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년

명성지맥 2차(자등현~여우고개) : 장괘한 조망과 억새밭 풍광을 함께

by 재희다 2022. 2. 19.

 

산 행 지 : 명성지맥 2차(자등현)  강원도 철원군, 경기도 포천시.

산 행 일 : 2022. 02. 12.(토)

산행코스 : 자등현 ~ 615.3봉 ~ 헬기장(750) ~ 대득지맥 분기점 ~ 각흘산(836.8) ~ 765봉 ~ 716.4봉 ~ 약사령 ~ 724.3봉 ~ 명성산 삼거리 ~ 명성산(922) 왕복 ~ 삼각봉(906.6) ~ 894.4봉 ~ 구)삼각봉(863.1) ~ 645.2봉 직전 명성지맥 분기점 ~ 팔각정(619.1) ~ 산정호수길 ~ 초소 펜스문 ~ 안덕재 갈림길 ~ 통신탑 ~ 헬기장(명성지맥 접속) ~ 706봉 ~ 여우봉(725.7) ~ 710봉 ~ 여우고개(78번 지방도)  (17km, 8시간 반 소요)
산행참석 : 10백두.


<산행지도>

 

명성지맥 두번째 구간에는 억새밭과 산정호수로 유명하며 100대 명산에 속한 명성산이 있어서 코로나19로 한동안 함께하지 못한 몇몇 분들이 함께 산행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철원 동송읍에 별장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손점장이 함께하여 1박2일 일정으로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첫날은 명성지맥 명성산 구간 산행을 하고, 다음날은 철원의 최고봉인 금학산 산행을 하기로 한다. 

 

 

서울팀은 선릉역에서 7시에, 안산팀은 과천에서 6시 반에 출발하여 도중에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는, 8시 반쯤에 산행 들머리인 자등현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한다.

 

<자등현(自等峴 450m)>
강원도 철원군 서면 자등리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3리의 경계로 47번 국도가 지나며, 고개 이름은 고개 북쪽 마을인 자등리에서 유래된 듯하다. 고개에는 넓은 쉼터와 공터, 주차장과 철원관광종합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각흘산 등산로 입구가 있다.

 

<자등리(自等理)>
조선조 중엽 숙종 2년(서기 1676년) 2월 김화(金化)고을에 부임(赴任)한 황후영(黃候永)이라는 현감이 현 자등 2리에 있는 상해암(上海巖)의 마루터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볼 때마다 남녘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대동(待同) 했던 신하에게 사유를 물은 즉, “남쪽 하늘은 원래부터 그렇게 빨갛게 물들어 있습니다마는 아마 무슨 곡절이 생길 것만 같습니다.” 하고 말하자 현감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러면 이제부터 이곳 부락을 자등(紫等) 부락이라고 부르라!”라고 명명(命名)했다. 그로부터 이곳 마을을 자등(紫等)이라 칭해 오다가 해방(解放) 후부터는 현 법정지명과 같이 자등리(自等理)로 칭하게 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이곳 김화고을에는 청기와 공장(工場)에서 고려자기를 제조하여 원래 산간촌락(山間村落)이었으나 기와공장이 있어 기와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와수리 일대의 주민 주택은 거의 와가일색(瓦家一色)이였다 한다.

 

 

자등현 각흘산 산행 입구가 명성지맥 두번째 산행 들머리이고, 

 

2.7km 거리의 각흘산 산행 들머리에는 철망 울타리가 처져있는데, 

 

광역울타리는 북한으로부터 아프리가돼지열병(ASF)에 감염된 야생 멧돼지가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2019년 11월부터 설치가 추진됐다. 국내에서 ASF 감염 야생 멧돼지가 처음 발견된 것은 2019년 9월이다. 그동안 강원도 고성에서 경기도 파주까지 1,500km가 넘게 쳐졌고 비용은 1,100억 원이 투입되었다. 사람들이 드나들어야 하는 곳에는 철망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출입 시에는 반드시 출입문을 닫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철망문을 통과한 사람을 문을 닫아야 한단다. 

 

 

계속되던 강추위도 한결 누그러져 산행하기 좋은 날씨에 시원스레 뻗어있는 등로를 따르면, 

 

각흘산이 2.1km 남았다는 첫번째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군 사격훈련시 통제를 하는 초소가 있는 안부를 지나 오름길을 오르면,  

 

고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등로에는 쌓인 눈이 그대로인 구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지능선 분기 능선에 올라 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오르게 되고, 

 

이내 '준.희'님이 걸어놓은 '명성지맥 615.3봉' 표지기가 걸린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잘록한 안부를 지나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벤치가 있는 쉼터에서 오름길에 데워진 몸을 식히며 잠시 쉼을 한다. 

 

 

겉옷을 배낭에 갈무리하고는 더욱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오르면, 

 

뒤쪽으로 자등현 건너편의 광덕산 능선이 가늠되는 헬기장이 나오는데, 

 

이제 각흘산 정상까지의 거리가 한결 줄어들어 있고, 

 

전방에 포탄 낙하지점이라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있는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급경사로 밧줄까지 메여 있는 암봉을 오르면,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각흘산 주능선이 가늠되고, 

 

이어지는 급경사 오름길을 힘겹게 오르면, 

 

커다란 바위를 조각내며 솟아난 소나무가 눈길을 끌고, 

 

50m 앞이 포탄 낙하지점이라는 경고판이 각흘산 능선이 가까와졌음을 알려와 다시한번 다리에 힘을 주어,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방지용 절망이 설치된 각흘산 주능선에 도착하면, 

 

명성지맥은 좌틀하여 각흘산 방향으로 이어진다. 

