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관악지맥 1차(분기점/백운산~갈현/찬우물) (경기도 의왕시, 용인시, 성남시, 과천시)
산 행 일 : 2025. 02. 12.(수)
산행코스 : 의왕 백운사입구(87번종점) ~ 통신대 헬기장 ~ 관악지맥 분기점 ~ 백운산(567m) ~ 462.2봉 ~ 422.5봉 ~ 고분재 ~ 바라산(428m) ~ 365희망계단 ~ 바라재/복골재 ~ 백운호수 갈림길 ~ 우담산(425m) ~ 영심봉(369m) ~ 통신탑 ~ 하오고개 ~ 원터마을 갈림길 ~ 운중저수지 갈림길 ~ 국사봉(540m) ~ 청계사갈림길 ~ 이수봉(545m) ~ 헬기장 ~ 망경대 갈림길 ~ 전망대 ~ 청계사 갈림길 ~ 절고개 ~ 389봉(헬기장) ~ 과천 매봉(369.3m) ~ 350봉 ~ 과천청사역 갈림길 ~ 안부(중청계 갈림길) ~ 259.2봉 ~ 235봉 ~ 이미마을 갈림길(우측 과천시 방향으로) ~ 안부 갈림길 ~ 제비울미술관 울타리 ~ 샘터길 도로 ~ 지하차도 ~ 제비울길 ~ 재비울지하차도 상부 도로 ~ 돈우리가든 ~ 과천리오포레데시앙아파트 ~ 83.9봉(우회) ~ 갈현(찬우물 정류장) (지맥 18km + 어프로치 1.8km = 19.8km, 9시간 소요)
산행참석 : 5 명.
<산행지도>
◆ 관악지맥(冠岳枝脈) (한남)
▶개요
한남정맥 백운산에서 분기하는 관악지맥은 청계산과 관악산 그리고 국립묘지를 품고 있는 서달산을 거쳐 동쪽으로는 탄천(양재천 포함), 서쪽으로는 안양천(신도림천 포함)을 가르고 한강에 입수한다. 물줄기의 길이와 유역 면적으로는 탄천이 길이 35.6km, 유역면적 303㎢로 안양천보다 조금 큰 하천이나, 산줄기의 길이로는 관악산에서 우면산을 지나 탄천이 한강과 만나는 삼성동 청담교까지 보다는 관악산에서 영등포 들판을 지나 양화동 염창교에서 안양천이 한강을 만나는 산줄기가 더 길므로 안양천쪽을 입수점으로 잡아 관악지맥으로 정의하는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안양지맥이라 부른다.
관악지맥 (冠岳枝脈)은 한남정맥 백운산(566m)에서 북쪽으로 분기하여 바래산(427m), 학현(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국사봉(542m), 청계산(615m →0.9), 매봉(369m), 관악산(632m)을 넘어 남부순환도로에 내려서부터는 도심지로 까치산근린공원, 국립묘지 뒷산인 서달산(176m), 신길동 서울지방병무청, 문래역을 지나 안양천의 동쪽 끝에 이르는 도상거리 34.8km의 산줄기다. 혹자는 관악산 정상을 내려서서 남태령과 우면산을 거쳐 탄천의 서쪽 끝으로 가기도 하지만 이는 각자의 몫이고, 신산경표(박성태저)는 북악산.인왕산을 바라보면서 안양천의 동쪽 끝으로 가는 산줄기를 따르고 있다.
▶ 코스
관악지맥 분기점(564m) ~ 백운산(567m) ~ 바라산(428m) ~ 우담산(425m) ~ 하오고개 ~ 국사봉(540m) ~ 이수봉(545m) ~ 절고개 ~ 매봉(369m) ~ 갈현고개(찬우물) ~ 관악산(632m) ~ 국기봉(333m) ~ 까치고개 ~ 서달산(179m) ~ 중앙대후문 ~ 고구동산(108m) ~ 장승배기역 ~ 용마산(90m) ~ 문래역 ~ 영등포구청역 ~ 목동교(안양천) ~ 염창교(안양천합수점)
▶ 개념도
수락지맥 산행을 마치고 진행 중인 천마지맥 능선의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상태라 판단하고 다른 지맥을 검토하던 중, 목 디스크로 배낭을 메면 안 된다는 총무님과 함께하려 예전 총무님이 산책 삼아 다녔던 광청종주 구간인 관악지맥 산행을 먼저 진행하기로 한다. 희망하는 분들의 일정을 감안하여 화요일에 예정했던 산행일을 수요일로 바꾸니 산행 예정일에 비 또는 눈이 예보되었지만, 눈이 내린다면 모처럼 눈 산행을 할 수 있어서 좋을 것이고 비가 오더라도 양이 많지 않아 문제 될 게 없다며 예정대로 관악지맥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산행 들머리로 예정한 의왕 백운사 입구 주차장으로 가는 87번 버스를 탑승할 수 있는 전철역은 산본역이기에, 아침 8시에 산본역에서 만나 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백운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며 산행 준비를 하는 사이에 유 박사님과 손 사장님이 도착하여 예정했던 다섯 명이 모두 산행준비를 마치고,
<백운사(白雲寺)>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백운산 아래 청풍김씨(淸風金氏) 마을을 지나 백운산 자락을 올라간 지점에 위치한 사찰이다. 백운산의 서쪽 중턱으로 산은 의왕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옛날 영평현(永平縣)에 속해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인 백운사는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4-1번지 백운산(白雲山) 서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절이 위치한 백운산은 일대에서 가장 높고 큰 반면 부드러운 능선과 계곡을 지니고 있어 어머니 품과 같이 편안한 느낌을 자아낸다. 백운사는 그러한 산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백운사는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창건연도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창건 이후 절의 역사도 자세히 전하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동안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로 계속 법등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고종31(1894년)에 산불로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의 백운사는 절 아래 마을에 살던 청풍김씨가 고종32(1895)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창한 것이다. 절의 내력은 명확하지 않지만 백운사는 근대 한국불교사를 대표하는 선승인 금오(金烏) 대선사가 머물면서 수행승들을 지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의왕 백운사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관악지맥 산행을 시작한다.
