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남파랑길 1, 2코스(오륙도해맞이공원~부산역~영도대교 입구) 부산시.
산 행 일 : 2024. 12. 14.(토)
산행코스 남파랑길 1코스(19km) + 남파랑길 2코스(14.5km) = 33.5km, 11시간 예상)
- 시점 : 오륙도선착장 (부산 남구 용호동 산 196-4)
- 1.2코스 분기점 : 부산역 (부산 동구 중앙대로 206)
- 종점 : 영도대교 입구(부산 중구 태종로 8)
산행참석 : 21 백두.
<남파랑길 1코스(19km)>
▶ 경로 : 오륙도해맞이공원~신선대~UN평화공원~우암동도시숲~증산공원~수정산가족체육공원~부산역
▶ 개요
- 해파랑길 시종점인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부터 부산 중구 부산대교까지 이어지는 구간.
- 신선이 노닐던 신선대 및 부산항의 역동적인 파노라마를 만끽할 수 있는 구간으로 세계에서 하나뿐인 UN기념공원 및 부산박물관, 영화 '친구'로 유명한 부산 일대의 명소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코스.
- 아름다운 해안경관과 우리나라 제1의 항구도시 부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구간이며, 부산 갈맷길 3-1, 3-2코스가 중첩됨.
▶ 볼거리
-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는 부산의 상징 '오륙도'
- 오륙도와 영도를 어우르는 해안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신선대'
- 국화, 장미꽃을 볼 수 있고 호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유엔공원'
- 부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부산박물관'
- 영화 친구로 유명한 문현 곱창골목
- 부산 근현대 역사 이야기꽃으로 피어난 ‘이바구길’
- 중국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부산 차이나타운’
<남파랑길 2코스(14.5km)>
▶ 경로 : 부산역~봉래산 편백림~중리초등학교~KT동삼빌딩~중리바닷가~흰여울문화마을~깡깡이 예술마을~영도대교 입구 (옛 남파랑길에서 중리산을 도는 구간이 제외되어 18.9km에서 14.5km로 단축됨)
▶ 개요
- 부산역에서 시작하여 걷기 좋은 봉래산을 지나 흰여울문화마을로 이어지는 코스.
- 영도구에 조성되어 있는 봉래산 둘레길 및 태종대 일원을 걷는 구간이 포함되어 있어 숲길과 바닷길, 마을길 등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매력을 보유하고 있는 구간.
- 6.25전쟁 때 피난민의 추억과 애환이 서린 부산 최초의 연륙교인 영도대교를 포함하여 영도구 원도심 개발에 따라 핫 스페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깡깡이 예술마을, 흰여울 마을 등이 인접하고 있어 매력적인 걷기여행이 가능한 코스.
- 부산의 갈맷길 3-3코스가 포함된 구간으로 초보자에게도 어렵지 않은 코스.
- 옛 2코스에 포함되어 있던 중리산 둘레를 도는 부분이 빠져서 거리가 4.4km 정도 줄었음.
(두루누비 지도에는 포함되어 있으나, 네이버와 카카오 지도에는 제외되어 있음)
- 봉래산 편백숲길 구간에서 봉래산 정상으로 확장하여 진행하였는데, 봉래산 정상에서의 조망이 아주 좋았음.
▶ 볼거리
- 산책을 하기 좋고 약수터 물맛 좋은 '봉래산'
- 바다와 배가 어우러진 풍경을 만나는 ‘절영해안길’
- 멋있는 절경과 아름다운 벽화를 볼 수 있는 '흰여울 문화마을'
<산행지도>
등산이라는 취미를 가지게 되면 우리나라의 국립공원을 모두 가 보는 목표를 세우게 되고 이어서 100대 명산을 오르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산행을 계속하게 된다면 백두대간을 도전하고 9정맥을 걷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좀 더 높은 곳, 좀 더 먼 거리, 좀 더 어려운 코스를 도전하게 된다. 그런데 지난 9월 우리나라를 한바퀴 도는 4,500km에 달하는 '코리아 둘레길'이 완성되면서 매달 두 번씩 가면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해야 하는지 계산할 필요도 없이 걸어보기로 한다.
코리아 둘레길 중 해파랑길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지만 순차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계절이나 당일의 일기 예보에 따라 가장 적합한 둘레길을 정하여 그 둘레길을 순차적으로 이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그래서 지금이 겨울이라 따뜻한 남쪽 지방, 그리고 일출 시간이 늦으므로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을 진행하다가, 차츰 기온이 올라가고 일출시간이 빨라지면 다른 둘레길을 진행하기로 하고 남파랑길을 우선 진행하기로 한다.
34km라는 비교적 긴 코스를 부산이라는 먼 곳에서 진행하게 되면서 귀경 시간이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분들이 총무님께 일정 조정을 요구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지만, 산행 후의 샤워를 없에는 등의 시간을 조정하여 귀경 시간을 단축하는 것으로 협의가 되었다. 그래도 너무 이른 시간에 트레킹을 시작하여 야간 트레킹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는 것과 즐기는 트레킹이 아닌 오로지 걷는 데에만 집중하는 트레킹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는 고스란히 배낭에 넣고서 대장정의 첫걸음에 나선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먼 거리를 야간에 간다는 게 약간은 염려가 되기도 했지만, 기사님의 운전 솜씨와 성실성에 대한 신뢰가 다져진 상태라 흔들리는 버스에서 곤한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멈춰선다는 느낌에 눈을 뜨니 '영산휴게소'다. 잦은 부산 왕래에서 한번도 들려본 적이 없는 휴게소였지만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다시 버스에 몸을 실으니, 버스는 부산시내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산행 출발지인 오륙도유람선 선착장 주차장에 도착하였고, 쉬이 잠들지 못하던 사람들은 바로 불을 밝히고 트레킹 준비를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동해와 남해가 갈리는 오륙도공원 유람선선착장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바로 트레킹 준비를 하여 버스문을 나서니,
오늘 걷게 될 남파랑길 2코스 구간인 영도의 봉래산이 바다 건너로 바라다 보이고,
캄캄한 밤이라 바닷가의 동해와 남해가 갈리는 표석 확인은 생략하고 오륙도 스카이워크 입구로 올라,
오륙도공원 스카이워크 입구에서 '코리아 둘레길' 중 '남파랑길' 걷기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오륙도(五六島)>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龍湖洞)에 있는 섬으로 2007년 10월 1일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名勝)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부산의 상징물이었다. 영도구(影島區)의 조도(朝島)와 마주보며, 부산만 북쪽의 승두말로부터 남동쪽으로 6개의 바위섬이 나란히 뻗어 있다. 이 섬들은 육지에서 가까운 것부터 방패섬(2,166㎡)·솔섬(5,505㎡)·수리섬(5,313㎡)·송곳섬(2,073㎡)·굴섬(9,716㎡)·등대섬(3,416㎡)으로 나누어진다. 송곳섬은 작고 모양이 뾰족하며, 굴섬은 가장 크고 커다란 굴이 있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등대섬은 평탄하여 밭섬이라고도 하였으나, 등대가 세워진 뒤부터 등대섬이라고 한다. 등대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무인도이다.
섬 이름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 산천조(山川條)에 따르면,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된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방패섬과 솔섬의 아랫부분이 거의 붙어 있어 썰물일 때는 1개의 섬으로 보이고, 밀물일 때는 2개의 섬으로 보인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은 19세기에 일본 사람이 잘못 기록한 내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섬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12만 년 전까지는 육지에 이어진 하나의 소반도(小半島)였다가 유구한 세월 동안 거센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분리되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육지인 승두말과 인접한 방패섬과 솔섬의 지질 구성이 동일하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섬 주변은 조류가 매우 빨라 뱃길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옛날 이곳을 지나는 뱃사람들은 항해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해신에게 공양미를 바쳤다고 전해진다.
오륙도공원 '스카이워크' 입구를 뒤로하고,
4,500km에 달하는 코리아둘레길 종주의 첫걸음인 남파랑길 1코스 걷기길로 들어서서,
아직은 한밤중이라 불이 꺼진 해파랑길 관광안내소 방향으로 진행하여,
이기대 방향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과 남파랑길이 갈리는 갈림길에서 좌측 남파랑길 1코스로 진행하는데,
남파랑길 1코스 중 부산진시장까지는 '갈맷길 3-1' 코스와 동일한 코스로 이어지게 되고,
<갈맷길>
'갈맷길'은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로, 사포 지향(바다, 강, 산, 온천)인 부산의 지역적 특성을 담고 있어 바닷가를 걷다 보면 어느덧 산속이고, 산을 벗어나면 강이 있고, 몸이 노곤하면 온천이 반겨주는 부산에만 있는 길로 소개하고 있다.
'오륙도로'를 건너 좌측 보도를 따라 진행하니,
좌측 부산만(釜山灣) 건너편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영도가 조망된다.
앞으로 코리아트레일을 걷는 동안 늘 함께 할 남파랑길 이정표를 따라,
어둠에 묻혀 문을 닫아놓은 '오륙도 중학교' 정문을 지나는데,
<오륙도중학교(五六島中學校)>
오륙도중학교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는 공립 중학교이다. 2008년 11월 5일 오륙도중학교 설립 인가(조례 공포)를 받아 2009년 3월 3일 제1회 입학식(6학급 175명)을 거행하였다.
오륙도 중학교는 약 3,000세대의 오륙도 SK뷰 아파트를 건축·분양하면서, SK건설이 부산광역시 교육청으로부터 건설공사비 일부를 지원받아 2009년 3월 1일 완공하여 부산교육청에 기부하였다는 안내 동판이 정문 기둥에 박혀있다.
오륙도 초등학교는 도로를 건너지 않아도 되도록 아파트와 연이어 위치하고 있고,
사거리임에도 이름이 '용소 삼거리'인 로터리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내려가면 백운포가 나오게 되고,
남파랑길은 정면의 '늘빛 교회'를 우측에 끼고 11시 방향 직진길로 들어서서,
<백운포(白雲浦)>
백운포(白雲浦)는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던 자연 마을로, 동쪽 해안 절경지의 바다에 흰 구름[白雲]이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백운포(白雲浦)라 불렀다고 한다. 개항기에 용호동의 분개(盆浦) 마을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여 백운포까지 거주지가 확대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은 처음에는 분개 마을 사패(四牌)[분개 마을을 4개로 나누며 네 번째라는 의미]로 불렸으나, 언젠가부터 포구[신선대와 용호 2동 승두말 사이의 포구]의 이름을 따서 백운포 마을이 되었다.
백운포 마을의 북서쪽에는 용당동과 용호동의 경계에 있는 용마산이 있으며, 북동쪽에는 장산봉이 있다. 마을은 두 산지 사이의 남쪽 해안가에 위치한다. 앞바다는 기반암이 나출되어 있고, 주먹만 한 둥근 자갈로 이루어진 자갈 해안으로 자갈돌이 울면 비바람이 많이 친다고도 하였다. 현재는 매립되며 사라져 과거의 형태를 찾을 수 없고, 바다와 접한 해안 경사지에 10여 곳의 횟집만이 남아 있다. 골짜기 해안가는 매립되어 백운포 체육공원이 조성되었고, 앞쪽 방파제는 낚시를 즐기는 시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용마산 남쪽 산자락에는 천주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길 건너편의 '용호동 천주교 묘지' 진입로를 지나 계속해서 가로등만이 훤히 밝혀진 도로를 따르면,
'남파랑길 부산 01코스' 안내판 자리한 '무제등 소공원'에 도착하는데,
무제등 소공원 입구에서 갈맷길은 좌측의 신선대를 올랐다가 나오도록 안내하고 있는 반면,
남파랑길은 신선대를 생략하고 바로 우측으로 길 안내를 하고 있어서,
'무제등 소공원'에서 좌측 '신선대'로 오르는 등로 들머리는 두고,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가 내려다 보이는 2층 정자 전망대를 올라보기로 한다.
