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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아산기맥 2-1차(각흘고개~동천교회) : 태화산의 환상적 조망에 더해진 광덕산 설경

by 재희다 2021. 12. 27.

산 행 지 :아산기맥 2-1차(각흘고개~동천교회) 충남 아산시, 천안시, 공주시.
산 행 일 : 2021. 12. 15.(토)
산행코스 : 각흘고개~금북정맥분기봉(헬기장)~서귀봉~광덕산~장군바위~설화산갈림길~망경산~넋티고개~태화산~솔치고개(카터로)~배방산~배방산성~생명샘동천교회 (23km, 9시간 반 소요)

산행참석 : 4 백두.

 

<산행지도>

 

올겨울은 겨울 같지 않은 따뜻한 날들이 이어지며 추위에 대한 걱정은 거의 않고 있었는데, 날씨 예보가 나오는 전주말부터 서울이 -14C, 산행지인 아산시 송악면의 기온이 -11C로 전국적인 강추위가 예보되고 더욱이 바람까지 심하게 부는 것으로 예보되며 체감기온은 -20C 이하가 될 것으로 짐작되여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가 카톡방에 날씨 예기를 비추기라도 할라치면 바로 산행지를 근교의 짧은 곳이나 다음으로 미루자고 할 요량이었는데, 산행일이 되도록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는 분이 없었다. 대단한 분들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으신 분들인지..ㅉ

내심 걱정이 되면서도 나 때문에 다른 분들이 산행을 못하게 될까봐 아뭇소리 못하고 배낭을 꾸려두고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든다. 새벽골프 가는 것도 아닌 등산을 하자고 한밤중에 일어나 평소에 웬만해서는 꺼내지도 않던 내복까지 껴입고는, 캄캄한 한밤중인 새벽 5시에 과천을 출발 양재와 신갈정류장을 거치며 일행들을 태우고 충남 아산으로 향한다. 

 

지난번 산행에서 날머리인 도고온천역에 차를 두고 택시로 출발지인 각흘고개로 이동하여 산행을 진행하여 차량 회수에 소요되는 1시간 정도를 단축하였는데, 이번에도 들머리인 각흘고개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날머리인 배방읍의 생명샘동천교회에 차를 두고 택시로 각흘고개로 이동하여 아산기맥 2-1구간을 역진하자고 한다. 왠지 역진하는 게 꺼림직하고 새찬 겨울바람이 북북서풍인지라 칼바람을 안고 산행을 한다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코로나19 방역조치 강화로 식당이 일찍 문을 닫게 되는 것을 고려하여 전체 시간을 단축하기로 하고는, 동천교회 앞 주차장에 차를 새워두고 택시를 불러 각흘고개로 향한다.

 

 

너무 이른 시각에 각흘고개에 도착하였는지 여명은커녕 아직도 캄캄한 어둠이 뒤덮고 있고,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잠깐의 산행 준비를 하는 동안에 몸이 차가워지며 손이 시려온다. 서둘러 배낭에서 코로나19로 정기 산행이 중단되어 한동안 사용을 않았던 렌턴을 꺼내어 켜니 배터리가 방전되어 렌턴 불빛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수준이고, 그나마 일행 네 명 중에서 두 분은 렌턴을 가져오지 않은 상태다. '군대가 전쟁을 않으면 칼에 녹이 슨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딱 그런 수준이다.

 

<각흘고개(角屹峙, 220)>
충남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 각흘제골과 아산시 송악면 거산리 사이의 고개로 39번 국도가 지나간다. 가문현(加文峴), 각흘현(角屹峴)으로도 불렸으며, 소가 누워있는 와우(臥牛)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각흘고개 버스정류장에서 도로를 따라 생태통로 아래를 지나 고개 반대편으로 가니 등산로입구 표시가 나오며,

 

이정표에는 금북정맥이 분기되는 480봉 헬기장까지 3.3km는 금북정맥과 함께 이어진다는 표시도 되어 있고, 

 

광덕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자 수레길 수준의 널찍하고 가파른 오름길 등로가 이어진다.   

 

 

방전으로 꺼져가는 렌턴의 배터리를 교체하고 급하게 밀려드는 신호를 끄느라 10여분을 지체하여 오른 310봉에는 옛날에는 보이지 않던 삼각점이 보이고,   

 

후손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는지 잘 단장된 묘지를 지나 오르면, 

 

거대한 송전탑 옆을 지나는데, 

 

좌측 빼곡한 나뭇가지 사이로 지난여름 광덕산 임도 라이딩 길에서 보았던 아산시 공설봉안당 건물과 그 뒤편으로 지난 산행에서 지났던 봉수산도 가늠되며,  

 

우측 송전탑 뒤쪽으로는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가 살짝 가늠된다.

 

 

우측으로 또다른 송전탑이 자리하고 있는 빼곡한 소나무숲 오름길을 오르면,  

 

게양대가 있는 395봉 헬기장을 지나게 되고, 

 

전형적인 육산 능선에 커다란 바위들이 이채롭다른 생각을 하며, 

 

우측으로 가족묘지를 지나자, 

 

묘지로 연결된 임도에 접속하여 임도를 따라 진행하면,  

 

좌측 아래의 광덕산 임도와 연결되는 '임도연결지점'을 지나게 된다. 

