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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팔공기맥 6차(한티재~효령재) : 가산에서 보는 팔공산 주능선

by 재희다 2024. 2. 4.

 
산 행 지 : 팔공기맥 6차(한티재~한티재)  대구광역시 군위군. 경북 칠곡군, 구미시.
산 행 일 : 2023. 08. 26.(토)
산행코스 : 한티재(700m, 79번 지방도) ~ 783.9봉(부계봉, 삼면봉) ~ 치키봉(761m) ~ 할아버지할머니바위 ~ 용바위/유선대갈림길 ~ 동문 ~ 용바위/유선대 갈림길 ~ 가산(902m) ~ 중문 ~ 가산바위 ~ 서문 ~ 황학지맥 분기봉(846.5m) ~ 모래재 ~ 726.9봉 ~ 갈매기산(740.6m) ~ 745봉 ~ 무인 산불감시봉(710.5m) ~ 566봉 ~ 502.7봉 ~ 374.1봉 ~ 327.4봉 ~ 314봉 ~ 갈비재 ~250봉(삼군봉) ~ 효령재 (18.3km, 9시간 반 소요)
산행참석 : 21 백두.


<산행지도>

 

지난달 말에 몽골 고비사막을 다녀와서 지난번 정선의 운탄고도 야생화 트레킹으로 몸을 풀었기에 이번 산행부터는 정상적으로 맥산행을 이어가기로 하고, 아직도 더운 여름이라 그나마 고도가 높은 팔공기맥의 팔공산 구간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지난 6월 자주고개에서 군부대가 자리한 공산봉을 우회하여 팔공산의 정상 역할을 하는 비로봉으로 오르면서 시루봉과 청운대에서 멋진 경치를 즐기며 다채로운 산행을 했었기에, 이번에는 팔공산국립공원의 서쪽 부분인 가산산성을 지나는 코스라서 사뭇 산행에 대한 설렘도 가지고 산행일을 기다린다. 

 

 

올여름은 장마가 끝이나도 한참 전에 끝이 났어야 하는데, 늦게 시작한 장마가 8월 말까지도 이어져 최근까지도 비 오는 날이 맑은 날보다 훨씬 많다. 2~3일 비가 오다가는 잠깐 그쳤다가 또 오기를 반복하는 상황이고 날씨 변동도 심하여 기상예보가 맞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그래서 산행 전날까지도 기상예보를 살피며 산행 계획 변경을 고민하다가, 산행 전날인 금욜 오후에 약간의 비를 뿌리고는 산행일인 토요일은 맑고 약간의 구름만 끼는 정도라고 하여, 우중 산행에 대한 우려는 집에다가 내려놓고 양재에서 산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상주영천고속도로 동군위 IC를 나온 버스가 팔공산 주능선의 한티재를 향해 구불구불 힘겨운 오름길을 오르는 캄캄한 버스에서 내내 마음을 졸이다가 한티재에 무사히 도착한 버스에서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는 1시간여의 쪽잠에 빠져든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 깊은 잠에 들었다가 총무님의 "일어나시죠!"라는 외침에 눈을 뜨고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텅 빈 한티휴게소 주차장에 내리니 어두운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 장마철 날씨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가시게 하여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여름철 산행으로는 다소간 길어 보이는 산행을 위해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한티재(漢峙, 718m)>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와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를 잇는 7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높고 큰 고개'라는 뜻으로 「한티」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한자로는 대현(大峴)이라고 표기하였다. 과거에는 칠곡과 군위를 왕래하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였으나, 현재는 팔공산을 찾는 산행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팔공산의 경치와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도로의 굴곡이 아름다워 건설교통부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다. 

 

한티휴게소 좌측에 있는 화장실 뒤쪽의 들머리에서 '팔공산 생태탐방로 소원길' 안내판 옆으로 이어진 등로로 들어서며 팔공기맥 6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촉촉이 젖어 오히려 싱그러움이 더하는 완만하고 잘 정비된 능선 등로를 따르는데, 

 

널찍하게 정비된 등산로에는 미안할 정도로 이정표가 자주 나타나고, 

 

전망 봉우리 내림길에는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는 최근에 설치한 듯 보이는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최근에 팔공산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한 덕분일 듯 짐작되고, 

 

앞쪽으로 칠곡군 동명면쯤의 야경 불빛을 내려다보며 제법 긴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면, 

 

완만한 능선길 주위로 이런저런 모양의 바위들이 각기 제 맵시를 뽐내고 있고, 

 

작은 봉우리를 우회하는 우회 등로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팔공기맥은 치키봉을 지나 가산산성으로 이어진다는 이정표. 

 

능선 좌측인 남쪽 동명면 기성리 방향. 

 

앞쪽 가야 할 가산 방향. 