<무제등 소공원>
무제등 소공원은 2005년 쓰레기 소각장 운영이 종료되면서 공터로 방치되던 볼품없는 도심 공터인 용당동 신선대 유원지 일원 4,955㎡ 부지에 총 17억 원을 투입해 사유지 매입, 전망테크·쉼터 조성, 수목식재 등을 완료하여, 아기자기한 미니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신선대 일대의 난개발을 방지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존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신선대>
신선대는 황령산에서 뻗어 나온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하여 형성된 우암 반도의 남단에 해당하며, 화산암질 해안이 파도의 침식을 받아 발달된 해식절벽과 해식동굴로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남구 용당동 해변의 좌안에 위치한 바닷가 절벽과 산정(山頂)을 총칭하여 말한다. 부산 지정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신선대 주변의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 오는데, 신선대를 절단하여 도랑을 만들 때 사토에서 혈흔이 나왔다고 전하며, 가야진이라는 사람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하며, 신라 말 최치원 선생이 신선이 되어 유람한 곳이라고도 한다. 또 '신선대'라는 명칭도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라는 큰 바위에서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이곳에 가까이 가면 신선들이 노는 풍악소리가 들려왔다고도 한다.
1797년(정조 21년) 10월 14일부터 21일까지 8일간 영국의 탐사선 프로비던스 호의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턴 함장과 선원들은 북태평양 탐사 항해 중 식수와 나무 연료 부족으로 정박지를 찾아 표류하다 신선대 일원 용당포에 도착하여 주민들과 접촉했다고 하며, 해방 후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고 해수욕장과 위락시설이 운영되어 잠시 번성하였으나, 동명목재가 들어서면서 공장지대로 변모하였고 현재는 컨테이너 전용부두와 군사작전지역으로 변모하였으나, 신선대 정상에 서면 오륙도(五六島), 영도, 조도(朝島), 부산 내항과 맑은 날에는 쓰시마섬[對馬島]도 관망할 수 있으며, 한·영 첫 만남 200주년 기념비도 세워져 있는 부산의 역사적인 명승지다.
무제등 소공원을 나와 도로를 따르는데,
좌측 아래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부산항 신선대터미널이 넓게 펼쳐저 있고,
로터리 교차로에서 1시 방향의 너른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남부 자동차 매매단지'를 끼고 가다가 '동명 공고' 앞에서 좌틀하여 내려서서,
'동명 오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부산은행 건물을 좌측에 두고 2시 방향 도로를 따르다가
'UN 참전기념 거리' 입간판이 있는 '평화공원' 입구에서
남파랑길과 '갈맷길 약도' 안내판에 따라 좌측 평화공원으로 들어선다.
입구에서 좌측으로 들어서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리챠드 위트컴 장군 기념비'를 지나,
'UN 평화문화특구' 안내판을 지나며,
<UN 평화문화특구>
부산 남구 UN 평화문화특구는 UN기념공원 일원(574,147㎡)을 UN에서 명칭 사용 승인을 얻어 2010년 5월 19일 정부로부터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부산 남구에서는 UN 평화문화특구를 UN기념공원, 부산문화회관, 부산박물관과 연계하여 UN 평화기념관 건립, 일제 강제 동원 역사기념관 건립, 테마거리 조성, 평화축제 개최 등으로 명실 상부한 평화문화도시로 가꾸어 나가겠습니다. (안내판)
우틀하여 공원 산책로를 따르다가,
출입구1 직전에서 좌틀하여 평화공원에서 유엔조각공원으로 넘어가는 목교를 건너,
공원 산책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UN 조각공원'으로 들어서면,
<UN 조각 공원>
UN 기념공원을 세계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 되는 국제적 관광명소로 가꾸기 위해 조성한 UN 조각 공원은 한국전쟁 50주년 특별 기획으로 개최된 UN기념공원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한 6.25 참전 21개국의 조각가들이 제작한 34점의 조각품을 기증받아 조성하였다.
이내 남파랑길이 이어지는 '유엔기념공원 동문'이 나오는데,
유엔군묘역은 09:00부터 입장이 가능하여 기념사진만 가지고 부산박물관 방향 우회길로 진행한다.
<UN기념공원 유엔묘지>
부산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UN기념공원은 6.25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11개국 2,300여 기의 UN군 유해를 안장한 곳이다. UN기념공원은 전쟁에서 희생당한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5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기념묘지’로 인정한 세계 유일의 묘지이다.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6월 28일 제2차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 파병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전투지원, 의료지원, 물자지원 의사를 표명한 63개국이 참전하였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1953년 7월 27일까지 6.25 전쟁에 참전한 국가 중 17개국에서 40,896명의 유엔군이 전사하였다. 1950년 10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유엔군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1951년 1월 유엔군사령부는 유엔군묘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해 4월 5일 현재의 대연동(당시 동래군 당곡리)에 묘지를 세우고 전국에 가매장된 전사자 유해를 이장하였다. 1955년 유엔군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정부는 UN기념공원의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였고 1959년 11월 유엔과 대한민국 간 ‘유엔 기념 묘지 설치 및 관리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유엔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초기 명칭은 ‘유엔기념묘지’였으나 2001년 UN기념공원으로 개칭하였다. 현재는 재한유엔기념공원국제관리위원회에서 묘지를 관리한다. 공원 안에는 묘지 외에도 1964년 건축된 기념 예배당과 전시실, 부속건물들이 있다. 이 중 예배당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것으로 각국 용사들의 종교를 고려하여 다채로운 종교를 포함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그 밖에 전사하였으나 무덤이 없는 영국연방군 386명을 추모하는 기념탑과 UN군 참전 기념탑이 자리한다. 2006년 부산 APEC를 계기로 시설을 재단장하였으며 전몰장병 추모명비 등 새로운 시설이 추가되었다. 세계 유일의 UN군 묘지라는 역사성을 인정받아 2007년 10월 24일 등록문화재 제359호로 지정되었다.
UN조각공원 산책로를 따라 부산박물관 후문을 지나고,
노오란 은행잎이 나뒹구는 박물관 울타리 옆 도로를 따라,
부산박물관 정문 앞 오거리 교차로에서 10시 방향 '석포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도록 되어 있지만,
우리는 부산문화회관을 들리려고 7시 방향 박물관 울타리를 끼고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부산문화회관 앞 도로 복개터널 직전에서 좌측 길로 올라서,
도로 복개터널 위 비닐이 둘러진 체육시설 쉼터에서 따뜻한 차를 나누며 행장을 정비하는데,
즐산팀과 함께 진행하던 두규형이 종주팀에 합류하겠다고 하여 기다렸다가 함께 진행하게 된다.
세차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맞서는 여장을 갖추고 부산문화회관 앞 잔디광장을 좌회하여,
'부산문화회관' 앞 중앙광장에서 문화회관 대극장 좌측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라,
대극장과 중극장 사이이의 통로를 따라 진행하여,
대극장 뒤편에서 공공 연습 공간인 '다듬채'를 우측에 두고 부산문화회관을 나와 직진의 도로를 따라 '석포로'에 접속하여,
'석포초등학교' 버스정류장에서 '범일교'까지 4km를 68번 버스를 타고 진행하기로 하는데,
이 구간은 남파랑길과 68번 버스 코스가 거의 같아 귀경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발 대신 버스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른 새벽이라 커다란 버스를 독차지하여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동산성결교회를 지나,
감만동교차로에서 우틀하여 널찍한 '우암로'를 따르는데,
좌측 도로 건너편으로 제7부두에 쌓인 컨테이너가 보이고,
드디어 두세분의 손님을 더 태운 버스는,
부산 제7항과 자성대부두를 지나 영화 '친구' 촬영 장소로 유명한 '칠성식당'이 있는 문현교차로에서 좌틀하여,
<영화 '친구' 촬영 장소로 유명한 '칠성식당'>
칠성식당(七星食堂)은 부산광역시 남구의 대표적인 먹거리 타운인 문현동 곱창 골목의 원조로 60년 전통의 곱창 전문점이다. 1952년 개업 당시 문현동 일대에는 대선 소주 공장과 스테인리스 공장 등 여러 개의 공장들이 있었다. 인근 공장들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종류의 안주와 소주를 판매하는 식당으로 출발하였다. 안주들 가운데 돼지 곱창을 양념하여 구이로 판매하는 곱창 메뉴가 가장 인기가 많았고, 점차 전문적으로 곱창 요리를 판매하게 되었다. 당시 곱창은 1인분에 15원 정도였고, 소주는 병으로 판매한 것이 아니라 인근 대선 소주 공장에서 독으로 받아다가 사이다 병에 넣어서 판매하였다.
1990년대부터 골목에 여러 곱창 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문현동 곱창 골목을 형성하게 되었다. 처음에 네 곳에 불과하던 곱창 식당은 10곳으로 늘어났고, 2001년 제작·상영된 영화 「친구」의 촬영 장소가 되면서 곱창 골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범일교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범일교차로로 이어지는 남파랑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4km를 버스로 이동하여 30분 정도를 단축하였다며 근처 돼지국밥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KT범일타워를 지나,
훤히 불을 밝히고 있는 '자성대파출소' 앞을 지나는데,
좌측 도로 건너편으로 '부산진성공원' 입구가 보이지만 '금강산도 어쩌구저쩌구' 라면서 그냥 지나치고,
<부산진성(釜山鎭城, 지방기념물 제7호)>
부산진은 조선 태종 7년(1407)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상좌도 수군 사령부가 주둔하던 군사적 요충지로, 성종 21년(1490)에는 많은 병선과 수군, 그리고 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증산(甑山) 아래 부산진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무토가 부산진성을 파괴하고, 산 정상에 본성인 증산 왜성을, 본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동남쪽 해안가에는 지성(支城: 원래의 성 밖에 보조로 쌓은 성)을 쌓았다. 난이 끝난 뒤 선조 40년(1607) 조선 수군은 진을 지성으로 옮겨 이를 부산진성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사용했던 부산진성의 둘레는 약 2.25km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진동문, 금루관, 진남문, 구장루라는 문을 만들고 문루를 두었다. 성내 정상부에 있던 자성대에는 정유래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을 추모하는 만공단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는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성을 철거하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나 1974년 부산진성 정화 사업 때 동문인 건춘문(옛날 진동문)과 서문인 금루관, 장대인 진남대를 복원하였다. 부산진성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킨 선열들과 조선 수군의 5백 년 역사를 고이 간직한 곳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쌓은 왜성과 이후 왜성을 이용해 조선 후기에 쌓은 수군 진성을 연구할 수 있어 자료 사적 가치 또한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된다. (안내판)
혼수 전문시장으로 이름난 부산진시장 앞 교차로를 건너,
미리 검색해 놓았던 '고향진돼지국밥' 식당을 찾았으나,
주변의 모든 식당과 마찬가지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라 발길을 돌려,
마침 지나는 청년에게 길을 물어 근처에서 거의 유일하게 7시에 문을 여는 부산진시장 뒤편의 영남식당을 찾아드니,
아직 영업시작 30분 전임에도 훤히 불을 밝히고 있는지라 행운이라 여기며 식당으로 들어가,
준비를 하던 쥔장에게 사정 예기를 하고 돼지국밥에 막걸리를 시켜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잡내는 1도 안나는 부드러운 돼지고기가 한가득 들어간 돼지국밥이 별 다섯 개를 줘도 모자랄 맛이다.
