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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호미기맥 06차(흰날재~호미곶) : '상생의 손'을 보며 떠올린 흥망성쇄!

by 재희다 2024. 7. 22.


산행장소 : 호미기맥 06차(흰날재~호미곶) 경북 포항시. 
산행일시 : 2024. 04. 13.(토) 
산행코스 : 흰날재 ~ 백일령(옛 흰날재) ~ 월성손씨 묘지입구 ~ 동산공원묘원초입 ~ 금오산(230m, 산불초소) ~ 삼거리(해파랑길 이정표) ~ 말봉재입구 ~ 212봉 ~ 윷판재 ~ 공개산 갈림길 ~ 공개산(213.7m) 왕복 ~ 210봉 ~ 말 목장성 탐방로 갈림길 ~ 팔각정자(마봉루) ~ 발산 봉수대 터 ~ 흥환 보건소 갈림길 ~ 명월산(산불초소) ~ 학달비재 갈림길 ~둘레길 1,2코스 표지판 ~ 호미기맥 끝자락 포토존 갈림 ~ 고금산 입구 ~ 호미곶(호미기맥 종점) (약 19km, 7시간 소요) 
산행참석 : 19 백두.
 
<참고사항>
기맥 마루금이 고도 150~250m 구릉지대로 이어져 호미곶에서 산행을 종료하게 되는데, 구간의 많은 부분을 임도로 진행하게 되고 일부 숲길도 수레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임도를 벗어나면 등로가 무척 거칠고 희미해지므로 대부분의 기맥꾼들이 그냥 임도를 따라 진행하는 구간이다. 마루금 능선도 뚜렷하지 않아 지능선 분기점이나 임도 갈림길 등에서 알바가 잦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며, 업다운도 거의 없어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호미기맥길 마지막 구간이다.
 
금오산, 명월산은 정상에 산불감시초소가 있어서 오름길은 좋으나 내려오는 길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고 거칠다. 또한 마봉루 정자가 있는 목장성봉도 오름길은 좋으나 내림길은 급경사에 거칠어서 주의해야 한다. 우물재산은 임도에서 가깝지만 올라야 할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고, 공개산도 별것이 없다.
 
<산행지도>

 

 

누눈가가 '시작이 반'이라는 얘기를 할라치면 그냥 시작은 시작일 뿐이라고 면박을 주곤 했는데, 좀체 엄두가 나지를 않아서 미루고 또 미루다가 연초 첫 산행으로 시작한 호미기맥 산행이 예상보다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실로 적당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금번 여섯 번째 산행으로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호미곶에 도착하며 순식간에 종주를 마치게 된다. 매사에 첫발을 내딛기까지 고민하고 주저하기를 반복하다가 막상 첫발을 내딛고 나면 우려와 달리 저절로 일이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매사에 신중함도 필요하지만 결행하는 추진력이 없다면 사려깊음이 무소용일 뿐이다.
 
지구 온난화의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찍 찾아온 봄이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른듯, 초여름의 기온에 맑다는 일기예보로 우리의 호미기맥 종주를 배려라도 한 듯하여, 산행에 늘상 따라나서던 부담과 우려를 고스란히 집에다 때어놓고는 양재에서 산행버스에 몸을 싣는다. 

 

새벽 3시 반쯤 흰날재에 도착하여 한 시간쯤을 더 뒤척이다가 일어나 행장을 꾸려 버스 문을 나서니,

4차선의 31번 국도에는 그렇게나 부산하게 오가던 차들도 잠들어 있는지 한산하기 이를 데 없고, 

 

<흰날재(白日嶺)>
포항시 동해면 석리와 상정리 사이의 작은 고개로 31번 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흰날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흔히 백토(白土)라고 불리는 벤토나이트(Bentonic)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어 몇몇 광산업체가 채광작업을 하고 있다.

흰날재에는 옛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신라 어느 왕이 이곳을 돌아보다가 봉산현(장기현의 옛 이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태양이 빛을 잃고 밤과 같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놀란 왕이 일관을 불러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일관이 왕에게 말하기를, 왕의 몸으로 경솔하게 나다니면서 오랫동안 궁을 비워두었기 때문에 하늘이 크게 노하여 빛을 거두어 간 것이라고 했다. 왕은 크게 뉘우치고 환궁을 서둘게 되었다. 어둠속으로 막 고개를 넘자 태양이 다시 빛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밝은 날이 되었다는 뜻의 흰날재, 희날재, 히나리재 등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31번 국도 동해안로' 위 육교를 건너 포항 방향으로 50m쯤 진행하면, 

흰날재 육교에서 본 포항 방향

 

우측 '동산 공원 묘원' 입구 안내판이 세워진 흰날재 들머리가 나온다.

 

 

산(生) 자가 한밤중에 무덤 가는 길을 가는데도 오싹하기는커녕 푸근한 느낌이 드는 포장도로를 따르다가, 

 

산행지도에 '백일령(白日嶺)'이라 표시된 지점쯤을 지나는데 고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흰날재'를 한자로 표기하여 흰날재 부근에 대충 표시해 놓은 듯하고, 

 

좌측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포항시 야경에 시선을 잠시 빼앗기는 사이에, 

살짝 당겨본 포항시 야경

 

우측 '파평윤씨묘지' 표지석을 지나니, 

 

이내 좌측 '월성 손씨 묘지' 표지석이 있는 'Y'자 갈림길에서 대부분의 기맥꾼들이 그러하듯 사람들은 따르던 도로를 따라 무심하게 지나지만, 그냥 조금 더 궁금해 보이는 좌측 월성손씨 묘지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이내 월성손씨 묘지가 나오며 길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지만  묘지 관리용 움막을 지나 묘지 뒤편으로 진행하여, 

 

길흔적이 없는 숲으로 들어서 내려가면, 

 

이내 다시 따르던 도로에 접속하여 좌측 동산공원묘원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동산공원묘원 1km 전방' 표지판

 

 

싱그러운 새벽기운을 느끼며 도로를 따라 대나무숲을 지나고, 

 

도로 좌측의 밀양손씨와 순흥안씨 묘지를 연이어지나 여명을 향하다가, 

 

이동식 화장실이 있는 갈림길에서 직진의 도로를 두고 우측 공원묘지 상단으로 오르면, 

 

동산 공원 묘원 상단을 지나게 되는데,

우측 아래로 먼저 가신 분들의 천년집이 넓게 펼쳐져 있다. 

우측의 둥그런 산이 가야할 금오산이다.
남쪽 구룡포읍 뇌성산 방향
돌아본 동산공원묘원 입구 방향

 

 

묘원 가장자리를 따라 다시 도로로 내려서서, 

 

동산공원묘원 관리실 앞을 지나 우측 아래로 펼쳐지는 천년집들을 보며 도로를 따르다가,  

 

도로가 좌측으로 휘어져 나가는 지점에서 직진의 묘원 가장자리로 올라섰다가 우측으로 내려서서, 

 

삼거리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며 바로 직진의 도로를 두고 우측 숲길로 들어서면, 

돌아본 안부 삼거리와 내려선 동산공원묘원 방향

 

잘 정비된 수레길 수준의 능선 오름길이 이어지며, 

 

즈레밟고 가라는 듯 하얀 꽃잎을 흩뿌리고 있는 산벚나무를 지나 오르면, 

 

'산불 감시초소'가 있는 '포항 금오산(金鰲山)' 정상에 도착한다. 

