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소백산자락길 3, 4자락(희방사역~기촌리) 경북 영주시, 충북 단양군.
산 행 일 : 2024. 08. 24.(토)
산행코스 : 희방사역 ~ 죽령옛길 ~ 죽령주막 ~ 죽령마루 ~ 버들밭마을 산신당 ~ 보국사지 ~ 용부원리 ~ 영통사 입구 ~ 대강면 당동리 ~ 중앙선 똬리굴 입구 ~ 노루고개(10:08) ~ 장현리 문안골 ~ 가리점 마을 ~ 마조리 ~ 말씀의 동산교회 ~ 석회석광산 사택(중말마을) ~ 노동리 마을 ~ 노동동굴 입구 ~ 되인재(당이재) ~ 클레이 사격장 ~ 기촌교 ~ 기촌리 (3자락 11.4km + 4자락 13.4km = 24.8km, 8시간 소요)
산행참석 : 백두 전원.
▶ 즐산팀은 역방향 진행에 아스팔트 도로구간 제외하고 마조리에서 출발할 경우 17km 트레킹.
<3자락 : 희방사역~당동리 (11.4㎞, 3시간 20분>
3자락은 옛 서민들의 애환 서린 전설이 흐르고 있는 길이다. 예로부터 죽령을 ‘아흔아홉 굽이에 내리막 30리 오르막 30리’라고 했다. 한양과 경상도를 잇는 최단 경로인 탓에 사람들은 힘들어도 이 험한 고개를 넘었다. 그래서 이곳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사시사철 번잡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는 선비, 허리품에 짚신을 차고 봇짐과 행상을 지고 힘들게 걷는 보부상, 고을에 부임하는 관리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며 숨 가쁘게 걸었던 천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죽령 명승길이다.(명승 30호)
- 죽령옛길(2.8km, 50분) : 소백산역(희방사역) - 느티쟁이주막터 – 주점터 – 죽령마루
국가 명승 30호로 최초의 길 문화재가 된 '죽령 옛길'은 신라 초기 죽죽(竹竹)이 개척하였다 하여 죽령(竹嶺)이라 한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되기도 하였고, 고려조에는 보부상들의 장삿길이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장원급제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의 청운의 길이기도 하였다.
- 용부원길(3.9km, 70분) : 죽령마루 - 버들마 - 보국사지 – 샛골(죽령분교) – 용부사 - 죽령터널
이 길은 서울로 향하던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길이다. 그 간절한 염원은 국내 최장 중앙선 철로 터널(4.5km), 360도 회전하는 일명 똬리굴, 국내 최장의 중앙고속도로 터널(4.6km)을 만들었다.
- 장림말길(4.7km, 80분) : 죽령터널 - 매바우 - 음지마 - 장림리
장림 마을은 여느 고색실 아래처럼 죽령을 넘는 나그네를 위해 숙식이 가능한 마을로 발달되었다. 이런 마을에 빠질 수 없는 주정 산업의 발달이 대강 막걸리, 대강 동동주를 전국적인 브랜드로 발전시켰다.
<4자락 : 당동리~기촌리 (13.4㎞, 4시간)>
4자락은 꼬불꼬불 굽이굽이 할머니가 품은 추억의 이야기길이다. 고수, 노동, 마조지역 등 옛 단양사람들이 이 옛길을 이용하여 죽령을 넘어 풍기장을 보러 다니던 길이다. 농촌풍광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며, 당이재 길은 마조지역 주민과 수촌지역 주민이 서로 왕래하던 길로 훼손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당이재를 넘던 코스가 폐쇄되어 있음)
<산행지도>
보통 8월 중순이 지나면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여 동해안 해수욕장들조차도 대두분 폐장을 하게 되는데, 올해는 기록적인 무더위가 이어져 열대야가 한 달을 넘게 계속되며 관측 역사상 최초의 사태라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8월 둘째 주 봉화 청옥산과 백천계곡 피서산행으로 올여름 더위는 피한 것으로 예상했지만, 불볕더위가 이어진다는 예보에 이번 산행에서도 진행 방향을 역방향으로 바꾸어 걷기로 했다. 또한 소백산자락길 3자락과 4자락의 분기점인 대강면에 있는 막걸리의 명가 '대강양조장'에 들러 션한 막걸리 맛을 보려던 계획도 아쉽지만 취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소백산자락길 4자락의 종착지인 단양군 단양읍 기촌리의 팝스월드 단양 공영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두어 시간의 쪽잠을 더 청하다가 일어나, 즐산팀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 배낭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니 가로등 불빛도 밤안개에 흐려져 있고,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여 대충의 장거리 트레킹 준비를 마치고,
폐교된 '금곡 초등학교' 자리에 신기술 체험과 더불어 다양한 포토존으로 구성된 체험형 멀티컴플렉스 공간으로 꾸민 '팝스월드 단양' 앞에서 소백산자락길 3,4자락 역진 트레킹을 시작한다.
소백산 서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단양읍을 지나는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솔티천'을 좌측으로 내려다 보며 도로를 따르다가,
직진의 단양 고수동굴 방향 도로를 두고 좌틀하여 솔티천을 건너 노동리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들어서면,
좌측의 '단양 식초 연구회' 간판을 지나 노동리로 이어지는 2차선의 도로를 따르게 되는데,
아직은 캄캄한 신새벽이라 그런지 2차선의 널찍한 포장도로는 작은 렌턴 불빛에 의지해서 고독을 즐기는 듯한 여행자가 독차지하게 된다.
길가 작은 땅때기조차 옥수수와 고추 밭으로 가꿔놓은 농꾼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는 사이에,
'단양 클레이 사격장 입구'를 지나고,
<클레이 사격>
점토로 구워 만든 접시를 투사기로 쏘아 올려 산탄총으로 하나씩 사격하여 깨뜨린 접시의 수로 승부를 겨루는 사격 경기다. 18세기 영국에서 살아있는 비둘기를 날려 쏘아 맞추는 것이었는데, 잔인하다 하여 진흙(clay)으로 만들어진 접시(피젼)를 표적으로 사용하면서 클레이 사격이 유래되었으며, 한국에는 1955년 사격연맹이 발족되고 사격이 본격적으로 스포츠로 확산되었고 올림픽경기종목 중 하나이다.
잠시 더 도로를 따라 당이재로 표시하는 고갯마루를 지나서,
<당이재>
당이재(되이재)는 가리점마을(마조리)에서 옛 소백산자락길이 수촌리 미륵리로 이어지던 고갯마루이다. 그런데 코스가 옛길을 두고 노동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바로 기촌리로 이어지게 변경되면서 고갯마루에 해당하는 지점을 당이재로 부르게 된 듯하다.
내림길로 바뀐 도로를 따라 노동리로 내려서는데,
마조리 가리점마을에서 6시에 출발하는 즐산팀을 태운 버스가 사람들의 등살에 못 견디고 일찌감치 기촌리를 출발하여 우리를 앞질러 가는데, 걸어서 가는 우리도 6시쯤이면 가리점마을에 도착하게 되므로 함께 걸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즐산팀의 얼굴을 보기는 어려울 듯하여 약간 맥이 빠지는 듯하다.
밤안개가 내려앉는 넓은 포장도로를 독차지하며 완만한 내림길을 따르다가,
좌측 폐쇄된 노동동굴 방향 도로로 들어서서,
사유지라 출입을 금지한다기에 폐쇄된 노동동굴 입구 확인은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노동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단양 노동동굴(蘆洞洞窟)>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의 조선 누층군에 발달한 석회암 동굴이다. 단양국가지질공원의 지질유산이며 1979년 6월 21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남한강 줄기가 충주호 북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노동천 부근에 있으며 동굴의 총길이는 약 800m이다. 동굴은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의 퇴적암 지층 조선 누층군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굴 안은 경사가 급하다. 동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등 동굴 생성물이 잘 발달되어 있다. 동굴 중간의 수직벽 밑에는 토기 파편이 흩어져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1592) 당시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노동동굴은 동굴 내에 갖가지 지형지물이 생겨 있고 종유폭포, 석주, 석순 등 2차 생성물이 잘 발달하여 지질학적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크고 동굴 경관이 아름답다. 2008년 문화재청은 동굴을 보호한다는 조치 하에 동굴을 비공개로 전환하였다.
