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한남정맥 07차(백운공원~성황당고개) 인천시.
산 행 일 : 2017. 02. 25.(토)
산행코스 : 백운공원~구루지고개~장고개~철마산~원적산~아나지고개~천마산~중구봉~징매이고개
~계양산(394)~꽃뫼산~아라뱃길(목상교) (거리 20km)
산행참가 : 19백두.
<산행코스>
양재에서 인천의 백운공원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아직은 밤이 긴 겨울이라 일찍 출발할 수도 없어서 버스 안에서 새우잠을 줄기차게 청해 보는데, '잠 못 이루는 인천의 밤'을 맞이한 일부 백두들과 밤중에도 주기적으로 화장실을 가야 하는 분들의 왕래로, 깊은 잠은커녕 선잠을 자기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예정했던 4시 반에 버스에 불이 밝혀지고 분주히 산행 준비를 한다.
차가운 밤공기가 콧구멍을 통해 허파로 파고들며 비몽사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산행의 기대감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백운공원과 부평아트센타 사이에서 한남정맥 일곱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아직은 한밤중이라 도로는 텅 비어있고 다니는 차량도 없지만,
횡단보도에 녹색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려 도로를 건넌다.
'삼신보살'이란 입간판이 있는 도로를 따라서 올라도 되지만,
옹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절개지 사면을 치고 오르면 이내 임도에 도착하는데 잠시 전 들머리에서 '삼신보살'이라는 간판이 있는 임도다.
돌아본 백운공원과 법성산 방향.
임도에서 절개지 사면길로 오르며 바라본 부평 방향 야경.
산불감시초소(128m)를 지나며,
송전탑 좌측으로 돌아서 내려서면,
그루지고개를 지나게 된다.
<그루지고개>
인천광역시사(史)에 나오는 지명 유래에 따르면 화랑 농장에서 서쪽 산을 넘어 가좌동이나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그루지고개는 6.25 전쟁 이후에 생선 장수나 소금 장수들이 많이 넘어 다녔는데, 경사가 급하여 '그만 굴러 넘어지지'하는 뜻에서 붙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또 다른 설은 일제강점기 군용으로 이곳 산에다가 굴을 많이 파 놓았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즉 그루지는 군용지의 변음으로 본 것이다. 얼마 전까지도 새우젓 장수들이 이곳 굴에다 새우젓을 보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돌아본 인천시내 방향.
호봉산 갈림길 이정표 도착.
지도상에는 호봉산이란 명칭이 없는데 우측으로 3분 거리에 있는 136.3봉을 호봉산이라 하나 보다.
한밤중에 호봉산을 가본들 별다른 소득이 없을듯하여 호봉산은 그냥 두고 직진방향의 정맥길로 들어선다.
가야 할 철마산 방향으로 군부대 울타리가 드러나 보인다.
좌측 인천항 방향.
능선 갈림길에서 뚜렷한 직진길을 두고 우틀하여 내려서면,
우측으로 군부대 울타리를 만나 잠시 더 내려서고,
장고개쯤으로 보이는 안부에 내려서는데 인위적으로 만든 수로를 건너게 된다.
<장고개(30m)>
인천시 서구 가좌동에서 부평구 산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산곡동은 너른 초지가 있어 말을 키우는 곳이었는데(마장뜰) 장고개는 마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금은 산곡동 쪽으로 군부대가 들어서 장고개는 고개의 기능을 잃었다.
안부에서 잠시 올라서니 귀여운 장고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다가 걸어온 한남길을 돌아보고,
이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조그마한 봉우리를 지난다.
앞쪽으로 가야 할 원적산이 윤곽을 드러내고,
호봉산 정상부에 도착하여 지나온 한남정맥 능선을 다시 한번 담아 본다.
우측 부평 방향.
좌측 인천항 방향.
뒤에 남겨진 두 분이서 호봉산 정상 인증을 한다.
