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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백두산우회 10주년 보길도 트레킹 2일차 :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 더듬기

by 재희다 2021. 8. 3.

장 소 : 전남 완도군 보길도

기 간 : 2014. 11. 07.(토) ~ 09.(일) (1박3일)

참 석 : 31명.

숙 소 : 오우해 펜션 (061-555-2861)

 

< 2일차(2014. 11. 09.(일)) 일정 >

07:00 기상 및 아침식사

09:30  윤선도 사적지 탐방(세연정 등)
11:30 산양항 출발(배편)

13:00 점심식사(우수영)

14:00 우수영 출발

19:00 서울 도착 및 해산

 

<트레킹 코스>

 

백두산우회 10주년 기념 연회에 대한 기억은 토막기억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의 회원들이 곤한 새벽잠에 취해 있을 시간에 종협 형과 몇몇 분들이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일어나 보옥리로 향하면서 남긴 사진들은 당연히 본 적이 없는 장면들이고, 사진에 기록된 시간에서 55분 정도를 더해야 현지의 시각이 된다.  

 

 

일출을 보기 위해 보옥리의 공룡알해변으로 향하면서 담은 보옥항과 보족산 모습이다. 

 

공룡알해변에서 큰구미 해안절벽으로 향하다가 돌아본 보족산 위에는 둥근달이 아직도 훤히 걸려있다.

 

 

큰구미 해안절벽 전망대에서 돌아본 치도와 불무섬 그리고 보족산 방향.

 

보옥리에서 큰구미 해안절벽을 따라 예송리로 이어지는 해안둘레길은 아직 연결이 되어있지 않고, 보옥리에서 큰구미 전망대까지만 이어져 있다. 큰구미 해안절벽 전망대에 서면  동쪽으로 당사도와 소안도 끝자락이 보인다.

 

큰구미절벽 전망대에서 본 동쪽 당사도 방향.

 

당사도 위로 일출이 시작된다.

 

당사도 위로 뜬 아침 해.

 

당사도 위에서 온 세상을 밝히는 태양.

 

보옥리 공룡알해변으로 돌아나오며 본 일출.

 

 

 

오우해 펜션에서 본 선창리 앞바다에는 갈도, 미역섬, 상도가 아침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올려다본 해뜨는 망월봉 능선.

 

북쪽 멍도와 넙도 방향.

 

 

일출팀들도 돌아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펜션 마당에 나서니 어느새 아침해가 망월봉 능선을 넘어 보길도의 서쪽에도 환하게 햇살을 비춰오고 있다.

 

오우해 펜션 전경.

 

선창리 앞바다에는 갈도, 미역섬, 상도가 나란히 떠 있고, 옥매도는 갈도 뒤에 숨어서 보이지를 않는다.

 

 

10주년 기념연을 가졌던 오우해 펜션에서의 추억을 갈무리하고,

 

보길도에 남겨진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버스에 올라 세연정으로 향한다.

 

<보길도와 고산 윤선도(尹善道)>
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12㎞쯤 떨어진 보길도는 상록수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자연경관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으로 더욱 알려진 곳이다. 고산 윤선도, 그의 나이 51세 때인 조선 인조 15년(1637)에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섬에 터를 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보길도이다.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 후 두 차례의 귀양을 가고 벼슬을 하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섬 여기저기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등 건물을 짓고,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붙였는데, 이 정자와 대가 모두 25여 개소에 이르며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세연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보길도는 세연정에서 보는 인공정원의 풍경과 동천석실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어부사시사의 현장인 예송리 해안에서 보는 바다 풍경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빼어난 섬이다. 보길도의 부용동은 조선의 시인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 살던 유서 깊은 곳이다. 병자호란의 국치와 추잡한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부용동의 아름다운 절승에 의탁하여 자기구제와 초속적 자유를 얻었다. 부용동은 고산이 51세 때(1637년) 들어와 85세(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13년간 살면서 7차례나 드나들었고, 어부사시사 40수와 수십 편의 한시를 창작하였다.

고산의 부용동 생활은 격자봉 밑에 낙서재와 무민당을 짓고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 곡수당 지역은 초당,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월하탄이 조성되어 고산이 휴식하던 장소이다. 곡수당 옆에는 서재가 건립되어 고산의 아들들과 제자들이 살던 곳이다. 동천석실은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험한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쳔여평 공간에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 칸짜리 목조건물인 '동천석실'이 있다. 이곳은 고산이 책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 세연정 지역은 3천여 평의 계원으로 부용동 입구에 있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조우에 연못(205여 평)과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아름답다. 또 고산의 유적으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행사인 유상공수를 행하던 '낭음계', 용이 승천하는 '승용대', 연정이 있었던 '조산'과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는 '하한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던 '혁희대', 석전, 미산 등 경승의 산봉우리마다 고산은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 부용동 유적은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과의 조화성으로 구성된 한국 최고 최대의 별서조경 유적이다.

