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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팔공기맥 9차(내밀재~갈현) : 홀로 걸어도 좋을 청화산과 냉산

by 재희다 2024. 9. 10.


산 행 지 : 팔공기맥 9차(내밀재~갈현)  대구시 군위군, 경북 구미시, 의성군.

산 행 일 : 2024. 06. 08.(토)
산행코스 : 내밀재(195m, 927번 지방도) ~ 334봉 ~ 남일재 ~ 355봉(둥근바위) ~ 409봉 ~ 냉산 갈림봉 ~ 냉산 왕복 ~냉산 갈림봉 ~ 땅재(68번지방도) ~ 551봉(H) ~ 497봉 ~ 612봉(H) ~ 690(3군 경계봉) ~ 695봉 ~ 청화산(701.2m) ~ 643봉 ~ 638봉 ~ 사거리 안부 ~ 286봉 ~ 293봉 ~ 갈현(2차선 포장도로) (기맥 산행 14.6km + 냉산 왕복 2.6km = 17.2km, 7시간 40분 소요)
산행참석 : 19 백두.

▶ 즐산팀은 땅재에서 출발하여 9km 산행.

 


<참고사항>

- 전반적으로 등로가 뚜렷한 편이며 대부분의 구간에는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다. 
- 내밀재에서 완만한 오르내림이 이어지다가 냉산 직진 안부를 지나며 급경사 오름길을 올라야 하고,

- 냉산 분기점에서 냉산 정상 왕복은 완만하고 호젓한 숲길이라 부담이 없으며,

- 냉산분기점에서 땅재로 내려서는 구간도 무척 가파른 내림길이 이어지는데, 좌측 구미 땅재와 우측 군위 땅재 방향이 나뉘는 갈림길에서 우측 군위 땅재로 내려서는 게 좋아 보인다. 
- 정자 쉼터가 있는 청화산 정상에서는 조망도 시원하게 트인다. 


<산행지도>

 

지난해 10월 여덟 차례의 산행으로 군위와 구미의 경계인 내밀재에 도착하여 두 번의 산행만을 남겨둔 팔공기맥 잇기를 잠시 접어두고, 청산도 주년산행과 체력 안배 특별산행을 진행하다가 잡목의 태클이 덜한 겨울철로 접어들며 그동안 미뤄두었던 호미기맥과 진양기맥 산행을 진행하여 거칠기로 소문난 호미기맥과 진양기맥 산행을 마무리하였다. 이제 9기맥 중에서 팔공기맥의 마지막 두 구간만을 남겨놓은 상태라 여름 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6월 두 번의 산행으로 9기맥 종주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카페에 팔공기맥 냉산과 청화산 구간 산행을 공지해 놓고 산행일의 일기예보를 살피는데, 하루가 다르게 비 예보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는지라 산행지 변경 가능성을 제외시키고 비가 오더라도 우중산행을 무릅쓰기로 결정해 놓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렇게 수시로 바뀌던 일기예보가 산행일을 하루 앞두고서는 산행일인 토욜 12시경에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에 따라 배낭에 방수재킷을 넣고서 집을 나선다.  

 

양재에 도착한 산행버스에 오르니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타고 있다. 쉽지 않은 기맥산행임에도 코스를 단축하여 산행을 할 수 있어서 별다른 부담을 가지지 않는 듯하다. 산행 코스를 설명하면서 거리가 14km로 짧은 편이고 업다운도 냉산 오름길 짧은 급경사 구간과 청화산 오름길 정도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라며 은근히 모두가 함께 산행하기를 권해 보았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아 땅재에서 출발하여 청화산 구간만 산행하는 단축코스를 별도로 진행하기로 한다. 

 

 

팔공기맥이 그간의 호미기맥이나 진양기맥보다는 다소간 가까운 곳이라서 서울을 출발한 버스가 산행 출발지인 내밀재에 새벽 두 시 남짓에 도착했고, 버스에서 한 시간 이상의 쪽잠을 더 청하다가 일어나 산행 준비를 하고 버스 문을 나서니, 

 

일 년여 만에 오는 내밀재가 초행길인 듯 무척 낯설게 느껴지고, 

 

<내밀재/나밀재>
경북 구미시 해평면 창림리와 군위군 소보면 도산리를 잇는 927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냄밀재, 남일재, 나밀재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려져 혼란스럽다. 내밀재란 이름이 유래된 남일(藍一) 마을은 칠봉의 남방 1.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남일이란 이름은 이 마을 서쪽 해평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에 옛날에는 산적이 나타나므로 밤에는 넘기 어려워 어둡기 전에 넘어야 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남일재가 나밀재, 내밀재, 내머리재 등으로 변음된 것으로 짐작되며, 가까이 있는 마을을 냄일로 불란다 한다.

『남일재(藍一峙)는 구미시 해평면 도문리 내미리마을에서 군위군 소보면 도산리 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지만, 조선시대의 고문헌과 고지도에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한국지명총람》에 "남일재(내미티, 남일티, 藍一峙) : 냄일에서 해평면 도문동, 습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중략) 냄일(새마을, 藍一) : 남일재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기록과, 같은 문헌의 선산군 해평면 도문동 기록에 "내밀재(남일재) : 남일에서 산동면 도산동의 칠풍으로 넘어가는 재. (중략) 냄일이(남일, 남일리) : 습문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 내밀재 밑이 됨"라는 기록이 있어 이칭인 '내밀재', '남일티', '남일치', '냄일이'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개 지명에서 파생된 촌락 지명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지명유래집)

 

 