 

우측 무성지맥 능선 조망.

 

 

임도 연결지점 안부에서 작은 봉우리로 오르면 우전방으로 금북정맥의 갈재고개가 가늠되고,

 

우측 무성지맥 능선의 남쪽 끝에는 공주시 유구읍의 금계산이 조망된다.

 

우측 무성지맥 능선의 태화산 천자봉 방향 조망.

 

 

잠시 완만한 능선을 따르니 앞서 간 김전무가 오름길에 달궈진 몸을 식히고 있는데,

 

우측 갈재고개 방향의 무성지맥 능선 위로 아침 일출이 준비되고 있고,  

 

완만한 오름길을 잠시 더 진행하면 금북정맥과 광덕산 방향의 능선이 분기하는 480봉 헬기장에 도착하여, 각흘고개에서 함께 해 온 금북정맥 능선과 헤어져 좌측 광덕산 방향 아산기맥 능선으로 진행한다.

 

480봉 헬기장 이정표.

 

 

임도 수준의 널찍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좌측 송악면 거산리의 시루봉 방향 등로를 두고 우측 능선길을 따르면,

 

매서운 추위에 칼바람이 불어와 잠시의 지체에도 냉기가 뼛속으로 스며들고, 

 

좌측으로 우회길이 있는 봉우리를 앞두고 잠시의 망설임 끝에 좌회길로 들어서서,

 

봉우리를 좌회하여 다시 능선에 접속하는데,

 

앞서 간 두 분이 봉우리를 넘다가 좌회하는 우리를 보고는 서둘러 내려서다가 송사장님이 능선 땅 한 떼기를 사놓는다.

 

 

칼바람에 눈도 함께 흩날리기 시작하는 부용봉 오름길에 직진의 능선길을 두고 좌측 우회길로 들어서라는 작은 '등산로' 안내 표지판이 걸려있고, 

 

안내판의 표시를 따라 부용봉을 좌회하는 사면길을 따르면, 

 

커다란 묘지를 좌회하여 널찍한 공터가 나오는데, 

 

돌아본 부용봉(560m) 앞에 커다란 묘지가 조성되면서 등로를 우회시킨 모양이다.

 

 

등로는 능선 좌측의 수레길을 따라 광덕산이 2.7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북실고개쯤을 지나고, 

 

<북실고개(520m)>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누에골과 아산시 송악면 종곡리 원장골 사이의 고개이다. '북실'은 부락 뒷산 모양이 북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북실이라 한다.

 

좌측 궁평리 송남휴게소 방향 갈림길이 있는 558봉 갈림길을 지나면, 

 

558봉 갈림길 이정표.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광덕산쯤이 가늠되고,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백색의 상고대가 열리는 모습에 취하여 걷는 사이에, 

 

지나친 서귀봉을 배경으로 철지난 인증도 남겨보며,

 

<서귀봉/소귀봉(585m)>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와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부에 바윗돌이 많고 정상석은 없으나 이정표에 서귀봉 정상을 표시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이곳 봉우리 형상이 소의 귀를  닮은 형상이라 소귀봉이라 한단다.

 

그러면 서귀는?
"서귀(筮龜)란 ①톱풀[蓍草]의 떨기 아래 살고 있다는 거북으로 점을 치는데 쓰임. ②학문이나 덕행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어 나라의 중요한 문제를 자문할 수 있는 훌륭한 경륜을 가진 사람을 말함." 이라는데 서귀봉의 서귀는 어떤 의미인지 정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삭막하던 겨울산의 모습이 우아하게 변하는 현장을 목도하며 광덕산으로 향한다.

 

 

설경으로 변하는 광덕산 능선길에 취해 매섭게 몰아치는 추위도 잊은 채, 

 

석류봉쯤으로 짐작되는 봉우리를 오르다가, 

 

산객들의 쉼터로 각광받았을 전망 쉼터에서 오늘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고는 잠시 쉼을 한다.

 

돌아본 서귀봉 방향의 지나온 능선 조망.

 

 

 

이내 얼어오는 몸을 움직여 잠시 더 올라 조망이 좋다는 석류봉 정상쯤을 지나는데, 

 

<석류봉(659.2m)>
정상은 온통 바위지대로 동쪽 아래가 수십 미터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조망이 좋다고 한다.

 

석류봉쯤의 이정표에는 현위치 표시가 보이지 않고, 

 

사진으로 보았던 석류봉 소나무 전망대의 고고한 듯 홀로 서있는 한그루 소나무가 동쪽 광덕면 방향으로 이어가는 금북정맥을 지긋이 가늠하며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지금은 짙은 눈구름으로 조망이 흐린 게 아쉬울 따름이다.

