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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남금북 09차(대정고개~칠장산) : 갑오년 첫산행으로 걸은 한남금북정맥 마지막 구간 z

by 재희다 2014. 1. 12.

산 행 지 : 한남금북정맥 09차(대정고개~칠장산)

산 행 일 : 2014. 01. 12.(일)

산행코스 : 대정고개~대야고개~마이산~수레티고개~황색골산~저티고개~삼박골산~당목리고개~도솔산

              ~걸미고개~ 좌벼울고개~3정맥분기점~칠장산~칠장사 (산행거리 19km)

산행참가 : 홀로.(11일 백두정기산행 17명)

 

<산행코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새해 첫 산행을 빠지게 되었다. 거의 회사 행사가 두 번째 토요일로 정해지기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도 한두 번이지 왜 너만 행사하는 날 항상 일이 있냐는 물음에는 이제 변명이 궁해진다. 사실 4월 둘째 토욜도 벌써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일정을 조정하라는 공문이 내려와 있다.

 

어제 오후에 손 총무님 전화를 받고 한남금북을 졸업한 백두들의 서울 도착 시간에 맞추어 양재로 나가 함께 기쁨은 나누었으나, 왠지 내일 홀로 하는 땜빵 산행이 은근히 부담이 되지 않는게 아니었다. 그나마 죽산에서 이미 많은 술과 안주를 거덜내고 오는 길이라 그런지 자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나고 몇 시간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고, 평소와 같이 6시에 일어나 7시 남짓에 집을 나서 승용차로 대정고개로 향했다. 어제 버스 기사분도 주소가 네비에 나오지를 않아서 고생을 했다는데, 나도 마찬가지로 '덕정리 산 2-11'이 나오지를 않아서 '2-1'을 찍고 갔더니 형제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부랴부랴 차를 멈추고 형제고개에서 지난 구간 막판에 걸었던 정맥길 도로를 따라 차를 몰아 대정고개에 도착한다.

 

 

대정고개(뒷두리실고개)에 차를 세워두고,

인적 없는 대정고개에서 홀로 한남금북 마지막 구간 산행에 나선다.

 

어제 새벽 백두들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돌아본 대정고개.

정면 언덕 위에 세워둔 차가 보인다. 심심해도 한나절만 지둘려라..ㅋ~~

 

 

우측 능산리 방향에 아침해가 안개를 뚫고 나타났다.

 

 

윗두리실 오거리에서 11시 방향 언덕으로 이어진 농로로 들어서면,

 

우전방 묘지 좌측에 표지기가 달려있다.

 

 

어지러운 등로를 헤치며 잠시 오르니,

'안산(137m)'을 알리는 표지가 나무에 묶여 있다.

 

안산을 지나며 등로는 우측으로 휘어지는데, 우측 아래로 외딴집이 내려다 보인다.

밤에 왔다면 농로를 따라 외딴집까지 와서 능선으로 붙어도 될 듯하다.

 

 

가족묘를 지나면 좌측 아래로 승순농장이 보이고,

지능선처럼 보이는 앞쪽 능선을 따라 승순농장 방향으로 정맥길이 이어진다.

 

 

승순농장 뒤 봉우리에서 좌틀하여 내려간다.

 

승순농장 방향으로 마이산도 희미하게 보인다.

 

 

진순이가 지키는 쪽문을 통해 승순농장 안으로 진입.

 

 

승순농장 정문으로 나오면 대야고개가 우측으로 보인다.

 

돌아본 승순농장 정문.

 

 

대야고개.(아랫두리실고개)

길 건너편 소나무에 표지기가 주렁주렁 열렸다.

 

지난 새벽 대야고개를 통과하는 백두들.

 

 

들머리 언덕을 올라 좌측으로 조금 진행하면,

 

 

너른 공터가 나타나는데, 수확하다가 남은 듯한 호박과 배추가 널려 있다.

