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한남정맥 09차(장승고개~보구곶리) 김포시.
산 행 일 : 2017. 03. 25.(토)
산행코스 : 장승고개~것고개~고정리지석묘~56번지방도~쌍룡대로~문수산~보구곶리 + 보구곶리 마을회관
(거리 17.5km)
산행참가 : 26백두.
<산행코스>
오늘 한남정맥 아홉 번째 산행을 완주하면 178km에 달하는 한남정맥 종주를 마치게 된다. 대간길을 걸으며 수많은 선조들이 생존을 걸고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들을 목도했었고, 그 후 여러 정맥길에서도 그 흔적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한남정맥을 걸으면서는, 현존하는 생존투쟁의 생생한 증거들을 목도했었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선조들이 생존을 놓고 얼마나 많은 위협을 이겨 내었으며, 나 또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문수산에 오르면 실존하는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실체를 목도하고, 그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하며 이번 산행을 준비했다.
이번 산행으로, 그동안 한남정맥을 걸으며 봉우리를 점령하고 있는 군부대와 능선을 파헤치고 있는 공단과 주택단지를 단지 우리가 걸어야 할 정맥길을 훼손하는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이런 상황을 개선할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맥 능선의 보존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의미가 있다면 보존가치를 설파하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산행이었으면 한다. 오늘 산행은 길 찾기에만 연연하지 않고,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1대간 9정맥 종주의 의미와 우리와 후손들의 삶과 연관된 의미를 생각하며 걸어 보리라 다짐하며 양재에서 버스에 오른다.
한남정맥 졸업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26명이 산행에 참가했다.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김포의 장승고개 인근에 있는 지난 산행 종료지점에 도착했고, 우리는 3시간 이상 버스에서의 쪽잠으로 자다깨다를 반복 하다가 일어나, 산행 준비를 마치고 가로등 불빛에 몸을 맡긴다.
대곶북로 장승고개 인근에서 한남정맥 마지막 산행을 시작한다.
사실 대곶북로 도로가 한남정맥 능선이다.
대곶북로를 따라 150m쯤 진행하다가, 우측 '동인기연' 표지판 뒤로 이어지는 들머리로 들어서는데,
등로는 희미하고 잡목과 가시나무가 뒤엉켜 있어서 진행에 상당한 고초를 겪으며 더디게 능선을 더듬어 나아간다.
동인기연 공장 울타리를 따라 우틀하여 조금 오르면 오래된 철대문이 앞을 막아선다.
철대문을 옆으로 돌아 들어서면 청색 화살표 방향의 직진 길에 표지기들이 몇 개 보이지만,
한남길은 녹색의 화살표처럼 좌측 수레길로 가야 하는데 철망으로 막아 놓았다.
표지기를 쫓아 직진하는 백두들을 돌려세워, 좌측의 철망 울타리를 타고 넘어 나무둥치로 막아 놓은 수레길을 따라 진행하면,
주말농장처럼 보이는 시설물과 밭이 나타난다.
아마도 이 농장 주인이 철망 울타리를 설치하고 수레길을 막아 놓은 장본인 인가 보다.
밭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하면 철조망이 능선을 막아서고, 철조망을 넘으면 능선을 따라 수레길이 이어진다.
잠시 후, 지도상 절골로 90번길이라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고,
잠시 능선을 따르다가 좌측 공장지대를 통과해야 하지만,
공장 울타리 너머로 이어진 정맥길 통과가 쉽지 않다는 선답자 산행기에 따라 배수로 방향으로 우회하기로 하고,
잠시 더 능선을 따라 진행하다가 우측으로 내려서며 배수로를 건너 농로에 내려선다.
농로에 내려서서 좌측으로 잠시 진행하면,
공장지대로 이어지는 지도상 절골로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진행한다.
T자 삼거리에서 건너편 천주교 공원묘원 방향으로 들어선다.
천주교 공원묘원을 오르며 돌아본 공장지대와 건너편 지나온 한남정맥 능선.
우측으로 군부대 울타리를 끼고 가는데 좌측으로 절개지가 있어서 다소 위험해 보이는 곳도 지난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72.8m)에서 첫번째 쉼을 하는데.