 

 

석류봉 내림길에 밧줄을 잡아야 하는 암릉이 나타나며, 

 

앞쪽 광덕산 능선이 상고대와 살짝 내린 눈으로 설경을 연출하고 있고, 

 

우측으로는 지난여름 광덕산 임도 라이딩을 와서 머물렀던 광덕쉼터가 내려다 보인다.

 

 

육산 능선에 암릉이 나타나며 그러지 않아도 미끄러워서 더뎌진 발걸음이 더욱 느려지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온 신경을 발 디딜 곳에 쏟는 사이에, 

 

 

상고대가 열린 나뭇가지가 멋진 설경을 연출하고 있고, 

 

 

오늘 뜻하지 않게 '천안 12경' 중에서 7경이라는 광덕산 설경을 만끽하는 사이에, 

 

<천안 12경>
1경 천안삼거리,
2경 독립기념관
3경 유관순 열사 사적지,
4경 아라리오 광장
5경 병천 순대거리,
6경 태조산 각원사
7경 광덕산 설경,
8경 천안종합휴양관광지,
9경 왕지봉 배꽃,
10경 입장 거봉포도마을,
11경 흥타령 축제,
12경 천호지 야경.

 

 

 

어느새 부지런한 산객들이 올라와 있는 광덕산 정상에 도착한다.,

 

<광덕산(廣德山, 699.3m)>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 아산시 송악면 강당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광덕산이란 이름은 '세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광덕보시(廣德布施, 중생들에게 널리 자비를 베푼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조선 후기까지 태화산과 광덕산을 혼용해 불렀는데, 아마 자락에 위치한 '광덕사'로 인해 광덕산으로 바뀐 듯하다. 예로부터 산이 크고 풍후(豊厚)하여 덕이 있는 산이라 하였다. 명산으로서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광덕산 부근에서 생산한 호두는 껍질이 얇고 알이 꽉 차서 천안시의 대표적인 명산품으로 꼽힌다.

 

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광덕사 일주문에는 '태화산광덕사'라고 쓰여 있다. 즉, 이 산이 예전에는 태화산(太華山)으로 불렸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고지도 15개를 찾아보면, 그중에 대동여지도를 포함한 7개 지도엔 태화산으로, 광여도, 청구도, 해동지도 등 나머지 8개 지도엔 광덕산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광덕산 보다도 호서제일가람이었다는 광덕사가 유명하다 보니 각종 지도에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것은, 인근 호서대학교 뒤편에 태화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는데 청구도, 대동여지도에는 그 산이 대학산(大鶴山)이라고 적혀 있다. 사실 그곳도 대학산이라는 이름보다는 대학사라고 하는 사찰이 더 많이 나오는 걸 보면, 산 이름이 절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예전에 태화산, 광덕산이라고 불렸던 지금 이 산은 현재 광덕산으로 통일이 되었는데, 근처의 대학산이라고 불렸던 산은 태화산으로 둔갑을 했으며, 또 그 산의 휴양림은 태학산이라는 태화산과 대학산이 섞인듯한 출처불명의 애매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광덕산 정상 전망대 전경.

 

서쪽으로 봉수산과 멀리 예산의 가야산도 조망된다는데 오늘은 상고대가 멋진 조망을 대신하고 있다. 

 

광덕산 정상 인증.

 

 

오늘 올라야 할 '배태망광' 중에서 겨우 첫번째 산을 올랐고 아직도 세 개의 산이 남아 있는지라, 서둘러 광덕산을 뒤로하고 장군봉 방향의 데크목 계단길로 들어서서,  

 

상고대의 배웅을 받으며 제법 긴 데크목 계단 내림길을 내려서면 벤치가 있는 쉼터가 나오고, 

 

 

좌측 강당골 방향 갈림길을 지나, 

 

 

 

다시한번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면,

 

좌.우로 갈림길이 있는 안부에 자리한 커다란 장군바위에 도착한다.

 

장군바위 이정표.

 

장군바위 모습.

 

<장군바위>
옛날 허약한 한 젊은이가 깊은 산속을 헤매다 허기와 갈증으로 사경에 이르렀는데, 어느 곳에서인지 물소리가 들려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가보았더니 큰 바위 밑에서 물이 뚝 뚝 떨어지고 있기에 신기하게 여겨 손으로 받아먹었더니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마치 장군처럼 우람하게 됐다고 하여 장군바위라 칭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장군바위를 뒤로하고 봉우리로 올라서면 우측 부용묘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묘>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 여류 시인 운초 김부용의 무덤이다. 김부용(金芙蓉, 1820~1869)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4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11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한 문재로 알려졌다고 한다. 11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다음 해 어머니마저 잃자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12세에 기적에 오른 기녀였지만 16세에 성천 군민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운초(雲楚)라는 시명(詩名)을 가지고 시문과 노래,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서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오강루 문집(五江樓文集)』 등이 있으며,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여류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그의 나이 19살 때,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77세의 평양감사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소개를 받았는데, 이에 김이양이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라고 말하여 거두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김이양이 호조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자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으며 이후 정식 부실로 삼았다. 김대감이 한양으로 간 다음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있다가, 애절한 부용상사곡을 전해받고 부용을 불러다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렸는데, 단촐하고 소박해도 숲이 우거지고 기화요초로 정원을 꾸려 녹천당(祿泉堂)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사람들이 부용을 초당마마라고 불렀다.
김이양은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며 부용과 다정하게 지냈으며, 둘은 나이를 떠나 서로의 시(詩)세계를 이해하면서 깊은 애정을 나누게 된다. 이때 부용이 김이양에게 보인 시 한수가 ‘부용당청우(芙蓉堂聽雨)’이다.

