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장소 : 영산기맥 10차(감돈재~다순금) 전남 무안군, 목포시.
산행일시 : 2023. 03. 25.(토)
산행코스 : 감돈재 ~ 110.9봉 ~ 197봉 ~ 국사봉(283m) ~ 대봉산(252.3m) ~ 서해안고속도로암거 ~ 추자재 ~ 채석장 ~ 825번지방도(남해환경) ~ 지적산 ~ 지적산 웅지봉 ~ 120봉 ~ 117봉 ~1번국도(목포도시가스) ~ 대박산 ~ 목포재활용센터 ~ 대운레미콘 삼거리 ~ 비녀산 ~ 꽃무릇사거리 ~ 양을산 ~ 체육공원 ~ 용해지하차도 ~ 경찰서사거리 ~ 용해2단지APT ~ 마리아고교 ~ 따부재 ~ 유방봉 ~ 목포농협 산정지점 ~ 산정산 ~ 59.4봉 ~ 산정동성당 ~ 목포여고 오거리 ~ 정명여고 후문 ~ 故 이난영여사 생가 ~ 북촌초교 ~ 유달산 순환도로 ~ 팔각정자 경관루 ~ 유달산 이등봉 ~ 소요정 ~ 유달산(229.6m) ~ 관운각 ~ 아리랑고개 ~ 다순금 (24km, 11시간 소요)
산행참석 : 22 백두.
<산행지도>
2019년 늦가을, 호남정맥의 순창새재 윗봉에서 출발하여 이산저산을 기웃거리며 진행하다가, 코로나19로 산행이 중단된 지 3년 만에 산행을 재개하여 지금까지 총 9회에 걸쳐 152km의 영산기맥 능선을 걸었고, 이제 24km가 남아 한 번의 산행이면 영산기맥 종주를 마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영산기맥은 도상거리 기준 154km(자료에 따라 159km 또는 174km)였는데, 걸은 152km와 남은 24km를 더하면 176km가 나온다. 전체적으로 잡목과 가시나무가 많고 사유지 등으로 우회가 불가피한 곳도 많기는 했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기맥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기에 일부 우회 구간을 감안하더라도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가 시간 여유가 되면 검증을 해 볼 숙제로 남긴다.
이제 영산기맥의 종착지인 다순금까지는 24km로 두 번으로 나누어서 진행하기로 하고, 금번 산행에서는 1번 국도가 지나는 삼향동 주민센터까지만 진행하고 시내버스로 이동하여 목포의 입암산과 갓바위 탐방을 계획했다. 산행지도와 일정을 거의 완성하여 카페에 공지하려는데, 영산기맥 종주의 대미를 함께하고 싶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다음 산행 참석이 어렵다며 이번 한 번의 산행으로 영산기맥 종주를 마쳤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전달해 오는 분이 있어서, 부득이 많은 분들께 공지했던 계획과는 달리 비교적 긴 산행 한 번으로 영산기맥 목포시내 구간을 종주하기로 한다.
산행지가 서울에서 먼 목포이고 산행거리도 다소간 긴 구간이라서, 짧은 산행을 원하는 분들을 위하여 팀을 나누어 진행하기로 한다. 종주팀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각인 새벽 4시에 감돈재에서 출발하고, 유람팀은 지적산 직전의 남해환경 임도에서 6시 반쯤에 기맥산행을 진행하는 것으로 맞추어 지적산 정상에서 주변의 멋진 조망을 즐기며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는, 목포시내와 유달산 구간을 오손도손 함께 걸어 영산기맥 종주의 기쁨을 나누기로 한다.
올들어 전례 없이 극심한 봄가뭄으로 전국적으로 산불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다행으로 산행 출발일인 금욜에는 전국적인 비 예보가 있었고 언 발에 오줌누기 정도의 비가 내렸다. 흐린 날씨로 작은 접이식 우산을 배낭에 챙겨 넣고는 양재에서 산행버스에 몸을 실으니, 어느새 산행출발지인 감돈재 아래 목포장애인요양원 앞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300km가 넘는 거리라 새벽 4시쯤에나 도착할 것으로 예상하여 도착하면 바로 산행을 시작하자고 했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일어나 산행준비를 하는 분들을 다시 주무시라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천천히 걸어서 시간을 맞춰보자며 함께 산행 준비를 하고는 버스를 나선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버스를 나서는데 아직 3시밖에 안 되었다. 이렇게 일찍 출발하면 야간산행 시간이 길어져 추자재를 지나 길찾기가 어려운 채석장 구간을 어두울때 통과해야 하는 부담도 있기는 하지만, 삼향리 정부양곡창고 앞에서 6시에 출발하여 6시 반쯤 남해환경 임도에서 기맥산행을 시작하게 되는 유람팀들과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장점도 있기는 하다 싶어,
지체없이 감돈재 고갯마루를 넘어,
<감돈재/넘어골고개(甘豚峙, 60m)>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넘어골과 청계면 월선리 독골마을 사이의 고개로, 815번 지방도가 지나며 고개 아래에는 꽤나 큰 감돈저수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목포대학교가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감돈마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 뒷산의 산세가 험하여 은신하여 살기가 좋아 “돈(豚)”자를 써 마을이름을 감돈이라 하였다고 하며, 일로읍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감돈리는 북동쪽으로는 몽탄면, 북서쪽으로는 청계면 월선리와 서남쪽으로는 삼향읍에 접하고 있다.
감돈재 삼거리 도로표지판과 전봇대가 있는 지점에서 우측 묘지길로 들어서며,
영산기맥 열 번째이자 마지막 산행 이야기를 시작한다.
감돈재 들머리에서 남양홍씨 가족묘지 우측으로 올라 묘지 상단 숲길로 들어서고,
이내 수레길 수준의 등로가 이어지는 능선에 접속하여 좌틀하여 능선오름길 등로를 따르면,
'T'자 능선갈림길이 있는 110.9봉에 도착하여 기맥길은 우틀하여 이어지는데,
삼면봉인 110.9봉에서 우측은 청계면이 계속 이어지만 좌측은 몽탄면에서 일로읍으로 바뀌게 되고,
110.9봉에서 우측 능선길로 들어서서 좌.우로 희미한 길흔적이 있는 완만한 안부를 지나,
점점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오르면,
다시 'T'자 능선 갈림길에 올라 우측 능선 오름길로 진행해야 하는데,
10여분 남짓의 산행으로 몸이 달아오르며 입었던 겉옷을 배낭에 갈무리한다.
완만하던 능선길에 짧은 오름길을 더하여,
표지기가 걸린 174봉에 올라서는 좌틀하여 내려서고,
둥그런 안부를 지나 183봉으로 올라서는,
다시 또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더 오르게 되고,
좌측 일로읍 방향.
186봉에 올라 우측으로 살짝 휘어지며 급하지 않은 내림길을 내려서면,
안부를 지나는 시멘트포장 임도삼거리에 내려서서 건너편 숲길로 들어서며 기맥길을 이어가게 되는데, 안부 우측의 좌측 임도는 청계면 월선리 한치마을 방향 능선까지만 이어지고, 우측 임도는 아침에 출발한 감돈재 북측 목포장애인요양원 앞 도로로 이어지며, 안부 좌측 임도는 큰골저수지를 지나 일로읍 감돈 마을로 이어진다.
안부 우측의 좌측 임도인 월선리 한치마을 방향 임도로 들어서던 분들을 불러 임도 건너편의 표지기들이 반기는 널찍한 숲길로 들어서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T'자 능선에 올라 좌틀하여 다소 완만해진 능선길을 오르면,
222봉에 오르게 되는데 봉우리 우측에 자리한 묘지 아래로도 표지기들이 걸린 뚜렷한 등로가 보이지만,
기맥길은 직진의 동백나무 숲으로 이어가야 하는데, 아마도 우측 묘지 아래로 이어진 등로는 봉우리 능선내림길 암릉을 우회하는 등로로 짐작된다.
동백숲을 지난 222봉 내림길은 급경사 바윗길이라 지나기가 무척이나 까다롭고,
급경사 내림길이 다시 완만해지며 급경사 바윗길인 222봉 능선내림길을 우회하여 온 듯한 등로가 합류되고,
완만한 안부를 지나 오르면,
삼면봉인 197봉을 지나게 되는데, 좌측은 무안군 일로읍이지만 우측은 청계면에서 삼향읍으로 바뀐다.
완만한 능선 숲길을 따라 193봉을 지나면,
능선등로 좌측 나무둥치에 '질재 185m' 코팅지가 걸려있고,
완만한 능선길이 길게 이어지다가 작은 렌턴 불빛에도 화사한 모습이 드러나는 진달래가 피어난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우측 삼향읍 유교리 군산동 마을에서 이어온 등로가 합류하는 232봉을 지나게 되고,
우측 삼향읍 유교리 방향.
잠시의 보너스 같은 완만한 능선길에 이어 로프까지 메인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좌측이 산불감시카메라탑봉이고 우측이 국사봉 정상 헬기장인 안부에 도착하여 잠시 배낭을 내리고 첫번째 쉼을 하는데, 기맥길은 우측 국사봉 정상 헬기장으로 이어진다.
<국사봉(國師峰, 283m)>
전남 무안군 일로읍 감돈리와 삼향읍 지산리, 유교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산정에는 산불감시탑이 설치되어 있다.
국사봉 진전 안부의 이정표.
동쪽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일로읍 감돈리 방향 야경.
국사봉 직전 안부 좌측의 무인 산불감시카메라탑 전경.
10여분 이상의 긴 쉼을 뒤로하고 우틀하여 10여 미터 오르니 널찍한 국사봉 정상 헬기장이 나오는데,
평소와는 달리 '인증합시다'는 한마디에 다들 헤드렌턴까지 끄는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급하지 않은 국사봉 내림길을 내려서서,
한때 사유지 출입을 막는 철망펜스 출입문이 있었던 안부를 지나 오르면,
한 때 서래야님의 '국사봉상봉' 코팅지가 걸려 있었다는 292봉을 지나게 되는데,
봉우리 한켠에 세워진 작은 표지석에 새겨진 '물 수(水)'자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고,
별반 필요없어 보이는 가드로프까지 메인 내림길을 내려서서,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오르면 좌전방 일로읍쯤의 야경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238봉을 지나게 되고,
넓은 공터에 벤치가 있는 대봉산 정상에 도착하여 기맥길은 이정표의 군산동 방향으로 우틀하여 이어지는데,
<대봉산(大峰山, 251m)>
무안군 삼향읍 맥포리와 유교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대봉산 정상에는 넓은 공터에 국사봉 등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대봉산을 알리는 표식이나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 대봉산에 우틀하는 영산기맥은 우측으로 함께하던 무안군 일로읍과 이별하고 온전히 삼향읍으로 이어져 지적산 직전의 남해환경 임도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정표에서 기맥길은 우틀하여 이어지는 군산동 방향이고,
직진의 '제각'은 지명이 아니고 삼향읍 맥포리 793에 있는 제각(祭閣)을 말하는 듯하다.
