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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금북정맥 01차(칠장산~배티재) : 한겨울 우중(雨中)산행으로 시작한 금북정맥 z

by 재희다 2014. 1. 26.

산 행 지 : 금북정맥 01차(칠장산~배티고개)

산 행 일 : 2014. 01. 25.(토)

산행코스 : 칠장사 + 칠장산 ~ 칠현산 ~ 덕성산 ~ 무이산 ~ 옥정치 ~ 470봉 ~ 배티고개

(산행거리 19km)

산행참가 : 21명.

 

<산행코스>

 

 

지난해 한남금북 산행은 겨우내 내린 많은 적설로 설산 산행으로 점철되었었는데, 올해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산행 예정일인 토요일에 비 예보가 되어 있었다. 추위에 비까지 맞으면 저체온증 걸릴 위험이 크고, 여러모로 불편한 것이 많다. 전국에 비가 온다니 해외로 가지 않으면 별다른 대안도 없고 하여, 비옷과 우산을 챙겨 넣고 양재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아마도 무척 이른 시간에 칠장사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한참을 더 자다가, 5시에 눈을 떠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내가 산행 시간을 착각해서 8시간이 아닌 7시간으로 예기하면서, 12시 30분 하산 시간에 맞추어 5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 걸린 시간은 8시간 이상이 소요되어 오후 1시 50분에 배티재로 하산하게 된다. 7시간을 예상하던 일행들은 늘어난 산행시간에 무척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그냥 10시간을 각오하고 시작했으면 8시간은 별로 힘들지 않았을 텐데, 7시간을 예상하다가 더 걸리니 훨씬 힘들어하게 된다. 역시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는지에 따라 같은 산행이 어렵게도, 쉽게도 바뀔 수 있다. 앞으로는 정확한 예측과 넉넉한 예상시간으로 좀 더 각오를 단단히 가지고 산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칠장사 주차장 관리인에게 숙박비를 지불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비가 조금 내렸는지 땅은 젖어 있고, 주차장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빗방울이 떨어져 배낭에 챙겨둔 우장을 서둘러 꺼내 입는다.

 

 

칠장사 경내를 통과하여 칠장산 정상을 향해 산행을 시작한다.

 

버스에서 잠을 청할 때 들려오던 은은한 종소리의 출처가 이곳임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고요함만이 가득찬 경내를 발자국 소리도 죽이며 통과한다.

 

나한전과 산신각을 지나 들머리로 들어선다.

 

칠장산 오름길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으나, 높은 기온으로 표면이 살짝 녹아 있어서 그다지 미끄럽지는 않았으나 내림길이라면 무척이나 위험스러울 듯하다.

 

능선 갈림길 도착.

금북정맥은 칠장산 정상에서 시작해야겠지만, 지난 산행에서 이미 거쳐 와서 금북정맥을 이어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하여 좌측 칠현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길에 오른다.

 

 

능선삼거리에서 잠시 쉼을 하는 사이에 다시 빗줄기가 굵어져 우장을 새로이 갖추고, 아이젠도 착용하고,

 

칠현산 정상을 향해 금북정맥 걷기에 나선다.

 

 

중고개에 있는 '부부탑.칠순비'를 지나고,

 

<칠순비 부부탑>

뒷면에 “김성기 임경순 2002년 11월 24일 광혜원 중고개”라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이 '중고개' 였던 것 같다. 이곳 금북길 1구간에는 돌탑을 많이 본다. 산 정상과 안부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돌탑이 있다. 무티고개와

만디고개에도 부부돌탑이 있다.

