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장소 : 진양기맥 05차(춘전치~밀치) 경남 거창군, 함양군, 산청군.
산행일시 : 2023. 04. 22.(토)
산행코스 : 춘전치(1084지방도, 88고속도로)(1.9km) ~ 식기봉(670.5m) ~ 덕갈산(669.2m) ~ 수영덤이(1034 도로) ~ 매봉산 갈림길 ~ 매봉산(810m) 왕복 ~ 매봉산 갈림길 ~ 갈전산(765.1m) ~ 갈밭재 ~ 728봉 ~ 철마산(773.9m) ~ 706봉 ~ 흰머리재 ~ 638봉 ~ 예동고개 ~ 바랑산(797.4m) ~ 큰재 ~ 소룡산(760.9m) ~ 밀치(502.6m, 59번 국도) (약 18.7km, 9시간 소요)
★ B팀은 예동마을 임도에서 예동마을로 하산.
산행참석 : 15 백두.
<산행지도>
이번 구간 등로는 전반적으로 무난하다. 초반 식기봉 올라가는 구간이 좀 가파르지만 식기봉만 지나면 덕갈산까지는 완만한 능선이며 곧바로 수영덤이로 내려가게 된다. 수영덤이 통과는 기존의 신원면 방향 종돈장 직전에 있는 들머리가 아닌 새로이 만들어진 생태통로를 건너 바로 벌목된 능선으로 오르면 된다. 이후 매봉산 오름길은 꽤나 긴 오르막이지만 그리 가파르지는 않아 꾸준히 올라가면 되고, 매봉산은 갈림길에서 약 300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가는 길이 완만하여 매봉산 정상을 쉽게 다녀올 수 있다.
매봉산을 지나면 도중에 잠깐의 가파른 오름길이 있기는 하지만 철마산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고, 철마산 내림길에서는 갈림길을 주의하여 기맥 능선을 찾아 내려서야 한다. 이후 흰머리재에서 바랑산 직전의 예동고개까지는 기맥길이 거친 곳이 많으므로 임도와 능선을 잘 섞어서 진행해야 하고, 바랑산은 그리 가파르지는 않지만 고도차가 커서 꽤나 긴 오름길을 올라야 한다.
그 다음은 이번 구간에서 가장 힘든 소룡산인데, 산행 막바지인데다가 경사가 아주 가팔라서 힘겹게 올라야 하고, 이후 정수지맥 분기점에서 밀치로 내려서는 능선은 잡목이 많으므로 조심스레 진행해야 한다. 또한 바랑산 내림길과 소룡산 내림길에서 직진의 뚜렷한 능선길을 두고 좌틀해야 하는 갈림길이 있으므로 알바에 주의해야 한다.
지난 진양기맥 바래기재~춘전치 구간을 우려와 달리 무난하게 마친 상태라 이번 춘천치~밀치 구간은 지난 구간에 비해 거리가 6km가량 짧아서 다소 편안한 느낌으로 산행계획을 했다. 더욱이나 산행을 짧게 하고 싶은 분들을 위한 탈출도 예동마을이 기맥 능선과 가까이 있어서 문제 될 게 없고, 뒤풀이 식당만 물색하면 멋진 산행이 될 듯했다.
또한 이번 구간은 진양기맥 중에서 조망이 좋은 구간에 속하여, 전반부인 식기봉과 덕갈산 구간은 잡목이 가득하고 매봉산까지는 빽빽한 숲속이지만, 철마산 부근에서 잠깐 조망을 보여준 후에 바랑산을 지나 소룡산에 오르면 지리산 천왕봉과 함께 황매산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날씨만 좋다면 지리산 천왕봉의 높은 봉우리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바람대로 되지는 않아, 산행 출발 이틀 전까지도 맑은 날씨가 될 것이라는 일기 예보에 갑자기 짙은 황사가 예보되며 멋진 조망에 대한 기대는 집에다 고스란히 접어두고 배낭을 꾸려 산행 버스가 출발하는 양재로 향한다.
춘전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두 시간여의 쪽잠을 더 청하다가 산행 준비를 하여 버스문을 나서니, 일기예보대로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도 가야 할 식기봉 능선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여 혹여나 중국발 미세먼지가 이곳만은 피해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밀치를 향해 진양기맥 산행을 시작한다.
춘전(외춘)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마을 앞 도로를 따라 춘전치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달빛고속도로(88고속도로)를 건너는 춘전1육교 방향의 좌측 시멘트포장 도로로 들어서서,
돌아본 춘전마을과 기선봉 방향.
도로를 따라 88고속도로를 넘는 춘전1육교를 건너고,
우측 88고속도로 광주 방향.
우측 도로를 따라 절개지 사면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우측으로 보이는 춘전치를 지나는 88고속도로 건너편의 절개지 규모가 엄청나 보인다.
<춘전치(春田峙)>
경남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 외춘(춘전)마을과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 치라골 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 1084번 지방도와 대구에서 광주까지 이어지는 88고속도로(달빛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는 곳이다. 춘전(春田)이란 지명은 밭이 많은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춘전리(春田里)는 임진왜란 때 엄씨 성을 가진 신선같은 사람이 살던 언덕이라 하여 엄능(嚴陵)이라 하다가, 뒤에 지금의 내춘을 중심으로 엄전(嚴田)이라 하여 “음지이”라고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안의면에 속하게 되어서 밭이 많은 곳이라 춘전(春田)이라 했다 하며, 1973년에 함양군 안의면에서 거창군 남상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따르던 임도가 좌측으로 꺾여져 올라가는 지점에서 우측 절개지 가장자리로 들어서는 들머리가 있는데, 그냥 임도를 따라 새로이 조성되고 있는 암자까지 진행하여 기맥능선에 접속해도 되지만, 갈 수 있는 기맥 능선을 두고 우회할 필요는 없어 보여 바로 절개지 가장자리 들머리로 들어서면,
잡목이 빼곡한 절개지 가장자리를 따라 가파른 오름길을 힘겹게 오르게 되고,
5분여 만에 절개지 위로 올라서면 다소 완만하고 선명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좌측으로 잠시 전에 헤어졌던 시멘트포장도로가 보이며 계곡을 건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잡목 길을 지나면,
집터를 닦고 있는지 흙덕미가 앞을 가로막아 서는데,
집터 흙더미를 우측으로 우회하여 숲으로 들어 조금 올라,
좌측 아래로 조성되고 있는 암자가 내려다 보이는 파묘 자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장을 정비한다.