아마도 누군가가 경작을 하는가 보다.

 

 

공터를 가로질러 능선 위로 이어진 임도를 따르다가,

임도는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고 정맥길은 우측 언덕으로 이어져 앞쪽의 빨간 기와집 뒤로 이어진다.

 

 

갈마봉으로 이어지는 정맥길은 잡목과 덤불로 뒤엉켜 있다.

아마도 여름철에는 등로 찾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돌아본 대야고개 방향.

 

 

직진방향으로 우회길을 두고,

좌틀하여 표지기가 붙은 갈미봉 방향 오름길을 택하면,

 

 

이내 갈미봉(210m) 표지기가 붙어 있는 봉우리에 도착한다.

 

 

갈미봉을 내려서면 우회길과 만나고,

 

 

안부를 지나 능선 분기점을 향해 오름길을 시작한다.

 

 

좌측으로 대야산이 안갯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우측 325봉은 한남금북길에서 벗어나 있다.

 

 

잠시 후 갈림길을 만나 표기기가 붙어 있는 우측의 오름길을 따른다.

좌측 사면길은 대야리산 직전 안부로 이어지는 듯하다.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능선 분기점에 도착하면,

 

우측 능선은 정맥에서 벗어나 있는 325봉 방향이고,

 

좌측 능선이 대야리산 방향 한남금북길이다.

두텁게 입었던 외투를 벗어 갈무리하고 대야리산을 향한다.

 

 

안부를 지나고,

 

 

대야리산(396m)을 지나는데, 정면에서 정맥꾼인 듯한 산꾼과 마주친다.

이 추위에 나도 그렇지만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된다.

 

 

급경사가 잠시 어어지더니 망이산성터 안으로 들어선다.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돌아본 모습.

 

주위에 돌무더기들이 보이고, 망이산성 안내판도 보인다.

 

망이산성 남문터 안내판.

 

 

 

잠시 후 망이산성 내성 안내판을 지나고,

 

 

좌측 아래로 약수터가 내려다 보이는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면,

 

 

마이산(망이산 소죽골산 471m) 정상에 도착한다.

 

<마이산(472m, 망이산. 소죽골산)>

마이산은 충북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황봉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망이산(望夷山)이라 표시되어 있으며, 옛 신라의 군사 요충지로 북쪽 오랑캐를 바라본다는 듯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서울로 통하는 봉수대가 있었으며, 망이산성도 발견되었는데, 이 망이산성은 1980년 단국대 한술조사단에 의해 발굴되었다. 현지 주민들이 마이산으로 호칭하고 있는데 이는 망이산성에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죽 화봉리 방향에서 온듯한 산객 2명이 올라와 쉼터에서 쉬고 있다.

 

어제 백두들이 마이산 정상을 지날 때는 어두웠나 보다.

 

마이산에는 정상석이 3개나 설치되어 있는데,

아마도 충북 음성군 삼성면과 경기 안성시 일죽면의 경계에 있어서 그런 듯하다.

 

여러 개의 정상석 중 삼각점과 가장 가까운 정상석에서 셀카!

 

백두들도 마이산 정상에 있었다.

 

봉수대 안내판.

 

 

좌측 소나무 쉼터에는,

 

실감 나는 글귀도 걸려 있다.

 

 

마이산 정상을 뒤로하고 또 다른 마이산 정상을 향한다.

 

 

약수터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헬기장을 지나고,

 

 

또 다른 마이산 정상석이 있는 아이산 북봉에 도착하면,

따르던 등로는 우측으로 휘어져 가고 한남금북길은 좌측 내림길로 접어든다.

 

이곳에도 망이산성 안내문이 걸려 있다.

 

마이산의 키가 10cm 자랐다.

 

 

별다른 특징 없는 마이산 내림길을,

 

밴치 사이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내려간다.

