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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서울 인왕산 둘레길과 이곳저곳

by 재희다 2021. 12. 24.

 

산 행 지 : 인왕산. (서울시 종로구, 서대문구)

산 행 일 : 2021. 12. 18.(토)

산행코스 : 독립문역 ~ 인왕사 ~ 국사당 ~ 선바위 ~ 범봉 ~ 인왕산 정상 ~ 석굴암 ~ 수성동계곡 ~ 인왕산둘레길 반시계 방향 ~ 수성동계곡 ~ 서촌 ~ 경복궁역 (12km, 4시간 반 소요)

산행참석 : 4 백두.

 

<산행지도>

 

인왕산은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사직동, 필운동, 누상동, 옥인동,  청운동, 부암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에 걸쳐 있는 높이 338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 중 하나이며,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하였다.

 

서울 도심에 있는 인왕산은 이런저런 사연이 깃든 바위들도 많고 바위산이라 조망도 좋은데 둘레길까지 만들어져 있다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코로나19의 빠른 확산세로 멀리 이동하기도 눈치가 보이고 하여 카페 '함께 산행합시다'에 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목욜까지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금욜 총무님의 댓글이 달리며 이런저런 이유로 4명이 함께 걷기로 하였다.

 

 

연일 계속되던 따뜻한 날씨가 산행을 앞둔 금욜에 영하 9도까지 떨어지며 칼바람이 휘몰아쳤는데, 다행히 산행일인 토욜은 바람도 잦아들고 기온도 올라가며 오후에는 눈도 예보되어 있다. 오후에는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겠지만 그래도 매서운 추위에 대비하여 겹겹이 몸을 감싸고는 9시에 산행 출발지인 독립문역 2번 출구에 모여 산행을 시작한다. 

 

독립문역 2번 출구에서 골목길을 더듬어 인왕산 방향으로 진행하니 '인왕사 가는길' 안내판이 나타나고,

 

앞쪽 급경사 비탈길에 인왕사 일주문이 보이고,

 

<인왕산 인왕사(仁王山 仁王寺)>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에 여러 암자들이 다닥다닥 군락을 이룬 통합 사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조가 인왕사에서 조생(祖生)스님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조의 후원으로 늦어도 1397년에는 사찰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주는 무학대사와 조생선사이며 매월 초하루 보름마다 내원당에서 법회를 올리고 강설은 호국인왕금강반야바라밀경을 설하였다고 한다. 세종 때는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명칭을 인왕산이라 칭하고 사찰을 인왕사라 부르게 되었으나, 연산군 때 궁궐이 보인다 하여 복세암, 금강굴과 함께 인왕사도 폐사되었다. 그 후 복원되어 상당기간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지만 남게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 박선묵이 선암정사(현 본원정사)를 세우면서 인왕사를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1914년에 탄응이 인근에 대원암을 세웠고, 1924년에 자인이 안일암을 지었고, 1927년에는 춘담이 극락전을 세우고, 1930년에 묘법이 치성당을 신축하는 등 1930년경에 이르면 10여 개의 암자가 모이며 군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1942년에 분리된 여러 개의 암자를 통합, 다시 '인왕사'라 칭하여 봉은사의 말사로 등록하였고, 현재 5개 종단의 10여 개 사암(私庵)이 군락을 이루며 '인왕사'라는 한 명칭의 사찰 아래서 공존하고 있다.
실제로 1977년 인왕사 부흥을 위한 복원불사 차원에서 대웅전, 관음전, 극락전, 선암정사와 보광전의 5개 전각 대부분의 소유명의자는 인왕사 명의로 등기했다. 인왕사가 1988년 7월 25일 구 전통사찰보존법에 따라 전통사찰로 등록될 당시 작성된 '전통사찰 선정을 위한 조사보고서'에는 전각들이 인왕사의 주요 건물로 등재되어 있고, 인왕사의 교세에 관하여 승려는 12명, 신도는 2만 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각 암자마다 종단이 다르고 주지가 따로 있지만, 4년에 한 번씩 대표 역할을 하는 총주지를 선출하여 절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법원도 최근 판례에서 인왕사 명의로 소송이 가능한 당사자능력이 있다고 판시했다.

 

인왕사의 중심인 본원정사를 지나 오르면,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여러 신을 모신 국사당이 나오고 앞쪽으로는 선바위도 보인다.

