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관악지맥 2차(갈현~문래역) : 늘 다니던 산길의 새로운 속삭임

재희다 2025. 5. 12. 15:26


산 행 지 : 관악지맥 2차(갈현~문래역)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  서울시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 

산 행 일 : 2025. 02. 26.(수)
산행코스 : 갈현고개/찬우물(60m) ~ 지엘건설본사 ~ 123봉 ~ 인재개발원 옆 도로 ~ 야생화자연학습장(90m) ~ 버섯바위 ~ 물개바위~ 6봉 국기봉(520m) ~ 8봉 국기봉(550m) ~ 관악산 연주대(629m) ~ 관악문 ~ 559.3봉(H) ~ 520봉 데크쉼터 ~ 마당바위(400m) ~ 관음사 국기봉(320m) ~ 사당역 갈림길 ~ 까치고개(생태통로) ~ 까치산(119.3m)공원 ~ 원당고개(솔밭로생태다리) ~ 상도중학교 ~ 백운고개(사당이고개) ~ 서달산(179m) ~ 서달산자연공원 ~ 흑석동생태다리 ~ 중앙대후문 ~ 고구동산/수도산(100m) ~ 고구동산 ~ 장승배기역 ~ 용마산(97m) ~ 대방공원 ~ 우신초교 ~ 신도림고가차도 ~ 문래동사거리 ~ 문래공원사거리 ~ 문래역에서 관악지맥 마감 (24km, 10시간 소요)
산행참석 : 4 백두.

 

<산행지도>

 

 

관악지맥 대부분의 능선과 봉우리는 최소한 한두번씩은 밟아본 코스지만 한남정맥 백운산에서 분기한 지맥이 어디로 이어지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걸으니 같은 봉우리와 고개들이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기에 남은 관악지맥 2차 산행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다. 지난 주말에 남파랑길 1,2코스 트레킹을 다녀와서 지맥팀 사람들의 선호하는 날짜를 조사하고 화요일의 비 예보를 고려하여 수욜에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갈현에서 문례역까지의 산행 거리도 길지만 관악산 오름길의 암릉구간과 이후 수많은 암봉과 암릉이 이어지는 관악산 능선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될 듯하여 비교적 이른 시간이 7시에 과천청사역에서 모이기로 하였는데, 모두들 금번 산행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약속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모두 모여 버스를 타고 갈현 직전 찬우물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7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다. 

 

어제 내림 비 탓인지 아침안개로 시야가 흐려진 찬우물 버스정류장에서 관악지맥 능선이 지나는 갈현고개를 카메라에 담고, 

 

산행준비를 하며 버스정류장 뒤편에 있는 6.25 전쟁 때 이곳에서 전사한 故김승철 중위의 위령비도 카메라에 닮고서, 

6.25 전쟁당시 이곳에서 전사한 김승철 중위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한림 장군이 1956년 9월 19일 이 비를 세웠다.

 

버스정류장 50여 미터 아래 가일로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관악지맥 산행을 시작한다. 

 

 

 

선답자들이 과천대로에서 숲길로 진입하는 루트는 일정하지 않지만, 가일로 도로로 접어드며 바로 우측 골목으로 들어서 숲으로 들어서던지 가일로~김영철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능선으로 오르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진행한 가일로~찬우물로 도로를 따라 공영주차장 뒤편 언덕으로 오르는 루트가 가장 빠르고 쉽게 관악지맥 능선에 접속할 수 있다. 

 

가일로로 30m 진행하다가 CU 앞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찬우물로를 따라 60m 진행하다가 좌측 공영주차장을 지나며 다시 좌틀하여, 

 

GL건설 앞마당에서 돌계단 들머리로 오르면, 

 

직원들의 산책용으로 만든 짧은 산책로가 이어지다가, 

 

이내 산책길은 우측 아래로 내려가고 낙엽이 수북이 덮인 잡목숲으로 들어서게 된다. 

 

 

길없는 능선 나뭇가지에 걸린 선답자의 표지기에 확신을 얻어, 

 

거칠지만 희미한 족적이 이어진 능선을 따르니,   

 

좌전방으로 가일로~김영철로를 따라 지맥능선으로 오르는 들머리쯤이 가늠되고, 

 

우측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등로에 접속하여 이후 인재개발원 도로까지 뚜렷한 등로를 따르게 된다. 

 

 

 

우측 과천상수도사업소 뒤편 능선을 좌회하여, 

 

아직도 길흔적이 남아있는 옛고개를 지나고,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방치되어 진행을 방해하는 구간도 지나, 

 

우측 보광사와 과천고교 방향에서 이어오는 더욱 뚜렷한 등로를 만나 좌측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좌측 김영철길에서 이어오는 등로가 접속하는 지점을 지나게 되고, 

 

좌측 옛 과천배수지 철망울타리를 만나 울타리 우측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다가, 

 

123봉쯤에서 울타리는 끝나고, 

좌측 안개로 희미한 과천지식정보타운 방향


뚜렷한 등로가 이어진 우측 아래로 텃밭들이 보이는 옛고개를 지나서, 

 

등로는 군부대 철조망 울타리 우측으로 이어지다가 이내 철조망 울타리와 작별하고 우측으로 진행하여, 

 

인재개발원 옆 도로로 내려서게 되는데,

이곳에서 지맥능선을 차지한 인재개발원을 통과하기 위해, 

좌측 도로를 따라 과천야생화자연학습장 방향으로 계곡을 건넜다가 다시 돼 건너오게 된다.

 

 

 

과천야생화자연학습장으로 이어진 좌측 도로를 따라, 

 

국군지휘통신사령부 후문을 지나 맥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금기 사항인 계곡을 건너, 

 

야생화 자연학습장 방향 도로를 따라 오르니, 

 

야생화자연학습장이 나오고, 

 

'밤나무단지 안내도'가 있는 지점에서 우측 야자메트가 깔린 '과천생태길(용마골 산불초소)'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우측 정자 옆으로 새벽안개를 뚫고 아침해가 슬그머니 떠오르고 있다. 

