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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강화도 마니산 종주

by 재희다 2011. 8. 28.

산 행 지 : 마니산(465m) 강화도.
산 행 일 : 2011. 08. 27.(토)
산행코스 : 분오리돈대~314봉~정수사갈림길~469봉~마니산(465m)~참성단~단군로갈림길~314봉

~작은뫼넘이~상봉(254m)~선수돈대~선수선착장 (약 11km, 6시간 소요)

산행참가 : 15명.

 

<산행코스>

 

 

 

<강화도(江華島)>
강화도는 경기도 김포시와 염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섬으로, 국조 단군의 개국과 역사를 같이하는 고장이다. 단군왕검이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린 때부터 오늘날까지 숱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나라가 위급해지고 풍운이 몰아칠 때마다 호국의 숨결이 가빴던 곳으로, 몽고의 침입과 병인·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란을 겪은 역사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또한 외국의 문물이 강화도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드나들던 관문이기도 했다. 강화도조약은 일제에게 침략의 기회를 주었지만 한편 근대화로 나아가는 길도 열었다. 그리고 강화도 북단 바다는 NLL이 지나가는 북녘 땅을 마주한 곳으로, 6.25 동란 와중에 자유를 찾아 내려와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강화도의 역사적 배경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뜻깊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역사의 길목을 지키는 염하(鹽河)>
염하(鹽河)는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海峽)으로, 구체적으로는 강화도와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남북 방향의 좁은 바닷길을 말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져서 서해로 흐르는 물길의 한 갈래로 양쪽 기슭 사이 거리는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옛날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교역로이자 요충지이며, 조선시대때 삼남(경상, 전라, 충청)에서 출발한 세곡선이 서해를 따라 북상해 이곳을 통과한 후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조선의 곳간을 채우는 조운선의 길이자 한양으로 올라가는 관문이었다. 조선은 오백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나라의 배들이 염하를 따라 한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지켰던 것이다.
또한 염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오랜 세월 동안 외국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개항기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이 염하를 따라서 군대의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그리고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널려 있다. 김포 서쪽 해안에는 덕포진(德浦鎭), 강화도 동쪽의 해안에는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 광성보(廣城堡),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등이 있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는 현재의 대대급 진영이었다. 이 염하를 통과하는 배에 대하여 동과 서에서 포격을 하면 한양으로 진격하는 타국의 배들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런 염하의 존재감은 조선 말기에 나타난다. 이곳에서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가,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 1875년 운요호사건 때는 일본 함대가 들어왔지만 조선 수군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당시 초지진과 광성보, 덕진진을 사수하던 조선 수군의 용맹에 미국 장교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북한의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으나, 전쟁 후 뱃길이 막혀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었다. 2007년부터는 민간어선의 통행은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 염하를 가로질러서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토요무박산행을 하는 백두산우회에서 서울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산행 거리가 적당히 길지도 않은 강화도 마니산 종주산행을 가게 된 이유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전혀 기억에 없다. 아마도 마니산이 백대명산이라는 게 가장 합당할 것이나 산행을 계획하는 산행대장의 부상으로 짧은 산행을 계획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그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떠오르는 기억을 댓글로 남겨주기를 간곡히 요청드릴 뿐이다.

 

 

마니아들에게는 많이 알려진 동막해수욕장이다.

늘 그렇듯이 가로등이 밝혀진 해수욕장은 많은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동막해수욕장(東幕海水浴場)>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폭 10m 길이 200m의 해변이 펼쳐져 있다. 강화에서 가장 큰 모래톱을 자랑하는 동막해변은 물이 빠지면 직선거리로 4㎞까지 갯벌이 드러나 칠게, 가무락, 고둥, 갯지렁이 등 다양한 갯벌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어서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갯벌 체험을 하기에도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사장 뒤로는 수백 년 묵은 노송들이 늘어서 있으며, 동막해수욕장 옆에는 분오리돈대가 있는데, 해질녘에 이 돈대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모텔?이 많은가!

 

영종도와 인천 방향 야경.

 

 

강화도 마니산 종주를 이곳 분오리돈대에서 내리의 선수돈대까지로 계획하였기에,

깜깜한 어둠을 뚫고서라도 분오리돈대를 밟아 보기로 한다.

 

<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
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인데, 분오리돈대는 조선시대 숙종 5년(1676년)에 강화유수(江華留守) 윤이제(尹以濟)가 설치한 여러 돈대 중 하나로, 강화도의 남쪽 해안 중앙의 동막해변 동쪽 끝에 있다. 대포 4문을 올려놓는 포좌와 톱니바퀴 모양으로 돌출시킨 치첩(稚堞) 37개소가 있는 초지진의 외곽 포대이다. 이 돈대의 동.서.남벽은 바다에 면한 천혜의 절벽 요새이며 서쪽의 송곶돈대까지 3,100m 거리에 있어 영문(營門)에서 돈장(墩將)을 따로 두어 지키게 할 만큼 중요한 돈대였으며 1994년에 복원되었다.

