2013년

대간남진 14차(댓재~피재) : 연초록의 대간길에 깃든 옛 이야기를 추억하며 걸은 대간길 z

재희다 2013. 5. 26. 23:00

산 행 지 : 백두대간 14차(댓재~피재)

산 행 일 : 2013. 05. 25.(토)

산행코스 : 댓재 ~ 황장산 ~ 큰재 ~ 지장산 ~ 덕항산 ~ 구부시령 ~ 건의령 ~ 피재

(거리 25km)

산행참가 : 23명.

 

<산행코스>

 

 

댓재에서 산행 준비를 마친 분들이 단체 인증을 하자는 요청에도 아랑곳 않고,

뭣에 쫓기는 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권샘만이 홀로 백두대간 댓재 출발을 신고한다.

 

<댓재(810m)>

두타산과 덕항산을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있는 댓재는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옛부터 삼척지방에서 하장, 정선을 거쳐 서울로 가는 주요 고갯길이었다. 꼬불꼬불 급경사의 15km에 이르는 도로는 차로 오르는데도 현기증이 날 만큼 위험한 고갯길이다. 대나무가 많다는 뜻에서 유래된 댓재는 일명 죽현(竹峴), 죽치령(竹峙련嶺)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은 4,5km 이르는 댓재 옛길이 복원되어 또다른 산행길의 멋을 더해준다. 1984년 10월 지금의 도로가 개통되기까지는 영동(강릉지방)과 영서(원주지방)를 넘나들던 옛 고갯길로서 보행자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먼저 떠난 분들을 쫓아, 후다닥 황장산 방향 댓재 들머리로 들어선다.

 

 

황장산 정상 도착.

 

<황장산(黃腸山, 1,059m)>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과 미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황장목을 쓰기 위해 왕실에서 일체의 벌목과 개간을 금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면서부터 황장산으로 부르게 된 산이다. 다시 말해서 왕실의 관곽(棺槨)재와 궁궐 건축에 쓰일 황장목(黃腸木)을 확보하기 위해 지정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는 보통명사가 ‘황장산’(黃腸山)으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이곳 강원도 삼척의 황장산(黃腸山)은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인 문경의 황장산과 동명이산(同名異山)인데, 이름의 유래가 옛날에 황장목이라는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점과 함께, 현재에는 황장목은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 까지도 공통점이 있지만, 문경의 황장산이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릴 만큼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는 반면에, 이곳 삼척의 황장산은 북쪽의 두타산과 남쪽의 덕항산이라는 두 곳의 100대 명산 사이에 낀, 그저 평범하고 순하기 이를 데 없는 산봉우리라는 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질 좋은 소나무를 적송 또는 금강송이라 하는데, 이들은 주로 강원도나 경북 북부지방에서 자라며, 잔가지가 적고 곧게 자라서 중요한 목재로 활용하였다. 그런데 한때 이런 적송(赤松)이 외지로 반출되는 집산지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춘양역이었기에 춘양목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런 적송이 오래되어 300년 이상 고목이 되면 속에 송진이 배어들어 누렇게 되므로 황장목(黃腸木)이라 하며, 잘 썩지 않아 적송 중에서도 최고로 질이 좋은 소나무로 분류되었고, 황장목이 생산되는 산을 황장산(黃腸山)이라 불렀다.

 

 

황장산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길을 한참동안 따르니,

나무로 경계를 지어 놓은 쉼터를 지나게 되고,

 

 

어둠이 가시기 시작할 즈음에 1069봉에 도착하는데,

정상에는 3등 삼각점과 ←황장산 2.5km, →큰재1.9km 이정표가 있다.

 

 

 

