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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땅끝기맥 05차(미왕재~제안고개) : 월출산의 진면목을 월각산과 별뫼산에서 본다 y

by 재희다 2016. 3. 24.

산 행 지 : 땅끝기맥 05차(미왕재~제안고개) 전남 영암군, 해남군, 강진군.

산 행 일 : 2016. 03. 12.(토)

산행코스 : 무위사 + 미왕재 ~ 도갑산(375m) ~ 월각산(456m) ~ 밤재 ~ 별뫼산 ~ 제안고개

              (산행거리 14.9km + 2.3km)

산행참가 : 22명.

 

<산행지도>


지난해 4월 땅끝기맥 4차(불티재~미왕재) 산행 이후, 대간남진과 한남정맥 산행을 이어오다가 이제 따뜻한 봄날을 맞아 다시금 땅끝기맥을 이어가기로 한다. 옛날 월출산 산행에서 천왕사지구에서 출발하여 능선을 따라 미왕재에서 도갑사로 하산하였고, 지난해 땅끝기맥 월출산구간 산행에서도 도갑재로 하산하였기에 이번 미왕재로의 어프로치는 조금 짧은 무위사를 들머리로 잡고 산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아무리 길이 잘 뚫려 있다고는 하나 서울에서 강진까지는 머~언 거리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선잠을 자다가 버스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굴곡진 도로로 들어선다는 느낌에 께어보니, 아직도 버스는 짙은 어둠을 뚫고 좁은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흔한 차량 불빛조차 뜸한 시골길을 달려 무위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무위사 주차장에서 산행 채비를 마치고,


무위사 천왕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한다.

 

<무위사(無爲寺)>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절 이름을 관음사라고 했고, 그 후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갈옥사(葛屋寺)로 바꿨으며,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대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명,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선사가 4창하고 비로소 절 이름을 무위사로 고쳤다는 내용이 『무위사 사적기』에 나온다. 이 사적기는 영조 15년(1739)에 당시 주지였던 극잠이 절을 보수하면서 쓴 것인데, 당시까지 전해 오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은 듯하여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우선 진평왕 39년에는 이 부근이 백제의 영토였고, 또 원효는 바로 그해에 겨우 태어났을 뿐이었다. 도선국사가 중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효공왕 9년(905)부터 선각대사가 주석했다는 것으로 보아 도선의 중창설도 의문시되고 있다. 도선국사는 동리산문에 속하며 선각대사는 가지산문에 속하는데, 사찰의 소속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바뀌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또 정종 원년은 선각대사 부도비가 세워진 해이고 선각대사가 죽은 지 이미 28년이 지난 때이므로 그 해에 그가 절을 중창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절 이름에 대해서도, 지금 절 안에 있는 선각대사 부도비의 제목에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적혀 있고 비문 속에도 신라 효공왕 9년(905)에 왕건이 선각대사를 무위갑사에 머물도록 청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그 이전부터 계속 무위사로 불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무위사는 무위갑사라는 이름으로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신라 말에 왕건과 가까웠던 선각대사가 머물던 기간에 사세를 키웠다. 조선시대 들어와 태종 7년(1407)에는 각지의 명찰을 골라 여러 고을의 자복(資福) 사찰로 지정하는 가운데 천태종 자복사의 하나로 꼽혔다. 이전에 선종 사찰이었던 무위사가 어느 때부터인가 천태종 절이 된 데는 고려 후기에 백련사에서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히 활동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화를 입지 않아서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한 도에서 으뜸이었다던 무위사는, 그 후 점차 퇴락하여 앞의 사적기가 써진 영조 15년(1739)에 이르면 미타전(지금의 극락보전)·천불전·시왕전만이 남았다. 일제시대에 극락전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 내어 벽화보존각에 따로 모신 것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펌)

 

우리가 일상 접하는 사찰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들이 얼마든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말해 주는 듯하다.

 

무위사 경내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계단으로 인도되어 올라가면,


한 점의 허세나 치장 그리고 허튼 구석 하나 없이 단정한 그 모습의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는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절 이름과 잘 맞아떨어지는 듯하다는 평이다.

(사진 펌)

 

 

미왕재 들머리는 극락보전 좌측 뒤편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퍼온 사진)

 

출입금지 표지판과 함께 대마무 목책을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대나무숲 사이로 뚜렷한 등로가 이어진다.

 


출입이 통제되기 전에는 많은 등산객이 다녔음을 짐작케 하는 표지판도 자주 눈에 띈다.