 

<인왕산 국사당(仁旺山國師堂)>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인왕산(仁王山)에 있는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 신을 모신 신당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인왕산 기슭 선바위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나, 원래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따라서 그 연혁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의 역사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년 5월, 9년 7월)고 하며,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년, 2월)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라는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가을에 초제[醮祭: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국사당이라는 명칭과 무신도(巫神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사당의 전신이다. 1972년 당시 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엽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고,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 한다.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다스리는 기록]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의 명산과 당·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 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국사당은 1925년 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도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재 당의 평면은 전면 3칸에 측면 2칸의 주간(柱間)이고, 기둥 간 사이는 전면 어간(御間) 약 2.6m에 협간(夾間)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이다. 따라서 내부의 넓이는 도합 11평이고,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좌우 일부와 뒷면 및 전면에는 무신도가 걸려 있고, 평면 전체가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민간의 일반건물들보다 단순한 구조이지만 규모는 더 큰 편이며, 기둥 위의 구조나 지붕형태 등 전체적인 구성이 견실과 간소를 위주로 하면서도 방주[方柱: 네모진 기둥]의 실귀[糸刻: 가늘게 귀접이한 재목]나 분합문의 긴 형태, 문살의 새김 등과 같은 드러나지 않는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도의 세련된 장식요소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아울러 대들보의 후림이나 연목의 배흘림,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정조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한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단골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참배객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연중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고 그다음이 2월·3월·9월의 순이다. 이 당에서 행하는 굿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이고, 둘째는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셋째는 흔히 부모의 사령(死靈)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기굿이다. 그러나 몇 가지 동기가 복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굿이 1년에 평균 100여 회 치러진다. 서울시내에도 이러한 굿당이 몇 군데 있는데, 최근 10∼20년 사이에 남산 밑 회현동의 노인성당과 불광동의 할미당, 자하문의 서낭당 등이 없어졌지만, 국사당은 1973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국사당 안내판.

 

늘 간절한 치성을 드리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 선바위. 

 

<인왕산 선바위(禪岩)>
이 바위는 아이 갖기를 원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불리는데,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린다. 또한 부부가 나란히 머리를 기댄 것 같다고 해서 부부바위라고도 하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어 소원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바위가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像)이라는 설화와 태조 부부의 상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일제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이 바위 곁으로 옮긴 뒤부터는 이 바위와 국사당이 함께 무신(巫神)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으로 천도할 무렵 선바위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불교를 상징하는 선바위가 마땅히 도성 안에 있어야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학자인 정도전은 도성 밖에 있어야 불교가 쇠미해지고 유교가 흥왕하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종결정권자인 태조 이성계는 그들의 주장에 결정을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왕사였고, 또 한 사람은 첫손가락에 꼽히는 개국공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눈이 내렸다. 이성계는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 가자는 정도전의 제언을 듣고 그와 함께 현장답사에 나섰다. 그때 오늘날의 도성 성곽 안쪽에만 눈이 녹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태조는 이 현상을 하늘이 내린 계시라고 생각하고 눈이 녹은 곳과 녹지 않은 곳의 경계선을 따라 성곽을 쌓게 했다. 그러니까 자연히 선바위는 성 밖에 남게 되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제 중들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의 예언대로 승려들은 조선시대 내내 도성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가 살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한양도성의 경계를 눈 때문에 결정지었다고 하여 '눈 설(雪)' 자가 들어가는 '눈 울타리', 즉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ㄹ' 받침이 묵음화되어 서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은 서울 성곽을 '설성(雪城)'이라 부르는 이유라고 한다. 인왕산을 볼 때면 이 바위가 가장 눈에 띄는데 조선 초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것이 이 설화에도 나타난다.

 

선바위 안내판.

 

내 눈에는 스님의 장삼이 떠오르지 않고 핼러윈 가면과 뭉크의 판화작품 '절규'가 떠오르는 선바위 모습.

 

 

 

선바위를 우측으로 돌아 뒤쪽 바위 능선으로 오르니, 뒤쪽 남산 방향으로 조망이 멋진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좌측 서대문 독립공원(옛 서대문 형무소) 조망.

 

무악재 건너편의 안산 조망.

 

 

전망 좋고 햇살이 따스한 바위를 뒤로하고 오르면, 앞쪽으로 얼굴바위라고도 하는 부처바위가 내려다보는 지점에서 무악아파트에서 오르는 등로와 만나 우측 와불바위 방향으로 진행하여,

 

와불바위 위로 올라서면,

 

다시한번 주변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서울 도심과 검단산 방향.

 

올려다본 인왕산 범봉 방향으로 보이는 부처바위와 모자(帽子)바위 조망.

 

 

모자바위 아래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는데 곳곳에 치성을 드린 흔적이 산재해 있고,

 

모자바위 아래 절벽 밑에는 깡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눈길을 끈다.

 

 

데크목 등로를 따라 한양도성 성곽 안으로 들어며 남산 방향을 돌아보고,

 

좌틀하여 인왕산 정상을 향해 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르면,

 

바위를 오르는 철계단길을 오르게 되고,

 

바위 위로 올라서면 북악산도 조망되고,

 

가야 할 범바위와 인왕산 정상이 지척으로 보인다.

 

북동쪽 북악산과 경복궁 방향.

 

남동쪽 남한산성 방향.

 

남서쪽 여의도 방향.