 

철원 용화저수지 방향.

멀리로 철원평야와 동송읍 그리고 금학산이 조망되어야 하는데 미세먼지로 가늠조차 안된다.

 

북쪽 악희봉 방향으로 뻗은 대득지맥 조망.

 

<대득지맥(大得枝脈)>
한북정맥이 흐르다 철원군 서면, 화천군 사내면, 포천시 이동면의 삼면봉인 천문대가 있는 광덕산(△1046.3)에서 한북정맥은 동남방향으로 흐르고, 명성산으로 가는 명성지맥을 서남방향으로 분기하여 철원군과 포천시의 경계를 따라 자등현을 지나 철원군 갈말읍, 서면, 포천시 이동면의 삼면봉인 각흘산(角屹山, 838.2m) 직전 헬기장에서 지맥은 서쪽 방향으로 흐르고, 다른 한줄기 능선인 대득지맥은 북쪽으로 분기하여 철원군 갈말읍과 서면의 경계를 따라 악희봉(710), 대득봉(大得峰), 가로개고개를 거쳐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하토동 남대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곳으로 떨어지는데, 이 약 32km의 산줄기를 대득지맥이라 한다.

 

광덕산 방향 철망펜스에 작은 '대득지맥분기점' 표지판이 걸려있다.

 

태화산과 악희봉 방향 대득지맥 조망.

 

대득지맥을 배경으로.

 

 

각흘산이 3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뒤로하고, 

 

철망펜스가 처진 능선을 따르면, 

 

밧줄이 메인 암릉을 오르게 되고, 

 

이내 가야 할 명성산은 물론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 각흘산 정상에 도착한다.

 

<각흘산(角屹山, 838.2m)>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동쪽으로 강원도 철원군 서면, 남쪽으로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서쪽으로 철원군 갈말읍에 접한다. 북동쪽 광주산맥과 명성산으로 능선이 뻗어 있다. 등산로는 험하지 않으며 산 아래에 암반 지대가 있다. 등산로 초입에 있는 각흘계곡은 수량이 많고 너비가 좁으며, 주변에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다. 경사가 완만한 폭포가 많아 아름답고 한적한 경관을 이룬다.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 서면 철원 일대가 한눈에 보이고, 왼쪽으로 광덕산(廣德山, 1,046m)·백운산(904m)·국망봉(國望峰, 1,168m)이, 서쪽으로는 용화저수지가 보이고 명성산·안덕재·자등현·박달봉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약사동) 사람들이 산의 북쪽을 바라보았을 때 소의 뿔을 닮았다고 하여 각흘봉(角屹峰)이라 했다고 하며, 한자로는 '뿔 각(角)' 자와 '산 우뚝할 흘(屹)' 자를 써서 표기한다. 

 

각흘산에서 본 360도 파노라마.

 

남동쪽 화악산과 한북정맥의 국망봉 방향.

 

동쪽 명성지맥이 분기된 광덕산 방향. 

 

북동쪽 북계산 방향.

 

북쪽 대득지맥 방향.

 

북서쪽 철원군 갈말읍 용화저수지 방향.

용화저수지 뒤쪽 멀리 검은 미세먼지 위로 희미하게 솟은 산이 철원의 최고봉 금학산쯤.

 

<용화저수지>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갈말읍 신철원리에  있는 저수지로, 저수지 위에는 유명한 삼부연 폭포가 있다. 삼부연폭포(三釜淵瀑布)는 『여지도서』 철원도호부 산천조에 "삼부연(三釜淵)은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여러 시내가 뒤섞여 모여 갈수록 깊고 점점 커지다가 석벽에 거꾸로 걸리면서 문득 3층의 돌구덩이를 만들었다. 그 깊이는 알 수 없는데 모양은 세 개의 가마솥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 부른다. 곧 기우처(祈雨處)이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폭포가 삼단으로 꺾어지고 가마솥처럼 움푹 파인 못이 세 개가 있어서 지명이 유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삼연(三淵) 김창흡이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서 은거하기도 하였는데 삼연은 바로 삼부연을 상징하는 별호이다. 『해동지도』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는 부의 동남쪽 끝 용화산 밑에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다. 철원팔경의 하나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데 폭포 옆에 부연사라는 절이 있고, 폭포와 부연사 사이에는 오룡굴이라는 터널이 있다. 이 터널을 지나면 용화저수지와 한국전쟁도 피해 갔다는 용화동이 자리 잡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는 도를 닦던 4마리의 이무기가 있었는데, 3마리가 폭포의 기암을 각각 하나씩 뚫고 용으로 승천하였다고 한다. 또 그때 생긴 세 곳의 구멍에 물이 고인 것이 삼부연이며, 마을 이름도 이무기가 용으로 변했다는 의미로 용화동(龍華洞)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용이 승천하며 남긴 상단의 못을 노귀탕, 중간 못을 솥탕, 하단의 가장 큰 못을 가마탕이라 부르고 있다. 

 

서쪽 명성산 방향.

 

각흘산 인증.

 

 

각흘산 정상에서의 멋진 조망을 뒤로하고 명성산을 향하면, 

 

각흘산 내림길은 아찔한 암릉길로 이어지고, 

 

약사령 건너편 명성산은 물론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여우봉도 조망되며, 

 

저 멀리 약사령능선이 달려가 명성산 능선에 닺는 지점 좌측 봉우리가 삼각봉이고, 우측으로 마루금에서 약 300m 비껴있는 봉우리가 명성산 정상이다.

