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대간남진 17차(도래기재~마구령) : 단군의 영역 태백에서 부처의 영역 소백으로 ! z

재희다 2013. 8. 11. 23:00

산 행 지 : 백두대간 17차(도래기재~마구령)

산 행 일 : 2013. 08. 10.(토)
산행코스 : 도래기재 ~ 옥돌봉 ~ 박달령 ~ 선달산 ~ 늦은목이 ~ 갈곶산 ~ 마구령 + 남대리

               (거리 17km + 2km)

산행참가 : 23명.

 

<산행코스>

 

근래 들어서 양재에서 버스에 오른 후,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에는 잠에서 잘 깨지 않는데, 지난밤에는 왠지 모르게 눈이 떠졌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이정표가 조금은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마트폰 지도앱을 켜서 현 위치를 조회해 보았더니, 영월에서 태백으로 가는 31번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알바다! 싶어서 버스의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더니, 이미 길을 잘못 들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일단 차를 돌릴 수 있는 곳에 세우고 상황 파악 후, 버스를 돌려서 오던 길로 돌아나와 영월군 중동면에서 내리 방향의 지방도를 타고 다시 도래기재를 향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한시간쯤 늦어서 도래기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알바는 산꾼들만 하는 줄 알았는데, 최신장비를 갖춘 버스도 알바를 한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바로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어렵게 도착한 도래기재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도래기재(導驛峙)>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로, 고갯마루에는 '금정굴'이라 불리는 터널이 있어서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산행 들머리의 도래기재 안내판에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도래기마을 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한다.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재 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라고 적혀있다. 도래기재 아래에 있는 '금정굴'이라는 터널이 뚫려진 내력과 관련하여서는, 아픈 우리네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일제강점기때 까지는 지금 지나고 있는 대간길 좌측 지역은 본래 영월에 속하던 지역이었는데, 여기에서 금정광산의 금이 쏟아지고 금강송이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일제가 침을 흘릴 만도 했다. 문제는 운반이었다. 영월로 내어가자니 강원 내륙 산간을 끝도 없이 운반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우구치로 모아 도래기재를 넘어 춘양으로 보내고, 다시 낙동강 수운(水運)을 이용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뚫은 터널이 도래기재 아래 금정터널이었다. 그러나 미처 춘양까지는 철도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일제가 패망하고 말았다.

때 이들이 저지른 일이 행정편의를 위해 박달령부터 구룡산에 이르는 대간길 북쪽의 행정구역을 춘양이 속해 있는 봉화로 바꾼 일이다. 이리하여 영월은 졸지에 금(金)과 금강송을 봉화에 내어 주게 되었다. 광복 이후 대간길 좌우를 기준 삼아 행정구역을 되돌렸으면 별 문제가 없었으련만, 아직도 영월과 봉화는 서로 불편한 사이로 지내고 있단다.

통행이 금지된 지 이미 오래지만, 터널은 ‘금정수도’라는 이름표를 단 채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우구치리에서 금정수도까지 광물을 운반하는 삭도를 ‘도래기’라고 부른 데서 고개 이름이 연유했다는 것이 금정광산의 내력을 아는 이들의 말이다.

 

나무데크 계단을 만들어 놓은 산행 들머리에서,

대간남진 17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옥돌봉을 향해 도래기재 들머리로 들어선다.


나무계단을 따라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나무데크 계단과 돌계단 등으로 급경사 등로를 잘 정비해 놓아서,

오늘 산행이 어렵지 않게 진행될 것임을 짐작해 본다.

잘 정비된 등로 옆에는 영주국유림관리소에서 설치한 '숲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산행을 시작한 지 50여분의 오름길 끝에 '보후수 갈림길'에 도착하여,

 

'직진본능' 백두들의 행렬을 잠시 멈추고,

550년이나 된 철쭉이 얼마나 큰지 확인하러 간다.


산림청에서 설치한 보후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옛날 북진 때는 아무런 안내판이나 표지가 없었는데, 이제는 나름 관찰을 할 수 있게 잘 정비 해 놓았다.


<550년 된 세계 최대의 철쭉나무>

도래기재에서 옥돌봉으로 올라서는 길은 봄이면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곳으로, 철쭉 군락 속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든 550년 된 철쭉나무가 자란다. 백두대간 등산로에서 살짝 비껴 난 비탈을 지키는 철쭉은 나무 둘레가 1m를 넘는다. 수령과 크기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경우라 한다.