 

 

 

우측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다가, 

 

좌측 밤나무단지 탐방로(관양능선)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과천향교 방향으로 진행하여야 하지만, 

무심코 좌측 관양능선 방향 알바길로 들어서서, 

 

관양능선 방향으로 5분여 알바를 하다가 발길을 되돌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내려와 과천향교 방향으로 들어서서, 

 

얼어있는 계곡을 넘는 데크목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잠시 전 지맥능선을 차지한 인재개발원을 좌회하는 도로를 따라 건넜던 계곡을 돼 건너는 것으로, 이곳 계곡 건너편 능선이 관악지맥 능선이므로 데크목 다리를 건너 둘레길 등로를 따르다가 우측 능선길로 들어서야 하는데, 

 

계곡을 건너며 바로 좌측으로 뚜렷한 등로가 보이기에 지름길이라 생각하여 따르던 둘레길을 두고 좌측길로 들어서서, 

 

다시 계곡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두고 우측 길없는 사면 숲으로 들어서서 지맥능선 방향으로 진행하니, 

돌아본 청계산 위로 아침해가 아침안개를 헤치며 눈부신 했살을 비추고 있다.

 

잡목과 슬렙지대가 연이어지며 조금 빨리 가려고 지름길로 들어섰다가 개고생하게 되었음을 후회하게 되고, 

 

10여분 간 후회로 점철된 잡목지대와의 사투를 뚫고 오르니, 

 

돌로 쌓은 벙커의 흔적이 나오며 낯익은 선답자의 표지기가 후회막급이던 산꾼에게 위안을 주고, 

 

이내 우측 아래에서 이어오는 지맥능선 등로에 접속하게 된다.  

 

 

 

지난 폭설로 쓰러진 소나무로 '관악산 신령'에게 무릎을 꿇어 편안한 산행을 기원드리기도 하고,  

 

아침 안개가 과천 방향 멋진 조망을 가리고 있는 바위 슬랩을 올라,  

 

291.6봉쯤을 지나니, 

 

앞쪽으로 가야할 관악산 육봉능선 방향 지능선이 조망되고, 

 

앙증맞은 오리 모양의 바위 옆으로 올라 더욱 가팔라진 암릉구간을 오르는데, 

 

'버섯바위'라 불려지는 바위를 지나서,  

되돌아본 버섯바위

 

잡을 곳이 마땅치 않은 까칠한 바위를 오르면,  

 

가야할 국기봉을 비롯한 육봉능선이 시원스레 조망되는 넓은 바위슬랩에 오르게 되는데, 

왜 관악산이란 이름에 '악(岳)'자가 들어가 있는지를 알 것도 같다. 

지나온 과천과 청계산 방향
가야할 육봉능선 방향

 

 

 

"이리도 힘든 곳에 계시니 좋습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은 묘지를 지나, 

 

계속되는 가파른 암릉지대를 오르니, 

 

육봉 국기봉이 1.2km 남았다는 이정표도 지쳤는지 비스듬히 누워 있고, 

 

계속되는 까칠한 암릉지대를 오르는데, 오래전 홀로 육봉능선을 오르다가 길을 잘못 들어 거대한 바위절벽 아래에서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던 난감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며 과연 관악산에 '악(岳)' 자가 붙을 이유를 절감하며 이제는 한결 여유로워진 나의 모습이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사이에, 

 

산꾼들이 물개바위아 부르는 바위가 아래에서 보니 뱀의 머리처럼 보이고, 

 

바위절벽으로 올라 옆에서 보는 물개바위는 그저 이상하게 생긴 바위쯤으로 보일뿐이고, 

 

육봉 능선에 올라서서 좌측 육봉 국기봉을 향하는데, 

우측 관악산 정상 방향

 

좌측 아래로 보이는 물개바위가 한결 물개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앞쪽 칼바위 능선은 정규 등산로가 아니므로 우회하라는 빛바랜 안내문의 권유에 따라 직진의 칼바위 능선을 두고 좌회하여, 

 

국기봉 직전 안부에서 아직도 일부 얼음이 남아있는 가파른 바위절벽을 올라,  

 

한결 완만해진 암릉으로 접어들어 육봉 국기봉으로 향하여, 

과천에서 쉽게 올랐다가 내려설 때 섬뜩했던 옛기억이 있는 돌아본 칼바위

 

이내 관악 6봉의 정상 국기봉(528m)에 도착하니, 

 

<관악산 육봉 국기봉(525m)>
관악산 육봉 국기봉은 경기도 과천시와 안양시 경계의 관악산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주로 관양능선 또는 육봉능선을 따라 오를 수 있으며, 주변에는 팔봉 국기봉과 문원폭포 등이 있다. 관악산의 여러 국기봉 중 하나로, 관악산과 삼성산에 산재한 13개 국기봉을 도는 관악산 13국기봉 종주 코스가 유명하다, 

 

과천 방향 하산 시 육봉능선을 두고 안전한 문원폭포 방향으로 하산하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바로 아래에는 과천과 평촌 방향 조망이 트인 전망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남서쪽 평촌 방향의 관양능선 모습
동남쪽 육봉 능선과 과천 방향
육봉 국기봉 정상 인증

 

<안양시(安養市)>
안양이란 불가(佛家)에서는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청정한 극락정토의 세계를 말하며, 현재 서쪽에서 10만억 佛土(불토)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를 말하는데 안양시의 유래는 석수동에 자리잡고 있는 안양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안양시의 지명 유래지인 안양사(안양시 만안구 석수동)는 신라 효공왕 3년(900년)에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가는 길에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피어오르자 이를 이상히 여겨 능정(能正)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로 전해지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최영 장군이 7층 전탑을 세우고 왕이 환관을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佛事)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어려울 것으로 짐작되던 갈현~육봉 구간을 통과했기에 다소 느긋해진 기분으로, 

