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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진양기맥 04차(바래기재~춘전치) : 산들의 고향 거창분지를 내려다보며

by 재희다 2023. 5. 25.

 
산행장소 : 진양기맥 04차(바래기재~춘전치) 경남 거창군, 함양군. 
산행일시 : 2023. 04. 08.(토) 
산행코스 : 바래기재(3번국도) ~ 청태산(546m) ~ 솔고개 ~ 안시산(586m) ~ 개목고개(2.8km) ~ 544.3봉 ~ 구슬재 ~ 559봉 ~ 망덕산/망실봉 ~ 630봉(H) ~ 새재 ~ 580.5봉 ~ 551.0봉 ~ 웅골(곰실) 갈림길 ~ 관술봉(611m) ~ 관술령(610m) ~ 관동고개/관술령 ~ 숙패령 ~ 망설봉/덕우산(620m) ~ 숙지령 ~ 644봉 ~ 683봉 ~ 고인돌바위 ~ 660봉 ~ 부채바위 ~ 기선봉(669m) ~ 남재 ~ 사별산(697m)/골무산갈림길 ~ 춘전치(1084지방도, 88고속도로) (약 24km, 11시간 30분 소요)

산행참석 : 16 백두.

★ B팀은 06:00 개목고개에서 합류하여 숙지령에서 신기마을로 하산 후 최종 도착지인 춘전마을로 도보 이동. 


<산행지도>

 

2019년 9월 8일에 첫걸음을 시작한 진양기맥 종주길이 코로나로 중단되어, 두번째 산행은 혼자서, 그리고 2.5번째 산행은 네 명이서, 그리고 세번째 산행은 둘이서 걸어서, 거창군과 함양군의 경계인 바래기재에 도착해서는 백두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중단되었다. 실로 코로나가 우리 사회에 끼친 충격파가 우리 산우회의 산행에 고스란히 그 흔적을 남겨놓은 진양기맥 남덕유산~바래기재 구간이다. 언젠가는 "그때는 그랬지!"라는 중얼거림으로 흘러버릴지도 모르는 생생한 기억을 딛고 마침내 기어코 진양기맥을 이어걷기로 한다. 

 

금년 5월 둘째주 산행에서 철쭉이 만개한 황매산을 올라 2023년도 시산제를 거행하기로 예정하여 산행코스를 정하다 보니 금번 산행을 어디까지 진행할 것인지가 고민이다. 요즘 산우회 분위기로는 관술령까지 진행하여 관동마을로 탈출하는 게 무난해 보이지만, 그럴 경우 황매산 구간 산행이 5월 넷째 주로 밀려지게 된다. 그렇다고 춘전치까지 진행하자니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기산봉과 사별산 등이 있는 빨래판 구간을 산행 후반부에 지나게 되어 힘겨운 산행이 될 게 뻔하다. 이리저리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보아도 황매산 철쭉 시산제를 포기하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결국은 주변 분들의 의견을 물어 황매산 철쭉 시산제를 선택하고 산행을 그에 맞추기로 한다. 따라서 오월 둘째 주 황매산에서 시산제를 거행할 수 있도록 금번 산행을 춘전치까지 진행하기로 하고, 좀 더 여유로운 산행을 원하는 분들은 개목고개에서 출발하여 숙지령까지 진행하고 좌측 신기마을로 하산하기로 한다. 전체 산행 코스 중에서 도중에 시작하여 중탈까지 가능하도록 대안을 가지게 되니, 선택 가능한 다양한 코스가 생기게 되어 긴 산행을 원하는 분들과 짧은 산행을 원하는 분들이 모두 원하는 데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어 부담없이 양재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오르게 된다.   

 

 

양재를 출발한 버스가 쉬지않고 달려 산행 출발지인 바래기재 '바래기암소한마리' 식당 입구에 도착하니 식당의 개가 쉬지 않고 짖어댄다.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분들이야 바로 버스를 내려 떠나면 되겠지만, 개목고개에서 출발하는 분들은 이곳에서 2시간여를 더 머물러야겠기에 버스를 고갯마루로 이동하여 주차를 하고는 산행준비를 시작한다. 

 

 

거창군 마리면과 함양군 안의면의 경계인 바래기재 고갯마루에 주차한 버스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버스문을 나서니, 서늘한 밤공기가 높이 걸린 달빛 때문인지 포근하게 느껴지고, 

 

<바래기재>
경남 거창군 마리면과 함양군 안의면을 잇는 고개로, 진주에서 김천, 충주를 거쳐 성남 갈마터널로 연결되는 3번 국도와 또다른 24번, 26번 국도 등 세 개의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안의면 삼산(三山) 마을에서 거창으로 넘어가는 재를 바래기재라고 하는데, 옛날 남편이 서울로 과거보러 갈 때 그의 아내가 이 고개까지 남편을 바래다주고 또 이 고개에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여 바래기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며, 또 다른 하나의 유래는 옛날에 한양에서 고위 관료들이 진주 관아를 왔다가 갈 때에 진주목사(晋州牧使)가 이곳까지 바래다주었다고 하여 ‘바래기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바래기재 고갯마루에서 4차선의 국도를 건너기 위해 훤히 걸린 달빛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0m 정도 내려가다가, 

 

좌측 국도를 건너는 지하암거를 통과하여, 

 

다시 고갯마루 방향으로 진행하면 거창군 마리면 교통표지판을 지나고, 

 

거창군 마리면을 알리는 「행복한 마리」 표지석이 있는 지점에서 우측 농가 옆 시멘트포장 농로로 들어서서,  

 

시멘트포장 농로를 따라 우측 외딴 농가를 지나며 바로 좌측 숲길로 들어서야 하지만, 기맥 등로가 잡목으로 거칠다 하여 잠시 더 농로를 따르다가, 농로가 비포장으로 바뀌고 좌측 과수원과 묘지를 지나며 좌틀하여 소로를 따라 올라, 

 

개목고개가 4.5km 남았다는 첫 이정표가 있는 능선마루에 올라 우측 숲길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최근에 심은 어린 나무를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올라, 

 

442봉쯤에서 우틀하며 숲길로 들어서면, 

 

잡목의 방해가 심한 거친 능선 능선 등로가 이어지고, 

 

밋밋한 능선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면, 

 

커다란 나무가 지키는 둥그런 능선 안부를 지나 오르게 되는데, 

 

좌측 거창읍 방향으로 망덕산능선쯤이 가늠되고, 

 

개목고개가 3.2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누워있는 476봉에서 우틀하여 진행한다. 

 

 

다시 밋밋한 능선 안부를 지나서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오르면, 

 

508봉쯤을 지나게 되는데 좌측으로 꺾어지며 내려서고, 

 

안부를 지나 이제 막 새싹을 티우는 잡목들도 별다른 방해가 되지 않는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길게 오르다가, 

 

망실봉이 6.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지능선 분기봉인 530봉에서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틀하여 내려선다. 

 

 

개념도의 546봉을 오르다가 무심코 좌회길로 들어서서 한참을 진행하다가 좌회길임을 알아채었는데, 어둠 속에서 발길을 되돌려 546봉(청태산)을 올라도 별반 뵈는 게 없을 듯하여 그냥 좌회하기로 하고, 꾀나 가파른 비탈로 이어지는 사면길을 계속 진행하여 다시금 546봉(청태산)을 넘어서 오는 기맥 능선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기맥길을 따르면,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지능선 분기점쯤에서 우측의 뚜렷한 내림길 등로로 들어서고,  

 

여름철이었으면 잡목과 덩굴의 방해가 심했을 거친 등로를 내려서다가 우측의 선명한 등로를 두고 표지기가 한두 개 걸린 좌측의 희미한 능선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바닥 데크목이 썩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이는 데크목 다리가 설치되어 있는 솔고개를 조심스럽게 지난다. 

