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소백산자락길 1, 2자락(소수서원~희방사역). 경북 영주시.
산 행 일 : 2024. 07. 13.(토)
산행코스 : 소수서원 ~ 금성단 ~죽계구곡~ 초암사 ~ 달밭골 ~ 비로사 ~ 삼가동 ~ 금계호(삼가저수지) ~ 금선정 ~ 정감록촌(임실) ~ 풍기소방서 ~ 풍기온천 ~ 희방사역 (역방향 진행, 1자락 12.6km + 2자락 15.6km = 28.2km, 9시간 소요)
산행참석 : 19 백두.
▶ 더운 날씨로 2코스의 도로 구간을 새벽과 아침에 걷고자 역방향 진행.
▶ 1자락에 죽계구곡 입구에서 삼가동까지는 계곡 숲길 구간으로 여름에 걸어도 시원함.
<1자락 : 소수서원~삼가동(12.6km, 4시간 30분)>
소백산자락길의 첫자락은 가족여행객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길이다. 100살은 족히 넘어 보이지만 선비의 곧은 마음만큼이나 높게 뻗은 소수서원 소나무숲길에서 시작되며, 조선 500년을 관통하는 유학이념이 1자락 곳곳에 위치한 문화유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모여들던 선비들이 한번쯤 지나쳤을 법한 이곳은 아직도 까마득한 숲길이고 보드라운 흙길로 보존되어 있다. 산수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예로부터 신성시되고 명당으로 여겨져 수많은 명현을 배출한 이곳에서, 옛 선비가 된 듯 ‘선비걸음’으로 천천히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며 생생한 역사를 만나보자.
1자락길은 선비길, 구곡길, 달밭길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수서원에서 출발해 금성대군신단과 죽계구곡, 초암사 및 비로사를 거쳐 삼가동에 이르는 12.6km 도보길이다. 이 코스의 주요 볼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단종복위사건으로 처형된 금성대군을 추모하는 금성단, 퇴계 이황선생이 이름 지은 죽계구곡, 국망봉 남쪽 계곡의 초암사, 신라시대 창건된 천년고찰 비로사를 들 수 있다.
1자락길의 출발지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재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한국 최초의 본격적 서원이며, 최초로 임금의 친필현판을 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하나이다. 소수서원 진입로에는 학자수립이라고 하여 수령 300년에서 천년에 이르는 적송 수백 그루가 서원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소수서원 바로 좌측에는 선비촌이 있으므로 출발지를 선비촌으로 해도 좋지만 우리는 소수서원을 기점으로 한다.
<2자락 : 삼가동~희방사역(15.6km, 4시간 20분)>
2자락은 소백산자락길 탐방로 중 유일하게 기차역이 통과하는 코스로 열차를 이용한 탐방객이 걷기에 좋은 곳이다. 조선시대 정감록의 십승지 중 1승지로 손꼽히는 이곳은 오감만족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잊게 만드는 2자락의 매력은 풍부한 먹을거리, 볼거리, 체험거리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인삼재배지로 유명한 풍기에서 맛깔스런 음식, 인삼재배체험, 사과따기체험 등의 다양한 농촌체험, 전국에서 으뜸가는 유황온천인 풍기온천체험까지 다양한 팔색조 매력을 가진 2자락에서 오감만족 여행을 즐길 수 있다.
※ 2자락은 단축길인 곰네미길 6㎞(120분) 코스도 있다.(삼가주차장~당골~골넘이재~풍기온천)
<산행지도>
※ 소백산 자락길 개요.
소백산자락길은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 걷기길로 전체 길이가 143km(360리)에 이른다. 모두 열 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자락은 평균 거리가 12km(30리) 내외여서 약 3~4시간이 소요되므로 하루에 한 자락씩 쉬엄쉬엄 걸을 수 있어 리듬이 느껴진다. 더구나 열 두 자락 모두 미세한 문화적인 경계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자세히 살펴보면 자락마다의 특징이 발견되어 색다름 느낌의 체험장이 될 수 있다. 2009년 1,2,3자락이, 2010년 4,5,6,7자락이, 그리고 2011년, 2012년에 8,9,10,11,12자락이 완성되어 전국의 자락꾼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생태탐방로’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고, 2011년 ‘한국관광의 별’로 등극되었다.
소백산자락길은 경북 영주시, 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의 3도 4개 시·군에 걸쳐져 있다. 올망졸망한 마을 앞을 지나기도 하고, 빨갛게 달린 과수원 안길로 안내되는 가하면, 잘 보존된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하기도 하여 아기자기하므로 대부분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는 다른 곳의 걷는 길과는 차별된다. 특히, 국립공원 구역이 많아 원시상태가 잘 보존되어 숲의 터널에서 삶의 허기를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돌돌 구르는 시냇물과 동행할 수 있어 신선하다.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 등의 봉우리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소백산자락은 명산에 걸맞게 대찰을 품고 있는 불교문화 유적의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에 속해 있어 부석사를 위시한 성혈사, 초암사, 비로사, 희방사, 구인사 등등의 불교유적지 탐방의 재미도 쏠쏠하다. 3도 접경지역이라 행정구역을 달리한 생활문화의 특징까지 감상할 수 있음은 보너스이다.
<소백산 자락길 12자락>
1자락 : 소수서원-삼가주차장(13km) 소수서원길. 경북영주
2자락 : 삼가주차장-희방사역(9km~13km) 희방사역길. 경북 영주
3자락 : 희방사역-당동리(12km) 죽령명승옛길. 경북 영주
4자락 : 당동리-기촌리(12km) 당이재길. 충북 단양
5자락 : 기촌리-보밭재(16km) 보발재길. 충북 단양
6자락 : 보발재-영춘면 사무소(14km) 온달 평강로맨스길. 충북 단양
7자락 : 영춘면사무소-김삿갓문학관(18km) 십승지 의풍옛길. 충북 단양
8자락 : 의풍분교-주막거리(7km) 삼도 화합길. 강원 영월군
9자락 :주막거리-물야 저수지(7km) 보부상길. 강원 영월군
10자락 : 오전댐-부석사(7.5km) 부석사 소풍길. 경북 영주
11자락 : 부석사-단산 저수지(14km) 사과향길. 경북 영주
12자락 : 좌석-배점 분교(8km) 자작재길. 경북영주
2004년 11월에 백두대간을 걷기 시작하여 20여 년만에 대간길 왕복과 9정맥 그리고 9기맥 종주까지 마감하고, 마침내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둘레길 트레킹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에서 둘레길하면 가장 먼저 제주올레길과 지리산둘레길이 떠올라 우선 지리산둘레길을 진행하려 예정하였으나, 올들어 유난히 더운 여름날씨로 햇볕에 노출된 도로구간이 적고 시원한 계곡길이 많은 소백산자락길 중 일부를 먼저 걷기로 했다. 또한 대부분의 자락길이 하루 걷기에 부담이 없는 15km 정도로 구성되어 있어서 무박으로 진행하는 우리가 새벽부터 걷기에는 너무 짧아 2개의 구간을 합하여 25~30km 정도씩을 걷기로 한다.
그런데 영주 소수서원에서 출발하는 1자락은 죽계구곡 입구까지 4km 정도만 도로이고 이후는 계곡길이지만, 2자락은 거의 전 구간이 햇볕에 노출되는 도로구간이어서 2구간을 단축길인 곰네미길로 진행하려고도 검토해 보았으나, 새벽에 조금 일찍 희방사역에서 출발하여 역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예년 같았으면 한창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을 터인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쬘 것이라는 일기예보다. "그냥 높은 산으로 산행을 갈걸.."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산행버스에 올라 날씨 걱정에 내내 뒤척이다가, 트레킹 출발지인 희방사역 주차장에 일찌감치 도착한 버스에서 두 시간여의 단잠에 들었다가 일어나, 1코스 종착지인 삼가리에서 출발하기로 한 즐산팀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 불도 켜지 않은채 배낭만 들고 버스에서 내려, 주차장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트레킹 준비를 한다.
"언젠간 오~겠지, 푸르른 이~ 청춘!" 밤새 훤히 가로등을 밝혀 놓았지만 오직 우리의 애마가 독차지한 넓은 희방제3주차장,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트레킹 준비를 마치고,
주차장 입구의 희방사역 버스정류소에서 소백산자락길 첫번째 트레킹을 시작한다.
소백산자락길 2자락의 종점이자 오늘 트레킹의 출발 지점인 희방사역 옆에는,
열차가 이어지듯 카라반 7동을 연결하여 2017년 7월에 개장한 '열차펜션'이 있고,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가고 있는 폐쇄된 희방사역 앞에는,
<희방사역(喜方寺驛)>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있는 중앙선의 철도역으로 희방사역의 북쪽 소백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 희방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역이다. 희방사역은 청량리 기점 187.4㎞에 위치하며, 죽령역은 희방사역의 북서쪽 7.8㎞ 지점에 자리하고 있고, 풍기역은 역 남동쪽 6.1㎞ 지점에 있다. 희방사역의 남동쪽 19.6㎞ 지점에는 중앙선[청량리-경주], 경북선[김천-영주], 영동선[영주-강릉]이 교차하는 영주역이 있다.