좌측 조성되고 있는 암자 전경.
돌아본 춘전치 방향.
파묘 터를 뒤로하면 좌측 암자로 이어지는 갈림길에는 철망 문이 닫혀 있고,
뒤돌아본 춘천지 건너편으로는 지난 산행에서 이어온 망덕산~기선봉 능선이 건너다 보이며,
또다른 파묘 터를 지나 숲으로 들어 오르면,
587m쯤의 능선 봉우리를 지나고,
정상부에 파인 흔적이 있는 능선 봉우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잡목이 들어찬 편평한 정상부 바로 아래에 정상석(식기봉/670m/함양군)이 자리한 식기봉에 도착한다.
<식기봉(食器峰, 670.5m)>
식기봉은 삼군봉으로, 좌측은 그대로 거창군 남상면이지만 우측이 함양군 수동면에서 산청군 생초면(生草面)으로 바뀌는 봉우리이다. 정상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별다른 조망이 없고 함양군에서 설치한 정상석이 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을 식기(食器)라 하는데, 이곳은 그저 이어지는 능선의 봉우리로, 봉우리의 모양이 밥그릇을 닮았다는 것인지 그 유래를 알 길이 없다.
식기봉 정상 인증.
식기봉에서 좌틀하여 북동 방향으로 덕갈산을 향하면,
완만하지만 키 작은 철쭉이 빼곡한 거친 등로를 따라 사각형의 보도블록 몇 개가 흩어져 있는 폐헬기장(668m)을 지나,
당겨본 좌측 사별산 방향.
잡목이 빼곡한 좌측의 능선을 두고 뚜렷한 등로를 따라 우측 사면의 안부 느낌의 지계곡을 지나게 되고,
쓰러진 나무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완만하지만 희미한 능선 등로를 따르는데,
좌측으로 지난 산행에서 걸었던 기선봉 능선이 건너다 보이고,
평지 수준의 완만한 능선길을 오르면,
영산기맥 감방산과 연징산에서 보았던 형태의 정상석이 자리한 덕갈산 정상에 도착한다.
<덕갈산(德葛山, 669.2m)>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에 위치하며 산청군 생초면(生草面)을 경계 짓는다. 칡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가까운 곳에 '칡 갈(葛)' 자가 들어간 지명으로 갈전산, 갈전재가 있다. 남덕유산에서 분기하는 진양기맥 종주 등산로이자 거창군 경계를 일주하는 등산로에 위치하는 산이다. 뚜렷한 직진길은 감악산 가는 지능선으로 감악산까지는 약 10km, 월현산을 거쳐 합천호까지는 25km 되는 거리로 감악단맥을 이루는 능선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빨치산들이 이 산에 은거하며 게릴라전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오'라는 산꾼에 따르면, 칡이 많아 '갈(葛)'자를 쓴 게 아니라, '갈라지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즉 국어학자들에 따르면 예전 우리말 '가라'는 이리저리 갈라졌다는 의미에서 온 것이라 한다. 그러니 그런 모양에서 '가람', '가라' 즉 강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고, 가락동의 가락도 사실은 이 '가라'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이런 '가라'는 '우뚝 솟거나', '뾰족하다.'라는 의미도 있어 여기서 '칼'이 나온 것이며, 지금 우리가 쓰는 말 중에 '가르마'나 '가래' 같은 말이 다 '갈라지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갈골이나 갈말, 갈고개, 갈내 등도 다 같은 의미다. 또 '가리'는 곡식 더미를 뜻하기도 하니, 장작더미나 곡식을 쌓아놓은 것을 의미하므로 가리왕산이 이런 축이다. 이상과 같이 '갈'은 이런 정도의 의미이지 이를 칡과 연관시켜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말의 어원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부근의 갈전산이니 덕갈산 등은 다 이렇게 산꼭대기에서 두 갈레로 갈라진 모습을 보고 붙인 이름이지 칡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이다.
덕갈산 인증.
덕갈산에서 직진 등로도 선명하지만 우측 3시 방향으로 꺾어 급경사 내림길로 들어서면,
좌측 감악산과 우측 매봉산 사이의 수영덤이에서 신원면 방향으로 이어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고,
우측 묘지 방향 갈림길을 지나 철쭉이 뒤덮은 다소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르다가,
최근에 설치한 듯 보이는 생태통로가 우측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지점을 지나면,
1034번 지방도가 지나는 수영덤이에 도착하는데,
기존의 기맥 산꾼들은 좌측 신원면 방향의 도로를 따르다가 원산종돈과 태양광발전단지 직전의 이정표가 있는 우측 숲길 들머리로 진행하였지만,
우리는 우측 생태통로를 건너서 바로 능선으로 오르는 방식으로 진행해 보기로 한다.
<수영덤이/덕갈재>
수영덤이(수영덩이, 수영더미재, 숭더미재)는 경남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 산청군 생초면의 세 개 면이 갈리는 1034번 지방도(청수로)가 지나는 재이다. 그런데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수영덤이와 수영덩이가 혼용되고 있고, 지도 마다 다르게 표시하고 있어서 정확한 명칭표기 조차 명확치 않다. 네이버 지도에는 이곳을 수영덤이(산청군 생초면 향양리)로 표시하고 있고, 이곳 삼거리에서 동쪽 신원면 방향 450m 지점을 수영덩이(거창군 신원면 덕산리)로 표시하고 있지만, 다음 지도에는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의 '수영덤이골'이란 지명만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영덤이의 자세한 유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수영'이란 말이 '잘 여문 벼나 수수 따위의 이삭'을 뜻하는 수영(秀潁)과 '변방을 지키는 수자리의 진영(陣營)'을 뜻하는 수영(戍營)이란 말이 있고, '덤이'는 경남지방에서는 '바위'란 뜻의 방언이고, 경북지방에서는 '절벽'이란 뜻의 방언이므로, '수영덤이'란 말은 '군사들이 지키던 수자리가 있던 바위가 있는 곳'이라 추정해 볼수도 있겠다.
