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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009년 두타산 청옥산 단풍산행 : 투타 청옥 무릉계곡의 진면목을 보다.

by 재희다 2009. 10. 25.

산 행 지 : 청옥산 두타산 (강원도 삼척시)

산 행 일 : 2009. 10. 24.(토)

산행코스 : 중봉리 ~ 고적대 ~ 망군대 ~ 연칠성령 ~ 청옥산 ~ 박달재 ~ 두타산 ~ 산성삼거리 ~ 산성폭포

산성터 ~ 삼화사 ~ 매표소 (도상거리기준 19km, 9시간 40분)

산행참가 : 19명.

 

<산행지도>

 

지난해 단풍산행이 설악산 서북능선과 십이선녀탕계곡을 연결한 장쾌하고도 아기자기한 산행이었기에 올해 단풍산행에 대한 기대도 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대에 걸맞는 산행지를 쉽게 찾아 내기가 만만치 않았음은 사실이다. 잠시 가리봉으로 갈까도 고려했으나 여러가지 상황으로 다른 곳을 물색할 수 밖에 없던 차에, 다행히 회장님 회사 직원들 야휴회를 무릉계곡으로 간다고 하여 곰곰 생각해 보았더니, 빼어난 경관을 간직하고 있으나 서울에서 쉽게 가기가 어려워서 많은 회원들이 아직 가보지 못하였고 대간길을 걸으면서도 추억이 많은 곳이라서 백두산우회 단풍산행지로서 부족함이 없을듯하여 올해의 단풍산행은 무릉계곡으로 정했다.  이렇듯 쉽지 않게 산행지가 결정되자 다음은 무박산행을 즐기는 우리들의 관행에 맞는 코스가 고민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일상에서 실패의 경험이 성취의 기쁨을 배가시키고, 여름날의 폭풍우를 이겨낸 가을의 수확이 훨씬 풍성하게 다가옴을 알고 있다. 또한 산행에서도 힘든 산행 다음의 맛난 뒤풀이 식사가 우리의 만족감을 더욱더 크게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인지하고 있다. 지도를 펼쳐 놓고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중봉리 중봉분교터를 찾아 내고는, "대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라는 윤곽을 그린다. 그런데 중봉리 쪽에서의 산행은 산행지도와 산행기를 뒤져 보았지만 거의 자료를 찾아 내지를 못하던 차에 우리 회원 한분이 중봉리 쪽 산행을 해본 경험이 있다고 하여 코스를 확정했다. 이제 날씨만 좋으면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 산행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양재로 향한다.

 

양재를 출발한 버스에 몸을 싣고 곤한 잠에 취했다가 속도가 많이 느려진듯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을 뜨니, 어느덧 버스는 국도를 벗어나 중봉리 계곡을 달리고 있다. 하장면 면사무소 직원과의 통화에서 중봉분교까지 버스가 진입할 수 있다는 예기는 들었으나 , 군데군데 비포장도 있고, 갈림길도 여럿 있어서 깜깜한 한밤중에 중봉분교터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버스는 몇 번의 가다 서기를 반복한 끝에 우리나라 오지마을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중봉분교터에 어렵게 도착했다.  

 

 

중봉리 중봉분교(폐교) 도착.

 

분교터 직전 안소내골 갈림길까지는 포장이 되어 있었으나, 그다음부터는 비포장 임도여서 계곡 안쪽에 버스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없으면 어쩌나 우려하며 조심스럽게 진행하여 도착해 보니, 과거에 운동장이었음직한 너른 공터가 나오고 간이 화장실까지 있다. 

 

버스는 중봉분교 운동장터에서 돌려서 떠나고, 깜깜한 어둠 속에 남겨진 우리들은 산행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산행 준비를 마친 후 출발한다. 임도가 분교터 100여 미터 전에 있는 교량을 건너 이어져 있어서, 왔던 길을 따라 잠시 후진 후 교량을 건너 임도를 따른다. 교량을 건너자 임도는 갈라지는데, 좌측 길은 중봉산 지능선 위로 올라가는 길이고, 우측이 계곡을 따라 고적대 방향으로 이어지는 우리가 가야 할 임도다.

 

 

임도를 10여분 따르면 자연휴식년제 실시 지역 철망이 가로막는다.