백운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100여 미터 진행하다가 별다른 표식이 없는 우측 길흔적을 찾아들어,
우측 지능선으로 이어진 뚜렷한 수레길을 따라 지능선에 올라,
사면으로 이어지는 수레길을 두고 좌틀하여 묘지들이 있는 지능선 등로로 진행하면,
급하지 않은 소나무숲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고도를 높여가자 쌓인 눈의 깊이가 깊어지며 경사도 가팔라져,
두텁게 껴입었던 옷은 벗고 배낭에 넣고 왔던 아이젠은 꺼내어 착용한다.
흰 눈으로 덮인 급하지 않은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다소간 가팔라지며 가이드 로프도 설치되어 있고,
통신대 헬기장 직전에서 지지대고개로 이어지는 한남정맥 등로에 접속하며,
넓은 통신대 헬기장을 지나게 되는데,
옅은 안개로 희미하게 보이는 백운산 정상을 향해,
열린 철망문을 통과하여 통신대 방향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능선을 차지한 군부대 입구에서 우회하여 오르면,
군인들의 보행로로 쓰이는지 정비된 등로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새벽에 내린 눈이 멋진 설경을 감상하며,
가파른 침목 계단길을 올라,
백운산 정상을 차지한 군부대를 우회하는 좌측 백운산 정상석 봉우리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백운산 정상을 차지한 군부대 우회길을 따르면,
이내 한남정맥에서 관악지맥이 분기하는 백운산 정상 군부대 울타리 아래의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여지없이 이곳에도 '준.희' 님의 '관악지맥 분기점 산패가 걸려 있고,
관악지맥 분기점 산패 아래에서 인증을 남기고 본격적인 관악지맥 걷기를 시작한다.
군부대 북측 울타리를 따라 아무도 지난 흔적이 없는 눈덮인 등로에 발자국을 세기며,
백운산 정상석 직전의 팔각정을 지나는데 앞서 오른 총무님이 추위에 떨고 있다며 불평이 늘어졌고,
한남정맥 안내도와 백운산 등산 안내도가 있는 백운산 정상석 봉우리에 도착하여,
<백운산(白雲山, 567m)>
경기도 의왕시와 용인시, 수원시 등 3개 시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세가 깊고 험하여 서울 근교에서는 관악산에 버금가는 등산코스로 알려져 있다. 산이 높고 산세가 험해 항상 흰 눈에 덮여 있고 산봉우리에 흰 구름이 항상 끼어있어 백운산이라 한다. 백운산 정상은 이곳이 아니고 조금 떨어진 통신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나, 그곳은 접근할 수가 없기에 이곳이 정상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산 중에서 가장 많은 이름을 가진 백운산(白雲山). 산봉우리에 늘 구름이 쌓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백운호수로 불리는 백운저수지를 끼고 있고, 백운저수지 근처는 라이브 카페촌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백운산은 흔히들 등산 마니아들에게는 '삼관우청광'이라는 5 산 종주코스로도 유명하다. 우리 백두들은 10여 년 전쯤에 한두번 걸었던 코스인데, 그 이후로 무리하지 말자는 중론으로 보신 산행만 열심히 하고 있다.
다시한번 형식상의 관악지맥 출발 기념사진을 남긴다.