 

 

이런 좌틀하는 곳도 지나면,

 

 

중부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묘터를 지나고,

 

 

이내 화봉육교가 내려다 보이는 수레티고개에 도착한다.

 

수레티고개 날머리.

 

마이산 등산 안내도.

 

 

중부고속도로 위를 통과하는 화봉육교.

 

중부고속도로 남이 방향.

 

중부고속도로 호법 방향.

 

 

수레티고개 음성군 삼성면 방향.

 

수레티고개 들머리 노란색 표지판이 걸려 있다.

 

<수레티고개(182m, 차현고개 보리고개)>

충북 음성군 삼성면과 경기 안성시 죽산면을 잇는 고개로 중부고속도로와 861번 지방도가 지난다. 현지의 주민들은 보리고개라 해야만 알아듣는다. 이곳 차현고개주변 차령산맥지역은 삼국시대에 매우 중요한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로, 특히 동남쪽에 치우친 신라가 경상도와 충북의 경계인 이화령을 지나 한강 및 경기도로 진출하여 당나라와 교역하고, 한강 경기지역의 풍부한 물자를 수도인 서라벌로 가져오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통일신라는 차현고개 이남인 청주지역에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을 두었고, 차현고개 북동지역에 중원경을 두었다. 5소경은 작은 서울이란 뜻으로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통치하고 지방세력을 감시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차현고개 주변 차령산맥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에 전체 5소경 중 두 개의 소경을 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이 정치적, 군사적, 지리적으로 중요하였다는 뜻이다. 당나라와의 교역물품들과 경기, 한강지역에서 생산된 생산물품들을 실은 수많은 마차와 인력들이 차현고개, 이화령을 거쳐 경상도 서라벌로 가고 다시 경상도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이화령 차현고개를 거쳐 경기, 한강지역으로 갔으며 수레(車)와 관련된 지명이 자연스레 생겨났을 것이다.

 

한남금북정맥을 다니는 사람들만 아는 수레티고개.

 

어제 새벽 수레티고개에서 잠시 쉼을 하는 백두들.

 

 

수레티고개 들머리를 지나 황색골산을 오르며 돌아본 좌측 삼성면 방향.

 

 

죽림산 갈림길.

 

 

황색골산(353m) 정상 도착.

 

황색골산은 도고리봉 이라고도 하며 주변에 있는 골짜기인 황새골에서 유래된 이름이 아닌가 추정된다.

 

 

349봉 직전에 우틀.

 

 

바닥에 쓰러진 나무 위에 이정표가 놓여 있다.

 

정맥길은 삼박산 방향이다.

 

 

예쁜 돌탑이 있는 저티고개를 지난다.

옛날 고개 근처에 '겨터'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겨터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어제 백두들이 이곳을 지날 때쯤에 날이 밝아 온듯하다.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상고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아 날씨가 꽤 쌀쌀했던 모양이다.

 

 

북쪽 용설리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고 멀리 남산(332m)이 조망된다.

 

 

삼박골산 정상.

지도에는 삼박골산이 정맥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삼박골산도 삼박골짜기가 있는 산이라 그리 부른 듯 짐작해 본다.

 

하루 전 삼박골산을 지난 만식님.

 

 

능선 분기점.

정맥길은 좌측 동화동 방향이다.

 

아제 아침 백두들이 이곳 능선 분기점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257봉에서 좌측으로.

산행기에서 묘지가 있는 봉우리에서 좌측 길로 가야 한다는 내용을 읽지 않았으면 직진방향으로 갔을 듯하다.

 

 

지능선에서 우틀 하며,

 

우측 아래로 임도가 나란히 지난다.

 

 

잠시 후 또 우틀하면,

 

 

당목리고개로 오르는 9번 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태극기가 게양된 묘지 상단을 지난다.

 

 

당목리고개 도착.