550년 된 철쭉을 카메라에 담으며,

이리도 큰 철쭉나무에 철쭉꽃이 활짝 핀 모습은 어떨까? 상상해 본다!


잠시 목을 축이고, 이내 옥돌봉을 향한 오름길을 계속한다.


 

최고령의 철쭉나무를 뒤로하고 10여분 오름길을 재촉하니 이내 옥돌봉 정상에 도착한다.

옥돌봉 정상의 이정표.


봉화산악회에서 설치한 옥돌봉 정상석.


<옥돌봉(1,242m)>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물야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옥석산이라고도 부르며, 정상 아래의 하얀 바위 탓에 옥돌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바위는 햇빛을 받으면 예천에서도 보인다 해서 예천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산 아래 마을은 그 빛이 비친다 해서 '서벽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백병산으로 적고 있다.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같은 산으로 서북쪽으로는 선달산과 이어진다.

옥돌봉은 한자로 옥석산(玉石山)으로 기록되어서인지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려진다. 옥돌(玉石)이란 귀한 것과 천한 것, 선과 악 등 상반된 뜻이 합성된 말이다. 세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나쁜 것이 있어야 좋은 것이 있으며, 좋은 것은 나쁜 것으로 인해 더욱 드러난다는 의미이니, 옥과 돌은 서로 화답하며 뒤따르는 존재일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인데, 우리 카페에는 관심이 없것지..ㅋㅋ

 

정상에서의 '조망 안내판'

깜깜한 어둠과 밤안개로 조망은 안내판을 보고 짐작만 해 본다.

 

렌턴 불을 끄고 어렵게 옥돌봉 정상 인증을 남긴다.


 

옥돌봉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을 조금 따르니, 주실령 갈림길이 나온다.


<주실령(朱實領)>

실령(朱實領)은 옥돌봉과 문수산 사이의 안부로서, 봉화군 물야면과 춘양면을 잇는 915번 지방도가 지나는 아주 험한 고개다. 기슭에 산림이 울창하여 머루, 다래 등 열매가 많이 열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주실령 갈림길에는 "십승지 춘양둘레산길", 문수지맥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를 '문수지맥' 분기점.


<문수지맥 개념도>

 

<문수지맥(文殊枝脈)>

낙동강의 서쪽과 내성천(乃城川)의 동쪽을 흐르는 산줄기로, 백두대간 박달령과 도래기재 사이에 솟은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갈래 친 산줄기는 문수산(文殊山 1,207.6m)으로 내려와 봉화군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명호의 만리산(791.6m), 도산의 용두산(665m)을 거쳐 녹전의 봉수산(569.6m), 북후의 불로봉(482m)으로 이어진 뒤, 안동의 조운산(朝雲山 635m)을 지나 학가산(鶴駕山 874m)에 이른다. 학가산으로 향하는 문수지맥은 조운산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 갈래를 나누어 봉정사가 있는 명산 천등산(天燈山, 575.4)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문수지맥의 원 흐름은 학가산에서 보문산(641.7m)으로 이어진 뒤, 풍천의 검무산(331.6m)을 거쳐 예천군 지보면의 나부산(334m)을 지나,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삼강리(三江里)를 돌아 예천의 명물로 알려진 의성포(義城浦)의 맞은편 절벽인 회룡대(回龍臺)에서 끝난다.(펌)

 

 

급경사 내림길을 지나 박달령을 향하는 백두들.


 

박달령 직전 쉼터에서 잠시 션한 아침기운을 만끽해 보고는 백두들!


 

박달령 직전 봉우리를 넘어,


 

박달령에 내려선다.


박달령 산령각.


<박달령 산령각(山靈閣)>

박달령은 고치령, 마구령과 함께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경상도와 강원도 영월을 드나드는 길목으로 유명하며, 뒤에 있는 산신각에서는 이들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며 지금도 매년 4월 초파일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박달령 정상에 있는 현재의 산령각은 노후로 1994년도에 중수한 산령각이다. 우리 조상들이 숭배하던 고향마을의 성황당이 1960년대 후반부터 많은 수난을 당했다.

 

 

박달령으로 내려서는 백두들.