관악지맥 분기점인 백운산을 뒤로하고 광청종주 능선 청계산 방향의 지맥길로 들어서니,
겨우내 내린 눈이 두텁게 쌓인 데다가 간밤에 내린 눈까지 등로의 흔적을 덥고 있고,
흰 눈에 첫 발자국을 새기며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다가 헬기장인듯한 넓은 공터를 지나,
잠시 올라 지난 폭설 때 꺾인 소나무가 방치된 462.2봉쯤을 지나서,
다소간 완만해진 능선 내림길을 따라 용인시 경계 둘레길 이정표의 바라산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급하지 않은 짧은 오름길을 오르면,
멋들어진 소나무에 벤치 쉼터가 있는 422.5봉을 지나게 된다.
눈이 두텁게 덮여 계단 구분이 되지 않는 급경사의 데크 계단길을 내려서니,
'계단길에서 스마트폰 사용은 위험하다'는 107계단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이내 이정표와 쉼터가 있는 고분재에 도착하여,
<고분재(古盆峙, 320m)>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고분가리골과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 고산약수터 사이의 고개이다.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의 맨 윗동네인 고분동 능선에 있는 고개로, 고분동의 유래는 아주 옛날 이 마을에서 토기(土器)를 만들었다고 해서 ‘옛 고(古)' '질그릇 분(盆)’이라 해서 고분동이라 불렀고, 마을 위의 고개인 고분재는 고분동에서 의왕시 의일동(지금은 학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잠시 배낭을 내리고 따스한 커피를 나누는데,
간밤이 내린 눈에 우리보다 먼저 발자국을 남기려는 여성 산객 한분이 휘리릭 지나간다.
10여 분간 커피를 나누며 얼어오는 몸을 녹이다가 앞질러간 여성 산객의 발자국을 따라 잠시 오르니,
데크 전망쉼터가 설치된 바라산 정상을 지나게 된다.
<바라산(望山, 428m)>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과 의왕시 학의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바라산은 의왕 의일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날 달을 바라보던 산으로 발아산(鉢兒山) 또는 망산(望山)이라고도 불렀으며, 망산의 뜻인 "바라본다"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개국공신 조준의 아우 조윤(趙胤)은 자신의 형과 달리 조선을 섬기지 않고 망해버린 고려왕실을 그리워하는 충신이었다. 그는 스스로 망국의 신하됨을 부끄러이 여기어 이름을 견(犬:개라는 뜻)이라고 고치고 개는 죽어도 주인을 잊지 않는다는 식으로 청계산에 숨어들어 산에 올라 옛 수도인 개경을 바라보며 하루도 쉬지않고 통곡을 하니 그가 앉았던 곳이 청계산의 주봉인 망경대(望京臺)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조선조 3대 임금 태종)이 찾아와 출사(出仕) 할 것을 수차례 권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이곳 바라산에다 초막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조견은 청계산에서 바라산으로 옮겨와 왕을 그리며 개성을 바라보면서 망국의 신하됨을 부끄러워하며 침식을 잊은 채 울고 울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안개구름이 짙어 뵈는 게 없는 바라산을 뒤로하니,
바라 365 희망계단 설명판이 나타나며,
<바라 365 희망계단>
바라산을 오르는 이곳은 365개의 계단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이곳 365 계단은 태양 황도상 위치에 따라 365일을 15일 간격으로 계절을 구분한 24절기를 소재로 하여, 바라산에 오르고 내리는 모든 등산객이 365일 건강하고 희망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정하였으며 계단 우측과 좌측에는 24절기에 대한 의미와 내용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365 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내리면서 1년 365일을 생각하는 소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의왕시)
계단 난간에 24절기 설명판이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가,
폭설에 허리가 꺾인 소나무가 즐비한 능선길을 잠시 내려가면,
골짜기처럼 깊게 파인 바라재를 지나게 된다.
<바라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石雲洞)에 있는 고개다. 대부분 석운동은 잘 모르고 운중동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있는 곳으로 부촌으로 알려진 분당구에서도 가장 오지로 알려진 마을이다. 도루니, 고갯말, 논골, 바리산리 등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 청계산과 백운산 사이에 있는 산촌마을이다.
석운동은 도루니, 되루니, 돌운, 도롤리및 도륜리 등으로 불렸는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구름이 자주 끼고 돌이 많아서 석운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또 예전에 길 가던 선비가 해가 저물어 이곳에 머물고 갔는데 이로 인하여 일이 잘못되어 서운하게 되었다고 하여 ‘서운리’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조선의 학자 이경석이 낙향하여 이곳에 살면서 도륜리나 수신동으로 불렀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는 뜻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급하지 않은 눈 덮인 등로를 따라 송전탑을 지나,
좌측 백운호수 갈림길인 ‘제4구간 백운호수 갈림길 능선’이라 표시된 이정표의 청계산 방향으로 진행하고,
또 다른 좌측 백운호수 갈림길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져 오르면,
널찍한 공터에 벤치가 설치된 우담산/발화산(424.2m) 정상에 도착하여,
<우담산(優曇山, 424.2m)>
경기도 의왕시와 성남시 분당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나온 백운산, 바라산과는 달리 변변한 표시석이나 설명도 없고 그냥 이정표에다 안양산악회에서 만든 '우담산(발화산)' 표시판이 걸려있다. 정상은 꽤나 넓은 공터에 벤치가 있고, 관악지맥 산패도 걸려있다.