 

<금오산(金鰲山, 230.4m)>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상정리와 입암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이다. 산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우두커니 서 있고 산불감시초수 쇠기둥 옆에는 삼각점(불국사 425 1995 재설)이 있다. 산불초소 망루에 오르면 서쪽 멀리로 영일만과 포항 시가지가 조망되고, 북동쪽으로는 호미반도의 나지막한 산군들이, 남쪽으로는 장기면 일대의 올망졸망한 산군들이 펼쳐져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동명이산(同名異山)의 유명한 금오산이 여섯 군데나 있는데, 구미의 금오산(976m)과 밀양 삼랑진의 금오산(730m), 하동 진교의 금오산(849m), 전남 여수의 금오산(323m). 그리고 경주 남산의 금오산(468m)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곳 포항 금오산은 그 어디에도 지명의 유래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금오(金烏)란 해를 달리 이르는 말로, 태양 속에 세 개의 발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지만, 이곳 금오산은 '까마귀 오(烏)'가 아닌 '자라 오(鰲)'자를 쓴다. 

 

산불감시초소에 올라서 본 조망.

남서쪽 흰날재 방향
서쪽 포항시가지 방향
살짝 당겨본 포항시가지 모습
북쪽 영일만 방향
동북동쪽 호미곶 방향
동쪽 구룡포 방향
남쪽 장기면 방향

 

 

산불감시초소가 물끄러미 지키고 선 금오산을 뒤로하고, 

 

족적조차 희미한 잡목숲으로 들어 포항산꾼의 '포항 금오산' 코팅지가 있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등로는커녕 너덜에 잡목의 태클까지 조심조심 헤치며 내려서는데, 

 

잡목숲 사이로 보이는 동해를 박차고 오른 아침해와 낯익은 표지기가 쌍으로 반갑고, 

 

이내 다시 비포장 임도로 내려서서,  

돌아본 금오산 방향

 

우측 능선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가, 

 

임도가 능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좌측 지맥 능선으로 들어서면, 

 

뚜렷한 묘지길이 20여 미터 지점의 묘지까지만 이어져 있다. 

 

 

지맥꾼들조차 임도로 우회하는지 묘지 뒤편 숲으로 들어서니 잡목들이 우거진 능선으로 희미한 족적만이 이어지며, 

 

또다른 묘지 뒤편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진행하고, 

 

좌측 마산리 방향 지능선 갈림길에서 직진의 능선 등로를 따라, 

 

가야 할 기맥능선 봉우리 위로 떠오른 태양의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거친 내림길을 내려서다가, 

 

다시 잠시 올라 작은 봉우리를 넘어 완만하게 내려서면,  

 

좌.우로 길흔적이 뚜렷한 옛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안부 우측으로 지나는 임도에는 기맥 능선을 우회하여 진행하는 분들이 보이지만, 

 

따르던 기맥 능선을 따라 잠시 오르면 이내 다시 임도에 접속하여 좌측 임도를 따라 190봉쯤을 좌회하여 지나게 된다. 

 

 

190봉쯤을 좌회하는 매끈한 비포장 임도를 따르다가, 

 

'ㅏ'자 갈림길에서 직진의 동해면 중흥리 방향 임도를 두고 우틀하여, 

 

편안하게 이어지는 임도를 느긋하게 따르는데, 

 

제법 뚜렷한 능선길도 못본체 하며, 

돌아본 우.후방 중흥리 방향

 

다른 분들의 눈에는 잘 보이는 두릅이 내겐 왜 보이지 않는지 궁금히야 하기도 하는 사이에, 

 

임도가 지능선 분기점쯤을 통과하는 좌측 숲으로 표지기가 걸린 등로가 이어지는데,

그냥 따르던 임도를 계속 따라도 되겠지만 뭔가 더 흥미로운 게 없을까 하고 좌측 능선 숲길로 들어선다. 

 

 

거칠지만 제법 뚜렷한 능선 등로가 이어지다가, 

 

좌전방 사면에서 이어오는 뚜렷한 수레길에 접속하여 능선으로 이어진 수레길을 따라 오르면, 

 

넓게 드러난 암반을 올라서게 되는데 우측 구룡포 방향이 시원스레 조망되고, 

이글거리는 태양이 떠 있는 우.전방 동쪽 방향
구룡포읍 눌태지와 구룡포 방향
살짝 당겨본 '눌태지'와 구룡포 방향

 

폐헬기장으로 보이는 편평한 정상에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나 조망이 없는 212봉에 올라서 우틀하여 진행하게 되는데,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212봉에서의 조망이 좋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오름길 암릉에서의 조망을 말한 듯하다. 

210m라 표시된 '준.희'님의 산패에서 212봉 인증

 

 

뚜렷이 이어지던 길흔적은 212봉 내림길 좌측 사면으로 이어가 버리고,

길없는 기맥능선을 따라 안부를 지나, 

 

등로는커녕 표지기를 걸어놓은 산꾼이 가엽다는 생각이 드는 210봉쯤을 올랐다가 내림길로 들어서면, 

 

길없는 거친 너덜지대를 내려서게 되고, 

 

용도폐기된 임도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진행하면, 

 

성황당 돌무덤과 거북바위가 있는 윷판재를 지나게 되는데, 

 

<윳판재>
포항시 구룡포읍 눌태리와 동해면 중흥리를 잇는 고개로, 희미한 길흔적이 보이고 길 옆에는 조그만 돌무더기가 하나 보인다. 이곳을 윳판재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옛날 흥환 사람들이 구룡포를 넘나들다 지루하면 이 재에서 윷놀이를 한 판 벌이고 간다고 해서 윳판재라고 불렀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이곳 우측 아랫마을이 후동(厚洞)인데 옛날부터 이 마을은 다른곳에 비해서 농토가 많아서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여 인심이 후하였다고 한다. 구룡포와 포항을 잇는 31번 국도가 뚫리기 전까지만 하여도 이 마을의 서쪽에 있는 헛재를 넘어서 동해면 상정리를 거쳐서 포항으로 왕래하던 구룡포 사람들이 날이 저물거나 굶주리면 이곳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여 후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 뒤쪽의 죽전산(竹田山) 일대에는 수시수 또는 후동수라 하는 넓은 대나무 숲이 있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질좋은 신이대가 많이 나서 조선시대에는 울산병영에서 관리하며 해마다 베어다가 활을 만들었다고 하며, 대를 꺾는 사람은 볼기 열대를 맞았다고 한다. 

옛 산행기에는 돌무덤 옆에 큰 '거북바위'가 있다고 했는데, 커다란 바위가 어찌보니 거북을 닮은 듯도 하다. 

