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4년

진양기맥 11차(용산치~진양호) : 시산제를 올리며 걸은 진양호반길

by 재희다 2024. 8. 31.

 


산행장소 : 진양기맥 11차(용산치~진양호) 경남 진주시. 

산행일시 : 2024. 05. 25.(토) 
산행코스 : 용산치(77m) ~ 196.8봉 ~ 203.0봉 ~ 240봉 ~  222.2봉 ~ 200봉(장아산, 시산제 예정) ~ 212.2봉 ~ 222봉(상미산) ~ 216.3봉 ~ 174.5봉 ~ 대전통영고속도로 ~ 159봉 ~ 181.3봉 ~ 146봉 ~ 175.4봉(양마산) ~ 163봉(팔각정) ~ 121.4봉 ~ 호반전망대 ~ 우약정(팔각정자) ~ 진양호(귀곡동승선장) ~ 충혼탑/망향비 (11km, 7시간(시산제 2시간 포함) 소요) 
산행참석 : 20 백두.

▶시산제는 장아산에서 오전 7시 거행.

 

<참고사항>

- 금번 진양기맥 마지막 구간은 출발지인 용산치에서 오르면 만나는 240봉이 최고봉으로, 200미터 안팎의 구릉성 봉우리들을 따라 기맥능선이 이어진다.

- 들머리인 용산치에서 능선 접근 등로가 거칠고 가파른 편이나 이후부터는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지만, 도중에 갈림길이 많아 주의하여야 한다. 

- 대전통영간고속도로로 내려서는 구간과 다시 능선으로 오르는 구간 등로가 희미하고 거친 편이나, 이후 181봉에서 진양호 둘레길과 만나서는 매우 양호한 등로가 이어진다. 

- 장아산 부근 능선에서 진양호 조망이 일부 트이며, 산행 막바지 진양호 호반 전망대에 오르면 진양호는 물론 지리산도 조망할 수 있다. 

 

<산행지도>

 

 

진양기맥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5년 전인 2019년 9월이었으나, 코로나19로 산행이 중단되면서 개인적으로 다른 기맥과 지맥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4월 기백산 아래 바래기재에서 백두산우회 정기산행으로 진행하여, 마침내 이번 산행에서 2024년도 안전산행을 기원드리고서 산행을 이어가 진양호에 도착하는 진양기맥의 마지막 구간을 걷게 된다.

진양기맥은 그동안 걸었던 다른 정맥이나 기맥에 비해 다채롭고 굴곡이 많았던 종주길이었다. 기맥길에서 올랐던 기백산과 황매산, 한우산, 집현산 등의 명산들로 이어진 호젓한 등로는 물론, 이름없는 봉우리를 넘나드는 거친 등로만큼이나 백두들의 진양기맥 종주는 수많은 난관과 환희로 점철된 인생사에 비견될 정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역경을 이겨낸 기쁨과 호젓한 등산로를 걸으며 느꼈던 행복감을 마무리하는 진양기맥 마지막 구간을 앞두고서 늘 함께 걸었던 창병 대장이 모친께서 유명을 달리하심에 따라 종주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하게 된 아쉬움을 가지고 진양기맥 종주를 마감하러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진양호 호반길을 걷게 되는 진양기맥 마지막 산행과 함께 2024년도 시산제를 거행하게 되어 많은 분들이 함께 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양재에서 시산제 제물과 평소 수준의 인원만을 태운 버스는 말없이 산행 출발지점인 진주의 용산치로 향한다.

 

 

지난 산행 하산지점 반대편 용산고개 버스정류소 간이매점 앞 공터에 도착한 버스에서 두 시간여의 쪽잠을 더 청하다가, 총무님의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산행준비를 하여 버스문을 나서니, 어느새 날이 어슴프레 밝아서 렌턴이 없어도 될 정도이고, 

신령님께 올리는 시산제 제물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편육을 배정받아 배낭에 넣고는, 

 

진양기맥 용산치 들머리가 있는 용산고개 버스정류장 간이매점 앞에서, 

 

<용산치/오미고개>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와 용산리를 잇는 고개로, 6차선의 3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산청에서 진주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좌측 용산리에서 보면 용산치요, 우측 오미리에서 보면 오미고개일 것인즉 인터넷 지도에는 용산치와 오미고개가 모두 표기되어 있다.  

중앙분리대까지 있는 6차선 도로에 차량의 통행도 많아 무단횡단하기에는 위험하므로 우측 오미리 방향 300여 미터 지점에 있는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통과하는 게 좋아 보이며, 기맥 들머리는 용산고개 버스정류소 간이매점 우측 절개지로 나 있다. 