<박달령(朴達嶺, 970m)>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있는 박달령은, 선달산과 옥돌봉 중간에 있는 고개로, 고치령, 마구령, 도래기재와 함께 과거 보부상들이 경상도와 강원도 영월을 드나들던 길목이다. 정상에는 널따랗게 잘 정비된 헬기장이 있고, 한쪽에 산신각이 있으며, 전각 형태의 쉼터와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야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헬기장 우측에는 봉화군과 경상북도에서 세운 자세한 "백두대간 등산 안내도"가 서 있고, 그 옆의 이정표에는 "(서쪽)선달산 4.8km, (동쪽)옥돌봉 3.08km"라 적혀 있다. 그리고 박달령 북쪽 50m 아래에 샘터가 있다는 이정표가 서있다. 박달령 정상에는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오전약수 쪽에서 이어져 온 임도가 있어서 사륜구동형 차는 올라올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박달’은 '배달'이라는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배달'이란 곧 고대 한국을 가리키는 말이니, 박달이란 상고시대 우리의 국가명이었다. 또한 박달(朴達, 또는 白達)은 檀(박달나무)을 뜻하며, 이는 곧 단군의 ‘단’을 의미한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있다.

 

<오전약수(五田藥水)>

오전약수는 서쪽으로 마구령과 동쪽으로 도래기재 사이의 선달산 동남쪽 아래에 있으며, 물맛이 좋기로 조선시대 최고로 꼽혔다. 조선 중종 때의 풍기군수 주세붕은 오전약수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만하다고 극찬했다.

오전약수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오전리의 후평장과 춘양면의 서벽장을 드나드는 보부상이 주실령을 넘어가던 어느 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약수를 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약수를 쑥밭약수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옛날 이 근처에 살던 여인이 남정네와 정을 통하기 위해 약수터를 찾았다. 그런데 그때까지 맑게 샘솟던 약수가 흙탕물로 변하고 뱀이 나타나 부정한 여인의 행위를 제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박달령에 도착한 백두들이,

 

 

'백두대간 박달령' 인증을 남기고,


 

박달령을 뒤로하고, 산달산을 향해,


박달령 헬기장을 가로질러 숲으로 든다.


 

싱그러운 떡갈나무 숲속으로 이어진 대간길에,

가끔씩 만나는 쉼터는 직진본능의 대간꾼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20여 분 남짓에 1.4km를 왔다.

안개가 쌀짝 드리워진 숲길이 대간꾼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8월의 무더위에도 높은 고도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최고의 피서지다.


 

구조목 4-4지점의 능선 갈림길 삼거리에서 좌측 능선을 따른다.

안개에 가려진 태양은 아직 그 이글거림의 본능을 감추고 있어서 다행이라 여기며 선달산을 향한다.


 

멧돼지들이 파헤쳐 놓은 공터에서 재미난 화재 거리를 찾아보기도 하며,


 

밴치가 있는 쉼터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하는데,

 

밴치를 식탁으로 사용하니 더더욱 편리하고,

 


언젠가부터 '밥파'와 '빵파'가 반반쯤이었는데, 오늘은 밥파가 더 많은 듯하다.


산행에서 좀처럼 보지 못했던 막걸리도 등장한다.

오늘 산행이 여유로워 보였던지 보성님이 한병을 넣고 왔다. "Good job!"

 

참나무 식별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참나무의 종류가 많기도 하다,

갈참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등등등...

 

 

싱그러운 숲속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선달산을 향한 여유로운 걸음을 이어간다.


 

능선 우측 아래로 등로가 이어지더니,


 

'선달산 샘터' 갈림길을 지난다.


'선달산 옹달샘'이 능선에서 150m 아래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높은 고도의 고산지대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무척이나 경이롭다.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대간꾼들에게 주어지는 자연의 선물이 아닐런지!

 

 

지도상 1243봉 정상에 도착한다.

선달산 전위봉으로 고도는 선달산에 비해 오히려 조금 높다.


 

1243봉 내림길에서 만난 이끼로 덧칠된 바위가 이채롭다.

 

 

나무로 된 이정표도 만나고,


 

우거진 숲속에서 바위가 있는 작은 암릉도 지난다.


 

원시림의 완만한 육산 능선에서 만나는 바위가 신비감을 더해준다.


 

주변의 참나무들이 아름드리나무로 변할 때쯤에, 대간길을 한번 더 걸어야지..!

욕심이 좀 과한가!

 

 

 

선달산을 향한 마지막 오름길의 백두들!


 

드디어 선달산 정상에 도착한다.