길찾기가 가장 어려운 구간을 지나와서 그런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쉼을 한다.
전방으로 김포시 통진읍 마송 택지지구가 보이며, 정수장으로 짐작되는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선다.
철망울타리를 따라 내려서서 좌측으로 잠시 도로를 따르다가 우측 숲으로 들어서고,
잠시 후 Y자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도 되는데, 좌측 길은 군부대 울타리를 만나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서야 하고, 우측 길은 바로 부대 정문 앞으로 이어진다. 부대 정문 앞 도로를 건너 잠시 진행하면,
희미한 숲길을 따라 직진하면 바로 것고개로 이어지지만, 정맥길인 좌측 오름 능선을 따라 오르면 참호가 있는 봉우리에 오르게 되고 능선을 따라 우측 방향으로 진행하면,
삼각점이 있는 80봉에 도착한다.
낙엽 쌓인 80봉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면 동진문화센터 뒤편으로 내려서게 되고,
이내 것고개에 도착하는데,
도로 건너편으로 아침식사를 예약해 놓은 김포두레식당이 보인다.
도로를 건너서 돌아본 것고개 날머리.
<통진두레문화센타>
통진두레놀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벼농사가 시작된 통진읍 가현리 일대의 두레에서 비롯되었다. 1997년 제38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통진두레놀이는 1998년 4월 13일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통진두레놀이는 매년 단오제와 김포 문화예술제에서 볼 수 있으며, 통진읍 48번 국도변에 통진두레문화센타가 건축되어 전승보전되고 있다.
것고개는 해병대 정문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통해 통과한다.
<것고개>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와 옹정리를 잇는 고개로 48번 국도가 지난다. 48번 국도는 것고개에서 북서쪽은 강화도로 이어지고 남동쪽은 김포공항을 거쳐 서울로 연결된다.
80봉을 우회한 백두들은 벌써 식당으로 들어가고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한남정맥은 80봉에서 해병대 정문 앞으로 이어져 사진의 식당 좌측 능선으로 이어져 군부대 안쪽으로 이어진다.
나도 서둘러 들어가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최근 들어 아침식사를 매식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번에는 권용호님께서 베풀어 주셨다고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서암리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로 들어서며 다시금 한남정맥길을 이어간다.
군인아파트로 보이는 푸르지오 아파트 앞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 백두들.
해병대 관사 앞도 지나고,
아직은 이른 휴일의 아침이라 통행이 뜸한 도로를 계속 따르는데,
인도가 끊어진 곳은 도로로 내려서는 위험도 감수하며 도로를 따르다가,
'문배술중요무형문화재' 표지판 방향으로 좌틀하여 들어선다.
<문배술>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술로, 대중화된 전통주로는 안동소주와 경주법주가 있지만 문배술도 거기에 빠지지 않는 우리나라를 대표로 하는 전통주에 속한다고 한다. 시기상으로 보면 몽골군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벌하고 세계를 호령할 때, 아랍의 알코올 증류법을 도입해서 증류방식 술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니 역사가 꽤 오래된 모양이다. 당시에 몽골군에서 유명한 술은 마유주(말의 젓을 발효 시켜서 만든 술)인데, 술을 워낙 좋아하던 민족인지라 새로운 증류식 소주도 그들의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다. 13세기 초 몽골군의 진격에 고려군도 어쩔 수 없이 지배를 당하는데, 그 당시 그들이 주둔했던 평양에서도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좋은 술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문배술의 시초라고 한다.