희방사역은 1942년 4월 1일 중앙선 전 구간이 개통됨에 따라 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1951년 4월 11일 역사를 신축했으며 보통역으로 승격되었다. 1988년 12월 12일 현 역사가 신축 준공되었으며, 1988년 12월 23일 전철화되었다. 2009년 역명을 ‘소백산[희방사]역’으로 변경했다가 2016년 다시 ‘희방사역’으로 환원하였다. 한편 2017년에는 영주시에서 산골철도역사 관광자원화사업의 일환으로 희방사역 부지에 영주시 소백산역[희방사역] 캠핑장을 개장했다.
희방사역과 죽령역 사이는 중앙선 죽령터널이 뚫려 있고, 희방사역 옆으로는 중앙고속도로의 죽령터널이 통과한다. 소백산 산지로는 죽령 옛길과 국도 제5호선 죽령로가 통과하고 있다. 희방사역 광장에서부터 소백산 죽령 옛길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어 등산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2020년 12월 13일 중앙선 철도의 복선전철화 사업이 완료됨에 따라 희방사역은 폐역이 되었다.
신라시대부터 마을에 놓여 있었던 무쇠다리 때문에 이름 붙여진 무쇠달마을 유래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 무쇠달 마을의 유래 : "은혜 갚으려던 호랑이, 은혜 갚은 경주 호장" >
신라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태백산에서 수행하던 두운 스님이 소백산으로 터를 옮겼습니다. 스님은 암자 하나 없는 산속 동굴에서 홀로 생활하며 도를 닦고 있었는데, 이 동굴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종종 스님의 벗이 되어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는 달리 호랑이가 입을 벌린 채 몹시 괴로워하며 스님이 있는 동굴을 찾아왔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에 호랑이의 입속을 들여다본 두운스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름 아닌 은비녀 하나가 호랑이 목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황급히 비녀를 빼내 호랑이를 구해준 두운스님은 산 중 짐승들을 두고 사람을 해친 것에 대해 호랑이를 크게 꾸짖었고, 호랑이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기소침해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비록 크게 꾸지람은 들었지만 호랑이는 자신을 살려준 스님에게 은혜를 갚을 요량으로 큰 멧돼지 한 마리를 물고와 두운스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본 두운스님은 또다시 호랑이를 크게 나무랐습니다. 불도를 닦는 스님에게 멧돼지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호랑이는 돌아가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두운 밤, 두운스님이 어떤 기척을 느껴 동굴 밖으로 나가보니 호랑이가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스님의 옷자락을 물고 어딘가로 스님을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호랑이를 따라가 큰 바위 앞에 멈춰선 스님은 바위 위에 놓여있는 어렴풋한 물체를 발견하고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어스름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아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아닌가! 어리석은 호랑이가 스님의 뜻도 모르고 또다시 은혜를 갚겠다며 사람을 해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처녀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고, 놀란 스님은 황급히 처녀를 들쳐 업고 동굴로 돌아왔습니다. 두운 스님은 여러 날 동안 뜨거운 물을 끓여 먹이고, 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를 달여 먹이는 등 극진히 처녀를 병간호하였고, 그 정성을 아는지 처녀는 이내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깨어난 처녀에게 스님은 어찌된 일인지 그 연유를 묻자 처녀가 말하기를, 자신은 경주 호장 유석의 무남독녀이며, 혼례를 치르고 신방으로 향하던 밤에 갑자기 몸이 하늘로 들리더니 그 후로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는 것입니다.
두운 스님은 며칠 더 처녀의 기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처녀를 남장시켜 경주로 데려갔습니다. 먼 길을 걷기에도, 또 스님과 함께 긴 여정을 하기에도 남장이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하나밖에 없는 딸을 애타게 찾아 헤매던 부모에게 딸이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었을까. 경주 호장은 크게 기뻐하며 마을에 잔치를 열고, 딸을 간병하여 무사히 경주까지 데려다준 두운 스님에게 보답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두운 스님은 이를 정중하게 거절하였으나, 경주 호장은 스님이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소백산 자락에 암자를 하나 짓고, 그 암자로 향하는 길의 개천에 무쇠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렇게 두운 스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경주 호장 유석에 의해 만들어진 ‘무쇠다리’는 ‘무쇠달 마을’이라는 마을의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그때 지어진 절이 지금의 ‘희방사’입니다. ‘기쁠 희(喜)’ 두운 조사의 참선방을 상징하는 '방(方)'자를 쓴 희방사의 이름에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무사히 되찾은 아버지의 기쁜 마음이 서려 있습니다.
폐쇄된 희방사역에서 들머리를 찾지 못해 잠시 혼선을 겪다가 '희방옛길' 방향 데크계단으로 내려가니,
'무쇠달 마을을 관통하는 희방계곡 물길이 나타나고,
이곳 무쇠달 마을이 알려진 것은 죽령 옛길을 복원하고 소백산 자락길이 지나면서부터다. '죽령 옛길'은 우리나라 최초의 길 문화재로 지난 2007년 명승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에 비로소 죽령 길이 열렸다"라고 적혀 있으니 1,900년 가까운 시간이다.
희방계곡 물길 옆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희방사역 아래를 통과하는 수로 겸 인도가 지나는 터널을 통과하니,
좌측으로 커다란 고목나무와 '무쇠다리 옛 터' 표석이 있는 광장 쉼터를 지나게 된다. (사진 펌)
<무쇠다리 옛 터>
이곳은 삼국시대의 고적 무쇠다리 자리이다. 신라 선덕왕 12년(643) 서라벌 호장(戶長) 유석(兪碩)이 호랑이에게 잃은 딸을 구해준 희방골 스님 두운 조사(杜雲祖師)의 은혜에 보답코자 희방사를 창건하고서 절로 통하는 앞개울에 무쇠로 다리를 놓은 사실이 희방사지(喜方寺誌)에 전하고 있다. 무쇠다리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인 듯 근래까지 둑 다리로 이어 오다가 1940년대 초 중앙선 철도가 나면서 그마저 없어져 버렸다. 여기는 1914년까지 순흥 고을 지경이었기에 옛 읍지에 이곳 촌명이 순흥부 창락면 수철교리(水鐵橋里)였고, 지금은 풍기읍 수철리라 속칭 「무쇠다리」라고도 한다. 고장의 유서 있는 시설물이 지명이 된 한 예이다.
펜션 간판만이 가끔씩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는데,
죽령 방향에서 흘러내리는 남원천 계곡 물소리가 조용한 새벽이라 유난히 크고 맑게 들려오고,
'만약 정상 방향으로 걸었다면 여름 정오를 지난 시간의 땡볕에 무척 힘든 길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하며 남원천변 도로를 따르다가 좌측으로 '풍기온천'으로 이이진 '창락 2교' 사거리를 지나는데 우측으로 소백산자락길 이정표가 보이고,
잠시 후 '창락 역사 주춧돌과 마상'이 목책 안에 설치된 '창락역 소공원'을 지나게 된다.
<창락역 소공원>
「창락」이란 동네 이름은 「창락 역참」이 있었던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락 역참은 영남 북부지방에서 가장 큰 중심역이어서 한때 소속 인원이 찰방과 역리 23명을 포함 총 84명이 있었고 말도 16마리가 있었으며, 신라시대부터 영남 대로 길목의 가장 큰 쉼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중앙선 철도의 죽령터널이 개통되면서, 죽령 옛길로 가는 사람의 왕래가 줄어들어 이곳 창락역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지금은 역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대신 역 마을은 관광지로 변해 온천 리조트와 「인삼 박물관 」, 인삼센터와 음식점 및 숙박 시설이 들어섰다.
창락역사 터를 나서면 바로 소백산 인삼시장이고, 세계 최초 산삼배양근 대량 생산에 성공한 「비트로시스」가 위치하며, 좀 더 올라가면 「인삼 박물관」과 「소백산 풍기온천 리조트」가 자리한다. 인삼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인삼과 관련된 역사, 전설, 민속, 효능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인삼의 역사는 1542년 주세붕 풍기군수가 산삼 공납으로 인한 폐해가 극심한 군민들을 위해 산삼 종자를 채집하여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효시라고 한다. 소백산 풍기온천은 유황과 불소가 함유되어 부드러운 촉감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온천은, 지하 800m에서 용출하는 온천수를 데워서 사용한다. 1일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온천탕과 노천탕을 비롯 각종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가족 단위뿐 아니라 단체 연수 활동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 소백산 풍기온천 리조트 자리에 과거에는 주막과 국밥집, 기생집 등 객점들과 마방과 대장간이 있었다면 지금은 욕탕, 야외 수영장, 숙박시설, 식당 등을 갖춘 온천리조트와 모텔들로 바뀌었다. (펌)
지난해 유난히 올라버린 사과값을 떠올리며 주렁주렁 열린 사과 열매가 마냥 신비스럽기까지 하고,
좌측 소백산 능선을 두르고 자리한 창락리 마을에서 벌써 하루를 시작하려는지 가로등이 밝게 켜져 있는데,
밤이 아닌 낮에 걸었으면 햇볕에 노출된 포장도로에서 지금과 같은 포근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고,
랜턴 불빛에 노출된 어린 도라지가 자라서 가을이 되면 피울 보라색 꽃을 떠올리는데 어둠이 더욱 좋은 배경이 되며,
어둠에 싸인 탁 트인 벌판길이 호젓한 소나무숲길 못지않게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이에,
'습지 생태쉼터' 이정표를 지난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더라면 유용했을 아고라 쉼터를 지나,
풍기읍 방향으로 남원천변 도로를 따르는데,
좌측 백신리 뒤로 보이는 소백산 금계능선과 주능선이 뚜렷하게 조망되고,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을 맞아 더욱 소란스러워지는 남원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최근에 복선 전철로 새로이 개통한 중앙선 철길의 풍기1교 아래를 지나,
중앙선 철길 아래를 따라,
다시 우측 남원천변길로 진행하여,
풍기읍내로 들어서서 잠시 도로를 더 따르다가,
풍기119 방향으로 좌틀하여 진행하게 된다.