이곳 수영덤이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발생한 거창양민학살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 정부 합동조사단을 피습하여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0일과 11일에 걸쳐, 지리산 일대에서 인민군과 빨치산을 토벌하던 국군 제11사단 9연대가 무고한 민간인을 적과 내통한 ‘통비분자’라는 혐의로 무차별 대량 학살한 사건인 '거창양민학살사건'이 발생하였다. 자칫 역사 속에 묻힐뻔한 이 사건은 동년 3월 신중목(愼重穆)에 의해 국회에 폭로되어 동년 4월, 거창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정부합동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오던 중,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휘하 군인을 공비로 위장시켜 험준한 이 수영덤이 고개 부근에서 조사단을 향해 사격을 가함으로써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한 역사의 장소이다.
<거창양민학살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 정부 합동조사단 피습의 현장 수영덤이>
신원면은 지형적으로 감악산, 매봉산, 갈전산, 바랑산, 월여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오지인데, 산자락의 작은 밭뙈기로 연명하여 온 웃동 6개 리(里)는, 48년 여순 반란사건 이후 6.25전쟁 때까지 2년여에 걸쳐 낮에는 율원에 본부를 둔 경찰과 대동청년단의 등쌀에, 밤에는 거창에 인접한 산청군 오부면에 거점을 둔 남부군 김지회 부대의 빨치산에 의해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7월 하순부터 인민군이 신원면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인민군이 패퇴하여 철수한 10월 초부터는 국군을 등에 업은 의용경찰대가 인민군 점령 시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인공부역자를 잡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온갖 만행이 자행되었다.
그러던 중 12월 초 다시 김지회 부대원의 기습으로 빨치산 치하가 되었는데, 그다음 해에 당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의 공비토벌 전담부대가 편성되어, 2월 6일(정월 초하루) 저녁에 신원으로 들어왔지만 빨치산의 적정이 없자, 신원 면소재지인 과정리에 경찰대와 청년방위대원 1개 중대만 남기고 3대대는 계속 소룡산을 넘어 산청군 오부면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보록산과 소룡산 등지에 숨어서 국군과 경찰의 동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던 빨치산들이 밤중에 과정리를 기습하여 면사무소와 경찰지서를 불태우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사라졌다. 이에 분개한 산청에 있던 오익경 대령은 3대대장 한동석에게 즉시 신원으로 돌아 가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라고 명령하였다. ‘견벽청야(堅壁淸野)'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성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정리하여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전법이다. 일종의 초토화 작전인 셈이다. 이 ‘견벽청야 작전’ 부록에는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람은 전원 사살’, ‘공비(빨치산)의 근거지인 건물 전부 소각’,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 등의 3개 항이었다.
명령에 따라 3대대는 신원면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는데, 이날, 곧 2월 9일 밤에 또다시 빨치산의 기습으로 전투가 벌어져, 피아 수십 명씩 사상자를 낼 만큼 치열했던 전투는 새벽에야 멈췄다. 날이 밝자, 예기치 않게 많은 피해를 입어 격앙된 국군은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대현리, 중유리, 과정리, 와룡리에 있던 주민들을 남김없이 과정리의 신원국민학교로 집결시켰는데, 모여든 500명 이상의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이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양민학살의 참극은 이미 주민들을 집결시키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는데, 국군은 와룡리의 주민 100여 명을 집결지도 아닌 탄량골에 몰아넣고 집단 사살했으며, 덕산리 청연마을에서도 70여 명을 학살했다. 목숨을 부지하여 교실에 남은 사람들은 공포와 추위와 굶주림으로 떨며 그 밤을 지새웠다. 날이 새자 군인들은 이들 가운데 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 일부를 가려낸 뒤 나머지는 모두 열을 지워 박산골로 끌고 가 골짜기로 밀어 넣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총질을 끝낸 군인들은 산더미를 이룬 시체 위에 나뭇단을 져다가 덮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질렀다. 박산골은 불바다로 변하고 그 하늘은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1951년 2월 11일, 신원면의 해는 그렇게 저물었다.
이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3월 거창의 신중목(愼重穆, 2대 국회의원 및 7대 농림부장관 역임)에 의해 국회에 폭로되어, 동월 국회와 내무 · 법무 · 국방부의 합동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1951년 4월 합동진상 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오던 중,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신성모 국방 장관과 사전에 모의하여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의 수색 소대로 하여금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의 길목인 수영더미재(숭더미재)에서 합동진상조사단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 사건이 기소되어 같은 해 12월 대구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김종원, 오익경, 한동석, 이종대에게 3년에서 무기의 형이 선고되었지만, 사전 짜여진 각본에 의해 1년도 되지 않아 전원 특사로 출감하여 원대 복귀하였다. 박산골에 방치되었던 517구의 시체는 54년 삼월삼짇날 화장되어 과정리 합동분묘에 안치되었는데, 4.19가 난 뒤 20여 일 후 묘지석을 운반하던 주민들에 의해, 당시 주민들을 외면하고 군경 편에 섰던 면장 박영보가 청년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 뒤 5.16이 난 한 달 뒤 군인들에 의해 합동묘소의 봉분이 파헤쳐지고, 묘비가 정으로 쪼아 져 파묻혔는데, 묘비에 적힌 ‘우매한 군인’이란 문구가 군을 모독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또한 군사정권은 유족회 간부 18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및 박면장 타살사건 피의자로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87년 민주화의 거센 바람이 불어 신원면 사람들도 다시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이후 1996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고 그로 인해 ‘거창양민학살사건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펌)
<거창군 신원면(神院面)>
거창군의 남쪽 끝에 자리하며 동쪽은 합천군과, 서쪽과 남쪽은 산청군에 맞닿았다. 1914년까지는 삼가군(三嘉郡)이었으며, 동쪽은 율원면(栗院面)으로 수원리ㆍ양지리ㆍ구사리가, 서쪽에 신지면(神旨面)은 과정리ㆍ와룡리ㆍ대현리ㆍ중유리ㆍ덕산리ㆍ청수리 6개 리가 있었다. 1914년 삼가군이 합천군과 합하면서 신지, 율원 두 면을 묶어서 신원면으로 고쳐서 거창군에 편입시켰다. 지금은 9개 리로 나뉜다.