대봉산 인증.
대봉산에서 우틀하여 온전히 삼향면 안으로 들어서며 로프가 매인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면,
우측 사면으로 이어온 등로가 합류되고는 이내 다시 좌측의 널찍한 등로에 합류하여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고,
약 3분 간격으로 연이어 세 번째 '水' 표석을 지나는데 용도가 몹시나 궁금하지만 알아볼 도리가 없는데,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벤치가 있는 219.8봉에 올라 우측으로 휘어지는 완만한 능선을 따르게 되고,
벤치가 있는 'ㅓ'자 갈림길에서 직진의 군산동 방향을 두고 직좌틀하야 죽림마을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야간 산행거리를 줄이기 위해 천천히 진행하자는데도 후딱 가버린 일행에 뒤처져 홀로 남은 상태라, 커피를 꺼내어 모닝커피 향을 맡으며 어둠을 음미해 본다.
죽림마을 방향으로 좌틀해야 하는 군산동 갈림길 이정표.
5분여의 '어둠 음미'를 마치고 좌틀하여 이어지는 죽림마을 방향 등로를 따르면,
전남도청이 자리한 삼향읍 남악리의 오룡산이 4.5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이내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두고 우측 희미한 능선 숲길로 들어서야 하는 길주의 지점을 지나게 되는데, 어두운 야간에 무심코 진행하다 보면 넓은 수레길 따라 알바에 나서기 십상이므로 주의해야 할 지점이라, 미리 주의하여 지나다가 우측 능선 숲에 걸린 빛바랜 표지기를 보고 우측 숲으로 들어서니,
빼곡한 잡목과 잔가지들이 얽혀있지만 비교적 뚜렷한 길흔적이 이어지며 지나기에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이고,
이내 잠시 전의 뚜렷한 등로를 따라 알바 갔던 기맥꾼들의 족적이 좌측에서 합류하는 지점쯤을 지나서 완만한 숲길을 따르다가,
송전탑(NO.131) 아래를 지나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희미한 등로를 20여 미터 따르면,
나뭇가지에 표지기 몇 개가 걸린 지점에서 우틀하여 깊어 보이는 안부를 향해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게 된다.
어둠 속 내림길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완만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올라,
길쭉한 능선으로 보이는 155.6봉쯤을 지나고,
155.6봉을 지나서 나오는 갈림길에서 선명한 직진의 등로를 두고 표지기가 걸린 우측 희미한 등로로 들어서서 내려가면,
좌측으로 표지기가 여럿 걸린 잘록이 안부 갈림길이 나오는데, 영산기맥은 표지기가 한두 개 걸린 직진의 봉우리로 올라 우틀하여 추자재로 이어지지만, 서해안고속도로 통과하려면 다시 돌아나와야 하므로, 이곳에서 바로 우틀하여 고속도로 암거 방향 골짜기 내림길로 진행한다.
기맥꾼들의 표지기가 잔뜩 걸린 좌측 골짜기 방향 내림길로 들어서면,
뚜렷하던 등로는 사방으로 흩어져 희미해지는 지라 그저 골짜기로 이어진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훤히 불을 밝히고 있는 호남고속철도 공사장이 내려다 보이고,
마른 덤불과 잡초를 헤치고 공사장 안으로 진입하여 현장 도로를 따라 나가면,
이내 서해안고속도로 아래로 통과하는 암거가 나오고,
서해안고속도로 지하암거를 통과하여 나와 정면의 백록식품 앞에서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추자재 방향으로 오르는데,
혹여 홀로 뒤떨어져 올고 있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기다리고 있는 두규형의 깊은 배려에 기운이 되살아남을 느끼며 선경폐차장이 자리한 추자재/주자재에 도착하여, 도로를 따라 우회할 것인지 아니면 길찾기가 어렵다는 원래의 기맥능선인 채석장으로 진행할 것인지를 두고 잠시 망설이다가, 우측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의 굉음 소리를 조금이라도 덜 듣고 싶어서 좌측 선경폐차장 직전의 채석장(지금은 태양광발전단지) 방향 진입로로 들어선다.
<추자재/주자재>
전남 무안군 삼향읍 용포리 와동마을 개고리골과 삼향읍 유교리 석교마을 추재골 사이의 고개로, 서해안고속도로와 2번 국도가 지난다. 추자재는 주자재, 주치재 등으로 표시하기도 하는데, 국가정보원 지도에 「추자재」로 표기하고 있고, 옛 지도에는 추치(秋峙)로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와동(臥洞)은 마을 앞 산맥이 사두혈(蛇頭穴)이며 마을의 지형은 개구리(蛙)형이라 하여 와동이라 부른다. 석교(石橋)는 마을 입구에 돌다리가 있어 석교라 부른다.
폐쇄된 채석장 한켠에 태양광발전단지가 들어서며 새로이 뚫린 진입로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
돌아본 추자재와 지나온 155.6봉 방향.
정면 태양광발전단지로 이어지는 도로를 두고 우측 쇄석이 깔린 개활지 능선으로 들어서면, 가야 할 송천탑 봉우리와 지적산이 가늠되고,
지적산 좌측의 송전탑봉을 기준으로 하여 골재 채취가 끝난 비교적 편평한 우측 능선 개활지로 진행하는데, 따르는 지적선 방향 능선은 쇄석이 깔진 평탄지가 계단식으로 이어지며 능선 좌측 아래로는 채석장 낭떠러지라서 야간에는 주의하여 진행해야겠지만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이고,
우전방 삼향읍 유교리 방향.
골재 채취가 끝나 쇄석이 깔린 비교적 평평한 지대를 살펴가며 진행하여,
좌측 낭떠러지 아래로 보이는 소나무가 조림지 모습.
채석이 끝나 소나무가 조림된 지대로 들어서면 대형 차량이 지나다닌 바퀴 자욱이 있는 길흔적을 따르게 되고,
반쯤 잘려나간 산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길흔적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길흔적은 채석장 바닥 소나무 조림지 사이로 이어지다가,
따르던 도로 흔적이 우측으로 휘어지며 가야 할 송전탑봉이 전방으로 보이게 되고,
따르던 길흔적이 한결 뚜렷해지며 임도의 모습을 갖추며,
추자재 방향의 지나온 채석장을 돌아보니 어려운 길찾기의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밀려오는데,
밝은 낮이었으면 그리 어렵지도 긴장할 필요도 없었을 듯하다.
폐쇄된 채석장 도로를 따르다가 신설 중인 도로를 가로질러 우측 절개지 상단으로 진행하여,
이즈음 삼향읍 유교리의 정부양곡창고를 출발하여 남해환경 뒤편의 지적산 등산로 입구로 이동하던 유람팀들도 따르던 825번 지방도가 신설 도로 공사현장에 막혀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었다는데, 유람팀들을 힘들게 했던 도로가 바로 지금 건너는 이 공사중인 도로다.
우측 유교리 방향.
돌아본 도로 개설 공사현장 모습.
신설도로 공사현장을 지나 다시 옛 임도에 접속하는데, 영산기맥 봉우리인 좌측 철탑봉으로는 오르는 길흔적이 보이지 않고 선답자들도 생략했다고 하므로 우리도 그냥 옛 임도를 따라 좌측 철탑봉과 우측 철탑봉 사이의 안부 방향으로 진행하여,
양쪽 철탑봉 사이의 안부 고갯마루에서 우측 희미한 잡목숲에 걸린 표지기에 이끌려 가파른 잡목숲길로 들어서면,
잡목이 침범하여 거칠고 가파른 수레길을 따라 오르게 되고,
망주석이 있는 지점 부근에서 우측 능선 방향 빼곡한 잡목숲을 헤치며 오르면,
이내 제법 뚜렷한 길흔적이 이어지는 능선에 올라서서 좌틀하여 진행하는데,
우측 아래로는 채석장 절개지가 이어지고,
표지기까지 걸린 뚜렷한 수레길 흔적을 따라 좌측의 No75 송전탑을 지나면,
더욱 뚜렷하고 넓은 송전탑 보수로가 봉우리를 지나 아래로 이어지다가,
현풍곽씨 가족묘원이 나오면 묘지 가로지러 내려가도 되지만 좌틀하여 묘지 아래로 내려서면,
825번 지방도(남해환경 진입로)에 내려서게 된다.
<825번 도로(남해환경 임도)>
목포시와 무안군 경계인 지도상의 삼향 유교리에서 목포 임성리역으로 가는 비포장 도로로 남해환경이라는 건축물 폐기업체 진입로로 쓰이고 있다. 이곳부터 대봉산에서부터 함께한 무안군 삼향읍과 이별하고 온전히 목포시로 들어서게 된다.
825번 도로에 내려서서 우측 지적산 들머리로 이동하는 두규형.
825번 도로(남해환경 진입로) 지적산 방향 들머리 전경.
지적산 들머리의 '영산기맥 트래킹길' 안내판.
목포시에서 만들어 놓은 영산기맥 트레킹길은 이곳 지적산 들머리에서 영산기맥의 종점인 다순금마을까지 총 17km를 7개 소구간으로 나누어 개설해 놓은 걷기길이다. 우리가 걷는 영산기맥과 일부 다른 곳(개인 사유지나 통행이 곤란한 지점 등)도 있지만 어차피 목포시내 구간은 기존의 기맥 능선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이곳부터는 영산기맥 트레킹길을 따르는 게 무난해 보인다.
지적산 들머리로 들어서면 나오는 'ㅏ'자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따라도 이내 다시 만나지만, 좌측 9시 방향의 정규 등로를 두고 직진의 수레길을 따르다가,
파묘의 흔적이 남아있는 묘지터를 지나 숲길로 들어서면,
이내 정규 지적산 등로에 접속하여 좌측 가드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지적산 오름길을 오르면,
활짝 핀 진달래가 반기고 커다란 바위들도 듬성듬성한 자리한 능선 오름길로 접어드는데,
우측으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삼향읍 유교리(柳橋里) 들판을 가로질러 나가고, 그 뒤로 초유선사 유적지가 있는 봉수산과 지나온 영산기맥의 승달산과 대봉산이 가늠되고,
까다롭지 않은 암릉능선을 잠시 더 오르면,
좌후방으로는 전남도청이 자리한 남악신도시의 뒷산인 오룡산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신기저수지지와 그 곁의 국립목포병원이 발아래로 내려다 보이며 멀리로 남악신도시와 영산강이 조망된다.
