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지리산 둘레길 4,5코스(금계~동강~수철) : 운치 있는 우중 트레킹

재희다 2025. 7. 10. 12:20


산 행 지 : 지리산 둘레길 4,5코스(금계~동강~수철) 함양군 마천면, 휴천면, 산청군 금서면.

산 행 일 : 2025. 06. 14.(토)
산행코스 : 금계마을 ~ 의중마을(0.7km) ~ 벽송사(2.1km) ~ 모전마을(용유담)(2.8km) ~ 세동마을(2.3km) ~ 운서마을(3.3km) ~ 구시락재(0.7km) ~ 동강마을(0.8km) ~ 자혜교(1.2km) ~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1.5km) ~ 상사폭포(1.8km) ~ 쌍재 (1.7km) ~ 산불감시초소(0.9km) ~ 고동재 (1.4km) ~ 수철마을(3.6km)  (4코스 12.7km + 5코스 12.1km = 24.8km, 8시간 30분 소요)
산행참석 : 18 백두.

 

▶ 즐산팀은 4코스 벽송사 경유하여 5코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종료.   


▶ 4코스(금계-동강, 12.7km)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를 잇는 11km/12.7km의 지리산둘레길 4코스, 금계~동강 구간은 지리산 자락 깊숙이 들어온 6개의 산중마을과 사찰을 지나 엄천강을 만나는 길이다. 사찰로 가는 고즈넉한 숲길과 등구재와 법화산 자락을 조망하며 엄천강을 따라 걷는 옛길과 임도 등으로 구성된다.

 

▶ 5코스(동강-수철, 12.1km)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와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를 잇는 12.1km의 지리산둘레길.
이 구간은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걸으며 산행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걷는 산길로, 4개의 마을을 지나 산청에 이르는 길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며,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전하며 지리산자락 장꾼들이 함양, 산청, 덕산을 오가며 생을 이었던 길이기도하다.

 

 

 <산행지도>

4코스 벽송사 경유
5코스

 

 

지난 5월 네째주 소백산자락길  9자락 늦은목이재에서 시산제를 거행하고서, 6월부터는 여름산행 모드로 바꾸어 햇볕에 노출이 많은 코리아둘레길을 두고 숲길이 많은 지리산둘레길을 이어가기로 한다. 지난해 7월에 지리산둘레길 3코스(인월~금계)에 이어 나름 숲길이 많은 4~5코스를 걷기로 한다. 그런데 산행일에 많은 비가 예보되면서 혹여 집중호우가 내리면 지계곡을 건널 때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비가 오지 않는 장소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는 장마 상황이라 마땅한 대체 산행지를 찾지 못하고 결국 예정된 지리산둘레길 트레킹을 진행하기로 한다. 

 

지리산둘레길 4코스는 용유담을 경유하는 쉬운 코스와 벽송사를 경유하여 700고지 정도의 능선을 넘는 어려운 코스가 있다. 그리고 5코스도 산청·함양 추모공원부터 고동재까지는 난이도 있는 숲길이 이어진다. 이런 4코스와 5코스 모두 지계곡을 건너게 되는데, 대부분 교량이 놓여 있어서 별반 문제될 게 없어 보이지만 혹여 폭우가 내리게 되면 넓은 도로를 따라 진행할 요량으로 산행버스에 오른다. 

 

 

 

장맛비가 내리는 폐교를 리모델링한 '지리둘레길 함양센터'에 도착한 버스에서 1시간 남짓의 단잠을 더 즐기다가 일어나 종일 비를 맞아도 끄떡없을 정도로 우장을 갖추고,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지리둘레길 함양센터는 한국전쟁 당시 의중마을을 비롯한 칠선계곡 일대의 마을들이 빨치산 토벌을 위한 국군의 소개 작전으로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에 당시 마을 주민들이 임시 움막을 짓고 생명을 이어왔던 역사의 장소였다고 한다.

 

지리산둘레길 4,5코스(금계~동강~수철) 트레킹에 나서기에 앞서 역사적 현장인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에서 인증을 남기는데 과거 산행때는 볼 수 없었던 우산을 든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를 나서서 우측 도로를 따라 20여 미터 가다가 좌측 임천을 넘는 '의탄교(義灘橋)'를 건너는데, 다리 건너의 의평마을 뒤로 비구름이 들어찬 칠선계곡이 지리산 능선으로 이어져 있고, 

 

<임천(臨川)>
지방하천 표지판에는 '임천'으로 표시하고 있고, 국토지리 정보원 지도에도 '임천'으로 되어 있으나, 지리 둘레길 팸플릿에는 '엄천'으로 표기하고 있다. 
『 지리산 고리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굽이굽이 흐름 속에 이름을 달리하면서 섬진강과 낙동강으로 흐른다. 고리봉에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쪼개져 동남쪽으로 튀면 영남의 젖줄이 되고, 서북쪽으로 튀면 호남의 젖줄이 되는 셈이다. 
지리산의 서북능선에서 흘러내린 물은 운봉 너른 평야에서 ‘광천(廣川)’이란 이름을 얻어 운봉을 지나 서북능선의 끝자락인 바래봉과 덕두봉을 돌아나가는 인월에서는 ‘남천(濫川)’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 남천은 산내로 들어와서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심원계곡과 달궁, 뱀사골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수하여 ‘만수천(萬壽川)’이란 이름으로 갈아탄다. 굽이굽이 흘러간 만수천은 백무동 한신계곡과 광대골(비린내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수하는 마천 즈음에서 ‘임천(臨川)’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불린다. 임천은 다시 의평에서 천왕봉에서 내려선 칠선계곡, 국골, 허공다리골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수하여, 용유담을 지나 휴천(休川)에서 ‘엄천(嚴川)’이란 이름으로 바뀌는데, 용유담은 내(川)가 흘러 흘러 강(江)이라는 여의주를 무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 엄천은 산청에서 저 멀리 덕유산에서 흘러나온 ‘남계천’과 만나 ‘경호강(鏡湖江)’이란 이름을 얻고, 이 경호강은 진주에서 지리산 대원사 계곡과 중산리에서 흘러온 ‘덕천강’과 합류하여 ‘남강(南江)’이 된다. 남강은 함안군 남지에서 ‘낙동강’에 합류하여 을숙도를 거쳐 몰운대에서 드넓은 바다로 흘러든다.』

 

의탄교 우측으로 보이는 의탄천(좌)이 임천(臨川)에 합류되는 지점 전경

 

<의탄천(義灘川)>

경남 함양군 마천면을 흐르는 하천으로 마천면 지리산 중봉(1,875m) 서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칠선, 선녀폭포를 지나 임천에 유입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탄소(義灘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의탄(義灘)에 '여울 탄(灘)' 자를 쓰는 것은 '여울목'이라는 뜻에서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여울 탄(灘)' 자 대신 '숯 탄(炭)' 자를 쓰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추성에 있을 때 이곳에서 참나무 숯을 구었다는 설이 있다. 의중(義仲) 마을은 의탄리의 가운데 마을이라는 뜻으로 중말이라고도 한다. 

 

다리를 건너서 의평마을길을 따라 칠선계곡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의평마을 입구 'ㅓ자'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100여 미터 진행하면, 

좌측 지나온 의탄교와 함양센터 방향

 

우측 침목계단길로 들어서라는 지리산둘레길 이정목이 있는 숲길 들머리가 나온다. 