고갯마루 좌측 아래에 구미시에서 개설해 놓은 정규 등산로를 두고,

기맥꾼들의 들머리인 구미시 해평면 교통표지판 옆 들머리로 들어서며 팔공기맥 아홉 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묘지길이어서 그런지 말끔히 정비된 등로를 따라 가족묘지를 지나 절개지 상단 방향으로 올라, 

 

'준.희'님의 '격려문'이 걸려있다는데 밤이라 확인이 안 되는 얕은 봉우리(223.1m)를 넘고, 

 

내밀재 좌측 구미 쪽에서 오르는 등로와 만나는 안부를 지나서 제법 뚜렷해진 등로를 따라 오르다가, 

 

등로 가운데를 깊게 파 놓은 오토바이 바퀴자국이 불편하기 짝이없는 가팔라진 오름길을 올라서는, 

 

우측 지능선 분기점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완만한 소나무숲 능선길을 따르다가, 

 

밋밋한 안부를 지나 다시 가팔라진 오름길을 오르는데, 

 

우.후방으로 엠스클럽의성 CC쯤의 불빛이 다른 방식으로 새벽을 맞는 분들도 있음을 문득 떠올리게 하고, 

 

좌측 해평면 방향 지능선 분기점에 올라서는 우측의 완만해진 소나무숲 능선길로 오르면, 

 

애기장수가 흘린 공깃돌인 듯한 둥그렇고 커다란 바위가 놓인 354.7봉을 지나게 된다. 

 

 

354.7봉을 지나 제법 급하게 고도를 떨구어 좌.우로 길흔적이 있는 안부인 개념도의 '남일재'쯤을 지나고, 

 

가팔라진 오름길을 치고 올라, 

 

두리뭉실한 405봉쯤에 올라서자, 

 

다시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라 밋밋한 안부와 작은 봉우리를 연이어 지나고, 

 

다시 짧은 오름길을 올라서는 평탄한 소나무숲 능선길을 잠시 더 따르면, 

 

두어 개의 표지기를 거느린 '준.희'님의 산패가 걸린 408.6봉에 도착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첫 쉼을 한다. 

 

 

짧은 쉼을 뒤로하고 평탄한 능선길을 따라 기맥길을 따르다가, 

 

평탄하게 이어지던 기맥길이 내림길로 바뀌며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냉산 산줄기가 성큼 다가서고, 

 

이내 다시 평탄해진 호젓한 소나무숲길을 이어가면, 

 

봉분이 낮아진 묘지와 잡풀만이 듬성듬성한 묘지에 연이어진 안부를 지나 잠시 가팔라진 오름길을 오르면, 

 

다시 평탄하고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지다가, 

 

냉산 직전의 안부로 내려서는 내림길로 접어드니 앞쪽으로 냉산 주능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2기의 묘지를 지나 완만해진 능선길을 잠시 더 따르면, 

 

좌측 해평면 창림리 방향으로 뚜렷한 등로가 이어져 있고 서낭당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덤이 있는 옛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이 고개에서 냉산분기점까지 200고지 이상의 급경사 오름길을 쳐올려야 한다.

 

 

가파른 등로에 나 있는 오토바이 바퀴자국이 산꾼의 발과 마음을 힘들게 하는 등로를 따라, 

 

서 있기조차 힘든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다가, 

 

직진의 능선으로는 약초꾼의 흔적인듯한 희미한 족적만이 보이고 뚜렷한 등로가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능선으로 올라도 되지만 우회하여 오르는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다가, 

 

다시 좌측 기맥 능선 방향으로 꺾어서 오르는 등로를 따르면, 

 

이내 다시 기맥 능선에 접속하여 가파른 능선 오름길을 오르다가, 

 

따르던 등로가 다시 또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이번에는 우측 사면 방향 등로를 두고 희미한 길흔적을 더듬어 직진의 기맥 능선으로 들어서서, 

 

거대한 절벽 암릉을 우회하여 절벽 위로 오르면,  

 

완만한 육산의 기맥 능선으로 호젓한 오솔길이 이어지고, 

 

양탄자인 듯 폭신하게 깔린 낙엽을 밟으며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잠시 따르면, 

 

618.1봉 산패와 이정표가 있는 냉산 갈림봉(618.1m)에 도착하여,

배낭을 두고 좌측 1.3km 떨어진 냉산 정상을 다녀와서 우측 땅재 방향으로 기맥길을 이어가기로 한다. 

냉산 갈림봉(618.1m) 이정표

 

 

냉산 갈림길에 배낭을 두고 기분까지 가쁜해진 상태로 태조산(냉산) 도리사 방향 등로로 들어서서,   

 

편평한 숲길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서다가, 

 

둥그런 안부를 지나서 오르면,

 

좌측 1주차장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헬기장을 지나게 되고, 

 

다시 좌측 2주차장 방향 갈림길 있는 안부로 내려섰다가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능선 길에 이정표와 정상석이 연이어 나타나는 냉산(태조산) 정상에 도착하여,

"그냥 한번 와 봤다!"며 인증을 남긴다.