철망을 따라 우측으로 조금 가면 바로 철망이 끝나고 다시 임도로 복귀하게 된다. 

 

 

첫 번째 중봉계곡을 건넌다.

여름철 비가 많을 때에는 감히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수량이 줄어있어서 계곡에 듬성듬성 놓여있는 바위들을 징검다리 삼아 쉽게 건널 수 있다. 고적대 아래에 있는 민가까지는 7~8회 계곡을 이쪽저쪽으로 건너게 된다. 

 

 

세 번째로 계곡을 건넌다.

널찍한 임도가 완만한 오름길을 이루고 있어서 백두들의 산행이 보통 때 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민가 직전 갈림길 도착.

이곳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청옥산 1시간 40분"이란 대리석 표석이 세워져 있다. 윗면에는 "절터"라고 음각되어 있어서 이곳이 절터였음을 짐작케 한다. 우측 길은 사면길로 망군대로 이어지는 듯한데,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군데군데 길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한다고 하여, 밤에 이 길을 제대로 따를 자신이 없어서 좌측 정연홍씨 집으로 이어진 길을 따른다. 

 

 

갈림길에서 좌측 길을 따르면 정연홍씨라는 분이 거주하고 있다는 민가가 나온다.

마당에 소형 트럭이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쥔장은 곤히 잠들어 있는 듯하여,

민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질듯한 소로를 따라 바로 오른다. 

 

민가 마당 한켠에는 조그만 샘이 있고 집 주위에는 토종벌 꿀통이 많이 놓여 있다. 민가 좌측 오솔길을 따르자, 조그만 등성이를 넘어 비탈로 이어지더니 이내 널찍한 밭이 나온다. 혹시 밭에서 능선으로 이어진 길이 있는지 살펴보지만 길 흔적은 밭까지만 이어져 있는 듯하여, 다시 조금 전에 지나왔던 등성이로 돌아 나와 등성이를 따라 희미하게 이어지는 흔적을 따라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합장묘지 도착. 

 

민가에서 고적대로 이어지는 등로에 대한 정보는 사실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나마 가진 정보는 옛날에 만들어진 듯한 "중봉산 안내도"에 고적대로 이어진 등로가 묘지를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고, 강릉의 어느 산악회에서 지난 초여름 이곳을 지나며 찍은 묘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사진에 검은 대리석 비석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묘터 직전에 조그만 묘터를 지났는데, 그곳에는 비석이 없어서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게 아닌지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차에, 이 묘지에 다다라서 비석을 확인하고는, 이제는 우리가 예정된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어둠과 안갯속을 희미한 족적이나마 더듬으며 고적대로 향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다. 한 시간여 동안을 위쪽 중봉능선 방향의 지능선을 따라 잡목숲을 헤치며 오르자, 중봉산에서 고적대로 이어지는 능선인 듯한 곳에 이르러서야 비교적 희미하나마 길 흔적이 뚜렷해진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혹시나 제대로 등로를 찾지 못해 나만 의지해 따르는 회원들을 고생시키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다행히 한두번의 짧은 알바는 있었지만 그런대로 무난하게 중봉능선에 오르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맥이 풀린다.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나니 주변의 풀과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산행을 한다는 느낌도 되찾게 된다.

 

 

고적대 직전 바위전망대 도착.

안개가 없었으면 중봉리 열두당골 계곡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을 텐데,

그랬으면 이곳에서 느긋이 앉아서 중봉산과 청옥산을 바라보며 여유 있는 쉼을 하려 했다.

하지만 주위는 온통 흰색 안개만 보이는 지라 셔터만 한번 누르고는 이내 고적대를 향한다.           

 

 

정연홍씨 민가를 지난 후로 처음 만나는 사람의 흔적.

"경고문"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다. 경고 고마워유 ~~ㅋㅋ 

 

 

고적대 도착.

이곳 고적대에서 동해 바다에서 솟구치는 일출을 보리라 예정했었는데,

시간은 거의 정확했으나 안개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고적대(1,353m)>

동해시, 삼척시, 정선군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이 대를 이루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쪽으로 뻗은 백두대간 상의 청옥산, 두타산과 함께 해동삼봉이라 일컬어지며, 신선이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이다.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고적대 이정표.