지도에는 철마산(164.8m)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마다 다르게 표기된 인천의 산 이름은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내가 정리할 수도 없는 일이고..ㅉㅉ
능선을 따라 잠시 진행하니 앞쪽으로 원적산이 보이며, 우측 부평구 산곡동과 좌측 서구 가좌동을 잇는 도로가 만든 엄청난 절개지가 내려다 보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측 새사미아파트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야 했으나, 이제 사람만 다닐 수 있는 동물이동통로가 만들어져 조금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경사가 너무 급해서 동물들은 못 다닌다고 연락 왔음..ㅋㅋ)
앞쪽으로 먼저 간 백두들의 렌턴 불빛이 원적산을 오르고 있다.
동물들은 쉬이 다닐 수 없는 거친 원적산 비탈면을 올라서며 돌아본 철마산.
원적산 절개지에 올라서서 바라본 부평 방향으로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동쪽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새사미아파트 방향으로 돌아서 와야만 했었다.
돌아본 철마산 방향.
남서쪽 인천시내 방향.
서쪽 인천항 방향.
서북쪽 청라신도시 방향.
먼저 도착한 백두들은 원적산으로 향하고,
우두커니 남겨진 전망데크가 붉게 물든 동녁 하늘을 배경으로 다음 산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원적산 오름길에 돌아본 한남정맥 능선.
원적산 정상 도착.
<원적산(元積山, 211m)>
부평부(富平府) 남쪽 15리에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북쪽으로는 아나지고개에서 천마산에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장고개에서 원통산으로 이어진다. 이 산줄기는 옛 마장면과 석곶면을 경계한 산으로 지금도 부평구와 서구를 경계하는 산으로 되어 있다. 원적산의 '원'자의 한문 표기는 본래 '원(怨)'으로 '원한 맺힌 산'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경인운하를 굴착하는데 원통이고개를 파도 암석이 나와 실패하고, 또 안아지고개를 파도 암석이 많아 실패를 하자, 원통하고 원한이 맺힌 산이라고 해서 원적산(怨積山)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이것을 원적산(元積山)으로 고쳐 쓴 것이다. 그리고 원적산(元寂山)은 매우 한적한 산으로 풀이될 수 있으나, 그 정확한 유래를 알 길이 없다.
추운 겨울날 야간산행을 완수한 백두들이 모여 원적산 정상 인증을 한다.
원적산을 뒤로하는 백두들.
앞쪽으로 가야 할 한남정맥 능선에 있는 원적정이 보인다.
원적정에 도착하니 정자 둘레를 도는 산객들이 보인다.
돌고 돌아도 제자리인 세상살이의 이치를 말하고 있는 듯!
<원적정>
원적산은 원래 천마산으로, 산 중턱 큰 바위에 말발굽 자국 같이 파져 있어 이를 마제석이라 하고 이 산을 마제봉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산 아래 가정동 마을에는 합천이씨가 대성을 이룬 명문가인데, 이 문중에서 아기장사가 태어나자 그 부모는 후환이 두려워 아기장사를 죽였다. 그러자 이 산에서 용마가 나와 울면서 떠났다는 전설이 있어, 마제석은 그 용마의 발자국이라 전하고, 이 산을 천마가 나왔다고 하여 천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적정 안내판.
아나지고개로 향하는 백두들.
날씨가 추워서 아침식사를 아나지고개에 있는 식당에서 한다며 발걸음을 서둘러 진행한다.
가정동 갈림길에서 좌측의 직진길은 서구 가정동 방향이고, 한남길은 우틀하여 내림길로 이어진다.
인천시 서구 가정동은 조선시대 개국공신인 숙위공 조반의 별장인 가정(佳亭)이 있었다고 하여 유래된 동명이라 한다.
좌측으로 조망이 트인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청라 신도시 방향.
한남길은 아나지고개를 향해 완만한 내림길로 이어지는데,
아침 햇살이 얼어붙은 나뭇가지 사이로 비춰온다.