등로 우측의 낙엽을 덮고 있는 묘지를 지나 오르면,
No77 송전탑과 우측 산양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오르게 되고,
우전방 삼향읍 유교리의 목포IC 방향.
좌후방으로는 새벽에 지나온 추자재와 채석장이 가늠되며,
왁자하게 들려오는 백두들의 목소리에 힘을 내어 오르니,
위치표시목과 삼각점을 차지하고 백두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지적산(芝積山) 정상에 도착한다.
<지적산(芝積山, 187m)>
전남 목포시 대양동과 석현동에 걸쳐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위치표시목(지적산시점 0.5km, 유달산종점 16.5km)과 표식이 없는 삼각점이 있다. 지적산의 이름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환여승람에 지적산이 지족산(芝足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급경사로 이뤄진 산으로 그 모양이 지초(芝草)를 쌓아놓은 듯이 생겼다 하여 지적산(芝積山)이라 한다.
좌측아래로는 석현마을이 보이고 전남도청이 들어서있는 남악신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희미하게나마 영산강 하구언이 보이며, 정면 남서쪽 유달산 방향으로는 목포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우측 서북쪽으로는 서해바다와 초유선사 유적지가 있는 봉수산이 조망되는 등 사방으로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지적산 정상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백두들.
지적산 정상의 360º 파노라마.
동남쪽 전남도청이 자리한 남악신도시 방향.
남서쪽 석현마을과 하당신도시 그리고 유달산 방향의 목포시가지 조망.
<지적산 정상에서 바라본 석현(石峴)마을 모습>
석현 현대APT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독갓재의 고인돌이 언덕에서 굽어 본다고 해서 석현리라 했다 한다. 이곳이 초의대사(草衣大師)의 출생지라는 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에 생가를 복원하고 성역화하였다. 지리적으로 여자가 성하는 지형이어서 아들들은 외지로 나가고 데릴사위들이 마을을 지킨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영산기맥의 종착지인 다순금 마을이 있는 유달산 방향.
서북쪽 바다 건너 압해도(押海島) 방향으로 보이는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와 삼향읍 왕산리 봉수산(熢燧山) 방향.
북쪽 승달산과 대봉산 방향.
구름이 끼여 쌀쌀함을 느낀 백두들이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야 할 유달산을 배경으로 지적산 인증을 남긴다,
지적산을 뒤로하고 데크목 계단을 따라 암릉 능선을 내려서면,
시누대숲으로 이어진 등로를 지나게 되고,
노간주나무와 곰솔나무감 듬성듬성한 158봉을 지나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면,
평상과 운동시설이 있는 사거리 안부인 서당골고개(66m)를 지나게 되고,
<서당골고개(66m)>
전남 목포시 대양동 서당골과 석현동 석헌마들 사이의 고개이다. 사거리 안부인 고개에는 평상과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편히 쉬어갈 수 있고, 이정표에는 우측이 목포중앙고등학교, 좌측이 석현마을 방향이고, 직진의 삼향동사무소 방향이 기맥길이다.
우측에 편백나무 조림지가 있는 오름길을 오르면,
좌측 현대아파트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서,
<현대 아파트 갈림길>
지금은 석현동으로 바뀌 옛 신지동(新芝洞) 내려가는 길로서 임성리 역 앞, 임성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지초(芝草)가 흔한 곳이었다 한다. 국립목포병원 쪽 마을을 작은신지마을이라 한다.
산불초소가 있는 지적산 웅지봉(144.1m)을 지나게 되고,
웅지봉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승달산 방향.
이내 넓은 공터에 송전탑과 운동시설, 벤치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봉을 지나서,
가야 할 대뱍산 방향.
살짝 당겨본 압해도 방향.
살짝 당겨본 봉수산과 그 아래의 초의선사 유적지.
<초의선사 유적지가 있는 봉수산>
삼향읍 왕산리 봉수산 아래 초의선사 탄생지에는 초의선사기념관 등이 세워져 있는데, 초의(草衣, 1786~1866) 선사는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초의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 관련 서적이자 중국의 육우가 쓴 『다경』에 견줄 만한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한 장본인이다. 초의 선사는 학문에 두루 통달했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나이 24세 때 그보다 24세 더 많던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 정약용을 만나 시문과 서화, 그리고 차를 매개로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다산은 그의 시에서 초의를 평하길 '남루한 옷 민둥머리에 중의 껍데기를 벗기니 유생의 뼈가 드러난다'라고 하여 학식의 높음을 칭송했다.
1815년에 한양으로 올라간 초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 자하(紫霞) 신위(申緯),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丁學淵)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돈독한 교분을 쌓고 유(儒)•불(佛)•선(禪)을 논하며 사상적 기반을 넓혔다. 그는 이러한 교유 속에서 자연스레 차와 가까이했다.
초의는 1824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해남 대둔산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 기거하면서 수행과 집필에 몰두했다. 1828년에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청(淸)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엮은 『만보전서(萬寶全書)』의 「다경채요(茶經採要)」를 베껴 『다신전(茶神傳)』을 초록(抄錄)해 냈다. 초의가 제다와 차 생활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을 낸 이유는 승가의 차 풍습을 이어나가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도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나아가 초의는 『동다송』을 통해 차나무의 생태에서부터 차 만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가 쌓아온 풍부한 지식을 시의 형식으로 담아냈다. 이 책에서 그는 특히 중국과 우리의 차 만드는 법을 비교하며 우리의 차가 지닌 우수성에 대해 노래했다. 『동다송』과 『다신전』 두 저서로 우리 차 문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초의 선사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꼽힌다.
진달래가 화려하게 장식된 능선길을 따르면,
우.후방 서해안고속도로 추자재 방향.
우측 검문소와 월산교회 방향 갈림길 이정표와 벤치가 있는 헬기장 봉우리(117m)에 도착하는데,
기맥길은 직진의 삼향동 주민센터 방향이다.
서쪽 압해도 방향.
헬기장봉에서 직진의 삼향동 주민센터 방향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서,
좌측 목포도시가스 절개지 울타리를 따라 내려가다가,
'Y'자 갈림길에서 좌측의 능선으로 가도 되지만, 편한 우측 사면의 편백숲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고,
1번 국도 절개지 상단 수로에서 좌측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지적산 등산로 안내판이 있는 1번 국도 지적산 날머리에 도착하여 육교로 올라 1번 국도를 건너게 된다.
육교로 올라 1번 국도를 건너고,
육교 위에서 바라본 남쪽 석현동과 대박산(우) 들머리 방향.
육교에서 좌측으로 내려서서 중앙직업전문학교 입구로 들어서며 진입로를 건너서,
영산기맥 트래킹길 삼향동주민센터 이정표가 있는 대박산 들머리로 들어서서 사면으로 이어진 편백숲길을 따르다가,
유달산종점이 14.1km 남았다는 표시목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NO83 송전탑을 지나게 되고,
밋밋한 능선 안부를 지나 한번 더 올라 능선 우측 밭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하면,
좌측에 녹색 인조메트로 덮인 묘지가 눈길을 끄는 밋밋한 안부를 지나,
동백의 붉은 선혈이 낭자한 오름길을 오르고,
시누대숲으로 이어진 제법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
시누대숲으로 둘러싸인 묘지의 향기가 천리를 간다 하여 천리량이라고도 불리는 서향(瑞香)의 짙은 향기에 취해도 보고,
잠시 더 오름길을 올라,
통신탑과 산불감시카메라 그리고 유달산종점이 13.4km 남았다는 표시목이 있는 대박산 정상에 오르니,
먼저 오른 백두들이 영산기맥은 나몰라라 하며 봄나물 채취에 여념이 없다.
<대박산(大朴山, 155.4m)>
전남 목포시 대양동, 석현동, 상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천박산이라고도 부른다. 삼향동사무소 뒤편에 있는 산으로 동쪽으로 조금 전에 지나온 지적산과 남쪽으로는 가야 할 양을산이 보이며 북쪽에는 대박마을과 월산마을이 있다. 대박산이란 이름은 산골마을 초가지붕 위에 열려있는 박이 크게 보여 대박산으로 불리게 된 대박산마을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무안현조에 따르면 옛 이름이 함박산(含朴山)이었으나, 언제부터 대박산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대박산 정상에는 펜스로 사방이 둘러쳐진 무인산불감시 카메라탑과 앞쪽에 울타리가 에워싼 이동통신중계탑과 폐창고 건물이 있는데, 대박산을 내려서는 길은 철망 울타리 어느 쪽으로 가도 통신탑 진입도로로 이어지게 된다.
남쪽 가야 할 양을산 방향.
동쪽 지나온 지적산 방향.
대박산 전경.
가야 할 유달산 방향.
대박산 정상 인증을 한 손점장님, 대박 나실거구먼유!
철망 울타리 어느 쪽으로 가도 되지만, 울타리 우측으로 진행해야 대박산 안내판을 볼 수 있는데 누군가가 울타리 좌측으로 앞장서서 내려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뒤따라 내려서면,
등로가 잡풀과 덩굴로 덮여 있지만 진행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이 내려설 수 있고,
이내 이동통신탑 진입로에 내려서서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우측의 목포시 재활용 제2선별장을 지나고,
'T자' 갈림길에서 우측 대양동 목포시 위생매립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두고 좌틀하여 내려가는 도로를 따르면,
따르는 도로 앞쪽 멀리로 가야 할 유달산이 가늠되고,
좌측 도로변에 위치표시목이 있는 곳에서 따르던 도로를 두고 좌측 희미한 숲길로 들어서,
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이어진 숲길을 내려가,
다시 4차선의 포장도로를 건너는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양을산 입구 숲길로 들어선다.
