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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금남기맥 6차(칠거리재~동백대교) : 호수(湖水)도 아름다운 군산에서 금남기맥 종주를 마감한다!

by 재희다 2021. 11. 2.

산 행 지 : 금남기맥 6차(칠거리재~동백대교) 전북 군산시.
산 행 일 : 2021. 10. 23.(토)
산행코스 : 칠거리재 ~ 황새고개 ~ 66.7봉 ~ 청암산(118.8m) ~ 117.8봉 ~ 금성산 갈림길 ~ 칠다리재(709번 지방도 제2금당교) ~ 백석교회 ~ 돗대산(91.0m) ~ 76.2봉 ~ 21번 국도 ~ 개산고개 ~ 미제저수지(은파유원지) ~ 87.3봉 ~ 녹점재 ~ 할매산 ~ 83.4봉 ~ 석치산(98m) ~ 장계산(108.4m) ~ 금강하구(동백대교) (도상거리 약 20km, 8시간 30분 소요)
산행참가 : 5백두.

 

<산행지도>

 

 

지난 4월 금남정맥 금만봉 아래 싸리재에서 출발한 금남기맥 종주길을 마감하는 산행이다. 그리 높지 않은 완주에서 출발하여 익산을 거쳐며 한껏 고도를 낮추어 군산에서 마감하는 금남기맥 길이라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으로 짐작했으나, 돌이켜보면 어느 한 구간 어렵지 않았던 구간이 없었던 듯하다. 역시나 맥길은 산의 높낮이보다는 등로의 상태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진다는 예기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남기맥의 마지막 구간인 이번 구간은 군산시가지를 가로지르는 구간으로 수변 도로와 들판 그리고 도심 공원을 통과하는 코스라서 상대적으로 쉽고 여유로울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출발지점인 군산으로 향한다.

 

배낭을 메고 주차장으로 가는데 아차 등산화가 아닌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게 아닌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요즘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자주 생기는 게 여간 우려스러운 게 아니다. 나도 영화 'Still Alice'의 여주인공처럼 준비를 해 놓아야 하는 게 아닌지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다. 그렇게 10여분 늦은 5시에 집을 출발, 양재와 신갈정류장에서 동행자들을 태우고는, 사기꾼이거나 센스 없는 대선주자들 예기로 흥분까지 해 가며 고속도로를 달려 예상했던 시각쯤에 산행 들머리인 군산의 칠거리재에 도착한다.

 

 

칠거리재 고갯마루를 조금 지난 지점의 갓길에 주차를 하고 산행 준비를 하는데,

 

서쪽 하늘에는 둥그런 낮달이 제모습을 잃지 않고 파란 하늘에 박혀있고,

 

칠거리재 고갯마루로 이동하여, 

 

지난 산행의 날머리인 표산 버스정류장 반대편 가족묘지로 들어서면,

 

묘지 정원수 나뭇가지에 '칠거리재' 표지기가 걸려있고 등로는 묘지 좌측 상단으로 이어진다.

 

<칠거리재>
군산시 회현면 원우리와 군산시 옥산면 남내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칠거리고개라고도 불린다. 칠거리재라는 명칭은 『군산의 지명 유래』에 우동에서 대위로 넘어가는 고개로 기록되어 있는데, 칠거리고개로도 기록되어 있다. 회현면 고사리 대위 마을 북동쪽에 포산·신당·풍촌·대위·옥산·남내·용하산의 일곱 갈래로 갈라지는 길의 명칭이 칠거리인 것을 볼 때, 칠거리재는 ‘칠거리’라는 명칭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칠거리재 표지기.

 

 

가족묘지 상단에서 이어지는 거친 등로를 따르는데 좌측으로 대위마을과 대위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잡목이 우거진 작은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면,

 

 

고(高)씨 집안 묘지임을 알리는 '고가유택' 비석이 있는 가족묘지를 지나게 되고,

 

가족묘지에서 황새고개 방향 능선 위로 이어진 임도를 따르면,  

 

우측으로 우동마을과 남내리의 대황산이 조망되더니,

 

이내 널찍한 임도가 지나는 황새고개에 도착하여,

금남기맥은 임도 건너편 능선으로 올라 좌틀하여 남쪽으로 이어진다. (좌측 임도를 따라 우회 가능)

 

<황새고개>
황새고개는 전북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 황새골과 옥산면 남내리 우동 사이의 고개다. 충청 감사를 지낸 반씨가 젊었을 때 그의 아버지와 함께 문전걸식하면서 어렵게 살다가 아버지가 이 고개에서 떨어져 죽자 그 자리에 묻었는데, 그 후 그가 감사가 되어 좋은 데로 옮기려 파묘하자 그 속에서 황새 한쌍이 나와서 이 고개를 넘에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어 황새고개라 한다.
또한 인근 주민들은 이곳이 6.25동란 때 인민군들이 경찰 가족들을 끌고 가다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살한 곳이라고 하여 다니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김전무는 임도로 우회하고, 궁금증이 심한 나머지 분들은 황새고개 건너편 능선으로 올라 좌측으로 능선을 따르는데, 등로는 커녕 족적조차 희미하고 빼곡한 잡목을 헤치며 어렵게 나아가니 좌측으로 철망 울타리가 있는 66봉을 지나게 되고,

 

희미한 등로조차 찾기 힘든 능선에는 빨갛게 익은 망개(청미래) 넝쿨이 갈길바쁜 산객의 다리를 부여잡고,

 

어렵게 잡목숲을 뚫고 나아가다가 동그란 묘지가 여러 기 자리한 가족묘지를 지나니,

 

좌측 황새골에서 오르는 임도가 지나는 안부가 나오며 군산 구불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안부 우측에는 쉼터 정자와 '청암산 에코라운드 걷기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부터 청암산까지는 '군산 구불길 5구간 물빛길' 이정표의 청암산 방향으로 산책하듯 걷게 된다.

 

청암산 에코라운드 안내판.

 

<군산호수/옥구저수지/청암산호수>
전북 군산시 옥산면 옥산리의 저수지로, 청암산 일대가 1939년 수원지로 조성되었으며, 1963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2008년 지정 해제될 때까지 45년 동안 생태계가 그대로 보존되어 태초의 원시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다. 군산 제1수원지 월명호수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데 부족하여 제2수원지로 지정된 옥구저수지는 군산시민의 식수와 북선제지공장(현 페이퍼코리아)의 공업용수로 사용하여 왔다고 하며, 면적은 234㎢라고 한다. 옥구저수지 및 청암산 일대의 5개 마을인 장다리, 팔풍갱이, 세동, 요동, 고사통 마을로 옥산저수지가 예전에 전부 논(답)이었고 가운데에 군도 정도의 큰길이 있었으며 회현~군산 간 도로로서 회현 월하산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월하산은 조선시대 포구로서 넓게 보면 만경강과 금강을 연결하는 도로기능을 하였다고 한다.

청암산은 군산 옥산면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이전 푸른 산이란 의미의 취암(翠岩)산으로 불리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청암산(靑岩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취암이란 말은 빨리하면 '샘'이란 말로 들려서 '샘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암산호수는 군산의 3대 호수 중 자연생태적인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능선을 걷는 등산로와 수변길 등 다양한 트래킹 코스가 있는데, 억새풀길, 왕버드나무 군락지, 죽향길이라 이름 붙여진 대나무 숲길 등이 장관이다.

 

 

금남기맥 능선인 이정표의 청암산 방향 널찍한 등산노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위저수지가 보이고,

 

<대위저수지(大位貯水池)>
전북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에 있는 저수지로, 물의 저류, 조정, 조절 등을 하기 위해 하천의 계곡에 댐을 축조하여 만든 인공적인 저수지이다. 1956년 착공되어 1962년 준공되었다.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군데군데 우측 군산호수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전방으로 가야할 청암산쯤이 보이며,

 

뒤쪽 척동마을 방향으로 대위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더니,

 

잠시 후 좌측 척동마을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척동마을>
명당터로 알려진 고사리 척동마을은 옛 말에 "척동 흙 한 말은 금싸라기 한 말과 안 바꿔 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명당이다. 형국이 삼태기와 같아 모든 것을 쓸어담을 수 있는 형태 이기에 길지(吉地)라 하는데, 다른 시각으로는 이 마을 산의 형태를 보고 많음을 뜻하는 '물(勿)' 자형 명당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예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지만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의 쉼터가 자리하게 되는 현상을 낳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척동마을에는 남원 양씨, 두릉 두씨, 담양 전씨, 광산 김씨, 평산 신씨 등의 다섯개 집안 선산과 제실들이 몰려 있는데, 광산 김씨와 평산 신씨는 각각 대정전과 사정전의 두 개씩의 제실을 지니고 있어 결과적으로 좁은 척동마을에 총 7개의 제실이 자리하고 있는 보기 드문 모습을 하고 있다.