완만한 능선을 내려서면 정자와 등산로 안내판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한남길은 녹색 화살표 방향으로 직진하여 이어지지만 앞쪽 날머리가 가정집 울타리로 막혀있어서, 일반 등산로인 청색의 화살표 방향으로 좌틀하여 한신그랜드힐빌리지 방향으로 내려서야 한다.
백두들은 좌틀하여 일반 등산로를 따라 내려 보내고, 나와 만식형은 직진방향으로 진행했다가 가정집 철조망 울타리에 막혀서 잠깐 헤매다가 낙석방지 철망이 트인 곳으로 빠져나온다.
길 건너편 아파트로 진행하는 것이 지름길이지만,
최대한 한남길을 근접하여 진행하기 위해 우측으로 진행하여 횡단보도를 건넌다.
횡단보도를 건너 근린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한남길은 이곳에서 아나지고개 건너편으로 이어지지만, 아나지고개로 경인고속도로와 6번 국도가 지나므로 좌측으로 이동하여 고가인도교를 건너서 경인고속도로를 통과한다.
<아나지고개(경인고속도/6번국도)> - 인천 서구 가정동 -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무학대사로 하여금 도읍지가 될만한 곳을 두루 살펴보게 하였다.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던 무학대사는 부평에 이르러 들이 넓고 기름지며 가까이 한강까지 끼고 있으므로 도읍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도읍 터는 백개의 봉우리를 가져야 하는데 세어 보니 봉우리가 꼭 백개였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성계는 부평 땅이 능히 도읍이 될 만한 곳이라 기뻐하며, 주안산(만월산)에 있던 주안사로 무학대사를 보내어 산신께 제사를 지내도록 당부하고는, 흡족한 마음으로 개성으로 돌아갔다. 뒤에 다시 백관을 이끌고 찾아와 확인하니 백개였던 봉우리가 아흔아홉 개 밖에 되지 않았다. 한 개의 봉우리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개의 봉우리는 원통해서 주저앉아 원통이 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99번째 봉우리로 가는 고개는 지금도 아흔아홉 번째라는 뜻의 '아나지고개'로 불리고 있다 한다.
근린공원을 통과하여 진행하다가,
우측 경인고속도로를 건너는 육교로 우틀한다.
육교를 건너는 만식형.
우측 낮은 아파트 우측에 아나지고개 들머리가 있다.
경인고속도로 서울 방향.
경인고속도로 인천항 방향.
육교를 내려서서 왔던 길을 돌아보고,
6번 국도를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로 들어선다.
6번국도 위로 지나는 도로로 진행하여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으로 진행한다.
6번국도 부평 방향으로 진행한다.
내려다본 6번 국도.
아나지고개에서 철마산(226m)으로 오르는 들머리는 녹색 화살표 방향이나,
아침식사를 위해 청색의 화살표 방향으로 비포장 도로를 따라 들어간다.
<아나지고개>
인천시 서구 가정동에 있는 고개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무학대사로 하여금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을 두로 살펴보게 하였다.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던 무학대사는 부평에 이르러 들이 넓고 기름지며 가까이 한강까지 끼고 있으므로 도읍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도읍 터는 백개의 봉우리를 가져야 하는데, 세어 보니 봉우리가 꼭 백개였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성계는, 부평 땅이 능히 도읍이 될 만한 곳이라 기뻐하며 주안산(만월산)에 있던 주안사로 무학대사를 보내어 산신께 제사를 지내도록 당부하고는 흡족한 마음으로 개성으로 돌아갔다. 뒤에 다시 백관을 이끌고 찾아와 확인하니, 백개였던 봉우리가 아흔아홉 개밖에 되지 않았다. 한 개의 봉우리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개의 봉우리는 원통해서 주저앉아 원통이 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99번째 봉우리로 가는 고개는 지금도 아흔아홉 번째라는 뜻의 '아나지고개'로 불리고 있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아나지골'이라는 식당이 있다.
추운 겨울날 야외에서 아침 식사는 여간 고역이 아니다. 헌데 한남정맥이나 한북정맥 구간은 시내 통과 구간이 많아서 아침식사를 매식하는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해장국과 청국장 등을 시켜서 느긋한 아침식사를 즐긴다.