풍기읍내 도로를 따라,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교회(예수재림교회) 맞은편의,
풍기 119 안전센터 앞 이정표의 삼가리 방향으로 직진하면,
복선화 된 중앙선 철길 아래를 통과하여 좌측으로 휘며 마을로 들어서서,
우측의 '금계1리 마을회관'을 지나다가,
바로 좌측에 있는 정자에 올라 잠시 모닝커피 타임을 갖기로 한다.
모닝커피와 함께 트레킹 모드를 야간에서 주간으로 바꾸어 농로를 따라 진행하면,
쉼터 정자와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서 우틀하여 금계1리 임실 마을로 들어서야 하는데,
<금계1리의 마을>
금계1리는 임실, 부계밭, 쇠바리, 용천동 등 네 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눠져 있는데, 임실(任室) 마을은 이곳에 집을 짓고 아이를 임신하면 큰 인물을 낳는다는 전설에 따라 '임실(姙室)'이라 했는데, 일제 강점기 이후 ‘임실(任室)’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부계밭은 임실과 개천을 사이에 두고 동은 부계, 서는 임실이다. 부계(알품을 부(伏), 닭 계(鷄))밭은 정감록에서 십승지지의 으뜸이라고 하는 금계촌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또한 부계밭은 주세붕 선생이 가삼을 제일 처음 심은 곳이기도 하다. 쇠바리는 임실마을 북쪽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뒷산 모양이 흡사 소의 발처럼 생겼다고 해 쇠바리라고 하며, 용천동은 신라 때 용천사라는 절이 있어 용천동이라 불렀다는 설과 마을 뒤산의 지형이 용이 하늘로 등천하는 형세여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정자 지나 뒤편에서 우틀하여 진행하여야 하지만,
직전의 전봇대에 있는 자락길 표지기를 따라 좌틀하였다가 잠시 알바 아닌 알바를 하게 되는데,
뒤편 당산나무와 정자 사이에는 이곳 금계촌 임실 마을이 십승지임을 알리는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승지마을 금계촌>
십승지란 전국에서 삼재(전란, 질병, 기근)를 피하기 좋은 10곳을 말한다. 십승지로 꼽는 곳은 비경서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어느 비경서든 그 첫째로 꼽는 곳이 풍기 금계촌이다. 그래서 예부터 비결을 쫓는 사람들이 전국 각처에서 모여들었다. 금계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설왕설래하지만, 돌과 바람이 없어야 하고, 죽령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에는 모두 수긍하는데, 이 조건에 맞는 곳이 바로 현재의 금계동 임실 마을이다. 또 금계라는 지명은 '닭이 알을 품고 있다'라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에서 비롯되었고, '임실'이란 지명도 임신(妊娠)과 뜻이 통하기 때문에 가장 유력한 승지로 꼽힌다. 마을 원로들은 금계촌이 정감록촌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부계밭과 임실에 사는 사람 중 십중팔구는 정감록을 믿고 찾아온 사람들과 그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북지역에서 온 사람 중에는 평안도가 제일 많고 황해도, 함경도 순이며, 이 지역 토착 주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살기(殺氣)가 없어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다'라고 한 소백산의 줄기에 위치한 이 금계마을에 정감록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다. 마을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이전에 온 사람들은 금계촌에 많이 정착했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후에 온 사람들은 욱금동과 삼가동에 많이 정착하게 됐다"라고 기억했다. 당시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서는 "풍기로 가야 산다"라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에는 한국전쟁 중에 정감록을 믿고 이북에서 피란 온 이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데, '풍기 발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인순(59) 씨의 경우에는 6촌 이내 일가족 40명이 아버지를 따라 모두 내려왔다고 한다. 피란 온 평안북도 사람들은 직물 쪽을 하였고, 개성 사람들은 인삼을 하였다. 현재 풍기에 인견이나 인삼이 유명한 이유라는 것이다.
정성들여 쌓은 돌담에 둘러진 빈집이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주는 임실마을을 지나,
농로로 접어들어 어둠에서 깨어난 농촌풍경을 즐기며 걷고 있는데,
우측 쇠바리 마을 뒤편 능선 위로 아침해 모습을 드러내며 평소와는 다른 일출풍경이 무척이나 생경스럽다.
임실마을을 뒤로하고 잠시 농로를 따르다가,
이정표가 가리키는 수로 옆 들길에는 웃자란 풀이 이슬을 매달고 있어서 아래 밭두렁으로 우회하여,
다시 농로에 접속하여서는 이정표의 삼가리 방향으로 우측 도로를 따르고,
풍기인삼이 시작된 곳을 돌아볼 수 있는 둘레길인 ‘풍기인삼 개삼터길' 이정표를 지나,
<풍기인삼 개삼터 길>
풍기인삼은 1541년 주세붕 선생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풍기의 토양과 기후를 조사한 결과 본래부터 산삼이 많이 자생할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삼을 재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임을 발견하고 산삼종자를 채취해 풍기읍 금계동 임실마을 ‘개삼(開蔘)터’에 시험 재배한 것이 그 시작이다.
풍기인삼 개삼터길은 풍기인삼 최초 재배지이며 정감록의 제1승지인 풍기읍 금계리 일원에 조성되어 있는데,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최초의 개삼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영주시 풍기읍 금계1리 부계밭에서 출발하여 쇠바리와 금선정 그리고 금계호를 지나 영전고개를 넘어 진밭골과 용천골을 경유하여 금계1리 출발 지점으로 복귀하는 7km 거리로 약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사진 펌)
지형이 '소의 발'처럼 생겼다는 쇠바리 마을로 진행하여,
소임을 다하고 그 고단함을 내려놓고 있는 지게가 눈길을 끄는 쇠바리 마을을 통과하고,
포장도로에서 우측 이슬을 듬뿍 매달고 있는 웃자란 풀이 가득한 농로로 들어서서,
'소백산자락길' 이정표의 삼가리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우측 풍기읍에서 좌측 삼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삼가로'를 가로질러 직진하면,
'금계 교회' 건물이 우뚝해 보이는 금계2리 마을로 들어서서,
금계2리 회관에서 좌틀하여 넓은 포장도로인 금계로를 따라 금계호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금계 2리>
금계2리는 속칭 장생이, 장시이, 장선이, 장선동 등으로 불리어 왔다. 그 유래는 마을 지형이 긴 배(船) 모양 같다 하여 장선(長船)이라고 이름하였다 하고, 또 일설은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마음씨 좋은 착한 사람들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長善)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금계지'로 이어지는 도로 우측으로 금선계곡과 건너편의 소나무숲이 멋들어지고,
우측 '풍기인삼 개삼터길'이 이어지는 금선정교를 건너면 '장생이 녹색농촌 체험관'이 있다는 표지판을 지나서,
좌측 '금양정사'가는 길을 두고 우측 금선정이 있는 자락길을 따르다가,
우측 아래의 솟을문이 있는 '금선정'을 둘러보기로 한다.
<금선정(錦仙亭)>
500년 세월의 송림 아래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내려다 보이는 금선정은 그 시냇물을 병풍처럼 드리운 바위 위에 얹혀있으며, 자연 그대로의 바위를 살려 모든 기둥의 길이가 다른 것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보여주는 금선계곡을 대표하는 정자이다. 원래 이곳은 뒷산 허리 금양정사에서 학문에 몰두하던 금계 황준량이 자주 거닐었던 곳이라 한다. 금계 황준량선생의 염원을 이어 2백여 년 후 정조 임금 시대에 그의 후손들이 세웠다.
금선정은 조선의 소박하고 고졸(古拙)한 건축미학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자다. 정면 2칸 측면 2칸 구조이며 벽체 없이 네 면이 개방된 전형적인 정자 양식이다. 정자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암반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기둥의 길이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난간은 평난간인데 네 면을 두르는 일반적인 양식과 달리 계곡 쪽 앞면 두 칸과 측면 한 칸만 둘러 소박미를 더했다. 낭떠러지가 있는 쪽으로 난간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금선정 편액은 금선정 건축 4년 뒤에 풍기군수 이대영이 당시 성주목사이던 조윤형의 글씨를 받아 걸었다고 한다. 당초 정자 안에는 시판이 빼곡히 걸려 있었으나 모두 도둑맞고 없어졌다고 했는데, 새롭게 단장하면서 다시 걸었다고 한다.
금선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금선계곡.