옛적 몹시도 추운 겨울날 백두대간을 걸을 때는 백봉령으로 갔지만, 오늘은 반대방향 청옥산으로 간다.

 

 

고적대 내림길. 

옛날에 이 길을 왔던가 싶게 전혀 기억에 없다. 아마도 안개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ㅉㅉ 

 

 

연칠성령(連七星嶺) 정상. 

 

<연칠성령(連七星嶺)>

청옥산과 고적대 사이의 안부 고개로, 글자 그대로 새기면 칠성님께로 이어지는 고개라는 의미이지만, 이곳 땅이름 유래에 따르면 동쪽 사원터 방면에서 서쪽 하장면 방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 일곱 개의 등성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성스레 칠성님께 돌 하나를 보태드리고,

 

연칠성령 인증을 남기고 청옥산을 향한다.

 

 

청옥산 정상 도착.

안갯속에서 별다른 흥미 거리도 찾지 못한 채, 혹시나 있을 옛 추억을 더듬다 보니 어느덧 청옥산 정상에 도착한다. 

 

청옥산 정상석.

 

또 다른 정상석.

 

<청옥산(1,404m)>

청옥산의 "청옥"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의 일곱 가지 보석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두타라는 이름과 함께 불가와 관련이 있는 듯 하지만, 우가 어떤 연유로 그리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청옥산 정상의 널찍한 헬기장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어둠과 안갯속에서 오지의 산길을 더듬느라 육체의 갈구는 잊고 있었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할 속세 번민의 한 가지를 해소한다. 

 

 

청옥산 증명을 남기고 청옥산을 뒤로하고 두타산을 향한다. 

 

 

 

청옥산 남쪽 60여 미터 지점에 있는 샘터를 찾았으나, 

 

샘터의 흔적만이 남아 있고 샘물은 없다. 

 

 

학등 갈림길.

무릉계곡에서 최고의 경치를 간직한 곳이 학등능선이라고들 한다.

무릉계곡을 거슬러 올라 문간재를 지나고 하늘문을 통과하여 하늘로 오르는 능선이 학등이다. 

 

 

청옥산 내림길에서 발견한 옛 기억!

 

옛날 몹시도 춥던 어느 겨울날 아침에, 막 떠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아직 아침 식사도 못한 채 얼어붙는 몸뚱이를 지탱하며 회장님과 함께 두타산을 거처 오르던 청옥산 오름길의 추억이 생각나는 장소다. 그때 뒤돌아 본 두타산 위로 막 떠오르던 햇살이 너무나 반가워서 잊히지가 않았나 보다. 지금은 두타산 방향으로 온통 자욱한 안개구름이 가리고 있어서 두타산의 듬직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때의 "살 것 같다!"라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두타산 방향. 흰 안개가 가리고 있는 곳에 두타산이 있었는데..ㅉㅉ

 

 

문바위재.

'문(門)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박달재를 지난다. 

 

청옥산과 두타산을 잇는 7.5km 능선은 해발 1,300m 높이의 백두대간으로 마치 거대한 횃대 같다고 하여 옷걸이 고갯길이라는 의미의 의가등(衣架嶝)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두타산 오름길이 꾀나 길게 느껴질 때쯤에서 잠시 쉬어 간다.

아직도 두타산이 1.3km나 남았다.  

 

 

 

두타산 정상 도착.  

 

 

<두타산(1,362m)>

두타산은 부처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박달령을 사이에 두고 청옥산과 마주하고 있으며, 울창한 수림과 기암절벽에 노송이 뿌리를 내려 산세가 수려하여 강원도 국민관광지1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란 속세 번뇌의 티끌을 털어 없애 버리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아니하며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을 말한다. 후세에는 산야와 세상을 순력하면서 온갖 신고를 인내하는 행각의 수행, 또는 그러한 수행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두타산의 정상에서는 강원 내륙의 명산들은 물론 동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안개 자욱한 두타산의 정상석을 보니 또 옛 생각이 난다. 처음 이곳을 왔던 추운 겨울날 신새벽에, 이 정상석을 사진에 담으려 카메라를 꺼냈더니 날씨가 너무나 추워서 카메라 배터리가 작동을 하지 않아서 그냥 돌아서야 했던 그때가..ㅉㅉ 

 

안개 낀 두타산 정상에서 잠시 옛 추억을 나누고..,

 

 

오늘은 두타산 정상 증명사진을 제대로 남긴다. 

