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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남금북 07차(모래재~구례고개) : 정맥길에 들른 반기문 UN사무총장 생가 z

by 재희다 2013. 4. 28.

산 행 지 : 한남금북정맥 07차(모래재~구례고개)

산 행 일 : 2013. 04. 27.(토)

산행코스 : 모래재~보광산~내동고개~보천고개~가정자~행치고개~큰산~삼실고개~돌고개~구례고개

(산행거리 21.31km)

산행참가 : 25명.


<산행코스>

 

 

 

모래재 보광관광농원 뒤쪽 한남금북정맥 능선 위로 밝은 달이 '산행 시작'을 제촉하는 듯하다.

버스가 보광농원 주차장이 아니라, 괴산 방향으로 200여 미터 진행하여 길가에 주차했다.

요즘들어 버스에서도 침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잘 수 있게 적응된 듯하다.

 

 

04:01 모래재에서 수암낙시터 방향으로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한다.

 

인적 없는 수암낙시터를 지나,

새로 난 34번 국도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좌틀하여 오르면,

 

 

보광산 들머리가 나타나고 보광산을 향해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보광사로 이어지는 임도에 내려섰다가,

 

 

보광산 정상을 향해 다시 우측 숲으로 들어간다.

 

 

백두들을 능선 숲길로 보내고 혼자 보광사를 확인하러 숲으로 들어가지 않고 임도를 잠시 따르면, 보광사가 나오고, 경내에서 '괴산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 안내판'을 만난다.

 

<보광사>

보광사는 보광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고려 28대 충혜왕 1년에 창건되어 조선 현종 때 폐사된 옛 봉학사 터 아래에 건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청북도지에 의하면 1925년 폐사지에 권봉주 스님이 초막을 세우고 김봉삼 스님이 1936년부터 폐사지에 있던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을 아래쪽에 새로 지은 대웅전에 봉안해 주존불로 모시면서 보광사로 건립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1967년 사찰 위쪽에 있는 봉학사지를 발굴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봉학사지 5층 석탑 2층 옥개석 사리공에서 조선 세조 때 탑을 보수한 기록문이 나왔다고 하며, 폐사지에서 수습한 암막새에 음각된 당초문이 고려 중기 이후인 것으로 밝혀져 봉학사의 창건과 중수 연대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보광사는 크게 대웅전, 삼성각, 요사건물로 이뤄진 작은 가람으로, 이곳에는 구례 손씨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대웅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은 본래 봉학사의 법당에 있었는데, 조선 현종 때 충청도 관찰사였던 김손의 자손들이 이 절터가 풍수지리설에서 금계포란형의 명당자리로 소문났기 때문에 김손의 묘(보광산 갈림길 아래에 있다)를 법당자리에 쓰면서, 불상을 근처에 파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 스님이 찾아와 명당을 더 복되게 하려면 계곡 아래 물을 막아 복이 새나가는 것을 막으라고 일러 주었고, 자손들이 그 말대로 하자 집안이 망했다. 금계포란형은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인데, 물이 흐르지 못하여 알이 썩는 바람에 집안이 망했다는 것이다. 그 뒤 19세기 중엽 보광산 아래 하도마을에 사는 손씨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서 옛날에 파묻은 불상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이제 때가 됐으니 보광사 남쪽 언덕에 있는 땅속에서 불상을 파내어 봉안하라’고 했다. 이에 손 씨는 마을사람들과 산에 올라가 불상을 파내고 봉안했는데, 그 후로 손씨 집안은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보광사 산신각 건물.

 

남서쪽 방향으로 증평읍의 야경 불빛이 달빛에 눌려 있다.

 

 

경내에서 보광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찾지 못해 난감해 할 때, 여성 신도 한분이 등로의 위치를 알려주어 보광산 정상으로 향하는 들머리로 들어선다.