 

<솔고개>
함양군 안의면 귀곡리에서 거창군 마리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 보부상이나 약초꾼이 넘었을 법한 고갯길이지만 지금은 깊게 파인 고갯길 위로 데크목 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오래되고 관리가 되지 않아 바닥면 데크목이 썩고 부서진 곳도 있어서 이곳을 건너는 기맥꾼들은 주의를 해얄 듯하다.

 

솔고개를 건너는 데크목 다리 전경. 

 

 

솔고개를 지나 안시산 오름길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안의면의 불빛이 건너다 보이고, 

 

돌아본 잠시 전에 좌회하여 지나친 546봉(청태산) 좌측으로 대봉산쯤도 밝은 달빛에 그 윤곽이 드러나 보이더니, 

 

좌측은 넓은 과수원이 조성되어 있고 우측은 벌목된 능선 마루에 조성된 넓은 공터에 도착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온 누리로 스며드는 밝은 달빛을 감상하며 행장을 가다듬는다.

 

 

좌측의 넓은 과수원에 난입하는 산짐승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듯 보이는 전기울타리를 따르다가,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접어들며 좌측 과수원 전기울타리와 헤어져 숲길로 들어서고, 

 

제법 가파르지만 뚜렷이 이어지는 능선 오름길을 오르면, 

 

꾀나 넓은 터에 잡목이 무성한 안시산(582.4m)을 지나게 되는데, 직진의 뚜렷한 능선을 따르다가 되돌아와 좌틀하여 내려선다. 

 

참나무 둥치에 메인 안시산(582.4m) 산패.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다가 수종을 알 수 없는 조림지를 지나고, 

 

개목고개가 1.1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안부를 지나 오르면, 

 

지능선 분기점(542m)에서 직진의 능선을 두고 표지기갈 이끄는 우측으로 급하게 꺾어 내려서고,     

 

등로를 침범한 산딸나무와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면 능선 좌측의 넓은 밭으로 이어진 시멘트포장 농로에 내려서게 된다.  

 

 

농로를 따라 능선을 차지한 밭으로 들어 앞쪽으로 보이는 작은 봉우리를 밭 가장자리를 따라 좌회하여 지나고, 

 

봄농사 준비를마친 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건너편 숲으로 들어서서 묘지를 지나 완만하지만 거친 능선 내림길을 따르면, 

 

인위적으로 조성한 두릅밭을 지나게 되는데, 

 

마악 피어난 두릅에 반색을 하며 걸음을 멈추려는 분들에게 산행 종착지인 춘전치 부근에 두릅이 많다는 가짜로 판명난 뉴스를 전하여 탐스럽게 피어난 두릅을 못본체 지나면, 

 

개목고개의 화사한 벚꽃나무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애마가 내려다 보이고,  

 

이내 떨궈진 꽃잎으로 장식된 거창군 마리면과 함양군 안의면을 잇는 포장도로가 지나는 개목고개에 도착한다. 

 

<개목고개>
경남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마리면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10번 군도(황마로)가 지난다. 개목고개의 유래는 고개 부근에 감나무의 사촌 격인 개암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데, 개암나무 즉 개목이 많다 하여 개목고개란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감나무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에 요즘도 뿌리가 튼튼한 개암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이기한다고 한다.

 

개목고개로 내려서는 백두들. 

 

좌측 거창 마리면 동편과 서편 마을 방향.

 

<거창군 마리면(馬利面)> 
거창군의 서쪽 끝에 위치하여 함양군의 안의면과 서남경계, 동으로는 거창읍, 북으로 위천면과 접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덕유대간, 동으로는 취우령, 서남쪽으로는 기백산으로 둘러 쌓인 표고 230m의 산간 소 분지이다. 산간 내륙에 위치한 입지여건으로 인하여 대륙성 기후를 특징으로 하여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우며, 기온의 일교차가 크게 나타난다. 동서로 국도 3호선과 남북으로 국도 37호선이 지나는 중심부로 관광동맥이 합류하는 교통 요충지이며, 논농사 중심인 중산간 평야로서 한우사육, 시설하우스(딸기, 복수박) 작물 재배로 소득을 증대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마리현을 이안현으로 바꾸어 천령군(함양)에 편입, 고려 공양왕 2년(1390년) 가음현(안의)에 편입되었으며, 조선 고종 32년(1895년) 제현을 군으로 바꾸면서 본면의 북부를 동리면 남부를 남리면으로 나누었다. 서기 1914년(개국 533년) 안의군 동리면과 남리면을 합하여 마리면으로 칭하고 거창군에 편입되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바래기재에 멈춰 선 버스에서 겨우 잠을 청하여 피로를 회복한 백두들이 벚꽃이 화사한 개목고개로 이동하여 기다리다가, 바래기재에서 영산기맥을 이어온 분들과 합세하여 모든 백두들이 함께 망덕산을 향하게 된다. 

 

좌측 마리면 방향 산그림.

 

 

개목고개 들머리 능선이 넓은 대지로 바뀌어 있어서 대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묘지 방향으로 진행하여 능선으로 오르면, 

 

돌아본 개목고개 방향. 

 

제법 뚜렷한 기맥 등로가 이어지는데, 

 

잡목과 산딸나무는 물론 넝쿨들까지 등로를 침범하여 산꾼들의 진행을 어렵게 하고, 

 

당겨본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기백산 모습. 

 

우회로가 있어서 봉우리 방향 등로가 희미한 544.3봉에서 기맥능선은 우측으로 휘어져,  

 

완만하고 호젓한 능선 내림길이 이어지는데,

 

우전방 공전마을 뒤쪽의 망덕산 위에서 아침해가 눈부신 햇살을 쏘아 보내고 있다. 

 

 

능선 좌측 마리면 동편마을에서 이어온 등로가 합쳐지는 봉우리를 지나는데,  

 

우측 덕산마을 방향으로는 가야 할 망설봉쯤도 가늠되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얕은 봉우리를 지나고, 

 

우전방 공전마을과 망덕산 방향. 

 

쓰러진 나무둥치와 덤불이 막고 있는 능선을 두고 우측 아래로 이어지는 수레길에 내려서서,  

 

다시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족적을 따라 오르다가, 

 

개목고개 이후 처음 만난 공터인 묘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따뜻한 모닝커피를 나누고는, 

 

다시금 잡목들의 방해가 이어지는 기맥길을 따르면, 

 

오래된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게 되는 구슬재를 지나게 된다.  

 

<구슬재>
경남 거창군 마리면 동편마을과 함양군 안의면 공전마을을 잇는 경계 능선의 고개로, 고개 우측 안의면 공전 마을에서 이름을 따와 공전고개라고도 부른다. 넓은 콘크리트포장 임도가 지나며, 산꾼을 배려한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데크목 계단이 많이 낡아 있어서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구슬재 이정표와 고개 우측 안의면 공전마을 방향. 

 

고개 좌측 거창군 마리면 하고리 공사골 방향. 