 

 

 

침목계단을 올라 수로 위에 나무판을 덮은 좌측 등로를 잠시 따라가다가 다시 우틀하여, 

 

가파른 오르막 침목 계단길을 올라, 

 

미끈한 적송 한 그루와 대나무숲이 둘러진 작은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삼굿터' 표지판과 '우리마을 이야기 중말(義仲)' 안내판이 있는 마을길을 가로질러 건너편 숲길로 진행하게 되고, 

 

<삼굿터> 

이곳에 있는 삼굿터는 100여 년 전부터 의중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문종이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 껍질을 벗기기 위하여 닥나무 15톤(20.8㎥)을 넣은 후 아궁이에 불을 지펴 종이의 재료를 만들어 오던 곳으로, 1990년 중반까지 맥을 이어 오다가 노동력이 점차 없어 잊혀 가고 있는 곳입니다.  - 2008. 10. 함양 군수 - 

 

<우리마을 이야기, 중말(義仲)>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이다. 고려 시대 의탄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성리 칠선계곡 입구에 있다. 마을 안에는 800여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어 매년 음력 7월 7일에는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선조 때부터 함양 박씨, 경주 정씨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정조 때는 경주 이씨가 입촌 정착해오고 있으며, 본 마을 출신인 은계 이진우 선생은 1897년에 태어나 천석지기를 한 향토교육가로서 사유재산 일백 두락을 저당하여 마천 초등학교 설립에 공헌하였고 현재 도계공원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마천 면민의 이름으로 세워져 있으며, 그의 후손이 생가를 보존하고 있다. 

 

좌측으로 의중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숲길을 잠시 더 따르니, 

 

<의중마을>
옛날 노디목 자리에 놓인 의탄교를 건너 의중마을에 다다른다. 마을 어귀에는 의중, 의평, 추성마을을 지키고 이어주는 600년 묵은 느티나무 당산이 있다. 중말이라고도 하는 의중마을은 목기, 숯, 옻칠 등 지방특산물을 중앙에 공납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행정구역인 소(所)의 하나인 ‘의탄소’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의중(義仲)이라 했다고 한다. 의중, 의평, 금계를 합쳐 의탄리라 했다. 이곳은 지금도 옻으로 유명하다. 의중마을을 지날 때 'ㅅ자' 모양의 돌아궁이처럼 생긴 ‘삼굿터’를 볼 수 있다. 100여년 전 마을 공동으로 닥나무 15톤을 넣고 불을 지펴 종이 재료를 만들어 오던 곳인데 1990년 중반까지 맥을 이어오다 노동력부족으로 지금은 점점 잊혀지고 있다. 의중마을 윗당산에서 용유담을 경유하는 길과 벽송사를 경유하는 길이 갈라진다.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이 있는 의중 당산 갈림길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엄천강을 따라 이어진 용유담 코스는 좌틀하여 진행해야 하고 벽송사를 지나 와불산 능선을 넘는 코스는 직진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야말로 귀신에 홀렸던지 당산목을 내려서며 사각 원두막 직전의 이정표도 확인하지 않은 채 우측의 데크목 계단길에 눈길이 머물며 데크목 계단길이 벽송사로 이어지는 것으로 착각하여 엄천을 따라 이어지는 용유담 코스로 진행하려는 분들께 직진의 벽송사 방향 길로 진행하게 하고 우리는 우틀하여 의탄천 방향으로 알바길에 나섰다가, 

 

의탄천으로 내려가는 알바길인 듯하여 지도를 확인하고 발길을 돌려, 

 

의중마을 당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의도치 않게 벽송사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 즐산팀을 따라잡으러 걸음을 서둔다. 

 

'의중마을 당산' 둘레길 표시목에는 붉은 방향 표시가 직진과 왼쪽 두 곳으로 나 있는데, 직진은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거쳐 송대마을과 빨치산 루트 기념관을 지나 모전마을로 향하는, 500고지 이상의 고도를 올렸다가 내려서야 하는 등산길이고, 
좌측 용유담으로 바로 가는 길은 엄천을 좌측에 두고 산기슭을 따라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구간으로, 여행자가 선정한 ‘둘레길 베스트 숲길 5’에 들 만큼 걷기에 편하고 또 아름다운 길이다. 

 

 

 

'의중마을 당산'을 뒤로하고 벽송사 방향으로 들어서며 총무님께 전화를 드려 알바임을 알렸더니, 

 

그냥 '벽송사 코스'로 진행하겠다고 하여 내심 죄스런 마음으로 벽송사 방향 숲길을 따라 앞서간 분들을 따라잡고, 

 

폭우가 오면 위험해 보이는 사면길도 지나, 

 

칠선계곡 조망과 석굴법당, 바위불상으로 유명한 서암정사 입구에 접속하여,

너무 이른 시간이라 서암정사 둘러보기를 생략하고 우측 진입로를 따라 내려서는데, 

 

<서암정사(瑞庵精舍)>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소속 사찰이다. 지리산 자락은 통일신라 이래로 등구사, 안국사 등 천년 고찰이 많은 곳이지만 서암정사(瑞庵精舍)는 근래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90년대부터 석굴 불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현재는 경상남도 함양군을 대표하는 사찰의 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암정사는 원래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말사인 벽송사에 부속된 조그만 암자였다. 서암정사는 벽송사 서쪽 600m 거리에 있는 곳으로, 암자의 창건주인 비구 원응(元應)[?~2018]이 1960년대 중반 사미(沙彌)[십계(十戒)를 받고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위하여 수행하고 있는 어린 남자 승려] 시절부터 수행한 곳으로 전하여진다. 처음에는 6·25전쟁 때 지리산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불사를 하였다. 1988년에 암자까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개설되자 1989년부터 원응 중심으로 석굴 불사를 시작하여 현재와 같은 사세를 이루게 되었다. 2018년 8월부터는 벽송사의 부속암자가 아니라 해인사 말사로 등록된, 독립된 사찰이 되었다.

 

 

당간지주 역할을 대신하는 듯한 바위 기둥 앞.뒤로 '삼라만상의 모든 흐름이 하나의 이치로 모여 진다'는 내용의 칠언시(七言詩)가 새겨져있다. 

 

백천강하만계류(百千江河萬溪流) : 백천 강물 만 갈래 시내가 흘러,
동귀대해일미수(同歸對解日味水) : 바다에 돌아가니 한물 맛이네.
삼라만상각별색(森羅萬象各別色) : 삼라만상 온갖 가지가지 모양이여,
환원원래동근신(環原元來同根身) : 근원에 돌아가니 원래로 한 몸이라.