고려 시절에 그 맛이 너무나도 좋고 유명해서 왕에게만 진상되다가, 고려 시대 중엽에 이르러서 양조 비법을 퍼트려서 서민들도 마실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맥이 끊겼다가 평양에서 3대째 전수자이신 이경영 옹께서 아버지로부터 비법을 전수를 받다가, 6.25가 일어나자 남한으로 내려와 서울에서 거북선이란 이름으로 문배술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간에 양곡관리법으로 잠시 중단되었지만, 80년대에 들어서 다시금 생산을 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5대째 전수를 받아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문배술은 특이하게 쌀과 누룩을 사용하는 않고 밀과 수수, 조를 원료로 하여 술을 빚는 삼양주이다.(한 번만 빚는 술이 단양주, 밀술에 덧술로 이뤄진 술을 이양주, 여기에다 덧술을 한번 더 빚어서 만드는 술이 삼양주이다) 잡곡으로 만든 순곡증류주이지만, 맛이 깔끔하고 뒤끝이 없어서 높은 도수임에도 불구하고(40도) 술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술이다. 잡곡으로 만들었지만 야생 들꽃배의 향기가 난다고 해서 문배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문배술이 유명해진 것은 2000년 남북 정상들이 만남을 가졌을 당시에 우리 측에서 제공하여 건배를 했던 술로도 유명하다. 술의 맛은 도수가 높지만 깔끔하게 넘어가고 뒤끝이 없다. 그리고 원래 들꽃배의 향기가 난다고 한다. 문배술은 40도의 도수를 자랑하는 '문배술'과 23도인 '문배술 순'이 있다.
다시 한번 '문배술중요무형문화재' 표지판 방향으로 좌틀하고,
문배술 공장 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다가,
상부로 수로가 지나는 T자 갈림길에서 우측 '해주최씨 문덕제' 방향으로 들어서서,
도로가 우측(문덕제 방향)으로 꺾인 지점에서 정면의 숲으로 들어선다.
숲으로 들어서면 뚜렷한 산길이 이어져 있고, 잠시 후 통진읍 서암리 '검바위 약수터'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나,
오늘 처음으로 정맥능선 다운 능선길이 이어진다.
잠시 후 우회길을 만나서 그냥 편한 우회길을 따르고,
우회길은 다시 능선길과 합류하여 이어진다.
잠시 후 군부대 울타리가 막아서는 곳에서 울타리를 따라 우틀하여,
철조망 울타리를 따른다.
원형철조망이 앞을 가로막는 지점에서 우측 아래로 내려서서 교통호를 따라 진행하는데,
우측 김포시 하성면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지만 연무로 인해 조망은 별로다.
교통호에 설치된 철조망 쪽문을 통과하고,
따르던 교통호를 건너 폐타이어가 쌓인 곳으로 진행한다.
따르던 능선길이 다시 우측 교통호로 내려서는데, 이곳에서 능선을 고집해 봐야 금방 우측으로 내려오게 된다.
무심코 교통호를 따라 직진하다가 되돌아와, 우측 지능선으로 내려선다.
교통호를 따라 알바 갔던 분들을 기다려서 함께 진행한다.
이곳부터는 가림막이 쳐진 울타리를 따르게 되는데, 우측 아래로도 족적이 이어져 있지만 울타리를 따라야 한다.
가림막이 쳐진 울타리를 따라 잠시 더 진행하면,
옛고개에 내려서서,
건너편 계단을 오르면,
고정리 지석묘에 도착한다.
<고정리 지석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는데, 탁자식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이고, 바둑판식은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뚜껑돌을 덮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린 형태이다.
통진읍 고정리 뒤편의 구릉지대에 3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이 가운데 1기는 탁자식 고인돌로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3m, 두께 0.83m이다. 나머지 2기는 받침돌 부분이 땅 속에 묻혀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 어렵다. 고정리 고인돌은 한강 하류 지역에 나타난 고인돌 문화와 사회 그리고 고인돌 축조 방법과 기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정리 지석묘.
창병씨로부터 고인돌과 지석묘의 차이점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가지고 온 과일을 나누며 느긋한 쉼을 즐긴다.
고정리 지석묘 인증.
오늘 처음으로 참가한 강효경 상무(우측 끝)도 처음으로 인증에 참여했다.
고정리 지석묘를 뒤로하고 낙엽길을 따라 내려서니,
12번 군도가 지나는 '남정곡 고개'에 도착하는데,
12번 군도에 내려서서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 10여 미터 진행 후 좌측 숲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 오래된 삼각점이 있는 95봉을 지나면,
월곶면 갈산공단이 정맥능선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 내려다 보이는 절개지에 도착하는데,
갈산공단 건물들 우측으로 돌아서 건너편 능선으로 진행하게 된다.
