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년

팔공기맥 7차(효령재~오로고개) : 한국의 보통 산길 걷기

by 재희다 2024. 2. 7.

 

산 행 지 : 팔공기맥 7차(효령재~오로고개)  경북 군위군, 구미시.
산 행 일 : 2023. 09. 09.(토)
산행코스 : 효령재 ~ 258봉 ~ 291봉 ~ 275봉 ~ 안부/성황당터 ~ 376봉 ~ 응봉산(334.1m) ~ 안부/중앙고속도 군위터널 위 ~ 326봉 ~ 314봉 ~ 군위 JC 지하통로 4곳  ~ 267.3봉 ~ 상주영천고속도 불로터널 위 ~ 임도삼거리 ~ 적라산갈림길 ~ 적라산(352.1m)~ 적라산갈림길 ~ 중앙고속도로 절개지상단/시멘트수로 ~ 중앙고속도로 수서1교 ~ 오로고개 (14km, 7시간 소요)
산행참석 : 18 백두.

 

<참고사항>
-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넘나드는 구간으로, 

- 전반적으로 등로는 뚜렷하나 적라산 내림길부터 오로고개까지의 등로가 불분명하고, 

- 산행 내내 별다른 조망도 없지만 별달리 높은 산도 없으며, 산행 거리가 짧아 다소 쉬운 산행.


<산행지도>

 

 

금번 효령재에서 출발하는 팔공지맥 구간은 산행 종료지점을 정하는 게 무척이나 고민스럽다. 지난번 산행 때, 갈비재에서 산행을 마치지 않고 굳이 효령재까지 진행한 이유는 금번에 효령재에서 14km 지점의 오로고개를 지나 10km를 더 진행하여 곰재까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9월 초순에 하는 산행이라 더위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좀 더 쉬운 산행을 하려는 분들도 고려해야 하며, 특히나 효령재에서 곰재까지의 구간은 별달리 높은 산이나 볼 것도 없지만 등로가 거칠고 불분명하여 소요시간을 추정하기도 어려운 듯 보였다. 그래서 스크린에 지도 화면을 켜 놓고서 이리저리 짱돌을 굴려보다가, 험한 등로를 모두 함께 산행함으로써 동안 따로따로 산행을 해서 공통적인 관심사를 많이 만들지 못했던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기로 한다. 

 

 

효령재 들머리에는 버스를 주차할 만한 장소가 없는지라, 들머리에서 우측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지난 산행에서 뒤풀이를 했던 하나로참숯가마 입구에 도착한 버스에서 3시간 가까이나 새벽잠을 더 청한다. 오늘은 산행 거리가 짧아서 물을 많이 가져갈 필요도 없는지라 배낭 무게가 가벼워져 오히려 걸음을 빨리할 수 있기에 가급적 출발을 늦추려고 해 보았지만, 나이 탓인지 4시쯤에 눈을 뜬 분들이 은근히 텔레파시를 보내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평시보다 가벼운 느낌이 드는 배낭을 들고 버스문을 나서니 벌써 사위가 밝아오는데 아직도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이 유난히도 밝아 보인다. 

 

 

해가 뜨면 출발하자고 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05:30에 출발하는 것으로 변경했는데, 참숯굴방 앞에 주차한 버스에서 내려 그 사이를 못 참고 왜 출발하지 않느냐고 또 성화를 한다. 올 들어 새로이 우리 애마를 담당하시는 기사님의 솜씨가 탁월하여 서울에서 출발하는 순간부터 숙면에 들어 도중에 깨지도 않고 집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더 단잠을 자서 그런 듯한데, 그렇다고 위험하게 차를 몰아, 타고 있는 사람들이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기사님으로 바꿔달라 할 수도 없으니...ㅉㅉ

 

조금만 더 있으면 렌턴 없이도 산행이 가능할 듯이 보이지만, 준비를 마친 산꾼들의 발을 묶어 놓기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라서 300m 떨어진 오로고개를 향해 도로를 따라 올라, 

 

돌아본 효령면 장군리 방향.