 

 

분오리돈대를 걷고 있는 회장님과 총무님.

 

 

 

분오리돈대를 한바퀴 휘둘러 걸어보고는,

 

 

다시 분오리돈대 주차장으로 돌아 나와 본격적인 마니산 종주산행을 시작한다.

 

 

123봉을 지나 안부로 내려섰다가는 다시 210봉에 올라선 백두들.

 

210봉에서 아침 일출을 준비하느라 붉게 물들고 있는 인천 방향을 조망하는 백두들.

 

남쪽 영종도와 신도 방향.

 

동쪽 인천의 계양산 방향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작은 암봉을 좌회하여 오르니,

 

 

 

영종도와 신도, 시도, 모도 등이 모두 조망되는 멋진 쪼갠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조망터에는 둥글둥글하고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앉아서 조망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장봉도 방향.

 

 

 

 

인천 방향.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등등을 배경으로.

 

영종도와 신도를 배경으로.

 

 

 

살짝 당겨본 계양산 방향의 동쪽 하늘.

 

쪼갠바위 전망대에서.

 

 

멀리 보이는 마니산 정상을 향해 귀여운 아기 토끼 모양의 바위 옆으로 오르는 백두들.

 

우측 전등사가 자리한 정족산과 길상산 방향.

 

가야 할 마니산 정상 방향.

 

 

살짝 당겨본 청라국제도시 방향.

 

 

귀여운 아기 토끼 바위.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귀가 쫑긋 서지를 않았다.

 

 

커다란 바위를 물고 있는 악어머리 바위 너머에서는 314봉과 마니산 정상이 겁먹은 듯 바라보고 있다.

 

 

작은 통천문이랄까 아니면 뚱땡이 검문소랄까?

마무튼 몸집이 큰 사람은 마니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는 얘기!

 

가뿐!

 

겨우!

 

거뜬!

 

 

잠시 육산의 완만한 숲길이 이어지다가,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전망바위가 나오는데, 이곳이 314봉인 듯하다.

 

 

김포와 인천에 내리 비추는 서광!

 

 

가야 할 마니산 정상 직전의 암릉 모습.

 

살짝 당겨본 신도는 썰물이라서 그런지 드넓은 갯벌이 드러나며 이곳 강화섬과 연결된 듯 보인다.
저 드넓은 갯벌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 터!

 

바닷물이 갯벌에 멋진 물길을 그려 놓았다.

편평하여 따로이 길이 필요치 않을 것 같아도 바닷물은 각자 제 나름의 길을 만들며 갯벌을 드나든다.

내가 아닌 남의 인생은 그것이 그것인 듯 하지만 각자 제 나름의 인생 여정을 만들듯이..

 

 

부둣가에 배를 메어두는 밧줄을 거는 앵커를 닮았는데,

혹자는 닭의 부리와 머리를 닮았다고도 하는 바위를 지난다.

 

 

 

이제 357암봉을 향해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위험하다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모나지 않은 바위들을 오르고, 돌고, 하며 통과한 357암봉을 돌아보니,

 

흡사 귀신고래가 숨을 쉬려고 머리를 내미는 모습이다.

 

 

가야 할 암릉의 바위들이 그 옛날 한울님이 참성단을 만들기 위해 켜켜이 쌓아 올린 듯하다.

 

그런 쌓은 듯한 바위를 하나하나 오르는 재밌는 암릉길을 오르면,

 

 

 

함허동천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에 접속하게 되고,

 

안전시설이 갖추어진 등로를 따라 참성단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제 안전한 등로에 들어섰으니 잠시 앉았다가 갑시다!

 

 

 

뒤쪽 영종도를 배경으로,

좌측부터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감투섬, 동만도, 서만도 등이 멋지다는 조망 안내판이 있다.

 

 

이제부터는 안전시설도 있는 모나지 않은 바위 암릉을 넘나들며 마니산 정상으로 향한다.

 

 

암릉을 올라 아무런 표식이 없어 지나치는 암봉인 마니산의 최고봉(469m)에 도착한다.

아마도 참성단에서 이곳에 이르는 암릉길이 위험하여 참성단 옆의 봉우리에 정상목을 세워놓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마니산의 최고봉에서 "마니산도 식후경" 태양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아침식사를 한다.

 

 

 

 

 

평소와 달리 느긋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금 마니산 정상과 참성단을 향한다.

 

 

 

 

 

 

주변 조망에 시선을 빼앗기면 발이 위험해지는데..ㅉㅉ

 

 

 

거다란 바위가 켜켜이 쌓인 암릉이지만, 안전시설이 있어서 주변 조망도 보면서 수월하게 진행한다.