식당 바로 뒤편에 아나지고개에서 올라오는 한남정맥 능선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식당 뒤편의 한남정맥 능선으로 올라 한남길을 이어간다.
다리가 불편한 전소장은 이곳에서 탈출하고, 나머지 백두들은 한남정맥 잇기에 나선다.
식당 우측 뒤편으로 올라서면 이내 한남길에 접속하게 되고,
우측으로 군부대 울타리를 끼고 또 다른 인천의 철마산을 향해 오름길을 이어간다.
이윽고 앞쪽으로 가야 할 철마산 정상부가 보이기 시작하며,
모처럼 산행에 참가한 손지점장은 인천의 산들이 왜 이리 험하냐고 투덜거린다.
끝없는 투덜거림에도 가야 할 길은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체력과 의지를 가진 손점장.
나도 인천에 산들이 이리도 많은 줄은 최근에야 알았네!
철마산 주능선에 올라서서 한남길은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좌측의 전망바위를 가보기로 한다.
뜨듯한 아침을 먹고 오름길을 오르다 보니, 두텁게 껴입은 겨울옷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되나 보다.
정자가 있는 철마산 정상에 도착한다.
<철마산/천마산(鐵馬山, 221m)>
인천광역시 부평구와 서구, 계양구를 연결하여 관통하는 산으로, 계양산의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높이 뭉친 산을 철마산(鐵馬山)이라 부르고 있으나, 원래의 이름은 천마산(天馬山)이다. 이 산의 유래는 암석에 말발굽(馬蹄)이 많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 계곡을 용마가 나타난 곳이라 부르는데 이 산에서 천마가 나왔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산 기슭에는 고려 때부터 살아왔다는 합천 이씨와 백천 조씨가 많이 산다. 조선 중기 이곳 이씨 문중에는 한 장사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는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걸음을 걸었다 하며, 아기의 양어깨에 날개가 달려 하늘을 오르내렸다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장사가 나면 나랏님께 반역할까 두려워하여 장사를 없애버리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아기장사의 부모들도 벌벌 떨며 외인이 알기 전에 이 아기장사를 죽이고자, 다듬이 돌로 눌려 죽이려 할때 천마산에서 천마가 나타나 큰 소리를 내어 울며 아기장사의 집을 빙빙 돌다가 아기장사의 목숨이 끊기니 천마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씨 문중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나, 그런 후에는 큰 인물이 나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이산을 신성시하고 천마산(天馬山), 마제봉(馬蹄峯)이라 부르고 있다 한다.
<천마산과 아기장수>
조선 중기, 산 아랫마을에 선량한 부부가 살았다. 부부는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없었다. 어느 날 아내는 말이 힘차게 달려오는 꿈을 꾸고 아기를 갖게 되었다. 열 달이 지난 뒤 남자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열흘 만에 걸었으며, 한달 만에 뛰어다녔다. 백일이 되자 맷돌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초가지붕 위로 휙휙 날아올랐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천마산 꼭대기로 달려 올라가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말했다. "아, 우리 마을에서 전설처럼 정말 아기장수가 태어났구나." 하지만 아버지는 아기장수가 나오면 역적이 되어 나라를 해친다는 속설 때문에 자식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아기장수를 다듬잇돌로 눌러 죽이고, 땅에 묻을 때 콩과 팥을 함께 묻었다. 그러나 관군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기장수가 살아 있었고, 아기와 함께 묻은 콩은 군사가 되고 팥은 군마가 되어 아기장수를 호위하여 일어나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관군들이 칼을 내리쳐 아기장수를 죽였다. 그때 천마산 골짜기에서 천마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흔들며 들려왔다. 천마가 힘차게 날개를 휘저으며 날아와 아기장수의 무덤 위를 선회했다. 천마는 한나절 동안 그렇게 하늘을 날며 슬피 울다가 땅으로 떨어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장수 무덤 옆에 천마를 묻어 주었다. 몇 해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쳐들어왔다. 사람들은 탄식했다. 아기장수가 살아 있었으면 천마를 타고 날아다니며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켰을 것이라고...(펌)
철마산 정상에서 돌아본 한남정맥 능선과 아침 안개에 가려진 인천시가지 조망.