양을산 입구 이정표(67m)에서 기맥길은 양을산 산림욕장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서 좌측 사면 방향 갈림길을 지나 짧은 계단길을 오르면 등로 한가운데에 박힌 삼각점을 지나게 되고,
등로 우측 아래의 레미콘공장과 멀리로 보이는 압해대교를 조망하며 절개지 상단 목책 등로를 따르다가,
<압해대교>
전라남도 목포와 압해도를 연결하는 총길이 3,563m의 다리로 2008년에 완공되었고, 총사업비 2,100억 원이 소요되었다. 국도 2호선으로 중심부는 케이블로 경사지게 교량을 연결하는 닐센아치교 형태로 설계하여 조형미를 살렸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목포에 있는 신안군청과 유관기관이 압해도로 이전하고, 목포 북항에서 운항하던 여객선이 압해면 송공리 연안항에서 팔금도 고산 선착장과 암태도 오도 선착장 방면으로 운항하게 됨으로써 운항시간이 1시간 10분 이상 단축되었다.
좌측 목책이 알루미늄으로 바뀐 능선 갈림길에서 직진의 에덴추모원 방향 등로를 두고 좌틀하여 진행하면,
넓은 능선 공터에 팔각정자와 다양한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비녀산(양을산) 유래 안내판이 있는 쉼터를 지난다.
<비녀산(양을산, 陽乙山)의 유래>
현재 양을산으로 불러지고 있는 해발 151m 높이의 이 산은 본래에는 비녀산으로 불러져왔다고 한다. 비녀산이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불리어지게 되었는지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정상이 유난히도 일자형(一字形)이다보니 흡사 비녀(簪) 형상(形象)이고, 산기슭에 있는 바위가 여인네의 비녀쪽지를 닮았다고 하여 비녀산으로 불려 왔다. 양을산이라 바뀌어 불려진 것은 등산 및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산 밑자락 양을촌 마을을 시발점으로 오르다 보니 차츰 양을산으로 불러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목포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자료)
육각정자를 지난 갈림길에서 직진의 정상·전망대 1500m 방향 능선길로 올라,
널찍한 공터에 벤치가 있는 110봉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다가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면,
110봉을 좌회하여 오는 등로와 합류하고,
소나무 가로수가 있는 신작로인 듯 능선으로 뻗어있는 등로를 따르면,
'양을산 섬너릿길' 이정표에서 직진의 양을산 정상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직진으로 이어지는 등로 좌측의 능선 봉우리로 오르면 사각 정자가 자리한 비녀봉(121m)에 올라 우틀하여 진행하는데,
사각정자 기둥에는 이 능선길이 언젠가 걷게 될 '서해랑길'임을 알리는 작은 표식이 걸려있고,
이내 만나는 세갈레 갈림길에서 좌측 사면 우회로와 우측 사면 용해주민센터 방향 등로를 두고,
가운데 꽃무릇사거리 방향 능선 등로를 따르면,
우측 용해주민센터 방향 능선 갈림봉에 오르게 되는데,
좌측으로 내려서서 좌회하여 오는 넓은 등로와 만나 생태복원용 출입금지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넓은 등로를 따르다가,
안부 사거리인 꽃무릇사거리를 지나게 된다.
<꽃무릇사거리>
목포시 상동과 용해동의 경계에 있는 안부 고개지점으로, 좌측은 상동 목포성신고등학교로 내려서는 길이고, 우측은 용해동 빛과소금교회로 가는 길이며, 이곳 안부 사거리 아래로는 양을산터널이 통과하고 있다. 등로 주변에는 생태복원지와 꽃무릇식재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꽃무릇사거리 이정표.
석산화(꽃무릇) 안내판.
<석산화(石蒜花)
석산화는 여름에 잎이 다 말라죽고 난 후 추분 전후 9월경에 꽃이 핀다. 잎이 나오면 꽃이 지고 꽃대가 나오면 잎이 말라버리는 운명 탓에 슬픈 연인의 꽃으로 불린다. 꽃은 피우지만 열매는 맺지 못하는 꽃 이루지 못한 사랑에 바쳐지는 헌화이기도 하며 독이 있어 '사인화, 유령화'로도 불리고 있다.
꽃무릇사거리를 지나 등로 우측에 육각정자 쉼터에서 직진의 능선으로 들어서서 밋밋한 봉우리를 넘고,
운동시설과 사각정자 쉼터가 있는 안부를 지나 직진 원목 계단길로 들어서서 오름길을 따르면,
다시 안부 사거리를 지나게 되는데, 좌측은 꿈나무유치원으로 이어지고 우측은 청산푸른아파트 방향으로 양을산을 지난 기맥길이 지나는 경찰서사거리로 바로 내려설 수도 있겠지만,
직진의 편백숲과 통나무계단길을 차래로 지나 오르면,
양을산 정상부를 차지한 KT중계소 진입로에 올라서서 좌측 도로를 따라 양을산 정상으로 오른다.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져 오르는 지점에서 좌측 직진 KT중계소 담장 방향으로 올라도 되지만 그냥 도로를 따라 오르면,
양을산 정상부를 차지한 KT 중계소 정문 앞에서 우측 담장을 따라 들어가면,
1961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류권 산란방식 무선통신의 효시인 목포~제주 간 무선전화 시설을 설치 운용하였다가, 1976년 해저케이블에 그 소임을 넘겨주었다는 '양을산 스켓타 통신시설터' 표석이 설치되어 있고,
목포시가지와 영산기맥의 종착지가 있는 유달산 방향.
<양을산 정상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목포는 무안반도 서남쪽 끝에 위치하여 육지부와 도서부를 연결하는 관문에 해당한다. 북동쪽은 무안군과 접하고, 북서쪽은 신안군과 접하며, 남동쪽은 영암군과 접하고, 남서쪽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해남군과 접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북동부 무안군과의 접경을 제외하고는 시 경계가 모두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목포라는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목포 부근 해안의 도서지방에 수목(樹木)이 울창하여 신시(薪柴, 장작과 섶나무)를 운반하였기 때문에 '나무의 고장', '나무의 포구'에서 목포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는 견해, 목포 부근이 옛부터 목화의 주산지였기 때문에 지명이 유래하였다는 견해, 서해로부터 깊게 만입되어 들어온 영산강의 어구, 즉 목·목덜미에 해당되는 곳이어서 '목덜미의 포구'라는 의미로 목포 또는 목개로 불려진 것이 한자어로 목포(木浦)로 표기되었다는 주장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두 번째의 주장은 목화의 생산이 후대의 일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른 시기부터 사서(史書)에 보이는 목포는 나주의 남쪽 영산강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목포를 목포로 표기한 최초의 기록은 것은 조선 세종대 목포만호진이 설치되면서부터이다. 결국 현재의 목포를 목포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초이지만, 그 유래는 단정 짓기 어려운 것이 현재의 실정이라 하겠다.
KT중계소 담장길을 잠시 더 따르면 넓은 광장에 육각정자(양을정)가 자리한 양을산(陽乙山)에 도착한다.
<양을산/비녀산/장계산(陽乙山, 156m)>
전남 목포시 상동과 용해동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정상에는 KT중계소와 양을정이란 육각정이 있으며 목포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양을산은 본래의 이름이 비녀산이라고 한다. 비녀산의 지명이 언제부터 불리게 되었는지의 유래를 알 수 없지만, 산의 정상이 유난히도 일자형(一字形)이다 보니 흡사 비녀(簪, 비녀 잠) 형상이고, 산기슭에 있는 바위가 여인네의 비녀 쪽지를 닮았다고 하여 비녀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양을산으로 바뀌게 불린 것은 등산 및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산 밑자락 양을촌 마을을 시발점으로 오르다보니 차츰 양을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설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군량 창고로 노적을 두고 밤에도 불을 켜서 이곳을 지키고 있어, 멀리서 보면 이 산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 양을산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산 꼭대기에는 통신유적지인 KT 목포지점 송신탑이 있고, 양을로가 있어 유달산과 목포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양을산 북동사면에 있는 제1수원지 주변에는 양을산 산림욕장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건강, 산림휴양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육각정자 위에 올라 휴식하는 백두들.
양을산 정상에서 서쪽 방향 능선이 기맥능선이지만, 등산로는 남동쪽 방향 능선으로 이어지므로 우측 사면 숲으로 우회하여 서쪽 방향 능선으로 진행하거나, 왔던 길을 되짚어 KT통신소 진입도로를 따라 내려서야 하는데,
일부는 길없는 사면으로 우회하여 가고,
우리는 발길을 되돌려 KT통신소 진입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따르던 도로를 두고 좌측 체육공원으로 들어서고,
공터에서 직진의 목포대 목포캠퍼스 방향 등로를 두고 우측 팔각정자가 있는 능선 등로로 들어서서,
우측 길상사 방향 갈림길을 지나 암봉을 넘어,
암봉 바위 사이에 설치된 삼각점.
서쪽 방향으로 이어진 뚜렷한 능선길로 내려가면,
등로는 어지러운 텃밭 사이로 이어지며 앞쪽으로 가야 할 옥녀봉(유방산)과 유달산이 가늠되고,
좌측 주택단지와 우측 용해3단지APT 사이로 내려서며 바로 우측 용해3단지APT로 진입하여,
용해3단지 아파트를 통과하여 나오면,
양을산 정상의 KT통신소와 길상사 진입도로가 지나는 용해지하차도 상부 회전교차로가 나오고,
좌틀하여 용해지하차도 우측 도로를 따라 경찰서사거리로 내려간다.
경찰서사거리에서 원 기맥길은 우측으로 약간 이동하여 옛 목포경찰서 맞은편 용해2단지 아파트로 들어서서 맥길을 이어가야 하나, 지금은 경찰서사거리에서 직진의 마리아회고등학교 방향으로 영산기맥 트레킹길을 설정하여 길 안내를 하고 있다.
경찰서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서 함께하던 백두들은 직진의 영산기맥 트레킹길을 따르게 하고, 나는 호기심을 해결하려 우틀하여 50여 미터 진행하다가 용해동 경로당이 있는 좌측 골목으로 들어서서,
용해2단지 아파트를 통과하여 뒷문으로 나가,
좌측 텃밭 가장자리로 진행해야 하는데 울타리가 처진 상태라 하는수 없이 계속 도로를 따라,
목포선린교회 앞으로 진행하여 오르면,
길은 축대와 울타리로 막혀 있지만 낮은 축대 위로 올라 구멍 뚫린 철망울타리를 통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돌아본 철망 울타리와 양을산 방향.
울타리를 넘어 편백나무 조림지로 오르자,
상징과 '도강령(道鋼令)'이라 새겨진 비석을 지나게 되는데, 비석이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한 내력을 알 길이 없고,
<도강령(道鋼令)>
사람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근본 도리로 봉친(奉親), 경사(敬師), 충국(忠國), 제장(悌長), 신우(愼友), 신심(信心)을 말한다.