수영덤이로 내려서는 백두들.
이곳 수영덤이에서 생태통로를 건너 바로 능선으로 진행한 선답자의 산행기나 트랙을 본 적이 없었고,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산행이기에 주저하고 있는데, 뒤쫓아 온 김전무가 한번 시도해 보자는 말에 용기를 내어 도로를 건너 생태통로 옆으로 이어진 임도로 들어서서 오르다가,
바로 우측의 어린 편백나무가 식재된 능선으로 오르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고,
어린 편백나무를 밝지 않도록 주의하며 맑끔이 벌목된 능선을 따라 오르면,
좌측 기존의 원산종돈 직전 들머리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접속하여,
뚜렷한 능선길을 따라 오르는데,
좌측 원산종돈 축사에서 풍겨오는 퀘퀘한 돈사 냄새가 산뜻한 아침기운에 취해있던 산꾼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편백나무가 식재된 벌목지대를 지나 숲으로 들어,
계속해서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등로 우측으로 나무에 깊이 박힌 철조망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소나무숲 봉우리를 넘어 얕은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접어들면,
눈길을 끄는 커다란 삼형제 소나무를 지나며 철쭉이 만개한 소나무숲길이 이어지다가,
715봉쯤의 능선봉우리에 올라 다시 얕은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들어서면,
철쭉이 덮고 있는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게 되는데,
등로의 어린 새싹을 밟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고,
돌아본 지난 구간의 사별산 방향.
등로를 뒤덮은 철쭉꽃이 혹여 부딪혀 상처를 입지 않을까?를 고민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이에,
기둥만 남은 이정표가 있는 매봉산 갈림길 삼거리에 도착하여 기맥길은 우측 갈전산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좌측으로 3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매봉산을 들르지 않고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하겠다는 일행들을 남겨두고, 홀로 매봉산을 다녀오기로 한다.
매봉산으로 가는 등로는 편평하고 완만하게 이어져,
철쭉숲에 소나무숲 그늘이 드리워진 편안한 등로를 잠시 따르면,
이정표와 바위에 앉아있는 '매'의 모양을 한 정상석이 있는 매봉산에 도착하니 앞서갔던 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있지만, 나는 배낭을 갈림길에 두고 온 상태라 인증만 남기고 바로 갈림길로 되돌아나간다.
<매봉산(810m)>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에 있는 봉우리로, 갈림길에서 짧은 철쭉 터널을 지나면 예전에는 없던 매봉산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산세가 매를 닮았다 하여 매봉산으로 불리며, 거창군에서 화강암으로 참매를 조각해 세워놓았다. 실제 매봉산은 여기서 200m쯤을 더 가야 하지만, 대부분의 기맥꾼들은 정상석이 있는 이곳에서 인증을 남기고 돌아간다.
매봉산 정상석.
매봉산 정상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백두들.
황사먼지가 없었다면 더욱 싱그러웠을 솔밭 오솔길을 따라,
쥔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배낭이 있는 매봉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매봉산 갈림길 등로 옆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백두들과 함께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매봉산에서 식사를 하고 때맞춰 도착한 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남긴다.
매봉산 갈림길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도중 바랑산 직전 예동고개에서 예동마을로 하산할 분들과 밀재까지 완주할 분들이 따로 산행을 하기로 한다. 바랑산 직전의 예동고개까지 진행하는 분들의 이유있는 느긋함과는 달리 밀재까지 진행하여야 하는 분들은 하산 시간을 맞추어야 하기에 서둘러 갈전산을 향하면,
능선 구분조차 애매한 평퍼짐한 육산 능선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안부는 언제 지났는지 낌새조차 채지 못하는 사이에 작은 능선 봉우리인 733m 봉을 지나고,
화사한 철쭉의 유혹과 은은한 숲의 향기에 취해 무심코 걸음을 옮기는데,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지난 구간에서 올랐던 사별산이 언뜻 보이더니,
완만한 갈전산 오름길로 접어들어 오르다가,
돌아본 우.후방으로는 지난 산행에서 멋진 거창분지 조망을 보여주었던 망덕산쯤이 짙은 황사에도 희미하게 가늠되며,
점점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잠시 더 오르면,
칡이 많아 '칡 갈(葛)' 자를 쓰는 갈전산(葛田山)에 도착하는데 주변은 잡목만 무성하고 칡은 보이지 않는다.
<갈전산(葛田山, 765.1m)>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향양리와 거창군 신원면 정수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칡이 많아 '칡 갈(葛)' 자를 사용하여 갈전산( 葛田山)이라고 이름했다고 전해진다. 산 정상부에서는 북쪽의 거창 방향 조망이 뛰어나며, 덕갈산, 매봉산 등의 봉우리가 보인다고 하지만, 실제는 잡목 때문에 조망이 어렵다.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는 갈전산 이정표.
갈전산 정상 전경.
갈전산을 뒤로하고 완만하게 우측으로 휘어져내려가는 등로를 따르는데,
능선 등로 우측으로 송이버섯 산지 울타리인 철조망이 소나무 둥치에 깊이 박혀 있어서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작은 언덕 수준위 731봉쯤을 넘는데 봉우리 한켠에 자리한 대 저택의 쥔장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입산금지'를 알리는 양철 표지판이 거꾸로 달려있는 곳을 지난다.