 

<냉산(冷山, 692m)>
경북 구미시 해평면과 도개면, 군위군 소보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일명 태조산(太祖山)이라 불리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산성을 쌓고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인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선산도호부의 동쪽 13리에 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이곳에 머물렀으므로 그렇게 불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여지도서(선산)」, 「대동여지도」, 「1872년 지방지도(선산)」에 '냉산(冷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의 "냉산[冷山, 냉산성(冷山城), 배너미산, 태조산(太祖山), 숭신산성] : 숭신산성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이곳에 웅거하면서 후백제 견훤과 싸웠음"이라는 기록을 통해 냉산의 이칭인 '배너미산', '태조산'과 함께 냉산 정상에 '냉산성' 혹은 '숭신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미 냉산이 태조산(太祖山)으로 불린 이유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이 산에 어가(御駕)를 두었던 데서 유래한다. 실제 왕건은 925년 팔공산 전투에서 명장 신숭겸을 비롯한 여러 장수를 잃는 등 견훤에게 패한 후 이 산에 숭신산성(일명 냉산성)을 쌓아놓고 929년과 930년 안동 전투에서 잇따라 견훤의 후백제군을 대파한다. 이후 견훤이 왕위 계승자로 금강을 지명한 데 불만을 품은 신검은 935년 동생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로 유폐한 후 왕건의 고려군과 맞섰지만, 냉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인근 선산읍 일대와 고아읍 일대 전투에서 결국 참패하고, 이로써 왕건의 후삼국 통일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냉산을 후세 사람들이 태조산으로 부르게 됐고, 도리사의 일주문과 안내판 등에도 태조산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충남 천안의 진산으로 통하는 태조산(421m) 역시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이어서 붙은 산 이름이라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는 ‘도리사에는 신라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있던 곳이다. 그 당시 신라에는 불교가 없었는데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라는 승려가 고구려로부터 와서 이 府의 도개부곡 모례의 집에 머물렀는데 모례가 움집을 만들어 거쳐하게 만들었다. 그가 물러간 뒤에 아도화상이 시종과 더불어 3명이 또한 모례의 집에 왔다.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여 수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질병이 없었다. 나중에 시종이 머물러 있으면서 경율(經律)을 강론하였더니 더러 믿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신라 불교의 시초이다. 아도화상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갔다 돌아와 이 산밑에 이르니 겨울이 한창인데 산 허리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이곳에 절을 세우고 도리사(桃李寺)라고 이름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법흥왕 때 이차돈이 순교(527년)하여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110년 전의 일이다.

냉산 정상의 쉼터 바위

 

 

냉산 정상 남쪽 아래에 자리한 신라 최초의 불교 전래지인 도리사도 둘러보고 싶지만 후일을 기약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도리사(桃李寺)>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번지에 위치한 신라 최초의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눌지왕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度和尙)이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 포교를 위해 처음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이다. 아도화상이 수행처를 찾기 위해 다니던 중 겨울인데도 이곳에 복숭아(桃)꽃과 오얏(李)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고 좋은 터임을 알고 이곳에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짓고 이름을 복숭아와 오얏에서 이름을 따 도리사(桃李寺)라 하였다. 도리사 입구에는 海東最初伽藍聖地太祖山桃李寺(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라는 산문이 그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하는 곳이다. 그 후 1677년(숙종 3)의 큰 화재로 절이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부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라불교 초전법륜지로 불교의 성지인 이곳에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때에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1976년 세존사리탑 보수공사 중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에 봉안되어 발견되었다.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는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냉산 남쪽 기슭에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 화상이 417년 신라 눌지왕 때 신라 최초로 창건한 절인 도리사(桃李寺)가 있는데, 수선요 뒤로 들어가면 17세기에 조성된 극락전이 있고 그 앞 뜰에 보물 제470호인 도리사 화엄 석탑이 있다. 높이 3.3m 규모의 이 탑은 고려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국내에서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독특한 형태의 모전석탑이다. 또 석탑 옆 문으로 나가면 아래쪽 솔밭에 아도 화상이 참선을 했다는 좌선대가 있고, 그 외에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아도 화상 동상, 범종각 등을 둘러볼 수 있다.
한편 1977년 도리사 세존사리탑(석종형 부도)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 절에는 대웅전이 없고, 적멸보궁과 뒤뜰의 사리탑이 대웅전과 불상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진신사리를 담고 있던 금동육각사리함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김천 직지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외 아도 화상이 입적한 곳이라고 알려진 금수굴이 있고, 인근에 불교를 처음 포교하여 불도가 열린 곳이라 하여 지명을 얻은 도개리(道開里)가 있다.』 

 

<아도화상(阿道和尙)>
아도화상은 중국 위나라  아굴마의 아들로 일명 묵호자라고도 부른다. 신라 19대 눌지왕 때 19세의 나이로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몰래 들어왔다.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의 모례장자의 집에 숨어서 낮에는 우곡에서 소와 양을 기르는 목동이 되고 밤에는 많은 사람을 모아 불법의 자비로운 진리를 강론하기를 3년이나 계속하였으며 도리사를 창건하였다.

 

<도리사(桃李寺)와 직지사(直指寺)의 인연>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짓고 금산(金山, 지금의 김천시) 금릉땅을 바라보니 황학산(黃鶴山) 중턱에 좋은 절터가 보이므로 승도들에게 손가락으로 절터를 가리켰다 하여 절 이름을 직지사(直指寺)라 하였다고 한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年(418)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후 936년에 능여대사가 중건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입적할 때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이산 아래 큰 절터가 있음을 아는가?"
하고 턱으로 가리켜 주었다 하여 "직지사"라고 했다는 전설도 있고 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이 절을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측량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도리사"가 신라 최초의 가람(伽藍)이란 것이 이미 판명되었고, 아도화상이 수도했다는 곳에서 똑바로 정면에 직지사가 있는 것을 보면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의해 비롯된 것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많은 승병을 이끌고 왜병과 싸워 전공을 세웠으며 일본과의 외교에서 많은 활약을 하여 포로를 구출한 사명당(四溟堂)이 13살에 직지사에서 수도하였다. 
이렇듯 도리사와 직지사는 불가분의 인연을 갖고 불도의 수련장이요 호국의 도량(道場)으로서 우리 겨레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함께하여 왔다.

 

배낭을 두고 온 냉산 분기점을 향해 헬기장을 지나고,  

 

평탄하고 호젓한 숲길을 따라, 

 

팔공기맥의 냉산 분기봉으로 되돌아 나와 아침식사를 한다. 

