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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호미기맥 03차(순지마을~추령) : 흔챦은 경주 토함산 눈꽃산행

by 재희다 2024. 6. 20.

산행장소 : 호미기맥 03차(순지마을~추령) 경북 경주시. 
산행일시 : 2024. 02. 24.(토) 
산행코스 : 순지마을(태화식품 사거리) ~ 70.6봉 ~ 194.7봉 ~ 원고개(105m) ~ 감산사입구 ~ 317봉 ~ 364봉 ~ 삼태지맥 분기점 ~ 토함산목장 ~ 토함정사 ~ 불국사 갈림길 ~ 528.6봉 ~ 동산령(460m) ~ 석굴암 주차장 ~ 성화 채화지 ~ 추령갈림길 ~ 토함산(745.7m) ~ 추령(310m) (약 18km, 7시간 소요)
산행참석 : 16 백두.  


▶ 여유로운 산행을 즐기려는 분들은 원고개에서 출발하여 추령까지 14km 산행.

 

<참고사항>
- 금번 구간은 토함산을 완만하게 올랐다가 내려오는 구간으로, 
- 도로와 산길 등로가 반반쯤인 비교적 순탄하고 쉬운 구간이다.
- 농로와 다소 거친 능선길 구간인 순지마을~삼태지맥 분기점 구간만 주의하면,
- 알바의 위험도 거의 없어 대체로 쉬운 산행이 가능하다. 

 

<산행지도>

 

 

예년 같았으면 산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건조한 날씨가 시작되는 시기인데도 연일 비 예보가 이어진다. 아직은 겨울이라 산행 중에 눈이 아닌 비가 내리면 저체온증에 대한 염려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산행일 하루 전인 금요일 저녁쯤에 경주 일원에 비 예보가 있어서 혹여 산행을 시작하는 새벽에 비가 내리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하며, 저지대는 비가 내리지만 혹여 500고지 이상의 고지대에서는 눈이 내릴 수도 있기에 "아이젠을 챙겨 오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기고는 배낭을 꾸려 양재로 향한다. 

 

 

쉬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린 버스가 평소와 같이 예정 시각보다 일찍 산행 출발지인 순지마을 순지휴게소 앞 공터에 도착하였고, 불꺼진 버스에서 새벽잠을 더 청해보다가 4시 반쯤에 일어나, 원고개에서 출발하는 즐산팀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배낭을 들고 버스에서 내려 산행준비를 한다. 비가 그친 새벽공기가 그리 차갑지도 않고, 바람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서 그런지, 우려와 달리 다소 포근한 느낌이 들어 날씨에 대한 염려는 어둠에 잠긴 순지 마을에 내려놓고는, 배낭을 메고 호미기맥 세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순지휴게소 앞 너른 공터에서 다소 포근한 느낌의 바깥공기에 안도하며 산행 준비를 하는데, 

 

<순지(筍池) 마을>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마을로 영지(影池)에서 남으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미개척 시대에는 이곳에 죽림(竹林)이 넓게 퍼져 죽순이 많이 났다고 하여, '죽순 筍(순)’ 자를 써서 순지 마을로 불렀는데, 그 뒤 순(筍)이란 거사가 이곳에 들어와 죽림(竹林) 가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 밤숲(栗林)이 우거졌다고 한다. 또 율림(栗林) 근처에 못을 파 이 못 이름을 밤숲못이라고 했다.

 

지난 산행 때 올랐던 마적산 방향

 

우리를 내려놓은 버스는 즐산팀의 출발지인 원고개를 향해 떠나고,  

 

우리도 순지마을 태화식품 사거리에서 태화식품 우측 도로를 따라 호미기맥 세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좌측 태화식품 공장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비포장 농로로 바뀐 도로를 따르다가,

'ㅓ'자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수레길로 들어서서, 

앞쪽 능선의 안부 고개지점이 지도의 장구뱅이 고개

 

50여 미터 진행하다가 우측 소로로 들어서면, 

 

기맥 능선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듯 뚜렷한 길흔적이 묘지 사이로 이어지다가, 

돌아본 순지마을과 마석산 방향

 

묘지 지대를 벗어나며 임도 수준으로 넓어진 호젓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게 되고, 

 

지초, 신원 마을과 193.4봉을 거쳐 오는 다른 경로의 기맥길과 만나는 140봉쯤의 'Y'자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진행한다. 

 

 

주변에 묘지가 연이어 나타나는 고도차가 크지 않은 능선으로 이어지는 널찍한 수레길을 따르는데,

우측으로 토함산에서 남으로 이어진 삼태지맥 배경의 외동읍 죽동리와 개곡리쯤의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고, 

가로등이 밝히고 있는 도로는 동해고속도로 남경주TG 진입로쯤

 

완만한 봉우리를 넘나들며 수레길 수준의 널찍한 능선 등로를 따르면, 

 

우측 조망 바위에서는 경주시 외동읍 죽동리의 너른 들판과 남경주IC 진입로의 가로등 불빛이 내려다 보인다. 