 

 

소주를 두 병쯤 들이키고 걸어도 별일이 없을 듯이 보이는 능선 등로에 가이드 로프와 야자 메트는 심하다 싶을 정도이고, 

 

완만한 능선길에 별다른 표식이 없는 부계봉(784m)쯤을 지나는데 너무 많이 설치된 이정표 대신 정상 표식이나 설치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부계봉(缶溪峰, 784m)>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칠곡군 가산면 응추리를 경계 짓는 삼면봉(三面峰)으로, 부계봉에서는 북사면으로 큰 산줄기가 하나 흘러내려 그 서편의 칠곡 가산면(사창천골)과 동편의 군위 부계면(남천계곡)을 가른다. 사창천골 음지마을 주민들은 이 봉우리를 '큰골말랭이'로 부르는데, '큰골 위의 봉우리'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나 공식 명칭은 부계봉(缶溪峰)인데, '부계'는 팔공산 북사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을이기 때문이라 한다.(매일신문사) 
※ '말랭이'는 경상도에서 '말래이', '만대이', '만디' 등으로 부르는 말로 정상 또는 '높은 곳'을 뜻한다. 

 

 

이런 근사한 이정표가 200미터마다 설치되어 있으니 나의 짐작과 요구가 정당하지 아니할 수 없다!

 

 

90세 어르신이 넘어져도 아무 일 없을 듯이 보이는 편평한 등로에 설치된 가이드 로프!

 

옥구슬을 굴려도 굴러내려가지 않을 듯이 곳에 설치된 나무계단길!

 

유모차나 휠체어 통행도 가능해 보이는 무장애숲길에 설치된 가드로프!

 

알려주지 않아도 봄이면 진달래가 피어나 진달래 군락인 줄 아는 곳에 설치된 안내판!

 

 

대한민국 대부분의 등로에는 500m쯤의 간격으로 설치된 긴급 구조목(팔공 01-156)이 팔공산 탐방로 구간에는 100m~ 300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면 "좀 과했다"싶은 생각을 갖는 게 당연하고, '돈'은 이런 금방 닳아 없어질 시설물보다는 공원에 사는 생물종들이 좀 더 다양하고 풍성해지는 데 사용되었으면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하며 싱그러운 팔공산 능선 숲길을 걷는다.

 

 

날이 어슴프레 밝아오며 등로에 산재한 각양각색의 바윗돌들이 눈길을 끄는데,

대문처럼 서 있는 거대한 입석 사잇길을 통과하기도 하고, 

 

서 있거나 누워 있는 올망졸망한 바윗돌들의 속삭임에도 귀 기울이며,  

 

어슴프레 새벽안갯속에서 홀로 고독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는 선돌의 고독에도 공감하고,  

 

누가, 언제, 무슨 연유로 쌓았는지는 몰라도 귀한 의도가 담겨 있을 듯이 보이는 돌탑도 지나,  

 

거대한 무덤 속에서 빠져나온 듯이 보이는 돌들의 하소연에도 귀 기울이며 걷다가, 

 

또 그런 그닥 필요해 보이지 않을 듯이 보이는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다가 무심결에 지나 온 방향을 뒤돌아 보니, 

 

아! 지나온 팔공산 주능선의 봉우리들이 아침해의 붉은 기운을 후광으로 나란히 서 있는데,

 

지난 6월 팔공기맥 6번째 산행에서 차례차례 넘으면서 덧 쌓았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새롭게 떠오르며, 

 

최근 설치된 듯 보이는 정자 옆 이정표에 '참새미봉(811m)'이란 코팅지가 걸려있는 봉우리에 도착하여,

 

넓지 않은 정자에 올라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이하며 잠시의 쉼을 한다. 

 

 

잠시의 쉼으로 산행 모드를 야간에서 주간으로 바꾸어 급하지 않은 참새미봉 내림길을 내려서면,  

 

멋들어진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울리는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우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가산의 정상쯤이 멀잖아 보이고, 

 

'아무리 쉬워도 눈 감고 걸으면 안 된다'는 듯이 가끔씩 편안한 걸음을 방해하는 바위들의 출현을 뿌리치는 사이에, 

 

'구조목 01-160' 외엔 별다른 표식은 없지만 네이버지도에는 치키봉(761m)으로 표시된 지점을 지나고, 

 

기기묘묘한 바위들로 조각품을 만들어 놓기라도 한 듯한 암릉들을 지나며 완만한 등로를 따르면, 

 

치키봉 안내판과 좌측 진남문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치키봉(761m)을 지나게 된다. 

 

<치키봉(757.3m)>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에 걸쳐 있는 가산(架山, 902m)의 동쪽 봉우리이다. 산세가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키와 닮아서 치키봉이라고 불렀다 한다. 팔공지맥(八公枝脈) 능선 상의 봉우리로 가산산성(架山山城) 동문에서 1.9㎞, 진남문에서 2.7㎞, 한티재에서 3.2㎞ 거리에 있는데,  서쪽 동문 방향 주능선을 따라가다 할배·할매바위를 지나면 가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치키'는 경상도에서 '치' 혹은 '치이'로 발음되는,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도구인 '키'를 말하는데, 그걸 엎어 놓으면 등이 평평하다가 끝에서는 직각으로 절벽을 이루는 형상이 된다. 그러나 이 757봉은 전혀 그런 형상이 느껴지지 않는 봉우리로, 행정 당국의 부주의로 다른 봉우리를 이 봉우리로 적는 바람에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현지인들이 '치이봉'이라 불러온 봉우리는 757봉이 아니라 그 아래 남쪽 방향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700봉인데, 현장을 보아도 700봉의 등은 평평한 평지를 이루다 끝부분에서 절벽으로 떨어져 내려 남사면이 훤하게 살펴지며, 역으로 산 아랫마을에서 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산도 바로 700봉이라는 것이다.(매일신문사)

 

치키봉 유래 안내판. 