평촌 방향 관양능선으로 이어지는 데크계단길 옆 암릉길로 내려서다가, 

 

움푹한 안부를 지나 암릉을 오르면, 

 

가야할 관악산 정상 방향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돌아본 육봉 국기봉

 

좌측 불성사 방향 갈림길이 표시된 오래된 제1국기봉 위치 표시목(493m)을 지나, 

관악산 서쪽 삼성산 상공 하늘길로 쉴 새없이 지나는 비행기

 

빙판으로 지나기가 까다로운 암릉을 좌회하여 지나, 

 

서쪽으로 팔봉능선이 분기하는 팔봉 국기봉(493m)을 지나면, 

 

관악산 팔봉 능선에서 가장 멋지다는 불꽃바위/관음바위를 지나게 되는데, 

 

불꽃바위를 지나서 내려서는 암릉이 얼음에 덮여 있어서 내려서기가 무척이나 위험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기암들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된 암릉을 피하는 등로를 찾으며, 

 

잘 나있는 등로에 혹여 얼음이 있어서 불의의 사고가 날지도 살피고, 

 

남들보다 커다란 몸뚱이가 끼이면 어쩔까 하는 염려를 하며, 

 

차라리 빙판을 이루고 있는 능선 좌측의 등로를 따라 진행하기도 하다가, 

 

능선 봉우리를 지나는데 가야할 능선에 자리한 거대한 'KBS 송신소'가 시야에 들어온다. 

 

 

 

뭘 하려는지 알 수는 없지만 듬직하게 등로를 지키는 바위를 지나서 올라, 

 

케이블카능선 갈림봉인 KBS 헬기장 봉우리를 지나고, 

연주암까지 300m 남았다는 KBS 헬기장 이정표

 

KBS송신소가 차지한 봉우리 직전 안부에서 좌측 우회길로 진행하여, 

 

KBS송신소 입구에서 관악산 제4야영장 방향의 능선길을 두고 직진의 연주암 방향 데크계단길로 내려서는데, 

 

<연주암(戀主庵)>
연주암은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연주암은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652~702) 대사가 창건한 절로, 의상대사는 관악산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 골짜기에 절을 짓고 관악사(冠岳寺)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부터 고려 말까지는 거의 폐사되다시피 하다가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가 의상대와 관악사를 중수하고는 조선왕조의 번창을 기원하는 200일 기도를 하였다.
이 절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는데, 1868년(고종 5) 중수작업 때에는 명성왕후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龍華殿)을 신축하였으며, 1918년에는 경산(慶山)의 주도 아래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1928년에는 재운(在芸)에 의해, 1936년에는 교훈(敎訓)에 의해 새로 건물을 세우거나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본당인 대웅전과 그 뒤편에 금륜보전(金輪寶殿:삼성각)이 있고 연주대에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금륜보전은 현재의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로서 1929년에 신축한 것이고 대웅전 및 기타 건물은 1970년대 이후에 지은 것으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모신 천수관음전과 효령대군 영정(경기도 지방문화재 제81호)을 모신 효령각은 1996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3.2m의 고려시대 양식의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은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뛰어나며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16나한의 모습을 비단에 그린 탱화가 응진전에 봉안되어 있고, 약사여래 석상이 응진전 옆의 암벽에 마련된 감실에 봉안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상은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KBS송신소 보급용 궤도차가 사람과 짐을 싣고 급경사를 내려가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이고, 

 

우측 아래로 이어진 연주암 방향 갈림길에서 연주대 방향 직진의 사면길을 따르니, 

 

좌측 서울대 방향 갈림길이 있는 깔딱고개를 지나게 된다. 

깔딱고개 이정표

<깔딱고개> 

깔딱고개는 서울대입구에서 연주대로 오르는 주요 등산 코스 중 하나로, 서울대 방향에서 많은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구간이다. ‘깔딱고개’라는 이름은 오르막이 매우 가파르고 계단이 길게 이어져 숨이 ‘깔딱’ 넘어갈 정도로 힘들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곳 깔딱고개에서 다시 능선으로 진행해도 될 듯하지만, 이내 관악산기상관측소가 앞을 막아서게 되므로 능선 우측 연주대 방향 이정표의 우회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연주암에서 관악산 정상석이 있는 연주대로 이어진 데크길에 접속하여 데크계단길을 오르면, 

돌아본 연주암 방향

 

관악산 정상석이 자리한 암봉 절벽 위에 자리한 연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지나게 되고, 

 

<연주대(戀主臺)>

‘연주대’는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크고 작은 바위가 우뚝 솟아 절벽을 이룬 곳에 축대를 쌓아 평평한 집터를 만든 곳이다. 이름의 한자를 보면 ‘연(戀)’은 그리워한다는 뜻이고 ‘주(主)’는 주군(主君) 즉 임금을 뜻하여, ‘임금을 그리워하는 곳’으로 풀이된다. 
연주대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677년에 지은 작은 암자로 원래 ‘의상대’라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의 연주대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에 붙인 것이다. 이름과 관련된 전설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이 세워지고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겨지면서 고려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여기에 올라 옛 왕조와 충신들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조선이 세워지고 한양이 수도로 정해질 때,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권유로 태조 이성계가 직접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경치를 둘러보고 조선과 한양의 복을 빌기 위해 원각(圓覺)·연주(戀主) 두 절을 지었고 이때부터 ‘연주대’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연주대와 관련된 설화 중에는 세종의 형인 양녕 대군과 효령 대군의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셋째 왕자 충녕 대군(훗날 세종)을 세자로 정하려 하자 두 형은 궁을 나와 여러 곳을 유람하였는데, 양녕 대군이 이곳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를 지었고, 효령 대군은 스님이 되어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악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으로, 1411년(태종 11), 동생인 충녕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전국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 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관악사의 이름이 연주암으로 바뀐 유래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가 있다. 고려의 충신이었던 강득룡(康得龍)과 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그 자리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연주대 전망대를 뒤로하고 계단길을 잠시 더 오르면,  

돌아본 관악산기상관측소 방향

 

어떻게 저리도 큰 정상석을 이곳에 올려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관악산 정상에 도착한다. 