 

거북바위 상단의 큰 바위 구멍(性穴) 흔적. (펌)

 

커더런 거북바위 상부에는 큰 바위 구멍(性穴) 흔적이 남아있는데, 삼신할머니가 태어난 아기장수를 바위 구멍에 고인 물로 씻긴 곳이라는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이러한 바위의 홈 구멍은 농경사회에서 다산(多産, '구멍-여성의 성기-마찰-생산’ 으로 이어지는 기자신앙(祈子信仰)적 형태)과 풍요(豊饒, 구멍-알-곡식-생산’으로 이어지는 풍요의 형태)를 기원하는 신앙적 의식의 표현인데, 홈 구멍의 입지도 마을의 상징적 경관에 위치함으로써 그 자체가 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관련된 의례가 성스러운 행위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다음 카페 임병기(선과)님의 '옛님의 숨결, 그 정취를 찾아'에서 펌)

 

거북바위 측면의 '游板谷(유판곡)' 각자.

 

거북바위 측면에는 『游板谷/海州吳/氏葬地/訥台里/ 吳宗華/ 吳宗惠』라고 각자 되어 있다. 이 부근이 눌태리의 '유판곡'으로, 해주오씨의 장지가 있다는 표시를 吳宗華/吳宗惠가 새겼다는 내용이다. '윷판골'로 불리던 이 지역을, 한자 표기로 '游板谷(유판곡)'이라 한 것이다.  (다음 카페 임병기(선과)님의 '옛님의 숨결, 그 정취를 찾아'에서 펌)

 

 

 

 

거북바위를 조금 더 찾아볼까 하다가 그냥 커다란 바위가 자리한 윷판재를 뒤로하고 오름길로 접어들어, 

 

잠시 오르다가 커다란 무덤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진행하면, 

 

커다란 묘지 상단을 지나서, 

 

이내 다시 임도로 내려서서 잠시 임도를 따르다가, 

 

공개산 방향 들머리인 소나무가 지키는 묘지로 들어서며 공개산으로 향한다.

 

 

묘지 뒤로 이어진 거칠지만 제법 뚜렷한 오름길로 들어서서, 

 

비스듬히 드러나 보이는 바위를 어렵잖게 오르며 가파른 오름길을 따르다가, 

 

봉분이 낮아진 묘지를 지나면, 

 

나타나는 공개산 갈림길에서 우측이 기맥길이지만 좌측으로 200m 떨어진 공개산을 다녀오기로 하고,

좌측길로 들어서서 공개산을 향하면, 

 

평지 수준의 완만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이내 숲속 나무둥치에 '공개산(213.7m)' 산패가 걸린 공개산 정상에 도착하니, 

 

<​공개산(孔開山, 213.8m)>
경북 포항시 동해면 중흥리에 있는 산으로, 호미기맥 등로에서 200m 정도 벗어나 있으며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산이다. '준.희'님이 걸어둔 산패만 없으면 들러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산이다. 낙엽이 수북한 바닥에 아무런 내용도 없는 삼각점 하나만 달랑 외롭게 박혀있다. 
이 산 아래에 있는 중흥리(中興里) 마을은 마을 뒷산이 마치 배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곳은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일본을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일골 또는 배일곡(排日谷)이라 불렀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시 일본인들이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중흥리라 불렀다고 한다.

 

먼저 도착한 분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공개산 정상 인증.  

 

 

공개산을 뒤로하고 사람이 아닌 멧돼지의 흔적이 어지러운 등로를 따라, 

 

공개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직진(진행 방향에서 우측)의 등로를 따르면, 

 

그저 밋밋한 능선 나무둥치에 '준.희'님의 213.5봉 산패가 걸린 지점을 지나며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다가,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라 밋밋한 안부를 지나, 

 

빼곡한 잡목이 들어찬  212봉쯤을 우회하여 지나고, 

 

이내 다시 210봉쯤을 지나서는 제법 가파른 내림길을 길게 내려서니, 

 

우측으로 임도가 내려다 보이더니, 

 

이내 임도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약간 나가면, 

 

'Y'자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호미곶 둘레길' 안내도가 세워진 우회길을 따라도 되지만, 우측 '봉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마침 봉수대 방향에서 내려온 구룡포의 라이더 한 분이 좌측 우회로로 가려던 김전무에게 봉수대를 들려야 한다고 하여 모두가 함께 우측 오름길 임도를 따라 봉수대를 향하면, 

 

도로는 우측 장기목장성 전망대가 있는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 사면으로 이어져, 

 

안내판에 '흥환리 말 목장성 탐방로'의 종점이라 표시된 4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능선 너머로 이어지는 직진의 임도는 구룡포로 이어지고, 장기목장 석성 안내도가 있는 우측 길은 '장기목장성 전망대'로 이어지며, 기맥길은 좌측 봉수대로 이어가게 된다. 

 

<흥환리 말 목장성 탐방로>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도보중심의 역사·전설의 이야기를 담은 트레킹로드인 해파랑길 중, 말 목장성과 고인돌의 보존이 잘 되어있는 보도 및 등산로에 해안둘레길과 연계되어 조성된 탐방로이다. 기존 구룡포 말 목장성 탐방로, 봉수대와 연결되어 다양한 볼거리 및 경관자원을 체험할 수 있다. 푸른 자연경관을 보고 운치 있는 마을길을 거닐며 말 목장성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탐방로이다.

 

우측 '장기목장성 전망대' 방향. 

 

<장기목장(長髻牧場)의 석성(石城)>
이 석성(石城)은 말을 키우던 장기목장의 돌울타리다. 구룡포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km의 장기반도를 가로질러 쌓은 것으로, 아직도 약 5.6km나 남아있는 현존 국내 최대 규모로 여지도(輿地圖), 경주도회좌통지도(慶州都會左通地圖) 등 고지도에도 전한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못을 박지 못하지만 조선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목장 감목관을 장기 수령이 겸임한 기록이 있어 이미 세종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유사에는 장기반도 안에 있는 호미곶면 강사리 명월암이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에 지역 수장의 군마사육을 기원하는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이 현재의 석성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장기목장의 근원은 간접적으로 약 1400여년의 역사성을 갖게 된다. 일성록(日省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당시 호랑이의 피해가 극심해 산행장(山行將)이 목장에 배치되고 포수와 창군도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구룡포돌문이 당시 말의 출입과 수를 헤아리던 문지기 2명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구룡포 삼정리에는 목아문(牧衙門)을 설치해 양육하는 말을 관장했고, 장기반도에는 물을 먹이는 웅덩이 50여개소와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마구 19개소도 있었다. 특히 관찰사의 지휘아래 있는 종 6품의 관직을 가진 관리가 목장을 관리했으며, 목자군이 목장 안에 살면서 말의 분뇨를 치우거나 관리에 동원됐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서는 효종 6년(1655년)에 울산 감목관이 관찰하는 울산 남목 휘하에 장기목장을 두게 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 이후에는 탐관오리들이 들끓으면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경상관찰사가 직접 절목(節目)을 만들어 공포했다.
이와 관련 동해면 흥환리에는 목장의 폐해를 일소했다는 홍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듯 서 있다. (안내문)