 

 

보길도의 가운데 골짜기에 자리한 부황리 윤선도 원림.

 

<보길 윤선도 원림(甫吉 尹善道 園林)>
1992년 1월 11일 사적 제36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4호로 변경되었다. 지정면적은 480,728㎡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의 항복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은거를 결심한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수려한 경관에 매료되어 머물렀던 곳이라고 전한다. 윤선도는 1637년(인조 13)부터 1671년 죽을 때까지 일곱 번이나 이곳에 드나들며 글을 쓰며 생활했는데 햇수로는 13년이나 되어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가 많다.
① 세연지(洗然池): 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판석(板石)으로 만든 보(길이 11m, 너비 2.5m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둑을 조성하고 자연적으로 수위조절이 되도록 조성한 연못이다.
② 세연정(洗然亭): 1637년 세연지 가에 단을 조성하여 지은 3칸짜리 정자이다.
③ 낙서재(樂書齋):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하던 곳으로, 석실과 마주 보이는 곳에 있다. 무민당(無悶堂) 등 건물 4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집터만 남아 있다.
④ 곡수당(曲水堂):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지은 집이다. 윤선도의 아들이 조성한 초당·석정(石亭)·석가산(石假山)·연못·화계(花階)·다리 등의 다채로운 조원(造苑)이 베풀어진 곳이다.
⑤ 동천석실(洞天石室): 곡수당 건너 산중턱 절벽 위에 지은 1칸짜리 집. 여기서 독서하며 사색을 즐겼다 한다.
소은병(小隱屛),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賞春臺), 언선대(偃仙臺) 등 그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은 아직도 남아 있다.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며, 특히 보를 막아 연못을 조성하는 등 기발한 안목 등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입구에서 매표를 하고 윤선도 원림 탐방에 나선다.

 

윤선도에 관한 여러가지 전시물이 전시된 원림 내부를 둘러보고 세연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원림을 뒤로하고 널찍한 들길을 잠시 따르면 울창한 숲으로 둘러진 연못이 나오는데, 

 

오래된 노거수와 커다란 자연석으로 꾸며져 고궁의 별채 정원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고산 윤선도의 부용동 생활은 격자봉 밑에 낙서재와 무민당을 짓고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 곡수당 지역은 초당,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월하탄이 조성되어 고산이 휴식하던 장소다. 곡수당 옆에는 서재가 건립되어 고산의 아들들과 제자들이 살던 곳이다. 동천석실은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험한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쳔여평 공간에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 칸짜리 목조건물인 '동천석실'이 있다. 이곳은 고산이 책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 세연정 지역은 3천여 평의 계원으로 부용동 입구에 있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연못(205여 평)과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아름답다. 또 고산의 유적으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행사인 유상공수를 행하던 '낭음계', 용이 승천하는 '승용대', 연정이 있었던 '조산'과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는 '하한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던 '혁희대', 석전, 미산 등 경승의 산봉우리마다 고산은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 부용동 유적은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과의 조화성으로 구성된 한국 최고 최대의 별서조경 유적이다.

 

자연미가 물씬 풍겨나는 세연지 전경.

 

 

연못 건너편에 자리잡은 세연정 모습.

 

<세연정(洗然亭)>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孤山年譜)'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洗然亭) 동쪽에 '호광루(呼光樓)', 서쪽에 '동하각(同何閣)', 남쪽에 '낙기란(樂飢欄)'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비홍교와 세연정.

 

<비홍교(飛虹橋)>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간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이 연결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비홍교 안내판.

 

 

회수담(回水潭).

 

<회수담(回水潭)>
세연정 동쪽 축단 밑에 계담에서 인공연못으로 흘러드는 터널식 수입구가 있다. 계담 쪽에서 물이 들어가는 수구는 다섯 구멍이며, 인공 연못 쪽으로 나오는 수구는 세 구명이다. 이를 '오입삼출'이라 하는데, 이 구조는 아주 독특한데 물막이 석축에 다섯 곳의 흡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되, 배출하는 구멍은 세 곳만 만들어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이다.