 

치키봉으로 오르는 백두들.

 

 

치키봉을 지나 완만한 능선길을 잠시 더 따르면, 

 

그닥 선돌처럼 보이지 않는 선돌이 서 있는 안부인 선돌재를 지나게 되고, 

 

<선돌재>
선돌(立石)에 가까이 있는 재라는 뜻으로, 팔공산 주능선 20km 구간 중 가장 낮은 고도 690m 정도에 있는 재다. 북사면 주민들이 옛날 이 재를 넘어 동명장을 봐왔던 주 통로로, 지금도 남사면의 천주사 터 인근으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유지되고 있으며, 다만 북사면의 산길은 분간이 불가능한 상태로 묵어있다.(매일신문사)

 

평지 같은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는데, 

 

탐방객들이 힘들어할까 염려하여 깔아놓은 야자메트를 밟고 올라, 

 

잡풀이 자라난 헬기장을 지나면, 

 

좌측 동명면 기성리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 조망바위를 지나게 되고, 

 

좌측 도덕산 우후방 멀리로 보이는 산이 2007년 걸었던 비슬산. 

 

살짝 당겨본 도덕산과 비슬산 사이의 대구시가지 모습.  

 

이내 할배·할매바위도 지나게 된다.

 

< 할배·할매바위>

자식이 없어 걱정하면서 살아가던 부부가 어느 날부터 할배·할매바위에 치성을 다하여 공을 들이니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귀하게 얻은 아들이 자라면서 나쁘게 될까봐 할매·할배바위 앞에 아들 바위를 모셔다 두고 아들이 건강하고 올바르게 장성하도록 보살펴 달라고 기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이후로 마을에서는 이 바위에 득남을 기원하였다고 전해진다.

 

 

할배바위는 꼿꼿하고 늠름하게 서있고 그 앞에 자그마한 할매바위가 낭군에게 순종하듯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이다. 예전 할아버지 할머니를 뵙는 듯하다. 그런데 요즘은 여자들의 기세가 올라 남자들이 꼼짝 못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이기는 하지만, 작금의 이런 세태를 보면 저 할배바위는 뭐랄지 궁금하다. 남자들아, 너무 기죽지 말고 살아라!

 

 

생각이란 놈이 참으로 묘해서 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기 마련인지라, 할배·할매바위를 보니 40여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떠오르며 어느새 나도 그때의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음을 새삼 인식하니,  

 

한티재에서 가산으로 이어지는 팔공기맥 능선길은 할배·할매들이 걷기에도 좋은 길이라는 생각까지 할 즈음에,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올라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데, 직진의 표식이 없는 뚜렷한 길로 진행하면 동문을 거쳐서 가산 정상으로 갈 수 있는 우회로이고, 우측 용바위 방향이 기맥능선에 쌓은 가산산성을 따라 가산 정상으로 가게 된다.

 

 

삼거리에서 우틀하면 바로 나타나는 산성의 흔적을 따라 진행하니,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쌓은 가산산성 석축이 앞을 가로막아 서는데, 

 

<가산산성(架山山城)>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산성(山城)으로, 인조 17년(1639)에 내성의 축성공사가 시작되어 약 100여 년간의 긴 세월을 거쳐 축성되었다. 따라서 가산산성은 17~18세기에 걸쳐 정상에 내성, 중턱에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3중의 포곡식 석성(石城)으로써 금오산성,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방비한 그야말로 ‘영남 제1관방’이 되었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가산(架山) 요새에 삼중(三重)으로 축성되었다. 1639년(인조17)에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된 이명웅(李命雄, 1590~1642)이 “경상도 60주(州) 산성 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晋州)·금오(金烏)·천생(天生)의 3성뿐이므로 적지(適地)에 축성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도임 후 천생산성(天生山城)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泉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가축(加築)하는 한편, 최적지인 팔거현의 가산(架山)에 축성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그해 9월부터 이듬해(1640년) 4월까지 내성을 쌓았다. 가산산성이 축성되면서 5월에는, 경산부(京山府: 현재 성주)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되고, 이후 약 180년 동안 부의 치소(治所)인 읍치를 산성 내에 두었으며, 진관(鎭管)은 4개 현(군위, 의흥, 신령, 하양)을 관장하였다. 
칠곡도호부 관아(官衙)가 험준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관아를 옮기기를 갈망하여 왔다. 1819년(순조 19)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평지인 팔거구지(八?舊地)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가산산성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제6대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 1608~?)이 경상감사 이만(李曼, 1605~1652)과 합심하여, 군병과 승려를 동원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건물(建物)·포루(砲樓)·남쪽 곡성(曲城)·북쪽 구책(舊柵) 등을 중수(重修)하였다. 외성(外城)은 1700년(숙종 26) 경상도 관찰사 이세재(李世載, 1648~1706)의 장문(狀聞:임금에게 글을 올림)으로 왕명을 받아 1701년에 완성하였다. 중성(中城)은 1741년(영조 17) 경상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가 장문하여, 왕명으로 그 해에 완성되었다. 가산산성에는 식량과 병기를 충분히 비축할 양창(糧倉, 남창·북창)·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중성의 성벽은 내·외성에 비해 작고 동문은 홍예문(虹霓門, 무지개문)이었다. 1812년(순조 12)에는 가산산성에 별장(종9품)을 두고 가산진(架山鎭)을 설치하였다. 