 

가드레일이 끝나는 지점의 「구미시/ 장천면」 표지판이 있는 효령재 들머리에서 팔공기맥 일곱 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효령재(175m)>
경북 구미시 장천면 명곡리 덕골과 대구시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원당골을 이어주는 고개로, 군위군 효령으로 통한 데서 효령재라 한다. 이곳 효령재에서 명곡천(明谷川)이 발원하여 한천으로 유입되어 구미 낙동강으로 합류된다.

 

 

제법 뚜렷한 들머리로 들어서면 이내 길흔적은 사라지지만 관목숲이 다니기에 어려울 정도는 아니고, 

 

우측 사면으로 뚜렷한 수레길의 흔적이 있지만 몇 달 전에 지난 '항아'님의 표지기가 걸린 능선을 따라 올라, 

 

개념도의 254봉쯤을 지나 좌측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제법 뚜렷한 능선숲길이 이어지며 가끔씩 선답자들의 표지기도 나타나서 밤길을 걷는 산꾼의 불안감을 달래주고, 

 

작은 언덕 수준의 봉우리에서 뚜렷한 기맥산꾼들의 발자국을 쫓아 좌측으로 내려서서 옅은 안개가 신비감을 더하는 빼곡한 소나무숲길이 이어지는 능선을 오르내리다가,  

 

258봉 오름길에 봉우리를 우회하는 등로를 두고 말라죽은 나뭇가지들이 어지러운 능선을 따라 오르면, 

 

개념도에 칡넝쿨이 많다고 표시된 258봉에 도착하는데 숲이 우거지며 칡넝쿨이 고사하여 통행이 어렵지 않다.

 

 

258봉을 지나자 좌측 장천면 명곡리를 지나는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 소음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시끄럽게 들리며, 

 

좌후방으로는 뿌연 아침안개를 뚫고 유학산이 선명하게 가늠되고, 

 

거의 업다운은 없지만 다소 거친 능선길이 이어지는데,  

 

일출 시간이 임박해서 그런지 남쪽 유학산 방향이 붉게 물들어오기에, 

 

산행 시작 30여분 만에 좌측으로 조망이 트인 능선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행장을 여미는 시간을 갖는다. 

 

남쪽 다부동 소야고개 방향. 

 

남서쪽 하늘에 걸린 그믐달. 

 

 

행장을 정비하여 한결 가벼운 차림으로 기맥길에 나서자 잠시 잊고 있었던 거미줄이 새삼 훼방꾼으로 등장하며, 

새심하게 살펴야 보임!

 

좌측 구미시 장천면 방향으로 정상부가 평평한 천생산(406.8m)과 그 뒤로 금오산도 가늠되고, 

 

<구미시 장천면>
구미시 장천면은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개편하면서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의 길이가 길다 하여 장천(長川)이라 하였다. 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 통합으로 구미시 장천면이 되었다. 구미시의 최동단에 있는 지역으로 중앙고속국도가 장천면 동부에서 남북 방향으로 지나며, 대구와 상주 방면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 남서부 지역은 교통이 편리한 반면 북동부 지역은 교통이 불편하다.
신라 초기에 상주와 더불어 국경 지대에 있어 백제와 분쟁이 잦았던 곳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선산에서 장천을 거쳐 인동·군위·안동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하였고 임상역(林上驛)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인 황사충, 김윤부 등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매복하였다가 왜적 10여 명을 죽인 곳이기도 하다.

 

잔가지들이 결코 편안한 산행을 허락하지 않는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은 거친 능선길을 따르다가, 

 

밋밋한 안부를 지나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는데,  

 

좌측 장천면 방향으로 정상부가 평평한 천생산(406.8m)과 그 뒤로 금오산도 선명하게 조망되더니, 

 

