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땅끝기맥 09차(닭골재~도솔암) 전남 해남군.
산 행 일 : 2016. 05. 14.(토)
산행코스 : 닭골재 ~ 바람재 ~ 달마산 불썬봉 ~ 하숙골재 ~ 떡봉 ~ 도솔암 + 미황사
(산행거리 9.5km + 6km)
산행참가 : 15명.
<산행지도>
땅끝기맥의 마지막 구간인 닭골재에서 땅끝까지의 구간을 두고 고민 아닌 고민에 빠졌다. 지난번 오소재에서 닭골재까지의 산행이 쉽지 않았던 탓에 구간이 너무 길다는 중론이 들끓었다. 그래서 A, B팀으로 나누어서 산행을 할까도 검토했지만, 도솔암에서 미황사로 이어지 달마산 북서쪽 사면의 숲길이 걸어 볼만한 길이고 미황사 탐방도 겸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북정맥 시작을 알리며 지내려던 금년도 시산재를 다음 구간 도솔봉 근처에서 거행하게 되면 좋을 듯도 하여, 이번 구간을 도솔암에서 끊기로 했다.
그런데 땅끝기맥 산행을 앞둔 지난 주말, 구간을 나누자는 의견을 제시 하셨던 회장님이 동해안 자전거길 라이딩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셨고, 비보를 접한 회원들은 무척이나 놀랍고 황망스러운 상황에 황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히 신속한 치료와 강건한 의지로 우려보다 빨리 회복되리라는 소식에 일말 안도감을 가지고 땅끝기맥 산행길에 나선다.
쉼없이 달려온 버스가 닭골재에 도착하자, 바로 산행 준비를 시작하고는 서늘한 아침 공기에 몸을 맡긴다.
<닭골재>
전남 해남군 현산면과 북평면의 경계에 있는 13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로, 지금은 13번 국도가 4차선으로 새로이 포장되어, 구 도로는 지역주민과 땅끝기맥 산꾼들이나 다니는 잊혀진 고개로 남아 있다. 해남지지(海南地誌)에 기록되어 있는 ‘닭골재’의 지명유래는 고개 아래에 있는 동네 지명이 ‘딱골’이라 하여 그 마을의 지명이 이 고개의 지명이 된 듯하며, ‘딱골’은 닥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해남지지에는 ‘저동(楮洞)’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고개의 지명은 ‘저동치(楮洞峙)’인데 딱골재라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민들이 ‘닭골재’라 부르면서
변음되어 그렇게 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 13번 국도에서 오래된 절개지 방향의 들머리를 찾아 오르며 산행을 시작한다.
닭골재 들머리를 들어서서 수로를 따라 좌측으로 조금 올라서니 철망을 만나고, 철망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표지기가 걸린 철망문이 열려있고, 철망문을 통과하면 뚜렷한 등로가 이어진다.
철망문을 통과하여 묘지까지 이어진 뚜렷한 등로를 지나니 등로는 온통 잡목들이 뒤엉켜 희미해지고, 136봉에서 다시 잡목을 헤치고 벌목지로 나오니 월송리 '매화영농법인'의 양돈장이 내려다 보이며 가야 할 227봉으로 이어진 땅끝기맥 능선이 가늠된다.
우측 매화리 방향.
가끔씩 만나는 묘지에는 웃자란 고사리로 덮여 있는데, 서 여사님은 제철에 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한다.
능선 갈림길 봉우리를 내려서는 백두들.
뒤로 보이는 봉우리에서 능선은 좌측으로 연결되는 듯 보이지만 땅끝길은 우측 사면으로 내려서야 한다.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신새벽에 능선 너머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관음봉을 배경으로.
벌목지대을 내려서니 이내 뚜렷한 수레길이 있는 작은닭골재로 내려서게 되고,
이내 임도가 지나는 작은닭골재에 도착한다.
작은닭골재를 지나는 백두들.
작은닭골재를 지나 시멘트 포장 임도를 잠시 따르다가 좌측 숲으로 들어서는데,
이곳에서 임도를 따라 계속 진행해도 앞쪽 봉우리 너머에서 능선과 다시 만나게 된다.