인천시 서구 방향 조망.
청라국제도시 방향 조망.
아시아드 주경기장 방향 조망.
가야 할 계양산 방향 조망.
(계잉산 -> 계양산)
중구봉을 향하는 도중에 돌아본 철마산 정상.
가야 할 중구봉과 계양산이 아득히 멀어 보이는데, 아마도 아침 안개로 시야가 흐려서 그럴 것이다.
철마산에서 중구봉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 능선이 여느 큰 산의 산줄기 못지않다.
돌아본 철마산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좌측 아래로 인천시 인재개발원과 한국은행 인재원 건물이 내려다 보인다.
심곡동 방향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도 지나고,
공촌정수사업소 방향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을 하나 더 지난다.
서곶근린공원 방향 갈림길에서 중구봉 방향으로 진행하고,
이어지는 갈림길에서도 중구봉 이정표를 보고 진행한다.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조금 오르면 폐초소봉(286봉)에 도착하게 된다.
<효성산/폐초소봉(286m)>
인천시 서구 심곡동과 계양구 효성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의 대부분을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이곳은 군부대 초소가 있어서 초소봉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등산객이 왕래할 수 있는 봉우리로 바뀌었고, 아마도 심곡동 사람들은 심곡산이라 부르고 싶겠지만, 인천 사람들은 이곳을 효성봉이라 부른다 한다. 하여튼 주변 조망이 좋아 조만간 근사한 이름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286봉에서 바라본 계양산 방향.
돌아본 한남정맥이 인천시 가운데로 끊어질 듯 이어오고 있다.
남서쪽 청라신도시 방향.
폐초소 옆에서 쉼을 하는 백두들.
동쪽 계양구 방향.
286봉을 뒤로하고 중구봉을 향하면,
효성동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난다.
이쯤에 막걸리 노점이 있을 만 한데, 한겨울이라 철수했나 보다.
중구봉을 향한 가파른 오름길을 치고 오른다.
돌아본 한남능선 광학산 방향.
중구봉 정상에 오르니 계양산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중구봉 정상 전경.
중구봉 정상 이정표에는 잠시 전에 지나온 철마산을 천마산이라 표시해 놓았는데, 지도상 명칭과 이정표의 명칭을 통일시켜 주면 좋을 텐데 낮선 산꾼들에게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한다.
중구봉 정상 인증.
<중구봉(重九峰, 275m)>
인천시 계양구 효성동과 서구 심곡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경명산(景明山)으로도 불린다. 중구봉은 고려 시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인천 이씨들의 전성기인 고려 시대에 인천 이씨 가문에서 왕비들을 많이 배출하여, 왕비들의 친정 '어향(御鄕)'으로 불리면서 많은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중구봉은 고려시대 때 불교 행사인 중구절(重九節, 음력 9월 9일)의 행사를 치른 산이라 하여 중구봉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중구봉을 뒤로하고 징매이고개로 내려선다.
징매이고개로 내려가는 내림길은 무척이나 가파르게 이어지는데,
고개 지나서 올라야 할 계양산 오름길도 비슷할 거라 생각하니 살짝 걱정도 된다.
징매이고개 건너편으로 올라야 할 계양산이 버티고 있다.
징매이고개 도착.