 

가야 할 명성산을 배경으로. 

 

주변으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조망은 제쳐두고 가파른 암릉길을 시선을 집중하여 조심조심 내려서면, 

 

어느새 암릉 내림길은 끝이 나고 방화선을 만들어 놓은 듯한 헐벗은 능선으로 내려선다.

 

 

이곳 능선에 만들어 놓은 방화선은 아마도 승진종합훈련장에서 혹여 발생할 수 있는 산불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뿐이고, 

 

우측 용화저수지 방향. 

 

돌아본 각흘산 조망.

 

어린시절 보았던 민둥산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풍광에 착잡한 마음으로 벌거벗은 능선을 따르면,  

 

좌.우로 능선이 분기하는 민둥봉 정상에 도착하게 되는데, 지맥길은 좌측 철망문을 통과하여 이어진다. 

 

돌아본 각흘산 조망.

 

우측의 명성산 방향 능선은 용화저수지 방향의 지능선. 

 

 

명성지맥은 철망문을 통과하여 좌측의 능선으로 이어져, 

 

돌아본 각흘산과 광덕산 방향.

 

폐헬기장을 지나 낡은 군 경고판이 자리한 764.9봉을 지나는데, 

 

좌측 소나무에는 각흘봉 방향으로 지능선이 분기하는 764.9봉임을 알리는 '준.희'님의 표지기가 걸려있고, 

 

잠시 낙엽이 수북한 완만한 능선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등로를 뒤덮은 낙엽에 미끄러져 참호에 빠지기도 하며,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면, 

 

다시 완만한 안부 능선길이 이어지는데, 

 

이 사진을 찍고서 배낭의 보조배터리를 꺼내는 와중에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가, 

 

잠시 후 다시 사진을 찍으려는데 스마트폰이 없어졌음을 인지하고 전여사님의 도움으로 낙엽에 묻힌 스마트폰을 찾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잠시의 완만한 능선길에 이어 다시금 오름길이 시작되고, 

 

짧은 오르막을 올라 지나온 764.9봉 방향을 돌아보고,  

 

잠시 더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716.4봉 전망바위에 도착한다. 

 

전망바위에서 돌아본 광덕산 방향.

 

남동쪽 국망봉 방향.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명성산을 가늠해 보며,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고, 

 

잠시 완만해진 내림길을 따르다가 약사령 직전 널따란 군 진지에서 잠시의 쉼을 하고는, 

 

잠시 더 내려서면 이내 널따란 비포장 도로가 지나는 약사령을 지나게 된다.

 

<약사령(藥寺嶺)>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를 잇는 고개로 비포장 도로가 지나는 곳인데, 통일 신라 말 또는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藥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약사령이라고 부른단다. 도평리의 약사가 있었던 곳을 '도평리 사지' 또는 약사지(藥寺址)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이곳에는 유명한 약수터가 있었다고 하며, 약사 주변에는 약성(藥性)이 뛰어난 약초들이 많이 났다고 한다.

 

약사령 신철원 방향.

 

약사령에서 명성지맥길은 명성산 등산 안내도 좌측으로 이어진다.

 

 

약사령에서 명성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면, 

 

장병들의 땀이 배인 수금포(삽)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낙엽이 수북한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거대한 암릉을 만나 우측으로 우회하여 밧줄을 잡고 오르면, 

 

지나온 약사령 건너편 능선의 봉우리들이 무척이나 높아 보이고, 

 

날카로운 바위능선 우측 사면의 눈 쌓인 등로를 조심스레 오르면, 

 

좌측으로 승진종합훈련장이 가늠되더니, 

 

가야 할 명성산으로 이어진 약사령능선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좌측 승진종합훈련장과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여우봉 방향.

 

 

한참동안 나른한 겨울 오후의 양광을 즐기다가 뒤이어 도착한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명성산으로 이어진 약사령능선 억새밭으로 들어서면, 

 

이내 우측 용화저수지 방향 능선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가야 할 명성산 방향.

 

돌아본 각흘산 방향.

 

남쪽 여우봉 방향.

 

가야 할 명성산 주능선이 가까이 다가섬을 느끼며, 

 

좌측으로 보이는 승진종합훈련장을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이에, 

 

우측 용화저수지 방향 계곡 등산로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넓게 펼쳐진 약사령능선 억새밭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오르면, 

 

명성산이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서며, 

 

각흘산에서 이어온 능선이 한눈에 시원하게 조망된다.

 

 

낙엽을 떨군 떡갈나무 한그루가 자리한 언덕에 서면, 

 

광덕산에서 각흘산을 지나 이어온 명성지맥이 한눈에 가늠되고, 

 

황량한 민둥산을 연상케 하는 헐벗은 능선을 오르면, 

 

가야 할 명성산과 삼각봉이 지척으로 다가서고, 

 

좌측으로는 가야 할 명성지맥 능선에 둘러싸인 승진종합훈련장이 내려다 보이며, 

 

미세먼지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커진다.

 

 

나무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섯다가는,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명성산 삼거리 직전의 전망바위 쉼터에 도착하게 된다. 

 

지나온 각흘산 방향의 약사령능선 조망.

 

남동쪽 국망봉 방향.

 

 

점심식사를 하자는 제안에도 명성산 정상에 올라서 하자며 다시금 명성산을 향하면, 

 

이내 명성산 주능선 삼거리에 도착하여 지맥길은 바로 좌측 삼각봉으로 이어지지만, 우측 300m 지점에 있는 명성산 정상을 다녀오기로 한다. 