그저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다 보니 네이버 지도에 표시된 좌측 청수리 대안마을 방향 안부 갈림길도 지나쳐서는 693.9봉 산패가 걸린 능선 봉우리도 그저 능선인 듯 지나치고,
그리 급하지 않은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다가,
그저 평지로 보이는 숲에 좌.우로 희미한 길흔적이 있지만 작은 나무둥치에 걸린 표지기가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갈밭재를 지나고,
<갈밭재(625m)>
경남 거창군 신원면 청수리 갈밭산촌과 산청군 생초면 향양리 고촌마을을 잇는 고개로, 오래전 갈밭산촌 사람들은 이 재를 넘어 향양리를 거쳐서 산청군 생초면으로 오가던 재로 꾀나 통행이 많았다고 하나, 지금은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기맥 산행을 하는 산꾼이나 지나는 고개가 되어 버렸다.
갈밭재 표지기.
문패 없는 천년집이 있는 언덕을 지나면,
좌측 신원면 청수리 대안마을로 이어질 듯 보이는 폐임도 종점쯤의 안부를 지나게 되는데, 인터넷 지도에는 이곳 안부 좌.우로 등산로가 표시되어 있다.
임도 종점이 있는 안부를 지나자 제법 가파른 오름길 등로에 고개를 내민 새싹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오르다가,
희미한 'Y'자 갈림길에서 좌측 희미한 오름길은 723.3봉으로 이어지겠지만 우측 사면의 뚜렷한 우회길을 따르고,
우측 지능선 봉우리 방향으로 족적이 어지러운 능선에 올라서서 살짝 좌측으로 휘어지며 진행하면,
철마산이 1.4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723.3봉을 넘어오는 기맥길에 접속하여,
철마산 방향 등로를 따르는데 앞서가던 분들이 등로 주변 숲에서 두릅을 찾고 있고,
완만하게 이어지던 능선길에서 모처럼 가파른 까풀막을 잠시 오르면,
명당이라는 봉우리 정상에 묵묘가 자리한 749.7봉을 지난다.
명당자리인데 터을 차지한 사람과 맞지를 않다고 하는 묵묘 모습.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6.25 동란의 상흔으로 보이는 교통호 흔적을 지나는데,
무심한 산꾼들은 오래잖은 무고한 희생의 흔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숲이 내어주는 선물을 받아 들기에 정신을 쏟을 뿐이고,
또한 자연이 내어준 작은 공간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철마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잠시 후에 오를 바랑산이 보이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넋이 서려있어서 저리도 붉은, 철쭉으로 장식된 능선길을 따르면,
네이버 지도에 우측 생초면 고촌마을 방향 갈림길로 표시되어 있고 철마산이 0.4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게 되는데,
이정표 바로 앞에는 또 다른 형태의 스테인리스 봉 이정표(임도 1.0km)가 세워져 있다.
고사리밭으로 바뀐 묘지를 지나,
성터의 흔적으로 보이는 바위너덜을 오르면,
등로 좌측에 770봉 산패가 걸린 나무둥치를 지나,
좌측 바랑산 방향.
평탄한 능선길을 50여 미터 더 진행하면 말끔히 정리된 헬기장을 지나게 된다.
산이 내어주는 고사리 선물을 받드는 백두들.
헬기장을 지나 절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200여 미터 구간은 평탄하지만 우측이 절벽인 암릉 구간으로,
우.후방 북서쪽 방향으로는 짙은 황사에도 지난 구간의 사별산은 물론 잠시 전에 지나온 갈전산과 매봉산이 조망되며,
우측 아래로는 향양리(向陽里)와 향양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 멀리의 사별산에서 식기봉 능선을 거쳐 갈전산으로 이어온 진양기맥 능선이 가늠되더니,
이정표와 생초면에서 세운 작은 대리석 정상석(철마산/744m/생초면)이 있는 철마산 정상에 도착한다.
<철마산(鐵馬山, 773.9m)>
경남 산청군 생초면 구평리와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꼭대기 바위 밑에 쇠로 만든 말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이곳 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국군 107연대와 지리산 빨치산 부대가 대치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고도 표시가 잘못된 철마산 정상석.
철마산 정상 인증.
진양기맥은 철마산에서 바로 좌측 능선으로 진행하여 흰머리재로 이어지지만 길이 없는 절벽과 대숲이 있는 구간이므로, 직진의 남서진하는 능선을 따라 706봉을 지나 기상관측시설이 있는 곳에서 임도를 따라 기맥 능선으로 돌아오는 우회 코스로 진행하여야 한다.
철마산을 뒤로하고 직진의 남서쪽 능선으로 이어진 뚜렷한 등로를 따르면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희미한 우측길은 전망바위를 지나 너덜을 내려서는 능선길이고, 좌측 뚜렷한 등로는 우회로이므로 어느 길로 가도 되지만,
좌측 우회길로 내려서다가 너덜에서 우측 위에 있는 전망바위로 오르면,
황사가 없었으면 지리산 주능선이 멋지게 조망되었을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되는데,
우측 아래로 길게 펼쳐진 산청군 생초면 구평리와 향양리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고,
짙은 황사로 지리산 주능선과 덕유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의 연봉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너덜을 내려서면,
잠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능선 좌측에 묘지가 있는 지점에서 뚜렷한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측 묘지 아래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고,
우측에서 이어오는 등로가 합류되는 지점을 지나서,
좌측 예동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안부에서 직진의 오름길로 진행하는데,
이곳에서 좌측의 예동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철마산 정상에서 좌측 능선을 따라 흰머리재로 이어지는 진양기맥에 보다 근접하여 진행하는 것이지만, 왠지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의 선답자들이 직진하여 706봉에서 좌측 능선을 따라 기상관측시설이 있는 능선으로 내려서서 임도를 따라 흰머리재로 진행하였기에 뭔가 곡절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표지기가 한두 개 걸려있는 좌측 예동마을 방향 갈림길을 두고 직진의 능선길로 들어서면,
또 다른 스테인리스 이정표가 우리가 진행하는 방향이 '노은' 방향이라고 표시하고 있고,
이내 706.1봉에 올라 표지기들이 걸려있는 좌측으로 내려간다.
잔가지들이 등로를 침범하여 진행을 방해하는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다 보면,
능선길을 가로막아서는 기상관측시설을 우회하여 지나,
좌측 신원면 신촌마을과 예동마을에서 우측 생초면 노은마을로 이어지는 포장 임도에 내려서서,
임도를 가로질러 숲길로 들어 바로 흰머리재로 진행해도 되지만 좌측 임도를 따라 흰머리재로 향하면,
앞쪽으로 잠시 후에 오를 바랑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우측으로 가야 할 흰머리재가 건너다 보이더니,
철마산에서 바로 내려서는 기맥능선에 접속하여 사거리 갈림길인 흰머리재를 지나게 된다.