도강령 비석 뒷면.
편백나무 조림지와 신우대숲을 지나 내려서면,
좌측에 목포마리아회고교가 있고 우측이 야구장인 안부를 지나게 되고,
안부를 지나 따르던 도로가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지점의 좌측 목책을 돌아 능선 숲길로 오르면,
유달산종점이 8.1km 남았다는 표지석을 지나 편백숲 능선길을 따르게 되고,
둥그런 언덕을 지나 내려서면,
옥녀봉 설명판이 세워진 안부 사거리를 지나게 된다.
안부 사거리 이정표.
옥녀봉 안내판.
<옥녀봉/유방산/수리봉(玉女峯, 97m)>
옥녀봉은 목포시청 뒤에 있는 해발 97m의 산으로 속칭 유방산이라고도 한다. 백련동에서 바라보면 마치 두 봉우리가 여인의 젖가슴처럼 보여서 생겨난 이름인 듯하다. 그러나 연산동 현대아파트 뒤쪽에 있는 풍천임씨(豊川任氏) 묘비에 「玉女峯大洞右麓寅坐(옥녀봉대동우록인좌)」라고 새겨져 있는데, 대동(大洞)이란 지명은 현재의 연산주공아파트 부근을 가리키고 있으며 옥녀봉의 오른쪽 기슭임을 나타내고 있어 유방산의 본디 이름은 옥녀봉임을 알 수 있다. 또 수리봉이라고도 했는데 독수리가 날개를 쫙 펴고 하늘로 나는 모양에서 생겨난 이름이라 한다. 옥녀봉의 남쪽 기슭에는 목포시청과 KBS방송국, 마리아회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 기슭인 백련마을과 관해들발은 용해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어 많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가드로프 나무기둥에 이 등로가 '서해랑길'임을 알리는 작은 표시가 있는 오름길을 오르면,
삼각점과 각종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옥녀1봉/유방1봉'을 지나게 되고,
<옥녀1봉/유방1봉(97m)>
전남 목포시 용당동과 연산동 경계에 있는 유방산(97)은 옥녀봉이라고도 하며, 두 개의 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여인의 가슴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성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서 최근에는 옥녀봉이라고 고쳐 부른다고 한다.
옥녀1봉에서 바라본 우측 옥녀2봉과 좌측 멀리 유달산 조망.
옥녀봉에서 침목 계단길로 내려서며 옥녀2봉을 향하면,
둥그런 능선 안부 나무둥치에 '따부재(85m)' 코팅지가 걸려있고,
<따부재(80m)>
따부재는 전남 목포시 용당동 목포시청과 목포시 연산동 백련공원 사이의 고개지점으로, 옛지도는 물론 인터넷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데, 그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유달산종점이 7.6km 남았다는 옥녀봉 표지목을 지나 다시 오르면,
삼각점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옥녀2봉에 올라서는데, 양을산 내림길에서 헤어졌던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옥녀2봉/유방2봉(99m)>
옥녀1봉/유방1봉에서 3분 정도 거리에 유방2봉이 자리하는데,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표식이 없는 삼각점이 있다.
하기좋은 말로 방을 빼준다며 길을 떠나는 백두들.
나의 도착과 동시에 길을 떠나는 백두들을 쫓아 옥녀봉을 내려서다가 좌측 나뭇가지에 걸린 표지기에 이끌려 좌틀하여 편백숲 능선길로 진행하다가,
따르는 등로가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측 사면으로 휘어져 내려가고,
등로 좌측의 작은 텃밭들을 지나 근화아파트와 색동빌라 사이로 내려서면,
경찰서사거리에서 직진의 영산기맥 트레일을 따라간 분들이 막걸리병을 비우며 기다리고 있다.
근화아파트를 나와 우틀하여 도로를 따르다가,
도로 건너편으로 목포농협 산정지점이 보이는 지점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목포농협 산정지점과 PC방 건물 사이 도로로 올라,
신안아파트 가운데를 통과하는 도로를 따르면,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지어진 빌라단지 도로를 통과하게 되고,
우리세향교회 직전 ‘Y자’ 갈림길에서,
우측 길이 마루금에 더 가깝지만 도로 끝에 블록 담으로 막혀있다 하여 좌측 아래로 이어지는 도를 따르다가,
돌아본 우.후방 우리세향교회 뒤쪽 마루금 방향.
담벼락이 막아선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돌아 올라,
비포장 사면 도로와 작은 텃밭들을 지나 오르면,
녹색의 보리와 마늘쯤이 심긴 텃밭이 자리한 봉우리를 지나게 되는데,
봉우리 정상부 텃밭 건너편은 4차선의 도로절개지 펜스가 설치되어 있고,
텃밭 봉우리 철망 펜스를 따라 좌측으로 내려서다 보면 앞쪽 아래로 도로를 건너는 육교가 내려다 보이며,
우측으로는 잘라낸 절개지의 높이가 어마어마해 보이며 그 위로 가야 할 산정산쯤이 건너다 보이고,
도로(연산로)변 보도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조금 더 진행하여 도로를 건너는 육교로 올라 도로를 건넌다.
좌측 센트럴카운티 아파트 단지 방향.
육교를 건너 골목길을 따르면 앞쪽으로 가야 할 산정산이 보이고,
골목길이 좌측 아래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우틀하여 좁은 골목길로 오르면,
시멘트포장도로에 올라서게 되는데 좌측으로 보면 산정산 들머리를 알리는 이정목이 보이고,
유달산 종점이 6.1km 남았다는 표시목과 산정산 등산로 이정표가 있는 산정산 들머리로 들어선다.
노오란 개나리의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산정산 들머리로 들어서,
급하지 않은 통나무 계단길을 오르면,
좌측 텃밭지대 아래로 목포시 연산동과 목포일반산업단지가 내려다 보이더니,
이내 유달산 종점이 6km 남았다는 표시목과 벤치가 있는 산정산/석산(73.9m) 정상부를 지나게 되고,
<산정산/석산/독산(山亭山/石山, 74m)>
목포시 산정동과 연산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죽산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산 자락에 중앙하이츠와 일신아파트가 위치해 있다. 이 산의 남쪽 채석장은 옛날 목포형무소의 수감자들이 담 쌓는 경치석과 흙(뻘)다지는 잡석 등의 석재를 생산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돌을 흔히 '형무소 돌'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돌을 떨어내는 산이라 하여 독산(돌산)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이금은 이곳에 산정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건강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이 산의 서쪽에는 목포교도소 합장비가 있는데, 이 비의 뒷면에 적혀진 합장시기가 태정6년(1917년), 태정9년(1920년), 소화2년(1927년), 소화8년(1933년)이라고 적혀 있어, 여기 묻혀 있는 원혼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시대에 억울하게 복역하였거나 항일독립운동 등의 죄명으로 고생하던 분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정산 정상에서 바로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야 하나 길이 없으므로, 바로 앞의 팔각정까지 진행하여 급좌틀하여 아래로 내려간다.
좌측 중앙하이츠 아파트 너머로 보이는 유달산 조망.
기맥길은 팔각정자에서 급좌틀하여 내려가야 하는데, 직진의 운동기구와 벤치아 있는 넓은 등로를 따르면 과거에는 바다였던 매립지 위를 지나 유달산으로 진행하게 된다. 영산기맥 마루금을 논할 때 호남정맥 순창새재 위 분기봉에서 갈라져 이곳까지는 아무 이견이 없으나 이곳 산정산에서부터는 여러 이견과 설이 존재한다.
<목포시 옛 지도>
목포의 옛 지도를 보면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현대식 측량술에 근거한 지도가 1919년 일제에 의해 발행된 지도인데, 현재의 지형도와 비교해 보면 반도형태의 아래 위쪽 대부분이 예전에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산꾼들이 마루금을 잇는 시각으로 보자면 대박산과 양을산을 넘고, 목포시청 뒷산 99봉(일명 옥녀봉)에서 내려와 목포농협(산정지점) 앞 도로를 건너고, 중앙하이츠아파트 뒷산인 산정산(73.9m)까지는 마루금을 따르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이 산정산에서 유달산을 직선으로 향하면 예전의 바다 위를 지나는 꼴이 된다. 현재는 도심지가 형성되어 어디가 마루금인지 눈으로는 찾을 수도 없지만 옛 지도를 보면 현재 대성초등학교 일대는 바다였고, 남동쪽에 대형 배수지가 묻혀있는 59.4봉을 지나 카톨릭병원· 목포여고· 북교초등학교를 잇는 선이 마루금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사정상 정확하게 마루금을 밟을 수는 없는 일이고, 다만 그렇게 알고 지나갈 일이다. 또한 옛 지도는 목포 앞바다의 삼학도도 섬 그대로 표시하고 있다.(펌)
살짝 당겨본 유달산 모습.
산정산 팔각정자에서 급좌틀하여 중앙하이츠 아파트를 우측으로 보며 내려서면,
운동시설과 테이블이 있는 능선길을 지나 목포형무소 합장비를 지나게 되고,
야자메트가 깔린 능선길을 따라 우측 중앙하이츠 아파트와 좌측 창조교회 사이의 도로로 내려서서,
잠시 도로를 따르다가 좌측 창조교회 주차장 방향으로 좌틀하면,
앞쪽으로 영산기맥 봉우리이지만 배수지가 차지하고 있어서 도로를 따라 우회하게 되는 59.4봉이 건너다 보이고,
도로를 따라 양을로에 접속하여 좌.우 어느 쪽의 횡단보도를 건너도 되지만,
우측의 횡단보도를 건너 다시 좌측으로 진행하다가,
대성동 LH아파트 버스정류소를 지나 우측 '양을로 68번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산정동 마파지' 표지판이 세워진 원두막 쉼터를 지나게 되고,
<마파지(馬破地)>
목포시 대성동에서 옛 형무소로 돌아가는 길목을 마파지라 했다. 옛날에 말구루마(수레)가 겨울에 미끄러져서 부서진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일을 계기로 '말 마(馬)'자, '부술 파(破)'자를 써서 그 근방을 마파지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이곳은 겨울철에 서북풍이 마주치는 곳이기에 목포에서는 추운 곳 중에 하나이고 바람이 마주친다는 뜻의 '매서운 바람을 맞받아 치는 곳', '맞바람 부는 곳' 등의 뜻으로 마파지라 불렸다 는 예기도 있고, '삼별초들이 항쟁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말과 함께 전사한 곳'이라는 설도 있다.