 

 

산행 초반이라 그런지 우려와 달리 냉산 오름길이 그리 어렵지 않았고, 냉산 정상을 왕복하는 숲길도 평탄하고 호젓하여 여유롭게 다녀온 상태에서 아침식사까지 마치니, 벌써 산행을 다 한듯한 느낌이 들어 편안한 마음으로 냉산 분기봉 사진을 남기고는 땅재를 향하여, 

 

잠시 평지 수준의 완만한 내림길을 따르다가, 

 

오래된 이정표가 뉘어있는 610봉쯤을 지나면, 

 

좌측 구미 땅재로 이어지는 등로와 직진의 군위 땅재 방향 등로가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정표의 좌틀하여 이어지는 군위 땅재 방향 등로는 뚜렷이 잘 나있고, 이정표의 직진 방향인 군위 땅재 방향 등로는 희미하다. 그런데 양쪽 등로 모두 기맥 능선을 조금씩 우회하여 지나게 되지만 구미 땅재 날머리는 땅재 고갯마루에서 좌측 구미 방향으로 2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반면에 군위 땅재 날머리는 고갯마루에 있으며 전체적으로 기맥 능선과 보다 가깝게 이어지고 등로도 제법 뚜렷하여 지나는데 불편함이 없으므로, 

 

뚜렷한 등로를 따라 좌틀하여 구미 땅재로 향하는 분들을 불러세워 직진의 군위 땅재 방향으로 진행한다. 

구미 땅재와 군위 땅재 갈림길 이정표

 

 

좌틀하여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두고 직진의 군위 땅재 방향으로 들어서면,

 

기맥능선과 나란한 우측 지능선으로 희미하고 가파른 내림길이 이어지는데, 

 

통행이 많지 않아 희미해지고는 있지만 나무계단과 이정표까지 설치되어 있고, 

 

따르던 지능선을 두고 좌측 기맥능선 방향 사면으로 좌틀하여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면, 

 

구미 땅재 갈림길 이후 기맥 능선에서 또다시 우측으로 분기된 지능선에 접속하여 내려서게 되고, 

 

이내 다시 접속한 지능선에서 한번 더 좌측 사면으로 진행하여, 

 

방치되어 거칠어지고 있는 사면 등로를 따르면, 

 

마침내 땅재로 이어지는 기맥 능선에 다시 접속하여 땅재로 내려가게 된다. 

 

 

뚜렷하지만 급경사의 등로를 따라 땅재를 향해 내려가면서, 

 

급경사의 통나무 계단이 낙엽으로 덮여 있어서 불필요한 땅을 사기도 하지만,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급경사 내림길을 조심조심 내려서면, 

 

등로가 완만해지며 멋진 숲으로 이어지다가,  

 

등로 우측 아래로 시멘트포장 임도가 보이더니, 

 

이내 땅재 고갯마룰 지나는 2차선의 포장도로가 나타나며, 

 

고갯마루에 ‘召保(소보)'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군위 땅재 날머리로 내려서게 되는데,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땅재 부근에서 기맥 능선을 따르려고 하다가 무척 고생스럽게 땅재로 내려서게 된다고 해서 우려를 했는데 의외로 잘 나있는 등로를 따라 편하게 땅재로 내려선다.

 

<땅재/땅고개(堂峙, 280m)>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와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를 있는 고개다. 아스콘포장의 2차선 6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 아래로는 2017년 개통된 상주영천고속도로 군위터널이 지난다. 조선시대 큰 고목과 서낭(돌무더기), 당집(성황당)이 있어서 당고개, 당현(堂峴) 또는 당재라고 불렀고, 재 아래에 있는 마을이름을 당현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흘러 당재라는 말이 변하여 땅재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땅재라 부르니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하는 지도에도 이 고개를 두고서 땅재, 마을 이름을 당재라고 표기하고 있다. 청화산과 냉산 사이에 위치하며, 고갯마루에는 ‘召保’라 새긴 커다란 돌 표석이 군위군 소보면을 알린다. 

<소보면(召保面)>
대구광역시 군위군(軍威郡) 서부의 면이다. 군위군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군위읍과 의성군 봉양면, 남쪽은 구미시 장천면과 산동면, 서쪽은 구미시 해평면과 도개면, 북쪽은 의성군 비안면, 구천면과 경계를 이룬다. 소소보부곡(召召保部曲)이었는데, 조선조에 소소본면(召召本面) 또는 석본면(召本面)이라 하여, 대흥, 농암, 상소, 하소, 부황, 호암, 상량, 달천, 어의, 모로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땅재 우측 군위군 방향
좌측 땅재 들머리가 있는 고갯마루 전경

 

 

군위 땅재 날머리에서 좌측 구미 방향으로 조금 이동하다가 우측의 구미시 도개면 교통표지판을 지나서,  

땅재 좌측 구미시 도개면 방향

 

우측의 청화산 등산로 입구인 들머리로 들어서면, 

 

청화산 정상까지 4.2km라는 이정표와 「청화산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제법 가파르지만 야자메트까지 깔린 잘 정비된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가팔라지는 등로 가에 설치된 벤치 쉼터의 유혹에 못 이겨 배낭을 내리고 잠시 쉼을 한다. 