 

 

칠현산 정상에 도착하여,

 

<칠현산(516.2m)>

경기도 금광면과 죽산면·삼죽면에 걸쳐 있듯이 경기도 안성시의 동남쪽 칠현산 위쪽에 위치한 산이 바로 칠장산(492m)이다. 옛날부터 같은 산줄기로 서로 가까이에 있는 산이기에 칠장산과 칠현산을 혼동하여 함께 칠현산으로

불렀다. 하지만 조선 시대 어느 권력자가 이 산 일대를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후, 칠장사 뒤쪽의 산이라 하여 칠장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지리지나 고지도에는 칠장산이란 지명이 나오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기슭에 있는 칠현산 칠장사(七長寺)라는 사찰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646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칠현산 칠장사는 혜소국사가 일곱 도적을 감화시켜 수도승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사찰이지만, 일곱 사람의 힘센 장정이라는 ‘칠장(七長)’이란 의미가 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일곱 사람의 어진 사람이 나왔다는 의미의 칠현산(七賢山)이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펌)

 

칠현산 인증을 남긴다.

 

 

'곰림 정상'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곰림 정상(515m)을 지난다.

 

<곰림 정상>

아마 산아래 마을이 곰내미 즉 곰마을이란 이름이 있음에 비추어, 그 곰마을의 정상이라는 취지에서

붙여진 듯하다.

 

 

좌전방으로 광혜원면 일대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광혜원(廣惠院)>

조선 9대 임금 성종(1469~1494) 때부터 충청도 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충지로,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였고, 충청도 신.구 관찰사 인수인계 장소로 광혜원을 설치한 후, 이 지역의 이름으로 불려 왔다.

 

 

병무관 덕성산 갈림길.

 

<병무관>

병무관 또는 병목안이라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병무관 터라 하며 화랑들의 연무대로 사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옛터는 마을 동쪽에 있고 지금부터 800여년 전의 금귀고리가 발견되었다.(펌)

 

<생거진천>

'생거진천'이란 아마도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 즉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말에서 유래된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진천지방에는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하나는 옛날에 진천과 용인에 추천석이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살고 있었다. 진천의 추천석은 양순하고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이었던 반면, 용인의 추천석은 부자로 살면서 심술이 많아 동네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염라대왕이 용인의 추천석을 괘씸하게 여겨 사자(使者)로 하여금 잡아오도록 하였으나, 사자가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와 다시 돌려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장사를 지낸 후인지라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체에 진천 추천석의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옛날 한 여자가 용인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 낳고 단란히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진천으로 개가하여 아들을 낳고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용인 아들이 성장하여 진천의 어머니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진천의 아들이 극구 반대하여 결국 관가에 소장(訴狀)을 내었다. 관가에서 판결하기를 "너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안에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서 모시고 제사도 모시도록 하라"고 하여,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으로 간다는 전설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진천 지방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고, 한해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롭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기에 생거진천(生居鎭川)라 하였고, 용인은 산세가 순후하여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사거용인(死去龍仁)라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으로부터 약 80년(1932) 전에 만든 진천군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 당산지 토산(常山誌 土産)편에는 조선시대 진천에서 년간 6만여석의 쌀을 생산하였다는데, 당시 전국통계가 단보당 평균 수확량이 9말3되 인것에 비해 진천은 11말5되나 수확되어 곡향(穀鄕)으로 유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의 고적조(古蹟條)에는 동호(東胡)가 조선 중종조 이전부터 관개용 저수지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덕성산 갈림길에서 2분여 만에 덕성산에 도착한다.

 

<덕성산(519m)>

덕성산은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에 소재한 산으로, 요순산(堯舜山)·무위산(無爲山)·무수산(無愁山)·국사봉(國寺峰) 등으로도 불린다. 이곳 덕성산에서 무이산으로 향하는 능선의 왼쪽 골짜기인 광혜원면 구암리에는 무술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진천 태생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낭도들과 무예 등 화랑도 정신을 연마하던 터가 남아 있다. 또한 북쪽 골짜기 비들목도 화랑들이 전서구(傳書鳩)를 길들이던 마을이며, 동쪽으로 내려오면 화랑의 연무대와 병기고 자리에 병무관 마을이 있다. 지금의 구암저수지 부근이다.

 

덕성산 정상.

 

덕성산 정상 인증.

 

 

<김유신과 진천>

이곳 덕성산에서 무이산을 잇는 능선의 오른쪽 구암리에 남아 있다는 김유신 장군의 흔적은 이곳 뿐만이 아니라 진천군 전체에 걸쳐 곳곳에 남아 있는데, 김유신과 진천은 어떤 관계에 있던 것일까?

