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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남정맥 06차(방죽머리~백운공원) : 그렇게나 많은 군부대들이 차지한 한남능선, 돌리도! y

by 재희다 2017. 2. 12.

산 행 지 : 한남정맥 06차(방죽머리~백운공원) 시흥시, 부천시, 인천시.

산 행 일 : 2017. 02. 11.(토)

산행코스 : 방죽재(42번국도)~봉재산~양지산~중림고개~삼십고개~할미고개~ 봉매산~여우고개~하우고개

              ~성주산~거마산~비루고개~철마산~만월산~동암산~백운공원 (거리 23km)

산행참가 : 17백두.

 

<산행코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이 해를 넘기고도 실마리를 찾기는커녕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지 않는 집단으로 검찰을 꼽았는데, 그 검찰의 발표를 믿어야 할지 말지 조차도 모르겠다. 국민을 선동하는 듯한 여론은 말할 것도 없이, 주변 사람들이 진실이라며 전하는 말들에도 전혀 신뢰가 가지를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신뢰 없는 세상인데, 도무지 신뢰할만한 언행을 하는 이가 점점 더 드물어지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학창시절 토론과 비판을 통한 신뢰를 쌓아가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하는 예기들을 너무 쉽게 믿어 버리다가도 어느새 그 신뢰가 께어지면 아무리 진실을 예기해도 믿지 않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다. 제발 적당히들 좀 했으면 한다.

 

주말이 가까워지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영하 10도를 기록함에 따라, 산행거리를 5km 정도 줄이고, 아침식사를 매식으로 바꾸어 예약을 하고, 바뀐 노정에 따라 이런저런 사항들을 챙기고는 양재에서 버스에 올랐다. 출발지가 양재에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어서 버스 안에서의 쪽잠을 은근히 걱정했는데, 중간에 한두번 깬듯한 느낌은 있지만 비교적 단잠에 빠졌다가 예정된 4시쯤에서야 일어나 산행 준비를 한다. 출발지로 바로 오기로 한 권용호님 부부가 택시로 도착하는 것을 확인하고, 오지 않는 천보 형님에게는 전화를 넣었더니 잘 다녀오라는 예기를 전해온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방축재(방죽머리)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에서 내리니 밤공기가 무척이나 차갑다.

그나마 바람이 잔잔하고 보름달이 밝게 떠 있는 것이, 산행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황임을 예견해 준다.

 

 

방축재 고갯마루 버스정류장(방죽머리) 옆으로 나있는 수레길에서 우측으로 오르며 산행을 시작한다.

 

<방축재(방죽머리)>

방축재 버스정류소에는 '방죽머리'라 표시되어 있다. 방축재는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에 위치한 재로, 6차선의 42번 국도인 수인산업도로가 지나고 있고, 좌측으로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들머리를 들어서서 잠시 언덕을 오르면 군부대 철망 울타리가 앞을 가로막고, 한남길은 좌틀하여 울타리를 따라 이어진다. 잠시 후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며 울타리가 우측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좌측 아래쪽으로 표지기들이 몇 개 걸려 있는 등로를 따랐다가 50여 미터 알바를 하고, 다시 봉우리로 돌아와 우측 능선을 따라 내려선다.

 

 

봉우리를 내려서며 밭을 지나 수레길을 따라 397번 지방도로에 내려선다.

 

397번 지방도는 좌측 시흥시 금이동 금이사거리에서 우측 무지내동을 연결하는 도로인데,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300여 미터 진행하여, 좌측으로 부대 정문을 갓 지난 지점의 버스정류소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선다.

 

철망 울타리를 따라 잠시 진행하면 전주이공 내외분 묘지를 지나게 되고,

울타리가 좌측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울타리를 따라 좌틀하여 진행하여 안부를 지나 오르면,

 

 

잘 보이지 않던 표지기들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능선 위로 오르게 된다.

표지기가 반가운지, 옆에서 편안해진 웃음을 띠고 있는 창병씨.

 

 

한남길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좌측에 두고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데,

좌측 편으로 월곶 소래포구 방향의 야경이 시원스레 조망되는 곳을 지난다.

 

 

자그마한 언덕을 오르니 다시 부대 철망이 나타나고,

철망을 우측에 끼고 진행하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로 내려서게 되는데,

고속도로 방음막과 만나는 지점에서 고속도로로 내려서서..,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300여 미터 진행하다가,

방음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철망울타리 문을 열고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봉재산(147.7m) 쯤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우측 시흥시 방향 조망.

봉재산 이후는 오솔길이지만 비교적 뚜렷한 등로가 이어져, 양지산 너머 안현분기점까지 편히 갈 수 있다.

 

 

거대한 송전탑 아래에 서니, 앞쪽 소래산 방향으로 이어진 순환고속도로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잠시 안부로 내려섰다가 조금 오르면 이내 양지정에 도착하는데, 지도에는 이곳을 '봉재산'이라 표시해 놓았다.

양지정에 올라서 보았지만, 밤이라서 그런지 별다른 조망이 없다.

 

 

양지점에서 잠시 쉼을 하고 편안한 능선길을 따르니, 이내 정자가 있는 양지산(150m) 정상에 도착하는데,

정자 좌측 입구에 '양지산'이라는 조그마한 표지목이 걸려 있다.