 

 

가파른 구슬재 절개지를 올라 망덕산을 향하면, 

 

거칠지만 뚜렷한 능선 등로가 이어지며, 

 

좌측 거창군 마리면 상고창 마을 방향으로 오두봉쯤이 가늠되고, 

 

<거창군(居昌郡)>
덕유산 자락 아래 드넓게 펼쳐진 축복의 땅, 거창(居昌). '살 거(居)'자는 '클 거(巨)'자와 음이 같고 '창성할 창(昌)'자는 밝음과 함께 기운차게 뻗어 나가는 의미로 풀어낼 수 있으니 거창은 일찍부터 크게 일어날 밝은 곳으로 예견된 축복의 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창은 역사 속에서 거열, 거타, 아림으로 불려 오다가,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거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선조들의 올곧은 기개를 면면히 이어오면서 한반도 남부내륙의 중심에 당당히 자리잡아, 서부경남 북부의 거점도시 역할을 확실히 해 내고 있다. 수려한 자연경관, 풍부한 역사ㆍ문화유산을 보유한 품격 높은 도시이자, 명품 교육과, 특색 있는 문화도시로서 미래를 향해 거침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곳, 오늘의 거창의 모습이다.(펌)

 

살짝 당겨본 기백산 산줄기에 자리한 오두봉 모습. 

 

활짝 핀 산벚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더욱 싱그럽게 느껴지는 호젓한 등로를 따라 올라, 

 

별다른 특징이 없고 기맥 능선 등로보다 어지러운 555봉(개념도 상 559봉)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면, 

 

이내 본격적인 망덕산 오름길이 시작되는 밋밋한 안부를 지나게 된다. 

 

 

본격적인 망덕산 오름길은 갈비가 푹신한 오름길로 이어지다가, 

 

호젓하게 이어지던 오름길이 점점 가팔라지며 꽃망울을 터뜨린 진달래가 힘들어하는 산꾼들을 위로해 주고, 

 

표지기가 걸린 능선 봉우리(607m)에 오르면 가파르던 오름길이 다소간 완만해지며 우측으로 휘어져 오르게 되고, 

 

자연으로 귀의하라는 멧돼지의 노력이 역력한 묘지를 지나, 

 

다시금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올라 커다란 바위들이 성곽인 듯 막아서는 짧은 암릉도 통과하며, 

 

화려했던 봄날의 흔적이 흩뿌려진 능선 등로를 말없이 지나 오르면, 

 

정상에 자리한 묘지 때문인지 주변 나무들이 제거되어 거창 방향 조망이 시원스레 트인 망덕산 정상에 도착하여 최고의 조망을 즐기며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망덕산/망실봉(望德山/望實峰, 681.2m)>
경남 거창군 거창읍과 함양군 안의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거창읍내를 비롯한 주변을 둘러싼 연봉들과 능선이 한눈에 조망되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망덕산은 서북 방향으로 자리 잡은 덕유산의 산자락을 이어받아 남쪽으로 줄기를 뻗고 있다. 망덕산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기백산, 남덕유산, 무룡산을 지나 덕유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망덕산 산속 깊은 곳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박동저수지를 이루고 이 물줄기가 흘러 남강을 이룬다. 동남쪽으로는 거창읍 중심을 가로지르는 넓은 황강이 합천댐을 향하여 흐르고, 멀리 수도산으로 연결되는 귀봉, 보해산이 보인다. 그 왼쪽으로는 양산처럼 생긴 일산봉, 그리고 비계산, 두무산, 오도산과 숙성산이 뒤를 받치고 있다. 
망실봉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망덕산은 덕유산을 바라본다는 뜻의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망실봉은 이곳이 원래 가야의 땅으로 신라가 차지했다가 다시 백재가 차지하는 등 전투가 잦은 곳으로 땅을 뺏긴 나라에서 보았을 때는 '땅을 잃어버린 곳'이라는 뜻으로 망실봉이라 불렸다고도 하고, 예전의 이곳이 봉수대로 망을 보던 곳이라 망실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망덕산 정상 이정표.  

 

동북쪽 수도지맥 능선에 둘러진 거창읍 조망. 

 

<거창군(居昌郡)>

거창은 예부터 거열(居列), 거타(居陀), 한들, 거창(居昌), 아림(娥林), 제창(濟唱) 등으로 불렸다. 이것을 종합하면 ‘크고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거창분지가 내륙산악지대에서 보기 드문 평야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이중환 이 쓴 <택리지>에서는 “거창은 땅이 기름지다”라고 했다. 현재 거창읍에는 영천(濚川)이 흐르는데, 이는 서쪽 북상의 월령계곡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성천(星川)과 소정계곡에서 남류하는 갈천(葛川)이 합한 위천(渭川)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 영천은 아월천(阿月川)과 합류하여 황강을 이루고, 황강은 흘러가면서 남상면에서 동류하는 고천(古川)을 받아들여 합천호로 유입한다.

 

서쪽 기백산과 금원산 방향. 

 

거창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 조망. 

 

북쪽 우두령 방향. 

 

북동쪽 우두산과 비계산 방향. 

 

살짝 당겨본 우두산 방향. 

 

살짝 당겨본 동남쪽 감악산 방향. 

 

망덕산 정상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백두들. 

 

멋진 아침식사를 마치고서 남긴 망덕산 정상 인증. 

 

 

묘지가 자리한 망덕산 정상을 뒤로하고 조금 내려서다가 올라, 

 

우측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로 이어지는 임도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들어서, 

 

'거창 미소산악회'에서 2009년 5월 24일에 설치한 '망실봉' 정상석과 게양대가 설치된 봉긋한 봉우리를 돌아나가면, 

 

한켠에 '망덕산' 정상석이 자리하고 거창읍 방향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에 도착한다. 

 

<거창(居昌)>
거창은 경남 서북부 지방의 중심지로서 꽤나 큰 읍이다. 그러나 이곳은 함양과 더불어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나기 전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예전에 서울에서 오려면 김천을 거쳐서 꾸불꾸불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하던 곳이 거창이었다.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청정지역이란 이야기도 된다. 거창은 사과의 고장이라고 말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교육의 도시다. 소규모 지방읍내에 유명한 고교가 많아 해마다 서울의 명문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었던 곳이 이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사화(士禍)에 곤욕을 겪은 곳이 이곳 거창이기도 하다. 1494년에 연산군이 조선조 제10대 왕으로 즉위하니, 그 왕비는 장성공 신승선의 따님으로 거창현은 거창 신씨의 관향(한 성씨의 시조가 태어난 고향)이라 하여 거창군으로 높였다고 한다. 연산군 12년간에 세 차례의 사화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1498(연산 4)년의 무오사화이고, 두 번째가 1504(연산 10)년의 갑자사화이며, 세 번째는 1506(연산 12)년에 있었던 병인삼화(丙寅三禍)이다. 
무오사화 때 이미 세상을 버린 김종직을 부관참시(죄인의 관을 쪼개어 시신의 목을 베는 행위)하였으며, 그의 문인으로서 안음 현감이던 정여창을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하였다. 김종직의 조카인 김연은 성주 교수로 있다가 거창 남상으로 도피해서 옮겨왔고, 보령현감 김수양은 벼슬을 버리고 가조로 옮겨왔다. 두 번째 갑자사화 때는 김종직의 문인 김굉필 등 10여 명을 죽이고, 이미 죽은 정여창, 표연말 등을 부관참시하였고, 김굉필의 문인 권시민은 벼슬을 버리고 위천으로 내려왔다. 연산 말년인 1506년 병인사화까지 세 번에 걸쳐 김종직을 종사로 하는 영남 사림이 큰 화를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사에서도 질곡이 많은 역사와 아픔을 가진 곳이 거창이 아닌가 싶다. 해방 전후의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특무대장 김창룡이 저지른 신원면 양민 학살사건 등이 있었다. 저리도 아름답고 평온한 거창이 참으로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게 믿기지를 않는다. 