 

 

등로를 따라 잠시 오르니, '괴산 봉학사지 5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괴산 봉학사지 5층석탑>

이 탑은 보광사 뒤편의 옛 절터에 남아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도며, 4매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가 없어진 채 탑 몸돌 부분이 올라가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초층을 제외하고 2층부터는 탑 몸돌과 지붕돌이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966년 2층 지붕돌의 사리공에서 청동사리함과 청동불상이 발견되었는데, 불상에서 '봉학산 봉학사'라는 시주문이 발견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보광산의 옛 이름은 봉학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서, 보광산 정상을 향하는 등로를 만나 좌측으로 진행한다.

 

 

능선길을 잠시 따르니, 이내 정맥길인 고리티재 방향과 보광산 방향의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5분 거리의 보광산 정상을 다녀오기로 한다.

 

 

보광산 정상.

 

<보광산(寶光山, 539m)>

충북 괴산군 시리면에 있으며, 원래 이름은 봉학산이었다가 조선 중기부터 보광산이라고 불렀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봉학사 터가 있고, 그 아래에 최근 세워진 보광사가 자리하고 있다.

 

보광산 정상 증명을 남기고,

 

 

보광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고리티재로 향한다.

 

 

고리티재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편안한 둘레길 수준으로, 등로에는 진달래가 만개하여 산객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소암 갈림길.

능선 우측 아래쪽에 괴산군 소수면 소암리가 있다.

 

<소암리>

소암리는 본래 괴산군 북상면 지역으로 소바우가 있어서 소바우 또는 소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소암리라 해서 소수면에 편입되었으며, 좌측으로는 사리면 둔터골이 자리하고 있다.

 

 

삼각점이 있는 395봉을 지나니,

 

충청북도의 땅 모양을 흔히 초승달 모양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곳 괴산은 그 초승달 모양의 중앙부에 속하며, 괴산군의 왼쪽은 한남금북정맥이 지나가고, 우측은 경북 상주와 문경을 경계로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간다.

 

 

이내 고리티재에 도착한다.

 

<고리티고개>

충북 괴산군 사리면 소암리와 소매리를 잇는 고개로, 차량이 다닐 정도의 널찍한 임도가 지난다. 도로를 건너니 고리티 고개라 적힌 하얀 합판이 걸려있고, 정맥꾼들의 흔적도 보인다. 원래는 이곳은 고리티 고개가 아니고, 약 5분 정도 더 가면 성황당 흔적이 있는(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 돌무덤이 있는 안부가 고리티고개라고 한다. 고리티고개는 고마리, 명덕, 소바우 사람들이 증평장을 보기위해 넘나들던 고개였으며, 천주교 내외국 신부, 선교사들이 몰래 넘나들며 포교를 하던 주요 길목이었다고 한다.

 

고리티고개 이정표.

 

정맥길은 임도를 건너 바로 숲으로 이어진다.

 

 

성황당 흔적이 있는 진짜 고리티재 일듯한 안부를 지나니 숲길을 따르니,

 

 

우측 아래로 소암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등로 주변에는 진달래가 유난히 많이 피어 있다.

'진달래'란 시로 유명한 김소월이 생을 마감한 곳이 충북이라는데, 그래서 이리도 많이 피었을까!

 

 

높낮이가 거의 없는 편탄한 능선길을 편안히 진행하면,

 

 

백마산 갈림길에 도착한다.

 

<백마산 갈림길>

여기서부터 음성군에 들어섰는데, 잠시 더 괴산군의 경계와 함께 간다. 백마산(465m)은 이곳 갈림길에서 30여분 거리에 있는데, 산세가 이름다워 소금강이라 불려진다.

백마산 중턱에는 백마굴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백마굴에서 백마가 나왔다고 해서 백마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산의 서쪽 5㎞ 정도 떨어진 곳에 백마령이 있는데, 백마령은 예로부터 교통로의 몫을 해 왔으며, 현재는 충북선 철도와 청주∼충주 간 국도가 지난다.

 

 

아침 일출이 시작된다.

