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4년

지리산둘레길 1, 2코스(주천~운봉~인월) : 평화가 깃든 동편제의 고장 운봉고원

by 재희다 2025. 1. 16.


산 행 지 : 지리산둘레길 1, 2코스(주천~운봉~인월) 남원시 주천면,  운봉읍, 인월면.

산 행 일 : 2024. 11. 23.(토)
산행코스 : 주천면~내송마을(1.1km)~구룡치(2.5km)~회덕마을(2.4km)~노치마을(1.2km)~가장마을(2.2km)~행정마을(2.2km)~양묘장(1.7km)~운봉읍(1.4km)~서림공원(0.2km)~북천마을(0.8km)~신기마을(1.1km)~비전마을(2km)~군화동(0.8km)~흥부골자연휴양림(2.9km)~월평마을(1.5km)~구인월교(0.2km)  (1코스 14.7km + 2코스 9.5km = 24.2km, 8시간 소요)
산행참석 : 20 백두.
 
▶ 1코스(주천-운봉, 14.7km)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7km의 지리산둘레길.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너른 들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이 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있는 구간이다. 회덕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남원장으로, 노치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은 운봉장을 보러 다녔던 길이다. 특히 10km의 옛길 중 구룡치와 솔정지를 잇는 회덕~내송까지의 옛길(6km)은 길 폭도 넉넉하고 노면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솔숲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 2코스(운봉-인월, 9.5km)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5km의 지리산길. 운봉-인월 구간은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9.9km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성지, 송흥록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산행지도>

 

 

지난여름 장마철에 지리산둘레길 3코스인 인월~금계 구간을 걸었기에 올해가 가기 전에 1, 2코스인 주천~운봉~인월 구간을 걷기로 하고 2024년도 마지막 산행이 될 금번 산행에서 지리산둘레길 1, 2코스를 걷기로 한다. 누군가 '1, 2코스를 올해 꼭 걸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올해의 산행기를 정리하면서 앞 뒤가 가지런히 배열되는 게 좀 더 보기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래봤자 별반 달라지는 게 없기는 하지만..  

 

 

11월 말이면 겨울로 접어들었다고 봐야 하는데 비교적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고, 대부분의 둘레길이 그렇듯이 이번 구간에도 마을과 면소재지를 경유하게 되므로 매점이나 카페 등이 있어서 트레킹에 대한 별다른 부담감을 느끼지 않은 채 산행일을 기다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주차장 문제로 지리산둘레길 1코스 출발지에서 300m 떨어진 남원시 주천면 호경교차로 옆에 주차한 버스에서 두 시간여의 쪽잠을 더 청하다가 일어나 산행 준비를 하여, 

 

정령치로를 따라 지리산둘레길 1코스의 출발지인 지리산둘레길 남원주천안내센터 방향으로 이동, 

 

장안교를 건너 주천면 외평마을의 지리산둘레길 남원주천안내센터 앞의, 

 
 '여기서부터 남원 지리산둘레길 제1코스(주천~운봉) 시작점입니다'라는 표지판 있는 곳에서, 

 

<원터마을(외평) 유래>

1300년경 채씨(蔡氏)와 정씨(丁氏)가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조 이래 조선말기까지 응양(현재 이백면 효기리)에서 원님이 말을 갈아타고 이곳 현 파출소 앞에서 일단 쉬어가는 곳이어서 원터거리라 하였는데, 경치가 수려하여 감탄을 자아낸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 때부터 교통의 중심지로서 국가에 납품하는 물자를 생산해낸 지역(원부곡)이었으며 조선조 말까지 원천원(元川院:국가에서 운영하는 숙박업소)이 있었다. 1885년(고종 22년)에 현 중앙지로서 위치를 정하고 하원천방(下元川坊)의 소재지로서 원터라는 마을명칭으로 불린다. 
마을이 내방(內坊)과 외방(外坊)으로 나누어 있었으며 내방은 물이 많아 근심이 없다 하여 무수(無愁)라 불리고, 외방은 땅이 건조하여 들의 대부분이 밭으로 구성되어 밭들, 밖들이라고 부르다 외방 외(外)자와 밭들의 전평(田坪) 평자를 따서 외평으로 바뀌었다. (외평은 원래 마을이 배모양 같다고 하여 뱃들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지리산둘레길 1, 2코스(주천~운봉~인월) 트레킹 출발에 앞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박수' 모양의 지리산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작은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 

 

지리산 둘레권역 안내도가 있는 지리산둘레길 홍보관을 지나고, 

 

원천천을 건너는 데크목교 아래에는 징검다리도 보이지만, 

깜깜한 밤이라 안전한 데크목 다리로 건너, 

 

키다리 소나무가 가로수로 심긴 장백산로에 접속하여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대성쉼터' 앞의 지리산둘레길 안내판을 따라 우틀하여 내송마을 방향 소로로 들어선다. 

운봉 고원을 향해 2km 가량의 오르막 구간 안내판
아직 곤한 잠에 취해있는 대성쉼터

 

 

 

내송마을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돌아본 주천면 원터마을 방향

 

내송마을 와등(臥嶝) 삼거리에서 우측 육모정 방향을 두고 좌측 개미정지 방향으로 들어서서,  

 

<내송마을(안솔치)>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한양 조(趙)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후로 경주 김(金)씨, 서산 류(柳)씨 등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30여 호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에는 뒷산 고개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쇠고개, 우치동으로 불렸으나 마을 주변에 송림이 무성하여 솔고개로 불리다 내송(內松)이 되었다. 내송마을에는 두꺼비를 닮은 바위처럼 생긴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남아 있어 복을 가져다주고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이곳 출신 조경남(趙慶南) 장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가 남긴 일기인 <난중잡록>은 지방유형문화재로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내송마을 버스정류장에는 화장실이 있고, 해발 500m 내외의 운봉고원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안내판이 있다.