 

'망덕산/望德山/ 해발 682.8m/거창韓거창'과 중앙에 거창군내 12개 읍면 지도가 새겨진 거창군에서 설치한 정상석. 

 

이곳 망덕산/망실봉에는 12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약간 높은 북쪽의 봉우리에는 묘지가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이정표만 세워져 있고 정상석이나 흔한 등산로 안내판 등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남쪽으로 120m 떨어진 약간 낮은 봉우리에는 '거창 미소산악회'에서 설치한 '망실봉'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 활공장 한켠에는 거창군에서 설치한 '망덕산' 정성석이 세워져 있다. 지도 표기도 저마다 각각인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고 우리가 가진 진양기맥 개념도에는 망덕산과 망실봉이 병기되어 있지만, 인터넷 지도에는 북쪽의 높은 봉우리를 망덕산으로, 남쪽의 약간 낮은 봉우리를 망실봉(660m)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한 활공장 한켠에 거창 페러글라이딩클럽에서 설치한 안내판에는 '망실봉활공장'이라 쓰여 있다. 

 

이렇듯 시대와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표시하는 상태라 정리가 필요해 보이는데, 본디는 북쪽의 묘지가 자리한 약간 높은 봉우리를 망덕산 또는 망실봉이라 부르다가, 근래에 정상석을 설치하면서 묘지가 있는 북쪽 봉우리에 정상석을 설치하기가 곤란하여 그 옆에 있는 조금 낮은 봉우리에 정상석을 설치하게 되면서 표기에 혼선이 초래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분명히 다른 봉우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바, 북쪽의 약간 높은 봉우리를 망덕산으로, 그리고 남쪽의 약간 낮은 봉우리를 망실봉으로 구분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현재 네이버지도의 표기 방법임)

 

활공장 한켠에 설치된 망덕산 정상석에서 거창읍을 배경으로. 

 

 

활공장에서 본 동쪽 거창읍과 거창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수도지맥 파노라마. 

 

<거창읍과 거창분지 조망>
거창분지(居昌盆地)는 경남 거창군 거창읍 일대에 펼쳐진 달걀 모양의 침식분지로, 북서쪽에는 취우령(驟雨嶺, 795m), 남서쪽에는 관술령(官述嶺:554 m), 남동쪽에는 감토산(紺土山, 520m), 동쪽에는 일산봉(日傘峰, 627m) 등의 산봉우리와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黃江)이 분지를 남북으로 흐르고, 그 밖에 여러 개의 지류가 흘러들어 황강과 합류한다.

 

수도산에서 단지봉, 비계산, 오도산으로 이어지는 수도기맥과, 그 앞쪽 수도산에서 남쪽으로 갈래쳐 나온 양각지맥 조망. 

 

동북쪽 거창읍 가운데를 동서로 위천이 가로지르고, 중앙 좌측(북쪽)에서 아월천(阿月川)이 흘러 위천(영천)에 합류하여 합천 황강으로 이어지는 거창분지 조망. 

 

남동쪽 산그림에 가려 보이지는 않는 합천호 방향. 

 

서쪽의 안의면과 그 우측 황석산 방향.

 

 

숙지령에서 산행을 마감하고 신기마을로 하산하는 분들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일각의 지체도 없이 부지런히 걸어야 하기에 활공장에서 바라보는 거창의 평화롭고 신기하기까지 한 장면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진양기맥 능선으로 들어서면,  

 

이내 좌틀하여 덕천서원과  둔동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이내 다시 좌측 거창읍 장팔리의 덕천서원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둔동 방향으로 들어서서 호젓한 솔숲 능선길을 따르면, 

 

개념도에 헬기장 표시가 있는 624봉쯤을 지나게 되고, 

 

완만하고 걷기 좋은 소나무숲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방향표시만 있는 이정표를 지나면, 

 

우측 덕산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새재를 지나게 된다. 

 

<새재>
경남 거창군 거창읍의 거창유원지가 있는 장팔리와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새재마을/덕산마을(명종황후묘와 벌명당이 있음)로 이어주는 고개이다. 새재마을(덕산마을)로 연결되는 재로서 희미한 길흔적만이 남아있다. 

 

우측은 새재마을로 이어지고, 좌측은 이정표가 없지만 거창읍 장팔리 거창유원지 방향이다.

 

 

새재를 지나 완만하고 호젓한 능선 오름길을 오르면,  

 

우측으로 벌목이 되어 조망이 트이는 개념도의 583봉(580.5m)을 지나는데, 

 

우전방 멀리로 지리산은 물론 그 우측으로 백두대간의 백운산과 함양의 '기금거황' 연봉이 조망되며 옛 기억을 더듬게 한다. 

 

 

이어지는 완만하고 호젓한 소나무숲길은 마치 둘레길인양 평온함을 느끼게 하고, 

 

그저 작은 언덕 수준의 봉우리들을 지나 개념도의 562봉(551.0m)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봉우리인지 눈치도 체지 못하는 사이에 그저그런 봉우리를 스치듯 지나게 되는 호젓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단정하게 보살펴진 묘지를 지나 내려서면, 

 

좌측 웅곡(곰실)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안부를 지난다. 

 

<웅골(곰실)마을 갈림길>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 웅골마을과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를 넘나들었던 고개인 모양이다. 아마 예전에  이곳이 곰(熊)과 관련된 뭣이 있었던 모양이다. 

 

좌측 웅곡(곰실)마을 갈림길 이정표. 

 

 

웅곡 갈림길 안부를 지나서도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름길을 따라, 

 

좌전방으로 제법 높아 보이는 관술봉을 향하는데, 

 

은진임공과 유인 김녕김씨 부부의 합장묘를 지나, 

 

송전탑을 지나게 되고, 

 

묘를 이장하였는지 널찍한 공지를 지나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잡목이 들어찬 편평한 정상부에 삼각점이 자리한 관술봉에 올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과일을 나누며 다리쉼을 한다. 

 

<관술봉(官述峰, 606.1m)>
거창군 거창읍과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인데, 이곳에서 남쪽 150m 지점에 삼면봉인 611봉이 자리하고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봉우리다. 봉우리 정상부 잡목들이 점령한 평지에 삼각점(△거창439-1981재설)이 설치되어 있다. 


바쁜 와중에도 관술봉 코팅지가 걸린 나무둥치 옆에서 두규형의 협조로 남긴 인증. 

 

관술봉 남쪽 사면에서 다리쉼을 하는 백두들. 

