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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철원 금학산 : 철원평야가 한눈에 내려다 뵈는 철원의 진산

by 재희다 2022. 2. 25.

 

산 행 지 : 철원 금학산.  

산 행 일 : 2022. 02. 13.(일)

산행코스 : 금학체육공원 주차장 ~ 비상도로 ~ 매바위 ~ 정승바위 ~ 정상 ~ 노랑물통(용탕) ~ 쉼터 ~ 능선갈림길 ~ 마애불상 ~ 갈림길 ~ 거북이약수터 ~ 비상도로 ~ 금학체육공원 주차장 (6.5km, 4시간 소요)
산행참석 : 10백두.


<산행지도>

 

"제사보다 젯밥이다"는 표현이 적당할까? 어제 명성지맥 명성산 구간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철원 동송읍에 머문 것은 철원의 최고봉인 금학산 산행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금학산 산행을 핑계로 즐거운 하룻밤의 추억을 만들기 위한 것인지는 참석자들 각자의 판단일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지난밤 회장님표 동동주를 마시지 않은 탓인지 다행히 기억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동송읍의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자는 간절한 요청은 무참히 무시되고 이것저것 남은 재료로 끊여낸 갱죽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는데 손맛이 드며들었다고나 할까 의외로 든든한 아침식사가 되었다. 식사를 마치자 이내 안주인을 핑계로 쥔장의 성화에 맞추어 청소와 정리를 말끔히 끝내고는 금학산 산행을 위해 금학산체육공원 주차장으로 향한다.

 

 

어제 명성산 자락의 산정호수에서 숙소가 있는 동송읍을 향하면서 동송읍 숙소의 쥔장인 손점장이 하늘을 뚫을 듯한 자세로 솟아있는 삼각형 모양의 금학산이 동송읍으로 진행하면서 둥그스름한 산으로 바뀐다며 계속  주시하라고 했었는데, 막상 동송읍에서 보아도 금학산은 여전히 뾰족한 삼각형의 쉬이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고, 숙소를 출발한 지 채 10분이 되지 않아 금학체육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공기는 차갑지만 바람이 잦아들어 그리 춥지는 않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텅 빈 금학체육공원 추자장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금학산을 향해 산행을 시작하여, 

 

도로 좌측으로 각종 체험시설물이 들어찬 '하늘 숲 땅 숲'을 지나 오르면 금학체육공원 표석이 자리한 산행 들머리가 나오고, 

 

'금학산정'이란 현판이 걸린 정자 옆으로 이어진 등로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금학산 산행을 시작한다.

 

 

야자메트가 깔린 등로를 올라 지그제그로 만들어 놓은 데크목 계단길도 오르면, 

 

금학산 산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비상도로(철원진산길)가 나오며,

이곳부터 2km 거리의 금학산 정상을 향한 가파른 능선 오름길이 시작된다.

 

<비상도로(철원진산길)>
산의 아랫부분을 따라 횡으로 임도가 나 있다. 군 작전도로로 사용되는 곳으로 이 도로를 따라 들머리와 날머리가 만나게 된다. 이 도로 덕분에 어디로 내려오든 처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용이하다. 능선을 향한 도로와 비상도로가 큰 사거리를 만들고 있으며 또 하나의 들머리 역할을 한다. 직진하면 등산로로 이어지며, 우측으로 가면 사문안계곡이, 좌측으로 가면 오지리와 담터계곡이 나온다.

 

비상도로 갈림길 119 구조판.

 

우측 사문안계곡 방향으로 이어진 눈 덮인 비상도로 모습.

 

 

비상도로 건너편 숲길로 들어 잠시 오르면 능선 등로로 오르게 되고, 

 

바로 가파른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지난밤 먹은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어제의 명지지맥 산행 피로가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2km만 오르면 정상에 도착하는 짧은 산행이라 생각하며 힘차게 걸음을 재촉한다.

 

 

돌아본 동송읍 방향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철원평야가 낮게 드리운 구름과 미세먼지로 희뿌연 모습이고,  

 

가드 로프까지 매여진 가파른 오름길을 힘겹게 오르면,  

 

금학산 정상 오름길의 1/3 지점인 '금학산 매바위' 안내판이 나오며 앞서간 분들이 쉼을 하고 있다.

 

내 눈에는 다소고니 앉아있는 아기곰으로 보이는 매바위 모습.

