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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대간남진 31차(큰재~추풍령) : 알밤과 도토리 풍년의 대간길 y

by 재희다 2014. 9. 28.

 

산 행 지 : 백두대간 31차(큰재~추풍령)

산 행 일 : 2014. 09. 27.(토)

산행코스 : 큰재 ~ 국수봉 ~ 용문산 ~ 작점고개 ~ 묘함산갈림길 ~ 사기점고개 ~ 추풍령

(거리 17.3km)

산행참가 : 23명.

 

<산행코스>

 

 

백두대간숲생태원이 있는 큰재에 일찌감치 도착한 버스에서 쪽잠을 더 청해 보는데, 대간꾼을 실은 또 한대의 버스가 도착하여 한무리의 산꾼들이 지난번 우리가 걸었던 대간 북진길로 사라진다. 잠시 후 우리도 버스에 불을 밝히고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버스가 주차한 큰재 입구의 공터는 경북 상주시 공성면 신곡리 마을로, 예전에는 허름한 민가 한 채가 있었고, 목마른 산꾼이 목을 축이던 그 집에는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살았었으나, 몇해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헐려서 이제는 대간꾼들을 태운 버스가 주차하는 넓은 공터가 되어 있다.

 

 

05:01 큰재 길가에 살던 일명 욕쟁이 할머니로 알려진 분의 집터에 주차한 버스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서늘한 밤공기에 온 몸을 맡긴다.

 

<큰재(320m)>

상주시 모동면에서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포장 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이름이 '큰재'라고는 하지만 고도를 잔뜩 낮춘 탓인지 큰재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백두대간 상의 유일한 학교였다가 폐교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산림청에서 세운 '백두대간숲생태원'이 세워져 있다.

 

 

05:03 큰재에서 신곡리 표석이 있는 도로를 30m 정도 따르다가,

좌측 이정목이 세워진 곳에서 등선으로 오르며 대간 산행을 시작한다.

 

 

05:07 들머리에서 능선으로 오르며 대간길에 나서는 백두들.

 

 

05:23 딱 걷기 좋을 만큼의 경사도를 가진 능선을 따라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05:24 오름길 경사가 가팔라지며 475봉을 향한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05:55 683봉 오름길에 돌아본 큰재 방향.

 

돌아본 공성면 우하리 방향.

 

돌아본 상주시 공성면 오광리 방향으로는 운해가 멋지다.

 

 

06:01 683봉 정상쯤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돌린다.

 

683봉 삼각점.

 

683봉 표지판.

 

선두그룹은 683봉을 뒤로하고 국수봉을 향한다.

 

북서쪽 모동면 상판저수지 방향.

 

서쪽 공성면 신곡리 방향.

 

가야 할 국수봉으로 이어진 대간 능선이 가늠된다.

 

 

06:14 국수봉으로 향하는 등로에 핀 구절초가 힘들어하는 백두들을 위로한다.

 

 

06:20 제법 거친 등로가 잠시 이어지더니,

 

 

06:25 국수봉(웅이산) 정상에 도착한다.

 

<국수봉(鞠水峰, 794m)>
경북 상주시 공성면 영오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최근에 지명이 웅이산(熊耳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물을 뜬다는 의미의 鞠水(국수)라 부르는데, 뜬 물은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내리게 마련이다. 말인 즉 국수봉 또한 물을 가르는(낙동강과 금강을 가른다) 분수령이라는 뜻일 게다. 큰재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 상에 솟은 산으로, 맑은 날 낮에 국수봉 정상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 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청명한 날이면 백두대간 상주, 문경, 김천 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되는 곳이다.

국수봉은 웅이산(熊耳山),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또는 곰산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지는데,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 톱풀, 뺑때쑥, 점을 치는데 썼으며 후에 대나무를 깎아 시초 대신 점을 쳤으므로 서죽(筮竹)이란 말이 생겼음)가 난다 하여 웅이산이라 하고,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가 있다.

 

<국수봉(鞠水峰)에서 웅이산(熊耳山)으로 명칭 변경>

국수봉 정상부에 웅신당(熊神當)이 있어서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내게 되는데, 이에 따라 산의 명칭을 새롭게 정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어서 주민들의 민원으로 상주시는 웅이산으로의 명칭 변경을 국토지리정보원에 신청했고, 2012년 5월 18일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웅이산으로 최종 확정 고시했다.