 

<앙지산(151m)>

양지산 정상에는 팔각정이 있고, 정자 입구 왼쪽 기둥에 앙증맞은 표지판이 있다. 주변은 나무들이 애워싸고 있어서 별다른 조망은 없을 듯하지만 동쪽 광명시 방향으로는 불빛이 보인다.

 

<광명시>

경기도 중부에 있는 '市'로, 서울시의 금천구와 구로구, 경기도 부천시, 시흥시, 안양시와 접해 있다. "여지도서" 금천현 방리조에 서면과 남면으로 기록되어 있는 지역으로, 1795년에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바뀌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면과 남면이 통합되어 시흥군 서면이 되었다. 1963년 박달리는 안양시로 분리되어 나갔고, 1970년 광명리와 철산리 지역에 서면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4년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되었고, 1979년 나머지 서면 지역은 소하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1년 광명출장소와 소하읍을 합쳐서 '광명시'가 되었다.(펌)

 

 

양지산을 뒤로하고 조금 내려서니 삼거리 갈림길 이정목을 만나는데,

좌측 '체육단련장' 방향으로 진행하면,

 

지도상 길마산(111봉) 정상쯤을 지나게 되는데,

올라서자마자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다시 좌측 길로 진행한다.

 

 

제2경인고속도로가 지나는 중림고개에 내려서는 백두들.

 

<중림고개>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과 과림동을 잇는 고개로, 마을도로로 내려서면 창성포장이란 회사 간판이 보이고,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이동하여 제2경인고속도로 지하통로를 통과한다.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이동하는 백두들.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좌틀하여 진행하고,

 

 

이곳에서 우틀하여 골목길을 따라 오르면 공동묘지를 지나 한남정맥 능선으로 이어지고,

조금 더 직진하다가 우틀하여 마을 안길로 접어들어 도로를 따르면 우회 지름길이다.

7시 40분에 예약해 놓은 아침식사 시간도 맞출 겸, 이곳에서 우틀하여 한남정맥 능선길로 들어선다.

 

 

공동묘지 정상부에서 잠시 쉼을 하며 돌아본 수리산 방향.

 

남서쪽 소래포구 방향.

 

서쪽 소래산 방향.

 

 

처녀귀신, 몽달귀신, 목없는 귀신 등등의 귀신 얘기를 하며 공동묘지에서 한참 동안 쉼을 한다.

 

동쪽 광명시 방향 .

 

 

공동묘지 꼭대기에서 울타리를 통과하여, 울타리를 좌측에 끼고 매달고개로 내려서는데,

앞쪽 소래산 위에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동그란 보름달이 전깃줄에 걸려 있다.

 

공동묘지 울타리를 끼고 매달고개에 내려서면 앞쪽 능선 방향으로 철재 울타리가 막아선다.

이쪽 저쪽을 둘러보았지만 들어갈 구멍을 찾을 수 없고, 우전방 사면길에 표지기들이 몇 개 걸려 있어서 그 길을 따라 진행한다. 밭두렁길을 이리저리 이어 가노라면 다시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되고,

 

 

표지기들이 흔적을 감추어서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능선을 따르면,

 

 

족적은 능선 좌측 수레길로 이어지고,

 

 

잠시 후 '비룡사' 표지석이 있는 고갯마루로 연결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이곳은 시흥시 계수동 안골마을에서 고갱이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한남길은 표지석 옆 능선으로 이어진다.

 

 

비룡사 뒤쪽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전방으로 과림저수지가 보이고,

 

과림저수지 우측으로는 시흥시 계수동에 있는 계수터널이 보인다.

 

 

한남길은 다시 숲으로 잠시 이어지며 자그마한 봉우리에 올라서서 갈림길을 만나는데,

좌측 길은 피정의집 앞으로 내려서게 되고, 우측 길은 삼십고개 고갯마루로 내려서게 된다.

 

 

우리는 우측 내림길을 따라 283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삼십고개에 내려선다.

 

한남길은 화살표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통과가 여의치 않으므로 좌틀하여 피정의집 정문 방향으로 돌아서 가던지, 우틀하여 샘터주유소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서 가는 게 좋을 듯하다. 우리는 아침식사를 예약한 '용설리순대국'이 있는 샘터주유소 사거리 방향으로 우틀하여 진행한다.

 

<삼십고개>

경기도 시흥시 계수동에 있는 고개로, 4차선의 283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좌측으로 정맥꾼들을 알바에 빠지게 하는 '피정의 집' 정문이 보인다.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 250m쯤 진행하면 샘터주유소 사거리가 나오고,

좌측 부천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아침식사를 예약해 놓은 식당 앞에 도착한다.

 

보통 8시에 문을 여는 식당이지만 예약을 하면서 7시 40분쯤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렸는데,

예약 사항을 당일 근무자에게 전달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여, 우리가 도착한 이후에나 식사 준비에 분주하다.

 

 

서둘러 준비하느라 그런지 약간은 설익은 듯한 순대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식당 문을 나와 다시금 한남정맥 잇기에 나선다.

 

 

구도로를 따라 삼십고개 고갯마루로 이동하여 들머리로 들어서면,

 

 

피정의집에서 쳐 놓은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등로가 이어진다.

철조망이 사면에 설치되어 있고 등로가 거칠어서 걷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데,

철조망 안쪽 능선 위로는 '피정의집' 사람들이 산책하는 뚜렷한 등로가 나란히 이어진다.