 

 

당겨본 일출.

 

 

 

내동고개쯤으로 보이는 임도를 지난다.

 

<내동고개>

백마산 기슭에 있는 주봉리 안쪽 골짜기에 있다 하여 내동 또는 안골이라 하며, 내동고개로 칭한 듯하다. 내동에서 괴산군 소수면 소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장자밭고개(내동고개)라 한 것으로 미루어 짐직한다.

 

임도를 건너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주변의 갖가지 나무들이 모두 다투어 꽃을 피우고 있다.

 

 

삼각점이 있는 445봉도 지나고,

 

 

보천고개 직전 봉우리에서 목을 축이며 잠시 쉼을 한다.

 

 

 

보천고개를 향해 급하게 고도를 낮추니,

 

 

좌측으로 백마산이 조망된다.

 

<백마산(465m)>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주봉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주봉리와 괴산군 사리면과의 군계를 이루고 있는 명산이다. 고문헌에는 음성군 남쪽 20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계절 경치가 아름다워 소금강이라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백마산의 산 중턱에는 백마굴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백마굴에서 백마가 나왔다고 해서 산의 이름이 백마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산 정상 부근에는 암석군이 있는데, 모양에 따라 상촉암·관모암·장수암·군반암·상좌바위·범바위·매바위·쌍동바위 등으로 불리며, 백마산 서쪽 5㎞ 지점에 백마령(240m)이 있어서 청주~충주 간 국도 36호선과 충북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다. 백마령은 충청북도를 북부와 남부로 양분하는 경계선이 되기도 한다.

 

보천고개 직전 좌측으로 보이는 소수면 옥현리 마을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옥현리 마을은 토옥동, 수저동, 석현동을 병합하여 토옥과 석현의 이름을 따서 옥현이라 하고 소수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토옥마을은 옥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땅이 기름지고 골이 깊어서 옛날부터 부자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발길을 잡는 꽃들의 연출이 이채롭다.

 

 

보호수가 지키고 서 있는 보천고개를 지난다.

 

<보천고개(230m)>

음성군 원남면과 괴산군 소수면을 잇는 515번 지방도가 지나는 보천고개는 토골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개 마루에는 괴산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수령이 450년이나 되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보호수인 느티나무 모습.

 

보천고개 서쪽 원남면 방향.

 

보천고개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돌아본 보천고개.

 

 

동쪽 소수면 옥현리 방향 조망.

 

 

어지럽던 등로가 능선마루가 가까워 지며 정비해 놓은 듯하고,

 

 

주능선 직전 가족묘터에서 모처럼 느긋한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도 먹었고, 정맥길도 유순하고 서둘러 속도를 내 볼까!

 

 

오대산 갈림길이 있는 주능선에서 직좌틀하여 행치고개로 향한다.

오대산은 우측으로 7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한남금북정맥길은 연초록 입사귀들과 연분홍 진달래로 장식도 있다.

 

 

좌측으로 음성읍이 아침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378봉도 여느 봉우리와 다르지 않게 표지판이 걸려 있다.

 

 

 

좌측 백마산 방향.

 

 

이번 구간에서 보기 드물게 급경사 내림길이 잠시 이어지더니,

 

 

옛고개 흔적이 있는 안부를 지난다.

 

 

이후 오르내림이 생기기 시작하지만, 조그만 언덕 수준의 업다운이다.

 

 

우전방으로 건설되고 있는 원남산업단지가 조망된다.

 

시멘트 포장 농로가 지나는 이름 모를 고개를 가로지르고,

 

 

능선이 뚜렷하지 않아 등로가 희미한 곳이 자주 나타나며,

 

좌축 주봉리 마을 건너편으로 백마산이 지척이다.