 

풀이 우거진 길흔적을 더듬어 우측으로 우회하여 올라, 

 

우측 가산면 가산리 북창마을과 양지가라골 방향. 

 

성곽 위에 서니 가산산성이 이어진 가산 정상과 그 우측의 용바위와 유선대가 건너다 보이고, 돌아본 팔공산 주능선에 도열한 연봉들의 모습이 장관을 연출하며 산꾼들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돌아본 팔공산 주능선 방향. 

 

우후방으로 보이는 도덕산과 비슬산 방향.

 

 

성곽 보수작업이 진행되는지 정비를 하지 않은 성곽을 따르는데,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팔공산 능선과 연봉들이 자꾸만 뒤돌아 봐 달라 아우성이고, 

 

좌측 동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과 우측 가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좌.우로 갈라지는 지점으로 향하는데,  

좌측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곽 모습

 

정비를 하지 않아 키높이로 웃자란 풀이 물방울을 매달고 산꾼들의 걸음을 더디게 하지만,  

 

성곽이 좌우로 갈라지는 가산 전위봉쯤인 '825.6봉에 올라서면, 

 

가산산성 성곽이 이어진 가야 할 가산 정상이 지척으로 건너다 보인다. 

 

 

키높이로 자란 잡초들 방해를 헤치며 성곽길을 따라 안부를 지나 오르니,

 

뒤돌아 본 팔공산의 모습이 점점 넓어지는 듯하며, 

 

오뚝한 도덕산 우측 멀리로 비슬산이 대구시를 덮은 구름에 떠 있는 듯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고, 

 

참나무 한그루가 외로이 서 있는 조망 언덕에 오르면 지나 온 팔공산 주능선이 연무를 가르며 켜켜이 쌓여 있다. 

 

동쪽 군위군 부계면 방향. 

 

남쪽 도덕봉과 멀리로 보이는 비슬산 방향.

 

 

가산 정상을 향할수록 돌아다 보이는 팔공산 주능선의 모습은 점점 넓어지며, 

 

그렇게 꿈을 꾸듯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웅혼한 팔공산의 서쪽을 담당하는 가산 정상에 도착하는데, 

 

<가산(架山, 901.6m)>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와 동명면 남원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서쪽으로 오계산과 연결되며, 동쪽으로 한티재를 지나 팔공산과 이어진다. 가산이라는 명칭은 팔공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가사산' 즉 '갓(가장자리)산'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가산이라 표기한 것이라 전해진다. 가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7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 칠봉산(七峰山)이라고도 한다. 7개의 봉이 7개의 골짜기를 이루어 칠곡(七谷)이라 한 것이 오늘의 칠곡군이 되었으며, 6.25동란 때에는 이곳에서 낙동강 전투의 최고의 격전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산의 골짜기 곳곳에 암괴류가 분포하며, 남쪽 사면에서 남원천이 발원하고, 가산바위 등 관광명소들이 있다. 산 정상부에는 1640년(인조 18)에 축성된 가산산성(사적 제216호)이 있다. 가산산성이 완성되자 칠곡 도호부가 이곳에 설치되었으며, 1819년까지 읍치 역할을 수행하였다. 현재도 성벽과 사대문지와 암문, 수구문, 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가산은 「여지도서」에 처음 기록되어 있는데, "부성(府城)의 주산(主山)이다."라고 쓰여 있다. 「해동지도」에는 가산산성 내부의 시설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나, 가산이라는 명칭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조선지도」에는 성곽을 묘사하고 '가산성'이라고 기재하였다.

 

팔공산국립공원에서 담당하는 가산의 역할에 비해 그 정상은 별다른 표식조차 없는 초라한 모습이다.  

 

북쪽 용바위와 유선대 방향.

 

동쪽 화산 방향. 

 

동남쪽 팔공산 주능선 방향. 

 

남서쪽 대구시와 비슬산 방향. 

 

팔공산 주능선을 배경으로.

 

 

가산 정상에서 직진의 용바위 방향 성곽길을 두고 좌틀하여 가산바위 방향으로 내려서면, 

 

정상 바로 아래 장대터에 최근에 설치한 듯이 보이는 가산 정상석에 인증을 남기고, 

 

오늘 산행 최고봉인 가산봉 정상 옆 나무그늘에서 편안한 아침식사를 즐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 잠시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러 정상에 올랐으나 어느새 주변이 구름에 가려버려, 

 

장대지로 내려와 인증을 남기고는, 

 

용바위를 다녀오기로 한 분들과 헤어져 공사 중인 등산로를 따라 중문으로 향하다가, 

 

공사 자제가 널브러져 있는 사거리에서 직진의 가산바위 방향 등로로 들어서서, 

 

좌측 언덕으로 이어지는 기맥능선을 두고 서문 방향의 정규 등로를 따라,  

우측 용바위와 유선대 방향 갈림길 이정표.

