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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금남기맥 4차(다듬재~수레재) : 광할한 황금빛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금강으로

by 재희다 2021. 10. 7.

산 행 지 : 금남기맥 4차(다듬재~수레재) 전북 익산시, 군산시.
산 행 일 : 2021. 09. 25.(토)
산행코스 : 다듬재/아리랑고개~미륵산성~우제봉(406m)~미륵산~간재선생길~석불사거리~바람공원~새말공원~도마마을~상마사거리~제내사거리~호남선철로~국도23호~용산리~함라초교~함라재~봉화산(23.63m)~칠목재~칠목봉(178.9m)~방령재~송전탑(#18)~수레재  (도상거리 약 25km, 8시간 30분 소요)
산행참가 : 3백두.

 

<산행지도>

 

 

지난 4월초에 금남기맥 산행을 시작하여 5월 둘째주에 다듬재까지 세번에 걸친 산행을 한 이후, 더운 날씨에 그늘이 없는 벌판길 구간인 석불사거리에서 함라마을까지의 12km를 걷는 게 싫어서 대전의 보만식계와 몇몇 명산을 다녔다. 사실 더운 날씨를 피해 쉬운 산행을 하려는 의도 였지만, 보만식계를 비롯하여 가리산 등 거의 대부분의 산행이 금번 금남기맥 산행보다 훨씬 더 고생길이었던 것 같다. 'X차 피하려다가 X차에 받친 신세!'라고나 할까. 또한 금번 금남기맥 4차 산행을 추석 전에 진행하려 하였으나, 일부 동행들이 코로나19로 격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연기되어 이번에 진행하게 되었는데, 최근들어 기온이 훨씬 낮아지며 오히려 다행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금번 금남기맥 네번째 구간은 들머리인 다듬재를 출발하여 미륵산만 오르내리고 나면, 그 이후부터 함라마을까지는 너른 벌판 도로 구간으로 평탄한 포장도로를 12km 이상을 지나게 되고, 이후 함라산과 봉화산을 지나 칠목재까지도 완만한 정비된 능선 등로가 멋진 쉬운 능선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산행 막바지의 칠목재~수레재 구간은 제대로 된 등로는 찾아볼 수 없고 표지기나 족적조차 희미한 거칠기 짝이 없는 구간으로, 길 찾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구간이므로 주의하여 지나야 하는 구간이다.

 

산행을 함께 하는 분들 카톡방에 산행이 공지되자 늘 함께 하던 서 여사님은 불문곡직 카톡방을 떠나시고, 총무님과 송 사장님은 당분간 산행을 쉬겠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권 전무님도 약속으로 후일을 기약하자고 한다. 보통 '당분간'이나 '후일'이라는 게 너무 애매한 표현이라 무기한 영원히 산행을 쉬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딸랑 창병씨와 둘이서 출발하게 되었는데, 지난밤 총무님으로부터 함께 가겠다고 연락이 와서 세 명이서 차량에 탑승하여 산행 들머리인 익산의 다듬재로 향한다. 

 

 

서울에서 5시에 출발하였으나 추석 연휴의 여진인지 고속도로에 일부 정체가 있었고, 근자의 세상사에 대한 너무 열띤 토론으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놓치고 회덕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예정보다 20여분 늦게 다듬재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다듬재/아리랑고개>
전북 익산시 금마면과 낭산면을 잇는 2차선 포장도로인 15번 군도가 지나는 고개다. 일명 아리랑고개라고도 부르고 점령, 뚜디딜재, 다디미재로 불리기도하며, 다듬잇돌이 많이 나오는 고개라 하여 다듬재라 불렀다고 한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수원백씨 천년 세천비'가 있는 수레길로 들어서면 '다듬재' 표지기가 걸려있고,

 

좌측으로 철조망 울타리를 끼고 미륵산을 향해 오르다가,

 

'정정렬 명창길'이란 표지목의 등산로 방향으로 조금 더 오르면,

 

<정정렬 명창길>
현대 창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국창 정정렬(丁貞烈)은 1876년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내촌리에서 태어났다. 근대 5명창(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중의 한 사람으로 7살 때부터 14살 무렵까지 박유전의 소리를 전승한 서편제 명창 정창업에게 소리를 배웠다. 스승 정창업이 타계한 이후에는 당시 국창으로 추앙받던 이날치에게 소리 수업을 받았으나, 16세에 이날치 역시 세상을 떠나자 이후 25년 동안 스승을 모시지 않고 본격적인 독공을 통해 소리 수련에 몰입했다. 익산 미륵산의 심곡사, 부여 만수산의 무량사, 공주 계룡산의 갑사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용맹전진 독공하니, 40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정렬제 판소리를 완성하였다.
정정렬의 소리제에 대한 대표적인 평가는 ‘좋지 않은 목으로 인한 부족한 성음을 다양한 음악적 변용을 통해서 신식 판소리로 확립했다’는 것이다. 즉 선천적으로 좋지 않은 목을 타고난 결점을 장단과 조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보충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정정렬의 소리는 사설이 장단보다 길게 붙여져 있거나, 또는 앞당겨 붙이거나 엇붙이는 방법 등 다양한 붙임새를 보인다. 그래서 고수들은 정정렬의 소리를 맞추기 어려웠다고 한다. 또한 소리의 조와 음질을 변화시켜서 소리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밋밋한 발성보다는 음을 흔들어 극적 표현을 살린다거나, 밝고 씩씩한 표현보다는 구슬픈 느낌의 계면조 선율이 많았다. 정정렬은 이처럼 소리꾼으로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에 걸친 수련과 음악적 변화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제를 만들었고, 일제강점기 청중들의 정서와 부합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대다수의 판소리 공연자들이 그의 소리를 배우고자 하여 당시 활동했던 명창들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교육 활동을 하기도 했다.
저술 및 작품으로, 1937년에 발매된 ‘빅터 판 「춘향가 전집」’은 정정렬의 탁월한 연출력을 잘 보여주는 음반이며 지금도 최고의 창극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 정정렬의 독집 음반은 「춘향가」, 「적벽가」, 「심청가」 등 전통 판소리뿐만 아니라 「숙영낭자전」, 「옥루몽」과 같은 창작 판소리도 포함되어 있어 그의 창작 능력을 잘 보여준다. 또한 창극 전집은 폴리돌 판 「심청전 전집」과 「화용도 전집」, 빅터 판 「춘향전 전집」, 오케 판 「춘향전 전집」 등으로, 이를 통해 정정렬의 치밀한 연출력의 일면을 볼 수 있고, 다양한 명창들의 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 「신연맞이」가 있다.
선생은 창극 형식의 판소리 정착 등 많은 일을 창의적이고 열정적으로 추진하던 중, 1938년 3월 21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평생 동안 김여란을 비롯하여 김소향,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등 20세기 판소리계에서 이름을 날린 수많은 여류 명창과 이기권, 백점봉, 김연수, 조상선, 박동진 등의 명창들에게 소리를 가르쳤다. 선생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여러 제자 중에서 정정렬제 소리의 계승자로 이름이 높은 이는 중요무형문화재 5호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은 김여란이다. 그 뒤를 이어 김여란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던 최승희가 정정렬제 판소리를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내 미륵산성 성곽이 나타난다.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미륵산성 성곽 모습. 