1069봉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니,

준경묘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준경묘(濬慶墓)>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이며,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 전주이씨(全州李氏)의 17세 손으로 목조의 아버지인 이양무(李陽武, 고려 의종 때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권을 수립했던 이의방의 동생인 이인의 아들)장군의 묘이다. 조선 개국을 합리화한 용비어천가 첫장에 등장하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중에서,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 살다가 전주 산성별감과 기생을 사이에 두고 다투어 사이가 나빠져, 처가인 강원도 삼척으로 피해 왔다. 목조 이안사는 부친이 죽자 이곳에서 장사 지냈고, 모친이 죽자 동산리에 장사 지냈다. 그 후 별감이 다시 삼척으로 부임한다기에 함경도로 이주해 여진에서 벼슬을 했다 한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오늘날 이양무의 무덤을 준경묘라 부르게 된 것은 고종 36년(1899년)에 그동안 실묘(失墓)하였던 이곳 이양무의 묘와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하사전리에서 그의 부인 묘를 찾아 대대적인 묘역 정비공사 후 이양무의 묘를 준경묘(濬慶墓)라 하고, 그의 부인 묘를 영경묘(永慶墓)로 정하면서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수가 수려한 곳으로, 이 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준경묘에 얽힌 조선 개국 설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왔는데, 삼척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이양무 장군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묘 자리를 찾고 있던 중, 산 속에서 한 도승이 동자승에게 하는 얘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는데, "이 곳에 장사를 지내면 5대 안에 한 나라를 개국하는 그런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개토제(開土祭) 때 100마리 소를 제물로 바쳐야 하고, 금으로 만든 관을 사용해야 한다." 이에 목조는 궁리 끝에 100마리의 소(百牛)는 흰 소(白牛)로 대신하고, 금으로 만든 관(金棺)은 황금빛이 나는 귀리짚으로 대체했다. 그렇게 해서 예언대로 이성계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백우(百牛)를 흰소(白牛)로 대신하여 천년 갈 조선이 5백년만 유지되었다고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서, 조선왕조의 수명이 500년이 되었다고도 한다.

 

 

좌전방으로 가야 할 1027봉이 보인다.

 

 

1062봉 내림길에 산나물을 채취하러 온 부부를 만나는데,

인근 주민으로 짐작되어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산나물과 야생화가 지천인 등로를 따르다 보면,

 

 

야생화 양탄자가 깔려있는 조림지를 지나게 되고,

 

 

이내 큰재에 도착한다.

옛날 북진 때는 맞은편 숲으로 대간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좌측 임도를 따라 오르게 되어 있다.

 

<큰재>

삼척시 하장면 속암리에서 동쪽의 귀네미 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대치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1,062봉에서 1Km쯤 떨어진 곳으로, 귀네미 마을에서 개간지로 넘어오는 임도와 대간능선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곳에는 오랫동안 이용하지 않아 희미해지긴 했지만 고무릉리 감나무골과 통하는 오솔길도 있다. 옛날 대간북진 때는 보이지 않던 풍력발전기 때문인지 포장도로가 새로이 신설되어 있다.

 

큰재 이정표.

 

 

큰재에서 임도를 따라 대이리군립공원(귀네미마을 고랭지 채소밭)으로 향하는 백두들.

 

 

임도에서 돌아본 지나온 1,062봉 모습.

 

 

'번천국유임도'라는 이름을 가진 임도를 따라 차단기를 통과하여 능선 위로 올라서니,


좌측으로 1027봉에서 환선마을 울미산(661m) 방향으로 뻗은 지능선이 조망된다.


 

능선 위로 오르자 앞쪽으로 풍력발전기들이 시야에 들어오며,


우측에 백두대간(건의령~댓재) 등산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귀네미 마을 고랭지 채소단지 가장자리로 이어진 능선을 따른다.


 

귀네미마을 고냉지채소단지 전경.

(지금은 대이리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수몰지구 이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귀네미마을 고랭지 채소밭>

1985년 백두대간 서쪽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이 만들어 지면서, 광동리, 조탄리, 숙암리 등에 살던 37가구 주민들이 이주하여 집단으로 마을을 형성한 곳으로, 고랭지 배추가 주산물인 귀네미마을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산골로 이주하여 일군 터전이며, 민초들이 역경을 극복한 질긴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팍팍하고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하여 전국 제일의 고랭지 배추밭을 일구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에게는 천혜의 행운도 따랐다고 하며, 그들이 성공하기까지는 자연조건도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습기를 함유한 안개 상습지역이고 바람까지 거센 지역이라 고랭지 채소를 경작하기에는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라고 한다.

 

야생화로 장식된 꽃밭길 너머로 풍차가 있는 풍경 !

 

야생화의 환영을 받으니 뿌듯함도 느껴지고,


이곳이 유럽이 아닌 한국의 풍경임에 새삼 감탄한다.