 

 

 

서암정사 입구에서 좌측 벽송사 방향 도로로 들어서서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였다는 벽송사가 나오는데, 지리산둘레길은 벽송사 입구에서 우측 숲으로 이어지지만 벽송사를 둘러보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이곳에서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벽송사(碧松寺)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있는 벽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다. 신라말경에 창건된 후 조선 중종 경진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碧松 智嚴大師)가 중창, 『벽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 이전에 한국선맥을 이어온 벽계정심(碧溪正心)과 벽송지엄(碧松智嚴), 부용영관(芙蓉靈觀)뿐만 아니라 환성지안(喚醒志安), 서룡상민(瑞龍祥玟)등 조선 선맥을 빛낸 8분의 조사가 이 벽송사에서 수도 정진한 도량으로써 한국 선(禪)과 벽송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숙종30년(1704) 실화(失火)로 소실(燒失)되었다가 환성지안(喚醒志安)대사가 중건하였고, 철종 원년(1850)에 서룡당 상민(瑞龍堂祥玟)대사가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어 1960년 원응구한(元應 久閒)스님이 쓰러진 가람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전면에는 산문(山門)과 종루(鐘樓)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또한, 경내에는 보물제474호인 『벽송사3층석탑』과 민속자료 제2호인 『벽송사 목장승』,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인 벽송당지엄영정(碧松堂智嚴影幀), 경암집책판(鏡巖集冊版), 묘법연화경책판(妙法連華經冊版)등의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사찰은 1950년대 전란(戰亂)시 빨치산 루트로 사용되는 등 처참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벽송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절 뒤쪽의 창건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으로 미루어볼 때 그 시기를 신라말이나 고려초로 보고 있으며, 현재 3층석탑은 보물 제4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벽송사라고 전하여지며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도 있으며 이때 불에 타 소실된 이후 곧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계 정심의 맥을 이어 조선불교 태고선맥의 5대 정통이 되었고 부용영관, 원오, 일선등 60여 명에게 선을 가르쳤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벽송사 나무장승은 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가운데 하나이며,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 되는데, 예전에는 지하에 1m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가 더 묻혀 있어, 드러나 있는 것은 2m 정도였으나 현재는 벽송사 경내에 정려를 지어 보관하고 있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이라 음각돼 있고,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두 장승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사찰 입구에 세워져 사천왕이나 인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양간에 와서 식사를 하라는 벽송사 스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옷이 젖은 상태라 공양간 앞 천막에서 비를 피하며 아침식사를 하고,  

 

벽송사 입구에서 우중 트레킹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벽송선원 정진중 묵언'이라 표시된 '지리산벽송사'라는 현판의 건물 앞에서 우측으로 진행하여, 

 

스님이 알려준 따스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무인 다실을 들렀다가, 

 

벽송사 대웅전과 삼측석탑 탐방을 생략하고 발길을 돌려 지리산둘레길 들머리가 있는 입구로 내려서니, 

 

원래 몸통이 절반 가량 땅 속에 묻힌 채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있었던 목장승을 보존 중인 장승각을 지나, 

 

<함양 벽송사 목장승(咸陽 碧松寺 木長丞)>
장승은 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것으로 마을의 수호신,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 이정표 등의 역할을 한다. 
벽송사 목장승은 원래 몸통이 절반 가량 땅 속에 묻힌 채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장승각 안에 보관 중이다. 왼쪽에 있는 '금호장군(禁護將軍, 경내에 잡귀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군)은 윗부분이 불에 타 원래의 모습이 상당 부분 소실되었고, 오른쪽은 호법대신((護法大神, 불법을 지키는 신)이다.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대략 일제 강점기 초기에 세웠다고 한다. 목장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시대가 오래되었고 비록 눈, 코, 입이 과장되게 표현되긴 하였으나 순박한 인상을 주며, 무서운 듯하면서도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수수한 조각 수법이 돋보인다.

 

 

이내 벽송사 앞에서 숲길로 이어지는 지리산둘레길 들머리가 나온다. 

김종직의 유두류록길 안내도 (와불산 5km, 적조암 8.5km)

 

 

 

벽송사에서 와불산과 벽송사를 지나 운서마을까지 이어지는 '김종직의 유두류록길'과 함께 용유담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지리산둘레길로 들어서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니, 

 

등로는 우측 사면을 따라 호젓하고 평탄하게 이어지다가, 

 

와불산에서 의평마을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접속하여 야자메트까지 깔린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는데, 

 

서암정사와 벽송사 탐방은 물론 식사조차 잊은 채 부지런히 걷고 있는 즐산팀을 따라잡고, 

 

좌측 용유담 방향 'ㅓ'자 갈림길에서 직진의 와불산(1,213.9m) 방향 능선길을 두고 좌틀하여 내림길로 들어선다. 

 

 

 

울창한 능선 숲으로 이어진 제법 가파른 나무계단길을 지나,  

 

미끄러운 돌계단길을 내려서다가, 

 

굵은 다래넝쿨 아래를 지나 비로 불어나기 시작한 작은 계류를 건너니, 

 

좌측으로 시야가 트이며 경작지로 이어진 임도가 나타나고, 

 

이내 작은 계류를 넘는 목교를 건너,  

 

임도에 서니 임천 건너편의 구름을 두른 법화산이 멋지게 조망된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그냥 건너기는 불가능할 정도로 불어난 계곡물

 

둘레길 이정표인 벅수의 안내를 받아 데크목 다리로 물이 불어난 주골을 건너, 

 

좌측 내림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계곡을 건너온 잠시 전의 임도에 다시 접속하게 되고,  

 

용유담을 경유하여 오는 지리산둘레길과 다시 만나는 모전마을 입구 도로에 접속하여 우측 도로로 진행하게 되는데, 

용유담을 보려면 좌측으로 약간 진행하면 나오는 용유교 다리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모전(茅田)마을, 용유담(龍遊潭)>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지리산 깊은 곳에 들어앉은 산촌마을로, 모전(茅田)은 띠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강과 계곡, 기암절벽이 마을과 어루어진 풍경이, 지리산 깊은 곳에 들어앉은 산촌마을의 정취를 듬뿍 안겨준다. 의중에서 갈라진 지리산 둘레길이 모전에서 다시 합쳐진다. 
모전마을로 들어가는 용유교 아래의 용유담은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짜기의 물이 모여 임천이 되고 용유담에서 엄천으로 이름이 바뀐다. 지리산 여러 협곡에서 흘러온 물살이 강폭이 넓은 곳에서 잠잠해지며 평평하고 큰 연못을 이룬 용유담(龍遊潭)에는 아홉 마리 용과 마적도사 전설이 내려온다. 장보러 간 나귀가 물건을 싣고 용유담에 와서 울면 마적도사가 다리를 놓아 건너게 했는데, 어느날 용들이 싸우는 소리에 나귀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장기에 골몰하여, 결국 울다 지친 나귀가 죽어 바위가 되고, 화가 난 마적도사가 던져버린 장기판 조각들이 용유담에 흩어져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지리산계곡에서만 산다는 물고기 ‘가사어’ 이야기도, 아름다운 계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용유담 풍경에 신비로움을 더한다.