 

 

둥그런 묘지가 있는 194.7봉을 지나서도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진행하는데, 

 

우측 풍력발전기가 꽂힌 삼태지맥을 배경으로 죽동리 남경주IC와 그 우측 울산 방향의 불빛이 환하게 돌아다 보이고, 

 

190봉쯤을 지나면서 완만하게 내려서다가 불국사 집단시설지구 불빛 뒤로 토함산쯤이 가늠되더니, 

 

짧은 능선에 참으로 많은 묘를 목도하며 각각의 묘지에 얽힌 사연에 호기심이 생기려 할 즈음에,

앞쪽으로 괘릉 마을 앞 원고개를 지나는 경주와 포항을 잇는 산업로가 내려다 보이더니, 

 

이내 동해선 철로와 4차선의 포장도로인 7번 국도가 지나는 원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먼저, 이제는 철로가 제거된 옛 동해선 철길을 건너고, 

 

경주와 포항을 잇는 4차선의 포장도로인 7번 국도를 건너서 '충효마을 괘릉동' 표지석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원고개(105m)>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고개로, 왼고개, 왼곡, 어인고개, 영곡이라고도 한다. 옛 동해남부선 철길과 7번 국도가 지나는 원고개에는 원성사와 '충효 마을 괘릉동(挂陵洞)'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고개 남쪽에는 경주원성왕릉(괘릉)이 있다. '원고개'란 이름의 유래는, 신라 때 두 노승(老僧)이 불국사(佛國寺)를 향해 가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웬 고개냐?’라고 물은 것이 ‘왼고개’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불국사역(佛國寺驛, 폐역) 남방 1.2㎞ 지점이다. 
이 고개가 위치하고 있는 ‘자미산’은 울산만(蔚山灣)으로 흘러드는 동천강(東川江: 일명 禹朴川)과 영일만(迎日灣)으로 흘러드는 형산강(兄山江)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남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동천강을 거쳐 울산 태화강(太和江)으로 흘러가고, 북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경주의 남천(南川)과 서천(西川)을 거쳐 포항 영일만으로 흘러간다. ‘왼고개’를 지도에서는 ‘원고개’라고 기재하고 있고, 현지에서는 ‘웽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괘릉(掛陵)>
경북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신라시대 798년경의 능으로 사적 제26호이다.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소나무가 울창한 넓은 능역(陵域) 가운데에 둘레돌(護石)을 돌린 원형 토분(土墳)으로, 둘레돌은 판석과 탱주(撑柱)로 짜여져 봉토 밑에 있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탱주에는 각각 방향을 따라 12지신상(支神像)이 양각되었고, 봉토 앞에는 옆면에 안상(眼象)이 조각된 우수한 상석(床石)을 놓았다. 봉토 주위에 수십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아래에 동그란 구멍 2개를 뚫어 관석(貫石)을 끼워 난간을 돌렸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고 둘레돌과 기둥 사이엔 판석을 깔았다. 봉분과 멀리 떨어진 전방에 돌사자 2쌍과 문무인석(文武人石)이 각각 1쌍씩 배치되고, 그 좌우에 석화표(石華表)가 서 있다.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 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하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경주원성왕릉(퍼온 사진)

 

 

원고개에서 괘릉동 마을길로 들어서면 이내 나오는 'Y'자 갈림길에서 좌측 오름길로 진행하면, 

 

원고개에서 원성사를 지나 좌측 봉우리로 이어지는 기맥능선을 우회하는 도로를 따르게 되는데, 

 

좌전방 멀리로 토함산 능선과 '석굴암 주차장'쯤으로 짐작되는 불빛이 가늠되고, 

 

괘릉동 마을회관을 지나서도 계속 널찍한 포장도로를 따르다가, 

 

<괘릉리(掛陵里) 유래>
약 400년 전 이만동(李晩童)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신라 제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이 위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능말, 능지촌(陵旨村) 또는 괘동(掛洞)이라 불렀다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계리의 상신리(上薪里). 하신리(下薪里). 영지리(影池里)의 일부를 합하여 괘릉리(掛陵里)라 하게 되었다.

 

사거리 갈림길에서 좌측의 사각정자 앞에 '성균관전의 괘정 이상열옹 공적비'가 있는 길로 좌틀하여 50m쯤 진행하여서는,

 

첫번째 우측 갈림길로 들어서서 시멘트포장 농로를 따르다가, 

 

좌측 수로 건너에 청심사슴목장이 위치한 갈림길에서 직진의 수로 우측 제방길을 따라도 되지만, 

수로를 건너 청심사슴목장 우측의 농로를 따라 오르다가, 

 

농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농막 좌측 밭두렁으로 진행하면, 

 

경주원성왕릉(괘릉)을 지나 괘릉 저수지로 이어지는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좌측 감산사와 괘릉저수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어슴프레 밝아오는 미명에 한쯤 선명하게 보이는 좌측 토함산을 바라보며 감산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르다가, 

 

고갯마루 약간 못 미쳐서 감산사를 좌측에 두고 괘릉저수지로 이어지는 직진의 도로를 두고,

우측 수레길로 들어서서 10여 미터쯤 진행하면, 

 

<감산사(甘山寺)>
경주시 외동읍 ‘하이골’ 아래쪽 괘릉재(동산령) 기슭에 있는 사찰인데, 719년(신라 성덕왕 18) 중아찬(重阿飡) 김지성(金志誠)이 감산(甘山)에 있는 장전(莊田)을 희사하여, 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모 관초리(觀肖里) 부인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그 일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미륵보살상 1구와 아미타불상 1구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이후 1915년 이곳에서 발굴된 불상(佛像) 2구는 각각 국보(國寶) 제81호인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과 국보 제82호인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으로 현재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절터는 전답으로 변하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감산사지삼층석탑과 석등(石燈), 대석(臺石) 등이 남아 있다. 