모처럼 널찍한 헬기장에 도착하여,
지난 구간의 대둔산 방향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진다.
헬기장을 뒤로하고 숲으로 들어서니 이내 관음봉이라 이름 붙여진 227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잡목 숲을 헤치는 와중에 떠오른 아침해가 훤히 비추고 있는 관음봉을 향한다.
좌전방으로 완도의 모습도 드러나 보인다.
바람재를 지나는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숲으로 들어간다.
네이버 지도에는 이곳을 바람재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정표는 227봉 지난 지점에 바람재 표시가 되어 있다.
여전히 잡목 숲길 등로가 계속 이어지고,
돌아본 해남군 현산면 월송리와 달도 위로 아침해가 올라와 있다.
<북평면 남창리와 달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와 완도 사이에 있는 섬 ‘달도’는 배의 닻을 닮아 ‘닻도’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되어 사람들이 부르기 좋게 ‘달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남창리에는 조선 중기까지 ‘달랑진’이라 불려지던 수군기지가 있었으며, 수군기지가 조선 인조 때 남쪽에 있는 북평면 이진리로 옮겨가고, 달랑진 남쪽에는 조운창을 지어 남창(南倉)이라 불렀는데, 남창은 조세로 거둔 대동미를 싣고 한양으로 가거나 먹거리가 부족했던 제주도로 식량을 공급했던 창고이다. 려말 선초 왜구의 침략이 유난히도 많았던 이곳 해남, 특히 조선조 명종 때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불렸던 '달랑진 사변(을묘왜변)'이 터졌던 곳으로 왜구의 침략으로 해남, 강진, 영암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었다고 한다.
달마산 입구로 들어서니 멋진 농바우가 마치 사열을 하듯 꽃꽂이 서서 맞아 준다.
잡목 숲을 헤치며 조그만 암봉을 우회하여 올라서니,
뒤쪽 대둔산 방향으로 지나온 땅끝능선의 봉우리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서니 우측으로 송지면에 위치한 가공산(334.8m)이 보이는데, 가공산은 우리나라 산 이름 중에 가. 나. 다 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산이라고 한다.
멋진 분들이 멋진 암봉과 멋진 땅끝기맥 봉우리들을 배경으로.
숲으로 살짝 가려진 암봉과 어우려 연무로 살짝 가리워진 대둔산과 두륜산이 참으로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
이곳부터 도솔봉까지 멋진 암릉구간이 펼쳐지게 되지만,
바로 맞닥뜨린 암봉은 너무 험하여 암릉 우측으로 우회하여 급하게 내려섰다가 다시 치고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암봉 우회길에 나선 백두들이,
절벽 아래쪽을 따라 내려서고 있다.
암봉을 우회하여 내려서니 바람재가 나온다.
<바람재>
암릉을 우회하여 안부로 내려서면 바람재 이정목을 만나는데, 우측은 송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은 이진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달마산을 오르는 일반 등산객들은 주로 송촌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오늘도 김포의 산악회 팀이 송촌리에서 올라와 우리와 조우하여 앞서거니 뒷석거니 함께 산행을 이어간다.
바람재 이정표.
우측 암릉의 바위들이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바람재를 지나 암릉으로 올라서며 돌아본 농바우 너머로, 지난 구간 이어온 땅끝능선과 대흥사를 가슴에 품고 있는 두륜산이 아련히 조망되고,
좌측으로는 완도가 한눈에 들어오며,
좌전방으로는 이진진(梨津鎭)이 내려다 보인다.
<이진진(梨津鎭)>
이진리에는 이진산성이 있는데, 이진리 마을 뒤쪽에 있는 이진산성은 정유재란 이후인 1598년(선조 21)에 진(鎭)이 설치되었고, 1627년(인조 5)에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는데 성의 축성 연대가 이때쯤으로 추정된다. 이진리(梨津里)는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진 또는 이진이라 하였는데, 서전리를 일부 병합하여 이진리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 남창리 있던 ‘달랑진’이라는 수군기지가 조선조 인조 때 남쪽에 있는 북평면 이진리로 옮겨와서 이진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임진년에 침범하지 못했던 이곳 전라도 땅으로 침범을 하였다고 한다.