 

 

세연정은 사방으로 문이 배치되어 있는데 조금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돌쇠에 매달린 띠살문과 당판문은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을 제공하고, 

겨울에는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주게 되지 않을까 싶다.

 

 

 

동대(東臺).

 

<동대(東臺)>
세연정에서 바라보아 오른쪽 판석보 옆에 위치해 있고, 그 규모는 가로 6.7m와 세로 7.5m의 장방형으로, 높이는 약 1.5m이며 자연석으로 쌓아 올렸다.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여러 사람이 어울려 군무(群舞)를 즐겼던 곳으로 평형이다.

 

동대 안내판.

 

 

세연정을 둘러보고 판석보로 향한다.

 

판석보를 건너며 바라본 세연정 건너편 전경.

 

판석보를 건너는 백두들.

 

<판석보(板石洑)>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洑)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판석보를 건너면서 뒤돌아 보는 세연지에는 배롱나무의 반영이 내려앉아 있고, 판석보 하류 쪽으로는 '보길초등학교'가 살짝 보인다.

 

판석보 안내판.

 

판석보 하류 보길초교 방향.

 

돌아본 판석보 모습.

 

 

연못 건너편에서 바라본 세연정 모습.

 

세연정을 배경으로.

 

서대 앞에서.

 

<서대(西臺)>
현재는 나선형으로 세단이 남아 있으며, 그 규모는 축단의 한 변이 7.5m정도의 정방형이며, 그 높이는 2.2m에 이른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을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 행위를 했던 곳으로 춤을 추며 돌면 정성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을 이뤘다.

 

찍사 바꿔서 한번 더.

 

세연지와 세연정 전경.

 

 

사투암.

 

<사투암(射投岩)>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七岩)'이라 불렀는데, 그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 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 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칠암과 세연정.

 

 

 

자연 계곡같은 연못이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칠암과 세연정 그리고 세연지 뒤로 보이는 아담한 산의 모습이 그림이다.

 

 

 

 

 

세연정을 둘러보고 다시 윤선도 원림 입구의 전시실로 향한다.

 

윤선도 원림 전시실 내부.

 

 

 

 

 

 

이곳 세연정이 있는 윤선도 원림에서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1637년(인조 15년)에 들어와 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집인 낙서재(樂書齋)와 고산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인 곡수당(曲水堂)이 있는 부용마을까지의 2km 남짓은 부황천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산책로 주변에는 '고산문화 체험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윤선도 원림을 뒤로하고 잠시 도로 가장자리에 조성된 데크목길을 따르다가,

우측 '고산 윤선도 문학체험공원' 방향 산책길로 접어들면,

 

자연석으로 쌓은 돌담이 정겨웁고,

 

돌담 안에는 고산 윤선도의 문학과 관련된 조형물들이 다수 조성되어 있다.

 

 

 

문학체험공원을 대충 둘러보고 다시 부황천변 산책로를 따르면,

 

 

산책로는 대나무숲을 지나기도 하고,

 

제법 울창한 잡목숲을 통과하여,

 

 

 

동천석실 방향 산길 들머리가 있는 소공원이 나온다.

 

 

원두막에 나란히 앉아..

 

 

낙서재 앞산 중턱에 자리잡은 동천석실은 보길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라 한다. 하늘정원이라고도 불리는 동천석실로 가기 위해서는 산길로 접어들어 10여 분을 올라야 한다.

 

소공원에서 동천석실로 이어지는 등로로 들어서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며 '산책길이라더니 등산이네!'라는 불평이 들려올 즈음에,

 

 

앞쪽으로 곡수당과 낙서재가 자리한 부용동과 격자봉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반석 전망대에 도착한다.

 

동쪽 세연정 방향.

 

산책길이라더니 힘든 등산길이구먼!!!

 

 

부용동과 격자봉 방향 파노라마.

 

우측 보길저수지 조망.

 

 

반석 전망바위 바로 옆에 동천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신선처럼 살고 싶었던 고산 윤선도의 생각이 담겨진 동천석실 모습.