 

경주 감산사 전경 (퍼온 사진)

 

바로 좌측 숲길 입구가 나타나며 한두개 걸린 표지기에 확신을 얻어 숲길로 들어서서 꾸준히 능선 오름길을 따르게 된다. 

 

 

예상과 달리 널찍하게 나있는 능선오름길을 따르는데 다듬어 놓은 듯이 보이는 바위가 눈길을 끌고, 

 

좌측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눈 덮인 토함산 능선 방향 아래로 '괘릉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괘릉저수지>

감산사 위쪽 대리곡 골짜기 입구에는 경주시 외동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괘릉 저수지가 위치한다. 이 저수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고갈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1950년대 대물림되던 보릿고개를 벗어나기 위해 근동 주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수지 둑을 쌓았는데, 완공 직전인 1959년 영남지역을 초토화시킨 사라호 태풍의 영향으로 전부 유실되어 실의에 빠진 주민들은 하나 둘 울산공단과 포항공단으로 이주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 괘릉 저수지는 2001년경 정부에서 완공하였다고 한다.

 

살짝 당겨본 토함산과 석굴암 주차장(불빛) 방향

 

제법 튼실한 소나무숲 능선을 따라 고도를 높여가니, 지난밤 비가 아닌 눈이 내린 흔적이 점점 더 역력해지더니, 

토함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가야할 호미기맥 능선 조망

 

지난밤 내린 눈으로 살짝 덮인 317봉을 지나, 

좌측 눈 덮인 토함산 방향

 

잠시 내려서다가 안부 묘지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따뜻한 차를 나누며 첫번째 쉼을 한다. 

 

 

잠시 완만한 능선을 따르다가 작은 봉우리를 지나고, 

 

둥그런 묘지를 지나면서 따르던 능선길이 제법 가팔라지는데,

이후 작은 능선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계속 고도를 높여 '삼태지맥 분기점' 직전까지 오르게 된다. 

돌아본 호미기맥의 마석산과 낙동정맥의 단석산 방향
살짝 당겨본 단석산 우측 멀리는 팔공산쯤

 

<단석산(斷石山, 827m)>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芳內里)와 송선리, 화천리, 산내면 내일리에 걸쳐있다. 신라 때 화랑들의 수련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김유신이 검으로 바위를 내려쳤더니 바위가 갈라져 단석산(斷石山)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선사(神仙寺)에는 마애불상군(국보 199)이 소장되어 있으며,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우측으로 지능선이 갈라지는 370봉에 올라서는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고, 

 

잠시 완만한 소나무숲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표지기가 한두개 걸린 작은 봉우리를 올랐다가 다시 내려서고, 

 

다시 가파른 능선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오르면, 

 

앞쪽으로 가야 할 삼태지맥 분기점 방향 능선이 가늠되고, 

 

백의를 두른 소나무가 멋들어진 능선길에 가로놓여진 잔가지가 길을 막아서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원고개에서 출발한 분들이 뒤따라 오는 백두들에게 영역표시를 해 놓았고, 

 

더욱 가팔라진 능선 오름길을 오르는데, 

 

주변이 온통 설국으로 변화며 나뭇가지에는 설화가 만발하게 피어나,

호미기맥을 걷는 백두들의 토함산 진입을 환영하는 듯하다. 

 

 

장관을 이룬 설국 풍경에 가파른 오름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올라, 

 

450봉쯤을 좌회하여 지나서는 좌측으로 휘어지며 다소 완만해진 능선으로 이어진 눈길을 따라 오르면, 

좌측 토함산 방향

 

월성이공과 '유인 일성최씨' 묘가 있는 460봉쯤을 지나는데 앞서 오른 백두들의 쉬어간 흔적이 역력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능선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서다가, 

 

우전방으로 풍력발전기가 아주 가까이 보이는 묘지 상단을 지나서 내려서면, 

 

<경주 풍력발전단지>

토함산의 이웃 산인 조항산 정상부에 경주 풍력발전이 자리해 있다. 친환경 청정에너지 생산을 위해 한국동서발전과 동국S&C가 건설한 상업용 풍력발전단지로 총 7기의 풍력발전기가 가동 중이다. 1만여 가구가 쓸 수 있는 양인 평균 4만 MWh 정도의 전력을 연간 생산한다.
산 능선을 따라 띄엄띄엄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는데 ‘바람의 언덕’으로 부르는 이 일대를 365일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풍력발전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 ‘경풍루’가 있는 전망대와 함께 바람길 산책로, 피크닉테이블존 등이 갖추어져 있다. 경주풍력발전 ‘바람의 언덕’은 일몰, 노을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망대, 바람길 산책로 등 곳곳에서 석양을 감상하기 좋다. 더러는 일몰 후 조금 더 기다려 별빛 쏟아지는 낭만적인 밤까지 즐겨도 좋다고 한다. 

 

시멘트포장 임도에 내려서서 좌측 임도를 따라 기맥길을 이어가게 되는데,

등로 우측 소나무 둥치에 '준·희'님의 '삼태지맥 분기점' 표지판이 걸려 있다.