돼지국밥이 정말 맛난 영남식당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경부선 철도를 건너기 위해 '부산진시장 지하보도'로 진행하여,
중앙대로에 접속하여서는 좌측으로 조금 이동하여 횡단보도를 건너며 골목으로 들어서서,
미화당슈퍼 앞에서 좌틀하여 진행하면,
'일신기독병원'을 지나,
<일신기독병원(日新基督病院)>
일신기독병원(日新基督病院)은 한국 전쟁 중인 1952년 부산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한국 선교회의 '헬렌 펄 메켄지(한국명 매혜란)'에 의하여 일신 부인 병원으로 개원하였다. 산부인과 진료와 함께 조산 간호원 및 여의사에 대한 전문교육을 병행함으로써 당시 부족하였던 모자보건 분야의 전문 요원 양성에 주력하였다.
옛 성곽의 성루를 닮은 정공단을 지나게 된다.
<정공단(鄭公壇)>
정공단(鄭公壇)은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장공 정발(鄭撥) 장군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하여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영조 42년(1766) 부산 첨사 이광국(李光國)이 부산진성에서 순국한 사람들의 충성심을 기리려고 그들이 순국한 장소인 이곳, 옛 부산진성 남문 터에 제단(祭壇)을 쌓았다. 이후 부산 첨사들은 부산진성이 함락된 날인 음력 4월 14일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단의 중앙에는 정발 장군의 비, 서쪽에는 정발 장군의 막료였던 이정헌(李庭憲)의 비, 동쪽에는 정발의 첩 열녀 애향(愛香)의 비가 있다, 남쪽에는 여러 군민을 모시는 비석이 있고, 남쪽 계단 밑에는 충직한 노비인 용월(龍月)의 단이 있다.
1895년 첨절제사(僉節制使: 벼슬의 이름 중 하나)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그 뒤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된 향사계(享祀契)에서 제사를 올렸다. 또한, 1907년 순종(純宗) 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하사금을 내려 정공단(鄭公壇)을 유지하고 향사를 계속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민족혼을 일깨운다는 이유로 정공단에 대해 박해를 가하여 1942년 향사계는 해산당하고 제단은 폐쇄되었으며, 관련 유물과 비품 등도 몰수당하였다. 그러다 1945년 11월에 다시 향사계가 조직되었고 옛 비석도 세워지고 향사도 계속되었다. 1948년 제단을 새로 만들면서 뒤쪽으로 별단을 쌓아 옛 비석을 두었고, 2009년에 옛 비석을 땅에 묻고 제단을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는 사단법인 정공단보존회(鄭公壇保存會)에서 매년 음력 4월 14일에 제향을 주관한다. (안내판)
정공단을 지나자 길 좌측에 독립운동가 '정오연 생가터'가,
길 우측에는 '왕길지 기념관'이 있는데, 왕길지는 독일명 엥겔 목사로 1900년 가족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경남 동부지역에서 장로교 지역 전도와 교회 설립을 주도하였던 분이며,
기념관을 지난 갈림길에서 우틀하여 가파른 오름길로 이어지다가,
'부산진 교회' 앞 갈림길에서 다시 좌틀하여,
좌측의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전시관'을 지나는데,
<부산진 일신여학교>
부산진 일신여학교는 1905년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양관으로, 부산·경남지역 최초의 신여성 교육기관이고, 3·1독입운동의 깃발을 처음으로 올렸던 독립운동의 산실로서, 역사적·교육사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문화재로 평가되어 시지정 기념물 제5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안내판)
급경사 도로 우측 축대 벽면에는 '동구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다'란 슬로건 하에, 부산·경남지역에서 최초 3·1운동의 시발점인 동구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 및 역사적인 장소를 탐방·체험하고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장소로 조성하였다는 안내문이,
그 좌측 편에는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3월에는 부산 초량객주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는 설명판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 내용이 게시되어 있고, 그 좌측 편에는 일신여학교에서 1919년 3월 11일 만세시위운동이 개시되어 시위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설명문과 함께 좌측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독립 선언서 전문이 게시되어 있고,
삼거리 갈림길에 올라서며 바로 우틀하는데,
맞은편 금성고등학교 축대 벽면에도 동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초상과 '동래 부산포 고지도'가 걸려있다.
금성고둥학교 아래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100여 미터 이동하니,
우측에 '부산포 개항 문화관' 겸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고,
<안용복(安龍福)>
안용복(安龍福)은 동래부(현재의 부산진구 좌천동) 출신으로 신분은 사노비였으며,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는 오충추(主京居吳忠秋)였다. 당시 좌천동에는 초량 왜관으로 이주하기 전의 왜관인 '두모포 왜관'이 있었는데, 이러한 주거 환경 덕분에 안용복은 일찍이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동래부에 설치된 경상 좌수영의 수군 능로군(能櫓軍)으로서 전선의 노를 젓는 병졸이었으며, 어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로 40여 명의 어부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거기에 고기잡이하러 나온 일본 어부들과 조우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다투었다. 이에 일본 어부들은 일본어를 할 수 있던 안용복과 울산 어부 박어둔 등 두 명을 일본 돗토리번으로 납치해 갔다. 일본 영토라고 생각한 울릉도와 독도에 조선 어부들이 잘못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증거로서 두 사람을 데려간 것이다. 하지만 안용복은 일본 관료들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서는 하루 만에 도착하는 거리지만 일본에서는 닷새가 걸리므로 조선 영토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막부로부터 "鬱陵島非日本界(울릉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란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일본 측 자료인 <인부연표>의 당시 기록에는 안용복을 송환할 때 호송사 2명, 요리사 3명, 병졸 5명 등을 딸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송환 도중 나가사키에서 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다시 대마도에서 50일 동안 구금된 뒤 일본 사신 타다 요자에몽(多田與左衛門, 조선 기록에는 귤진중(橘眞重)으로 표기)을 따라 부산 왜관으로 송환되어 9개월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왜관에서도 40일 넘게 갇혀 있다가 12월에야 동래부사에게 인도되었다. 적지 않은 고초를 겪으면서 중요한 영토 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온 그에게 내려진 것은 포상이 아니라 처벌이었다. 그와 박어둔은 허가 없이 월경(越境, 국경을 넘는 일) 한 죄목으로 각각 곤장 100대와 80대를 맞았다.
안용복에게 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친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동래부 동헌으로 넘기면서 항의를 한다. 대마도주가 서계의 내용을 뜯어고쳐서 울릉도와 독도의 관할권을 주장한 것은 당시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 근해로 북류하는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하여 울릉도와 독도 부근으로 어로를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인 조선 태종 때도 대마도 주는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들어가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조정에 간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조선은 대마도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우리 바다로 들어오면 말썽이 생긴다는 이유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당시 우리 조정은 울릉도에 농토가 없고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도 정책을 써왔다. 그 틈을 타서 1618년 일본 막부가 오타니 가문에 도해 면허를 내준 것이었다. 당시 노론 지배하의 조정은 임진왜란 후 일본국과 국교를 고려하여 안용복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양국 간에 불씨를 만든 안용복을 은근히 나무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장희빈이 축출되고 인현왕후가 복권되면서 소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소론은 노론과는 달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서계를 보냈다. 이에 대해 일본 막부는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대한 도해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대마도주는 막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우리 조정에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때 안용복이 다시 나섰다. 그는 '鬱陵于山兩道監稅官(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고 자칭하고,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내쫓고 10여 명의 조선 어부들을 인솔하여 그 길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막부를 찾아가 강력한 항의 끝에 다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는 확약을 얻어낸 안용복은 다시 대마도주를 찾아가 항의했다. 대마도주가 말을 듣지 않자, 막부가 우리 조정으로 보내는 물자들을 대마도주가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도주로부터 완전 굴복을 얻어냈다. <번례집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헌에서 대마도주는 비로소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하였다.
뱃길로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그는 이 사실을 비변사에 알렸다. 그러나, 조정은 함부로 벼슬을 사칭하고 양국 간에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였다. 그는 국경을 함부로 넘나들었다는 범경죄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 신여철(申汝哲)과 남구만 등 몇몇 신하들이 나서서 ‘나라에서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니 죄과와 공과가 서로 비슷하다’고 그의 공적을 변호해 주어서 간신히 유배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안용복의 기록은 여기서 끝이 나 있다. 그가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언제 죽어 어디에 묻혔는지 역사는 말이 없다. 후에 나온 <고암집>에도 그가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천민 출신의 신분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땅으로 문서화하는 역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안용복 이후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2년에 한 차례씩 순시하도록 하였다. <성호사설>은 '안용복은 영웅에 비길만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용복보다 조금 늦은 시기를 살았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벌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는 척박하다. 그러나 대마도는 한 조각의 농토도 없고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우환이 되어왔는데, 울릉도를 한번 빼앗기면 이것은 대마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니 앞으로의 앙화(殃禍- 재난)를 이루 말하겠는가. 그러니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만이 아니었다. …… 그런 사람을 나라의 위기 때 병졸에서 발탁해 장수로 등용해 그 뜻을 펴게 했다면, 그 성취가 어찌 여기서 그쳤겠는가.』
- [성호사설] 제3권 <천지문(天地門)> 울릉도 -
안용복은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현대에 와서 더욱 높이 평가된다. 1967년 1월 대통령 박정희는 “國土守護, 其功不滅(국토를 수호한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휘호를 기증했고, 같은 해 10월 안용복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부산 수영사적공원(지금 수영구 수영동으로 안용복이 근처에 살았던 경상좌수영이 있던 곳이다) 안에 그의 충혼탑을 세웠다.
맞은편 테크전망대로 오르는 계단길이 오르기도 전에 한숨이 나오게 하지만,
다행히도 바로 옆에는 경사형 엘리베이터인 '강삭철도(綱索鐵道)/푸니쿨라'가 있어서,
주민들의 시범을 보며 함께 탑승하여 오르니,
'좌천 체육공원'과 '문화 아파트' 앞 중간기착지쯤에 도착하고,
경사형 엘리베이터 중간 기착지에 내리면 '증산공원' 방향으로 오르는 또 다른 엘리베이터 승강장이 있고, 그 옆에는 예전에 걸어서 오르내렸던 계단길이 보인다. 부산에는 경사가 급한 고지대에 주택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스위스나 이태리 등에서나 있는 이런 '푸니쿨라(인클라인)'가 설치되어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고, 외지 관광객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이곳도 예전에는 160개 계단길을 고스란히 걸어서 올라야 했지만, 경사형 엘리베이터 1호기와 2호기가 설치됨으로써 많이 편리해졌다고 한다.