김유신은 이곳 태수로 있던 김서현과 만명 부인 사이에서 595년에 태어났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본디 신라에 합병된 가락국의 왕족이다. 신라의 왕족은 부모가 모두 왕족인 성골과, 어느 한쪽만 왕족인 진골로 나뉘는데, 이들 성골과 진골이 다른 신분과 혼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김서현은 신라의 장군이기는 했으나, 엄연히 다른 신분에 속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왕족인 만명과 사랑을 하게 되고, 이 사실을 안 만명의 아버지는 이들의 사이를 떼어 놓기 위하여 김서현을 고구려와 맞닥뜨려 싸움이 그칠 새 없는 이곳 진천의 태수로 보내 버렸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이들을 떼어 놓지 못했고, 만명이 당시 만노군이라 불리던 이곳 진천까지 도망을 쳐, 사랑의 결실로 김유신을 낳은 것이다.

 

덕성산에서 바라본 무이산 방향.

 

 

덕성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무이산을 향하다가 돌아본 덕성상.

 

 

485봉을 지나는 곳에 설치된 구암리 이정표.

 

 

가야 할 454봉(좌)과 큰곰봉(우).

큰곰봉은 454봉에서 안성시 금광리의 금광저수리로 뻗은 지능선에 있는 봉우리다.

 

 

우측으로 큰곰봉 방향 지능선이 분기하는 454봉에 도착한다.

 

 

삼각점이 있는 정상이 넓지 않아서 앞 봉우리까지 가 보았지만 식사 장소로 부적합하여,

다시 454봉으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한다.

 

산이 높지는 않으나 좌우 모두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능선 마루가 좁게 형성되어 있어서 모두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할만한 장소를 찾기가 어렵다.

 

454봉 능선 등로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무이산을 향해 454봉을 뒤로한다.

 

 

우측 아래로 평택제천간 고속도로가 보이고, 질주하는 차량 소음이 세차게 들린다.

 

당겨본 평택제천간 고속도로.

 

 

지나온 454봉과 금북능선.

 

 

완만한 내림길이 이어지더니,

 

 

무티고개를 지난다.

 

<무티고개>

진천군 광혜원면 구암리 무수마을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를 잇는 고개로, 무치(武峙) 또는 무위치(無爲峙)라고도 한다. 무수동(無愁洞)에 대하여 진천 고장의 역사서인 상산지(常山誌)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 산 이름은 요순산이며, 재 이름은 무위치(無爲峙)이고, 동네 이름은 무수동이라 하였다. 없을 ‘無’와 근심 ‘隨’ 자를 쓴 것으로 보아 근심이 없는 동네란 뜻이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아무 근심 없이 피난하여 지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호반 무(武)'와 '재주 술(術)' 자를 써서 무술이라고 하여, 옛날 이곳은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었다는 설도 있다.

 

 

등로는 완만하게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무이산으로 이끈다.

 

 

무티고개를 지나 조금 오르자 봉우리 정상에 '사장골 정상'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사장골>

병무관 남쪽에 있던 마을이다. 사장을 射場(사장)으로 보아 신라 화랑들이 활을 쏘고 훈련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전국에 사장골이라는 골짜기가 적지 않은데, 활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는 지역도 있지만 대체로는 사장나무(당산나무, 마을 앞 둥구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좌측 아래 골짜기가 사장골이라서 사장골정상이라 부르는 듯하다.

 

<덕성산~무이산~무제봉 임동 자전거 길>

새벽에 지나온 덕성산에서 구암리 사장골을 거처 무이산으로 금북능선 좌측 아래로 임도가 지나는데, 산이 깊고 임도 또한 잘 정리되어 있어서 자전거 동호인들이 애호하는 총 거리 80km에 달하는 코스라고 한다.

 

 

사장골 정상을 뒤로하고 무이산을 향한다.

 

 

440봉을 지나니,

 

 

무이산 갈림길 봉우리가 지척이다.