 

철망 중간중간에 사유지이므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수없이 걸려 있는데, 도대체 대한민국에 개인이나 단체의 소유가 아닌 토지가 한뼘이나 있는지 되묻고 싶다. 특별한 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자기네 소속 신자들이 산책로로 이용하는 등로를 일반 등산객과 함께 이용하는 게 뭐가 그리 큰 문제인지 참으로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앞으로 피정의집에 사는 분들은 자기 소유가 아닌 곳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지어다!

 

지도상 능선이 좌측으로 꺾이는 봉우리를 지났는데도 철조망을 직선으로 아래쪽을 향해 이어져 있다. 아마도 저그들 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등산객들이 좌틀하여 능선 부근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자 철조망을 길게 아래로 늘여서 쳐 놓은 모양이다. 정말 욕지기가 난다. 아래로 향하던 발길을 되돌려 다시 능선 위로 되돌아 올라서서는, 철조망이 끊긴 곳을 찾아 피정의집 철조망 안쪽으로 들어선다.

 

 

철조망 안으로 들어서니 이내 뚜렷한 등산로가 나타나고, 등로를 따라 봉우리에서 좌틀하여 안부로 향한다.

 

 

봉우리에서 잠시 내려서니 조경수를 키우는 밭이 나타나고,

 

좌측으로는 피정의집 건물들이 내려다 보인다.

 

 

다시 오름길을 오르며 돌아본 피정의집 철조망을 넘어 들어 왔던 봉우리 방향.

 

 

봉우리 위로 올라서며 우측 철망이 쓰러진 나무둥치에 망가진 곳을 통과하여 피정의집 울타리을 벗어 난다.

 

 

피정의집 철조망을 벗어나니, 이내 좌측에서 이어오는 등로와 만나 우측 길을 따르면,

 

 

이내 시야가 트이며, 좌측 아래로 대야교차로로 이어진 널찍한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한남정맥 능선 위에 서게 되고, 좌측으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소래산이 조망된다.

 

좌측으로 소래터널로 이어지는 외곽고속도가 시원스레 조망된다.

 

<소래산(蘇萊山, 299.4m)>

소래산은 경기도 시흥시와 인천광역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인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바위산이다. '소래'란 지명은, 첫째로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서 그리 불리게 되었다는 설(說)과, 둘째로 냇가에 소나무숲이 많다. 즉 솔내(松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셋째로 지형이 좁다 즉 솔다→좁다 등의 이유로 비롯되었다고 설이 있다. 또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신라 무열왕 7년(660)에, 당나라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략하기 위하여 중국 산동성의 래주(萊州)를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이 산에 머물렀던 뒤부터, 소정방의 '소(蘇)' 자와 래주(萊州)의 '래(萊)' 자를 합쳐서, '소래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잠시 밭 가장자리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송전탑 아래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며 수레길로 들어서게 되고,

 

수레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니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앞서 간 창병씨 일행들은 피정의집 철망을 따라 아래까지 갔다가, 전화를 받고 돌아가서 피정의집 울타리를 통과하여 오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참시 기다렸다가 도로를 건너 숲으로 들며 한남길 잇기를 계속한다.

 

 

희미한 숲길을 잠시 따르면, 남서쪽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시흥IC에서 북동쪽 오류동역 방면으로 연결되는 신설도로가 까마득한 절개지를 만들며 지나가는 절개지 상단에 서게 된다. 절개지 상단에서 좌측 절개지 상단을 따라 대야교차로 방향으로 내려서서 도로를 건너도 되지만, 우리는 우측 절개지 상단을 따라 내려서서 도로를 무단횡단 후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한다.

 

내려다본 좌측 대야교차로 방향.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내려서는 백두들.

 

 

산행기에는 교통량이 많지 않다고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차량의 꼬리가 끊어지지를 않는다.

잠깐 차량이 뜸한 틈을 타서 손을 들어 차량을 제지하며 무단횡단을 감행하여,

반대편 절개지 보수용 철사다리를 타고 절개지를 오른다.

 

 

다시금 절개지 위로 올라서면, 조경수를 식재해 놓은 밭이 나타나며 바로 능선 숲길로 들어서게 된다.

 

 

숲길을 조금 진행하니 도로가 나오고, 도로를 건너 '이조가든' 후문으로 들어가서,

 

앞마당을 통과하여 정문으로 나오면,

 

 

시흥시와 부천시를 잇는 도로가 지나는 할미고개에 도착한다.

 

이조가든 정문을 나와 우틀하여 횡단보도를 향하는 백두들.

 

할미고개에서 부천시 방향으로 잠시 이동하면 도로를 건너는 횡단보도가 있다.

 

<할미고개>

할미고개는 경기도 시흥시 계수동과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을 잇는 고개로, 고개 북동쪽 소사고교 뒤쪽에 할미산(151.2m)이 있다. 이 고개 위의 산 모양이 노파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할미는 ‘한뫼’ 즉 ‘큰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 고개의 산봉우리가 근동에서는 가장 큰 산이라는 의미라고 짐작된다.

 

<부천(富川)>

부천은 예로부터 복숭아가 많이 난다고 하여 '복사골'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으며, 이 때문에 부천시는 복숭아를 상징물로 지정하였다. 부천을 상징하는 꽃은 복숭아나무의 꽃 즉 복사꽃이다. 1902년 부천 지역에서 복숭아가 재배되기 시작한 이래로, 부천의 복숭아는 '소사 복숭아'라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재배 면적이 크게 늘면서 소사 복숭아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사 복숭아는 수원의 딸기, 안양의 포도와 함께 경기도 3대 과일로 꼽혔고, 또한 구포의 배, 대구의 사과와 함께 전국 3대 과일로 유명해져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러나 1970년을 절정으로 이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부천에서 복숭아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부천이 도시화되면서 복숭아 밭은 소사공단.송내공단으로 변했다.