 

북서쪽 백련산 방향.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는 범바위에서 포즈를 취해 보는데 역광이라 누군지 가늠이 안되고,

 

데크목 계단길을 따라 범바위봉을 내려서면,

 

지난달 17주년 산행에서 올라왔던 인왕천약수터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철계단길을 시작으로 인왕산 정상을 향한 가파른 오름길을 시작하여,

 

가드 로프가 메인 암릉을 오르다가,

 

뒤쪽 범바위 방향 한양성곽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 쉼터에서,

 

두텁게 껴입었던 솜옷은 벗어 배낭에 갈무리하며 잠시 쉼을 한다.

 

 

한결 가벼운 차림으로 다시금 인왕산 정상을 향하면,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한동안 인왕산이 출입이 통제되었을 때 군인들의 순찰로였던 바위계단길을 오르게 되고,

 

이내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있는 인왕산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인왕산(仁王山, 338.2m)>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弘濟洞)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서울시를 분지로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인왕사(仁王寺)라는 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산의 능선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남쪽으로 행촌동과 사직동이 있고 동쪽으로 필운동, 누상동, 옥인동, 신교동, 청운동으로 이어지며 북쪽 산허리의 자하문고개를 통해 북악산(北岳山)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서쪽으로는 서대문구 홍제동이 있다.
경희궁 뒤편 사직동 한국사회과학자료원 앞 인왕산로를 지나 서울성곽이 이어지며 인왕산 선바위를 지나 범바위를 지난다. 서울성곽은 인왕산 정상부로 이어지는데 메부리바위, 치마바위, 삿갓바위로 이어지고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자하문(창의문)과 연결되고 그다음 북악산으로 이어진다. 인왕산은 고려시대부터 불교사찰이 많았던 곳이며 현재도 5~6곳의 사찰과 암자가 있다. 조선 중기 명나라 사신이 임금을 보필한다는 의미에서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연유로 필운대(弼雲臺)와 필운동(弼雲洞)의 이름이 남아있다. 필운대에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집터가 남아있다(현 배화여자고등학교 교내 소재). 옥인동은 옥류동과 인왕동이 합쳐진 이름인데 계곡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었다. 북쪽 창의문을 지나 부암동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이 있다. 인왕산 국사당(仁王山 國師堂)은 원래 남산(南山)의 산신(山神)인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는 산신당(山神堂)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사(神士)를 지으면서 국사당을 인왕산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서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아 다양한 이름들이 지어져 있다. 선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데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禪(선)’ 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 모자를 닮은 모자바위, 돼지를 닮은 돼지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가 있고 남쪽 능선 정상에 있는 달팽이바위는 달팽이가 기어가는 형상으로 유명하다. 호랑이 굴이 있는 남쪽 능선에 호랑이바위, 정상부에 이르면 뾰족한 메부리바위가 있으며 삿갓모양의 삿갓바위가 인왕산 정상이다. 그 외 치마바위, 해골바위, 기차바위, 부처님바위 등이 있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강희언(姜熙彦)의 《인왕산도(仁王山圖)》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영조 대와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표기하기도 하였으나, 현대에 들어서 ‘仁王’으로 옛 지명이 환원되었다. 청와대를 경호하는 군사적인 이유로 1968년 1월 21일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인왕산 정상 인증.

 

인왕산 정상에서 본 북악산 방향.

 

형제봉과 수락산 방향.

 

북한산 주능선 방향.

 

북서쪽 은평구 방향.

 

북한산을 배경으로.

 

 

인왕산 정상을 뒤로하고 창의문 방향 성곽길로 들어서면,

 

위험 표시가 있는 철계단길이 나타나고,

 

기차바위 너머로 북한산 주능선이 멋지게 조망되며,

 

철계단과 돌계단을 연이어 내려서면,

 

따르던 한양도성길을 두고 우측으로 석굴암 방향 샛길로 들어선다.  

 

 

가파른 계곡 암릉 내림길이 이어지며,

 

좌측도 바위 절벽이고,

 

우측도 바위 절벽인데,

 

거대한 바위 슬랩 아래에는 토치카로 보이는 구조물이 있다.

 

토치가 내부 전경.