 

백마산의 원래 이름은 지봉산(芝峰山) 또는 소마산(小馬山)이라 불리었다 한다. 조선 인조(1623~1649) 때 백마 한마리가 나타나 덕정리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전답의 곡식을 마구 뜯어먹자, 이곳 마을 사람들이 말을 붙잡아 보니 백마가 어찌나 사나운지 당할 도리가 없어 덕정리 꽃절의 석굴 속에 가두고 굴 앞을 막아 놓았는데, 백마는 배가 고파 있는 힘을 다해 쌓아 놓은 돌담을 차고 석굴 밖으로 뛰어나와 지봉산에서 숨어 살다가 노쇠하여 비봉산 남쪽 지금의 사리면 소매리 어은동 뒷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소매동 사람들은 죽은 백마를 묻어 주고 지금도 '말무덤'이라 부르고 있으며, 날이 가물면 말무덤에 맑은 물 한말을 길어다가 제사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후 지봉산에 살다 죽은 백마 때문에 백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정재 삼거리로 내려서는 백두들.

 

 

가정재 삼거리를 가로질러 건너편 언덕으로 오른다.

 

<가정재>

주봉리의 바랑골과 상노리를 잇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옛날 갓나무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가정재'라고 불린다고 한다.

 

돌아본 가정재.

 

 

이내 언덕을 넘어,

 

시멘트 포장도로를 지나 앞쪽 가족묘지 좌측을 따라 언덕으로 오른다.

 

 

남쪽 원남면 방향으로 백마산(좌)과 종지봉(우)이 보인다.

 

벌목지역을 지나고,

 

 

옛 고개도 지나니,

 

 

앞쪽으로 윗행치마을(반기문 생가)과 뒤쪽으로 큰산(보덕산)이 나타난다.

 

당겨본 반기문 평화랜드.

 

 

행치고개로 이어지는 임도로 내려서서,

 

달성석재 공장 입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행치고개로 내려간다.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내려오면,

 

 

행치고개에 도착한다.

 

<행치고개>

음성과 청주를 잇는 36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으로, 예전에 이곳의 서낭당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서 행치(杏峙)라고 했으며, 행치고개라고 불렸다고 한다. 음성 원남의 한 고개를 두고 한금령, 백마령, 행치재 등 3가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한금령은 그 고개에서 한강과 금강물이 갈라진다는 뜻에서, 백마령은 인근에 백마 조형물이 세워진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의 공식 지명은 '행치재'다.

반석평 후손들은 과거부터 내려온 지명에서 이름을 따 자신들을 '장절공 행치파'라고 불러왔다. 장절공은 반석평의 시호로, 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그의 직손이 된다.

 

4차선의 36번 국도를 지하도로 통과한다.

 

행치재에 설치된 반기분 생가 '반기문 비채길' 이정표.

 

석재공장 가장자리에 '행치마을'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지하차도를 통과하여 나오자, 반기문 총장의 생가가 있는 광주 반씨 집성촌 마을이 나타난다.

 

<광주 반씨 씨족마을인 윗행치마을>

이곳은 반기문 UN사무총장을 배출한 곳으로, 현재는 광주 반씨 14가구가 살고 있는 호젓한 시골마을이다. 조선시대 팔도감사(관찰사)를 다 역임하고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역임하는 등 조선 전기에 행정의 달인이라 불렸던 반석평(1472~1540)이 이곳 출신이다. 그러니 반기문 총장의 선대가 되는 셈이다. 반석평은 '서얼'(庶孼) 출신이면서 양반과 상놈을 엄청나게 따지는 조선시대에 성공한 대표적인 분이다.

 

<'서얼'(庶孼)>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을 '서얼'(庶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와 '얼'에는 구별이 있다. 서자는 양반 아버지와 평민 어머니 사이에서, 얼자는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 난 자식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서얼을 차별하지 않았으나 주자학을 수용한 조선은 달랐다. 서얼은 가정에서도 천하게 여겨졌고 관직에 등용되기도 어려웠다.

 

돌아본 행치재와 지하차도 전경.

 

 

직진 방향의 도로를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행치마을 유래비도 보이고,

 

보덕정이란 정자도 지난다.