츨산팀 출발지인 가리점마을에 6시 전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시원한 새벽공기를 들이키며 노동리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노동천을 건너고,
사거리 갈림길에서 우체통과 담배 가게 표지판이 있는 노동상회를 끼고 좌틀하여 노동리 가리점마을로 진행한다.
가리점마을을 향해 중앙선이 없는 포장도로를 따라,
노동리 버스정류장을 지나 완만한 오름길을 포장도로를 따르는데,
가리점마을에서 출발하는 즐산팀을 내려주고 돌아내려오는 버스가 반갑고,
손글씨의 '단양 소백산 가리점 마을' 간판이 걸린 아치문을 지나면,
폐허로 방치되어 있는 '석회석 광산인 노동광산 사택지'쯤을 지나게 되고,
<노동광산(蘆洞鑛山)>
충북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에 있는 석회석(石灰石) 광산이다. 중앙선 신단양 역에서 동쪽으로 3km 지점에 있다. 광산 일대의 지질은 조선계(朝鮮系)의 막동 석회암층과 석탄기의 만항층 및 페름기의 장성층 등의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상은 막동 석회암을 대상으로 하며, 대체로 회색 또는 암회색의 치밀한 결정질을 보이고 있다. 국부적으로 흰색의 방해석 세맥이나 이질(泥質) 혹은 규질의 불순대가 있다. 심부로 갈수록 광맥은 치밀하고 견고한 석회암을 나타내고 있으며, 풍화를 심하게 받은 지표 부분보다 품위가 높다. 광구 북부의 실금산 동측 사면에 개설되어 있으며, 품위는 CaO 49.2%, MgO 1.75%이고 광산 전체 매장량은 약 2400만톤으로 추정된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쉼터 정자를 지나면,
좌측의 '사방댐' 표석을 지나,
'노동천' 계곡 좌측의 '말씀의 동산교회'로 이어지는 교량 입구를 지나게 된다.
깊은 골짜기 안으로 끝없이 이어질 듯 보이는 도로를 이어가다가,
도로 우측의 '가리점 마을 설명판'을 지나고,
<가리점 마을(마조리)>
마조리라는 마을명에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소백산 자락의 마지막 마을이라 하여 '마'와 마을 양 옆으로 계곡이 흐르다가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모양이 조리 모양과 같다고 하여 '조리'를 합성하여 '마조리'라는 마을 명이 생겨 났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예전에 마을에서 나무를 갈아 함지 등을 많이 만들었다고 하여 '갈 마(磨)'자에 '지을 조(造)'자를 써서 '마조리'라는 마을명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마을의 동일한 뜻을 가지는 옛 지명이 '가리점'임을 볼 때 더 설득력이 있다.
가리점 마을의 명소
소백산 성황당, 산신각, 벼락바우, 밤바위 뒷샘, 사마구바우, 흰비양지, 병풍바우, 소마장터, 개구리바우 싸리앗골, 풀무닥거리
우리마을 먹거리
산채정식, 황기두부, 오미자송편, 오미자화채, 산도라지, 산야초효소, 전통주, 수수부꾸미
전화 : 043) 423-2690
거의 모든 마을에 있는 것들이 가리점 마을에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호박 넝쿨이 오르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는 거다란 지지대 옆의 사방댐 표석을 지나면,
가리점마을 서낭당과 당산목, 쉼터정자가 있는 당산숲이 나오는데,
즐산팀들이 떠나버린 좌측 계곡 옆 쉼터 정자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쉼을 한다.
<마조리 가리점마을 당산숲>
소백산 골짜기에 위치한 소백산 가리점 마을 입구에 키 큰 한 쌍의 소나무와 느티나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성황당, 그리고 성황당 옆으로 시원스러운 물소리를 들려주는 계곡이 잘 어우러져 있다. 오미자, 더덕, 오가피, 황기 등과 같은 약초를 많이 재배하는 마을로, 특히 오미자는 청정지역에 맞게 친환경작목반이 구성되어 좋은 품질의 오미자를 생산하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생산된 약초를 이용하여 오미자 엑기스 만들기, 향기주머니 만들기, 약초비누 만들기와 감자, 옥수수 등 일반 농작물 수확체험 그리고 매년 정월 14일에는 지난해의 묵은 액운을 태우고 금년의 행운과 소원을 빌며 한 해의 무사태평을 바라는 기원제를 지낸다.
<마조리 마을 자랑비>
가리점(목그릇)을 많이 만들어 가리점이라 하다가 후에 마조리로 명명된 우리 마을 입구에 깊은 연륜의 느티나무와 수려한 소나무가 산신령이 호위하듯 병풍처럼 둘려있어 신성암(?)이 내려와 성황당이 되었고 산삼을 캐려는 심마니들의 치성이 모여 돌탑이 쌓였네. 발밑을 보면 극진히 아버님을 섬기었던 김봉경의 효심이 냇물 되어 흐르는 이곳 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14일 날 모새골 산신당과 탑 옆의 성황당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며 한마음으로 우리가 된다네..
199년 4월 25일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마조리 주민일동
즐산팀들이 출발하기로 예정된 시각에 가리점마을을 출발하여 도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가리점 마을 다목적회관 앞 마조리 버스정류장을 지나게 되고,
우측 노동천 개울을 덮는 파이프 지붕을 만들어 그 위로 오미자 넝쿨을 얹어 한여름 무더위에도 시원할 듯한 곳을 지나,
우틀하여 '노동천(蘆洞川)'을 넘는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나 그리고 가리점'이라는 시(詩)가 적힌 이정표가 서 있고,
- 나 그리고 가리점 -
높은 산 아래 옹기종기 모인 가옥에 / 대문 하나 없는 자연마을 /
살아 숨 쉬는 전통이 몸에 베인 듯 / 취나물 향내가 알려준다. /
산 계곡 물보라 거품에 / 한 겹 두 겹 씻어내고 /
발갛게 물든 오미자 향취에 취해본다.
우측의 육각정자와 방치된 '민예품 전시장'을 지나서 시멘트포장임도로 들어서게 된다.
싱그러운 숲으로 급하지 않은 오름길 포장임도가 이어지다가,
경사가 완만해지며 시멘트포장임도는 비포장 흙길로 바뀌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들어진 임도길이 이어지고,
이런저런 감춰둔 속내를 털어내며 한땀한땀 멋들어진 임도길을 꿰어모아,
'가리점마을 옛길' 설명판이 있고 좌측 제2연화봉으로 이어지는 지능선으로 뚜렷한 등로가 나 있는 고갯마루에 도착하여,
<가리점 마을 옛길>
소백산자락길 4구간으로 대강면 당동리에서 노루고개를 넘어 장현리를 지나 가리점마을 (마조리)에 이른 다음 되인재(당이재)를 넘어 수촌리 미륵이로 이어지는 옛길입니다. 당동리에서 오르는 길옆에는 중앙선 철도의 똬리굴이 있으며 장현리에는 석회암이 빗물에 녹아서 이루어지는 깔때기 모양의 지형인 돌리네가 많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마조리는 6.25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지역으로 많은 체험마을로 가꾸어가고 있습니다. 수촌리는 400년 전에 생긴 마을로 나라의 변란을 알아보는 샘물이 있는데 이 샘물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평소 맑던 물이 갑자기 씻을 수 없을 정도의 황토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소백산자락길-
다소 이르지만 일찍 걷기를 시작하여 다소간 시장기가 몰려와 맑은 아침공기를 쐬며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하루 24시간 무더운 서울이 아닌 맑은 공기에 서늘함까지 느끼게 하는 단양의 고갯마루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 무더위를 무릅쓰고 죽령을 넘을 수 있는 힘을 얻은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완만한 내림길로 바뀐 임도를 따라 장현리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길가에 '층층나무' 설명판이 있는 곳을 지나면,
우전방으로 장현리 문안골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갈림길 삼거리에서 우측 아래 문안골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로 들어서서,
잠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다시 나타나는 갈림길 삼거리에서 따르던 포장도로를 두고 좌측 차단기가 있는 시멘트포장임도로 들어선다.