 

 

관술봉에서 우틀하여 내려서다가, 

 

다시 오르면 이내 삼면봉(거창읍, 안의면, 남상면)인 611봉을 지나게 되고, 

 

이내 직진의 둔동 방향 등로를 두고 우틀하여 관동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우틀하여 둔동 방향으로 내려가면, 

 

<둔동 갈림길>

거창군 남상면 둔동리는 원둔동 마을에서 나온 이름으로, 남진, 동령, 신기, 원둔동의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남진(南眞)은 마을가에 참나무가 많아서 진목지라고 하다가 1973년 7월 함양군 안의면에서 진목리가 본면으로 들어온 뒤로 진목의 남쪽에 자리한다 하여 남진이라 하였다. 200여 년 전 밀양 박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동령(東嶺)은 마을 뒤의 관술령 줄기가 남쪽으로 달리다가 이곳에서 동쪽으로 뻗는 곳에 마을이 자리한다 하여 이름 붙여졌고 동용골이라고도 하며 200여 년 전에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신기(新基)는 100여 년 전 둔동 마을에서 떨어져 나와 밭들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라고 하며, 군위방씨가 처음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원둔동(元屯洞)은 마을 뒷산에 '옥등잔에 불을 켜서 걸어 놓은 명당자리가 있다'는 풍수설에 따르면 마을이 등불에 해당하여 등골(燈洞)이라 불리다가 등(燈)자가 둔(屯)자로 바뀌어 둔동(屯洞)이 되었는데, 600여 년 전 남원 양씨가 처음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묘지를 지나, 

 

좌측 등로가 희미한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 지점이 진양기맥을 걷는 산꾼들에게 관술령의 물길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능선 분기점이다. 관술령으로 이어지는 양쪽 능선 사이에 경작지가 있어서 물길의 향배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내려서서 자세히 살피면 이곳에서 우측 능선을 따라 내려서는 게 맞는 듯하다고 하여 우리도 우측길로 접어들어,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따라 파묘 자리를 지나서 내려서면, 

 

측 관동마을에서 관술령(관동고개)을 지나 좌측 둔동마을로 이어지는 포장 농로에 내려서서, 

 

좌측으로 농로를 따라 약간 진행하면 관술령 이정표가 있는 들머리가 나온다. 

 

<관술령(官述嶺)/관동고개>

관술령은 망덕산(망실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지(山枝)가 경남 거창군 거창읍과 경남 함양군 안의면을 가로막고 있다. 관술령은 이 산지 능선의 안부를 지나는 고갯길이다. 관술령에 관한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안의]에서 "관술령은 초재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와 이 산마루를 이룬다. 관아의 동쪽 20리 거창과의 경계에 있다."라는 기록에 등장한다. 이후 『대동지지(大東地志)』[거창]에 "관술산(官述山)은 남쪽 30리에 있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조선 지지 자료』[거창]의 고천면에는 안의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관술령이 수록되어 있다.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거창]에 부의 서쪽 안의와의 경계에 관술현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조령, 남쪽으로 골산현도 묘사되어 있다. 그 밖에 『영남 지도(嶺南地圖)』[거창],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7첩 3면] 등 조선 후기 고지도에 관술치, 관술산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관술령 지명의 유래는 전설에서 안의 현감이 부임할 때 이 재를 넘어서 안의에 관행차(官行次)를 했기 때문에 고개 이름이 관술령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지명 유래로 “옛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이 고개를 지날 때 의관을 벗어 걸어놓고 술 한잔 하면서 발길을 쉬어 가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관술령은 망덕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지를 넘는 고갯길로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거창읍을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로였다. 안의면에서 황곡리를 지나 북동 방향으로 뻗은 계곡을 따라 도림리를 거쳐 관술령 고개를 넘어 거창읍 장팔리를 통해 거창읍 중심부로 연결된다. 관술령은 거창군 일대에서 잘 발달된 남서-북동 방향의 구조선을 따라 발달하였다. 관술령 고개 서쪽 아래의 관술령마을(혹은 관동, 왕암)에는 성황당이 있다. 

현재 관술령 고갯길은 더 이상 이용되지 않으며, 안의면에서 북동쪽으로 거창군 마리면과 거창읍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을 이용하여 사람 및 물자 등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동차 중심의 도로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관술령은 거창읍과 안의를 잇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이정표에는 이곳을 관술령으로 적고 있지만, 옛 기록의 관술령은 잠시 전에 내려온 북동쪽 약 0.7km 지점의 611봉을 지칭하고 이곳은 관동고개로 부르는데, 관동고개의 관동(關東)이라는 명칭은 관내(안의)의 동쪽에 위치한 땅이라는 데서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우측 관동마을 방향. 

 

 

관동고개(관술령)에서 잠시 행장을 정비하고, 방향 표시가 애매하게 바뀌어 있는 이정표 뒤로 이어진 들머리로 들어서서,

 

오르다가 뒤돌아 보니 가운데 경작지 우측 능선이 기맥 능선처럼 보이기도 하여, 가운데 골짜기의 논 물이 어디로 흘러내려가느냐에 따라 정확한 기맥길이 정해질 텐데, 대체로 논 물이 우측 거창 방향으로 흐를 것으로 보여 잠시 전에 내려선 좌측 능선이 기맥길이 맞는 듯하고,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따라 오르는데, 

 

따르는 기맥 능선이 之자로 방향을 바꾸며 우전방으로 가야 할 망설봉쯤이 올려다 보이고, 

 

호젓한 등로를 따라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다가 3000산 오르기 한현우님의 '숙패봉' 표지기가 걸린 봉우리를 지나, 

 

잘록이 안부를 지나 제법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오르는데,  

 

좌후방으로 거창군 남상면의 승강기전문농공단지 방향이 조망되고, 

 

이내 '망설봉' 표지석과 이정표가 누워있는 능선 갈림길 삼거리에 도착하여, 우측 숙지령 방향 오름길을 따라야 한다. 

 

이곳은 능선 갈림길 삼거리로 지금은 이정표가 부서지고 쓰러져 있어서 정확한 방향을 알아볼 수 없지만, 옛 산행기의 이정표는 "←둔동마을 1.9km, ↓둔동마을 3.0km, 숙지령→ 1.2km"로 삼거리 갈림길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나온 관동고개 방향은 '↓둔동마을 3.0km' 방향이고, 능선 아래 둔동마을로 바로 이어지는 방향은 좌측 '←둔동마을 1.9km' 방향이며, 가야 할 망설봉 방향 기맥길은 우측 '숙지령→ 1.2km' 방향이다. 따라서 이곳쯤을 '숙패령'으로 표시한 네이버지도가 맞게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 자리한 '망설봉(561.8m)' 표지석의 고도는 얼추 맞는 듯하지만, '망설봉'은 이곳에서 500여 미터를 더 가야 하는 봉우리인데 왜 이곳에 '망설봉'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설치 이유가 궁금한 '망설봉(561.8m)' 표지석. 

 

 

우측 제법 가파른 능선 오름길을 따라 봉우리를 올라서는데 이 봉우리가 망설봉이 아니라 무명봉일 뿐이고, 

 

또다시 더욱 가팔라 보이는 오름길을 힘겹게 올라, 

 

빼곡한 잡목 가지에 표지기들이 삼각점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망설봉에 도착하니, 봉우리 남측 양지바른 곳에서 앞서간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관술령 이후부터는 빨래판 구간이라더니 봉우리 오르내림의 경사가 관술령 이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가팔라 춘천치까지 가야 할 기맥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망설봉(望雪峰, 620.7m)>
경남 거창군 남상면 둔동리와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덕우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상에는  삼각점(△거창308-1981재설)이 설치되어 있고, 이곳도 이정표는 잘 설치되어 있지만 정상에는 잡목과 잡초가 가득하여 주위의 멋진 조망이 아쉽지만, 정상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거망산과 황석산이 멋지게 조망되고 좌측에는 감악산과 감악평전이 시야에 들어온다.

 

망설봉 좌측 양지바른 곳에서 빨래판 구간에 대비하여 다리쉼을 하는 백두들.