'문화 아파트' 축대 담벼락에는 '안용복'이 2차 도일 때 사칭하였다는 '조울양도감세장' 표시를 보며,
다시 중간 기착지에서 상단으로 오르는 '푸니쿨라'에 탑승하여,
상단 기착지에 도착하여 밖으로 나서면,
부산포 개항가도 안내판과 '부산진성의 정발장군' 표지판이 보이고,
데크계단을 올라 우측에 '좌천1동 어린이집' 앞을 지나는데,
어린이집 입구에는 '부산포 개항가도 증산공원' 표시판과 '증산 왜성'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증산(甑山)>
증산(甑山)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 사이에 있는 산이다. 해발 고도 130m인 증산의 능선을 따라 조선 시대 쌓은 부산진성이 있던 곳으로, 산릉을 따라 쌓은 성의 모습이 마치 시루와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증산은 동래부 동방 2리 지점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축성한 산인데 위에 장대가 있고 아래에 성황당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의 거주지로 점거되기 시작하여 점차 산 정상까지 주거지가 확대됨에 따라 지금은 성벽이 거의 다 허물어져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주변에는 1876년 개항 이후 들어선 호주 선교사 관련 유적들과 일제 강점기의 일본식 주택 등 근현대적인 역사 문화 자원들이 분포하고 있어 근현대사 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산 정상에는 잘 정비된 증산공원(甑山公園)이 1982년에 개장하여 시민들의 휴식과 건강에 도움을 주고 있다.
어린이집을 지나 '증산 왜성'으로 오르는 계단길을 오르니,
좌천시민아파트가 나오는데,
비록 아파트는 낡았지만 앞쪽으로 보이는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좌천시민아파트 뒤편에서 데크계단과 시멘트계단을 연달아 오르니,
널찍한 운동장 한켠에 자리한 2층의 팔각정자인 증산전망대에 도착하는데,
전망대에 오르니 해뜨는 부산이 멋지게 조망된다.
증선전망대를 내려서서 운동장 동측으로 이동하여,
계단길을 내려서서,
증산공원 정문을 나서면서 바로 좌측으로 휘돌아 진행하면,
앞쪽으로 가야 할 남파랑길이 산허리로 이어지는 수정산이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고,
멋진 전망대를 가졌음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주택을 지나자,
좌측 축대 벽에는 윤석중 선생의 「넉 점 반」 동시가 그림책 작가 이영경의 그림과 함께 벽화로 그려져 있고,
< 넉 점 반 > -윤석중-
아기가 아기가 / 가겟집에 가서 /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 "넉 점 반이다." //
"넉 점 반 / 넉 점 반" /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 한참 서서 구경하고 //
"넉 점 반 / 넉 점 반" /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 한참 앉아 구경하고, //
"넉 점 반 / 넉 점 반" /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 한참 돌아다니고 //
"넉 점 반 / 넉 점 반" / 아기는 오다가 / 분꽃 따 물고 / 니나니 나니나 / 해가 꼴딱 져 / 돌아왔다. //
"엄마 / 시방 넉 점 반 / 이래"
「넉 점 반」은 윤석중 선생의 1940년 작으로, 친근하고 깨끗한 우리말로 동시 고유의 리듬감을 잘 살렸을 뿐 아니라 독자의 허를 찌르는 재미난 반전 덕에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수작이다. ‘넉 점 반’은 ‘네 시 반’이라는 뜻으로 시계가 귀했던 시절, 지금 몇 시인지 알아보고 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을 놀이에 정신이 팔려 그만 잊어버리고는 해가 꼴딱 져서야 집에 돌아가 “시방 넉 점 반이래.” 외치는 능청맞은 한 아기의 행동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화가 이영경은 1966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1993년부터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데, 자신의 어린 시절인 1960년대의 농촌 마을을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넉 점 반』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50년대 이전 세대의 이 '넉 점 반'은 '보릿고개'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시각이기도 하다. 보릿고개 시기에는 하루 세 끼를 먹을 양식이 없어 하루 두 끼로 때우기도 했는데, 아침을 희멀건 피죽으로 느지막하게 먹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을 이른 네시 반경에 먹었기 때문에 '넉 점 반'이란 말이 생겨났다.
보릿고개는 하곡인 보리가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해 가을에 걷은 식량이 다 떨어져 굶주릴 수밖에 없게 되던 음력 4∼5월의 춘궁기(春窮期)를 표현하는 말로 한자어로는 맥령(麥嶺)이라고 한다. 농민이 추수 때 걷은 수확물 중 소작료, 빚 또는 그 이자, 세금, 각종 비용 등을 지급하고 난 뒤 나머지 식량으로 초여름에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버티기에는 그 양이 절대 부족하였다. 따라서 이때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草根木皮] 등으로 끼니를 잇고 걸식이나 빚 등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수많은 유랑민이 생기게 되고 굶어 죽는 사람 또한 속출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가뭄이나 홍수, 황해(蝗害:메뚜기로 인한 농사 피해) 등으로 인하여 벌어졌던 참담한 굶주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며, 정약용(丁若鏞)은 기아시(飢餓詩)를 지어 보릿고개의 참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보릿고개가 1960년대 초까지도 이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하여 부황증(浮黃症: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에 걸린 농민들을 볼 수 있었지만, 한국인이 보릿고개에서 벗어난 것은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증산공원' 표지석이 서 있는 로터리에서 우측 성북 전통시장으로 진행하면,
아직은 인기척이 뜸하지만 친근한 작은 가게의 좌판이 늘어선 성북 전통시장 골목을 지나게 된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간에 투박한 부산사투리를 들으며 걸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며 시장골목을 나와,
'상아 약국' 앞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잠시 진행하다가,
이내 성북고개를 지나며 우측 '아란야사' 방향 도로를 따르고,
잠시 갈맷길 이정표의 '아란야사(阿蘭若寺)' 방향 우측 계단길로 올라서면,
출가 수행자들이 머무는 곳이란 뜻의 '아란야사' 아래 '초량 이바구길'에 접속하여 남파랑길 이정표의 좌측 길을 따라,
수정산(314.7m) 산허리로 이어지는 '초량 이바구길'을 따라 한참 동안 진행하게 되는데,
수정산 산허리 숲과 주택지 경계를 따라 이어지는 남파랑길은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좌측 부산항 앞에 높다랗게 걸린 부산대교를 보며 호젓한 산록길을 따라,
'수성 아파트' 뒷길을 지나고,
우측 수정산 정상 방향 갈림길에서 수정산 가족공원 방향 둘레길로 진행하여,
그저 평범한 주택으로 보이지만 '황룡사'라는 표석이 있는 암자를 지나,
우측의 장승조각공원과 백운사 입구 표지판이 있는 갈림길을 지나게 된다.
운동 시설이 있는 호젓한 흙길이 잠시 이어지다가,
이내 다시 따스한 햇살이 쬐는 도로를 따르면,
'동구 등산안내도'를 지나 우측 '수정산 가족체육공원'아래를 지나게 되는데,
도로가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우측 위로 조성되어 있는 '씽씽로드 산책로'로 이어지는 데크 계단길로 들어선다.
쭉쭉 뻗은 편백 숲 사이로 이어진 씽씽로드 산책로를 따르다가,
돌아본 수정산 둘레길이 저만치 멀리에서 이어져 왔고,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계단길로 오르면,
계단길 우측의 '해수관음전'을 지나게 되고,
주택가 뒤편 도로를 따르다가 '구봉산 치유 숲길' 입구에서 좌측 아래로 휘어져 내려가는 도로를 따라야 하지만,
우측 '구봉산 치유 숲길로 들어서서 오르다가,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좌틀하여,
잘 다듬어진 데크목 계단길을 따라 내려가,
초량천을 건너는 목교를 지나서,
씽씽로드 산책길 이정표를 따라 진행한다.
씽씽로드 산책로를 따라 울창한 편백숲을 지나,
지계곡을 넘는 또다른 목교를 건너면,
철봉과 간단한 체육시설이 있는 흙길을 지나게 되는데,
주변의 나무들이 계절의 변화를 돌이켜 놓은 듯 이제 막 단풍 든 모습을 연출하고 있고,
씽씽로드가 끝나는 지점인 '월봉사' 직전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아래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월산사 아래의 가지가 잘려나간 노거목이 있는 쉼터에 도착하는데,
남파랑길은 노거목 옆을 지나 골목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급경사 계단길을 내려서서 좁을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
초량산복도로인 '망양로'에 접속하여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도로 건너편 전망대에는 1년 뒤에 배달되는 느린 우체통인 '유치환의 우체통'이 자리하고 있고,
유치환(柳致環)은 시인 겸 교육자이자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 소령이다. 호는 청마(靑馬)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외가인 거제에서 출생하였고, 초등학교 입학 전 경남 통영군 충무읍 본가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그는 극작가 유치진의 아우이기도 하다.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39년 첫 번째 시집 《청마시초》를 발표하였다.
부산 남 여자상업고등학교(현 부산 영상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도중, 1967년 2월 13일 수정동에서 시내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생을 마감하였다.
'망양로' 도로를 따라 부산컴퓨터과학고 후문을 지나,
우측 '친환경 스카이웨이 전망대'와 나란히 이어지는 산복도로를 따르다가,
좌측 초량로 갈림길에서 직진의 산복도로를 따라 좌로 크게 휘어져 내려가,
'초량 화신 아파트' 표적을 지나면,
'망양로 산북도로 전시관'이 있는 'Y'자 갈림길에서 좌측 도로로 내려서게 된다.
<망양로 산복도로 전시관>
부산의 근현대 산복도로의 생활사를 소재로 한 전시기획 및 창의적인 신개념 놀이터 설치 공간인 망양로 산복도로 전시관은 2021년 개관한 전시관이다. 산복도로는 부산의 애환이 담겨있는 도로로, 6.25 전쟁으로 산동네가 생겨났고, 그곳을 이어주는 산길이 만들어져 생겨난 도로이다. 산복도로 전시관에는 1950년대 동구 일대에 나전칠기, 자개농 가구거리가 형성되었던 거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자개로 만든 벽면 전시품을 입구 통로에 전시하고 있으며, 각종 전시공간은 방문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있는 플레이형 체험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전시관 구성은 산복도로 주변 경관과 역사, 일상을 주제로 만든 전시공간인 아카이브존, 모션카메라로 관객과 풍경이 하나가 되는 미이어아트 체험 공간인 미디어아트존, 집 모양 만들기, 구술 전화기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플레이존, 여러 스탬프와 스티커로 엽서를 만들어 출력하는 기념품 체험존 등이 있다. 산복도로 전시관 인근에는 초량이바구길, 168계단 모노레일, 유치환의 우체통, 차이나타운 등이 있어 역사유적 관광을 겸할 수 있는 곳이다.
산복도로를 지나며 따르던 망양로를 두고 좌측 도로로 내려서다가,
좌틀하여 내려가는 초량 168계단이 모노레일 공사중이라 무심코 지나쳤다가 돌아나와,
푸니쿨라(모노레일) 설치 공사가 진행 중인 부산 초량 168계단길로 내려가는데,
168계단 중간쯤의 우측편에 전망 좋은 싐터가 마련되어 있어서 잠시 쉼을 하기로 한다.