예로부터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다는 속신이 있는 과일이라서, 다른 과일과 달리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 '조율이시'로 대표되는 제사상의 과일 중에 복숭아는 빠져 있는데, 제사상을 받아먹기 위해 온 귀신을 복숭아를 올려 쫓는다면 집안으로 드는 복이 달아나기 때문이다. 무당들이 복숭아나무 가지로 귀신을 쫓는 행위를 하는 것도 그와 같은 연유다.

 

 

시흥시와 부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할미고개를 횡단보도로 건너,

소사 2배수지로 이어진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르면 소사2배수지 정문 앞에 서게 되고,

 

소사2배수지 앞에서 한남길은 울타리를 끼고 좌측으로 이어진다.

 

 

122봉(봉매산)에는 쉼터와 체육시설이 있어서 잠시 쉼을 하기로 한다.

 

북서풍을 피할 수 있는 정자 옆 마당에서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시며,

 

깜깜한 신새벽에 시작한 산행의 기억을 떨쳐버리며 여유로운 쉼을 한다.

 

 

봉매산을 뒤로하고 능선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가 좌틀하여 내려서면 여우고개 생태통로를 지나게 된다.

생태통로 위에서 본 좌측 시흥시 방향.

 

<여우고개(80m)>

「선비와 여우고개」는 부천시 남쪽에서 시흥시로 넘어가는 곳에 자리한 ‘여우고개’에 얽힌 지명유래 이야기다. 여우고개는 부천의 옛 지명인 소사와 시흥, 그리고 서울로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으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다양한 여러 유래담이 존재한다.

 

이 고개를 통해 시흥에서 부천시 소사 우시장으로 소를 끌고 넘어 다녔으며, 또한 부평 황어장을 가기 위해 넘어 다니기도 했다. 여기에서 한자로 여우(如牛)고개라고 해서 ‘소고개’라 해석하기도 하며, ‘산의 형세가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므로, '소와 같다'하여 여우(如牛)고개라 했다는 설이 있다.

다음으로 ‘여우’는 ‘여위다’가 변화된 것으로 보아 ‘여윈고개’, 즉 ‘좁고 작은 고개’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호현(狐峴)’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곳에 나무가 많고 후미진 곳이어서 ‘여우가 많이 출현하였다’하여 붙여진 것으로 해석한다. 소사 지역의 촌로들 중에도 여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고, 현재의 도로가 형성되기 전 이곳의 산세와 지형으로 보아 신빙성이 있는 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천시사』에서는 여우고개에서의 ‘여우’의 어원을 달리 설명하고 있다. ‘여우’의 어원은 ‘여’이다. 동물 ‘여우(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는 ‘엿’으로 발음되고, ‘엿’은 ‘얕다’는 의미의 ‘얕’과 같은 말이다. ‘엿’이 ‘여오’가 되고 이것이 ‘여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우가 자주 출몰하는 고개가 아니라 ‘야트막한 고개’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여우고개를 보통 ‘여시고개’라고도 부른다. 여시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서 여우를 부를 때 쓰던 말이다. 여우고개 동쪽으로는 할미산이 있고 서편으로는 성주산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고개 아래에는 웃소새·아랫소새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우고개 부천 방향.

 


여우고개 생태통로를 지나 하우고개 방향 숲길로 들어선다.

 

들머리 좌측에 있는 '부천둘레길 안내도'

 

 

잠시 언덕길을 오르면 정자가 있는 능선 마루에 올라서게 되고,

 

남쪽으로 외곽도로 시흥IC 방향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잠시 편안한 능선길을 따르면, 좌측으로 전원주택단지가 지어지고 있는 능선 오름길을 올라간다.

 

 

좌측으로 전원주택단지를 두고 오르면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는데, 하우고개는 직좌틀하여 내림길로 이어진다.

백두들은 직진의 편안한 능선길로 가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서 온다.

 

갈림길 이정표의 하우고개 방향이 한남길이다.

 

 

좌틀하여 내려서면 이내 하우고개를 건너는 구름다리가 내려다 보이고, 가야 할 성주산도 보인다.

 

<하우고개(100m)>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에 있는 고개로, 하우고개란 이름은 산의 형태인 와우에서 유래된 것이란 설과 의성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처음의 경우는 이 산이, 臥牛山(와우산)이기 때문에 이 산을 넘는 고개도 한자로 표기하였다. 이를 우리말로 풀이해 와우고개라 하였다가, 하우로 변해 하우고개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두번째 경우는, 옛날 시흥시 뱀내장에서 계양 황어장으로 오일장을 오가는 장사꾼들이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행인들을 터는 도둑떼가 득실거렸다고 하는데, 장사꾼들은 그들이 무섭지만 이 고개 외에는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어, 이 고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돌뱅이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 아래 주막에 모여 떼를 지어 고개를 넘었으며, 언제 어디서 도둑떼의 기습이 있을지 몰라 사람과 소가 가파른 길을 바쁘게 걷다 보니, 모두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찼다. 강행군을 하여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안도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이때 나오는 '하우 하우'하는 숨소리의 음을 따 하우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우고개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시흥 방향.