 

 

 

두타산 정상을 출발하여 무릉계곡 방향으로 가파른 내림길을 20여분 내려왔는데도 아직 안개만 보인다.

아마도 이곳 전망바위에서의 조망이 썩 좋을 듯한데..ㅉㅉ 

 

 

쉰움산 갈림길. 

안내판이 이렇게 있을 줄 모르고 혹시나 쉰움산 쪽으로 갈까 봐 염려를 많이 했었는데..ㅉㅉ 

 

<쉰움산(883m)>

두타산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예전에 오십정산(五十井山)으로 불리던 쉰움산이 있다. 아마도 쉰(五十) 우물(井) 산 즉 쉰우물산이 쉰움산으로 쉽게 불리어지고 있는 듯하다.

 

 

쉰움산 갈림길에서 좌측의 산성터 방향 능선길로 들어서면,  

 

암릉길이 이어지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락도 나타난다. 

 

 

단풍이 뵈지 않으니 아쉽지만 소나무를 배경으로 ..ㅉㅉ

 

 

대궐터 삼거리.

이곳에서 우측의 횃대등 방향의 능선을 타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연될까 저어되어 좌측 지름길로 들어선다. 

 

 

탐스러운 금강송을 벗 삼아서 걷다가,  

 

안갯속을 걷느라 배낭을 비울 겨를이 없어서, 널찍한 바위에 앉아 배낭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본다.

 

이쯤에서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성터 흔적인듯한 돌무더기도 보인다. 

 

 

고도를 낮출수록 안개는 한층 옅어지고, 조금씩 주위 분간이 가능해질 즈음에,  

 

 

앞서가던 백두들이 걸음을 멈추고 계곡 쪽으로 뭔가를 보고 있는데...??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단풍이 여기에 있다!!! 

 

안갯속을 헤매다 드디어 발견한 단풍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시야가 선명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려다 보이는 계곡은 온통 불바다가 되어있다. 

 

 

이제는 등로 주위도 온통 단풍 단풍이다. 

 

 

깔딱고개인 듯, 등로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등로는 단풍 불구덩이 속으로 이어진다. 

 

 

푸른 소나무와 노란 단풍이 함께 어우러지며,  

 

 

이제 등로는 온통 불길에 휩싸였다. 

 

나뭇잎이 노랑 빨강으로 물이 드는 것은, 여름철 동안에 광합성을 하던 옆록소가 기온이 내려가면서 나뭇잎에서 먼저 소멸됨에 따라 녹색의 옆록소를 잃어버린 나뭇잎이 단풍이 들게 된다. 그런데 왜 어떤 잎사귀는 빨간색으로, 또 어떤 잎사귀는 노란색으로 물드는지에도 생존의 비밀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나뭇잎을 갉아먹는 해충들이 빨간색을 싫어가기 때문에 남북으로 뻗은 산맥에는 빨간색 단풍이 많고, 동서로 뻗은 산맥에는 노란색 단풍이 많다고 한다. 이해 곤란!!

 

 

대궐터를 지나 계곡으로 내려가, 

 

 

지도상 대궐터로 표시된 지계곡을 건넌다. 

 

계곡의 단풍. 

 

 

조그만 계곡을 건너서 산성터로 오르는 지능선의 단풍. 

 

 

깔딱고개 입구 이정표를 지난다.

깔딱고개를 내려왔기에 망정이지 역으로 올랐다면 땀께나 흘렸을 듯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단풍산행의 기분을 느끼며.. 

 

2009년 단풍산행의 기억이 오래도록 추억되리란 확신을 가지며,

 

능선과 계곡의 단풍 모습들을 이것저것 담아 본다.

 

 

널찍한 바위 위로 이어진 길이 마치 포장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계곡 건너편 능선이 총 천연색 파노라마로 상영을 하고 있다.

 

 

단풍 터널길이 쉰 총각의 마음도 물들게 한다!

 

 

이제 무릉계곡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무릉계곡을 둘러싼 기암절벽도 장관이다. 