 

진양기맥 마지막 구간 산행에 앞서 완주자의 면면을 사진으로 남긴다. 

진양기맥을 완주한 백두들!

 

 

2024년도 시산제 제물을 나눠 담아 묵직해진 배낭을 메고,

용산치 간이매점 옆 들머리로 들어서서 잡풀이 그득한 거칠고 가파른 절개지를 오르다가, 

 

희미한 족적을 따라 좌측 숲으로 들어서서 좌측 아래로 보이는 절개지 수로를 따라 올라도 되지만, 

 

능선 마루를 향해 낙엽이 수북한 사면을 치고 오르면, 

 

잡목과 잔가기들이 그득하지만 선답자의 표지기가 한두 개씩 걸린 희미한 족적이 이어지다가,  

 

우측 오미리 방향 지능선에서 이어오는 뚜렷한 능선 등로에 접속하여 좌측 등로를 따르면, 

 

좌.우로 길흔적 있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작은 바위들이 드러나 보이는 거칠고 가팔라진 오름길을 따라, 

 

쉼터의 흔적이 있는 우측 오미리 방향 지능선 분기봉에 올라 좌측 능선길을 따라 100여 미터 진행하면, 

 

'준.희'님의 '진양기맥 196.8m' 산패가 걸린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거칠기는 하지만 고저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탄한 능선길을 따라 안부를 지나,  

 

그냥 평범한 능선으로 보이지만 '다류'라는 분의 '진양기맥 203m' 산패가 걸린  봉우리를 넘어서 내려서다가, 

 

최근에 파묘한 흔적이 있는 파묘 자리와 등로를 막고 있는 쓰러진 나무를 우회하여 지나고, 

 

좌측 아래 복천사 방향 갈림길이 있는 옛고개를 지나서, 

우측 명석면 가화리 방향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데, 

 

어린 소나무 위로 살짝 조망이 트이는 능선마루 우후방으로 용산고개 북쪽의 오미마을을 휘감으며 연무에 가린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뻗은 3번 국도가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 지능선이 분기하는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진행하다가, 

 

오늘 구간의 최고봉임에도 별다른 표식이 없는 240봉에 올라 잠시 시간때우기 쉼을 한다. 

240봉에서 시간 조절 쉼을 하는 백두들

 

 

'쉬고 싶지 않은 쉼은 고역'이라며 240봉을 뒤로하면,

'농작물에 피해를 줄 경우 법적조치(총살)"하겠다는 멧돼지들에 대한 출입금지 경고판을 지나고, 

 

올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227봉을 '올라봐야 별게 없다'는 말로 때우며 뚜렷한 등로를 따라 좌회하여 지나면, 

 

참나무류가 빼곡한 안부를 지나게 되고, 

 

다소간 걷기좋은 호젓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산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탱자나무를 지나서, 

 

고도차가 없는 호젓한 능선길을 잠시 더 따르다가, 

 

187.7봉에서 우측의 송전탑 방향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두고 좌틀하여 다소 거친 등로로 진행한다. 

 

 

멧돼지의 먹이활동 흔적이 역력한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한때는 경작지나 산막이 있었던지 탱자나무가 줄지어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곳을 지나, 

 

키높이의 작은 봉우리를 좌회하여서는, 

 

호젓한 등로를 따라 안부를 지나 잠시 오르면, 

 

최근에 닦은 듯이 보이는 임도가 지나는지 넓은 공터인 장아산(200m) 정상에 도착하게 되는데, 

널찍한 공터인 이곳에서 2024년도 시산제를 거행하기로 한다. 

 

<장아산(200.0m)>

진주시 명석면 가화리와 용산리, 우수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장아산'이란 이름은 좌측 우수리 '장아실골'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정상에는 최근에 닦은 듯이 보이는 임도 흔적이 지나는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다. 