 

하우고개 부천 방향.

 

하우고개 구름다리 위를 지나는 백두들.

 

하우고개 구름다리를 지나 성주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잠시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군부대가 자리한 성주산(316.5m) 정상쯤에 도착한다.

한남길은 우틀하여 진행되고, 좌측은 소래산 방향이라 표시해 놓았다.

 

<성주산(聖柱山)/와우산(臥牛山), 217m>

성주산은 부천시 남단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부천의 주산이다. 성주산(聖柱山)이라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와우산 또는 댓골산이라고 불렸다. 특히 하우고개가 있는 부분은 1918년 발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화오현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성주산은 부천시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시흥시 대야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1917년에 측량한 지도에는 聖主山(성주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주산이라고 한 이유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도서관 심곡분관 자리에 1938년 일왕에게 참배를 강요하던 소사면 신사가 세워졌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산 이름이 아닌가 한다.

성주산은 일명 와우산(臥牛山)이라고도 불린다. 이 산의 형세를, 현재는 시 청사나 멀리 고층건물에서 관찰해 볼 수 있지만, 도시화되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벌막 쪽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는데, 소가 앉아 있는 형세를 한눈에 보아 알 수가 있었다. 즉 지금의 상수도 탱크가 있는 그 언저리의 돌출부인 성무정(활터) 쪽 언덕 즉 서울신학대학이 있는 뒤편의 돌출부는 마치 소가 앞다리를 굽히고 있는 형상임을 엿볼 수 있고, 주봉인 산 정상이 소의 엉덩이 부분이 된 형태이며, 여기서 약간 동쪽에 하우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가 소의 허리 부분에 해당된다. 한편 부천풀장을 찌르듯 돌출된 능선이 바로 소가 엎드려 있을 때 다리를 굽힌 형상이다. 서쪽으로 길게 뻗쳐 있는 능선 줄기는 소의 꼬리로 보아 소가 누워있는 형태가 된다. 한편 깊은구지 쪽의 성주산은 댓골산으로 불렸다. 이곳의 서쪽에 1960년대까지 암자가 있었는데 산동네로 불리고 있다.

 

기둥에 성주산(316.5m)라고 적어 놓은 정자 주위에서 배낭털이를 시작한다.

 

 

성주산을 뒤로하고, 성주산 정상부를 차지하고 있는 군부대 울타리를 따라 마리고개로 향한다.

 

 

잠시 후 능선분기점에서 부대 울타리와 이별하고 우틀하여 능선을 따르면,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서 이정표의 '송학약수터' 방향으로 좌틀하여 내려서면,

 

 

'전진아파트'로 불리는 마리고개에 도착한다.

 

<마리고개(와우(臥牛)고개)>

이곳부터 지금까지 같이 해 온 좌측은 시흥시와 이별하고 인천시로 접어들고, 우측은 계속 부천시와 함께한다. 고개 정상부는 군부대 위병소가 점령하고 있어서 부득이 우회를 해야 한다. 이곳 사람들은 마리고개는 잘 모르고, 전진아파트로 주로 알고 있다.

 

마리고개로 내려서서 좌틀하여 고갯마루 쪽 군부대 정문 방향으로 조금 이동하면,

 

 

우측으로 거마산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있는데, 이정표에는 '송학약수터' 방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북사면이라 그런지 내린 눈이 얼어붙어서 무척이나 미끄러운 등로를 조심조심 지나고,

 

가파른 계단길을 한참 동안 오르면,

 

군부대 울타리 옆에 '거마산'이라 새겨진 철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우측 사면에서 올라온 이곳 공수부대 출신의 전역자 모임인듯한 한 무리의 등산객과 어울려 잠시 쉼을 한 후에,

 

쇠로 만든 '거마산' 표지판에서 인증을 남기는데, 공수부대 출신이라 그런지 사진도 잘 찍어 놓았다.

 

<거마산(巨馬山, 210m)>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에 있는 산으로, 거마산의 뜻을 풀이하면 큰 말(馬) 산이다. 그 의미는 산의 형상이 말처럼 생긴 큰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산의 형상이 말처럼 생겼다기 보다는, 뭔가 다른 유래가 있을 것으로 봄이 좋을 듯하다. 한 세력의 우두머리인 제사장을 ‘’라고 했는데, 이때 ‘’는 우두머리를 가리킬 때 쓰는 마()이다. ‘’가 이화현상으로 ‘검마’가 되고, ‘검마’가 다시 동음 생략으로 ‘거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즉 거마산은 '우두머리산', '으쯤산'이라는 뜻이다.

 

거마산은 동쪽으로 부천시, 서쪽으로 비루고개, 남쪽으로 인천시 장수동, 북쪽으로 만수산이 있으며, 조선 말기에는 산이 깊고 험하여 도둑들의 소굴이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소세골, 뒤골, 장골 등이 이 산에 속해있다. 거마산 아래 마을이 검디인데, 검디는 검데이 또는 검대라고 하여 신성한 제를 지내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고, 주변에 화장터가 있어 검게 된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거마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거마회라는 모임에서 철조망 밖에다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거마산 인증을 마치고 우측으로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면 능선 분기점에 서게 되고,

울타리를 따라 직진하면 소래산으로 향하는 길이고, 한남길은 우측 능선 방향으로 직우틀하여 진행한다.