 

낙엽송으로도 알려진 일본입갈나무 조림지를 지나서, 

 

『잎갈나무는 침엽수이면서 한 잎도 남김없이 낙엽이 지는 나무가 잎갈나무다. 잎갈나무란 이름은 ‘잎을 간다(바꾼다)’는 뜻에서 온 이름인데 소리 나는 데로 ‘이깔나무’라고도 한다.』 

 

 

가산산성 중문이 나타나는데, 

 

중문 위 성곽으로 올라 좌측 성곽길을 따라 가산바위로 진행하여야 하지만 지금은 통행이 금지된 상태라서, 

 

훤히 뚫려있는 중문을 통과하여, 

좌측 남쪽 방향 성곽 모습.

 

공사 중인 등로를 계속하여 따르는데, 

 

세계 최대 복수초 군락지가 경상북도 팔공산국립공원이라는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복수초(福壽草)는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고 설연화(雪蓮花)이라 하고,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동그랗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눈색이꽃 혹은 얼음새꽃이라고도 부른다.』

 

세계 최대의 군락지라는 예기에 궁금하여 찾아본 복수초 모습. 

 

 

우거진 숲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다라 우측 장군정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오솔길로 변하는 숲길을 잠시 더 따르다가, 

가산산성 일원의 식물과 동물 자원 분포 안내판
학명리 53km, 가산바위 이정표

 

삼거리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직진의 서문 방향을 두고 좌틀하여 가산바위로 향하면, 

 

팔공기맥 능선에 쌓은 가산산성 성곽길에 자리한 '가산바위'에 닿는데, 이정표와 안내판 옆에는 가산바위로 오르는 데크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좌측 성곽길에서 본 가산바위 모습

 

<가산바위>
가산산성 서북쪽 성벽 사이에 위치한 바위로 가암(架岩)이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 상면은 약 270㎡ 규모의 넓은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을 훤히 전망할 수 있어 대구광역시의 전경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다. 바위 상면 동단에 큰 구멍이 나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고승이었던 도선(827~898)이 산천을 편력하면서 지기를 잡기 위해 이 구멍에다 쇠로 만든 소와 말 형상을 묻어지기를 눌렀다고 한다.

 

 

예까지 와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인지라 가산바위로 오르는 데크 계단을 오르면, 

 

배구를 해도 될 정도의 넓은 마당바위가 펼쳐지며 백두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가산바위 한가운데에는 도선국사가 지기(地氣)를 다스리기 위해 철마(鐵馬)와 철우(鐵牛)를 묻었다고 하는 구멍이 뚫려 있다.

 

가산바위(860m)는 가산의 정상부에 약 10m 높이로 우뚝 솟은 바위로 가암(架岩) 또는 개산암(介山巖)으로도 불리는데, 바위의 윗부분은 성층면을 따라 수평으로 쪼개져 표면이 평탄하여 넓이가 약 270㎡나 된다. 바위의 한가운데에는 폭 30㎝ 내외의 구멍이 동굴처럼 뚫려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고승(高僧) 도선(道詵)이 지기(地祇)를 다스리기 위해 쇠로 만든 소와 말(鐵牛와 鐵馬) 형상을 넣고 묻었던 곳인데, 조선시대 관찰사였던 이명웅(李命雄)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고  전해진다. 팔공산 신 8경(新八景) 중 제5경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전설로 '힘이 센 가산 장사와 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가산 고을에 한 장사가 살고 있었는데, 모두들 가산 장사라고 불렀다. 가산 장사는 금강산 유람을 가서 주머니에 조약돌을 잔뜩 넣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산에서 금강산에서 주워 온 조약돌을 실수로 하나 굴러 떨어뜨리게 되었다. 굴러떨어진 조약돌이 바로 거대한 가산바위이며, 바위 한가운데 있는 큰 구멍은 가산 장사가 오줌을 누어 뚫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가산바위 정상에서 대구 남서쪽에 있는 비슬산을 배경으로.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 가산바위에서 남쪽 지능선에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도덕산 우측 멀리로 앞산과 그 우측으로 청룡산과 비슬산이 또렷하게 가늠되며, 

 

남서쪽 아래로 계정사와 두무지, 학명리 마을이 보이고 정면 멀리로 가야산 우두봉이 오뚝하고, 

 

서쪽으로는 황학지맥 능선이 이어져 소야고개 건너의 황학산이 가늠되고, 다부동과 그 우측으로 이어진 유학산 줄기 사이 멀리가 구미 금오산쯤인데, 뭉게구름이 오늘은 보지 말라 한다. 

 

넓은 가산바위가 신기한 백두들. 

 

남서쪽 멀리의 가야산 우두봉을 배경으로. 

 

 

가산바위에서의 시원한 조망을 뒤로하고 내려서는데, 가산 아래에서 아침식사 함께 한 후 용바위를 보러 갔던 백두들이 마침 도착하여 함께 북서쪽 성곽으로 이어진 팔공기맥길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가산바위의 손자쯤으로 보이는 바위가 자리하고 있고, 

 

두 다리를 하늘로 하고 땅에 머리를 박은 개구리 모양의 소나무를 지나게 되고, 

 

정비를 않아 잡초에 뒤덮인 성곽길을 더듬어 가다보면, 

 

우거진 잡초밭에 이정표가 홀로 서 있는 부근의 서문(西門)을 지나게 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서문을 통과하여 지나다녔다는데 지금은 붕괴 위험 때문에 막아 놓았고, 

 

좌측 황학산과 우측 유학산 사이의 다부동 방향. 