 

행치(杏峙)마을은 삼신(天.地.明)이 보덕산에 놀러 왔다가 만발한 살구꽃에 반해 머물러 살게 되었고, 이후 삼신의 보살핌으로 이 마을에 큰 인물 3명이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왔으며, 그리하여 세계적인 인물 반기문 UN사무총장이 태어났다고 한다.

 

 

반기문 생가에 잠시 들러,

 

옛날 시골집의 정취도 느껴 보고,

 

 

반기문 생가와 큰산을 배경으로 인증을 남긴다.

 

 

반기문 비채길 안내도.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큰산(보덕산)을 향한다.

 

광주반씨 장절공파 후손이 쓴 찬양시.

 

 

마을 뒤쪽 갈림길에서 물탱크가 있는 왼쪽 길로 들어서고,

 

물탱크 뒤쪽으로 돌아가면 큰산 들머리가 나온다.

 

 

들머리의 이정표에서 큰산(보덕산) 정상으로 향한다.

 

돌아본 행치마을.

 

화려한 이정표가 음성군에서 관광지를 만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등로는 이정표와 쉼터 등이 잘 갖춰져 있고,

 

곳곳에 안내판도 설치해 놓았다.

 

제작 비용이 꾀나 들었을 텐데..ㅉ

 

 

우측 반기문 평화랜드에서 올라오는 등로가 합쳐지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큰산(보덕산) 정상부에 도착하니,

오늘도 손총무님은 부족한 운동량 채우기에 열중하고 있다.

 

 

큰산(보덕산) 정상.

 

 

돌아본 행치재 너머로 지나온 한남금북정맥이 가늠되고, 중앙 뒤편으로 뾰족한 백마산도 가늠된다.

 

 

큰산 정상에는 전망데크와 팔각정이 설치되어 있고, 서북쪽으로 가야 할 한남금북정맥이 뚜렷하다.

 

보덕산 안내판과 팔각정.

 

<큰산/보덕산(509m)>

음성군 원남면 보룡리, 하당리, 덕정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일명 보덕산이라고 한다. 큰산의 서남쪽으로 꽃절이 있으며 바위가 움푹 파여 10여 평이나 되는데, 특이하게 바위 아래에 불상이 있으며 꽃절 바위에서 나오는 약수가 유명하다. 등산을 하다 보면 임도가 잘 닦여 있어 등산하기가 매우 편리하며 천연림이 울창하게 생육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페러글라이딩 출발 장소가 조성되어 있어 많은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다.

한남금북정맥에는 시루산, 국사봉, 구봉산 등등 높은 산들이 즐비하지만, '큰산'은 보은, 청주, 청원, 괴산을 거쳐 오며 점점 고도를 낮춰가던 한남금북정맥이 음성지방에 들어서며 다시한번 불끈 솟아오르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산의 높이가 낮아지며 평야가 넓어지는 곳에 우뚝 솟아올라 주변을 호령하니 비록 작은 산이지만 큰 산으로서의 역할과 명성을 얻게 되었던 모양이다.

 

남쪽 종지봉 방향.

 

 

정상 팔각정에서는 배낭털이와 분칠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큰산 정상에서 쉬고 있는 백두들.

 

신발 벗고 올라오랬는데, 신발 신고 올라갔으니 괜찮을까..ㅋㅋ

 

큰산 정상과 팔각정 전경.

 

 

큰산을 뒤로하고 임도를 따라 돌고개로 향한다.

 

 

임도에서 숲으로, 다시 임도로 내려섰다가,

 

 

임도삼거리를 가로질러 건너편 언덕으로 오른다.

 

임도삼거리의 안내판.

 

 

잠시 언덕길을 오르니, 나뭇가지에 517봉 표지가 걸려있는 봉우리가 나오고,

 

517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517봉을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잠시 후 지날 음성읍 초전리 풋내고개 도로가 그린 듯 선명하다.