 

 

가파른 사면에 설치된 돌계단이 산악오토바이 바퀴에 허물어진 등로를 오르고, 

 

더욱 급해진 침목 계단길 옆으로 산악오토바이가 깊은 도랑을 파 놓은 급오름길도 올라, 

 

의성군 소방서에서 설치한 청화산 10번 구조목을 지나면, 

 

가파르던 등로가 완만해지며 벤치 쉼터를 지나게 되고, 

 

푸르름이 싱그러운 완만한 육산 능선 오름길을 쉬엄쉬엄 오르니, 

 

앞서 가던 분들이 지도를 꺼내어 둥그스름한 이곳이 봉우리냐 아니냐를 두고 내기라도 할 기세이고,  

 

더욱 평탄해진 숲길을 유유자적 따르다가, 

 

청화산 정상이 2.9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폐헬기장 한켠에 벤치가 자리한 550.6봉을 지나게 되는데, 땅재에서 제법 가파른 경사를 극복하고 만나는 첫번째 봉우리로, 이후 청화산 정상까지는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고도를 높여 나아가게 된다. 

 

 

551봉 헬기장을 뒤로하고 "너무 많이 내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려서다가, 

 

좌측 다곡2리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안부를 지나고, 

 

다시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쉬엄쉬엄 오르면, 

 

그닥 쓰이지 않을 듯한 벤치가 자리한 497봉쯤을 지나게 되는데, 

 

앞쪽으로 가야 할 612봉쯤이 나뭇가지 위로 건너다 보이고, 

 

잠시의 완만한 안부를 지나 꾀나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돌아본 베틀봉 방향

 

등로 우측에 헬기장이 있는 612봉쯤에 도착하여 잠시 배낭을 내리고 목을 축이며 쉼을 한다. 

 

 

어렵지 않은 코스임에도 후텁지근한 날씨로 점점 무거워지는 몸뚱이를 이끌고 잠시 내려서다가, 

 

청화산 정상이 1.4km 남았다는 이정표와 10번 구조목이 있는 안부를 지나, 

 

다시 가팔라진 오름길을 잠시 오르다가, 

 

땀이 좀 베어나려 할 즈음이면 등로는 어김없이 완만하게 바뀌고, 

 

깔아놓은 야자메트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산악오토바위를 원망하며, 

 

암릉이 조금 더 높아서 산악오토바이의 통행을 막아줬으면 하는 아쉬음이 드는 암릉을 지나고, 

 

꾀나 가팔라진 급경사를 짧게 오르면 우측 의성·군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고 정상에 묘지가 자리한 694봉을 지나게 되는데, 좌측은 구미시 도개면이 계속되지만 우측이 군위군 소보면에서 의성군 구천면으로 바뀌게 되는 삼군 경계봉이다. 

 

<690봉>

690봉은 군위군 소보면, 의성군 구천면, 구미시 도개면이 만나는 3군 경계봉으로, 노귀재를 지나 보현지맥 분기점에서 만나 여태껏 팔공기맥과 함께 해 온 군위군과 헤어져 기맥 우측이 새로이 의성군 구천면으로 바뀌고, 좌측은 도개면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정상에는 말끔히 단장된 묘지 1기가 있고, 우측 지능선으로 의성·군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의성군(義城郡)>

의성군(義城郡)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중앙부에 있는 군으로, 북쪽에 안동시, 동쪽에 청송군, 서쪽에 구미시, 상주시, 예천군, 남쪽에 대구광역시 군위군과 접해 있다. 대구권에 속한 지역이며, 의성군의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흐른다. 낙동강의 주요 지류 중 하나인 위천이 의성 군내를 관통하며, 경작지가 넓고 평야지대가 비교적 많다. 특히 군 서부의 안계평야는 경주의 안강평야, 영천의 금호평야와 함께 경북에서 손꼽히게 넓은 평야다. 이 때문에 농업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했던 19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인구가 20만을 넘을 정도로 제법 큰 군이었지만, 이후 농촌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해 현재(2024년) 5만이 채 안 되는 대표적인 인구소멸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삼한 시대에는 조문국(召文國)이라는 부족국가가 금성면 지역을 중심으로 있었으며, 이 때문에 금성면에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신라 벌휴 이사금(서기 185년) 때 구도와 구수혜 장군이 정복해 신라 땅이 되었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문소군(聞韶郡)이라 개칭되었다. 문소군 소속 영현이 넷 있었는데 진보현(眞寶縣, 의성읍), 비옥현(比屋縣, 비안면), 안현현(安賢縣, 비안면), 단밀현(單密縣, 단밀면)이다. 즉 신라 때는 금성면이 중심이고 의성읍이 외곽이었는데 나중에 서로 뒤집힌 것이다.
고려 초에 이르러 문소군의 성주 홍술이 후삼국의 다툼 속에서 왕건을 지지했고, 이미 고려의 장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견훤은 5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문소군을 공격해 왔고, 홍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왕건은 "나의 팔이 떨어져 나갔구나"하고 애통해하며 홍술에게 김씨(金氏) 성을 하사(下賜)하고, 그를 의성군(義城君)이라 높여 부르게 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왕건은 940년(태조 23)에 문소군(郡)을 나라 안에 10곳밖에 없는 부(府)의 한 곳으로 승격시키고 이름도 홍술 장군을 기려 의로운 고장이라 하여 의성부(義城府)라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 의성이리는 지명이 생긴 유래라고 한다. 한편, 안계 평야 일대는 속현(屬縣)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비옥현, 안정현(현재의 의성군 서부 지역 중심지인 안계가 있는 곳), 단밀현, 다인현 등이 있었는데, 비옥과 안정은 의성을 주현으로 하고 있었고, 단밀은 처음에는 의성의 임내였으나 후에 소속 주현이 상주로 바뀌었고, 다인은 처음부터 상주의 임내였으나 예천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조선 초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비옥현과 안정현만 비안현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독립하였으며 나머지 두 속현은 소속 주현에 흡수되었다. 조선 후기인 1895년(고종 32)에 전국이 13도로 개편되면서 의성, 비안이 군으로 바뀌었다. 1906년 단밀, 다인 일대가 구 비안군에 흡수되었다. 1908년 구 비안군과 구 의흥군 일부를 통합하였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비안군을 흡수하였으며 18개 면이 되었다. 1934년에는 산운면과 소문면을 통합하여 금성면으로 개칭하여 17개 면이 되었고, 1940년 11월 1일에 의성면이 의성읍(1읍 16면)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4월 1일 안사출장소가 안사면으로 승격하여 1읍 17면이 되었다.