이 부근은 과거 명석면 민간인 학살사건(鳴石面 民間人 虐殺事件)의 한이 서린 곳으로, 
『1949년 정부가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전향자들을 모아 보도연맹이란 반공 단체를 조직하였으나,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여름 진주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될 것이 확실해지자, 경찰과 국군 등이 과거에 좌익활동을 했다가 전향한 이 지역 보도연맹원들이 북한 측에 동조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검속해 즉결처분했다. 학살은 진주의 외곽지역 곳곳에서 벌어졌는데, 특히 산간지역이 많은 명석면 일대는 대학살의 진원지였다.
1950년 7월 29일에 경상남도 진주지역으로 파견된 CIC 대원(육군 특무대 소속)들에 의하여 진주시 명석면 일대 우수리 갓골, 밀밭골, 솔밭골 등에서 10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보도연맹원들을 ‘마치 북어 짐짝을 싣듯 세 겹으로 트럭에 얹어 싣고 그 위에 타고 앉아 와서 늘어 세운 다음 기관총으로 소사했다’고 한다. 당시 학살자들은 군복을 입지 않은 채 한복을 입고 있었으나 모두 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실탄이 가득 찬 탄통을 차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진주시 명석면 소재 지역별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장소와 인원수를 추정해 보면, 우수리 송고 콩밭골 1백여 명, 우수리 갓골 내 밀밭골 43명, 관지리 삭평 건너 닭족골 50여 명, 관지리 신촌 앞 화령골 1백여 명, 용산리와 오미리 고개 수백 명 등이었다. 
이 중에서 학살된 희생자의 신분과 숫자가 밝혀진 곳은 2곳뿐이다. 형무소 수감자들이 집단학살 당한 용산리의 용산치와 정확히 43명의 민간인이 보도연맹원이란 이유로 학살당한 우수리의 갓골이다. 용산리에서 대량 살육된 희생자들이 죄수 복장으로 머리를 모두 빡빡 깎은 것으로 볼 때 진주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미결수나 복역수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 이후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였는데, 이때 그들이 미군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 정보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장아산 정상에 도착하는 백두들

 

 

장아산 정상 널찍한 공터에서 배낭을 내려 가져온 제물들을 진설하고는, 

 

2024년 갑진년(甲辰年) 백두산우회 시산제를 거행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꿰고서 재미난 역사 예기로 산행의 흥미를 더해주는 손점장님의 안전산행 기원문 낭독에 이어, 

 

참가한 백두들이 헌작의 예를 올리고는, 

 

마지막으로 포항을 향해 엊그제 소천하신 김대장 모친의 극락왕생을 빌고,  

 

장아산 정상 공터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음복례를 가진다. 

 

 

 

예정했던 두시간의 절반인 한시간 만에 갑진년 백두산우회 시산제를 마무리하고서는, 

 

임도 같은 널찍한 등로를 따르다가, 

 

좌측 능선으로 꺾어서 내려가는 임도를 두고 우측 능선 숲길로 들어서서, 

 

평탄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잠시 오르면, 

 

'다류"님의 '진양기맥 212.2봉' 산패가 걸린 개념도의 212봉을 지나게 되고, 

 

좌측 사면에서 이어오는 뚜렷한 등로와 만나는 안부를 지나,  

 

가끔씩 커다란 밤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완만한 능선길을 이어가다가, 

 

육산 능선임에도 바위들이 듬성듬성 드러난 오름길을 오르면, 

 

'준.희'님의 222봉 산패가 걸린 봉우리에 도착하는데,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는 국지원 지도에 222.0m인 이 봉우리도 인터넷 지도에는 장아산으로 표시해 놓았고, 개념도에는 219.3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북동쪽 광제산과 집현산 방향
살짝 당겨본 광제산과 집현산 방향
우측 서북쪽 대전통영간고속도로가 뻗은 명석면 가회리 방향
서북쪽 대천통영간고속도로 뻗어가는 우측 지리산 주능선 조망

 

 

222봉 인증사진을 가지고 평탄한 능선을 따라 애기장수가 가지고 놀았음직한 바위 2개를 지나, 

 

'호돌 바위'라 음각된 바위 우측으로 이어진 급경사 내림길로 들어서니, 

 

우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진양호 상류쯤의 물길이 보이고, 

 

다시 평탄한 숲길을 따르다가 잠시 오르면, 

 

참나무 둥치에 '준.희'님의 산패가 걸린 216.3봉을 지나게 되는데, 

 

개념도 상의 218봉으로 기맥꾼들의 알바가 잦은 직진의 넓은 등로에는 나무막대가 걸쳐져 있고,

기맥길은 급좌틀하여 희미해진 등로를 따라 진행하여야 한다. 

좌틀 화살표 사진?

 

 

희미한 길흔적을 더듬어 내려서다가, 

 

잡목과 덩굴로 등로가 터널을 이룬 잡목지대를 통과하면, 

 

다시금 말끔해진 안부를 지나 오르게 되는데, 

 

우측으로 대전통영간고속도로가 진양호를 건너는 가화2교가 내려다보이고, 

 

이내 작은 돌탑이 있는 180봉에 올라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다 보면, 

 

능선에 널찍하게 조성된 묘역 진입을 막아서는 철조망 울타리를 우회하여,

 

잘 단장된 가족묘지로 들어서게 되는데, 

 

묘역의 쥔장을 확인해 보니 '진주강씨 박사공파 25세손 후손묘역'이라 되어 있는데, 

이곳이 후손들의 묘역이면 선대묘역은 따로 있다는 것인지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고, 

 

쥔장의 부재로 미쳐 허락은 받지 못한 채 잠시 배낭을 내리고 이러쿵저러쿵을 한다. 