<징매이고개>
계양산 서쪽을 관통한 서곶에서 부평으로 넘나들던 고개다. 옛날 중국으로 통하는 큰길이었다고 하며, 고려 때는 삼남지방에서 개성으로 통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징매이고개라고 부르는 이 고개를 중심으로 동서(한남정맥)의 능선을 따라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중심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어지고 성문 공해루가 있던 초석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징매이고개란 이름은 매를 징발한다는 '징매'에서 나왔는데, 고려 중엽에 매를 길들여 꿩, 비둘기 등을 잡는 매사냥이 성행해 나라에서는 도성 안에 매방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매 때문에 주민의 피해가 커지자 충렬왕은 이를 경명현으로 옮기면서 징매이고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징매이고개 서쪽 50m 지점인 공촌동에는 고려 때 나라에서 세웠던 국영 매방 자리가 있다. 고려 충렬왕은 매사냥을 즐겨 송도에 있던 매방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자주 이곳을 찾아오게 되고, 그래서 계양도호부를 길주목이란 목사 고을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심곡동은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이 탁운봉 바로 밑 깊숙한 골짜기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이 고개는 고려 때 고을 이름을 따서 수주고개라 이름 하였는데, 원나라 간섭기인 고려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겨 국영 응방을 이곳에 설치하고, 재위 시 다섯 차례나 이곳에 들러 좋은 매를 징발한 것에 유래하여 '징매이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변음되어 '징맹이고개'로도 불리게 되었고, 한자로 표기하면서 다시 경명이고개(景明峙)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한편 경맹이고개라고도 하는데, 이는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길 때, 매를 경쟁시켜 산짐승을 잡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징매이고개 생태통로로 들어서고,
생태통로를 건넌다.
좌측 인천시 서구 방향.
생태통로를 건너면 '중심성터'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중심성터 안내판.
징매이고개 계양산 쪽 절개지 위에 올라서며 돌아본 중구봉 방향.
절개지 위로 올라서는 좌틀하며 본격적인 계양산 오름길을 시작한다.
전망바위에서 돌아본 부평구 방향.
우측으로 가야 할 계양산 정상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다.
계양산 오름길 모습.
돌아본 중구봉과 철마산 방향의 한남정맥 능선.
청라신도시 방향 조망.
계양산 헬기장.
이곳에서 한남정맥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우측 200m 지점에 있는 계양산을 들르지 않을 이유는 없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계양산 정상.
지나온 한남정맥 능선.
계양산으로 향하던 도중에 이미 계양산을 찍고 내려온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계양산 정상에 도착하니 겨울임에도 많은 등산객들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조망을 즐기고 있다.
계양산 정상 인증.
<계양산(桂陽山, 394m)>
인천시 계양구에 있는 산으로, 동국여지승람은 진산 또는 안날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계양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 한다. 지명의 변천에 따라 고려 수주 때에는 수주악(樹州岳), 안남도호부 때에는 안남산(安南山), 계양도호부 때에는 계양산으로 불렀는데, 한때는 아남산, 경명산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산 이름의 유래는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1944년 1월 8일 인천시 최초의 도시자연공원(계양 공원)으로 결정되고, 그 후 계양산은 시지정 제1호 공원이 되었다. 인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이 산의 동쪽 능선에 있는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일명 고산성(古山城)으로 불리는데, 지금은 대부분 훼손된 상태다.
계양산은 기서지방의 주산으로 문학산, 청량산과 더불어 인천의 삼대 명산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한때 임꺽정이 계양산 기슭과 인근의 징매이고개를 소굴로 삼았다고 하는 설화도 전해진다.
계양산성은 주봉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에워싸는 형상으로 축조되어있다. 이곳은 한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으로,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던 곳이다. 계양산성은 이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에 완전히 폐성으로 남았으며, 일제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계양산성 안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현재도 산성 안의 완만한 구릉지는 대부분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다. 둘레 약 1,180m의 성벽은 현재 대부분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간은 거의 없을 정도며, 정자가 세워져 있는 아래 부분 등 일부 구간에서만 옛 성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계양산 정상에서 돌아본 한남정맥의 봉우리들.
옅은 안개가 끼어 있어서 멀리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의 능선은 구분키 어렵다.
부평 방향.
서쪽으로는 영종도와 서해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경인운하가 내려다 보인다.
동쪽 김포공항 방향.