 

완만한 오름길 농로를 따라 잠시 더 진행하면, 

돌아본 주천면소재지 원터마을 방향

 

차단시설과 각종 안내판과 이정표가 늘어선 고목(서어나무) 숲 쉼터인 '개미정지'에 도착하는데,  

 

<개미정지> 

'개미정지'의 '정지'는 '쉼터'라는 뜻으로, '개미정지'는 '개미 쉼터'라는 의미이다.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 장군은 이곳 내송마을 출신이었는데, 근처 지리를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던 장군의 활약으로 왜군들은 큰 낭패를 보고 있었다. 어느 날 장군이 이곳 쉼터에서 고단한 몸을 잠시 뉘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발뒤꿈치가 따끔하여 깨어나 보니 개미가 발을 깨물고 있었다. 그때 왜군들이 내송마을 앞까지 쳐들어오고 있었는데 개미의 도움으로 큰 화를 면할 수 있었고, 그 뒤부터 이곳 쉼터를 개미정지(개미쉼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남원장을 보러 가던 이들도 이곳에서 무거운 보따리를 풀어놓고 쉬었다 가고, 나무를 한 짐 하여 오던 마을 사람들도 이곳에 지게를 잠시 내려놓고 쉬어 간 곳이다. 

 

이곳 개미정지에서 구룡치까지 약 1.8km는 400m 정도의 고도를 높여야 하는 오르막 산길이 이어지게 된다. 

 

 

 

개미정지를 지나자 돌계단도 나타나며, 

 

제법 가파른 소나무숲길을 오르는데, 

 

둘레길이라 렌턴을 두고 온 용현 형님이 낙엽 덮인 돌계단길을 뒷사람의 불빛에 의지해 조심스레 오르고 있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따르던 앞사람의 궁둥이가 멀어지는 바람에 숲속을 헤매는 분들의 외침에 응답하기도 하면서, 

 

서로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며 함께 협력하여 캄캄한 급경사 오름길을 오르면, 

 

통나무 벤치와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지능선 쉼터를 지나게 된다. 

 

 

 

쉼터에서 진행 방향으로 이어진 임도를 잠시 따르다가 좌측 돌계단 숲길로 들어서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벤치가 있는 또다른 고갯마루인 솔정지(똥재)를 지나게 되고, 

 

<솔정지(솔정자)>

정지가 쉼터라는 뜻이므로, 소나무 쉼터라는 의미다. 즉, 솔정지는 20여 년 전만 해도 나무하러 지게를 지고 가다가 고개를 오르기 전에 땀을 식히고 주천 들녘과 멀리 숙성치와 밤재를 바라보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던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숙성치를 넘어 남원성을 향하는 왜군을 향해 조경남 장군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한다.

 

돌계단이 연이어지는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데, 

 

돌아본 소나무 가지 사이로 잠시 전에 출발했던 주천면 원터마을 야경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고, 

 

갈비가 수북이 쌓여 푹신하게 느껴지는 오솔길을 잠시 더 올라, 

 

이정표와 벤치가 있는 구룡치에 도착하여 잠시 여장을 정비하며 쉼을 하는데, 

 

<구룡치(九龍峙)>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구룡계곡을 넘어가는 고개여서 붙여진 이름인데, 주천면의 여러 마을과 멀리 달궁마을에서 남원장을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달궁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너무 멀어 남원 장에 가려면 2박 3일에 걸쳐 다녀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룡치를 장길로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백중 (음력 7월 15일) 이 지나면 마을별로 구간을 나누어서 길을 보수하여 왔는데, 지금도 길 옆에 돌로 축대를 쌓아 놓은 곳 등이 남아 있어서 예전의 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개미정지에서 이곳 구룡치까지 약 1.8km가 가파른 오르막길이라면,

구룡치를 지나서부터는 고저차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 1코스 종점인 운봉까지 이어지게 된다. 

구룡치 벤치 쉼터

 

 

 

등로 좌측의 봉분이 낮아져 편안해 보이는 풍천노공묘처럼 완만하게 내려가는 소나무숲길을 따라, 

 

우측 구룡폭포 방향 갈림길에서 직진의 좌측 등로로 진행하여, 

 

「사랑은 하나이어라」라는 표지판을 달고 있는 연리지(連理枝) 소나무를 지나게 되는데, 

용(龍) 형상을 닮아 「용 소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사랑은 하나이어라>  - 글 유영근(소설가) - 
두 소나무가 서로 접목된 이 연리지(連理枝) 나무는 일심동체로 남녀 이성간의 화목은 물론 깊은 애정도 그려주고 있으며 또한 비상(飛翔)하려는 용의 형상을 지니고 있어서 이 명품 용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거나 소원을 빌면 모든 이들의 행운과 건강이 오래오래 이어진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백두대간 천 세월 묻어둔 이야기로 
아낌없이 몸 비비 싹틔운 정 
산속에 잠제운 그 사랑노래 늘 아름답구나

-  남원시 -

 

소나무의 작은 가지가 용틀임하듯 꼬여 큰 둥치를 휘감아 올라 한 몸이 되는 희귀한 연리지 (옛 사진 펌)

 

 

 

두세 차례 작은 지계곡을 건너고, 

 

우측 멀쩡한 도로로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걸린 갈림길을 지나, 

 

등로 우측 '정자나무쉼터 안내판'의 메뉴를 전화로 주문해 놓으면 잠시 후 쉼터에서 바로 먹게 될 듯하고, 

 

등로 우측의 '사무락 다무락'이라 적힌 지리산 첫길 이정표를 지나는데, 

 

<사무락 다무락>
'사무락 다무락'의 '사무락'은 '바램/사망(事望)', '다무락'은 '담벼락의 남원 말'​이 운율에 맞춰 변천된 것으로, '소망을 비는 돌담 또는 담벼락'이라는 말이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무사함을 빌고 액운을 막아 화를 없애고자 지날 때마다 돌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사무락 다무락' 이정표 곁에는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와 성황당 돌무더기가 자리하고 있다. 