 

 

돌아본 마니산 능선.

 

 

관목 그늘이 싱그러운 등로를 지나면,

 

 

콘크리트 헬기장인 마니산 정상에 도착한다.

 

<마니산(摩尼山, 472.1m)>
마니산은 강화도 서남단에 있으며 강화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 산의 정상에서 남쪽의 한라산과 북쪽의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각각 같다. 마니산은 마리산 또는 머리산으로도 불리는데, 마리란 고어(古語)로 머리를 뜻하며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의미한다. 더욱이 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는 단이 있어 강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민족, 전 국토의 머리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마니산 정상에서는 주위의 섬들이 모두 조망되는데,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매음도(媒音島), 사도(蛇島), 석모도(席毛島), 미법도(彌法島), 서검도(西黔島), 동검도(東黔島), 말도(唜島), 볼음도(乶音島 혹은 望島) 등등이 잔잔한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이 내려다 보인다. 또한 주변을 내려다보면 마니산이 불쑥 솟은 화도면(華道面) 주위로 간척을 한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다. 본래 이곳 마니산은 강화 본섬과 떨어진 별도의 작은 섬이었다. 1706년 숙종 때 강화유수 민진원이 간척해 지금처럼 하나의 섬으로 연결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 화도면(華道面)은 1937년까지 아래 섬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하도면(下道面)이었다고 한다.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참성단 방향.

 

 

대부분의 정상석은 돌로 만들어 놓았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마니산의 정상석이 눈길을 끈다.

 

472.1m라 표시된 마니산 정상목이 서 있다. 하지만 이 봉우리의 실재 높이는 455m로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실재 정상은 잠시 전에 지나온 동남쪽 1km쯤에 우뚝 선 봉우리가 469m로 실재 정상이라 한다. 아마도 참성단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 암릉길로 위험하여 이렇게 배려한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마니산 정상 헬기장에 도착한 백두들.

 

마니산 정상에서 바라본 참성단이 정성들여 쌓아 놓은 석축 제단과 보호수로 지정된 한그루의 소사나무가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뭔지 모를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소사나무가 지키는 참성단 입구로 들어서는 백두들.

 

<참성단 소사나무>

참성단의 소사나무는 수령이 약 150년 정도로 추정되며 2009년 9월 16일에 천연기념물 제502호로 지정되었다. 소사나무는 참나무목 자작나무과의 낙엽소교목이며 잎이 작고 5월에 꽃이 피는데 줄기가 마치 고목처럼 보여 분재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참성단의 소사나무는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 참성단의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에 주위에 방해 요인이 없어서 한층 돋보이는데,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나무의 줄기는 지면에서 여러 개로 갈라졌다. 줄기 수는 현재보다 많았으나 일부가 잘려나가고 현재는 여덟 개만 남아 있다.

 

 

전국 제일의 생기처(生氣處)라는 마니산 참성단으로 들어서는 회장님의 발걸음이 가볍다.

'기(氣)는 만물을 움직이는 그 어떤 근본적인 힘'이라는데, 기(氣)가 무언가 있기는 있는가 보다.

그러기에 '기 죽는다, 기 산다'는 말이 누구에게나 통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참성단(塹星壇, 구덩이 참(塹), 별 성(星), '별 구덩이 제사터'>

인천시 강화군 마니산 정상에 있는 제단으로, 마니산에 있다고 '마니산 참성단' 또는 '마니산 제천단'이라고도 부른다. 면적은 5,593㎡이며, 상단 방형(方形) 1변의 길이는 1.98m, 하단원형의 지름은 4.5m. 자연의 산석(山石)을 다듬어 반듯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쌓았고, 돌과 돌 사이의 사춤에 아무 접착제도 바르지 않았다. 자연석들에 의지하여 둥글게 쌓은 하원단(下圓壇)과 네모 반듯하게 쌓은 상방단(上方壇)의 이중으로 구성하고, 상방단 동쪽면에는 21계단의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에 중수했다.

참성단은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 즉 제천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제천 행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사냥과 채집으로 식량을 구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농사를 짓게 되면서 사람들에게는 날씨나 자연환경이 중요해졌는데, 이때부터 하늘을 숭배하는 의식이 생겨났다. 그러다 철기 시대에는 제천 의식이 나라의 행사로 정착되었다. 부여의 영고나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각각의 나라는 제천 행사를 통해 나라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단합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런 전통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왕의 이름으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참성단의 제사는 정기적인 것과 비정기적인 것이 있었다. 정기적인 제사는 봄과 가을에 지냈는데, 제사의 목적은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비정기적인 제사는 외적의 침입이나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있을 때 수시로 지냈다.
참성단은 우리 민족의 시조이자 첫 임금인 단군왕검이 처음 제단으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개국신화(開國神話)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桓雄)의 권속이므로 결국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 지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방(方)과 원(圓)은 천지의 의형(擬形)이며 조화가 모두 거기서 일어나는 것으로 옛날 사상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참성단의 원과 방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에 두고 설치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참성산 전경.