공장건물 울타리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서서,
공장 축대를 따라 진행하고,
도로에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 좌틀하여,
도로를 따라 고갯마루로 올라서서,
동호엔지니어링 건너편 공터로 들어서서,
절토 작업을 중단한 공터 건너편 능선으로 올라간다.
절개지 위에 올라서서 돌아본 95봉 방향. 녹색 실선이 지나온 길이다.
내려다본 서쪽 갈산공단 방향.
좌측으로 갈산공단 절개지를 끼고 잠시 오르면 작은 기독교 공원묘원이 나타나고,
양지바른 능선길에서 올해 처음으로 진달래를 카메라에 담는다.
105봉을 지나 내려서면,
우측으로 축산농장이 자리하고 있는 곳을 지나는데,
근년에 창궐했던 전염병 때문인지, 가축들은 보이지 않고 텅 빈 축사만이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농장 건물에는 '에덴농축'이라는 간판만 휑하니 걸려 있다.
잠시 후 농장 진입도로쯤으로 내려서고, 정면 T자 갈림길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 비루고개까지 한참을 진행한다.
아침식사도 든든히 했고 기온도 서늘하니 산행하기 딱 좋은 날이다.
길가에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만 아니면 걷기에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한 도로를 따르는데,
앞쪽으로 한남정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문수산이 떠억하니 보인다.
따르던 도로가 56번 지방도로와 만나서 우틀하면,
비루고개에 도착한다.
<비루고개>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와 개곡리를 잇는 56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다.
비루고개 들머리에 있는 묘지에서 잠시 배낭털이를 하며 쉼을 한다.
앞서 가던 분들도 산 중턱에서 쉼을 하다가 함께 출발한다.
삼각점이 있는 80봉을 지나고,
잠시 내려서면 군부대 울타리를 만나 우측으로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는데,
앞쪽 능선 너머로 올라야 할 문수산이 보인다.
잠시 후 능선 마루로 올라 '각개전투'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군부대 울타리와 이별하고 우측 능선을 따라 오른다.
아마도 이 능선 전체가 장병들의 각개전투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나 보다.
가끔씩 북한군 모형들이 나타나고,
각개전투 완료 지점쯤을 지나면,
이내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에 자그마한 공터와 삼각점이 있는 100봉으로, 봉우리 우측으로는 애기봉이 안갯속에서 어슴프레 조망된다.
100봉을 내려서면 임도와 만나게 되고 한남길은 좌측으로 임도를 따라 진행된다.
임도는 능선을 따라 널찍하게 닦여져 있는데 아마도 이 임도가 '쌍룡대로'라 표시된 군사용 도로인 듯한데,
MTB를 타도 좋을 듯한 흙길이 이어진다.
앞쪽으로는 올라야 할 문수산이 점점 다가오고,
애기봉 방향으로 이어지는 평화누리길 갈림길을 지나면,
갈림길 이정표.
널찍한 헬기장에 도착한다.
헬기장 옆 이정표.
따르던 임도가 22번 군도와 만나고,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 산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려 함께 본격적인 문수산 오름길을 시작한다.
금방 후미도 모두 도착하여,
다시금 행렬을 이루어 문수산 오름길을 시작한다.
잠시 호젓한 소나무숲길이 이어지더니,
따르던 등로를 에코빌리지 새싹유치원에서 철재 펜스로 막아 놓았는데,
이란 한적한 시골에 고등학교 크기의 유치원이 자리하고 있다니, 쉬이 짐작이 어렵다.
새싹유치원 절재 펜스를 따라 올라간다.
잠시 후 휀스가 끝나는 지점에 도착하게 되는데, 휀스는 국기게양대 2개가 있는 곳을 둘러싸기 위해 설치한 모양새로 보이지만, 이 또한 이유를 짐작키 어렵다. 본디 세상에는 이해하시 힘든 일이 많으니...ㅋㅋ
잠시 가파른 능선을 따라 오르다가 지나온 능선을 돌아보고,
능선 우측 골짜기를 따라 올라왔다는 선두들을 만난다.
암릉 전망대에서 돌아본 한남정맥 능선의 봉우리들.