 

<장기목장(長鬐牧場)의 석성(石城)>
조선시대 말을 사육하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경상북도 포항시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일명 석병성(石屛城)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돌문 마을[石門洞]에서 눌태리 계곡과 응암산(鷹岩山)을 거쳐 동해면 흥환동 배일리에 이르기까지 산등성이를 따라서 쌓은 석성(石城)이다. 1655년(효종 6)에 축성하였으며, 둘레 25리에 높이가 10척이나 되었다.  
이 성은 목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소속은 울산 목장으로 감목관의 관할하에 군사 244명이 1008필의 말을 놓아길렀으며, 목장 안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는 웅덩이 50여 곳과 마구간 19개 소가 있었다고 한다. 눌태리 등지에 성벽의 잔해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구룡포읍 읍사무소 정원에 당시 성의 출입문으로 쓰이던 돌문의 일부가 남아 있다. (네이버)

 

 

<​장기목장(長鬐牧場)>
장기목장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한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해안과 하천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로 덮여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등 역사문헌을 살펴보면 장기목장의 마성은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대의 국영 목장으로 244명의 목자가 1000여필의 말을 사육하였던 곳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목장수의 감소 등 관리상의 어려움 등으로 마필수가 점차 축소됐다.
장기 목장의 마성은 구룡포읍 구룡포 3리(창주리)에서 작은 산 능선을 따라 눌태리 계곡을 거쳐 응암산 서쪽과 공개산 서북편 산정을 지나 동해면 흥환리 진골 산 계곡을 지나 바다에 까지 연결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흥환리 해안 약 2km부터는 마성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만 마을의 밭둑이나 담장 등에서 마성의 돌로 추정되는 것이 쉽사리 발견되는 점으로 미뤄 인위적으로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기 마성의 길이는 약 25여리이며 높이는 10척이다. 석성으로 되어 있으며 호미곶을 가로질러 남북방향으로 축성되어 있는 장성(長城)이다. 목장의 둘레는 대략 120리(약 45km) 정도이다. 얼마 전까지 구룡포에는 높이 10여 미터의 자연 돌문이 있었다. 이 돌문이 시외버스 터미널과 가깝고 돌문 사이가 약 5m 정도여서 좁아 차량통행상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낙석 위험으로 1988년 하나를 해체하였다고 한다. 당시 해체한 돌문의 윗부분은 구룡포 읍사무소에 전시되고 있어 아쉬움을 들어주고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당시 돌문의 용도는 말의 출입을 통제하며 그 수를 헤아리던 곳이었으며 문지기 2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마성이 지역개발로 훼손이 심각한 상황인데 반해 장기 마성은 해병대 군사 작전지역의 영향과 계곡안쪽에 위치해 마성 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게 특징이다. 특히 섬을 제외한 내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드문 마성이라 점과 조선 초기에 건축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본다. 
장기 목장에는 막에게 물을 먹이는 웅덩이 50여개소와 눈비를 피할 수 있는 마구 19개소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까지 그 유적을 발견되지 않았다. 대보면 강사3리 절골 해봉사 맞은편에는 화재로 소실된 월명암(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 추정)이 있었으며, 이곳은 울산 방어진의 월봉사와 마찬가지로 목장의 마필의 번창을 위한 국마 축원당으로 쓰였다. 포항 장기지역에는 이밖에 군소목장으로는 흥해 곡강리 일대의 봉림목장지, 초곡리 일대의 마장목장지, 해병사단일대의 일월목장지 등이 있었다고 한다. 
장기 마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해동지도 장기부>에는 ‘신라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목장이다’라는 해제(解題)가 있다. 또 <세종실록>의 세종 14년(1432년 12월 1일)의 기록에 ‘이제 경상도 동을배곶이(冬乙背串)에 이미 목장을 설치하였사오니, 청컨대 영일·장기의 두 고을 수령으로 감목관(監牧官)을 겸임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미뤄 장기목장에서 말을 방목한 시기는 최소 1432년 이후로 보이며, 인근 지역의 영일과 장기의 수령이 함께 관리하였다. 즉 동배곶 목장은 영일현과 장기현의 수령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겸감목관제의 형식으로 운영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목장의 규모와 보유한 마필 수에 있어서 훨씬 많은 장기 목장이 울산 목장으로 편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지리적 위치로 보아 장기 목장은 울산 방어진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지역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로,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곳에 유배됐었다. <승정원일기> 숙종원년 6월 19일 기록에 송시열은 1675년 6월 10일께 장기에 유배됐고, 정약용은 1801년 3월 9일께 유배됐다.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이 장기에 유배됐다.
두 번째로는 장기 목장이 연일과 장기현의 사이에 있어서 관리 방식과 운영에 있어서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1625년)에 의하면 ‘장기 동배곶 목장은 말의 품종이 좋아서 경상도에서 제일로 불리고 있다. 
현재 8명이 1066필을 방목, 관리하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원래 목자의 인원은 280명이다. 목자의 수가 적은 까닭으로 성이 무너진 것이 한계를 넘었고, 성끝 변경으로 말들이 넘어가서 흩어지니 혹 지역사람들이 쏘아서 잡아먹기도 한다. 목자를 충정(充定)하고 마성을 쌓는 일은 사복시로부터 행동으로 옮길 것이나 각도의 감사(監司)는 눈치를 보며 살피기만 할 뿐 시행하지를 않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장기목장성 돌담은  조선시대에 말을 키우던 국영목장 울타리로 동배곶(冬背串) 목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구룡포읍 돌문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지르는 약 7.6km의 길이로 축조되었는데 지금은 5.6km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돌담의 길이가 세계 최대의 크기라고 한다.

 

구룡포 말 목장성 안내도.

 

<구룡포 말 목장성>
조선시대 감목관을 파견해 말을 키우던 국영목장의 돌울타리(石柵)로 동배곶(冬背串) 목장이라고도 한다. 구룡포돌문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지르는 약 7.6km에 축조돼 현재 5.6km가 남아 있으며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세계 최대 규모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구룡포돌문에서 당시 말의 출입을 통제하던 문지기 2명이 있었고 구룡포읍 삼정리에는 관아인 목아문(牧衙門)이 있었다.

<말 목장성 옛길>
말 목장성 옛길은 옛 선조들이 임도가 생기기 전에 사람들이 왕래하던 길이다. 포장되지 않은 숲의 오솔길 이 이어져 있어 운치가 있으며, 시원한 그늘과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즐기면서 걸을 수 있다.

<말 목장성 탐방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국영목장의 돌울타리를 탐방할 수 있도록 만든 등산로이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느낄 수 있다.