선달산 정상 이정표.


마침내 오늘 산행의 최고봉을 올라서니,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진다.


<선달산(仙達山, 1,236m)>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영주시 부석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봉이 김선달을 연상케 하는 선달산의 유래는 여러 갈래로 다양하다. 신선이 노닐던 산이란 뜻의 仙達山(선달산)이, 먼저 올라야 할 산의 先達山(선달산)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남쪽 산기슭 부석사의 부석(浮石)을 일컫던 우리말 "선돌"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 산 북동쪽 지능선 상의 마대산 동쪽 산기슭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일대에 위치한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언 봉이 김선달)의 신위를 모신 당집과 묘소에서 그 이름을 유추하기도 한다. 선달(先達)이란 ‘과거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는 신분’이라는 뜻과 ‘먼저 올라야 할 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선달산 정상 증명도 남긴다.

 

 

 

이제 선달산을 끝으로 강원도와 이별하고 충북으로 들어간다.

진부령에서 시작한 대간남진길 3년 만에 드디어 강원도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선달산 정상을 내려서니, 회암령 갈림길이 나오고,

'외씨버선길'이라는 예쁜 이름의 이정표도 만난다.

 

 

<외씨버선길>

외씨버선길은 경북 청송에서 출발하여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 이르는 장거리 도보여행길로, 버선을 닮은 4개 군(청송, 영양, 봉화, 영월)이 함께 모여 2010년 7월에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조성하였는데, 총길이는 241km이다. 먼 훗날 여유가 되면 우리 백두들도 한번 걸어 봄직한 길이 아닐는지!

 

 

지난밤, 비가 내려서 그런지, 곳곳에 온갖 버섯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버섯에는 단 두 종류의 버섯이 있다고 한다.

먹을 수 있는 버섯과 먹을 수 없는 버섯..ㅋㅋ

이 버섯은 혹시 어느 종류 인지..?


 

늦은목이로 향하는 급경사 내림길이 길게 이어진다.


예쁜 이 버섯의 이름은 망태버섯이란다.

 

 

 

늦은목이에 도착하여 쉼을 하는 백두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늦은목이재(800m)>

늦은목이는 선달산과 갈곶산 사이의 안부로, 백두대간 동쪽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생달마을과, 백두대간 서쪽 영주시 단산면 남대리를 잇는 고갯마루이다. 일반적으로 '낮은 산등선이'라 부르는데, 이곳이 해발 800m이니 이해가 잘 안된다. 예전에는 보부상들이 넘나들었으나, 지금은 대간산꾼들이나 가끔 드나드는 고개다. 그리고 이곳부터는 소백산국립공원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늦은목이 좌측 오전리 생달마을 쪽으로 약 30m 정도 내려가면 내성천 발원지 샘이 있다. 늦은목이는 비슷한 이름이 여러 곳에 있다. 다음 산행 소백산 구간에는 '늦은메기'라는 이름으로, 또 낙동정맥 주왕산 구간에는 '느지미재'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익숙하다. 대부분 고개 아래 동리에서 이곳을 올라오는데 느지막하게,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라고 한다. 좌측 오전리로 내려가면 생달리이고, 우측 남대리는 정감록에 명시된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양백 지간에 숨어있는 명당이 있다고 남사고가 지시한 곳이다. 순흥으로 유배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영월과 단양 쪽에서 부석으로 장을 보러 가던 장꾼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모여서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도에 보면 주막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늦은목이에서 쉼을 하는 백두들.

 

이제 이곳부터 소백산국립공원으로 들어왔음을 실감케 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목디스크로 고통 속에서 산행을 하던 천보님과 몇몇 분은, 이곳에서 남대리 주막거리로 바로 하산했다. 나도 그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산행 종착지인 마구령에서 남대리고 가는 길을 확인해야겠기에, 함께 탈출의 유혹을 뿌리치고 마구령으로 향한다.

 

 

늦은목이 이정표를 뒤로하고 갈곳산을 향한다.

 

이곳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태백산군과 작별을 하고 소백산국립공원으로 접어든다. 오늘이 태백산군(太白山群)의 마지막 구간이지만, 가야 할 소백산군(小白山群) 구간과는 시사하는 바가 확연히 구분된다. 소백산이 참선, 수행, 부처 등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면, 태백산은 배달, 단군, 선도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 및 사상과 연계되어 있다.