 

 

산성폭포 도착. 

 

산성폭포가 건너다 보이는 널찍한 조망바위 위에서,

 

 

 

 

화염에 휩싸인 산성폭포를 조망하며,

 

 

지난했던 지난 새벽 중봉능선 오름길의 고단함은 모두 단풍 불길에 태워 버리며,  

 

불붙은 계곡 건너 갈미봉 쪽 지능선들의 모습을 조망한다. 

 

 

 

 

 

 

 

 

산성12폭포를 조망하는 자리에 거북이가 한 마리 있다는데,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북이!

모습은 물개 인디..ㅋㅋ 

 

산성폭포 주변 조망.

 

산성폭포 모습.

 

산성폭포와 거북바위. 

 

산성폭포 거너편 기암절벽도 불붙고 있다. 

 

 

산성폭포를 뒤로하고 내림길 전망바위에서 무릉계곡 건너편으로 관음사를 조망하고,

 

당겨본 관음사 모습.

 

투타산성으로 내려서는 백두들.

 

 

 

산성 뒤쪽 절벽 모습.

 

 

 

당겨본 두타산성에 도착한 백두들.  

 

두타산성의 백두들.

 

내려다본 두타산성 모습.

 

 

두타산성에서 무릉계곡을 조망하고 있는 백두들.

 

두타산성 안내판.

 

두타산선은 임진왜란 때 삼척 의병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모두 죽임을 당한 역사의 현장으로, 산성은 보잘것없고 초라하지만 두타산 최고의 조망지이다. 사방이 기암괴석이요,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두타산성 뒷쪽 기암절벽 모습. 

 

두타산성의 백곰바위 안내판. 

 

백곰바위와 백총무. 

다들 백씨라서 잘 어울리는 듯..ㅋㅋ

 

돌아본 두타산성 모습. 

 

두타산성 증명사진을 한 장 남겨 놓는다.

 

 

 

두타산성에서 바라본 산성폭포 방향의 기암들이 마치 비석처럼 보인다.

 

계곡 건너편 기암절벽 위에도 사람들이 있다. 

 

무릉계곡 조망.

 

 

두타산성을 뒤로하고 하산길로 들어선다.

 

무릉계곡 하류 문수봉 방향 조망.

 

 

돌아본 두타산성 오름길 모습.

 

 

무릉계곡 속으로 잦아드는 백두들.

 

 

무릉계곡 두타산성 갈림길 도착.

 

 

 

무릉계곡으로 내려오니 단풍 나들이 인파가 많이 보인다.

 

다리에서 본 무릉계곡 하류 쪽 모습.

 

상류 쪽 모습.

 

 

노란 단풍터널을 지나고,

 

 

학소대에 도착한다.

 

갈수기라 물이 말라버린 학소대 모습.

 

 

관음사 갈림길을 지나,

 

 

 

삼화사에 도착한다.

 

좌측 관음사 뒤쪽 산폭포 모습.

 

당겨본 산폭포.

 

삼화사 앞마당의 단풍들.

 

삼화사 전경.

 