 

잠시 더 소나무숲 등로를 편안히 걸으니 우측에 청암산생태학습원이 자리한 사오개에 도착하게 된다.

 

<사오개>
사오개는 옥산저수지(현 군산저수지)가 축조된 1939년 이전에 회현면 대정리, 월연리, 세장리 사람들이 옥산이나 군산시내를 가려면 넘어야 하는 청암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고개의 이름이다. 당시 6척 이상의 큰 길이 시내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회현 사람들과 군산시장통을 이어가면서 민초들의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 아쉽게도 옥산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사오개에서 옥산면 신성동까지의 대부분 길은 물속에 잠기게 되었다. 도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사오개는 회현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시키는 고갯길이었던 것이다.

 

각종 안내판과 쉼터 평상과 화장실 등이 있는 사오개 전경.

 

사오개 이정표.

 

사오개와 대나무숲 안내판.

 

<대나무숲>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1930, 40년대경 만경강 하구 마을에서 옥서 하제까지 민물고기, 바닷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던 어촌마을 사람들이 농사 시작 전에 죽동마을에 매년 대나무를 사기 위해 몰려들었고, 대금 흥정이 끝나면 달구지에 대나무를 다발로 차곡차곡 실어 먼지 풀풀거리는 진흙길을 되짚어 해안 쪽으로 가곤 했는데, 그 대나무는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고기잡이 방식인 '쑤기 놓기'에 사용하였단다. 그 당시 대나무밭에서 대나무를 잘라 파는 일이 논에서 벼를 재배해서 나오는 소득보다 대여섯 배 많았기 때문에 현재보다 대나무 군락이 폭넓게 분포하였다.

 

사오개 우측 청암산생태학습원 전경.

 

 

사오개 쉼터 정자에서 과일을 나누며 10여 분간 쉼을 하고는,

 

이정표의 청암산(샘산) 방향 등노로 들어서서,

 

우거진 숲속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르는데,

 

우측 만경강 방향으로 죽동마을이 내려다 보이며 들판에 봉긋한 똥뫼산이 이름에 걸맞다는 생각이 들고,

 

벤치가 있는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들어서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좌전방으로 옥구면의 너른 들판이 시원하게 조망되며,

 

좌측 똥뫼산 뒤편으로는 만경강이 희미하게 가늠되고,

 

이내 사각의 정자가 자리한 청암산 정상에 도착한다.

 

<청암산(靑巖山, 117m)>
청암산은 구릉성 산지로 옥산면 남쪽에 위치하여 옥산면과 회현면의 경계가 된다. 북쪽으로 이어진 금성산과 함께 군산저수지, 또는 옥산저수지로 불리는 제2수원지를 품고 있다. 옥산저수지 입구에서 청암산 정상까지는 약 2.5㎞이며, 등산로가 잘 마련되어 있다. 정상에는 전망대와 삼각점이 있다. 전망대에 서면 옥구읍 수산리•상평리•이곡리와 회현면의 금광리까지 펼쳐진 수산 이곡 평야와 만경강 하류를 조망할 수 있다. 북쪽으로 금성산을 마주하고 있으며, 남서쪽으로 옥구읍 일대의 산지인 영병 산지를 조망할 수 있다.
청암산의 명칭 유래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푸르다'는 의미의 취암산(聚岩山)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같은 '푸르다'의 의미로 청암산(靑岩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다. '샘산'이라는 말은 주민들이 취암산을 빠르게 말하다 보면 샘산으로 들려 그렇게 불린 것으로 추정되며, 청암산 일대는 일제강점기 1935년 최초로 수원지로 조성되고 1963년에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45년간 자연생태계로 보존된 곳이다.

 

청암산 정상에서 살짝 당겨본 오성산 모습.

 

 

나무가 가려 별다른 조망이 없는 청암산 정상을 뒤로하고 군산저수지 제방 방향으로 기맥길을 이어가면,

 

이내 좌측 죽동마을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죽동마을>
군산시 회현면 죽동마을은 예로부터 대나무가 삼림을 이룰 정도로 많아 '댓골'로 불려 왔으며, 댓골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죽동(竹洞)'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마을에 대나무가 많은 이유는 만경강 하구에 사는 사람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대나무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으로, 대나무는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쑤기놓기' 방식의 고기잡이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정표 옆에는 사오갯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사오갯길>

청암산 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군산시장까지 오가던 초입 고개가 '사오개'이며, 이 고개를 연결하여 죽동마을을 크게 감도는 걷기길을 사오갯길로 명명하였다.

 

 

죽동마을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 잠시 오르면 좌측으로 금성마을 방향 갈림길이 있는 능선분기점에 올라서게 되고, 금남기맥 능선인 차돌바위가 있는 우측 능선길로 접어들면,  

 

멋진 소나무숲 능선길이 이어지며,

 

좌전방으로 선답자의 산행기에 봤던 채석장이 내려다 보이는데,

이 부근 어디에서 따르던 멋들어진 구불길 등로를 두고 좌측 험한 능선길로 들어서야 하는데,

 

멋진 소나무숲길에 취해 마냥 걷다가 스마트폰 지도를 보니 군산호수 제방으로 이어진 알바 길을 걷고 있기에 바로 발길을 돌려,

 

채석장 절개지 방향의 금남기맥 능선분기점으로 돌아와 잡목이 가득한 희미한 능선길로 접어들어,

 

잠시 거친 능선길을 내려서면 안부가 나오는데,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거친 수레길을 따라도 되지만 선답자의 족적만이 희미한 직진의 능선으로 들어서,   

 

빼곡한 잡목을 헤치며 채석장 절개지 위로 이어진 족적을 더듬는데 낯익은 표지기가 반갑고,

 

좌측 깎아지른 낭떠러지 아래로 채석장이 내려다 보이는,  

 

더이상 진행하기가 곤란한 채적장 정상부에서 우측 숲으로 들어서면,

 

잘록한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희미한 족적이 이어진 금남기맥 능선이 이어진다.

 

 

잡목과 가시덩굴이 가랑이를 부여잡는 능선길을 헤쳐나가면,

 

산불감시카메라가 있는 119봉 직전부터는 구불길 등로인지 등로가 정비되어 있고,

 

119봉을 지나는 총무님.

 

편백나무가 조림된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면,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수레길은 앞쪽 분기봉을 좌회하는 구불길이자 기맥 우회길이고,

우측의 거친 능선 길은 분기봉을 거쳐 금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이라 우측의 거친 능선길로 오르는데,  

 

금남기맥과 금성산 방향 능선이 갈라지는 분기봉에 올랐지만 좌측 기맥능선 방향 등로가 보이지 않아,

그냥 금성산을 올랐다가 좌측 내류마을로 내려서기로 하고 금성산 방향으로 진행하자,  

 

금남기맥은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이어져 내류마을의 옥류정으로 이어지지만, 금성산에 금으로 만든 성이 있을까 궁금하여 금성산을 가 보기로 하고, 결국은 내류마을 서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금남기맥 대신에 내류마을 동쪽의 금성산 능선을 걷게 된다.

 

좌측 내류마을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금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거친 수레길을 따라 오르면 정상 직전의 묘지를 지나,

 

잡초가 그득한 금성산 정상의 삼각점 표시판에 작은 '금성산' 표지가 붙어 있다.

 

<금성산(錦城山, 122.9m)>
군산시 옥산면 금성리와 옥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옛날 옥구현의 고을 성을 쌓았던 산이라 하여 금성산이라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이 산 아래의 지명이 박지산면이어서 박지산(朴只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금성산 정상 인증.

 

 

금성산에서 좌측 내류마을 방향으로 바로 내려서는 등로는 보이지 않고, 내류마을 동편 능선으로 이어진 수레길을 따르면,

 

군데군데 묘지도 지나는 수레길이 이어지다가,

 

Y자 갈림길에서 좌측의 능선 방향으로 이어진 수레길을 따라 내려서면,

 

2차선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내류마을 동편 산기슭으로 내려서서,

좌측 도로를 따라 내류마을을 지나 칠다리로 진행한다.