 

 

 

여명이 스며드는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지리산옛길 454' 이정표(←주천 6.1km, 운봉 9.0km→)를 지나 편안한 솔숲길을 내려서면, 

 

시멘트 포장임도를 건너 직진의 능선길로 표지기들이 길안내를 하고 있는데, 

 

좌측 벤치 뒤로 보이는 백두대간의 수정봉 아래에는 회덕마을이 평화로워 보이고, 

 

<회덕마을>
회덕마을은 임진왜란 때 밀양 박(朴)씨가 피난 와서 살게 된 것이 마을을 이룬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마을 이름을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 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고 불렀다. 그 뜻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곳에 모아 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둘레길 따라 잠시 내려서니 앞쪽으로 운봉고원 들판이 펼쳐지는데,

바로 앞 비닐하우스는 폐업한 '임금댁쉼터'이고, 내림길에 본 차림표의 '정자나무 쉼터'는 도로 건너편에 있다. 

 

 

 

폐업한 쉼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비닐하우스 앞을 지나, 

 

좌측의 백두대간에서 우측으로 흘러 구룡폭포를 만들고 원천천으로 흐르는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 

우천으로 징검다리가 범람할 때는 우측으로 우회하라는 안내판
동쪽 덕치리 방향 운봉고원 조망

 

우측 논둑길을 따라 도로에 접속하여 좌측 운봉읍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정자나무 쉼터' 앞 도로 접속지점에는 차단기를 비롯한 각종 안내판과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지리산둘레길에서 구룡폭포 순환코스가 갈리는 지점임을 알리는 빛바랜 안내판과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안내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이순신장군은 경남합천으로 백의종군하던 도중, 1597년 4월 25일 운봉(박룡 혹은 박산취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이때 권율도원 수가 전남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음 날 아침 구례로 항합니다. 구례로 가기 위해서는 여원재로 되돌아가 주천을 거처 갈 수 있겠으나, 이곳에서는 남원의 아름다운 지리산둘레길 '운봉~주천' 구간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여원재로 되돌아갈 경우, 이백면사무소로 내려서면 약 4km 거리에 주천면 외평마을이 있습니다. -남원시-

 

도로 건너편 둘레길 화장실 뒤편이 '정자나무 쉼터'

 

 

 

좌측 도로를 따라 우측의 '미륵정사' 표지석을 지나는데, 

 

좌측 회덕마을 방향으로 '덕치리 초가'로 표시된 유일하게 남아있는 회덕마을 샛집이 보이고, 

 

<회덕마을 샛집(덕치리 초가)>
회덕마을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 곳에 모아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는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 불렀다.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아 짚보다 억새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때는 마을 전체가 억새풀로 지붕을 이은 ‘샛집’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예전에는 샛집이 부잣집이었고 초가집은 가난한 집이었다고 한다. 고원지대인 운봉에는 폭설이 자주 내리니 용마루를 높이고 지붕을 경사지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숨어든 왜군 패잔병들이 처음 샛집을 짓고 살았다고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일본의 전통가옥(합장집)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지도에는 '덕치리 초가'로 표시되어 있고 ‘구석집’이라 불리는 마을 안쪽 귀퉁이의 초가집은 1895년에 지은 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전쟁 후에 다시 지었다. 이 ‘덕치리 초가’는 조선시대 형식의 샛집으로 전라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구석집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집 앞 논밭 너머로 지리산의 줄지은 봉우리가 펼쳐진다. 둘레길에서 아주 살짝 비껴 있지만, 아기자기한 샛집도 둘러보고 잠시 다리쉼을 하고 가도 좋다.

 

좌측 고리봉에서 바리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 너머에서 퍼지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묘지를 지키는 굽은 소나무숲 직전에서 따르던 도로를 두고 좌측 농로로 진행하다가,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하염없이 차도를 따르다가 '백두~"라는 외침에 수확이 끝난 논을 가로질러 복귀한...

 

정면 백두대간이 지나는 수정봉 아래 노치마을을 향해 진행한다.

 

 

 

지리산 서북능선이 멋지게 조망되는 노치마을 앞 벤치 쉼터를 지나, 

 

고리봉에서 한껏 고도를 낮춘 백두대간이 수정봉을 향해 노치마을로 들어서는 백두대간에 접속하여, 

 

좌측 노치마을로 들어서다가, 

노치마을 입구에서 마을회관 옆 도로를 따라 수정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을 두고 우틀하여, 

 

<노치마을>

노치마을은 해발 500m의 고랭지로서 서쪽에는 구룡폭포와 구룡치, 뒤에는 덕음산이 있고 지리산의 관문이라고 말하는 고리봉과 만복대를 바라보고 있다.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여 있어 ‘갈재’라 부르기도 했다. 노치마을은 비가 내려 왼쪽 주천면으로 빗물이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 운봉읍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수분령(水分嶺) 마을이다. 그러나 일제가 백두대간의 목을 눌러 기운을 끊는다고 이 마을 앞 들녘에 큰 구덩이를 파고 100kg이 넘는 거대한 목돌 6개를 설치했다는 참담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는 목돌 5개를 파내어 아랫 당산(큰바위) 위에 지어진 마을회관 옆에 모아두었다. ‘목조임돌’ 또는 ‘잠금돌’이라고도 하는 이 목돌은 일제의 간교함을 증언하는 역사적 유물이다. 그 옆에는 백두대간 표지석이 있다. 노치마을 윗 당산 소나무숲의 수령 800년 된 할아버지 나무께서 이 마을을 수호하고 백두대간의 정기를 지켜주시기를 빌어 본다.