 

 

명성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등노로 들어서면 좌전방으로 궁예봉도 조망되고, 

 

좌측 몽베르CC 뒤편으로는 불무산쯤이 희미하게 조망되며, 

 

돌아본 삼각봉 방향으로는 가야 할 명성지맥 능선의 905봉과 옛 삼각봉이 나란히 조망된다. 

 

 

명성산 전위봉을 올랐다가, 

 

내려서면 좌측으로 신안계곡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잠시 오름길을 올라서면 이내 명성산 정상에 도착한다. 

 

<명성산(鳴聲山, 923m)>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과 영북면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 강원도 철원군의 중남부 갈말읍 신철원리에 위치한 산이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망국의 슬픔으로 이 산에서 통곡을 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 하여 '울 명(鳴)', '소리 성(聲)' 자를 써서 명성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북정맥에 속하여 대성산 · 복계산 · 광덕산 등을 잇는 산으로 험준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삼부연과 같은 명승지 외에도 석천곡(石泉谷) · 등용 폭포(登龍瀑布) · 비선폭포(飛仙瀑布) 등이 있는데, 특히 가을 억새로 유명한 산이다.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명성산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데, 『1872년지방지도』 철원구방지도(鐵原九坊之圖)에는 부의 남동쪽 경계에 명성산(鳴城山)이 묘사되어 있다. 이곳은 궁예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은 곳이다. 궁예가 918년에 왕건에게 쫓겨 이 산중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가 전의를 상실하고 통곡하면서 군사들을 해산하였는데, 그 후부터 산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와 명성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궁예왕굴(弓裔王窟)은 상봉에 위치한 자연동굴로 궁예가 왕건에 쫓겨 은신하던 곳이었다 한다. 항서받골(降書谷)은 궁예 군사에게서 항복하는 항서를 받은 곳이라고 하며, 가는골(敗走谷)은 궁예가 단신으로 이 골짜기를 지나 평강으로 도망갔다고 하여 패주골, 또는 가는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눌치(訥雉)는 궁예가 도주하면서 흐느껴 울었다는 곳으로 느치라고도 불린다. 또다른 설은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로 향하다 바위산에 올라 엉엉 울었더니 산도 따라 울어 명성산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명성천(鳴聲川)과 '명성산억새꽃축제'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명성산 정상에서 돌아본 삼각봉 방향.

 

명성산 정상 남동쪽 사면에서 점심식사.

 

명성산 정상 인증.

 

 

명성산 정상 인증을 마치고 산정호수로 하산하는 분들을 남겨두고 지맥팀들이 먼저 출발하여 신안계곡 갈림길을 지나고, 

 

다시 각흘산 방향의 약사령능선이 분기하는 삼거리를 지나면, 

 

바로 뾰족한 삼각봉이 불쑥 앞을 막아서는데,

앞서간 분들은 좌회하여 지났지만 명성산이 초행인 나는 홀로 삼각봉 정상으로 향하면, 

 

명성산 삼거리에서부터 좌.우 모두가 철원 땅이라는 안내판. 

 

이내 해태상이 자리한 삼각봉 정상에 도착한다. 

 

<명성산 삼각봉(906m)>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과 영북면,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의 경계에 있는 명성산의 한 봉우리로 정상에는 정상석 위에 해태상이 올려져 있고, 정상석 뒤에는 포천 출신인  양사언의 “태산가(泰山歌)”가 새겨져 있다. 

 

경기 포천시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명성산 줄기의 삼각봉을 다시 찾은 것을 기념하고 산불예방을 비는 뜻에서 삼각봉 정상에 해태상을 설치했다. 최근 GPS를 임차해 주변 봉우리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알려졌던 삼각봉이 아닌 진짜 삼각봉을 찾아냈다. 시 관계자는 “기존에 삼각봉으로 알려진 곳은 봉우리가 길쭉하고 평평하며 낙타봉처럼 생겼다”며 “답사 중 삼각형 모양의 뾰족한 봉우리를 발견, 그곳에서 GPS를 찍어보니 화면상에 삼각봉이라는 글씨가 나타났다”라고 한다. 시는 다시 찾은 삼각봉이 군 훈련으로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승진종합훈련장 위에 위치해 있는 점 등을 감안해 산불예방 염원을 담아 삼각봉과 명성산 정상에 화마를 물리치는 신수(神獸)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태산가(泰山歌)
태산이 비록 높다하나 이 또한 산이니
오르고 올라 그치지 아니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으리요.
사람이 몸으로 노력하지 아니하고
다만 산이 높아 오를 수 없다고 말하네.

-양사언-

 

삼각봉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 할 산정호수 방향의 능선 조망.

 

삼각봉 정상에서 바라본 궁예봉 방향의 궁예능선 조망.

 

<궁예(弓裔, 857?~918, 재위 901~918)>
궁예는 신라 진골 왕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라를 망칠 놈’이라는 예언과 함께 모진 인생역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힘과 재주로 사람을 모아 드디어 후고구려를 세워 왕이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미륵으로 자처했으며, 관심법(觀心法)이라는 특유의 술책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그것이 지나쳤을까, 포악한 성격으로 주변의 인심을 잃고 마침내 부하인 왕건에 의해 내몰려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도솔천의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를 이어 중생을 구하러 세상에 올 것이다.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 7천만 년이 되는 때이다. 사람들을 저 위의 세상으로 데리고 올라갈 때, 그는 미륵불이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미륵 상생신앙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미륵 하생신앙이 있다.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 도탄에 빠진 중생이 56억 7천만 년을 기다릴 수 없어지면 미륵보살더러 어서 오라 탄원한다. 미륵보살은 그 간청을 저버리지 못하고 이 세상으로 내려온다. 혼란한 시기, 스스로 미륵이라 부르며 나타나는 이들은 대체로 이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우리 역사상 미륵을 자처한 두드러진 예로 궁예를 들 수 있다. 901년에 개성에서 후고구려를 연 바로 그이다. 