 

<동천석실(洞天石室)>
윤선도의 이상세계인 부용동을 바라볼 수 있는 낙서재 앞산 중턱에 자리잡은 동천석실은 보길도 최고의 경관을 보여주는 하늘의 정원이다. 넉넉한 산속 우거진 숲 사이를 걸어가면 하늘이 툭 열리듯 보길도와 부용동을 한눈으로 담는 자리에 한 칸으로 만들어진 정자가 자리한다. 윤선도 스스로가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칭하며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었다는 이곳은 작은 봉우리들이 부용동을 감싸듯 자리하고 있다. 한 칸으로 지어진 정자는 선비의 소박함보다 홀로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어 하였던 윤선도의 욕심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절벽 위로 계단과 석축을 쌓아 층마다 화원을 꾸미고 작은 다리와 연못을 만들었으니 신선의 놀이터가 이보다 더욱 아름다울까 싶다. 넓고 편평한 바위 위로 작은 홈을 내어 찻상 다리를 고정하게 만들어 차를 즐기고 두 갈래로 갈라진 바위틈으로 나무로 만든 도르래를 달아 필요한 물품들을 날랐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윤선도는 부용동 너른 터를 닦아 자신의 살림집을 만들고 낙서재라 이름 지었다. 비록 낙서재는 흔적만 남아 있지만 푸른 숲에 둘러싸인 낙서재와 하늘을 바라보는 동천석실을 오가며 독서를 하고 차를 마시며 경관을 즐겼을 윤선도의 삶은 상상만으로도 부럽다.

동천석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 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있다. 3,306m²(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던 곳이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지금도 석실 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바위가 남아있다.

 

 

동천석실 안내판.

 

 

 

 

필요한 물품을 나르는 데 사용된 도르래를 걸었던 용두암 모습.

 

<용두암(龍頭岩)>
2개의 큰 바위인 용두암(용두는 도르래의 방언)이 있는데, 두 바위 사이에 도르래를 걸어서 산 아래에서 여기까지 음식이나 필요한 물건을 끌어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용두암 안내판.

 

 

동천석실 우측 아래에는 차바위도 보인다.

 

<차바위>
동천석실 바로 앞에 움푹 파인 바위로 고산 선생이 차를 끓이던 장소라고 전한다. 바위에는 차상다리를 고정할 수 있도록 몇 개의 구멍을 파 놓았다. 이곳에 올라앉아 청별항, 격자봉, 곡수당, 낙서재, 낭응계를 바라보면서 시상을 떠올리고 다도를 즐겼다고 한다. 낙서재 주변 지형과 유사한 모양을 한 홈의 형태도 이채롭다.

 

차바위 안내판.

 

차바위 모습.

 

 

 

 

동천석실 아래에 침실이 자리하고 있다.

 

<침실(寢室)>
날이 차거나 피곤하면 잠시 눕거나 자고 갈 수 있도록 한 칸짜리 침실을 마련하였는데, 아궁이가 침실 아래에 있다.

 

 

차바위 우측으로 내려서는데 석담과 화황교가 보인다.

 

<석담과 희황교>
동천석실 정자 오른쪽 암벽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받아 모으는 연지가 있고, 벼랑 쪽을 석담이라 하고 바깥쪽 연지를 석천이라 한다. 커다란 암반을 파서 조성한 석담에는 회향교가 있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눴다. 석담 위쪽으로 8개의 계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담과 석담 사이에 구멍이 뚫린 바위가 그 돌계단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하고 있는데 이를 '희황교'라 했다. 여기서 희황은 중국의 고대 황제 복희씨를 말하는 것으로 동천석실을 천자가 사는 곳으로 비유하였다. 희황교는 돌거북이 동천석실로 기어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석담과 화황교에서.

 

돌아본 동천석실(위)과 침실(아래) 방향.

 

화황교 안내판.

 

석담 안내판.

 

 

동천석실을 휘~이 둘러보고 잠시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부용천을 건너는 판석 다리를 건너게 된다.

 

돌아본 동천석실 방향.

 

살짝 당겨본 동천석실 모습.

 

동천석실을 배경으로.

 

 

보길도에서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를 더듬으려면 가장 먼저 윤선도가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을 하면서 기거하던 낙서재를 둘러봐야 하고,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아들 학관이 머물며 아버지 고산 윤선도를 보살폈던 곡수당을 둘러본 다음, 부용동과 주변 조망이 좋은 동천석실과 뱃놀이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별서정원인 세연정을 둘러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연정을 먼저 둘러보고 동천석실을 올랐다가 내려오니 다들 지난밤의 성대한 연회 탓인지 무척이나 지친 표정이고, 회장님의 '그까짓 옛날 집들 그게 그것이지, 서울까지 가야 할 길도 먼데 굳이 불게 있냐?'라는 말씀에 따라 남은 낙서재와 곡수당 탐방은 후일을 기약하고 서둘러 귀경길에 오르기로 한다.