 

 

한사코 결론이 나지 않을 못다한 이러쿵저러쿵을 갈무리하여 진주강씨 묘역을 뒤로하고, 

우측 대전통영간고속도로 가화2교와 진양호 조망

 

선답자들 산행기의 단골 사진인 소나무가 교차칼 형태를 하고 있는 곳에서 우리도 인증을 남기고는, 

 

잡목들이 점령하여 길흔적 찾기가 어려운 174.5봉을 지나서 내림길로 들어서면,  

 

잡목과 넝쿨이 뒤덮인 거친 능선을 지나,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게 되고, 

 

진주강공 내외분 묘지를 지나서는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족적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좌측 방향의 족적을 따라 내려가면,  

 

대전통영고속도로와 2차선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판문고개에 내려서게 되는데,

좌틀하여 도로를 따라 고속도로 굴다리를 통해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통과하게 된다.

 

<판문고개>

진주시 명석면 가화리와 판문동을 잇는 2차선의 20번 지방도가 대진통영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고 있는 곳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판문고개라고 부른다. 도로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50m 정도를 내려가다가, 우측 시멘트 도로로 들어서서 진행하면 고속도로 굴다리를 통해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통과할 수 있다. 

 

 

 

도로에 내려서서 좌측으로 약간 내려가다가, 

 

우측 시멘트포장 도로로 들어서서 잠시 진행하면, 

 

이내 우측 대전통영고속도로 아래로 지날 수 있는 암거가 나타나고, 

 

지하암거를 통과하며 우측 수로를 따라 올라도 되지만 밤나무 단지로 들어서서 오르다가, 

 

우측 절개지 관리용 철계단으로 들어서서 넝쿨들을 헤치며 올라서는, 

우측 판문고개와 잠시 전에 내려선 기맥능선 방향

 

철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 거친 숲을 헤치며 오르면, 

 

이내 제법 뚜렷한 길흔적이 나타나더니, 

 

대전통영고속도로를 지나 첫 봉우리(169m) 능선 등로에 접속하게 되고, 

 

좌틀하여 호젓한 등로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묘지의 흔적이 희미한 성산이공 묘비를 지나, 

 

쓰러진 나무가 방치된 안부를 지나서, 

 

좌측이 벌목된 능선 오름길을 오르다가, 

좌측 진주시 판문동 방향

 

다시 숲으로 들어 제법 가팔라진 오름길을 오르면, 

 

많은 선답자들의 쉬어간 흔적인 표지기들이 널린 181.3봉쯤을 지나고,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옛 헬기장의 흔적으로 보이는 오래된 보도블록이 흩어진 능선을 지나,  

 

최근에 본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주변 환경을 가진 멧돼지 목욕탕을 지나고, 

 

높게 자란 소나무 그늘로 인해 헐벗게 된 묘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면, 

 

벤치와 이정표, 양미산 물빛길 안내도가 있는 146봉에 올라 좌측 진양호 전망대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양마산 물빛길>
진양호 양마산의 호반 둘레길인 양마산 물빛길은 진양호공원 정문에서 시작하여 15.3km에 약 5시간 정도 소요되는 도보 순환코스로 언제 가도 좋은 곳이다. 진양호를 옆구리에 끼고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진 이곳은 진양호의 진정한 매력이 숨겨진 보석이기 때문이다. 호반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진양호는 호수로서는 드물게 물이 맑다. 벽과 조화된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 또한 그만이다.
진양호 양마산 가는 길은 간간이 들리는 맑은 귀가 즐겁다. 얼마쯤 걸으면 흙길이 나오고, 편백숲 산림욕을 겸한 본격적인 산책을 즐기다 보면 어느덧 정적인 진양호가 주는 그윽한 신비감과 낭만적인 운치가 배가 된다. 양마산 가는 길은 잔잔하고 고요한 진양호를 바라보며 눈을 정화시키고, 편백 숲길 속 향기 테라피에 머리가 맑아진다. 아침 산책은 진양호 물안개를 즐길 수 있어 좋고, 낮은 맑은 햇살과 숲의 어우러짐이 좋고, 늦은 오후 산책은 노을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진주시청)

 

 

그간의 고된 기맥길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비단길 같은 진양호 양마산 물빛길을 따라, 

 

솜씨 좋은 장인의 정성이 깃든 돌탑이 늘어선 사면길이 우회길 같은 느낌이라 사뭇 어색한 느낌도 들고, 

 

우측 진양호 방향으로 '수변탐조대'가 있다는 이정표가 자리한 안부 갈림길을 지나 잠시 오르면, 

 

돌탑과 밴치가 있고 우측 수변탐조대 방향 갈림길인 172.3봉에 올라서 좌측 전망대 방향으로 진행하여야 하지만, 

 

산행 종료시간도 맞춰야 하는 백두들은 할일 없이 이런저런 화재를 꺼내어 요리를 시작한다. 