 

궁예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것이 관심법(觀心法)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 이 신통력이 그의 말년에 갈수록 포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 데 쓰였으니, 그가 애써 이룬 공업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도 이 관심법이었다. 915년,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충언을 올렸다. 그러자 궁예는 부인더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라고 응수하였다. 부인이 어처구니없어 하자,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라며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였다. 미치광이 같은 이런 짓으로 그는 두 아이의 목숨마저 빼앗았다. 미륵이 아니라 패륜의 극치였다. 심지어 궁예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왕건(王建)에게도 예의 관심법을 들이댔다. 반역을 모의하였다고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관심법으로 이 일을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왕건을 아끼던 최응이라는 사람이 귓속말로 불복하면 위태롭다고 일러주었다. 그때야 분위기를 알아챈 왕건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며 무릎 꿇었다. 궁예는 크게 웃으며 정직하다고 칭찬하며,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까지 내려 주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왕건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미륵으로 자처하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궁예의 최후는 이 뒤에 바로 이어 닥쳐온다. 악행의 끝은 민심의 이반을 불렀지만, 기왕 악행을 일삼자면 왕건 또한 살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궁예는 바로 그 왕건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예의 삶과 역사 또한 승자에 의해 왜곡되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 점은 궁예와 동시대에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워 ‘가련완산아(可憐完山兒)’가 된 견훤의 경우와 유사하다. 둘 다 미륵의 나라를 표방했지만, 인간의 세상에 용화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좌절한 비운의 영웅들이었는지 모른다. 
박로자 교수는 왕건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궁예를 '인격살인'했다고 주장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그려졌던, 궁예가 부석사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 경문왕 초상화를 칼로 베는 장면도 부석사(의상) 중심의 화엄종과 금산사(진표) 중심의 법상종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다.
궁예와 견훤이 미륵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법상종 계열의 민중불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왕건이나 신라 귀족들은 화엄종을 그 정신적 뿌리로 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궁예의 삶과 역사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뿌리를 잃은 절대권력은 무너진다'는 교훈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패자의 역사는 늘 초라하고 옹색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지금 우리들의 왕도 예전의 선(善)한 모습은 패권을 거머쥐며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백성들을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끝없는 다툼의 세계로 몰아넣었으니 앞날이 그리 평안해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삼각봉 정상에서 바라본 각흘산 방향.

 

홀로 오른 산꾼에게 부탁하여 남긴 삼각봉 정상 인증.

 

 

삼각봉을 내려서니 산정호수로 하산하는 팀들이 앞서가고 있어서, 

 

여우봉을 지나는 지맥길을 따라야 하는 나는 천천히 오시라고 인사를 건네고는 걸음을 서두르는데, 

 

앞쪽 905봉 방향 능선 어디에도 앞서간 분들의 흔적은 보이지를 않는다.

 

 

팔각정이 1.5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 

 

조망이 트인 명성산 능선에서 지나온 삼각봉과 각흘산 방향을 되돌아보고, 

 

잠시 전에 지나온 삼각봉을 닮은 905봉을 만나서는 봉우리로 오르는 등로가 희미하기에, 

 

뚜렷한 좌측 우회로로 들어서서 바위 절벽 눈 덮인 등로를 조심스레 지나서,  

 

다시 능선으로 접속하여 좌회하여 지난 905봉을 되돌아보니 거대한 암봉이라 좌회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 구) 삼각봉을 향하다가, 

 

돌아본 명성산 방향으로 905봉과 삼각봉이 나란히 보이고, 

 

각흘산 방향.

 

이내 케른이 자리한 전망이 트인 밋밋한 바위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돌탑봉에서 바라본 구) 삼각봉과 승진종합훈련장 조망.

 

<승진 훈련장(勝進訓鍊場)>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에 있는 군사 훈련장으로 단일 훈련장으로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훈련장이다. 한국에서 대대급 부대가 공·지 합동 훈련을 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곳으로, 민간인들의 관람이 가능한 안보 견학지이다.
군사 훈련을 통한 국방력 강화를 위하여 1952년 7월 미군에 의해 건립되었다가 1973년 한국군에 인수되었으며, 2010년 8월 4일 건립 이후 최초로 민간에 군사 훈련을 공개하게 되었고 면적은 18.957㎢이다. 5군단 통제 하에 8사단이 관리하고 있으며, 상시적으로 대규모 군사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일반에 개방하기 전에는 훈련할 때의 포격음 등으로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군사 훈련장을 안보 관광의 장소로 활용하자는 역발상을 통해 2010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면서 포천시의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승진 훈련장 안보 관광은 현재 롯데관광에 위탁운영되고 있다.

 

원 명성지맥 마루금은 좌측 능선으로 진행하여 승전종합훈련장으로 이어가야 하지만, 군사 시설로 출입금지구역이라 우회하여 진행하게 된다.

 

살짝 당겨본 승진종합훈련장 조망.

