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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호미기맥 05차(성황재~흰날재) : 포항시를 내려다 보며 그려진 그림

by 재희다 2024. 7. 9.


산행장소 : 호미기맥 05차(성황재~흰날재) 경북 경주시, 포항시. 
산행일시 : 2024. 03. 23.(토) 
산행코스 : 성황재(298.3m)~390봉~성황당고개~403.5봉~삼면능선(연대분맥 분기점)~만리성(426.9m)~산정 연못~246봉~묘봉산(362.5m)~284.6봉~월미산 갈림길(275m)~뒤뜸재~삼봉산(290.3m)~솔밭재~군펜스~장승백이교차로~장승백이/세계원재~신설도로구간~석곡묘소갈림길~석곡 이규준 선생 안내판~산악기상관측장비(210m)~조항산~항공장애등3호기~흰날재 (22.5km, 8시간 소요) 

산행참석 : 19 백두.

 
<참고사항>
산행 전반부인 성황재~장승백이(세계원재)까지는 약 16km로  6시간 정도 소요되는 구간이다. 만리성(426.9m)이 최고봉이며, 그 외 기맥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묘봉산(362.5m)과 삼봉산(290.5m)이 그나마 이름이 회자되는 산이다. 전체적으로 고도 200~400m 사이를 오르내리며 진행하게 되지만, 지금까지 진행해 온 기맥길과는 달리 등로가 뚜렷하고 특히 구간 후반부는 해병대 산악 훈련 코스로 조성되어 거의 수레길 수준이다. 다만, 장승백이로 접근하며 군부대 펜스 구간을 통과할 때는 원 기맥길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안전하게 우회 등로를 따르는 것이 무난하므로 무리하게 군부대 훈련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회하여 진행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이후 장승배기~흰날재 구간의 조항산까지는 임도와 능선길이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조항산 이후 흰날재까지는 등로가 없거나 희미하고 무척 거칠어 시간이 많이 걸리며 여름철에는 지나기조차 어려운 곳도 있다. 대체로 별다른 조망이 없으나, 조항산 오름길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포항과 영일만 조망이 볼만하다.
 
<산행지도>

 
삼월 하순으로 접어들며 기온이 올라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 되었다. 이번이 다소 긴 구간이기는 하지만 업다운도 무난하고 등로 상태도 좋다고 하여 무심하게 산행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산행일을 이틀 앞두고 이른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회사업무로 인해 새벽에 해외에서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업무가 바뀐 후부터 새벽 전화는 오직 따로 사시는 어른들 전용이 되었다. 산행을 이틀 앞둔 수욜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혹여 알람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허무하게 무너지며 짐작한 대로의 상황이 발생했지만, 다행히 예상보다 상황이 호전되어 산행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래도 세 곳의 살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미리 배낭을 꾸려 차에 싣고 금욜 오후 병원으로 가서 상태를 확인한 후 시골집으로 가서 식사를 챙기고는, 여느 산행 때의 집을 나서는 시간쯤에 차를 몰아 상주영천고속도로 낙동강의성휴게소로 향한다. 한산한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하여 총무님께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하면 전화를 달라고 메시지를 보내 놓고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데, 역시나 예상했던 새벽 2시쯤에 총무님으로부터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배낭을 들고 버스로 바꿔 탄 후, 좀 느긋해진 마음으로 두어 시간의 단잠에 들었다가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산행 출발지인 성황재에 도착한 버스에서 산행 준비를 마친 서여사님과 에스코트조 두 분이 배낭을 들고 버스문을 나서고 있다.  

 

 

진주의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서 여사님이 성황제 임시휴게소 앞에 정차한 버스에서 내려, 에스코트를 대동하여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성황재 방향으로 떠나고, 

 

<성황재>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양북면)에서 포항시 오천읍을 잇는 '거제 포항선'이라고도 하는 14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다. 고개 북쪽 아래에 휴게소가 있을 정도로 붐볐던 고개였는데, 지금은 고개 아래로 울산-포항 간 65번 도로인 '동해고속도로'의 '양북5터널'이 이어지고 있어서 한산한 고개로 바뀌었다. 성황재란 명칭은 옛날 성황당이 있어서 그리 불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성황재에서 포항 방면으로 100m 정도 내려간 지점의 간이 휴게소 입구에 해병대 1사단 장병들이 1979년 완공하였다는 '영월로' 개통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남은 사람들은 한 시간여의 쪽잠을 더 청하다가 일어나 산행 준비를 마치고는, 

 

1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성황재 고갯마루로 이동하여,  

 

성황재의 '급경사 구간' 표지판 뒤 절개지로 올라서며 호미기맥 다섯 번째 산행을 시작하는데, 

표지판 앞에서 대성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진행해도 기맥 능선으로 접속할 수 있다고 한다. 

 

 

소나무 가지들이 얽혀있어서 까탈스러운 절개지를 올라서면 꾀나 넓은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성황재에서 대성사로 이어지는 임도에서 이어오는 등로와 합류하여 350봉쯤의 밋밋한 첫번째 봉우리를 넘고, 

350봉쯤

 

우측 능선 봉우리로 이어진 임도를 두고 좌측 능선의 수레길로 진행하다가, 

 

우측 사면으로 이어가는 수레길을 두고 좌측 능선 숲길을 따르면, 

 

360봉쯤을 지나며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는데, 

 

좌전방으로 포항시 야경 불빛이 능선 너머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  

 

 

빼곡한 관목숲으로 이어진 소로를 따라 390봉쯤을 올랐다가 급좌틀하여 내려서는데, 

 

좌측 소나무 사이로 가로등이 밝혀진 동해고속도로 오천터널 부근의 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절벽 암릉을 만나 좌측으로 우회하여 내려서는 곳에서는, 

 

돌아본 지난 구간의 함월산 좌측 멀리로 '토함산'과 그 좌측의 석굴암 입구 주차장의 불빛쯤이 조망되며 일기 예보와는 달리 높은 구름으로 조망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하며, 

 

등로에 핀 진달래가 벌써 봄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오늘 산행에 대한 기대를 한층 부풀린다.  

 

 

말없이 새벽잠에 취해있는 묘지들을 지나며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르면, 

 

능선 안부 가운데의 나무 주변으로 돌무더기가 형성된 성황당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성황당((城隍堂)고개>
경주시 문무대왕면(양북면) 권이리 세바시골에서 오천읍 진전리 음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에 있는 돌무더기가 예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개였음을 짐작케 한다. 좌.우 계곡이 깊고 산을 휘돌아 내려가가서 마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측은 권이저수지 수정사, 좌측은 진전리로 가는 길이다. 

 

성황당 고개를 지난 오름길 초입에 포항시계를 알리는 '포항시 산악구조대' 표지판이 나무에 걸려 있고, 

 

오름길 우측 문무대왕면 방향 사면이 벌목되어 있어서 조망이 트인다. 

우측 문무대왕면 권이리 방향

 

 

오늘 산행은 세 팀으로 나뉘어 출발하게 되었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찍 산행을 마처야 하는 서여사님 팀은 새벽 4시에 출발 장승백이에 9시 남짓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치게 되고, 흰날재까지 종주하는 우리는 5시쯤에 출발하였고, 마지막으로 장승백이까지 짧게 진행하는 즐산팀은 6시에 출발하게 되었는데, 즐산팀은 6시 반을 넘은 시각에 이곳 벌목지대에서 쉼을 하며 느긋한 산행을 즐겼던 듯하다.

 

 

성황당 고개에서 잠시 올라 320봉쯤을 넘고,  

 

등로 좌측 낭떠러지가 일부 무너진 산사태 지역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접어들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따라 370봉쯤에 올라서서, 

 

다소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라 쉼터 흔적이 있는 안부를 지나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따르면, 

 

'준.희' 님의 403.5봉 산패가 걸린 봉우리를 지나게 되는데,

가야 할 만리성 방향으로 엇비슷한 봉우리들이 연이어 보인다. 