 

<삼태지맥(三台枝脈)> 
삼태 지맥(三台枝脈)은 호미 기맥의 토함산 남쪽 5.9km 지점, 토함산 목장 부근의 456봉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삼태봉(630.5m)· 동대산(444.8m)· 무룡산(450.7m)을 지나 31번 국도가 지나가는 정자 고개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마골산(297m)· 염포산(203m)· 망계산(85m)을 지나 동해 화암추 등대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44.6km의 산줄기다. 호미기맥과 더불어 태화강의 북동쪽 울타리를 치면서 태화강의 하류에서 역시 낙동정맥 정족산에서 갈래친 남암 지맥의 끝과 마주한다.   ​

 

 

삼태지맥을 걸을지도 모르는 백두들

 

 

삼태지맥 갈림길에서 좌측 임도를 따르는데, 

좌측 메타세쿼이아 숲에는 '토함산 솔밭가든'이라는 토종닭 식당이, 

우측에는 장항리에 있어서 '장항지'라 부르는 갈대가 무성한 못이 있다는데, 눈 덮인 못이 주변 개활지와 구분키 어렵고, 

 

<장항리(獐項里)>
마을 앞산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목, 장항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거 경주군 외동면 상신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항리로 하였다. [경주시 양북면 지명유래]

 

'토함산 솔밭가든' 입구에서 2차선의 포장도로인 '불국로'에 접속하여 좌측 호미기맥 능선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석굴암 주차장까지 진행하게 되는데, 도중 기맥능선으로 올라서 진행할 수도 있지만 길흔적이 희미하고 거칠며, 이내다시 도로로 내려서곤 하므로 굳이 기맥능선을 고집하는 실익이 없는 듯하다. 

석굴암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불국로' 전경

 

 

오묘한 날씨가 만들어 놓은 그림 같은 설경 속으로 흘러들다가, 

 

맥길이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건설 자재를 쌓아놓아 바람을 막아주고, 

 

좌측으로 지난 구간에 올랐던 마석산 방향 조망이 멋들어진 곳에서 조망 맛집을 개설하고 아침식사를 한다. 

살짝 당겨본 마석산 조망
그래도 겨울이라 시리고도 춥다,
오늘 종주팀은 5, 아니 6명

 

 

아침식사 동안에 차가워진 몸을 덥히려 좌측 숲으로 들어 보았지만, 

눈덮인 까시잡목과 고사목 능선을 걷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다시 도로로 내려서서 멋들어진 포장도로를 따르면, 

 

도로 우측에 있는 '경주이씨 지수공(旨叟公) 선영' 표지석이 반갑고, 

 

멋들어진 설경이 이어지는 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혹여 더 멋진 풍광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발자국이 새겨진 기맥능선으로 이어질 듯 보이는 좌측 임도로 들어서면, 

 

사람들의 발자국은 '영양남씨 동덕랑 유만묘원 입구' 표석이 있는 개활지까지만 이어져 있는데,

아마도 차로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화장실이 급하여 찾아든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보이고, 

 

기맥 능선길로 접어들어 순백의 도화지에 발자국 그림을 그리며 진행해 보지만, 

 

작은 길흔적은 능선이 아닌 사면의 묘지로 이어져 있어서 길없는 능선으로 접어들어 잡목들의 태클을 뿌리치며 진행하다가, 

 

'토함정사' 표석이 있는 지점에서 다시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길없는 기맥능선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도로로 내려서는 백두들

 

우측 토함정사 입구 전경.

 

<토함정사>

토함정사는 30년 넘게 도자기를 빚다 불가에 귀의한 대호 박병석(토함정사 주지)의 작은 사찰이다. 본당이 양옥집이라는데, 마당에는 특이한 형태의 마애 석불들이 전시되어 있고, 전통 자기와 생활 자기 전시장이 있다. 토함정사가 있는 능선 아래로 4번 국도 '토함산터널'이 지나가고 있다.

 

오래전 자전거팀에서 연말에 동해안 일주여행을 했었는데, 그때 하룻밤을 묵었던 펜션이 토함정사 아래에 있는 정다운산방이라는 펜션이었다. 그때 3일간의 여행에서 "엉덩이만 붙이면 마신다"는 유명한 속담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우후방 조항산에서 북동쪽 문무대왕면 방향으로 뻗어내린 지능선 조망.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설경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르는데, 

 

우측으로 보이는 눈덮인 조항산쯤이 멋진 설산의 포스를 뽐내고 있고, 

 

잠시 더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우측 언덕 위에 '관흥정(觀興亭)' 정자가 나오며,

좌측 불국사를 지나 경주로 이어지는 불국로와 우리가 따르는 석굴로가 만나는 삼거리 갈림길을 지난다. 