북쪽 현산면 방향.
주변 조망을 몇 장 담는 사이에 백두들은 사라지고 김포 산악회 사람들만 남았다.
돌아본 대둔산과 두륜산 방향.
이곳에서 보니 투구봉(주봉/위봉) 능선이 꾀나 높아 보인다.
서북쪽 송지면과 가공산 방향.
가야 할 달마산도 아침햇살을 받아 멋진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완도 방향 파노라마.
가공산 방향 파노라마 사진인데, 좌측이 달마산 정상부다.
먼저 떠난 백두들의 아쉬움을 뒤이어 도착한 백두 후미들이 채워주고,
달마산을 배경으로도 인증을 남긴다.
빼어난 조망을 선사받은 암봉을 뒤로하고 능선 삼거리에 도착하니, 우측으로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능선 아래에는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의 산그리메가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삼거리 식당에서 최고의 조망을 즐기며 아침식사를 한다.
나무벤치를 식탁 삼아 아침식사를 하는 백두들.
식사를 마친 후, 달마산을 배경으로 능선삼거리 인증을 남기고는,
능선삼거리 이정표를 뒤로한다.
칼날 같은 바위를 밟고 오르다가.
뒤돌아 두륜산 방향의 조망을 감상하며,
바위틈 사이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암봉으로 올라서면,
또 다른 모습의 조망이 펼쳐진다.
서쪽 송지면 방향.
잠시 후에 가야 할 달마산 정상으로 어어진 능선이 환상적이고,
북서쪽 가공산 너머로 울돌목 우수영 앞바다가 어렴풋하다.
동쪽으로는 달도와 완도를 연결하는 완도대교의 모습도 선명하고,
가야 할 달마산 불썬봉과 달마산 북봉으로 이어진 등로에는 백두들이 오르고 있다.
달마산 북봉 북쪽 지능선의 암릉 모습.
봉우리 위로 올라서니 누군가가 아담한 돌탑 하나를 정성 들여 쌓아 놓았다.
아마도 이곳이 달마산 북봉쯤인 듯하다.
돌아본 두륜산과 대둔산 방향.
달마산의 최고봉인 불썬봉 위의 돌탑이 보이기 시작하는 이곳이 달마산 북봉쯤일 듯하다.
돌아본 돌탑이 있는 달마산 북봉,
우전방으로 달마산 서북쪽 사면에 미황사도 내려다 보인다.
당겨본 미황사 모습.
등로는 잠시 안부 숲길로 이어지더니,
불썬봉 오름길에 돌아본 달도 방향.
두륜산 방향 땅끝기맥 능선의 봉우리들.
달마산의 최고봉인 불썬봉에 도착하니 땅끝까지의 기맥능선이 가늠된다.
불썬봉 정상 인증.
<달마산 정상 봉수대(돌탑)>
불썬봉 정상에는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불을 써는(써다는 켜다의 전남 방언) 봉'이라 해서 불썬봉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불썬봉 대신 이 지점에서 북쪽으로 470m쯤 떨어진 곳에 '달마산(達馬山)'으로 오기했다. 극심한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산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고도 한다.
봉수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어느 학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하고 어느 학자는 12세기 중반인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봉수대에서는 밤이면 횃불, 낮에는 연기로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긴급함을 알렸다. 이곳 달마산의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완도의 숙승봉과 북일 좌일산으로 연결하던 봉수대다. 그래서 달마산 정상의 봉우리가 불선봉 또는 불썬봉이라 불렀는데, 이는 전라도 사투리로 ‘불을 켜다’,‘불을 써다’라는 유래에서 따온 지명으로 봉수대와 관련된 지명인 듯하다.
두륜산 방향 파노라마.
땅끝 방향 파노라마.
불썬봉 돌탑 아래쪽에 달마봉이라 써진 조그마한 정상석과 이정표가 있다.