좌틀하여 올라야 하는 59.4봉은 봉우리 정상부에 배수가 설치되어 진입이 어렵다 하므로 우회하는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우전방으로 보이는 산정동 성당을 향해 59.4봉을 우회하는 도로를 따르면,
좌측 59.4봉을 올랐다면 내려왔을 도로와 합류하는 지점을 지나고,
가톨릭목포성지 앞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 위쪽으로 보이는 산정동성당 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측의 신정동 성당 입구를 지나고,
좌측 아래로 목포여자고동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도로를 따라 유달산 방향으로 진행하여,
목포여고 앞 교차로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농협 대성지점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 농협 산정동지점 앞을 통과하며 우틀하여 골목길로 들어서고,
뒤돌아 본 목포여고 교차로 전경.
도로 좌측 목포정명여고 쪽에는 '목포 정명여고 4.8 만세운동'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서 바로 우틀하여야 하나 앞서 가는 사람을 무심코 따르다 보니 우측의 이난영 소공원 탐방을 놓친다.
목포 정명여학교 4.8 만세운동 안내판.
<목포 정명여학교 4.8 만세운동>
1903년 설립된 호남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목포정명여고는 1919년 전국적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여 4월 8일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일대에서 여학생들이 의로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난영 생가터의 흉상>
<이난영 선생 생가터>
노래의 여왕 이난영 선생은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이남순(李南順)의 장녀로 태어났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되기 전 나와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열여섯 살 되던 해였다. 이후 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출신 문일석 작사인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된 것이 드디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恨)이 서린 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좌틀하여 '이난영 생가터'로 가는 갈림길에서 무심코 정면으로 보이는 유달산만 보며 걷는 바람에 '목포의 눈물' 노랫말을 되새겨보는 기회를 놓치고 직진의 도로를 따르다가, 장원슈퍼와 용해생활용품 앞 사거리에서 2시 방향으로 우틀하여 진행하면,
북교초교 앞 사거리 갈림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북교초교 좌측 도로로 진행하게 되는데,
북교초등학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다녔던 학교로 정문에는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 출신학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북교초교 담장길을 따라 후문쯤을 지나면,
삼거리 도로로 나서게 되는데, 도로 건너편 믿음의 교회와 달산쉼터 사이 계단길로 들어서서,
앞쪽으로 보이는 유달산 일주도로로 진행하는데,
좌전방으로는 올라야 할 유달산이 꾀나 높아 보이고,
유달산 일주도로로 올라서 좌측으로 50여 미터쯤 도로를 따르다가,
돌아본 양을산과 입암산 방향.
우측 돌계단을 오르니,
영산기맥은 좌틀하여 삼등바위 방향으로 진행하라는 이정표 앞에서 쉼을 하던 백두들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방을 빼주겠다며 일어나 유달산 오름길로 떠나고, 나는 우측의 팔각정자인 경관루(景觀樓)에 올라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우측 유달산 보해동산의 팔각정자인 경관루 전경.
경관루를 뒤로하고 이정표의 삼등바위 방향 등로로 들어서서 오르다가,
보해동산 능선 직전에서 바로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널찍한 등로를 따르면,
조각공원으로 들어서서 여러 조각작품들을 둘러봐도 좋겠지만 그럴 여유는 없는지라 바로 우틀하여 오르다가,
보해동산 능선으로 올라 이정표의 이등바위 방향 나무계단 오름길을 따르고,
유달산 케이블카 기둥 옆으로 이어진 가팔라진 돌계단길도 올라,
'T'자 갈림길에서 영산기맥 트레일은 우측 어민동산 방향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좌측 소요정 방향으로 들어서서,
사면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올라서면,
동북쪽 양을산 방향의 지나온 영산기맥 봉우리들이 조망되고,
동쪽 영산강 하구언 방향이 옅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멀리까지 조망된다.
유달산 암릉 동쪽 사면을 따라 소요정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다가 우틀하여 암릉 안부를 향해 오르고,
유달산 삼등봉과 이등봉 사이의 암릉 안부에 도착하여 북측 삼등봉을 다녀오기로 하고 암릉 계단길을 올라,
거인의 공깃돌 같은 삼등바위에 도착하니 가야 할 이등바위와 일등바위가 모두 조망된다.
<유달산 삼등봉/삼등바위>
고도는 이등봉과 비슷하지만 순서상으로 세번째여서 삼등봉(삼등바위)이란 이름을 얻었다. 장수바위 위편에 있는 봉우리로, 여기에 올라서면 멀리 일등바위 정상이 보이고, 다음 이등바위 정상에 있는 수도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세 번째 봉우리인 삼등바위. 이곳에서는 압해도와 북항일대, 양을산 부근, 그리고 멀리 무안 도대 부근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고하도와 달리도 사이를 통과하여 목포항에 들어오는 여객선들과 바다에 점점이 박혀 있는 작은 배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들이 어우러져 다도해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이등바위와 함께 이어져 있기 때문에 삼등바위의 중턱을 돌아가는 일주로를 따라 가면 다시 이등바위의 입구에 이른다.
남서쪽 고하도와 목포신항 방향.
서쪽 아래의 목포해양대 앞바다에 길게 누워있는 고하도를 잇는 목포대교 방향.
<유달산 정상에서 바라본 목포해양대학교의 전경>
목포해양대학교는 목포시 대반동에 1950년 4월 5일 항해과 15명 전문대학으로 개교, 1994년 대학교로 승격, 현재 2500명으로 장보고의 기상을 이어받아 해양분야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목포의 꿈과 희망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두 척의 유달호(3644톤급)와 새누리호(4701톤급)를 보유 실무교육을 담당한다. 목포해양대학교 부근에 '해양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뒤로 고하도로 이어지는 목포대교의 교각이 보인다.
서북쪽 율도와 목포북항 방향.
북동쪽 유방산과 지나온 영산기맥의 연봉들 조망.
동쪽 입암산 방향의 목포시가지와 영산강 조망,
지금은 육지의 산으로 보이는 삼학도 방향.
삼등봉과 이등봉이 사이의 안부로 되돌아 내려서서 이등봉으로 오르는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면,
이등봉 정상부는 여러 명이 서 있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널찍하고,
우측 목포해양대와 목포대교 방향.
이등봉의 이등바위가 있는 남쪽으로 조금 가면,
이등봉의 수도바위(똥바위)를 배경으로.
<이등봉 북측에 자리한 수도바위(똥바위)>
이등바위의 정상부는 제법 널따랗고 평평하다. 사람들은 신선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곳에는 동그란 바위가 얹혀 있는데 수도정진 하는 수도자의 머리 모습을 닮았다 하여 ‘수도바위’ 라고 부르며, 애칭으로 ‘똥바위’ 라고도 한다. 둘다 걸맞는 이름이다. 수행정진하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마당바위에서 봐야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꼭 똥 덩어리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신들이 연회를 벌이면, 금반 위에 온갖 산해진미와 주지육림을 쌓아놓고 옥로주와 먹구슬나무주를 금복개로 떠 마시면서 즐기고 자시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어느 신이 갑자기 대변이 마렵자 다급히 앉아서 힘주어 노란 황금빛 똥 한 덩어리를 싸 놓은게 아닐까. 온갖 진미란 진미는 다 맛보고 사는 신이 싸놓은 똥이기에 누런 황금 빛깔의 찰진 똥 덩어리가 아니었겠는가!
유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여서 이등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판이 있는 이등바위가 나온다.
<유달산 이등봉/이등바위>
유달산에서 두 번째 높은 봉우리라 하여 이등봉이라고 한다. 일등바위에서 심판 받은 영혼이 이 바위로 이동하여 잠시 대기한다 하여 ‘이동바위’ 라고도 부른다. 이등봉은 동그란 탑처럼 보이는데 시내 쪽에서 바라보면 마부가 말을 끄는 모습이다. 아마도 영혼을 실어 나르는 마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어떤 사람들은 ‘독승바위 ’라고도 부른다. 세속의 번뇌를 씻는 마음으로 이등바위를 만난다. 이등바위는 일등바위의 강렬한 인상이나 웅장함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멀리서 보면 둥그스름한 젖무덤처럼 솟아 있는 봉우리를 중턱 곳곳에 자란 작은 소나무들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 하다.
이등봉 표지석.
금강산 일만이천봉 형상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인용되는데 유달산도 그 둥 하나이다. 주변에 양을산, 태을곡 등이 있어 불교와 도교 색채가 짙은 지명들이 많은 편이다. 남쪽으로부터 일등바위, 이등바위, 삼등바위가 있다. '호남의 개골산'이라 부르는 것은 금강산의 여름 이름을 따서 부르기 때문이다. 금강산의 다른 이름이어서 그랬을지는 모를 일이나 업경이나 명경과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사람이 죽으면 일단 유달산의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는다. 심판이 끝난 영혼은 이등바위에 가서 저승사자의 명을 기다린다. 저승사자의 명을 받은 혼령은 삼학도의 세 마리 학이 이끄는 탈것에 타고 극락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또는 고하도의 용을 타고 떠난다.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고하도는 기다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압해도와의 사이에 있는 거북섬의 거북 등을 타고 간다. 그래서 유달산을 영달산(靈達山)이라 부른다. 영(神靈)과 관련시켜 지어낸 이름이다. 까마득한 어떤 날 혹은 영산강 들머리에 사람이 들어서기 시작한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꾸며졌을 스토리텔링이다. 사람들은 왜 기암괴석에 사후심판을 한다는 거울 전설들을 덧입혀 이야기를 만들어왔을까? 아마도 죄짓지 말고 선하게 살라는 뜻 아니었을까? (펌)
이등봉에서 본 유달산 일등봉 방향.
영산강 하구언 방향.
북서쪽 걸어온 영산기맥의 지적산 방향.
북쪽 압해대교 방향.
수도바위와 이등바위를 둘러보고 우측의 돌계단길을 따라 내려가,
일등바위 방향의 암릉길을 따르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정표의 '일등바위 340m' 방향으로 진행하면,
이내 또 다른 이정표가 나오는데 일등바위까지의 거리가 500m로 늘어나 있고,
돌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팔각정자인 소요정(逍遙亭)과 그 앞의 보리마당을 지나게 된다.