 

 

"시간이 왜 이리 안 가지!"라는 푸념을 하며 다시 호젓한 기맥길로 들어서서, 

 

좌측 예술촌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전망대 방향으로 내려서면, 

 

좌측 파크골프장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내림길 만큼만 가파른 나무 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팔각 정자가 있는 양마산(157m) 정상에 도착하여, 

 

먼저 자리를 잡고 쉬고 있던 산객들이 양보해 준 정자에서 흘려야만 되는 땀을 식히는 연습도 해 본다. 

 

 

팔각 정자가 있는 양마산에서 우측 진양호가 있는 남서 방향으로 내려서서, 

 

우측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진양호 조망을 즐기며, 

 

진양호 호반 소나무 숲길을 이어가다가, 

 

사각정자 쉼터가 자리한 121.4봉을 넘고, 

 

싱그런 편백나무가 늘어선 숲길을 내려가다가, 

 

갈림길 안부를 지나 진양호 전망대 방향으로 들어서서, 

 

편백 숲으로 이어진 계단길을 따라 오르면, 

 

확 트인 넓은 진양호 호반 건너로 웅장하게 솟은 지리산 능선이 조망되는 진양호 전망대에 도착하는데,  

우리는 우측 무장애길을 따라 3층 전망대로 올랐다가 좌측 계단길을 따라 내려오기로 한다.

 

<진양호 호반전망대>
진양호는 진주 시민의 생명수라 불리는 주변의 상수도, 관개용수, 공업용수로 이용되는 청정 호수다. 진주성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강을 막아 만든 다목적댐이 있는데, 그 건설 과정에서 생긴 호수가 바로 진양호다. 진양호 호반 전망대는 tvn드라마 지정생존자 촬영지로 명성을 얻으면서,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양호 공원 안에는 동물원, 놀이 시설, 호텔 등이 있다. 호반 전망대 역시 진양호 공원 안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어,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다’를 닮은 진양호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확 트인 넓은 호반 너머로 웅장하게 솟은 지리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일 년 계단과 연결되어 데이트 코스로 각광받고 있으며 진양호와 어우러진 환상적인 야경도 감상할 수 있다. 

 

 

주변 경치를 즐기며 무장애길을 따라 올라, 

 

드넓게 펼쳐진 진양호가 시원스레 조망되는 3층 진양호 호반 전망대에 도착하여, 

 

배낭을 내리고 진양호 건너로 보이는 조망과 안내도의 위치를 비교해 보며 탁 트인 절경을 감상한다. 

 

<진양호(晋陽湖)>

진주를 흐르는 남강의 근원은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는데 경호강이라 부르며, 다른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덕천강으로 부른다. 이 두 강이 진주 시내 서쪽 광탄(光灘)[너우니]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 제방을 쌓고 사천만으로 방수로를 뚫어 남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하자는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남강 유역의 상습적인 수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댐을 건설하는 낙동강 개수계획이 착공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1960년대에 비로소 경제개발계획에 치수사업으로 포함되어 1969년 남강다목적댐이 완공되었으며,‘남강댐 숭상공사’로 불리는 새로운 댐 건설이 1989년 착공되어 2001년 준공되었다. 이 사업의 목적은 댐 저수량의 확대를 통하여 서부경상남도 일대의 생활·공업용수와 관개용수 등 용수를 확보하는 데 중점이 있다. 