<달마산((達摩山, 489m)>
해남군 북평면과 현산면, 송지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땅끝을 향해 펼쳐져 있는 암릉이 다도해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불썬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서 ‘불을 사용하다’라는 남도 사투리에서 ‘불 쓴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썬봉이라 부른 것을 미황사 스님들이 불선봉(佛禪峰)이라 부르는 바람에 불선봉이 되었다 한다.
달마산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된 달마대사가 머무를 만큼 산세가 뛰어나다는 데서 유래했다. 기록상으로 고려의 무외스님이 처음으로 이 산을 달마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달마산 정수리의 바위들은 사자와 용,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불썬봉을 불선(佛仙), 불성(佛聖)봉으로도 부른다. 미황사 스님들은 달마봉이라 부른다. 달마(達摩)란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인 ‘다르마’에서 유래되어 ‘경전’ 또는 ‘진리’를 의미하며, 달마대사는 중국에 선(禪)을 전한 후 천축국(인도)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동의 바닷가 달마산에 머물렀다는 설로 이 산의 이름을 달마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달마(達摩)는 조사선의 초조(初祖)로 인도의 스님이었는데, 중국으로 건너와 선맥(禪脈)을 이어 육조 혜능조사로 이어져 우리나라 조계종맥으로 이어지는 스님이다. 달마대사는 본래 인도 파사국(波斯國)의 왕자였다. 6세기 전후에 북위(北魏)로 건너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한 강설불교(講說佛敎)의 모함을 받아 여섯 번이나 독약을 받았다. 결국 중국에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인도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 전설에 대한 우리나라 땅끝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달마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해남으로 왔다고 믿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때 무외스님이 쓴 글에 “1281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이 산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나와서 달마산을 향해 예를 올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듣고도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가 머무를 땅이다”라며 그림으로 그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마산 불썬봉 돌탑 모습.
미황사가 좌측 아래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당겨본 미황사(美黃寺) 모습.
<미황사(美黃寺)>
신라 경덕왕 8년(749년)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石舟)가 사자포구(지금의 갈두상)에 닿자, 의조 화상이 100여명의 향도와 함께 쇠등에 그것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한번 울면서 누운 자리에 절을 세워 통교사(通敎寺)라 하였으며, 소가 마지막 멈춘 곳에 절을 세우니 미황사였다. 그때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다 하여 '아름다울 미(美)’, 금인(金人)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것을 기려 '누를 황(黃)’이라 미황사(美黃寺)라 하였다. 이러한 설화를 볼 때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중국(당나라)이 아닌 바다를 통해서 인도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설화를 뒷받침하는 부분이 미황사 초입에 있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다. 미황사 입구에
있는 우분(牛墳) 마을이다.
미황사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사찰로 바닷길 불교 전래를 추측케 하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천년 고찰이다. 바위의 누런 이끼, 금빛 나는 금샘, 달마전 낙조를 미황사의 3황(黃)으로 꼽는다. 미황사는 한반도 내륙의 위도상 가장 끝에 자리잡은 사찰로서, 신령스런 달마산의 기슭에 있는데 달마산은 미황사의 불상과 석양빛, 암릉이 조화를 이뤄 달마산의 삼황(三黃)이라 부른다고 한다. 미황사 주변으로는 동백꽃 군락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불썬봉을 뒤로하고 도솔암을 향하면,
선돌(立石) 아래로 미황사가 내려다 보이고,
가끔씩 암봉을 우회하게 되는 곳에는 밧줄을 타야 하는 곳도 있지만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다만 비가 오거나 해서 바위에 물기가 있으면 많이 미끄러울 듯하다.
달마산을 지나면서 연이어지는 암릉구간이 마치 설악산 용아릉에 온 듯한 착각을 할 만큼 멋진 암릉구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달마산 능선을 많은 산꾼들이 공룡의 등줄기라 부른다.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를 만큼 풍광이 수려하여 힘찬 기상과 장엄한 기운을 얻는다고도 하며, 조물주가 일만 이천봉의 금강산을 만든 후에 힘이 남아 땅끝마을에 작은 금강산을 만들어 수석을 전시했다고 할 만큼 빼어난 풍광이다.