 

▶ 용유담 : 지리산을 유람하던 선인들이 여흥을 즐기던 곳으로 마적 도사와 아홉 용의 전설이 있다.
▶ 옻 : ​마천은 천연도료이자 약으로 쓰이는 옻이 유명했던 곳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으나 의중, 금계, 원정 마을에는 겨울이 되면 아직도 옻을 생산하는 농가가 남아있다.
▶ 엄천강​ : 지리산 북부 지역의 물줄기가 모여 엄천강이 되며, 경호강과 남강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도로를 따라 50여 미터 진행하다가 모전마을회관 앞 갈림길에서 지리산둘레길은 포장도로인 모전길을 따라 이어지지만, 우리는 좌측 임천 강변으로 이어지는 '용유담전설 탐방로'로 진행하기로 하고, 

 

<지리산둘레길 용유담전설 탐방로>
옛날 용유담에 아홉 마리 용과 마적 도사가 살고 있었다. 마적 도사가 쇠 도장을 찍어 나귀에게 보냈다가 나귀가 생필품을 싣고 와 용유담 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 도사가 다리를 놓아 나귀를 건너오게 했다. 어느 날 장기 삼매경에 빠져있던 마적 도사는 용들이 싸우는 소리에 나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고 결국 나귀는 울다 지쳐 죽고 말았다. 화가 난 마적 도사는 자신을 질책하며 장기판을 던져버리고 용들을 쫓아버렸다. 그때 던진 장기판 조각들이 용유담에 있는 바위들이다. 용유담과 세동마을을 잇는 옛길로 용유담의 전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이다.

 

 

비가 오는데도 우의를 입고 밭일을 하시는 아낙에게 인사를 건네며 데크길로 들어서니, 

 

벤치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전망데크 쉼터를 지나, 

좌측 황톳물이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엄천 전경

 

이정표가 있는 용유담산장 진입 도로에 접속하여 좌측 아래로 내려서다가, 

 

작은 나뭇가지에 걸린 빛바랜 목판 이정표를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여,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은지 다소 거칠어진 숲길을 따르면, 

좌측 엄천 방향으로 내려다 보이는 모내기가 끝난 논 전경

 

'기도도량 용천암' 입구에서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포장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지리산둘레길을 따라 진행한다. 

예쁜 손에 담긴 산딸기 선물

 

 

 

가랑비 내리는 지리산 산골 도로를 따라, 

 

'송전리 세동마을 펜션'과 '송전농촌건강마을 농산물판매장'을 지나자, 

 

<송전리 세동마을>
송대, 모전, 세동, 마적동, 고양터마을 등의 자연부락을 합쳐 송전리로 불린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유명한 닥종이 생산지였다. 세동마을 주변 산에는 닥나무가 지천이어서, 닥나무를 삶고, 종이를 뜨는 일로 분주한 마을이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이 마을의 모든 가옥은 산과 계곡에서 자라는 억새를 띠로 이어 얹은 샛집이었다. 딱밭은 칡덩굴로 덮이고 종이 뜨는 일상과 샛집 지붕의 아름다운 산촌 풍경을 이젠 볼 수 없어도, 바위를 담으로 이용한 집, 너럭바위에 앉은 집, 바위틈으로 솟는 우물 등 자연 속에 세 들어 사는 산촌마을의 모습은 지금도 변함없다. 이곳의 당산제는 높은당산, 윗당산, 아랫당산 세 곳에서 지내면서 특히 윗당산제는 별도로 술 한잔을 더 부어 올렸다. 이는 사도세자가 인재를 구하러 다니다가 이곳 세동 윗당산 정자나무 밑에 쉬어갔는데, 그가 뒤주에 갇혀서 죽자 애석하게 여겨 그를 추모하는 행사라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소개령에 의해 마을을 떠나면서 당산제는 사라졌다.

 

송전마을 버스정류장 옆의 효자각을 지나게 되는데, 

 

효자각 옆에는 세동마을 안내도와 마적도사전설탐방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마적도사와 아홉 마리 용 전설>
신라 무열왕(659년) 때 마적도사가 용유담에 와서 마적사를 짓고 나귀를 기르고 있었다. 식량과 부식물이 떨어지면 쪽지를 써서 쇠도장을 찍어 나귀에 부쳐 오도재를 넘어 관동장에 보냈다. 상인이 물품을 챙겨주어 싣고 다시 돌아와 나귀바위에서 울면 마적도사는 쇠지팡이로 다리를 놓아 나귀를 건너오게 하였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지리산 친왕 할매와 장기를 두는데 정신이 빠져 있었고 눈먼 용을 제외한 여덟 마리 용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며 하늘에 오르려고 물고 뜯고 싸우는 소리 때문에 나귀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귀는 울다 지쳐서 죽고 말았다. 뒤늦게 나귀의 죽음을 알게 된 마적도사는 장기 때문에 나귀가 죽는 줄을 몰랐다며 화가 나서 장기판을 던지니 깨어져 한 조각은 나귀가 죽은 나귀바위에 떨어졌고, 한 조각은 마적동에 떨어져 바위에 장기판이 새겨졌다. 마적도사는 눈먼 용 한 마리를 남겨 놓고 여덟 마리 모두 쫓아 버렸다. 

 

좌측 엄천 건너로 보이는 법화산 조망

 

 

 

좌측으로 계속해서 황톳물이 그득 흐르는 '엄천강'을 내려다보며 진행하다가, 

 

길 가의 뽕나무에서 잘 익은 오디를 따서 입에 넣으며 그 달콤함에 젖어보기도 하며, 

 

멀리서도 우뢰와 같이 들려오는 엄천강의 꾸짖음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이에, 

 

우측의 '커피 무료'라는 곳에 들리자는 제안도 흘려들으며 임천 건너편 문하마을로 나갈 수 있는 송문교를 지난다. 

 

 

 

커다란 공깃돌 모양의 글자없는 표석을 지나, 

 

좌측 아래의 '지리산 청정 낙원'이란 떨어져 나간 간판을 보고 '뭣 하는 곳일까?' 궁금하여 내려가 보았더니, 

 

예전에 사슴요리 전문음식점이었다가 폐점한 상태인 건물 앞마당에서 보니,

엄천을 그득 메우며 흐르는 황톳물이 장관을 이루고, 

 

좌측 아래의 농원과 민박집으로 이어진 갈림길을 연이어 지나니, 

 

집채만 한 암반 옆으로 지나게 되고, 

 

이내 지리산 와불산/상내봉(1.213m)에서 내려오는 지계곡을 건너는 운서제1교를 지나 좌측으로 휘어져 나가니, 

 

커다란 물탱크와 정자가 있는 지능선 고갯마루의 운서마을 쉼터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여장을 정비하며 쉼을 한다. 

우측 능선 방향은 적조암과 와불산 방향

 

<운서(雲西) 마을>
송문교에서 와룡대와 소나무를 바라보며 달달한 무료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운서마을로 향하는 길. 엄천강 가운데 조선시대 세종의 아들인 한남군이 유배와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 ‘새우섬’이 보인다. 운서마을은 휴천면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좁은 마을로, 마을 전체 면적의 1/3 이상이 지리산국립공원 구역 내에 있으며, 대부분이 산악지역이라 이곳에서 자생하여 채취되는 두릅순, 옻순 등의 산채류들은 살이 찌고 부드러워 맛과 향이 일품이라고 한다. 이곳은 옛날 엄천사 산하의 암자들이 많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마을 숲이 정겨운데 옛날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 유람을 할 때 이곳을 지나 중봉, 천왕봉으로 갔다고 한다. 구름도 쉬어갈 고즈넉한 운서마을 쉼터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 새우섬 : 한남대군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건너에 한남마을이 있으며, 숲이 잘 보존되어 있다. 
▶ 구시락재 : ​운서마을에서 동강마을로 가는 고갯길. 옛날 김종직이 지리산 유람을 할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 운서마을​ : 귀농인들이 마을 주민과 잘 어울려 사는 지리산 자락의 귀농마을.