<천생산(天生山, 407m)>
경북 구미시 신동, 인의동, 금전동과 장천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동쪽인 장천면에서 볼 때에 생김새가 ‘하늘 천(天)’자를 닮아 천생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아 함지박의 경상도 사투리인 ‘방티’를 붙인 방티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능선이 ‘한일(一)’자로 보인다고 해서 일자봉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또한 장천면 일대에서는 정상에 있는 산성을 신라를 개국한 박혁거세가 처음 성을 쌓았다는 전설 때문에 혁거산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한 산을 두고 이렇게 이름이 많은 산도 드물다.
이처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천생산은 그다시 높지 않으며 산마루가 길고 평탄해 산행하기 수월하며, 숲이 울창하여 구미시에서 삼림욕장을 개설해 놓았다. 
정상 서쪽에 튀어나온 큰 바위가 있는데 미득암(未得岩)이다.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 포효하는 형상이라 천생산을 앙천산(仰天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난공불락이었던 천생산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왜군이 산기슭에 큰 연못을 파서 우물을 마르게 했는데, 이때에 이 성을 지키고 있던 의병장 곽재우는 미득암에다가 말을 세워두고 쌀을 주르르 부어 쌀을 씻는 시늉을 했다. 이를 본 왜군들이 산성에 물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쌀의 덕을 보았다고 해서 미덕암(米德岩)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내 별다른 표식이 없는 개념도의 291봉을 지나서는, 

 

100여 미터 진행하다가 좌틀하여 내려서면,    

 

최근에 팔공기맥을 걸은 무영객, 항아, 마당쇠 님의 표지기가 나란히 걸려있고, 

 

수풀에 가려진 김녕김공과 유인 밀양박씨 쌍분묘를 지난다. 

 

 

한반도를 비추기 시작한 후 20여 분만에야 그 빛이 스며드는 소나무숲길을 따라, 

 

평지 같은 완만한 오름길을 이어가다 보니, 

 

269봉쯤을 지나게 되고, 

 

빼곡한 소나무숲으로 이어진 등로가 조금은 가팔라지며, 

 

우전방으로 가야 할 375봉쯤이 낮게 깔린 구름이 들어찬 골짜기 너머로 가늠되더니, 

 

T자 갈림봉(275봉)에 올라서서는 우측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275봉에서 좌측 정각산으로 이어지는 제법 뚜렷한 등로를 두고 우측 기맥길을 따라 내려서면, 

 

지난여름 동안에는 기맥꾼조차 찾지를 않았던지 등로를 뒤덮은 수풀과 거미줄의 훼방이 자심하여,   

 

특히나 거미줄은 날파리 한 마리조차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고, 

 

잘 익은 매실처럼 생긴 열매의 정체를 두고 개복숭아다 아니다 논란을 벌이다가, 

 

성황당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흩어져 있는 안부를 지나는데, 

 

좌측에는 장천면 묵어리 외곡지(外谷池)가, 우측에는 효령면 장군리 원당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안부를 지나며 나오는 Y자 갈림길에서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길을 두고 직진의 희미한 오름길로 진행해야 한다. 

  

 

길흔적조차 희미한 가파른 375봉 오름길을 가끔씩 나타나는 표지기를 이정표 삼아 오르면, 

 

참나무 잎사귀에서 자라난 작은 알갱이들의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막상 아는 이가 없어서 호기심을 더하고,  

 

가파른 오름길이 잠시 완만해지며 멧선생의 찜질방을 바로 지난 지점에서, 

 

산행길이 짧아 뒤풀이 음식의 맛을 돋우기 위해 일찌감치 아침을 먹어야 한다며 아침식사 장소를 잡는다.  

 

모처럼 함께하는 백두들의 아침식사!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375봉에서 동쪽 효령 녹동마을 방향으로 이어지는 지능선에 접속하여 좌측 능선을 따라 오르는데, ​

 

육산 능선에서 모처럼 바위들이 보이며 신기한 문양이 그려진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끌고, 

달팽이가 그린 그림

 

길흔적은 희미하지만 다소간 완만해지는 능선을 잠시 오르면, 

 

다소간 짧은 구간이기는 하지만 오늘 산행에서 당당히 최고봉의 위치를 점하는 375봉 정상에 도착한다. 