자세한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불교에서 말하는 '상서로운 우담바라'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하는데, 불경에서 말하는 우담바라는 여래(如來)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날 때만 핀다는 상상의 꽃이다. 한자로는 優曇婆羅, 優曇波羅, 優曇跋羅華, 優曇鉢華, 優曇華 등 다양하게 표기하고 있다. 영서(靈瑞)·서응(瑞應)·상서운이(祥瑞雲異)의 뜻으로, 영서화·공기화(空起花)라고도 한다. 3천 년 만에 한 번 피는 신령스러운 꽃으로, 매우 드물고 희귀하다는 비유 또는 구원의 뜻으로 여러 불경에서 자주 쓰인다.
불경에 의하면, 인도에 그 나무는 있지만 꽃이 없고, 여래가 세상에 태어날 때 꽃이 피며,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면 그 복덕으로 말미암아 감득해서 꽃이 핀다고 하였다. 때문에 이 꽃이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은 상서로운 징조라 하였다. 또 여래의 묘음(妙音)을 듣는 것은 이 꽃을 보는 것과 같고, 여래의 32상을 보는 것은 이 꽃을 보는 것보다 백만년이나 어렵다고 하였다. 여래의 지혜는 우담바라가 때가 되어야 피는 것처럼 적은 지혜로는 알 수 없고 깨달음의 깊이가 있어야 알 수 있다고도 하였다. 우담바라는 보통 한송이만 피어 있는데 주위에서 많이 발견되는 일명 우담바라는 진짜 우담바라가 아니라 곰팡이나 풀잠자리알이다. 보통 풀잠자리알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담바라=풀잠자리알 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다. (펌)
배낭을 내리고 단촐한 점심 식사를 하려는데,
정월대보름이라 그런지 각자의 배낭에서 내어 놓는 먹거리들이 거의 뷔페 수준이다.
우담산을 뒤로하고 내려서서,
그윽한 설경을 만끽하며 완만한 능선길을 이어가다,
점심을 먹은 후라 완만한 오름길조차 쉬엄쉬엄 올라,
좌측 하우현 성당 방향 능선 갈림길에서 우측 하오고개 방향으로 진행하여,
이내 삼각점이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 영심봉(367.1m)을 지나고,
<영심봉(369m)>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과 청계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지형도에 표시되지 않은 봉우리다. 하오고개에서 올라와 우담산 방향과 청계 방향으로 갈라지는 갈림길 지점이다.
이내 커다란 통신탑이 자리를 잡고 있는 367.2봉을 우회하여 지나니,
전방으로 또다른 KBS 중계탑이 자리한 봉우리 직진에서,
우측 응달산 방향 갈림길을 두고 중계탑봉을 좌회하여 지나,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얼어붙은 눈길 위에 간밤에 내린 눈이 덮여 미끄럽기 그지없다.
급경사 능선길을 따르다가 하오고개 절개지 상단쯤에서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로 들어서서,
가이드 로프까지 메인 급경사 계단길을 내려가면,
성남누비길 태봉산길 5구간이 끝나고 청계산길 6구간이 시작되는 게이트를 지나게 되고,
<태봉산길>
태봉산(173.2m)은 한국지명총람(1985)과 성남시사(1993)에 따르면 조선 인조의 태가 이곳에 묻혀있다 하여 태장산 또는 태봉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태봉산은 풍수지리상 길지로 여겨져 산의 정산부에는 세조 때 정난공신과 좌익공신 3등에 녹훈된 이예장의 묘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홍민의 묘가 있다.
이내 멋들어진 육교가 설치된 하오고개를 지나게 된다.
<하오고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과 의왕시 청계동 원터 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광주목의 영역이 현 안산시 반월동 사리까지 이르렀는데 어느 때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하루는 사리에 사는 염부들이 염전(鹽田)에서 작업을 하다가 사소한 일로 시비가 벌어지자 이를 가리기 위해 당시 관아가 있던 경안(현 광주시)으로 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서로 하우(和解)를 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 고개를 하우고개(하오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의왕시에서는 학고개 또는 학현(鶴峴)이라 부르는데, 운중동에서는 하오개·하오고개·화의고개 등으로 불리며 학현이란 명칭은 이웃한 의왕시 청계동 점말에 있었던 김해김씨 종산(宗山)이 풍수지리상 학이 거동하는 형국이며, 인근의 안동김씨 묘역도 학의 혈(穴)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하여 학현 좌우에 숨어 살았다고 하며, 고개 너머 청계동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자 한덕운(토마스)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시대 동양원이라는 역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인덕원과 판교를 연결하는 지방도 57호선이 지나가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도 청계터널을 통과하여 이 구간을 지나간다.