 

 

망설봉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다가,  

 

다시 조금 오르면 표지기가 한두개 걸린 593.9봉을 지나게 되고,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다가, 

 

주위의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울 듯 보이는 묘지를 지나는데,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둔동리 동령마을 방향으로 88고속도로와 함양울산고속도로 터널 공사 현장이 조망되며, 

 

길이 없는 직진의 능선이 기맥능선으로 보이지만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희미한 등로를 따라 급하게 내려서면, 

 

앞쪽으로 가야 할 기선봉쯤이 건너다 보이더니,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면, 

 

아담하게 자리한 묘지를 지나게 되는데 건너편 능선 자락의 함양울산간고속도로 터널공사 현장이 내려다 보이고, 

 

자락에 함양울산간고속도로 터널공사 현장이 있는 능선과 그 뒤쪽의 풍력발전탑이 있는 거창 감악산(紺岳山, 951m) 능선 사이에는 클럽디거창CC가 자리하고 있을 터이고, 풍력발전탑들이 있는 저 감악산은 거창의 안산으로 본래의 이름은 대덕산(大德山)이었다고 한다. 

 

살짝 당겨본 함양울산간고속도로 터널공사 현장. 

 

 

잠시 더 다소간 완만해진 능선길을 내려서면, 

 

좌측 신기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와 서낭당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는 숙지령을 지나게 되는데, 컨디션이 나빠 산행을 일찍 끝내려는 백두들이 좌측 신기마을 방향으로 탈출키로 한 곳이다. 

 

<숙지령(宿只嶺, 455m)>
거창군 남상면 둔동리 신기마을과 함양군 안의면 불당골을 잇는 고개로, 고개 정상부 주위에는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과거에는 왕래가 많았던지 안부 길흔적이 깊게 파여 있고 서낭당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다.

숙지령은 좌측 둔동리 신기(新基) 마을은 100여 년 전 둔동마을에서 떨어져 나와 밭들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고 불렀는데, 한자 표기로 신기라 하였으며, 군위 방씨가 처음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숙지령 이정표. 

 

 

산행을 일찍 마치려는 분들이 숙지령에서 좌측 신기마을로 탈출할 수 있도록 숙지령 기선봉 방향 기맥길 들머리에 나무를 횡으로 설치하여 표시를 해 놓고는 기선봉 방향 기맥길로 들어서면, 

 

잠시 그림같은 호젓한 솔숲길이 이어지다가. 

 

이내 급경사의 오름길을 10여분 오르면, 

 

좌전방으로 가야 할 636봉쯤이 건너다 보이는 582봉쯤을 지나며 기맥길은 다소간 완만해지고, 

 

기맥길이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측으로 휘어져 내리더니, 

 

잘록이 안부를 지나는데,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두고 좌측 오름길로 진행하라는 이정표를 따라 좌측 기선봉 오름길로 들어서면, 

 

좌틀하여 진행하라는 갈림길 이정표.

 

나무계단까지 설치된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우후방 기백산 방향. 

 

표지기들이 나부끼는 개념도 상의 636봉인 643.5봉에 올라 잠시 다리쉼을 한다. 

 

작은 소나무둥치에 걸린 643.5봉 산패. 

 

 북서쪽 기백산 방향.

 

동쪽 거창의 감악산(紺岳山, 951m) 방향. 

 

 

643.5봉을 내려서서 기선봉이 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소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 안부를 지나 오르면, 

 

좌측으로 감악산이 시원스레 조망되는 묘지가 자리한 봉우리를 지나고, 

 

상석이 없는 묘지가 있는 안부를 지나 다시 봉우리를 오르면, 

 

개념도에 '큰바위'로 표시된 바위를 지나서, 

 

또다시 기선봉이 2.8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이내 봉우리를 한두개 넘었다고 느낄 즈음이면 어김없이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숙지령에서 기선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연이어지는 봉우리 갯수보다 이정표의 숫자가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소간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르는데, 

 

개념도의 683봉쯤을 지나는데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틀하여 진행하라는 이정표에서 좌측 기산봉 방향으로 내려서면, 

 

우후방 안의면 도림리 방향 멀리로 기백산의 뾰족한 모습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이더니, 

 

기선봉이 2.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685봉을 지나고, 

 

육산 능선에 커다란 선바위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우측으로 우회하여 내려서면, 

 

<선바위로 상징되는 변강쇠와 그의 짝 옹녀가 마지막에 정착한 함양군(咸陽郡)>

전국 각지에 있는 수없이 많은 선바위는 남자가 꿈꾸는 이상형의 남자인 변강쇠를 떠올리게 하는데, 저마다 변강쇠를 꿈꾸며 멍멍탕에다 별별 보신음식으로 보양해 보지만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남자들이 가장 동경하는 여인 또한 변강쇠와 궁합이 맞는 옹녀가 아닌가 싶다.
이 고장 함양군(咸陽郡) 마천면 삼봉산 아래 등구마을이 바로 천하의 음남(淫男)과 음녀(淫女)인 변강쇠와 옹녀가 육욕(肉慾)을 탐닉(耽溺)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인간답게 살고자 조용하게 찾아온 곳이라 한다. 함양(咸陽) 마천면 등구마을은 변강쇠와 옹녀가 전국을 떠돌다 마지막에 정착해 살던 곳으로 주변경관도 절정이며 함양에서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가는 길목이다.
판소리 “변강쇠 타령”의 주제를 보면, 천하의 음남인 변강쇠와 천하의 음녀인 옹녀가 육욕만을 탐닉하다가 스스로 응징된다는 내용으로 성문화와 도덕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권선징악이 깔려 있는 교육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양기맥 산꾼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선바위와 고인돌 바위를 지나게 된다. 

 

 

고인돌 바위를 지난 670봉쯤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다가, 

 

잘록한 안부를 지나 능선 봉우리를 지나는데 좌측 감악산 우측 멀리로 황매산쯤이 가늠되고,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면 좌.우로 길흔적이 뚜렷한 옛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좌측은 마을 부근에 참나무가 많아서 명명된 진목(眞木) 마을로 이어지고, 우측은 안의면 황곡리 독자마을로 이어지는 듯하다. 

 

 

다시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진달래가 장식된 멋진 솔숲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88고속도로를 건너 다음구간에 가게 될 수영덤이를 거쳐 신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널찍한 공터에 기선봉이 1.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661.3봉쯤을 지난다. 

 

 

바위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능선을 지나,  

 

작은 봉우리들을 연이어 오르내리다가, 

 

기맥 산꾼들이 부채바위라 명명한 암릉을 지나고, 

 

다시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라 폐헬기장으로 보이는 널찍한 공터봉인 654봉을 지나며 좌측으로 내려서면, 

 

가끔씩 커다란 바위가 놓여있는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여러 개의 바위들이 진입을 막고 있는 647봉쯤을 우회하여 지나고, 

 

한때는 헬기장으로 쓰였음직한 편평한 봉우리를 지나, 

 

또다른 폐헬기장 봉우리를 지나는데 이곳을 포함하여 헬기장 용도쯤으로 정비된 봉우리가 연이어 나타나더니, 

 

급하지 않은 능선 오름길을 올라 삼각점과 이정표가 있는 편평한 숲으로 보이는 기선봉에 도착한다. 

 

<기선봉(670.4m)>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남상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폐헬기장에 이정표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부근 고만고만한 여러 봉우리에는 널찍한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편평한 공터에 이제는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곳 기선봉과 잠시 후 오를 사별산은 우리가 가진 개념도나 네이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산명이지만 옛 등산지도나 거창군에서 세운 이정표에 표시되어 있으므로 고증을 거쳐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기선봉 코팅지를 고쳐 다는 영규형. 

 

사별산까지 1.3km 남았다는 기선봉 이정표. 