 


이곳 해발 510m 표지판까지는 그런대로 뚜렷한 등산로가 이어지지만,

 


이어지는 대나무 숲으로 들어서면 등로의 흔적은 희미해지며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얽혀 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대나무 숲을 빠져나왔는데, 뒤따르던 분들이 앞사람을 놓치고 숲속에서 '백~두'를 외친다. 지척임에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한참 만에야 겨우 후미도 대나무 숲을 벗어난다.

 

 

월출산 땅끝기맥 능선 위로 올라선다.

 

가야 할 땅끝기맥은 좌틀하여 진행해야 되지만, 지난번 하산 지점인 미왕재를 다녀오기로 하고 우틀하여 미왕재로향한다.

 


미왕재 출입금지 목책 앞에서 우리만의 인증을 남기고,

 


다시 무위사 갈림길로 돌아와 본격적인 땅끝기맥 산행을 시작한다.

 


잔설이 남아있는 500봉 내림길을 급하게 고도를 낮추어,

 


410봉 능선 암릉에 올라 돌아본 미왕재 방향으로 백두들의 랜턴 불빛이 땅끝기맥 능선을 가늠케 한다.

 


돌아본 월출산이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배경으로 그 형체를 선명히 드러내고,


우전방 주지봉 방향의 우측 불빛이 구림리(옛날 점심 맛나게 먹은 마을) 쯤이다.

 


돌아본 월출산 방향 하늘이 훤히 밝아오며 이제 희미하게나마 등로가 구분되고,

 


등로 좌전방으로는 성전저수지(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소재)와 월각산이 조망되며,


해 뜨는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키높이로 자란 조릿대가 빼곡한 도갑산 전위봉에 올라 잠시 쉼을 하고, 우틀하여 앞쪽의 도갑산으로 향한다.

 


도갑산(400.9m) 정상은 비교적 편평하지만 잡목들이 우거져 있고 아무런 표식이 없어서 그런지, 이곳이 도갑산이라 예기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오로지 운동에만 관심이 있다는 예기!

 


도갑산을 뒤로하여 도갑재를 향하는데, 좌측으로 월각산과 성전저수지 조망이 훤히 드러난다.


월각산 방향.


태양을 잉태한 동동남쪽 제암산 방향이 붉게 물들었다.

 


눈 덮힌 도갑재를 지나 다시 조그만 봉우리로 오르고,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는 사이에,

 


붉게 물들던 동쪽 하늘에서 일출이 시작된다.


당겨본 2016년 4월 12일의 태양.


좌측이 월출산 능선이다.

 


잡목이 빼곡한 근처의 봉우리에 비해 약간 높은 봉우리를 오르는데,


좌전방으로 월각산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돌아본 월출산 노적봉(좌)과 향로봉(우).


당겨본 향로봉 모습.

 


386봉쯤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갈림길 흔적이 있지만 몇 미터 옆에 있는 정상까지만 연결되어 있고,


동쪽 제암산 위로 이글거리는 태양이 자리하고 있다.

 


잡목 숲이 연속되는지라 마땅한 아침 식당을 찾지 못하고, 찬바람 잦아든 329봉 전위봉 오름길 능선 어디쯤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뜨듯할 듯이 보이는 된장국이 부러워~유!

 


서늘한 한기에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땅끝기맥 능선 잇기를 나서 329봉쯤을 지나고,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문필봉(좌측 암봉)과 주지봉이 조망된다.

 

<도선국사(道先國師)의 탄생 설화>

문필봉(文筆峰) 아래의 구림(鳩林)마을(영암군 군서면 소재)은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서려있는 마을로 몇 해 전 백두들이 월출산 산행을 마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맛난 점심을 먹었던 마을이다. 옛날 구림마을의 처녀가 성기동 통샘에서 빨래를 하던 중, 참외 하나가 떠내려오자 이것을 먹었는데 잉태하여 아기를 낳았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마을 숲속의 바위에다 아기를 갖다 버렸다. 며칠이 지난 후 그곳을 가보니 비둘기들이 아기를 감싸고 있어서 다시 집으로 데려와 키웠는데 그 아기가 후에 도선국사(道先國師)였다고 한다.


주지봉 갈림길이 있는 329봉을 향한다.

 


주지봉 갈림길인 T자 갈림길에서 우측이 주지봉 방향이고, 좌측이 땅끝기맥 월각산 방향이다.

 


주지봉 갈림길을 지나 306봉에 오르니 조망이 좋은 전망바위가 나온다.