 

<익산 미륵산성(益山彌勒山城)>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둘레 1,822m,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지금은 문지(門址)•수구문(水口門)•옹성(壅城)•장대지(將臺址)•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일명 기준성(箕準城) 또는 용화산성(龍華山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금마면 북방 3㎞ 지점의 높이 430m를 최고봉으로 하는 미륵산 동 사면을 감은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성벽은 할석을 이용하여 내외협축(內外夾築 : 속을 단단히 다지고 겉을 쌓음)을 한 흔적이 보이는데, 성내에서는 ‘金馬渚(금마저)’라고 새겨진 백제기와조각과 백제도질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동문 안 건물지에서는 고려와 조선조의 기와 편도 발견되었다. 익산 지역은 5세기 중엽부터 백제 지방의 중심세력이었고 7세기를 전후하여 금강변의 웅포 지역보다 내륙에 위치한 금마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산성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 전하는 준왕(準王)이 쌓은 성이라 하여 기준성(箕準城)이라는 전설도 있으나, 마한의 여러 나라 중의 하나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산성도 그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려초에 전주를 근거로 할거하였던 후백제의 신검이 부왕 견훤을 쫓았을 때 고려 태조가 이를 토정(討征)하여 마성(馬城)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 그 마성이 바로 이 산성이다.

 

 

최근에 보수된 듯 보이는 성곽을 따라 오르면,

 

등로는 좌측 성곽 위로 이어지고,

 

성곽 위에 올라서 돌아본 용화산 방향의 조망이 맑게 펼쳐져 있다.

 

 

미륵산을 향한 등로는 보수되지 않은 옛 성곽 위로도 이어지다가,

 

잠시 암릉을 오르면 옛 헬기장터쯤으로 보이는 우제봉(405m)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미륵산 정상인 장군봉은 좌측 능선으로 진행해야 한다. 

 

동북쪽 대둔산 방향.

 

동쪽 용화산과 천호산 방향.

 

동남쪽 완주군 방향.

 

살짝 당겨본 지나온 금남기맥 방향.

 

 

전망 좋은 공터봉을 뒤로하고 좌측 능선을 따라 미륵산 장군봉으로 향하면 이내 좌측으로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잠시 능선 오름길을 오르면 정상 주변으로 데크목 전망대가 둘러진 미륵산 정상 장군봉에 도착한다.

 

<미륵산(彌勒山, 430m)>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삼기면·낭산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원래 이름은 용화산이었으나, 미륵사가 지어진 후부터 미륵산이라고 부른다. 또한 봉우리가 사자의 형상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자봉이라고도 한다. 마한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이곳에는 미륵산성이 축성되어 있는데, 성곽의 둘레가 1,822m이다. 미륵산성은 정상인 우제봉에서 동쪽으로 둘러쌓았으며 성문에는 옹성을 설치하였다. 기름 한 말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큰 홈이 패인 등잔암 외에 4m의 높이에 구멍이 나 있는 투구바위, 안질에 좋다는 약수터, 사자암, 심곡사, 왕궁탑 등 명소와 볼거리가 많다. 주변에는 익산 미륵사지 외에도 익산쌍릉,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보물 45),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보물 44), 가람 이병기 생가 등 중요한 문화유적이 많고, 금마면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유명한 왕궁온천이 있다. 금마면, 왕궁면 등에 숙박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 산은 천호산의 줄기가 동서로 가로질러 이룬 산으로 북으로는 황산벌이 보이고 남으로는 멀리 호남평야를 바라보는 평지에 우뚝 솟아 있으며, 이 산에서 발원하는 도천, 부상천, 궁평천, 등은 만경강의 상류를 이루며, 서해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산의 최고봉을 우제봉이라 하고 조금 낮은 앞 산봉을 장군봉이라 하는데, 장군봉에는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쓴 것 같은 모양으로 생긴 까닭에 투구 바위라고 부르고 있는 바위가 있다. ‘여지승람’ 익산군 산천조에서는 “장군봉은 용화산에 있는데, 남쪽에 있는 바위에는 두어말의 기름을 녹일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어 이 바위를 등잔암이라 한다”라고 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말하는 등잔암은 지금의 장군봉 산정에 있는 투구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의 남록에 있는 거북바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바위에는 가로 70cm 세로 50cm 정도의 구멍이 파여져 있다.  미륵산 안에는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사자암, 죽사(지금은 없다. 사자암 서쪽으로 백보 거리에 있었음), 수백암(지금은 없음, 사자암 남쪽으로 이백보 거리에 있었음), 영혈사(지금은 없음. 수백암 북쪽으로 1리의 거리에 있었음), 명적암(지금은 없음, 사자암 동쪽으로 이백보 거리에 있었음), 천장암(지금은 없음), 명적암 (사자암 동쪽으로 2리 거리에 있었음), 심곡사(현존), 석불사, 태봉사, 장안사지 등 절터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서 볼 때 이 산은 백제, 신라, 고려 대를 이어 이 지역의 불교문호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산 위에는 기준성이라 불리는 미륵산성터가 있으며, 중턱에는 백제의 도요지가 여러 곳에 있어 삼족토기 등 백제 토기를 이곳에서 구워냈음을 알 수 있다.(여러 기록의 장군봉과 우제봉이 헛갈림)

 

한켠에 세워진 미륵산 정상 이정목에서 금남기맥길은 좌측 약수터 방향이다.