호젓한 비포장 임도길을 따라,
지능선을 넘으니 임도가 시멘트포장으로 바뀌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림길 임도를 따르면,
좌전방으로 성황당 터를 지키는 소나무 한그루가 시야에 들어오는 '노루고개'가 건너다 보이더니,
장현리 마을 성황당터임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임도 차단봉 옆에 장현리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노루고개를 지나게 된다.
<노루고개/장현리>
충국 단양군 대강면 당동리와 단양읍 장현리를 잇는 당동장현로가 지나는 고개지점으로, 유래에 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임도 차단기를 통과하여 2차선의 포장도로인 당동장현로에 접속하여 좌측 당동리 방향으로 들어서서,
뜸하지만 가끔씩 지나가는 차량을 조심해야 하는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
도로는 헤어핀 구간이 나타나며,
우측 급경사 사면 숲속에 자리한 외딴집이 눈길을 끌고,
가야 할 당동리가 옅게 드리운 아침안개를 뚫고 희미하게 내려다 보이더니,
다시한번 헤어핀 구간을 연속으로 휘돌아 내려가면,
커다란 나무가 나타나며 아래에는 '삼둥지 농촌마을' 입간판과 '소백산 자락길 단양 구간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삼둥지 마을>
'삼둥지 마을'이란 소백산 준령에 둘러싸여 있는 노동리, 장현리, 마조리를 합한 권역으로, 이 세 개 마을이 마치 새의 둥지처럼 높은 산이 마을을 아담하게 둘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좌측으로는 똬리굴을 지나 죽령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철로 축대가 올려다 보이는데,
<똬리터널/똬리굴>
도로 좌측 철길 축대 좌측 끝에 똬리굴 입구가 위치하고 있다. '루프식 터널'이라고도 하는데, 철도의 고저차를 극복하기 위해 원을 그리며 진행하는 것이다. ‘똬리’는 짐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받치는 고리 모양의 물건으로 짚이나 천을 틀어서 만드는데, 뱀이 몸을 동그랗게 마는 모양도 똬리라고 한다. 즉 둥글게 빙빙 틀어 놓은 것, 또는 그런 모양을 말한다.
<중앙선 복선화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똬리 터널>
중앙선 복선 전철 사업 중 가장 어려운 공사 구간으로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를 잇는 소백산 죽령터널이 2017년 말에 관통했다. 한국철도시설공단 강원본부에 따르면 죽령터널은 중앙선 도담~영천 복선 전철사업 38개 터널 중 11.165㎞로 가장 긴 터널이다. 2015년 7월 착공, 2년 6개월 만에 터널 굴착 공사를 마쳤다. 연인원 5만여 명의 건설인력과 덤프트럭 등 중장비 3만 5,000여 대가 투입됐다. 죽령터널을 뚫는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후속 공정으로 궤도 전기 등 시스템 공사를 거쳐 2020년 말부터 열차가 운행할 예정이다. 도담~영천 복선 전철 사업은 현재 47%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으며 안동 구간까지 완공되면 임청각 복원의 기반이 조성되고 단양 구간 철도 중 고저차 극복을 위해 건설된 똬리 터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한국일보, 이용호 기자, 2017. 12. 27)
중앙선 철로가 축대 좌측 끝지점이 똬리굴 입구이지만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중앙선 철로 똬리굴 입구 아래를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서자,
이제 복선화 된 중앙선 철길에 그 역할을 넘겨준 철길 굴다리로 통과해야 하지만,
바로 좌측의 중앙선 철길 밑을 지나는 터널형 통로를 지나는데,
이제는 그 쓰임새를 바로 옆에 새로이 만들어진 굴다리에 내어주고 시원한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이내 다시 복선화 되어 새로이 건설된 중앙선 철길 아래를 통과하게 된다.
중앙선 철길을 지나면 단양IC 램프 구간이 지척으로 다가오고,
그 우측으로는 '대강 막걸리'로 유명한 대강면 소재지인 장림리 일대가 내려다 보이고,
<대강면 장림리>
본래 단양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때 장림역이 있었으므로 장림역 또는 장림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림리라 해서 금강면에 편입되었다. 1917년에 대강면으로 편입되었다. 소금무지산에 올라가서 보면 용부원1리에서 단성 북하리까지 들이 펼쳐져 있는데, 단양군 전역을 뒤져도 이만큼 넓은 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마을 뒷산의 참나무숲과 맑은 날 장림교 부근에서 바라보는 동트는 광경과 우무락소의 바위절벽이 일품이다. 1917년 풍양조씨 가문에서 처음 시작했다는 대강양조장을 필두로 52년 문을 연 대강두부공장과 1960년대에 시작한 대동상회, 대청방앗간, 대강철물점 등이 유서깊은 상점이다.
단양에서 죽령을 거쳐 영남으로 연결되는 요로에 위치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장림역이 있었다. 서울-원주-제천-단양-영주-안동-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5번 국도와 중앙선 철도, 중앙고속도로가 모두 마을을 지나고 있다. 6 25 때 북한군의 주요 진격로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내 4자락 출발점이자 3자락 종점인 대강면 당동리 당동장현로가 국도 5호선에 접속하는 삼거리에 도착하는데, 이곳 삼거리에서 3자락길은 좌틀하여 국도 5호선과 도로를 따라 죽령으로 이어지지만, 죽령옛길을 따라 진행하려면 우틀하여 장림리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도로를 건너 죽령옛길을 따라 고갯마루로 진행하게 된다.
이곳에서 장림리에 있는 100년 전통에 4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온다는 '대강 양조장(043-422-0077)'에 들러 막걸리박물관도 둘러보고 청와대 만찬주로 알려진 션한 막걸리을 한 사발 걸치고 싶지만, 아직도 즐산팀의 흔적을 따라잡지 못하여 막걸리는 후일을 기약하고 좌틀하여 국도 5호선으로 들어서서,
도로를 건너는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아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통행량이 뜸한 4차선의 국도 5호선을 무단으로 건너,
국도 5호선을 갓길을 따라 단양IC 진입로 입구를 지나 죽령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소백산 죽령 옛길'과 '용부원 1리(음지마을)' 표지석이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여,
이내 '용부원1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두고 우측 죽령천을 넘는 다리를 건너면,
죽령이 7.2km 남았다는 죽령옛길에 접속하여 좌틀하여 죽령 방향으로,
'죽령옛길' 이정표와 구조목이 연이어 세워진 시멘트포장 농로를 따르다가,
용부원교회 첨탑이 보이는 지점의 이정표를 따라 좌틀하여,
화장실과 아고라 쉼터가 있는 '한지역사전시관' 앞에서 배낭을 내리고 잠시 쉼을 한다.