 

<당목리고개>

당목리에 있는 고개로, 당목리는 대한제국 시절 죽산군 부이면에 속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당진과 목동에서 한 글짜씩 가져와 당목리라 하였다. 당목리는 현재 행정마을로 당진, 목동, 도화동의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당목리 방향 조망.

 

당목리고개 들머리는 맞은편 절개지 옹벽 우측 끝에 있다.

 

 

당목리고개 들머리.

 

하루 전 당목리고개의 백두들.

 

한남금북정맥 꾼들을 위한 당목리고개 이정표.

 

 

당목리 고개에서 허물어진 임도를 조금 따르면 고개 마루에 도착하고, 정맥길은 우틀하여 이어진다.

 

돌아본 당목리고개 방향.

 

 

또 임도와 만나서 좌측으로 진행하면,

 

 

11:59 표지기가 곰방 좌측 산으로 이끌고,

 

 

죽산-삼성 간 신설도로 절개지 위에 선다.

요즘은 없던 생태통로도 만드는 판국인데, 이넘들은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하루 전 절개지를 통과했던 백두들.

 

 

도로에 내려와서 바라본 건너편 절개지.

 

 

절개지에 있는 임도 연결도로를 따라 오르며,

 

건너편 절개지에 방금 내려온 흔적을 더듬어 보고,

 

절개지에서 한쌍의 멍멍이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절개지 우측 상단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절개지 상단에 올라 돌아본 모습.

 

 

잠시 전의 임도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는데,

 

우측 임도로 이어지는 소로가 있다.

 

 

한동안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도솔산 비로봉(278m)이라 표시된 곳에 도착한다.

아래쪽에 놓여있는 표지판에는 보현봉 방행이 반대로 되어있다.

 

별로 봉우리 같지는 않은 곳에 비로봉이라니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

 

 

'보현봉 가는길'이라는 안내판이 놓여있는 안부를 지난다.

 

도솔산에 비로봉에 보현봉 등등의 이름들이 거창하니 커다란 산세를 연상하게 한다.

나도 어느새 관행이랄까 아니면 선입관에 젖었나 보다.

 

 

'도솔산 보현봉입니다'를 지난다.

 

 

장수봉(바가프미산) 방향을 알리는 안내판이 놓여있고,

 

 

잠시 후 벌목지 상단에 서니,

 

우측으로 남산(337m)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가프미산(장수봉) 갈림길 도착.

 

바가프미산(장수봉) 방향.

 

<바카프미산/장수봉(332m) 갈림길>
오름길 말미에 좌측 아래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이 바카프미산이고, 왼쪽 내림길이 정맥이다. 이름이 특이한 봉우리라, 이 또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데.. 여러 곳을 검색해 보았지만 기대한 만큼의 답은 안 나온다.
안성시의 담당부서(문화체육관광과)에 문의한 바, 이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고 지역 주민들(용설리 거곡마을 이장) 또한 예로부터 그렇게 불려 왔고, 지금도 마을에서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답변이다. 억지 추측이긴 하지만, 아랫마을이 ‘바깥걸미’ 마을이라 언뜻 읽으면 비슷한 발음으로 들리는 것도 같아 그런 게 아닐까 짐작만 해 본다.

 

갈림길에 흩어진 바위돌 아래에서 뜨끈한 커피로 몸을 녹이며 여유를 부려 본다.

 

 

걸미고개 직전 공장 절개지 상단에 도착하는데,

 

정맥 능선을 파헤쳐 놓아서 좌측으로 우회하여,

 

 

걸미고개 절개지 위에 서면,

 

안성CC 입구가 내려다 보인다.