 

2004. 11. 13. 백두대간 작운고리봉 아래 헬기장에서
2015.10.24. 대간남진 때의 수정봉 인증

 

2004년 11월 13일 지리산 산행이라며 멋도 모르고 참석한 백두대간 길의 추억을 떠올리며, 

노치마을 회관 앞에서 백두대간길과 헤어져 우측 버스정류장과 돌탑이 있는 길로 들어서서, 

노치마을 앞 버스 승강장과 돌탑

 

마을 앞 넓은 농로를 따라 노치마을을 뒤로한다.

'백두대간 생태교육장'과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안내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이순신장군은 경남합천으로 백의종군하던 도중, 1597년 4월 25일 운봉(박룡 혹은 박산취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이때 권율도원 수가 전남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음 날 아침 구례로 향합니다. 구례로 가기 위해서는 여원재로 되돌아가 주천을 거처 갈 수 있겠으나, 이곳에서는 남원의 아름다운 지리산둘레길 '운봉~주천' 구간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여원재로 되돌아갈 경우, 이백면사무소로 내려서면 약 4km 거리에 주천면 외평마을이 있습니다. -남원시-

 

 

 

노치마을을 뒤로하고 시멘트포장 농로를 따르다가, 

우측 지리산 서북능선 조망

 

이정표를 따라 진행하던 포장농로를 두고 좌측 논두렁길로 들어서니, 

 

요즘은 농부들도 걸어다니지 않는데,

얼마나 많은 둘레길 트레커들이 지나다녔는지 논두렁길이 움푹 패어 있고, 

 

이내 덕산저수지 옆 산사면 호젓한 숲길을 따르는데, 

우측 덕산저수지 전경

 

빠른 걸음에 시장끼가 돈 분들이 푹신한 낙엽길 위에 식당을 차리고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면경같은 덕산저수지 전경
나무꾼이 선녀와 아이들을 위해 매어 놓은 그네일까?

 

 

 

먼저 식사를 끝내고 '선입선출'이라며 떠나버린 분들을 뒤쫓아 호젓한 숲길을 따르다가, 

 

수확을 끝낸 논과 덕산저수지가 보이는 농로로 접어들어, 

 

최근에 지어진 듯 보이는 통나무집 외딴 농가주택을 지나, 

우.후방 고리봉과 만복대 방향

 

따르던 농로를 두고 우측 숲길로 진행하라는 이정표가 있는 질매재/질미고개에서,

우틀하여 '소나무숲 쉼터' 차림표가 있는 돌계단을 올라, 

 

잠시 호젓한 소나무숲길을 따르면, 

좌측 운봉읍 방향

 

등로 좌측에 잘 조성된 동복오씨 가족묘원이 나오며, 

 

묘원 아래 입구에는 팔각정(心修亭)과 이정표를 비롯한 동복오시 후손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동복오씨 배항표와 후손의 시비
정자에서 본 서쪽 덕산저수지 조망

 

팔각정 옆에는 무인 매점이 있지만, 잠시 전에 아침식사를 한 터라 못본체 그냥 지나쳐, 

 

동복오씨 가족묘원 진입로를 따라 나가면, 

 

'동복오씨 묵재공파 우암공 가족묘원' 표지석을 지나게 된다. 

 

 

 

도로를 따라 가장마을을 스치듯 지나, 

우측으로 보이는 가장마을 쉼터

 

둘레길 화장실도 있는 가장마을 쉼터를 지나고, 

 

<가장(佳庄) 마을>
가장(佳庄)마을은 풍수지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아름다울 가(佳)' 자에 '단장할 장(粧)' 자를 써서 가장리(佳粧里)라 불렀는데, 지금은 들녘에 농사짓는 움막 터를 뜻하는 '농막 장(庄)' 자를 써서 가장리(佳庄里)로 쓰고 있다. '아름답게 단장하는 선녀의 마을'이 '아름답게 농사짓는 움막 터의 마을'로 바뀌게 된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장마을이 '옥녀봉 아래에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玉女織錦)의 천하명당'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마을이 뱀 형국으로 마을 앞에 입석을 세워 뱀의 기를 눌러 마을의 액 막음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300여 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동복 오(吳)씨와 강릉 유(劉)씨라고 하며, 그 후 창녕 조씨와 김씨, 박씨 등이 입주하게 되었다.

 

오석의 '가장마을' 표석이 있는 운봉로에 접속하여 좌틀하여 진행한다. 

돌아본 가장마을 쉼터 방향

 

 

 

2차선의 한적한 도로를 따르다가, 

 

우측 덕산마을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덕산마을 버스정류장 옆으로 이어진 주촌천 제방길로 들어서서, 

우측 덕산마을 표지석

 

벚꽃이 피는 봄에 오면 더욱 좋을 듯 보이는 시멘트 포장의 주촌천 제방길을 따르고, 

 

'운봉로' 도로에 합류하여 우측 주촌천을 넘는 가장교를 건너서, 

 

바로 좌틀하여 다시 추촌천 제방길로 들어서고, 

 

이제는 주촌천 우측 제방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직진의 제방길을 두고 우틀하여 진행한다. 