가파르게 오르던 능선이 완만해지더니,
이내 문수상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문수산 정상부 우측 큰 나무 아래서 조망을 즐기며 잠시 동안 후미를 기다려,
문수산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오른다.
<문수산(文殊山, 376m)>
한강 하류인 김포반도의 서쪽 끝자락인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 위치한 산으로 김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한남정맥의 최 북서쪽에 위치한 문수산은 산의 경치가 사계절 아름다워 '김포의 금강산'이라 불리며, 휴전선 최북서단으로 서울의 관문이자 수도 서울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하며 강화도가 지척에 있는 특이한 지형으로 인해 늘 역사의 현장이 되어왔다. 멀게는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 이곳 문수산 일대가 격전지였고, 가까이는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의 일대 격전이 있었다. 이때의 격전으로 성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됐다. 그리고 6.25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분단의 최전선이어서 북한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맑은 날 문수산 북단에 서면, 북한땅이 강 건너로 손에 닿을 듯 있으며, 연백평야와 예성강 하구를 희미하게 볼 수 있고 개성 송악산도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다.
문수산 정상은 조선 후기에 쌓았다는 문수산 장대지(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하여 지휘하던 곳으로 보통 산성의 정상부에 있다)가 있는데, 지금은 발굴작업을 마치고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문수산성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에 위치한 산성으로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화의 갑곳진을 마주 보는 김포 쪽 육지의 문수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성체이다. 강화도 갑곶진을 마주 보고 자리한 험준한 문수산 정상부에서 서쪽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가,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포용하여 해안지대를 연결한 포곡식의 산성으로,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門樓)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은 본래의 것이 남아 있다.
강화도 방향으로 김포와 강화도를 연결하는 강화대교 아래의 바다를 염하(鹽河)라 한다.
<염하(鹽河)>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海峽)을 염하(鹽河)라 한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문수산 정상에서 강화도 방향을 조망하는 백두들.
강화도 방향 파노라마. 오늘은 옅은 안개가 끼어 있어서 조망이 신통치 않다.
북동쪽 한강하구(조강) 방향.
하구 쪽 한강을 할아비강이라 하여 조강(祖江)이라고도 하는데, 아마도 한반도 중부지방의 크고 작은 물줄기는 모두 한강으로 흘러들여 바다로 간다고 하여 '한반도의 할아비강'이라 부르는 듯하다.
어렵게 이어온 한남정맥의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선 백두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다.
1대간 8정맥을 완주한 백두들의 문수산 정상 인증.
원조 회원인 종협 형님과 만식 형님 파이팅!
종협 형님은 산행 참석을 위해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서 왔다. 감사!
이제 문수한 정상석을 뒤로하고,
문수산 전망대로 이동하는데,
문수산 정상 방향 등로는 문수산성 장대지 복원공사로 인해 막아 놓았다.
가림막을 우회하여 내려섰다가,
문수산 정상 전망데크에 오른다.
돌아본 문수산 정상 방향.
북서쪽 서울 방향.
아래쪽으로 한강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시야가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문수산을 뒤로하고 보구곶리를 향하는 백두들.
문수산 정상 전망데크를 뒤로하고 보구곶리 쪽으로 내려서는 도중에 있는 전망대에서,
남겨진 백두들이 마지막 배낭털이를 하고는 보구곶리 방향 능선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용강리 갈림길에서 좌측의 북문 방향 능선을 따르고,
문수산성 동아문을 지난다.
문수산 북봉 도착.
북봉 이정표에서 학생야영장 방향이 한남길이다.
강화대교를 배경으로.
가야 할 한남정맥의 마지막 능선.
이곳에서 앞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우측으로 내려서야 한다.
동막골 갈림길을 지난다.
동막골 갈림길 이정표에서 한남정맥 줄기는 직진 방향의 능선으로 계속 이어진다.
좌측으로 강화대교와 갑곶이 조망된다.
김포와 강화를 잇는 강화대교가 있는 바다가 강줄기처럼 보인다고 해서 염하(鹽河)라고 한다. 다리 옆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갑곶진으로 다리가 없던 시절에 육지에서 강화도로 통하는 나루터였다.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이곳 문수산성이 한국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병인양요의 현장이다.