돌아본 월출산 방향.


흑석산과 율치저수지 방향.


가야 할 월각산 방향.

 


고갯마루라는 느낌 보다는 359봉 직전 안부쯤으로 보이는데, 앞쪽 언덕 나뭇가지에 352봉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안부쯤로 보이는 편평한 고갯마루에서 잠시 쉼을 한다.

 


359봉을 올라서니 가야 할 월각산이 좌측으로 보인다.


359봉 내림길 묵묘에서 바라본 월출산.

 


묵동재를 지난다.

 

<묵동재(墨洞峙)>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죽동마을과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의 지명은 우측 아래에 있는 묵동리에서 따온 듯하다.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墨洞里)는 옛부터 먹을 만드는 곳이라 하여 묵동 혹은 먹뱅이라고 하였다. 혹은 마을 북쪽에 병풍처럼 산(매봉산)이 펼쳐져 있고, 옥녀가 글을 쓰려는데 붓과 벼루는 있는데 먹이 없어서 마을 이름을 먹뱅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1940년 경에 먹뱅이라는 명칭의 어감이 좋지 않아 명동(明洞)이라 개칭하였다가, 1950년 6.25 전쟁 때 마을이 모두 전소되자, 마을 이름을 바꿔서 재앙이 닥쳤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묵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월각산 전위봉쯤인 310봉 오름길은 가파르게 이어지고,

 

지나온 땅끝능선 위로 주지봉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야 할 월각산이 바로 좌측으로 보이고,


돌아본 주지봉과 문필봉, 그리고 좌측 월각산 사면 옆으로 월출산 노적봉도 보이며,


다시 한번 돌아본 땅끝능선 너머로 문필봉과 주지봉이 자리하고 있다.


월각산 갈림길 도착.

 

310봉을 지나 다시 급경사 오름길을 10여분을 치고 오르니 월각산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월각산은 이곳에서 300m 정도 좌측으로 벗어나 있어서, 일부는 배낭을 벗어 두고 월각산으로 향한다.

 

 

월각산 정상 도착.

 

<월각산(月角山, 456m)>

강진군 성전면과 영암군 학산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빼어난 산새에도 불구하고 월악산의 그늘에 가려 땅끝기맥꾼들만 들리는 산이다.


월각산 정상에서 바라본 월출산 능선.


당겨본 월출산 향로봉.

 

우측으로는 노적봉이, 좌측으로는 주지봉(朱芝峰:490.7m)과 문필봉(文筆峰)이 조망된다.

 

<주지봉(朱芝峰, 490.7m)과 문필봉(文筆峰)>

주지봉(朱芝峰)과 문필봉(文筆峰)은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동구림리와 학산면 용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 모양이 붓끝처럼 뾰쪽하여 주지봉(朱芝峰)이라 했으며, 주지봉 우측의 문필용은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관련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풍수에서는 화산(火山)인 첨봉을 학자와 연결하면 붓(筆)으로 보고, 무인으로 풀면 칼(劍)로 본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관봉, 필봉, 성제봉으로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나온 땅끝능선 너머로 영암군 서호면이 어렴풋이 조망된다.


서쪽 뫼봉(매봉산) 방향으로 묵동마을도 보인다.


월각산에서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각산 인증을 남긴다.


최근 백두와 함께 산행하는 전병철님.


서쪽 학서면 방향을 당겨 본다. 저기 산 너머로 영산강의 물줄기가 있을 터인데 구별이 쉽지 않다.


동남쪽 송월리 수암산 방향.

 

잠시 후에 가야 할 별뫼산(좌)과 흑석산(중앙 뒤쪽) 방향.

 


다시 월각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땅끝기맥을 이어간다.


돌아본 월각산.


송월제 저수지와 수암산 방향.


가야 할 땅끝능선과 대월리 420봉 방향.

 


382봉을 내려서는 손경익님.

 


돌아본 월출산.

 


대월마을 갈림길.

 

직진의 능선으로 가면 420봉을 거처 대월마을로 내려가게 되는데, 420봉에서의 조망이 매우 좋다고 한다. 언제가 한번 가봐야겠다고 다짐해 보며 우리는 땅끝능선 방향으로 직우틀하여 밤재로 향한다.

 


지나온 땅끝기맥 능선 방향으로 주지봉, 월각산, 월출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월각산 모습.


매봉산(좌)과 주지산(우) 방향.


가야 할 밤재 건너 별뫼산(좌)과 흑석산(우측 멀리) 조망.