 

 

 

 

비에 젖은 도로를 따라 운서마을 입구를 지나, 

낙과만을 기다리고 있는 잘 익은 매실

 

구시락재를 향해 다락논 사이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오르니, 

 

좌측으로 모내기가 끝난 다락논이 옛 정취를 떠올리게 하고, 

좌측 지나온 운서마을 방향

 

이내 운서마을을 뒤로하고 동강마을로 들어서는 구시락재/구슬박재를 지나게 된다. 

 

< 구시락재>

구시락재는 조선 초 성종 때 유학자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을 오르고 쓴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나오는 옛길이다. 즉 동강마을에서 이곳 구시락재를 넘고 운서마을을 지나 천왕봉으로 올랐다고 적고 있다.

 

이번에는 또 뭘 드시나 봤더니...?
약간 세콤한 맛이 더해진 보리수 열매다.

 

 

 

구시락재를 넘자 바로 아래 동강마을 건너 편의 휴천면 남호리의 원기마을과 동호마을이 멋지게 조망되고, 

나그네의 손길을 기다리는 검게 익은 오디

 

동강마을을 굽어보며 서 있는 600년 수령의 팽나무 당산나무를 지나 내려가면, 

 

지리산둘레길 4코스의 종점이자 5코스의 시작지점인 동강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동강(桐江) 마을>
구시락재를 넘으면 동강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엄천강이 펼쳐진다. 동강마을은 평촌, 점촌, 기암(개암터) 3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고종 때에는 엄천면으로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휴천면에 속하게 되었다. 평촌에는 엄천면사무소가 있었고, 점촌은 토기와 철기를 만들어내던 곳이다. 동강마을에는 짚신을 만들 때 사용하던 틀을 닮았다는 ‘신틀바위’가 있다. 맑은 내가 흐르는 옆에 운치 있는 동강마을 당산쉼터가 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이곳을 ‘화암’이라 기록해 놓았는데, 뒷산의 산봉우리 모양이 연꽃을 닮아 옛날부터 ‘꽃봉산’이라 불리었다. 그 옛날 지리산산행기에 기록된 이곳 동강마을은 지리산둘레길 금계-동강구간과 동강-수철구간의 시종점이다.

 

동강마을 안내도
좌측 편 엄천교 방향의 예쁜 둘레길 화장실
지리산둘레길 5코스 출발점인 동강마을에 도착하는 백두들

 

 

 

지리산둘레길 5코스로 들어서며 도로에 들어찬 물을 건너는 작은 돌멩이 징검다리를 건너, 

 

마을 앞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좌전방으로 구름에 둘러진 왕산(925.6m)쯤이 멋지게 조망되고, 

 

우측 언덕의 동강마을 회관 앞 누각을 지나, 

 

모내기가 끝난 들판을 가로질러 나가면, 

 

오석의 방곡마을 방향 표석이 자리한 2차선의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우측 방곡마을 방향 도로를 따르게 되는데, 

 

우측 곡각지 수풀 속에는 '수석대(水石臺)'라는 표석이 있다. 

 

<수석대(水石臺, 신틀바위)>
동강마을과 자혜마을, 방곡마을 삼거리 갈림길 곡각지에 짚신을 만들 때 사용하던 틀과 모습이 닮았다는 신틀바위가 있는데, 그 앞에 '수석대'라는 표석이 있다.

 

방곡마을 방향 갈림길에  어지럽게 세워져 있는 각종 이정목과 표지판

 

 

 

임천강으로 흘러드는 좌측 오봉천과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좌측 '점촌마을 주민 희생 터' 방향 갈림길의 점촌마을 정류장을 지나, 

 

2022년 12월 31일 완공된 방곡저수지 제방 입구의 정자 쉼터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쉼을 한다. 

방곡저수지 전경

 

 

 

부슬비로 바뀌자 우장을 배낭에 갈무리한 백두들이 더욱 가벼워진 걸음으로 둘레길에 올라, 

좌측 방곡저수지 건너의 가야할 상사골과 쌍재 방향

 

차량들의 왕래조차 뜸한 도로를 따라 오르니, 

 

방곡마을 직전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정문에 도착하게 되는데, 

 

<방곡마을,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방곡마을은 지리산의 북동쪽 자락에 위치하여 대부분 산지이며 방곡천이 흐른다. 지형이 방안처럼 되었다 하여 방실 또는 방곡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산청군 금서면 방곡(芳谷)리가 되었다. 물 좋고 산 좋은 방곡마을 입구에는 2022년 방곡저수지가 생겼다. 저수지 맞은편 산자락에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있다. 한국전쟁 중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현대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1951년 지리산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이 시행되고, 산청의 가현, 방곡, 함양의 점촌, 엄천강 건너 서주마을 주민들 700여 명이 무참히 학살된다. 이후 진상조사를 국회에 제안하고 2001년 위령탑과 합동묘역을 조성하게 되었다. 지리산둘레길 곳곳에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민중들의 애환을 만난다. 청정산골 꽃다운 방곡마을에서 잠시 묵념을 올리고 간다.

 

'회양문(廻陽門)'이란 현판이 걸린 희생자 추모공원 정문

 