옛부터 교통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던 이곳에 산성을 쌓았는데, 고려시대에는 몽고가 고려를 침공하여 이곳까지 왔으나 강 같은 저 염하를 건너지 못하였고, 1886년 병인양요 때에는 그 당시 최신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 함대가 염하를 건너 문수산성으로 진격하여 조선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양쪽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프랑스군이 전투에는 승리했으나 프랑스군 역시 피해가 막대하여 서둘러 자국으로 철수하면서, 그 당시 조선의 조정이 국가의 중요문서와 역사기록 등 많은 기록물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분산 배치시킨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중요 기록물 340점을 본국으로 가져갔으며, 나머지 6,000여 점의 도서와 외규장각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프랑스로 반출된 외규장각 도서를 끈질기게 돌려달라고 하였으나 돌려주지 않다가, 지금은 임대 형식으로 몇 해 전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갑곶(甲串)은 강화도에서 염하 쪽으로 육지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현재 강화대교 서작점 부근의 지명이다. 고려 23대 고종 때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무신정권의 실질적 집권자였던 최우가 조정을 이끌고 건너간 곳으로,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김포반도의 끄트머리에 툭 튀어나온 모양의 월곶면은 북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개풍군(현 판문군)과 마주 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염하를 건너면 바로 강화도다. '곶(串)'은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형을 이르는 말이다.
돌아본 문수산 정상 방향.
가야 할 한남정맥의 마지막 봉우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270봉 정상에서 한강의 마지막 모습을 배경으로.
강화도 방향으로 염하가 마치 진짜 강처럼 보인다.
이제 임박한 1대갼(大幹) 9정맥(正脈)의 마감 장소인 한강을 배경으로,
완주를 마쳐가는 나와 이제 막 시작을 하는 강 상무가 함께!
보통 저 뒤로 보이는 강을 대부분 한강이라 부른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한강이 아니라 조강(祖江)이라 부르는 게 맞다는 설도 있다. 한강의 물줄기는 백두대간과 한강기맥이 분기하는 오대산 두로봉에서 발원하여 정선과 평창을 거치면서 여러 계곡의 물줄기들이 만나서 오대천, 골지천, 임계천, 송천 등의 꽤나 큰 물줄기가 정선읍까지 이어지며 조양강(朝陽江)이라는 강의 모습을 갖춘다. 이 조양강에 동남천 물줄기가 합해지는 정선읍 남쪽 가수리 수미마을에서부터 영월에 이르는 51km 구간을 동강(東江)이라고 부른다. 이 동강은 영월에 이르러 다서 서강(西江)과 합쳐지면서 부터 남한강(南漢江)이라 불리어진다. 남한강은 단양, 충주, 여주를 거쳐서 양수리(두물머리)로 흘러 들어와, 이곳에서 청평에서 내려온 북한강(北漢江)과 합쳐져 한강(漢江)이란 이름으로 수도 서울을 거쳐서 파주의 오두산 전망대가 있는 교하(交河)에서 임진강을 만나,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강화도를 거치면서 서해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교하라는 지명은 큰 강 2개가 만난다고 해서 생겼으며, 교하에서 강화도 앞까지를 나라 강의 원조라고 하여 '할아버지 강'이란 뜻의 조강(祖江)이라고 한다.
270봉 정상에 올라서니 유도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동안 산줄기에 가려져 모습을 보이지 않던 머머리섬(유도)도 마지막 봉우리에선 온전히 내려다 보인다.
<유도(留島)>
한강에서 떠내려 오던 섬이 멈춰서 머무른 곳이라 하여 유도(留島)라고 부른다. 유도는 조선시대까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섬이라고 한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배들이 한양의 마포나루로 올라가기 위해선 서해바다의 간조 시간을 맞춰, 밀물 때 올라가려고 대기하였던 장소라고 한다. 그래서 저 섬에는 주막도 있었다고 한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강 건너편은, 지금은 북한의 개성직할시 판문군이 된 옛 개풍군 땅이다. 고려 도읍 송도의 진산 송악산(489m)을 경계로 북쪽이 개성이요, 그 남쪽이 바로 개풍군이다. 고려의 첫 임금 태조와 마지막 임금 공민왕의 능(陵)이 나란히 그곳에 있고, 조선 건국을 반대했던 고려 72현이 들어가 숨어 살았던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이다. 조선시대에는 그곳을 해풍군 또는 풍덕군이라 했다.