 

 

내류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서,

 

<내류(內柳)마을>
마을 뒷산인 금성산의 지세가 꾀꼬리가 버들잎을 물고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형국이라 하여 '안 내(內)' '버들 류(柳)'를 써서 내류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칠다리로 이어지는 좌측 수로 옆 도로로 들어서면,

 

좌측 내류마을 방향으로 선답자의 산행기에 등장하는 옥류정 정자가 보이고,

 

내류마을의 시멘트로 지은 옥류정 모습. (김 전무님 촬영)

 

이내 칠다리 사거리에 있는 '칠다리 슈퍼' 앞을 지나게 된다.

 

<칠다리>
군산시 옥산면 금성리 내류마을에 있는 다리로, 70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일설에 물줄기(도랑)가 일곱 칠(七)자형으로 흐른다고 하여 칠다리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다리를 만들 때 다리난간 받침을 나무로 사용하여 그 위에 옻칠을 입혔다 해서 칠교라 했고, 이를 두고 '칠(漆) 다리'라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도 한다.
금성마을을 배그메라고도 부른다. 또한 강줄기가 이곳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제방을 쌓아 농토를 만들어 넓은 들이 생기자 들땅리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 다리 건너편 금성산 중턱에 만경강을 이용하여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박지산성(금성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칠다리 모습.

 

 

칠다리를 뒤로하고 칠다리삼거리에서 우틀하면,

 

칠다리삼거리 버스정류장을 지나게 되고,

 

넓은 들판 건너로 보이는 돗대산을 향해 돗대산 우측의 골프연습장을 바라보고 직진의 도로를 따르다가, 

 

우리가 금성산을 다녀오느라 우회한 금남기맥 능선도 돌아보고,

 

구불길이 좌틀하여 이어지는 갈림길의 한림마을 표석을 지나는데, 이곳은 금남기맥이 좌측 백석제 방향으로 이어진다는 설과 직진의 돗대산 방향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갈리는 지점이다.

 

개념도에서는 금남기맥이 좌측 한림마을 백석제 방향으로 들어서서 염의서원 뒷산인 53.4m 봉을 지나 76.2m 봉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답자들은 골프연습장 뒷산을 거쳐 백석마을 뒷산인 돗대산(91.0m)을 지나 76.2m 봉으로 이어 가는 길을 택하고 있어서, 어느 길이 정확한 금남기맥인지 알기가 어렵다. 결국은 돗대산(91.0m)과 염의서원 뒷산(53.4m) 사이의 한림제(澣林堤)의 물길이 어디로 흐르느냐인데, 국가정보원 지도상 이곳 버스정류장의 좌측으로 흐르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선답자들이 이어 간 우측 돗대산으로 이어지는 맥길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인공수로와 전답으로 기맥 능선을 찾기가 어려운 벌판 도로를 따르다가, 지금은 폐선된 옛 '옥구선' 철길을 지나고,

 

<옥구선(沃溝線)>
옥구선은 군산시의 옛 군산역에서 시작하여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에 위치한 옥구역 사이에 놓인 11.6km의 단선 철도로, 한국 전쟁 당시인 1953년 미군 비행장(군산 비행장)에 화물을 운송하기 위해 건설된 군사용 철도이다. 1955년부터 여객 열차도 운행되다가, 1970년 여객 운항이 중단되었고, 2000년 이후 군용화물 수송도 중지되어 폐선되었다.

 

골프연습장 직전에 좌측 길로 들어섰다가 진흙 논을 지나야 한다는 주민의 귀뜸을 듣고는,

 

에이스골프연습장을 지나서 좌틀, 백석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로 진행하면,

 

백석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골프연습장 뒷산을 우회하여 진행해도 되지만,  

 

궁금증이 도진 나는 기맥능선을 더듬어 골프연습장 뒷산으로 들어선다.

 

 

대부분의 기맥꾼들이 따르는 우회로를 두고 당연히 희미한 등로라도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기맥 능선으로 들어섰는데, 헐! 등로는 고사하고 족적조차 보이지 않고 잡목과 가시나무가 뒤엉켜 도무지 진행이 어렵고,

 

그래도 좌전방으로 가야할 돗대산이 지척으로 보이는지라 힘을 내어 올라,

 

잡목뿐인 봉우리에 올라 하릴없이 홀로 인증을 남겨보고, 

 

10여 미터를 진행하는데 5분이나 걸릴 정도로 빼곡한 대나무와 잡목숲을 헤치고 내려서면,

 

좌측 당북리 들판 건너편으로 군산시의 아파트 건물들이 보이고,

 

우회한 분들이 쉬고 있는 백석교회 앞마당에 도착한다.

 

덕분에 잘 쉬셨죠!

 

 

백석교회 우측의 수레길로 들어서서 가족묘지를 지나 오르다가,

 

수레길이 우측 아래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좌측 숲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거칠지만 비교적 선명한 오름길 등로가 이어지더니,

 

표지기들만 반기는 돗대산 정상에 도착한다.

 

<돗대산(91m)>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와 상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산의 형국이 배의 돛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돗대산이라고 부르는데,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한 나.당연합군이 백제와의 전쟁을 치를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금강하구인 기벌포 전투를 치르고 이곳까지 친격하였는데, 예전에는 이 산의 앞까지가 바다였다고 한다.(펌)

 

돗대산 정상 인증.

 

 

돗대산을 뒤로하고 로프가 매인 거친 등로를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21번 국도 당북육교 부근과 군산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더니,

 

잠시 더 내려서서 절개지 상단에 서자, 군장국가산단 진입철도 공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지형상 금남기맥은 21번 국도와 나란하게 공사장 가운데로 이어져 75.6봉에서 21번 국도를 건너 60봉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일단 75.6봉까지의 기맥 능선은 공사로 허물어져 있고, 군장국가산단 진입철도와 6차선의 21번 국도는 울타리로 막혀 있어서 우회하여야 하는데, 기맥꾼들이 다양한 루트로 진행하면서 따로 뚜렷한 등로가 없어서 진행이 무척이나 난해한 곳이다. 혹여 훗날 공사장 중앙으로 통과가 불가능해지면 21번 국도 당북육교 동측의 굴다리를 통과하여 당북마을과 당북제를 지나 60봉이나 개산고개 방향으로 진행해도 좋을 듯하다.

 

절개면 고착작업장에서 풍겨오는 거름냄새를 맡으며 절개지 가장자리를 따라 공사장으로 내려서고,

 

가야할 75.6봉을 향해 공사장 가운데로 진행하면,

 

돌아본 돗대산 방향.

 

우측의 군장국가산단 진입철도 울타리와 만나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고,

 

돌아본 돗대산 방향.

 

우측 울타리 너머의 군장국가산단 진입철도 모습.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희미하고 거친 오름길을 따라 75.6봉을 오르다가 우측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지도상 구불길쯤으로 표시된 수레길에 접속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잠시 여장을 정비하며 쉼을 하기로 한다.

 

 

이번 구간에서 가장 난해한 지점을 통과였다는 안도감에 느긋한 쉼을 하고는,

수레길로 들어서면 상수도 저수시설로 보이는 시설물을 지나면 임도 수준의 도로가 이어지고,  

 

지도상 척동길로 표시된 2차선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진행하면,

 

이내 군장국가산단 진입철도 아래 굴다리를 통과하게 되고,

 

바로 6차선의 국도 21호선 아로로 이어지는 굴다리도 통과하게 된다.

 

 

21번 국도 굴다리를 통과하여서는,

잠시 더 도로를 따르다가 앞쪽으로 보이는 고갯마루에서 우측 능선으로 들어서도 되지만,

 

바로 우틀하여 21번 국도 옆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다가 좌측 숲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이내 고갯마루에서 우측 능선길로 이어온 분들과 만나 우측으로 능선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우측으로 21번 국도 절개지가 나타나며 오가는 자동차의 굉음이 귓전을 때리고,

 

우전방으로 지나온 돗대산이 오뚝하게 도드라져 보이며,

 

수레길 수준의 능선 등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는데,

 

좌측으로 은파유원지라고 불리는 미제저수지가 조망되고,

 

잠시 후 임도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내려서니,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개산고개/지산마을고개를 지나게 된다.

 

<개산고개/지산마을고개>
미제저수지 아래쪽 군산시 지곡동 지산마을에서 옥산면 당북리 외당마을로 이어지는 1차선 도로가 지나는 고개다.

 

개산고개 표지기.

 

 

개산고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하면,

 

이내 따르던 임도가 좌측 아래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금남길은 우측 숲길로 들어서야 하고,  

 

호젓한 사면 숲길을 잠시 따르면,

 

은파유원지 주변 도로인 2차선의 백토로에 내려서서 우측 백토사거리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기맥길은 이곳부터 2.5km 정도를 도로를 따라 걷게 된다.