즐산팀의 403봉 인증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또다른 400봉쯤을 지나자, 

 

59번 송전탑 아래를 지나게 되고, 

 

완만한 능선길과 낙엽이 푹신한 등로를 따르다가,  

 

'포항시계 산악구조대' 표지판이 걸린 안부에서 직진의 능선을 두고 표지기가 걸린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는데, 

 

사면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기맥 능선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지만, 

 

이내 좌측이 무너져 내린 산사태 지대 날등에 이르러 우측 아래로 내려서게 되는데, 

 

날등을 내려서서 산사태 지대를 뒤돌아 보니 왜 등로가 우측 사면으로 우회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이 일대 경주와 포항 지역에서는, 지난 2016년 9월 12일 경주시 남남서 쪽 8km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지진은 1978년 대한민국 지진 관측 이래 역대 가장 강력한 지진으로, 대한민국 내륙 지진으로는 1978년 홍성 지진 이후 38년 만의 대형 지진이며, 한반도 내륙 지진으로는 1980년 평안북도 지진 이후 36년 만의 대형 지진이다. 그리고 2017년 11월 15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에서 발생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하였는데,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규모를 기록한 바 있는데, 이 포항 지진 원인 등을 조사해 온 정부 연구단은 2019년 3월 20일 인근 지열발전소가 촉발했다는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또한 2023년 11월 30일 오전 4시 55분 경주시 동남동쪽 19km, 와읍 분지의 남쪽이자 울산단층 동편 지진다발지역에 해당하는 문무대왕면 입천리에서 규모 4.0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곳 경주와 포항 일원은 지진이 잦은 곳이라 산사태의 원인이 지진이지 않을까 싶어 옛 산행기를 찾아봤더니, 이 부근의 산사태는 지진 발생 이전부터 있었던 흔적으로 지진과의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듯하고, 다만 토양이 마사토라 쉽게 무너질 수 있어서 산사태가 잦은 듯하다.  

 

무너져 내려 마사토가 드러난 사태지대 전경

 

산사태 지대 안부에서 파묘터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르다가, 

 

360봉쯤을 우회하여 지나, 

 

좌측 오천읍 진전리 큰샘정골 방향 갈림길을 지나면, 

 

이내 나타나는 'Y'자 갈림길에서 좌측 뚜렷한 능선 임도는 좌측 지능선의 송전탑으로 이어지므로,

표지기가 걸린 우측 사면 방향 등로를 따라야 하고, 

 

묘지가 있는 밋밋한 봉우리를 좌회하여 내려서면, 

 

넓고 펑퍼짐한 안부를 지나게 된다.  

 

 

빗물에 쓸려나간 자국이 낙엽으로 메워진 등로를 오르다가, 

 

이번에는 등로 우측이 산사태로 무너진 곳을 지나고, 

 

등로가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본 길주의 지점을 떠올려 좌틀하여 길 없는 사면으로 오르면, 

직진의 등로는 100여 미터 전방의 암자로 이어진다.

 

이내 우측 권이리 방향에서 이어오는 능선길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기맥길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 능선 봉우리가 삼면읍이 갈리는 곳으로, 좌측은 포항시 오천읍이 이어지지만, 우측은 경주시 문무대왕면에서 포항시 장기면으로 바뀌게 된다. 즉 이제 기맥길은 경주시계를 벗어나 온전히 포항시로 들어서서 호미곶까지 이어지게 된다.

길없는 사면을 따라 능선으로 오르는 백두

 

<​장기면의 지명 유래>
본래 신라의 지답현(只畓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에 기립현(鬐立縣)으로 고치고 양주(良州) 의창군(義昌郡: 지금의 포항시 흥해읍)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태조 23) 장기현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경주부의 속현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현으로 승격하여 감무를 두었다. 조선 시대에는 왜구의 방어를 위하여 태종 때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가 그 뒤 현감으로 바꾸었다. 1895년(고종 32) 동래부의 장기군이 되었다가 다음해 경상북도로 이관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일군 장기면이 되었다. 그 뒤 1934년 봉산면과 합하여 새로운 면을 만들 때 장기현의 옛 이름인 지답의 답(畓)자를 잘못 써서 행(杏)이 되어 지행면이 되었다. 1991년에 장기면으로 개칭되고 1995년에는 영일군과 포항시가 통합되어 포항시가 되었다. 장기의 지명 유래는 이곳의 지형이 긴 반도로 말갈기와 같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경주의 동쪽 외곽 지대이므로 신라 때부터 군사적으로 중요시하였던 곳이다. 신라 때의 옛 읍성이 있었고, 고려 현종 때 옛 읍성 북쪽에 새로이 읍성을 쌓았다. 해변가의 포이포진(包伊浦鎭)은 선조 때 동래로 옮기기 전까지 수군만호가 주둔하였었다. 이 지역 해안에 있던 복길(福吉)ㆍ뇌성산(磊城山) 봉수는 남북으로 연결되었고, 발산봉수(鉢山烽燧)는 내륙 지방의 영일ㆍ영천 지방의 봉수와 이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봉산역(峯山驛)을 통해 남쪽의 울산과 이어지는 해안도로가 발달하였고, 장기에서 서쪽으로 사현(沙峴)을 넘어 영일에 이어졌다. 현재 호미곶 등대가 있는 동을배곶(冬乙背串)은 당시 목장이 있었는데, 울산에 속하여 있어 월경지(越境地)의 행정 지역이었다. 

 

 

포항시계로 완전히 접어드는 삼면읍봉을 지나는데, 

 

우.후방 능선 너머에서 아침해가 붉은 기운을 비산시키며 모습을 드러내고, 

 

또다른 400봉쯤을 우회하여 지나서, 

 

앞쪽으로 드러나 보이는 만리성(426.9m)을 향해 낙엽이 수북한 능선 길을 따르다가, 

 

그저 밋밋한 능선 나무둥치에 '반바지(sblshch)'라는 산꾼이 걸어놓은 '만리성재(335m)' 코팅지를 지나게 된다. 

 

 

봉분이 낮아진 경주김공 묘를 지나, 

 

잠시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오르다가

 

다시 완만해진 능선길을 조금 더 따르면, 

 

만리성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의 돌 축대 흔적이 있는 만리봉을 갔다가 이곳으로 되돌아나와 우측으로 기맥길을 이어가는 지점이고, 

 

좌측 등로를 따라 만리성 정상부로 오르니 '가선대부 도은(陶隱) 김공' 묘비석이 있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묘지 뒤로 해병대 깃발과 오석의 '만리봉'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만리성/만리봉(萬里城, 427m)>
경북 포항시 오천읍 진전리와 갈평리 그리고 장기면 산서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인터넷 지도에는 만리봉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정상석에는 만리성으로 표시되어 있다. 오늘 산행구간 중에 가장 높은 산봉우리로, 흔히들 산은 독립된 봉우리는 ‘산(山)’이라 부르고 연결되어 있는 곳은 ‘봉(峰)’이라 부르는데, 이곳 정상은 성(城)이라 부른 것은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 있다고 하여 그리 부르게 된 듯하다. 
신라의 수도가 있던 서라벌(지금의 경주) 부근에는 성이 많이 있다. 왕궁을 방위하기 위한 성으로 서라벌 동쪽엔 명활산성, 남산엔 도당토성, 남산토성, 남산신성, 고위산성을 서쪽 선도산엔 서연산성을 그리고 멀리 건천 쪽엔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작성(작원성), 더 나가면 부산성과 왜구를 비롯한 외침을 막기 위한 성들이 많다. 이곳 만리성은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관문성과 함께 외침을 막기 위한 성이 아닌가 추측된다. 

 

 

 

오늘은 더 높이 오를 일이 없어진 만리성 정상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만리봉 정상부에 있는 묘지 한켠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쪽 장기면 양포항 방향

 

만리성 갈림길로 돌아나와 완만하게 이어지던 기맥길이 좌틀하며 급경사 내림길로 바뀌더니, 

좌전방 포항시 오천읍 방향

 

다시 완만해지며 우측으로 휘어지는 능선을 두고 다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급하게 내려서다가, 

가야 할 묘봉 방향

 

또다시 좌측으로 이어지는 지능선을 두고 급하게 우틀하여 사면 방향으로 내려가서는, 

 

이내 다시 우측 기맥 능선으로 접속하여 뚜렷한 능선길을 따르게 되는데, 

지도를 보면 등로가 지능선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기맥능선으로 접속하게 되어 있다. 