 

<관악산(冠岳山, 629m)>
서울 관악구와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의 경계에 있는 관악산의 주봉은 연주봉(戀主峰)이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는 ‘관악’으로 많이 나오는데 악(岳) 자체가 산(山)을 뜻하기 때문에 그 뒤에 다시 ‘산’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운악, 북악, 치악 등이 그와 같은 예이다. 
관악은 그 형상이 마치 관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처음의 산 이름은 주위 산세에서 으뜸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 오악(五岳)의 하나였으며,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울려서 철 따라 변하는 산의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한다. 
고려 숙종 원년(1,069년) 김위제가 지리도참설에 의해 남경 천도를 건의할 때 삼각산 남쪽을 오덕구(五德丘)라 말하며, 그 남쪽의 관악은 모양이 날카로와 화덕(火德)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관악산은 서울의 조산(祖山)으로 일찍이 역사무대에 등장했으며, 남쪽 봉우리 삼성산 중턱에 있는 삼막사에는 몽고 항쟁 때 적장 살리탑을 주살한 기념으로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또한 관악산은 그 이전 한강을 중심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이 쟁탈전을 펼치고 당군(唐軍)을 축출할 때 그 지형상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서쪽 봉우리 끝에 해당하는 호암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성한 석축이 있으며 조선 후기의 기록인 『연주암지(戀主庵誌)』에는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대사가 관악사와 의상대를 창건했다고 한다. 

 

딱 한사람의 산아주머니가 남겨분 관악산 정상 인증
관악산 삼각점
북북서쪽 여의도 방향
북쪽 용산 방향
동쪽 우면산 방향
남쪽 청계산과 백운산 방향

 

 

 

10여 년 전에는 밧줄과 박아놓은 쐬기에 의지해 오르내려야 했던 사당능선 바위절벽을 7~8년 전쯤에 데크계단이 설치되며 시간과 노력이 많이 절감되었는데, 오늘처럼 먼 길을 가는 산꾼은 더욱 고마운 마음으로 데크계단길을 편안하게 내려서서,   

돌아본 관악산 정상 조망

 

데크계단 설계자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데크계단이 없는 작은 암봉 까칠한 오름길을 올라 다시 데크계단을 내려서는데, 

 

옛날 '삼관우청광' 종주길에서 걸었던 남태령 방향 능선이 분기되는 559봉을 완벽하게 뒤로 감추고 있는 관악문과 지도바위가 있는 579.5봉이 우뚝하게 다가서고, 

 

옛날 데크계단이 설치되기 전에 연주대를 좌회하여 다니던 우회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 

 

관악문, 지도바위, 촛대바위 등이 있는 암봉이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오름길로 들어서서 데크계단길을 오르니, 

 

관악산 연주대를 향해 기도를 할 때 필요할 듯 보이는 촛대바위를 지나, 

돌아본 관악산 능선 조망

 

지도바위와 관악문이 있는 579.5봉에 올라, 

 

관악문 또는 통천문이라 불리는 바위문을 통과하여 내려선다. 

관악문을 통과하였으니 모든 일이 술술 잘 통하게 될 백두들!

 

 

 

안부 갈림길에서 직진은 559.3봉으로 오르는 등로이고 사당역 방향 등로는 좌측 우회길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곳 559.3봉은 관악지맥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지점으로, 559.3봉에서 우측 능선을 따르면 남태령과 우면산을 거쳐 양재천으로 이어가게 되고, 좌측 능선을 따르면 사당동 까치고개와 서달산을 지나 도심을 거쳐 안양천 합수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때는 우면산을 넘는 양재천 합수점으로 가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으나 요즘은 대부분 서달산을 거쳐 안양천으로 진행하고 있는 상태라 우리도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사당역 방향의 우회길로 들어서며 안양천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관악지맥을 따르게 된다.

 

북사면이라 겨우내 얼어붙은 빙판이 남아있는 사면길을 조심조심 지나, 

 

다시 능선길에 복귀하여 능선 봉우리에 설치된 데크목 광장쉼터(520m)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쉼을 한다. 

데크 광장에서 본 북서쪽 여의도 방향
데크광장에 도착하는 백두들

 

 

 

데크광장 쉼터(정상부 조망데크)를 뒤로하고 지맥능선을 따라 이정표가 있는 헬기장을 지나, 

 

회색 건축물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녹지대로 지맥길이 이어질 듯 보이는 동작구 방향의 조망에 눈길을 주어가며 데크계단길을 내려서니, 

 

그저 평범한 능선 봉우리인 411.7봉을 지나게 되고, 

 

추운 날씨라 붐비던 산객들이 사라져버린 바위 능선길을 따르면, 

 

전망이 트이는 널찍한 암반이 펼쳐지는 마당바위를 지나게 된다. 

가야할 379.8봉
건물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녹색섬으로 보이는 서달산 방향
좌측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서울대 관악캠퍼스 조망

 

 

 

데크 계단길을 내려서서 '하마바위'라는 기다란 하마몸통 같은 바위 옆을 지나, 

 

좌측 낙성대 방향 갈림길을 연이어 지나서, 

 

379.8봉 벙커 데크쉼터에서 다시 배낭을 내리고 쉼을 한다. 