잠시의 쉬는 이유를 내려두고 음지교를 건너 바로 우틀하여 진행하다가,
<용부원리>
용부원은 조선시대 장림역에 딸린 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원이 있던 곳은 용부원3리로, 텃골과 매바위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는 죽령산신당도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남북으로 산이 열리면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 죽령고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동쪽의 소야와 양터, 서쪽의 양지말과 음짓말은 매우 협소하다. 음지말은 사오실 칼기봉의 그늘에 들어 있어 음지라 불리며, 노인들이 장수를 한다고 마을 자랑비에 적고 있다. 양지말은 죽령역이 있는 마을로, 역의 뒷받침으로 한때 경기가 좋았으나 지금은 간이역으로 전락하여 마을도 크게 위축되었다.
우측 죽령옛길 안내도가 있는 데크길로 들어서서,
죽령천 천변으로 이어지는 잘 정비된 죽령옛길을 따라 죽령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죽령천에 작은 돌다리가 보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좌측 북하리 방향 갈림길을 지나면,
어느 분의 여름 피서지가 부럽기 그지없고,
죽령천을 건너는 출렁다리가 보이는 지점에서 데크계단을 올라,
죽령옛길 출렁다리를 건너서,
가이드 로프가 안내하는 죽령옛길을 따르면,
죽령옛길 탐방로 아치문을 들어서게 되는데,
죽령폭포가 1.9km 남았다는 이정표 옆에는 '뱀 주의' 등의 각종 주의사항이 안내되어 있다.
죽령천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잘 정비된 죽령옛길을 따르는데,
계곡 가파른 비탈면에는 데크길을 설치하여 누구라도 쉽게 걸을 수 있게 되어 있고,
작은 지계곡을 건너야 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데크목 다리를 설치해 놓았으며,
죽령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계곡물이 한여름에도 감히 더위를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데,
맑고 시원한 숲길을 검은 우산을 받치고 가는 분이 화투장 12월 '비 광(光)'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무더운 여름, 숨쉬기조차 싫은 날에 대강면 장림리에 차를 두고 군내버스로 죽령에 올라 죽령옛길을 따라 한양 방향으로 쉬엄쉬엄 내려오다가 죽령천 맑은 물에 발을 담그면 더위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죽령옛길을 걷다가,
둥글어진 바윗돌에 앉아 발을 담그기 좋은 죽령천의 유혹에 잠시 흔들리기도 하며,
죽령옛길 아치문을 들어선 지 30여분 만에 처음으로 계단길이 나타나고,
죽령천 맑은 물의 유혹도 이겨냈는데 벤치 쉼터의 유혹쯤은 본체만체 그냥 지나치며,
죽령천 계곡과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더니,
좌측 아래로 데크계단길이 갈라지는 지점의 이정표에 따라 좌측 아래에 있는 죽령폭포를 다녀오기로 하고,
죽령폭포를 향해 데크계단길을 내려가는데,
가리점마을에서 출발한 즐산팀 사람들이 올라오며 반가이 인사를 건네오고,
이내 '단양 제2팔경, 죽력폭포' 설명판이 있는 죽령폭포 전망데크에 내려서게 된다.
<단양 제2팔경, 죽령폭포>
소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죽령계곡으로 흘러 심산유곡의 청정한 숲과 어우러져 비경(秘境)을 연출한다. 북벽ㆍ금수산ㆍ칠성암ㆍ일광굴ㆍ온달산성ㆍ구봉팔문ㆍ다리안산과 더불어 단양 제2팔경으로 손꼽힌다.
죽령폭포는 죽령의 중턱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홉 척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죽령폭포는 마치 은옥(銀玉)으로 수를 놓은 듯한 신비경을 자아낸다. 울창한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암반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수는 보기만 해도 더위가 날아간다.
참고로 단양팔경(丹陽八景)은 충청북도 단양군 주위에 있는 여덟 곳의 명승지로, 옥순봉(玉荀峯)ㆍ구담봉(龜潭峯)ㆍ도담삼봉(島潭三峯)ㆍ단양석문ㆍ하선암(下仙巖)ㆍ중선암(中仙巖)ㆍ상선암(上仙巖)ㆍ사인암(舍人巖) 등이다.
다시 죽령옛길로 돌아나와 이정표의 용부사 방향으로 좌틀하여 진행하면,
죽령폭포 상단 계곡을 건너,
곧게 자라는 낙엽송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데크목 등로를 따르는데,
지도상 코레일 경북북부지사 건물쯤이 좌측 죽령천 계곡 건너편으로 보이고,
데크길이 좌틀하여 계곡을 건너는 교량으로 들어서서,
교량 위에서 하류 방향 아래로 보니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죽령천이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려가고 있는데,
인터넷 지도에는 이곳을 죽령폭포로 표시하고 있으니 10여분 전에 지난 죽령폭포는 어떻게 된 것인지..?
죽령천 계곡을 건너자 좌측 계곡 하류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는데 아마도 정규 소백산자락길인 듯하고,
이제는 계곡 좌측으로 이어진 잘 정비된 등로를 따라 오르면,
용부사 입구 진입도로에 접속하여 좌틀하여 도로를 따르게 되는데,
<죽령옛길 유래> - 굽이굽이 역사가 깃든 죽령옛길 -
죽령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갯길로 문경새재,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과 충청도를 잇는 3대 관문 중 하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에 죽령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 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옛길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때는 한동안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는 국경지역으로서 삼국의 군사가 불꽃 튀는 전투를 벌이는 격전장이었습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죽령옛길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나가야 할 중요한 역사 자원입니다. - 소백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
바로 우측의 용부사는 보통의 사찰로는 보이지 않고 그냥 낡고 평범한 건물들이 몇 채 보일 뿐이고,
발길을 돌려 용부사 진입도로를 따라 나가면,
용부사 진입로는 이내 포장도로로 바뀌어 사과가 탐스럽게 열린 과수원 사이로 이어지더니,
'태고종 용부사' 진입로 표시가 있는 갈림길 삼거리에서 우측 용부원2리 방향 도로를 따르게 되는데,
도로 좌측 널찍한 공터에는 '죽령 옛고개마을' 설명판과 '아름다운 마을' 선정 알림판이 세워져 있다.
<죽령 옛 고개 마을>
죽령옛고개 마을은 본래 단양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때 장림역에 달린 원이 있어 용부원이라 하였다. 본디 용부원은 한 개 부락이었으나 1967년에 행장편익을 위해 용부원2리로 분구되었다. 죽령 옛길의 보국사지 미륵불은 신라 하대의 것으로 향가 모죽지랑가의 죽지랑 설화를 간직한다. 죽령은 단양과 경상북도 영주시 사이이 있는 고개로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5년(서기 158)에 이 길을 열었다. 옛날 어느 고승이 고개를 넘는데 하도 힘들어서 짚고가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았다고 하여 대재라고도 불린다.
마을의 명소로는 소백산, 연못, 습지, 생태공원, 양터, 죽령산신당, 보국사지미륵불(장유불), 신기산성, 신기리, 용부사, 죽령계곡, 성황당 등이 있다. -죽령옛고개마을영농조합-
<죽령옛고개마을>
우리 마을은 오래도록 인연이 이어온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자연경관 및 환경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두드러지고, 서로 협력해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고자 하는 주민들의 의지가 돋보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과의 교류에 손색이 없는 것으로 인정받아 2013년 1월 11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었습니다. -(사)한국에서 가장아름다운마을연합-
빛바랜 용부원2리 마을 안내도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자,
산골 오지마을임에도 가옥들이 모두 새로이 지어진 듯 번듯한 모습이고,
2층 건물에 태양광 패널까지 얹은 마을회관을 지나면,
커다란 나무 아래의 데크목 쉼터를 지나게 되고,
'Y'자 갈림길에서 좌측 도로를 따르는데,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올여름 유난히 뜨거운 태양의 공격에 일보 후퇴를 한 선두들이 그늘에서 쉼을 하고 있고,
더 뜨거워지기 전에 죽령에 오르자며 재촉을 하여 다시 도로를 따라 죽령 고갯마루로 향하는데,
앞쪽으로 공장 굴뚝 모양의 거대한 죽령터널 환기구가 시야에 들어오고,
이내 길 좌측으로 '보국사지'에 알림판이 나타나며,
<보국사지(輔國寺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 2리 산 41번지에 있는 절터.