<금선계곡(錦仙溪谷)>
소백산 비로봉(높이 1,439m)에서 발원하여 남쪽 골짜기를 따라 흐르다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욱금리~금계리~교촌리~동부리를 지나 서천으로 합류하는 '금계천' 중에서, 욱금리 금계 저수지(삼가지) 남쪽의 금계리 장선 마을(장생이 마을)에서 흐르는 길이 1.5km의 금계천을 특히 '금선계곡(錦仙溪谷)'이라 한다. 계곡 상류 쪽 여울목에서는 맑고 투명한 물방울 수천 수 만개가 튀어 올라, 황준량은 이를 ‘얼음 방울이 튄다’라고 시를 읊었는데, 장마철 유량이 많아지면 볼 수 있지않을까 싶다.
솟을대문 좌측에 있는 '遊錦仙臺(유금선대)' 시비.
< 遊錦仙臺(유금선대)> - 황준량의 시(詩) -
승지 찾는 마음에 골짜기 창문에 드니
시재를 어찌 꼭 반강에 빌리랴
무지개 밝은 폭포에는 해맑은 눈이 날리고
비단을 깐 안개 속 꽃이 돌다리를 비추네
소백산 구름 노을 어느 곳이 제일일까
금선대 달과 바람 짝할 때가 없으리
봄옷 지어 걸치고 꽃을 찾아 나서며
졸 그늘에 기대어 술동이를 기울이네
금선계곡을 멋들어지게 하는 아름드리 소나무.
금선정을 돌아나오면 '금선정 유래' 설명판이 세어져 있고,
<금선정(錦仙亭) 유래>
정조(正祖) 5년(1781년)에 풍기군수 이한일이 금선계곡의 금선대(錦仙臺)에 정자(亭子)를 세우고 금선정( 錦仙亭)이라 이름하였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風景)을 찾아 원근유상풍월객(遠近遊償風月客)이 끈이질 않았다고 한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바위에 금선대(錦仙臺)라 명명하고 학문(學問)을 강구(講究)하고 음풍농월지(吟風弄月趾)로 택하였으며, 영조 33년(1767년)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금선대(錦仙臺) 삼대자(三大字)를 암벽(巖壁)에 새긴 글씨가 남아있다.
바로 옆에는 금계 황준량 선생 추모비와 '계양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로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 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 뒤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 훈도로 차출되었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하였다. 1544년 학정, 1547년(명종 2) 박사에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 중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었다.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 기사관을 겸했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1551년 경상도 감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앞서 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 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였다. 그러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신녕 현감으로 있을 때 기민을 잘 진휼(賑恤) 하여 소생하게 하였다. 또한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 문권(負債文券)을 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학교와 교육 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 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 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하였다.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내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祠宇)를 마련해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목사로 나아가서도 영봉 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 서당(孔谷書堂)·녹봉 정사(鹿峰精舍)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 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퇴계가 심혈을 기울인 주자(朱子)의 편지와 상소문 등을 모아 요약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발문을 쓰고 처음으로 간행하였는데, 이 < 주자서절요>는 이후 조선 성리학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으며, 황준량을 퇴계학파의 중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성주목사 4년째인 1563년 봄 황준량은 병을 얻어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황준량은 귀로에 서찰로 퇴계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린다. 타계하기 하루 전이다. 그리고 중도인 예천에서 끝내 죽음을 맞는다. 겨우 47세였다. 과로사였을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승 퇴계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밝히는 계기가 된다.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마음은 그 끝을 알 길이 없다. 황준량이 죽자 스승 퇴계는 그의 관을 덮을 명정(銘旌)을 썼다. 그러고는 슬픔을 억누른 채 행장(行狀)을 지어 그의 일생을 기록한다. 퇴계가 제자의 행장을 쓴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퇴계는 일생 7편의 행장을 남겼다. 그가 행장을 쓴 인물은 정암 조광조,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명종 임금, 퇴계의 아버지가 전부였다. 여기에 제자의 행장이 보태진 것이다. 황준량의 이야기로 오늘날 전하는 상당 부분은 여기에 근거한다. 퇴계는 또 제문을 지어 아들 준을 통해 보냈다.
“아, 슬프다 금계여!…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영결하는 말이 부고와 함께 이를 줄을! 실성하여 길게 부르짖으니 물이 쏟아지듯 눈물이 흘렀다네.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빠르게 이 사람을 빼앗아 가시나이까….”
스승은 제자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도 살폈다. 황준량이 공을 들인 금양 정사가 그의 사후 완공되자 퇴계는 1566년 현장을 둘러보고 풍기군수에게 특별한 배려를 당부하는 글을 쓴다. 또 제자가 남긴 시문과 저작을 수년 동안 일일이 넘기며 편차를 정하고 간행한다. 황준량의 <금계집> 초판본이 1566년께 일찌감치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추모비 옆면에 ‘居官四箴’(거관 사잠)’이라는 공직자가 지켜야 할 네 가지 잠언을 세분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持己以廉(지기이렴) 청렴으로 자신을 지키고 / 臨民以仁(임민이인) 사랑으로 백성을 대하며
存心以公(존심이공) 마음은 공익에 두고 / 莅事以勤(이사이근) 부지런히 일하라
금계 선생의 유적을 뒤로하고 잠시 도로를 따라 금계지 아래 소공원으로 들어서면,
운동시설과 아고라를 비롯한 여러 시설을 갖춘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금계지 제방 좌측의 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소백산 자락길은 종합병원이요, 당신의 두 다리가 의사입니다.'라고 새겨진 소백산자락길 표지석이 자리한 제방 위에 서게 되는데, 금계지 건너편으로 소백산 비로봉이 우뚝한 주능선이 조망되고,
'금계호'와 '금계지' 표지석 뒤에는,
소백산을 그윽하게 품고 있는 잔잔한 금계지의 아침 풍경이 새벽 걸음을 마다않은 트레커의 수고를 씻어준다.
금계지 좌측 호안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탐스럽게 자라고 있는 사과나무 한그루의 수확량을 고려한 수입을 추정해 보며,
즐비한 펜션과 사과밭의 수입을 비교해 보기도 하는 사이에,
2차선의 포장도로인 '삼가로'에 접속하는 지점에는 '풍기인삼 개삼터 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잠시 삼가로 도로를 따르다가 도로 우측의 금계지 둘레 데크길로 들어서면,
우측 금계지 건너편으로 잠시 전에 지나온 금계지 못뚝이 건너다 보이고,
이내 나타난 금계지 전망데크로 들어가서 넓은 저수지를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는데,
저수지 안에서 흔적으로 남긴 '왕버들'이 청송의 주산지를 떠올리게 한다.
물안개가 피어나는 금계지 모습을 한번 더 카메라에 담고서 전망데크를 돌아나와,
'삼가로' 도로를 따르는데,
좌측으로 소백산 금계능선의 금계바위가 아침안개에 아스라이 조망되고,
<금계바위>
금계호 북쪽 샘밭골 마을 뒷골짜기에 닭 볏 모양과 비슷한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이를 '닭산' 혹은 '금계 바위'라 부른다.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동네의 수호신으로 믿어 왔다. 이 바위의 가운데 부분에는 많은 금이 묻혀 있었고, 닭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빛나는 보석이 박혀 이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확천금을 노린 어떤 나그네가 가파른 바위를 기어올라가 눈에 박힌 보석을 빼려고 하였는데,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다. 이 벼락으로 바위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나그네는 무너진 바위에 깔려 숨지고 말았으며, 그 후 그 보석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마을은 점차 가난해져 사람이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바위의 형태도 닭 볏처럼 보이지 않지만, 다만 닭이 뿌린 눈물이 바위 곳곳에 수정처럼 박혀서 해질 무렵이면 낙조에 눈부시게 반사되어 그 모습이 닭의 벼슬 같다고 한다.
저 금계바위 동쪽 골짜기는 십승지의 하나인 감록촌(監錄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감록촌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정감록(鄭監錄)에 기록된 피난지는 '풍기의 차암과 금계천' 두 물골 사이로 임실·장선·부계밭·갓밭·용천동·쇠바리 일대이다. 그런데 그곳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한 중심지, 즉 피난의 적지로 알려져 정감록 신봉자들이 처음에 정착했던 곳이라고 한다.
금선계곡 옆으로 자리한 캠핑장과 펜션들을 지나,
꾀나 큼지막하게 지어진 삼가리 마을회관을 지나서 잠시 더 오르면,
소백산자락길 1자락과 2자락의 분기점인 소백산국립공원 삼가매표소가 있는,
삼가매표소 주차장 위 당골 갈림길 삼거리에서 좌측 소백산자락길 2-1코스가 이어지는 당골 방향 도로를 두고 우측 비로봉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마침 삼계능선을 걷고 내려온 분들이 삼거리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어서 잠시 쉼을 하며 목을 축인다.
좌측 소백산 주능선을 바라보며 잠시 도로를 따르면,
소백산 국립공원 삼가야영장을 지나게 되는데,
야영장 담벼락을 따라 소백산 자락길 전 구간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고,
좁은 1차선 도로 좌측으로 야자메트가 깔린 인도를 따라 오르면,
장애인 탐방 가능 구간인 '무장애 탐방로' 시작 지점을 지나게 된다.