 

 

백토로에 내려서서 우측 백토사거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좌측으로 은파유원지 수변길이 나란히 이어지더니,

 

꾀나 큰 규모의 은파교회 앞을 지나게 되고,

 

백토사거리 직전에 좌틀하여 은파유원지를 좌측에 두고 계속 진행하게 되고,

 

좌측에 음식점 거리가 있는지 각종 식당 간판이 즐비하고,

 

은파유원지인 미제저수지도 보인다.

 

<은파유원지로 불리는 미제지(米堤池)>
요즘 군산에서 미제(米堤,쌀뭍방죽)라고 하면 잘 모르지만 '은파유원지'하면 금방 알아차린다.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므로, 본 이름이 미제지(米堤池, 쌀뭍방죽)이고 "은파(銀波)"는 훨씬 후에 임의로 만들어 부른 별명에 불과한데도 본 이름은 모르고 별명만 아는 격이다. '은파'란 이 저수지를 유원지로 개발할 때 사업자가 신청서에 '국민관광지 은파(國民觀光地 銀波)'라고 써서 교통부에 제출한 데서 시작되었고, 또 그대로 허가가 나 '銀波(은파)'라는 간판으로 유원지사업을 벌인 때문에 널리 퍼진 것이다. 유원지 이름은 곧바로 번지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작금의 우리네 상황이었으니,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말고 젊은 층에서는 아예 '미제(米堤)'라는 이름을 모르는게 일면 당연하다.

미제지(米堤池)는 우리말로는 ‘쌀뭍 방죽’이다. 미제(米堤)란 말의 어원은 '쌀 뭍[쌀의 땅]'에서 유래됐는데, ‘쌀 뭍’은 현재 군산대 앞 미제리의 옛 이름으로, ‘쌀 뭍 마을의 저수지’라는 뜻으로 ‘쌀뭍제’라 불린 것이다. 미제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종 25년(1530)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옥구현 산천조에 '미제지(米堤池)는 옥구현 북서쪽 10리에 있으며 둘레가 1만 910척(尺, 약 3.3km)에 달한다'라고 간단히 적혀 있다. 미제지의 축조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시기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축조됐을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인데, 『팔도지지』, 『전국지지』 등을 근거로 백제시대까지 소급하는 향토사학자도 있다.
미제지(米堤池)는 오래전부터 몽리구 10여리 들농사의 젖줄이었고, 이 바람에 쌀의 집산지가 그 주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제지 물로 지어 거둔 쌀이 그 주변에 있었던 사창(社倉)으로 입고되었을 것이다. 미제지의 중부 동쪽 골짜기를 일찍부터 사창굴이라고 해왔고 미제지의 북서부 곧 지금 개발한 은파유원지의 입구 골짜기를 '사창'이라 불러왔다. 이 두 곳에 사창을 두고 염산(斂散)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미제지는 현재의 규모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아래쪽에 둑이 있었고 둑은 낮아 저수량이 적었다. 수심도 낮아 한쪽은 연이 무성했다. 둘러싸인 산과 마을이 여러 귀가 되어 아흔아홉귀라고도 했다. 그러나 옛날의 사정으로 보아 무척 큰 방죽이었다. 아흔아홉귀라는 말도 귀가 많다는 것도 의미하나 사실은 방죽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여진다.

은파유원지인 미제지는 본래 농업용 저수지였으나, 저수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작은 산들을 포함하여 171만 9000㎡가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고, 그 후 순환도로가 완공돼 아흔아홉구비라는 은파호수공원의 주변을 모두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시민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햇살 받은 물결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은파'라 불리게 된 이 호수공원은, 화사한 벚꽃 터널이 유명하며 물빛다리, 음악분수, 광장, 자전거도로, 인라인스케이트장, 보트장, 산책과 조깅코스, 연꽃 자생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조성되며 군산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으며,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지역자원 콘테스트’에서 전국 100대 관광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제저수지 주변은 관광지로 변해 있고 은파유원지의 상징인 길이 370m, 너비 3m의 국내 유일의 보도 현수교로가 있다. 은파를 가로지르는 '물빛다리' 위에서 호수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야간에는 조명으로 연출된 빛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경주이씨 종산 입구 표석을 지나고,

 

좌측 은파호수공원 수변 산책길로 들어서면,

 

산책로 초입에 '임방철' 안내판이 있는데,

설명판 내용으로 보아 '임방철'이 아니라 '임방절'이지 싶은데 좀 혼란스럽다.

 

<임방철/임방절?>
"임방절"은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임방(壬方)이라는 뜻이다. 이 방위는 24방위의 하나로 정북에서 서쪽으로 15도 정도 비낀 각도의 안쪽을 말한다. '절메산'에서 보면 '임방절'이 정확히 임방(壬方)이 된다. 다음으로 임방(任房)이라는 뜻이다. 옛날 보부상들이 모여서 놀던 곳이라는 뜻으로 본래 우리말의 '임방'이겠는데 취음하여 한자로 임방(任房)이라고 전한다. 이러한 임방에 절[寺]이 있었는데, 이를 '임방절'이라고 부르고 있다. [안내판 내용]

 

호수 건너로 보이는 은파유원지 남쪽 산기슭에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고은 시인의 생가가 있다고 한다.

 

<고은(고은태) 시인>
시인 고은의 본명은 고은태(高銀泰), 호는 파옹(波翁)이며 본관은 제주(濟州)로, 참여시인이자 소설가다. 전북 옥구(지금의 군산시 미룡동 용둔리)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보냈고,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카바야시 토라스케(高林虎助)'였다. 군산고등보통학교(군산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 고은의 일가친척들은 대부분 좌익 활동을 했으며 당숙은 인민위원장이었으며, 고은 일가는 6.25 당시 용둔리 일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원수 사이가 되었다.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군산에서 도피하여 선유도로 피신했고, '고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1년에 군산 동국사에서 기승(奇僧) 혜초(慧超)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1953년에는 혜초 스님의 소개로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를 찾아가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고승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1957년 효봉 스님이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었다. 1962년 폭음과 성추문으로 종단의 징계를 받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이후 저작과 저술 활동을 하며 70년대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1983년 중앙대학교 영어과 이상화 교수와 결혼하였으며, 2005년부터 노벨상 후보로 거명되며 국내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2017~18년 미투운동 때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어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으나 1,2심에서 모두 패소하고 은거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총 30권으로 발간된 연작시인 ‘만인보(萬人譜)’를 꼽을 수 있고, 서사시 ‘백두산’, 시집 ‘머나먼 길’ 등이 있다.

 

 

은파호수공원 안내도가 있는 호수공원 산책로 입구를 나와,

 

은파호수공원 안내판.

 

부곡사거리도 직진하여 지나면,

 

도로 우측의 오늘 점심 요기를 하기로 한 해장국집인 예림옥에서,

 

요즘 모든 물가가 올라서 좀처럼 보기 힘든 6,500원짜리 해장국에 소맥을 곁들여 점심식사를 한다. 

 

 

가성비는 물론 맛도 좋은 예림옥에서의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금 금남길에 들어서서,

 

직진의 도로를 따르다가 올라야 할 산을 앞에 둔 ㅜ자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진행하면,

 

송전탑을 지나 우측 산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있고,

 

이후 기맥 등로는 널찍한 도시근교의 산책길로 이어지며,

 

벤치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83봉을 지나고,

 

송전탑이 있는 안부를 지나서 벤치와 체육시설이 있는 87봉에 올라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따라도 되지만,

 

기맥길은 평행봉 옆으로 나 있는 샛길로 이어진다.  

 

 

87봉을 선명한 오솔길을 따라 지그제그로 내려서면,

 

다시 따르던 선명한 등로와 만나,

 

아래로 좌측 군산국가산단과 우측 군산시내를 연결하는 6차선의 공단대로 위에 만들어진 생태통로를 지나는데, 생태통로 위 작은 잣나무에 이곳이 녹점재라는 표지가 걸려있다.