원고개에서 출발한 백두들이 아침식사를 한 '관흥정'이라는 현편이 걸린 정자
불국사 방향 갈림길 삼거리
갈림길 삼거리에서 석굴암을 왕복 운행하는 경주 12번 버스(불국사와 석굴암을 왕복)

 

 

그냥 도로를 따라 진행할까 하다가 산행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고, 불국사 방향 갈림길을 지난 이곳에서 좌측 능선길로 들어서야 528봉을 오를 수 있는 상황에서 좌측 능선 방향 길로 사람들의 발자국이 이어져 있어서, 혹여 원고개에서 출발한 분들이 도로를 두고 좌측 능선길로 들어섰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좌측 묘지길로 들어서서,  

 

묘지를 지나 또다른 묘지로 이어지는 묘지길을 따라 오르면 사람들의 발자국은 널찍한 묘지까지만 찍혀있고,

능선 방향으로는 아무도 지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전에 능선으로 들어섰다가 고생한 경험이 있기에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 

 

다시 석굴로로 되돌아 내려와 석굴암 주차장을 향해 진행하니, 

 

차량으로만 한두번 와봤던 이 길을 걸어보니 어느 걷기길보다 좋다는 생각이 들고, 

 

좌측 위에 528봉이 위치한 지점쯤에서 우측 경주시 양북면 범곡리 마을로 내려서는 시멘트포장 임도 갈림길이 있는 동산령을 지나게 된다. 

 

<동산령(東山嶺, 460m)>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신계리와 양북면 범곡리를 잇는 고개이다. 토함산(吐含山)의 남쪽에 있으며 경주국립공원 토함산 지구에 포함된다. 옛날부터 경주에서 동해로 넘어가는 통로로 이용되어 신라 때 화랑들이 문무대왕릉을 참배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전한다. 북쪽에 석굴암, 서쪽에 불국사와 감산사지(甘山寺址) 등의 유적이 있다.

 

가야 할 토함산 방향
우측 감포 방향

 

 

멋진 설경을 즐기며 도로를 따라 '경주 국립공원' 입간판을 지나, 

 

고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나뭇가지에 피어난 눈꽃이 더욱 소담스러워지며 장관을 이루는 도로를 따르면, 

 

석굴암 주차장 출입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양쪽 도로 사이의 숲으로 들어서서 수북이 쌓인 눈을 밟으며 오르니, 

돌아본 동남쪽 문무대왕면 방향

 

온통 빙판으로 바뀐 넓은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하는데,

추운 날씨의 이른 시간임에도 여러 대의 버스들이 보인다.  

 

 

기다리고 있다는 김전무의 전화를 받고 석굴암 입구로 진행하니,  

 

다음 구간에 오를 함월산과 동해 방향 조망안내도가 있지만 눈이 덮고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고, 

동해 방향

 

통일대종 옆 석굴암 입구로 오르는 계단에서 한국수력원자력 노경합동 안전기원 시산제 기념촬영을 하고 있고, 

 

<토함산 석굴암 통일대종>

석굴암 통일대종은 불국사 주지 월산성림의 주창에 따라,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면서 겨레의 숙원인 남북통일의 대업과 불교의 세계화·인류화를 이룩하자는 뜻을 새기며 6천만 겨레의 마음을 담는 그릇을 만들고자 6천 관의 쇳물을 녹여 만들었다. 대종은 성덕대왕신종의 소리 형태 및 조각 등을 참고하여 제작에 들어가 두 차례의 실패 끝에 불기 2532년(1988년)에 비로소 시타에 성공하였고, 익년 4월 통일 대종의 타종식을 올렸다. 재질은 청동으로, 크기는 종신고 393cm, 구경 236cm, 용두 95cm, 무게 23.5톤, 고유진동수 62.5hz이다.

종각 옆에는 '통일 대종 타종 시 1,000원 이상을 내고 타종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는데, 모인 금액은 전액 불우이웃과 소년소녀 가장 돕기 성금으로 사용된다고 하니 후일 다시 오면 한번 타종해 보아야겠다.

 

계단 위로 오르면 석굴암 입구 일주문이 나오는데, 앞서 간 우리팀들이 석굴암 탐방에 나서지 않았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산에서는 절대 곁눈질을 않는 백두들의 성정을 미루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짐작하고 좌측 토함산 방향 들머리로 향한다.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는 1977년 중학교 수학여행 때 와 본 이후 몇 차례나 더 왔었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는 느낌에 오늘도 들려보려 예정했다. 원고개에서 출발한 일행분들을 석굴암 입구에 도착하기 이전에  따라잡아서 함께 석굴암 탐방에 나설 계획이었지만, 오늘 즐산팀들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지 종내 따라잡지 못하여, "눈 내린 석굴암" 탐방은 언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세계문화유산 등제 표석 앞에서 인증을 남기고 바로 토함산을 향한다. 

 

<경주 석굴암(石窟庵)>
경주 석굴암 석굴은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있는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 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였다. 국보 제24호이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 시작되었지만 경덕왕의 원찰로서, 또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로서 경영되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인공석굴 구조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정교한 계산 속에 배치된 아름다운 불상들은 완벽한 불국토를 연출한다. 종교성과 예술성에서 우리 조상이 남긴 가장 탁월한 작품이자 전 세계의 종교예술사에서도 빛나는 유산이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하였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고,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驅)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이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심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 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석굴암 (사진 펌)

 