남강댐이 남강을 막아 만들어진 진양호는 맑고 수려한 풍광을 지닌 서부경남의 유일한 인공호수로 지리산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시원하게 트인 전망과 아침에 피어나는 호반의 물안개, 황홀한 저녁노을이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진양호는 서부경남의 대표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진양호공원, 휴게전망대, 봄 벚꽃터널, 경남유일의 동물원, 물문화관, 어린이 교통공원, 진양호 일주도로 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좌측부터 와룡산, 금산, 망운산, 금오산, 백운산, 반야봉, 천왕봉, 웅석봉

 

 

남쪽으로는 남강댐과 그 뒤 멀리의 사천 와룡산이 조망되고, 

남쪽 사천의 와룡산 방향

 

<남강댐(南江댐)>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과 판문동에 걸쳐있는 남강의 다목적댐으로, 서부 경남지역의 생활용수와 공업용수 및 관계용수의 안정적 공급과 남강 하류 및 사천만 연안의 홍수피해 방지, 수력발전등 수자원의 적극적인 활용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런 남강댐 건설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낙동강의 제일 지류인 남강은 유역이 연 강수량 1,300mm의 다우지를 이루어 유수량이 본류 유수량의 27%를 차지한다. 또 삼랑진에서 물금까지의 낙동강 하폭이 좁아 홍수때는 하수의 소통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유역일대가 수해 상습지가 되어왔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부터 1925년까지 낙동강 개수계획을 수립할때 남강댐 지점을 선정하였으며, 1926년에 개수공사를 착공하여 1934년에 완료하였다. 이후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낙동강 전역에 걸친 대홍수로 피해가 막중하여 남강 방류가 필요하게 되자 1936년에 1차 공사로 낙동강 홍수피해 복구와 동시에 사천만 방수로 굴착공사를 하였다. 광복후 1949년에 2차 공사를 시행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62년에 이르러 3차 공사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사업으로 책정되어 다목적댐으로 착공하여 1969년 10월 7일 준공하였다. 1998년 8월 8일 남강댐 수문설비가 준공되고, 1998년 10월 2일 상업발전을 개시하여 1998년 12월 15일 제수문공사 준공과정을 거쳐서 2001년 12월에 남강댐 보강공사를 완료하였다. 

이 남강댐의 길이는 1,126m, 댐의 높이는 21m, 평균수심 34m이다. 남강댐의 구축으로 조성된 진양호(晉陽湖)는 진주시 판문동, 귀곡동, 대평면, 내동면 및 사천시 곤명면에 걸쳐 있으며 만수면적 23.55㎢, 만수위 37.5m, 총저수량 1억 800만 톤으로, 유효낙차 10.4m~20.0m이고, 발전용량은 14,000kw이다. 댐의 높이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효용은 어마어마한데, 당장 진주시, 함안군, 의령군 일대를 괴롭히던 홍수 문제가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남강 인근의 늪지대가 개간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남강댐 건설 이전에는 남강에서 역류한 홍수가 수km 밖에 있는 의령군 의령읍과 함안군 가야읍을 뛰어넘어 함안면까지 솟구쳐 올라왔을 정도였다. 지금도 큰 태풍이 오면 가야읍 검암리 인근까지는 수위가 차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살짝 당겨본 남강댐과 사천 와룡산 방향

 

약간 우측으로는 진양호 건너 숲 위 물문화관 건물이 있고, 그 뒤 멀리로 남해군 상주면·삼동면·이동면에 걸쳐 있는 금산(錦山)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이 금산은 소금강(小金剛) 또는 남해금강(南海錦江)이라고 불리며, 

살짝 당겨본 물문화회관 조측 멀리로 남해의 금산이 희미하다.

 

남서쪽으로는 하동의 금오산(金熬山)과 그 우측으로 광양의 백운산쯤이  조망되고, 

남서쪽 하동 금오산(金熬山) 방향 (우측은 광양 백운산)

 

서북쪽 대평면 방향 멀리로는 노고단에서 반야봉, 삼신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능선이 연무에 가려 희미하다.

서북쪽 연무에 가려진 지리산 방향

 

진양호 호반 전망에 에서 본 파노라마(1'18")

 

 

 

해질녘 저녁노을 조망이 좋을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배낭을 메고 호반전망대를 뒤로하면, 

 

우측 아래로 호반전망대에서 진양호 수변으로 이어지는 '일년계단'이 내려다 보이고, 

호반 전망대 전경

 

호반 전망대를 내려서서 남쪽으로 이어진 도로로 들어서서, 

 

우측의 레이크사이도호텔을 지나 내려서다가, 

 

좌측 모퉁이에 이재호 노래비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이재호(李在鎬) 노래비> 