 

언덕 위에 홀로 선 거목을 향해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황학지맥 분기점' 표지판과 많은 표지기가 나부끼는 황학지맥 분기봉(851.5m)에 올라선다.

 

<황학지맥(黃鶴枝脈)>

황학지맥(黃鶴枝脈)은 팔공지맥상의 가산(架山, 901.8m) 북서쪽 1.8km 지점 851.5봉(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서는 846.5m)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 경계를 따라 오계산(466.3m), 백운산(713.4m), 황학산( 758m)을 지나 남진하면서 소학산(624m), 자봉산(427m), 장원봉(372m), 용산(244m), 마천산(274.2m), 죽곡산(195.8m)을 거쳐 금호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강정마을에서 맥을 다하는 41.6km의 산줄기다. 팔공지맥과 더불어 대구 시민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금호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며, 합수점에서 강 건너편 비슬지맥에서 분기하여 온 청룡지맥의 끝점과 마주 본다.  

 

팔공산 주능선은 그 끝 가산권의 마지막 852봉에서 두 개의 지맥을 낸다. 한 줄기는 서쪽으로 달려 '잡사리등(466m)', '오계산(356m)'을 거친 후 소야재를 건너 또 하나의 커다란 산군을 형성한다. 그곳의 대표적 높은 산봉들이 황학산, 소학산, 유학산 등이니 '학산지맥'이라 불러 둬 보자.[신 산경표상의 '황학지맥']. 다른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의성 단밀까지 내리뻗는다. 위천이라는 큰 물길의 둑이 되니 '위천지맥'이라 부르자.[신 산경표상의 '팔공지맥']. 응봉산(336m), 적라산(352m), 청화산(701m)을 거쳐 만경산(499m)에 이르러서야 멈춘다. 어떤 이는 이 줄기를 팔공기맥 꼬리로 판단하기도 했다. 따라서 팔공산 주능선의 서편 시종점은 가산이 아니라 그 서편에 있는 852봉(황학지맥 분기봉)이 된다. 현장에서 보면 가산권이라는 한 권역이 완성되는 경계점인 852봉이 너무나 명확한데, 이 봉우리를 경계로 더 서편 구간은 500m대 이하로 급락하는 것이다.(매일신문)

 

 

황학지맥 분기봉을 뒤로하고 다소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다가, 

 

수풀이 우거져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암문(暗門) 위를 지나면, 

 

북문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성곽길은 우측으로 꺾어 북문으로 이어지고 팔공기맥은 직진의 숲으로 이어진다. 

 

 

성곽길에서 기맥능선을 더듬어 능선 숲길로 들어서면 제법 뚜렷한 길흔적이 이어지다가, 

 

특이한 지형지물이나 조망이 없어서 기맥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려는 즈음에 낯익은 표지기들이 반갑고,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다가 희미한 삼거리 갈림길에서 직진의 우측 능선길로 진행하는데,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모래재 건너편의 가야 할 봉우리가 무척이나 위압적으로 보이더니,

 

봉분이 낮아진 안동권씨 묘를 지나면, 

 

급경사의 내림길은 다소 완만하게 바뀌더니, 

 

좌측 다부동 방향으로 조망이 트이며, 

 

좌측 아래로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에서 모래재로 오르는 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이내 모래재 절개지 상부 펜스 너머로 쉼터 정자 지붕이 내려다 보이더니,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면,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모래재에 도착하게 된다. 

 

<모래재>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에서 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부터 모래가 많아 모래재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4.3㎞ 떨어진 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 산성 가산산성(架山山城)의 방어벽이 고개 아래 갈림길까지 이어진다. 동쪽에 금화계곡, 서쪽에 저수지 가산지(架山池)가 형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라시대 사찰 대둔사(大屯寺)와 금곡사(金谷寺)가 있다.

 

모래재 날머리 전경. 

 

 

당초 컨디션 난조의 몇몇 분이 이곳 모래재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가산리로 탈출을 예정했었으나, 

 

모래재 정상의 쉼터 정자에서 쉬면서 논의한 끝에 지금까지의 팔공기맥길이 그리 힘들지 않았고 컨디션도 그리 심각한 상태가 아니므로 745봉을 넘어 갈비재까지 진행해 보기로 의견을 모은다.  

 

정자 앞 동북쪽 가산리와 부계면 방향. 

 

 

정자에서 10여분의 쉼을 뒤로하고 모래재 들머리로 들어서면, 

 

작은 나뭇가지에 모래재 코팅지와 표지기들이 걸려있고, 

 

꽤나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고도를 50여 미터 높여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잠시 쉬고, 

 

 

잠시 컨디션을 조절한 일행들과 다시 745봉을 향하니 기맥 산꾼들이 '공깃돌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눈길을 끄는데, 내가 보기에는 공깃돌이 아니라 사리탑바위라 해야 맞을 듯하고,

 

잠시 완만하게 이어지던 능선길이 좌측 사면 방향의 갈림길에서 우측 오름길로 접어들면 다시 가팔라져,  

 

고도를 100여 미터 높여 '661봉'쯤을 지나고, 

 

다시 오름길을 오르가 뒤돌아 보니 모래재 건너편으로 지나온 황학지맥 분기봉이 건너다 보이며 그 좌측 뒤로 가산도 멀지 않아 보이고, 

 

모래재에서 745봉을 오르는 오름길은 중간중간 능선 봉우리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계단식으로 이어지는데, 

 

회장님의 컨디션이 가파른 오름길을 극복할 정도로 회복되지를 않아, 결국 745봉 직전 726봉에서 모래재로 되돌아내려가 탈출하기로 함에 따라, 회장님과 함께 탈출하는 분들과 헤어져, 

 

갈정산이라 적힌 표지기도 걸려있는 726.9봉을 인증하고 한참을 앞서갔을 분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걸음을 서두른다. 