<석굴암 본존불상(石窟庵 本尊佛像)>
석굴암 본존불상은 그 종교성과 예술성에 있어서 세계의 종교예술사상 탁월한 유산이다. 특히 간다라식의 어깨선, 두 팔과 두 손, 가부좌를 한 두 다리와 무릎 등이 인공적인 부자연스러움이 없이 부드럽게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의 손은 촉지항마(觸地降魔,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 즉 항마인(降魔印), 촉지인(觸地印), 지지인(指地印)이라고도 한다.)의 인상(印相)을 나타내며, 이것은 도가 이루어져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극치에 달한 때에 생기는 불가사의한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존불의 석련대(石蓮臺)는 교묘한 형태와 뛰어난 조각솜씨로 본존불의 위용을 돋보이게 한다. 
신라 석불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석굴암 본존불상은 아름다운 균형감각,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가는 눈과 웃음 머금은 입술, 두툼한 얼굴과 풍만한 몸체는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움이 풍겨 동양 조각 최고의 걸작품이고, 그 종교성과 예술성에 있어서 세계 종교예술사상 탁월한 유산이다. 맨 밑에는 평면의 원형으로 된 2단 기대가 있고 이어 복련대가 새겨져 있는데, 복련의 연판은 32개로 웅대하고 화려하다. 전체높이는 약 1.6m, 최하부의 지름은 3.63m, 윗좌대의 지름은 2.72m이다. 석굴의 본존불상 바로 뒤, 전면을 향한 중앙에 지름 2.24m의 크고 둥근돌을 새겨넣어 두광을 만들었다. 그 주위에 36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전체를 오목한 거울면처럼 만들어 전실에 서서 본존을 예배할 때 바로 본존불의 두광을 향하도록 구상되어 있다.
신라시대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조각하였다는데, 실제로 이것은 불상이 아니라고 한다. 조각해 놓은 석굴암 본존불상은 불상 즉 부처님이 아니고 항마촉지인이라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깨달음을 얻었지만 부처가 되지 못하고 대마왕에게 유혹당해 마로 들어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본존불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11개의 얼굴 모습을 갖추고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본존불 바로 뒤에 관세음보살이 오고, 그 본존불 앞으로 좌우에 문수 · 보현의 두 보살이 조화롭게 배열된 석굴암 원실의 배치는 영원한 힘의 원천과 양상과 기능의 질서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조상은 각각 그 하나하나에 조화와 질서가 있고, 그 모든 것은 전체로서 또한 하나의 조화와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 조화와 질서는 정적이며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동과 정이 혼연일치를 이루는 조화이며 질서인 것이다. 석굴암의 십일면관음보살은 일제강점기에 9면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인이 2면을 꺼내 감으로써 9면이 되었던 것이며, 원래는 11면이었다.

 

『십일면관음신주심경(十一面觀音神呪心經)』에는 십일면관음의 형상과 의미가 설명되어 있는데, 그 형상은 석굴암 관세음보살상과 거의 완전한 일치를 보인다.
십일면이라고 한 것은 관음보살의 정면인 본얼굴을 제외하고 두부에 부가된 면이 11면이라는 말이다. 경에는 두부 전면에 3면이 있고, 그 좌우에 각각 3면, 그리고 후면에 1면, 정상에 1면, 모두 11면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석굴암의 관음은 전면에 화불 1면이 있고, 좌우에 각 3면, 위쪽에 3면, 정상에 1면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이 11면의 배치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석굴암의 관음상이 부조이기 때문에 부득이 생긴 변화에 불과하다. 이 11면은 다방면의 기능과 양상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앞의 3면은 자상(慈相)인데 선한 중생을 보고 자심(慈心)을 일으켜 이를 찬양함을 나타낸 것이다. 왼쪽의 3면은 진상(瞋相:화난 얼굴)인데, 악한 중생을 보고 비심(悲心)을 일으켜 그를 고통에서 구하려 함을 나타낸 것이요, 또 오른쪽의 3면은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이를 드러내어 미소짓는 모습)이며, 정업(淨業:올바른 수행)을 행하고 있는 자를 보고는 더욱 불도에 정진하도록 권장함을 나타낸 것이다. 뒤의 1면은 폭대소상(暴大笑相)으로서 착한 자, 악한 자 모든 부류의 중생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모두 포섭하는 대도량을 보이는 것이요, 정상의 불면(佛面)은 대승근기(大乘根機:남을 위해 보살행을 닦는 사람)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불도의 가장 지극한 진리[究竟]을 설함을 나타낸 것이다.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에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부드럽고, 그러나 늘 자비로운 웃음을 잃지 않고, 그러한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크나큰 미소 속에 중생을 안주(安住)시키려는 대자대비의 의미가 응결되어 있는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상 (사진 펌)

 

 

석굴암 출입구의 반대쪽인 능선 좌측 '토함산 공원지킴터'가 있는 토함산 등산로 입구로 들어서면, 

 

등로 주변으로 화려한 설화가 만발하여 반겨주고, 

 

토함산 설경을 보려는 탐방객들과 수자원공사 직원들까지 더해져 널찍한 등로가 좁게 느껴질 정도이고, 

 

가팔라지는 등로를 메우고 올라가는 산객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아이젠을 착용한다. 

 

 

전나무숲으로 뻗은 눈길을 휘리릭 지나, 

 

눈과 상고대가 그려놓은 멋진 풍경을 폰카메라에라도 담으며, 

 

앞서 간 분들이 이런 멋진 장면을 두고 휘리릭 사라져 버린 이유가 궁금해지려는 사이에, 

 

그렇게도 따라잡으로 했던 원고개에서 출발한 분들 중 한 분이 '성화 채화지' 안내판을 읽고 있기에, 

오매불망 못 잊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며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따르던 등로를 두고 좌측 능선으로 이어진 '성화 채화지' 방향으로 오른다.