 

 

뭄이 늦게 풀려는 탓인지, 산행 초반에 늘 힘들어하시는 정여사님이 국수봉을 밟는다.

 

국수봉 정상 이정표 앞에서.

 

웅이산으로 바뀌었는데, 안내판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서쪽 공성면 신곡리 방향.

 

북서쪽 모동면 상판저수지 방향.

 

백학산 방향의 지나온 대간 능선도 가늠된다.

 

 

국수봉 정상석 동편 사면으로 이동하여 바라본 북동쪽 상주시 방향의 운해.

 

동쪽 공성면 신현리의 백운산(631m) 방향.

 

우중앙으로 가야 할 용문산도 조망된다.

 

동쪽 방향 파노라마.

 

 

아침해가 낮게 드리운 구름 위로 떠 오른다.

 

 

06:37 국수봉 정상 인증.

 

국수봉 정상 인증을 마친 백두들은 떠나고,

오늘 산행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고, 운해를 좀 더 감상하며 다시 한번 상주시 방향의 운해를 담아둔다.

 

동쪽 하늘에는 둥근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다.

 

 

06:40 상주시 방향의 운해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한 후,

 

 

06:49 국수봉을 뒤로하고, 용문산을 향한다.

 

 

06:51 용문산으로 이어진 능선에는 싱그러운 풀들이 넘실거리는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용문사 갈림길을 지난다.

 

 

07:06 좌측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와 우측 추풍령면 웅북리를 잇는 옛고개를 지난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걸어온 상주시 구간의 대간길과 이별하고, 이곳부터는 김천시 구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 용문산기도원>

한국 기도원의 원조로, 1947년에 나운몽 목사(당시 장로)가 용문산 기슭에 설립한 기도원(애향숙기도원)은 한국 개신교 기도원의 모체가 되었다.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는 일제 치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출발하였다가, 이후 재건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한다. 현재 전국 3만여 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대기도집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07:26 추풍령면 웅북리 방향 갈림길을 지난다.

 

 

07:34 용문산 정상 도착.

 

<용문산(龍門山, 710m)>
경북 김천시 능치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옛 지명은 맷돌봉이라고 불렀으며,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다. 1800년경 박송(朴松)이라는 유생(儒生)이 산세를 보고 용문산(龍門山)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하며, 이후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애향숙 기도원을 세우고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는 누구나 다 용납하고 만나 준다’는 뜻으로 ‘용(龍)’자를 용서하다는 의미의 ‘용(容)’자를 써서 용문산(容門山}으로 바꾸었다 한다.

경북 상주군 공성면 백학산에서 국수봉으로 이어온 백두대간 산줄기가 용문산(龍門山)을 지나 갈현(葛峴), 사기점고개, 추풍령(秋風嶺)으로 이어지고, 이 일대 백두대간 산줄기 높이는 500~700m로 대체로 낯은 산지를 이룬다.

능선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고, 동쪽 비탈면인 용문산 마을에서는 어모면의 주요 하천이자 어모천을 대표하는 지명인 아천(牙川)이 발원하여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다가, 갈현 부근에서 발원한 아천의 다른 지류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본류를 이룬다. 영동군에 속하는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반계천과 추풍령천을 이루어 초강으로 흘러든다.

 

살짝 당겨본 서쪽 지장산 방향.

 

 

용문산 정상 넓은 헬기장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선선한 아침공기와 더불어 산행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으니, 모처럼 느긋한 야외식을 즐긴다.

 

먼저 식사를 마무리한 분들은 급할 게 없는 산행을 서둘러 진행하고,

 

 

08:16 늘 그렇듯이 남겨진 분들이 용문산 정상 인증을 한다.

 

 

08:27 올해는 유난이도 도토리가 풍년 이라더니, 등로에 깔린 도토리에 미끄러져 넘어질 지경이다.

 

 

08:47 떨어진 토종 알밤도 주워 보는데, 배낭이 무거워져 선뜻 가져가겠다는 분들이 없다.