남서쪽으로는 영종대교도 뚜렷이 분간이 된다.
당겨본 영종대교 방향으로, 아시아드 주경기장 모습도 선명하다.
계양산을 뒤로하고 계양산 아래에서 기다리던 백두들과 합류하여 배낭털이를 하며 잠시의 쉼을 한다.
계양산 헬기장으로 돌아나와 한남정맥 잇기를 계속한다.
계양산 내림길은 가파른 데다가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무척이나 미끄럽다.
가야 할 한남정맥 능선을 그려 보고,
급경사를 내려서면 이내 작은장리고개에 도착한다.
작은장리고개 이정표.
돌아본 장리고개와 계양산 방향.
송전탑을 지나 203봉에서 직좌틀하여 아래로 내려가다가,
한번 더 급하게 고도를 낮춘다.
안부에 도착하니 좌측으로 오래된 철조망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를 따라 앞쪽에 보이는 207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207봉 오름길에 능선 우측으로 난 우회길을 따르면 이내 정맥능선에 다시 접속하게 된다.
돌아본 계양산 방향.
잠시 밋밋한 능선을 따르면,
207봉 정상인 헬기장에 도착한다.
어느 산행기에는 이곳을 피고개산이라 표시해 놓았는데, 이에 대한 다른 기록이나 정확한 증거는 없다.
돌아본 계양산 정상.
207봉에서 잠시 진행하니 깃대가 있는 199봉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정맥길은 뚜렷한 직진의 능선길을 두고 직우틀하여 아래로 내려서야 한다.
우리도 직진방향으로 잠시 알바를 다녀왔다.
199봉을 급하게 내려서면 호젓한 소나무숲을 지나게 되고,
출입하지 말라는 군부대의 경고판과 훈련장이 나오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는 관계로 그냥 능선길 등로를 따라 진행한다.
군인들 훈련장으로 쓰이는 곳에서 바라본 꽃메산 방향.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문을 적어 놓고는 이렇게 등로를 마련해 놓은 심사는!
안부에 내려서니 군부대 후문으로 통하는 비포장 도로가 나오고,
도로를 지나 부대 울타리를 따라 능선으로 오르는데,
군부대 안쪽에는 경계병들이 지키고 있어서 총 맞을까 살짝 걱정을 하며 조용히 울타리를 따라 진행한다.
잠시 후 울타리를 두고 숲길로 들어서는데,
등로의 흔적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냥 주능선 근처의 등로를 따르면 무난할 듯!
참호 통풍구가 있는 113봉 정상을 지나고,
잠시 후 표지기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꽃메산(133.4) 정상에 도착한다.
지도에 꽃메산이라 표시되어 있어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된장!
꽃메산에서 잠시의 쉼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이내 굴포천 운하가 내려다 보이는 절개지 위에 서게 된다.
아래쪽으로는 영종도 인천공항으로 이어지는 공항철도와 신공항고속도로 그리고 굴포천 경인운하가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으로는 '아라마루 전망대'도 보인다.
절개지 위쪽 관리용 도로를 따라, 우측 목상교 방향으로 향하는 백두들.
이곳은 경인운하 등이 정맥길을 끊어 놓고 있어서, 우측 서울 쪽으로 이동하여 목상교를 통하여 운하를 건너야 한다.
공항고속도로 영종도 방향을 배경으로.
절개지 관리용 도로를 나와 임도에 내려서고,
절개지에서 좌측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총무님과 회장님을 기다리는데, 몇 대의 전동차가 지나간다.
이윽고 회장님 일행이 도착하고,
경인운하를 건너기 위해 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절개지에서 600m쯤 서울 쪽으로 이동하면 좌측으로 지하통로가 나타나고,
지하통로로 공항철도와 공항고속도로를 차례로 통과하면,
일반도로가 나오고, 횡단보도를 건너 경인운하를 건너는 목상교로 진입한다.
목상교를 건너는 백두들.
목상교 위에서 바라본 인천운하 서해갑문 방향.