 

돌아본 사장골정상.

 

좌측 사장골 방향의 지능선.

 

 

갈림길에서 좌측 오름길을 오르자 무이산 갈림길 봉우리에 도착한다.

'병목안정상'이라 적힌 바위가 있었다는데 찾을 길이 없고, 기다리던 선두팀과 함께 좌측 무이산으로 향한다.

 

 

갈림길에서 5분여 만에 무이산 정상에 오른다.

 

무이산 정상 인증.

 

 

<무이산(462m>

진천군 광혜원면에 위치한 산으로 금북정맥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정상에서 광혜원의 아파트가 내려다 보이고, 천룡CC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덕성산도 보인다. 정상에는 2011년에 광혜원 무이산우회에서 만들어 놓은 정상석이 있다.

 

지나온 덕성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 능선.

 

남서쪽으로 천룡CC가 안갯속에서 모습을 보인다.

 

무이산 정상 주변.

 

 

후미의 백두들도 갈림길에 배낭을 두고 무이산으로 오고 있다.

 

 

백두들이 두고 간 배낭들이 무이산 갈림길을 지키고 있다.

 

 

우회길 접속지점에서 기다리던 변 여사님과 함께 길을 떠난다.

 

 

만디고개를 지난다.

 

<만디고개>

평택제천간 고속도로 안진터널이 만디고개 아래로 지난다. '만디'라는 말은 경상도 말로 꼭대기라는 뜻인데, 이곳은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인데 경상도 말이 이곳 지명으로 사용된 듯하여 조금 의아하지만, 진천 죽현리 마을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만디/만죽리(晩竹里)/만승리(萬升里)>

죽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옛날 흉년이 든 어느 해에 큰 부잣집(영의정 허적의 집)에서 쌀을 만 되나 내어놓아 주민을 구휼했다고 하여 만되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만디가 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만승면이라는 면 이름을 만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409봉을 또 지나고,

 

 

고라니봉(375m)에 도착한다.

 

고라니봉에서 혹시 고라니가 있나 배낭을 뒤져 보았지만 찾을 길은 당연 없다.

 

 

고라니봉을 뒤로하니 이내 정맥길이 파헤처진 곳을 만난다.

 

금북 마루금을 통제하고, 금북정맥길을 우측 사면으로 돌려놓았다.

여기도 누가 개발인지 뭔지를 하면서 아예 맥길을 바꿔 놓았다. 가파른 산사면을 파헤쳐 임도를 내면서까지 통행을 막아야 했는지! 겨우겨우 우회를 해서 옥정재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포크레인을 가져다 놓고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다. 뭔 공사인지는 모르지만 허가를 해 준 진천군청이나, 허가를 받아 공사를 하는 넘에게서 역사나 지리에 대한 소명의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터이다.

 

어거지로 급경사의 우측 사면 아래로 도로 흔적을 만들어 놓고, 표지기를 그쪽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후답자가 있으면 좌측 사면으로 내려가지 말고 능선 위로 직진하여 가는 것이 빠르고

좋은 길이라고 추천한다!

 

 

경사가 너무 심하여 도로를 내다가 일부는 밧줄로 흔적만 만들어 놓았다.

 

 

옥정재 날머리.

 

옥정재 진천 방면.

 

<옥정재(玉井峙 390m)>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 고갯새울마을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옥정(玉井)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옥정현(玉井峴)은 ‘옥정리로 넘어가는 고개’라서 붙은 이름이며, 달리 옥정리고개로도 부른다. 옥정은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지명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좋은 우물’로 풀이한다. 옥정현은 높이 335m로 비교적 높은 고개이다. 과거에는 안성에서 구입한 소금짐을 지고 옥정현을 넘어 진천으로 와서 쌀과 바꾸어 가곤 하였다. 1994년경 신계리골프장이 들어서면서 2차선 진안도로(鎭安道路)가 개통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초평면 신통리 용동마을에는 임꺽정이 은신하였다는 임꺽정굴이 있다. 임꺽정이 이 굴에 은거하면서 이월면 옥정현과 백곡면 엽둔재[葉屯峙]를 거점으로, 안성 방면으로 약탈을 하기 위해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옥정재의 들머리는 좌측 진천 방향으로 조금 이동하여 이월면 표석 앞쪽 임도를 따라 이어진다.