 

당겨본 초전리 풋내고개 뒤로 부용산이 멀리 조망된다.

 

 

우측으로 하당저수지도 모습을 드러내고,

 

 

벌목지대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지던 한남금북정맥길은,

 

 

삼실고개(밤나무재)로 내려서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정면의 가족묘지 능선으로 오르게 된다.

 

<삼실고개(밤나무재)>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와 초전리를 잇는 고개로 1차선 포장도로가 나 있다. 이곳은 밤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밤나무재라고도 부르며, 길가에는 밤나무 체험농장과 복분자를 파는 농장이 있다. 이 건물을 끼고 우측으로 오른다.

 

삼실고개 날머리에서 좌측으로 20여 미터 이동하여 반대편 농막 앞으로 난 도로를 따라 오른다.

 

복분자 체험농장을 끼고 임도를 따라 오른다.

 

 

임도 끝지점에서 가족묘지 능선으로 올라, 능선 마루에서 직좌틀하여 진행한다.

 

 

가족묘지에서 삼실고개와 큰산 방향을 돌아보며 배낭털이를 한다.

 

 

능선 좌측으로 지름길을 택한 이들은 벌써 능선 좌측 풋내고개에 도착한다.

 

 

음성군 초전리와 신성리를 잇는 풋내고개 마루에서 반대편 들머리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길섭에는 온갖 야생화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잡목과 가시넝쿨(산초나무)이 어우러져 산객들의 몸뚱이를 노리는 등로를 따라,

 

 

이리저리 아래위로 헤매다 보면,

 

 

삼각점이 있는 352.7봉을 지난다.

 

 

우측으로 옅어진 안개를 뚫고 음성읍내가 조망된다.

좌측이 가섭산이고 우측이 수정산이다.

 

가섭산이 외호하고 있는 음성읍을 당겨본 모습.

 

<가섭산(迦葉山 709m)>

음성읍을 외호하고 있는 가섭산은 음성의 진산이다. 가섭산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음성 쪽에서는 ‘가섭산’이라고 부르고 있는 반면, 충주 신니면 사람들은 ‘가엽산’으로 부르고 있다. 한자의 음에 대한 해석이 달라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섭존자의 가섭(迦葉)이라는 한자를 보면 가(迦, 막을

가)와 섭(葉, 잎 섭)으로 되어 있는데, 대개 사람이름에서는 잎 섭으로 사용하고, 낙엽에서와 같이 사물에 쓰일 때에는 같은 한자라도 엽(葉, 잎 엽)으로 사용된다.

 

고려의 초기쯤에 이 산의 중턱에 초라한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곳 암자의 행자승이 그 행하는 불도의 방법이 청결단정해서 누구라도 이곳 암자에 오는 사람은 그 스님의 수행을 보고 스스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또한 물욕이 없었으므로 번민하는 마음이 하나도 엿보이지 않았다. 날이 더우면 선을 행하여 마음과 몸을 찬 것으로 식혀 항상 차고 시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며, 엄동설한의 추운 날씨에는 눈 위에 앉아 있어도 심정에 열기를 가함으로서 언제나 따스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마음의 평온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스님을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생불로서 대했으나, 그는 조금도 교만하지 않고 겸허하게 찾아오는 신도들을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찾아온 신도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 "이제 나는 입적할 날이 다가왔으니 이 암자를 찾지 마시오"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은 신도들은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면서도 한편 놀랍고 또 한편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여, 그 스님이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려고 아침 일찍 몰려들었으나, 그는 이미 지난 밤중에 입적을 한 후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의 시신에는 근처에서 볼 수 없는 싱싱한 입사귀가 붙은 보리수나무의 가지로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신도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부처님이 행자승을 인도해 갔음이 분명하다 해서 그때부터 이 암자가 있는 산을 가섭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뭇가지에 폐타이어가 매달려 있는 곳을 지나고,

 

 

돌고개에 도착한다.