<흰머리재>
산청군 생초면 구평리에서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 신촌(신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흰머리재의 명칭 유래는 찾을 길이 없고, 고개 좌측 아래로 보이는 신촌마을은 예동마을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신예동 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흰머리재 좌측 바랑산 방향,
돌아본 철마산에서 우리가 진행한 직진의 706봉 방향은 우회길이며, 철마산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바로 이곳 흰머리재로 이어지게 될 듯이 보인다.
흰머리재에서 직진의 임도를 따라 오르면,
기맥길은 좌측의 얕은 봉우리로 이어지는데 야생조수 방지용 펜스가 쳐진 밭이 가로막고 있어서 밭 우측으로 우회하는 수레길을 따라 진해해야 되지만 지름길인 잡초가 빼곡한 좌측으로 들어서고,
잡초와 찔레 넝쿨을 헤치다가 진행이 너무 어려워 우측 수레길 방향으로 탈출하여,
밭을 우회하여 오는 수레길에 다시 내려서서는 좌측 오름길로 들어서면,
수레길은 널찍한 묘지로 이어지는데 기맥길은 묘지 좌측으로 올라 숲길로 들어서게 된다.
거칠지만 제법 뚜렷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밋밋한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들어서면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의 623봉을 우회하는 사면길을 두고 좌측 직진의 오름길을 따르면,
베어 넘어뜨린 나무들이 어지러운 편평한 623봉에 올라 기맥길은 직우틀하여 내려서야 한다.
623봉에서 5분여의 짧은 쉼을 하고는 우틀하여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내려서면,
623봉을 우회하여 오는 희미한 등로와 합쳐져서 잡목이 무성한 등로를 따르게 되고,
좌측 보리밭 가장자리로 처진 야생조수 방지용 전기울타리를 따르다가,
보리밭 가장자리로 내려서서 우전방의 삼면봉인 620봉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짙은 황사에도 좌측 밭 너머로 바랑산과 소룡산 그리고 다음 구간에 오를 황매산이 가늠되며,
기맥길은 우전방의 620봉(삼면봉)을 올랐다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대부분의 선답자들이 620봉(삼면봉)을 좌회하는 임도를 따라 진행한다고 하여 우리도 그냥 좌회하는 임도를 따르기로 하고,
보리밭을 벗어나 다시 임도에 접속하여, 정면의 좌측은 거창군 신원면이 이어지나 우측이 산청군 생초면에서 오부면으로 바뀌는 삼면봉(620봉)을 좌회하는 임도를 따라,
좌측 바랑산 방향.
좌측 예동마을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오름길로 진행하면,
이내 삼면봉인 620봉을 넘어오는 기맥 능선에 접속하여 좌틀하여 능선을 차지한 밭 가장자리로 진행한다.
엣 산행기에는 이곳이 인삼밭이라고 하였는데, 인삼을 수확을 하고 두릅나무가 심긴 밭을 가로질러 숲길로 들어,
거칠지만 제법 뚜렷한 등로를 따라 오르면,
숲속 널찍한 공터에서 앞서간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는 636봉에 도착하여 과일을 나누며 잠시 쉼을 한다.
짧은 쉼을 뒤로하고 636봉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며 완만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다 보면,
이내 임도에 내려서서 우측 임도를 따르고,
능선을 차지한 경작지 가장자리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얕은 언덕길을 올라서면 정면으로 가야 할 바랑산이 지척으로 다가오고,
돌아본 철마산 방향과 신촌(신예동) 마을 방향.
이내 우측 산청군 오부면 왕촌리로 이어지는 임도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정면의 기맥 능선을 차지한 밭과 태양광발전단지를 우회하여 우측이나 좌측으로 우회하는 임도를 따라 진행하여 예동고개로 진행해도 된다.
살짝 당겨본 우측 오부면 대현리 방향.
이곳에서 좌.우 어느 쪽의 능선 우회 임도를 따라도 되지만 조금이라도 기맥 능선과 가깝게 진행하고자 좌측 예동마을 방향 임도 우측의 능선으로 들어서서,
한때는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지금은 정원수가 식재되어 잡풀이 무성한 능선을 따르다가,
앞서 가던 분들이 더 이상 길흔적이 없다며 좌측 임도로 내려서고 있음에도 잠시 더 정원수 식재 능선을 따르다가 태양광발전단지 울타리 직전에서 우틀하여 내려가면,
능선 우측 아래로 이어오는 임도에 내려서서 좌측 임도를 따르고,
태양광발전단지를 우회하여 예동고개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르면,
우측 산청군 오부면 방향.
이내 이정표와 '진양기맥 종주 등산 안내판'이 있는 예동고개에 도착하여 우틀하여 바랑산 방향 능선 임도로 진행하게 된다.
<예동고개(570m)>
경남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 예동마을과 산청군 오부면 왕촌리 신촌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다. 예동(禮洞)은 마을이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 역골이라 하다가, 후에 어느 지리학자가 마을 이름을 예동으로 바꿔 부르면 좋을 것이라 하여 그 후부터 예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예동고개 전경.
좌측 임도가 이어지는 예동 마을 방향.
예동고개에서 우틀하여 바랑산 방향 능선 임도를 따르면,
가야 할 바랑산이 그리 높아보이지 않고,
예동고개에서 7분여 만에 도착한 임도 우측의 바랑산 방향 숲길 들머리로 들어서면,
가파르지 않은 숲길이 이어지다가,
제법 가파른 소나무숲길을 오르면,
우측 왕촌리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이내 오늘의 최고봉인 바랑산 정상에 도착하는데, 정상에는 이정표와 정상석(바랑산/796.4m) 그리고 널마루가 설치되어 있어서 앉아서 조망을 즐기며 쉼을 하기 좋아 보인다.