 

 

가이드로프가 설치된 등로를 따라 성화 채화지로 오르니, 

 

매년 개최되는 경북도민체전 시 성화를 채화하는 '성화 채화지' 제단이 흰 눈에 덮여 있고, 

 

'성화 채화지' 제단을 뒤로하고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이내 토함산으로 오르는 등로에 내려서게 된다. 

 

 

설국의 풍경 속으로 빠져들며 다시 토함산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오르면, 

 

우측 추령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는데, 

토함산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서 추령으로 향하게 되는 지점이고, 

 

다시 등로를 메운 한수원 직원들의 행렬을 따라 만발한 상고대 풍경을 즐기며 오르다가,  

 

헬기장과 정상이 갈리는 갈림길에서 우측 정상 방향으로 오르면, 

좌측 헬기장 방향

 

토함산 정상부에 올라서는데 앞쪽 정상석으로 향하는 탐방객들이 기념촬영 차례를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다음 구간 가야 할 동북쪽 함월산 방향을 담고는, 

 

먼저 정상에 올랐다가 인파에 기념촬영을 포기하고 내려서는 분들을 되돌려세워, 

 

토함산 정상석을 독차지하고 기념촬영을 이어가던 한수원 직원의 양해를 강제하여 정상석을 점령하고서야,

눈꽃 모자를 눌러쓴 토함산 정상석에서 인증을 남긴다. 

 

<토함산(吐含山, 745m)>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경주에서는 단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신라 5명산 중의 하나로 예부터 불교의 성지로 자리 잡아,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유적지로 보일 만큼 유물과 유적이 많다. 또한 소나무, 참나무 숲으로 덮여 녹음이 짙다. 
토함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토함산과 인연이 깊은 탈해왕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견해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탈해는 “한편 토해(吐解)라고도 한다”라고 했는데, 특히 『삼국유사』에서 토해라고 많이 쓰고 있다. 토해와 토함은 유사음이니 토함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토함산의 경관에서 연유한 것이다. 동해의 바닷물을 들이마셔서 구름과 안개를 토해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래서인지 이곳은 동해로부터 밀려드는 물기와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동해와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바다의 습기와 바람은 변화무쌍하여 지척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의 안개가 눈앞을 가리는가 하면, 어느 사이에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여 잇단 봉우리와 소나무 숲이 한 폭의 동양화를 이루기도 한다. 

 

 

 

토함산 정상을 뒤로하고 'Y자' 갈림길에서 우측 헬기장 방향으로 내려서다가 남쪽 설경을 배경으로 추억을 담고는, 

 

흰 눈이 덮인 헬기장으로 내려서는데 이제 추령으로 내려서기만 하면 오늘 산행을 마치게 된다는 안도감이 들며 학창시절 따라 불렀던 송창식의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라는 노랫말이 토해져 나오는 듯하고, 

 


  ♬ 토함산 ♬  - 노래 송창식 -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
가슴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 아~하
터져 부서질듯 미소짓는 님의 얼굴에도
천년의 풍파세월 담겼어라
바람속에 실렸어라 흙이되어 남았어라
님들의 하신양 가슴속에 사무쳐서 좋았어라 아~하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바쳐라
산산히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힘차게 뻗었어라 하늘 향해 벌렸어라
팔을든채 이대로 또 다시 천년을 더 하겠어라 아~하
세월이 흐른뒤 다시 찾는 님 하나 있어
천년 더한 이 가슴을 딛고서게 아~하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 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바쳐라
산산히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바쳐라
산산히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송창식의 토함산을 흥얼거리다가 헬기장에서 걸음을 멈추고,

추령으로 내려서는 길이 가파르고 눈까지 쌓여 미끄럽다며 아이젠을 착용케 한다. 

 

지도를 보면 기맥 능선은 토함산 정상 헬기장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추령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일부 산행기에서는 추령으로 이어지는 정규 등산로와 별도로 토함산 정상 목책 너머로 꾀나 선명한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고도 하였기에, 만약 기맥능선으로 들어서는 길이 뚜렷하다면 다른 분들은 정규등로를 따라 추령으로 향하게 하고서 홀로 한번 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나의 고생길을 허락하지 않으려 눈으로 등로 흔적을 덮어놓는 바람에 나도 정규 등로를 따라 우회하여 추령으로 내려서기로 한다.

 

 

토함산 정상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 

 

추령 갈림길에서 추령까지 2.5km라 표시된 이정표를 따라 좌틀하여 사면 등로로 들어서면, 

 

인파로 꽉 메워졌던 석굴암 주차장에서 토함산 정상까지의 등로와는 달리 발목을 넘게 눈이 쌓인 등로에는 산짐승의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고,     

 

모든 흔적이 지워진 등로 주변에 피어난 눈꽃과 상고대로,  

 

모처럼 맞이한 설산 산행의 희열에 젖은 백두들은 이런 멋진 광경이 추령까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보지만, 

 

추령이 2.0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자 상고대의 화려함이 옅어지더니, 

 

아무도 다닌 흔적이 없는 등로 맞은편에서 산객 한분이 올라오는데, 

이 지역에 살지만 "토함산 눈산행은 좀체 만나기 어려운 멋진 경험"이라며 인사를 건네오고,  

 

따르던 등로가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앞쪽 전망바위로 오르면, 

 

추령과 다음 구간 가게 될 함월산 방향으로 멋진 설산 그림이 펼쳐져 있다. 