<소요정(逍遙亭)>
소요정의 ‘소요’는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걷는다’는 뜻이다.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이 두 봉우리 사이에 위치해 있다. 1966년에 세워진 소요정은 평지처럼 산책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등산객들에게는 다도해 전망대라고 불린다. 맑고 잔잔한 바닷물과 점점이 흩어진 푸른 섬들로 유명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이곳에서 목포해양대 쪽을 바라다보면 고하도와 압해도를 위시한 조그마한 섬들이 펼쳐져 있다. 다도해 멀리 저녁해가 유달산너머로 빠져들 때면 저녁노을은 갖가지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그리고 난 공원이 있는 우측으로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이등바위가 있는 쪽으로는 목포의 북항이 바라다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무안의 망운과 지도가 바라다 보인다.
보리타작을 한 곳이라는 '보리마당'.
좌측 관운각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다시 돌계단 오름길을 오르면,
아래를 보며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얼굴바위를 지나게 되고,
<얼굴바위>
일등바위에서 흔들바위를 지나면 소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큰 바위더미를 돌아가야 한다. 바위의 아래로 돌아서 지나야 하는데 돌아가기 전이나 돌아간 후에 바위를 올려다보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바위의 끄트머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포효하는 남자의 얼굴로 보인다.
얼굴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대교 방향 조망 안내판.
다시 위쪽 암릉에 굴러떨어질 듯 얹혀있는 바위를 향해 계단길을 오르면,
흔들리지 않는 흔들바위를 지나게 되고,
<흔들바위>
일등바위를 지나 이등바위를 향해 가다 보면 흔들바위가 보인다. 급하게 경사진 암반 끝에 있어 실바람만 닿아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흔들바위는 장정 대여섯 명이 올라갈 수 있는 평평한 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올라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재미도 뛰어나다. 또한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커다란 바위면을 직접 깎아 만들었는데 주변 바위들과 어울림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이제 일등바위가 올려다 보이는 계단길을 다시 또 오르면,
유달산 산왕대성전터를 지나게 되고,
<유달산 산왕대성전터>
유달산 일등봉 쪽에서 이등봉 쪽으로 내려가다가 왼편으로 나있는 샛길로부터 30여 미터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고하도와 목포해양대를 바라볼 수 있는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형태의 작은 공터이다. 흔히 ‘대성전터’라고 불리는 이곳의 바닥면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던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면 중앙부 바위 면에 ‘山王 大聖殿(산왕 대성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왼편 바위면 두 곳에는 그 내력이 알려지지 않은 암각상들이 새겨져 있다. 얼굴 부분이 훼손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는 신상의 모습으로, 도교적인 색채와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측 지면에는 아래로 연결되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아래쪽에‘향천정(香泉井)’이라는 샘이 조성되어 있다. 향천정이 조성된 장소는 작은 동굴의 형태를 나타내며, 동굴을 받치는 형태의 기둥 2기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세워져 있다.
좌측 마당바위 갈림길 이정표에서 다시 직진의 돌계단길을 오르면,
전망 안내도가 있는 일등바위 아래에 도착하여 먼저 일등바위에 오른 백두들의 응원을 받고,
일등바위 조망 안내도.
영산기맥의 마지막 산, 유달산 일등바위로 올라,
<유달산 정상 일등봉/일등바위/율동바위>
유달산 정상봉을 일등봉 또는 일등바위라 하는데, 사람이 죽어서 영혼의 심판을 받는다 하여 '율동(律動)바위'라고도 한다. 유달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울뚝불뚝한 바위들이 뒤엉켜 웅장한 모습을 만들어 낸다. 마당바위에서 다시 내려와 관운각 아래에 있는 길을 가다보면 일등바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일등바위를 바라보면 살아 움직일 듯한 바위들의 웅장함을 더욱 느낄 수 있다. 오랜 옛날 사람이 죽으면 이 일등바위(율동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이동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삼학도)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을 타고가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영달산(유달산)에서 조금 떨어진 거북섬(목포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에 있는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일등봉 표지석.
<유달산(儒達山, 228m)>
전라남도 목포시의 남서부 죽교동에 위치하고 영산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산으로, 산세가 매우 날카롭고 층층기암과 절벽이 많아 '호남의 개골(皆骨)'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렸으며,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고도 하였다. 그 뒤 구한말 학자인 무정 정만조(鄭萬朝, 1858~1936)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을 건립하여 그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무안)에 "현에서 남쪽으로 66리 떨어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무안)에 유달봉수(鍮達烽燧)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산정에서는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므로 산정에 두 개의 봉수대를 설치해 멀리 바다에서 들어오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동쪽 산꼬리에는 기상관측소ㆍ시청ㆍ법원 등 관공서가 있고, 산 중턱에는 유달사ㆍ수도사(修道寺)ㆍ관음사(觀音寺) 등 사찰이 많다. 유달산에는 경치가 좋은 곳에 대학루(待鶴樓)), 달선각(達仙閣), 유선각(儒仙閣), 관운각(觀雲閣), 소요정(逍遙亭), 팔각정 등 6개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으며, 달선각에서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 (午砲臺)와 노적봉(露積峯)이 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엉으로 바위를 덮어 아군의 군량미처럼 가장해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는 설화가 전하여져 오는 곳이다.
목포시와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므로 산정에 두 개의 봉수대를 설치해 멀리 바다에서 들어오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달성각(達成閣)에서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午砲臺)와 노적봉(露積峯)이 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군량을 쌓아둔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속인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여진다. 남쪽 기슭의 해안을 광복 전에 일본 사람들이 매축하여 신시가지를 만들었는데, 현재의 만호동과 무안동이 이 지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산중턱에 있는 보광사에는 샘과 관련된 전설인 '짓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산에는 대학루(待鶴樓)·달성각·유선각(儒仙閣)·관운각(觀雲閣)·소요정(逍遙亭) 등의 정자가 있다. 달성각은 1958년 광복 13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고, 유선각은 1932년 10월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는데, 처음에는 목조로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콘크리트건물로 개축되었다. 그리고 230평의 어린이 놀이터와 4·19기념탑·충혼탑(忠魂塔) 등이 있으며, 산 중턱에는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유달사(儒達寺)·관음사(觀音寺)·수도사(修道寺) 등의 사찰이 산 중봉에 있으며, 활터도 있다. 산의 정상인 일등암(一等巖)에 오르면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 경관은 장관을 이룬다.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에서 백두들 모두가 함께 기념 인증을 남긴다.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에서 본 동쪽 양을산과 입암산 방향.
북쪽 이등봉과 압해도 방향.
서쪽 고하도와 목포대교 방향.
남쪽 다순금마을과 목포신항 방향.
백두들 인증 사진을 남겨준 미래의 백두 후보님.
유달산 정상인 일등바위를 뒤로하고 올랐던 계단길을 내려가 좌측 모퉁이를 돌아가면,
우전방 아래로 가야 할 다순금 마을 방향 능선과 애마가 기다리는 신안비치호텔이 내려다 보이고,
절벽을 내려서는 꾀나 가파른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다가,
좌측 소요정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가면,
앞쪽으로 가야 할 관운각이 건너다 보이고,
살짝 당겨본 목포항과 과거에는 섬이었던 삼학도 조망.
깎아지른 바위절벽 아래의 쉼터를 지나,
우측 손가락바위쯤을 좌회하다가 우측 암릉 봉우리들인 손가락바위를 올려다봐도 손가락은 보이지 않고,
좌측 달성사 방향 갈림길에서 직진의 관운각 방향으로 오르다가,
관운각 진전 좌측 아래의 전망데크 쉼터에 서면 목포시내는 물론 손가락바위도 올려다 보인다.
관운각 아래 전망데크의 목포시 조망 안내도.
살짝 당겨본 영산강하구언 방향.
마당바위와 손가락바위 조망.
살짝 당겨본 유달산 손가락바위.
<손가락바위(약속바위)>
목포의 어느 지역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유달산의 상징적인 바위라 할 수 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차이가 난다. 뭔가 약속하자는 듯 새끼손가락을 내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유달산 바위 중 내가 최고라고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기괴한 손가락바위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손가락이 하나 보이는데, 이 손가락 바위가 워낙 반듯하여 아무리 암벽을 잘 타는 전문가라도 장비 없이는 오를 수가 없다. 그러나 손가락바위를 아무런 기구 없이, 마치 서커스 하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오르고 내린 기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유달산 타잔’이라 불렀는데, 그가 바로 해방직후에 살았다는 정인조이다. 그가 손가락바위를 타는 일요일이 되면 바위 타는 걸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바위를 타는 신기를 타고 난 그도 결국 산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관운각 아래 갈림길에서 기맥길은 좌측 유달산케이블카승강장 방향이지만, 우측 능선 위의 마당바위로 항하면,
별다른 안내판은 없고 2006년 5월에 기업은행에서 기증했다는 표지석만 있는 관운각을 지나고,
<관운각>
일등봉 아래에 있는 누각으로 유달산의 누정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관운각은 명칭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비가 온후 안개가 끼면 산허리에 구름이 머물러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 곳에 세워져 있어 볼 관(觀)에 구름 운(澐)을 써서 ‘관운각’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하고 추측한다. 관운각에서는 목포항 입구에 길게 용처럼 꿈틀거리는 고하도가 잘 보인다. 목포 팔경 중 하나인 고하도를 사진에 담고 싶다면 관운각에 올라서서 한 컷...
관운각에서 본 다순금과 고하도 방향.
관운각 옆에 있다는 나막신바위와 입석바위는 찾을 수가 없어서 마당바위를 향해 데크목 계단을 오르면,
백두들이 다 들어서도 넉넉할 듯 넓은 마당바위에 도착하여,
손가락바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마당바위>
어른 10명이 앉아서 쉴 정도의 마당같이 넓은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당바위로 오르는 길은 계단을 만들기 힘들어 바위의 능선을 계단모양으로 깎아 내고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다. 마당바위 맞은편에는 일등봉 전면이 보이고 중앙에 손가락바위가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로 일등봉을 오를 수 없어 다시 관운각까지 돌아가야 한다. 이 바위 근처에서 봉화불을 피웠을 가능성이 많다고 전한다.
일등봉(손가락바위)와 이등봉 방향.
마당바위에서 당겨본 부동명왕상.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
부동명왕은 대일여래(大日如來-밀교 진언종의 본존)가 모든 악마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으로, 오대명왕(五大明王)의 하나이다. 1920년대 말 일인(日人)들이 일본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일등봉 아래쪽 암벽에 조각했다고 전해진다.