 

 

 

행정마을로 들어서서 행정리회관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접속하여 좌틀하여 진행하면, 

 

서어나무숲 안내판이 있는 행정마을 회관을 지나게 되고,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안내>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이곳 행정마을은 거대한 지리산 자락을 따라 흩어진 120개 마을을 이어 주는 트레킹 코스 21개 코스 중 2코스 구간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안쪽으로는 마을사람들에 의해 조성된 200년 수령을 가진 100여 그루의 서어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서어나무 숲은 2000년에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받았고, 2022년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생태녹생 관광지로도 선정이 되었다.  -남원시-

 

 

좌측에 누각 쉼터와 맞은편 커다란 노거수 아래에 '창녕조씨 효자 정문' 비석을 지나, 

창녕조씨 효자 정문

 

<창녕조씨 효자 정문 관련 전설>
효자비가 세워진 시기는 비문이 오랜 풍우에 마모되어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다. 1922년에 발간한 운성지(雲城誌) 기록에 의하면 효자 조석상(曺錫祥)은 창녕 사람으로 본도 선비의 추천을 받아 윤허를 얻어 정려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어 건립 시기는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5대 손 조윤근(58세)씨에 의하면 5대조 조석상씨의 모친 동복 오씨가 고질병에 걸리자 본인의 허벅지 살을 베어 인육봉양으로 병을 낫게 하여 효자 교지를 받았다 한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비만 서 있는 이곳에 창녕 조씨 가문에서는 풍우로 인한 비문의 마모를 막기 위해 비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자 부락에 재난이 일기 시작하였다. 원인 모를 이유로 친족들이 연이어 비명횡사하고, 부락에 잇단 화재가 발생하여 가옥 8채가 불타는가 하면, 밥을 지으려 마루에 내어놓은 쌀바가지에서 쌀이 벌레처럼 기어나가고, 병든 아이의 병이 낫기를 빌던 떡시루가 날아가 처마 밑에 붙었다 떨어지고, 저녁밥을 푸기 위해 솥뚜껑을 열려고 하자 솥뚜껑이 밑으로 빠져 밥을 푸지 못하게 하는 등 온갖 해괴한 일들이 꼬리를 물자 동네 사람들은 비각을 뜯어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영험한 무당을 통해 원인을 알고 보니 그 비석을 세운 자리가 도깨비 혈인지라 집을 지으면 도깨비들을 노하게 하여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행정 마을은 도로를 경계로 비석이 서 있는 도로 동쪽에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돌아본 행정마을 전경

 

'람천'을 넘는 행정교를 건너며 바로 좌틀하여, 

우측 지리산 서북능선 방향
좌측 고남산 방향의 람천 하류 방향

 

람천 우측 제방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좌측 서어나무숲으로 이어진 람천을 건너는 다리가 보이고, 

 

다리를 건너면 들판 한가운데에 자리한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앞에 서게 되는데,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은 수령 200년이 넘은 64그루의 나무가 숲을 이룬 곳으로,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고자 조성된 인공 숲으로 2000년 11월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 숲' 부문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남원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은 2000년 11월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 숲' 부문 대상을 수상한 곳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200여 년 전 조성한 인공 숲으로 100여 그루의 서어나무가 모여 있습니다. 숲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약 100여 그루의 서어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항상 15℃ 안팎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 여름철에도 냉방기를 들여놓은 것처럼 시원합니다. 

서어나무(Carpinus laxiflora)는 ? 
자작나무과 낙엽교목으로 수피는 회색이고 근육질의 울퉁불퉁한 줄기를 가지며 잎은 어긋나고 길이 5.5~7.5cm의 타원 모양 또는 긴 달걀 모양이며 끝이 길게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겹톱니가 있으며 뒷면 맥 위에 털이 있습니다. 숲이 변해가다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안정된 상태인 극상림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나무입니다.  -남원시-

 

 

서어나무는 우리나라 온대림의 극상림 중의 하나다. 극상림은 식물이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적당한 습도, 온도에서 가장 안정된 식물군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데, 서어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에서는 어떤 나무도 자랄 수 없다고 한다. 지구상의 모든 숲은 극상림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나라 온대림에서는 서어나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숲은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년) 중 춘향이 그네 뛰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제비같이 몸을 차고, 나비같이 날개 벌려 높으락 낮으락 왔다갔다 하니...'
'저기 저 건너 장림 숲속에 울긋불긋 오락가락하는 저 게 무엇이냐?'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람천의 겨울색 갈대와 대조를 이룬 제방의 여름색 풀

 

 

 

다시 람천 우측 제방길로 돌아나와 운봉 방향으로 제방길을 따라, 

 

'주촌천'이 '람천'에 합류하는 지점 아래의 엄계교를 지나고, 

 

벤치 쉼터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도 지나서, 

 

우측으로 나무 묘목이 탐스럽게 자라는 곳이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지려는데,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직진의 제방길을 따라 2코스의 서림공원으로 바로 진행해도 되지만, 

이정표를 따라 우틀하면, 

북쪽 백두대간의 고남산 방향

 

서부지방산림청 남원양묘사업소로 들어서게 된다. 

 

 

 

양묘사업소를 'ㄷ'자 형태로 관통하여 다시 60번 지방도인 운봉1로에 접속하여, 

 

운봉읍내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다가 좌틀하고, 

 

양묘사업소 출입문을 나가 '운봉로'에 나서서 좌측 도로를 따라, 

 

지리산둘레길 1코스의 종점인 운봉읍내로 진행한다. 