 

서쪽 익산시 삼기면 방향으로는 황금빛 들판이 가을이 다가섰음을 알려주고 있다.

 

<익산시 삼기면(三箕面)>
익산시 삼기면은 마한 땅인데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합병하여 금마저(金馬渚)라 하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쳤다. 고려초에는 전주에 속하였다가 충혜왕(忠惠王) 5년(1344)에 익주(益州)로 승격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제면과 구문천면, 율촌면 등 3개 면이 합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1995년 도농통합에 따라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어 익산시로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기면의 지명은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삼기산(三箕山)에서 이름을 따왔다. 원래 삼기산이란 지명은 인근의 미륵산과 대비해 생긴 말로, 미륵산이 우람하고 높은데 반해 삼기산은 작은 새끼 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 ‘새끼뫼’라 한 데서 왔다. 새끼뫼가 음변해 '세끼메'가 되었으며 이것이 다시 변해 ‘세(三) 기(箕) 뫼(山)’, 즉 삼기산으로 굳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미륵산 장군봉 정상 인증.

 

 

미륵산 정상 인증을 남기고 약수터 방향으로 내려서니 바로 미륵산성 안내판과 쉼터가 있다.

 

쉼터에서 바라본 남동쪽 익산시 왕궁면과 완주 방향.

아래쪽 저수지가 금마저수지이고, 우측 멀리로 아파트가 있는 곳이 전주시다.

 

 

쉼터 벤치에서 커피와 주전부리를 나누며 잠시 여유를 부리다가 미륵산 정상부를 뒤로하면,

 

소불알을 닮은 바위가 눈길을 끌고,  

 

좌전방으로 익산시가 조망된다.

 

<익산시(益山市)>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노령산맥의 지맥인 천호산과 미륵산이 동부에 아름다운 산세를 이루고 있다. 서북부에 함라산 줄기가 이어져 남서로 향하는 구릉과 대,소하천이 비옥한 평원을 이룬다.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 논산시와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다. 호남선이 남북으로 중앙을 관통하고 익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전라선과 군산선(장항선)이 동서로 통과하며. 호남고속도로는 동부를 지나 금마 진입로에 있고, 1번 국도와 23번 국도 외 10여 개의 국도, 지방도 등 전국 각지를 이을 수 있는 편리한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다. 익산은 서해와 옥구, 김제평야를 어머님 품안으로 껴안고 있는 형상이다. 배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류가 유통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일맥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전라북도 익산은 전국에서 수도를 가장 많이 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문명이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축으로 우리나라에서 네 번이나 수도였다. 첫 번째 수도는 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8년경에 남하하여 금마에 수도를 세웠고, 두 번째는 마한의 수도로써 금마지역은 마한 54개국을 총괄하던 도읍지였다. 세 번째는 보덕국의 수도로써 고구려 왕손 안승이 세운 나라이다. 네 번째는 백제의 무왕이 익산 왕궁으로 천도한 것으로 백제의 유일한 왕궁터가 남아 있다.

 

 

미륵산성의 치성 부분을 지나자,

 

치선 안내판.

 

이내 미륵사지 방향 갈림길인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직진의 능선길은 익산 미륵사지로 이어지고 금남기맥은 우측 아래로 이어진다.

 

<미륵사지(彌勒寺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었던 삼국시대 백제 제30대 무왕 당시 창건한 사찰로, 삼국시대 절 가운데 백제의 절로는 최대 규모이다.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행차하였을 때 용화산(龍華山)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으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였으므로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움으로 못을 메워 절을 창건하였다. 2013년부터 시작된 보수정비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절을 창건한 사람이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절에는 미래불인 미륵이 3회의 설법으로 미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龍華三會說)에 입각하여 전(殿)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이 절터는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化公主)와의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719년(성덕왕 18) 9월 금마군(金馬郡)의 미륵사탑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한다. 이는 미륵사의 탑에 벼락이 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1407년(태종 7)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資福寺刹)을 정할 때 충청북도 청주의 보경사(菩慶寺), 전라북도 임실의 진구사(珍丘寺) 등의 여러 사찰과 함께 자복사찰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사찰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가 있으며,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2년 절터 주변에 흩어진 옛 석재들을 일부 재사용하여 동탑(東塔)을 복원하였다.

 

미륵(彌勒)이란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줄임말로 불교 용어다. 그 뜻은 도솔천에 살며 지금은 천인(天人)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중이나, 석가가 입멸(入滅)한 지 56억 7천만년 후에 미륵불로 태어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미륵신앙은 삼국의 불교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신앙이었다. 물론 어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해 민중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된 미륵신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 한 것으로, 이것은 자비를 갖춘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비라는 것은 포용력을 가지고 인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는 말로서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미륵사지 방향 능선길을 두고 우측 아래로 이어진 소나무 능선길로 들어서자,

 

좌전방으로 익산시와 황등면 방향의 황금빛 들판이 조망되고,

 

제법 가파른 능선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면,

 

이내 등로는 완만해지면서 데크목 등로가 나타나는데,

 

이런 멋진 산길에 데크목 포장길이 왜 필요한지 불현듯 의문이 들고, 

 

잠시 후 데크목 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은 금마면 기양리 방향으로 이어지고 금남기맥은 우측 길을 따르게 된다. 

 

이정표에서 금남기맥은 간재 선생 묘소 방향이다.

 

<간재 전우(田愚, 1841∼1922)>
간재 전우는 전라북도 전주 출신의 조선 말기의 한학자로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구산(臼山)•추담(秋潭)으로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1882년(고종 19) 이후 수차례에 걸쳐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가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이 승낙하지 않았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등으로 이어지는 영남 기호학파의 후예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임금에게 을사오적을 참수하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暀嶝島)•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으며, 부안•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전우의 성리학 연구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있어서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도학군자만을 자부하고 있었고, 또한 파리장서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며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즉 김평묵(金平默)은 “간재는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하였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전우 자신은 정통 왕권(王權)의 계승만이 국권의 회복이라 생각했고, 파리장서(巴里長書)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이적(夷狄)을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하여, “이는 척화를 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의 간섭을 자초하는 일이니 열강의 세력을 빌려 이들에게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라고 거절하였다. 전우의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다.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등에 제향 되었다.