- 芙蓉堂聽雨(부용당청우) 부용당에서 빗소리를 듣다 -

明珠一千斛 (명주일천곡) 
遞量琉璃盤 (체량유리반) 
箇箇團圓樣 (개개단원양) 
水仙九轉丹 (수선구전단)

옥구슬 일천 말을 유리 쟁반에 쏟는구나.
알알이 동글동글 신선의 환약(丸藥)이런가


1844년 2월 김이양은 회방(回榜:과거 급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조상들의 성묘를 위해 고향인 천안 광덕사(廣德寺) 경내에 있는 자신의 장원(莊園)에 부용을 동반하고 순행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에 김대감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고, 이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김이양 대감을 보내고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十五年來今日流  (십오년래금일유) 
峨洋一斷復誰栽  (아양일단부수재) 

십오 년 정든 님 오늘도 눈물짓네,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꼬.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달라’ 했다 한다. 49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운초시집, 오강루(五江樓) 등의 문집에 한시 350여 수를 남겼다.

 

마치 이황과 두향의 이야기 같은 애절한 느낌이 전해온다.

雨中書懷 빗소리를 들으며

一別成都惱遠思  한번 서울로 떠나 이별하니 생각은 하염없고 
庭花如雨滴        뜰 꽃은 떨어져서 비 내리듯 하는구나
鵲數聲 罷夢       처마 밑 까치 소리에 어린 꿈 깨고 보니
夢中歸路細如絲  꿈에 본 길 희미하게 실낱처럼 떠오른다
春風忽 蕩          봄바람은 화창하게 불어오고
山日又黃昏        서산에는 또 하루 해가 저문다
亦如終不至        오늘도 님 소식은 끝내 없건만
猶自惜關門        그래도 아쉬워 문을 못 닫소
垂楊深處倚窓開  실버들 휘늘어진 창에 기대어
小院無人長綠苔  님 없는 집에는 이끼만 낀다
簾外時開風自起  주렴 밖엔 봄바람이 절로 불어와
幾回錯誤故人來  님 오시나 속은 게 그 몇 번인고

 


운초 김부용의 시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일명 보탑시로 알려진 '부용상사곡'이다. 김대감이 부용을 부실로 삼았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한양으로 혼자 떠나게 되었는데, 부용은 몇 달을 그리움과 외로움의 나날을 보내도록 소식이 없자 피를 토하는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내는데, 이게 바로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시 '부용상사곡'이다. (*보탑시 - 글자로 탑을 쌓듯이 지은 시)

 

- 芙蓉相思曲 (부용상사곡) - 

別, (별) 
思. (사) 
路遠 (로원) 
信遲 (신지) 
念在彼, (념재피) 
身留玆. (신유자) 
巾櫛有淚, (건즐유루) 
扇環無期. (선환무기) 
香閣鍾鳴夜, (향각종명야) 
練亭月上時. (련정월상시) 
倚孤枕驚殘夢, (의고침경잔목) 
望歸雲恨遠離. (망귀운한원리) 
日待佳期愁屈指, (일대가기수굴지) 
晨開情札泣支頣. (신개정찰읍지신) 
形容憔悴把鏡淚下, (형용초췌파경루하) 
歌聲嗚咽對人含淚. (가성오인대인함루) 
掣銀刀斷弱腸非離事, (체은도단약장비리사) 
躡株履送遠眸更多疑. (섭주리송원모경다의) 
朝遠望暮遠望郞何無心, (조원망모원망랑하무심)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작불래금불래첩독견기) 
浿江成陸地後鞭馬騎來否, (패강성륙지후편마기래부) 
長林變大河初乘船欲渡之. (장림변대하초승선욕도지)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견시소별시다세정무인가측) 
好緣斷惡緣回天意有誰能知. (호연단악연회천의유수능지)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일편향운초대야신녀지몽재모) 
數聲良簫秦樓月弄玉之情屬誰. (수성량소진루월롱옥지정속수) 
欲忘難忘愁依牡丹峯可惜紅顔老, (욕망난망수의모단봉가석홍안로) 
不思自思强登浮碧樓每歎緣鬢衰. (불사자사강등부벽루매탄연빈쇠) 
孤處霜閨腸雖欲雪三生佳約寧有變, (고처상규장수욕설삼생가약령유변) 
獨宿空房淚從如雨百年貞心自不移. (독숙공방루종여우백년정심자불이)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파춘몽개죽창영화유소년총시무정객) 
攬香衣推玉枕送歌舞者類莫非可憎兒. (람향의추옥침송가무자류모비가증아) 
時出門望出門望甚矣君子薄情豈如是, (삼시출문망출문망심군자박정기여시) 
千里待人難待人難悲哉賤妾孤懷果何其. (천리대인난대인난비재천첩고회과하기) 
惟願寬仁大丈未決意渡江舊面燭下欣相對, (유원관인대장미결의도강구면촉하흔상대)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물사연약아여자함루귀천애혼월중읍상수) 