다소 느긋한 쉼을 뒤로하고 168계단길을 내려서서,
예전에는 물지게를 지고 저 계단을 오르내렸다는데, 돌아본 168계단길이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이고,
다시 도로를 건너 다소 짧은 계단길을 한번 더 내려서면,
우측 초량초등학교 담장에 '동구 초량의 삶과 마주 보기'라는 이바구길 전시 패널이 걸려 있는데,
먼저 초량초등학교 한류스타인 나훈아, 이경규, 박칼린 등의 프로필 판넬에 이어,
의료보험의 아버지이자 한국의 슈바이처로 추앙받는 '장기려' 박사와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한 시인 김민부, 의사이자 정치가인 박기출과 청마 유치환 안내판과 초량동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허정', 여성 정치가인 '박순천', 독립운동가인 '장건상'과 '박제혁' 패널 등이 걸려있고,
부산항의 역사에 관한 판넬이 이어져 있어서 시간 여유가 되면 찬찬히 읽어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고,
초량초등학교 담벼락 끝지점의 '이바구길 안내도'를 지나며,
'부산 초량교회'를 좌측에 끼고 좌틀하여 진행하다가,
<초량교회>
초량교회는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교회로서, 1893년 호주 선교사 애덤슨(Adamson, A., 孫安路)에 의하여 부산 지역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다. 영서현(英署峴)에 있던 서당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삼았다. 이 교회는 1925년에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부임하면서 항일민족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민족정신과 신앙의 융합을 이루었으며 또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진원지 구실을 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30년에는 삼일 유치원(三一幼稚園)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에도 큰 기여를 한 교회다.
'초량 지구대' 앞에서 우틀하여 내려선다.
우측 초량 전통시장 입구에서 다시 우틀하여,
<초량시장>
1975년 개설된 상가 건물형의 중형시장이다. 부산역 근처 가볼만한 곳으로 손꼽히는 초량전통시장은 부산역에서 도보로 10분이면 도착하는 곳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생기와 매력이 넘쳐나는 초량전통시장은 부산역에서 내린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서, 인근 주민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초량전통시장은 현대화 사업을 통해 깔끔하게 정돈되어 밝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높고 튼튼한 아케이드 천장과 곳곳에 보이는 장승 모형, 통일된 간판이 인상적이다. 전통시장의 느낌은 그대로 느끼면서 깔끔한 현대적인 분위기를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주변에 차이나타운과 부산역의 유동 인구를 활용해 시장 홍보보 방법을 모색하고 축제 한마당 행사를 진행하여 현재는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고색창연한 골목길을 따르다가,
부산화교협회 앞에서 좌틀하면,
부산 차이나타운 거리를 지나게 되고,
<부산 차이나타운>
부산 상해거리는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중국인 최대 거주지역이자 중국의 다양한 문화와 먹거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중국인들이 이주해 형성된 거리이며, 과거 중국 영사관이 있기도 했다. 2007년 국내 유일의 차이나타운특구로 지정된 바 있다.
최근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당과 만두집 등이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국내외 여행자들의 방문이 늘고 있다. 매년 개최하는 부산 차이나타운특구 문화축제도 볼거리이다. 상해거리 입구에는 부산시와 상해시의 우호를 상징하는 조형물인 상해문이 자리하고 있으며, 붉은 기둥과 중국풍 기와로 된 지붕 아래 금색 글씨의 상해문 현판이 달려있다. 상해거리 끝에는 동화문이 있다.
부산역 앞 중앙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부산역 광장으로 들어서서,
남파랑길 1코스를 마감하고 2코스를 시작하는 부산역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남파랑길 2코스는 부산역 광장에서 출발하여 부산대교를 건너 영도로 들어가 봉래산 둘레길을 시계방향으로 걸은 후 영도 서쪽 해변길을 따라 걸어서 다시 영도대교를 건너 남포동에 있는 영도대교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코스이다.
두루누비 남파랑길 2코스 지도에는 태종대 입구까지 진행하여 중리해변으로 진행하도록 되어 있지만, 네이버 지도에는 롯데캐슬아파트 사거리에서 중리해변으로 바로 우회전하도록 안내되어 있는지라, 인터넷 지도를 따르기로 하면서 4km 남짓을 단축하여 진행하고, 중리해변부터 흰여울 문화마을까지는 해변의 멋진 풍경도 많고 전망대도 많아서 모두 둘러보기에는 다소간 시간이 부족할 듯하다.
부산역 광장에는 남파랑길 안내 표시가 보이지 않아,
광장 우측 택시승강장을 지나 부산역사 건물 우측으로 진행하여,
부산역 광장 남동쪽 끝에서 우틀하여 부산역 풍물거리로 들어서서,
이후 부산역 선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동구 초량동 골목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세관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서,
부산세관 담벼락을 따라 진행하는데,
벽면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길게 그려져 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 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임무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의의는 조·일 양국간만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부사·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 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였다. 그 뒤 육로로 교토로 갔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 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다.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는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 ·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병풍·회권·판화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또 그들은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 형태로 남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견문록으로 엮어져서 당시 두 나라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
<조선통신사 행렬도(朝鮮通信使行列圖)>
조선통신사 행렬도(朝鮮通信使行列圖)는 일본에 파견한 조선의 외교사절인 조선 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행렬의 순서나 의장(儀仗)의 형색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반차도(班次圖)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 통신사들을 매우 정중히 맞이하였다. 일본의 사절단이 부산에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조선 통신사 일행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대마도까지 안내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에서 에도(지금의 도쿄)까지는 대마도 영주가 안내하였다. 즉, 대마도에서 성대한 영접 행사가 끝나면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여러 작은 섬을 거쳐 일본의 본토에 상륙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일본 각 지역의 영주들과 에도에서 파견된 영접 책임자와 호위 무사들이 통신사 일행을 영접하였다. 조선 통신사들이 머무르는 곳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통신사를 만나보려고 했다.
조선 통신사의 인물 구성은 정사, 부사, 종사관과 통역, 군관과 병사, 의원, 화가, 인쇄공, 악공 등으로 하고, 일본인들은 사절단, 대마도 영주, 각 지역의 영주, 호위 무사, 그 밖의 인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림을 보면, 조선 사절단 1명당 5-10명가량의 일본인들이 수행하고, 큰 깃발을 날리며 행차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 사절단을 얼마나 환대했으며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인 수행원들이 짊어진 많은 짐들을 볼 때, 조선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할 때, 상당한 양의 선진문물을 전달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세관을 지나 연안부두사거리로 나서자 앞쪽으로 가야 할 영도의 높게 솟은 봉래산이 조망되며,
<영도(影島)>
부산 앞바다에 위치한 섬이다. 중심에는 봉래산(해발 394.7m)이 위치해 있으며 대개 봉래산을 둘러싸면서 주거지역이 위치해 있다. 구의 동쪽으로는 부산광역시 남구가 부산항대교로 연결되었으며, 서쪽으로는 부산광역시 서구가 남항대교를 통해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부산광역시 중구가 영도대교와 부산대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쪽에는 태종대가 있다.
영도의 원래 이름은 절영도(絶影島)였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 따라올 정도라 하여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을 붙여 절영도라 불려졌다고 한다. 해방 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옛이름 "절영도"를 줄여서 현재의 "영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도는 육지와 인접한 섬으로 말을 방목하기에 적당한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마장(國馬場)이 있었으며, 명마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열전」 김유신의 조항을 보면 신라 33대 성덕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공을 되새겨 김유신의 적손(嫡孫) 김윤중에게 절영도 명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서도 후백제의 왕인 견훤이 절영도 명마 한 필을 고려 태조인 왕건에게 선물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서도 영도를 「마키노시마(牧島)」라고 하였는데 일본어로 "말먹이는 목장의 섬"이란 뜻이다.
영도 서쪽 해변을 따라 걷는 길은 경치도 아름답고 좋은데, 여름철에는 그늘이 없어서 힘들 수도 있지만 흰여울해안터널이 있어서 잠시 시원하게 쉴 수 있다. 흰여울길은 예전에 봉래산 기슭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바다로 굽이쳐 내림으로써 마치 흰눈이 내리는 듯 빠른 물살의 모습과 같다 하여 흰여울길이라 하며, 흰여울길 주변일대를 제2송도라 일컬었다고 한다. 바다 건너편 암남동의 송도를 제1송도라 하고 마주 보고 있는 이곳을 제2송도라 하였다. 영화 변호인, 범죄와의 전쟁,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등 수많은 작품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2011년 12월 공가와 폐가를 리모델링하여 지역 예술가의 창작 의욕을 북돋우고, 영도 구민들로 하여금 생활 속 문화를 만나게 하는 독창적인 문화 예술 마을로 거듭났다고 한다. 길거리에서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일본인 관광객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좌측으로 부산항 '연안크루즈터미널'과 '연안여객터미널'이 자리하고 있고,
우전방으로는 특이한 외관을 가진 롯데몰이 우뚝하니 모습을 드러내더니,
영도를 이어주는 부산대교로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산대교로 올라,
부산대교 좌측 보행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
'부산대교 / 준공 1980년 1월 30일' 머릿돌 앞에서 좌측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서고,
부산대교와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영도교차로 아래 봉래교차로에 이르러서 좌틀하여 잠시 더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봉래교차로에서 좌틀하여 영도고가교 아래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교통순찰대 앞에서 우측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 도로를 따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우측 '봉래언덕길'을 따라 영도센트럴에일린의뜰아파트 정문을 지나,
'T'자 갈림길에서 계단도 있는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
다시 봉래길 도로에 접속하여 좌측 도로를 따르다가 봉래치안센터 직전에서 우틀하여 유림아파트 방향으로 오르면,
'봉래산 그린공원' 입구가 나오며 좌측에는 봉래산 둘레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영도 봉래산(蓬萊山, 396.2m)>
봉래산은 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 앞바다를 끼고도는 주변 경치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드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산 정상부에는 [봉래산 영도 할매 전설]이 서려 있는 할매의 신체인 할매바위가 있다. 이에 따르면 봉래산에는 ‘영도 할매’가 있어 주민들을 평안하게 지켜준다고 전한다.
원래 봉래산이란 동쪽바다 한가운데 있어서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는 상상속의 영산이다. 봉황이 날아드는 산이라는 의미로 영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조봉이라 하고, 그다음의 봉우리를 자봉, 그 아래의 것을 손봉으로 부르고 있다. 가까이 보면 세 봉우리의 구별이 잘되지 않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굽이친 봉우리의 낮아진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산기슭에는 기계적 풍화작용에 의해 쪼개진 바위가 점점이 흩어져 있다. 봉래산의 다양한 등산코스를 즐기다 보면, 부산의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남해안의 절경과 바다 냄새를 느낄 수 있다. 주변 관광지로는 복천사, 국립해양박물관, 영도 조내기 고구마 역사기념관 등이 있다.
입구 일주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오르다가 봉대산 둘레길을 만나 우틀하면,
봉래산 허리 사면으로 이어진 야자 매트가 깔려있는 '봉래산 둘레길'이 이어지고,
'청학동 해돋이 마을' 방향 돌계단을 오르면,
시멘트 포장의 '봉래산 둘레길'이 이어지다가,
'해돋이 전망대 청학무루'라는 흰색 건물을 지나게 되고,
우측 불로초공원(헬기장) 방향 갈림길에서,
직진의 조내기고구마역사공원(0.5km) 방향 남파랑길을 두고,
봉래산 정상에서의 조망을 보려 우틀하여 불로초공원 방향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영도 조내기 고구마 역사기념관>
고구마 시배지였던 영도 봉래산 자락에 '조내기 고구마 역사기념관'이 자리한다.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설명하고, 그 선구자 역할을 해냈던 조엄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고구마 재배 방법, 요리 방법 등을 소개한다. 쿠킹 클래스 등 각종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기도 하다.