 

 

다시 뚜렷한 능선 등로가 이어지다가, 

 

기맥 능선이 직진의 지능선을 두고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임도 절개지가 사태가 난 듯이 보이는데, 

우측 절개지 상단을 따라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도 되지만 절개지 좌측 임도를 따라 진행하면, 

 

이내 우측으로 휘어지며 장기면 산서리 마근담골 군훈련장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두고 좌측 숲길로 들어서야 하고,

 

호젓한 숲길을 따라 작은 지능선 봉우리를 우회하기도 하고, 

 

좌회하기도 하며 평온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좌측 오천읍 갈평리 방향 지능선을 두고 급우틀하여 진행하면, 

 

능선 좌측 갈평리 방향 지능선 위 오목한 위치에 묘하게 자리한 묘지를 지나게 되고, 

기맥 능선 좌측 지능선을 깎아 남향으로 쓴 묘지

 

잠시 오름길을 올라 등로 우측 깃대가 있는 260봉쯤에 오르면 잎사귀를 떨구어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다. 

 

260봉쯤에서 본 가야 할 북동북쪽 묘봉산 방향. 

기맥길은 좌측 송전탑 방향으로 내려섰다가 우측 묘봉산 방향으로 휘어지며 이어진다.

 

좌측 서북서쪽 운제산 방향 

운토종주 산행에서 올랐던 운제산 남동쪽 기슭에 오어사와 오어지가 있다.

 

<오어사(吾魚寺)>
신라 진평왕(579-631)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19대 사찰 중 하나로, 원효대사, 자장율사, 혜공대사, 의상대사 등 신라 4대 조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최고의 성지이다. 창건당시 항사사(恒沙寺)라 불렸던 이 절이 오어사로 불리는 데는 두 수도승의 재미있는 일화에서 비롯된다. 원효대사와 혜공대사가 수도할 때, 서로의 법력을 겨루고자 물고기를 잡아 한마리씩 삼키고 변을 보았다. 그런데 한마리가 살아서 힘차게 헤엄치는 것을 보고 서로 자기 고기 라고해서 '나 오(吾)'지와 '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가 되었다고 하며, 그 문제의 고기를 놓아준 곳이 지금의 오어지(吾魚池)라고 삼국유사에 나와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스님이 1246년에 오어사에 머문적이 있으므로 당시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등로 우측 조망이 트인 260봉쯤에서 돌아본 만리성/만리봉 방향. 

 

 

해병 훈련용 깃대가 있는 260봉쯤을 돌아나와 능선길을 따르다가, 

 

송전탑이 자리한 232봉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서고,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작은 봉우리를 지나면,

등로 좌측으로 추락 방지용 가드 로프가 없는 지주봉이 줄지어 박혀 있고,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장기면 산서리 마근담골의 군 훈련장이 내려다 보인다.

 

'T'자 갈림 능선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좌전방으로 가야 할 묘봉산 능선이 펼쳐져 보이더니, 

 

임도 수준의 등로가 직좌틀하는 244.5봉을 지나면, 

 

올라야 할 묘봉산 능선이 성큼 다가서 있다. 

 

 

진달래가 화사하게 피어난 수레길 수준의 능선길을 따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우측 장기면 산서리 마근담골의 군 훈련장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길을 두고 좌측 오름길로 들어서면, 

 

빗물에 등로가 움푹 파인 능선길을 올라, 

돌아본 마근담골 방향 갈림길 전경

 

임도 공터가 조성된 24봉쯤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면서는 제법 가파르게 오르게 되고, 

 

제법 굵은 소나무가 자리한 260봉쯤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다가, 

 

밋밋한 안부를 지나 오래된 통나무 계단이 있는 능선 오름길을 오르게 된다. 

 

 

잠시 완만한 능선으로 수레길 수준의 널찍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편평한 쉼터 자리를 지나 가팔라진 오름길을 오르면, 

 

수레길이 완만해지며 봉우리를 좌회하여 지난 지점에서 '묘봉산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 갈림길에서 기맥 길은 좌측 아래로 이어지지만, 

 

우측 130m 지점의 묘봉산(362.5m)을 다녀오기로 하고 완만한 등로를 따르면,    

 

이내 자그마한 오석의 정상석이 자리한 묘봉산 정상에 오르게 되는데, 

직진하는 능선길과 좌측으로도 희미한 길이 있으나 갈림길로 되돌아 나가야 한다. 

 

<묘봉산(妙峰山, 361.5m)>
경북 포항시 오천읍 갈평리와 장기면 방산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나지막한 산봉으로 대부분이 야산지형을 이룬다. 호미기맥의 만리성재~삼봉산 사이에 있는 산으로 기맥에서는 약 130m가량 벗어나 있지만 호미기맥에 속해있는 산이라 할 수 있다. 정상부에는 '남포항클럽'에서 세운 아담한 정상석과 바윗돌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별다른 조망은 없다.

방산리를 기점으로 묘봉산 오르는 산길은 아직 찾는 산객이 그리 많지 않아 대부분의 등로가 희미할뿐더러 잡목이 제법 성가시게 하지만 오히려 청정수림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망해산~삼봉산~묘봉산을 잇는 오붓한 오솔길은 어느 깊은 오지의 고산에 못지않을 만큼 숲 속에 들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고, 산기슭에는 신라 때 사찰이었던 석남사터의 '남파대사비'를 비롯하여 망해산 아래의 고석사가 있어 산행과 더불어 사찰, 향토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묘봉 정상에서 본 북쪽 포항 방향
즐산팀의 묘봉산 인증

 

 

묘봉산 정상에서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기맥 진행 방향 좌측 능선 내림길로 들어서서, 

 

널찍한 수레길 수준의 행군로를 따르다가, 

 

310봉쯤을 오르지 않고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우회길로 들어서는데, 

 

돌아본 만리봉 우측 멀리로 함월산쯤이 가늠되고, 

 

사면에 자리한 묘지 아래를 지나 오르다가, 

 

작은 너덜지대 위를 통과한 후 사면으로 비스듬히 올라 다시 기맥 능선으로 접속하고,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잠시 더 따르다가, 

 

좌측 사면 방향 갈림길을 지나 능선길로 오르면, 

 

이내 그저 평범한 능선 봉우리인 336봉(방산봉)을 지나게 된다. 

우측 장기면 방향
돌아본 묘봉산 방향

 

 

신작로처럼 편안하게 이어지는 능선 등로를 따라, 

 

41번 송전탑을 지나고, 

우측 포항불루벨리산단과 구룡포 방향으로 이어진 송전선로

 

해병대 행군로로도 쓰이는 고속도로처럼 쭉 뻗은 기맥길을 따르다가, 

 

284.6봉 직전에서 등로는 우측 사면으로 휘어져 내려서게 되는데, 

원래는 직진하여 284.6봉을 올랐다가 우측으로 내려서야 하지만 편의상 해병대 행군로를 따라 우회하여 지나게 된다. 

 

 

이내 기맥 능선으로 복귀한 널찍한 행군로를 편안하게 이어가는데, 

 

우측 잡목 사이로 제법 커다란 규모의 '방산지'가 내려다 보이더니, 

 

좌측 '방산 저수지 0.6km'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방산저수지 갈림길 이정표

 

이내 다시 만나는 좌측 월미산 용봉(325m)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제1기동사격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월미산과 삼봉산 서쪽 기슭의 오천읍 문충리 마을>
삼봉산 아래에 있는 문충리는 고려말 충신이었던 포은 정몽주의 고향이다. 태어난 곳이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안 출신인 모친의 친정인 영천으로 7세까지 영천에서 기거하다가 문충리로 왔다는 설과 문충리에서 출생하여 영천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후에 포은의 고향인 문충리에서 '문충곡(文忠谷) 팔경(八景)'을 소개한 글을 남겼다. 문충리는 예로부터 선비들의 학문의 터전이요 훌륭한 인재를 배출한 선비촌으로 옛 지명에서도 고려시대 사거리(士居里), 사거리(索居里)라 불려졌고 신라시대에 이곳 출신이 태사자(太師者)란 벼슬을 했다고 하여 사거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말의 충신 초명은 몽란, 몽룡, 자는 달가 호는 포은, 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영일로 정습명의 후손이며 관의 아들, 공민왕 9년(1360) 삼장시험에 연달아 장원급제 1364년 병마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의 삼선, 삼개를 격퇴하였고 1372년 서상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가 다시 귀양 갔다. 1380년 일본사신으로 가서 해구를 금지토록 교섭하고 돌아와 1384년 두 번째 명나라에 가서 국교를 두텁게 하고 돌아왔으며 1386년 또 명나라에 들어가 세공을 면제토록 청하고 돌아와 영원군에 봉해졌다.
1389년 대제학이 되어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세우고 좌명공신의 호를 받으며, 1392년 대명률을 새로 찬정해 바쳤다. 당시 이성계의 힘이 날로 커져서 조준, 정도전 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매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성품이 호방하고 매서웠으며 충효로 일관했고 성리학에 매우 밝아 5부학당, 향교를 설치 유학을 진흥시켰다. 고려조의 마지막 충신으로 이 지방 오천읍이 공의 고향이다.