죽령(竹嶺) 마루턱에서 용부원리의 옛 도로를 따라 마을 쪽으로 내려오는 오른쪽 산기슭에 있다. 보국사는 보곡사(保谷寺)·보국사(補國寺)·보국사(報國寺)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며,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절터는 약 660㎡(200평)에 이르는데, 경작지로 사용되어 훼손된 곳이 많다. 이곳에서 장육불상(丈六佛像)과 연화문 대좌(蓮花紋臺座), 죽절문 간석(竹節紋竿石) 토막, 연화문 석판(蓮花紋石版), 주초석 등이 발견되었고, 절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장육 불상의 조각 수법이나 기와에 새겨진 무늬, 일부 남아 있는 축대의 구조 등으로 미루어 9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장육 불상은 몸체·좌대·지대석 등 3개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불두(佛頭)는 남아 있지 않다. 불두를 제외한 전체 길이는 4m이며, 불두를 포함하면 약 5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좌측 언덕 위를 보니 몸뚱이만 남은 석불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불두가 사라진 보국사지 장육불상 모습.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어서 덥지 않은 도로를 따르다가,
그늘을 벗어나 햇볕에 노출된 도로로 들어서면 아직은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 하니 막혀올 지경이고,
햇볕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죽령에 올라야 한다며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앞서가던 분들도 햇볕에 녹아내릴 듯한 몸뚱이를 식히려 손바닥 만한 그늘에서 쉼을 하고 있고,
이제 금방 죽령에 도착할 것이니 더 뜨거워 지기 건에 죽령에 올라서 편히 쉬자는 권유에 다시금 걷기를 시작하여,
단양 죽령 산신당(丹陽 竹嶺 山神堂, 충북 민속문화재 제3호)을 지나고,
<단양 죽령 산신당(丹陽 竹嶺 山神堂)>
죽령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춘사죽죽(春史竹竹)이 길을 열었고, 고구려 장수왕(450년경) 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신라 진흥왕때(551년) 다시 신라가 회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19년(1437, 정사년)에 예조에서 전국에 신패(神牌)를 모시는 곳을 정하고자 할 때, 단양군의 죽령산은 소사(小祀)로 정하고 위판에는 죽령 산지신(竹嶺山之神)이라고 쓰고 제사 지내는 곳은 세종 14년(1432년)의 수교(受教, 임금의 명)에 의하여 죽령산 기슭으로 옮기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세조실록에는 세조2년(1456, 병자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가 조선 8도에 34개 명산을 정하여 왕의 윤허를 받을 때, 죽령산이 포함되었고, 인조실록에 의하면 인조 12년(1634, 갑술년)에 충청북도 제천일대가 천재지변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자 왕명으로 예조가 웅진, 계룡산, 죽령, 양진에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조방장 유극량(劉克良), 단양군수 서희신(徐希信) 등이 죽령을 지켰고, 충청도관찰사 윤승훈(尹承勳)이 관방설치(1594.10.9.)를 건의했고,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1595.3.18.)이 나라의 요충지임을 왕에게 고했으며, 비변사의 파발로(擺撥路) 및 군량미 수송로 등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조선시대 죽령은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였다.
1960년대 죽령옛길 옆에 포장도로가 신설되어 영남의 물류가 서울로 넘나드는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최근(2001년) 중앙고속도로의 죽령터널(4.6km)이 생기면서 죽령고갯길은 옛날의 영화를 모두 잊어버렸다.
그러나, 옛날의 역사와 풍광이 그대로 담겨있는 이곳 죽령옛길은 지금도 묵묵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죽령 옛길 주변에는 보국사지라는 장육불이 남아있으며, 삼국시대 산성과 조선시대 봉수대터 등 역사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측 명품마을인 버들밭마을과 '죽령 생태공원' 방향 갈림길을 지나는데,
<버들밭마을>
버들밭마을은 해방 이전에는 99가구가 거주하며 화전민촌을 이루고 있었으나, 화전 정비 사업으로 대부분 인근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현재의 마을은 1939년 도청에서 목양장을 개설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병화로 없어진 자리에 들어섰고, 1975년에는 12 가구가 거주하였다. 고산 습지에 버들이 서식하였다 하여 버들밭 마을로 알려졌고, 현재는 국립공원 명품마을(옛 고개마을)로 지정되었다.
우측에 쉼터 정자와 '다자구 할매 설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다자구 할매 설화>
축령산신 다자구 할머니 설화는 축령산신당이 있는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마을에서 구전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어느 때인가 죽령에 도적이 많아 행인이 다닐 수가 없었다. 나라에서 이들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어떤 할머니가 나서서, 자기가 적굴에 가서 도적들이 잠이 들지 않았으면 '더자구야'라 하고, 잠이 들면 '다자구야'라고 할 테니, '다자구야'라는 소리가 들리면 쳐들어오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적굴에 들어가서 "더자구야, 더자구야" 외치고 다니자, 도적 두목이 이상하게 여겨 잡아다 물어보니, 자기 아들들을 찾느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적 두목은 이 말을 의심하지 않아 할머니는 적굴에 머물 수가 있었다.
어느 날 도적들은 두목의 생일을 축하하느라 큰 잔치를 벌이다 취한 나머지 모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다자구야"라고 소리쳤고, 그 말을 들은 관군은 일제히 습격하여 도적들을 모두 잡았다. 그런 다음 할머니를 찾았으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 할머니가 축령산신 임을 깨닫고, 축령산신을 '다자구할머니'라 부르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죽령산신 다자구할머니 설화')
이곳의 산신당은 상기 설화와 무관합니다. 설화의 산신당은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49-9에 있습니다.
-소백산국립공원사무소-
소백산에서 나는 산나물을 파는 가게를 지나,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진행하다가,
우틀하여 데크계단을 오르면,
죽령고갯마루 넓은 광장에 도착하여, 죽령옛길 유래 설명판과 죽령 명품마을 안내도가 있는 데크목 전망대에서 휴게소에서 사 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여유로운 쉼을 한다.
<죽령옛고개 명품마을>
죽령 옛고개 명품마을은 2012년 9번째 국립공원 명품마을로 소백산 자락 해발 700m에 위치한 산촌 마을입니다. 자연의 소중함과 역사 필요성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연의 소중함과 자연 속 동·식물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필요성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학습을 운영하고 있으며, 특히 식초체험교실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어 인기가 많습니다. 죽령 옛고개 명품마을은 탐방객분들이 다함께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며 때 묻지 않은 오지의 정과 풍광을 흠뻑 느끼고, 편안함과 행복감을 주는 마을입니다.
• 식초체험교실 및 특산품(발효식초, 꿀) 구매 문의 : 010-9299-4921
그늘이 드리워진 데크목 전망대에서 여유로운 쉼을 하는 백두들.
막걸리를 곁들인 30여분 간의 즐김을 뒤로하고,
좌측에 죽령산성 안내판과 충북의 마스코트인 '고드미'와 '바르미'가 반기는 죽령 정상으로 이동하여,
<죽령 산성(竹嶺山城)>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 1-13번지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죽령은 예부터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를 잇는 매우 오래된 길이다. 이곳에 위치한 죽령 산성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었으며, 문경새재와 함께 지형이 험하여 수비하기에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군사적 요충지였다. 현재는 군부대시설로 인해 전체 성곽의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토성 및 망루 흔적, 우물지 등 성곽 관련 유적들이 남아있다. 조선 후기 지리서인 《대동지지》에는 신라시대에 쌓은 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에는 임진왜란 중 선조 28년(1595년)에 비변사의 건의로 성을 쌓았다고 전하고 있어 조선 시대까지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이 산성은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으로 통하는 통로였으며, 서로 침공을 막아내는 관문에 해당하였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해발 700m에서 747m에 걸쳐 축조한 것으로, 그 시기는 449~450년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축되었는데, 내성은 석축(石築)으로 둘레 76m이고, 외성은 토축(土築)으로 둘레 385.5m이다. 약 2m 높이의 석축 전망대가 있으나 대부분 붕괴되었다.