기념관 1층은 전시실이다. 고구마의 전파 경로와 역사를 시간 순서로 소개한다. 조엄이 고구마를 조선에 들여온 과정, 영도에서 재배하게 된 내용 등도 찾아볼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면 금~일요일 오후 1시부터 5시 사이에 방문해 해설사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2층은 체험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과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고구마를 넣은 쿠키와 머핀을 만들어볼 수 있는 쿠킹 클래스에 참여해볼 수도 있다. 3층에는 루프탑이 있으며, 기념관 내에서 운영하는 카페 조고매의 디저트와 함께 전망을 즐길 수 있다. 역사관 뒤로는 봉래산 산책로가 이어져, 전망대로 올라가 부산의 풍경을 감상해 볼 수도 있다.
<고구마 -권현숙의 전통음식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63년(현종4)에 일본에 표착한 사람들로부터 고구마를 보고 이 작물로 백성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는 소식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고, 숙종 때 일본 통신사 일행이었던 신유한의 ‘해유록’에 일본에서는 고구마를 구워 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서울에 사는 이광려라는 사람이 명나라 문헌인 ‘농정전서’를 보고 고구마가 구황작물임을 알고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나 역관 등을 통해 고구마를 구하려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흉년으로 기근이 지속되었다.
1763년 11차 조선통신사를 이끈 정사 조엄(趙曮)이 일본으로 가던 중 첫 기착지인 쓰시마[對馬島]에 도착하여, 고구마를 수확하는 현장을 보게 되었다. 조엄이 행차를 멈추고 통역관에게 물으니, ‘코이코이이모[孝行藷]’인데 맛도 아주 좋다라고 답하였고, 조리방법을 물으니 쪄서도 먹고 구워서도 먹을 수 있다고 설명을 해줬다. 조엄의 ‘해사일기’에는 『대마도에는 먹을 수 있는 뿌리가 있다. ‘감저’ 또는 ‘효자마’라 하는데 왜음으로 ‘고귀위마’라 한다. (중략) 이것을 우리나라에 퍼뜨린다면 고려 시대 문익점이 목화를 퍼뜨린 것처럼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엄은 이 작물이 최상의 구황작물(救荒作物)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현지에서 고구마 종자 2말과 재배법을 적은 책자와 함께 종자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귀위마(告貴爲麻)' 적어 부산으로 가는 비선(飛船) 편으로 부산진 첨사 이응혁(李應赫)에게 보냈지만, 시기가 늦가을이라 월동 방법을 몰라 종자를 모두 동사(凍死)시키고 말았다.
이듬해(1764년) 새로 부임해 온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고구마 종자가 동사한 사실을 알고 사자(使者)를 선발 통역관과 함께 쓰시마에 보내 감저종자(甘藷種子: 고구마)를 구해오게 하여, 1765년 관리가 용이한 동래부와 쓰시마와 기후 조건이 비슷한 절영도(絶影島) 두 곳에서 첫 재배를 시작하였다. 동래부는 토질이 달라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대마도와 기후환경이 비슷한 절영도에서 재배가 성공했다. 강필리 부사는 조엄이 보내준 자료와 고구마를 심고 수확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세심하게 관찰·기록하여 '감저보(甘藷譜)'를 저술하였는데, 병으로 완성하지 못하고 동생인 강필교(姜必敎)에 의해 1766년에 완성되었고,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라는 책자로 발간되어 고구마 재배법을 알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전문서다.
부산 영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구마를 재배한 시배지로, '조내기마을'이 생기게 되었는데, '조엄'의 '조'자에, 그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 지역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내기'를 붙여 '조내기'라고 하였다. 조내기 고구마는 아기 주먹만 한 크기로 작은 고구마였지만, 일제 때는 일반 사람들이 조내기 고구마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영도에서는 2017년에 「영도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과 「기념관」을 오픈하여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 고구마 생산량이 연간 50만 t에서 중반에는 300만 t을 넘어섰다. 당시 주곡을 제외한 생산량 중에 고구마가 제일 많았다. 1970년대에는 고구마 생산을 정책적으로 장려하기도 했다. 부수적으로 제주도에는 ‘무수주정’, 영산포에는 ‘흥인산업’, 군산의 ‘서영주정’ 등 주정산업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기근이 심할 때는 주식을 대신하던 고구마가 감자에 비해 당질과 비타민C 등이 많고 칼로리가 낮아 현대에는 건강식품으로 인기가 많다.
봉래산 정상부의 불로초공원으로 오르는 등로를 따라,
커다란 바위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앞서간 분들이 기다리고 있는 불로초공원에 도착하게 되고,
불로초공원 북측 가장자리에 있는 '하늘마루'라는 팔각정자에서,
간식을 나누며 여유로운 쉼을 즐긴다.
하늘마루 정자를 뒤로하고 봉래산 정상을 향하는데,
창덕궁에 있던 불로문이 이곳에도 있고,
방송사 중계소를 연이어 지나서 오르다가,
좌측의 봉래산둘레길인 데크길을 두고 돌계단 오름길을 오르는데,
좌측에 데크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지난 새벽에 남파랑길 1코스 걷기를 시작했던 오륙도공원이 시원스레 조망되고,
이내 아담한 정상석이 자리한 봉래산 정상(조봉)에 도착하는데,
봉래산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며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데크도 있다.
<영도 봉래산(蓬萊山, 395m)>
봉래산은 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 앞바다를 끼고도는 주변 경치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드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산 정상부에는 [봉래산 영도 할매 전설]이 서려 있는 할매의 신체인 할매바위가 있다. 이에 따르면 봉래산에는 ‘영도 할매’가 있어 주민들을 평안하게 지켜준다고 전한다.
원래 봉래산이란 동쪽바다 한가운데 있어서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는 상상속의 영산이다. 봉황이 날아드는 산이라는 의미로 영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조봉이라 하고, 그다음의 봉우리를 자봉, 그 아래의 것을 손봉으로 부르고 있다. 가까이 보면 세 봉우리의 구별이 잘되지 않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굽이친 봉우리의 낮아진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산기슭에는 기계적 풍화작용에 의해 쪼개진 바위가 점점이 흩어져 있다. 봉래산의 다양한 등산코스를 즐기다 보면, 부산의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남해안의 절경과 바다 냄새를 느낄 수 있다. 주변 관광지로는 복천사, 국립해양박물관, 영도 조내기 고구마 역사기념관 등이 있다.
정상석 뒤편 전망바위에서 본 북서쪽 방향.
정상석 앞쪽 전망데크에서 본,
북동쪽 부산항 방향.
동쪽 오륙도선착장 방향.
봉래산 정상을 뒤로하고 남쪽 전망대로 이어진 데크길을 따르는데,
우측으로 '봉래산 영도할매 전설'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봉래산 영도할매 전설>
영도 전역에 걸쳐져 있는 봉래산은 어머니 품과 같은 형상이다. 자식이 어머니 품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영도 주민은 이곳을 떠나서는 잘 살 수 없다. 봉래산 삼신 할매 산신령은 자식을 품어주려는 어머니처럼 영도에 살 때는 보호를 해주고 밖에 나가면 고생할까 걱정한다. 영도 삼신할매는 한 편 욕심이 많아서 영도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만 밖으로 떠나는 것은 싫어한다. 주민들은 봉래산 정상에 있는 삼신 할매 바위를 신성한 장소로 여겨서 함부로 올라가지도 않으며, 그 주변에서 합장 하거나 기도를 한다. 봉래산 삼신 할매는 봉래산의 산신으로 해석된다. 이곳에 좌정한 삼신할매는 영도주민의 운명을 좌우할만한 영험한 산신이다.
특히 영도에 살던 주민이 삼신 할매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가면 3년 안에 망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영도에 살면서 삼신할매 덕에 부자가 돼서 나간 많은 사람도 영도 밖으로 나가 그 재물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영도의 주민은 섬사람으로 육지 주민에 비하여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다. 또한 영도에 사는 사람끼리는 상부상조하며 단결력과 협동심도 높았다. 따라서 영도에 정착하면 향토색이 강해지고, 이사를 잘 가지 않았다. 영도에 살다가 육지로 나가 잘 모르는 사람 때문에 사기를 당하거나 속는 경우도 있었다. 영도 삼신 할매에 얽힌 속설은 섬으로서 지리적 환경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도 삼신 할매가 이곳을 떠난 사람에게 해코지한다는 속설은 일본인의 간계(奸計)로 생겨났다. 일본인은 "영도 지형이 일본으로 날아가는 새의 형상"이라고 호도하며 "이곳에서 돈을 모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절명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렸다. 실제로 영도 삼신 할매는 영도를 떠난 사람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외지로 나간 영도 출신 사람들이 겪을 어려움을 미리 예견하고 방지하려는 것이다. 봉래산 삼신 할매는 산삼과 불로초를 기르고 있으며, 영도 사람의 안위를 지켜주며, 국가적 위기가 닥쳐올 때 부산사람을 지켜줄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내 봉래산 정상 남측에 자리한 전망데크에 서게 된다.
봉래산 정상에서 부산항과 부산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그동안 잘 맞춰지지 않던 부산의 그림조각들이 일시에 맞춰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봉래산 정상을 뒤로하고 안부로 내려섰다가,
잠시 돌계단길을 올라,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잠시 더 따르면,
정자와 산불감시초소 앞에 작은 정상석이 자리한 봉래산 자봉(子峯, 391m) 정상을 지나게 되고,
자봉을 뒤로하면 이내 나오는 갈림길에서 남파랑길로 다시 접속하기 위해 좌틀하여 고신대 방향으로 들어서면,
돌계단까지 설치된 꾀나 가파른 내림길이 길게 이어지다가,
옛 해암사 진입로에 내려서서는 우측 내림길을 따라 지그제그로 내려서다가,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에 이어 숲길을 잠시 더 내려가면,
봉래산둘레길에 접속하여 우측 '함지골청소년수련관' 방향의 남파랑길을 따르게 된다.
잠시 호젓한 오솔길을 따르다가,
직진으로 이어지는 봉래산둘레길을 두고,
좌틀하여 BMC와치공원 방향으로 내려가면,
벤치 쉼터를 지나,
부산도시공사(BMC) 와치공원 입구로 내려서게 된다.
<와치공원>
와치공원은 2012년에 부산도시공사(BMC) 소유의 임야인 동삼동 510번지 일원에 조성된 소규모 공원으로, 이전에는 쓰레기 무단투기와 우범지역으로 방치돼 왔던 곳인데, 영도구에서 새롭게 초화와 나무를 심고 운동기구와 공원 벤치 등을 갖추어 도심 속 휴식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시켰다는 것이다.