 

월미산 방향 이정표

 

 

월미산 용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 등로를 따르다가, 

 

250봉쯤의 'Y'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하고, 

 

이내 또다른 261봉에 올랐다가 좌틀하여 내려서는데, 

 

좌전방 능선 너머로 포항시가지가 가늠되고, 

 

<포항(浦項)이란 지명 유래>
'포항(浦項)'이란 지명 유래는 포항의 대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형산강의 하류이자 지류로서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칠성강의 중요지점을 나타내는 우리말 지명인 갯메기(갯미기:표준말은 갯목)의 한자화로 이루어졌다. 갯목은 구 역전교(驛前橋, 1980년대 초에 복개함) 지역이며, 포항창진은 오늘날 포항시네마(구 포항극장) 지역이다. 포항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731년(영조 7년) 포항창진(浦項倉鎭)을 설치하면서 창진이 설치된 마을 이름을 기존의 영일현 북면의 대흥리(大興里)를 포항리(浦項里)로 개칭하고, 창진의 이름을 포항창진(浦項倉鎭)으로 등재한 데서 비롯되었다. 
예로부터 형산강 북하구의 중심지류 연변인 포항리가 조운과 물화교역의 요충지로서 주목을 받아 오다가 포항창진(흉년시 함경북도지방의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때로는 여타 지방의 백성진휼(賑恤)의 운송을 담당하는 전국 굴지의 제민창)이 설치되면서부터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 이들에 의해 도내(島內)리를 비롯한 5도 등의 섬마을이 개척되어, 바야흐로 포항은 동해안 물화교역의 중심항구로서 잠재적 역할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포항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따라서 포항 지명은 고장의 특유한 자연환경(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중요 지점:갯목)과 역사환경(포항창진 설치)에 의해서 유래되었으며, 이로부터 포항의 지명은 중앙에서부터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살짝 당겨본 포항 시가지 조망

 

군 행군로로 쓰여서 그런지 최근까지도 정비한 흔적이 역력한 등로를 따르면, 

 

최근에 설치된 듯 보이는 군부대 펜스가 시작되는데,

이곳부터 한참동안 펜스 우측 넓은 등로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걸어온 등로가 둘레길 수준이라며 좋아했는데,

군 훈련장 울타리 옆으로 이어지는 산책길 수준의 더욱 걷기 좋은 등로를 따르면,  

 

등로 우측 나무둥치에 반바지님의 뒤뜸재 코팅지가 걸려있고, 

 

<뒤뜸재(265m)>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리에 있는 고개다. 해병대 훈련장 울타리 옆으로 이어진 행군로 상에 있어서 옛 고개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고, 네이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삼봉산으로 가는 능선으로 올라가면 우측으로 희미한 길흔적이 보이고, 그곳에서 조금을 더 가면 해병대에서 쌓은 돌탑이 나오는데 그곳이 '뒤뜸재'라고 한다. 뒷동네라는 뜻의 뒤뜸으로 뒷동네 재를 말하는데, 현지에서는 길등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뒤뜸재를 바로 지난 지점의 해병대 경고판이 서 있는 곳에서 우측 능선숲길로 들어서서, 

 

잡목과 잔가지들의 태클을 뿌리치며 잠시 거친 능선길을 따르면, 

 

글자가 없는 삼각점과 손글씨로 쓴 '삼봉산 288m' 나무판자가 걸려있는 삼봉산 정상에 도착하는데,

주변은 잡목으로 둘러싸여 별다른 조망은 없다. 

 

<삼봉산(三峰山, 290.3m)>
경북 포항시 오천읍 용산리와 장기면 방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 3개가 연이어 있어서 삼봉산이라고 부른다. 산 정상에는 손글씨로 쓴 '삼봉산' 나무판자가 걸려있고 아무런 글자 표식이 없는 삼각점이 있다. 정상에는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이 없으며, 건너편으로 망해산만 가늠된다. 봉우리 정상을 10여 미터 지난 지점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다시 행군로를 만나게 된다.

 

 

삼봉산 정상을 뒤로하고 10여 미터 진행하다가 좌측 길흔적을 따라 좌틀하여 내려서면,

 

이내 다시 군 훈련장 울타리 옆으로 이어지는 등로에 접속하게 되는데, 

 

등로 옆 나무둥치에는 '삼봉산 50m'라 쓰인 작은 표지판이 걸려있고, 

그 앞쪽으로 빨간 전화부스와 해병대 장병들의 낙서판과 입산통제구역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해병대 신병들의 낙서판이 오래 전의 옛 기억을 일깨워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편안한 등로를 따르다가, 

 

등로가 펜스 철망문 안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펜스 우측 아래로 이어진 오솔길로 내려서서, 

 

좁지만 뚜렷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군부대 펜스 안쪽의 송전탑을 지나고, 

 

따르던 등로가 우측 지능선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표지기가 걸린 좌측 사면길로 진행하면, 

 

좌측으로 또 다른 펜스 문을 만나는데,

약 5분 전에 만났던 출입문 안으로 들어갔던 행군로가 이 출입문으로 이어지는 듯하고, 

 

바로 나타나는 세 번째 출입문도 잠겨 있어서 다시 펜스 우측 아래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그다지 '재' 같지는 않은 지점의 등로 옆 나무둥치에 '반바지'님이 걸어놓은 '솔밭재(195m)' 코팅지가 걸려있다. 

 

 

따르던 등로가 다시 철망 펜스 옆 행군로로 접속하는 지점에 네 번째 철망문이 있는데, 이곳도 5분 전에 만났던 철망문으로 들어섰던 행군로가 다시 이곳으로 나오게 되는 듯하고, 다른 철망문들과는 달리 이곳 철망문의 자물쇠는 잠겨져 있지 않고, 

 

'통문 2'라 적힌 자물쇠가 걸린 철망문 옆 나무둥치에는 '준.희'님의 204.2봉 산패가 걸려있는데, 

지도를 보니 기맥길은 북동진하는 능선을 두고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장승배기로 이어지게 되는 지점인데, 

군 훈련장으로 들어서기도 어렵지만 나오는 것도 부대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그냥 훈련장을 우회하기로 한다. 

 

 

연이은 다섯 번째 출입문에서 안쪽 임도로 진행하면 바로 장승배기의 훈련장 정문으로 진행할 수 있겠지만, 굳게 잠겨 있는 문을 어거지로 열어젖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철망 울타리 옆으로 이어지는 행군로를 따라 진행하고, 

 

우측 지능선으로도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직진의 울타리 옆 행군로를 계속 따르면, 

 

이어지던 철망울타리가 끝나는 194봉쯤에서 따르던 행군로도 앞을 막아서는 원형 철조망에 가로막혀 끝이 나고,

등로는 원형 철조망을 피해 우측 능선으로 이어져, 

 

완만한 지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파묘터와 교통호를 연이어 지나서 내려서면, 

 

녹슨 게양대가 나타나며 해병 각개전투장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내 사라졌던 철망 울타리가 다시 '각개전투장' 안과 밖을 갈라놓는 지점에서,

철망 울타리를 좌측에 끼고 훈련장 밖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울타리 안쪽의 또다른 철재 가림막이 보이기에 혹여 가림막과 울타리 사이로 진행하는 길이 있을까 싶어서 들어가 보았지만, 

 

포항은 예로부터 나라와 향토를 지키는 해방(海防)의 보루로써 역사의 고비마다 시대적 과제를 극복하며 그 역할을 다해온 전통적인 국방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물론 많은 포항시민들까지도 현재 ‘해병대 제1사단’의 주둔지, 즉 오천해병부대가 6.25전쟁 때 처음으로 설치된 군사기지로 알고 있을 뿐, 이 터전이 일찍이 조선시대에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말하자면 포항 군사기지의 역사는 아주 길고, 해병부대 주둔의 역사는 짧은 것이다. 