<삼화사>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7세기 설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는 9세기 설, 그리고 흥덕왕 때 (?~836) 창건했다는 설이 분분하다. 이 중 7세기 창건설에는 청년장수 김재량을 연모했던 세 처녀가 여신이 되어 자장율사를 도와 삼화사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겠다는 야심이 온 나라에 퍼져 있었던 선덕여왕 때의 신라 서라벌에는 진골 출신의 아름다운 세 처녀가 살고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나림, 혈례, 골화였다. 이 세 여인은 집안끼리 잘 아는 처지였다. 그래서 어른들끼리는 서로 왕래가 잦았고 이웃사촌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자신들도 서로 왕래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세 여인은 혼인 적령기가 되자 신랑감을 고르게 되었다. 때 마침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전쟁이 터져 신라의 청년들은 징집되기에 이르렀다. 세 여인의 이웃 마을에 살던 건장하고 인물이 수려했던 청년장수 김재량도 전쟁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을 사람들은 전장에 떠나는 청년들을 위해 큰 잔치를 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 자리에는 나림과 혈례, 골화도 동참하게 되었다.
“신라의 청년들이 백제군을 물리치고 금의환향해야 할 텐데….”
세 여인은 똑같은 마음으로 기원을 하며 수많은 청년장수들 가운데 자신의 신랑감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중에는 수려한 외모의 김재량이 단연 눈에 띄었다. 세 여인도 김재량을 본 순간 모두가 한눈에 반해 버렸다.
“우리 신라에 저토록 멋있는 청년이 있었다니….”
그날부터 세 처녀는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천장에 아른거리는 청년장수 김재량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사병에 걸릴 만큼 김재량에 대한 연모의 정을 가진 세 연인은 모두 자신의 집에 있는 시녀를 보내 김재량과 연락을 취했다.
“그대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소녀는 하루도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디 저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갑자기 세 처녀의 프러포즈를 받은 김재량도 당황했다. 모두가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 어느 여인을 선택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달리해 세 여인을 번갈아 가며 만나면서 정을 통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곧 서라벌에 알려지고 말았다. 세 연인과 정을 통하던 김재량은 무척 당황했다. 곧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부담감도 마음을 압박해 왔다.
“한 여인만을 선택하라는 것은 나에게 너무 가혹하구나. 하지만 어찌하랴. 내 전장에 나가 큰 공을 세운 뒤 신분 높은 장수가 되어 이들 여인 모두를 아내로 맞이하리라.”
한 사내를 함께 사랑했던 세 여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부터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하더니 점차 질투하고 적대시하는 사이가 돼 버렸다. 이러한 시기에 결국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세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던 김재량은 전쟁터로 나갔다. 큰 공을 세워 신분을 상승시켜 세 여인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김재량은 용감하게 싸워 큰 전과를 얻었다. 나라에서도 김재량의 공로를 인정해 큰 상과 신분상승을 해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이제 김재량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세 연인을 아내로 맞아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은 듯했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대열에는 백제 첩자가 있어 김재량을 죽이고 말았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 사실을 접한 세 처녀는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구나!” 오랜 기간 집안에서 칩거하던 세 처녀는 깊은 산중으로 은둔의 길을 떠났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강원도 무릉계곡의 두타산이었다. 이곳에서 깊은 수행을 한 세 처녀는 여신(女神)이 되었다. 이들은 신이 되어서도 김재량을 잊지 못했다. 그들은 김재량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시켰다. 세 여신은 서로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내 서방 김재량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질투하며 싸움을 일삼았다. 이들은 또 마을 사람들에게 두타산에 많은 재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를 종용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는 보복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산에 문수성지를 만들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던 자장율사가 두타산에 이르러 산세에 감복했다. “천하의 명당이로구나. 이곳에는 반드시 부처님 도량이 있어야 해.” 그곳에 사찰 창건을 하기로 마음먹은 자장율사는 도량이 설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를 본 나림여신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한편, 자장율사의 입산을 방해하기 위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해 유혹했다.
“스님, 이 깊은 산중에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소납은 산세가 좋은 이곳에 부처님 도량을 세우고자 마땅한 장소를 찾고 있소.”
나림여신은 간드러진 말투로 스님에게 달라붙었다.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소녀도 그 큰일에 동참하고자 하오니 동행을 허락해 주세요.”
“산세가 험하니 도량이 만들어지면 다시 찾아오시지요.”
자장율사가 아무리 거절해도 여인은 계속 그를 뒤따랐다. 밤이 이슥해지자 유숙할 곳을 찾던 자장율사는 사람이 살다가 떠난 외딴집에 여장을 풀었다.
나림여신을 도술을 부려 맛있는 음식을 한상 가득 장만해 자장율사 앞에 가져다 놓았다.
“스님, 오랫동안 걸으셔서 시장하실 터이니 마음껏 드시고 푹 쉬었다 가세요.”
잠시 좌정에 든 자장율사는 눈을 크게 뜨고 여인에게 엄격한 태도로 꾸짖듯 말했다.
“이 보시오. 당신은 지금 신통력으로 변장을 해 소납을 유혹하려 하고 있소. 하나 내 눈에는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인분을 싼 비단만 보이는 구료.”
깜짝 놀란 나림여신은 도력과 인품이 뛰어난 자장율사에 감복하고 말았다.
“큰스님!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스님에게 피해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나림여신이 자장율사의 법력에 감복해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자 혈례와 골화여신은 비웃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한낱 인간에 불과한 스님에게 감복당하다니. 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이들은 자장율사를 혼내 줄 요량으로 호랑이로 변해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자장율사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이들을 꾸짖었다.
“이런 버릇없는 축생을 보았는가. 축생 주제에 신성한 도량을 세우는 불사를 막다니. 정녕 지옥에 떨어지고 싶은 것이냐.”
하지만 호랑이로 변한 두 신도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큰 발톱을 들어 달려들 태세를 취하며 자장율사에게 겁을 주었다. 그러자 자장율사는 진언을 외우며 몸을 금강석같이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모르고 호랑이는 발톱으로 스님을 내리쳤다. 그러자 발톱이 으스러지면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이 모습을 본 다른 호랑이는 기겁을 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자장율사가 다시 진언을 외우자 도망가던 호랑이는 오금을 당기며 데굴데굴 굴렀다.
“이제 너희들의 본모습을 드러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무간지옥에 떨어뜨려 버릴 것이야.”
다시 여신의 모습을 돌아온 두 여신은 잘못을 참회하며 용서를 구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한 남자를 그리워하며 서로 다퉜습니다. 오늘 큰스님의 법력에 감화되어 다시는 어리석은 마음을 품지 않으며 평생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섭수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세 여신은 모두 자장율사에게 귀의해 부처님 제자가 되어 사찰불사를 도우니 이 절이 삼화사다. 또한 삼화사가 있는 마을 이름을 삼화동이라 불러 세 여인의 화합정신을 기렸다고 한다.