 

 

 

헬기장이 있는 333.5봉을 지나, 

 

데크계단 내림길을 따라 공감이 안 되는 쪼개진 하트바위를 지나니,  

 

가야활 관음사 국기봉인 317.3봉이 성큼 다가서고, 

우전방 우면산 방향

 

안부를 지나 다시 데크계단을 잠시 오르면 317.3봉에 도착하게 되는데, 옆에서 송사장님이 전망이 빼어난 이곳은 처음 와 본다고 한다. 10년 전인 2016년 송년산행 때, 노들역에서 동작충효길을 따라 서달산을 지나 이곳까지 왔다가 사당역으로 하산했던 장소라고 얘기를 해도 도저히 믿지 않는데, 사람의 기억은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며 언젠가는 나도 그 모든 것이 생소하게 느껴지게 될 것임에 다소간 서글픈 생각이 든다.  

돌아본 관악산 정상 방향

 

서달산 방향의 관악지맥이 녹색 띠의 형태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북동쪽 남산과 반포 방향
녹색 띠의 형태로 명맥이 남아있는 서달산 방향의 관악지맥

 

 

 

지금까지 관악산 주능선으로 이어온 지맥길은 317.3봉을 끝으로 관악산 주능선을 뒤로하고 관악산 하산길로 접어드는데, 서달산으로 이어지는 가녀린 녹색띠가 가야할 관악지맥이라 생각하니 그나마 맥길이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가파르게 이어지는 철계단 끝지점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내려다 보이더니, 

 

이내 관음사 국기봉을 지나게 되고, 

 

데크로 바뀐 계단길을 잠서 더 내려서다가, 

 

'T'자 갈림길에서 좌측 선유천 방향을 두고 우측 등로를 따라 내려가서, 

 

'관등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사각정자 쉼터를 지나 서울둘레길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인헌고등학교 방향 '인헌공 강감찬 길'을 따르면, 

 

평탄한 능선길을 따라 '인헌공 강감찬 길' 스토리텔링 글판이 연이어 나타난다. 

 

<강감찬과 관악산에 얽힌 전설>
관악산은 그 북쪽 기슭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강감찬과 관련한 전설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아 없앴다는 전설도 있고,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전설들을 뒷받침해 주듯 관악산에서는 칡덩굴을 별로 볼 수 없고, 곳곳의 바위에 아기 발자국 같은 타원형 발자국들이 보인다. 

 

 

 

 

좌측 인헌고교 뒤편의 사거리 갈림길을 지나, 

 

육각정자가 자리한 98.2봉을 좌회하여 지나고, 

 

'인헌공 강감찬 길' 안내판이 있는 쉼터를 지나면, 

 

<인헌공 강감찬 길>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落星垈)'라 불리며, 강감찬생가터와 낙성대 공원 내 인국사에 있는 낙성대 3층 석탁을 볼 수 있다. 숲길로 들어서면 숲이 우거져 청량한 산의 기운을 흠뻑 느낄 수 있고, 시원하게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낙성대전망대와 봉천동마애미륵불과 호민공 이경직 묘역 등 역사와 문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산책길이다. 

 

 

남부순환로를 넘는 생태통로가 있는 까치고개를 지나게 된다. 

 

<까치고개(鵲峴)>
남부순환로의 봉천동과 남형동 사이의 고개 지점으로, 옛날 이곳에 수목이 우거져 까치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작현(鵲峴), 가추개라고도 한다. 2005년 6월 아치형 생태육교(관악까치 생태다리)가 세워지면서 관악산까지 이어지는 등반이 가능해졌다. 

좌측 남부순환로 서울대 방향

 

 

 

까치고개 생태통로를 건너 까치산근린공원의 영역으로 들어서서 잠시 오르니, 

 

<까치산 근린공원>
넓이는 36만 8,425㎡이고 수목이 우거지고 까치가 많아 까치고개라 불렸던 곳으로부터 이름이 유래했다. 2005년 6월, 도로 개설로 인해 끊어졌던 공원에 길이 22m, 폭 15m의 아치형 생태육교가 세워지면서 관악산까지 이어지는 등반이 가능해졌다. 이 생태로는 낮에는 사람이, 밤에는 동물들이 이동하는 길로, 주변에는 3천여 그루의 나무를 비롯해 8종의 생태시설물을 조성했으며 배드민턴장, 운동기구시설, 약수터, 산책로 시설이 있고,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61호인 임당정공신도비 (林塘鄭公神道碑)가 있다. 

 

한켠에 어린이놀이터와 체육시설이 설치된 넓은 공터 옆을 지나, 

 

'까치산길' 이정표와 나란히 서 있는 동작충효길 안내판을 지나게 된다.  

 

<동작충효길>
동작충효길은 동작구 곳곳에 자리한 충·효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역사와 문화 공간을 따라 도보길을 조성하면서 명명한 이름이다. ‘충효의 고장 동작에서 만나는 일곱 색깔 동작 이야기 길’을 테마로 도심 속의 웰빙 산책 코스를 조성할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명품동작 건설 계획의 일환으로 동작구에서 조성한 도보코스로, 국립서울현충원, 사육신역사공원 등 역사문화유산과 한강, 국사봉 등 생태자연을 함께 포함하여 총 7개 코스 26㎞로 조성되었다. 2011년 6월부터 시작된 동작충효길 1단계 사업은 고구동산~현충근린공원~한강수변길~사육신역사공원~노량진역을 연결하는 1~3코스까지의 구간으로 10.5㎞에 이르며 2011년 11월에 마무리되었다. 2012년 7월부터 시작된 동작충효길 2단계 사업은 노량진역~노량진수산시장~노량진근린공원~보라매공원~국사봉~까치산을 연결하는 4~7코스까지의 구간으로 14.5㎞이며 2012년 12월에 완료되었다.