 

 

 

잠시 더 내려서면 조망이 멋진 커다란 반석이 있고,

 

그 우측에는 주름치마바위라고도 하는 치마바위가 보이는데, 이야기 속의 치마바위는 사직골에 있는 반면에 이곳은 치마의 주름을 닮은 바위라서 구분하여 그리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치마바위>
종로구 사직동 사직공원 서쪽에 있는 넓고 평평하게 생긴 바위로,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즉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중종이 되자 그 부인 신씨(愼氏)는 친정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 때 피살되었는데, 반정을 주도해온 박원종(朴元宗) 등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 하며 반대하자 인왕산 아래 사직골 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또 중종이 사직단에 나올 때에는 언제나 말죽을 쑤어 주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옥인동에 있는 인왕산 중턱 병풍바위 앞에 우뚝 솟은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조선 왕비중 가장 오랫동안 왕비 자리를 지킨 이는 영조의 비 정성왕후로, 무려 33년간 왕비 자리를 지켰다. 반면 가장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비는 중종의 첫째 왕비인 단경왕후로 단 7일간에 불과했다. 그것도 왕비 즉위식조차 못한 채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난 비운의 왕비이자 치마바위의 주인공이다.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로 12세 되던 해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훗날 중종이 된 진성대군과 혼인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파에 의해 살해되는 와중에 왕비가 되었다. 그러니 반정파에 의해 역적의 딸로 지목돼 7일 만에 폐비가 되어 사저가 있던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기거했다. 하지만 중종과의 사이는 좋았다. 중종은 어쩔 수 없이 단경왕후를 내보내야 했고, 이후 왕후를 그리워하며 종종 경회루에 올라 단경왕후가 있는 인왕산 자락을 바라보곤 했다고 전한다. 이 말을 어찌어찌 전해 들은 단경왕후는 그날부터 경복궁이 발아래 펼쳐지는 인왕산 정상 아래 바위에 붉은 치마를 펼쳐놓고 중종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바람에 실어 보냈다.

단경왕후는 이후 50여 년을 더 살다 71세 때 세상을 떠났다. 중종도 단경왕후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지지만 생전에 두 사람이 만난 기록은 없다. 이미 중종이 말년에 단경왕후를 비구니로 위장시켜 궁으로 불렀다는 믿거나 말거나식 야사만 전해진다.
치마바위 주인공 단경왕후는 죽은 후인 1739년(영조 15년)에 왕후로 복위되었고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온릉에 잠들어 있다. 주인공들은 떠났지만 애틋한 사랑이 깃든 바위는 남아 그날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사직골에 있다는 치마바위도 찾아봐야겠지만, 어쨌거나 치맛자락을 닮은 치마바위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며 붉은 치마를 펼친 불운의 단경왕후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치마바위를 배경으로.

 

 

커다란 바위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여 내려서다가,

 

다시한번 우측의 치마바위를 올려다 보고,

 

밧줄에 의지하여 커다란 바위를 미끄러져 내려서면,

 

 

 

이내 '샛길 폐쇄' 표지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석굴암에 내려서게 된 듯하다.

 

 

좌.우 갈림길에서 우측은 인왕천약수터 방향이고, 좌측으로 진행하면 매바위가 자리하고 있고,

 

매바위 틈에 놓인 작은 불상.

 

좌측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으로 진행하면,

 

아래에 석굴암이 있는 거대한 암반이 있는데,

이곳이  연산군 때 궁궐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여 불경스럽다고 폐사한 인왕사였을까?

 

<인왕산 석굴암>
인왕산 정상 아래 거대한 암반 내의 석굴에 자리한 석굴암은 수성동 계곡 주변 옥인동 불국사의 암자로, 건물은 없고 거대한 암반 아래 석굴만 있다. 석굴암은 인왕산 생태경관보전지역 내에 자리한 암자여서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정상 바로 아래에 있어서 매우 험준하다.

 

이 부근이 생태경관보전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

 

정면에서 본 석굴암.

글자 그대로 거대한 바위 아래 석굴에 부처를 모셔 놓은 암자가 있다.

 

문이 닫혀있는 석굴암 출입구 모습.

 

 

병풍바위와 치마바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명소 중의 명소는 후일을 기약하고 돌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데크목 계단길이 시작되는 우측편에 전망이 좋은 쉼터가 있다.

 

동쪽 아차산 방향.

 

남동쪽 남한산성 방향.

 

 

길게 이어진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면,

 

우측에 석굴암 약수터가 자리하고 있고,

 

잠시 더 내려서면 북악스카이웨이 도로가 나오는데 좌측 벤치에서 군고구미를 먹으며 잠시의 쉼을 한다.

 

 

석굴암 입구를 뒤로하고 수성동계곡으로 내려서다가,

 

좌측 인왕산둘레길로 들어서서 창의문을 향하는데 쉼터에는 '황소 화가' 이중섭 안내판이 걸려있고,

 

인왕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작은 공터를 지나는데 '해맞이동산'이란 안내판이 걸려있고,

 

종로구 옥인동 불국사 뒤편의 쉼터를 지나면,

 

옥인동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나고,

 

커다란 참나무가 있는 쉼터도 지나,

 

따스한 햇살이 몰고 온 졸음에 연신 고개를 떨구는 노인장이 앉아있는 쉼터도 지나면,

 

'위항문학' 안내판이 걸려있는 쉼터를 지나게 된다.