 

 

대이리군립공원 전망봉으로 오르는 백두들.


 

돌아본 대간길은 꽃밭 길!

 

 

 

커다란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전망봉에는 밴치도 놓여져 있다.

 

귀네미골 건너 서쪽 방향 파노라마.

 

 

 

전망봉을 뒤로하고 덕항산을 향해 잠시 숲으로 들었다가,

 

 

 

다시 채소밭 가장자리로 나오게 된다.

대간 능선은 앞쪽 1027봉을 올랐다가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등로는 임도를 따르다가 봉우리를 우회하여 이어진다.

 

 

환선봉 방향 3.7km 이정표를 지난다.

 

전망봉을 내려서는 백두들.

 

 

아직 채소를 파종하지 않은 밭을 가로지르기도 하며,

 

 

1027봉 우회길로 접어든다.

 

 

 

잠시 후 시멘트 포장 임도를 다시 만났다가는,

 

 

이내 우측 숲으로 들어가고,

 

 

숲속 등로는 오솔길을 따라 평탄하게 이어지다가,

 

 

다시 채소밭 가장자리로 나오면,

 

 

우측 아래로 귀네미 마을이 조망된다.

 

<등로에서 바라본 귀네미(牛耳谷) 마을>

태백시 하사미동 귀네미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 소의 귀를 닮았다 하여 우이령(牛耳嶺)이라 부르는 데서 연유했다. 이 마을의 형성은 1985년 광동댐 건설로 수몰 실향민이 된 주민들이 산을 개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귀네미 마을의 30여 만평(坪)에 조성된 고랭지 배추밭은 태백시 매봉산 고랭지 배추밭과 강릉 안반덕, 평창 600마지기에 이은 우리나라 4대 고랭지 배추밭으로, 해마다 8월이면 이곳에서만 약 230만여 포기의 배추가 출하된다고 한다.

 

예언서인 <정감록>에 나오는 피난지로 알려진 곳으로, 이 골짜기에는 과거 조선조 말엽부터 이북 사람들이 <정감록>을 믿고 이곳으로 집단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며 살다가 해방 전.후 다른 곳으로 떠나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1988년부터 광동댐 수몰지역인 숙암리, 광동리, 조탕리 사람들 37가구가 집단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우이(牛耳)는 '소귀'로 이두표기 이기에, 우귀 곧 '어귀'의 한자표기다. 이상향 무릉도원으로 가는 어귀에 있는 고개이자 골짜기라는 뜻인데, '귀넘이'가 '귀네미'로 변음되어 불리게 되었다. 귀네미 마을(牛耳谷)은 태백시로부터 2007년도 대표 모델 마을로 추천받은 고랭지 배추, 쌈채의 마을로서 주요 농산물인 고랭지 채소, 산더덕, 산나물(곰취, 곤드레, 나물취, 참나물, 산도라지, 산약초)등을 재배하고 있다. 또한 귀네미 마을은 해발 1100미터의 고산지대로도 유명한데, 중국과 티베트을 연결하는 험한 산길인 '차마고도'를 패러디한 '배추고도'로 2008년 9월에 방영한 KBS 1박2일에 방영된 이후 유명세를 타고 있다. 태백 매봉산, 강릉 안반덕, 평창 육백마지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고랭지 배추밭으로 꼽히는 귀네미 마을의 정상은 태백시와 삼척시 경계에 솟은 삿갓봉(1185m)으로 해돋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다시 숲길로 들어서는 수레길 수준의 등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면,

 

 

널찍한 공터가 있는 자암재에 도착하는데,

좌측 아래로 1.7km 지점에 환선굴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고, 환선굴 방향의 등로가 뚜렷하다.

 

<자암재(紫巖峙)>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숙암리 귀네미 마을과 환선굴로 유명한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장암재라고도 부른다. 환선굴이 있는 대이리가 있는 곳에 장암목이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자암재는 고갯마루에 있는 바위들이 자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바위에는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자주색은 바위 속의 철분이 녹슬면서 나타나는 색이다.

무박산행을 하지않고 당일 산행을 하는 분들은 이곳으로 구간을 마감하고 우측 환선굴 방향으로 내려가는 분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선답자들에 따르면 환선굴이 위치한 대이리 일대에는 석회석 동굴뿐만 아니라 너와집, 굴피집 그리고 통방아 등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일부는 아직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조만간 기능은 다하게(死) 될 것이다. 그러나 주거 민속의 연구 대상과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은 지속하게 될것이다.