 

<구룡포 말 목장성>

구룡포 말목장성 탐방로는 2009년 구룡포 읍사무소에서 약 4km의 석장 터를 발굴해 둘레길로 조성한 곳이다. 해발 205m의 정상에 2층 전망대를 설치해 아름다운 해안 마을인 구룡포와 호미기맥의 호미 반도 능선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정상 부근에는 진달래, 구절초 등을 심어 더욱 다양한 볼거리를 관광객에게 제공한다. 말 목장의 석성은 말을 키우던 돌 울타리를 말한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국유사 등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말 목장의 역사가 약 1400년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원래는 구룡포에서 남구 흥환리까지 약 8km 길이로 쌓여 있었지만 현재는 5.6km가 남아 있다. 종 6품 관리가 목장을 관리하였고, 목자 군이 이곳에 살면서 분뇨를 치우는 등 잡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네이버)

 

 

갈림길 4거리에서 좌측 봉수대(0.15km) 방향 포장 등로를 따라 오르면, 

 

발산봉수대 안내판과 2층 팔각정자인 마봉루 그리고 여러 쉼터 시설이 설치된 봉수대 터에 도착하는데, 

 

발산 봉수대 설명판.

 

<발산봉수대(鉢山烽燧臺) :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산 1번지>
봉수(烽燧)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통신 방법의 하나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서로 연락을 하였던 통신수단이다. 이 방법은 국방에 이용하기 위한 시설로 만든 것이 봉수제이며,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에서, 지방에서는 수령의 직접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군사정보는 그 정세의 완급에 따라 거화법에 의하여 전보되었는데, 조선 세종 1년(1419)에 완성된 거화법을 보면 5구분법이 있었다. 해상과 육상을 구별하여, 해상의 경우 평상시에는 1거, 왜적이 해중(海衆)에 나타나면 재거(再炬),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 접전 시에는 4거, 육지로 침입하면 5거로 하였다. 소재지는 포항시 ◇남구 동해면 발산리와 흥환리, 구룡포읍의 경계선상에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 구룡포에 포함된다. 발산(發山) 봉수대라고도 불리는 이 봉수대의 기록에 의한 규모는 둘레가 1,530척(409m), 높이는 15척(4.5m)으로 조선시대 중기에 신설되어 조선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고종 31년(1894)에 철폐되었다. 이 봉수는 위치상 연해 봉수이나 전해오는 발산(發山)이라는 봉수대의 이름과 같이 중계지의 역할을 하는 내지 봉수의 기능을 하였던 매우 중요한 봉수다. 응보관계는 동쪽으로 동을배봉수, 남으로 뇌성산봉수, 북으로는 바다건너 흥해군이 관장하는 지을산봉수, 서쪽으로는 영일현이 관장하는 사화랑봉수에 응한다. 실측 조사 결과 봉수대를 보호하는 담장과 봉돈(烽墩), 연대(煙臺), 그리고 입구 쪽에서는 우물이 확인되었고 봉수군이 기거하였던 주거지가 확인되고 있다. (자료제공:동대해문화연구소)


​<발산봉수대(鉢山烽燧臺)>
조선 초 동해면 중흥리 공개산(214m)에 조성했던 발산봉수대(鉢山烽燧臺)는 순조때인 1819년에 지금의 구룡포리 산1번지로 옮긴다. 그 뒤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연해봉수의 신호를 받아 서울 남산(木覓山)으로 왜적의 침입을 전달하던 간봉(間烽)이었다고 한다. 둘레 약 70여m가 되는 타원형의 봉수대 바로 옆에는 오장(伍長)의 지휘아래 봉수군이 거주했던 곳으로 짐작되는 500여평의 평지가 있다.

 

 

기맥길은 좌틀하여 봉수대터 좌측 가장자리의 벤치 사이 희미한 길흔적을 더듬어 내려서야 한다.

올라타지 말라는 경고가 있는 말 가족상

 

 

마봉루 옆에는 이시영 시인의 '미당이 구룡포에 가서'라는 시판 뒤로 포항 시가지가 보이고, 

 

봉수대터 한켠에 세워진 `마봉루(馬烽樓)’에 오르면 호미반도의 여러 봉우리와 푸른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봉루에 올라 간식을 나누며 쉼을 하는 백두들
서쪽 포항시와 영일만 방향
동쪽 호미곶 방향
살짝 당겨본 구룡포읍 삼정리의 불석을 채취하는 구룡광산 조망
남동쪽 구룡포항 방향
살짝 당겨본 구룡포 조망
마봉루에서 내려다본 봉수대 터 전경

 

마봉루 앞 호미곶 방향에 세워진 지역 출신 시인의 시판에서...

 

<구룡포>  - 이원규 -
온 밤을 걸어서 왔다. 
도대체 입 다문 구룡포
아무리 몸부림치며 일어서려 해도
파도는 파도일 뿐
돌아누은 방파제 앞에서 서러운 것을
어디 한두 번 태풍이 인다고 
쉬 폐항이 될까마는 
못다한 속울음
뭍으로 뭍으로 달려와 통곡해도
도대체 구룡포는 말이 없다. 
깜박등 등대 하나 켜두고
먼 바다 오징어배를 기다리며
소주를 마시는 구룡포
갈매기섬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제 스스로 한 점 섬이 되고픈 것일까
해돋이 기다리다 문득
회오리치며 비상하는 갈매기떼들을 보는 
숙취의 구룡포 앞바다
오늘 아침은 또 속이 쓰리다.

​<내 안에 구룡포 있다>  - 김윤배 - 
갯바람보다 먼저 구룡포의 너울이 밀려왔다.
너울 위에 춤추던 열여섯 달빛이 방 안 가득 고인다.
밤은 검은 바다를 벗어놓고 
내항을 건너고 있었다.
적산가옥 낡은 골목을 지나
밤은 꿈을 건지는 그물을 들고 있다.
너는 구룡포였으니 와락 껴안아도 좋을 밤이었다.
내항을 내려다보는 비탈에 매월여인숙은 위태롭다.
해풍이 얼마나 거칠었으면 구룡포
바위산이 올망졸망 작은 거처들을 열매로 매달고
어판장 왁자한 웃음들 꽃으로 피웠을까
켜지지 않은 집어등 초라한 배경 위에
구룡포 잠시 머물다 떠난
사람들 아름다워 목이 메었던 것이다.
너는 구룡포였으니 와락 껴안아도 좋을 웃음이었다.