우측의 '죽령' 표지석 앞에서 인증을 남기고,
<죽령(竹嶺, 696m)>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 고개 북동쪽에는 소백산이 있는데, 고개 대부분이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 때의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닦아서 '죽령'이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로도 삼국시대 당시 신라의 북쪽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자,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생명선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죽령이 고구려 남쪽-신라 북쪽 국경선이었고, 이는 진흥왕 때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빼앗는다. 이때 죽령 입구에 성을 쌓으면서 만든 비석이 단양 신라 적성비.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땅을 찾고야 말겠다"고 달려나갔다가 유시로 유명을 달리했을 만큼 고구려와 신라를 가르는 주요한 경계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김춘추가 연개소문과 교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을 때도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9주 5소경 행정구역을 구분할 때 원신라 영역(현 경상도) 상주와 원고구려 영역 명주, 삭주의 경계선이었다.
이후 김헌창이 세운 장안국의 판도에도 들어갔으나 김헌창의 장안국은 빨리 망해 이 중요한 지역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태봉에게 이 중요한 지역이 넘어갔으며, 이후 고려에게 계승되어 신라가 고려 상대로 상당히 불리한 처지의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바 있다. 다만 이 일대가 고려가 후백제군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는 통로로 자주 활용된 게 신라에겐 불행 중 다행. 고구려가 과거 신라의 종주국이 되었을 때 주로 죽령을 통해 지원군을 보냈는데, 고려가 죽령을 장악하면서 비슷한 구도가 사백 년 만에 다시 성립된 것. 다만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 과정 중 후백제가 아주 잠깐 죽령을 장악한 일이 일어났는데, 경북의 다른 주요 요지는 고려에게 넘어갔고 후백제의 다른 북쪽 국경 일대가 꽤 남하한 상황이라 신라는 또다시 위기를 벗어난다.
과거 영남대로 가운데서 우로(右路)의 고비에 속하는 곳으로 한양에서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로 통했다. 역사적으로도 여러차례 중요한 길목이었으나, 전근대 시절 충청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제1간선은 문경새재였고, 죽령은 제2, 제3간선의 역할을 맡았다. 예천 지역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6.25 전쟁때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민간인들을 많이 끌고갔는데 죽령 고개에서 폭격을 맞고 몰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북도 단양 땅을 뒤로하고 죽령 고갯마루를 넘으니,
장승이 여럿 서 있는 '백두대간 죽령' 표지석이,
그 옆에는 '영남관문 죽령' 표지석과 지금은 문을 닫은 '죽령 주막'이 자리하고 있고 맞은편에는 '죽령루'가 있는데,
'죽령 옛길' 설명판과 각종 플래카드와 현판이 세워져 있는 도솔봉 방향 들머리에서 옛 기억을 떠올려 보다가,
<죽령(竹嶺) 옛길>
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자리한 해발 689m[교통 표지판에는 696m로 표기]의 죽령은 《삼국사기》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 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 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祀]이 있다」고 했다.
유구한 유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에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하는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 470년경)까지이며, 신라는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 여덟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 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지이었음을 짐작할 만하다.
1910년까지도 경상도 여러 고을에서 과거를 보로 가는 선비와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 길을 이용했기에, 늘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길목마다 늘어서 있었다. [안내판 내용]
죽령은 역사서에 고갯길의 개척자와 시기가 명확히 기록된 아마도 유일무이한 옛 고갯길이다. 예부터 죽령은 문경새재,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권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영남 3대 관문으로,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을 잇는다.
죽령 옛길은 영주·안동·예천·봉화 등 경북 동북부 지역에 살던 백성과 관원,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던 선비들, 보부상 등이 주로 이용했다. 고개가 험준하고 마을과 떨어져 있어 나그네의 괴나리봇짐과 보부상들의 짐을 노리던 산적 떼가 들끓던 곳이라 고갯길 초입에는 주막들이 늘어서 사시사철 번잡했다고 전해온다.
이처럼 장장 2천 년의 유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 동남지역 교통 대동맥의 한 축이었던 죽령(竹嶺) 옛길은 한때 교통수단의 발달로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이 끊겨 역사의 애환을 간직한 채 수십 년 동안 숲과 덩굴에 묻혀 있었다. 1999년 영주시는 이 잊혀가던 영남 내륙을 이어온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는 뜻에서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1시간 정도(2.5km) 걸리는 길을 복원하면서 다시금 세상에 알려졌고, 복원한 옛길은 2007년에 명승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영주시 문화 관광 홈페이지]
남쪽 처마에는 '죽령루'라는 현판이, 반대쪽 북쪽 방향에는 '영남제일관' 현판이 걸려있는 누각에 올라,
죽령에 서린 퇴계 선생과 친형 온계 선생의 애틋한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쉼을 한다.
<퇴계 선생과 온계 선생의 애틋한 형제애>
퇴계 이황(1501~1570년) 선생은 풍기군수로 있을 때, 그 무렵 충청감사였던 친형 온계 이해(李瀣·1496~1550) 선생이 고향인 예안(지금의 안동)을 오갈 때 이곳 죽령에 주연을 마련하여 마중하고 배웅하였다. 당시 마중하고 배웅하던 죽령에 두 개의 대를 쌓았는데 동쪽을 잔운대(棧雲臺), 서쪽을 촉령대(矗泠臺)라 했다. 현재 그 터와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이해 선생은 이식의 아들 중 넷째이며 퇴계는 여섯째다. 여섯 형제 중 온계와 퇴계가 가장 훌륭해 이 두 형제를 금곤옥제(金昆玉弟), 금곤옥우(金昆玉友)로 높이 평가했다. 온계는 7세(퇴계는 2세) 때 부친이 작고해, 모친 박씨 부인의 슬하에서 자랐다. 엄격한 숙부 송재 이우로부터 글을 배웠다. 두 형제는 다른 형제와 달라서 유달리 학문에 뜻을 두었고 또 도학과 성현지도를 닦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우애가 남달랐다. 온계는 33세에 문과에 합격했고, 퇴계도 6년 뒤 급제했다. 온계는 1550년 을사사화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대사헌에서 물러나 귀양길에서 죽는다. 퇴계는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됐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70년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령주막>
향토음식점, 테라 푸드 지정점, 경북 향토음식연구 회원 업소로 2015년 영주 향토음식 경연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였고, 각종 매스컴에도 소개된 맛집이었는데,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다. 우리가 백두대간 왕복종주 길에 들러서 막걸리와 파전으로 힘듦을 잊고 담백한 헛제삿밥으로 시장기를 벗어난 곳이었는데, 지금은 문을 닫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죽령루를 뒤로하고 돌계단길을 내려서서 죽령옛길로 들어서는데,
'영남3대 관문, 죽령의 어제와 오늘' 안내판과 '송곳니 고라니' 안내판에 세워져 있고,
잘 정비된 죽령옛길을 따라 내려서는데,
주막 옛 터에 세워져 있는 '죽령 옛길 주막' 안내판을 지나게 되고,
<나그네의 쉼터, 죽령 옛길 주막>
죽령 옛길은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로써 당시 유생, 장사꾼, 나그네 등이 많이 이용하던 매우 큰길이었다. 그래서 이 길 곳곳에는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는 주막과 떡집, 짚신 가게 그리고 먹고 잘 수 있는 객점과 마방이 성업하던 주막거리가 크게 번성하였다.