 

<매바위>
금학산 등산로에서 가장 대표적인 바위로서 매의 부리와 몸체가 선명하게 보이며, 반대편 바위를 웅크린 암컷에 비유하기도 한다. 매바위에서도 철원 시내와 너른 들판을 조망할 수 있다. -안내판-

 

동남쪽 명성산 방향.

 

북동쪽 동송읍과 학저수지 방향.

 

늘 씩씩한 모습을 보여 주시던 전 여사께서 컨디션 난조로 하산을 결정하고는 매바위 인증을 남긴다.

 

 

다시한번 담아본 매바위는 아무리 보아도 곰돌이 모양이고, 

 

등산로 바로 건너편의 바위가 매를 닮았다.

 

 

한번 더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뒤돌아 보니 6.25 와 관련된 사연이 많은 소이산이 조망되고, 

 

<소이산(所伊山, 362m)>
소이산(所伊山)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있다. 고려 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던 제1로 봉수대가 있는 곳으로, 해방 이전까지 철원 역사의 중심이었다. 소이산(所伊山)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소이산은 산정에 고려 시대부터 통신수단으로 이용된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함경도 경흥·회령·길주·함흥·영흥·안변·철원·서울(남산)과 연결되는 경흥선 봉수로에 속하여 있던 산이다. 1253년(고려 고종 40) 몽고군이 동주(철원)를 침입할 때 방호별감이었던 백돈명의 지시에 따라 군민들이 소이산으로 들어갔으며 출입이 금지되었다. 추수기에 군민들이 교대로 추수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방호별감에 의하여 처형되면서 혼란이 발생하였고 그 틈에 몽고군이 침입하였다. 이후 소이산의 성이 함락되고 김화와 금성까지 몽고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고도는 높지 않아도 소이산 정상에 서면 백마고지,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6·25 전쟁과 관련된 사연이 많이 있는 곳이며, 민간인 통행이 금지되었던 군사지역으로 곳곳에서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정상까지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정상의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동쪽 고석정과 복계산 방향으로 펼쳐진 철원평야 조망.

 

<철원평야(鐵原平野)>
철원평야(鐵原平野)는 강원도 철원군과 평강군 일대에 걸쳐 있는 평야이며, 철원군의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김화읍, 서면, 근북면과 평강군의 남면 등이 속해 있다. 해발 고도는 약 200~400m로, 평강에서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높이가 낮아진다. 철원평야는 신생대 제4기에 분출한 알칼리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용암대지이다. 강원도에서 제일 넓은 평야로 논농사를 주로 하며 예로부터 철원 쌀이 유명하다.
추가령구조곡에서 열하분출로 발달한 철원-평강 용암대지는 황해도의 신계-곡산 용암대지와 더불어 신생대 제4기에 형성된 대표적인 용암 평원이며, 면적은 약 125㎢이다. 이 지역의 제4기 현무암은 추가령구조곡의 중앙에 해당하는 검불랑에서 오리산(452m)을 연결하는 선상에서 분출한 것으로 추정되며 북쪽으로는 안변 남대천을 따라 안변까지, 남쪽으로는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흘러내렸다. 이렇게 흘러내린 용암은 기존의 하곡과 저지를 메우면서 지표를 평탄하게 만들었다. 용암은 여러 번 분출하여서 한탄강 상류에서는 최소 11회, 연천군 전곡리 부근에서는 3~4회 정도 용암층이 쌓인 것으로 확인된다. 전곡 현무암의 형성 시기는 약 54만년 전부터 약 10만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철원-평강 용암대지는 지난 수십만년 동안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철원평야의 현무암 풍화토는 상당히 비옥한 편이며, 관개용수의 공급으로 강원도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현무암층은 수질 절리의 발달로 인하여 배수가 잘 되기 때문에 지표면에 물 공급과 수분 유지가 불리하다. 그러나 용암대지 이전의 원지형이 배수가 불량한 습지이거나 점토층이 있는 경우에는 지하로의 물 침투 속도가 느려져 지표면의 수분 유지가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하지만 평강 오리산 부근은 현무암 용암층이 철원 지역에 비하여 두터워서 침투력이 훨씬 높아 논농사가 거의 불가능하며 주로 밭농사에 의존한다.
철원-평강 용암대지에는 많은 저수지가 개발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철원평야가 미곡 집중 생산지로 개발되면서 표토 정리와 객토 및 관개 작업이 시행되었으며 봉래호와 보양호 등의 대형 저수지가 개발되었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북한은 북한 지역의 저수지 물을 하류인 남쪽의 철원으로 보내지 않고 서쪽의 황해도로 물줄기를 돌렸다. 이런 이유로 철원군은 한때 농업에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용화저수지, 하갈저수지, 토교저수지 등을 개발하면서 이를 극복하였다. 현재 철원평야 주변에는 동호, 봉래호, 보양호, 죽대호, 남원포, 서수포, 외학호, 학저수지, 토교저수지 등의 많은 수리시설이 있다.