 

<환선굴(幻仙堀)>

처녀가 선녀로 환생하였다는 전설과, 스님들이 도를 닦기 위해 환선굴에 들어갔으나 되돌아 나온 스님은 없어서 그 스님들 또한 환선 하였다는 설이 있다.

 

환선굴 초입 대이리 골말에는 중요 민속 자료로 지정된 약 300년 된 굴피집이 있다. 그곳에서 정 동쪽 방향의 동해 바닷가 삼척시 근덕면에는 살해치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지명이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간성에서 2년간 귀양을 살다가 삼척으로 옮긴 지 한달만에 이성계가 보낸 사람에게 목이 졸려 목숨을 잃었으며, 근처 궁촌에 조성된 무덤은 가장 큰 것이 공양왕, 그 옆은 2명의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궁촌 또한 왕이 피신해 머물던 곳이라는 지명이다. 공양왕 능은 이곳을 포함하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 금수리 등 세곳이나 된다. 공양왕이 교살된 후 신원 확인을 위해 목을 잘라 머리만 가져가고, 몸은 이곳에 묻었다는 설과, 간성에 있는 무덤은 공양왕의 최 측근 홍문관 박사 출신 함부열이 왕의 시신을 수습해 간성으로 옮겨 묻은 것이라 설이 전한다. 그러나 세종실록에는 '안성군 청룡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군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했다'구절에 근거하여 고양시 원당의 능을 공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또 만나고,

 

 

환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좌측은 천 길 낭떠러지여서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좌측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수직 절벽이다.

 

 

헬기장으로 쓰임직한 널찍한 공터를 지나면,

 

 

환선봉 오름길이 시작된다.

 

잠시 전에 지난 공터가 헬기장이었나 보다.

 

환선봉 오름길에는 통나무 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벌써 자암재에서 1.4km나 왔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이내 환선봉 정상에 도착한다.

 

<환선봉(幻仙峰, 1,180m)>

강원도 태백시 하사미동과 삼척시 신기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일명 찌걱산, 지각산(地角山) 등으로도 불리는 환선봉은, 산 동쪽 깎아지른 절벽에 설패바위, 촛대바위, 금강문 등 수많은 기암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선경을 이루는 별유천지다. 건너편 미륵봉 밑에는 천연기념물 178호로 지정된 환선동굴이 있는데, 황금색 종유석, 석순, 폭포 등 기묘한 형상으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환선봉은 공식적으로는 지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무명봉으로, 이 지역에서는 지각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1990년대에 이 봉우리 아래의 환선굴(幻仙窟)이 관광명소로 개발되면서 이를 둘러싼 산줄기의 중앙부에 가장 높게 솟구친 점을 감안하여 삼척시에서 임의로 환선봉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봉우리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환선굴 입구의 대이리협곡 풍광은 가히 경이롭다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삼척시 하장면 광동댐 부근에는 또 하나의 지각산(904m)이 있다. 이 산 이름은 원래 ‘찌걱산’이었던 것이 한자화하면서 지각산이 되었다. '찌걱’이란 삼척지방 사투리로 남녀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나타내는 의성어이다. 지각산 자락이 'Y'자로 벌어져 있고, 그 계곡에서 남녀가 우연히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둘 사이에 꼭 사단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찌걱산이라 했다는데, 속된 이름인 찌걱산을 한자화하면서 고상하게 지각산이라 하게 됐다. 이곳 지각산(환선봉) 아래의 Y자 계곡도 보는 이에 따라서 그와 비슷하다. 이곳의 지각산 역시 원래는 찌걱산이었던 것이 고상한 이름의 지각산이 됐고, 이후 더욱 근사한 환선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예기도 있단다.

 

환선봉 정상에서.

 

 

 

환선봉 전망바위에서 돌아본 대이리군립공원 방향으로,

잠시전에 지나온 능선이 가늠되고 고랭지채소밭 가장자리에 설치된 풍차도 보인다.

 

10여분 후 후미들도 도착하여 피곤한 몸을 쉬게 했다.

 

 

환선봉을 뒤로하고 덕항산을 향한다.