 

<걸미고개>

걸미고개는 '긴 고개' 혹은 '진 고개'라고도 했고, 채표노름을 많이 했던 곳이라서 '채팻골', 비석이 있던 자리라고

해서 '빗돌골', 외딴집에 할머니 한 분이 살던 곳이라 해서 할미고개, 4월 초파일날 음성에서 칠장사로 가는 사람들로 붐볐다는 목동의 큰 고개 가로질러 있다고 해서 '가루고개', 돌이 많아서 '돌막골' 등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옛날 이 고개 근처에는 농사가 안되어서 주민들이 거지가 되다시피 하고, 또한 곡식으로 음식을 하면 맛도 없다 하여 걸미고개라 했다. 농사가 안 되는 건 마루금이라 물이 귀해서 일 테지만, 거지니 맛이 없느니 하는 이야기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당히 기분 나쁜 유래로 들리겠다.

 

걸미고개를 내려와 안성CC 방향으로 가야한다.

 

절개지 옹벽 위에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한 보조수준점이 박혀있다.

 

돌아본 걸미고개 날머리.

 

 

정맥길은 우측 산으로 연결되나,

어차피 안성CC 클럽하우스로 내려와 만나기 때문에 그냥 도로를 따라 안성CC 안으로 진행한다.

 

하루 전 안성CC 안으로 들어가는 백두들.

 

 

겨울철이라 휴장하나 생각했지만,

 

 

클럽하우스 앞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이 주차해 있다.

 

주차장을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질러 이동하면,

 

 

칠장산으로 향하는 들머리가 있다.

 

돌아본 안성CC 클럽하우스.

 

들머리엔 표지기들이 걸려 있다.

 

 

가파른 절개지를 오르면 능선길은 호젓해지고,

 

 

우측 아래로 눈 덮힌 골프장이 내려다 보인다.

 

 

좌벼울고개를 지난다.

 

<좌벼울고개>

죽산면 장계리와 칠장리를 잇는 고개로, 남쪽 능선으로 이어진 제비월산으로 이어진 고개라 하여 붙여진 고개 이름이 변음되어 좌벼울고개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북쪽 장계리 방향이 골프장으로 막혀 있어서 건너지 못하는 고개가 되었다.

 

고개 좌측에 팻말이 붙어있다.

 

고개 좌측 편으로 보이는 안성CC 페어웨이.

 

 

잠시 오름길이 있은 후 산불감시탑이 있는 376봉을 지난다.

 

 

신대마을과 칠장산둘레길이 갈라지는 쉼터 봉우리에 도착하여 잠시 쉼을 하고,

 

칠장산 방향으로 오름길을 시작한다.

 

 

바사리열두고개 도착.

 

<바사리열두고개>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재공 등 많은 궁중 사람들과 선비들이 칠장사를 찾아 오가며 넘나들었다는 바사리열두고개. 칠장사로 들어가는 제일 큰 고개로 고갯길이 갈 '之'자 형태로 열두 번 꾸부려 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을 붙이려면 좀 더 부르기 쉽게 '열두바사리고개'라 했으면 더 좋았을걸..ㅉㅉ

 

 

삼정맥 분기봉을 향해 금경사 오름길을 지그제그로 오른다.

 

 

삼정맥 분기점에서 163km의 한남금북정맥 걷기를 마친다.

 

함박눈이 허리춤에 닫도록 내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백두들은 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에서 분기하는 한남금북정맥을 걷기 시작했다. 이 한남금북정맥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 두 정맥이 겹치는 산출기로, 속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말티재~수철령~시루산~선도산~상당산~좌구산~보광산~소속리산~마이산(망이산)~칠장산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163km에 달하는 산줄기다. 이제 이곳 칠장산에서 그 이름을 다하고, 다시 서북쪽으로는 '한남정맥'이란 이름으로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갈 것이며, 남서쪽으로는 '금북정맥'이란 이름으로 태안반도 안흥진까지 이어간다.

 

 

나도 한남금북정맥의 마지막 걸음을 마처 걸었다.

 

 

3정맥 분기점에서 서쪽 3분 거리의 칠장산 정상으로 무대를 옮겨.

 

지나온 동쪽 방향의 한남금북 정맥 조망.

 

하루 전 사진.