 

 

 

마봉루에서의 쉼을 뒤로하고 봉수대터 말 가족상 앞으로 돌아나와 내림길 들머리로 들어서서, 

 

등로랄 것은 없지만 뚜렷한 길흔적을 따라 제법 가파르게 내려서면,  

 

이내 다시 임도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임도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멋들어진 신우대 숲 사이를 지나기도 하고, 

 

임도 절개지 단면에 드러나 보이는 화산 폭발의 흔적이 눈길을 끌기도 하는 사이에, 

절개지 단면에 드러난 주상절리

 

나타나는 'ㅠ'자 갈림길에서 우측 임도는 삼정리 삼정저수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임도이고, 좌측 임도는 '호미곶'으로 이어지며, 좌측 안쪽 임도는 동해면 상정리와 흥환리로 이어지는 임도로, 

 

'ㅠ'자 갈림길 건너편 숲으로 표지기도 걸린 뚜렷한 등로가 나 있어서 숲길로 들어섰지만, 길은 묘지까지만 연결되어 있고 이후 묘지 뒤편으로는 길흔적이 보이지 않는 빼곡한 잡목숲이라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160봉쯤을 좌회하는 임도를 따라 진행하는데, 

 

임도 가장자리의 전봇대에 붙은 빛바랜 해파랑길 방향 표시가 사뭇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임도가 과거에 해파랑길 코스로 지정 운영되었지만 현재는 이 코스가 아닌 해안 길로 해파랑길이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해파랑길 14, 15, 16코스에 나오는 지명이 적힌 이정표

 

 

우측 사면 방향 임도 갈림길에서 직진의 임도를 따르다가,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져 나가는 갈림길에서 정면 산불 감시탑이 보이는 '명월산(185.7m)'으로 수레길로 오르면, 

 

넓은 공터에 산불감시초소가 덩그러니 자리한 명월산 정상에 도착한다. 

 

<명월산(明月山, 185.7m)>
포항시 구룡포읍 강사리(江沙里)에 있는 산으로, 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명월이라 명월산이라고 부른다. 명월마을은 절골, 寺里(사리)/多木浦(다목포) 서편 계곡 깊숙한 곳에 있는 산촌으로, 달그림자가 없는 마을이라 '明月'(명월)이라고 한다. 해봉사(海蓬寺)가 있어 절골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달이 한 번 뜨면 새벽닭이 홰를 칠 때까지 동네를 환하게 비춘다 하여 붙은 지명이라고 했다. 주위로 달을 가릴만한 높은 산이 없는 탓이다.

 

가야할 호미곶 방향
돌아본 봉수대와 공개산 방향

 

 

명월산을 뒤로하고 산불감시초소 직전에서 좌측 많은 표지기들이 걸린 숲길로 들어서서, 

 

거친 숲길을 따라 묘지를 지나면,  

 

낙엽이 수북이 덮인 뚜렷한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이내 다시 임도에 접속하여,  

 

우측 임도를 따라 편안히 진행하게 되는데, 

 

지도에 우물재산으로 표시된 지점 부근을 지나다가 우측의 야트막한 능선으로 오르니, 

 

그냥 평범한 능선 정도로 보이는 능선숲 나무둥치에 '우물재산(180.1m)' 산패가 걸려있다. 

 

<​우물재산(180.1m) >
포항시 남구 동해면 발산리의 산으로, 인터넷 지도에도 우물재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반바지 님의 산패와 몇몇 선답자들의 표지기도 달려있는 명백한 산으로 보이지만, 우물재산의 지명 유래 등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우무재산을 뒤로하고 잠시 길흔적이 희미한 능선숲을 따르다가 다시 임도에 접속하면, 

 

바로 사거리 갈림길인 '우물재 사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임도는 '학달비재'로, 우측은 절골(해봉사)을 지나 구룡포 청수년수련원 방향으로 이어지고, 

기맥길은 직진의 '호미곶 해맞이 광장'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우물재 사거리의 호미곶 둘레길 안내도와 이정표

 

 

지금까지 우측으로 호미곶면 강사리, 좌측으로 동해면 발산리를 가르며 진행해 온 기맥길이 이곳을 지나면서 온전히 호미곶면 안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표지기가 주렁주렁 열린 직진의 '호미곶 해맞이 광장' 방향 임도를 따라 400여 미터 진행하다가, 

 

임도가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가는 지점의 'ㅓ'자 갈림길에서 따르던 임도를 두고 좌틀하여 소로로 들어서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꽤나 넓은 옛 임도가  이어지며, 

 

좌측으로 160봉쯤의 봉우리 두어개와 우측의 180봉쯤도 우회하여 지나다가,   


<180.6봉>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동배리에 있는 산으로, 빼곡한 숲속 나무에 180.6봉 산패가 걸려 있고 3등 삼각점이 있다. 개념도에는 삼각점봉이라 표시되어 있다는데, 180.6봉에 대한 자료는 찾기가 어렵다.

 

 

호미곶에 너무 일찍 도착하면 기사님께 폐가 된다며 배낭을 내리고 시간때우기 쉼을 한다. 

 

 

능선 구분이 안 되는 그저 숲으로 이어지는 임도 수준의 기맥길을 따르다가,  

 

지도에는 없지만 고금산 좌측 골짜기를 지나 대보초교 방향으로 이어지는 직진의 임도를 두고 우측 수레길로 들어서면, 

 

※ 군부대가 있어서 갈 수 없는 호미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고금산(121.5m)을 기준으로, 

    좌측 직진의 임도는 고금산 좌측인 북서쪽 계곡으로 이어지고, 

    우측 수레길은 호미기맥 길로 고금산 직전에서 고금산 우측인 동남쪽 계곡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레길 수준의 등로가 이어지다가, 

 

등로 좌측에 물이 고여있는 습지가 눈길을 끌고, 

기맥꾼들의 행태를 감시하기 위한 감지기 일까..ㅉㅉ

 

요즘은 기맥꾼이나 다니는 이 길이 예전에는 왕래가 많았던지 움푹 파인 길이 이어지다가, 

 

우측의 언덕으로 올라서 이어지는 등로가 기맥 능선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로 평탄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는데, 

 

나무둥치에 걸린 '독도'님의 힘내라는 격려문이 호미기맥 능선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일시에 가시게 한다. 

 

 

그렇게 어디가 능선인지 분간이 어려운 밋밋한 등로를 따르는데,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대보저수지가 언뜻언뜻 내려다 보이고, 

 

주변 지형을 닮았는지 봉분조차 밋밋해진 묘지를 지나서, 

 

예전에는 민초들의 발자국 소리로 북쩍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기맥꾼들이나 다니는 길을 잠시 더 따르다가, 

 

호미곶 도착 시각을 12시 이후로 맞추기 위한 시간때우기 쉼을 한번 더 가진다. 

 

 

추던 춤도 멍석을 깔아주면 안 추듯이 쉬라고 했더니 쉬는 게 지겹다며 자시 배냉을 매고서, 

좌.우로 길흔적이 뚜렷한 밋밋한 안부쯤을 지나고, 

 

산행기 쓰기 곤란하게 별다른 특징이 없는 등로를 따라 지형을 닮은 묘지를 지나니, 

 

빛바랜 '호미기맥 1코스 끝자락 포토존(묘지)' 방향 표지판이 있는 언덕을 지나게 되고, 

 

빛바랜 표지기들 만큼 거칠어진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서면, 

 

이내 직진의 고금산 방향 능선을 두고 우측 계곡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야 하는 고금산 갈림길을 지나게 된다. 

 

<고금산(古今山, 122m)>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舊 대보면) 대보리에 있는 산으로, 나지막한 산이지만 바닷가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라 그런지, 산 전체를 군부대 철조망 울타리가 둘러져 있어서 접근할 수 없는 산이다. 고금산은 호미곶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이곳 고금산 능선에 혈(穴)을 끊는 쇠말뚝을 박은 곳(현재의 미사일 기지지역)이라고 한다. 이곳 기지는 미군이 사용하던 기지였는데 1964년에 우리 군이 인수하였다고 한다.