 

 

08:58 차광망으로 씌워진 움막을 지난다.

옛 산행기에 보면 무속인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비어있는 듯하다.

 

 

09:08 급경사 내리막을 잠시 내려서면 갈현을 지나게 된다.

 

<갈현(葛峴)>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에서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도치량으로 넘나드는 고개로, 갈현 또는 칡고개라 부르는데, 네이버 지도에는 갈태고개라 표시되어 있다. 예전에는 칡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고개 아래 도치량 마을은 최근까지도 옻이 많이 생산되어 옻칠을 하는 행랑 즉 도칠랑이라 했던 것이, 그 후 변음되어 도치량(道治良)으로 변했다고 한다.

 

 

09:16 알밤 줍기에 여념이 없는 백두들.

이제 도토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알밤도 실한 놈만 주워 본다.

 

 

09:34 무좌골산(474m) 도착.

알밤과 도토리로 배낭이 무거워진 백두들이 잠시 쉼을 한다.

 

 

09:56 무좌골산 내림길에, 좌전방으로 난함산 능선이 보인다.

 

 

10:02 완만한 능선을 잠시 내려서면 작점고개에 도착한다.

 

<작점(雀店)고개>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에서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축전리로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다. 성황뎅이고개, 여덟마지기고개 등의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는 능치재라 부른다. 작점고개라는 이름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에서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 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 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부분의 대간 종주 자료에 작점고개라 적혀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잡은 마을로, 소백산 줄기이며 마을 뒤편 난함산 정상부에는 국영 통신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년 전 전국에서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서 유기 점포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참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참새 작(雀)'자와, 유기점이 많아서 '가게 점(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김천시에서 큰돈 들여 설치했을 '백두대간 작점고개' 이정석과 상징물이 있다.

 

능치쉼터 정자에서 여유로운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10:22 작점고개 인증을 하고,

 

작점고개를 뒤로하고 대간길 잇기에 나선다.

 

고개 서쪽 충북 영동군 작점 마을 방향.

 

 

10:23 작점고개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10:25 좌측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방향 조망.

 

돌아본 국수봉 방향.

 

 

10:31 우측으로 가족묘지를 지나고,

 

 

10:34 안부를 지나 또 내려서면,

 

 

10:35 난함산 중계소로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도로에 내려서게 되는데,

주변에 축산농가가 있는지 분뇨 냄새가 코를 찌른다.

 

 

10:46 구절초의 환영을 받으며 포장도로를 따라 난함산 방향으로 올라간다.

 

 

10:52 대간길은 이곳에서 좌측의 난함산 지능선 봉우리(난함산 갈림길)로 이어지는데,

지능선 봉우리 난함산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다시 도로로 내려서야 하므로,

 

대간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난함산(卵含山)은 다수의 백두대간 종주 자료에 묘함산(卯含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 '卯含山(묘함산)'이라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 빚어진 일이다. 그러나 현지명은 분명 난함산(卵含山)이다. '알 란(卵)' 자를 '토끼 묘(卯)' 자로 잘못 표기한 것이다. 난함산 정상에는 한국통신 무선통신중계소가 있는데, 그 이름도 난함산중계소다. 지도를 만들 때 '난(卵)' 자가 '묘(卯)' 자로 오기된 게 확실해 보인다. 산의 형국이 알을 품고있다 해서 명명된 것일 텐데, 십이지(十二支)의 넷째이자 동쪽을 가리키는 말인 '묘(卯)' 자가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10:53 난함산 갈림길 봉우리로 오르지 않고, 따르던 도로를 따라 잠시 더 진행한다.

 

 

10:56 무심코 도로를 따르다가 보면 알바를 할 수도 있다는 말에, 백두들이 멈춰 서서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

 

션한 그늘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후미가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

 

 

11:04 모두 함께 대간 잇기를 계속한다.

 

 

11:07 잠시 진행하니 좌측으로 난함산 갈림길에서 돌아 내려오는 날머리가 나오고,

 

 

11:08 맞은편으로 도로 우측에 추풍령으로 이어지는 들머리가 나온다.