 

갈곳산 오름길에 발견한 이 버섯은?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도착한 갈곶산 정상.


<갈곶산(966m)>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와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갈곶산은 지나온 다른 봉우리보다 낮고 조망도 없으며 특이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도 '산'이란 지명을 갖고 있다. 황장산을 지나 촛대봉-투구봉-솔봉-도솔봉-삼형제봉-연화봉-비로봉-국망봉-상원봉으로 이어지다가 '갈곶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소백산권은 모두 '봉'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갈곶산은 소백산에서 벗어나 태백산권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갈곶"이란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소백과 태백의 양백 중간에서 어느 쪽으로 붙어야 할지, 정말 '갈 곳'을 모르는 산으로 표지석도 없다.

이곳 갈곶산은 남쪽으로 봉황산(818m)으로 이어지는 길과, 북쪽 선달산 대간길의 삼거리를 이룬다. 남쪽으로 1.7km쯤 가면 봉황산 정상이 나오고, 봉황산 남쪽 기슭에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화엄10찰(華嚴十刹)로 유명한 부석사(浮石寺)가 자리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갑곳산(甲串山)이라 불리우니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가는 배가 머물렀던 선착장이던가! 절 이름에서도 돌이 떠다니니(부석:浮石), 은하수 건너 멀리로 영혼들이 여행을 떠나는 출발지인지, 도착지인지는 모르지만, 갈곶산의 유래와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또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부석사 안양루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봉황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지만, 일주문의 편액에는 ‘태백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다는 점이다. 부석사가 봉황산에 있으니 ‘봉황산 부석사’라는 표현은 당연하다. 봉황산이 부석사의 주산(主山, 한양으로 치면 북악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태백산 부석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태백산 부석사’라는 말은 몇 가지를 생각게 한다.

 

첫째, 태백산이 부석사의 조산(祖山)이라는 것이다. 한양으로 치면 삼각산(북한산)에 해당한다. 태백산이 부석사의 조산이니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 역시 태백산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봉황산 역시 대간의 일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봉황산이 마루금은 아니지만 山體(산체)로 보면 분명 대간의 일부다.
우리 전통지리에서는 대간이라는 개념을 線(선)으로 보지 않고, 영역으로 보고 있었음을 부석사 일주문 편액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산경표에서도 대간 마루금을 지나는 산뿐만 아니라, 주변 산(예를 들면 오대산, 계방산, 월악산 등)도 기록하고 있다. 마루금 산행에서도 사람 발자국만 남게 되는 가느다란 선(線)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대간의 개념을 선(線)으로 보지 않고 영역으로 보는 것은, 최근 백두대간 복원과 자연 및 생태 보호의 가장 기본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조산(祖山)은 백두산 방향으로 정해진다는 점이다. 국내 모든 산의 큰 할아버지 격인 태조산(太祖山)은 백두산이다. 한양의 주산인 북악이 조산인 삼각산 그리고 한북정맥과 대간을 거쳐 백두산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부석사의 주산인 봉황산은 조산인 태백산을 거쳐 백두산으로 이어진다. 만약 소백산이 봉황산 바로 옆에 있다 하더라도 소백산은 지리산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조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봉우리를 올라왔다고 완전히 퍼져서 쉼을 해 본다.

 

 

부석사를 검색하다 보니 방랑시인 '김병연(김삿갓)'이 '부석사 안양루'에 올라서 지었다는 한시 '부석사(浮石寺)'가 검색된다.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忽忽馬(풍진만사홀홀마)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우주에 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백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있네.

 

위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은 백두산우회 최 회장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라,

회장님과 김삿갓과의 관계가 궁금해져서 한번 옮겨 보았다.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 방향을 두고,

우측 대간길로 홀로 떠나시는 최 회장님의 뒷모습에서 '김삿갓'을 떠올리는 것은...ㅋㅋ


 

934봉을 지난다.


934봉 이정표.


 

1057봉 오름길로 접어들자 등로의 경사가 다시금 가파르게 바뀐다.


 

늦은목이에서 몇몇 분을 남대리 주막거리 방향으로 탈출시키고,

허겁지겁 달려온 창병씨가 숲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1057봉 헬기장에 도착하여 잠시 쉼을 한다.


 

1057봉 내림길에 부처님 손가락 모양의 바위를 만나,

소백산은 부처님의 산이라는 것을 실감해 본다!