 

 

잠시의 다리쉼을 가졌던 기선봉에서 약간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면 이내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세월의 무개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서 뚜렷한 직진의 능선을 두고 직좌틀하여 내려서면, 

 

이내 좌측 춘전리 임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기맥길은 우틀하여 '사별산 1.1km'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고,

 

능선 구분이 모호해서 그런지 족적이 이리저리 흩어진 사면에서 그나마 보다 뚜렷한 등로의 흔적을 더듬어 내려서는데, 

 

우측 안의면과 황석산 방향으로 조망이 살짝 트이는 지점을 지나고.  

 

등로 우측에 황석산 방향 조망이 멋진 묘지가 쉬어가라 유혹하지만, 

 

따르던 등로가 남재 직전에서 능선을 두고 좌측 아래의 수레길로 내려서니, 

 

수레길 좌측 아래로 작은 묘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족 묘원이 있는데, 그 아래에 시멘트포장 임도가 여러 갈래 나 있고 건너편으로는 다음구간에 오를 식기봉 능선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이제는 사별산만 오름면 오늘 산행의 난코스인 빨래판 구간도 끝나고 이내 목적지인 춘전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금은 여유로워진 걸음으로 주변 조망도 살피는데 앞서 갔던 영규형이 되돌아오며, 김.오 형수님 두 분이 알바에 나섰다며 통화 중이던 전화기를 건넨다. 아마도 기선봉 내림길에서 두어 군데의 알바주의 지점 중 한 곳에서 우측  황곡리 방향 지능선으로 알바에 나섰던 모양이다. 그리 많이 내려가지는 않은 듯하여 다시 갔던 길을 되짚어 능선으로 오르시라고 하고는, 두 분이 능선으로 오르면 모시고 오르려고 기선봉 방향으로 되돌아 진행하는데 영규형이 젭싸게 먼저 올라가더니 20여 분 만에 두 분을 모시고 내려온다. 능선 갈림길에서 이곳까지 10여 분 걸렸으니 실제 알바는 왕복 10여 분을 한 샘이다. 땀방울이 베어나기는 하지만 환한 모습으로 복귀하신 두 분께 박수를 보내며 다시금 오늘의 목적지인 춘전치를 향한다. 

 

 

알바에서 복귀한 분들과 함께 좌측 춘전리 방향으로는 수레길이 이어지는 남재(嵐峙)를 지나 0.6km 거리의 사별산 오름길로 들어서면, 

 

<남재(嵐峙, 495m)>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 남재마을과 함양군 안의면 황곡리를 잇는 고개다. 고개 좌측 거창 쪽에는 커다란 농장과 꽤나 큰 규모의 가족묘지가 있어서 묘지길로 보이는 뚜렷한 수레길이 이어져 있지만, 고개 우측 황곡리 방향으로는 희미한 옛길의 흔적만 남아 있다. 

남재의 '남(嵐)'자는 '남기 남(嵐)'자로, 남기(嵐氣)는 산속에서 생기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말하는데, 아지랑이가 많이 피는 재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우측 안의면 황곡리 방향. 

 

좌측 남상면 춘전리 방향. 

 

코가 닿을듯한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사별산에 올라섰다고 생각하였지만 겨우 350여 미터 진행한 681봉쯤이고,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사별산 전위봉인 695봉쯤에 오르니 앞서 갔던 백두들이 다리쉼을 하며 기다리고 있다. 

 

 

695봉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너무나 뚜렷하여 카메라에 담아 보았는데, 

 

지리산 천왕봉이다!

 

 

두규형이 나눠준 사과 한 조각에 기운을 얻어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니, 

 

춘전치가 2.4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커다란 바위에 기대어 서 있는 개념도상 692봉인 사별산 정상에 도착한다. ​

 

<사별산(705m)>
거창군 남상면과 함양군 수동면, 안의면의 경계능선에 자리한 삼면봉이다. 북서쪽 아래 안의면 황곡리(黃谷里)에 '새벌'이라는 지명이 있는 걸로 보아 '새벌'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사별산은 좌측은 거창군 남상면이 계속되지만, 우측이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에서 수동면(水東面)으로 바뀌는 삼면봉인데, 우측으로 뻗어 나가는 능선은 함양군 안의면과 수동면을 가르며 북서진 하여 '산의 모습이 바느질할 때 손끝에 끼는 골무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골무산(552.9m) 방향으로 이어지며, 기맥길은 좌측으로 뻗어 내려 춘전치를 거쳐 식기봉으로 이어진다.

사별산 이름이 특이한데, 어떤 사람이 부인(남편)과 이 산과의 인연으로 동고동락하던 사람과 사별하였기에 그리 불려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별산 인증.

 

 

사별산에서 직진의 골무산 방향 능선을 두고 좌틀하여 가파른 절벽같은 사면을 지그제그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좌.우가 모두 가파른 다소간 좁지만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춘전치가 1.9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자리한 안부를 지나게 되고,

 

다시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 춘전치가 1.9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 

 

조금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면 '628.3m'봉 산패가 걸린 개념도의 635봉을 지나게 된다.

 

이제 좌측으로 보이는 사별산과 기선봉 방향.  

 

 

소나무가 떨군 갈비로 덮인 묘지를 지나 내려서서, 

 

우측 사면이 벌목되어 조망이 트인 능선을 지나는데, 

 

우측 수동면 죽산리 차라골 방향으로 지리산 천왕봉쯤이 멋지게 가늠되고,  

 

다시 밀성박씨들 묘지를 지나 내려서면,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춘전리 남재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계단식으로 내려서는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를 지나는데, 

 

되돌아본 635봉(좌)과 사선봉(우)이 저만치 멀어져 있다.  

 

 

우측이 벌목된 소나무숲 능선을 따르다가, 

 

개념도의 529봉쯤을 오르는데, 

 

좌측 거창군 방향의 능선이 멋진 모습으로 보이고, 

 

산행 막바지라 짧은 오름길도 무척이나 힘겹게 올라 춘전치가 0.7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개념도의 529봉을 지난다. 

 

돌아본 635봉(좌)과 사별산(우) 방향. 

 

 

529봉을 지나자 앞쪽으로 88고속도로가 지나는 춘전치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좌측 대산천이 흐르는 골짜기로 멀리의 거창분지 방향. 

 

<거창읍과 거창분지 조망> 
거창분지(居昌盆地)는  경남 거창군 거창읍 일대에 펼쳐진 분지로 달걀 모양의 침식분지로, 북서쪽에는 취우령(驟雨嶺, 795m), 남서쪽에는 관술령(官述嶺:554 m), 남동쪽에는 감토산(紺土山, 520m), 동쪽에는 일산봉(日傘峰, 627m) 등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黃江)이 분지를 남북으로 흐르고, 그 밖에 여러 개의 지류가 흘러들어 황강과 합류한다. 

 

살짝 당겨본 가야산 상왕봉쯤도 가늠되는 우두산과 비계산 방향. 

 

지나온 진양기맥 방향. 

 

밧줄이라도 잡아야 할 듯 보이는 가파른 529봉 내림길 능선은 벌목이 되어 가시나무와 잡목이 진행을 방해하고, 

 

살짝 당겨본 춘전리 외춘(남령)마을 방향. 

 

숨은 그림 찾기, 애마는 어디에?