 

도로에서 표지기가 걸린 들머리로 들어서자 뚜렷한 능선길이 이어져 있다.

 

 

11:16 옛고개의 흔적을 지나면,

 

 

11:17 사기점고개쯤에서 이어오는 임도가 나온다.

 

 

11:19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서면,

 

 

11:22 사기점고개쯤으로 짐작되는 안부에 내려서게 되고, 따르던 임도를 두고 다시 숲길로 들어간다.

 

 

<사기점고개(沙器店, 390m)>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 작점리다.

 

 

11:34 완만한 능선과 약간의 오름길이 번갈아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른다.

 

 

11:45 정오쯤에 가까워지니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고, 그늘이 있는 쉼터만 보면 앉아서 쉬고 싶어 진다.

 

 

11:54 좌후방으로 난함산 중계소가 조망된다.

 

 

11:59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자그마한 언덕 정도의 봉우리들을 지나면,

 

 

 

12:16 '백두대간 501봉'이라는 표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봉우리를 지난다.

 

 

12:21 501봉을 내려서니 완만한 능선길에 있는 '해주오씨묘'를 지나게 되고,

 

앞쪽으로 다음 구간의 눌의산이 살짝 조망된다.

 

 

12:23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곤천고개쯤으로 보이는 옛고개를 지난다.

 

<곤천고개>
김천시 봉산면 곤천 마을에서 영동군 추풍령면 작동 마을과 작점 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무심코 가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다. 곤천 마을은 고려말까지는 마을 앞에 건천내가 있어 건천이라 하였으나, 그 후 음향오행설에 의해 조선시대 황간군 백호촌장 손정만이 곤천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손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12:27 이제 산행 막바지라 배낭무개 걱정이 줄어들어, 쉼을 하면서 도토리도 몇 개 주워 본다.

 

 

12:33 완만한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12:39 들기산(505m)이라 표시되어 있는 봉우리에 도착한다.

 

 

12:44 육산 능선에 이정표 역할을 할 듯한 바위를 지나고,

 

 

12:58 싱그러운 선들바람이 살짝 불어오는 능선길을 따르다 보면,

 

좌측으로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가 보인다.

 

<경부고속도로와 추풍령휴게소>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추풍령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모두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驛馬)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잡하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어우러져,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에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새재가 조선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이,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넘쳐난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내륙 한양 길의 절반-반고개인 추풍령>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새재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5로와, 천안.공주로 이어지는 제6로에서 각각 지로(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 도로)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 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13:00 금산 오름길은 제법 가파르다.

금산의 북쪽 부분은 채석장에서 파먹은 상태라, 안전을 위해 울타리를 설치해 놓았다.

 

 

13:03 금산 정상을 확인하고자 울타리를 넘어 금산 정상쯤으로 올라,

 

채석장이 갉아먹어 반쪽이 된 금산 정상에 선다.

 

<금산(金山, 370m)>
경북 김천시 봉산면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북 지역에서 보면 산이 온전하게 보이나, 충북 지역은 산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반쪽만 남아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채석장 개발로 대간 자락의 북사면 절반이 사라진 산으로, 자병산과 더불어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 지역으로 꼽힌다.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기 시작하다가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 자갈 생산 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 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 그다음에는 고속전철용 자갈 공급을 위해 깎여졌다. 채석을 중단한지는 오래되었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를 한 후 방치되고 있다. 아찔한 벼랑으로 변해 버린 산 정상에는 어느새 인적이 뜸해졌고, 백두대간 종주로가 벼랑 끝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다.

 

내려다본 금산의 반쪽 부분.

 

북동쪽 추풍령저수지 옆으로 작점고개로 가는 도로가 이어져 있다.

 

북서쪽 영동군 추풍령면 방향.