 

 

우측 간재선생 묘소 방향 등로로 들어서자 멋진 수레길이 이어지더니,

 

잠시 후 기맥 길은 따르던 등로를 두고 우측 숲길로 들어서게 되고,

 

이내 좌.우로 갈림길이 있는 사거리가 나오는데, 

'간재선생길'은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금남기맥은 직진의 능선으로 들어서야 한다.

 

사거리 이정표.

 

 

작은 오솔길 수준으로 변한 등로를 따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다시 우측 길로 들어서면,

 

연안이씨 가족묘지가 나오고, 묘지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서면,

 

잠시 전에 헤어졌던 '간재선생길'에 다시 접속하여 좌측 아래로 내려선다.

 

 

숲길을 벗어나자 '간재선생길'은 좌틀하여 진행하라는 죽청마을 갈림길 이정표가 나오고,

정면으로 보이는 죽청마을 방향 도로를 두고 좌틀하여 간재선생 묘소 방향으로 들어서면,

 

갈림길 이정표.

 

기맥길은 우전방으로 보이는 황금빛 들판 건너편의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어진다.

 

 

황금빛으로 변하는 논 사이의 농로를 따라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는 주택 방향으로 진행하면,

 

길은 주택을 좌측에 두고 뒤편으로 이어지고,

 

길은 주택 앞을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로 이어진다. 

 

돌아본 아담한 전원주택.

 

 

기맥길은 코스모스가 핀 도로를 따라 이어지며,

 

좌측 코스모스 꽃밭 너머로 익산시의 높다란 건물이 살짝 보이는데,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무척이나 어여쁘고,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만나 도로를 건너 직진하니,

 

도로는 밭 사이 농로로 이어지며,

 

돌아본 미륵산이 어느새 저만치로 멀어져 있다.

 

 

농로와 밭두렁의 구분이 모호해지며 알 수 없는 묘목이 식재된 밭을 가로질러 진행하면,

 

다시 능선 위로 이어진 농로에 접속하게 되고,

 

농로를 따르다가 다시 우측의 희미한 소로로 접어들어 진행하면,

 

농로는 운수업 사업장으로 보이는 마당으로 이어지더니,

 

SK주유소와 삼기가든이 있는 도로에 접속하여 우측 석불사거리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돌아본 기맥길 모습. 

 

 

이제부터 함라산 아래의 함라마을까지는 계속 포장도로를 따르게 되는데,

석불사거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달리는 라이더들이 부럽기만 하고,

 

잠시 후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의 석불사거리에 도착하여,

 

<연동리 석불 마을>
연동리 석불 마을은 이곳에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보물 제45호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이 있어 붙어진 이름이다. 이 석불좌상은 당당한 어깨와 균형 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하면서도 우아함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 불상 중 가장 큰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 백제시대 불교문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금남기맥길은 직진의 논산, 함열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지만, 좌측의 석불사를 잠시 둘러보기로 한다.

 

 

익산 석불사.

 

<익산 연동리 석불사(石佛寺)>
삼기면 연동리에 있는 한국불교화엄종 본산으로 백제 무왕(武王, ?~641) 때인 7세기경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찰이다. 석불사 대웅전에는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益山蓮洞里石造如來坐像)이 봉안되어 있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의 석불사는 언제 폐사되었는지 전하지 않고 지금의 사찰은 1990년대에 중수하였다.
절터에서 발견된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륵전을 짓고 ‘석불사’라고 명명하였다는 사실만 전한다. 현재의 석불사는 1990년대에 이르러 새로이 법당을 건립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삼성각과 종각, 석탑, 일주문 등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석불사의 연동리 석불은 땀 훌리는 불상으로 유명하다.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

 

 

 

석불사를 나와 앞서간 분들을 따라잡기 위해 '익산 제3 일반산업단지'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데,

 

좌측으로 잔디와 고구마 밭이 파란 가을 하늘과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고,  

 

'익산 제3 일반산업단지'로 들어서는 교차로에서 좌틀하여 진행하면,

 

우측으로 넓은 '익산 제3 일반산업단지'의 공장들이 보이고,

 

'익산 제3 일반산업단지' 도로가 좁아지는 끝 지점에서 우틀하면,

 

좌측으로 바람공원이라 표시된 작은 소공원 앞을 지나게 된다.

 

 

'익산 제3 일반산업단지' 도로에 자전거 경주로 우회하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포장도로를 걷느라 발바닥에 통증을 느끼는 산꾼들은 자전거가 무척이나 부럽기만 하다.

 

 

길게 뻗어있는 도로를 따르다가 좌측 공원으로 들어서니,

 

'세말공원'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앞쪽으로 보이는 정자에서 간식을 나누며 쉼을 한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함라마을에 가서 맛있는 백반을 점심으로 먹자며 다시금 힘든 포장도로 걷기에 나서며,

 

돌아본 미륵산이 많이 멀어져 있다는데 잠시 위안을 삼으며 도로를 따라 금남기맥을 더듬으니,

 

드디어 기맥길은 '익산 제3 일반산업단지' 도로를 벗어나 농로로 들어선다.

 

 

기맥길은 KTX호남선 철길 아래로 이어지고,

 

상마사거리에서 좌측 상마 방향으로 진행하면,

 

형제농원 앞을 지나게 되고,

 

우전방 멀리로 가야 할 함라산에서 봉화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금남기맥 능선이 보인다. 

 

 

황금빛 벌판으로 이어진 수로 옆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수로가 능선 위로 설치된 것은 주변 농지보다 높아서 농지에 물을 공급하기가 좋아서인 듯 보이고,

 

길 옆 황토밭에서는 고구마 수확이 한창이다.

 

돌아본 미륵산 방향.

 

 

기맥길은 수로를 좌우로 넘나들며 이어지다가,

 

진주정씨 세천비가 세워져 있는 문중묘지 앞을 지나는데, 옆에 있던 분이 '세천'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다.