 

 

팔각정이 1.2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신안고개 갈림길 삼거리를 지나는데,

우측 신안고개 방향에는 등산로가 아니므로 진입을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돌아본 명성산 방향으로는 궁예봉과 삼각봉을 보이는데 정작 명성산은 모습을 감추어 버렸고, 

 

구) 삼각봉을 향해 거리를 좁혀가자 좌측 아래로 승진종합훈련장의 위용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승진종합훈련장을 휘감아 돌아 여오봉과 사향산으로 이어진 가야 할 지맥 능선이 가늠되며, 

 

구) 삼각봉을 좌회하는 길을 두고 봉우리로 오르는 오름길을 오르면, 

 

별다른 표식이 없는 구) 삼각봉 정상에 도착한다. 

 

돌아본 각흘산 방향.

 

가는 녹색선이 승진종합훈련장을 휘돌아 이어지는 명성지맥 능선이고, 우리는 등룡폭포 상부에서 계곡길을 따라 안덕재 갈림길을 지나 바로 여우봉으로 오르는 우회길을 따르기로 한다.

 

오늘 가야할 마지막 봉우리인 여우봉과 다음구간 가게 될 사향산과 관음봉 방향.

 

 

구) 삼각봉을 뒤로하고 명성산 주능선을 따르다가, 

 

능선 좌회길을 두고 팔각정이 0.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능선길로 오르면, 

 

우전방으로 산정호수가 내려다 보인다. 

 

<산정호수(山井湖水)>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 위치한 산정호수는 뒤편의 명성산을 비롯하여 여러 높은 산봉우리가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호수 주변의 자인사와 등룡폭포, 비선폭포 등이 경관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이곳의 산책로는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며, 보트장, 방갈로, 놀이터 등  여러가지 시설도 고루 갖추어져 있다.
산정(山井)은 “산속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봉우리가 호수에 그림자로 드리우면 한폭의 산수화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인공호수인 산정호수는 명성산 자락의 천연 암벽을 이어가는 물의 궁전으로, 김일성의 별장이 있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군사시설이 철수한 70년대 이후 관광지로 단장된 이곳은 훼손되지 않은 청정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유원지 입구에서 호수 끝자락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3㎞의 산책로는 산과 호수를 담는 길이다. 
호수 면적은 약 0.24㎢로 서울에서 약 72km 거리에 있으며, 영북농지개량조합(永北農地改良組合)의 관개용 저수지로서 1925년에 축조되었으며, 산중에 묻혀 있는 우물 같은 호수라는 뜻으로 산정(山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북쪽에 명성산(鳴聲山)이 있는데, 산 이름은 고려 건국 때 왕건(王建)에게 쫓긴 궁예(弓裔)의 말년을 슬퍼하는 산새들이 울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남쪽에 관음산(觀音山)이 있는 등 산으로 둘러싸인 국민관광지이다. 명성산 기슭으로 등룡폭포가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보트·수상스키를 즐기고, 겨울은 얼음썰매장으로 수도권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95년 이 일대에 온천이 개발되었다. 

 

살짝 당겨본 산정호수 조망.

 

서쪽 몽베르CC 방향.

 

가야 할 명성지맥의 봉우리들.

 

 

우측 아래로 펼쳐지는 산정호수를 조망하며 잠시 더 능선을 따르면, 

 

명성지맥 분기점을 알려준다는 "5-1 구조목"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명성지맥은 좌틀하여 승진종합훈련장 방향으로 이어져 훈련장 외곽을 휘돌아 안덕재와 바깥덕재를 지나 여우봉으로 이어지지만, 군부대에서 통제하는 지역이고 등로조차 거칠고 희미하다는 정보에 따라 직진의 팔각정 방향으로 우회하여 진행하기로 한다. 

 

<명성지맥 승진종합훈련장 통과 방법>

명성산 주능선의 "5-1 구조목"이 있는 지점에서 명성지맥은 좌틀하여 승진종합훈련장으로 진입하여 안덕재와 바깥덕재를 지나 여우봉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곳은 군 전차와 포 사격 훈련장으로 군부대에서 진입을 통제하고 있고, 혹여 진행을 하더라도 지맥 능선길이 희미하고 거칠어 진행에 무척이나 애를 먹는 곳이다. 특히나 훈련이 있는 날이면 각흘산 들머리에서 아예 통제를 하게 되어 각흘산에서 명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물론 각흘산을 오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이번 구간은 주로 훈련이 없는 공휴일에 진행하는 것이 좋으며, 승진종합훈련장도 우회하여 지나는 것이 여러모로 타당해 보인다.

 

이번 구간 명성산 능선 '5-1 구조목"에서 여우봉까지의 진행을 위해 검토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원 명성지맥 : 5.4km, 4시간 예상.

2. 승진종합훈련장만 우회 : 3.8km, 2시간 30분 예상.

3. 편한길로 우회 : 4.8km, 1시간 50분 소요.

 

 

좌틀하여 지어지는 지맥길을 두고 직진의 명성산 주능선 등산로를 따르면,

 

가야 할 여우봉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이고, 

 

전망이 트인 바위에 서니 다음 구간에 오르게 될 사향산과 관음봉도 조망되더니, 

 

이내 명성산 억새밭과 여우봉이 건너다 보이는 지점의 돌탑을 지나는데, 

 

우측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정호수가 산만 보이는 풍광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고, 

 

명성산 억새밭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그루 나무와 벤치가 있는 쉼터를 지나게 된다. 