달마산의 암봉들!
땅끝 해남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해 내륙 최남단의 산이라고 불리는 달마산은 수려한 산세와 시원한 조망을 자랑하는 화려한 산이다. '해남의 산'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두륜산이나 주작산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해남에서 산을 좀 탄다 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달마산이 해남에서 가장 아름답다”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달마산은 바위들이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어 마치 금강산을 길게 펼쳐 놓은 듯하다 하여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암봉을 우회하기 위해 현기증이 날 만큼 급경사의 데크계단을 내려서서,
급우틀하여 다시 오르면 문바위 앞에 이른다.
문바위재에서 바라본 완도 방향.
문바위 아래에는 통천문이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갈 만큼의 구멍으로 등로가 이어진다.
문바위재 이정표.
돌아본 문바위. 아래쪽 구멍으로 통과해야 하니 몸집이 너무 큰 분들은 달마산 가면 않 될 듯!
문바위를 통과한 후 다시 능선 위로 올라 가면,
도솔봉으로 이이지는 암릉 위에 다시 서게 되고,
바로 작은금샘 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작은 금샘은 금서동굴 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야 하는데, 금샘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으며 해남군에서는 금샘을 보호하기 위해 이정표를 설치하지 않았다 한다.
가야 할 암봉들 모습.
우측 아래로 미황사가 멀어져 간다.
등로는 좁은 바위틈 사이를 통과하기도 하고,
능선 위에 자리한 뾰족한 바위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이어지다가,
가끔씩은 나무 그늘이 있는 쉼터를 지나기도 한다.
암봉 사이의 암부는 깊지 않으나 높지 않은 암봉을 오르내리는 그 자체가 쉽지만은 않다.
또다시 만나는 작은금샘 삼거리 이정표.
땅끝능선은 우측 암릉 위로 이어지지만, 이곳에서 조금만 내려서면 작은 금샘이 있다고 한다.
지나온 암봉들.
암봉 오름길이 가팔라서 조심조심 오르다가,
돌아본 암봉이 꾀나 거대해 보이고,
이직도 가야 할 암봉들이 넉넉히? 남아 있다.
완도대교 방향.
암릉을 형성하고 있는 바위들이 칼날 같아서 조금만 방심하면 다리에 생채기를 남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들은 해 내고 있다!
북쪽 가공산 방향으로 미황사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오늘의 종착지는 미황사인데..ㅉㅉ
지나온 암봉들.
가야 할 암봉들.
바위들 사이로 이어지던 등로가 갑자기 숲으로 들어서고,
바로 대밭삼거리에 도착한다.
대밭삼거리에는 상대적으로 널찍한 나무 그늘이 펼쳐지고 벤치도 놓여 있다.
대밭삼거리에서의 쉼을 뒤로하고 또 다른 암봉에 올라서면,
통신탑이 희미하게 보이는 도솔봉이 가늠된다. 언제 저 도솔봉까지 가나..ㅉㅉ
올라야 할 귀래봉으로 이어지는 등로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오리와 코뿔소의 입맟춤.
귀래봉 오름길 계단을 오르는 권용호 님.
그냥 계단을 쭉 이어서 설치해 놓지, 군데군데 밧줄도 타게 해 놓았다.
귀래봉에서 웅빈 님이 지나온 암봉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다.
가야 할 떡봉과 도솔봉, 그 너머로 남해바다가 보인다.
좌전방 북평면 평암리 방향.
하숙골재를 지난다.
떡봉 정상에 올라서 돌아본 하숙골재와 귀래봉 방향.
완도 방향.
떡봉 정상 인증.
떡봉을 뒤로하고 도솔봉을 향한다.
우측 송지면 방향.
이제 날카롭던 암릉길도 도솔봉이 가까워지면서 조금은 유순해진다.
우측 도솔봉에서 좌측 언제나봉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 능선이 가늠되고,
땅끝 너머로 있을 노화도 방향도 가늠해 본다.