 

이어지는 능선 오름길을 잠시 더 진행하면, 

 

가파른 암릉에 설치된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게 된다.

 

데크목 계단 오름길에 돌아본 동송읍과 학저수지 방향.

 

한탄강 고석정 방향.

 

 

고도가 높아지며 등로의 눈이 녹지 않은 상태여서,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은 채 오르는 우리는 네 발로 기어서 오르고,  

 

눈이 다져저서 미끄러운 등로를 조심스레 진행하니 정승바위 직전의 등산로 3지점을 지나게 되는데, 

 

뒤쪽으로는 소이산과 학저수지 방향이 발아래로 내려다 보이고, 

 

우전방으로는 금학산에서 능선으로 연결되어 산꾼들이 많이 찾는 고대산이 가까이 조망되며,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도 한결 완만해 보인다.

 

 

다소 완만해진 능선 등로를 따라 금학산 정상을 향하는데 능선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런지 도대체 정승바위는 어디 있는지 찾을 길이 없는데,  

 

앞쪽으로  가야 할 금학산 정상부가 불쑥 나타나며, 

 

그 우측으로는 고대~금학 능선의 보개산과, 

 

고대산이 조망되며, 

 

우측으로는 소이산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산객들의 발길에 단단하게 다져진 눈길을 조심스레 오르면, 

 

고대산 정상 헬기장 아래의 화장실을 지나게 되고, 

 

마지막 오름길로 접어들면, 

 

우측으로 사문안계곡에서 이어온듯 보이는 임도 종점이 보이고, 

 

마침내 금학산 정상부의 널찍한 헬기장에 도착한다.

 

고대산 방향 능선 능선등로를 알려주는 이정표.

 

남서쪽 지장봉 방향.

 

서쪽 보개봉에서 지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조망.

 

서북쪽 고대산 방향.

 

북쪽 소이산과 학저수지 방향.

 

동쪽 한탄강 신철원 방향.

 

동남쪽 명성산 방향.

 

금학산 정상에서 드넓게 펼쳐진 철원평야를 보면서, "금학산을 진산으로 도읍을 정하면 국운이 300년에 이를 것이나 고암산을 도읍으로 고집하면 3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라는 도선국사의 예언이 문득 떠오른다.  

 

충신 아지태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도 도선국사의 예언을 거론하며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해야 한다고 고집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봉국의 도읍은 고암산으로 해야 한다는 궁예의 고집을 아무도 꺾질 못했다. 궁예가 고암산을 선택하자 금학산은 사흘 밤낮을 울었다고 한다. 금학산 수목들은 죽지 않았는데도 3년 동안 잎이 나지 않았고, 산에서 나는 취나물은 써서 먹지 못했다고도 한다. 이곳 금학산과 궁예에 얽힌 설화다. 결국 도선국사의 예언대로 궁예는 나라를 세우고 26년 만에 몰락하고 만다.

 