육교를 건너 가파른 데크 계단을 지나 발자국이 이어진 숲길로 들어,
예전에 비해서는 다소 줄어든 듯 보이는 공동묘지를 지나,
더욱 가팔라진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다가,
가파른 침목 계단도 오르고,
등로에서 우측으로 살짝 떨어진 송전탑을 지나며,
다소간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라,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 잠시 더 오르면,
좌측 하우현성당이 있는 원터마을 방향 갈림길이 있는 390.6봉을 지나게 된다.
<원터(院址) 마을>
잠시 전에 지난 하오고개 서쪽 아래에 있는 원터(院址) 마을은 옛날 광주, 인덕원, 과천을 잇는 동양원(東陽院)이란 역이 있었다 하여 처음에는 역원터(驛院址)라 했다가 일제강점기부터 원터(院址)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1880년대에 하우현 성당이 생기면서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현재 주민의 대다수가 천주교인이며 전주이씨와 밀양박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원터마을 갈림길이 있는 390.6봉을 내려서서,
안부 사거리 갈림길을 지나,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풍에 넣어 두었던 겉옷을 꺼내어 입고,
커다란 돌탑이 연이어진 가파른 통나무 계단길을 오르다가,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족적을 따라 앞을 막아서는 암봉을 좌회하여 올라,
국사봉이 40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 미끄럽고 가파른 암릉길을 잠시 더 오르면,
오리무중의 작은 설국 가운데에 정상석만이 우뚝한 국사봉 정상에 도착하게 되는데,
<국사봉(國思峰, 540m)>
고려말의 충신 조견이 이 봉우리에 올라 나라(고려)에 은혜를 입었다며 개성을 향해 통곡하였다 하여 국사봉(國思峰) 또는 국은봉(國恩峰)의 이름으로 불려오다가, 이 봉우리 밑에 있는 운중동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개원되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들러 국은봉(國恩峰)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등로에는 보이지 않던 몇몇의 등산객이 벤치에 앉아 쉼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리 많이 내려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라는 투덜거림과 함께 국사봉을 내려서서,
밋밋한 능선 봉우리인 455.3봉쯤을 지나고,
좌측 청계사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
완만한 오름길을 따라 또다른 좌측 청계사 방향 갈림길 이정표와 벤치 쉼터를 지나,
그리 급하지는 않지만 국사봉을 오르는데,
눈길에 많은 체력을 소모한 탓인지 무척이나 힘겹게 느껴지고,
마침내 늘 붐비던 산객들의 자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가 신비감을 더하는 텅 빈 이수봉 정상에 도착한다.
<청계산 이수봉(二壽峰, 545m)>
서울, 성남, 용인, 과천, 의왕의 5개 시에 걸쳐있는 청계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산천조에 청계산(淸溪山)이라 되어 있고, 과천현 산천조에는 청계산이라 쓰고 일명 청룡산(靑龍山)이라 한다고 쓰여있다. 과천읍지에도 이러한 내용이 있는데, 좌청룡 우백호의 개념으로 오른편에 있는 관악산을 백호산이라 부르고, 왼편에 있는 청계산을 청룡산이라 불렀을 것이다. 17세기에 세워진 청계사 사적비 등 여러 곳에 청룡산이라 되어 있고, 택리지 산경표 대동여지도 등에는 청계산(靑谿山)이라 되어 있다. '맑을 청(淸)'자가 아니라 '푸를 청(靑')자를 썼고, 시내라는 뜻이 같기는 하지만 '골 곡(谷)'자가 붙은 '시내 계(谿)'자를 쓴 것이다. 옛날 청룡이 이 산의 허리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가서 청룡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 이수봉은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고 명명하였다. 여러번 올랐던 이수봉이지만, 관악지맥 길에 오른 안개 자욱한 이수봉은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평소와 달리 아무도 없는 평탄한 청계산 능선길을 따라,
"조견 선생과 망경대" 설명판이 세워진 헬기장을 지나,
<조견 선생과 망경대>
이곳에서 보면 망경대가 잘 보이는 곳이지만 오늘은 짙은 안개와 구름으로 인해 보이질 않는다. 조선조 창건의 일등공신인 조준의 아우 조윤은 형의 변절과 망국과 동시에 죽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부끄러워하여 개와 같다는 뜻으로 '개 견(犬)'부가 붙은 '성급할 견(狷)'(성급하다, 절의를 지켜 뜻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를 '개'를 따른다는 뜻으로 종견이라 했다는 것이다.