능선 좌측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천 길 낭떠러지다.

괜스레 장난이라도 치다가 자칫하면 대간 종주는 예서 마감해얄지도 모를 정도다.

 

좌측 환선굴이 있는 계곡 방향.

 

 

우람한 황장목이 가끔씩 눈에 띄는 편안한 등로를 따라면,


 

골말 갈림길 쉼터에 도착한다.

 

골말 갈림길 쉼터 이정표.

 

<골말마을(예수원) 갈림길>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골말 일대는 6·25 한국전쟁 조차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주변에는 너와집, 굴피집, 통방아 등 많은 민속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모두 강원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전통가옥이라고는 기와집이나 초가 정도만 봐왔던 사람들은, 너와집이나 굴피집의 여기저기 물이 샐 것 같은 지붕과 바람이 드나들 것 같은 허술한 판자벽을 보고는 의아해한다. 그러나 맑은 날 조금씩 틈이 벌어져 있던 지붕은, 습기를 머금게 되면 부풀어서 물샐틈없는 완벽한 지붕이 되고, 겨울에 눈이 덮이면서 그 무게에 눌려 틈이 없어진다고 하니 괜한 걱정은 않아도 된단다.

 

 

좌전방으로 덕항산을 지나 구부시령으로 이어진 능선이 연무에 어슴프레 보인다.

 

오늘은 등로가 편평하게 이어져서, 거리에 비해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는 않는다.

 

 

덕항산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백두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덕항산 정상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백두들.

 

 

식사를 마친 백두들이 덕항산 인증을 하고는 먼저 피재를 향한다.

 

<덕항산(德項山, 1,072.5m)>

태백시 하사미동과 삼척시 신기면의 경계에 솟아 오른 산으로, 옛날에는 덕매기산 이라 불렀다고 한다. 덕항산은 산 전체가 석회암으로 되어 있고, 산 아래 삼척 쪽에 유명한 한선굴이 있으며, 그 밖에도 석회암동굴이 54개나 있다고 한다. 산의 동쪽은 험한 벼랑이며, 서쪽은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산이다.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소재한 대이리군립공원에 소재하고 있으며, 약 12km 길이의 무릉천이 덕항산에서 동으로 계곡을 따라 흘러 오십천(五十川)에 합친다. 산세가 수려하고 동남으로 펼쳐지는 병풍암, 거대한 암벽, 칼로 벤 듯한 암면, 우뚝 솟은 촛대봉 등 특이한 절경을 이룬다.

 

덕항산은 산보다도 환선굴로 더 유명하다. 덕항산은 능선으로 지각산과 나란히 하고 있으며, 이 두 산의 가운데 해발 840m에 환선굴이 있다. 환선굴은 5억3천만년 전부터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종유석의 아름다움도 더할 나위 없지만, 그 큐모가 크고 웅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총연장 6.5km, 높이 30m , 폭 100m로 동양 최대를 자랑한다. 환선굴은 1997년 10월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며, 총연장 6.5km 주굴 3.2km로 6개의 동굴군 중 가장 규모가 큰 굴로, 내부에는 기암괴석이 항아리, 소, 사람 등 다양한 형태의 석순과 종유석이 형성되어 있어서 석회동굴의 아름다움을 고루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동굴 내 지형지물과 동.식물 집단 서식지의 보호를 위해 전체 6.5km 중 1.6km만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덕항산의 원래 이름은 '덕메기()'었다고 한다. " 너머 화전하기 좋은 더기() 있는 " 뜻이라고 . 그것 '목이' 변하고 덕항산으로 표기 것으로 . 예전에 삼척 사람들이 화전밭을 일구기 위해 태백(하사미)으로 넘어오던 산이라 하여 "덕메기산"으로 불렸으나 이두문자 표기로 덕항산(메기=목덜미 항(項))으로 바뀌었다.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이 대로 해지 이름이다. 전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라도 덕항산은 수려 산세를 자랑. 동지(傾動) 표본 루는 곳으 환선봉과 나란히 하여 양쪽 사면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동쪽 삼척 대이리 방향은 깎아지른 석회암 사면으로 촛대봉, 사다리 바위, 나한봉, 수리봉, 금강, 미륵 기암들이 즐비하고, 계곡의 초입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굴(환선굴, 관음굴, 사다리바위굴, 양터목세굴, 덕밭세굴, 큰재세굴)등이 있다. 서쪽 태백 하시미동 방향은 1000m 전후의 화전을 일구어도 될만한 고위평탄면을 이룬다. 아홉마리 용이 아홉 늪에서 놀고 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산으로,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으로 꼽히기도 한 곳이다.