 

 

 

 

짧은 오르막을 올라, 

 

체육시설이 설치된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니, 

 

별다른 표식이 없는 작은 언덕 수준의 까치산(119.3m) 정상을 지나게 되고, 

 

<까치산(119.3m)>
까치가 많아 까치산이 라 불렸던 곳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질주본능에 따라 앞서 가다가 우아한 정자 쉼터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사장님을 만나,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서 솔밭로가 지나는 원당고개를 넘는 생태통로를 건너게 된다.  

 

<원당고개>
원당고개는 현재 동작고등학교에서 낙성대역으로 넘어가는 사당동 산 44번지 솔밭로 생태다리가 있는 지점으로, 조선시대 동래정씨 문중과 전주이씨 문중에서 사당고을을 서로 자기 땅이라 하여 소송이 붙자 당시 이 고을 원님이 이 고개에 앉아서 판결을 내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당동 산 44번지 일대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산 44-12, 산 32-4번지를 경계지점으로 하여 반씩 소유토록 했는데, 산 44-1번지에서 남태령고개까지는 전주이씨가, 산 32-4번지에서 동작동 배나무골까지는 동래정씨가 소유토록 했다고 한다.

 

벌명당과 원당고개 설화 안내판
원당고개를 지나는  솔밭로를 넘는 생태통로 우측 사당동 남성역 방향

 

 

 

다소 호젓해진 도시민들의 산책로를 따라, 

 

우측 행림초등학교 방향 갈림길을 지나 능선으로 이어진 까치산근린공원 산책로를 계속 따르다가, 

 

완만한 데크길을 내려서면, 

 

관악푸르지오APT 옆 도로로 내려서서, 

현위치 동작충효길 7코스

 

도로를 따라 조성된 산책길을 따르게 되는데,  

 

'구석구석 동작이야기 - 까치산 공원과 삼일공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서 서울시내를 통과하는 관악지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렇게 이어져 있다는 게 다행스럽고 곳곳에 지명유래와 안내판을 설치하여 관리하는 동작구의 행정에 감사할 따름이고, 

 

산책로가 다시 도로와 접속하는 지점에서, 

 

도로 우측에 조성된 맨발걷기 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실오라기처럼 이어오던 녹지가 끝나고 마침내 도로에 내려서면, 

 

이내 '청림 어울림길' 표지판이 있는 상도중학교 담벼락에서 우측으로 꺾어져 상도중학교 이정표 방향으로 진행한다. 

 

 

 

상도중학교 옆 도로를 따라도 되지만 1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상도중학교로 오르는 계단을 오르니, 

 

외부인은 출입하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상도중학교 철망문으로 들어서서, 

 

상도중학교 운동장을 휘돌아 가로질러 정문으로 나가, 

 

좌측의 사당롯데캐슬골든포레 APT를 관통하여,  

 

아파트 정문에서 우틀하여 사당로 인도를 따라 오르면,   

 

사당이고개/백운고개를 지나는 사당로를 넘어 서달산으로 이어지는 생태통로를 건너게 된다. 

 

<사당이고개/백운고개>
동작구 상도1동 숭실대학교에서 사당동 총신대학교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백운고개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고개 부근에 큰 사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 사당고개 옆에 있는 나무시장이 성시를 이루었는데 지금의 미륵암과 숭실대학교 부근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녀들의 학비조달을 위해 나무를 해다가 새벽 일찍 이곳에서 팔고 다시 나무를 하러 가던 곳으로 주로 장작, 솔개비, 깔비 등이 매매되었으며 이곳의 나무들은 부자와 일본인들이 사갔다고 한다.

 

사당이고개 생태통로에서 본 우측 사당동 방향

 

 

 

사당이고개 생태통로를 건너 데크목 계단길을 올라, 

 

국립현충원 갈림길에서 고구동산길 이정표의 우측 국립현충원(옛 동작동 국립묘지) 방향 산책로를 두고, 

좌틀하여 노들나루공원(3.2km) 방향으로 들어서서, 

 

국립현충원 울타리 옆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동작동 국립현충원 뒷산인 서달산 정상에 도착하여 정자 쉼터에서 배낭을 내리고 잠시 쉼을 한다. 

 

<서달산(西達山, 179m)>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뒤쪽에 있는 서달산은 ‘달마(達磨)가 서(西)쪽으로부터 왔다’는 불교의 화두(話頭)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 산으로, 산 정상에는 동작대라는 2층짜리 팔각정이 있고 정상 북쪽 아래에는 근세 불교의 고승이셨던 만공선사의 상좌이신 유심스님이 창건한 달마사가 있다. 
서달산 정상의 원래 지명은 화장산(華藏山)또는 공작봉(孔雀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화장산은 국립현충원 안에 있는 호국지장사의 옛 지명이 화장사라서 붙여진 이름이고, 공작봉은 풍수적으로 전체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형국인 공작장익형(孔雀張翼型),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형국인 장군대좌형(將軍對坐型)의 명당이라 공작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달산 아래의 호국영령이 잠든 풍수명당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으로, 과거에는 국군묘지로 서울 장충단공원 내의 장충사에 위치했으나  6.25 전쟁 이후 풍수상 명당으로 손꼽히는 현 위치로 옮겼으며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현충원에는 국가원수로부터 국가유공자, 일반묘역, 외국인 등 다양한 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 등 의미 있는 공간이 많다. 다른 표현에는 낮고 부드러운 능선이 아늑하게 외곽을 두른 봉황포란형(鳳凰抱卵型) 명당으로 묘사되고 있고, 면적은 143만㎡(약 43만 평)로 묘소 약 5만 4000기(基)와 위패 10만 위(位)가 모셔져 있다.