 

<세천비(世阡碑)>

선산 입구 등 선산 근처에 세워 그 문중의 선산임을 나타내며 문중이나 문중 선조들의 치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기록으로 남기는 비석을 말한다. 또한 세천비에는 가문과 선산의 내력 그리고 비를 세우는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하기도 한다. 한자 해석으로만 본다면 여러 대(세世)의 무덤길(천阡)이며, 선산(선영)의 묘소 안내표지로 세장지지(世葬之地: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땅)를 가리키는 용어다. 즉 세천이란 세대(30년)를 천개나 지난다는 뜻이 숨겨져 있으며, 여러 대를 내려오며 선산에 조상의 산소를 모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전남 강진에서 천안을 잇는 국도 23호선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잠시 진행하다가 도로를 건너 우측 소로로 들어서서 진행하면,

 

호남선 철길 용산리 건널목을 건너서 우측으로 진행하고,

 

호남선 철도 남쪽 황등역과 익산역 방향.

 

다시 국도23호선 아래로 이어지는 굴다리를 통과하면,

 

잠시 비포장 도로가 이어지는데 주변에는 닭을 키우는 양계장이 많이 보인다.

아마도 옛부터 익산이 양계로 유명하고 그런 연유로 '하림'같은 대형 기업도 이곳에 있는 듯하다.

 

 

다시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잠시 진행하자 용산리 표석이 세워진 용산삼거리를 지나게 되고,

 

구자 마을 표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는데, 구자 마을은 거북이 앉아있는 형태라 하여 '거북 구(龜)'에 '앉을 좌(座)'인 '구좌'였으나 한자 기록이 어려워 음이 비슷한 구자(九子)로 변형되어 전해진다고 한다.

 

 

그렇게 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걷다가 발바닥 통증의 고통으로 길가 소나무 그늘에서 쉼을 한 후,

 

성큼 다가선 함라산 아래의 함라마을을 향하면,

 

길 가 논두렁의 억새가 가을이 왔음을 대변하고,

 

커다란 봉곡마을 표석도 지나면,  

 

이내 마을 복지회관 건물이 도회지의 건물처럼 커다란 갈마마을을 지나는데,

지도에는 이곳이 길마재라 표시하고 있다.

 

갈마(渴馬·갈마골)는 마을이 야산 속에 들어 있어서 갊아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갊아골’이라 했다고도 하고, 또 풍수설의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에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마침내 들판 포장도로 12km 남짓을 걸어 함라마을 앞 행동교차로에 도착하고,

 

넓은 4차선의 711번 지방도를 건너니 좌측에 100년 전통의 함라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고,

 

마침내 삼부잣집으로 유명하고 함라면 소재지인 함라마을로 들어선다.

 

<함라(咸羅) 마을>
'함라'라는 명칭은 이곳의 주산인 함라산에서 취한 것으로 전해지며, 홍길동전의 작자로 유명한 허균이 1611년(광해군 3)에 함열로 귀양을 와 유배되어 있는 동안 시가(詩歌)를 96권으로 묶은 '성수시화' 등 여러 작품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뒤의 함라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옆으로 부를 가져온다는 길상(吉祥)의 의미로 알려진 소가 누워있는 형세에서 따온 와우산이 마을 전체를 싸고 있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일찍이 부유한 농촌으로 자리 잡았다.

 

 

함라마을을 통과하는 구 711번 지방도를 건너 파출소 옆길로 진행한다.

 

금남정맥은 이곳 갈림길에서 좌향 하여 함라우체국을 끼고 우틀하여 골목을 따라 진행하다가 능선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우리는 '익산 둘레길' 중 '양반길'로 들어서서 '함라마을 옛 담장'과 '삼부자 집' 사이 양반길로 진행하기로 한다.

 

양반길로 들어서는 모퉁이에 '참봉 조용균 화갑 송덕비(參奉趙容奎花甲頌德碑)'가 세워져 있는데, 화갑(花甲)은 화갑(華甲)과 같은 말로, 화(華) 자에는 십(十)이 여섯개에다 일(一)이 하나 있으므로 61세를 나타낸다고 한다.

 

 

고택과 토담이 이어지는 골목길로 들어서서 함라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함라산 둘레길'과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 안내판 그리고 삼부자집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함라마을 삼부자집은 돌담길 좌측에 이원배가옥이, 그리고 우측에 조해영가옥과 김안균가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조해영 가옥(趙海英家屋,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조해영 가옥은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고가로, 본래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 1동과 별채 1동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상량문에 ‘대정(大正) 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 또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은 정남향에 가까운 남남서향이며 건물들의 전체적인 배치는 알 수 없다. 안채와 별채는 모두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남쪽으로, 별채는 서쪽으로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안채의 난간은 상당히 훼손되었으며 모든 건물의 기와가 퇴락하였다. 또 일부 건물은 누수공사가 필요한 곳도 있어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나쁘다.

 

<김안균 가옥(金晏均家屋,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3호)>
김안균 가옥은 대지 2,318평, 건평 188평으로,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상류 가옥의 변모를 보여주며 조선 말기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구조와 의장에 일본식 수법이 가미되었다. 서양식을 본떠 거실과 침실을 구별하였고,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두르고 유리문을 달아 채광을 조절하였다. 사랑채 옆에는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을,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배치하였다.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정교한 아자(亞字) 난간을 둘렀으며, 주춧돌은 정교하게 잘라낸 희고 매끄러운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행랑채 끝에 정문(旌門)이 있고, 곳간은 정면에 기둥을 세워 지붕을 연결한  포치 형식으로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서 통로로 이용하였다. 뒤쪽 집들을 사들여 점차 넓힌 탓에 넓은 대지에 비해 건물이 앞쪽으로 몰려 있다.