만경대가 망경대로 이름이 바뀐 것도 이색 등 고려 유신들이 이 바위봉우리에서 망한 고려의 서울(개성)을 바라보며 그리워한 터라 해서 정여창이 고쳐 불렀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는 청계사를 제목으로 지은 이색의 시가 있다. 또한 망경봉 서남쪽에 있는 천연동굴 마왕굴은 한때 고려 말의 조윤과 정여창이 은거했던 굴로 알려져 있고, 매봉과 망경봉 사이에 있는 혈읍(血泣)재는 피눈물을 흘리며 운다는 뜻으로 정여창이 청계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무오사화를 겪고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한 데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
늘 있던 지나가는 과객 1, 2, 3가 없는 텅 빈 청계산 등로를 따라,
우측 석기봉 망경대 방향 갈림길을 지나 직진의 관악지맥을 따르면,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아래로 서울 대공원과 맞은편의 관악산, 모락산, 수리산이 모두 다 보이는 전망 좋은 벤치 쉼터가 나오는데, 10여 년 전 이곳에서 옆지기와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다가 지나가던 회장님께 딱 걸렸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급경사의 내리막에 설치된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지맥길은 직진의 청계사 방향 내림길을 두고 우측 사면 과천 매봉 방향으로 진행하여야 하는 지점으로,
앞서 진행한 두 분이 직진의 청계사 방향으로 진행하여 30여 분이 넘는 대형 알바를 시작하였고,
우측 과천 매봉 방향 능선길을 따라 으스스한 상어머리 형상의 바위를 지나,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라,
우측 서울대공원 방향이 철망 울타리로 막힌 절고개를 지나고,
<절고개>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의 청계사와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 서울대공원 사이의 고개이다. 절고개란 청계사 위쪽에 있는 고개라 해서 붙여진 지명인 듯하다.
청계사는 청계산 남쪽 태봉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의 말사로, 경기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 《봉은본말지》에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 평양부원군인 조인규 (趙仁規)가 사재를 들여 중창하였고, 가문의 원찰로서 후손들이 약 500년간 중창을 거듭하였고 조선의 연산군 때 도성 안의 사찰을 폐하고 관청을 세우자 불교 쪽에서 선종의 본산으로 정해졌고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이색(李穡), 변계량(卞季良) 등 당대 문인들이 즐겨 찾으며 절을 주제로 시를 지었으며 칩거했다. 경내에 신라의 석등과 부도 조각 일부가 남아 있으며, 극락보전과 종각, 삼성각, 산신각, 수각 등 3동의 요사를 비롯해 10채의 건물이 있으며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이 입산출가하고 수행했으며, 이후 1955년 월산, 월덕, 탄성, 월탄 스님, 종상 스님 등 금오 스님을 모시면서 가람을 수호하고 주석하신 유서깊은 고찰이다. 경허 스님의 출가지로 경허선사의 선맥을 이은 만공, 보월, 금오, 월산 선사의 체취가 경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앞서간 두 분이 보이지 않아 은근히 걱정하며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는데,
손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청계사로 알바 중이라기에 청계사에서 바로 절고개로 오라고 해 놓고는,
388.7봉 헬기장 직전의 쉼터에서 엄습하는 한기와 싸우며 알바 간 분들을 기다린다.
기~인 힘겨운 알바를 마치고 마침내 도착한 분들과 함께,
우측 서울대공원역 방향 과천 매봉 우회로 갈림길을 지나,
바위들도 듬성듬성 나타나는 가팔라진 오름길을 잠시 더 오르면,
널찍한 데크 전망 쉼터에 오석의 '청계산 매봉' 정상석이 자리한 과천 매봉에 도착하는데,
<과천 매봉(鷹峰, 369.3m)>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과 의왕시 청계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벤치가 설치된 데크목 광장 쉼터에 “청계산 매봉 해발 369.3m”라는 오석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청계산에는 2개의 매봉이 있다. 혈읍재와 옥녀봉 중간에 매봉(582.5m)이 있는데, 그곳은 청계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 망경대이나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등산객이 접근할 수 없기에 그곳 매봉이 청계산의 주봉 역할을 하여 사람들은 그곳을 '청계산 매봉’이라 부르고, 이곳을 ‘과천 매봉‘이라 부른다.
매봉은 흔히 한자로 응봉(鷹峰)이라 쓰고 예전에 매(鷹)가 살던 봉우리라는 설명이 따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흔치 않고 사실은 마을 앞 눈에 제일 자주 띄는 우뚝한 봉우리를 그냥 ’뫼(山)‘라 한 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고 하며 그 뫼가 어느 날부터 뫼봉이 되었다가 매봉이 되었다 한다. 선비들이 지명을 기록하자니 매(鷹) 자를 써서 응봉(鷹峰)이 되었다는 것이다.