 

 

녹점재 생태통로를 건넌 지점에 있는 나운배수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는 구불길을 두고 좌측 배수지 철망 옆길로 올라서면,

 

나운배수지에는 태양광발전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이내 월명공원 남단 입구에서 올라오는 도로에 접속하여 좌틀하면,

 

멋진 산책길이 월명공원 북단인 동백대교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우측 할매산 방향 갈림길에는 월명공원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월명공원(月明公園)>
군산시의 상징인 월명산(月明山)을 비롯하여 장계산•설림산•점방산•석치산 등으로 이어져 있다. 능선과 골짜기 사이에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공원으로 올라가면 군산 시가지와 금강하굿둑•서해•외항•비행장•장항제련소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공원 정상에는 전망대와 바다조각공원, 수시탑, 삼일운동 기념비, 개항 35주년 기념탑, 해병대 전적비, 생각하는 시민상, 채만식 문학비 등이 있다. 수시탑은 타오르는 불꽃과 바람에 나부끼는 돛의 형상을 띠고 있다. 공원 서쪽 설림산 기슭에는 고찰 은적사가 있으며, 점방산과 설림산 사이를 막아 만든 제1수원지가 있다. 공원 안은 조경이 잘되어 있으며, 수령 30년 이상의 등나무와 벚나무가 우거져 경관이 수려하다. 매년 4월에는 전국 규모의 벚꽃 사진 촬영대회가 열린다. 주변에 오성산•은파유원지•금강하굿둑 등의 관광지가 있다.

 

 

할매산 갈림길에서 무심코 앞사람이 가는 좌측 산책길로 들어서서 할매산을 좌회하여 지나쳐버리고,  

 

<할매산(90m)>
군산시 소룡동과 나운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야트막한 뒷동산에 불과하지만 엄연한 금남기맥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산으로, 정상에 서면 군산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며 전망이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금을 생산하는 금광이 있었다고 하며, 정상에는 금을 생산하던 굴과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정상에 평화정이란 육각정과 쉼터, 각종 운동시설과 2001년도 8월 대홍수 때 순직한 공무원 추모비가 있다.

 

이내 할매산에서 내려서는 길과 합쳐져서,

 

편안한 월명공원 산책길을 따르다가,

 

산책길이 좌측 아래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우측 능선길로 오르면,

 

우회한 할매산이 돌아다 보이고,

 

벤치가 있는 작은 봉우리를 지나,

 

좌측으로 편백나무숲 쉼터가 있는 내림길을 내려서면,

 

좌우로 월명호수와 나운초교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 직진의 오름길로 들어서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벤치가 있는 봉우리를 또 지나고,

 

다시 좌측 순환도로, 우측 나운동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둥그런 안부를 지나 직진의 석치산 방향 오름길로 들어서서,

 

나운동 갈림길 이정표.

 

<군산시 나운동>
지금의 나운동이 탄생된 때는 1973년 7월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조선시대 옥구군 미면(米面) 신풍리(新豊里)에 속했던 곳으로, 신풍리에는 상나운, 하나운, 부곡, 대정, 정성, 대전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이중 큰 마을 중 하나인 나운리(羅雲里)의 운중반월(雲中半月 : 구름 속에 반달과 같음) 명당 터에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나-랭이 또는 나-룬이'라고도 했던 나운리 마을의 규모가 크다 보니 신풍초등학교의 서쪽지역(시민문화회관 일대)을 상나운(윗나룬이)으로, 동쪽지역(롯데아파트 일대)을 하나운(아랫나룬이)으로 나누어 불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에도 줄곧 시골마을이었던 나운리 일대는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산시에 편입되며 군산의 최대 주거단지로 탈바꿈해 발전과 동 분할을 거듭했다. 이 나운동이 만들어지며 상나운의 할매산 능선에 이어져 있던 '서당모퉁이산'과 '안산'은 택지개발과 함께 아파트 신축부지로 사라졌다.

 

가파르지 않은 오름길을 올라,

 

능선길을 따르는데 우측으로 군산시가지가 훤하게 내려다 보이고,

 

이정표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우측에 군산상고가 자리한 안부를 지나고,

 

<군산상고>
예전 우리 세대에는 군산상고하면 야구 역전의 명수라는 애칭을 얻은 학교이다. 야구에서 역전을 떠올리면 단연 군산상고였다. 1972년 황금사자기 지역의 라이벌끼리 맞붙은 부산고와 군산상고의 결승전, 창단 20년이 넘은 부산고와 달리 군산상고는 당시 창단한 지 4년 된 신생팀이었고 전국무대에서의 활약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경기 시작 후 1회초 공격에서 바로 선취점을 올리며 투지를 보였지만 3회 1점을 내주며 동점을 허용하고 8회에는 집중 6안타를 맞으며 3실점해 4-1로 점수차가 벌어지며 패배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9회초 부산고 에이스 편기철 선수를 상대로 김우근 선수가 출루하며 기회를 잡았고, 1사 이후 연속 볼넷으로 만루 찬스를 잡으며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계속된 찬스에서 김일권 선수의 몸에 맞는 불과 양기탁 선수의 2타점 적시타가 터지며 동점에 성공했고, 다시 김준환 선수의 1타점 적시타로 역전승을 일구어 내며 창단 후 첫 황금사자기를 품에 안았다. 이날 이후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라는 멋진 애칭을 들으며 동문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많은 이들에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군산상고 야구부(교장 한상하, 부장 원종혁, 감독 나창기)는 창단 3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역전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군산상고의 '역전 스토리'는 정인엽 감독에 의해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라는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군산상고의 인기는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전국구'였다. 68년 이용열씨(당시 경성고무 사장, 전쌍방울 구단주 대행)가 선수들이 먹을 쌀을 직접 손수레에 실어나르는 정성으로 창단한 군산상고 야구부는 70년 국가대표 투수 출신인 최관수 감독(98년 작고)이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열기 시작한다. 최감독은 강도 높은 훈련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이끌어 71년 전국체전 우승을 일구며 호남야구의 기틀을 다졌다.

 

우측에 군산상고가 자리한 안부 이정표.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산불감시카메라와 감시초소가 있는 석치산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석치산(石峙山, 98m)>
군산시 소룡동과 나운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석치사(石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꿩이 많아 '석치산(夕雉山)'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그 산기슭은 아늑하고 양지발라서 고순겸(高淳謙)이 그 조상이 오식도에 귀양살이(고려 고종 1214~1259) 끝에 죽게 되자 내려와 석치산 기슭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이 고씨 때문에 이곳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거기에는 지금도 '숭모사(崇慕詞)'라는 고씨 문중의 제각이 있다. 정상에는 무인감시 카메라와 산불감시 초소가 있고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삼각점과 일반 삼각점 등 2개의 삼각점이 있다.

 

석치산 정상 인증.

 

 

석치산을 뒤로하고 가파른 침목 계단길을 내려서면,

 

편백숲 산림욕장도 조성되어 있고,

 

이내 월명공원 산책로에 접속하여 우틀하여 진행하면,

 

군산청소년수련원 안부를 지나게 되고,

 

좌측에 공원 주차장이 있는 안부 도로 건너편 아치문 계단길로 들어서면,

 

넓은 잔디마당 쉼터가 나오며 점방산 방향 들머리는 쉼터 우측 끝에 있다.

 

돌아본 군산청소년수련원 방향.

 

 

점방산 오름길이 돌아본 석치산 뒤로 지나온 금북기맥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연이어져 보이고,

 

이내 전망산 방향 능선 갈림길에 도착하여,

우측 장계산 방향의 기맥길을 두고 좌측 400m 지점에 위치한 점방산을 다녀오기로 한다.

 

점방산 갈림길 이정표.

 

 

점방산으로 이어지는 Y자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가도 되지만, 우측 길로 오기로 하고 좌측 길로 진행하면,  

 

좌측으로 지나온 금남기맥 능선의 봉우리들과 월명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월명호수>
월명공원에 있는 저수지로 점방산과 설림산 사이에 있으며, 집수구역내에 큰 오염원이 없어 상급수의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수원지 주위를 산책하는 코스는 군산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점방산에서 수원지를 바라보는 경치는 등산객의 발길을 잡는 곳으로, 겨울철 눈이 오는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형용사를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한다.

 

멋진 월명호수 조망.