 

 

잠시 능선을 따라 고도를 낮추다 보면 군부대 훈련장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서게 되고,

 

 

능선 앞쪽으로 원형 철조망을 만나 철조망이 망가진 부분으로 통과한다.

진행 방향이 철조망 안(內)인지 밖(外)인지 구분이 어렵다.

 

 

잠시 후 정맥꾼들의 알바가 잦은 갈림길을 만나는데,

뚜렷한 직진 방향의 능선을 두고 우측 아래 방향 능선길로 접어들어 내림길을 따르면,

 

 

다시 군부대 울타리가 앞을 가로막고, 우틀하여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면,

 

 

이내 부대 정문으로 통하는 임도에 들어서게 되고 우측 내림길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지는 부분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그냥 도로를 따라도 조금 돌아서 비루고개로 내려설 수 있다.

 

 

능선 위로 군인들 훈련장으로 쓰이는 시설물이 설치된 곳을 지나게 되고,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비루고개로 이어지는 도로에 내려서게 되는데,

도로에서 우측 방향으로 진행하면,

 

 

한남정맥꾼들의 산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박씨농원 간판이 있는데,

우리는 도로를 따라 이곳을 통과하지만, 정맥꾼들은 소로를 통하여 화살표 방향으로 내려서는 곳이다.

 


도로를 따라 외곽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여 나오면 비루고개로 이어지는 도로에 서게 된다.

 

<비루고개(별이고개, 별류현, 별고개, 성현, 박촌)>

부천시 소사구 구산동과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을 잇는 왕복 8차선의 도로가 지나는 고개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일반도로가 연결되는 장수IC가 있는 곳이다. 성현이라고도 불리는 비루고개는 백제시대부터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로 알려진 곳이지만, 안내판 하나 없고 길 찾기가 아주 어려운 한남정맥의 요주의 구간 중 한 곳이다.

비루고개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별고개라고도 불리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인조 임금 시절인 1642년(임오년)에, 중국 사신이 한양에 특사로 왔다가 궁중에 머무는 동안 공주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 사신은 공주와 결혼을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할 날이 되어 서로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신이 새벽에 한양에서 귀국길에 올라, 본산(현 수산동)에서 중국 가는 배를 타려고 할 때,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공주가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중국을 가려다가 나라의 법이 엄하여 이별하게 되어 별류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이후 이곳을 별류현, 별고개, 성현, 박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비루고개의 또 다른 유래는 비류왕자가 이 고개를 넘어 문학산에 미추홀 왕국을 세웠다고 해서 비루고개라고도 하며, 백제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가족들과 이별을 한 고개라고 하여 별이고개라고도 불렀단다.

 

돌아본 외곽순환고속도로 통과 노정.

 

 

도로 좌측을 따라 내려가다가, 고속도로 진입 램프를 통과하기 위해 좌측 소로로 접어들어,

 

진입램프 아래로 통과하여 나오면,

 

 

다시 비루고개로 오르는 도로에 서게 되는데,

도로를 건너기 위해 좌측 인천대공원 진입도로로 내려서고,

 

인천대공원 진입도로에 내려서서 지하통로를 통과하게 된다.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나오면 장수동 수현 마을이 나오고,

 

포장공사 중인 도로는 좌측으로 꺾여서 이어지고,

 

뒤풀이 장소로 예약된 '오가백숙' 앞을 지나,

 

광학산 들머리가 있는 곳까지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도로를 따라 만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이동하여 우측 광학산 들머리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오늘 예약해 놓은 목욕탕이 있는 만월재까지 가기로 했던 분들께 백운공원까지 함께 가기를 권하여, 결국 모든 백두들이 목적지인 백운공원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는 광학산 들머리로 들어선다.

 


지도상 '물넘이 뒷산'으로 표시된 정상부에 자리한 군부대 울타리를 만나 좌틀하여 사면 우회길을 잠시 따르면,

 

군부대로 통할 듯한 도로에 내려섰다가,

 

이내 다시 숲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숲으로 들어가기 전 임도에서 배낭털이를 하며 편안한 휴식을 가진다.

 

 

숲길로 들어서서 옛고개를 지나 급경사 오름길을 시작하면,

봉우리 우회길을 만나 백두들은 좌측의 우횟길을 따르고,

나는 봉우리 위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우측의 오름길을 따른다.

 


봉우리에 올라서니 널찍한 공터가 있는 그냥 평범한 봉우리일 뿐이고,

우횟길을 따르다가 봉우리로 올라 온 서여사님께서 백두들은 대신해서 인증을 한다.

 


봉우리 동쪽으로는 소래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보이는데,

우측의 고속도로가 소래산 방향으로 휘어진 부분이 잠시 전에 지나왔던 장수 IC다.

 


광학산을 향해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고,

 

잠시 전에 갈라졌던 우회길과 다시 만나 광학산으로 향한다.

 


다시 우측으로 갈라지는 우회길을 지나 봉우리를 오르면, 옛 지도에 철마산쯤으로 표시되어 있는 봉우리에 오르게 되고, 우측 능선으로 진행한다. 최근 지도에는 이곳을 광학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철마산/광학산(鐵馬山, 202m)>

철마산(鐵馬山)은 인천시 남동구 만수3동과 부평구 일신동의 경계에 있다. 광학산 또는 ‘만수산(萬壽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산인데, 『동국여지승람』이나 『인천부읍지』등에는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시내 다른 곳에 같은 이름의 산이 2곳 더 있어서 혼동하기 쉬운 이름이기도 하다. 인천시내에는 이 산 말고도, 서구 가정동과 심곡동, 부평구 효성동 사이에 걸쳐 있는 철마산이 있고,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가좌동 사이에도 철마산이 있다.