 

 

 

 

 

참성단에서 본 북서쪽 석모도 방향.

 

북쪽 진강산과 혈구산 방향.

 

참성단에서 본 북쪽 방향 파노라마.

 

 

 

 

서쪽 여차리 방향.

 

남서쪽 장봉도 방향 아래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너른 벌판은 흥왕리 앞 간척지다.

 

오늘 걸어온 마니산 능선 조망.

멀리 끄트머리 능선에 가려진 곳에 출발지인 분오리돈대가 있다.

 

참성단 소사나무 그늘 아래에서 생기(生氣)를 받고 있는 백두들.

 

 

 

 

 

마니산 참성단 인증.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氣(기)를 듬뿍 선사받은 참성단을 뒤로하고 선수돈대로 향한다.

 

 

참성단을 내려서며 매표소 방향 갈림길에서 능선길로 들어서서,

잠시 더 진행하면 데크목 전망 쉼터가 나온다.

 

서북쪽 주문도 방향 조망.

 

가야 할 선수돈대와 상봉 방향의 마니산 능선.

 

 

마니산의 기를 받으며 오른다는 372계단을 내려서면,

 

 

기도원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옛 지도에는 이곳을 매너미재로 표시하고 있다)에서,

직진의 단군로 방향으로 진행한다.

 

마니산 등산 안내도.

 

 

매표소 방향 등산로(단군로) 갈림길이 있는 314봉을 지나는데,

 

암릉 절벽 바위에는 돌산양 한마리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다.

 

 

314봉 내림길 전망바위에서 본 북서쪽 석모도 방향.

 

가야 할 상봉 방향의 능선 조망.

 

 

작은매너미고개를 향한 능선길을 내려서는데, 앞쪽에서 만식형의 반가운 얼굴이 불쑥 나타난다.

 

새벽에 집에서 출발하여 산행 종점 부근인 후포항에서 역으로 진행해 오다가 드디어 조우하게 되었단다.

 

 

마니산 참성단에 받은 기(氣)를 나눠드릴 테니 하산하자고 꼬드겨서는,

 

 

함께 작은매너미고개(하늘재)로 내려선다.

 

옛 지도에는 마니산과 314봉 사이의 기도원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매너미고개로,

그리고 화도면 장화리와 내리를 연결하는 도로가 나 있는 이곳을 작은매너미고개로 표시하고 있다.

 

산행의 종착지인 선수돈대 방향은 작은매너미고개(하늘재) 건너편 선수 방향으로 들어서야 한다.

 

좌측 장화리 방향으로 가다가 돌아오는 백두들.

 

 

헬기장쯤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지나고,

 

 

상봉(245.6) 정상쯤에 서니, 앞쪽으로 석모도의 민머루해수욕장이 있는 삼산면 매음리가 건너다 보이고,

 

그 좌측으로는 주문도가 연무에 흐릿하게 조망된다.

 

 

상봉 아래 해안선 따라 멋진 전경이 보이는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쉼을 하고,

 

 

좌측 장곶돈대 방향 능선을 두고,

우측 선수돈대 방향의 능선으로 들어서니 바위 암봉을 지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내려서게 된다.

 

 

안내판 있는 선수돈대에 도착한다.

 

<선수돈대(船首墩臺)>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가 건의, 감독하여 강화도에 세운 49 돈대 중 하나이다. 송강돈대(宋岡墩臺)라고도 하며, 반월형(半月形)으로 일부는 둥글게, 일부는 모나게 돌을 쌓아 곳곳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는 강화도를 경강(京江:지금의 한강) 어귀의 요새로 만들도록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당시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는 강화도 곳곳에 돈대를 설치하여 화력을 보강하고 해안경비를 강화하였다. 이곳 남쪽으로는 검암돈대(黔巖墩臺), 북쪽으로는 굴암돈대(屈巖墩臺)가 있는데 선수돈대와 굴암돈대는 영문(營門)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각 돈대의 명칭과 위치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되어 있다.

 

선수돈대 안내판.

 

 

 

 

후포항 산행 날머리 도착.

 

 

 

강화 초지대교 인근의 해수탕에서 땀을 닦고,

 

 

초지대교를 건너 김포 대명포구의 횟집에서,

 

산행 뒤풀이를 한다.

 

 

 

 

 

 

 

거의 세시간여만에 뒤풀이가 종료되었나 보다.

 

 

 

 

영등포의 익숙한 중국집에서 다시 2차!

 

그렇게 탈 많았던 2011년의 여름을 겨우 보낼 수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