 

<위항문학(委巷文學)>
조선 선조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중인·서얼·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으로 여항문학(閭巷文學)·중인문학(中人文學)·서리문학(胥吏文學)이라고도 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중종 때의 홍유손(洪裕孫), 선조 때의 박지화(朴枝華)·서기(徐起)·송익필(宋翼弼), 인조 때의 유희경(劉希慶)을 비롯한 풍월향도(風月香徒), 현종 때 최기남(崔奇男) 등의 《육가잡영(六家雜詠)》 동인, 숙종 때 임준원(林俊元) 등의 낙사시인(洛社詩人), 영조 때 3정(鄭來僑·鄭敏僑·鄭俊僑)과 이언진(李彦瑱), 정조 때 천수경(天壽慶) 등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동인, 철종 때 이상적(李尙迪), 고종 때 조기원(趙基元)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들이 남긴 주요 저술로는 개인적인 시문집 이외에도 《육가잡영》 《해동유주(海東遺珠)》 《소대풍요(昭大風謠)》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 등이 있는데, 이는 우리 한문학사(漢文學史)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비록 양반계급의 지배를 받았으나 경제적으로는 양반계급을 능가하는 자도 있어 자기류의 독특한 문학을 가질 만하였다. 그러나 중인·서얼·서리 출신의 위항시인·문사(文士)들은 민중 속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양반사회에 기생하는 계층이었던 만큼 양반계급의 문학과 비길 때 큰 혁신이나 창조를 기대할 수 없었으며, 단지 문학적인 기교의 발달과 소시민적인 기호에만 접근한 일면이 있었다.

 

북한산 보현봉과 북악산 조망.

 

 

조망이 좋은 쉼터를 내려서면 데크길이 이어지고,

 

이내 '가온다리'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자그마한 출렁다리를 지나는데,

 

'가온'은 '가운데', '중심'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며,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아보라는 글귀가 걸려있고,

 

다시 데크길 오르내림을 지나면,

 

'대금 명인 정약대와 나막신'이란 안내판이 걸려있는 옹벽을 지난다.

 

<대금 명인 정약대와 나막신>
인왕산은 조선 후기 최고의 대금 명인 정약대에게 훌륭한 연습장이었습니다. 매번 곡을 연습할 때마다 나막신에 모래알 하나씩을 넣어 가득 찬 뒤에야 산에서 내려왔는데, 나중에는 모래 속에서 풀이 솟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천재는 집중과 노력으로 태어납니다.

 

QR코드를 찍으면 대금 연주가 들려요!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라는 이빨바위.

 

 

'쭉~' 가면 윤동주 문학관이 나온다는 이정표를 따르면,

 

'청운공원 해맞이명소'가 나오며 인왕산둘레길은 포장도로에 접속하게 되고,

 

잠시 포장도로를 따르면,

 

윤동주 문학관과 '1.21사태' 때에 일등 공신이었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 순직비가 있는 자하문고개 도로에 도착하여,

 

<자하문고개>
아래로 자하문 터널이 뚫려 한산해졌지만 옛날에는 세검정과 평창동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해서 무척 붐비는 고개였다.

 

<청계천 발원지 표석>
예부터 청계천(옛 이름 개천(開川))은 이곳 백운동에서 발원해 인왕산 청풍계 물과 합쳐지고 다시 삼청동 계곡수, 남산 청학동 물, 낙산 반촌 쌍계동 물과 합쳐져 오간수문(동대문 옆 청계천)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니 이 지점은 수도 서울 물줄기의 시원이다(요즘은 세종로 광장 한쪽에 청계천의 인공 발원지를 만들어 놓아 발원지를 대신하고 있다). 이곳 바로 아래 동네 이름이 청운동(淸雲洞)인데 이는 이곳 물줄기가 시작하는 백운동과 인왕산 청풍계에서 따온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장동이라 불렸고 장동 김씨(안동 김씨 중 이곳에 살던 이들)는 조선 세도가의 대명사였다. ‘가노라 삼각산아’의 김상헌 선생과 송강 정철 선생이 모두 이곳 장동 출신이다.

 

좌틀하여 자하문고개를 넘는데, 건너편으로 청계천 발원지 표석이 있고 그 위로는 '창의문'도 보인다.

 

<창의문(彰義門)>
서울성곽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四大門), 그 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을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원래 북한(北漢)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태종 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에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야사에는 ‘이 문을 열면 아랫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의 운반을 위하여 열어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 17년(1741)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 당시 훈련대장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 공사 때 천장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되었고,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현판이 결려 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 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月團)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자하문 고개를 넘으면 건너편으로 꾀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자하손만두, 부빙, 부암동돈가스 등의 식당들이 있고,

 

도로를 따라 내려서다가 부암동주민센타에서 직진의 인왕산둘레길을 두고 좌틀하여 자하미술관 방향 골목길로 들어선다.