해돋이 명소인 호미곶이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호미기맥의 마지막 산이지만 먼 길을 걸어온 기맥꾼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게 하는 산이다.

 

 

골짜기 우측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는데, 

 

골짜기 건너편으로 원형철조망과 '지뢰 매설 지역' 경고판이 연이어 설치되어 있고, 

 

우측에서 내려오는 지계곡과 합쳐지는 지점에 설치된 철제 간이 다리를 건너면, 

 

완만해진 계곡길 좌측으로 무시무시한 경고판이 연이어 설치된 원형 철조망이 이어지다가, 

 

계속 숲길이 끝나고 좌측 고금산 사면으로 이어지는 시멘트포장 임도로 들어선다. 

 

 

호미곶에 다와가는데 아직도 12시가 되려면 멀은 상태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사면으로 이어진 임도를 따르다가,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호미곶의 유채꽃밭 풍경

 

좌측에 '태양 사슴농장' 표지석이 있는 'ㅜ'자 갈림길에서 좌측 고금산 정상 방향 도로를 두고, 

우틀하여 앞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호미기맥의 종착지인 호미곶을 향하면, 

 

<호미기맥의 종착지인 호미곶>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호미곶은 해맞이 명소뿐만 아니라 등대박물관과 인근 항구 그리고 빼어난 풍경으로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잦다. 풍수지리의 대가 남사고(南師古)는 우리나라 모양새를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고 있는 형상이며, 호랑이 꼬리를 닮은 호미곶을 천하명당으로 꼽았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는 국토의 동쪽 끝을 측정하기 위해 영일만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 한 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임을 확인, 호랑이 꼬리 부분'이라고 기록하였다. 조선 중엽 강태희는 《근역강산맹호도(槿域江山猛虎圖)》에서 우리나라 지형을 호랑이로 표현했다. 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우리 전통지리서인 《산경표 山經表》의 백두대간과 정맥을 지도로 그리면 틀림없는 호랑이 형상이었다.

오늘날의 호미곶이 갖는 위상은 일제의 한반도 풍수침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한반도의 형상을 희생물의 상징인 토끼로 폄하하자 육당(六堂) 최남선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안출해 낸 것이 바로 '근역강산맹호기상도'이다. 이 두 그림은 한일합방 직 전인 1908년 11월에 발행된 '소년지(少年誌)' 창간호에 흥미로운 기사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

 

왼쪽 <근역강산맹호기상도> 호미곶 등대박물관 소장. 오른쪽 <근역강산맹호도> 강태희 작.

 

호미곶항을 배경으로

 

929번 호미로를 건너는 대보2교차가 나오는데, 

오르지 못해 아쉬움이 남은 고금산 방향

 

대보2교차로 우측 소공원에는 '시인 리성 이성균 문학의 산실' 비석이 자리하고 있고, 

 

<시인 里城(리성) 朴暘均(박양균, 1924~1990)>

경상북도 순흥[영주]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46년 조병화(趙炳華)·김창석(金昌錫) 등과 동인 시지 『형상』을 출간하였고, 1948년 이윤수(李潤守)·박목월(朴木月)·유치환(柳致環)·이호우(李鎬雨)·이영도(李永道)·이효상(李孝祥)·김요섭(金曜燮)·신동집(申瞳集) 등과 시동인지 『죽순(竹筍)』에 참가하였다. 
1950년 『문예』에 「창」으로 첫 추천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1952년 종군작가단에 참가 일선에서 종군하였다. 1951∼1961년 사이 대구여상, 원화여고, 대보 고등공민학교, 경북대학, 효성여자대학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는데, 대보 고등공민학교 교편생활 중, '꽃', '창', '계절' 등의 주옥같은 시를 창작한 문학적 고향이라 하여 이곳에 시비를 세웠다. 

 

대보2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호미곶의 또다른 볼거리인 노오란 '유채꽃 대평원'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의 유채꽃밭을 감상하며 호미곶 해맞이 공원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르다가, 

 

다시 2차선의 포장도로인 '해맞이로'를 건너면, 

 

'호미곶 해맞이 광장'으로 들어서게 되고, 

호미기맥 종점을 확인하러 '바다 상생의 손'이 있는 동해 바다로 향하여, 

 

<호미곶(虎尾串) 해맞이광장>
한반도 최동단(最東端) 호미곶 해맞이광장은 2000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매년 열리는 장소다. 포항시에서 새천년의 출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역사성과 새천년의 미래 지향과 상징성을 담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124억 원을 들여 조성하였다. 2000년 새천년 한민족 해맞이 축전, 2002년 전국 최대규모의 축구공 제작, 2004년 2만 명분 떡국만들기 체험행사, 2006년 독일 월드컵 성공을 기원하는 초대형 태극기 제작 등 다양한 해맞이 이벤트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이곳은 13,920평의 부지에 상생의 손, 성화대, 천년의 눈동자, 연오랑세오녀상등이 조성되어 있다. 상생의 손은 육지에 왼손이, 바다에 오른손이 설치되어 있는데,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 도무며 살자는 뜻에서 조성되었고 육지에 설치된 왼손 앞에는 태양과 상생을 상징하는 성화대가 있다. 천년의 눈동자는 햇빛 채화기로 햇빛의 적외선을 열로 변환시키고 천년의 눈동자 안의 불씨함에는 변산반도에서 채화한 20세기 마지막 불씨, 남태평양 피지에서 채화한 지구의 불씨, 독도에서 채화한 즈믄해의 불씨, 호미곶에서 채화한 새천년 시작의 불씨를 합한 영원한 불씨가 보관되어 있다.
연오랑세오녀상은 이야기의 배경인 영일만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연오랑이 타고간 바위가 이곳에서 솟아올랐다고 전해진다. 광장 진입로에는 유채꽃 단지가 있고 매년 4~5월경에 유채꽃이 활짝 핀다. 광장 주변에는 한국 최초의 국립등대박물관과 호미곶의 세찬 해풍을 이용하는 풍력발전기등의 볼거리가 풍부하다.

 

광장 우측의 연오랑세오녀상(延烏郞細烏女像).

 

<연오랑세오녀상(延烏郞細烏女像)>
고려 초엽 박인량(朴寅亮)이 엮은 수이전(殊異傳)에 실렸던 것으로, 지금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의 동해 바다에 살고있던 부부인데, 157년(신라 아달왕 4년) 미역을 따러나간 연오랑이 올라섰던 바위(물고기라고도 한다)가 움직여 일본의 한 섬에 닿아 임금이 되었는데, 남편을 찾아나선 세오녀도 바위에 실려 일본에 닿아 연오랑을 만나고 왕비가 되었다. 
그때 신라에서는 돌연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
변괴에 놀란 왕이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이는 해와 달의 정(精)이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탓이라고 아뢰었다.
왕이 급히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는 없으나 세오녀가 짠 세초(생사로 가늘게 짠 비단)를 가지고 돌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다시 해와 달이 밝아졌다고 하는데, 이 후로 제사 지낸곳을 영일현(지금의 영일만)이라고 하였다.