짙은 눈구름으로 과천시와 그 너머의 관악산은 물론 지척의 바로 아래 과천시 문원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과천시 문원동(文原洞)>
정상에서 우측 능선으로 내려서면 과천시 문원동으로 내려서게 된다. 과천시 문원동은 의왕시 청계동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문원동은 조선 시대에는 과천군 군내면 외점동, 문원동, 교동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흥군 과천면 문원리라 하였다. 1982년 경기도 과천지구출장소에 편입되고 1986년 과천시 문원동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막계동은 조선 시대에는 과천군 군내면 막계동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라 하였다. 1982년 경기도 과천지구출장소에 편입되고 1986년 과천시 막계동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호구총수』의 과천현 현내면 문원리(文原里)라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향교말(校洞)·다락터(樓基)·홍촌말(洪村)·새술막(外店)·구리안(九里內)·베레이(또는 배랭이, 別陽)를 합해 시흥군 과천면의 문원리로 편제되었다.
1982년에 원문리의 북쪽 지역에 중앙·별양·원문의 3개 지역이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행정단위가 되었고, 1986년에 과천시로 승격되면서 문원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문원리 지명은 향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향교에 있던 대성전(大成殿)인 문묘(文廟)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문원리의 중심 마을은 향교말·홍촌말·새술막이었는데, 현재 이곳의 대부분은 중앙동에 속해 있다.
엄습해 오는 한기에 서둘러 과천 매봉 정상을 되돌아나와 송전탑 옆으로 이어진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면,
우측 과천정부청사역 방향 갈림길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게 되고,
이내 네이버 지도상 "매봉산"으로 표시되어 있고 삼각점도 있는 349.4봉을 지나,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다가,
다시 좌측 정부과천청사역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사기막골 갈림길을 지나고,
<사기막골>
사기막골은 지금의 서울대공원 쪽에 위치한 곳으로 도자기에 사용되는 백토가 많이 생산된 곳이다. 과천 일대에서 확인된 도요지로는 관문동 도요지, 관악산 분청자요지1, 관악산 분청자요지2, 중앙동 도요지, 문원동 사기막골 백자요지1, 문원동사기막골 백자요지2, 막계동 분청자요지 등이 있다 고 한다.
침목 계단이 설치된 급내림으로 바뀐 내림길을 내려서니,
좌측 중청계 방향 갈림길 안부를 지나 직진의 이미마을 방향 계단길을 오르게 되고,
벤치 쉼터가 있는 259.2봉에 올라서,
언덕 수준의 작은 봉우리를 넘으며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이어가면,
직진의 이미마을 방향 능선길을 두고 우틀하여 과천시 방향으로 진행하여야 하는데,
이곳 갈림길 직전의 능선분기점에서 우측 능선이 지맥이지만 등로가 없어서 이곳에서 우틀하여 진행하게 된다.
<이미마을 갈림길>
갈림길 좌측은 의왕시 청계동 방향이고 우측은 과천시 문원동이다. 지맥은 직전의 능선 분기봉에서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게 되지만 등로가 없어서 직진의 능선을 따라 내려서다가 이곳에서 우측 과천시 방향으로 들어서서 사면을 따라 지맥 능선으로 다시 접속하게 된다.
이곳에서 직진의 능선길을 따라 의왕시 포일동에 있는 이미마을은 진터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순흥안씨와 나주정씨의 오랜 세거지로 마을에 큰 나무(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어 마치 숲을 이룬것과 같다 하여 ‘임이(林二)’라 불렀다고 해서 임이마을이라고 불렀는데 변음 되어 이미마을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사면으로 이어진 뚜렷한 등로를 따라,
다시 지맥 능선에 접속하니 뚜렷하고 호젓한 능선길이 이어지고,
좌.우로 뚜렷한 등로가 나있는 갈림길에서 직진의 능선길로 들어서면,
노오란 깔비가 푹신하고 표지기도 걸린 희미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좌측 철망 울타리 안으로 정자가 보이는데 제비울미술관인 듯하고,
<제비울미술관>
제비울 미술관은 경기도 과천 청계산 자락의 제비울 마을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2002년 3월 문을 연 이 미술관은 과천에서 14대째 살고 있는 신창건설(현 LIG건설에 합병) 김영수 전 대표가 사재 200여 억 원을 들여 어린이와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했다. 대지 2만 9000여 ㎡에 건물면적 2300여 ㎡, 지상 3층의 미술관 건물은 전통 한옥 양식과 현대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전시실 3개와 야외조각공원, 세미나실, 산책로 등을 갖추고 있다.
미술관은 설립 취지에 맞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기획전을 집중적으로 개최하고, 방학 때는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한 현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소외되는 관람자의 입장을 배려해, 현대 미술을 쉽게 풀어 원활한 소통을 이루는 데에도 역점을 둔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 미술을 중심으로 의미 있는 기획전을 다양하게 열어 왔다. 젊은 작가를 위한 개인전 지원과 해외 미술흐름을 반영한 국제전 등을 개최하고, 전시관을 지역 미술인들에게 무료로 개방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미술관은 설립자가 경영하던 신창건설이 2009년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대출금을 못 갚고 운영난을 겪었고, 경매 절차를 밟았다.