 

서달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동작대(銅雀臺)

 

 

 

서달산 정상을 뒤로하고 북측의 달마사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좌틀하여, 

 

노들나루공원과 중앙대 후문 방향 내림길로 내려서니, 

 

좌측의 서달산자락길 입구 표지목을 지나,  

 

북측 흑석동과 남측 상도동을 잇는 서달로를 넘는 흑석동 생태다리를 건너게 되고, 

 

<흑석동(黑石洞)>
흑석동이란 옛날 이 일대에 검은색을 띤 돌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검은돌 마을이라 불리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상도동(上道洞)>
상도동은 예전에 상여꾼이 집단 거주하여 ‘상투굴’이라고 부르던데서 유래되어 조선시대에는 상도화리라 불리다가 상도리, 상도정이란 이름을 거쳐 1955년 상도동으로 바뀌었다. 

 

서달산 근린공원의 '서달산 숲속도서관'을 지나, 

 

잣나무 숲으로 이어진 잘 정비된 산책길을 잠시 더 따르면, 

 

<잣나무 숲길>
서달산 등산로 일대에는 측백나무·잣나무 등 10여종 7587그루의 나무가 있는 동작동 피톤치드 숲이 있다. 2008년 5월 조성된 이 숲을 거닐면 나무가 발산하는 피톤치드로 심신 안정과 인체 면역력을 높일 수 있다. 동작구는 숲 체험과 생태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용객들의 생태적 감수성을 끌어올리고 건강 증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도로에 접속하게 되는데, 

 

우측 능선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동작구 청년창업지원센터를 지나 중앙대학교 후문으로 진행하여, 

 

중앙대 후문 인근의 순대국밥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기대보다 훨씬 맛있다!

 

 

 

순대국과 해장국으로 다소 늦어진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중앙대 후문으로 되돌아나와,  

 

산책길로 이어진 지맥능선을 따르다가, 

 

따르던 산책길을 두고 우측 돌계단길로 오르니, 

 

체육시설과 벤치가 있는 공터 한가운데에 삼각점이 있는 수도산/고구동산(100m) 정상을 지나게 된다. 

 

<고구동산(100m)>
동작구 노량진 본동과 흑석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 부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주변에는 노량진 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정상의 공터에는 4등 삼각점이 있는데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다. 노량진 본동의 동명(洞名)은 조선시대에서부터 오랫동안 불렸던 자연부락 명칭으로 ‘노랑진의 원마을’이란 뜻이다. 

 

 

 

고구동산을 뒤로하고 배드민턴장을 가로질러, 

고구동산 정상부 전경

 

북쪽 북한산 방향으로 노들섬과 한강철교가 조망되는 서울시 우수조망명소가 나오는데, 

살짝 당겨본 북한산 조망

 

직진의 노들역 방향 충효길로 진행하는 분들을 돌려세워,

우수조망명소 직전의 게이트볼장에서 좌측 상도터널 방향으로 꺾어, 

 

제법 가파른 도로를 따라 내려가, 

 

아래로 상도터널이 지나는 매봉로에 접속하여 횡단보도를 건너고, 

 

LIG건영아파트 남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e편한세상상도노빌리티아파트 입구 우측 하늘빛교회 옆 도로를 따라 내려서서,   

 

2차선의 '만양로'를 건너 신동아리버파크 입구로 들어서고, 

 

신동아리버파크A 내부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701동 옆 출입구로 나가 좌틀하여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동작도서관을 끼고 좌측으로 내려서니, 

 

7호선 장승배기역이 있는 장승배기 교차로를 지나게 되는데, 

 

<장승배기>
장승백이는 동작구 노량진동과 상도동의 경계에 있는데, 고개턱에 장승이 서 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시대에 장승백이 일대는 인가가 없는 울창한 나무숲이었는데,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1789년(정조 13)에 양주 배봉산 기슭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를 수원 근교 화산으로 옮겼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해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현륭원(顯隆園)에 자주 행차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으로 가는 길목인 이 지점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지만 나무숲이 우거져 적적하였고 쉴 수 있는 마땅한 공간도 없었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壯士) 모양을 한 남상장승(男相長承)을 세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女相)을 세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라고 명하였고, 장승백이에는 곧 두 개의 높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백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 장승 앞에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고 한다. 한편 장승백이 설화와는 달리 영조(英祖) 연간에 만들어진 「해동지도(海東地圖)」에 ‘과천계장생현로(果川界長栍峴路)’라는 지명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장승백이'라는 지명은 더 오랜 역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승배기역 6번 출구 직전 동작도서관 담장 옆에는 장승이 세워져 있다. 

 

 

 

장승배기 교차로 횡단보도들 건너, 

 

상도파크자이A 상가를 끼고 파크자이아파트 정문 방향으로 좌틀하여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상도파크자이A 정문을 지나, 

 

좌측의 노량진근린 장승공원으로 들어서서, 

우측 노량진2구역재개발아파트 현장 전경

 

장승공원 정상부로 진행하여, 

남동쪽 국사봉과 관악산 방향
북쪽 노량진과 남산 방향

 

장승배기지하차도를 건너고, 

 

우측의 백로어린이공원 축대 아래로 진행하다가, 

 

좌측의 상도래미안1차A 101동을 지나며 좌측 도로로 내려선다. 

 

 

 

상도래미안1차A  내부 도로를 따라,  

 

상도 래미안1차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여, 

 

래미안 아파트 107동을 좌측으로 지나 후문으로 나오니 노량진근린공원 어린이놀이터가 나오는데, 

 

노량진근린공원 어린이놀이터 뒤쪽으로 올라서서 공군항공안전단 군부대 담장에서 좌틀하여, 

 

지금은 서울대방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된 옛 공군항공안전단 담장길을 따르면, 

 

이정표와 체육시설이 있는 쉼터를 지나, 

 

이내 공군항공안전단 담장 옆 등로 가에 작은 돌탑이 있는 용마산 정상을 지나게 된다. 

 

<용마산(龍馬山, 97m)>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용마산의 2/3는 공군항공안전단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예전에는 통행 자체가 금지된 곳이었다. 지금은 주변에 산책길이 조성되고 정상에는 작은 돌탑을 만들어 용마산 정상임을 알리고 있다. 용마산의 유래를 보면 인근에 있는 성남중고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용마우물에서 용이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산이라기보다는 조그만 봉우리에 불과하다.