 

 

선두들을 먼저 보내고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즐기는 백두들.

 

 

가야 할 건의령 방향의 대간 능선에서 동쪽 재당구미골 방향으로 분기된 지능선 조망.

 

 

 

잠시 후 후미들도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한다.

 

이번 구간이 도상거리 25km로 비교적 최근에 한 산행 중에서는 긴 편에 속하는지라, 덕항산에서 건의령까지만 산행을 하고 건의령에서 상사미동으로 탈출하기로 한 후미 분들과 헤어져, 덕항산을 뒤로하고 피재로 향한다.

 

 

새목이재(850m) 쯤을 지난다.

 

새목이재에는 안부에 넓은 공터가 있지만 넘나드는 고개는 아니고, 능선에서 V선을 이루는 곳으로 풍수지리에서 새의 목과 닮은 산세에서 유래된 듯하다.

 

 

활엽수(闊葉樹)들이 울창한 등로를 따라 1007봉 쯤을 지나니,

 

 

박복한 여인내의 한이 서린 구부시령에 도착한다.

 

구부시령 이정표.

 

<구부시령(九夫侍嶺)>

태백시 하사미동의(푯대봉 뒤쪽 마을) 외나무골에서 삼척 도계읍 한내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 한내리 땅에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박복한 여인이 살았는데, 서방만 얻으면 죽고 또 죽어 무려 아홉 서방을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고개를 구부시령(九夫侍嶺)이라고 부른단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내가 있을 듯하여 돌아다보게 하는 구부시령을 뒤로하고,

 

 

고도차가 크지 않은 등로를 따라 잠시 오르니, 1055봉을 지나게 된다.

 

 

등로에는 이제 막 새싹을 활짝 피운 낙엽수들의 연초록과,

기구한 사연이 얽힌 듯한 소나무들이 어울려 산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을 듯한 소나무에게서 저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싶지만,

앞서 간 선두들을 따라 가느라 잠시의 여유도 갖지 못하고 카메라에 모습만 담아 둔다.

 

 

1017봉(석희봉)을 지나고,

 

 

 

능선분기점 쉼터도 그냥 지나친다.

 

 

거대한 상수리나무에는 또 어떤 사연이 어려 있을런지 상상해 본다.

 

 

한내령 쯤으로 보이는 안부 쉼터를 지나니,

 

이곳은 '삼밭골 잘루목'이라고도 하고, '한내령'이라고도 한다. 태백시 상사미동 삼밭곡에서 삼척시 한내리로 넘어가던 고개다.

 

 

우측으로 시야가 트이며, 태백시 하사미동에 있는 무사동 목장이 펼쳐진다.

 

 

목장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잠시 이어지던 대간길은 이내 961봉 오름길로 접어들고,

 

 

이내 961봉을 지난다.

 

 

조용한 등산로에 홀로 서 있는 이정표들을 지나,

 

 

푯대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푯대봉 삼거리에서 대간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표대봉을 삼거리에서 100m쯤 떨어져 있다.

 

 

푯대봉 정상.

 

<푯대봉(1,009.2m)>

삼척시 도계읍과 태백시 상사미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일제 강점기에 자원 수탈을 위해 측량을 하면서 측량 깃발을 표시하여 세웠다고 해서 푯대봉이라고 부른단다. 우리가 산행을 하면서 많이 만나는 깃대봉과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정상에는 정상석과 산불감시 무인카메라와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정상은 대간에서 살짝 비껴 나 있다. 둘러진 작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전망이 좋고 푯대봉 삼거리에서 불과 50m 거리이므로 다녀가도 좋아 보인다.

이곳의 대간 능선은 오히려 서쪽의 대간이 아닌 산군보다 해발 고도가 낮으며, 동쪽은 지능선과 계곡으로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임도가 마치 나무뿌리처럼 얽혀 있다. 임도는 구릉지 언덕의 산채(나물)와 채소를 가꾸는 농경지로 연결된다.