 

 

등로랄 것도 없지만 앞서간 분들의 뚜렷한 족적을 더듬여, 

 

산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위가 있는 안부를 지나서 오르면,  

 

커다란 바위암릉이 앞을 막아서는데, 대부분의 기맥꾼들은 암릉을 오르게 되지만 나는 앞서간 분들을 따라잡아야 하기에 희미한 족적을 따라 좌회하여 지나면, 

 

커다란 자연석에 돌을 쌓아 만든 돌탑이 있어서 기맥꾼들은 돌탑봉(745m)이라 부르는 봉우리에 도착하는데 반바지님의 '갈매기산(740.6m)' 코팅지가 걸려있다. 

 

홀로하는 인증.

 

 

745봉을 뒤로하고 홀로 뒤처졌다며 발길을 서두르며 "힘 힘 힘!" 응원 글귀를 지나는데, 
교화형으로부터 알바 중이라는 전화가 걸려와, 이후 40여 분간의 숨 졸이는 시간이 이어진다.

 

 

분명 745봉 정상부 능선과 서쪽 아래에 금곡사 사이 사면 어디쯤에 있는데, 바로 능선으로 올라오라고 하여도 경사가 가팔라 올라 올 수가 없다며 비스듬히 올라온다고 한다. 이후 능선과 사면을 왔다갔다 하며 지척일 듯하여 목놓아 불러도 응답은 없지만 그나마 통화가 되어 근처에 있음을 확인하고 조우의 순간을 찾아 헤매다가, 

 

두 번이나 다녀갔던 산불감시카메라와 초소가 있는 710.5봉 부근에서 교화형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와 '745봉을 지난 지점의 기맥 능선으로 접근하고 있는 듯하다'라고 하기에 갈비재를 향해 기맥능선을 진행하여, 

 

무인 산불감시카메라가 있는 710.5봉에서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는데,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되어 있는 감시초소와 시설공사 폐자재와 페트병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마침내 교화형으로부터 능선으로 빠져나왔다는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서 쉬고 계시라 말씀드리고는  잠시 더 기맥길을 따르니, 

 

알바에서 복귀하여 쉬고계시던 분들이 나를 보며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이 기뻐하시는데, 기뻐한 이유가 배낭에 물이 떨어져서 그리도 반가워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알바 갔던 무용담을 들으며 잠시 긴장을 풀고는 갈비재를 향해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다가,  

 

봉분은 알아보기도 힘드나 비석만 멀쩡한 부림홍공(岳林洪公) 묘를 지나면, 

 

봉우리랄 것도 없는 능선 언덕에 '준·희'님의 565.6봉 산패가 걸려있고, 

 

걷기 좋은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다가, 

 

알바를 다녀오신 분들이 많은 체력소모에 이은 긴장 완화로 내림길조차 힘들어해서 등로의 바위에 걸터앉아 배낭털이를 하는데, 산행이 어렵지 않아 고스란히 남아있던 두 병의 물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이후 갈비재를 지나 효령재로 갈 때는 심한 갈증을 격기도 한다.  

 

 

한여름 정오쯤의 산행은 쉽지가 앉지만 나무그늘이 싱그러운 완만한 능선 내림길이라 부담 없이 걷다가, 

 

주변의 여느 봉우리와 마찬가지로 작은 언덕 수준의 나무 둥치에 걸린 '연화바위산, 502.7봉' 산패를 발견하여 인증을 남기고는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면, 

 

계속에서 완만한 능선 내림길이 이어지는데, 

 

3년쯤 전에 진양기맥 수망령에서 영각사까지 차를 태워주신 '마당쇠'님의 산패가 반갑고, 

 

등로 좌측으로 창끝처럼 뾰족 튀어나간 전망 바위에서 좌측으로 펼쳐진 전경을 보며 잠시 쉼을 한다.

 

서쪽 구미 방향으로 좌측이 유학산, 우측 멀리가 금오산. 

 

좌측 멀리가 금오산, 우측이 천생산.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좋은 능선 내림길을 따르다가, 

 

금산이라고도 하는 438봉쯤을 좌회하여 지나고, 

 

금산을 좌회한 지점에서 다시금 5분쯤의 쉼을 하고서 마냥 걸어도 좋은 내림길을 이어가면, 

 

마치 뚝방길을 걷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좌후방으로 유학산이 우람하게 조망되더니. 

 

삼각점이 있는 374.1봉을 지나게 된다. 