 

오늘날 해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오천의 군사기지가 국방의 보루로 된 것은 조선시대 초이며, 뿐만 아니라 영일만권의 해방 요충지에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수군기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영일만은 삼국시대부터 북으로는 고구려와 접경지역이며 동해안은 왜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신라의 서울 금성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모든 문물이 미개하고 풍토가 척박했던 섬나라 왜구의 잦은 침입과 노략질로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왜구의 침입은 신라 초 14년(남해왕 11)부터 기록이 보이기 시작하여 731년에 이르기까지 30차례나 되었으며, 특히 고려말 1350년부터 1380·1381년 31년간 겪게 되는 왜구의 병화는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영일만 일대는 초토화되었다. 또한 1381년에 더욱 화를 입어 고을이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들은 학살과 약탈을 당하여 거의 재물이 없어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사방으로 달아나 흩어졌다.
영일만권에서 가장 큰 고을인 흥해군은 텅비어 나무들만 무성하게 되었으며, 고을 원도 먼 마을로 피신해 살면서 흥해로 들어오지 못한 지 수년씩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외적에 대한 방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신라시대부터 설치했던 개포(현 월포)의 수군진을 1387년(우왕 13)에 통양포 두모적포(현 두호동)로 옮겨 수군만호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곧 만호를 위시하여 병선 8척과 정규군 218명이 배치되면서 인근 고을로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포항은 광복 후 현대에 이르러서도 국방지역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고 있다. 6.25 전쟁시 학도의용군의 전투와 포항해병부대의 설치가 그것이다. 포항은 6.25 전쟁시 계급도 군번도 없이 참전한 학도의용군의 숭고한 정신이 살아있는 요람이다. 당시 포항은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으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8월 11일 새벽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참전하여 50∼60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나 아깝게도 김춘식 외 57명이 장렬한 전사를 하였으며, 이후 포항 학도병들이 대거 참여한 양덕동의 무당곡 삿갓봉 전투에서 100여 명의 학도병들이 꽃다운 나이로 산화하였다.
포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였다. 김석원 장군은 《학도병회고》에서 “의로운 정신은 생사를 초월했고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야 말로 천하무적의 장군이 아니었던가. 학도는 그 시대의 양심이며 미래를 위한 꽃봉오리인 것, 젊음이 아깝고 우국충정이 가상하다. 그날의 수많은 젊은 이들이 죽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나라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의로운 사람은 죽어서 억조창생을 살게 하노니…”라 하였다. 이로써 포항은 6.25 전사에 빛나는 구국 희생정신의 사표로서 나라사랑의 귀감이 된 학도의용군의 본고장이 되고, 학도의용군 전투는 국방도시 포항의 정체성을 빛내고 한국 학도의 명예를 드높인 자유·민주수호의 횃불이 되었다. 

1949년 4월 15일 창설된 한국 해병대가 이미 조선시대부터 닦아놓은 포항 오천의 군사기지 터전에 처음으로 주둔하게 된 것은 1952년 8월 1일이었으며, 1956년 8월 이후 포항에서 국토방위의 투혼과 실전능력을 배양하는 해병의 일선교육기지로 발전하여, 이제 포항은 한국해병의 산실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1959년 해병대 1사단이 경기도 파주에서 포항으로 이전하였으며, 1965년 3월 비둘기부대와 청룡부대가 베트남 전선에 파병되어 ‘신화를 남긴 해병’, ‘무적의 해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날렸다. 이로부터 무적해병의 강한 호국의지는 다른 어느 지역민보다 포항인의 기상에 강하게 흐르고 있다. 따라서 영일만권의 군사기지 설치는 일찍이 신라의 수군진(浦鎭)에서 비롯되어 고려를 이어 조선조의 수군진과 영일진을 거쳐 학도의용군의 호국의지와 함께 오늘날 해병부대의 주둔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을 맥맥이 이어오고 있다.

 

더이상 길흔적이 보이지 않아 되돌아 나와, 

 

울타리 밖으로 이어진 족적을 따라 진행하기로 한다. 

 

 

철망 울타리 밖으로 이어진 기맥꾼들의 족적을 따라, 

 

울타리 우측 꾀나 넓은 밭 우측 밭두렁을 따라 나가서, 

 

밭과 대나무숲 사이로 이어진 임도를 따르면, 

 

이내 2차선의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방산로에 내려서게 되고, 

 

좌측 언덕을 넘어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우전방 가야할 금광석산과 조항산 방향

 

 

도로를 따라 해병대 '각개전투교장/침투교장'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출입문을 지나고, 

 

6차선의 929번 도로가 지나는 '장승백이 교차로'에서 좌틀하여 훈련장입구가 있는 장승백이로 향하면, 

 

벌써 논에 물을 잡아 못자리를 준비하는 농부가 시선을 끌고, 

 

넓은 929번 도로를 따라 원래의 기맥 길이 지나는 군부대 정문 앞, 장승백이로 진행하면, 

 

장승백이/세계원재를 지나는 넓은 929번 도로 위 복개도로에서 즐산팀을 기다리는 우리의 애마가 보이고, 

원 기맥길인 군 훈련장 정문 전경

 

<장승백이/세계원재>
경북 포항시 오천읍 금광리와 장기면 정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다. 좌측은 오천읍 세계리, 우측은 장기면 정천리인데, 6차선의 929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고 정상에는 석장승 2기와 정천리(井川里) 버스 정류장이 있다. 예전에 장승이 있어서 장승배기라고 부르는 장승배기 마을에는 현재 20 가구 정도의 민가가 있으며,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금은 장기면 정천 2리에 속해 있고, 지도상에는 세계원재로 표기되어 있다.(고개 서쪽 31번 국도와 929번 지방도가 교차하는 ‘세계교차로’를 '세계원재'라 부르기도 한다.)

세계(世界) 세계원(世界阮) 혜제(惠濟) 혜제원(惠濟阮)은 신라 때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일월지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빛이 고지대인 이곳에 제일 먼저 비쳐 온 세계가 환하게 되었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맥길은 장승백이/세계원재를 지나는 '장승배기' 마을로 이어진다.  

 

 

 

즐산팀을 기다리는 애마에게 아쉬운 눈초리를 보내며 흰날재를 향해 정천2리 장승배기 마을 안길로 들어서서, 

 

<정천리(井泉里)>
정족산의 북동쪽으로 펼쳐진 참샘이, 장승배기, 퉁점을 정천1리라 하고, 냉천마을을 지나는 하천과 죽정에서 흐르는 하천과 만나는 곳에 정천2리에 속하는 하정이 있다. 서로는 오천읍과 북은 동해면과 경계를 이룬다. 
정천리에는 운천 김윤찬(金潤瓚)의 효자비와 백운 김광화(金光華)의 충절유허비 및 만취 이헌칠(李憲七)을 기리는 이요정(二樂亭)이 있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스산한 마을 안길을 따르다가, 

 

장승백이 마을을 벗어난 시멘트 포장도로를 두고 우측 숲길로 들어서서 잠시 더 진행하면, 

 

이내 2차선의 포장도로인 금광로에 접속하는데,

장승백이까지 산행을 하고 포항 터미널로 떠난 서여사님 에스코트 조가 기다리고 있다가 합세하여, 

 

좌측 금광로를 따라 100여 미터 진행하다가 우측 '산불전문 진화대' 앞으로 이어지는 임도로 진행해야 하는데, 

산불진화대 대기소 앞마당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쉼을 한다. 

 

 

잠시 따스한 햇살을 즐기다가 다시금 배낭을 메고 산불진화대 대기소 앞으로 이어진 임도를 따르면, 

임도 좌측의 보리밭 풍경

 

임도는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을 연이어지나, 

 

'Y'자 갈림길에서 정면 납골묘 방향 임도를 두고 급 우틀하여 대나무숲과 소나무숲 사잇길을 지나서, 

 

정천리 통점마을 안길로 이어지는 도로에 접속하여서는 좌측 통점 마을 안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르게 된다.

 

<​통점(銅店) 마을>
포항시 동해면과 장기면과의 경계지점에 위치하며 퉁지미라고도 부른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으로 되어 있다가 1995년 6월 21일 장기면 정천 1리로 편입되었다. 옛날에 구리를 녹이던 동점(銅店)이 있었다 하여 불려지게 된 이름이다. 