 

 

375봉을 뒤로하고 잠시 내려서다가, 

 

등로 좌측에 표지기가 한두 개 걸린 361m봉쯤에서 직진의 선명한 등로를 두고 좌틀하여 희미한 좌측 사면길로 들어서서,  

 

족적이 사방으로 흩어진 사면 내림길을 내려서면, 

 

잠시 평지 수준의 완만한 소나무숲 능선이 이어지다가

 

다시 잡목의 방해가 심한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는데,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응봉산이 제법 우람해 보이며, 

 

다소 완만해진 능선길로 접어들고,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거미줄의 방해를 뿌리치며 묘지가 줄지어 출현하는 능선을 내려서면,  

 

성황당의 흔적으로 보이는 흩어진 돌무더기와 좌.우로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는 안부를 지나게 된다. 

 

 

안부를 지나면서 바로 가파른 응봉산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잠시 완만한 능선 오름길로 바뀌고, 

 

다시 또 가팔라진 오르막을 오르면, 

지나 온 375봉 방향

 

남몰래 먼저 오른 두규형이 뒤이어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걸음이 왜 이리 늦냐'며 꾸짖고 있는 응봉산에 도착한다. 

 

<응봉산(應峰山, 334.1m)>
경북 군위군 효령면과 구미시 장천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이곳은 인적이 닿지 않은 그야말로 오지 중에 오지에 있는 산이다. 팔공기맥을 걷는 산꾼이 아니면 이곳에 올 일이 없을 정도로 길도 희미하고 그냥 밋밋한 산이다. 준.희님이 걸어놓은 표식만이 응봉산임을 알려준다.

 

도착기준 1그룹 인증. 

 

도착기준 2그룹 인증.

 

 

먼저 도착한 1,2그룹 분들이 직진의 대내리 방향 뚜렷한 등로를 두고 좌틀하여 기맥길 잇기에 나선 후, 뒤이어 도착한 분들은 응봉산 인증을 남긴 후 직진 방향의 대내리 방향으로 마을의 내력을 조사하러 떠나고,  

 

홀로 남겨진 나는 응봉산 정상에서 직좌틀하여 급사면의 희미한 기맥길로 접어드는데, 

 

가장 먼저 응봉산을 떠났던 서여사님이 다시 응봉산으로 올라오고 있기에 '왜 다시 올라오느냐'라고 물으니 그냥 길을 따라가다 보니 이렇게 올라오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응봉산 급사면으로 이어진 기맥꾼들의 족적이 사방으로 얽혀있어서 무심코 희미한 족적을 따르다가 보니 그리 된 듯 하지만, 그 정확한 연유는 알 길이 없고, 

 

어찌 되었던 응봉산을 다시 갈 필요가 없게 된 서여사님과 함께 기맥길을 따르니, 

 

급경사의 내림길이 완만해진 능선에서 앞서간 분들이 과일을 나누며 쉼을 하고 있다. 

 

두규형의 전용 사과 나누기 신공.

 

 

응봉산 정상에서 다 함께 쉬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졌던 쉼을 뒤로하고 잔가지들의 태클이 심한 내림길을 내려서면, 

 

아래로 중앙고속도로 군위터널이 지나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326봉 오름길로 접어들어 큰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오르니, 

 

다소간 완만한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봉우리 직전 'ㅏ'자 갈림길에서 기맥길은 우틀하여 내려서지만, 직진 방향으로 10여 미터 떨어져 있는 326봉을 향하면, 

 

뚜렷한 직진길은 장천면의 금정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보이는 곳에 ‘준.희’님의 326봉 산패가 걸려있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좌틀(기맥 진행 방향에서 보면 우틀)하여 내려서면, 

 

이내 완만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게 되고, 

 

봉우리 정상부 능선의 멧돼지 전용 진흙 찜질방도 지나니, 

 

기맥꾼들의 표지기들이 나부끼는 322봉쯤을 지나게 된다. 