 

잠시 후에 가게 될 별뫼산 조망.

 


307봉을 내려서는 손경익님.

 


월각산과 월출산이 이제 막 능선 너머로 몸을 숨기려 한다.


대월리로 이어진 능선의 420봉과 암릉.

 


이제 땅끝기맥 능선은 호젓한 야산으로 이어지며,

 


오늘 마지막으로 올라야 할 별뫼산이 성큼 다가오고,


땅끝기맥 등로는 편안히 밤재를 향해 이어지더니,

 


월출산국립공원 출입통제를 위한 대나무 방책이 나온다.


돌아본 대나무 방책.

 


이제 출입금지구역을 벗어났으니,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배낭을 뒤져 본다.


올망졸망한 땅끝기맥 봉우리들을 수없이 넘느라 피곤한 몸을 양지바른 묘지에서 편안히 쉬게 한 다음,

 


별뫼산을 향해 2번 국도가 지나는 밤재로 내려서는데,


밤재 너머 레미콘 공장 뒤쪽으로 올라야 할 별뫼산이 위압감을 준다.

 

 

2번 국도는 4차선의 넓은 도로이지만, 새로 난 남해고속도로 탓인지 차량통행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아 과속으로 달려오는 차량의 흐름을 파악한 후 도로를 그냥 건넌다. (달리 방법이 없음!)


무단횡단하는 백두들.

 

<밤재(栗峙, 100m)>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와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목포와 부산을 잇는 2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며, 고개 정상에는 주유소와 장승 2기가 고개를 지키고 있고 밤재 농장이 있다.

밤재와 관련된 옛 기록을 살펴보면 율치(栗峙), 율현(栗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율현은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율치로 기록되어 있고, 『호남지도(湖南地圖』에는 가학치(駕鶴峙) 동쪽의 고개로서 율치기록되어 있다. 또한 『1872년 지방지도』에는 율치,『해동지도(海東地圖』『해동 여지도(海東輿地圖)』에는 율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밤재로 내려서서 2번 국도를 횡단하려는 백두들.


도로를 건넌 후, (구)도로를 따라 좌측 성화대학 간판 쪽으로 오른다.


마지막 주자인 손경익님도 밤재를 건너 별뫼산을 향한다.

 


성화대학 간판을 지나 레미콘 공장과 골재 야적장 사이의 전봇대 옆으로 난 들머리로 들어서서 별뫼산을 향한다.


별뫼산 들머리로 올라서는 백두들.

 


레미콘 공장 절개지 사면을 따라 잠시 이동하며,


좌측의 레미콘 공장을 담아 본다.

 

 

우측 골재 무더기를 지나서 좌측 능선으로 접어들면,

 


잠시 후 송전탑이 나오고,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등로가 뚜렷하지 않아 암릉구간을 우회하는 등로를 찾는데 한참을 더듬어,


북사면이라 아직 잔설과 얼음이 남아있는 급경사 등로를 오른다.


우측으로 거대한 바위 절벽을 피해서,


바위를 덮고 있는 얼음을 통과하고,


바위절벽 위로 올라 서면,


지나온 능선들이 한눈에 보이고 지나온 밤재도 시원스레 내려다 보인다.


당겨본 월각산과 월출산.


잠시 전에 지났던 대월리 방향의 420봉과 암릉.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잡목이 우거진 암릉길을 조금 더 오르면,

 

이내 별뫼산 정상부에 서게 된다.

 

별뫼산 정상에서는 2번 국도와 남해고속도로 신설구간인 목포여수간고속도로가 나란히 조망되고, 뒤쪽 멀리로 주지산과 월출산 노적봉도 시원스레 조망된다.


서쪽 율치저수지 방향.


월출산 방향.


좌측으로는 성산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웅장한 암봉이 자리하고 있다.

 

 

성산봉 갈림길에서 걸음음 멈추고 잠시 조망을 즐긴다.

 

북한산의 인수봉이라 착각을 할 만큼 멋진 암봉이 나오는데 지명이 성산봉이다. 뒤쪽의 별뫼산은 순우리말로 성산(星山)과 같은 뜻인데 참으로 헛갈린다.


월출산 방향.


서쪽 목포 방향.


별뫼산(좌) 능선과 나란히 이어진 2번 국도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목포를 향하는 2번국도 방향.


성산봉을 배경으로.

 


별뫼산을 향해 성산봉 갈림길을 뒤로한다.