좌측 달밭골 계곡을 내려서는 물소리를 들으며 야자매트가 깔린 탐방로를 따라 오르다가,
달맞이길 탐방로 아치문으로 들어서면,
계곡을 따라 데크길 탐방로가 이어지다가,
테이블까지 마련된 널찍한 데크 쉼터를 지나고,
맑은 물이 조잘대며 흐르는 달밭골 계곡을 잠시 더 거슬러 오르면,
좌측에 화장실이 있다는 이정표가 있는 도로에 다시 접속하게 되는데,
우측 오름길로 이어진 자락길을 잠시 미뤄두고 좌측에 자리한 비로사를 잠시 둘러보기로 한다.
비로사의 구조와 내력이 적힌 안내판을 읽고는 꾀나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비로사 일주문을 지나,
<비로사(毘盧寺)>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소백산 비로봉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신라 신문왕 때 승려 진정이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창건 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제자인 진정의 홀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현 비로사 자리로 추정되는 소백산 추동에 초가를 짓고 《화엄경》을 강의하였고, 90일 동안 계속된 이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하늘에서 환생했다고 말했다. 신라 시대에는 소백산사로 불렸다.
한편, 신라 말에 이 절을 중창되고 고승 진공이 머물렀는데, 고려 태조가 이곳에 와서 진공의 법문을 듣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태조 20년에 진공이 사망하자 태조가 직접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이때 최언위가 글을 지어 세운 진공대사 탑비가 남아 있어 영주시 지방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 여러 차례 중창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승병이 거점으로 활용하다가 전소되어 새로 지어야 했고, 1909년에도 법당 외의 건물이 모두 불타 남아 있는 건물은 모두 현대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996호인 아미타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을 보유하고 있다. 9세기 신라 후기의 화엄불교 미술 특징을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잠시 더 돌계단길을 오르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당간지주가 나타나고,
<영주 삼가동 석조 당간 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
비로사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4.2m이다. 당간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佛) · 보살(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 지주라 한다. 두 개의 기둥은 정상 바깥에서 안으로 2단의 굴곡이 있으며, 그 가운데 깃대를 세우기 위해 상.하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 또한 기둥 사이에는 깃대를 받치는 돌이 있으며, 이 돌에는 깃대를 꽂기 위한 구멍이 있다. 절에서 기도와 법회 등과 같은 행사가 있을 때 사찰 입구에 이것을 세워서 그날의 행사를 널리 알렸다.
다시 또 돌계단길을 조금 오르면,
2층 누각인 영월루를 비롯한 비로사 여러 전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경내 전경이 펼쳐지며,
비로사 진공 대사 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가 눈에 띄고,
'진공'은 입적 후 공덕을 칭송하려고 왕이 하사한 시호이고, '보법'은 진공 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의 이름인 탑호, 그리고 '탑비'는 승려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을 의미한다.
범종각과 적광전 등의 여러 전각을 둘러 보고는,
장독대가 도열해 있는 스님들의 거주공간 뒤로 내려가면,
다양한 감성증진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 숲길 출입구가 잠겨 있고,
다시 비로사 아래 갈림길로 돌아나가며 비로사 탐방을 마감한다.
비로사 탐방을 마치고 달밭골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달밭골 방향의 자락길을 따라,
'명품마을 달밭골'이라 써진 장승을 지나고,
<소백산 달밭골>
조선 명종 때 「격암유록」을 저술한 남사고(1509~1571)는 소백산을 지나가다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하며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였다 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영조 27년 이중환(1690~1752)이 저술한 인문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는 '병란을 피하는 데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 좋은 지역이다'라고 했다. 달밭골은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설(十勝地說) 중 일승지에 포함된 지역이다. 인근에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비석이 있어 이곳이 신라시대 화랑들이 무예를 단련하였던 곳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단양 영춘면 나루터에 소금을 구하러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비로봉 방향으로 고려 시대 사고지로 추정되는 터가 남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어두운 밤하늘에 휘영청 떠있는 달을 보며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의 희망을 빌었다. 달밭(月田)은 배추밭에서 배추를 무밭에서 무를 뽑듯이 달밭에서는 달을 가꾸어 뽑는 곳이기도 하다. 달의 진정한 의미는 지혜를 말하기도 한다. 달밭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빛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좁은 도로 옆으로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오르면,
달밭골의 마스코트인 '화전이와 달이'상과 '달밭골 마을 안내도'가 있는 달밭골 마을이 나타난다.
2015년 영주시에서는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통해 선정한 16편의 작품을 선정해 《선비고을 이야기 여행》이란 책으로 펴냈는데, 그중 권이삼 작가의 《달빛 사랑》이란 작품이 이곳 달밭골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화전이와 달이' 상을 뒤로하고 잠시 더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좌측 비로봉(3.4km)으로 오르는 등로를 두고 우측 초암사 방향 자락길로 들어서면,
소백산 자락길 중 중요한 길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달밭골나눔터를 비롯한 민박, 카페, 민박 등의 간판이 내걸린 달밭골 마을을 지나,
좌측의 근사한 펜션을 마지막으로 비포장 수레길로 들어서서,
억새 군락지를 지나 숲길을 오르다가,
'잣나무숲 명상쉼터' 표지판에 세워진 잣나무 숲으로 들어서서 고단해진 다리를 멈추고 한참동안 편안한 쉼을 즐긴다.
잣나무숲에는 여러 형태의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데,
침대 형식의 벤치에 누우면 세상이 편안하다.
20여분의 달콤하기 그지없는 쉼을 마무리하고 다시 자락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오늘 코스 중 가장 고도가 높은 달밭재/성재를 넘게 되는데,
서쪽에 '달밭골'이 있어서 '달밭재'로 불리며 소백산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이정표에는 '성재'로 표기되어 있고,
고갯마루를 넘어 급하지 않은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우거진 잡초 사이로 버려진 외딴집이 보이는데,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역력하고,
그닥 필요해 보이지 않는 나무계단을 내려가다가,
좌측 지계곡을 건너는 달밭1교를 지나,
동물들의 발자국과 배설물 설명판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는,
불볕 같은 여름에도 서늘한 한기를 머금은 계곡길을 따라 내려가면,
좌측 월천계곡을 따라 국망봉으로 이어진 등산로(진입금지) 갈림길에서 우측 내림길을 따라,
좌측 월전계곡을 건너는 달밭2교를 지나게 된다.
<월전계곡(月田溪谷)>
죽계 구곡의 상류는 월전계곡과 석륜암계곡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월전계곡은 국망봉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고, 그 우측 계곡은 석륜암(石崙庵)계곡이다. 월전 계곡은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며, 상류에 달밭골이 있다. 한자로 표기해서 월전동(月田洞)이다. 지명은 이 마을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월전계곡 합류점의 시원한 계곡 전경을 카메라에 담고,
돌무덤 옆에 세워진 달팽이 설명판을 지나면,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고,
좌측에서 흘러드는 지계곡 물길을 넘는 달밭5교와 달밭4교를 연이어 지나는데,
등로에 세워진 쇠자우골 표지판을 보고서 소 발자국을 찾아보기도 하며,
<쇠자우골>
소 발자국이 찍힌 바위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쇠자우골로 부른다. 쇠자우골은 망월봉 북쪽에 붙은 골짜기를 말하며, 남쪽에 있는 긴 골짜기는 뱀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뱀골로 부른다. 전에는 소 발자국이 찍힌 흔적이 3개였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현재는 하나만 보인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소가 직접 바위를 밟아 난 흔적이라 보기는 힘들고 달밭골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다니며 위치를 알리는 약속의 의미로 붙인 이름일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청량한 물소리와 함께 달밭6교를 건너는데,
이제 계곡의 폭포수가 만들어 놓은 커다란 소가 금방이라도 뛰어들고픈 느낌이 들게 하고,
소백산 계곡에 사는 어류 일람표가 있는 데크목 쉼터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국망봉 서쪽 석륜암(石崙庵)계곡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과 비로봉 동쪽 월전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합수하는 지점인 9곡 중봉합류쯤이 되는 곳이다.
주세붕과 이황은 죽계 구곡을 하류부터 상류로 번호를 매겨, 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에서 차례로 올라와 이곳을 8곡 금당반석(金堂盤石)으로 하고, 그 위에 9곡 중봉합류(中峯合流)로 정하였는데, 9곡 중봉합류는 금당반석에서 100m 정도 올라간 지점, 즉 국망봉 서쪽 석륜암(石崙庵)계곡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과 비로봉 동쪽 월전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합수하는 지점을 말한다고 한다.
석륜암계곡을 넘는 다리를 건너면 달밭골 설명판이 나오며,
<달밭골>
소백산 초암사와 비로사 사이의 골짜기가 달밭골이다. 달뙈기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달밭골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는데, 그보다는 국망봉과 초암사의 바깥 골짜기라는 의미가 더 설득력이 있다. 달밭골은 옛날 화랑도들이 유오산수(遊娛山水)하던 곳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광복과 6.25 사변 전후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피난처로 많이 모여 살았다. 요즘은 요양하는 사람이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순박한 산 사람들이 밭농사와 약초, 산나물을 채취하여 생활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까지 산신제를 지내고, 집집마다 움막을 파서 감자나 음식을 보관하고 있다.