 

<운봉읍(雲峰邑)>
운봉읍의 남동부 산지와 구릉의 물을 모은 람천을 따라 걷는 길은 육묘장을 통과하여 운봉읍으로 들어서게 된다. 운봉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영토였고,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였다. 백두대간을 따라 노치산성을 비롯한 국경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남원과 장수, 운봉과 남원으로 장을 보러 다녔던 고갯길도 많다. 석기시대 때 운봉이 큰 호수로 있을 때 사람들이 고리봉에 배를 매었다는 설이 있고, ‘운봉고원가야’ 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운봉은 해발 500m 내외의 고원지대로서 고랭지 농사가 발달하였고 모내기와 추수도 빠르다. 또한 국악의 성지와 황산대첩비가 있는 역사 문화적 의미가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현재의 운봉은 예전의 융성했던 모습을 다소 잃은 듯하나, 운봉초등학교를 지나며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반갑다.

 

좌전방으로 보이는 고남산 방향

 

 

운봉사거리를 지나고, 

 

'동편제 소리길' 표석이 있는 '남원시 공동육아나눔터' 앞을 지나서, 

 

운봉초등학교 사거리에서 좌틀하면, 

 

으리으리해 보이는 운봉제일교회를 지나게 되고, 

우측 운봉초등학교 전경

 

24번 국도를 건너면, 

 

지리산둘레길 1코스를 마감하고, 2코스(운봉~인월) 출발점을 지나게 된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10.9km의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운봉-인월 구간은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 길이고, 황산대첩 비지, 송흥록·박초월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시작이 반이고 이제 반을 왔으니 오늘 트레킹은 끝인가!

아니, 이제 제2구간 운봉-인월 구간 출발지점 안내판 앞에서 인증을 남기고 잠시 도로를 따르면, 

좌측 수정봉 방향

 

이내 입구 양쪽에 석장승이 지키는 서림공원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좌측 남쪽에는 비바람에 닳아 분별이 어렵지만 여장승인 '진서 대장군(鎭西大將軍)'이, 

 

<서림공원>
운봉읍을 통과하여 천을 다시 만나는 곳 서림공원은 주천-운봉구간과 운봉-인월구간의 시종점이다. 주차장과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벚나무가 즐비한 람천 제방 옆 서림공원에 들어서면 석장승이 먼저 눈에 띈다. 해발고도가 높고 일교차가 심한 운봉에는 고되었던 농사일을 이겨내기 위한 것으로 마을의 수호신인 석장승 12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서림공원에 있는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 북천마을의 동방축귀대장군과 서방축귀대장군 등 투박하면서도 개성 강한 석장승들에서 옛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걸음을 내딛기 전후에, 할매 할배 장승이 지켜주는 서림공원 그늘에서 채비를 하거나 쉬어가면 좋다.

 

마주 보는 북쪽에는 남장승인 '방어 대장군(防禦大將軍)'이 마주보고 서서, 

마을의 나뿐 기운을 막고 있다. 

 

<남원 서천리 당산(南原西川里堂山)>
남원 서천리 당산(南原西川里堂山)은 중요민속자료 제20호로, 마을 사람들은 흔히 「벅수」라고 부르며, 당산나무 또한 지금은 없어진 솟대(짐대라고도 부름)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왔다. 
마을의 서쪽 길가 양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하나에는 방어 대장군(防禦大將軍), 또 다른 하나에는 진서 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다. 그 위치와 진서(鎭西)ㆍ방어(防禦)라 표기된 것으로 보아 마을의 허전한 방향을 막아준다는 풍수신앙에 바탕해서 세워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재질은 양쪽 모두 화강석으로, 방어 대장군은 높이 220㎝, 너비 50㎝이고, 벙거지를 쓰고 귀가 없으며 수염 한 가닥이 있는 남 신상이다. 진서 대장군은 방어 대장군의 남쪽 맞은편에 서 있으며, 높이 195㎝, 너비 58㎝로 벙거지를 쓴, 그리고 귀가 달린 여신상이다. 이 한 쌍의 돌 장승은 만든 이가 다른 듯 벙거지의 제작 형식이나 표현 수법 등이 다르다. 진서 대장군의 경우 실제 인간의 모형에 가깝게 귀가 달리고 얼굴 표정이 사실적이며 수수한 노인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장승은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떨어진 것을 접합시켰는데,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 부부 장승이 어느 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여신상인 진서 대장군의 목이 부러졌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동짓달 초에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낸 다음, 이들 돌 장승에게도 간단한 제의(祭儀)를 행한다. 돌 장승은 마을 수호의 부수적인 신이지만 당산나무·솟대·장승이 복합되어 마을을 수호한다는 민간신앙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제의를 행하는 것이다.

 

서림공원 전경

 

 

 

서림공원으로 들어서며 서림교 앞에서 우측으로 꺾어, 

지리산둘레길 2코스 안내판과 박수를 비롯한 이정표

 

매끈하게 포장된 람천 제방길을 따라 북쪽으로 진행하다가, 

 

좌틀하여 신기교로 들어서서 람천을 건너고,  

황산 방향으로 흘러가는 람천 전경

 

<람천(濫川)>
지리산 고리봉에서 흘러온 물이 람천이 되고 운봉고원과 인월, 산내를 지나 함양의 마천을 거치고 마침내 낙동강으로 흐른다. 갈대가 무성한 람천은 철새와 수달들이 찾는 곳으로 그 외에도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가 되고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원에 부는 바람이 람천 둑길을 걷는 나그네의 마음을 두드린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매요마을 방향 직진의 도로를 두고 신기마을 방향으로 우틀하여서는, 

 

이내 다시 우측 제방길로 들어서서, 

 

람천 좌측 제방길을 따라 황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잔돌이 소리를 내는 비포장의 람천 제방길을 따라, 

 

신기마을 앞의 작은 동산을 지나는데, 

바위에 음각된 草峯(초봉)이 벌판 가운데에 풀로 덮인 봉우리란 뜻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신기(新基)마을> 
지리산의 봉우리가 바라보이는 자리에 운봉고원이 마을을 보호하는 듯한 명당에 자리 잡았다는 신기마을은 새터라는 의미를 지녔다. 임진왜란이 휴전상태에 접어들던 때에 비교적 전란의 피해가 적은 정착지를 찾았던 입향조들이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 지은 마을 이름이다. 소 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고개)이 움푹 들어가 북동풍을 막지 못한다 하여 그 자리에 쇠한 기운을 막고자 마을 주민들이 직접 토성을 쌓고 숲을 조성했다. 이 숲은 마을 당산제를 올리는 당산숲이기도 하다.