등로는 숲으로 들며 도솔봉을 향한다.
좌측 영전리 방향.
돌아본 떡봉 방향.
완도 방향.
돌아본 달마산 방향 파노라마.
도솔암 직전 암릉길은 좌측 사면으로 우회하여 진행되며, 이제 도솔암 요사채가 선명히 느러나 보인다.
도솔암 갈림길 도착.
오늘 땅끝기맥 산행은 여기까지라서 청색 화살표 방향으로 우틀하여 도솔암을 가야 하지만,
다음 산행에서의 시산재 장소 물색을 위해 녹색 화살표 방향의 땅끝 방향으로 좀 더 가보기로 한다.
우측 도솔암 요사채.
또 도솔암 갈림길을 지나 땅끝능성인 도솔봉 주차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곳부터는 '땅끝 천년숲 옛길'이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아마도 미황사를 거쳐 도솔암에서 땅끝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보여행길인가 보다.
우측 송지면 방향.
도솔암 주차장에서 도솔암을 둘러보러 젊은이들이 몰려온다.
등로 좌측 봉우리에서 도솔봉 헬기장을 찾아낸다.
다음 구간 이곳에서 시산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도솔봉 주차장 방향을 좀 더 가 보기로 한다.
우측 송종리 방향.
널찍한 오솔길이 도솔암을 찾은 탐방객의 숫자를 말해 준다.
여기서 땅끝마을이 12km이면 그냥 땅끝까지 가도 될 듯하지만,
도솔봉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만 확인하고 도솔암으로 돌아선다.
우측 전망바위에서 돌아본 달마산 방향.
앞쪽 암릉 너머에 도솔암이 자리하고 있고, 우측 능선 위에 헬기장이 있다.
전망바위에서 진도 울돌목 바다가 아련히 보인다.
지난해 개봉된 영화 “명량”의 명량대첩이 있었던 장소가 진도대교 아래의 울돌목이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0척의 왜선을 대파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조선을 구한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였던 모양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라는 충격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의도의 정치인들은 제밥그릇만 챙기고 백성의 밥그릇은 내몰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라의 시스템이 잘 돌아가려면 국회의원들이 모든 특권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로 정부와 여러 이익단체를 감시하고 조화시켜야 하거늘!
서쪽 어불도 방향.
도솔봉에 자리한 통신중계소로 인해 사면길로 이어지는 땅끝길을 가늠해 보고,
암릉 너머에 있을 도솔암으로 향한다.
도솔암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솔암 갈림길을 지나쳐 직진본능을 따르고 계신 권용호님을 만나 더 이상의 알바는 필요하지 않음을 예기하며 함께 도솔암을 향한다.
달마산 방향.
다시 도솔암 갈림길로 돌아나와 좌측 길로 들어서면,
도솔암 요사체가 있는 도솔암 입구에 도착한다.
도솔암 연혁.
잠시 전 이정목에서 본 천년숲 옛길이 이런 것이구나!
능선 한켠에서 '아들과 아빠'
도솔암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도솔암((兜率庵)>
흔히 달마산 도솔암을 소개할 때 하늘에 맞닿은 암자, 땅끝에서 만나는 하늘 끝, 남도의 금강산인 달마산에 핀 연꽃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도솔암은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미황사를 창건하기 전에 수행하던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암자다. 조선조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왜군들이 해상 퇴로가 막혀 달마산으로 퇴각하던 중, 암자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소실되었는데, 월정사의 법조스님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도솔암은 깎아지른듯한 암릉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암자로 마치 제비집을 연상케 한다. 미황사의 12번째 부속 암자로 해남 8경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는 도솔암의 풍광이 마치 금강산에 온 것처럼 착각을 느끼게 하니 왜 이곳이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도솔암은 달마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로 원효성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여러 스님들의 기도처로도 사용되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달마대사의 法身이 늘 상주하는 곳’으로 기록이 되었으며, 드라마 ‘추노’, ‘각시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등이 촬영된 장소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암자이기도 하다.
도솔암 경내에 도착한다.
도솔암에서.
도솔암 마당에서.