고도표에는 그냥 내림길로 표시되어 있지만,

조그마한 오르내림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가끔씩 바위지대도 만난다.


 

철쭉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놓고 있는 능선을 걸으며,

이 구간을 6월 초.중순쯤에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8월 한여름에 이리도 시원한 곳을 두고 어디로들 피서를 가는지!

언젠가부터 여름철 피서를 바닷가로 가지 않게 된 연유를 떠올리며,

여유롭게 숲길을 즐긴다.


 

마구령이 900m 남았다.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살짝 스쳐갔다!


마지막 봉우리인 894봉 오름길이 살짝 힘들게 느껴지려는 찰나에,


 

894봉 헬기장에 도착해 벼렸다.


 

옛날 북진길의 추억을 떠올리며 찰깍!

그때는 이곳에 살짝 눈이 내려 있었는데, 오늘은 한여름이다!


 

마구령에 도착 해 버렸다!!!


<마구령(馬駒嶺, 810m)>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에서 남대리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마구령의 유래는, 이 길이 충청도와 강원도를 잇는 관문으로서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하여 '마구령'이라 하였으며, 경사가 심하여 마치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 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렀다 한다.

마구령은 고치령, 죽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갯길 중 하나였다. 영남 선비들의 과거길로는 ‘영남대로’라 불렸던 죽령길과 영월 하동과 이어지는 마구령길, 그리고 단양 영춘과 이어지는 고치령길 등이 있었다. 세 길은 모두 백두대간 주능선에 있다. 옛 기록에 馬兒峴(마아치)로 기록된 이곳이 마구령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메기재의 차음설(借音說) 또한 그럴듯하다.

 

마구령 이정표.


마구령 등산 안내도.


마구령 날머리 모습.


 

마구령 인증을 남기고,

 

다음구간 들머리도 확인하고는,

 

 

남대리를 향해 북쪽 영월 방향 내림길로 내려간다.

마구령에서 남대리 주막거리까지 2km쯤이라,

30여분 정도면 도착할 것이라 짐작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앞에서 트럭 하나가 달려오더니 우리 앞에서 멈춘다.

그런데 차창 너머의 얼굴이 익히 보던 얼굴이다!

천보님이 보우하사 ~~~,

늦은목이에서 탈출했던 보성씨가 트럭을 빌려서 마중을 나왔다.


예상과 달리 마구령에서 주막거리까지의 길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 보인다.

트럭을 타고 쉽게 도착했지만, 그냥 걸어왔으면 거의 한시간은 족히 걸렸을 듯하다.

다시한번 천보님과 그 일당들의 탈출에 감사?한다.

 

 

남대리 주막거리에 도착한다.


마구령에서 이어오는 계곡을 흐르는 물이 어서 들어오라 재촉하지만!


주막거리에 있는 '소백산 자락길 안내판'


계곡에서의 알탕은 피서객들의 눈치를 봐야하기에 그만두고,

주막거리 매점 쥔장의 허락을 얻어, 캠핑장 샤워시설을 이용하여 땀을 씻는다.


 

사워 후 그늘에서 잠시 쉬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나 샤워를 두번 하는 경험도 체험도 한다.


 

단양의 돌집식당으로 이동하며 간밤에 알바를 했던 버스가 또한번 알바를 한다.

단양IC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야 겨우 예약해 놓은 식당을 찾아왔다.

 

 

산행이 너무 쉬워서 그런지 밥상 앞에서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없다.

앞으로 산행은 좀 빡세게 해얄 듯하다!

 

단양의 명물이라는 마늘정식 상차림!

 

그래도 한여름에 짧지 않은 대간산행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행복하게 ~~~를 외친다.


 

선릉역에서 일괄 하차!

 

'산행이 쉬우면 귀가가 늦어진다'를 또한번 증명한다.

 

오늘 어느 분은 최근 심해진 지병으로 인해,

배낭을 메고 나서면 하늘이 온통 하얗게 변하는 상황에서도

대간 산행에 나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자세히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가는 게 무척이나 싫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던 것은,

학교라는 구속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강제하는 힘.

나의 삶을 이어가게끔 하는 형식적인 굴레.

자의든 타의든 나에게 작용하는 이런 속박이 없다면,

각자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런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언제가 우리 모두에게 원하던 원하지 않던 찾아오게 된다.

 

그런 구속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되돌아보니,

최모 회장님의 "산행은 우리의 의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러,

다음 산행에서 또 함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