철퇴를 들고 있는 모습 위에 '不動明王'이라 새겨져 있는데, 홍법대사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일본으로 돌아올 때 배를 타고 모시고 왔는데 이 부동명왕이 대사의 항해 안전을 지켜줬다고 하며, 홍법대사가 안치된 곳에는 어김없이 부동명왕상이 함께 있다.
마당바위에서 본 서쪽 고하도 방향 조망 안내도.
목포항과 삼학도 방향.
유달산케이블카 승강장과 영암군 삼호읍의 대아산 방향.
고하도 방향.
마당바위를 뒤로하고 영산기맥의 종착지인 다순금을 향해 하산길로 접어들면,
관운각 아래에 있다는 거북바위를 어렵게 찾아내고, (맞는지 몰라?)
널찍한 바위능선에 지붕까지 설치되어 있는 능선내림길을 따르다가,
돌아본 관운각.
등로 우측에 있는 애기바위와 조대바위를 둘러보고,
애기바위 모습.
<애기바위(두 엄씨바위)>
관운각 맞은편에 있는 바위로 ‘애기바위’, ‘큰 엄씨·작은 엄씨 바위“라고도 한다. 높이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 주변에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조금 아래의 남쪽에는 몇 개의 벤치가 있다. 큰 엄씨가 애기를 업고 작은 엄씨에게 등을 돌리고, 작은 엄씨도 애기를 업었는데 큰 엄씨를 보려고 하는 형상이다. 이곳은 마당바위로 오르는 능선이 남동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어 두 엄씨는 거센 바다 바람을 등지고 애처롭게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내려다보면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조대바위 모습.
<조대바위/낚시터바위(釣臺)>
조대바위는 애처롭게 서 있는 애기바위 뒤편 아래쪽에 있다. 고하도 앞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팔짱을 끼고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낚시꾼을 보는 듯하다. 등뒤의 큰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모양인데, 네 개의 바위가 합쳐져 이러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서는 다도해의 잔잔한 바다와 길게 늘어진 고하도,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온금동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안개 자욱한 날에 바라보면 더 이채롭다.
유달산은 자연이 만든 조각공원같다는 생각이 들며, 산행 시간이 여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바위들을 두루 찾아보고는, 애기바위에서 등로로 돌아 나와 능선 등로를 내려서면,
사거리 갈림길이 나오며 직진의 노적봉 가는 넓은 등로를 두고, 기맥길은 우틀하여 아리랑 고개로 이어지는데,
갈림길 좌측에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라는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인 전망데크. 근데 혼자다!
갈림길 이정표에서 직진의 노적봉 방향을 두고 좌틀하여 아리랑고개 방향으로 내려가면,
좌측 노적봉 가는 능선의 유선각 조망.
목포해상케이블카 유달산스테이션을 지나게 되고,
목포해상케이블카 유달산스테이션을 통과해도 되지만 우회하여 지나,
데크목 계단길을 잠시 내려서는데, 데크목 난간에 '유달산 수태바위' 안내판이 걸려있지만 웬일인지 들어가 볼 수도 없고 목포시청 홈피의 수많은 유달산의 기암괴석 소개 코너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다. 왜일까?
데크목 계단길을 잠시 더 내려가다가,
유달산둘레길과 만나는 사거리 갈림길 이정표에서 직진의 다순구미정상 방향으로 내려가면,
<다순구미>
따뜻하다는 뜻의 전라도 방언 '다순'과 후미진 곳을 가리키는 '기미'가 합쳐진 말로, 행정구역으로 '온금동', 유달산 남쪽 자락을 일컫는 말이다. 뱃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로 초창기 목포 어촌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약간 아래의 아리랑고개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는 유달산 둘레길 안내판.
이내 목포시 온금동의 아리랑고개를 지나게 되고,
부광상회 앞 갈림길에서 내일 또 걸어야 하는 손점장은 우측 공생원 방향의 빠른 하산길로 접어들고,
여기까지 왔는데 마침표를 찍고 싶은 백두들은 개항백년기념비 방향의 오름길로 들어서서,
우측 사면 방향의 다순구미둘레길을 두고 다순금마을 방향의 능선 오름길로 진행하면,
돌아본 일등봉 방향.
유달산종점 0.6km 남았다는 이정목이 있는 영산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다순구미 정상에 도착한다.
영산기맥 마지막 암봉만 남겨놓은 마지막 봉우리를 뒤로하면,
좌측 아래로 목포시 온금동인 다순금마을 동편의 서산동의 목포서산초교가 내려다 보이고,
고래등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우회하여 돌아가면,
커다란 바위에 '慶尙道友會記念會場(경상도우회기념회장)'이라 음각된 바위를 지나게 되고,
<慶尙道友會記念會場(경상도우회기념회장) 암각 바위>
1921년 당시 목포에서 활동하던 경상도 출신 사람들이 이 일대에서 기념회를 치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커다란 바위에 글씨를 새겨놓은 유적이다. 1897년 통상항으로 문을 연 목포에는 이미 개항장으로서 전례가 있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출신들이 많이 이주해 와서 살았는데, 이 바위 유적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유적이나, 경상도 출신 지역 인사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당시 개항 목포에 투자하여 돈을 벌었던 상인들은 목포 출신보다는 먼저 개항을 경험하여 부를 축적한 경남과 부산 출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이곳 목포의 음식은 전라도 지역의 음식과는 약간 다르다고 한다.
이 바위 정면에 "慶尙道友會記念會場(경상도우회기념회장)"이라 새겨져 있고 그 왼편에 '大正十年六月日(대정십년육월일)'이라는 1921년 조성 년대와 함께 주요 임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뒤편 바위 상부에는 모임의 상징 마크로 추정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한편 경상도우회기념회장으로 사용된 이 바위는 원래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는 장사바위로 불리던 것이었다. 바닥에 있는 바위가 갈라진 형상이 장사가 수련하여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경상도우회기념회장 암각 안내판.
잠시 더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좌전방 아래로 다순금마을로 불리는 목포시 온금동이 내려다 보이더니,
<다순금이라 불리는 온금동 조망>
다순금은 '따습다'의 '다순'과 바닷가나 강가의 '후미진 곳'의 '구미'의 합성어로 다순구미 라고 한다. 목포의 온금동(溫錦洞)의 다순구미 마을을 일컫는 말들이다. 일제시대깨 가슴속에 아픔과 희망을 간직한 채 목포로 몰려들었던 조선인들은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들어 살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온금동은 매립권을 둘러싸고 조선인 무안 출신 정래성과 일본 상인 후쿠다 간의 분쟁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목포의 포구를 막아 매립하면서 형성된 온금동은 자연스럽게 아리랑고개를 사이에 두고 일본인 거루지역과 통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는 다순금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벽돌공장(조선내화)이 옛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내 'T'자 갈림길로 삼각점 두 개가 있는 마지막 암봉(73.9m)에 도착하는데,
좌측길은 다순금 마을로 이어지고 영산기맥 트레일인 우측 다순구미둘레길 방향으로 내려선다.
우측으로 내려서라는 이정표가 있는 마지막 암봉(73.9m) 전경.
다순금마을과 길이 없는 직진의 뒷봉(49m) 방향.
영산기맥은 이곳에서 직진의 능선 방향으로 보이는 다순금마을 뒷봉(49m)을 거쳐 다순금마을로 내려서야 하지만 잡목과 가시나무에 뒤덮여 등로가 없는 능선을 내려서야 하고, 다순금마을로 진입하더라도 해안도로까지 길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가정집을 통과하여야 한다기에, 이곳에서 우측 다순구미둘레길 방향으로 내려서기로 한다.
73.9봉에서 이정표의 다순구미둘레길 방향으로 우틀하여 내림길로 들어서면 고하도가 조망되는 멋진 벤치를 지나게 되고,
'드디어 마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동안 영산기맥길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침목 계단을 내려가면,
다순금마을 해안도로변에 둥그런 모양의 화장실이 있는 영산기맥 트레일킹길 종점이 나오고,
영산기맥 종점인 다순금 해안도로에 도착하여 영산기맥 종주를 마감한다.
영산기맥 종주 산꾼들이 종주 인증을 남기는 '목포항 개항 110주년 기념탑'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1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그런데 먼저 도착한 분들이 우측의 신안비치호텔 주차장에 있는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우선 신안비치호텔 주차장으로 가서 버스로 '목포항 개항 110주년 기념탑'으로 이동하여 함께 인증을 하기로 한다.
목포와 고하도를 잇는 목포대교 조망.
해안도로 아래 바위에서 요염한 모습으로 유혹하는 인어아가씨 모습.
신안비치호텔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애마에 올라,
'예향목포(藝鄕木浦)'라 새겨진 목포개항 110주년 기념 표지석에 도착하여,
<목포개항 110주년 기념비>
1897년에 개항한 목포항은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4번째로 개항된 항구이다.
2019. 11. 23.(토) 호남정맥의 순창새재 위 새재봉에서 시작한 영산기맥 종주가 전대미문의 코로나19에 따른 산행중단으로 무려 3년 남짓이나 걸려 종주를 마감하였다. 멀고 먼 남도땅 수많은 장애물을 이겨내면서 한걸음에 한걸음을 더하여 마침내 목포 앞바다에 도착하였기에, 지금까지 걸었던 백두대간과 9정맥을 포함한 어느 종주길보다 가슴벅찬 느낌이다. 우리의 애마를 안전하게 끌어주신 여러 기사님을 포함한 우리의 종주길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며,
영산기맥 종주의 기쁨을 합께 나누고 싶다.
영산기맥 능선에서 뵈었던 석계공님의 증손이신 광산김씨 영규 형님과 형수님,
두번께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오아시스 보석사우나에서 쌓인 피로를 씻고,
목포 동부시장에 있는,
삼촌네회수산 식당으로 이동하여,
백두산위회 영산기맥 종주를 자축하고,
'영산기맥 완주'라는 뿌듯함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귀경길에 오른다.
학창시철 하라는 공부는 않고 노는 데 열심일 때는 할 공부가 없었지만,
어떤 계기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해야 할 공부가 많아졌다.
북한산도 오르지 않는 서울의 친구는 우리나라에 오를만한 산이 없다고 하지만,
거의 매주 새로운 산을 찾아 오르는 내게는 오르고 싶은 산이 너무나 많다.
영산기맥을 걸었으니 9기맥 중에 남은 기맥인 진양, 팔공, 호미기맥만 남았다.
아마도 남은 세 기맥 종주를 마치고 나면,
또 오르고 걸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로 많아질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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