 

중앙의 계단길을 올라서면,

 

전방산봉수대사적비가 나오며,

 

<점방산 봉수대(135m)>
해망동 바닷가에 우뚝 솟은 점방산(봉화재)은 해발 135m로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그 정상에서는 서해와 금강하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정상에 바로 봉수대가 있었고, 지금도 봉수대의 터가 남아 있는데 둘레 약 70m, 높이 3m의 모서리가 둥근 네모 모양의 돌을 섞어 쌓은 토단이 있고, 토단의 남동쪽 아래에는 50여평 남짓한 평평한 대지가 있다. 이곳은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바람과 추위를 막고 의지할 수 있는 봉수군의 막사가 있었던 장소로 추정된다. 봉수대 터에는 도내에서 유일하게 향토문화자료로 사적비를 세워 관리하고 있다. 점방산 봉수대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4권 옥구현 봉수조(條)에 '東應臨陂縣五聖山 南應花山 北應忠淸道舒川郡雲銀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동쪽의 임파현 오성산(직봉)과 응하고, 남쪽의 화산 봉수대, 북쪽의 충청도 서천군 운은산(간봉)과 역할을 하였다. 즉, 점방산 봉수는 전라도 순천에서 충청남도 공주•천안을 거쳐 서울 목멱산(남산)으로 연결되는 제5거(第五炬) 봉화로의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봉수망>
봉수(烽燧)라 함은 횃불(烽)과 연기(燧)로써 급한 소식을 전했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를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는 방식인데, 우역(郵驛)의 역참제도와 더불어 전근대적인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방의 군사적인 국방 전보기능의 하나였다. 봉수의 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먼 옛날부터 있어 왔으며, 중국은 기원전 8세기경 주(周)나라에서 이미 봉수로써 북방의 견융족 침공에 대처하였음이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나라 13대 왕인 유왕(幽王)이 포사라는 경국지색의 요녀에게 빠져 봉수로 작란질 놀이를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자신도 피살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기록상으로 보면 우리나라 봉수제도의 확실한 시발은 고려 중기로 보아진다. 고려시대 봉수에 관한 기록은 인종 1년인 1123년에 송나라 사신의 한사람으로 고려의 송경(松京:개성)을 다녀간 서긍(1091~1152)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봉수제도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 제18대 의종(毅宗) 3년인 1149년에 이르러서야 봉수의 제반 격식이 규정되었는데,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구분하여 신호하기로 하고 적군과 접근하고 있는 변경,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역과 서남 해안 지방에서의 급변하는 적정의 완급에 따라서 거화(炬火 : 횃불)의 수를 다르게 정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봉수의 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서 더욱 강화하였으며, 태종(太宗)에 이어 1419년 세종 1년에는 종전의 봉수 사거(四炬) 제도를 오거(五炬)의 방식으로 거화법을 더 세분하고 봉수군들의 근무소홀에 대한 과죄규정(좌로 처벌 규정)도 정하였으며, 세종 4년에는 각 봉수처에 연대(煙臺)를 높이 쌓고 그 위에 병기 등을 배치하여 주야로 간망을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바로 점방산(135.5m) 정상에 자리한 전망대가 나온다.

 

<점방산(135m)>
전북 군산시 월명동과 해명동 사이에 있는 월명 공원에 있는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상봉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에 '점방산봉수대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정자가 세워져 있어 전망이 좋은 곳이다. 옛날에 이곳 군산은 왜구 침범이 빈번하였고 그때마다 이곳에서는 봉화를 올려 위급한 사항을 알리곤 하였다. 왜구가 접근해 오면 봉화를 3개 올렸고 이 급보를 개경의 우왕에게 알렸으며 최무선으로 하여금 왜구를 물리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최무선은 이곳 금강하구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왜 적선 500척을 물리쳤는데 이 전투가 유명한 진포대첩이다.

 

<점방산 정상에 있는 월명공원 전망대>
전망대에 올라서면 금강 건너 장항읍과 금강 하구언이 보이고, 고개를 돌리면 군산시내와 지나온 금남기맥 능선이 한눈에 보이며 서해 바다에서 불여 오는 시원한 바람이 산꾼의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한 곳이다.

 

 

월명공원 전방산 전망대 조망 안내도의 북쪽 장항 방향 조망.

 

<예전에 기벌포라 불렀던 금강하구의 군산항 모습>
예부터 군산은 외세의 약탈과 침략으로 얼룩진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한 군산(기벌포)은 삼국통일의 큰 획을 그은 세번의 전투가 있었다. 삼국통일의 큰 획을 그은 세번의 기벌포전투가 있었던 군산은 백제시대에 기벌포라 불리던 지역이었는데, 기벌포는 넓게는 현재 금강하류 지역을 나타냈었고 좁은 의미로는 군산 인근지역을 나타내는 명칭이었다. 백제의 도성 인 사비성에 이르는 뱃길이 금감뿐임으로 인하여 기벌포 즉 군산은 군사적 요충지역이 되어 역사책에 삼국통일전쟁의 가장 중요한 세 번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첫번째 전투는 나당연합군의 백제 기습공격 때 소정방의 당나라군이 상륙작전을 벌인 기벌포 상륙작전의 현장이 곧 군산지역인 것이다. 이때 침입해 오는 당나라군을 맞아 항거하다 죽음을 당한 분들을 기리는 오성인대제가 매년 군산의 오성산 정상에서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다.
두번째 전투는 663년 쓰러진 나라를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나당연합군과의 기벌포해전 혹은 백촌강해전이라고 불리는 전투가 바로 금강하구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패배함으로써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세번째 전투는 백제, 고구려 멸망 후 신라를 포함한 우리의 땅을 직접 지배하려는 당나라군에 맞서 신라군이 전쟁을 하게 되는데, 매초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이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을 이곳 기벌포에서 20여 회의 전투 끝에 승리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마지막 전투가 군산 지역에서 있었다. 군산이 백제시대에 기벌포라고 불리며 많은 인구가 거주했던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시대 군산에 살았던 사람들의 외세 저항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통일신라 때는 전국을 9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전주는 그중 하나였다. 전주에는 다시 10군이 있었고, 그중 하나면 임피군(백제의 시산군)은 함열현(백제 감물아현), 옥구현(백제 마서량현), 회미현(백제 부부리현)을 거느렸다. 고려 현종(10C 초) 이후에는 전주목 아래 임피현이 있어 현령을 두고 현령이 없는 회미, 옥구, 만경 등의 현을 거느렸다. 고려시대 들어서 가장 흥미있는 이 지역의 역사는 왜구의 침입과 성산면 창안마을에 자리하고 있었던 조창(진성창)의 운영일 것이다.
조창이란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두는 곡식을 개경(고려시대 서울)으로 실어 가기 위해서 해안이나 강가에 두는 보관창고로 고려는 전국에 12조창을 두었다. 이 중 하나인 진생창이 지금의 성산면 창오리 망경산, 창안방죽 근처에 있었다. 이곳에 토성을 쌓아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였으며 이를 노리는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진성창 인근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가장 유명한 싸움이 바로 진포대첩이다. 고려 우왕 6년(1380) 8월 왜선 500척이 진포 입구에 침입하여 밧줄로 서로 묶어 일부는 배를 지키고 일부는 상륙하여 노략질하고 백성을 죽였다. 이때 나세, 심덕부, 최무선 3장군은 이미 최무선이 만든 80여 척의 병선에 역시 최무선이 만든 화통, 화포를 설치하여 진포에 이르렀다. 왜의 병선에 다가가 일시에 화포를 쏘아대자 적의 배는 서로 묶어 놓은 터라 일시에 불타 가라앉아 버리고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때 육지로 도망친 적이 옥천, 영동을 거쳐 전국을 휩쓸고 다니다가 이성계 부대에 의하여 황산(남원 운봉)에서 거의 전멸을 당하는데 이것이 황산대첩이다.

 

금강하구 건너로 보이는 장항항과 금북기맥의 종점인 용담정 방향 조망.

 

살짝 당겨본 구)장항제련소.

 

동백대교의 금남기맥의 종점 방향.

 

 

동쪽 군산시내 방향 조망 안내도.

 

<근대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시내>
군산은 근대문화의 도시로,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에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한 항구도시이다. 다른 항구와는 달리 오직 쌀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상공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군산은 일본인의 도시로 호남과 충청도의 쌀은 이곳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강제로 수출됐다.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했던 역사적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군산이다. 수탈의 아픈 흔적은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라는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그려진다. 과거 문화자료들을 근거로 근대문화를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체험학습의 장이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산의 인구 중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5:5 정도나 됐다고 한다. 내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이 주거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원도심(구도심 지역)의 건물 가운데 약 20%는 일제강점기 지어진 가옥이다.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는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로 1909년에 창건됐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전에도 일본인이 군산에 많이 거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국사는 일본 조동종에서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군산에 있는 5개의 일본 사찰 중에서 가장 컸다고 한다. 동국사 인근에 있는 해망동에는 구 히로쓰 가옥이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두목 하야시가 게다를 신고 나오는 장면을 촬영했다고 해서 하야시 집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집은 포목점을 경영하여 큰돈을 번 뒤 군산부의회 의원을 지낸 히로쓰의 저택으로 일본풍의 정원이 아름답다고 한다.
월명공원 아래로는 해망굴이 있는데, 1926년 10월에 개통된 터널로써 (구)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만든 반원형 터널이다. 내항에 자리잡은 구 군산세관은 1908년 6월에 완공된 건물로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 등 건축재를 수입해 유럽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부잔교도 수탈의 상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배들이 부두에 정박할 수 없자 수위에 따라 높이를 자동 조절할 수 있는 부잔교를 설치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에는 한 해에 200만 석의 쌀이 이곳에서 실려나갔다고 한다.