의성은 추위와 더위로 유명한 곳이다. 역대 최저기온은 1981년 1월 17일의 -23.3 ℃, 최고기온은 2018년 8월 1일의 40.4 ℃이다. 최한월이 약 -3°C라 온대 하우 기후와 냉대 동계 건조 기후의 중간지대에 위치한다. 그리고 봄에는 아침에 0도 근처까지 떨어지고 낮에 25도 근처까지 오르는 등 일교차가 매우 심하다. 겨울에는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고, 여름에는 35도 이상으로 오르는 등 연교차도 심하다. 내륙에 있지만 강수량이 적은 동네라서 여름에 뜨겁기는 해도 기온에 비해서는 생각보다 죽을 듯이 숨막힐 정도는 아니다. 강수량이 적은 것은 겨울도 마찬가지로 눈 구경하기 힘들고 엄청나게 건조하다.

의성은 마늘이 특산품으로 첫손에 꼽히는 고장이다. 마늘은 우리 건국신화에서 사람 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가 먹었다는 친숙하고 오랜 역사를 지닌 농산물이다. 이 마늘로 유명한 고장이 바로 경북 의성군이다. 마늘 재배 면적이 약 1500㏊, 연간 생산량이 약 1만 5000t이나 된다. 의성 마늘은 한지형(내륙 추운 지역에서 재배하는 마늘을 가리키며, 남부 해안지역 따뜻한 곳에서 재배하는 마늘은 난지형이라고 한다)으로 전국 마늘 생산량의 4% 정도를 차지하며, 한지형만 따지면 24~25%를 차지해 전국 제1위의 점유율을 보인다고 한다. 의성 사람들은 이곳 마늘이 조상 대대로 재배해 온 토종으로 즙액이 많아 적은 양으로도 양념 효과가 높고 김치의 신맛을 억제하는 기능도 탁월하다고 자랑한다.

690봉 정상에 자리한 묘지. 옛날 청화산 정상에 묘를 쓰면 인근에 가믐이 든다하여 말썽이 자자했었는데...ㅉㅉ

 

 

삼군봉인 690봉을 뒤로하고 완만하게 내려서다가, 

 

밋밋한 안부를 지나 작은 능선 봉우리에 올라 뒤돌아 보니 잠시 전에 지나온 냉산과 땅재가 조망되고, 

 

연이어 나타나는 능선 봉우리를 오르니, 

 

능선 봉우리 등로 한가운데에 오래된 묘지를 지나게 되는데,

어린 시절인 1970년대 초반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여름 동네 어른들이 하시던 예기가 생각난다. 

 

예부터 화산 꼭대기가 명당이라 묘를 쓰면 후손들은 잘 되지만 근방에 비가 내리지 않아 심한 가뭄이 든다고 했다. 그해 여름도 비가 내리지 않아 화산 아래의 꾀나 큰 저수지인 조성지도 말라버려 논의 벼가 타들어 갈 정도로 심한 가뭄이 들었다. 그때 동내 어른들이 모여  화산에 쓴 묘를 파내어야 한다며 인근 주민들과 함께 화산으로 간다고 했다. 그때 화산 정상에 쓴 묘를 파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높아서 어떻게 묘지를 썼을까 싶은데도 화산의 많은 봉우리마다에는 유난히도 묘지가 많다.  

 

 

그렇게 작은 능선 봉우리를 넘나들며 청화산 정상을 향하다가, 

 

등로 좌측으로 조망바위가 보이기에 들어가 보니,

좌측 도개면 다곡리 방향으로 냉산에서 서쪽 낙동강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가 시원스레 조망되고, 

 

잠시 더 능선길을 따라 오르니, 

 

청화산 정상 정자에서 앞서간 분들이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며 기다리고 있다. 

 

<청화산(靑華山, 700.7m)>
경북 구미시 도개면과 의성군 구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이다. 「일선지(一善誌)」에 「화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청화산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북쪽 골짜기 산 아래 청운동 마을과 남쪽 산 아래 신화동 마을, 동쪽에 화실이란 마을이 있어 자연스럽게 청산, 화산이라 부르다가 청화산이 된 것 같다. 청화산 주봉은 박봉(일명 용두봉)이다. 서북쪽 아래에는 가뭄이 들 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용샘이 있다. 그리고 다곡리에서 보면 주로 보름달이 솟아오르는 곳이라 해서 달뜨기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래 청화산(靑火山)으로 꽃(華)이 아닌 불(火)로 표기한 것을 꽃(華)으로 표기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다. 불을 뜻하는 산이름 탓인지는 몰라도 유난히 산불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어느 선비의 제안으로 불을 뜻하는 화(火) 대신 꽃을 의미하는 화(華)로 바뀌게 되었다는 믿지 못할 얘기가 전한다. 어쨌든 산명의 표기를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산불이 자주 발생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청화산 정상은 의성군에서는 「용솟음봉」으로, 구미시에서는 「박곡봉」으로 부르고 있다. 청화산 내 지명으로 마당미기.수리덤.방앗골.점티골.칭이골.벌샘.옷샘.불당골.위기소.통시웅덩.대목바위 등이 있는데 모두가 저마다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백련사지(白蓮寺址)가 상상봉에 남아 있는데 빈대가 많아서 절이 없어졌다고 전하며 군위땅이다. 용솟음 마루는 메워서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변하여졌는데 여기서 내려다보면 의성서부 7개면, 상주 일부와 구미시, 군위군 등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막혔던 가슴이 트이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청화산 정상 이정표와 등산 안내도. 