<거창 양민 학살사건과 산청·함양 학살사건>
거창과 산청·함양은 지형적으로 깊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는 오지로, 48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6.25전쟁 때까지 2년여에 걸쳐 낮에는 율원에 본부를 둔 경찰과 대동청년단의 등쌀에, 밤에는 거창에 인접한 산청군 오부면에 거점을 둔 남부군 김지회 부대의 빨치산에 의해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7월 하순부터 인민군이 거창군 신원면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인민군이 패퇴하여 철수한 10월 초부터는 의용 경찰대가 인민군 점령 시 인공 부역자를 잡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12월 초 다시 김지회 부대의 기습으로 빨치산 치하가 되었는데, 그다음 해에 당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예하 9연대(연대장 오익경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의 공비토벌 전담 부대(화랑 부대)가 지리산지구에 투입되었다.(이 외 13연대는 전북지구, 20연대는 전남지구를 담당)
2월 6일(정월 초하루) 저녁에 신원으로 들어왔지만 빨치산의 적정이 없자, 신원면 소재지인 과정리에 경찰대와 청년 방위대원 1개 중대만 남기고 3대대는 계속 소룡산을 넘어 산청군 오부면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보록산과 소룡산 등지에 숨어서 국군과 경찰의 동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던 빨치산들이 밤중에 과정리를 기습하여 면사무소와 경찰지서를 불태우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사라졌다. 이에 분개한 산청에 있던 오익경 대령은 3대대장 한동석에게 즉시 신원으로 돌아가 ‘견벽청야(堅壁淸野)’작전을 수행하라고 명령하였다.
‘견벽청야'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성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정리하여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이다. 이 ‘견벽청야 작전’ 부록에는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람은 전원 사살’, ‘공비(빨치산)의 근거지인 건물 전부 소각’,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 등의 3개항이었다.
11사단에 의해 토벌된 공비에 대한 공식 통계는 1950년 10월 7일부터 1953년 6월 30일까지 사살 2만 4,228명, 생포 3,690명이며, 이 수치에는 산청, 함양, 거창을 포함한 작전지역 내 각 지역의 무고한 주민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산청 가현마을 학살
1951년 2월 7일 11사단 9연대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의 2개 중대가 40여 가구가 사는 가현마을에 도착하여 주민 전원을 모은 후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 가 학살하였다. 희생당한 가현마을 주민은 어린이, 노인, 부녀자를 포함한 123명이었고, 시체더미에서 살아난 사람은 8명 정도였다.
○ 산청 방곡마을 학살
같은 날 오전 10시경, 현재 추모공원이 있는 이곳 방곡마을에 진주한 11사단 9연대 3대대의 또 다른 1개 중대는 주민들을 논바닥으로 내몰고 기관총으로 난사하여 212명을 학살한 뒤 7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 함양 점촌마을 학살
오후 1시 30분경 가현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른 1개 중대 병력이 함양 점촌마을에 도착한 군인들은 가현, 방곡에서처럼 귀중한 물건과 가축들을 빼낸 다음 주민들을 동네 우물가로 모이게 한 후 20여 호의 집을 다 태워버린 후 이유 물문하고 6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했다. 
○ 함양 서주마을 학살
1951년 2월 7일 아침 산청군 금서면 화계, 화산, 주상, 자혜마을과 함양군 유림면의 지곡, 손곡 등의 마을에 경찰, 향토방위 대원, 군인 등이 조를 짠 듯이 나타나서 모든 주민들을 강 건너 서주리로 모일 것을 통지했다. 오전 11시경 5개 마을 1천여 명 주민들이 서주 강변 둔치에 모이자 군경 가족을 선별해 낸 뒤, 젊은 장정 10여 명을 끌고 나와 서주리 엄천강 둔덕에 교실만 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주민 300여 명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수류탄, 박격포, 기관총을 난사해 310명을 처참하게 학살하였다. ​학살을 마친 3대대 병력은 숙영지인 함양군 생초면 생초 초등학교에서 학살한 마을에서 끌어온 가축을 잡아 작전 축하잔치를 벌였다.
○ 거창 청연골 학살
1951년 2월 8일 새벽 6시 ‘작명 제6호’에 따라 생초를 출발하여 오전리에 당도한 3대대는 2월 9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가옥을 방화하고 전 주민들을 눈이 쌓인 논들로 끌어내어 기관총 및 각종 총기로 무차별 난사하여 주민 84명이 목숨을 잃었다.
○ 거창 탄량골 학살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여 명이 학살되었으며 탄량골로 연행 중 도로변에서 2명이 학살당했다. 청연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3대대는 내동에서 소를 잡아먹고 날이 새자 병력을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로 이동시켰다. 3대대는 이동하면서 전 마을 가구에 불을 질렀으며 주민들을 끌어내어 신원초등학교로 몰아오던 중 와룡리, 대현리 주민 일부 노약자가 기력이 빠져 뒤에 처지자 길가 탄량골 골짜기에 끌고 가 무차별 학살했다. 
○ 거창 박산골 학살
신원초등학교까지 끌려온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등 3개 리 주민 800여 명은 공포와 굶주림, 추위 등으로 실신상태에서 24시간 감금되었는데 군경 가족 나오라 할 적에 젊은 층이 나오다 출구에서 지서 주임, 면장, 군경의 총대에 맞아 그 자리에서 실신하는 주민이 많았다.
학살 현장으로 가는 도중에도 군이 계속 총기를 난사해 도로변에서 16명이 학살당했으며 2월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학살당했다. 희생자는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세 ~ 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이 60명(남자 327명, 여자 392명) 등 719명이었다.

대대적인 학살을 저지른 대대장 한동석은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처참한 시신 위에 마른나무와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웠으며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 현장에서 약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했다. 사단장 최덕신 등은 187명의 공비 및 통이 분자를 소탕했다는 전과 보고를 하는 등 학살 사실을 은폐하였다.
이 은폐 조작 사실은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신중목(愼重穆, 2대 국회의원 및 7대 농림부 장관 역임) 국회의원에 의해 국회에 폭로되어, 동월 국회와 내무·법무·국방부의 합동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1951년 4월 합동 진상 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오던 중,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 민사 부장 김종원 대령이 신성모 국방 장관과 사전에 모의하여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의 수색 소대로 하여금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의 길목인 수영더미재(숭더미재)에서 합동 진상조사단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하였다.  ​
그러나 7월 27일 사건 발생 5개월여 만에 이 사건이 기소되어, 같은 해 12월 대구 고등군법회의(재판장 강영훈 준장)에 회부된 9연대장 오익경 대령과 3대대장 한동석 소령, 계엄 민사 부장 김종원 징역 3년에서 무기의 형이 확정 선고되었다. 
그러나 사단장 최덕신은 기소조차 안 되었고 오익경, 한동석도 1년이 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최덕신은 대사에 임명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으며 김종원은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석방된 후 전북경찰국장으로 복권되었다. 
제4대 국회 제35회 임시 회의 '산청·함양·거창사건 진상 보고서, 박상길 외 2인'에 따르면 산청, 함양, 거창에서 총 1,818명이 학살된 것으로 드러난다.  
산청·함양사건은' 산청·함양·거창사건’이라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이미 널리 알려진 '거창사건'(거창 신원면 학살 사건)은 산청·함양사건의 마지막 날에 발생한 사건이다. 즉 7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가현(123명), 방곡(212명), 점촌(62명), 서주리(310명) 주민 학살이 두 나절 만에 끝났고, 9일부터 11일 사이에 거창 청연골(84명), 탄량골(102명), 박산골(517명) 등 총 719명의 학살로 이어져 닷새 만에 마무리되었다.
이후 1987년 민주화의 거센 바람이 불어 신원면 사람들도 다시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이후 1996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 조치법’이 제정되고 그로 인해  ‘거창 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한 작전 아래 한 부대가 저지른 일인데도, 거창사건만 두드러진 까닭은 당시 거창의 신중목 의원이 국회 차원의 조사 발의를 한 데 반해 산청 쪽 이병홍 의원은 병중이어서 발의 단계에서 빠지게 된 데다, 생존자·유족들이 극소수였고, 진상을 거론할 분위기도 아니었던 탓이었다. ‘거창사건’으로 축소·은폐되는데, 그조차 숨기려고 국회 조사단의 조사를 방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고, 같은 해 7월 대구 고등군법회의 심문에서 산청·함양 학살도 잠깐 거론되었으나 정치적 재판으로 끝나게 되었다. 4·19 뒤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있었지만 5·16으로 주저앉았고, 9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인 신원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53년 방곡 지구 유족 몇몇이 ‘동심계’를 두어 곡우 때 숨어 제사를 지내 오다가, 89년에야 유족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산청 ·함양사건 희생자 위령탑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위령탑>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위령탑은 6.25 전란 중이던 1951년 2월 7일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견벽청야라는 작전명에 따라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 등에서 양민 705명이 희생되었던 바, 이때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한 위령탑이다. 
합동묘역 조성과 위령탑 건립은 1996년 1월 5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 조치법 공포와 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 심의위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2001년 12월 13일 합동묘역 조성 사업 착공 이후 4년에 걸친 공사 진행으로 준공에 이른 것이다. 
이 묘역과 위령탑은 어떤 경우에도 국민은 하늘과 같고, 역사는 정의의 편에 있으며, 인명은 절대의 가치가 있음을 확인하면서 희생된 영령들이 우리 후손에게 남겨 주고 있는 진정한 자유와 번영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추모공원 정문을 지나며 방곡마을 표석이 있는 갈림길에서 둘레길은 좌측 계곡 쪽으로 이어진다. 