쭉쭉 뻗은 낙엽송(일본잎갈나무) 사이에서 좌측 국망봉 갈림길이 나오는데 자락길은 우틀하여 초암사로 향하게 된다.
국망봉 갈림길에서 초암사 방향 자락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다가,
좌측 아래 100m 지점에 죽계 1곡이 있다는 이정표에 따라 좌측으로 내려서면,
죽계구곡 1곡 금당반석 안내판이 나오며,
<1곡 금당반석(金堂盤石)>
금당(金堂)은 절에서 본존(本尊), 즉 석가모니불을 모셔 두는 건물이나 크고 화려한 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렇듯이 이곳은 죽계 구곡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곳이다. 화강암 너럭바위도 일품이지만 그 위로 흐르는 맑은 물길은 마치 거울같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준다.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부석사를 구상했듯이 새로운 계획은 금당반석 맑은 물에서 자신의 구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반석 위를 구르는 청아한 물소리와 함께 금당반석 절경을 감탄하며 감상한다.
금당반석은 아주 넓은 암반 위로 죽계의 물이 넓게 퍼져 흘러내리는 굽이로, 반석 끝에 소(沼)가 있고, 그 위에 아담한 폭포가 있다. 폭포 우측 암반에 신필하가 새긴 '一曲' 글자가 선명하다.
죽계 1곡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자락길을 이어가게 되는데, 갈림길에는 영조·정조 시절 사헌부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한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의 시(詩) '竹溪九曲'이 게시되어 있고,
이내 이정표(국망봉 4.4km, 비로사(자락길) 3.4km)가 있는 '달빝골 국망봉 가늘길' 아치문을 나서면,
초암사 경내로 들어서게 되는데 예전 소백산 국망봉 산행길에 들렀지만 한번 더 경내를 둘러보기로 한다.
<초암사(草庵寺)>
초암사(草庵寺)는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에 의상대사가 세운 조계종 사찰로, 의상이 부석사 터전을 보러 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이다. 부석사를 지은 후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거석 축대 ·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백산의 절경 속에 자리 잡은 청량 도량으로 6•25 전쟁으로 파괴되어 다시 지은 법당이 남아 있으며, 초암사 삼층 석탑(경북 유형문화재 126)과 초암사 동부도(경북 유형문화재 128), 초암사 서부도(경북 유형문화재 129) 등을 소장하고 있다.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한 것으로, 사각형 지대석 위에 세워진 이중 기단의 각 면석에 우주가 있고, 일주씩 탱주를 모각하였다. 각 층 옥신에도 우주가 있고, 옥개석 아래 4단의 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없지만, 주변에 그 파편이 흩어져 있다.
새로이 복원한 초암사를 둘러보고서 초암사를 뒤로하면,
바로 2곡 청운대(靑雲臺)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2곡 청운대(靑雲臺>
주세붕은 '소백산 흰 구름이 비치는 곳'이라고 백운대(白雲臺)라 하였고, 이황은 소수서원 백운동과 구분할 수 있도록 청운대로 바꾸었다고 한다. 부딪쳐 휘감아 흐르는 물길 속에 우뚝 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는 바위 앞에서 스스로 청운의 꿈을 키운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청운대 앞에는 오산(梧山) 서창재(徐昌載, 1726년[영조 2] ~ 1781년[정조 5])의 시 등청운대(登靑雲臺)가 게시되어 있고,
'청운'은 '높은 이상(理想)이나 벼슬'을 가리키는 말로 젊은 유생들이 큰 뜻을 품고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라고 하며,
안내판 사진 속의 2곡 청운대의 모습은 아래의 괴목에서 위쪽으로 보아야만 가늠된다고 하는데,
바위에 뿌리를 박고 계곡을 향해 비스듬히 누운 괴목이 마치 도깨비방망이라도 되는 양 신비롭게 보인다.
온전한 2곡 모습을 담지 못하고 죽계 1교를 건너면,
'남천 권두문(南川 權斗文)'의 '초암사 죽계' 시판이 세워져 있고,
<남천 권두문(南川 權斗文)>
남천 권두문(南川 權斗文, 1543년[중종 38] ~ 1617년[광해군 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92년 창평 군수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권주와 함께 적의 포로가 되었다. 적진에 있으면서 적의 정세를 세밀히 탐지해 관군에게 알렸는데, 이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 《호구일록(虎口日錄)》이다. 원주에 이르렀을 때 깊은 밤을 이용하여 아들과 함께 탈출하였다. 저서에는 《남천집》이 있다.
초암사 일주문 방향의 도로를 두고 좌측 아래로 내려서다가,
좌측 아래 계곡을 건너는 다리로 내려서서 3곡 척수대(滌愁臺)를 향하는데,
목교 들머리에는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1768(영조 44)∼1844(헌종 10))의 송죽곡(松竹曲)이 게시되어 있고,
목교를 건너면 바로 3곡 척수대(滌愁臺) 안내판이 있는데,
<3곡 척수대(滌愁臺)>
천고의 세월 동안 흐르는 물은 3곡에서 좌우로 부딪치며 돌부리마저 말끔하게 씻어낸다. 이 3곡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없는 욕망 추구와 세속적 성취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생긴 온갖 근심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척수(滌愁)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우인회숙(友人會宿)'이라는 작품의 첫 구절에서 차용한 말이다.
滌蕩千古愁(척탕천고수) / 천고의 시름 말끔히 씻어버리려고
留連百壺飲(유련백호음) / 연거푸 일백 두루미 술을 들이켰네
良宵宜清談(양소의청담) / 좋은 밤은 정담 나누기 안성맞춤이요
皓月誰能寢(호월수능침) / 밝은 달을 두고 애초에 잠자기 글렀네.
醉來臥空山(취래와공산) / 한껏 취해 아무도 없는 산에 쓰러지니
天地即衾枕(천지즉금침) /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곧 베개로구나.
3곡 척수대(滌愁臺) 좌우의 천고의 세월 동안 씻어낸 바위가 그리 말끔해 보이지는 않는다.
죽계구곡 안내판과 공원 안내도가 설치된 계곡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4곡 용추(龍湫)' 안내판이 있는 지점에서 우측 아래로 조금 내려서면,
<4곡 용추(龍湫)>
용추는 죽계 구곡 중 소(沼)가 가장 깊은 곳이다. 아래위로 반석이 편평히 깔리고, 좌우편 깎아지른 듯한 암각(巖角) 가운데로 급한 여울이 성낸 듯 달리다가 쏟아져 드리워 비폭(飛瀑)이 되었다. 밑에는 검푸른 물굽이가 소용돌이치는 깊은 못을 이루고, 큰 바위가 못 가운데 누워, 마치 용이 꿈틀꿈틀 구름비를 뿜는 듯하다 하여 '용추'(龍湫)라 불린다.
순흥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살아있는 돼지를 이곳에서 목을 베어, 돼지머리를 용추 깊은 곳에 던져 넣으면, 소(沼)의 물이 끓어오르듯 핏물이 솟구친다고 한다. 돼지의 목을 베어 던져 넣음은 용이 깃들어 있는 신성한 처소를 핏물로 더럽힘으로써, 신령이 그 더러움을 씻어내고자 곧 비를 내리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가순(李家淳)의 옥녀봉곡(玉女峯曲)이 계시되어 있는,
<이가순(李家淳, 1768~1844)>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은 퇴계가 유람한 자취를 따라서 순흥향교를 시작으로 죽계천(竹溪川)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소백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시를 남겼다. 제1곡 횡당곡(黌堂曲), 제2곡 배점곡(裵店曲), 제3곡 송림곡(松林曲), 제4곡 옥녀봉곡(玉女峯曲), 제5곡 청련암곡(靑蓮庵曲), 제6곡 안간교곡(安干橋曲), 제7곡 청운대곡(靑雲臺曲), 제8곡 금당곡(金堂曲), 그리고 제9곡 죽암곡(竹巖曲)이다.
그러나 이황이 설정한 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3곡 백자담(栢子潭), 4곡 이화동(梨花洞), 5곡 목욕담(沐浴潭), 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7곡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9곡 중봉합류(中峯合流)와는 많이 다르다.
'4곡 용추'가 내려다 보이고,
이내 '초암 탐방지원센터'를 지나게 된다.
초암사 주차장을 지나며 포장도로를 두고 우측 계단길로 내려서자,
이름은 없지만 선녀와 함께 목욕하면 어딘들 나쁠까 마는 그래도 더욱 좋을 법한 맑은 소(沼)가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5곡 청련동애(靑蓮東崖)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5곡 청련동애(靑蓮東崖) / '청련암 동쪽에 위치한 바위'>
5곡(曲)이 새겨진 바위 위에 인위적으로 판 머리만 한 홈이 보인다. 아마도 안간교(安干橋) 다릿발을 세웠던 흔적인 것 같다. 안간교 건너 동쪽 낭떠러지로 물이 흘러내린다. 바로 청련암 동쪽 벼랑이다. 하지만 서쪽 어딘가 있어야 할 청련암(靑蓮庵)은 찾을 길 없다.