 

<청화산 정상의 이정표>
청화산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에는 백운동(白雲洞)과 청운동(靑雲洞)이 있어 예부터 청산은 아름답고 흰 구름이 드높은 선경이라 했다. ‘무한청산 행욕진(無限靑山 行慾盡=끝없는 청산 산길 끊긴 곳), 백운심처 유인가(白雲深處 有人家=흰 구름에 감춰진 곳 인가가 있더라)’라는 옛 글을 취하여 청산1리를 백운동, 조성지에 연해있는 청산2리를 대칭의 개념으로 청운동이라 한다.
또 서편의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아래 도개리에는 최근에 지은 신라불교 초전기념관과 함께 도문화재자료 제296호인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인 모례(毛禮)의 집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물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큰 독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밑바닥을 두꺼운 나무판자로 깔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나무판자는 아직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이 우물과 이웃마을의 도리사(桃李寺)는 신라 불교의 전파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불교 성지다.
도개는 신라시대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유서깊은 곳이다. 삼국의 불교 전래시기는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 (372)에 전진의 순도가 불교를 전하였다고 하고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의 마라난타가 전하였다고 한다. 그중 신라가 가장 늦어서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로부터 승 묵호자가 일선(지금의 선산) 지방 모례의 집에 들어와 전도하였고 소지왕(479∼500) 때 다시 고구려에서 아도가 와서 전도하였으나,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공인되었다.

 

 

사방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청화산 정상에서 본 구천면 방향이 연무로 희미하여 아쉽기만 하다.

 

<구천면(龜川面)>
구천면(龜川面)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의성군의 면이다. 넓이는 43.6k㎡이고,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1,984명이다. 원래 비안군에 속하였으나 1907년 6월 1일 의성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내서면(구천, 산구, 용점, 용천, 조성, 신촌, 조개, 흥암, 모고, 흥전 등 10개리) 외서면(하리, 팔미, 천동, 가리, 율지, 원산, 내동, 유산, 비산등 9개리) 단동면(상국, 중국, 하국, 장곡, 소리, 청신, 조율, 간제, 하사, 상제, 용신 등 11개리)을 합하여 구천면(위성, 조성, 모흥, 소호, 미천, 유산, 내산, 장국, 용사 등 9개리)으로 개칭하였고, 1987년 1월 1일 선산군 도개면 청산리(백운,청운동)가 구천면에 편입되었다. 

구천면의 명칭 유래는 구천서원(龜川書院)에서 유래하였다. 1721년(경종1 신축)에 세워진 이 서원은 1868년(고종5-무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육선생매판소(위성2리 마을안 위치)라는 비석만이 남아 있다. 또한 청화산에서 발원하여 면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위천으로 합류하는 귀천(龜川, 지금은 비산천이라 함)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구천면 소재지는 위성리(산구)에 있었는데, 8.15해방 직후에 면의 중심부가 되는 지금의 유산리로 옮겼다고 한다.

 

살짝 당겨본 구천면 방향
서남쪽 냉산에서 서쪽 낙동강 방향으로 뻗은 능선 조망
남동쪽 땅재 방향
동북쪽 비안면 방향
북쪽 단밀면 방향
백두산우회 팔공기맥 청화산 정상 인증
박곡봉이라 적힌 청화산 정상석 도개면 방향

 

 

청화산 정상의 헬기장을 가로질러 정화산 내림길로 들어서면,  

 

등로 우측에 "옹달샘" 표시판이 세워져 있는데, 

 

3~40여년 전 멧돼지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산 정상부에서는 흔치 않은 옹달샘으로 식수로 이용되었는데, 멧돼지들의 개체수가 늘어나며 멧돼지들이 붐비는 목욕탕으로 변하였다가 최근에 등로를 정비하면서 차단막으로 가려놓고 "식수 금지"라는 표지판을 걸어놓았고, 

 

완만한 기맥 능선으로 이어진 넓은 등로를 따르다가, 

 

육산 능선에 이채로운 바위들이 있는 곳을 지나는데, 

 

앞쪽으로 가야 할 643봉과 637.2봉으로 이어진 완만한 기맥 능선이 조망되고, 

 

4륜 차량이라면 너끈히 청화산 정상까지도 오를 수 있을 정도의 임도를 따라, 

 

헬기장 바닥에 깔았던 보도블록을 산악오토바이 차단시설로 재활용하고 있는 643봉 폐헬기장쯤을 지나고, 

 

육산 능선길에 바위가 드러난 곳을 지나는데, 

 

좌측 도계면 방향으로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지만 연무로 흐릿하여 아쉽기만 하고, 

 

우측 청산리 방향 지능선이 분기하는 638봉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다가, 

 

삼거리 갈림길에서 기맥길은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너른 다항리 방향 임도를 두고 우측 구천면 청산리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직진의 다항마을과 주륵폭포로 가는 넓은 임도는 구미시에서 정비해 놓은 일반 등산로이고 기맥길은 우측 좁은 등로로 들어서야 하는 지점으로, 이곳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는 좁은 숲길이 이어지지만 의성군에서 잘 정비해 놓아서 진행에 어려움이 없다. 