 

철마산이라는 이름은 대부분이 ‘옛날 산꼭대기에 철마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쇠(鐵)로 만든 말’이라는 그 철마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또는 언제 누구에 의해 그것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어 그 유래를 알 수 없게 한다. 다만 경인선 철도가 부설되며 철도로 달리는 기차(철마)가 보이는 산을 철마산이라 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인천가족공원묘지가 시작되는 봉우리에서 좌측 능선으로 진행하면,

 

 

우측으로 인천가족공원묘지가 내려다 보인다.(북쪽 방향)

 

북서쪽 방향으로 널찍하게 자리 잡은 죽은자들의 영역이 산자들의 성냥갑에 둘러 싸여 있다.

 


잠시 후 191봉에 도착하여 벤치에서 쉼을 하며 죽은자들의 집들을 내려다본다.

 


191봉을 내려서면 인천가족공원 외곽도로에 내려서게 되고, 능선 마루로 이어진 도로를 한참 동안 따른다.

 

 

좌측으로 만월산터널 TG가 내려다 보이는 곳을 지나,

 

 

도로를 버리고 좌측 숲길로 들어선다.

 

다시 한번 돌아본 인천가족공원 전경.

 

 

한남정맥은 우측의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 만월재를 건너 정면에 보이는 만월산으로 이어지지만,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아서 우측 공장지대로 내려서서 만월재로 우회하게 된다.

 

공장지대로 내려서는 백두들.

 

'SK농장주유소'가 있는 도로에서 좌측으로 보면,

 

 

만월재 위로 만수산~만월산 연결 구름다리가 있는데, 구름다리 아래를 지나 좌측 계단으로 오르면 한결 수월하다.

 

<만월재>

만월재 북쪽은 '부평삼거리역'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 방향으로 약 700m 거리에 간석사거리가 위치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 만월~만수산 연결 구름다리 입구에서, 따스한 햇살을 쬐며 다시금 배낭털이에 나선다.

 

만월재 구름다리 모습.

 

우측 부평삼거리역 방향.

 

남쪽 간석사거리 방향.

 

 

만월재 연결 구름다리를 건너 돌아본 '진돗개월드' 모습.

한남정맥꾼들 사이에서는 '진돗개월드(보안회사)' 사진이 없으면 한남정맥 무효라는 예기도 있다!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짧게 치고 오르면 이내 만월산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되고,

 

사방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트이며 지나온 광학산 방향도 돌아보고,

 

동쪽으로는 소래산도 살짝 보인다.

 

남쪽 소래포구와 월곶 방향.

 

남서쪽 문학산 방향.

 

서쪽 인천항과 월미도 방향.

 

북쪽 만월산 정상부에 있는 만월정 방향.

 

<인천(仁川 )>

문헌에 나오는 인천의 최초 명칭은 미추홀(彌鄒忽)이다. 이 지역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475년)로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 한자식으로 바뀌어 소형현(召城縣)이 되었다. 고려 숙종(1095~1105) 때, 숙종 어머니의 내향(內鄕)이었던 관계로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승격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다시피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년)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환원되었다. 그것은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왕실과 관련이 있는 왕비가 탄생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경원부는 다시 인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 군.현 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현재의 인천으로 명명되었고, 그날(1413년 10월 15일)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이 제정되었다 한다.

 

 

능선을 따라 만월정 못 미쳐 전망이 트인 곳으로 이동하여,

동쪽 광학산(만수산) 방향으로 지나온 한남정맥 능선을 가늠해 보고,

 

만월재 구름다리에서 이어온 한남 능선도 조망하고,

 

다시금 돌아본 월곶 방향으로 바다도 살짝 조망되고,

 

인천항과 월미도 방향도 한층 뚜렷하게 보인다.

 

만월산에 오르니 인천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박무로 시야가 흐린 게 아쉽기만 하다.

 

 

'만월정' 옆을 지나,

 

걸어온 만월산 능선을 다시한번 돌아 보고,

 

만월산 정상에서 인천항을 배경으로 인증 사진도 남긴다.

 

태극기 집회에 온 것은 아니지만 계양산과 만월산 태극기를 배경으로.

 

좌측 월미도와 우측 청라신도시의 고층빌딩이 시야에 들어온다.

 

북쪽 계양구 방향.

 

<부평(富平)>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부(富平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이곳은 황무지였으나 농경지를 개척하여 넓은 곡창지대가 되었고, 수확량이 많았으므로 '부할 부(富)'자와 '평평할 평(平)'자를 써서 부평이라 하였다고 한다.

 

 

만월산 정상 인증은 권법사님 내외분께서!

 

<만월산(滿月山, 187m)>

인천광역시 남동구와 부평구의 경계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광학산 좌측 능선은 U자 형태로 서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고, 그 남서쪽을 만월산이 막아주고 있는 형태로, 인천가족공원묘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만월산(滿月山)의 원 지명은 '원통산(怨通山, 元通山, 圓通山)'이다. 이 산의 흙과 돌이 모두 붉은빛이라 '朱(주)'자와 산의 형국이 기러기가 나는 것 같다 하여 '雁(안)'자를 붙여서 주안산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1861년에 간행된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는 한문 표기에 '기러기 안(雁)'자를 '언덕 안(岸)'자로 바꾸어 주안산(朱岸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주안산, 선유산(仙遊山), 약산(藥山)이라고도 한다.