서기 894년 명주성(강릉) 공략에 성공한 궁예는 그 여세를 몰아 고성 간성을 돌아 한반도의 중부권인 인제, 춘천, 화천, 금성, 김화 등을 정복하면서 철원에 들어온다. 궁예는 895년 8월 철원(鐵圓)의 철원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가 체제로 직제를 편성하는 등 위세를 드러내자 개성(송악)의 거족인 왕륭 왕건 부자를 비롯해 평안도와 황해도 강원도 회양지역의 호족들이 다투어 궁예에게 투항하여 온다. 궁예의 철원성 위상이 점점 커지자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옛 고구려 땅인 발해를 얻으려면 개성지역 호족들과 완전한 연합세력을 만들어야 가능하다.”며 개성으로의 천도를 강력하게 건의해 898년 2월 개성(송악)의 발어참성(勃禦塹城)으로 도읍을 옮긴다. 왕륭의 말대로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후, 김포, 양주, 강화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항복해 온다. 강원도 북부지역과 평안도 황해도 그리고 경기도 북부지역을 영토로 복속시키자 궁예의 앞길에는 중부권의 맹주인 양길의 세력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강 남쪽으로 진출, 신라세력과 후백제세력을 맞서려면 중부지역 북원(원주)에 자리 잡고 있는 양길의 세력을 꺾어야만 가능했기에 양길군과 궁예군의 결전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온다. 
드디어 899년 7월 양길군과 왕건 총대장을 앞세운 궁예군과의 혈투가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리(비뇌성)에서 치러진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접전은 결국 궁예군의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양길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양길이 차지했던 땅과 군졸은 모두 궁예에게 편입되어 궁예는 명실상부한 중부권의 패권을 차지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양길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궁예는 901년 어린 시절 세달사에서 꿈꾸던 나라를 건립, 국호를 옛 고구려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고려(高麗)라 정하고 본인을 왕이라 칭했다. 궁예가 고려(후고구려)를 세우면서 후백제와 통일신라가 또다시 새로운 삼국시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 궁예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옛 땅 발해를 정복하려는 대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성보다 더 넓은 땅에 도읍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자연히 5년 동안 머물던 철원의 넓은 들판이 생각났을 것이고, 903년 마침내 궁예는 철원군 북면 홍원리 풍천원(豊川原)에 도읍을 옮기고 바로 도성 축조공사에 들어갔다. 2년여에 걸쳐서 완공한 풍천원의 궁예도성은 외성둘레 4,370m, 내성둘레 577m로 당시 왕궁 규모로는 제일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위치는 동경 127도14분, 북위 38도21분에 해당한다. 

이상이 궁예가 양길에게서 나와 명주 왕 김순식과 왕건 부자를 만나 개성에서 고려를 개국하고 다시 철원 풍천원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의 얘기이다. 그런데 궁예가 개성에서 개국하자마자 왜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왕건이 궁예를 밀어내고 8개월 만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겨 500여 년간 번영한 땅인데 왜 궁예는 굳이 개성을 버리고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을까 하는 의문이다. 개성의 땅이 협소해 대야망의 꿈을 실현하기 어려워서, 그 당시 세상을 뒤흔들던 도선국사의 도참설에 따라, 왕건을 비롯한 개성 세력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세 가지 이유가 추정된다.

 

첫째는 위에서 언급된대로 새로 형성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옛 땅 발해를 정복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려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땅보다는 광활하고 먹을 것이 풍부한 철원 땅이 절실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궁예는 궁예도성 축조 공사와 함께 청주 사람 1천 호를 철원 풍천원 주변으로 옮긴 것을 보면 이런 추정을 하게 한다. 철원은 궁예가 고려를 개국한 영광의 땅으로 궁예는 그 당시 풍수지리에서 강조하는 진산(鎭山)을 결정하는데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북면의 고암산(高岩山)을 진산으로 하느냐 동송의 금학산(金鶴山)을 진산으로 하느냐의 선택이었다. 양쪽 모두 넓은 면적의 평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궁예는 철원평야와 평강들이 보이는 고암산을 진산으로 결정했다. 그 후 우리 후손들은 궁예가 고암산을 진산으로 택하는 바람에 18년 도읍으로 끝났지만 만약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했으면 3백 년을 갔을 것이라며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다.
둘째는 도선국사의 도참설 얘기이다. 그 당시는 한 나라의 도읍이 될 만한 땅이 따로 있다는 특히 도선국사의 도참설(圖讖說)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도선국사는 철원은 전국에서 몇 안되는 왕궁터라며 궁예가 철원 땅을 밟기 40년 전인 865년에 제자들을 직접 데리고 와서 도피안사(到彼岸寺)를 건립했었다. 특히 궁예는 소년 시절을 사찰에서 보냈고 왕이 된 후에는 자기 자신을 미륵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특히 도참설을 근거로 꼽게 된다. 
셋째는 젊은 왕건의 홈그라운드 세력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왕건은 젊어서부터 부친인 왕륭의 지원을 받아 개성 부근의 호족들의 힘을 얻고 있었고, 더군다나 서해안의 해상권을 모두 장악하는 등 젊은이답지 않은 저력을 가지고 있어 미리 홈그라운드의 힘을 빼기 위해 개성을 떠났을 것이다. 
1천 년 전의 일이라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애꾸눈 궁예왕이 철원 땅을 대야망을 실현하는 땅으로 선택한 것은 틀림없어 철원 땅의 후손들에게 긍지를 갖게 한다. 즉 철원 땅은 한 나라가 도읍을 정할 만큼 가치가 있는 땅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하면서 진산으로 정한 고암산은 맑은 날 이곳 금학산에서 보면 휴전선 북쪽으로 보이는 높이 솟은 암릉지대로, 우리에겐 고암산이라는 지명보다는 김일성고지로 알려진 곳이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패전해 철원평야를 빼앗긴 김일성은 고암산에서 3일간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곳에 보는 너른 철원평야는 김일성이 분통을 터트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맑은 날이었으면 철원평야는 물론 멀리 휴전선 너머의 북녘 산하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시야가 흐려 힘들게 올랐음에도 멋진 조망을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다시한번 너른 화면으로 주변 풍경을 담아본다. 