<바랑산(796.4m)>
바랑산은 경남 산청군 오부면 왕촌리와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의 경계에 자리한 산으로, 네이버 지도에는 바랑산(797.3m)으로, 국지원 지도에는 바람산(798.2m)으로 표기되어 있다. 바랑은 승려들이 행각이나 탁발 다닐 때 옷·경전·바릿대 등을 넣어 어깨에 메고 다니는 걸망을 말하는데, 행낭이라고도 하며 배낭은 바랑에서 변한 말이다. 원래는 '둥지'를 의미하는데, 바랑산의 모양새가 새의 둥지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산청의 바랑산은 원래 마고할미의 주머니였다고 한다. 인근 소룡산의 새이덤은 마고할미가 바랑에 넣고 가다 흘린 돌무더기라고 하고, 옆에 있는 월여산은 딸, 예동마을 옆의 보록산은 아들이라고 한다. '마고할미 설화'가 있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그만큼 중요한 산이었다는 증거다.
바랑산 정상석.
다음 구간에 오를 황매산 방향.
월여산에서 작은 황매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조망.
바랑산 정상에서 쉼을 하는 백두들.
바랑산에서의 편안한 쉼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다가,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틀하여 아래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면,
제법 가파른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우측 '천지사.왕촌'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고,
우측 소나무둥치에 696.1봉 산패가 걸려 있는 능선 봉우리를 넘으면,
멋진 소나무숲 능선 내림길이 지쳐가는 산꾼에게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이내 우측 소봉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능선봉우리를 넘으면,
제법 가파른 내림길이 길게 이어지더니,
밋밋한 능선 안부를 지나면,
우측 '폭포.독촉 주차장'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며 등로는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게 되고,
좌측 상대소류지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의 뚜렷한 등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우측으로 옛길 흔적이 뚜렷하고 이정표가 있는 큰재를 지나게 된다.
바랑산과 소룡산 사이의 중간 지점 안부인 큰재 이정표.
큰재를 지나 소룡산 오름길로 들어서서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우측 오부면 중촌리 쪽 나뭇가지에 산림욕장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걸려있고,
우측으로 독촉주차장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지나면,
잠시 가이드로프가 설치된 멋진 소나무숲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통나무 계단길로 접어들어 "제발 계단길을 끝내 주소서!"라는 중얼거림을 한없이 되뇌게 하는 급경사를 오르게 된다.
급경사보다는 통나무계단이라서 발 딛기가 불편한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가,
뒤돌아 보면, 지나 온 바랑산이 건너다 보이며 그 우측 능선 멀리로 풍력발전기가 희미한 감악산도 가늠되고,
제발 이 빌어먹을 통나무계단길이 어서 끝나기를 빌며 힘겨운 오름길을 오르다가,
등로 좌측 조망 바위에 올라서니, 지나 온 바랑산 우측으로 한(恨) 많은 신원면 대현리와 과정리가 조망되는데,
대현리(大峴里)가 자리한 골짜기 끝으로는 감악산 능선이 짙은 황사에도 희미하게 가늠된다.
<대현리(大峴里)>
대현리(大峴里)는 바랑산과 월여산 사이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한재골을 가로질러 위천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농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현리(大峴里)는 골짜기 전체를 한재골이라 해서 괘현이라고 쓰며, 내탄·외탄·도토점·진목평·하대현·대현·중대현·상대현 등 여덟 개 마을이 있다. 대현 마을은 큰 재 밑이 되므로 한재 또는 대현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탄'이란 골짜기를 뜻하는 고구려 말이라고 하며, 저 멀리로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이 발생했던 과정리의 박산골학살터가 자리하고 있다.
바랑산 방향.
감악산 방향.
월여산 방향.
가까이 보이는 새이덤 암릉 중 송곳처럼 뾰족한 바위는 지리산 천왕봉 산신인 마고할미가 반야봉에서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기다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들 때 쓰던 바늘이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등로 좌측 새이덤 암릉 전경.
<새이덤>
소룡산으로 오르는 급경사 등로 좌측으로 멋지게 생긴 바위군(群)이 나타나는데, 이 바위군을 세이덤이라고 부른다. 새이덤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많은 산행기에서 새이덤을 마고할미가 바랑에 넣고 가다가 흘린 돌무더기라고 하고 있다. 또한 어떤 분은 '새이'는 '상여'의 경상도 사투리 말이고 '덤'은 '바위'를 말하므로, 멀리서 보면 상여 형상의 암릉 바위여서 붙여진 이름이지 않을까 짐작한다고도 하며, 또 어떤 분은 새이덤에 가면 묘지 1기가 있는데, ‘새이’라는 뜻은 경상도 방언으로 '형님'이란 뜻이고, ‘덤’또는 ‘덤바꾸’는 경남지방에서 바위라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따라서 '새이덤이란 형님이 묻힌 산소가 있는 바위라서 새이덤이란 단어가 생긴 게 아닐까 짐작한다는 분도 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잠시의 다리쉼으로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여 코가 닿을 듯한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
좌측 새이덤 바위 모습.
돌로 축대를 쌓아 조성한 묘지가 있는 새이덤 정상에 올라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쉼을 한다.
새이덤 정상의 묘지에서 가야 할 소룡산을 배경으로.
잠시의 쉼으로 약간의 원기를 회복하여 새이덤을 뒤로하고 건너편의 소룡산 정상을 향하면,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다음 구간에 오를 황매산쯤이 황사로 희미하게 가늠되고,
묵묘 1기가 자리한 안부를 지나 오르면,
팔각정자와 정상석이 있는 소룡산에 도착하는데, 앞서가던 분들과 함께 부산에서 왔다는 두 쌍의 부부산꾼들이 박수로 맞이해 준다.
<소룡산(巢龍山, 760.9m)>
경남 거창군 신원면과 산청군 오부면(梧釜面)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소룡산(巢龍山)의 ‘소(巢)’자가 둥지나 집을 뜻해, 소룡산은 '용의 둥지'로 해석할 수 있고, 바랑산은 '새의 둥지'를 뜻하므로, 이 두 개의 산을 합하면 ‘용과 새의 보금자리’가 된다.