怨通(원통)이 元通(원통)으로 바뀐 것은 조선 영조 때 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원통산은 굴포운하 실패 이후 당시 주민들에 의해 붙여진 지명이다. 당시 공사에 동원된 인구를 읍지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동서정면의 인구를 가구당 3명으로 본다면 약 480여 명이다. 국가의 사업으로 인해 생업(농사)을 포기하고 부역에 강제로 동원된 것이 얼마나 억울하였겠는가! 이에 원통해서 원통(怨通)이란 지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만월산(滿月山)이란 이름은, 1920년경 보월(普月) 스님이 산 정상에 올라서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동서남북이 한눈에 다 보이고, 특히 산세가 인천 도심 쪽을 향해 좌우로 팔을 벌려 모든 만물을 감싸 안을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동방만월세계약사우리광불(東方滿月世界藥師琉璃光佛)이 계신 연원을 취한 데서 유래되었다.

 

가야할 한남정맥 능선의 산봉우리들을 가늠해 본다.

 

오늘 목적지인 백운공원도 가늠된다.

 

 

법성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의 흐름을 가늠해 보며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다가,

 

데크목 계단 길이 좌측으로 꺾어지는 지점에서 직진방향으로 가드레일이 트인 곳으로 내려가면,

 

 

'은혜유통'이란 한남정맥꾼들의 등대 역할을 하는 마트가 보이는 날머리로 내려서게 된다.

 

만월산 날머리로 나오는 백두들.

 

 

은혜유통을 끼고 골목길을 따라 진행하면 인천 남동구와 부평구 부평삼거리를 잇는 46번 국도가 나오고,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방향의 골목을 따라 진행하면,

 

 

지도에는 법성산이라 표시되어 있지만 동암산 입구라는 표지판이 걸려있는 들머리로 들어선다.

 

 

임도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우측으로 등로가 갈라지는 곳에서 3개의 화살표 방향 중 어느 방향으로 올라도 동암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물론 우리는 녹색의 화살표처럼 등로가 아닌 능선을 치고 오른다.

 

 

능선 마루에 올라 돌아본 만월산 방향.

 

지나온 광학산 자락에 있었던 인천가족공원묘원과 만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을 따라 잠시 더 진행하면 동암산 정상에 도착한다.

 

<동암산(銅岩山, 110m)>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봉우리로, 네이버 지도에는 법성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옛날 이곳에 구리광산이 있어서 동암산(銅岩山)이란 지명으로 불려진다는데, 정상에는 산불감시탑과 널찍한 공터에 군데군데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정상의 공터를 가로질러 능선길로 접어들어 잠시 진행하면, 자그마한 봉우리를 지나며 좌측 능선을 따르고,

 

잠시 후 송전탑을 지나,

 

조망이 트이는 주능선 자락에서 다시 우측으로 휘어지고,

 

이내 등로는 내림길로 이어진다.

 

 

좌측 십정과선교 아래로 1호선 전철이 지나가고 있는 동암산 날머리에 선다.

 

<십정과선교>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에 위치하며, 1호선 전철 철로를 건너는 교량이다. 다리 우측에 백운역이 자리하고 있다. 십정동(十井洞)은 우물이 열개 있어서 열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이곳을 흐르는 개울은 선래천(仙來川)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기라 한다. 옛날 이곳에 배(船)가 들어와 선래천(船來川)이었는데, 간척사업을 하면서 바다가 육지로 바뀌면서 '신선 선(仙)'으로 바뀌는 바람에 선래천(仙來川)이 되었다고 한다. 과선교는 옛날 배가 통과하는 다리라 하여 과선교(過船橋)라 부르는 모양인데, 지금은 배가 아닌 철마가 지나다니고 있으니..ㅉㅉ

 

백운공원을 지나서 다음 구간 가게 될 한남길을 가늠해 본다.

 

동암산 날머리로 내려서는 백두들.

 

 

십정과선교를 건너서,

백운공원 맞은편 부평아트센타 옆에 주차해 있는 버스에 도착하여,

 

 

한북정맥 여섯번째 산행을 종료한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먼지를 뜨뜻한 온탕에다 모두 두고서,

뒤풀이 장소인 비루고개 옆 수현 마을에 있었던 오가백숙으로 이동하여,

 

 

10여 년의 산행에서 등로 찾기가 가장 힘들었던 한남정맥의 기억을 소맥에 녹여 마신다.

 

함께해서 늘 감사하는 분들과 술잔을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알아서들 간다.

이곳에서는 택시로, 인천공원 앞에서는 버스로, 영등포에서는 전철로!

 

참으로 난감했던 한남정맥의 한 구간을 무사히 걸었다.

차가운 새벽바람과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철조망을 피하기도 넘기도 했다.

 

돌아서면 다시 만나는 군부대와 능선 사이로 얽히고 설킨 등로를

한 분의 낙오도 없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은

10년을 넘게 손발을 맞추어온 백두들이었기에 가능했다 생각한다.

 

다들 내내 평안하시고,

건강한 몸과 강건한 정신 끊임없이 정진하시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