 

 

푯대봉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면,

 

 

건의령(한의령)에 도착한다.

 

<건의령(巾衣嶺, 한의령, 840m)>

강원도 태백시 상사미동에서 삼척시 도계읍으로 넘나드는 고개다. 상사미 마을 사람들이 백두대간을 넘어 오십천 상류에 있는 도계나 고사리에서 서는 장을 보러 갈 때 넘던 지름길로, 내륙에서 해안으로 연결하는 고개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고려말 삼척 육배산으로 유배 온 공양왕이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고갯마루에 관모와 관복을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며 고개를 넘어 태백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고개로, 두문불출’하던 두문동재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관모와 관복을 벗어 걸었다고 하여 "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의복을 뜻하는 의(衣)를 합쳐 건의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건의령의 지명을 살펴보면 5만 분의 1 지형도에는 한글로 ‘한의령’이라 쓰고 寒衣嶺’이라 적혀 있다. 한의령이라 하게 된 것은, 옛날 삼척지방에서 이 고개를 넘어 태백으로 갈 때, 겨울에 눈이 엄청나게 오고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이 고개를 넘다가 얼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옷을 두껍게 입어도 얼어 죽는다고 하여 한의령(寒衣嶺)이라 했다고 한다.

선조들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 건의령 아래로는 도계와 상사미동을 잇는 건의령 터널이 지나가고 있고, 고개 우측에는 예전에 백인교 군자당으로 쓰였다는 산신각이 있다.

 

<백인교군자당(百人敎君子堂)>

구전(口傳)에 의하면 고려 말기 한 재상이 이 고갯마루에서, 100 사람에게 글을 가르쳐 마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기리고자 백인교군자당을 세웠다고 한다. 유배되었던 공양왕을 배알하고 돌아가던 충신들 중 한명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건의령 등산 안내도.

 

 

20여분 먼저 도착한 선두들이 건의령에서 쉬고 있다.

 

 

나도 건의령 피재 방향 들머리 좌측 그늘에서 쉼을 하는데,

좌측 아래로 건의령에서 상사미동 돌밭 마을로 이어지는 임도가 내려다 보인다.

 

 

잠깐의 쉼을 뒤로하고 피재로 향한다.

 

 

등로를 마치 수로(水路)처럼 만들어 놓았다.

 

 

전망바위봉 한켠에는 백두대간 생태복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능선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상사미동의 골지천이 만들어 놓은 감입곡류 지형이 멋지다.

좌측 건의령 분기 도로 맞은편 가계 주차장에는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애마도 보인다.

 

백두대간 능선의 전망바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태백시 상사미동(上士美洞) 방향으로는, 피재에서 삼척시 하장면 소재지로 연결되는 35번 국도와 도로 옆으로 흐르는 골지천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가덕산도 보인다.

 

태백시 하사미동, 상사미동을 거쳐 삼수재(피재)를 넘으면 태백 시내에 이른다. 사미란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 하지만, 옛날 이 지방에서는 삼공(蔘貢, 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을 많이 하여서, 삼 또는 사미라고 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 하며, 또 다른 이야기는 상사미의 고직대 밑에 맑은 샘이 있어서 새미, 사미로 불렸다는 설, 그리고 이 골짜기에서 삼(麻)을 많이 길러서 사미로 변형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옛 기억이 떠오르는 장소로(건의령 옛길?), 옛날 북진 때 화방재에서 피재를 지나 건의령으로 가면서 이곳에서 상사미동 방향으로 탈출을 할까 한참을 고민했던 장소다.

 

 

우장풀이 싱그러운 등로를 따라,

 

 

960봉 근처를 지난다.

 

 

능선이 편평하여 어디가 봉우리인지 구분이 어렵지만, 여기쯤이 960봉인 듯 !

 

 

또 다른 새목이재를 지난다.

 

<새목이재(鳥項, 850m)>

새목이재는 넘나드는 고개가 아닌 능선의 V선을 이루는 곳으로, 풍수지리에서 새의 목과 닮은 산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건의령 3km, →삼수령 3.5km의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송전선로 표시 이정표를 지나면,

 

 

우측 아래로 태백에서 피재를 넘어온 35번 국도에서 태백공원묘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길가에는 예분 화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사진이 흐려서 구분이 쉽지 않다.