 

 

 

통점 마을을 통과하여 앞쪽 능선 숲 방향의 비포장 임도로 진행하다가, 

 

신우대숲을 지나 소나무숲으로 들어서면 따르던 임도가 소로로 바뀌더니, 

 

이내 희미해지던 길흔적은 씻겨져 나간 듯이 사라져 대충의 방향만 정하여 진행하다가, 

이곳 우측의 골짜기가 '큰고자골'인데..ㅉㅉ

 

최근에 포장된 듯 보이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능선 위로 올라서니, 

 

다시 수렛길 수준의 등로가 이어지다가, 

 

잠시 전에 건넜던 시멘트포장 임도쯤에 접속하여 좌측 포장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훈련용으로 보이는 폐 군용 트럭과 소형차량이 비치된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르는데, 

 

<우리 군 차량의 역사>
건국 후 국군이 보유한 차량은 구 일본군이 남기고 간 도요타·이스즈 트럭이나 미군이 공여한 G503 지프(윌리스 MB 또는 포드 GPW)나 G508 트럭 등이 있었지만 수량은 심각하게 부족했다. 심지어는 전차 하나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침공으로 얼마 없던 군용차조차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민간에서 5천여 대의 트럭을 징발했지만 혹독한 전선을 상용차는 버텨내지 못했다. UN군이 파병되자 우리 군은 미 8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군도 차량 여분이 많지 않아 결국 고장 난 군용차를 수리하는 한편 도요타나 이스즈, 미쯔비시 등의 민수 트럭 1만여 대를 일본에서 들여와 우리 군에 보급하는 등, 미국은 한국군에게 필요한 신형 군용차를 일본으로부터 조달해 왔고, 결국 6.25 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의 자동차 공업은 다시금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차량들은 이후 1970년대 초까지도 일선을 지키며 우리 군 수송의 핵심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차량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베트남전이었다. 파월 군은 베트남 현지에서 미군 군용차량을 공여받았고, 미군이 오랜 기간 애용해 온 M35 트럭을 1978년 국산화한 것이 K-511 트럭이다. 이 트럭은 가장 쓰임새가 많았던 트럭으로 거의 2만 대가량이 보급되어 우리 군이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차량이었는데, 군대 내에서는 육공 트럭, 두돈반, 둘반, 이일톤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K-511은 포장로에서는 4.5톤, 야지에서는 2.5톤의 적재량을 자랑하며, 완전무장한 병력을 20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기계식 클러치와 핸들을 채용하여, 가장 운전하기 힘든 차로 악명이 높았고, 게다가 직렬 6기통 7,255cc 160마력 디젤 엔진과 5단 수동기어를 채용하여 리터당 2.6km밖에 달리지 못하는, 거의 슈퍼카급의 연비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2003년 등장한 K-511 A1은 파워핸들과 유압식 클러치가 채용되었고, 엔진 성능도 대폭 개선되어 183마력에 연비가 리터당 5.5km로 향상되었다.(펌)

 

옛날 쌍용의 무쏘?

 

도로 좌측 가장자리에 '측면경사지 통과 훈련' 안내판이 놓여 있고, 

 

군용 임도 우측의 넓게 공터는 군 훈련장으로 조성된 듯 보이며, 

 

훈련장으로 보이는 공터를 따라 우측으로 휘어지는 임도를 두고 좌측 임도로 들어선다. 

 

 

최근에 포장된 듯한 매끈한 임도를 따라 오르는데, 

 

우측 구룡포읍의 뇌성산(212.8m) 방향으로 새로이 조성되고 있는 포항블루밸리국가산단이 조망되고, 

 

조금 더 임도를 따르다가 기맥 능선으로 올라도 되지만, 

좌측 숲으로 이어진 희미한 길흔적을 따라 기맥능선 숲길로 들어서서, 

돌아본 임도가 이어진 기맥 능선 방향

 

거친 숲속으로 어지러이 흩어진 족적을 더듬어 오르다가,  

 

다소간 완만해진 빼곡한 소나무숲을 헤쳐 오르면, 

 

임도가 아닌 기맥 능선길을 고집했던 선답자들이 쉬어간 흔적이 역력한 178봉쯤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쉼을 한다. 

우측 포항블루밸리국가산단 방향

 

 

178봉을 뒤로하고 거친 능선으로 이어진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잠시 내려서다가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접어들어, 

 

잠시 전의 포장임도에서 이어올듯 보이는 임도에 접속하여 잠시 더 오르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 길에는 '석곡 선생 묘소 가는 길 250m' 표지판이 걸려있고,

기맥길인 좌측의 완만한 오름길로 들어서서 잠시 더 진행하면, 


​<석곡 이규준선생 묘소>
포항 출신의 유명한 한학자이면서 한의학자였던 석곡 이규준(1855~1923) 선생은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한의학자다. 근대 한의학의 서곡을 울린 한의학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만큼 그의 업적을 정리하고 유산을 보존, 관리해 포항의 문화유산으로 잘 가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석곡 선생은 고향인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에서 기존 성리학을 비판하며 특히 의학 연구에 힘써온 실학자였다. 선생은 당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주자의 학설을 비판해서 유교경전 13경에 독자적인 주석을 달아 조선 유림을 들끓게 만들었다. 또한 의학경전인 '황제내경'에 주석을 달아 중국의학을 숭상하던 조선의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대표적인 의학서로는 '황제내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추려 편찬한 '황제내경 소문대요'와 직접 저술한 '의감중마'가 있는데 이중 '의감중마'는 평소 선생이 주창하던 부양론(扶陽論)과 기혈론(氣血論)에 상통하는 부분을 '동의보감' 중에서 발췌하여 간행한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 한의학계에서 아주 소중히 여기는 의서로 중요시되고 있다. 또한 선생은 병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난치병을 치료했고 서병오(석재), 이원세(무위당), 배을제, 조규철 등의 제자를 배출했다. 석곡선생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무료로 처방해 주었으며 움막을 만들어 나병환자를 모아 두고 치료해 주었다. 이처럼 석곡 선생의 뛰어난 학문 성과와 사상은 오늘날 전국의 한의사들이 학회를 만들어 이어오고 있을 정도이다. 해마다 선생의 기일이 되면 한의사들이 그의 고향인 포항을 찾아와 한자리에 모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석곡 이규준 선생 묘소 가는 길 350m' 표지판이 있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휘며 이어지고, 

 

개항기 한국의 한의학을 빛낸 삼대(三大) 의가(醫家)로 황도연(黃度淵), 이제마(李濟馬), 이규준(李圭晙)을 꼽는다. 이들 세 인물은 한국 한의학의 전통을 현대 한의학까지 계승한 학술 대가(學術大家)들로, 공통적으로 유의(儒醫)인 이들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로서 자신의 독창적인 의학관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황도연(黃度淵, 1808~1884)은 서울 무교동에서 의원을 경영하면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로 노년에 펴낸 『방약합편(方藥合編)』은 한국의학사를 빛낸 위대한 업적이다.

이제마(李濟馬, 1836~1900)는 평생 연구한 의학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독창적인 사상체질의학 이론(四象體質醫學理論)을 완성했다. 이 학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기존의 관념을 뒤엎는 새로운 인체관을 제시한 것으로 한국의학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은 1855년(철종 6년) 경북 포항시 동해면 임곡리에서 출생하여 이후 동해면 석리로 이주하여 살며 지명을 따서 호를 석곡(石谷)이라 하였다. 그는 유학적 원리를 의학 이론에 적용시켜 독창적인 부양 학설(扶陽學說)을 창립했는데, 그가 주장한 부양론(扶陽論)의 핵심은 양기(陽氣)를 기르는 것이 인체의 생명활동을 영위하는 데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화(火)가 기(氣)가 되어 지각운동, 호흡, 소어(笑語) 등 일체의 활동을 비롯하여 피부를 윤택하게 하고 풍한을 방어하는 등의 생리작용을 하여 일신(一身)을 주류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주장했다.

 

'석곡 선생 묘소 가는 길 350m' 표지판

 

이내 다시 좌측으로 휘어지며 더욱 완만해진 숲길을 잠시 더 따르면, 

 

지도에 '금광석산'이라 표시된 210봉쯤을 지나게 되는데, 

(실제 금광석산은 잠시 전에 스쳐지난 석곡 선생 묘소가 자리한 봉우리 임)

 

앞서가던 김전무가 새벽에 시간에 쫓기며 급하게 걸은 탓을 하며 임도에 주저앉아 쉼을 하고 있다. 

 

 

잠시의 다리쉼으로 기운을 회복하여 임도 내림길로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가야 할 조항산이 조망되고, 

살짝 당겨본 조항산 정상부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포항시와 영일만 조망

 

임도를 따라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면, 

 

'석곡 이규준 선생 안내판'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진행해야 하지만,

좌측의 포항시와 영일만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를 잠시 다녀오기로 한다.