 

오성산 방향.

 

군산시가지 방향.

 

동남쪽 은파유원지 방향.

 

살짝 당겨본 은파유원지 방향.

 

 

남서쪽 고군산군도와 비응항 방향 조망 안내도.

 

남서쪽 고군산군도 방향.

 

남쪽 옥구 방향.

 

남서쪽 고군산군도 방향.

 

살짝 당겨본 새만금방조제와 고군산군도 조망.

 

서쪽 군산산업단지와 군산항 방향.

 

살짝 당겨본 서북쪽 개야도 방향.

 

 

전망대를 내려서서 점방산 이정표를 카메라에 담고는,

 

점방산 갈림길을 향해 이번에는 북측 사면 길로 들어서면,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금남기맥의 종착점인 동백대교가 시야에 들어오고,

 

점방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장계산을 향해 능선길로 접어들면,

 

잠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우측 아래로 신천암이라는 암자가 내려다 보이고,

 

완만하게 이어지던 능선길이 오름길로 바뀌더니,

 

삼각점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장계산 정상에 도착한다.

 

<장계산(長溪山, 108.2m)>
군산시 해망동 월명공원의 일원으로 정상부의 공터는 예전에 헬기장으로 사용되었던 듯하고 산불감시초소와 삼각점이 있다. 장계산은 금남기맥에서 이름을 가진 마지막 산봉우리이지만 금남기맥과 관련된 아무런 상징물이나 특이한 표식은 없다.

 

금남기맥의 마지막 산봉우리인 장계산 정상 인증.

 

 

장계산을 뒤로하고 잠시 내려서면 장계산과 월명산(月明山, 101m) 사이의 안부에 자리한 '삼일운동 기념공원'이 나오는데, 직진의 월명산은 금남기맥에서 벗아나 있고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이라 바로 급좌틀하여 수시탑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삼일운동 기념비.

 

<군산 삼일운동 기념비>
전 민족적 항쟁인 3.1운동은 전국 어디에서나 있었지만 군산은 3월 5일부터 일어났고, 이것은 호남지방 최초로 지방 3.1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군산 구암동(당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 본래의 이름은 궁멀)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학교인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생인 김병수가 2월 28일 독립선언서 200장을 가지고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박연세, 송현호, 고석주, 김수영 등에게 전하였고, 그들은 그곳에서 3,500장을 더 인쇄하여 기독교 신자에게 돌리고 널리 인근 지방까지 나눠 주었다. 이어 태극기를 만들고 조직을 갖추어 만세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무장 경찰관 수십명이 몰려와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교사를 붙잡아 가는 바람에 6일 설애장터에서 계획된 만세 시위는 못할 형편이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김수영, 고석주 교사와 학생들은 당장 선생님의 석방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군산경찰서 앞에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전북 최초의 만세시위였다.
이때 몰려간 영명학교 학생 70명 가운데 과반수를 유치장에 잡아넣었다. 경찰이 주동자를 잡아넣고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3월 5일의 만세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주로 학교와 예수병원 사무원들 그리고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까지 합세한 군중 500여 명은 설애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까지 갔다. 경찰서 앞에서의 시위가 점점 열기를 더해가자 일본 경찰은 재향군인들과 익산에 있던 헌병대의 응원까지 요청할 실정이었다. 그때 붙잡힌 사람은 모두 90명이었다. 이런 만세 시위는 열기를 더해 3월말에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입학 거부에 이어 학교에 불을 질러 일본 경찰을 놀라게 하였다. 3월 28일에는 일본인이 많이 사는 대화정(현 영화동)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3월 30일에는 다음날 열릴 만세 주동자 공판을 앞두고 시민들 수천명이 밤에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시내에서 일본 경찰과 큰 충돌이 있었다. 다음날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열린 법정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군산에서는 3월에서 5월까지 시위와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그동안의 의거 횟수는 21회였고 참가 연인원은 25,800명이었으며 21명이 죽기도 하였다. 3.1운동 당시에 군산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6,581명이었다.

 

안부 이정표의 수시탑 방향이 금남기맥 동백대교 방향이다.

 

 

동백대교를 향해 월명공원 산책로를 따르면,

 

좌측에 금강매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옛스런 매점이 보이고,

 

금강매점 뒤로 보이는 구)장항제련소 방향 조망.

 

<장항제련소>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되어 국내 비철금속 산업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1962년에는 한국광업제련공사가 되었으며, 1972년에는 한국광업제련 주식회사로 민영화되었다. 1986년부터 스테인리스 파이프 제조설비 등 금속가공 사업에 착수했으며, 2000년 현재 한일 합작회사인 LS-Nikko동제련의 장항공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동용광로의 준공으로 처음에는 동제련만 이루어졌으나, 1965년 연제련 설비가 준공되었으며, 1974, 1976년에는 동제련 공정이 증설되었다. 1982년 온산 동제련주식회사를 흡수합병함에 따라 1983년 귀금속공장이 온산제련소로 이전했으며, 1984년에는 주석제련설비가 준공되어 구리(동), 납(연), 주석을 전문적으로 제련하게 되었다.

 

서늘한 날씨에 한적한 평화매점도 지나는데,

 

좌측 금강 건너편으로 올해 초에 걸었던 금북기맥의 종착점인 용담정이 건너다 보이며,

 

'백릉 채만식 선생 문학비'가 세워져 있고,

 

<백릉 채만식 선생 문학비(白菱蔡萬植先生文學碑)>
『1902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소설가 채만식 선생은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중퇴했다. 1925년 단편 '새 길로'가 조선 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대표작은 장편소설 '탁류'로서, 부조리에 얽힌 1930년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이자 군산을 무대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억눌린 서민들의 삶을 기록한 수작이다. 군산까지 흘러와서 서해 바다와 합쳐지는 금강을 두고 채만식은 '탁류'에서 눈물의 강이라고 불렀다. 군데군데 일본식 가옥들이 남아있는 월명동 주택가나 군산 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한 거리 혹은 뱃고동 소리가 처량한 군산항 등지를 돌다 보면 채만식 선생의 체취가 아스라이 느껴진다. 채만식은 한국전쟁 직전 고향 근처에서 가난과 폐결핵이라는 병고로 마흔여덟의 짧은 나이에 이승과 인연을 끊었다.』(펌)

 

이곳이 '구불길 6-1코스 탁류길'이라는 이정표.

 

<구불길 안내판 및 '6-1 탁류길' 세부 안내도>

『군산시가 도보 여행길로 개발한 ‘구불길’ 가운데 ‘탁류길’이 한국관광공사의 ‘12월에 걷기 좋은 여행길 10선’에 선정됐다. '탁류길'코스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 월명공원 수시탑 ~ 신흥동 일본식 가옥 ~ 초원 사진관 ~ 정주사집문학비 ~ 개복동 예술인의 거리 ~ 옛 조선은행 ~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 이르는 6㎞ 구간으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탁류길’은 초원 사진관을 중심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와 ‘타짜’, ‘장군의 아들’ 등 숱한 명화들이 태어난 명성이 재평가돼 이 같은 영예를 안은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탁류길은 영화 촬영지로서의 매력은 물론 군산이 배출한 근대 문학의 거장 백릉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지로 일제 강점기에 남긴 역사의 흔적을 통해 우리 선조의 삶의 애환을 경험하고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어 교육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펌)

 

산책로 우측에는 '바다 조각공원'도 자리하고 있는데,

 

'바다 조각공원'에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바다 조각공원'의 작품을 휘익 둘러보고 내려서면,

바람에 나부끼는 선박의 돛 모양과 군산의 번영을 상징하는 모습을 담은 거대한 수시탑이 자리하고 있고,

 

<수시탑(守市塔)>
『수시탑(守市塔)은 1966년 박동필 군산 시장이 군산시의 발전을 위한 상징물로 세운 상징탑이다. 어려운 경제를 일으키자는 시민들의 의지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지켰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는 곳인 월명산에 세웠다. 수시탑은 돛을 펼친 배의 모습과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형상화했으며, 아랫부분은 항구 도시답게 배 모형을 상징한다. 높이 28m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전 홍익 대학교 강명구 교수가 설계하였다. 원래 탑 이름을 ‘봄을 기다린다’는 뜻의 ‘춘망대(春望臺)’였으나, 1968년 완공 시에는 군산시를 활성화시키자는 뜻의 ‘성시탑(盛市塔)’이었다가 얼마 후 수시탑(守市塔)으로 개명되었다.』(펌)
이 수시탑은 특히 매일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는 경관 조명이 가동되어 웅장한 야경을 창출하여, 항구도시의 화려함을 연출한다고 한다.