 

김안균 가옥의 지어진 시기는 1922년으로, 조해영 가옥의 1918년 보다 뒤에 지어졌다. 두 집은 어느 집이 더 크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저택인데, 당시 엄청난 부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방 이후 농업 비중이 70%를 상회하였으므로 이 두 집은 엄청난 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이 지어진 내력을 보면 두 집안은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누가 더 부자인지 서로 경쟁을 하듯이 집을 지었는데, 처음 조해영 집안에서 집을 짓자 김안균 집안에서 저 집보다는 더 크고 화려하게 짓겠다고 해서 여러 면에서 한 단계 더 고급으로 지어진 집이 김안균 가옥이다.
그러나 정해영 가옥의 대문이 솟을대문이고 김안균 가옥의 집 대문이 평대문인 것을 보면 아마도 정해영 가문이 지체가 더 높았을 것이다. 솟을대문은 원래 종이품 즉 참판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대문이므로, 김안균 가문은 솟을대문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을 더 화려하게 지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집 양식을 보면 조해영 가옥이 더 일본풍을 따르고 있고 김안균 가옥은 전통한옥을 고수하면서도 은근히 일본풍을 도입하였다는 차이점이 있다.(펌)

 

우측 골목에 조해영 가옥의 솟을대문이 보인다.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 안내판.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
함라마을의 옛 담장은 주택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담장이 높은 점이 특징이다.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밖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섞여 있고, 담장 일부는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 흙과 짚을 혼합하여 축조되었다. 마을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덧붙인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다.

 

 

돌담길을 잠시 따르니 '익산 둘레길' 안내판과 '함열현 관아터' 설명판이 있는 공터를 지나고,

 

<함열현 관아 터(咸悅縣 官衙址)>
전(前) 함열현(현 함라면, 황등면, 함열읍, 웅포면, 성당면)은 마한(馬韓)의 땅으로 함해국(咸奚國)이었으나, 백제 때 감물아현(甘勿阿懸)으로 개칭되어 오다가 삼국통일 후 신라 경덕왕 때 임피군의 관할하에 함열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초에는 전주에 속하였고, 1176년(고려 명종 6년)부터 감무(監務)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1409년(조선 태종 9년) 용안현과 합하여 안열현(安悅縣)이라 하였다가 7년 뒤 다시 함열현으로 복구되어 이후 조선 5백 년 동안 현청(縣廳) 소재지로서 관아가 이곳에 있었으며, 1895년(고종 32년) 함열군으로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익산군 함라면으로, 1995년 도농 통합으로 익산시 함라면으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관아지에는 동헌(東軒), 내아(內衙), 책실(冊室), 향청(鄕廳), 장청(將廳), 객사(客舍), 질청(作廳), 형리청(刑吏廳), 사령방(使令房), 통인청(通引廳), 현사(縣舍), 향교(鄕校) 등이 있었으며, 현감 아래 6방(吏, 戶, 禮, 兵, 刑, 工房)이 지방행정을 수행하였고, 함라 노소의 함열현 선생안, 호남읍지, 함열현지에는 1453년(단종 1년) 이후 현감의 명단이 기록 보관되어 오고 있다. 안내판 좌측에 그려진 고지도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1872년(고종 9년)에 그린 함열현 지도로서 그때 당시의 관청 배치, 도로망 등을 잘 알 수가 있다.
이곳 함열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한 허균(許筠 : 1569~1618)이 10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한 곳이고, 조선 24대 헌종(憲宗)의 비인 효정왕후(孝定王后)의 출생지로, 효정 황후는 부인 익풍부원군 영의정 홍재룡이 함열 현감으로 재직 시(1831년) 함열현 관사에서 출생하였다.

 

익산 둘레길 종합 안내도.

 

<백제의 숨결 익산 둘레길>
'백제의 숨결 익산 둘레길'에는 추억과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삶과 지역의 역사·문화를 되살리고 자연생태를 연결하여 만든 걷고 싶은 길입니다. '백제의 숨결 익산 둘레길'은 함라산 일원을 중심으로, 3부잣집과 돌담길이 있는 양반길, 야생 녹차밭 명상길, 고분전시관이 있는 역사길, 수려한 경관이 펼쳐진 병풍길, 천년고도 사찰 숭림사와 함께하는 건강길 등 총 13.8km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어지는 둘레길에서 백제인의 숨결과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시기 바랍니다.(안내판에서 펌)

 

잠시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작은 '함라산 갈매기' 식당 간판이 있는 곳에서 우측의 도로를 따라 식당을 지나 오르면,

 

'겟세마네 기도원' 입구에서 좌측 '야생차 군락지(명상기) 2.5km' 이정표를 따라 등로로 들어선다.

 

 

논둑길을 지나 잠시 오르면,

 

우측 수동마을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야생차나무군락지' 방향 오름길로 들어서고,

 

널찍한 수레길 수준의 오름길을 따라 오르면,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야생차나무군락지' 방향은 함라재로 이어지고,

우리는 함라산 정상을 다녀오기로 한 터라 우측 길로 들어서면,

 

이내 함라산에서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에 접속하여 우측 함라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갈림길 이정표.

 

 

함라산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면,

 

우측으로 아침에 지나온 미륵산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걸어온 벌판이 한눈에 조망되고,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이내 널찍한 공터에 벤치와 금속 정상 표시가 있는 함라산 정상에 도착하는데,

함라산 삼각점은 이곳에서 100여 미터 더 가면 나오는 헬기장에 위치하고 있다. 

 

<함라산(咸羅山, 241m)>
전라북도 익산시의 함라면 함열리와 웅포면 웅포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조선 시대 함열현의 별호인 '함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함라는 함열(咸悅)의 별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열)에는 "함라산은 현의 서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라는 내용이, 『조선지지자료』(함열)의 군내면에는 "함라산(함나산)은 읍내 서북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함열), 『대동여지도』(함열), 『1872년지방지도』(함열), 『한국지명총람』에도 표기자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함라산의 서쪽에는 우물 묵정(墨井)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우물이 깊속하고 검푸르며 모래와 돌이 검기 때문에 묵정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함라산의 물줄기는 금강으로 합수되어 서해로 흐른다. 함라산 정상에서는 산줄기가 맞닿은 금강 연안이 조망된다.
함라산은 가족 등산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함라산의 등산로는 지역민도 자주 이용한다. 특히 정상에서 한눈에 들여다 보이는 금강과 드넓은 들녘은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또한 호남평야와 웅포관광단지를 내려다볼 수도 있다. 함라산을 이용하는 등산객이 늘면서 등산로를 정비한 상태이다. 등산객의 편의를 위하여 정자와 같은 휴식 장소를 마련하였다. 함라산의 북쪽 산기슭에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창건된 숭림사(崇林寺)가 있다. 함라산의 서쪽 봉우리인 소방봉(所方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함라산 정상에서 본 미륵산 방향의 들판 조망.