자전거로 몇 번을 왔었던 곳인데 위에서 보니 전혀 생소한 느낌이다.
<굴포천 경인운하>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산자분수령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전에, 한남정맥의 맥은 굴포천에 잠기고 만다. 몇 해 전 낙남정맥길 진양호 유수교를 지나며 인공으로 만들어진 수로가 정맥길을 끊어 놓은 곳을 목도했었는데, 오늘도 같은 상황을 목도하게 되니 약간의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이 굴포천은 계양구 산곡동에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으로 길이 9.3km에 달한다. 이 하천이 굴포천으로 불리게 된 것은 김포굴포가 시도되었기 때문인데, 김포굴포란 인천 쪽 서해안과 김포 쪽 한강을 연결하려던 운하 계획을 말한다. 본디 이 계획은 고려의 최우 때부터 시도되던 것으로, 조선 중종 조에 이르러 김안로에 의해 착공되었다가 원통이 고개에 막혀서 중단된 것이다. 원통이고개 굴착에 실패한 것이 당시의 기술부족 때문인지 풍수지리사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이래 김포굴포에 집착하게 된 것은 삼남 지방에서 해로로 운송되던 세곡선들이 강화의 손돌목에서 자주 전복되었기 때문이다.
굴포천은 흙들 파낸 개울이란 뜻으로, 대교천 하류 김포군 지역(벌말에서 한강까지)으로 지반이 높아 한강까지 통수가 잘 되도록 인력을 동원하여 깊이 뚫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업은 지난 1988년 다시 시작한 경인운하사업으로, 서울 행주대교와 상습 홍수 피해 지역인 인천 시천동까지 18km를 폭 100m 수로로 연결하기 위한 치수사업으로 시작되었지만, 경제성 논란과 환경단체 등의 반발로 부침을 거듭하다가 MB정권 들어 재 착공하여 '경인아라뱃길'이란 이름으로 2011년 말 완공되었다.
목상교 중간쯤에 전망대도 설치해 놓았다.
목상교를 건너니 좌측으로 내려서는 계단이 나오고,
경인운하 북쪽 길을 따라 아라마루 전망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겨울임에도 따스한 햇볕이 내려 비추는 아스팔트 길은 그다지 원하는 길은 아니나, 아스팔트 길을 따라 아라마루 전망대로 향하다가 길을 건너 전망대로 들어선다.
돌아본 목상교 방향.
아라마루 전망대에서 서울방향을 배경으로.
전망대 바닥이 투명 셀로판으로 시공되어 있어서 아찔한 느낌을 더한다.
아라마루 휴게소.
서해갑문 방향.
지나온 꽃메산 방향.
천보형 쫄지 말고 인상 좀 펴시죠!
따스한 봄볕을 쪼이며 느닷없는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
오늘 예정된 스므네미고개까지 가지 말고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아직도 6~7km를 더 걸어야 하는데, 시간도 어느 정도 지체되었고, 날도 노곤한 한낮으로 접어들고.. 등등.
이해는 가지만 그러면 한남정맥을 한 구간 더 늘려야 하는데 다수결로 할 수도 없지만,
지금은 나를 제외하고 전원이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라 수용할 수 밖에는!
서운한 표정 노출을 보이지 않으려 재빨리 백석고개에서 중간 탈출을 대비하고 있는 버스를 부른다.
나도 쉬운 산행을 누구보다 좋아한다. 하지만 좋거나 쉽거나 편한 것은 비용이 따른다.
생각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한 버스에 올라,
인천 검단지구에 있는 사우나에서 땀을 닦고 화정족발로 이동하여,
줄어든 산행만큼 남겨진 기운을 족발과 소주 소화에 투입한다.
평소와는 달리 백두들의 표정이 살아 있다.
안주가 좋으니 술 소비는 늘어나고,
추운 겨울날의 산행을 깔끔히 마무리하고 마시는 소맥 한잔은...ㅋ~~으
산행을 짧게 만들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나도 쉬운 게 너무나 좋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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