석곡 이규준 선생 설명판

<석곡 이규준 선생>
석곡 이규준(石谷 李圭晙 1855~1923)은 우리지역의 대표적 유학자ㆍ한의학자로서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주창한 동무 이제마(東武 李濟馬 1837~1899와 함께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1855년(철종 6년) 경상북도 포항시 동해면 임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후 동해면 석리로 이주하여 살며 지명을 따서 호를 석곡(石谷)이라 하였다. 석곡은 유학자로서 기성 유학자들이 권위주의적인 허세ㆍ허식을 배척하며 유학이 근본이념으로 회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육경주소(六經注疏)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산정(刪定:쓸데없는 글귀를 다듬는 일)한 육경주(六經注)를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포상기문(浦上寄文)」, 「구장요결(九章要訣)」, 「신교술세문(新敎術世文)」, 「석곡산고(石谷散稿)」 등의 저서가 알려져 있다. 특히 한의학자로서, 모든 병은 양기를 북돋워 주어야 낫는다는 "부양론"을 주창하였으며 말년에는 의학연구에 전념하여 「황제소문절요(黃帝素問節要)」, 「의감중마(醫鑑重磨)」 등을 저술하였다. 
2009년에는 석곡 선생의 저서 목판본 360여 매가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선생의 이름을 딴 석곡도서관이 고향 동해면에 세워져 석곡의 학문과 뜻을 기리고 있다. 

 

※ 부양론(扶陽論) : 양기(陽氣)가 생명의 근원이지만 항상 부족하기 쉽고 음(陰)은 남아돌기 때문에 양기 부족이 병의 원인이라는 입장의 한의학 학설.

 

포항시와 영일만이 시원스레 조망되는 전망대.  

 

<포항(浦項)>
'포항(浦項)'이란 지명 유래는 포항의 대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형산강의 하류이자 지류로서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칠성강의 중요지점을 나타내는 우리말 지명인 갯메기(갯미기:표준말은 갯목)의 한자화로 이루어졌다. 갯목은 구 역전교(驛前橋, 1980년대 초에 복개함) 지역이며, 포항창진은 오늘날 포항시네마(구 포항극장) 지역이다. 포항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731년(영조 7년) 포항창진(浦項倉鎭)을 설치하면서 창진이 설치된 마을 이름을 기존의 영일현 북면의 대흥리(大興里)를 포항리(浦項里)로 개칭하고, 창진의 이름을 포항창진(浦項倉鎭)으로 등재한데서 비롯되었다.   
예로부터 형산강 북하구의 중심지류 연변인 포항리가 조운과 물화교역의 요충지로서 주목을 받아 오다가 포항창진(흉년시 함경북도지방의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때로는 여타 지방의 백성진휼(賑恤)의 운송을 담당하는 전국 굴지의 제민창)이 설치되면서부터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 이들에 의해 도내(島內)리를 비롯한 5도 등의 섬마을이 개척되어, 바야흐로 포항은 동해안 물화교역의 중심항구로서 잠재적 역할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포항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따라서 포항이란 지명은 우리 고장의 특유한 자연환경(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중요 지점:갯목)과 역사환경(포항창진 설치)에 의해서 유래되었으며, 이로부터 포항의 지명은 중앙에서부터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전망대에서 본 포항시와 영일만 조망. 

서쪽 운제산 방향
서북쪽 포항시가지 방향
살짝 당겨본 포스코(포항제철) 방향

 

<신의 한수 포스코(포항제철)>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중 기초산업으로 철강 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경제사정으로 볼 때 국내 자금만으로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제철소 건설을 위해 주식을 공모했지만, 목표액 33억 원의 0.4%인 1,300만 원만 모였을 뿐이었다.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은 다들 무모한 일이라며 반대를 했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과 국제단체에서는 이를 두고 과시용 사업이라고 보았다.
종합제철소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65년이었다. 그 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해 제철소 건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더 다지게 되었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포이 회장은 국제제철차관단을 만들어 종합제철소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부지 선정에서도 잡음이 있었는데, 당시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이었던 황병태 등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대한중석 사장이던 박태준이 종합제철추진단장으로 사업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제철소 후보지는 충남 서천(비인), 경남 울산, 삼천포 등 3곳이었고, 포항은 후보에도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고향 챙기기는 여전해서 충남 출신인 공화당 김종필 의장과 김용태 원내총무(현재의 원내대표격)가 서천을 밀고,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이 울산을 밀고,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창 서정귀가 삼천포를 밀고 있었다. 큰돈이 들어가는 사업인 만큼 박정희는 세 부지를 둘러보고 신중히 결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황병태만 있는 자리에서 슬쩍 물어보고 포항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연극을 하자고 했다고 한다. 이후 열흘쯤 후 경제동향 보고회 자리에서 뜬금없이 황병태를 찾은 후 제철소 부지 설명을 요구하고 포항 이야기를 하게 하더니 즉석에서 포항으로 낙점했다고 한다.

종합제철소 건설은 시작부터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었다. 세계은행은 채산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국내외의 많은 기관이나 회사들도 마찬가지로 제철소 건설을 회의적이라 보았다. 그러나 산업화 초입에 들어선 입장에서 철강의 자체생산은 필수불가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철소 건설을 성사시켜야 했었다고 한다.
1969년 1월 하순 하와이. 박태준은 와이키키 해변을 걷고 있었다. 종합제철소 건설에 쓸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 워싱턴까지 날아갔지만 믿었던 국제제철차관단(KISA)의 프레드 포이 대표에게 퇴짜를 맞았다. 세계 철강업계와 금융기관들은 이름조차 낯선 후진국 대한민국에다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이 성공할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박태준은 쏜살같이 콘도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에서 협상은 실패했지만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轉用)하는 것입니다. 

농수산 지원 용도 등으로 사용하기로 한 자금을 제철소 건설로 돌려서 활용하자는 이야기였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기막힌 아이디어군. 대일 청구권 자금이 1억 달러는 남아 있을 거야. 일본 정부는 임자가 설득해. 당시 정치권은 농수산 지원 용도로 쓰일 자금을 전용하는 데 반대했다. 많은 국회의원이 농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희와 박태준은 국가의 농수산업 대신 제철소를 선택했다. 
일본 정부를 설득하라는 언급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현금으로 지급된 게 아니라,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10년에 걸쳐 지급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금을 운용하여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일본 기업을 사실상 반드시 고용할 필요가 있었고, 일본은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시장 확보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상으로 지급된 차관은 갚아야 할 부채였다. 1969년은 일본의 기업과 정부에 의한 태도변화로 한국철강공업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있었던 해였다. 이러한 전환의 원인으로 기존에 크게 3가지 주장과 증언이 인용되고 있으나 본 고는 보다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이유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일본이 한국의 종합제철공장 건설에 협조적 자세로 전환한 배경으로 3가지를 찾아내었다. 첫째는 미국이 주도권을 잡았던 KISA 협약이 붕괴됨으로써 종합제철 건설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이 시기 철강공업 등 산업공해문제는 일본의 중요한 이슈의 하나로 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일본은 향후 철강공업 재구성, 자본재생산설비 과잉문제 처리를 위해서는 철강공업설비를 판매할 크고 안정적이며 중장기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장기간 준비하고 기술을 축적해 온 한국의 능력과 의지, 점점 표준화되고 있는 세계 철강공업의 노하우를 고려할 때 어차피 한국의 종합철강공장은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 건설이 시작된다는 판단이 분명히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의 대응이 중요하였다.


그렇게 1970년부터 제철소 건설에 들어갔다. 이때 박태준 회장은 첫 삽을 뜰 때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 모두 우향우 해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는데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에 해당하는 1,205억 원의 자금을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조업 첫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 달러, 순이익 1,200만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이로써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 하지만 아직 국제규모에 크게 밀리는 기업이라 확장이 절실했고 제철소 4기가 완성될 때까지 13년이 걸렸다.

1978년, 중국의 최고실세로 떠오른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을 방문해 중국에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은 “제철소는 돈과 기술로만 짓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짓습니다.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 포항제철은 기적입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한 일화가 있다. (펌)

 

포항제철이 있는 포항을 배경으로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가 트인 포항과 영일만 조망을 품고 석곡 선생의 설명판이 있는 삼거리로 돌아나와,

 

조항산으로 이어진 기맥길을 따르면, 

좌측 포항시가지와 영일만 방향

 

'산악기상 관측 장비'가 있는 능선봉에 도착하게 되는데, 

 

기상관측장비 옆에는 포항과 영일만을 조망할 수 있는 망원경도 설치되어 있다. 