 

관악지맥의 마지막 정상석? 인증

 

 

 

용마산을 지나 군부대 담장을 끼고 급하게 내려서니, 

좌측 성남중고등학교 전경

 

노량진근린공원인 대방공원을 지나, 

 

여의대방로36길을 넘는 생태통로를 건너, 

 

배드민턴장 앞에서 좌측 데크 계단으로 오르면,  

 

대방공원 잔디광장을 지나게 되고, 

 

철망울타리가 둘러진 잔디광장 출입구 앞에서 좌틀하여 계단을 내려서서, 

 

이제부터 시내구간으로 접어든다며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대방대림A 뒤편 제비어린이공원 앞 도로로 내려서서 여의대방로 병무청역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돌아본 대방공원 날머리
제비어린이공원

 

 

 

김건희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법으로 금지되어 추억으로 남게 될 인근의 싸리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서울공고 방향의 도로를 두고 우측 도로를 따라 내려서니, 

 

여의대방로에 접속하여 지하철 신림선 서울지방병무청역 1번 출구 앞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바로 직진의 삼환A 방향 도로로 들어서서, 

 

신길7동 주민센터 앞 갈림길에서 우측의 도로를 따라, 

 

대방동 삼환A  입구를 지나고, 

 

더샵파크프레스티지A 입구 교차로에서 좌틀하여, 

 

가마산로79길을 따르다가, 

 

'APT앞교차로'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올라, 

 

우측의 삼성래미안A  입구를 지나는 도로를 따르다가, 

 

신길4동 주민센터를 지나며 신길로에 접속하여 우측 도로를 따라,  

 

우신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우신초교앞 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영등포 방향으로 진행한다.

 

 

 

'Y'자 갈림길에서 우측의 영등포로터리 방향 도로를 두고 좌측 영등포역 방향 도로로 진행하다가, 

 

누군가가 땅을 샀는지 살살 아파오는 아랫배를 진정시키고는, 

 

영등포역 고가도로 진입로가 보이는 지점에서 좌틀하여 진행하다가, 

 

영등포 푸르지오A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아파트 후문 방향으로 진행하여, 

 

영등포역을 지난 경부선 철길 옆 도로인 도영로를 만나 좌틀하여 진행하다가,  

 

영등포 푸르지오A 출입구를 연이어 지나면, 

 

경부선 철길을 넘는 도림고가차도가 나오는데, 

 

도림고가차도로 아래에서 우틀하여 횡단보도를 건너 계단을 올라, 

 

<도림동>
도림동은 산 형국(形局)이 마을 뒤에 성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국도(國道)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라 부르다가 도림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지명에 관한 또다른 설은 도림리 일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경부선 철길을 건너 도림동에서 문래동으로 진행하는 도림고가차도로 진행한다. 

우측 영등포역 방향 경부선 철길 전경

 

 

 

도림고가차도를 내려면 나오는 문래동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문래동>
문래동은 일제강점기 이곳에 방직공장이 들어서자 일본인들에 의해 ‘사옥동(絲屋洞)’이라 불리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광복 후 문익점의 목화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文來洞)’이라고 지었다는 해석이 있고, 일설에는 학교와 관공서가 들어서자 ‘글이 온다’는 뜻에서 지명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전자(前者)를 주장하는 주민이 많다고 한다.

 

따르던 큰 도로를 두고 우측 IBK기업은행이 있는 철공소 골목으로 들어서니, 

 

많은 철공소와 기계류 부품 제조업체들이 늘어선 골목이 이어지다가, 

 

문래창작촌 안내판과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당산로에 접속하여 우측 문래역 방향으로 진행하면, 

 

이내 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 앞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관악지맥이 끝나는 성산대교 아래 안양천 합수지점까지는 거의 평지의 시가지 지역이라 이곳에서 지맥산행을 마감하기로 하고 인증을 남긴다.  

 

 

 

사실 문계역에서 관악지맥을 마감하는 이유는 지맥 끝지점인 안양천 합수부까지는 평탄한 시가지라 걷는 의미도 크지 않아서였는데, 마침 오늘 영파(영등포에서 산행버스에 탑승하는 사람들)들이 문례역 인근의 자주 가는 '마늘통닭'에서 축하연을 하자고 하여,  

 

지맥이 이어지는 당산역 방향을 바라보며 당산로를 건너, 

 

문래근린공원으로 들어서니, 

 

'수도군단사령부 창설지' 표석이 자리하고 있고, 

 

늘 거나하게 취한 한밤중에 와서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문래동 카든빌A 건너편에 위치한 마늘통닭집에 도착하여, 

 

영파 동료들의 뜨거운 축하를 받으며 조촐한 관악지맥 종주 뒤풀이 시간을 가진다. 

 

 

'1차에서 마감하는 영파는 없다!'는 기치에 따라 전철역 가는 길에 위치한 오댕 맛집에 들러, 

 

이런저런 안주와 이야기로 주거니 권커니를 하다가, 

 

차가워진 밤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왔던 길을 되짚어,  

 

문래역에서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고는 귀갓길에 오른다. 

 

 

관악산과 동작충효길은 물론 대방동과 영등포로 이어진 시가지 구간은 생활공간인 듯 익숙한 곳이지만, 관악지맥을 더듬어 걷다보니 익숙했던 풍경도 전혀 다른 느낌과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일이 이렇듯 같은 사안을 보른 사람마다 다른 느낌과 모습으로 보이는 게 당연한 이치일터인데...

 

 

숙제를 미루지 않으려 무진 노력을 다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걷기가 힘들어질까 염려하여 산행 횟수를 이어가다 보니 

해외 원정까지를 포함하며 15회의 숙제가 쌓였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도 희미해져 숙제하기도 힘드는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