죽령 옛길에는 당시 4개의 큰 주막거리가 있었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무쇠다리 주막거리(수철리 마을 어귀)를 비롯하여 과수원 끝에 위치한 '느티정 주막거리', 죽령 정상의 '고갯마루 주막거리'가 있었고, 그중 가장 규모가 작은 이곳이 '주점 주막거리'였다. (안내판 내용)
나그네에게 한없는 위안을 주었을 벤치가 자주자주 눈에 띄는 죽령옛길을 따라 내려서면,
낙엽송과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 군데군데에 '죽령옛길'에 서린 각종 설명판이 눈길을 끌고,
<'명현들의 자취' 설명판>
예안(禮安, 지금의 안동) 출신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刑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중종 37년(1542년) 76세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자,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는데, 당시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나귀에 술을 싣고 이곳 죽령까지 마중 나와 낙향(落鄕) 길의 이현보(李賢輔)를 맞았다.
높은 학식과 행덕(行德)으로 사림(士林)의 우러름을 받아 온 이들은 28년의 나이차(이현보가 많음)를 극복하고 뜻을 같이한 자별(自別)한 사이로, 여기 고갯길에서 배반(盃盤)의 자리와 함께 회포를 나누었다고 한다.
- 이현보(李賢輔) 시
草草行裝白首郞(초초행장백수랑) 초라한 행장으로 흰머리 날리며
秋風匹馬嶺途長(추풍필마령도장) 가을바람 속 필마로 죽령에 올랐네
莫言林下稀相見(막언림하희상견) 숲속에서 오랜만에 만났다고 말하지 말게나
落葉歸根自是裳(낙엽귀근자족상)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순리가 아니던가
- 주세붕(周世鵬) 시
飄飄歸興趁漁郞(표표귀흥진어랑) 가벼운 마음에 흥겨워 돌아오시는 님이여
直泝驪江玉帶長(직소려강옥대장) 한강 긴 물줄기 거슬러 올라 단숨에 오시어
今日竹領回首意(금일죽령회수의) 오늘 죽령에서 한양을 돌아보면 아쉽겠지만
乾坤萬古是綱常(건곤만고시강상)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만고의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침략과 수탈의 죽령>
고려 시대에는 왜구가 죽령을 넘어 단양 일대의 문화재와 물자를 수탈했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남아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이 길을 통해 문화재와 물자를 수탈해 갔으며,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죽령 주변의 울창한 조선의 소나무를 베어 갔다. 현재 주변을 둘러보면 소나무와 유사하면서 빨리 자라는 일본잎갈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들이 우리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심어 놓았다고 한다. [안내판 내용]
그러나 나무에까지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제의 프레임을 씌운 안내판은 의문이 드는데, 아래 기사 내용을 참고하면 좋겠다.
『잎을 간다고 하여 잎갈나무(이깔나무)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은 사계절 푸른 침엽수이지만 잎갈나무는 가을이 되면 붉은 색깔을 띠고, 낙엽이 지는 침엽수란 의미로 ‘낙엽송’이라 부르기도 한다. 잎갈나무는 뉴스에 한 번씩 오르내린 ‘일본잎갈나무’와는 또 다르다. 잎갈나무는 북한이 고향으로, 백두산에 울창한 원시림을 이룬 토종 한반도 나무지만, 애석하게도 국립수목원 광릉숲과 오대산 월정사 등 일부 인공조림한 지역을 제외하곤 남한에 자연산 잎갈나무숲은 없다. 남한의 잎갈나무는 거의 일본잎갈나무로 1904년에 들어왔다. 토종 잎갈나무가 북한에서도 북쪽의 추운 산지에서 잘 자라는 반면, 일본잎갈나무는 중부 이남에서 잘 자란다.
일본잎갈나무는 1960~1970년대에 정책적으로 많이 심었다. 잎갈나무와 달리 남한에서 잘 자라고, 줄기가 곧게 자라 전봇대나 철도목, 나무젓가락을 만드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나 한동안 이 나무가 이슈의 중심에 있었다. 일본이 원산지라는 부정적인 시각과 낮은 경제적 가치, 숲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이유에서 국립공원의 일본잎갈나무를 베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나무는 죄가 없다. 원산지는 일본이지만 100년 넘게 이 땅에 적응하며 우리나라의 나무로 거듭났으며, 빨리 자란 탓에 목재의 질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우리나라가 한창 성장할 때 그 많은 전봇대와 철도목의 재료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너무 빽빽하게 심은 탓에 햇볕이 땅에 닿지 않아 다른 식물이 자라기 어렵고, 뿌리를 수직으로 깊게 뻗지 않는 특성상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닥치면 연쇄적으로 쓰러져 산사태가 생길 위험도 있다. 효율성만 본다면 다 베어내고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새로 심는 것이 옳다. 그러나 다른 인공조림으로 다시 세운 숲도 몇십 년 후 또 다른 폐해를 불러올 수 있다. 비용과 시간이 들더라도 중간 나무를 적당히 솎아내는 방법으로 숲이 스스로 다양성을 찾도록 해야 한다.
일본잎갈나무는 지난 몇 십 년간 산소와 피톤치드를 내어주었고, 빠르게 거목으로 성장해 적재적소에 쓰이며 경제 성장에 이바지한, 한때 꼭 필요한 나무였다. 숲은 이해득실과 정치논리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월간 산, 19. 2.14, 일본잎갈나무를 위한 변론, 신준범 기자]
이내 죽령 옛길 주막 안내판과 널마루 그리고 등로 좌측에 허물어진 돌담 흔적만 남아있는 '주점 주막거리' 쉼터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죽령에 얽힌 저마다의 예기로 잠시의 여유를 즐긴다.
<나그네의 쉼터, 죽령 옛길 주막>
죽령 옛길은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로써 당시 유생, 장사꾼, 나그네 등이 많이 이용하던 매우 큰길이었다. 그래서 이 길 곳곳에는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는 주막과 떡집, 짚신 가게 그리고 먹고 잘 수 있는 객점과 마방이 성업하던 주막거리가 크게 번성하였다.
죽령 옛길에는 당시 4개의 큰 주막거리가 있었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무쇠다리 주막거리(수철리 마을 어귀)를 비롯하여 과수원 끝에 위치한 '느티정 주막거리', 죽령 정상의 '고갯마루 주막거리'가 있었고, 그중 가장 규모가 작은 이곳이 '주점 주막거리'였다. [안내판 내용]
<죽령 옛길 주막>
주막은 시골 길가에서 밥과 술을 팔거나, 돈을 받고 나그네를 묵게 하는 집이다. 죽령은 옛날 경상도 북부지역과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많은 길손이 이용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주막에서 묵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큰 고개나 나루터에는 으레 주막이 있었다. 주막들이 있는 길거리를 '주막거리'라 불렀는데, 이곳 죽령에도 주막거리가 많았다. 가장 규모가 컸던 '무쇠다리 주막거리'(수철리 마을 어귀)를 비롯하여 '고갯마루 주막거리', '느티정 주막거리', 그리고 이곳 '주점 주막거리'가 대표적이다. 일제 강점기에 국도와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죽령 옛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적어지자 주막도 없어지고 말았다. 빈 주막터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새소리, 계곡의 물소리가 옛날 이 주막에서 긴 여정의 피로를 풀며 고갯길을 지나던 길손들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듯하다. [안내판 내용]
'죽령 옛길 주막거리' 쉼터를 뒤로하고 잠시 내려서니,
'신종(神鐘)이 보인 이변' 설명판이 있는 쉼터를 지나게 되고,
<'신종(神鐘)이 보인 이변(異變)' -스토리텔링->
조선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를 원당사찰(願堂寺刹: 왕실 수호 사찰)로 정하고, 설치할 종으로 전국에서 가장 우렁차고 맑은 소리를 내던 안동 대도호부(大都護府) 남문루의 종을 선정하였다. 왕명에 의해 예종 1년(1469년) 수백 명의 군인과 소, 말들이 무게 3,379근(약 2톤)의 종을 오대산 상원사로 운반하던 중 죽령에 다다르자 갑자기 이 종이 구슬픈 소리를 내면서 종을 실은 수레가 움직이지 않았다.