 


- 부용상사곡 -

이별하오니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서신은 더디옵니다 
생각은 님께 있으나 
몸은 이곳에 머뭅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향각서 종소리 들려오는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때
쓸쓸한 베개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픕니다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뿐이고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픕니다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님께서 어찌 그리 신의가 없습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녁에도 멀리 바라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잊고자 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홍안만 늙어가고 
생각지 말자 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뿐이고 
베개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뿐입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흩날린 정도의 눈에도 멋진 설경이 펼쳐지는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좌측 수릿골 방향 갈림길이 있는 장고개를 지나고,

 

<장고개(550m)>
장고개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호두마을과 아산시 송악면 강당리 수릿골 사이의 고개이다.

 

둥그스름한 봉우리를 천천히 올라서면,

 

별다른 표식이 없는 마늘봉(605m)을 지나게 되고,

 

마늘봉 쉼터 이정표.

 

이내 설화산 방향 능선 갈림길인 '광덕산 장고개'에 도착하여, 직진의 설화산 방향 등로를 두고 우틀하여 망경산 방향 내림길 등로로 들어서야 한다.

 

<광덕산 장고개(570m)>
'광덕산 장고개'는 능선 삼거리 지점으로 장고개 방향과 설화산 방향 능선의 갈림길 지점이다.

 

설화산 방향 갈림길인 '광덕산 장고개' 이정표. (이정표에는 '망경산삼거리'라고 표시되어 있다)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급경사의 내림길로 들어서면,

 

앞쪽으로 가야 할 망경산이 커다란 덩치를 드러내고,

 

낙엽 위에 눈이 살짝 덮여서 미끄러운 급경사의 내림길이 이어지더니,

 

좌측 날마루 방향 갈림길이 있는 만복골 갈림길 안부를 지나게 되고,

 

만복골 갈림길 이정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20여분 오르면,

 

널찍한 헬기장에 커다란 정상석이 덩그러니 지키고 있는 망경산 정상에 도착한다.

 

<망경산(望京山, 600.8m)>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와 아산시 배방읍 수철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왕조 시대에 국상이 나면 높은 곳에 올라가 서울(京)을 바라보며(望) 망곡(望哭)한 곳이라 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망경산 아래 마을에 한씨 처녀와 조도령이 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어느 해 조도령이 군역에 뽑혀 서울로 올라간 후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한씨 처녀가 날마다 넙티고개를 지나 이 산봉우리에 올라 서울 쪽을 바라보다가 그만 애가 타서 죽고 말았다. 그 넋이 꾀꼬리가 되어서 늘 조도령을 못 잊어 '고개고개 넙티고개, 담배 밭에 조도령'하며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망경산 정상 이정표.

 

만경산 정상에서 본 설화산 방향 능선.

 

<설화산(雪華山, 447.5m)>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아산시 장존동, 아산시 배방읍 중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에 눈이 쌓인 모습이 장관을 연출하여 설화산이라고 부른다. 또 산 모양이 붓끝처럼 생겼으므로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하며, 이 산 아래에서 많은 문필가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 칠승팔장(七丞八將, 일곱 정승, 여덟 장수)이 나올 명당이 있다 하여 예로부터 몰래 묘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칼바람에도 멋진 설경을 감상하고 있는 망경산 정상석.

 

만경산 정상 인증.

 

가야 할 태화산에서 배방산으로 이어진 능선 조망.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배방산 방향 조망.

 

넋티고개 건너편의 태화산 조망.

 

 

멋진 조망이 트인 망경산에서 좀 더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홀로 뒤처진 상태라 서둘러 급경사의 넋티고개를 향한 내림길로 들어서서 조심조심 내려서는데, 

 

앞서간 분들이 북풍을 바위가 막아주는 등로에서 이른 점심식사를 하고 있기에, 함께 둘러앉아 김전무가 가져온 오래된 컵라면을 먹으며 잠시의 쉼을 한다. 이번에 안먹으면 다음에 또 가져온다는 협박에..ㅉㅉ

 

 

뜨듯한 라면 국물로도 스며드는 냉기를 어쩌지 못하고 다시 넋티고개를 향한 급경사 내림길에 들어서서,

 

낭떠러지 같은 능선 내림길을 조심조심 내려서면, 

 

480봉 이정표가 있는 작은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송곳처럼 뾰족해 보이는 돌아본 망경산.