 

사실 오늘 산행은 친한 친구 부부와 인왕산둘레길을 한바퀴 돌아보려 했다가, 회장님이 지인의 부탁으로 처리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서 자하문미술관 부근을 둘러봐야 한다고 해서 급히 노정을 변경하여 진행하게 된 산행이다.

 

 

골목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우측 길을 따르는데,

 

우측에는 '무계원'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멋진 한옥이 있고,

 

<무계원(武溪園) - 옛 오진암>
서울 종로구가 전통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부암동에 건립한 전통문화공간으로, 2014년 3월 개원하였다. 무계원은 해체 위기의 서울시등록음식점 1호 ‘오진암’을 이축해 복원한 한옥으로, 연면적 389㎡에 안채·행랑채·사랑채를 갖췄다. 특히 무계원에 쓰인 목조 자재는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에서 옮겨온 것인데, 오진암은 조선 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가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종로구는 2010년 10월 관광호텔 신축으로 오진암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복원하기로 하고, 안평대군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무계정사지’ 인근으로 이축을 결정했다. 무계정사지는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을 꾼 도원과 흡사해 화가 안견에게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하고 정자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장소로, 이곳으로 옮기게 되면서 ‘무계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한편, 1953년 한정식집으로 등록해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이었던 오진암은 조선말 내관 이병직이 지은 곳으로, 그의 사후 일반인에게 인수됐다. 3대까지 영업을 했으나 2010년 호텔이 건립되면서 사라지게 되었고, 한옥의 자재 일부는 무계원으로 이축·복원되었다.

 

이곳 무계원(武溪園)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살던 집이었다. 이 지역은 안평대군이 꿈을 꾼 중국의 '무릉도원'과 비슷해 화가 안견에게 '몽유도원도'를 3일 만에 그리게 한 곳이며 정자를 짓고 활쏘기를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다만 이 한옥들은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등록 음식점 1호인 '오진암'을 헐면서 자재를 이송해와 이곳에 복원했다. 즉 한옥은 '오진암'이라는 기생집이었던 것이고 또한 '남북 7.4공동선언문' 작성의 밀실이기도 하였으며 북한 관리들을 접대했던 곳이기도 하다.

 

잠시 더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 '반계 윤웅렬 별장" 도 지나면,

 

<반계 윤웅렬 별장>

이 집은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1865~1945)의 아버지 윤웅렬(1840~1911)이 창의문 밖 정승지에 지은 별장이다. 1906년 건립 당시 이 집에는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만 있었으나, 윤웅렬이 죽은 후 셋째 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안채, 사랑채 및 광채, 문간채의 세 채다. 반계 윤웅렬 별장은 도성 밖 인왕산 북쪽 계곡에 세워진 별장으로서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근대 건축 양식이 주택에 적용된 흥미로운 사례이며, 또 안채는 근대 서울 한옥의 변화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다.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의 아버지 '반계 윤웅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윤웅렬'은 구한말 군부대신 등을 지낸 무관이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 일본 제국 남작의 작위를 받고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공채 2만 5천 원을 하사 받은 친일파였고, 윤치호도 초기에는 국운 부흥에 노력하였으나 1920년 이후에는 친일 노선으로 선회한 인물이다.

 

반계 윤웅렬 별장 안내판.

 

인왕산으로 오르는 직진의 들머리가 나온다.

 

 

인왕산 들머리에서 좌측 골목길로 오르면 자하미술관이 자리하고 있고,

 

길은 '부암동 산 21'에서 끝이 난다.

 

 

부암동 조망.

 

<부암동>
부암동(付岩洞)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내로라하는 권세가들이 살거나 별장을 지어 나드리[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경치 좋고 놀기 좋은 동네였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살던 <무계원>,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그리고 홍제천이 흐르는 곳에 연산군이 봄을 농락하며 기생들과 놀았다는 <탕춘대>, 인조반정을 성공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洗劍亭)>... 일제강점기 친일매국노 반계 윤웅렬이 친일 댓가로 받은 돈으로 엄청난 별서를 지어 호위호식하던 별장, 더럽게 운수 없는 '운수 좋은 날'이란 소설을 쓴 현진건 선생이 끝까지 친일을 거부하다가 한 줌의 재가 되어 한강에 뿌려져 무덤조차 없게 된 동네. 수많은 역사와 영화가 아로새겨진 부암동은 이제 한켠으로 밀려나 서민들이 사는 달동네가 되었는데, 역사는 반복된다는데 언제 또 바뀌게 될는지!