 

동쪽 신철원 방향.

 

북쪽 동송읍과 학저수지 방향.

 

북서쪽 고대산 방향.

 

남서쪽 지장산 방향.

 

 

헬기장을 뒤로하고 지척의 금학산 정상으로 향하면, 

 

금학산 정상석이 자리한 데크목 전망대에 도착한다.  

 

<금학산(金鶴山, 947m)> 
강원도 철원군의 서남부 동송읍 이평리에 위치한 산이다. 『여지도서』 철원도호부에 "금학산(金鶴山)은 부 남쪽 15리에 있다. 수정산(水精山)에서 와서 고남산(古南山)의 주맥이 되었다. 우뚝 솟아 하늘에 뻗어 지방의 명산이 되었다. 산 위에 기우처(祈兩處)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는 부의 남쪽 경계에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다. 산의 형세가 학이 내려앉은 모양을 하고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 한다. 즉 오지리 방향으로 뻗어 내린 줄기는 학의 오른쪽 날개에, 이평리 방향의 줄기는 왼쪽 날개에 비유하며, 그 날개 품안에서 뻗어나온 지역인 초장족(初長足) · 이장족(二長足) 등의 마을은 학의 발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궁예가 송학으로부터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궁을 짓되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통치할 것이지만, 고암산으로 정하면 국운이 30년밖에 못 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가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1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고 전해온다. 산의 정상인 기봉(旗峰, 깃대봉)에는 남이장군의 용마가 나왔다는 용탕(龍湯)과 기우제를 지내던 터가 있으며, 중턱에는 마애석불 · 부도석재(浮屠石材) 등이 남아 있다. 북쪽 산록에 위치한 칠성대(七星臺)는 궁예가 소원을 빌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산세는 부드럽지만 산속으로 들어서면 곳곳에 매바위 · 용바위 · 칠성바위 · 탱크바위 등 기암들과 암봉들이 많이 나타난다. '산자락 반은 단풍, 반은 진달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을 단풍과 봄 진달래꽃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평리 일대에는 금학과 관련된 상호가 많으며 금학연지(金鶴蓮池), 금학체육공원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직사각형의 콘크리트로 된 헬기장이 있으며, 주변에 나무도 없이 완전히 개방된 공간을 만들어 삭막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특이한 광경이다. 옆으로 내려가서 계단을 오르면 정상 표지석이 있다. 그러나, 실제 정상은 군 초소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초소 쪽 동남방향으로 호랑이가 포효하는 형상의 호랑이 바위가 있다. 현재는 민간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군부대가 차지한 금학산 정상 모습. 

 

남서쪽 지장산 방향.

 

북서쪽 고대산 방향.

 

 

어제 명성지맥 산행 후 빈 배낭을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송사장님이 가져온 곶감과 커피로 가벼운 간식 시간을 가지고는, 

 

금학산 정상 인증을 남긴다.

 

 

금학체육공원에서 금학산 정상으로 오른 등로보다 마애석불 방향의 내림길이 더 경사가 급하고 눈까지 덮여 있는 상황이라 아이젠을 가져오지 않은 분들과 한쪽씩을 나눠 착용하고는 금학산 정상을 뒤로하고, 

 

마애석불 방향의 가파른 하산길로 들어서서 눈 덮인 급경사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면, 

 

정상 바로 아래의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참호를 따라 등로가 이어져 있고, 

 

이내 정상에 자리한 군부대로 이어진 모노레일이 있는 지점에서 다시 좌틀하여 아래로 내려가면, 

 

이내 우측 오지리 방향 갈림길을 지나, 

 

서 있기 조차 어려운 급경사 내림길이 길게 이어진다.

 

 

그렇게 가파른 눈길을 겨우 벗어나면, 

 

돌밭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결코 쉽지 않은 급경사의 내림길이 계속 이어져, 

 

이정표가 있는 능선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좌측 능선은 바로 비상도로로 이어지는 능선길이고 우측 능선이 마애석불 방향 능선길이다.  