 

돌아본 새천년기념관

 

호미곶 동해 바다에 있는 상생의 손 앞에 도착하여 호미기맥 종주를 마무리한다. 

 

<상생(相生)의 손>
한반도 최동단(最東端) 육지에 설치되어 있는 좌측 손 앞에는 태양과 상생을 상징하는 성화대가 있다.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이곳 호미곶은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일곱번이나 밟았던 곳이라고 한다. 호랑이 꼬리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이곳을 호미곶(虎尾串)이라고 하는데, 호랑이는 꼬리의 힘으로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하여 호랑이 꼬리는 국운상승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곳 한반도 최동단(最東端) 호미곶 해맞이광장에는 바다를 향하고 있는 상생의 커다란 좌측손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는 상생을 상징하는 성화대가 있다. 마친가지로 바다에는 육지를 향하고 있는 커다란 상생의 오른손이 세워져 있다. 이 청동 조형물의 상생의 손은 2000년 1월 1일 한민족 해맞이 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포항시에서 설치하였다. 바다에 있는 높이 8.5m의 오른손은 새 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세워졌고, 상생의 의미를 담은 커다란 왼손과 오른손 두 손이 서로 같이 잘 살자는 상생(相生)을 의미한다고 한다.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1999년 6월 제작에 착수한지 6개월만인 그해 12월에 완공됐다고 한다. 상생의 손은 국가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인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로, 상생의 손은 두 손이 상생(상극의 반대)을 의미한다.

 

호미곶 바다 '상생의 오른손'을 배경으로!

 

호미곶 육지 '상생의 왼손'을 배경으로! 

 

작금의 우리나라는 상생이 아닌 공멸의 길로 가는 게 아닌가 우려가 된다. 공무원 군가산점 논란으로부터 시작된 남여 갈등, 국민연금 개혁을 둘러싼 세대간 갈등, 빈부격차와 사다리 걷어차기로 인식되는 사법고시 폐지로 불거진 갈등 그리고 끊임없이 확대 제점화되는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이념갈등 등등등 온갖 갈등을 '상생'이라는 불꽃으로 녹여버릴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애마에 올라 내년쯤 오게 될 해파랑길의 구룡포를 지나, 

 

<구룡포항(九龍浦港)>
영일만을 형성하고 있는 범꼬리의 동쪽 해안선이 남쪽으로 내리 달리다가 응암산의 한줄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활처럼 휘어져 구룡포만을 이루는데 이를 끼고 기다랗게 놓여 있는 마을이다. 읍소재지로서 우체국, 파출소, 단위농협, 포항수산업협동조합, 농협중앙회 구룡포지점 등의 관공서와 금융기관, 구룡포 초등학교, 구룡포동부초등학교, 구룡포중․종합고등학교 등의 각급 학교가 밀집돼 있다.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일본식 건축물이 눈에 띈다. 특히 구룡포 개발에 공헌한 일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공자 탑'이 구룡포 공원에 아직도 남아 있다.

 

예로부터 용두귀운(龍頭歸雲), 옥산반조(玉山返照), 주잠명월(珠岑明月), 항구장제(港口長堤), 유명조일(維溟朝日), 창주모연(滄珠暮煉), 우진화선(盂津畵船), 석문청풍(石門淸風)등 8가지를 구룡포팔경(八景)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에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친 일이 있는데, 9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용두산 아래에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沼) 안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동해 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과메기의 유래>
과메기라는 말은 청어의 눈은 꼬챙이로 꿰어 말렸다는 관목(貫目)에서 유래한다. '목'을 구룡포 방언으로 '메기'라고 발음하여 관목이 '관메기'로 변하고 다시 ㄴ이 탈락하면서 '과메기'로 굳어진 것이다. 갓 잡은 청어나 꽁치를 겨울철 바깥에 내다 걸어 밤에는 얼렸다가, 낮에는 녹이는 횟수를 거듭하여 수분 함유량이 40% 정도 되게 말린 것으로 구룡포의 특산물이다.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算稿)》에 '청어는 연기에 그을려 부패를 방지하게 되는데 이를 연관목(燃貫目)이라 한다'라고 쓰여 있고,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비웃(청어)을 들어 보아 두 눈이 서로 통하여 말갛게 마주 비치는 것을 말려 쓰는 그 맛이 기이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 이 바다에는 청어가 무척이나 흔하였다고 한다.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뱃사람들이 그저 그물만 던지면 떼로 올라오는 청어를 배 안에서 먹을 밥반찬이나 할 요량으로 배 지붕 위에다 대충 던져놓았던 것이 , 제 스스로 찬 새벽바람에 얼었다 또 한낮의 햇살에 녹았다가를 반복해서 과메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얘기로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길에 배가 고파 바닷가 나뭇가지에 청어가 꿰어 있는 것을 보고 한 점 집어 먹어보니 너무 맛이 좋았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그렇게 청어를 구해다 처마에 걸어 얼린 후에 말려 먹었다는 것이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건 예부터 청어 산지로 유명했던 포항 앞바다의 사람들은 대나무에 청어의 눈을 꿰어 부엌 창문이나 처마에 매달아 놓았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과 밥 지을 때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기에 거듭 얼린 후에 마른 청어는 궁중 진상품으로도 그 이름을 높였다. 

과메기는 등푸른 생선으로 불포화지방산인 DHA와 EPA가 풍부하고 고혈압, 심근경색, 동맥경화 예방에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비타민E가 다량함유됨으로써 노화예방에도 효과가 크고 시력회복에 좋은 비타민A가 쇠고기보다 16배나 많은 우수한 상품이다. 과메기에는 뼈를 튼튼해질 수 있게 하게 되는 비타민D가 성인 1일 필요량의 3배 정도 함유되어 있으며, 그 외 다른 상황에서도 칼슘, 인, 니아신 등의 여러가지 영양소가 많아 옛날부터 “꽁치가 나면 신경통이 들어간다”는 말이 있었다. 

 

구룡포읍 31번 국도변의 온천에서 먼지를 닦고, 

 

포항시 동해면 임곡항 인근의 임곡횟집에서, 

 

호미기맥 완주를 자축하는 시간을 가지고는, 

 

조금은 이르다 싶은 시간에 귀경길에 오른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서울에서 호미기맥 졸업기념 호프타임을 가지고는, 

 

호미기맥  종주도 끝마쳤기에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귀갓길에 오른다. 

 

 

어린 시절 역사책을 읽으며 접했던 왕조나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예외 없이 발생하는 원리에 대해서는 이해가 충분하지 못했는데, 요즘의 세태를 보고 있노라면 원리에 대한 미진했던 이해의 부분부분들이 메꿔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 또한 나이 든 탓일까!  그래도 호미기맥 완주는 축하드리고 축하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