오늘 5구간을 시작으로 앞으로 6, 7, 8, 9구간이 산청을 통과하는 구간
공개방위/독바위/함양독바위 등산로 안내판

 

 

 

방곡 둘레길체험마을 민박 우측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지리 동부능선의 왕등 능선과 오봉 계곡에서 흘러내린 오봉천을 건너는 방곡1교를 건너며 바로 좌틀하여, 

 

방곡저수지 둘레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산딸기 따먹기에 열중하는 백두들
좌측 방곡저수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상사골계곡을 건너는 교량 직전 갈림길에서 따르던 저수지 둘레길을 두고 우측 상사골로 들어서면, 

따먹고 또 따먹어도, 보면 또 따먹고 싶은 산딸기

 

지리산둘레길은 왕산에서 발원하여 오봉천으로 흘러내리는 상사골을 따라 이어진다.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청아한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계곡길을 거슬러 오르니, 

 

빛바랜 이정표가 있는 좌측 상사폭포 갈림길이 나오는데, 

상사폭포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불안한 마음으로 좌측 상사폭포 방향으로 들어서서, 

 

30여 미터쯤의 계곡 옆 바윗길을 따라 들어가니, 

 
제법 큰 물줄기가 여러 단의 바위를 타고 떨어져 내리는 상사폭포에 도착하게 되는데, 

상사폭포의 높이가 20m쯤이고, 바로 옆에는 높이가 50m쯤 되는 상사바위가 있다. 

 

<상사폭포>
방곡에서 저수지를 건너 상사폭포까지 2km의 숲길은 계곡을 따라 온갖 야생화들과 바위를 타고 내리는 물줄기를 보며 걷는 즐거움을 준다. 상사폭포는 깎아지른 듯 아찔한 상사바위 때문인지 애절한 사랑에 관한 전설이 몇가지나 전해 오는 폭포이다. 모두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비만 오면 수량이 많아지는 폭포의 물줄기는 뱀이나 구렁이에 비유되었다. 더운 여름날엔 수량이 풍부해 시원스레 내려꽂히는 폭포수 아래 뛰어들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쌍재로 올라가는 길이 바쁘다면 발이라도 담갔다 가도 좋겠다.

 

상사폭포 전경

 

<상사폭포에 대한 전설>
상사폭포와 바위에는 세가지 정도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첫번째는 왕산 자락 마을에서 동네처녀를 짝사랑하던 총각이 상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죽어서도 그녀를 못 잊어 뱀으로 변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놀란 그녀가 손으로 내리쳐 뱀은 떨어져 죽었다. 그 후 여인은 상사폭포 바위로 변하고 총각은 계곡으로 변했다.
두번째는 총각이 처녀를 짝사랑했는데 이 처녀가 이웃으로 시집간다는 소식을 듣고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나중에사 처녀가 이사실을 알게 되었고 처녀도 원래는 이 총각을 짝사랑했었다. 이 처녀가 상사바위에서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죽은 총각을 그리다가 뱀으로 변했다.
세번째는 동네총각을 짝사랑한 처녀가 구렁이로 변해서 총각을 칭칭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총각부모가 아무리 뱀을 떼어내려고 해도 되지 않자 결국 부모가 뱀과 아들을 상사폭포 벼랑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상사폭포를 지켜보는 바위절벽에 짐승들의 얼굴 형상이 있는듯 없는듯!

 

 

 

상사폭포 갈림길로 돌아나와, 

 

가파른 돌계단길을 올라, 

 

추락 방지용 가드 로프가 설치된 상사폭포 상부를 지나는데, 

 

상사폭포 건너편 숲 사이에 상사바위쯤이 보이고, 

 

상사폭포 상부의 계곡에 놓인 데크목 다리를 건너게 된다. 

 

 

 

벅수가 안내하는 초록이 뿜어져 나오는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좌측의 묵혀진 경작지 가장자리로 이어진 가드로프가 설치된 곳을 지나서, 

 

표지기들이 내걸린 산약초 제배지역 울타리를 따라 좌측으로 휘어져 오르면, 

 

'산약초 재배지역 출입금지' 안내판이 걸린 농장 옆을 지나, 

 

쌍재쉼터를 지나게 되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문이 닫혀 있고, 

 

이내 동의보감 둘레길이 지나는 임도에 올라서서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이정표에 쌍재까지 0.82km라 표시되어 있다. 

 

<동의보감 둘레길>
산청의 자연과 동의보감촌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걷는 17.7km의 둘레길로, 동의보감촌에서 하양마을을 지나 동의보감촌으로 다시 순환하는 코스다. 산청 한방의 중심지로 한의학박물관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허준마을, 한방자연휴양시설, 동의보감촌을 관광하며 걸을 수 있는 길로, 왕산과 필봉산을 아우르는 둘레길로 자기자신을 돌아보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다.

 

 

 

 'Y자' 갈림길에서 좌측 오름길로 진행하여 호젓한 포장 임도를 따르다가, 

 

임도 갈림길에 동의보감둘레길과 지리산둘레길이 나란히 표시된 쌍재 이정표를 지나 잠시 더 오르니, 

 

좌측 왕산과 우측 고동재 사이의 쌍재에 올라 직진의 동의보감둘레길을 두고 우측 고동재 방향 능선 숲길로 진행한다.

 

<쌍재>
쌍재는 예전 함양 휴천에서 산청 방면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갯마루였다. 함양 사람들이 곶감을 지고 쌍재를 넘어 산청 덕산장에 가서 팔았다고 한다. 쌍재 아래에 보부상들을 위한 제법 큰 쉼터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옛 주막터였던 터에는 지금도 쌍재쉼터가 있다. 쌍재는 마지막 가야왕이었던 구형왕(양왕)이 물러나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깃든 고개이기도 하다. 쌍재에서 바라보이는 왕산에는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타원형 돌무덤으로 전해지는 ‘전(傳) 구형왕릉’이 있다.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한국식 피라미드 무덤이다. 구형왕은 신라에 나라를 잃은 죄인이라 자신의 무덤을 돌로 만들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는 신비함이 있다. 또한 이곳은 고령토 산지로 유명했으며, 산기슭에 가마터가 산재해 있다.

 

쌍재 이정표와 지리산둘레길 이정목인 벅수

 

 

 

최근에 정비한 능선 등로를 따르다가, 

 

구름안개가 자욱한 숲속 벤치쉼터에서, 

 

두규형이 힘겹게 지고온 사과를 나누며 잠시 쉼을 한다. 