종 운반 책임자인 운종 도감(運鐘都鑑)은 오랜 생각 끝에 '이 종이 고향을 떠나기가 서러워서 그런가?'라고 생각하여 종유(鐘乳) 하나를 떼어 안동도호부 남문루 밑에 묻고 제사를 지내고 나니 종이 소리를 멈추고 수레가 움직였다고 한다. 지금도 오대산 상원사 동종에는 종유 하나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판 내용]
『경상도 안동의 역사지인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안동의 어느 절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이 있었는데, 나중에 안동도호부의 남문 누각으로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원사가 왕실의 원찰이 되어 종을 설치하여야 하는데, 새로 종을 만들려면 시간과 돈이 많이 소요되므로 전국에서 가장 좋은 종을 구하도록 왕명이 떨어졌고, 이때 안동 남문의 종이 선택되어 죽령을 넘어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종을 힘들게 운반하여 이곳 죽령을 넘다가, 아마 가파른 고색실에서 종이 마차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다. 이때 종의 상단부에 있는 종유가 하나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이 일을 맡은 관리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터이다. 이때 재치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내었을 것이다.
"고개를 넘다가 쉬는데 종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꼬? 그 이유를 알아본즉 이 종이 옛 고장 안동을 떠나기 싫어서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종의 젖꼭지를 하나 떼어 안동으로 보내도록 하지. 그리하니 종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라"라는 것이다. 참 그럴듯한 유추이다. 상원사 종을 보면 36개 종의 젖꼭지 중 하나가 부족하다고 한다.』
벤치가 있는 죽령옛길을 따라 잠시 더 내려가자 죽령의 산신 '다자구 할머니' 안내판을 지나게 되고,
<죽령의 산신 '다자구 할머니'>
- 다자구 할머니를 여성 신격으로 모신 충청북도 단양군 용부원리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신화.
죽령 일대에는 도적 떼 소굴이 곳곳에 있어 지나가는 행인을 상대로 도적질 하고, 심지어는 공납물조차 노략질을 당하는 일도 있어서 단양 군수가 곤경에 처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도둑을 잡을 수 있는 묘안이 있으니, 인근 군에서 군사들을 지원받아 도적 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단양 군수에게 청하였다. 단양 군수가 할머니의 말에 따라 가까운 풍기, 영춘, 청풍의 수령에게 도움을 청하여 군사를 지원받아 매복시켰다. 할머니가 ‘다자구야!’ 외치면 도적 떼가 잠을 자고 있는 신호요, ‘들자구야!’ 외치면 도적 떼가 자지 않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신호로 알라는 묘책을 내놓고는 도적 소굴 근처에서 “다자구야, 들자구야!” 하며 외치고 다녔다.
도적 떼가 웬 소리냐고 묻자 할머니가 말하기를 “나에게 아들이 둘이 있는데 큰아이는 다자구요 작은 아들은 들자구인데, 두 아들이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 찾아다닌다.”라고 하니, 도적들이 의심하지 않고 도적 소굴에 같이 머물게 하였다. 어느 날 두목의 생일을 맞아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신 도적들이 취해서 곤히 잠들자 할머니는 “다자구야!” 하고 외쳤고,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한순간에 도적 떼를 잡았다. 한편, 궁중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보상하고자 할머니를 찾았지만 결국 못 찾았다. 어느 날 임금의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 연을 띄워 연이 떨어진 곳이 내가 자리 잡을 곳이라고 알려 준다. 그곳이 지금의 '죽령 산신당' 자리이다. 그 후 다자구 할머니는 신으로서 영험함을 보이고, 점차 지역민들은 신앙 대상인 '죽령 산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길손들이 오며가며 하나씩 더한 돌이 쌓여 만들어진 돌탑을 지나 죽령옛길을 따라 내려가면,
앞쪽으로 시야가 트이며 죽령의 개척자 '죽죽(竹竹)'에 대한 자세한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죽령의 개척자 '죽죽(竹竹)'>
다양한 야생화들이 피는 죽령옛길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王) 5년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이사금 5년에 신라의 죽죽(竹竹)이 왕명을 받아 죽령 길을 만들고 기력이 다해 숨졌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사당은 사라지고 없으나 죽죽을 기리기 위해 옛사람들이 이 길 이름을 '죽령(竹嶺)'이라고 불러왔다. (안내판)
<신라의 명신 죽지>
신라 중대의 명신 술종(述宗)은 삭주 도독사(朔州都督使, 강원 영서 지방 장관)로 임명받아 기병 3천여 명을 거느리고 부임하는 길에 이곳 죽지령(지금의 죽령)을 넘다가 고갯마루에서 길을 닦고 있던 한 거사(居士)와 이야기를 나누다 뜻이 맞아 서로 친구가 되기로 하고 헤어졌다.
술종은 부임한 후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밤 그 거사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부인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죽지령에 사람을 보내 거사의 안부를 확인해 보니 그 꿈을 꾸던 날 거사가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종은 성의를 다해 죽지령에서 거사의 장례를 치르고, 이후 부인이 아들을 낳자 그 거사를 기려 '죽지(竹旨)'라 지었다. 그 후 죽지랑은 화랑으로 성장하여 김유신과 함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고, 진덕왕에서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신라 번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효소왕대 죽지랑조(孝昭王代竹旨郞條)》에 실려 전해져 오는 '慕竹旨郞歌(모죽지랑가)'는 당시 화랑이었던 득오곡(得烏谷)이 악덕 관료에게 끌려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죽지(竹旨)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자, 죽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지은 시[향가]이다.
완만한 내림길을 따라 사과나무 과수원을 지나,
옆으로 맑은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널찍한 농로를 내려서니,
앞쪽으로 중앙고속도로 죽령교가 시야에 들어오며 커다란 '죽령 옛길' 안내판과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하늘 배경의 중앙고속도로 죽령교를 향하여,
'중앙고속도로'의 '죽령교' 아래로 지나게 된다.
이제 옛길이 아닌 현대의 포장도로를 따라,
종착지인 희방사역이 300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아고라 쉼터를 지나고,
무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장승들의 환영을 받으며,
'무쇠달다방'이란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오는 '희방사역'에 도착하여,
한여름날에 도전한 소백산자락길 4, 3자락 트레킹을 마감한다.
'희방사역 주차장'이란 검색에 두 곳의 주차장이 검색되는데,
희방사역이 아닌 희방사 앞 '희방3주차장'에서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가,
이내 도착한 버스에 올라,
소백산풍기온천리조트로 이동하여 땀을 씻고,
인근의 '신대성참숯불구이'라는 식당에서 푸짐한 뒤풀이 시간을 즐기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자리를 옮겨,
'밝은 대낮에 집에 들어가면 혼난다'며 션한 호프로 밤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오늘은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다며 혼날 위험을 무릅쓰고 집으로 향한다.
둘레길을 순서대로 정방향으로 진행하던 역방향으로 진행하던 그냥 걷는 것은 동일하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역방향으로 진행을 하다보니 약간은 손해라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역방향으로 걸으며 죽령옛길을 다 걷고 나서야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나올 때면
안내판을 먼저 읽고 걸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인생도 정방향으로 사는 게 조금은 더 나은 게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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