천룡CC가 이월면으로 이어지는 도로 우측에 있다.

 

옥정재 들머리.

 

 

돌아본 옥정재 건너편 사면이 공사장으로 바뀌어 있다.

 

 

옥정재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나란히 진행되는데, 임도는 송전탑이 있는 봉우리 아래까지 이어진다.

 

 

410봉 직전 헬기장에서 쉼을 한다.

보통의 겨울 산행 때는 거의 쉼을 하지 않는데, 오늘은 자주 쉰다.

 

 

410봉(409.9m) 정상을 지난다.

 

 

이어지는 금북길은 완만하고 호젓하게 이어지는데, 그래도 400m 전후의 봉우리가 줄줄이 꿰어진다.

 

 

송전탑이 있는 봉우리로 오르고,

 

우측으로 가면 이월면 새번디기골로 내려가는 임도로 이어지는 등로라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은 백두들을 불러서 좌측 숲길로 금북길을 이어간다.

 

 

또 그렇게 외길의 금북길은 이어지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에서 보았던 바윗돌이 앞을 막는다.

이곳에서 직진의 능선을 버리고 좌틀하라는 곳이다.

 

바윗돌 쪽으로 오고 있는 백두들.

 

 

좌틀하여 내림길로 들어서면 좁다란 수레길로 이어지고,

 

 

이내 수레길은 좌틀하여 아래로 내려가고, 금북길은 직진의 능선길로 들어선다.

 

 

지도상 '안성장고개'로 표시된 지점을 지나고,

 

 

능선 마루가 오히려 움푹 들어간 지형을 지나면,

 

생명을 다한 그루터기가 또 다른 생명을 발산하고 있다가,

김작가님의 안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랜즈에 잡혔다.

 

 

471봉 헬기장에 도착하여 배낭털이를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헬기장>

470.8봉 정상에는 화려한 헬기장이 하나 나타난다. 어느 산을 가더라도 헬기장들은 보도블록이나 잡풀들로 가득 차 있는 게 대다수인데, 이곳 헬기장은 착륙장에 아주 고급 강판으로 깔끔하게 처리해 놓았고, 관리도 잘되어 있다. 이곳에서의 전망이 좋다고 하였지만, 오늘은 흐린 날씨로 물방울만 보고 간다.

 

471봉 헬기장의 백두들!

 

 

우측 지능선으로 등로 표시가 되어 있다.

아마도 우측 금광면 국사봉 아래에 있는 금광농원에서 설치한 듯하다.

 

 

400봉을 좌회하여 통과하고,

 

 

지도상 판동고개를 지난다.

 

<판동고개>

좌측으로 내려가면 구레올골을 지나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학동.관동 마을이 있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안성시 금광면 한운리로 중동 마을이 있는데, 아마도 동리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이 아닌가 한다.

 

판동고개에 난데없는 '장고개' 표지판이 걸려있다.

사실 어떤게 맞는지는 모르지만, 지도를 들고 산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혼란을 초래한다. 우리가 가진 지도에 보면 장고개는 목적지인 배티고개 직전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이곳의 장고개 표시를 보고 이제는 다 왔다고 한시름 놓았다가, 가도 가도 끝나지를 않아서 마지막에 고생을 덤으로 한 느낌이었다.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여름장마처럼 굵어지고 배티고개는 언제쯤에나 나오려는지..ㅉㅉ

 

 

좌측 아래로 에머슨CC(옛날 중앙CC)가 내려다 보인다.

 

이어지는 작은 봉우리들이 높지는 않아도 피로감은 큰 봉우리에 못지않다.

 

겨울비는 내리는데, 배낭 속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받을까? 말까?