홈이 파인 바위와 5곡 표시가 된 바위는 있는데 청련암이 보이지 않아 그 의미를 알아내기가 어렵고,
사각정자 쉼터가 있는 곳에서 죽계구곡 탐방로 아치문으로 들어서서 다시 계곡을 건너게 된다.
나무다리를 건너,
계곡 좌측 기슭으로 이어진 숲길을 따라 내려가니,
데크목 전망대가 나오는데,
6곡 목욕담(沐浴潭)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6곡 목욕담(沐浴潭)>
6곡 아래와 위로 선녀가 내려와 몰래 몸을 씻었을 듯한 바위와 숲에 가려진 숨겨진 소(沼)가 있다. 옛 선비들이 그 물속으로 첨벙거리며 뛰어들었을 리 없겠지만, 자꾸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어난다. 옆에 앉아만 있어도 그 맑은 물에 취해 빠져든 것 마냥 마음마저 씻어 준다.
그 옆에는 담제 강구율(澹齊 姜求律)의 '육곡목욕담'이란 시가 게시되어 있는데,
선녀가 몸을 씻었다는 '6곡 목욕담'에 발을 담그려니 약간 거시기한 느낌이 들어,
바로 아래 선녀가 목욕한 뒷물이 내려오는 곳에서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혀 본다.
탁족으로 시원해진 걸음으로 망태버섯이 예쁘게 피어난 등로를 따르면,
7곡 탁영담(濯纓潭) 안내판이 있는 조망데크를 지나게 되고,
<탁영담(濯纓潭)>
탁영(濯纓)이라는 말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어보사(漁父詞)」의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중국 전국(戰國) 시대에 초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낸 굴원은 강남에 유배되었다가 「어보사(漁父詞)」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보이고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 漁父의 父는 '노인 보'임.)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 창랑지수 청혜 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 창랑지수 탁혜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을 수 있으리라.
세상을 살다보면 주어진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대처 방법을 강구하여야 하는 경우를 수없이 직면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선택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선택의 고민에서 다소 벗어나고자 한다면 굴원의 이 「어보사」 구절을 상기(想起)해 볼 필요가 있다. 7곡은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니 내 갓끈을 씻으면 된다. 나아가 갓끈뿐만 아니라 맑은 물에 내 마음의 때도 함께 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다시 짙은 숲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놓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8곡 관란대(觀瀾臺) 안내판을 지나게 되는데,
<관란대(觀瀾臺)>
觀水有術 必觀其瀾(관수유술 필관기란)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나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하느니라. '맹자'의 '진심장구(盡心章句)' 상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리고 그 주해(註解)에 '관수지란(觀水之瀾) 즉지기원지유본의(則知其源之有本矣)' 즉 '물의 여울목을 보면 곧 그 수원(水源)에 근본이 있음을 알게 되느니라'라고 풀이하고 있다.
8곡의 물살은 제법 빠르다. 그 물은 자연스럽게 여울을 이루며 계속 흐른다. 그 흐름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은 그 근본이 확실하게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근원이 멀고 깊은 물이 여울져 흐르는 여울목을 바라보면서 본원지수(本源之水)를 생각하는 태도를 우리는 가질 필요가 있다.
'8곡 관란대'의 모습은 나뭇가지에 가려 분위기만 살짝 느껴진다.
8곡을 지나면 9곡까지는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하기에 다소간 느긋해진 마음으로 숲길을 따르는데,
금계 황준량 선생의 '서죽계팔경후'라는 시판이 있는 데크목 쉼터를 지나게 되고,
이제 바윗돌도 보이지 않는 걷기 좋은 숲길을 편안히 따르는데,
등로 옆에는 조선 초 문신이며 학자였던 사가 서거정의 '소백산' 시판(詩板)이 눈길을 끌고,
청량한 계곡 물소리에 취해 계곡을 넘는 목교를 건너,
우리에게는 출구인 '죽계구곡 탐방로 입구' 아치문을 나서게 된다.
땡볕에 노출된 도로를 잠시 따르다가,
우측 선비촌 방향의 이정표를 따라 목교를 건너,
계곡 좌측 숲길을 따르면,
시멘트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야자메트가 깔린 둑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좌측 과수원에는 탐스러운 열매를 달고 있는 사과나무가 그득하게 들어차 있고,
우측 시멘트교량을 건너 도로를 따라 잠시 내려가다가,
좌측 '배점마을' 방향에 9곡이 았다는 이정표에 이끌려 좌측으로 내려서면,
제9곡 이화동(梨花洞)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제9곡 이화동(梨花洞)>
옥녀봉(玉女峯)과 이자산(二子山) 사이로 흐르는 죽계구곡은 이화동까지이다. 이화동 아래 깊은 물을 용소(龍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화동의 어원은 예전에 배꽃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배보다 주변이 모두 사과발이다. 이화동 다리 건너 산기슭은 배순의 대장간이 있던 자리이다. 그 모습은 없지만 불에 그을린 많은 돌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죽계구곡은 퇴계 이황선생이 명명한 하류(1곡)에서 상류(9곡)로 정해진 내용과 신필하가 1728년에 설정한 상류(1곡)에서 하류(9곡)로 정 해진 두 개의 이름이 있으나 지금은 순흥 부사 신필하가 명명한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또한 순흥 저수지 조성등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전해오는 자료와 현재의 조건에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조율하여 영주문화연구회에서 재지정하였다고 한다.
배점마을 방향의 시멘트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아래 바위 사이로 협곡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내려다 보이고,
다리 건너에는 '이화동'이란 시판과 '배점곡'이란 시판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죽계 구곡 중 구곡(九曲)으로 ' 마치 물줄기가 배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하여 '이화동(梨花洞)'이라 명명한 곳이다. 좁은 암벽 사이로 흐르는 죽계는 흰 포말을 만들며 힘차게 흐르지만, 새로 생긴 주변의 과수원 시설물과 시멘트 다리로 인해 경관이 훼손되어 다소 운치가 떨어진다.
다시 이정표가 있는 도로로 돌아나와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죽계 건너편에 배순의 대장간이 있었던 '배점마을(배점 2리)'이 있다는 설명판이 세워져 있고,
<배순의 대장간>
죽계 건너 맞은편 산자락에 배순의 대장간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그가 이곳에서 만든 물건은 근동에서 최고 인기였다고 한다. 아직도 그을린 돌멩이를 볼 수 있다. 배점이란 마을 이름도 배순의 무쇠점에서 따온 것이다.
죽계구곡 안내도와 설명판이 있는 소백산 국립공원 배점주차장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 배점주차장은 무료이지만 지나온 초암사주차장은 5,000원/1일이다.
<죽계구곡(竹溪九曲)>
『죽계 구곡(竹溪九曲)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장가인 안축(安軸 1287~1348)의 '죽계별곡'의 무대이자, 안향 · 주세붕 · 이황 · 신필하 등 많은 유현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으로, 초암사 위에서 배점 분교 옆까지 약 10리에 걸쳐진 계곡을 말한다.
죽계 구곡(竹溪九曲)에 대해서는 순흥부사를 지낸 주세붕의 《죽계지》와 이황의 《흥주지》에서,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의 '무이 구곡'을 본떠 하류부터 상류로 번호를 매겨, 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3곡 백자담(栢子潭), 4곡 이화동(梨花洞), 5곡 목욕담(沐浴潭), 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7곡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9곡 중봉합류(中峯合流)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소백산 자락길' 안내문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죽계 구곡은, 순흥부사 신필하(申弼夏)의 《순흥 읍지, 1728년》의 상류에서 하류로 차례를 매긴 것으로, 제1곡 금당반석(金堂盤石: 금당은 석가모니불을 모셔두는 건물이나 크고 화려한 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제2곡 청운대(靑雲臺: 청운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 제3곡 척수대(滌愁臺: 세속적 근심을 말끔히 씻어낸다는 뜻), 제4곡 용추비폭(龍湫飛瀑: 용이 구름비를 뿜는 듯하다 해 붙여진 이름), 제5곡 청련동애(靑蓮東崖: 청련암 동쪽에 위치했다 해 붙여진 이름), 제6곡 목욕담(沐浴潭: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을 듯한 바위와 숲에 가려진 웅덩이가 있다), 제7곡 탁영담(濯纓潭: 마음의 때를 맑은 물에 씻어낸다는 뜻), 제8곡 관란대(觀瀾臺: 물의 여울목을 보면 그 근원을 안다는 뜻으로 근본에 대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제9곡 이화동(梨花洞: 주변에 배꽃이 많았다 해 붙여진 이름) 등이다.』
도로 우측의 '순흥초교 배점분교터'를 지나서,
'Y'자 갈림길에서 따르던 도로를 두고 우측 마을길로 들어서면,
배순의 정려각이 있는 삼괴정이 나오는데,
도로 좌측의 매점을 지키는 할머니와 한담을 나누며 잠시 다리쉼을 한다.
<삼괴정(三槐亭)>
배순의 무쇠점(대장간)이 있던 마을인 영주시 순형면 배점리에는 수령 600년가량의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데, 느티나무 아래에는 배순의 정려비(경북 유형문화재 제279호)가 있다.
배순의 정려각.