 

신기마을 전경

 

좌측이 신기마을로 이어지는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사반교를 건너고, 

 

사반교 건너서 다시 좌틀하여, 

람천 상류 수정봉 방향
람천 하류 황산 방향

 

람천 우측 제방길을 따르는데, 

 

갈대가 무성한 람천 하상에 드러난 거대한 바위 암반이 신기하고,  

 

람천 맑은 물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천둥오리들이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점점 커져가는 뾰족한 황산을 향해 제방길을 따르는데, 

우측 바래봉 아래에 자리한 소석마을 방향

 

좌측 람천 건너편으로 황산대첩비지가 보이더니, 

 

둘레길은 좌틀하여 람천 건너편 황산대첩비지와 비전마을로 건너가는 다리로 들어서야 하지만, 

 

우측 동편제 마을 표지판이 있는 '반달곰의 새참'이란 카페에 들러 둘레길의 여유로움을 즐겨보기로 한다.

 

 

 

혹여 앞서간 분들이 '반달곰의 새참'에서 쉬고 있지 않을까 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오늘 우리가 첫 방문객이라며 쥔장 내외가 반겨주는데, 

'곰도 100일 먹으면 사람이 되는 반달곰빵'이란 메뉴가 눈에 띄어, 

 

젊은 쥔장 내외와 이런저런 예기를 나누며,

따뜻한 커피와 함께 즐거운 사람이 되고자 애써 본다. 

 

 

 

30여분 간이나 즐거운 쉼을 가진 '반달곰의 새참'을 나와, 

 

최근에 만들어진 듯이 으리으리해 보이는 대첩교를 건너서 우측 비전마을 방향이 둘레길이지만,

좌측의 황산대첩비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대첩교에서 본 우측 비전마을과 황산 방향
황산대첩비지 전경

 

정면에서 본 황산대첩비지 전경. 

 

<남원 황산대첩비지>
이곳은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고려 우왕 6년(1380)에 금강 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군은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군의 최고 지휘자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 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선조 10년(1577년) 운봉 현감 박광옥이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 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황산대첩비지 내부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대첩비각.

 

<황산대첩비>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이곳에 대첩비를 세웠고, 현종 8년(1667) 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 다시 고쳐지었으며 이때 어휘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 보호각을 세웠다.

 

 

우측 일제가 파괴한 원래의 비석 조각들을 모아 안치한 파비각과 황산대첩기념비. 

 

 

 

'반달곰의 새참'에 맡겨?놓았던 스틱을 회수하여, 

 

'동편제 마을' 표석이 있는 비전마을로 들어서는데, 

입구 좌측에 '송흥록 선생 생가터'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고, 

 

<비전(碑殿) 마을>

비전마을은 고려 우왕 때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섬멸한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하여 비를 건립한 곳이다. 마을 앞에 ‘황산대첩비각’이 있어 비전(碑殿)마을로 불린다. 대첩비에는 당시 전투를 같이 했던 8원수와 4종사의 이름이 새겨졌다 하나 일제강점기 일본은 이 비를 파괴하였고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서편에 '하마(下馬)정'이라는 2층 정자가 있어 구한말까지 주변의 주막의 기녀와 소리꾼, 가마꾼이 상주하던 곳이었으나 수해로 소멸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비전마을을 역촌이라고도 했다.
또한 이곳은 조선말 동편제의 시조이자 가왕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그의 후손인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며, 송만갑의 지도를 받은 명창 박초월의 생가가 송흥록 생가 옆에 나란히 복원되어 있다. 이를 기념해 동편제의 고향에 ‘국악의 성지’가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지가 되는 남원은 국악의 산실이다. 국악의 성지에서는 많은 공연과 프로그램이 운영중이다. 황산벌의 말발굽소리와 판소리 가락이 교차하는 비전마을 느티나무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

 

'가왕 송흥록(宋興祿), 국창 박초월(朴初月) 생가' 설명판이 있는 생가터 문 안으로 들어서면, 

 

<송흥록 선생 생가터>
이곳은 조선시대 판소리의 으뜸가는 명창 송흥록(宋興祿)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계면(界面) 우조(羽調) 진양조 등 가조(歌調)를 집성하여 판소리를 예술의 높은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춘향전의 옥중가에서 귀곡성(鬼哭聲) 등 많은 곡을 남겨 판소리의 큰 유파(流波)인 동편제의 시조가 되어 당대의 가왕(가왕)으로 명성을 떨쳤다.