 

<갈림길>
마애석불을 보고 갈 수도, 아니면 그냥 지나쳐 갈 수도 있다. 각각 우측과 좌측으로 나뉘는데, 우측의 마애석불 방향 능선길을 따르다가 마애석불 직전 갈림길에서 좌측 약수터 방향으로 진행하면 다시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합쳐지는 지점이 다시 갈림길이 되는데 다시 우측으로 가면 거북이 약수터가, 좌측으로 가면 약수터를 거치지 않고 내려간다. 두 갈래의 내리막길은 최종적으로 서로 멀지 않은 곳에서 비상도로와 만나게 된다.

 

앞서 간 분들이 어느 길로 갔는지를 알 수 없어서 잠시 망설이다가 우측 마애석불 방향 능선길로 들어선다.

 

 

완만해진 능선을 따라 오래된 묵묘를 지나고, 

 

또다른 묵묘와 "위험 등산로 주의!" 표지판을 지나면, 

 

수직의 절벽 내림길을 내려서게 되고, 

 

절벽 내림길에 담아본 동송읍 조망.

 

눈까지 덮여 있어서 더욱 아슬아슬한 절벽 내림길을 가슴 조리며 내려서서 잠시 완만한 내림길을 따르면, 

 

좌측 거북이약수터와 우측 마애석불 방향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리는 우측의 마애석불을 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좌측 거북이약수터 방향으로 진행한다.

 

갈림길 이정표. 

 

 

갈림길에서 직진의 금학산신제당 방향으로 30m 내려서면 마애석불 뒷모습이 보이고, 

 

커다란 바위의 한 면에 석가여래 입상을 선각하고 그 위에 불두를 만들어 올린 마애석불을 알현하게 된다.

 

<마애불상>
금학산 중턱에 소재한 여래입상인 마애석불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큰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음각된 것으로 불상의 머리 부분은 육신체 위에 다른 암석으로 머리 형대의 자연석을 좌측으로 비스듬히 올려놓은 석불이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3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마애석불 안내판.

 

마애석불 앞 쉼터와 전망바위 전경.

 

마애석불 앞 전망바위에서 본 동송읍 오지리 방향 조망.

 

 

마애석불 주변을 둘러보고 갈림길로 돌아나와 거북약수터 방향으로 들어서면 등로는 계곡 방향 사면으로 이어저, 

 

우측 거북이약수터 방향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사면 방향의 등로로 진행하면,  

 

능선 갈림길에서 내려오는 등로에 합류하게 되고, 

 

완만한 내림길 등로를 따르면 이내 금학산 산허리를 휘감아 이어지는 비상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비상도로 합류지점 이정표.

 

 

금학산 산행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좌틀하여 매바위 방향 비상도로를 따르면, 

 

금학산 산행 안내도에 '철원진산길'이라 표시된 비상도로는 지능선을 향해 사면 오름길로 이어지고,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아 미끄러운 도로를 조심조심 따르면, 

 

동송읍 방향 조망이 좋아 보이는 정자 쉼터가 나오는데, 

정자 옆 벤치에서 쉼을 하던 분이 청하여 맛난 더치커피를 나누며 이런저런 산에 얽힌 예기를 듣는다.

 

정자에서 본 동송읍 조망.

 

 

산뜻한 커피 향을 뒤로하고 잠시 더 임도를 따르면, 

 

비학산 오름길에 지났던 갈림길에 도착하고, 

 

우틀하여 금학체육공원 방향으로 들어서면, 

 

아침에 올랐던 데크목 계단길이 이어지고, 

 

이내 금학체육공원 정자를 지나게 된다.

 

 

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우측에는 각종 체험과 휴식공간으로 조성된 '하늘 숲 땅 숲' 체험시설이 자리하고 있고, 

 

이내 산행 출발지인 금학체육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한다.  

 

후미에서 마애석불까지 함께 걸었던 손점장이 거북이약수터 갈림길에서 약수터 방향으로 진행하여 동송읍 이평리 방향으로 하산하였다. 철원이 타지인 아홉분은 제대로 길을 찾았는데, 철원에 집이 있는 한 분이 철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지난밤 과음 때문일까...ㅉㅉ

 

 

점심으로 "해장국!"을 그렇게 외쳤으나, 결국은 겨울이 가기전에 한번 더 방어회를 먹자며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이동하여 애꿎은 방어 한마리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건들 바람에 누렇게 일렁이는 철원평야를 보러 한번 더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