 

태봉국 궁예의 한이 서린 이곳 명성산은 옛부터 지리와 군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한 요충지이기에 삼국시대부터 최근의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명성산을 대표하는 억새밭 또한 울창하였던 숲이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 사라지면서 만들어진 장소라고 한다. 

 

수많은 이들의 울부짖음이 지금은 바람소리에 묻혀버린 듯,

이곳을 찾는 산객들에게는 아름다운 풍광만이 추억으로 간직될 뿐인 듯하다. 

 

 

억새밭 가장자리 능선을 따라 내려서다가 방금 지나온 나무와 벤치가 있는 쉼터를 돌아보고, 

 

바람결에 일렁이는 억새밭의 풍광을 담는 사이에, 

 

억새밭 가장자리 능선 안부에 자리한 팔각정에 도착하니, 

 

뜬금없는 명성산 정상석이 떠억 허니 자리하고 있는데,

강아지를 데려온 산객은 이곳이 명성산 정상으로 착각하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그 옆에는 1년 후에 받는 우체통도 설치되어 있다.

 

 

우틀 억새밭을 가로지르는 등로를 두고 억새밭 가장자리로 이어진 직진의 등로로 들어서서, 

 

삼각봉을 들르지 않고 앞서가 기다리던 분들과 합류하여, 

 

억새밭 가장자리 등로를 따라 진행하면,  

 

등로는 억새밭 데크목 계단길로 이어져, 

 

그 자체로 멋들어진 데크목 전망대도 지나게 되고, 

 

등로는 계속 억새밭으로 이어진 데크목 내림길로 이어지다가, 

 

데크목 쉼터가 있는 곳에서 우측 가장자리 등로로 들어서고, 

 

돌아본 명성산 억새밭 조망.

 

그냥 직진의 등로를 따라도 되지만 좌틀하여 '억새밭풍경길'로 좌틀하여 내려서면, 

 

억새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억새와 갈대의 차이점>
갈대와 억새는 꽃이 핀다. 이 두 식물들은 꽃이 피고 지는 계절과 생김새까지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구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 자생지역으로 구분.
   억새와 갈대는 자생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쉽다.

   억새는 산이나 뭍에서 자란다. 산에 있는 것은 무조건 억새이다. 

   갈대는 산에서 자라지 못한다. 갈대는 습지나 물가에서 자란다.

   물가에서 자라는 물억새도 있으나 산에 자라는 갈대는 없다.

▶ 색깔로 구분.
  억새는 은빛이나 흰색을 띤다. 가끔 얼룩무늬가 있는 것도 있다.

  억새는 억새아재비, 털개억새, 개억새, 가는잎 억새, 얼룩억새 등 종류에 따라 색깔이 다소 다를 수 있다.

  갈대는 고동색이나 갈색을 띠고 있다.

▶ 키로 구분. 
  억새는 대부분 키가 1m 20cm 내외로 이보다 작거나 일조량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사람의 키만한 억새도 있다.

  갈대는 키가 2m 이상 큰다. 또 다른 점으로는 억새의 뿌리가 굵고 옆으로 퍼져나가는데 비해

  갈대는 뿌리 옆에 수염같은 잔뿌리가 많고, 억새의 열매는 익어도 반쯤 고개를 숙이지만,

  갈대는 벼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아~ 어~,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의 '으악새'가 '으악으악' 하며 우는 새의 일종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으악새'는 바람에 흩날리는 늦가을의 정취를 대변하는 억새를 가리킨다.

'억새'라는 이름처럼 좁고 긴 잎에는 아주 작은 가시가 있어 베이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 명성산 告- 

 

 

억새밭 데크목길을 따라 내려서면,  

 

명성산 억새밭길이 끝나고,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너덜 등로로 들어서게 된다. 

 

 

눈 덮인 너덜 등로를 따르다가, 

 

등로가 우측으로 휘어지며 등로를 덮고 있던 눈은 자취를 감추고, 

 

좌측으로 군부대에서 설치한 철망 펜스를 두고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면, 

 

좌측에 군부대 초소가 위치한 지점에서 등룡폭포와 산정호수 방향 등로는 우측으로 휘어지며 이어지고, 

 

우리는 초소 옆 철망문을 통과하여 승진종합훈련장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철망문을 통과하여 원상회복까지 완결!

 

 

철망문 안으로 들어서니 승진종합훈련장 방향으로 이어진 등로가 도시 근교의 등산로인 듯 뚜렷하지만, 

 

녹지 않은 눈에 발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지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가려는 지맥 우회길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어서 무척이나 불안했던 마음이 의외의 뚜렷한 등로에 눈녹듯이 사라지며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숲길을 빠져나와 승진종합훈련장으로 들어서니, 

 

일부 지도에 안덕재로 표시된 승진종합훈련장 외곽 시멘트 도로에 접속하여 우틀하여 도로를 따른다.  

 

우측 우회길 여우봉 오름길의 중간 목표지점인 통신탑 방향.

 

좌측 훈련장의 서쪽 능선인 645.2봉과 619.1봉 능선 방향.

 

지나온 명성산 등룡폭포 상부 방향.

 

 

우측 시멘트 임도를 따르면 일부 산행기에서 안덕재라고 표시하는 지점을 지나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안덕재는 이곳이 아니라 원 명성지맥의 맹봉산 북쪽 훈련장이 자리한 영북면 산정리와 이동면 도평리 약사동을 연결하는 고개를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되며, 우리가 지나는 현 지점은 승진종합훈련장이 차지한 계곡의 물이 산정호수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계곡으로 보인다.