 

 

다시 완만한 내림길 능선에 이제는 자연으로 귀의하고 있는 분성배씨(盆城裵氏)의 천년집이 포근하게 느껴지고, 

 

편평한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접어드는 지점의 59번 송전탑을 지나, 

 

개념도의 312봉을 우회하는 갈림길에서 잠시 갈등하지만 오늘 산행이 짧고 쉬운 편이어서 직진의 오름길로 오르면, 

 

지능선 분기봉인 개념도의 312봉( 313.6m)에 올라 우틀하여 진행하게 된다.

 

 

등로랄 것도 없는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312봉을 내려서다가, 

 

잠시 전에 지난 322봉의 것보다 훨씬 럭셔리한 멧선생의  진흙 찜질방을 지나고,  

 

312봉 오름길에 지났던 우회로가 다시 합류하는 지점쯤도 지나니, 

 

송전탑 설치용으로 보이는 널찍한 임도가 이어지며, 

 

표지기만 한두 개 걸려있는 무명봉에서조차 인증을 남겨가며 임도를 따르는데,  

 

임도 우측으로 오래된 철망 펜스가 이어지다가,      

 

따르던 임도가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능선 분기점에서 임도를 따라 내려서니, 

 

62번 송전탑을 지나게 되고, 

 

김해김씨 가족묘지도 지나서 내려서는데, 

 

312봉을 우회하여 앞서간 분들이 나무그늘에서 쉼을 하고 있다. 

 

 

그늘 쉼터를 뒤로하고 다시 임도를 따라 내려서다가, 중앙고속도로 군위분기점 램프 절개지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중앙고속도로 군위분기점 램프 건너로 지나온 응봉산이 조망되고,  

 

임도가 우측 숲으로 사라지는 지점에서 그냥 임도를 따라도 될 듯하지만, 좌측 절개지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우측 고속도로 램프를 통과할 수 있는 굴다리 입구가 나타난다. 

 

굴다리 안에서의 시원함을 즐기는 백두들. 

 

 

첫 번째 굴다리를 통과하여 내리쬐는 햇볕에 달궈진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르다가, 


이내 두 번째 굴다리를 통과하여서는, 

 

바로 좌측 램프 아래로 이어진 수로 암거로 들어서야 하고, 

 

수로 암거를 통과하여서는 바로 좌틀하여 절개지 사면으로 오르면,  

 

뚜렷한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삼각점과 정상 표지기가 걸린  267.3봉을 지나게 된다. 

 

 

상석이 깊이 묻혀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평산신씨 묘를 지나, 

 

거칠지만 완만한 내림길 흔적이 뚜렷한 능선을 따르다가, 

 

상주영천고속도로 불로터널 상부쯤을 지나고, 

 

좌측 묘지에서 벌초를 하고 있는 부부가 올 추석이 아직도 3주나 남았음을 떠올리게 하는데, 

 

산행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파란 물통을 지나면서 뚜렷해진 임도를 따르다가, 

 

좌측 상주분기점 램프 암거로 이어지는 갈림길 삼거리에서 우측 능선 방향으로 이어진 임도를 따라야 하고, 

 

우측의 묘지 직전에 숲으로 들어 묘지를 우회하여 본격적인 적라산 오름길로 들어서서, 

 

제법 가파르게 올라 짧은 암릉들을 통과하여 오르면, 

 

돌아본 팔공산 방향. 

 

바위들이 듬성듬성 노출된 소나무숲 좌측 나뭇가지에 표지기들이 걸려있는 적라산 갈림길이 나오는데, 기맥길은 이곳에서 좌틀하여 표지기들이 이끄는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등로 옆 그늘에 배낭을 벗어두고 전방 280m 정도 벗어나 있는 적라산 정상을 다녀오기로 한다. 

 

 

적라산 오름길로 들어서서 이런 암릉을 올라서면, 

 

앞쪽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 상석 없는 묘지가 자리하고 있고,  

 

묘지 앞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오로저수지와 구미 금오산 방향. 

 

완만해진 능선 오름길을 잠시 더 오르면, 

 

삼각점과 몇 개의 산패 그리고 그동안 적라산을 지나간 많은 기맥산꾼들의 표기기가 걸린 적라산 정상에 도착한다. 