 

<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추풍령면>
옛날 경상북도 금산군(錦山郡)에 소속된 황금소면(黃金所面) 지역으로, 교통의 요충지라 고려 때부터 추풍역(秋風驛)을 설치하였다. 황금이란 지명은 현 사부리에 있었던 황보(黃寶)와 금보(金寶)라는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1906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충청북도 황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황간군 오곡면의 일부와 경북 상주군 공성면의 일부를 병합하고, 사부리, 추풍령리, 죽전리, 작점리, 관리, 지봉리, 신안리, 계룡리, 웅북리 등 9개 리로 개편하여 황금면(黃金面)이라 칭하고 영동군에 편입하였다. 1971년에 추풍령리를 추풍령 1구와 2구로 분리하였고, 1982년에는 신안리를 상신안리와 하신안리로, 1984년에는 관리를 관리와 학동으로, 작점리를 작점과 자동으로 분리하여 14개 이동이 되었다. 1985년 관리를 관리와 후리로 분리하여 9개 법정리, 15개 행정리, 31개 자연 마을을 관할하게 되었고, 1991년 7월 1일부터 지방자치법에 의거하여 군 조례 1332호로 추풍령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금산 정상에서 본 북쪽 방향 파노라마.

 

돌아본 들기산(501) 방향의 대간 능선.

 

 

13:11 아픈 상처를 가진 금산 정상을 뒤로하고 울타리를 넘어 내려서니,

 

 

13:12 백두들이 후미를 기다리며 쉬고 있다.

 

백두대간과 금산의 위치 관련 안내판.

 

 

13:39 한참의 기다림 끝에 후미들이 도착하고,

 

 

13:44 금산을 뒤로하고 추풍령을 향한 내림길을 시작한다.

 

 

13:47 추풍령 날머리로 내려선다.

 

반쪽이 날아가 버린 금산 등산안내도.

 

 

13:48 수확이 마무리되어가는 포도밭에서 달콤한 포도 냄새가 풍겨온다.

 

남겨진 포도 한 송이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손점장.

 

길가에는 대추도 익어가고 있다.

 

 

13:50 드디어 추풍령에서 기다리고 있는 애마가 보인다.

 

도로 표지판에 '추풍령'이라는 단어가 이곳이 고개임을 말해 준다.

 

 

13:52 추풍령에서 기다리던 애마에 오르며, 오늘 산행을 마무리한다.

 

도로가에는 장승들의 호위를 받으며 추풍령 표석이 버티고 있다.

 

<추풍령(秋風嶺, 221.3m)>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경부선 중의 최고점이고,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룬다. 높이가 221m로 낮고 완만 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추풍령은 죽령, 조령, 화령과 함께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4대 고개였다. 그러나 다른 고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관방으로서의 역할이 미약했던 것 같다. 관방이란 방어진지 또는 요새 개념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을 조령과 추풍령으로 정했다. 왜군이 이들 두 고개를 넘어 충주와 청주로 진출한 다음에 한양로 입성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최고의 문장가인 다산 정약용은 '추풍령을 넘으며'라는 시를 지어 임진왜란 때 이 고개를 지키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지금은 추풍령을 넘어 대전과 천안을 지나 서울로 이어지지만, 옛날에는 청주와 죽산(지금의 안성)을 지나 한양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 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 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의병장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 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 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지점으로 추풍령 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 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이라는 가수 남상규의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 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 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 물이 일찍 들고, 고개 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추풍)'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추풍)'으로 불리고 있다.

 

 

<추풍령> - 노래 남상규 -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기적도 숨이차서, 목메어 울고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거치른 두뺨위에 눈물이 어려,
그 모습 어렸구나 추풍령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 남쪽 김천 방향.

 

 

14:55 버스를 남쪽으로 몰아, 김천에서 목감을 하고,

 

 

15:07 김천에 사는 벗의 추천으로 지례 흑돼지 집에서,

 

산행의 피로를 푸는 뒤풀이를 진행한다.

 

 

 

 

 

17:00 뒷풀이를 마무리하며 부족할 것 없는 포즈를 취해 보고,

 

 

17:28 혹여나 부족할까 손에 손에 만두를 사들고,

 

흑돼지로 부족했었나, 벌써 만두를..ㅋㅋ

 

서울로 오는 길에 예쁜 만두들은 어디론가로 숨어 버렸다.

 

모처럼 여유 있는 산행길이었다.

 

빨리 가면 앞만 보이고,

천천히 가면 숲이 보인다.

 

나무도, 풀도, 돌도, 벌레도 보며,

두런두런 세상 예기도 나누며,

그렇게 대간길을 걸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