 

 

안부 계곡을 지나 삼거리에서 우측 도로로 들어서서, 

 

최근에 밟은 흔적이 없는 흰 눈에 발자국을 남기며 올라,  

 

도로가 지능선을 넘는 지점에서 우측 산으로 진행하는데, 

 

돌아본 승진종합훈련장 방향으로 우측 광덕산 방향의 낮은 안부 지점이 안덕재쯤으로 짐작된다.

 

절개지로 오르며 돌아본 승진종합훈련장 방향.

 

 

숲길로 들어서니 산짐승들의 발자국만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눈밭에 찍힌 앞서간 분들의 발자국을 따르는데, 

 

앞서간 분들의 발자국이 능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지점에서 그냥 직진의 능선 방향으로 오르면, 

 

군사보호구역 말뚝이 박혀있는 지점을 지나게 되고, 

 

이내 우측 계곡에서 이어온 선탑자의 발자국이 능선으로 이어진 지점을 지나 오르면,  

 

선탑자의 산행기에서 보았던 통신탑에 도착하게 된다. 

 

 

통신탑을 뒤로하고 계곡 능선을 따라 오르면, 

 

원 명성지맥이 훈련장을 휘돌아 바깥덕재를 지나 여우봉으로 오르는 능선에 자리한 널찍한 헬기장에 도착하여, 

 

잠시 배낭을 내리고 신발에 들어간 눈과 잔돌을 털어내며 쉼을 한다. 

 

 

헬기장을 뒤로하고 여우봉으로 이어진 능선으로 들어서면, 

 

완만한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여우봉이 가늠되는 706봉쯤을 지나고, 

 

육산 능선에서 커다란 바위를 지나는데, 

 

이끼가 덮고 있는 바위에 남겨진 잔설이 눈길을 끌고,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능선을 따르면,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여우봉에 도착하게 된다. 

 

<여우봉(狐峰, 725.7m)>

포천시 이동면과 영북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왕수산악회에서 설치한 작은 여우 모양의 정상석과 군사시설보호구역 콘크리트 말뚝만이 서 있을 뿐 다른 특별한 건 없다. 여우봉이란 이름은 아마도 봉우리 남쪽의 여우고개에서 따온 듯하다. 그런데 여우봉의 고도 표시가 예전 오래된 산행기에는 620m로, 그리고 네이버 지도에는 726m로, 또 최근에 왕수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석에는 741m로 제각각인데, 네이버 지도의 표기가 맞는 듯하다.

 

여우봉 정상 인증.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여우고개를 향해 여우봉을 뒤로하고, 

 

얕은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면, 

 

아무런 표식이 없는 지도상의 710봉쯤을 지나게 되고, 

 

여우고개까지 20여 분이면 닿을 수 있을 것으로 짐직하여 산행 출발지인 자등현에 세워둔 차량 회수를 위해 이동면 택시를 호출하는데 8분이면 도착된다고 하여 20분 후에 여우고개에 도착해 줄 것을 요청하고는, 

 

여우고개를 향해 본격적인 급경사 내림길로 들어서는데,

앞쪽으로 다음 구간 가게 될 사향산이 부담스럽게 다가서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여우고개를 향한 내림길은 급경사에 끝없이 이어지고, 

 

희미한 능선길에는 낙엽까지 두텁게 덮여 있어서 도무지 속도를 낼 수도 없고,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급경사의 긴 내림길도 마침내 여우고개가 내려다 보이는 개활지로 내려서며 끝이 나고,

 

잡풀을 헤치고 여우고개가 내려다 보이는 경작지로 내려서서 좌측의 농로를 따라 내려서면, 

 

2차선의 78번 지방도가 지나는 여우고개에 도착한다. 

 

<여우고개((狐峴, 420m)>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구정보루에서 영북면 산정리 산정호수로 넘나드는 7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여우고개는 한자로 호현(狐峴)이고 영북면 쪽 고개 아랫마을이 호현동이다. 여우고개 도로는 한국전쟁 전에 북한이 닦은 길이다.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망을 '보았다' 즉 '엿보았다' 하여 '엿본 고개'가 여우고개로 되었다고 한다. 또는 여우가 많이 서식하였는데 겨울에는 양지쪽에서 여름에는 응달쪽에서 살았다고 하여 여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산정호수 남쪽에는 여우고개(狐峴)라는 마을이 있는데 여우가 자주 나타났다고도 하고, 또는 궁예의 군사가 왕건 군사에게 패하여 명성산에 피난하고 있을 때 왕건 군사들과 궁예 군사들이 이곳에서 서로 눈치를 보면서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여우고개 마을(狐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지명 총람』에 따르면 포천시에는 화현면 화현리와 군내면 직두리에도 여우고개가 있다고 되어 있으나, 각각 노태고개와 굴고개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여우고개 전경.

 

산행을 준비하며 명성산에서 여우봉까지의 구간 진행을 두고 무척 고민이 많았다. 자주 애용하는 어플에는 변변한 GPS트렉도 없고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뒤져봐도 모두들 제각각으로 진행한 듯 보이고, 그나마도 자세한 설명 없이 제대로 된 등로가 없고 거칠어 고생을 했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하나의 길을 선택해 막상 들어서니 우려와는 달리 어렵잖게 진행을 할 수 있었다. 역시나 일단은 도전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번더 깨닫는 산행이었다.  

 

 

산행을 마치고 뒤풀이는 철원군 동송읍의 손점장 별장?에서!

 

그래도 오늘은 앉은뱅이술을 마시지 않아서 

기억은 고스란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