 

<적라산(赤羅山, 352.1m)>
행정구역 상 좌측은 계속 구미시 장천면이지만, 우측은 군위군 효령면에서 군위군 군위읍으로 바뀌는 삼면봉이다. 


옛날, 이 적라산 아래 조(曺) 모(某)씨가 살고 있었는데 부친상을 당하여 이름있는 풍수에게 묘터를 부탁하였더니 그 풍수가 적라산의 한 곳을 정해 주면서, “이 산 아래 흐르는 물에 나무 오리를 만들어 띄워 놓아 그 오리가 하늘로 날아가면 장차 높은 벼슬에 오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씨는 풍수가 말한 대로 정성껏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나무로 오리 모양을 만들어 하늘에 기도하면서 물 위에 띄워 놓았다. 조씨는 매일매일 그 나무 오리를 바라보며 글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과연 가을이 깊어질 무렵, 나무 오리에 털이 나는 듯하더니 날이 갈수록 깃이 자라 조금씩 퍼덕거리지 않는가? 이상하기도 하며 기쁘기도 하여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갔다. 마침 그때 서울에서 과거 시험이 있어 조씨는 그 과거에 무난히 합격하였고 벼슬길에 오르더니 벼슬이 점점 높아져갔다. 그런데 조씨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벼슬이 높아지는 데만 욕심이 많아 다른 사람을 도울 줄을 몰랐다. 이에 풍수가 생각해 보니 그냥 두었다가는 나라에 해를 끼칠 것 같은지라 임금님께 상소하기를, “조 아무개는 장차 나라에 역모(逆謨)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상소를 본 임금님은 사람을 보내 전후 사실을 조사하여 그를 멀리 귀양 보낼 뿐 아니라 조씨 부모의 묘를 파내고 적라산의 지맥(地脈)을 끊어버렸다. 그 후로는 적라산의 정기가 없어져서 이 고을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백두산우회 팔공기맥 적라산 인증.

 

 

적라산을 뒤로하고 배낭을 두고 온 갈림길로 돌아나가다가,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군위를 관통하는 위천이 내려다 보이는데, 저 위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이 우리가 걷는 팔공기맥의 종착지일 터이고, 

 

<군위군(軍威郡)>
군사의 위세가 매우 당당하다고 해서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지어준 지명이다. 사람들에게는 사과 재배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곳곳에 숨겨진 관광지와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곳이 많다고 하는데,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도 군위에 있고, 경주 토함산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된 석굴사원 삼존석굴도 이곳 군위 팔공산 북쪽에 위치해 있다.

 

살짝 당겨본 군위읍을 관통하는 위천 모습. 

 

조망이 트인 묘지 앞 나뭇가지 사이로 어디에서 보아도 그 형체가 뚜렷한 천생산도 조망되더니,

천생산 우측 뒤는 선석산(742.3m)과 영암산(784.7m)

 

다시 적라산 갈림길 삼거리로 돌아나와 션한 나무그늘에서 과일을 나누며 잠시 쉼을 한다. 

 

 

적라산 갈림길에서 다소 가파르고 거친 내림길을 내려서자, 

 

다시 완만해진 능선을 가로지르는 임도를 좌측 앞쪽으로 진행하면 등로가 이어지는데, 

 

잡목이 그득한 능선에는 등로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이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 잠시 더 진행하다 보면 능선이 우측으로 휘어져 나가는 듯한 지점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 직진 방향으로 내려가면 중앙고속도로 절개지 관리용 계단으로 이어져 이후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이동하여 지하 암거를 통해 고속도로를 통과하여 기맥길을 이어가게 되고, 우측으로 휘어져 지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HC군위산업 공장으로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 중앙고속도로 수서1교 아래를 통과하여 오로고개로 진행하게 된다. 