 

<돌고개(石峴 290m)>

음성읍 신천리 냇말 주막거리에서 초전리 풋내로 넘어가는 516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돌이 많아서 돌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경사가 아주 심하여 1978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확.포장을 하여 지금은 음성읍내로 가는 버스가 다니고 있다. 한자로 표현하여 ‘석현(石峴)’이라 하기도 한다. 돌고개는 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의 분수령을 이룬다.

 

우측이 새로 개통한 도로이고 좌측이 구도로 인데,

정맥길은 도로 사이 언덕으로 이어지지만, 우리는 좌측의 구도로를 따른다.

 

 

구(舊) 도로를 따라 돌고개 들머리로 향하다가,

 

 

구 도로 한켠에 있는 돌고개 표지석 앞에서 인증을 남기고,

 

 

 

일부는 우회길로 가고,

 

보통의 백두들은 산길로 접어든다.

 

 

봉우리를 올랐다가 안부로 내려서고,

 

등로 우측으로 묘소를 지키는 멋진 소나무가 있다.

 

 

안부 임도로 내려섰다가는,

 

바로 다시 올라야 한다.

 

우측 멀리로 부용산이 우뚝하다.

 

<부용산(芙蓉山 644.4m)>

부용산은 금왕읍 육령리와 음성읍 사정리 및 생극면 오생리,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가섭산과 접하고 있으며 산형이 부용(芙蓉 연꽃 봉오리)처럼 생겨서 부용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으로는 사정고개를 경계로 북으로는 완만한 구릉을 지나 오생리 농경지대와 연결되었으며 용대골과 황새골을 주계곡으로 여기에 흐르는 물은 금석저수지의 수원을 이루고 있으며, 저지대는 완만한 반면 해발 500m 이상의 산정부는 준엄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명산이다. 산행은 다소 쉬운 편이며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요도천으로 남쪽으로 물은 음성천으로 유입하고 서쪽 물은 응천으로 유입하나 특이하게 모두 끝에 가서는 한강으로 합류된다.

 

좌측 남쪽 방향 전경.

 

 

또 옛고개 하나를 지나고,

 

 

27번 송전탑 아래를 지난다.

 

 

소나무 숲에서 등로는 직좌틀하고,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쉼을 한 후, 하산 시간 12시에 맞추어 다시금 출발하여,

 

 

오늘 한남금북정맥길의 목적지인 구례고개에 정시 도착하니,

 

구례고개에서 기다리는 애마가 보인다.

 

 

조금 이른 시간에 산행을 마치니 다들 너무나 여유로워한다.

산행 마치고 여유로우면 뭐하노, 산행 중에 여유로워야지 !!

 

산나물 채취에 나선 백두들도 있고,

 

벚꽃나무 그늘에서 쉬는 백두들도 있다,

 

다음 구간 가야 할 보현산 들머리 방향.

 

 

보현산 들머리 방향으로 잠시 들어가니 만생쉼터가 있고,

 

쉼터 해설문도 적혀 있다.

 

돌아본 돌고개 방향.

 

422봉 오름길 이정표.

한금길은 이곳에서 봉우리로 올랐다가 보현산으로 가야하는데, 약수터 방향으로 들어서면 계곡을 따라 바로 보현산으로 오르게 된다.

 

약수터 모습.

 

 

다시 돌고개로 돌아나와, 길가에 있는 보현산 약수터에서 목을 축여 본다.

 

보현산 약수터 해설.

 

마치 나무에서 나오는 듯하다.

 

 

금왕읍 인근 월드사우나에서 땀을 닦고,

 

 

매운탕 집에서.

 

진달래 화주에 취해본다.

 

산행 재밌었나요. 아님 운동 열심 하셨나요!

 

산행 뒷 예기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그래도 뒤풀이는 딱 두시간 안쪽 !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일찌감치 하루를 마무리한다.

 

산행에 참가하는 분들이 많아지니 산행이 일찍 끝나네.

다음 산행은 만차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