갈림길에서 모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백두들

 

 

기다리던 후미들도 도착하여 모두 함께 알바가 잦은 갈림길을 뒤로하고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그저그런 세 그루의 소나무에 '삼형제송'이란 표시판을 세워 놓았는데, 아마도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산객들의 흥미를 끌어볼 요량으로 새로이 만든 게 아닌가 싶고, 

 

<삼형제송>

비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를 지탱하는 것이 뿌리입니다. 가족간에 정이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 활력 넘치는 희망 의성 - 

 

인구가 소멸해가는 의성군에서 없는 돈을 들여서 정비해 놓은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등로는 점점 가팔라지며 침목 계단길과 데크목 계단길을 연이어 내려서게 되고, 

 

다소간 완만해진 내림길을 따라 청화산 1반 구조목을 지나, 

 

뚜렷하고 호젓한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따르던 등로는 우측으로 휘어져 임도사거리로 이어지고 기맥길은 직진의 능선 숲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호젓한 산길이 좋은 즐산팀들은 기맥 능선을 우회하여 갈현으로 진행할 수 있는 정규 등로를 따라 진행하고, 

 

"거칠어 봐야 진양기맥만 하겠어!"라며 따르던 등로를 두고 기맥 능선인 직진의 숲으로 들어선다.  

 

 

정규 등로를 두고 기맥 능선으로 들어서자 잡목으로 뒤덮여 거칠지만 제법 뚜렷한 길흔적이 이어지다가, 

 

우측 아래 임도사거리에서 갈현으로 이어지는 임도에서 이어오는 수레길에 접속하여 좌측 수렛길을 따르면, 

 

제법 넓은 삼거리가 나오는데, 

 

묘지길로 보이는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수레길을 두고 직진의 기맥길 들머리의,  

 

노간주나무둥치에 '준.희'님의 '힘힘힘!' 응원 패가 걸려있고,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올라, 

 

그늘사초로 덮인 둥그런 287봉에서 마지막 배낭털이를 하며 쉬어가기로 한다. 

 

 

"12시 전 하산 불가!"라는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더디 감을 한탄하며,

다시금 배낭을 메고 갈현을 향해 기맥길로 들어서서, 

 

얕은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 작은 봉우리를 지나고,  

 

멧돼지의 먹이활동 흔적이 역력한 안부를 지나, 

 

완만한 소나무숲 능선을 오르면,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291.6봉에 오르게 되는데,

선답자들의 표지기만 한두개 걸린 291.6봉 정상에서 기어코 인증을 남기고는 우측으로 휘어져 능선 내림길로 들어서면, 

 

능선을 따라 연이어진 묘지를 지나고,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갈현 건너편의 343.1봉을 가늠해 보며 점점 가팔라지는 내림길을 내려서면, 

 

갈현 절개지 상단에 서게 되는데 예전에는 우측으로 내려섰지만 지금은 거의 길흔적이 보이지 않고,

최근에 부쩍 늘어난 기맥 산꾼들이 다니는 길흔적을 따라 좌틀하여 내려서면, 

 

의성군 구천면 교통표지판과 '구미의산 종주길' 이정표가 있는 갈현 날머리로 내려서게 되는데, 

 

​칡넝쿨이 우거진 등로를 조심스레 내려서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현에서 팔공기맥 아홉번째 산행을 마무리 한다. 

 

<갈현(葛峴, 220m)>
낙동강 좌측(동쪽)의 구미시와 의성군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이다.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와 의성군 구천면 장국리(국수골)를 있는 2차선 아스콘포장의 12번 군도가 지나지만, 교통량은 매우 뜸한 편이다. 장자봉(422.1m)과 청화산(701m) 사이 오목사면(concave slope)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터 칡이 많아 갈현이라 불렸는데 지금도 도로 주위에 칡넝쿨이 많이 뒤엉켜 있다. 

 

우측 구천면 방향 100여미터 아래에 정규 등산로 들머리가 있지만 기맥꾼들이 이용하는 갈현 들머리 전경

 

 

갈현 우측 구천면 방향 100여 미터 아래에서 기다리는 버스로 이동하니, 

 

임도를 따라 우회하여 먼저 도착한 분들도 버스에 오르지 않고 갓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정오가 되려면 25분이나 더 남은 상태여서 하는 수 없이 갓길에 앉아서 수다떨기에 동참해 보는데,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곤히 자는 기사님을 깨워서, 

 

안계면소재지에 유일하게 남은 목욕탕에서 힘겹게 샤워를 마치고, 

 

안계중고교 옆에 있는 '오늘 손만두'라는 식당에서, 

 

식당 전체를 독차지하다시피 하여,   

 

쉬운 산행에 제격인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진다.  

오늘은 술만!

 

 

'예전에는 무척이나 넓었던 교정이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귀갓길에 올랐지만, 

 

밝은 대낮에 도착한 서울에서 "귀가는 해가 떨어진 후에!" 라며, 

 

이제 단 한번의 기맥산행만을 남겨놓은 9기맥 종주길의 소회를 나누다가,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 떨어진 지 오래'라고 우겨서는, 

다음 산행에서 다시 뵐 것을 기약하며 마침내 집으로 향한다. 

 

 

오늘 오른 냉산은 주변에서 보면 우뚝 솟아있고 무척이나 가팔라 보여 쉬이 오르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산이었지만, 팔공기맥이 지나니 아니오를 수가 없어서 올랐는데 막상 오르니 그리 어렵잖게 올랐다. 세상 일이란 게 모두 그러하여 어렵고 힘들어 보여도 막상 시도를 하면 의외로 쉽게 성취를 할 수 있는 경우가 많고,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훨씬 쉽게 새로이 시도를 할 수 있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미루지 말고 바로 시도를 해 보자! 다음 기회는 내것이 아닐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