 

<낙서재(樂書齋)>
격자봉 아래 윤선도가 기거하며 시를 짓고 강연을 했던 곳이다.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1637년(인조 15년)에 들어와 1671년 돌아기실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윤위의 '보길도지'에 따르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 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잡은 낙서재 입지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 한다. 이곳은 강학하고 독서하면서 소요하고 은둔하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최근 낙서재 마당 북쪽에 고산이 달구경하던 귀암(龜巖)이 발견되어 남쪽의 소온병과 낙서재, 귀암의 축선이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모옥(茅屋)으로 지어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와가(瓦家)로 바뀌었다.

주로 이곳에서 많은 책을 쌓아두고 독서하며 자제들을 가르쳤다 한다. 부용동원림(芙蓉洞圓林) 중에서도 낙서재 지역을 추천 주거공간(住居空間)으로 삼았다 한다. 낙서재의 형국 요처가 되는 곳은 소은병과 귀암(龜岩) 그리고 뒤에 자리잡고 있는 격자봉이다. 소은병은 낙서재터의 뒤에 있는 2.5m 높이의 병풍바위이다. 소은(小隱)은 세속을 싫어하여 은둔해 있다는 뜻이며 은병청풍(隱屛淸風)이라는 부용동팔경이 있다. 또 낙서재 앞뜰에 있었다는 바위가 귀암이다. 2.8m의 거북바위라고도 한다. 고산은 4령(봉황 기린 용 거북)이라고 하고 저녁이면 귀암에 앉아 보름달을 즐겼다고 한다.

 

<곡수당(曲水堂)>
曲水堂(곡수당)은  낙서재 아래 개울가에 지은 집이다.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조성한 草堂(초당), 石亭(석정), 石假山(석가산), 연못, 花階(화계), 다리 등의 다채로운 造苑(조원)이 베풀어진 곳이다. 고산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으로,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른 물이 이곳 인근에 이르러서 곡수를 이루고 있다. 1칸짜리 집으로 사방에 퇴를 달고 반자를 두었으며, 남쪽 난간에는 '취적헌(取適軒)', 서쪽은 '익청헌(益淸軒)'이라는 편액을 학관의 글씨로 새겼다. 주변에 일삼교(日三橋)와 유의교(有意橋)가 있다.
보길면에서는 윤선도의 손자인 '윤위'가  1748년에 지은 [보길도지]에서 그 모습을 생생히 되살리고 있는데 폐허가 된 곳을 하나둘씩 발굴 및 고증을 거쳐 복원해둔 상태라 한다. 곡수당(曲水堂)이란 이름은 물이 구부러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먼~언 훗날 보길도를 다시 찾게 되면 그때 낙서재와 곡수당을 가 보기로 하고 대기하던 버스에 올라 귀경길에 올라,

보길도대교 건너며 바라본 노화도 이목항 방향.

 

돌아본 보길대교 모습.

 

노화도 산양항으로 향하며 본 노화읍 이포리 전경.

 

 

노화도 산양항에서 땅끝 갈두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

 

노화도 산양항을 뒤로하고 육지로 향한다.

 

땅끝~산양(보길,노화) 배편 안내문.

 

 

30여 분만에 땅끝 갈두항에 도착하여,

 

 

 

해남 북평면에 있는 휴게소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버스 기사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진도를 잠깐 들리기로 한다.

진도대교를 건너며 본 명량해전의 격전지 울돌목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울돌목과 우수영이 내려다 보이는 망금산 진도타워 도착.

 

진도 방향.

 

울돌목을 건너는 진도대교와 전라우수영 방향 파노라마.

 

북쪽 방향.

 

진도대교와 우수영 방향.

 

진도대교 아래를 흐르는 해류가 가세다.

 

남동쪽 해남 방향.

 

진도타워 모습.

 

 

 

 

진도대교 조망.

 

막간을 이용하여 또 한잔!

 

진도대교를 배경으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1박3일의 긴 여정에도 밝은 표정으로 행사를 마무리하는 백두들.

 

 

백두산우회 10주년 기념으로 진행한 보길도 트레킹은,

이후 매 주년 행사를 한국의 다도해 섬에서 진행하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

 

워낙 오래된 기억이라 어떻게 기록으로 남길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옛 사진을 보니 약간의 기억이 새롭게 떠 올라 대충이나마 간추려 기록으로 남긴다.

혹여 본인의 기억과 다른 부분이 있거나 새롭게 떠 오른 게 있으면,

댓글로 남겨 주실 것을 간청드리며 기록을 마무리한다.

 

2021. 8. 2.

코로나19로 집에 갇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