작곡가 이재호는 1914년에 진주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에 형에게서 트럼펫을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등음악학교 본과 2년을 수료하였다.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고향인 진주에서 휴양 중 레코드사에 관계하는 친구의 소개로 대중가요 작곡을 하게 되었다. 1956년에 지병이 재발하여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요양하던 중 4·19혁명 직후 미발표곡들을 남긴 채 1960년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본명은 이삼동(李三童)이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에 있는 진양호공원 내에 이재호를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된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후 귀국하여, 처음에는 당시 OK 레코드사에서 무적인(霧笛人)이라는 필명으로 작사 및 작곡을 해오다가 태평레코드로 옮겨 이재호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8년에 「나그네 설움」으로 가수 백년설(白年雪)을 출세시켰고, 같은 해에 「불효자는 웁니다」와 「꽃마차」를 신인가수 진방남이 취입하여 인기가수가 되었다. 또한 1940년에는 「복지만리」와 「대지의 항구」를 백년설에게 주어 당시 최고 인기가수로 각광받게 하였다. 1942년에는 「황하다방」과 「갈매기 쌍쌍」으로 백난아를 출세시켰고, 1943년 이후 물자 결핍으로 인해 레코드 제작이 부진해지자 태평레코드사의 전국 순회공연 무대에서 연주단을 지휘하였다. 1945년 전후에 고향인 진주에서 중학교 음악교사로 봉직하였으며, 6·25동란 중에는 부산방송국 전속 악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에는 「홍콩 아가씨」를, 1953년에는 「경상도 아가씨」 등을 발표하였고, 환도 직후 「무영탑 사랑」, 「물레방아 도는 내력」,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을 발표하여 작품들의 완숙기에 도달하였다. 1957년에는 공보처 제정 국민가요 「고향에 찾아와도」를 발표하였고, 인기가수 남인수에게 「무정 열차」와 「산유화」 등을 취입 곡으로 주었다.

 

좌측 동물원 방향 도로를 두고 직진하여, 

 

도로 좌측의 데크목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재일본 진주 친목회 벚꽃 단지' 기념비를 지나게 되고, 

 

아시아레이크사이드호텔 웨딩컨벤션 앞에서 다시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내려가면,  

우측 진양호 조망

 

우약정 앞 주차장이 나오는데, 좌측은 진양호 놀이공원이고 우측으로 가면 남인수 동상이 있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남인수(南仁樹) 선생>
남인수(南仁樹)의 본명은 강문수(姜文秀)로, 경상남도 진주 출생이다. 소년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에서 일했고, 학력도 없고 음악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지만, 천성의 미성(美聲)에 노래에 대한 센스가 뛰어나 가수가 될 소질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다. 1935년 진주에서 중학생복을 입고 상경하여 1938년 이부풍(李扶風) 작사, 박시춘(朴是春)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 명성을 날렸다. 
타고난 고운 목소리를 가졌던 그는 한때 성악가 안기영(安基永)을 사사하였고, 주로 박시춘·조명암과 짝을 이루어 활약하였다. 1948년에는「가거라 삼팔선」을 불렀고, 한때 아세아 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6·25 동란 중에는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에 참여하였다. 1954년 환도 이후 그는 단연 가요계의 일인자 역할을 하였다. 1957년 대한레코드 가수협회 회장, 1961년 12월 사단법인 한국연예협회 초대 부이사장에 선출되었으나, 같은 6월에 폐결핵으로 별세하였다.
가요의 황금시대라고 불렸던 1930년대 이후 약 25년 동안 활약하였던 가수 중 최고의 가수로 평가되었고, 시대감각에 맞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로 평가되고 있다. 약 1천여 곡을 취입했다는 설도 있으며, 그중 유명한 것으로는 「애수의 소야곡」·「남아일생」·「낙화유수」·「감격시대」·「꼬집힌 풋사랑」·「가거라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이별의 부산정거장」·「산유화」·「청춘고백」·「무너진 사랑탑」 등이 있다. 

우약정 앞에는 호반 전망대 직전 안부에서 우측 호반길로 진행했던 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일중 김충현 선생의 현판 글씨를 단 우약정으로 올라, 

 

<우약정(雨若亭)>

우리 고유의 건축 양식을 본떠 만든 정자로, 진주시 대곡면 출신 재일교포 하경완 선생이 1974년 부모님의 묘소를 개수코자 금의환향하였다가, 살아생전 고향땅에 애향의 징표를 남기고 싶어 하였던 부모님의 유지를 받들어 진양호 호반에 사각 정자를 건립하여 진주시에 기증하였는데, 우약정이란 선친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멋들어진 정자 아래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우약정 뒤편  호젓한 숲길로 내려서면, 

 

정문 방향 이정표가 있는 선착장으로 이어진 도로에 내려서게 되고, 

 

지금은 유람선 운항이 중단된 선착장을 지나, 

 

몇 걸음 남지 않은 진양기맥의 종착지를 향하면, 

우측 진양호 건너편으로 보이는 남강댐 물문화관 조망

 