 

포항시와 영일만 조망. 

살짝 당겨본 운제산 방향
포항제철과 도구해수욕장 방향
바짝 당겨본 포항제철과 도구해수욕장 조망
영일만 두호항 방향

 

 

처음 보는 포항과 영일만 조망을 더 즐기고 싶지만 기다리는 분들을 떠올리며 기맥길을 따라 조항산을 향하는데,  

 

임도에서 나른한 봄볕을 즐기던 초로의 할머니들이 '방근 전에 본 망원경 사용료를 징수하고 있다'며 농을 건네기에, 

 

지갑을 차에 두고 왔으니 타고 온 차로 흰날재까지 태워주면 500원을 드리겠다고 하니, 

사용료를 내지 않으면 못 간다기에, "늙어서 쓸데도 없으니 보내달라고..."ㅉㅉ  

 

 

잘 다듬어진 소나무 정원수가 늘어선 조항산 직전의 안부를 지나는데, 

 

우측 사면에 잘 단장된 가족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멋들어진 임도를 따라 잠시 오르면, 

 

조항산 정상부를 차지한 각 방송사 송신탑과 통신부대를 지나게 되는데,

먼저 'TBC 조항산 중계소'를 지나서 오르면, 

 

좌측의 정자 쉼터와 우측 장기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연이어 지나게 되고, 

우측 장기 방향 갈림길 이정표
좌측 동해면 약전리로 이어지는 등산로

 

'MBC 조항산 송신소'와 '국군 55정보통신대대' 앞을 지나, 

 

멘 위에 자리한 'KBS 조항산 송신소'를 지나면, 

 

조항산 정상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앞쪽의 실제 조항산 정상(245.6m)은 '포항 항공무선표지소'가 차지하고 있어서 이곳에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

 

<조항산(鳥項山, 246m)>
경북 포항시 동해면과 구룡포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새의 목덜미처럼 생겼다고 ‘새 조(鳥)'자와 '목덜미 항(項)’자를 써서 조항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은 KBS를 비롯한 여러 방송사의 송신소와 항공무선표시국이 자리잡고 있어서 '포항 동해 산악회'에서 설치한 스테인리스 정상 표지판은 정상 아래 도로가에 설치되어 있다. 방송국 중계소가 설치된 거의 모든 산 정상은 주변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로 조망이 좋은 곳인데 이곳 조항산도 주변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조항산 정상 표지판을 뒤로하고 잠시 더 오르다가 '항공무선표지소' 정문에서 좌측 펜스 옆으로 들어서면,  

 

< 항공무선표지소>

항공무선표지소는 비행기가 정해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도록 등대 역할을 하는 관제통신시설이다. 비행기가 출발지 공항에서 목적지 공항까지 지정된 항로로 비행하도록 항공로 정보를 제공하는 항행 안전시설로는 '전 방향 표지 시설(VOR, TACAN)'과 관제사와 조종사 간 통신을 제공하는 '항공 이동통신시설(AG)' 등이 관리·운영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항공로 구성을 위해 안양·송탄·양주·강원·부산·대구·포항·예천·부안·제주에 10개소의 항공무선표지소가 운영되고 있다.

 

잡목이 제거되어 걷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고, 

울타리 안의 항공무선표시국 모습

 

이내 '준.희'님의 조항산 산패가 걸린 나무를 지나서 좌틀하여 숲길로 내려서게 되는데, 

조항산 정상을 차지한 항공무선표시국으로 인해 이곳에 조항산 산패를 걸어 놓은 모양이다.  

 

 

울타리를 따라 계속 진행하는 분들을 불러 좌틀하여 숲길로 들어서면, 

 

그저 밋밋하여 능선 구분이 어려운 잡목숲이 펼쳐지며 희미한 족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길흔적이 보이지 않아 대충의 방향만 짐작하여 내려가다가, 

 

200봉쯤의 밋밋한 봉우리를 지나서자 나타나는 거친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평지 수준의 안부에 나무가 자라나 자연으로 돌아간 무덤을 지나서 오르고, 

 

좌측 소정골 방향이 급경사의 낭떠러지인 210봉쯤을 지나는데 거친 등로를 피어난 진달래가 감추고 있다. 

좌전방 포항과 영일만 방향

 

 

거친 등로에 가끔씩 나타나는 선답자들의 표지기에 힘을 얻으며 안부를 지나 다소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다가, 

 

야생동물 방제용 그물이 둘러진 묘지로 올라서는,  

 

경주김공 내외 무덤 뒤편 숲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여름철이었으면 감히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잡목과 덩굴이 빼곡한 사면을 오르게 되고, 

돌아본 조항산 방향

 

마침내 200봉쯤에서 '해 냈다'며 인증을 남기고는, 

 

길도 답도 없는 거친 능선길을 따라 얕은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면,  

 

야간 비행에 장애가 될 염려가 있는 높은 건축물이나 위험물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조명장치인 '항공 장애등 3호기'가 설치되어 있는 202봉에 도착하여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인증을 남긴다.  

 

 

나뭇가지 사이로 우리를 기다리는 애마가 언뜻언뜻 보이는 흰날재를 향하여, 

 

거친 급경사 내림길을 제법 길게 내려서다가,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수레길을 만나 좌측 아래로 내려가서는, 

 

우측 소동골로 이어지는 임도에 접속하여 직진의 외딴 농가 좌측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진행하고,  

돌아본 202봉 방향

 

우전방으로 복합비료 및 기타 화학비료 제조업체인 '동양산업'을 바라보며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4차선의 31번 국도인 동해안로에서 우측 동양산업으로 진입하는 도로에 내려서는데, 

31번 국도가 지나는 흰날재의 다음구간 들머리가 건너다 보이고, 

 

볼록거울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나가,  

 

'31번 국도 동해안로'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서, 

31번 국도 동해안로 포항 방향

 

흰날재 들머리인 동산공원묘원 가는 길로 진행하는데, 

가로등 지주에 반바지님이 걸어놓은 '흰날재(105m)' 코팅지가 걸려있다. 

 

<흰날재(白日嶺, 105m)>
포항시 동해면 석리와 상정리 사이의 야트막한 고개로, 4차선의 31번 국도(동해안로)가 지나고 있다. 흰날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흔히 백토(白土)라고 불리는 벤토나이트(Bentonic)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어 몇몇 광산업체가 채광작업을 하고 있다. 

흰날재에는 옛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신라 어느 왕이 이곳을 돌아보다가 봉산현(장기현의 옛이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태양이 빛을 잃고 밤과 같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놀란 왕이 일관을 불러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일관이 왕에게 말하기를 왕의 몸으로 경솔하게 나다니면서 오랫동안 궁을 비워두었기에 때문에 하늘이 크게 노하여 빛을 거두어 간 것이라고 했다. 왕은 크게 뉘우치고 환궁을 서둘게 되었다. 어둠속에서 막 고개를 넘자 태양이 다시 빛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밝은 날이 되었다는 뜻의 흰날재, 희날재, 히나리재 등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호미기맥의 마지막 구간이 될 다음 산행의 들머리인 '동산 공원 묘원' 입구 방향 도로를 확인하고, 

 

기다리던 버스에 오르며 호미기맥 다섯번째 산행을 마감한다. 

 

 

 

31번 국도를 따라 포항시내로 이동하여, 

 

죽도시장 인근의 학산타워사우나에서 땀을 씻고,  

 

포항의 명물 죽도시장에서, 

 

신선한 해산물로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좋아하는 산행에 이은 즐거운 뒤풀이의 추억을 가지고 편안한 귀갓길에 오른다.  

 

 

 

지난밤 주차해 놓았던 차를 회수하기 위해 낙동강 구미휴게소에서 서울로 가는 분들과 헤어져, 

 

천신만고 끝에 상주영천고속도로 건너편으로 이동하여, 

 

상주영천고속도로 하행선 낙동강의성휴게소에서 주차해 놓았던 차를 회수하여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포항을 여러차례 방문했었지만 포항이 어떻게 생겼는에 대한 감은 잡을 수 없었고, 포항제철이나 포항항 그리고 죽도시장이 포함된 포항의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가 않았는데, 오늘 조항산에서 포항시와 영일만을 내려다 보고는 포항 전체의 윤곽이 내 머리에 그려지게 되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지식습득 보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윤곽을 파악하여 형성되는 지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깨닫는 계기가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