 

성산봉 뒤로 다산(茶山) 정약용의 숨결이 남아있는 수암산과 강진군 성전면이 한눈에 들어오고, 우측으로는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제안고개가 가늠된다.


가야 할 별뫼산 정상을 향한다.

 


잠시 오름길을 이어가면,

 


이내 별뫼산 정상에 도착한다.


별뫼산 정상에서 쉼을 하는 백두들.

 

<별뫼산(星山, 465m)>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성산’ 또는 별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조금 전에 지나온 전위봉(암봉)을 보고 지어진 이름 같다. 별뫼산은 성산봉을 머리, 별뫼산 정상을 왼쪽 다리 부분으로 여신이 머리를 늘어뜨리고 누워서 왼발을 오그리고 치부를 가리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곳 별뫼산 정상에서 직진으로 가면 흑석산으로 이어지는 흑석지맥으로 가는 길이고, 기맥길은 좌측으로 꺾어지는데 등로는 편안하게 이어진다. 이곳부터 우측은 오두재에서 같이해 온 영암군과 작별 하고 해남군으로 접어든다.

 

<흑석지맥(黑石枝脈)>

 

흑석지맥은 땅끝기맥 별뫼산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가학산, 흑석산, 두억산을 지나 소아산 대아산을 끝으로 영산강하구로 떨어지는 41.1km의 산줄기로, 목포 앞바다에서 영산기맥의 끝점과 마주 본다.

 

 

오를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라 그런지, 우렁찬 함성과 함께 별뫼산 인증을 남기고는,


제안고개를 향해 별뫼산을 뒤로한다.

 

별뫼산 내림길은 낙엽이 편안함을 더해 주는 숲길로 이어진다.

 


잠시 좌측 사면으로 접어드는가 싶더니,


좌측으로 지나온 별뫼산과 성산봉이 보인다.

 


편안하게 이어지던 능선길이 급우틀하며 13번 국도 방향으로 내려간다.

 


숲속 나뭇가지에 216봉이라는 팻말이 걸려있고,


낙엽 쌓인 등로 주변에는 푸른 동백나무가 이채롭다.

 


등로 한가운데에 삼각점이 나타나고,

 


우측 가족묘지가 있는 방향으로 13번 국도와 다음 구간 잇게 될 땅끝능선이 조망된다.

 


편안하게 이어지던 땅끝길은 13번 국도가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수레길을 만나 좌측으로 이어가고,

 


이내 13번 국도에 내려선다.


이곳에서도 무단횡단을 하고 싶지만, 중앙분리대도 있고 하여 좌측 250m 지점의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통과한다.

 


13번 국도를 건너 남쪽 해남 방향.


국도를 우회 통과하여 돌아오는 백두들 뒤로, 잠시 전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 섰던 420봉과 암릉이 보인다.

 


13번 국도를 뒤로하고 제안고개로 향한다.

 


잡목 숲을 지나니 아담한 가족묘지가 나오고,

 


이내 제안고개 날머리로 내려서게 된다.


제안고개 옆 공터는 벌써 초록으로 물들었고 봄꽃도 만발하다.

 


제안고개 도착.

 

<제안고개>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 제안마을과 해남군 계곡면 선진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13번 (구)국도가 지나가며 고개 좌측에는 조그만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JC에서 설치한 애향(愛鄕)탑에는 JC의 모토인 ‘祖國의 未來는 靑年의 責任’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고개의 지명은 성전면 월하리 제안마을에서 따온 듯하며, 해남군 계곡면 사람들은 선진고개라고 부른다 한다.


제안고개 애향탑에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제안고개 남쪽 계곡면 방향.


북쪽 성전면 방향 도로 너머로 수암산(424.1m)이 버티고 있다.

 


다음 구간 들머리를 확인 해 두고,

 


성전면 방향 삼거리에 주차한 버스로 이동하여,


버스에 오른다.


별뫼산 성산봉(좌)과 420봉(우)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진읍으로 이동하여 흙먼지를 털어내고,

 


병영면에 있는 설성식당으로 이동하여,


한정식 한상을 기다리는 백두들.


푸짐한 밥상을 받아,


산행의 피로를 푼다.


이런 식당이 서울에 있었으면, 대박!


월출산이 좋은 줄은 알았는데,

월출산을 보기 위해서는 월각산으로 가야 할 듯하다.

 

월출산 못지않은 월각산과 별뫼산의 훌륭한 조망은

멀리까지 찾아온 산꾼들의 수고에 아낌없는 보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