 

 

480봉을 뒤로하면 더욱 가파른 내림길이 이어지는데,

 

넋티고개 건너편으로 태화산이 지척으로 보이지만, 

 

급경사에 바닥은 얼음이고 그 위에 낙엽과 눈이 차례로 덮여 있어서 가드 로프를 잡아도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의 미끄러운 등로에 넘어지기를 여러차레 진행이 무척이나 더디고,

 

지나온 등로의 낙엽과 눈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듯이 보이는 급경사 내림길을 한참 동안 내려서면,

 

어떻게 이런 곳에 묘지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경사면에 자리한 묘지를 지나게 되고,

 

다시 한번 급경사의 내림길을 조심조심 내려서서,

 

이런 급경사에 짐작키 어려운 '농장갈림길' 이정표를 지나면,

 

넋티고개를 향한 등로는 다소간 완만해지며,

 

좌전방 넋티고개의 명막골 마을 뒤편으로 가야 할 태화산쯤이 살짝 보이고,

 

이내 망경산과 태화산 사이의 안부인 넋티고개에 도착한다.

 

<넋티/넙치(넓티)고개(200m)>
넋티/넙치(넓티)고개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와 아산시 배방읍 수철리 사이의 고개로 623번 지방도가 지난다. 옛날 이순신 장군이 한양에서 고초를 겪은 후 백의종군 길에 올라 삼남으로 갈 때 이 고개를 넘어갔던 백의종군길이기도 하며 이를 알려주는 빗돌도 있다.
이정표에는 '넋티'라 표기되어 있으나 바른 표기는 '넙티'라는 설이 있는데, 이곳의 지세가 상당히 넓은 고개이고, 옛 문헌에는 광치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즉 넓다는 의미의 '넙티'가 맞는 표기라는 것이다.

 

넋티고개 이정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 이정표와 넋티고개 고갯마루 전경.

 

넋티고개의 명막마을 표석.

 

 

이곳 넋티고개에서 태화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는 고개 절개지가 아닌 명막마을 안으로 이어져 있고,

 

갈림길에서 직진의 마을 안쪽 길로 들어서면, 

 

좌측의 무여선원 앞을 지나 백련사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고,

 

그냥 민가 형태의 백련사 앞을 지나면,

 

돌아본 넋티고개 건너편의 망경산 조망.

 

길은 태화산 방향 능선의 산길 들머리로 이어져 있고,   

 

들머리에서 수레길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  

 

좌들하여 능선을 따라 태화산 정상 방향 오름길을 따른다.

 

 

수레길이 우측 사면 방향으로 갈라져 가는 지점에서 능선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면,

 

풍세갈림길 이정표가 세워진 능선 분기점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좌틀하여 태화산 방향 능선으로 진행한다.

 

풍세갈림길 봉우리에서 돌아본 광덕산과 망경산 방향.

 

능선 분기봉의 풍세갈림길 이정표.

 

 

풍세갈림길 봉우리를 뒤로하고 잘록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면 멧돼지 머리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끌고,

 

완만한 육산 능선길에 가끔씩 커다란 바위들도 지나면,

 

멋진 소나무숲길이 이어지며 405봉 이정표가 세워진 봉우리를 지나게 되고,

 

앞쪽 소나무 사이로 가야할 태화산쯤이 가늠되더니, 

 

둥그런 안부를 지나 오르면, 

 

우측으로 태화산의 동쪽에 자리한 태학산이 조망되고, 

 

<태학산(太鶴山, 455.5m)>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동남구 풍세면 삼태리 경계의 태학산은 조선지형도, 한국지명총람에 태화산(太華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언제 태학산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산기슭에 있는 태학사의 이름을 따서 흔히 태학산이라 부른다. 태학사는 신라시대 진산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나중에 해선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폐사되었다. (일부 산행기에서 태화산과 태학산을 구분하고 있는데, 태학산은 태화산에서 동북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의 봉우리를 말한다)

 

이내 태화산 정상에 도착한다. 

 

<태화산(太華山, 460.5m)>
충남 아산시 배방읍 수철리,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동남구 풍세면 삼태리의 경계에 위치한 태화산은 태학산과 망경산 갈림길 표시만 있었는데, 2010년 4월 ~ 2011년 3월 아산시에서 태화산 정상석을 설치하여 천안시와 아산시가 태학산 정상을 관할구역으로 하려는 지역 간의 의도로 보여진다. 아산시가 설치한 태화산 정상은 높이상 정상이고, 천안시가 설치한 태학산 정상석은 문헌상의 정상이다. (태화산과 태학산이 따로이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변이 나무로 둘러싸여 조망이 없는 태화산 정상 전경.

 

태화상 정상 이정표.

 

태화산 정상 인증.

 

 

태학산 왕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동료들이 앞서 간 생태라 바로 동천교회, 카터로 방향 능선길로 들어서면,

 

태화산과 솔치고개 사이에 자리한 376봉쯤이 꾀나 높아 보이고, 

 

이내 앞서간 분들이 쉼을 하고 있는 헬기장에 도착하여, 

 

과일을 나누며 잠시 쉼을 한다. 