'탄성'과 '신음'으로 점철된 진양기맥의 종착지로 삼는 충혼탑이 시야에 들어오고, 

 

<충혼탑(忠魂塔)>

겨레와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분들의 조국수호와 향토방위의 희생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 2002년 진주시 판문동 산 208-17번지에 건립되었다. 진주시 충혼탑의 경우 시·군 통합으로 문산 충혼탑을 상평 충혼탑으로 통합하고, 2002년 판문동 진양호공원에 새로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충혼탑에는 총 1600여 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충혼탑 직전 진양호 조성으로 수몰된 마을들의 이름이 새겨진 '망향비'에서 마지막 인증을 남기며, 

진양기맥 종주의 마지막 의식인 '진양호 호수에 발 담그기'를 대신하고 진양기맥 종주를 마무리한다. 

 

 

진양기맥 종주의 시작은 2019년 9월 덕유산 토옥동계곡을 따라 남덕유산 서봉으로 올라 백두대간에서 진양기맥이 분기하는 남덕유산에서 그 첫걸음을 떼었는데, 코로나19로 산행모임 자체가 금지되는 등의 파행과 기맥종주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 등의 수많은 난관을 뚫고 5년여 만에 종주를 마무리한다. 157km의 길지 않은 진양기맥은 다른 어떤 정맥이나 기맥 마루금보다 훨씬 더 다채로웠던 듯하다. 길지 않은 마루금에서 기백산과 금원산은 물론 황매산, 자굴산, 집현산 등의 명산들이 산행의 의미를 굳건하게 하였고, 가시와 잡목 그리고 넝쿨로 뒤덮인 능선길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종주꾼을 회의에 빠지게도 하였지만 이내 멋들어진 숲길이 나타나서 약해지는 산꾼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를 거듭하여 마침내 종주를 마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한마디로 다사다난(多事多難), 아기자기 그 자체인 마루금 산행이었던 듯하다.   

 

 

 

진양호공원 충혼탑 아래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진주시가지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사우나에서 땀을 닦고, 

 

옛날 대간길 아니면 낙남정맥 산행에서 들렀던 기억이 있는 듯도한 촉석루를 가 보자는 의견에 따라, 

촉석루가 있는 진주성 공북문(拱北文)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하여 진주성 촉석루 탐방에 나선다.  

 

<진주성(晉州城)>
진주성은 백제 때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산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강변 절벽 위에 성채가 만들어졌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면서 남해안에 출몰하여 분탕질하는 왜구를 방비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이 물리친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그 후 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또다시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 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
1605년(선조 38)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였다. 그 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의 둘레는 약 1.7km이고, 외성의 둘레는 약 4km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전투를 이끈 김시민 장군 동상.  

2013년 복원된 진주성 우물
진주성의 동문인 촉석문 방향

 

 

주장(主將)의 지휘소이자 남쪽 지휘대인 촉석루.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누각으로, 고려 말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이다.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하였다. 평시에는 선비들이 모여 경치도 즐기고 쉬면서 시문도 짓고, 또 과거도 보는 곳이라 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했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6월 1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승격되었다.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촉석루(矗石樓)
의암 가는 길

 

 

촉석루에서 의암(義巖)으로..  

진주 남강 조망

 

의암(義巖).

의기 논개의 이야기를 최초로 전한 어우당 류몽인 선생의 어우야담에 실린 논개의 이야기와 시를 새긴 의암사적비

 

 

'차(茶)의 날 재정선언문 선포기념식'이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 촉석루.

촉석루에서 본 진주 남강 조망

 

 

의기 논개 사당. 

 

 

진주성 동문인 촉석문.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진주성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되었던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이 전시된 포대. 

 

 

진주성 촉석류 탐방을 마치고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지난 산행에서 뒤풀이를 가졌던 '대박생선구이' 집으로 이동하여, 

진양기맥 완주의 기쁨과 소회를 나누고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심정으로 진주여고 앞에서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귀경길에 올랐는데, 

 

졸업식날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며 양재에서 모두 내려,

단골집을 찾았으나 치킨처럼 먹혀버렸는지 문을 닫은 상태라,  

 

부리나케 찾은 호프집에서 못다한 예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늘려 보다가, 

 

마지막 지맥종주 코스인 팔공기맥 산행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귀갓길에 오른다. 

 

 

거칠고 힘들었던 진양기맥 종주도 마쳤고, 

마지막 남은 팔공기맥도 다음 달이면 마치게 된다.

이렇게 포기하지 않으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데, 

한사코 포기하고 싶은 인생길은 왜 더욱더 빨라지기만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