지난한 산행 끝에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소룡산 정상에 오른 용현 형님께 박수를 보내는 부산 산꾼들.
소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다음 구간에 가야 할 좌측의 소황매산(843m)에서 황매산(1113m)으로 이어지는 진양기맥 산줄기.
소룡산 팔각정자에서 돌아본 바랑산 방향.
다음 구간에 가야 할 소황매산(843m)에서 황매산(1113m)으로 이어지는 진양기맥 산줄기 조망.
황매산 우측 부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방향.
부산 산꾼이 남겨 준 소룡산 정상 인증.
용의 보금자리 수호는 부산에서 오신 산님들께 맡기고 소룡산 정상을 뒤로하면,
소룡산 정상 아래의 헬기장을 지나게 되고,
이내 직진의 중촌리 방향 능선 등로를 두고 좌틀하여 내려서야 하는 갈림길에서 앞서 내려간 두 분이 기다리고 있다가, 직진의 능선길로 알바 간 두 분을 소리쳐 불러서 돌아오게 하고, (알바주의 지점)
한 분!
또 한 분, 알바 갔던 두 분과 함께 좌틀하여 내림길로 들어서면,
등로에 둥근 암릉 바위가 산재한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게 되고,
잠시 후 좌측으로 유해조수 방지용 울타리가 이어지더니,
좌측 아래로 소룡산 기슭의 버섯연구소로 가는 임도가 나란히 이어지더니,
넓은 공터에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안부(소룡고개)를 지난다.
좌측 소룡마을 방향.
돌아본 소룡산과 기슭에 자리한 버섯연구소 전경.
안부에서 직진의 오미자 농장 방향 능선 수레길을 오르면,
좌측의 오미자 농장으로 들어오지 말고 우측 능선으로 진행하라는 안내판이 놓여 있고,
농장 우측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거친 수레길로 오르면,
좌측은 거창군 신원면이 계속되나 우측이 산청군 오부면에서 차황면으로 바뀌는 삼면봉이자 정수지맥 분기점인 솔봉산(620m)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이정표의 강섭산 방향인 좌측 임도를 따라 내려서야 하는데, 앞서 가던 분들이 우틀하여 정수지맥 방향으로 알바를 가는 바람에 다시 불러 세우느라 잠시의 다리쉼을 하는 여유도 가진다.
이정표 우측 나뭇가지에 걸린 '정수지맥 분기점' 표지판.
<정수지맥(淨水支脈)>
정수지맥(淨水支脈)은 진양기맥 상 거창군 신원면과 산청군 오부면, 차황면의 꼭지봉인 삼면봉(솔봉산, 620봉)에서 동쪽으로 진양기맥을 흘려보내고, 또 한 산줄기를 남쪽으로 분기시켜 산청군 오부면과 차황면을 경계 지으며 달리는 맥길을 말하는데, 솔봉산을 출발한 정수지맥은 1026번 지방도로, 628.9m, 매봉(鷹峰, 599m), 구인산(九仞山, 587m), 비득재, 정수산(淨水山, 829.8m), 척지(尺旨), 60번 도로, 둔철산(屯鐵山, 823.4m), 마제봉(馬蹄峰, 198.7m), 동촌도로, 적벽산(赤壁山, 166.3m)을 지나 산청군 신안면 원지마을 앞 양천강과 경호강이 만나 남강으로 흘러드는 곳까지 이어지는 약 37km의 산줄기다.
그쪽은 정수지맥 방향입니다. 빽~~!
삼면봉인 정수지맥 분기점의 이정표에서 강섭산 방향으로 좌틀하여 최근에 닦은 임도를 따라 내려서다가,
임도가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좌측 숲길로 들어서고,
방화선인지 임도인지 용도가 불명확한 능선길 우측으로 야생조수 방지용 전기울타리가 설치된 능선을 따르는데,
벌목한 나무와 잡목 그리고 전기울타리 등등의 온갖 것들이 진행을 방해하고,
커다란 바위들이 산재한 능선 봉우리를 지나자 급경사 내림길이 이어지더니,
오늘 산행의 종점인 밀치 건너편으로 다음 구간 가게 될 강섭산(우)과 작은황매산(중앙)이 건너다 보이고,
좌측의 계단식으로 조성된 밤나무단지를 지나서 내려서다가,
좌측으로 내려서는 수레길을 두고 우측 전기울타리를 넘어 능선 숲길로 들어서면,
풀이 웃자란 숙인 합천이씨 묘지를 지나게 되고,
이내 소룡산이 1.6km 거리라는 이정표가 있는 수레길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수레길을 따라 내려서면,
2차선의 포장도로인 59번 국도가 지나는 밀치에 도착하여 오늘 산행을 종료한다.
<밀치(蜜峙, 502.6m)>
밀치(蜜峙)는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 소룡마을과 산청군 차황면 장박리 삼거마을 사이의 고개로 59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다. 고개 우측의 장박리(長朴里)는 옛날부터 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장박(長朴)이라 불렸다.
예전부터 밤나무가 많아 양봉을 많이 하였던 곳이어서 '꿀 밀(蜜)' 자를 써서 밀치라 하였으며, 지금도 양질의 꿀 산지라고 한다. 그러나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밀치(密峙)로 표기하고 있다.
밀치 좌측 거창군 신원면 방향.
다음 구간 강섭산 방향 들머리 전경.
애마가 기다리는 우측 산청군 차황면 방향 과수원 옆 공터로 이동하여,
기다리던 애마에 올라,
산청으로 이동하여 땀을 닦고,
전소장님이 추천한 '행님아흑돼지'라는 식당에서,
산에서 채취한 두릅을 곁들여,
푸짐하고 맛난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어제 출발했던 서울로 향한다.
산길을 가다가 지치고 목마를 때면 '음용불가' 표시된 옹달샘물을 거리낌 없이 마시고,
짜게 먹으면 혈관이 석회화 된다고 하여도 그저 맛있기만 하다면야 막무가내이듯,
중국발 미세먼지가 그득한 황사에도 우리는 산길을 마음껏 걸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주저할 시간이 남아 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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