 

 

 

구름안개로 더욱 신비감을 더하는 능선숲길을 오르다가, 

 

방곡마을 방향 지능선 분기점에 올라서는 좌측 오름길 능선으로 들어서서, 

 

안개구름에 젖은 싱그러운 숲으로 덮인 능선숲길을 오르면, 

 

지리산둘레길 최고의 조망처 중 한곳이라는 산불감시초소봉(642m)에 도착하게 되는데, 

 

<산불감시초소봉 (642m) >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이곳은 막힘없는 멋진 조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왼쪽으로 산청읍 전체가 내려다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천왕봉, 중봉을 비롯한 지리산 동북부 능선들이 펼쳐진다. 산청읍 시가지를 기준으로 왼쪽은 왕산과 필봉산, 오른쪽은 웅석봉과 밤머리재이다. 현재는 초소 앞쪽으로 데크를 놓고 주변 산자락에 대한 알림판을 설치해 놓았다. 참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은방울꽃 군락지를 즐기며 가다 보면 고동재에 이른다.

 

뜨거운 해를 가리랬더니 시야까지 가려버린 구름으로, 

멋진 지리산 천왕봉과 산등성이 모습은 조망안내도로 대신할 수밖에 없어서 아쉬웁기 그지없다. 

남서쪽 천왕봉 방향 조망안내도
북동쪽 왕산과 필봉산 방향 조망안내도

 

 

 

운무가 가려버린 산봉우리는 참으로 쓰잘데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텅빈 산불감시초소를 뒤로하고,

 

운무가 들어차 있어서 더욱 좋은 능선 숲길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서다가,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삼각점이 있는 600.7봉에 올라 등로 우측 조망 바위로 나가 보지만 이곳도 구름안개가 시야를 가려 조망은 없다.

600.7봉 삼각점

 

안개낀 원시의 오솔길을 따라, 

 

산객이 찾지 않는 비오는 날에 유일하게 상대가 되어주는 벅수와 친구를 하며, 

 

'이제는 내림길만 남았다'는 의도치 않은 거짓말을 수차레 반복한 끝에 마침내 마지막 봉우리를 지나서 내려서니, 

 

최신 기종의 천하대장군과 지리산둘레길 벤치 그리고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는 고동재에 도착하게 된다. 

 

<고동재>
지리산 동부능선과 연결되어 있는 수철마을 서북쪽과 방곡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고동형으로 생겼다고 ‘고동재’라 이름 붙였다 한다. 앞쪽으로 왕산과 필봉산이 보인다. 신라군을 피해 피난 생활을 하던 구형왕의 군사가 망을 보다가 멀리 함양쪽 황매산에서 적군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왕에게 보고하자, 결국 다시 피난짐을 꾸렸다. 왕등재에서 내려와 고동재를 넘으며 고동을 불었고, 쌍재를 지나 왕산을 넘어 피난을 갔다. 다양한 전설과 역사가 숨어 있고, 철 따라 눈길을 사로잡는 야생화가 핀 숲길, 시원스레 펼쳐지는 능선과 가슴이 트이는 고개를 오르내리는 매력이 넘치는 길이다. 

 

고동재 우측 방곡리 방향
수철마을까지 3.8km라 표시한 천하대장군
수철리 방향

 

 

 

'이제 진짜로 내림길만 남았다'며 고동재를 뒤로하고, 

 

3.5km 거리의 수철리까지 이어진 신작로처럼 넓은 임도를 따라, 

 

구름이 해를 가려줘서 좋았는데 비까지 그쳐서 더욱 좋다는 얘기를 하며 꾸준히 내려가면, 

 

좌측의 고동재농원 쉼터를 지나는데,

앞서 가던 분들이 나뭇가지 하나를 부여잡고 모여있어서 자세히 보니, 

산딸기, 살구, 오디, 보리수 등에 이어 이제는 버찌까지 청정이라며...ㅉㅉ

 

 

 

버찌로 배를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더욱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숲속으로 이어진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길가에서 제피나무를 발견한 누군가가 제피와 산초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고, 

 

<산초와 제피>
가시가 마주보는 제피나무(초피나무)는 남부지방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다. 열매와 잎을 이용하는데 제피잎은 봄에 먹고, 열매는 늦여름에 뜯어 말린 후 가루내어 향신료로 사용한다. 제피 열매는 매운맛과 입이 얼얼한 정도로 톡 쏘는 맛, 강한 향이 특징으로 생선의 비린내를 잡아주고 다른 요리에 감칠맛을 더해 주는데, 소화를 돕는 데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제피 잎 또한 같은 맛을 내는데 연한 잎을 뜯어서 장아찌로 담아 먹으며 봄에 채취한다. 
반면 제피와 비슷한 식물로 모든 가시가 어긋나 있는 산초나무는 닮았지만 전혀 다른 나무이며 산초는 가을에 열매를 수확하여 기름을 짜서 먹는 용도로 활용된다. 제피보다 향이 약해 조미료로는 사용하지 않고, 요즘 산초기름은 너무 비싸서 보기 힘들어졌다.

 

가시가 마주보고 있는 제피나무

 

도로가 숲을 벗어나며 주변으로 펜션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앞쪽으로 5코스의 종착지인 수철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며, 

불루베리 나무일까?

 

삼거리 우측의 '국립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학술림' 건물을 지나는데, 

 

징역을 곤란하지만 벌금은 가능하다며 계곡 가의 보리수 열매가 익었는지를 검사해 보고, 

 

유렵의 어느 산촌마을 풍의 수철마을로 들어서서 잠시 더 내려가면, 

 

수철2교를 건너 지리산둘레길 5코스(동강~수철)의 종착지인 수철마을회관에 도착하여, 

 

<수철(水鐵) 마을>
수철마을은 옛날 무쇠로 솥이나 농기구를 만들던 철점이 있어서 무쇠점 또는 수철동이라 불리었으며, 가야왕국이 마지막으로 쇠를 구웠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자연마을로는 구가재, 죽전, 원동 등이 있다. 경호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철천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수철마을 주민들이 오염된 하천을 물고기가 노닐고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우리마을 도랑살리기 1호’ 마을이 되어 화제가 되었다. 동강-수철구간과 수철-성심원구간의 시종점이다.

 

수철마을회관 앞의 '회락정'이란 현판을 단 정자 우측 위로 6코스(수철~성심원)가 이어진다.

 

수철마을 표적에서 우중에도 지리산둘레길 4, 5코스를 연이어 걸어낸 기념인증을 남긴다. 

 

 

 

넓은 주차장 한켠에 마련된 에어건으로 가랑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즐산팀을 태우고 도착한 버스에 올라,   

 

반값 목욕탕을 찾아 단성복지문화회관 목욕탕을 찾았으나 내부 공사로 문을 닫은 상태라 경호강을 건너 내일 폐업을 예정하고 있다며 반값으로 입장케 해 준 경호탕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지난해 진양기맥 산행 때 찾았던 '타짜오리하우스 본점'에서, 

 

푸짐하고 흥겨운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어느새 구름에 가렸던 뜨거운 햇살도 이제는 괜찮다는 듯이 귀갓길에 오른다. 

 

 

지금은 그저 모두를 넉넉하게 품어주는 지리산에 알지못하는 무수한 애환이 서려있는데,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을 보며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에는 단호히 대처해야겠지만, 

인명의 절대 가치를 경시하지 않아야 함은 필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