 

수시탑 아래에는 군산시의 연혁도 적혀 있다.

 

 

수시탑을 뒤로하고 시멘트 계단길을 내려서면,

 

또다른 거대한 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해병대 군산 장항 이리 지역 전적비'이다.

 

전적비 비문.

 

해병대 군산.장항.이리 전투 안내도.

 

<군산·장항·이리 지구 전투(張項群山裡里地區戰鬪)>
『張項群山裡里地區戰鬪(군산·장항·이리 지구 전투)는 1949년 4월 창설된 대한민국 해병[고길훈 부대]이 6·25 전쟁에서 최초로 감행한 상륙 작전이다. 1950년 7월 초 충청남도 천안을 점령한 북한 제13연대가 호남 지역으로 남하할 때 7월 16일 군산에 상륙한 해병대 부대가 북한의 금강 진출을 저지하고자 상륙 작전을 실시하였다. 고길훈 부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적군의 남침을 지연시켰고, 수송함[LST-810]을 이용한 정부미 1만 3000가마와 주요 물자 반출 작전을 수행했다. 병력과 화력이 열세임에도 사살 62명, 부상 311명, 포로 5명의 전과도 올렸다. 아군도 전사 36명, 부상 31명의 손실을 보았으나 최초의 승리로 ‘무적 해병’ 신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7월 20일까지 금강을 방패로 삼아 군산을 방어, 격렬한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고길훈 부대는 해상으로 철수한다. 자신감을 얻은 한국 해병은 낙동강 전선 상륙 작전에서 ‘귀신 잡는 해병’ 신화를 창조한다. 9월에는 미국 해병대와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 군산 지역에 양동 작전을 펼쳐 금강을 다시 찾으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펌)

 

전적비 좌측 군산항과 장항항 조망.

 

<월명공원 끝자락에서 바라본 금강 하구>
전북 장수군의 수분리에서 발원한 금강은 전북 북부지방과 충청도 땅을 동서로 가로질러 군산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숱한 역사와 애환을 담은 장장 400여 km의 금강 하구에는 하구둑이 생겨나 새로운 관광의 명소로 부상하였다. 또한 하구둑이 생기면서 군산과 장항 사이를 단숨에 자동차로 왕래하게 되었고, 군산에서 장항을 오가던 뱃길은 2009년에 폐쇄되었다. 주변경관 또한 상전벽해라 할 만큼 달라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유원지가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은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 등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굽이치며 흐르는 강의 물결이 비단결 같다는 뜻으로 금강(錦江)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강 외에 호강(湖江)으로도 불린다. 금강 하류가 폭이 넓어 호수로 연상해서였을 것이다.

 

해병대 전적비 아래에는 2014년에 개봉하여 200만 관객을 돌파한 황정민, 한혜진 주연의 '남자가 사랑할 때' 촬영지가 있고,   

 

황정민, 한혜진 주연의 '남자가 사랑할 때'를 촬영한 곳이 이곳 군산이었다는 안내판.

 

그 아래에는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행 동상'이 있다는 표석이 나오며,

 

'충혼불멸'과 '의용불멸' 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을 지나면,

 

<'충혼 불멸', '의룡 불멸' 탑>

(좌) 충혼불멸 탑은 ​한국 전쟁 당시 산화한 군산시 6개 학교 211명의 학도의용군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이고, (우) 의용불멸 탑은 ​군산 역사상 최대의 폭발사건으로 전해지고 있는 군산시 경마장 폭발사건 때 희생된 의용소방대원들을 추모하기 위한 비석이다.

 

'충혼 불멸', '의룡 불멸' 탑 안내문.

 

언덕 위 전망대 앞에는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춘고(春皐) 이인식(李仁植) 선생>
『춘고(春皐) 이인식(李仁植) 선생은, 1901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옥구 지방의 거부(巨富) 이태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보성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28일 정동교회 구내 이필주 목사 집에서 3·1독립운동을 계획할 때 보성중학교 대표로 참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3월 5일에는 남대문역 광장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0년 8월에 전 재산(토지 24만여 평)을 방매하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8,000원(현시가 약 200억 원)을 헌납하였다. 1923년 일본 동양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생 단체인 금우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간행하며 항일운동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하여 정보 수집과 군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다. 해방 후 1953년 임피중학교 교장으로 부임, 후진 양성에 매진하여 당시 전교생 80명인 폐교 직전의 학교를 학생 600명이 넘는 배움의 전당으로 육성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63년 3월 25일 전라북도 교육 위원 재직 중 별세하였고, 이인식 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2005년 10월 1일 이인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웠다.』 (펌)

 

이인식 선생 동상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앞쪽으로 동백대교가 보이며,

 

우측 쉼터 옆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본뜬 군산시의 '생각하는 시민상'도 있는데,

앞쪽으로 보이는 금남기맥의 종착점인 동맥대교 남단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기맥꾼'이 되어 본다.

 

 

월명공원 산책길 끝자락에서 좌측 '군산 수산물 종합센터' 쪽으로 내려서서,

 

동백대교 진입램프 아래의 횡단보도를 건너서 금강변으로 가,

 

동백대교 아래의 넘실대는 금강 물결을 바라보며 6차에 걸친 금남기맥 종주를 마감한다.

 

<금남기맥 종주를 마감하며>
산경표가 가리키는 금남정맥은 진안의 조약봉에서 발원하여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을 지나서 부여의 부소산에서 백마강의 조룡대로 가라앉으며 그 맥을 다한다. 그러나 이는 '정맥은 강의 울타리'라는 물 가름의 원칙으로 볼 때 오류라고 지적되어 왔다. 산경표의 원리에 충실하자면 금남정맥은 군산으로 산줄기를 이어가는 대동여지도가 합당해 보인다. 현재 산경표에 따른 금남정맥을 걸은 많은 정맥 꾼들은 대동여지도에 따른 '대동금남정맥/금남기맥' 종주에도 나서고 있다. 산경표에 나타난 산줄기가 그 흐름이나 산세로 볼 때 당당하고 멋지고 걷는 재미도 좋기는 하다.
금남정맥의 금만봉(750m)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하는 또 하나의 산출기가 대동여지도를 따르는 금남기맥인데, 이 산줄기는 옛 백제의 숨결이 남아있는 전주, 익산 땅을 크게 휘감으며 지나 군산의 장계산(108.2m)까지 이어지며 마루금 우측의 금강과 좌측의 만경강이 만나서 서해 바다와 합류하는 군산 앞바다에서 그 맥을 다하려고 한다. 지난봄부터 6개월에 걸쳐서 금만봉에서 걸어와 지금 이곳 군산 앞바다에 입수하려고 하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택시에 분승하여 산행 출발지인 칠거리재로 돌아가 차량을 회수하여,

 

과천의 김치찌개집에서 외부 인사의 축하까지 받으며 뒤풀이 겸 금남기맥 졸업연회를 가진다.

 

지난번 산행에서 갯고을로 알았던 군산에 산(山)이 많음을 알았는데, 이번 금남기맥 마지막 산행을 하면서는 군산에 아름다운 호수도 많음에 새삼 놀랐다. 여인의 눈썹을 닮은 월명호수를 비롯하여 군산호수, 은파호수 등은 따로이 한번 걸어봐도 좋을 듯하다.

 

'사람들이 산행을 멈추어도 세월은 흐른다.' 즉 코로나19로 백우산우회가 예정된 산행을 중단했어도 세월은 흐르고 우리들은 늙어 간다.  따라서 언제가 산행이 재개되더라도 힘든 기맥 산행을 할 수 있을지는 장담키 어려운 일이기에 가능한 몇몇 회원들 만이라도 어려운 기맥들을  걸어두는 게 좋을 듯하여 시작한 금남기맥 종주를 마쳤다. 하루빨리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