 

 

삼화사 경내에는 "삼화사 국행수륙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나라에서 시행하는 불교의식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무수한 고혼을 위로하고 삼국민의 화합을 위하여 사찰의 이름 삼공(三公)을 삼화사(三和寺) 개칭하고 이 곳에서 국행수륙대재를 설행 하였다. 또한 태조실록과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개국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많은 고혼들, 특히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그 왕족, 또 공양왕의 재 즉위를 도모하기 위해 모여든 세력들의 수많은 사람들을 이 지방에서 죽임을 당하게 하였음의 업장을 씻고,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삼화사에서 봄과 가을 매년 두 차례씩 18년 동안 국행수륙대재를 설행 하였다.

이번 국행수륙대재는 역사 기록에 의해 나타난 고혼들은 물론 6.25 동란과 자연재해, 산업재해의 고혼 들까지 모두 불러, 부처님의 가피로 극락왕생하기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행한다고 한다. 천지명양수륙대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大齋儀纂要)의 근거로 2005년부터 매년 10월 동해시 삼화사에서 성대히 봉행하고 있는 수륙대재는 5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복원 재현된 것이다.

 

 

삼화사 앞쪽 계곡의 보호수 모습이 마치...??

 

삼화사 일주문과 무릉반석.

 

무릉계곡 조망.

 

 

삼화사 일주문을 지난다.

 

 

무릉반석 안내문.

 

무릉반석 모습.

 

 

금란정 안내문.

 

금란정 모습.

 

 

무릉계곡 소개글.

 

무릉계곡 하류 쪽 조망.

 

 

무릉계곡 매표소 도착.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동해시에 있는 부곡사우나로 향한다.

 

동해시내에서 발견한 ??자동차.

 

 

버스를 타고 한참의 알바 끝에 도착한 동해시 묵호항.

 

 

선명횟집에서 무한리필? 회로 산행의 대미를 장식한다.

 

 

오늘의 산행을 정리하고,

 

바다에서 잡은 회를 마음껏 먹으며, 그래도 젤로 맛난 것은 처음 먹어본 곰치국이다. 

 

 

 

 

 

한참 동안 보지 못한 포천 임소장이 삼척으로 연수 차 와 있다가, 뒤풀이에 함께 했다.

 

 

뒤풀이를 마치고,

동해항에서 환담을 나누고는 서울로 향한다.

 

 

 

 

오랜만에 밤늦은 영등포 밤거리를 한번 누벼 본다.

 

 

아쉬움이 남는 올해의 단풍산행을 뒤로하고,

행복을 나누는 백두산우회원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다음 산행에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