 

 

능선 분기봉이 341봉에서 좌측 능선으로 길을 잡아 내려가다가, 

 

이내 족적이 어지러이 흩어진 능선분기점에서 다시 좌측으로 꺾어서 다소 급한 내림길을 내려서면,  

 

봉분이 낮아져 상석이 없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의 오래된 '유인 김해김씨' 묘소를 지나게 되고, 

 

327.4봉쯤을 지나는데 아래쪽에서 차량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하지만, 

 

목마르고 지쳐서 걸을 수가 없다는 분들과 잠시의 다리쉼으로 다시금 걸을 힘을 회복하여,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을 갈비재를 향해 길을 재촉하면, 

 

진사경주최공과 전주이씨 합장묘지를 지나자, 

 

묘지길로 보이는 수레길 수준의 등로가 이어져 있고, 

 

연이어 나타나는 묘지를 따라 이어지는 등로로 내려서다가,

 

칠곡군 가산면과 군위군 효령면을 잇는 5번 국도가 지나는 갈비재 펜스가 나오는데, 알바로 지쳐서 좌측 길로 내려가 갈비재에서 산행을 종료하려는 분들과 헤어져 우측 생태통로 방향으로 들어서면, 

 

갈비재(석우재)를 지나는 5번 국도(경북대로)를 넘는 생태통로를 지나게 된다. 

 

<갈비재/석우재(175m)>
경북 칠곡군 가산면 석우리와 대구시 군위군 효령면 고곡리 사이의 고개지점으로 5번 국도가 지나간다. 석우리(石隅里)는 마을 모퉁이에 돌이 많이 쌓여있어서 돌모리 또는 석우(石隅)라고 하였다.

 

알프스모텔과 S-oil 주유소가 보이는 좌측 가산 방면. 

 

길가에서 대기 중인 버스가 보이는 우측 군위 효령 방면.

 

 

5번 국도를 넘는 생태통로를 통과하여 숲길로 들어, 

 

수레길 수준의 선명한 등로가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다가, 

 

좌측으로 휘어져나가는 수레길을 두고 우측 숲에 걸린 표지기에 이끌려 소로로 들어서서 완만하게 진행하여,  

 

첫 번째 갈림길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서 진행하고, 

 

별다른 표식이 없는 삼군 경계봉(224m)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칠곡군 가산면과 군위군 효령면을 경계 지으며 이어 온 기맥길은 이 봉우리부터 우측은 군위군 효령면이 계속되나, 좌측은 칠곡군 가산면을 벗어나 구미시 장천면으로 바뀌게 된다. 

 

 

이미 1시간도 더 전에 배낭에 넣어 두었던 두병의 물을 한꺼번에 소진해 버린 터라 심한 갈증을 참으며, 오래전 산행기에서도 멧돼지 목욕탕으로 표시되었던 유서깊은? 장소를 지나는데 멧돼지 목욕물일지언정 물을 보니 갈증이 더 심해지고,  

 

최근에 팔공기맥을 걸은 '마당쇠'님과 '무영객'님, '항아'님의 표지기가 나란히 걸린 봉우리를 지나 내림길로 접어들면, 

 

상석은 없지만 관리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줄지어 늘어선 묘지를 지나, 

 

또 다른 잘 정비된 묘소를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제법 그럴듯한 봉우리들이 조망되고,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서면, 

 

차량통행이 뜸한 2차선 포장도로(906번 지방도)가 지나는 효령재에 내려서며 팔공기맥 6번째 산행을 마감한다. 

 

<효령재(175m)>
경북 구미시 장천면 명곡리 덕골과 대구시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원당골을 이어주는 고개로, 군위군 효령으로 통한 데서 효령재라 한다. 이곳 효령재에서 명곡천(明谷川)이 발원하여 한천으로 유입되어 구미 낙동강으로 합류된다. 

 

돌아본 효령재 날머리. 

 

좌측으로 도로 따라 조금 오르다가 우측 「구미시/ 장천면」 표지판을 지난 지점이 들머리. 

 

 

모래재에서 탈출한 분들과 갈비재에서 산행을 마감한 분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먼저 도착한 분들 모두가 모여 션한 물로 땀을 씻고 얼음장 같은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는, 

 

효령재 우측 아래 300m 지점의 하나로참숯굴방으로 이동하여, 

 

간단히 찬물을 끼얹고는 뒤풀이에 동참하여 물 없이 한 여름 산행 2시간의 갈증을 해소하고,  

 

서울로 향하는데, 

 

속리산휴게소에다가 휴대폰을 두고 버스에 타는 바람에 이튿날 이곳을 재방문해야 했다. 

 

 

오늘 뒤풀이가 션찮다 싶었는데 역시나 양재에서 전원이 하차하여 메기대감에서 두 번째를 즐기고, 

 

귀갓길에 오르는데, 

핸드폰이 없는 나는 걸어가야 하나 어쩌나! 

 

 

<잊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백두산우회 회원이 30여 명이나 되는데, 

그중 장갑, 모자 등등의 소품은 물론 

잠바에 배낭까지 잃어버려 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잃어버리는 게 다반사인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잊는다는 데 있다. 

 

기쁜 일을 빨리 잊으면 더 빨리 평정심으로 돌아올 수 있고,

슬픈 일을 빨리 잊으면 그 애타고 아쉬운 기억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래서 잘 잃어버리는 내가 잘 잊는 게 좋은 일이라 위안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