 

 

맑은 날씨였으면 더없이 좋았을 소나무 숲길도 그냥 지나치고,

 

 

정안이씨 납골묘지 상단을 지나,

 

묘지로 오르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에머슨CC 뒤쪽 고갯길을 지나 산으로 오른다.

 

고개 우측 전경.

 

고개 좌측으로 에머슨CC 클럽하우스 건물이 보인다.

 

 

고개에서 고도를 급하게 높여서는 다시금 완만해지고,

 

 

429봉 헬기장을 지난다.

 

 

좌측 금광면 옥정리 방향은 경사가 급하지만 능선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좌측 아래로 금광면 옥정리에서 옥정재로 구불구불 오르는 고갯길이 내려다 보인다.

 

<장고개>

지도에는 이곳쯤에 장고개로 표시되어 있다. 산이 높아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뒤에서 오는 사람이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인다고 해서 개미둑재라고도 했는데, 요즘은 갬덕지고개라고 부른다.

 

우측으로는 옥정재에서, 에머슨CC로 진입하는 도로가 나란히 이어진다.

 

 

평탄하게 이어지던 능선이 좌틀하며 내려가면,

 

 

드디어 배티고개 절개지 마루에 서게 된다.

 

절개지를 급경사로 깎아놓아 밧줄에 의지해야 할 정도이다.

 

 

베티고개에 도착하니 진천 방향 에머슨CC 진입도로 입구에서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말이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용인 사람들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는데..ㅉㅉ

 

<배티고개/이치재(341m)>

313번 도로가 지나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과 안성시를 넘는 고개로, 이 지역에 배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치(梨峙)재라 했고, 그것을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재라 불렀다는 설과, 조선 영조 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가 이 마을의 '이순곤'이라는 노인이 이끄는 주민들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 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했다고 해서 패치라고 불리다가 변음되었다는 설도 있다.

 

돌아본 배티고개 날머리.

 

배티고개(이티재) 안성 방향.

다음 구간 들머리는 이티재 표지판 뒤 백곡면 표석 옆에 있다.

 

<안성장>

안성장은 대구와 전주에서 열리는 오일장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장으로 손꼽혔다. 안성장은 서울과 경기 지방으로 올라오는 삼남의 물건들이 몰려들었던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신발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

 

 

에머슨CC 클럽하우스로 버스를 몰아 기다리던 두 분을 태우고,

 

 

안성시에 있는 목욕탕에서 겨울비에 얼은 몸을 녹이고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수구레집으로 갔다.

 

<수구레>

수구레는 쇠고기의 특정 부위로 소의 가죽 안쪽 쫄깃한 아교질 부위를 말한다. 식감이 좋아 음식 애호가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끓여서 국밥을 해 먹거나(수구레국밥), 술안주로 먹기도 한다.

 

겨울비에 얼은 몸과 마음을 행복으로 채우고,

 

난관을 통과한 사람만이 맞볼 수 있는 행복주(酒)에 취한다.

 

오늘 점심은 송 사장님 부부가 사셨다고 하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는지요?

잘은 모르지만 식사대접을 받았으니 감사하고 일단 축하드립니다.

연유는 담 산행 때 꼭 알려 주십시오.

 

글고 매년 겨울철에 협찬해 주시는 과메기가 도착했는데,

협찬해 주신 분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빠른 쾌유를 빌며, 다음 산행에서는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음주가 조금 길어졌다.

올해부터는 술을 반으로 줄인다는데, 음주 시간을 줄이면 술 소비량도 준다.

어서 서울로 가자! 잠이 쏟아진다!

 

 

우려와 달리 겨울비 내리는 우중 산행이라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이 무탈하게 마친 것을 함께한 우리 산우회원들과 함께 자축하고 싶다.

아울러 산행 예상시간을 한 시간 짧게 제사하는 바람에

각오를 느슨하게 하여 산행 막판에 고생시킨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좀 더 노력하는 것으로..!

 

진짜로 갑오년 새해에는 음주량을 줄여서

하이트진로와 롯데가 판매 부진에 허덕이게 합시다!

 

편안한 명절 보내시고,

갑오년 새해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