 

 

전망바위를 돌아나와 급경사의 내림길을 조심조심 내려서면, 

 

추령이 2.1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둥그런 안부를 지나 제법 가파른 침목 계단길을 오르면, 

돌아본 토함산 조망

 

'추령까지 1.6km'라는 이정표를 따라 좌틀하여,  

돌아본 토함산 방향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서 완만해진 능선길을 잠시 진행하다가, 

 

급경사의 데크목 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추령까지 1.4km'라는 이정표가 있는 486봉에 올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배낭 무게를 줄이려 노력해 보는데, 

 

돌아본 토함산이 어느새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배낭 무게가 살짝 줄어든 듯한 느낌으로 486봉에서 좌틀하여 가파른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면, 

 

추령이 1.1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오며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완만한 능선길이 길게 이어지며, 

 

머리에 한 움큼씩의 흰 눈을 이고 있는 가드로프가 정겹게 느껴지는 오솔길을 따르다가, 

 

위치표시목(경주 22-01, 해발 374m)을 지나고, 

 

추령재 지상 공용 기지국이 앞을 막아서는 지점에서 가파른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내려서다가,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가드로프길에 이어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면, 

 

한적해진 추령을 외로이 지키고 있다는 백년찻집 지붕이 내려다보이더니,  

 

'경주 국립공원 토함산지구' 추령 탐방로 입구를 통과하여, 

 

호미기맥 세 번째 산행의 종점인 추령의 백년다원(백년찻집) 앞에 도착하는데, 

 

고개 우측 문무대왕면 방향 도로가 유실 복구공사로 폐쇄되어 있어서 회차를 하는 주차장의 역할을 하는 추령에서, 

환상적인 토함산 눈꽃 산행과 함께한 호미기맥 세 번째 산행을 마감한다.  

 

<추령(楸嶺, 310m)>
경상북도 경주시 황룡동과 양북면 장항리를 잇는 고개로, 속칭 가내동재라고도 하는데, 순우리말 이름인 가내고개를 '가래나무 추(楸)'와 '고개 령(嶺)' 등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또한 서낭당이 있어 서낭재라고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는 동쪽 25리에, 『동경잡기』에는 동쪽 30리에 있다고 나온다. 『해동지도』(경주)에는 경주의 중심지에서 동해안을 연결하는 도로가 추령이 아니라 더 북쪽의 기림사 방향으로 돌아가는 고개로 묘사되어 있었다. 반면에 『대동여지도』에는 경주의 중심지와 동해안을 연결하는 중요 도로가 추령을 통과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주시내와 동해안의 양북면·감포읍 지역을 연결하는 최단 코스이자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4번 국도가 추령을 지나가게 건설되었다. 
토함산(吐含山)의 북쪽에 있으며 경주국립공원 토함산 지구에 포함된다. 4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1998년 고개 아래로 추령터널이 개통되는 바람에 이곳 구(舊) 4번 국도는 교통량이 거의 없고 토함산을 오르려는 산객이나 한적한 찻집을 찾은 여행객만이 가끔 지나는 고개가 되었다. 
예전에는 문무왕이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고자 넘었던 길이요, 신문왕이 문무왕의 뜻을 따라 감은사를 짓기 위해, 옥대와 만파식적(萬波息笛: 대나무로 만든 피리로,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날이 개는 등 신비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함)을 얻어 왕궁으로 돌아오던 ‘왕의 길’이었기 때문에, 지자체에서는 감은사에서 기림사를 지나 용연폭포, 불령봉표(佛嶺封標), 수렛재, 추원사, 모차골, 추령으로 이어지는 왕의 길이 등산로로 정비되어 있다. 서쪽에 보문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남쪽에 석굴암(국보 제24호)·불국사(명승 및 사적 제1호), 북쪽에 기림사, 골굴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 등의 유적이 있다. 

 

 

 

추령 우측 문무대왕면 장항리 방향 도로가 유실 복구공사로 폐쇄되어 어렵게 회차를 한 버스에 올라, 

 

예정했던 목욕탕으로 가는 도중에 교량 아래 도로의 통행가능 높이가 낮아서 우리 버스가 통과를 못하는 바람에,

다른 목욕탕을 찾아 세 곳이나 허탕을 친 끝에 어렵게 영업을 하는 목욕탕에서 몸을 녹이고, 

 

지난 산행에서 너무나 맛나게 먹었다며 한번 더 찾은 육부장 갈비에서, 

 

다시 한번 푸짐하고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육부장갈비 영업개시 시간 3시간 전에 출근하여 서빙을 해 준 외국인 직원분들께 다시한번 사장님을 대신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는, 멀다면 먼 귀경길에 오른다. 

 

 

산행 계획을 하면서 코스 계획, 등로 상태, 산행 개시와 종료 시점, 날씨, 이동 경로와 뒤풀이 장소 등등등, 떠오르는 모든 것을 살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수없이 발생하여 난처한 경우도 생기지만, 때로는 더욱 흥미진진해지기도 한다. 사람 사는 일이 예정된 대로만 된다면 어디 세상 사는 맛이 나겠는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겨야지 쪼기도 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께 부탁도 드리며 슬퍼도 기뻐도 하며 살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