 

 

시살밭 쯤을 지나고,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편안한 등로가 이어진다.

 

 

언덕 쯤으로 보이는 봉우리에 944봉 삼각점이 있다.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경이롭고,

 

조림지의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

 

 

권형님도 이제는 많이 지친 표정이고,

 

 

대간길은 노루매기 임도로 내려서더니,

 

<노루매기(장항, 獐項)>

'노루가 눈을 들어 산봉우리를 쳐다본다'는 주장봉망형지(走杖峰望形地)로 일명 노루목이라 하고, 노루가 많았던 지역에 마을이 생기면서 노루메기라 부르며, 마을의 지형도 마치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고 한다. 땅의 모양이 노루목처럼 생겼다면 노루가 많아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생긴 모양을 따라 노루모가지에서 노루메기로 변한 건 아닌지 그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한자로는 노루장(獐) 목덜미항(項)으로 쓰며 풍수지리상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노루메기(노루가 지나다니는 길목 또는 산이 막히는 막다른 곳)라 한다. 이러한 지명을 전국에 걸쳐 어려 곳이 있으나, 대부분의 표기는 “노루목”이나 “노루목이” 또는 장항(獐項)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노루메기(이 지방 사투리로 보임)로 표기하고 있다.

 

 

잠시 우측으로 임도를 따르면,

 

 

다시 좌측 숲으로 들어오라고 표지기들이 손짓하고 있다.

 

 

피재에 있는 삼수정이 옆으로 보이고,

 

 

일찍 도착하여 한가로움을 즐기는 만식님과 분덕 여사님이 부럽기 그지없다.

터울이 꾀나 되는 듯한 오뉘 ?

 

 

삼수정은 좀 더 시원할까 점검해 보고,

 

 

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분수령 임을 예기해 주는 삼수령 조형물에서,

 

오늘 걸은 대간길의 마침표를 찍는다.

 

 

상사미동에서 기다리던 애마가 어느새 피재(삼수령)에 도착해 있고,

 

삼수령에 먼저 도착한 분들은 막걸리 파티를 벌이고 있다.

 

피재(삼수령) 전경.

 

<피재(避峙, 935m)>

태백에서 삼척 하장면과 도계읍을 잇는 35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옛날 난리가 나면 태백으로 피난하던 재라 하여 '피재'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피재에 떨어진 빗물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 물 따라 서해로, 동쪽으로 흘러 삼척 오십천 따라 동해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 따라 남해로 갈라지는 분수령이라 하여 삼수령(三水嶺)이라고도 부른다.

삼수령에서 광동호에 이르는 지역의 행정지명도 사조동에서 삼수동으로 바뀌었다. 본디 삼척시 하장면의 일부였으나, 1994년 태백시에 편입됐다고 한다. 피재라는 지명이 붙기 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고독한 산이란 뜻에서 고적령(孤跡嶺)이라 했다고 한다.

 

사진의 좌측 오름길 도로가 다음 구간 들머리다.

 

백두대간 안내판을 담고는, 점심밥 먹으러 태백으로 이동한다.

 

 

 

태백시 그린목욕탕에서 목감을 하고,

 

 

태백이 고향이신 석여사님께서 추천해 준 맛집인 근처의 '김서방네 닭갈비'에서,

(사실 춘천도 아닌 태백에 (물)닭갈비집이 이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 큰 기대를 않고서 들른 '김서방네~~' 닭갈비가 예상보다 훨씬 맛나다.

그동안 태백에 올때마다 한우를 먹었는데, 비싸쟎은 별미를 찾는다면 좋은 메뉴라 추천하고 싶다.

석여사님 감사 혀요 !!

 

닭갈비 배불리 먹고, 거기다가 밥까지 볶아서 또 먹었다.

 

얼만큼 먹었는지,

맥주 -> 소맥 ->소주 -> 산머루주 -> 소주 -> 막걸리 -> 소주

무자게 달렸는데 식사비가 너무 적게 나왔단다.

쥔장님! 이래도 타산이 맞는지요..ㅋㅋ

 

서울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다.

그래도 다들 무사한 것 같으니 잘 된 일이고,

다음 산행에서도 건강한 모습으로 뵐 밖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