 

 

남쪽 금북정맥 방향 조망.

 

1일 전.

 

서쪽 인성베네스트CC 방향.

 

하루 전 사진.

 

 

 

홀로 칠장산에서 인증 셀카.

 

하루전 백두들은 서서 졸업사진을 남겼다.

 

유유자적 걸어온 백두들도 한남금북정맥을 다 밟았다.

 

정상석 뒤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은 내년쯤에나 갈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삼정맥 분기봉으로 돌아 나와 보지만 아무도 없다.

 

다만 어제 찍은 사진만이 남았다.

 

 

칠장사 주차장을 향해 내림길을 시작한다.

 

우측은 금북정맥 칠현산 가는 길이고, 좌측이 칠장사로 이어지는 내림길이다.

 

칠현산 방향의 금북정맥은 2주 후에 만나기로 하고, 칠장사로 향한다.

 

갈림길 이정표.

 

 

칠장사 주차장 갈림길에서 칠장사로,

 

 

칠장사 도착.

 

 

칠장사 삼신각 앞에서 택시를 불러 놓고,

 

칠장사 모습.

 

칠장사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칠장사 대웅전 모습.

 

칠장사 범종.

 

칠장산 둘레길은 이렇단다.

 

박문수가 유명하긴 한 모양이다.

 

 

칠장사 일주문 앞.

 

칠장산이 아니라 칠현산 칠장사였었다.

 

<칠장사(七長寺)와 칠현산(七賢山)>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죽산은 장호원, 음성, 문경새재, 문경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즉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를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사람과 돈이 오가는 길목에서 마을이 생겨나 번성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도둑들도 생겨나게 된다. 죽산에서 한 건 하고 반나절만에 닿을 거리에 칠장사가 있다. 도둑들의 은신처로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칠장사 나한전에 봉안된 7인의 아라한 역시 본래는 산적이었다.

칠장사를 중수한 고려 9대 임금의 왕사였던 혜소국사의 교화로 도를 깨쳐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이들 도둑의 산채 인근에 있었던 칠장사에 유명한 스님이 부임했다. 이에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을 염려한

도둑들이 스님의 동정을 살필 요량으로 한 명씩 뽑아 칠장사로 보냈다. 절에 당도한 도둑첩자들은 염탐은 뒷전이었고, 약수터에 놓인 금 바가지에 혹해 물을 마시는 척하면서 바가지를 훔쳐 돌아왔다. 이상한 것은 훔쳐온 바가지를 산체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깜쪽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도둑 중 한 명이 이 사실을 고백하니, 나머지 도둑들도 이런 괴이한 현상에 관해 실토했다. 이에 스님이 신통력을 발휘했기 때문으로 여긴 일곱의 패거리는 그날로 머리를 깎고 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스님이 입적하자 이들도 사람의 형상을 한 7개의 돌만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하여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한다.

 

 

택시로 대정고개로 이동하여 기다리던 10년 지기와 함께 귀가했다.

 

 

어제 백두들은 산행을 마치고,

 

죽산에서 목감을 하고,

 

아예 목장으로 쳐들어가,

 

윤 회장님 이란 분이 마련해 주신 술과 고기로 양껏 먹은 듯하다.

향후 1년간 소고기 생각은 안 날 듯..ㅋㅋ

 

한남금북정맥을 함께 걸어온 백두님들께 완주를 축하드린다는 말씀 전하며,

앞서 걸으며 흔적을 남겨주신 선답자 분들과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어릴 때는 뭔가 중요한 일인 듯했었는데,

지나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의문이곤 했다.

 

그래서 "이런들 저런들~~~" 이라는 예기는

도를 깨치거나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 생각하게 했다.

 

내가 오감으로 느끼고 가슴과 머리로 그려낼 수 있는 뭔가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럼 누가 그 의미를 부여해 주겠는가!

 

꼭꼭 반드시 내가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