좌측 묘지가 자리한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며 과천 지식정보타운 아파트숲이 내려다 보이더니,
좌틀하여 사면으로 내려가는 등로를 따르면,
과천시 문원동과 갈현동 경계 능선을 넘는 도로에 내려서서,
길 없는 직진의 능선 방향을 두고 좌측 도로를 따라 우회하여 진행하게 된다.
좌측 제비울길을 따라 건너편으로 과천시 자원정화센터의 높은 굴뚝이 보이는 봉담과천고속도 지하차도를 통과하여,
바로 우측 제비울길로 들어서서,
어울더울 과천본점 앞을 지나는데 주차관리원 아저씨가 앞쪽 도로가 막혀 길이 없다고 알려주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서 진행 방향 도로를 잠시 더 따르면,
새로 난 도로가 따르던 도로를 막아버려 길이 끊어져 있지만 도로 경사지를 올라,
신설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차량통행이 뜸한 제비울지하차도 위 도로를 건너,
좌측이 공사장으로 막힌 구리안로에 내려서서 우측 과천시 문원동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과천시>
과천시는 경기도의 중앙부에 있는 시로서 서울특별시의 관악구·서초구와 경기도의 성남시·의왕시·안양시와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과천현 건치연혁 항목에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일설에 동사힐(冬斯盻)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 때 율진군으로, 고려 초기에 과주(果州)로, 조선 태종 13년(1413)에 과천(果川)으로 고쳤다."라고 나온다. 조선 시대의 과천현은 현재의 과천시·안양시·의왕시의 대부분과 서울특별시의 동작구·서초구 등을 관할하였다. 현재의 과천시 영역 대부분은 조선 시대에 과천현의 현내면에 해당되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동면의 주암리를 합해 시흥군 과천면으로 편제되었다.
1979년에 과천지구 지원사업소가 설치되었으며, 1982년 경기도 과천지구 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82년부터 정부 제2과천청사와 서울대공원이 들어서고, 1986년에 과천시로 승격되었다. 중앙동·갈현동·별양동·부림동·과천동·문원동의 6개 행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나름 찾는 단골이 있다는 돈우리가든 앞을 지나,
우측 길 없는 지맥능선을 지나쳐 봉담과천고속도로 지하차도 직전에서 좌측 지식정보타운 아파트 공사장으로 들어,
지맥능선을 우회하여 지나,
우틀하여 오피스텔과 과천리오포레데시앙 아파트 사이로 진행해도 되지만 지맥능선 방향으로 직진하여,
공사장 공터를 통과하여 도로에 접속하여서는,
지맥 능선을 정면으로 보이는 숲으로 이어지지만 길흔적이 보이지 않아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좌측 숲이 끝나는 사거리에서 좌틀하여,
좌측에 지맥능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이어가면,
갈현 동측 아래의 찬우물(冷井)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관악지맥 1차 산행을 마무리한다.
<갈현고개(葛峴)>
과천시 갈현동에서 안양시 관양동 부림말〔富林洞〕로 넘어가는 고개다. 47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칡이 많아 갈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갈고개의 '갈'은 땅이름에서 갈라짐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갈현(葛峴)은 순우리말 '가루개'에 대한 한자 표기였는데, 후에 한자 발음이 그대로 행정단위의 이름이 되었다. 가루개란 고개의 이름이 그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쓰인 것이며, 『조선지형도』에 갈현리란 한자 위에 일본의 가타카나로 '가루개'란 발음이 적혀 있다.
<찬우물의 지명유래>
조선조 22대 임금인 정조대왕(1752~1800)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원인 수원 현륭원에 능행(陵幸)할 때마다 과천을 통과했는데, 어느 날 이곳에 이르자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한 신하가 근처 찬우물의 우물을 떠다 바치니 이 물을 마시고 물맛이 유난히 좋다 하여, 이때부터 이 우물에 벼슬을 주어 “당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가자당상(加資堂上) 벼슬을 제수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가자당상”이란 정3품 이상의 품계로 왕이 직접 관리하는 곳을 의미하며 이런 연유로 이 우물을 가자우물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우물은 또한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하여 찬우물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원래는 암반의 틈새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로 이루어져 우물로 솟아나는 약수로도 유명하였다.
찬우물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 소장님 차로 과천시내의 삼겹살 집으로 이동하여,
흐뭇한 대화와 함께 푸짐한 뒤풀이 시간을 가지며,
다음번 관악지맥 관악산코스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다가,
관악지맥 1차 산행 뒤풀이도 마무리하고는 귀갓길에 오른다.
여러 차래 걷고 올랐던 광청 능선과 청계산이었지만,
관악지맥이란 이름으로 걸으니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
무심코 지나쳤던 주변의 사소한 것조차도 그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더욱 새롭고 소중하다는 느낌이 들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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