 

 

매서운 칼바람은 그대로인데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능선길을 따르면,

 

우측 호서대 방향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을 지나고, 

 

호서대 갈림길 이정표.

 

가야 할 376봉과 나란히 설화산과 배방산이 함께 보이더니, 

 

벤치가 있는 376봉 정상을 지나게 되는데, 

 

376봉 이정표의 '카터로'는 '솔치고개'로 고쳐 표기하는 게 맞을 듯하다.

 

우측 천안 방향 조망.

 

 

376봉을 뒤로하고 솔치고개로 향하는데, 

 

좌전방으로는 광덕산에서 설화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조망되고, 

 

좌측으로는 지나온 망경산과 광덕산이 우람하게 조망된다. 

 

 

다시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좌측 쌍용정사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완만한 능선을 따르다가 소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으면, 

 

설화산이 멋진 그림으로 다가오고, 

 

다시 바위들이 듬성듬성 솟아난 소나무숲길을 따르면,

 

등로 좌측에 망경산과 광덕산에서 설화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조망되는 멋진 전망바위가 나온다.

 

망경산과 광덕산 방향.

 

광덕산에서 능선으로 이어진 설화산 방향.

 

설화산 우측으로 보이는 아산읍 방향.

 

 

멋진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잠시 바위능선을 오르면 삼각점과 이정표가 있는 삼각봉(290봉)을 지나게 되고, 

 

삼각봉(290봉) 이정표.

 

290봉 삼각점.

 

290봉을 뒤로하면 이내 벤치가 있는 호젓한 소나무숲길이 멋들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배방산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며, 

 

홀로 걷기 아까운 호젓한 소나무숲길이 이어지더니,

 

솔치고개가 900m 남았다는 238봉 이정표를 지나면, 

 

커다란 바위로 오르는 소나무 뿌리가 눈길을 끌고,

 

가야 할 배방산이 더욱 위압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더니,

 

카터로가 지나는 솔치고개에 도착한다. 

 

<솔치고개(110m)>
솔치고개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와 배방읍 회룡리 솔지골 사이의 고개로 카터로(지미카터로)가 지난다.

 

<지미카터로(Jimmy Cartet Road)/솔치로>
아산시 배방읍 배방산과 태화산을 잇는 솔치고개를 지나는 도로로, 아산시 배방읍 회룡리와 송악면 중리를 잇는 도로다. 2001년 지미카터 대통령이 사랑의 집 짓기에 참석 이후로 지미카터로(Jimmy Carter Road)로 명명되면서 카터고개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미카터로(Jimmy Carter Road)는 도고면 금산리 'Jimmy Carter work Project 2001사업'으로 88세대의 사랑의 집 건축을 위해 아산시를 방문한 미 합중국 전 대통령인 Jimmy Carter와 자원봉사자들이 이 도로를 이용하게 되어 도로 개통일에 맞춰 'Jinny Carter Read'로 도로명을 정하고 표석을 세워 자원봉사자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한다."라고 표지석에 기록되어있다.

 

솔치고개 이정표.

 

솔치고개 서쪽 신흥리와 수철리 방향.

 

솔치고개 배방산 방향 들머리.

 

돌아본 솔치고개 날머리.

 

솔치고개 들머리로 들어서니 김전무가 홀로 신발끈을 조이고 있는데,

함께 앉아서 커피를 나누며 잠시의 쉼을 한다. 

 

 

따스한 커피와 빵부스러기로 기운을 내어 가파른 배방산 오름길에 나서면,

 

우측으로 배방읍 회룡리가 조망되며,

 

이내 배방산 정상을 향한 가파른 오름길이 시작되고,

 

10여분의 코가 닿을듯한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뒤쪽으로 지나온 태화산 방향 능선과 망경산이 조망되고,

 

그 옆으로는 배방읍 세출리의 호서대학교도 가늠되며,

 

지나온 태화산 능선이 고래등처럼 조망된다.

 

바위가 있는 전망쉼터 전경.

 

 

등로는 우측의 배방산 정상부 바위 절벽을 피해 좌측으로 돌아서 이어져,

 

가드 로프가 메어진 바위 암릉을 오르면,  

 

뒤쪽으로 망경산에서 설화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광덕산 방향.

 

설화산 방향.

 

이내 배방산 정상부에 자리한 전망데크가 나오며,

 

커다란 바위가 우뚝한 배방산 정상에 도착한다.

 

<배방산(排芳山, 361.6m)>
충남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 회룡리, 공수리의 경계에 있다. 배방산은 백제 개로왕 때 지략을 겸비한 성배(成排)와 성방(成芳) 남매의 이름을 따서 배방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 창업 당시 고려조에 충성을 다하던 온양 방씨들을 이곳에서 내쫓았다 하여 배방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과안산 또는 길재라는 다른 이름도 있는데, 산 모양이 기러기가 지나가는 형국이므로 과안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며, 길재는 기러기재의 축약인 것으로 보인다.

 

배방산 정상의 남쪽 태화산과 망경산이 조망되는 전망대. 