 

 

가왕 송흥록(宋興祿)과 국창 박초월(朴初月)이 살던 초가 형태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고, 

 

송홍록 생가터 앞에는 '소리쉼터'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소리쉼터에서 본 람천 전경

 

 

 

비전마을 앞 람천 제방길을 따르다가, 

좌전방으로 보이는 황산 조망

 

좌측으로 들어가면 '국악의 성지'가 나오는 사거리에서 직진의 람천 제방길을 계속 따르면, 

갈대꽃이 무성한 람천 전경

 

우측 황산 기슭에 자리한 군화동 마을이 포근해 보이고, 

 

<군화마을>
군화동(軍花洞)은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군화동은 황산대첩을 이룬 황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군화동을 지나 둘레길을 왼편으로 조금 벗어난 국도변 하천에 ‘피바위’가 있다. 고려 우왕 때 왜장 아지발도가 팔량재를 넘어와 이성계와 대치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아군의 분별이 힘든 그믐날 밤에 달이 뜨도록 기원하여 마침 떠오른 달빛에 아지발도를 화살로 쏘아 죽였는데 그 핏자국이 람천 피바위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달을 끌어 왔다는 뜻의 인월(引月)이란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하였고 인월면 월평마을의 영월정도 이와 관련된 유적이다. 
또한 이곳은 조선말 동편제의 시조이자 가왕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그의 후손인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며, 송만갑의 지도를 받은 명창 박초월의 생가가 송흥록 생가 옆에 나란히 복원되어 있다. 이를 기념해 동편제의 고향에 ‘국악의 성지’가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지가 되는 남원은 국악의 산실이다. 국악의 성지에서는 많은 공연과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다. 황산벌의 말발굽소리와 판소리 가락이 교차하는 비전마을 느티나무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

 

 

좌측으로 궁도장 입구 옆에 있는 오덕준 장군 공적 기념비를 지나, 

 

원명당종범대선사부도탑도 지나면, 

 

군화동 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24번 국도에 접속하여 우틀하여 람천을 넘는 화수교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 좌측 '남원뜰 노인복지센터' 입간판이 있는 곳에서 다시 좌측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커다란 건물에 'GNKC리조트'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 지금은 노인복지센터로 쓰이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고, 

 

좌측의 '옥계호' 표석을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 

 

위쪽 옥계호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수로를 건너서, 

 

옥계호 제방 아래로 난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돌아본 동편제 마을 방향으로 잠시 전에 지나온 건물과 그 뒤로 황산 산자락에 자리한 국궁장이 보이고, 

 

잠시 더 바퀴자국이 이어진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 

 

우측의 옥계호 저수지 제방을 지나게 된다. 

돌아본 동편제 마을과 백두대간의 고남산 방향
등로 우측 덕두산 자락에 자리한 옥계저수지 전경

 

 

 

옥계저수지 울타리 옆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르는데, 

 

좌측 오봉산 방향으로 인월이 보이기 시작하고, 

 

우측 '지리산동자삼'이라는 표석이 있는 우측 길을 두고 좌측 길을 따라 오르면, 

 

넓은 신작로 수준의 임도가 구불구불 산허리를 휘감으며 길게 이어지다가, 

 

좌측 오봉산 방향으로 인월이 시원스레 내려다 보이고, 

 

걷고 있는 2구간 중 가장 높은 지능선을 휘돌아 내림길로 들어서면, 

 

흥부골자연휴양림으로 들어서서 좌틀하여 휴양림 입구 방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김한호-

 

 

 

좌틀하여 포장도로를 따라 휴양림 입구 방향으로 내려가가다, 

 

무심코 걷다가는 놓치기 쉬운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우측 숲길로 들어서서, 

 

우천 시에는 우회하여 건너라는 안내판이 있는 계곡을 건너고, 

 

낙엽송 조림지로 이어진 숲길을 잠씨 따르다가, 

 

이내 다시 흥부골자연휴양림 진출입 도로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내 다시 좌측 커다란 창고 건물 직전에서 좌측 소로로 들어서야 한다. 

 

 

 

창고 건물 뒤편으로 이어진 데크길을 지나, 

 

낙엽이 깔린 산길을 따라, 

 

어린 매실나무가 식재된 밭 가장자리로 이어지는 능선길로 접어들어, 

 

완만하게 이어지는 수레길을 따르는데,  

 

우전방으로 서룡산과 삼봉산 방향 조망이 시원스레 트이고, 

 

잠시 더 낙엽이 수북한 수레길을 따라 내려가면, 

 

서룡산과 삼봉산이 건너다 보이는 월평마을로 내려서게 된다. 

 

 

 

예쁜 벽화가 그려진 월평마을 골목길을 따라,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유명한 '지리산 나물밥'이란 식당을 지나고, 

 

월평마을 회관을 지나며 우틀하여 도로를 따르면, 

 

<월평마을(달오름마을)>
월평마을은 원래 1800년대 후반 천석꾼이었던 박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했다. 새동네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형국이 반월을 닮아 월평이라는 설과, 마을이 동쪽 팔량치를 마주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고 하여 월평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소박한 민박집들과 벽화가 아기자기한 월평마을은 2010년에 달오름마을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일광정'이라는 현판을 단 건물이 자리한 마을 앞 쉼터를 지나는데, 

쉼터 앞 주차장에 있어야할 애마가 보이지 않아 알아보니 마을 남쪽 구인월 마을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기에, 

 

2구간 종점이자 3구간 출발지점인 구인월교 앞까지 진행하여, 

 

구인월교 입구 3코스 출발점에서 지리산둘레길 1, 2구간 걷기를 마감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 구 인월마을 앞 공터에서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마천면에서 운영하는 마천목욕탕으로 가기로 예정하였으나, 

 

인월에 있는 목욕탕이 가깝다는 주장에 따라 낡은 지리산목욕탕에서 몸을 녹이고, 

 

인월 장날이나 차량 정체가 심하여 걸어서 이동, 

 

산골농장이라는 모처럼 삼겹살로 길잖은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이런저런 추억을 갈무리하여 귀경길에 오른다. 

 

 

존망을 두고 벌였던 삶과 죽음의 전장 운봉고원!

이제는 여유롭고 편안함이 깃들어 동편제의 고장으로 거듭나 있다. 

모처럼 옛 사람들의 정취도 느끼며 살아있는 자연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지리산둘레길 주천~운봉~인월 구간이었다. 

 

언젠가 한가해 지면 다시한번 옛 추억을 음미하며 걸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