 

※ 이곳 지능선 갈림길에서 오로고개로 진행하는 경로. 
1. 가장 기맥길에 근접하여 진행하는 경로로, 
이곳에서 좌측 직진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고속도로 절개지 관리용 계단으로 내려가 좌측으로 중앙고속도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지하 암거를 통해 고속도로를 통과하여 우틀하여 기맥능선 접속하는 경로.
2. 기맥능선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우측의 수서1교를 통과하는 경로로,

이곳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는 희미한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다가 좌측 고속도로 절개지 펜스에서 우측 수로를 따라 내려서서, 공장을 지나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수서1교 아래를 통과한 후 바로 좌측 고속도를 따라 기맥능선에 접속하는 경로.

3. 우리가 진행한 가장 수월한 경로로,

이곳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는 희미한 능선길을 따라 HC군위산업 공장으로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 중앙고속도로 수서1교 아래를 통과하여 오로로개로 진행하는 경로로, 이 경우 기맥길인 고속도로에서 해피 아일랜드 파3 골프장으로 이어지는 177.8봉 능선을 생략하게 된다. 

 

별다른 표식이 없는 능선 갈림길에서 중앙고속도로 통과를 위해 우측으로 휘어지는 지능선을 따르면 희미한 길흔적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다가,  

 

좌.우로 흩어지는 족적을 무시하고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희미한 길흔적이 HC군위산업 공장 안으로 인도하고, 

 

토욜이라서 그런지 인적이 없는 HC군위산업 공장을 통과하여, 

 

정문으로 나와 좌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애마가 기다리는 중앙고속도로 수서1교 앞 도로에 접속하게 되고, 

 

오늘 산행에서 군위터널 상부를 포함하여 3번째로 중앙고속도로를 통과하기 위해 중앙고속도로 수서1교 아래로 지나, 

 

이어지는 2차선의 포장도로인 장천로를 따르면, 

 

좌측의 문을 닫은 해피아일랜드 골프클럽(파3 골프장) 앞을 지나 오로고개에 도착하여 팔공기맥 일곱 번째 산행을 마감한다. 

 

<오로고개>
경북 구미시 장천면 오로리에 있는 고개로, 고개 동쪽 아래에는 무량사가 있고 우측으로는 군위읍으로 통하는 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오로고개의 유래를 살펴보면, 오로리(五老里)의 옛 이름은 오을고개(五乙古介)로, 외부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모두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올라가는 고개’, 즉 오을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유래에 따르면, 태종이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을 숙청할 때 그 아들 심회(沈澮)가 유모의 헌신으로 오로리 가좌골로 와서 강거민(康居敏)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뒷날 심온의 결백이 밝혀지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러 양아버지인 강거민에게 벼슬길에 나오기를 권하였으나, 강거민이 “오로사(吾老死:나는 이곳에서 늙어 죽을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부당하게 여긴 세력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할 때,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의 장인인 직제학 김성미(金成美)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오로리 뒷산인 직학곡(直學谷)에 올라가서 매일 단종이 유폐된 영월을 향하여 곡하며 절을 하고, ‘단종을 사모하며 나는 이곳에서 늙는다’는 말에서 오로(吾老)라 하였는데, 이후 매방골에 오로재(吾老齋)를 짓고 많은 후학들을 길러 낸 데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디지털 구미문화대전)

 

 

오로고개까지 걸은 김 전무와 함께 발길을 돌려, 

 

좌측으로 보이는 적라산.

 

왔던 길을 되짚어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군위읍의 허름한 목감탕에서 땀을 닦고, 

 

군위축협에서 모처럼 총무님도 만족하는 뒤풀이를 즐기고는, 

 

별달리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이 없어서 그 또한 기억될 오늘의 산행 일정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향한다. 

 

 

옛날 어린시절 할아버지께서는 고모가 많았던 내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때는 없어도 될 듯한 손가락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할아버지 말씀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어 자식을 키워보니 이제는 이해가 된다.

 

기맥길에서 오늘같이 별반 볼 것도 없는 구간은 빼버리자는 분들도 있지만,

오늘 구간도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라서 뺄 수가 없는데, 

대간, 정맥, 기맥길을 걷다 보니, 

세상 이치에도 밝아지는 게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