 

함라산 서쪽으로 보이는 금강 조망.

 

금강 상류 부여 방향. 

 

금강 하류 군산과 장항 방향.

 

함라산 정상 인증.

 

 

함라산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와 함라마을 갈림길을 지나면,

 

 

함라재/웅포재를 건너는 데크목 다리를 지나게 되고,

 

<함라재/웅포재(熊浦峙)>
웅포재/함라재는 금강변의 웅포리(곰개)에서 평야지대인 함열리를 잇는 가장 짧은 산마루 고갯길이다. 관련 지명인 웅포면, 웅포나루터 등이 여러 사료에 수록되어 있다. 예전부터 이 길로 많은 사람과 물건이 넘나들었는데, 이 길에는 짐꾼들이 금강을 따라 웅포항(곰개나루)에 들여온 진귀한 상품과 풍성한 농수산물을 보따리와 지게에 실어 함라로 나른 선조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재 아래에는 금광이 있었고, 숲이 울창하여 호랑이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삼부자집을 드나들던 과객들의 사연, 함라로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의 추억 등 수많은 사연과 전설이 곳곳에 숨어 있는 곳이다.

 

함라재 이정표.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함라마을에서 금남기맥 능선을 따르면 오르게 되는 202.8 봉을 지나게 된다.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익산 둘레길 구간이라 그런지 등로가 멋들어지게 이어지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샛길로 잠시 들어서니,

함라마을로 이어온 금남기맥 능선과 미륵산이 멀지않게 조망되고,

 

그 우측 익산 방향으로는 넓은 벌판이 아득하니 펼쳐져 있다.

 

살짝 당겨본 미륵산 방향의 금남기맥 능선.

 

 

다시 기맥 능선으로 복귀하여 멋진 능선길을 따르다가,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사각 정자가 자리한 함라산 소방봉/봉화산 정상에 도착한다.

 

<봉화산(烽火山, 236.3m)>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신대리와 웅포면 웅포리, 임정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익산의 북단에 자리 잡은 봉화산은 호남평야의 한가운데에 솟아있어 주변으로 조망이 좋다. 산 정상에 있었던 봉화대는 동쪽으로는 용안현 광두원산(봉화산)과 서로는 임피현 오성산 봉화대에 응했다.

 

봉화산 정상에서 본 군산 방향.

 

빛바랜 함라산 소방봉 봉수대 안내판.

 

<함라산 봉화산/소방봉(所方峰, 236.3m) 봉수대>
소방봉 봉수대는 제5직봉(여수~서울 목멱산)에 속해 있으며 "서쪽으로 임피현 오성산 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용안현 광두원산 봉수와 응한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고, 함열읍지에는 봉수군 75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동쪽 익산 방향의 함라면과 황등면 들판 조망.

 

서쪽 웅포/곰개나루 방향.

 

웅포(곰개나루)는 공주와 부여를 지나온 금강 물줄기가 남하하다가 남서쪽으로 급히 꺾이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루의 언덕 위에 서면 금강과 서해바다의 합수지점이 보일듯말듯한 곳이다. 왜구들이 자주 발호하던 시절에는 망루 역할을 했고, 금강 하구둑이 생기기 전에는 조운선과 고깃배가 드나들던 곳이었다고 한다.

 

북쪽 부여 방향.

 

살짝 당겨본 베어리버 골프장 전경.

 

봉화산 정상에서 금강하구 방향을 배경으로.

 

 

봉화산을 뒤로하고 가드 로프가 있는 계단길을 내려서면,

 

우측 산림문화체험관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갈림길 이정표.

 

호젓한 능선 숲길을 따르면,

 

좌측 황등면 벌판이 살짝 보이기도 하며,

 

벤치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를 지나는데, 선답자의 산행기에 충남 산꾼 서래야님의 '와우봉(169.5m)' 표지기가 걸려있다던 곳에는 쓰레기를 되가져 가라는 호소문이 걸려있다.

 

 

계속해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좌측 입남마을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입남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

 

벤치가 있는 154.6m 봉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면,

 

우측으로 이리중앙교회 수련관쯤으로 보이는 건물이 내려다 보이고,

 

묘지 조성을 위해 나무를 배어버려 흙이 훤히 드러나 있는 능선 길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금강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양쪽으로 묘지가 조성된 능선길을 지나, 

 

그닥 가파르지 않은 오름길을 오르고,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완만한 내림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앞쪽으로 칠목재가 내려다 보이고,

 

이내 722번 지방도가 지나는 칠목재에 도착한다.

 

<칠목재(七牧峙)>
칠목재는 우측 웅포면과 좌측 함라면을 잇는 722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함라면 소룡(巢龍)과 칠목 마을을 합쳐서 1972년 한 마을이 되었는데 소룡은 남병산에 쌓여있어 마치 용이 서리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풍수지리설에 따라 취해진 이름이며 옛 기록에는 소농(巢農)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칠목은 웅포로 가는 고갯길 옆이므로 길목의 전라도 사투리인 '질목'이 변음되어서 칠목이 되었다고 한다.
칠목재 구릉 중턱에는 백제 시기의 무덤인 익산 입점리 고분군이 있는데, 1986년 한 고등학생이 이곳에서 칡을 캐다가 금동제 모자 등을 발견하여 신고하게 되어 알려졌는데 현재까지 무덤 8기가 발견되었으며, 제1호기를 제외하고는 파손 상태가 심각하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류, 금동모자와 금귀고리, 유리구슬 등의 장신구, 말갖춤(마구) 등의 철기들로 백제 중요 문화재로 밝혀졌다. 유물로 보아 5세기경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추정되며 금동제 관문은 일본에서 발굴된 것과 비슷하게 생겨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 문화재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칠목재에서 좌측 함라면 방향으로 20여 미터 이동하면,

 

좌측에 칠목재 휴게소(영업은 하지 않는 듯)가 자리하고 있고,

 

칠목재 들머리는 우측 칠목마을로 이어진 도로로 이어진다.