<배순정려비(裵純旌閭碑)>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에 있는 정려비이다.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었다. 정려비는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시대 중기에 이 지방에서 대장간을 하던 배순 선생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배순(裵純)은 조선 중기 배점마을에서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천민이라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0여 리 길을 매일같이 걸어 소수서원 강학당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마당에서 작대기로 글씨를 써가며 귀동냥 공부를 하곤 하였다. 이를 가상히 여긴 퇴계 선생이 안으로 불러들여 유생들과 같이 글을 읽게 하여 퇴계 선생의 유일한 천민 제자가 되었다.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지내고 철상(鐵像: 사람이나 동물 등의 형상을 쇠를 부어 만든 상)을 만들어 기리는 등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선조가 죽자 고령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매월 삭망(초하루와 보름)에 초암사 뒷산에 올라 궁성을 향해 곡제사를 지냈다. 그 소문이 궁 안에까지 퍼져, 조정에서는 초암사 뒷산을 선조께 제사를 모신 장소라 하여 '나라 국(國)’자 '바랄 망(望)’자를 써 국망봉이 되었고, 1615년(광해군 7)에 정려(旌閭)되었다. 지금의 정려비는 1755년(영조 31) 그의 7대 외손인 임만유가 ‘충신백성(忠臣百姓)’이라는 말을 넣어 고쳐 세운 것이다.
배순이 죽자 군민들이 정려각을 세우고, 지금도 그를 ‘배충신’으로 높여 부르고 있으며, 배순의 대장간 점포가 있었던 마을 이름은 그의 성(姓)인 ‘배(裵)’를 따서 ‘배점’이 되었다.
잠시의 달콤한 다리쉼을 뒤로하고,
큰길에 접속하여 우측 선비촌 방향의 자락길을 따르면,
좌측으로 순흥저수지가 조망되고,
<순흥저수지/죽계호>
죽계천을 막아 만든 순흥 저수지는 원앙 등의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죽계호·송림호 또는 배점저수지로도 불린다.
땡볕이 내리쬐는 도로를 따라 '죽계호'라는 작은 표지석이 있는 순흥저수지 시설물 관리용 울타리를 지나서,
네이버지도와 다음지도 코스가 달라지는 지점에서 다음지도를 따르는 길로 들어서서,
자락길 흔적이 사라진 지점에서 과수나무가 식재된 밭을 가로질러 밭두렁을 넘는데,
잡초와 넝쿨을 뚫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돌방/고인돌 무덤 안내판을 지나,
잡초가 무성한 밭두렁을 따라 도로로 나서니 '고인돌 고분'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이음한옥스테이가 보이는 갈림길 이정표에서 다음지도의 1자락이 지나는 순흥향교 방향을 두고, 네이버지도의 1자락이 지나는 금성단이 있는 선비촌 방향으로 진행한다.
<순흥향교(順興鄕校)>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에 있는 고려 후기의 향교로, 1998년 4월 13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원래 순흥부 북쪽 금성에서 창건하였으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으로 고을과 함께 향교가 혁파되었다가 1683년(숙종 9)에 다시 세워졌다. 1718년 순흥부 동쪽 위야동에 이건 하였고, 1790년(정조 14)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세웠다.
죽계천 건너편 언덕에 자리한 순흥향교는 전에 금성대군 위리안치지(圍籬安置地)가 있었다고 하는 곳으로, 이곳에 위리안치지가 있었을 리 없다는 주장과 함께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돌우물을 파 그곳에 금성대군을 꼼짝 못 하도록 가두었다는 내용도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등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복숭아와 배나무가 탐스러운 열매를 매달고 있는 과수원길을 따라,
금성대군 신단의 은행나무인 압각수를 지나,
<금성대군 신단의 은행나무인 압각수(鴨脚樹)>
『이 압각수는 순흥 지역의 역사를 지켜본 신목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잎이 오리발과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 불리고, 충신수(忠臣樹)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금성대군과 부사를 비롯한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압각수는, 순흥도호부가 혁파되자 나무가 잎을 피우지 못하고 병들어가다, 혁파된 지 200여 년이 흐른 인조 21년(1643)에서야 생기가 돌고 껍질과 가지와 잎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숙종 8년(1682)에는 나뭇가지가 무성히 자라고 잎이 만개하는 등 변화를 가져왔는데, 다음 해인 1683년에 순흥도호부가 혁파된 지 226년 만에 다시 복권되면서 압각수가 이를 예견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경상북도 도목(道木: 제46호)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은행나무 고목인 압각수(鴨脚樹) 안내판에는 수령 1,200년, 높이 30m, 밑둥치 둘레 6m로 적혀 있다.
좌측의 금성대군 신단 담자락을 따르면,
금성대군 신단 입구가 나오는데,
무더운 날씨 탓인지 인적이 없는 신단 내부로 들어서서 그 옛날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
조선 세조 원년(1455) 단종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일파는 금성대군(錦城大君, 瑜유, 1426-1457)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삭령(朔寧)으로, 다시 광주(廣州)로 유배시켰다. 이듬해 성삼문 (成三問) 등 사육신의 상왕 복위 운동이 실패하면서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 대군은 다시 이곳 순흥으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지역 유림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사전 밀고로 관군의 습격을 받아 순직하였고, 고을은 온통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한 뒤 폐부(廢府)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숙종 9년(1683)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되었고, 이어 숙종 45년(1719)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삼단의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금성대군 신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沈聖熙)에 의해 서쪽으로 30~40보 옮겨 단소를 정비하여 순의비를 세우고, 관리사를 지어 매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 오고 있다.
전면 사주문(四柱門)을 들어서면 크게 제사 공간인 재실(齋室)과 음식을 준비하는 주사(廚舍) 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맞은편 태극이 그려진 '금성단문'을 들어서면 단소(壇所) 영역이다.
단소(壇所)의 단 위에는 '품(品)'자형으로 중앙에 '錦城大君之位(금성대군지위)'가 있고, 하단 우측(서측)에 '府使李公甫欽之位(부사이공보흠지위)', 하단 좌측(동측)에 '諸義士之位(제의사지위)'의 상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금성대군 상석 우측(서편)에 '有名朝鮮 端宗朝忠臣(유명조선 단종조충신) / 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라는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금성대군신단을 돌아나와 소수서원으로 향하다가,
바로 좌측에 있는 제월교(霽月橋)/청다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제월교(霽月橋)/청다리>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와 청구리를 연결하는 교량으로, 죽계천을 건너는 국가지원지방도 제28호선의 교량이다. 예전에 '청다리'가 있던 곳으로 '청다리'는 무량 청정의 세계로 들어가는 다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훗날 제월교로 바뀌었다. '제월(霽月)'은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온 말이다. 《송서(宋書)》《주돈이 전편(周敦頤傳篇)》에,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서가(書家)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쓴 글에 나오는 구절로, 「비가 갠 뒤의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이란 뜻이다.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말한다.
이 제월교(霽月橋)는 순흥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다리로, '청다리'라고도 한다.
『'너는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단다.' 어릴 때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런데 이 말 뒤에는 순흥(영주 지역의 옛 지명)의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다.
1456년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종 복위에 동조했던 수많은 순흥의 선비들과 그 가족들이 희생되었다. 수천 명의 순흥 사람이 제월교에서 참형을 당했고,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죽계천을 따라 십 리를 흐르다 영주시 동촌면 '피끝마을'에서 멈추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눈물겹게 살아남은 어린아이들이 청다리 밑으로 숨어들게 되었는데, 이를 가엽게 여긴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전해온다.』
죽계천 건너편의 다음지도상 소백산자락길 첫 자락 출발지인 '영주 선비촌'은 영주 지역의 고택을 재현해 놓았는데, 죽계천을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다. 네이버지도는 소백산자락길 출발지를 소수서원 입구로 하고 있다.
금성대군신단 입구로 돌아나와 소수서원을 향하는데,
좌측에는 '단종애사 대군길(8.7km)'와 '회원안향 도동길(4.6km)로 구성된 '선비의 길' 안내판이 있고,
초록의 이끼가 양탄자인 듯 보이는 소수서원 울타리 옆길을 따르면,
소수서원 입구에 도착하는데 입장료 3천 냥이 없는 가난을 한탄하며,
<소수서원(紹修書院)>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1542년(중종 37)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을 설립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명종에게 청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함께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 그 외에 노비를 하사 받았다.
무료인 소수서원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버스로 향하며,
백두산우회 둘레길의 첫걸음을 마무리한다.
오늘 새벽 트레킹 출발지였던 희방사역 인근의 풍기온천으로 가서 땀을 씻고,
희방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폭포숯불돼지갈비집으로 이동하여,
무더위에 적당해 보이지 않는 숯불돼지갈비에 가장 적합한 션한 소맥으로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최소한 여름철에는 다시찾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귀갓길에 오른다.
백두대간을 시작으로 20여 년 만에 마루금 산행을 종료하고,
소백산자락길을 시작으로 끝나지 않을 둘레길 트레킹을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둘레길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NGO에서도 개설하는데,
모두가 관리보다는 새로운 둘레길 만들기에 여념이 없어서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만드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제부터는 정말 열정을 가지고 걷지 않으면
언젠가는 걷지 못하고 남은 길이 너무 많음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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