 

남쪽 태화산과 망경산 방향.

 

동남쪽 풍세면 방향.

 

남쪽 망경산 방향.

 

남서쪽 봉수산 방향.

 

솔티고개에서 태화산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 조망.

 

제법 위엄이 있어 보이는 설화산 조망.

 

남쪽 방향 파노라마.

 

배방산 정상 전망대의 멋진 조망! 

 

배방산 정상 이정표.

 

작은 정상석만이 지키고 있는 배방산 정상 전경.

 

배방산 정상 인증.

 

 

배방산 정상을 뒤로하면 이내 벤치와 널마루가 있는 쉼터가 있고,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직진의 윤정사 방향 등로를 두고 좌틀하여 배방산성 방향으로 진행하면, 

 

갈림길 삼거리 이정표.

 

완만한 능선 내림길에 바위들이 널린 봉우리 오름길이 나오는데, 

 

돌아본 배방산이 어느새 저만치로 멀어져 있고, 

 

벤치가 있는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면, 

 

가드 로프가 있는 가파른 내림길이 잠시 이어지더니, 

 

'623도로'가 1.1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옛 고개를 지나면, 

 

배방산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 위로 오르게 되고, 

 

<성재산 배방산성(排方山城, 248.2m)>
배방산성은 신흥리 감택마을의 동쪽에 솟아 있는 해발 248m의 성재산 정상부에 데를 두른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든 삼국시대 백제의 석축 산성이다. 성의 길이는 약 1,500m이며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성의 남쪽에 15m 정도가 남아 있다. 성벽은 두께 10~20cm에 너비 40~50cm 정도 되는 납작한 돌을 쌓아 만들었다. 성벽의 안쪽 벽면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바깥쪽 벽면만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배방산성의 테가 3.3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2개의 우물과 군수 물자는 비축해 두었던 창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 원년(455)에 공수(公須)라는 칠순 노인이 성배(城排)와 성방(城芳)이라는 쌍둥이 남매 데리고 있었는데, 성배가 성방에게 무릎을 꿇었다 하여, 두 남매의 이름을 따서 배방산 복부성(排芳山 伏府城)이라 했다고 한다. 또 형태가 솥을 엎어놓은 모양이어서 복부성(伏釜城)이라고도 한다.

 

배방산성 둘레길과 만나 직진의 능선길을 따르는데, 우측의 둘레길을 따라도 봉우리 너머에서 만나게 된다.

 

 

우측의 둘레길을 두고 직진의 능선길로 들어서면 완만한 숲길이 이어지고, 

 

이내 오래된 묵묘가 있는 성재산(248.2m) 정상쯤을 지나게 된다. 

 

성재산 정상 인증.

 

 

어디가 정상인지도 불분명한 편평한 정상부 숲길을 따르면, 

 

이내 다시 배방산성 둘레길에 접속하게 되고, 

 

낙엽이 푹신한 숲길을 잠시 따르면, 

 

배방산성 안내판과 둘레길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직진의 배방산성 입구 방향으로 진행한다.

 

배방산성 둘레길 이정표.

 

배방산성 안내판.

 

 

배방산성을 뒤로하면 등로는 급경사의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이내 벤치가 있는 완만한 숲길로 바뀌더니, 

 

Y자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진행해도 동천교회 주차장으로 갈 수 있지만, 

주차를 해 놓은 교회 우측으로 가기 위해 우측의 능선길로 진행하면, 

 

잠시 더 완만한 오솔길이 이어지다가, 

 

날머리를 향한 마지막 계단길을 내려서면, 

 

공수리의 생명샘동천교회 우측 주차장에 도착하며 두 차례에 걸친 아산기맥 산행을 모두 마무리한다.

 

<공수리(公須理)>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는 조선 때 관아의 경비로 쓰는 공수전이 있었으므로 공수리라 하였다.

 

돌아본 아산기맥의 출발지이자 오늘 산행의 날머리 전경. 

 

날머리의 아산지맥과 '배태망설' 이정표.

 

거대한 규모의 생명샘동천교회 모습.

 

<생명샘동천교회>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생명샘동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으로, 1961년 1월에 세워졌다. 동천교회는 구약성경(舊約聖經) 에스겔 47장 1-12절에 나오는데, 동쪽에서 샘솟는 교회라는 뜻이다.

 

 

때맞춰 총무님께 걸려온 회장님의 호출을 받아 가락동 시장으로 이동하여 거대한 방어 한 마리를 꿀꺽하고는, 

 

늘 염려해 주시는 회장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리며 집으로 향한다.

 

광덕산은 천안에 있는 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아산기맥을 걸으며 아산에도 멋진 산과 능선이 있고 이를 찾아 관리하는 분들이 있음에 새삼 놀랐다. 높지 않은 광덕산에서의 상고대와 어우러진 설경은 뜻밖의 횡재였고 배방산에서의 조망은 어느 높은 명산에 오른 듯한 멋진 장관이었다. 새해에는 하루빨리 코로나19가 누그러져 여러 백두들이 함께 웃으며 걸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