BMC 와치공원 날머리에서 와치 종합사회복지관 앞 도로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 영도도서관 옆 와치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서다가,
중리초교를 지나,
부산역/ 태종대/ 송도로 갈리는 사거리에서,
두루누비 엡이 안내하는 태종대 방향으로 직진하는 대신,
네이버와 카카오 지도가 안내하는 송도 방향으로 우틀하여,
두루누비엡은 태종대 방향 직진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동산동패총'과 '유엔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 그리고 '태종대 입구' 등을 경유하며 중리산을 돌아서 나오도록 되어있는데, 네이버와 카카오 지도는 이곳에서 우틀하여 바로 중리항으로 진행하라고 되어있다. 아마도 중리산을 돌아나오는 남파랑길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사로 인해 폐쇄되면서 이곳에서 우틀하여 바로 중리항으로 진행하도록 변경된 듯하고, 현재 공사의 종료 여부는 알 길이 없으며 그래서 어느 길로 진행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라, 그냥 단축되어 쉬워진 코스를 따라 진행하기로 한다.
<동삼동패총(東三洞貝塚)>
동삼동패총(東三洞貝塚)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국가사적 제266호이다. 유적은 영도 동남부 하리 마을에 있으며, 한국해양대학교로 들어가는 갈림길의 동남쪽 일대이다. 1929년 일제강점기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 오이가와[及川民次郎]와 요코야마[橫山將三郎]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후 1963∼1964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모어(Mohr, A.) 및 샘플(Sample, L.L.)에 의해 시굴이 행해졌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69∼1971년까지 3년간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했으며, 2004년과 2005년에 1차와 2차 발굴 보고서가 발간되었고, 2015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부산박물관 등 여러 기관에서 10여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동삼동 패총은 패총뿐만 아니라 독무덤[옹관묘]·주거지·화덕자리 등 각종 생활 시설물을 포함하는 대규모 복합 유적으로, 약 7,500년 전부터 4,000년 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다. 퇴적 층위와 유물의 성격에 따라 초기에서 말기까지 5개 문화층으로 구분되며 각 문화층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빗살무늬토기와 석기·골각기·장신구·의례구를 비롯하여 일본 규슈[九州]산 흑요석과 조몬[繩문, 승문]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동삼동 패총은 남해안 지역 신석기 문화의 특징과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이른 시기부터 해양 활동을 통해 일본 규슈 지역까지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유엔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醫療支援團參戰記念碑)는 폭 2m에 이르는 기단부 가운데에 높이 20m의 탑신이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솟아 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5개 국가의 의료 지원 부대가 참전하였다. 이들 부대는 모두 부산항으로 들어와 서울, 부산 등지에서 유엔군과 한국군뿐만 아니라 포로와 민간인들을 치료하고 구호 활동을 펼쳤다. 특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3국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울에 메디컬센터[국립의료원의 전신]를 열어 의료 활동을 약 10년간 계속하다 한국 정부에 기증하였다. 1976년 9월 20일 국방부는 6·25 전쟁 때 의료단을 보낸 5개 국가의 적십자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태종대 공원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부산 영도 태종대(釜山影島太宗臺)>
부산 영도 태종대(釜山影島太宗臺)는 1972년 부산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국가 지정 문화재 명승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전국을 순회하던 중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였다고 하여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조선 태종도 이곳에서 유람하였다고 전하여지며, 한발이 있을 때 동래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영도의 남단 일대로 최고봉은 높이 250m이고, 산 전역이 수십 년 된 울창한 송림으로 싸여 있으며, 바다에 면한 돌출부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졌다.
태종대 해안단구의 특징은 파도에 침식된 계단 꼴의 바위들이 해안 곳곳에서 융기 파식대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인데, 태종대의 파식대의 단구애(절벽)는 수직에 가깝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기반암이 전체적으로 육지 쪽으로 기울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직 방향으로 금(절리)이 가 있기 때문이다. 태종대에서 동삼동까지만 분포하는 이곳의 퇴적암 암반은 약 1억 년부터 8천만 년 전 사이(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것이다.
태종대에는 산허리를 한 바퀴 도는 폭 10m, 연장 4.3㎞의 태종대 일주 순환 관광 도로와 오솔길 2.1㎞가 있다. 북쪽에는 영도와 방파제로 연결된 한국해양대학교가 있는 아치섬(朝島)이 보이고, 그 너머로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五六島)가 보인다. 동남쪽으로는 멀리 일본의 대마도(對馬島)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여기서 대마도와의 거리는 56㎞밖에 되지 않는다.
바닷가의 깎아 세운 듯한 벼랑 위에는 흰 등대가 있고, 그 밑으로 신선대(神仙臺)라 부르는 기암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망부석(望夫石)이 있다. 망부석에는 옛날 왜인에게 끌려간 남편을 이곳에 나와 기다리던 여인이 기다리다 지쳐 끝내 화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여진다.
절영로를 따라,
'중리맛집거리' 표지석 앞의 영도의 상징인 절영마(絶影馬) 동상을 지나,
<중리맛집거리>
부산광역시 명도구 동삼동, 중리해변에서 동쪽으로 중리고개에 이르는 도로 양편에 형성된 식당들이 밀집한 곳이 중리맛집거리이다. 약 30여 개의 식당들이 저마다의 맛을 자랑하는데, 옛날 말(馬)의 섬에서 이제는 맛(味)의 섬으로 바뀐 것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메뉴를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바다회를 비롯하여 돼지국밥, 밀면, 오리고기, 제주흑돼지, 아구찜, 칼국수, 소고기, 피자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다. 중리의 명소인 중리방파제등대와 노을전망대, 해녀전시관 등을 함께 돌아보는 것도 좋다.
이 거리 한복판에는 황금색의 힘차게 뛰어오르는 말 조형물이 있는데 바로 영도를 상징하는 절영마(絶影馬)의 모습이다. 이는 영도를 이야기할 때 말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도의 원래 이름이 절영도였는데, 이 말이 줄어 영도가 된 것이다. 그림자를 끊는다는 뜻인 절영마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기르던 말이 너무 빨라 자기의 그림자조차 끊어버렸다는 전설에 기인한 것이다. 이곳에는 신라 때부터 말을 놓아길렀다고 전하는데, 나라에 긴히 쓰이는 명마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닥 눈에 띄는 맛집들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따라,
중리항 방파제등대가 있는 중리해변에 도착하여,
우측 해안길을 따라 중리노을전망대로 진행하여,
기다리던 즐산팀원들과 함께 절영해안 탐방로로 들어선다.
이정표의 '75광장' 방향 절영해안 탐방로를 따라,
돌계단을 올라 해안절벽 위의 숲길로 들어섰다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게 되는데,
아찔한 해안절벽을 급경사의 철계단도 오르내리며 75광장 아래쯤을 지나는데,
탐방로 곳곳에는 만든 사람들의 정성이 스며들어 있고,
앉아서 해질녘이 되기를 기다려도 좋을 절영해안누리길 전망대를 지나게 된다.
<해안누리길>
노을빛 곱게 물들어 가는 바다를 걷다.
기암괴석이 노래하는 바다의 낭만 절영해안산책로.
영도팔경의 하나인 절영해안산책로는 2001년에 공공근로사업으로 완공하였습니다. 영선동에서 동삼동에 이르는 해안길을 따라 기암괴석이 빚어낸 환상의 해안경관을 가까이서 즐길 수 있습니다. 산책하는 내내 파도와 자갈, 바람의 합창 소리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명소로서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 '대한민국 해안누리길' 52개 노선 중에서도 꼭 한 번 가볼만한 5개 대표노선의 하나입니다.
주전자섬(생도), 대마도, 남형제도(외섬), 북형제도(형제섬), 목도, 거제도, 두도, 쥐섬(서도), 가덕도, 모자섬(경도) 등이 보이고,
'대한민국 해안누리길'은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 걷기 좋은 해안길입니다. 인위적인 보행길 조성이 아닌 자연 그대로이거나 이미 개발된 바닷길 중,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우리의 해양문화와 역사, 해양산업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을 엄선한 것입니다. 이 길을 걸으며 보다 많은 분들이 마음의 평온과 함께 우리 바다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느끼기 바랍니다. (안내판)
아찔한 철계단을 내려서서,
겨울이라 그런지 낚시꾼들이 보이지 않는 '노래미낚시터'를 지나고,
해안 바위절벽으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
그리 많이 흔들리지 않는 출렁다리도 지나게 되고,
해녀 쉼터가 있는 해안에서는 바윗돌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가까이로 들으며,
'대마도 전망대'를 지나게 된다.
한여름 뜨거운 땡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 쉼터쯤을 지나,
낙석방지 펜스 옆길을 따라,
'해녀촌'이라는 상호로 각종 해산물을 팔다가 태풍에 휩쓸려 잔해만 남은 터를 지나면,
높다란 바위절벽이 바닷가로 이어져 있지만 길흔적이 보이지 않아 잠시 망설이다가,
바위 절벽을 뚫어 만든 '흰 여울 해안터널'을 발견하고는 입구로 올라,
<흰 여울 해안 터널>
흰 여울 해안 터널은 절영해안산책로 근처 피아노계단과 파도광장 사이 급경사 계단 구간을 이용하기 어려운 노약자들의 보행 편의 제공을 위해, 해안 암벽에 약 70m 터널을 뚫어 2018년 12월 흰 여울 해안 터널을 개통하게 되었다. 터널 내부에 인조암 시공, 광섬유 판석 조명, 포토존 등을 설치하여 구민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방문하기 좋은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흰 여울 해안터널'로 들어서니,
터널 내부는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탐방객들이 추억을 남기려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우리도 터널 반대편 출구에서 추억을 남기고는,
출구로 나서니 '흰여울 해안터널' 명판이 걸려있다.
<흰여울 해안터널>
흰 여울 해안 터널은 영도구민의 염원을 모아 방문객들이 절영해안 산책로를 보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총 사업비 39억 6천만 원으로 2017년 8월에 길이 70m의 암벽 굴착공사에 착수하여 2018년 12월 준공, 개통하였습니다. 절영해안 산책로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과 함께, 터널 내부의 인조암을 타고 흐르는 조명과 사랑의 포토존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 2019. 3. 11. 부산광역시 영도구청장 -
흰여울 해안터널을 나오면 진행 방향 해안 산책로가 '공사중'이라 우회하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우측의 터널 개통 전 오르내렸던 피아노 계단을 올라 부산의 명소인 '흰여울 문화마을'을 탐방하게 되는데,
이곳은 인터넷 지도는 해안 산책로를 따르도록 길안내를 하고 있지만, 두루누비엡 지도는 우측 피아노계단을 올라 흰여울 문화마을을 탐방하도록 길안내를 하고 있는데, '흰여울 문화마을' 탐방로에는 이송도 전망대, 등대 쉼터, 흰여울 안내소와 영화 '변호인' 촬영장소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터널 개통 전에 많이 오르내렸을 피아노 계단을 올라,
이송도전망대 건물을 돌아오르면,
부산 남항 앞바다 묘박지와 송도해수욕장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이송도전망대를 지나게 된다.
'흰여울 문화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배들의 주차장' 묘박지(錨泊地)>
흰여울마을 앞바다에는 중.대형 선박들이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 부산 남항 외항의 묘박지이다. 부산항에 들어오는 화물선이나 원양어선, 선박 수리나 급유를 위해 찾아오는 선박이 닻을 내리고 잠시 머무는 곳이다. 한해의 끝인 12월 31일 자정, 이곳에서는 놀라운 '뱃고동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사뭇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흰여울 문화마을'의 이모저모를 둘러보는데,
이곳 흰여울 문화마을이 여러 영화들의 촬영지였다는 흔적도 곳곳에 보이고,
아기자기한 기념품과 흥미로운 상품을 파는 가게들을 둘러보는 재미를 느끼는 사이에,
'흰여울 문화마을 안내지도'가 있는 맏머리계단 입구에 도착하여,
'흰여울 문화마을' 탐방을 마감하고 맏머리 계단을 내려가,
다시 절영해안 산책로에 내려서서 우측으로 진행하게 된다.