 

 

 

 

 

다시 골목을 돌아 나와 인왕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로 들어서면,

 

가파른 바위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등로에 데크목 계단을 설치하는 공사장이 나타나고,

 

우측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 올랐더니 바위 비박지쯤에서 길이 끊어져 있어서 되돌아 나오고,

 

공사 작업자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데크목 설치 공사장을 따라 오르면,

 

금줄이 쳐진 탕춘대성 방향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서 인왕산둘레길은 우측 아래 탕춘대성 방향으로 내려가야 하지만,

점심시간에 맞추기 위해 지름길을 택해 우측 기차바위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전망대에서 우측 백련산 방향을 조망하고,

 

잠시 더 오르다가 좌측의 기차바위 방향 능선을 두고 우측 아래 환희사 방향 지능선 길로 접어들면,

 

패인 등로 복원작업이 이루어지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서는데,

 

좌측으로 기차바위가 올려다 보이고,

 

데크목 계단길이 나오며 앞쪽으로 안산이 조망되고,

 

좌측 무악재 방향으로 인왕산과 안산이 나란히 조망된다.

 

 

가드 로프가 설치된 암반지대를 내려서면,

 

사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틀하여 환희사 방향 인왕산둘레길로 들어서면,

 

데크목 계단길이 이어지고,

 

이내 환희사 입구 진입도로에 내려서서 도로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인왕산둘레길로 진행한다.

 

조계종에 속해있는 환희사는 비구니 사찰로 매우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진 절로, 환희사 용화전에 모셔져 있는 미륵불이라는 석불입상과 해맑은 표정의 웃는 동자석이 유명하다고 한다. 미스터리 이한성님의 글에 따르면 이 미륵불은 “지금은 돌아가신 노스님이 꿈을 꾸고 어느 논바닥에서 업어 왔다”라고 한다.

 

인왕산둘레길로 들어서며 돌아본 환희사 모습.

 

 

산 자락으로 이어진 인왕산둘레길은 청련사를 바라보며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는 테니스장 한켠의 벤치에서 쌀쌀해지는 몸을 데우려 고구미와 커피를 먹으며 잠시 쉼을 하고는,

 

다시 인왕산둘레길 잇기에 나서 데크목길을 지나면,

 

우측 아래로 무악재역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작은 지계곡에 놓인 데크목 다리를 건너는데,

 

바위가 드러난 계곡에는 얼음폭포가 형성되어 있고,

 

이내 운동시설과 화장실이 있는 공터에 도착한다.

 

인왕산 안내도.

 

 

인가 뒤편으로 이어진 둘레길을 따르다가,

 

무악재역 방향 갈림길에서 인왕산둘레길 방향으로 좌틀하여 진행하면,

 

인왕산과 안산을 잇는 무악재하늘다리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좌측으로 오르는 도로를 만나 우측의 둘레길을 따르는데,

 

좌측 범봉 방향으로 아침에 보았던 부처바위쯤이 위태로워 보이고,

 

편안하게 이어지는 둘레길을 따르면,

 

아침에 독립문역에서 인왕산으로 오를 때 지났던 무악공원에 도착한다.

 

 

아침에 지났던 인왕사 일주문에서 이번에는 우측 천안사 방향 둘레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무악 어린이공원으로 오르는 데크목계단길이 길게 이어지고,

 

천안사쯤으로 보이는 곳에는 나물을 다듬고 있는 여인네가 눈길을 끌고,  

 

추운 날씨로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어린이공원에 올라 공원을 가로지르다가,

 

돌아본 인왕산 범봉 아래에 여러 암자들이 모여서 인왕사란 사찰을 형성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는 도로에 접속하여 한양도성 성곽 안으로 진행하다가,

 

우측 남산 방향으로 이어진 한양 성곽을 카메라에 담아보고,

 

한양도성 성곽 안으로 들어서서 우틀하여 잠시 성곽길을 따르다가 다시 좌틀하여 진행하면,

 

둘레길은 황학정 방향으로 이어지는 싶더니,

 

이내 좌틀하여 내려서는데,

 

인왕산 유아숲 체험원이란 곳을 통과하여 다시 도로로 나서게 된다.

 

 

다시 인왕산 둘레길은 도로를 건너 우측 능선 위로 이어지더니,

 

몇 해 전 인왕산과 북악산 송년산행에서 지났던 택견 수련장을 지나게 되는데,

 

옛날에는 없는 조형물과 '송덕기 선생'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송덕기(1893~1987)>
조선 말기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난 현암(玄庵) 송덕기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택견 수련을 했습니다. 택전의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준 송덕기 선생은 이 수련터에서 인왕산 호랑이라고 불리던 당대 최고의 택견꾼이었던 임호 선생으로부터 택견을 사사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는 택견꾼이 많았는데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성 안쪽을 웃대패, 바깥쪽을 아랫대패라 하여 결련택견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이 택견 금지령을 내리면서 택견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송덕기 선생은 택견 수련법과 기술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광복 후인 1958년 이승만 대통령 생일에 시범을 보이면서 잊혀 가던 우리 택견을 다시 알리고 보급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 결과 1983년 택견이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면서 제자 신한승 선생과 함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안내판-

 

 