 

 

칠목재 들머리에서 도로를 따르다가 10여분 쉼을 한 후에,

 

산길로 접어드는데 따르던 산길은 금남기맥 능선의 남쪽 능선으로 이어지고,

(길은 전방 지능선의 묘지까지만 이어져 있고 이후는 길이 없다고 함)

 

원래의 금남기맥 능선인 우측 능선으로 이어질 듯 보이는 희미한 길흔적 방향에 표지기가 보이기에 우측 능선의 송전탑 방향으로 들어서면,  

 

돌아본 칠목재 방향.

 

덤불에 묻힌 길 흔적은 송전탑 아래로 이어진다.

 

돌아본 미륵산 방향.

 

 

빼곡한 송전탑 아래의 덤불을 헤치고 숲으로 들어서니 희미한 족적이 위쪽으로 이어지고,

 

가선대부를 지낸 파평윤공 묘가 나오는데 묘지 바로 위에 칠목봉이라는 179m 봉이 있다지만, 

 

칠목봉 삼각점 찾기를 포기하고 바로 능선으로 접속하여 좌측 내림길 능선으로 들어서면,

 

최근에 다닌 흔적이 거의 없어 보이는 거친 능선길이 이어진다.

 

 

잡목이 빼곡한 능선을 더듬어 기맥길을 찾는데 낯익은 표지기가 반갑고,

 

잡목이 어수선한 능선길을 더듬다가 수레길에 접속하여 우측 수레길을 따르면,

 

밀양박씨 가족묘지가 나오며 좌측 미륵산 방향 조망이 트인다.

 

 

가족묘지를 뒤로하고 능선을 따라 우측으로 휘어져 오르면,

 

한참 동안 보이지 않던 빛바랜 표지기들이 빼곡히 걸린 143봉에 오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금남기맥길은 제법 뚜렷한 직진의 능선길을 두고 직좌틀하여 사면으로 내려서야 하고,

 

뚜렷한 등로가 없이 족적이 이리저리 어지러운 사면을 잠시 내려서면 임도에 내려서게 되고,

 

칠목재에서 앞서 갔던 김전무가 임도에 앉아서 쉼을 하고 있다.

 

 

임도를 가로질러 다시 능선길을 더듬어 내려섰다가는,

 

편백나무숲을 지나 오르면,

 

동그란 묘지 1기가 있는 봉우리가 나오며 직진의 송전탑 방향으로 진행하면,

 

좌측 서수면 관원리 방령마을과 우측 나포면 장상리 서지마을을 잇는 방령고개를 지나게 된다.

 

좌측 서수면 관원리 방향.

 

방령고개임을 알리는 표지기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데 들머리 등로는 보이지 않는다.

 

 

거친 숲속을 올라 뚜렷한 수레길에 접속하여 진행하다가,

 

작은 봉우리 직전에 직진의 수레길을 두고 우측 길로 들어서고,

 

등로 주변에 무성한 미국 자리공으로 보이는 식물의 작은 열매들이 부딪혀 터지면 온통 자줏빛 즙이 옷을 물들이고,  

 

문패없는 묘지 3기가 나란한 가족묘를 지나 내려서면,

 

다시 수레길에 접속하게 되고,

 

이내 다시 수레길을 두고 우측 능선으로 진행하면,

 

전주이씨 가족묘지를 지나게 된다.

 

좌측 아래로 군산시 서수면 관원리의 서수양돈단지가 보인다.

 

 

19번 송전탑에서 우측 송전탑 아래로 진행해도 되지만 직진으로 올랐다가,

 

묵묘가 있는 봉우리에서 우틀하여 내려서고,  

 

잠시 숲길을 따르다가 다시 수원백공 묘지를 지나,

 

18번 송전탑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진행하면,

 

또 묘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족묘지를 지나게 되고,

 

이제 능선을 따라 제법 뚜렷한 수레길이 이어지더니,

 

Y자 갈림길이 나오면 직진의 뚜렷한 수레길을 두고, 우측 거친 수레길로 들어서야 한다.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수레길이 희미해지지만 한두개 걸려있는 표지기에 의지하여 잠시 더 내려서면,

 

앞쪽으로 수레재가 내려다 보이는 개활가 나오며,

 

개활지 우측으로 내려서도 되지만 좌측 수레길로 들어서서 내려가면,

 

포장 간선도로가 지나는 수레재에 도착한다.

 

<수레재>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에서 서수면 축동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금강 변을 따라 개설된 지방도 706호선과 망해산 산줄기를 따라 동북쪽으로 이어져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으로 이어지는 지방도 711호선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가 지난다. 『한국지명총람』(옥구)의 "(서수면 취동리) 수레재(차령(車嶺), 수내미재)는 흥법에서 나포면 장상리 와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수레같이 생겼다 함."이라는 기록에서 고개 모양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을 찾을 수 있다. '차령(車嶺)'은 수레재의 '수레'를 훈차 혹은 훈음차한 표기다. 『군산의 지명유래』의 나포면 장상리에는 수레재의 또 다른 명칭인 '순남미재[車峙]'가 기록되어 있다.

 

수레재 날머리 전경.

 

다음 코스 수레재 들머리는 고갯마루 '내포면' 표지판 옆 수레길로 이어진다.

 

 

수레재는 군산시에 속하지만 익산의 다듬재에 주차한 차량 회수를 위하여 익산 택시를 부르려고 하였으나, 먼저 도착한 손사장님이 114에 문의하여 택시를 불렀더니 불과 5분여 만에 택시가 도착한다.

 

 

말 많고 까칠한 기사님과 익산과 너른 김제평야에 대한 이런저런 예기를 나누는 사이에 다듬재에 도착하여 차량을 회수하고, 부근에 있는 '본향'이라는 식당으로 이동하여 늦은 점심과 이른 저녁을 동시에 해결한다.

 

1인당 15,000냥 하는 정식이 무척이나 푸짐하게 나와 여러 백두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식당 우측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이는데,

옛날 만식형과 함께 자전거로 삼남길 종주를 할 때 지났던 익산 보석박물관이다.

 

바람까지 시원하게 불어주는 좋은 날씨에 부담스럽던 금남기맥 익산의 벌판 구간을 무사히 마쳤다.

늘 산길만 걷다가 언덕조차 없는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걸으며 우리나라 최고의 평야지대를 몸으로 체험하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