건너편 암릉 아래에 삼성각 건물이 살짝 보인다.
다시 도솔암을 돌아나와,
이제는 미황사로 가야하지만,
지척에 있는 삼성각을 보지 않을 수 없어서 좌측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삼성각에 들린다.
삼성각에서 바라본 도솔암의 모습.
도솔암은 V자 형태로 벌어진 절벽 사이에 쌓은 석축 위에 앉아 있다.
다시 미황사 가는 길로 돌아나와, 미황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바위틈에 사이에 있는 용담(龍潭)이라는 샘.
이 용담샘은 굴 천정에 드러난 물길에서 물이 굴 바닥에 떨어져 생긴 샘인데, 이러한 샘의 구조는 우리나라에서 몇 곳이 안 된다고 한다. 이 굴은 ‘용굴’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 굴에서 2마리의 용이 나와 승천했다고 한다. 바위 앞에서 용이 입을 벌려 바위가 뚫리고 용이 뿔로 받아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청색 화살표 방향이 도솔암에서 미황사로 이어지는 등로이고, 붉은 화살표가 용담을 다녀오는 등로다.
잔돌들이 어지러운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면 삼나무숲 쉼터에 도착한다.
삼나무숲 이정표.
달마산 능선에서의 나무 그늘은 참으로 귀했다.
그래서 이런 숲길은 너무나도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 그 자체다.
사면을 따라 미황사로 이어진 오솔길을 걷는다.
이런 숲길은 언제라도 좋은데, 우리 백두들은 늘 능선을 헤매다 보니 좀처럼 접하지 못했다.
달마산 능선 위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타나고,
천년숲 옛길 안내판이 있다.
잠시 후 짧은 너덜지대도 통과한다.
너덜지대에서 올려다본 달마산 능선의 암봉.
길은 너덜을 건너 다시 숲으로 들고,
미황사 부도암 앞 갈림길에 도착한다.
부도암 쪽으로 대밭삼거리와 작은금샘으로 오르는 등로가 표시되어 있다.
달마산 서북쪽 사면에 자리한 부도암 모습.
좌측으로 흩어져 있던 부도탑들을 모아 놓은 부도전이 자리하고 있다.
부도암 경내.
부도암 마당에 있는 미황사 사적비.
부도암 전경.
부도암을 뒤로하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나와 미황사로 향한다.
오늘이 석가탄신일이라 그런지 미황사 경내가 무척이나 북적인다.
이곳에서 점심공양을 해도 되었을 듯하다.
사실 앞서 내려온 백두들은 이곳에서 떡과 음식을 함께하며 부처님 오심을 축하드렸다고 한다.
미황사 대웅전 앞으로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는 자그마한 생일상이 차려져 있다.
미황사 대웅전 전경.
대웅전 앞마당에는 노래자랑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어르신 노래자랑이라면, 나도!
미황사 경내 한켠에 달마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표시되어 있다.
미황사를 뒤로하고,
최근에 건축되아 아직 편액을 달지 않은 미황산 일주문.
미황사 아래쪽 주차장 입구에 있는 우리의 애마에 올라,
두륜산 집단시설지구에 있는 유달산 식당에서,
달마산에서의 벅찬 장면들을 담아서 나눈다.
옛날 100대 명산을 하면서 찾았던 식당으로 아직도 옛 맛이 남아 있고,
시장이란 찬과 맛깔난 남도의 찬들이 어울리며 밥상에는 빈그릇이 쌓여 간다.
회장님의 부재로 인한 분위기 탓인지,
보통 두 시간 걸리는 식사 시간이 한 시간으로 마치고는 서울행 버스에 오른다.
양재에서 최 회장님 쾌유 기원회를 개최하는 백두들!
어느 조직이건 무리에서의 리더의 역할은 중요하다.
시실 역사를 되돌아 보건, 주변의 상황을 헤아려 보건,
리더의 능력이 조직의 흥망을 결정하는 첩경이 됨은 자명한 일이다.
백두산우회를 끌어온 회장님의 쾌유를 기다리며
벅찬 남도에서의 산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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