우측 누상동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누상동(樓上洞)>
누상동 동명은 이 지역에 있던 마을 이름인 누각동(樓閣洞)의 위쪽 지역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고종 초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에는 누각동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연산군 때에는 이 지역에 누각을 세운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광해군 때 세우다 완성되지 못한 채 폐기된 인경궁(仁慶宮)의 누각이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1947년 6월 서울시령 제2호로 동회제도가 시작될 때 누상동에는 누상동회가 설치되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에 의해 행정동제가 실시될 때는 누각동이 설치되어 누상동 · 누하동 일원을 관할하였다. 이후 1970년 5월 5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로 누각동은 누상누하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는 행정동과 그 관할구역인 법정동의 명칭이 서로 달라서 생기는 혼란과 불편을 덜기 위하여, 행정동명을 관할구역의 법정동명으로 바꾼 것이다. 1975년 10월 1일에는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에 의해 이전의 누상누하동과 옥인동을 통폐합한 누상동이 신설되어 누상동 · 누하동 · 옥인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1977년 9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181호에 의해 누상동이 효자동에 통폐합되어 누상동 · 누하동 · 옥인동이 효자동사무소 관할구역이 되었다.

 

한적한 숲길을 쉬엄쉬엄 따르면,

 

자연과 사람이 경계하는 영역이 이어지더니,

 

'세종대왕과 인왕산'이란 설명판이 걸린 쉼터를 지나고,

 

<세종대왕과 인왕산(仁王山)>
본래 인왕산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산(山)이라 불렸고,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의 제안으로 인왕산(仁王山:어진 임금의 산)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조선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인왕산(仁旺山)으로 한자 표기를 바꾸었고 1995년에야 본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인왕산 자락(한양 북부 준수방, 지금의 통인동 일대)에서 태어난 세종대왕은 어진 임금으로 조선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세종대왕과 종로는 여러모로 인연이 깊습니다. -안내문-

 

세종대왕은 '서촌' , 현재의 '종로구 통인동 통인시장' 근처에서 탄생하여 자랐다.

 

숲속의 호젓한 쉼터를 지나는데,

 

진경산수화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설명판이 걸려있고,

 

이내 수성동계곡에 도착하여 인왕산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며 인왕산 이곳저곳 둘러보기 산행을 마감한다.

 

한양의 '서촌', 즉 인왕산 자락의 계곡은 사대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글짓기 시사(詩社)'가 일반 평민.중민들에게서도 시현되던 곳이었다. 이런 형태를 위항문학(委巷文學)이라고 한다. '위항문학'을 탄생시킨 주역들 중 한 분인 박윤묵 선생의 글로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을 설명하면..

 

박윤묵의 <존재집(存齋集)> 23권 遊水聲洞記(유수성동기) 한문 원문 생략.
수성동(水聲洞)은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뜻의 수성으로 이름이 붙었는데 곧 인왕산 입구다. 경오년(1810) 여름 큰 비가 수십 일이나 내려 개울물이 불어 평지에도 물이 세 자 깊이나 되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나막신을 신고 우의를 입고서 술 한 병을 들고 몇 명의 동지들과 수성동으로 들어갔다. 돌다리 가에 이르니 아래 위쪽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여 예전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대개 인왕산의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벼랑에 명주 한 폭을 걸어놓은 듯한 곳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는 눈비가 퍼붓는 듯 자욱하고 넘실거린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으로 노니는 듯하다. 마침내 술에 만취하여 즐거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 하노라.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면 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른다네. 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라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 내 풍경과 함께 때를 씻고 나서 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 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 해는 하마 서산에 걸렸네.

 

 

겸재 정선 선생의 '수성동' 진경산수화 설명판이 복원된 수성동 계곡(水聲洞溪谷)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는데, 그림의 기린교가 실제로 계곡에 놓여 있다.

 

<기린교>
'겸재 정선 선행'의 진경산수화 '수성동'에도 등장하는 '기린교(麒麟橋)', 동물 기린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역사적으로도 돌다리 연구에 중요한 다리라고 보호되고 인다.

 

 

수성동계곡 입구 벤치에서 만식형 부친 빈소 조문 복장으로 단장하고,  

 

퓨전 막걸리로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평소의 분위기와 달라서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우아한 점심식사를 한다.

 

 

3시에 브레이크 타임을 갖는다는 식당에서 나오니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경복궁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눈발이 한층 짙어지고,

 

빈소가 있는 성애병원으로 가기 위해 대방역에 내리니 함박눈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조문을 마치고서 엉겁결에 가진 송년회!

 

올해도 어김없이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은 송년회가 되었다.

 

조선 500년 역사가 아로새겨진 인왕산. 그 인왕산에는 이런저런 전설과 사연이 깃든 기암들과 사찰 그리고 서울 도성을 굽어볼 수 있는 멋진 조망을 선사하는 암봉과 전망바위에 자연과 사람이 공존할 수 있게 잘 만들어 놓은 둘레길이 있어서 도심에서 언제나 찾을 수 있는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