강 건너편도 남쪽의 산하와 하나도 다를 바 없건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듯한 이념 때문에 가지 못하는 저 산하를 언제쯤 갈 수 있으려나 상념에 빠져 본다. 한강 너머 바로 앞 화개산에서, 임진강과 예성강의 물길을 가르며 내려온 임진북예성남정맥, 백두대간의 분수령 추가령에서 뻗어내려 한강하구 장명산에서 맥을 다하는 한북정맥, 그리고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이곳 문수산까지 잘리고, 깎이고, 마구 파헤쳐지면서 어렵게 이어온 한남정맥이 모두 모이는 곳, 이 부근은 그야말로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나는 정맥 셋이 함께 모이는 요지로, 이 앞을 흐르는 한강하구를 할아버지의 강 즉 조강(租江)이라고도 한다.
땅에서도 물이 산을 만나면 이내 돌아서고, 산이 물을 만나면 금세 산이기를 접지 않았던가. 하물며 바다 앞에 이르러서야 산이든 물이든 이제 강산의 섭리와 추억을 거두어들이고 육지 존속으로서의 한남정맥 마지막 숨결이 이곳에서 한강과 함께 살며시 잠든다.
다시금 염하 건너로 강화도를 조망하고,
갈 수 있는 한남정맥의 마지막 지점에 도착한다.
한남길은 이곳에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출입이 불가능한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한남정맥 능선으로는 출입이 불가하여 좌측의 능선을 따라 보구곶리로 향한다.
Y자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면,
나뭇가지에 걸린 표지기들이 한남정맥의 최종 지점을 알려 준다.
파헤쳐진 한남정맥길을 어렵게 어렵게 더듬어, 그 종착점에 선 천보 형님.
나도 한남정맥의 마지막 산기슭을 배경으로.
저 앞쪽 언덕을 넘어서 한강변까지 가고 싶으나, 여기서 발길을 돌려야 하기에,
다시금 분단의 아픔을 아로새기며 한반도 어디든 가고 푼 데로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우측, 갈 수 없는 마지막 한남정맥 능선을 사진으로나마 담아두고,
뒤이어 도착한 후미분들의 한남정맥 종주 인증을 남긴다.
좌측 도로를 따라 보구곶리 마을 회관 앞을 지나고,
학생야영장 앞을 지나,
우리의 애마가 기다리는 곳에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지난 산행에서도 왔었던 '김포옥천인삼사우나'에서 땀을 닦고,
영식 형님의 자제분이 새로이 시작한 화곡동의 해성식당으로 이동하여,
늘 백두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 분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며,
뒤풀이 장소인 해성식당으로 들어선다.
함께 고생하신 백두들 '사랑합니다!'
그동안 먹었던 어떤 삼겹살보다 맛있는 삼겹살과,
형수님 손맛이 배여든 맛깔난 반찬들을 만끽하며,
백두들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본다.
일 년에 한두 차레 뵙던 분과도 동안의 예기를 나누며,
백두의 긍지와 자부심을 차곡차곡 쌓아 간다.
최고의 삼겹살과 형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맛깔난 요리와 찬들~~!
너무너무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자주자주 들리겠습니다.!
어느덧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뒤풀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멀리 제주에서 오신 종협 형님과 이별의 시간을 나누며, 이제 다음 달에 있을 1대간 9정맥 졸업을 기약한다.
끊어지고 파헤쳐진 한남정맥길을 더듬어 타 넘으며 그 의미에 회의를 품었던 순간순간들을
극복하고 이겨내어 백두의 자긍심을 한층 더 쌓은 한남길이었다.
길도 아닌 길을 만들어 가고 막아서는 철조망 조차도 넘어야 했던
백두님들! 함께해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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