 

가파른 능선 내림길을 내려서자 다시 완만해지며 좌측 아래 방향 수레길 갈림길에서 직진의 능선길을 따르면, 

 

이내 춘전치를 지나는 88고속도로 절개지 상단에 도착하여 좌측 희미한 능선 숲길을 두고 직진의 절개지 관리용 철계단을 내려서서, 

 

내려선 철계단 모습. 

 

절개지 중간 부분의 시멘트 포장면에 서면 아래로 춘전치를 지나는 1084번 지방도와 88고속도로가 차래로 내려다 보이지만, 1084번 지방도로 내려서는 부분에 철망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통과가 어려울 듯 보여, 

 

시멘트포장면을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면, 

 

좌측 절개지 사면으로 이어지는 등로에 접속하게 되고, 

 

절개지 사면을 따라 내려서면 춘전치로 이어지는 농로 날머리에 도착하게 된다. 

 

춘전치 날머리의 이정표. 

 

<춘전치(春田峙)>
경남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 외염전마을과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1084번 지방도와 대구에서 광주까지 이어지는 88고속도로(달빛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는 곳이다. 춘전(春田)이란 지명은 밭이 많은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춘전리(春田里)는 임진왜란 때 엄씨 성을 가진 신선같은 사람이 살던 언덕이라 하여 엄능(嚴陵)이라 하다가, 뒤에 지금의 내춘을 중심으로 엄전(嚴田)이라 하여 “음지이”라고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안의 안의면에 속하게 되어서 밭이 많은 곳이라 춘전(春田)이라 했다 하며, 1973년에 함양군 안의면에서 거창군 남상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춘전치 날머리에서 기맥 산행을 마치며. 

 

 

1084번 지방도에 접속하여,  

 

돌아본 춘전치 날머리 방향. 

 

좌측 도로를 따라 애마가 기다리는 외춘마을까지 진행하는데, 

 

다음 구간에 가게 될 우측 88고속도로를 건너는 춘전1육교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외춘마을로 들어서자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버스가 눈에 들어온다. 

 

외춘(남령)마을 전경.

 

 

이 마을의 정확한 이름은 아직도 의문인데,

춘전교 옆에는 남령마을, 마을회관에는 외춘마을, 버스정류장에는 춘전마을로 표시되어 있다! 

 

 

함양으로 이동하여 먼지와 피로를 씻어내고,

 

별점은 높은데 다시는 가고싶지 않은 늘봄가든이라는 한정식 식당에서, 

 

부지런한 서여사님이 채취한 더덕순을 데쳐서, 

 

늘봄가든의 대표 메뉴에 수육까지 더하였지만 서여사님의 두릅에 미치지 못하고,  

 

식당 직원과 쥔장의 무신경한 응대로 모처럼 찾은 진양기맥의 뒤풀이에 대한 기대가 거품처럼 사라졌다. 

 

우리는 가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오늘 걸은 진양기맥 산행은 코스와 날씨는 물론 기맥길에서 보기 드문 조망까지 좋았다.

그런데 끝부분인 뒤풀이 식당이 좋은 기분을 사라지게 했는데, 

음식이야 가리지 않는 백두들에게 크게 문제 될 게 아니었지만, 

종업원과 쥔장의 무신경한 서비스가 좋은 결말을 방해했는데...ㅉㅉ

친구가 보내준 "각설이 타령"에 대한 글로 결말을 바꾸었으면 한다. 

 

 

《각설이 타령~, 헉! 이런 뜻이...》

각설이를 한문으로 쓰면 각설이(覺說理)가 된다.
각설이의 각(覺)은 '깨달을 각(覺)'자이고, 설(說)은 '말씀 설(說)'이며, 이(理)는 '이치 리(理)'이다.

이를 풀이하면 "깨달음을 전하는 말로 이치를 알려 준다"는 뜻이 된다.
한마디로 깨치지 못한 민중들에게 세상이치를 알려준다는 뜻이라는 이야기다.

원조를 신라의 원효대사로 보고 있다.
원효대사가 한때 부처님의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 중생들이 알기 쉽도록

바가지를 치며 민중속에 들어가 법문을 노래하며 교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설이 타령은 '얼씨구'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얼씨구는 '얼의 씨를 구한다'는 의미라 한다.

“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 ”
이는 얼의 씨가 몸 안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 ”
이 또한 저얼의 씨도 몸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
이는 '전생에 깨달았던 영(靈)은 죽지 않고 이생에 다시 태어난다'라는 뜻이다.

“ 이놈의 자식이 이래봬도 정승판서의 자제로서 ~ ”
이 생에서는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전생에는 정승판서의 아들이었다는 전생론을 말하고 있다.

영(靈)은 돌고 돌아 다시 태어나는데

살아생전에 덕(德)을 쌓지 않으면 다음 생에 이 꼬라지가 되기 쉬우니 이 사실을 잘 알아라!

따라서 각설이는 영(靈)의 윤회를 노래한 선각자들의 민중문화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흥이 날 때 누구나 하는 소리로 ''얼씨구 절씨구'' 라는 용어를 쓰는데,
그 말의 어원은 다음과 같다.

역사상 900여 회나 되는 외세침략을 받았는데,
한번 전쟁을 치르고 나면 전쟁에 나간 남자들은 거의 씨가 말라버릴 정도로 많이 죽었다.

그러다 보니 졸지에 과부가 된 여자들과,
과년한 처녀들은 시집도 못 가고,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을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간다 해도 쉽게 씨를 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이 맺혀 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그 소리가 바로 “얼씨구 절씨구 지하자졸씨구''였다.

그 말 뜻은..

얼씨구(蘖氏求) : 세상에서 가장 멸시당하는 서자(庶子)의 씨라도 구해야겠네.
절씨구(卍氏求) : 당시 사회에서 천노(賤奴)였던 중의 씨라도 받아야겠네.
지하자졸씨구(至下者卒氏求) : 가장 낮은 졸병의 씨라도 구해야겠네.

이렇게 남자의 씨를 구하고자 했던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한자 원문을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얼씨구(孼氏求)란?
우리나라의 가족사에 서얼(庶孼)이란 말이 있다.
서자(庶子)와 얼자(孼子)를 합친 말이다.
서자(庶子)는 양반의 남자가 양가나 중인의 여자를 첩으로 얻어 낳은 자식을 말하며,
얼자(孼子)란 천민의 여자로부터 얻은 자식을 말한다.
그러니 천대받는 서얼(庶孼)의 씨라도 구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또 절씨구(卍氏求)란?
절간에서 씨를 구한다는 의미이니 중의 씨를 구한다는 뜻인데,
당시 승려는 사노비(私奴婢)와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妓生), 공장(工匠)과 함께 팔천(八賤)이라 하여 천민(賤民)에서도 최하위 천민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천민에 속해있는 중의 씨라도 구한다는 의미가 된다.

지하자졸씨구(至下子卒氏救)는 세상에서 가장 바닥생활을 하던 자로 어딘가 모자라고 신체적으로 불구(至下子)인 이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최하위 졸병들의 수발을 들며 허드레 막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병신(病身)인 졸병의 씨라도 구한다는 의미라 한다.

아마도 전해지는 일본의 ''기모노 내력'''과 비슷한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우린 각설이 타령에 이런 가슴아픈 의미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각설이 타령은 거지들이 구걸하는 모습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더 나아가 술자리에서 건배를 하며 태평성대를 즐기는 듯..
‘얼씨구 절씨구 지하자 좋다’하면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있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런지?

이제라도 이러한 슬픈 역사와 각설이 타령에 숨어있는 비애(悲哀)를 가슴깊이 새기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부강한 나라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겠다.

- 좋은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