배 모양의 카페 '마렌' 연결 통로 이어진 '절영해안 산책로' 입구로 진행하여,
좌틀하여 이정표의 '남항호안해상조망로' 방향으로 계단을 올라,
방파제 상부에 만들어진 '남항호안해상조망로'를 따르게 되고,
'남항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브릿지수변테마공원' 옆 방파제 길을 따라,
적색 등대가 서 있는 부산 남항 방파제 입구에서 우틀하여,
열린 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된다.
공장지대 도로같은 남항서로 도로를 따라,
'국제선 용품 유통센터' 앞을 지나,
좌틀하여 '깡깡이 마을' 방향 부둣가로 진행하니,
<깡깡이 마을>
배 표면에 슨 녹이나 조개같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깡깡거린다고 하여 붙여진 '깡깡이마을'은 대평동의 조선소 지역을 일컫는다. 억척스런 대평동의 '깡깡이 아지매'의 망치질 소리가 들리는 듯 어수선한 조선소 골목길이 이어진다.
배의 각종 부품이 진열된 가계도 보이고,
러시아 키릴 문자가 적힌 수리중인 배도 보이더니,
깡깡이 예술마을로 들어서려는데,
마침 영도대교가 도개행사 시간(매주 토 14:00~14:15)이어서 영도대교가 들어올려지고 있다.
<영도대교(影島大橋)>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 11월 23일 준공하였으며, 길이 214.63m, 너비 18.3m, 높이 7.2m로 국내 최초의 연륙교이자 유일한 일엽식 도개교로서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보급 및 수송로 구축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당시로서는 최초의 도개교로써 하루 7차례씩 영도대교 아래를 지나는 선박을 위해 다리가 들어올려지는 장관을 연출하여, 부산 최고의 명물로 손꼽혔으나 영도의 인구증가와 교통난 등으로 인하여 1966년 9월 1일 도개 기능이 중단되게 되었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교량으로 평가되어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11월 27일 기존 4차선 도로를 6차선으로 확장하여 도개기능 복원을 통해 다시금 부산의 명물로 옛 명성을 다시 찾고 있다. 현재는 매주 토요일 14:00~14:15(15분간) 다리를 들어올리는 도개행사를 한다.
매년 10월에는 부산의 근대문화유산이자 구민의 삶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영도다리를 소재로 한 전국 유일의 다리 축제인 영도다리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이를 통해 도개교로 다시 태어난 영도다리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영도의 대표적 문화 관광자원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하고 있다.
근대 수리조선 1번지, 영도 깡깡이 예술마을 조형물을 지나,
'대평동 깡깡이 예술마을 거리 박물관' 벽보 조형물을 보며,
<대평동 깡깡이 예술마을 거리 박물관>
「대한민국 최초로 엔진을 장착한 목선을 만든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진 곳」
부산항 개항 이후 일본 어선들은 조선의 해안까지 진출해 고기를 잡았고, 영도는 어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폭풍을 피하거나 기다리기 적합했던 대풍포(待風浦, 깡깡이 마을의 옛 이름)를 어선을 수리하고 식수를 공급받는 곳으로 이용하면서 깡깡이 마을에는 조선소나 선박수리 관련 업체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1887년 고베 출신 일본인 조선사업자인 '다나카 와카지로(田中若次郞)'는 자갈치 해안에서 목선 제조업으로 출발하여 1912년 현재 영도 대평 초등학교 자리에 목선을 만드는 '다나카 조선소'를 설립했고, 대풍포 일대가 매축된 후 현 우리조선(주)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다나카 조선소를 대한민국 근대 조선산업의 발상지로 보는 이유는 바람이나 증기로 추진력을 얻는 방식이 아닌 엔진으로 동력을 얻는 선박을 최초로 개발하고 보급한 곳이기 때문이다. 다나카 조선소 자리는 《대양조선철공》, 《구일조선》, 《남양조선》, 《유진조선》, 《에스엔케이조선》으로 사업자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가 현재는 《우리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오고 있다. 해방 이후 다나카 조선소를 비롯해 대평동에 있던 조선소를 불하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체적인 기술 개발을 통해 깡깡이 마을을 7~80년대 수리조선업의 메카로 성장시켰다. (안내판)
배의 구조와 만들어지는 과정은 물론 배의 변천사에 대한 설명을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고,
<깡깡이 안내센터 - 신기한 선박 체험관>
19세기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선소가 세워졌던 영도 대평동(남항동)은 근대 조선산업의 발상지로서 다양한 근대산업유산과 생활문화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녹슨 배의 표면을 벗겨내는 망치질 소리에서 유해하여 '깡깡이 마을'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항구도시 부산 사람들의 역동적인 삶과 독특한 산업현장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신기한 선박 체험관은 깡깡이 마을의 물양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인선을 활용하여 다양한 예술가들의 상상이 더해진 입체적인 선박체험공간이다. 선박 안과 밖의 조경 '바다정원(Floating Garden)'은 녹지가 부족한 마을에 생기를 더하는 선상 휴게공간이기도 하다. (설명판)
'영도 대풍포 매립지' 표지석을 지나며 좌틀하여 진행하다가,
<영도 대풍포 매립공사(影島待風浦埋立工事)>
원래 「바람이 기운차게 일어나는 포구」라는 의미로 풍발포(風發浦)라고도 불렸던 대풍포는 1900년대 초부터 일본 어선들이 몰려들면서 변화하게 되었다. 3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어선들이 큰 풍랑을 피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던 영도 대풍포는 배를 정박하기 좋았고 왜관이 가까이 있어 급수나 선박의 수리가 용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곳은 자연적인 만의 형성으로 풍랑을 피할 수 있는 포구라는 의미로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포(待風浦)라는 지명이 더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부산 주재 일본 영사는 한국 정부의 고관에게 대풍포 일대 사용을 요청하였고, 그 고관은 토지의 소유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구두로 사용을 허가하였다. 이에 이 지역 한국인 소유자가 동래부에서 대풍포 일대의 토지 소유 증명서를 발급받아 한양으로 올라가 정부 당국에 소원하였으나 정부에서는 모두가 모른다는 핑계로 일관하였다. 결국 대풍포 일대의 개인 소유 토지는 일본인 전관 거류민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뒤 일본인 시무라[志村]라는 인물이 대풍포를 매립하려고 일본 거류민단의 승낙을 얻어 매립권을 가지고 최초로 매립을 시도했으나 매축 공사를 시작하지 못했고, 또 다른 일본인 오사와[大澤]라는 사람이 매립권을 양도받아 1916년 매축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6월 준공하였다. 10년에 걸친 장기 공사였지만 구체적인 공사 진행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영도 대풍포 매립 공사에서 총 132,660㎡가 매립되었다. 현재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동, 대교동, 남항동에 포함되는 이 일대는 대풍포 매축 공사의 완성과 이후 1930년대 식민지 공업화에 편승하여 여러 개의 조선소들이 들어서는 등 공업지대로 변신하였다.
바닷가 도로를 따라 우틀하면 영도대교가 나타나며,
'영도대교' 직전에서 우측 계단길로 올라가면,
어디선가 '굳세어라 금순아'란 노래가 들려오는 현인 선생 동상과 노래비가 있는 소공원에 올라서게 된다.
<굳세어라 금순아> -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보았다 /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드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이다 /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철의 장막 모진 설음 받고서 살아를 간들 /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 통일 그날이 오면 / 손을 잡고 웃어나 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인>
1919년 영도구 영선동에서 출생하여 2002년 4월 13일 타계하신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고,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여 6.25동란 당시 실향민들의 애절한 사연의 무대가 되었던 영도대교와 당시 유행했던 대중가요『굳세어라 금순아』의 시대적 배경을 담아 우리 민족의 삶과 추억을 되새기고 후세에 역사적 교훈을 주기 위해 설치된 노래비입니다. 현인 동상의 오른쪽 발에 살짝 발을 올려놓으면 현인의 히트곡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현인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노래활동을 시작한 이른바 '가수 1세대'의 대표적인 대중가수이며, 현인의 노래들은 1950~1960년대 격동의 시대에 서민들의 아픔과 향수를 달래주기도 하고,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한편 그는 샹송, 칸초네, 탱고, 맘보 등 서양의 새로운 음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는데, 《베사메무쵸》나 《고엽》 등의 번안곡도 히트시켰다. 1974년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7년 만인 1981년 다시 돌아와 말년에도 가수활동을 계속하였다.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 연예협회 부이사장 등을 지냈고, 한국전쟁 종군연예인 공로패, 1999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대상(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굳세어라 금순아' 노랫가락을 뒤로 흘러보내며 영도대교로 들어서면,
잠시 전에 지나온 깡깡이마을 수리조선소가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고,
잠시 전 깡깡이마을을 지나며 보았단 영도대교를 번쩍 들어올리는 도개시설을 지나자,
좌측으로 부산의 명물 '자갈치시장'이 보이더니,
남파랑길 2코스의 종점인 영도대교 입구 중구관광안내소 앞에 도착하여,
남파랑길 1, 2코스 이어걷기를 마감한다.
트레킹 출발지였던 오륙도선착장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버스가 이곳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중구관광안내소 안에서 찬바람을 피하는데,
일찌감치 도착하여 롯데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던 분들도 합류하고,
자갈치시장에서 꼼장어에 소주를 시켜 부산의 정취를 음미하던 분들도 가세하여,
트레킹은 뒷전이고 애시당초 잿밥에 눈독을 들였던 분들이 미리와서 낮술을 즐기는 뒤풀이 장소에 도착하고,
재각각이 즐거웠는지는 모를 중구난방의 뒤풀이 시간을 가지다가,
그 모든 못난 생각과 행위들일랑 고스란히 영도에 남겨두고,
머~얼~고 힘겨울 코리아트레일의 첫걸음에 희미한 희망의 끈을 연결하여,
평상심을 되찾고자 일상으로 향한다.
4,500km에 달하는 코리아둘레길의 첫걸음으로 오늘 걸은 남파랑길 1, 2코스!
진정 멋지고 걷는 재미 또한 만끽할 수 있었던 걷기길이다.
2개 코스를 하루에 걷느라 가보고 싶었던 여러 곳을 그냥 지나쳐야 했고,
여러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심지어는 안내판을 읽어 볼 틈도 없이 지나야 했기에...
그래도 이렇게라도 둘러보고 아쉬움이 큰 장소는 후일 보충수업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도 싶다.
오늘 트레킹에서의 압권은 정규 코스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봉래산 정상이 단연 원픽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부산 방문과 단편적인 정보로 쌓아뒀던 조각그림들이
일시에 제자리를 찾아 완성된 부산 그림을 얻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지리산둘레길 주천~운봉~인월 구간에서 노정되었던 문제점들이
이번 남파랑길 트레킹에서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동안의 어려운 마루금 산행을 하는 동안에 형성되었던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을 다시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미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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