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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대간남진 41차(여원재~정령치) : 마을과 들판을 가로지른 백두대간

by 재희다 2015. 10. 25.

산 행 지 : 백두대간 41차(여원재~정령치)

산 행 일 : 2015. 10. 24.(토)

산행코스 : 여원재 ~ 입망치 ~ 수정봉 ~ 고기리 ~ 고리봉 ~ 정령치

              (거리 12km)

산행참가 : 19백두.

 

<산행코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머슴도 쉴 수가 있고 휴가도 갈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고용주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머슴의 권리는 제한되고 고용주의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 일 년에 한두 번은 있어 온 상황이라 별반 억울하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지만, 그동안 이어온 대간남진 능선을 잇지못한다는 게 살짝 아쉬울 따름이다. 대간길은 10여년 전에 한번 걸은 길이라 꼭 땜빵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크지 않아, 산행하신 분들의 사진을 관련 예깃거리와 함께 남김으로써 아쉬움에 대신하고자 한다.

 

 

여원재 산행 들머리의 이정표.

여느 때와 달리 날이 훤할 때에야 산행을 시작한 모양이다.

 

<여원재(女院峙, 480m)>
남원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읍으로 가다 보면 해발 480m의 여원재를 넘게 되는데, 남원시 이백면과 운봉읍의 경계에 있는 고개다.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에는 남원과 운봉, 함양을 오가는 길손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개였다.
여원재의 유래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때, 이곳 운봉현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고갯마루 주변 주막집에 들락이던 왜구 무리들은 주모에게 손찌검을 했다. 이에 주모는 날이 시퍼런 칼로 왜구의 손을 탄 왼쪽 가슴을 잘라내고 자결했다. 한편으로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운봉에 당도한 이성계는, 꿈자리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 부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아 전투에 대승을 거둔다. 이성계는 꿈에 나타난 이 노파가 왜구의 손찌검으로 부터 몸을 지키려고 자결한 주모의 원신이라고 믿고, 고개마루 암벽에 여상을 암각한 다음 주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을 지어 '여원'이라 불렀다. 그 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여원재라 불렀으며, 지금도 여원재를 지나는 도로 아래의 암벽에 왼쪽 젖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서 있다고 한다.

 

 

685봉의 이정목 기둥에는 갓바래봉이라 써 놓았다.

 

 

입망치.

 

<입망치(笠望峙, 545m)>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와 운봉읍 행정리 갓바래기를 이어주는 고개다. 갓바래재라고도 불리며,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 입촌 마을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듯하다. 또 다른 설은 입망치는 '삿갓 입(笠)', '바랄 망(望)' 자를 쓰는데, 조선 중엽 청주 한씨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이 마을은 중이 삿갓을 쓰고 바랑을 지고 가는 모습의 산혈(山穴)이 있어서 갓바래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또한 갓(笠)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 입촌(笠村)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수정봉을 향하는 덕현 형.

 

 

 

 

 

수정봉 정상 도착.

 

<수정봉(水晶峰, 804.7m)>
전북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주천면 덕치리, 이백면 양가리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다. 학이 날개를 펴고 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봉우리다. 산 중턱에 수정(水晶)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서 수정봉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두 개의 산봉우리를 표주박 형태로 감싸는 양지산성이 있다. 수정봉은 지리산의 한 봉우리로 운봉 쪽에서 보면 야산과 같이 야트막해 보이지만, 남원 쪽에서 바라보면 지리산의 주능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하늘금에 맞닿아 있고 산세는 부드러우며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수정봉 정상에서 아침 식사.

 

 

 

수정봉 정상 인증.

 

 

이정목에 덕운봉이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는 곳을 지난다.

 

 

노치마을 당산제전(堂山祭典).

 

 

노치마을 당산 소나무.

 

 

노치마을에서 돌아본 수정봉 방향.

 

 

노치샘.

 

 

 

노치마을 쉼터.

 

<노치(蘆峙)마을(550m)>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은 조선 초에 경주 정씨가 터를 잡고, 이어 경주 이씨가 들어와 형성되었다. 해발 550m의 고랭지로, 본래 이름은 갈재였다. 마을 앞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에 갈대가 많이 있어 갈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갈대 노(蘆)', '고개 치(峙)' 자를 써서 노치마을이라 불린다. 한국전쟁 때에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으로 완전히 불타 버린 아픔이 있는 이 마을은 백두대간 능선이 통과하는 유일한 마을이다. 대간이 통과하는 동쪽은 운봉읍에, 서쪽은 주천면에 속해 있어서,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 때 축성된 노치산성이 있는데,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중요한 요충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갈대 노(蘆)', '고개 치(峙)' 자를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평지가 아닌 고개임을 암시한다. 노치 마을은 섬진강과 진주 남강의 분수령으로 물의 흐름이 나뉘게 된다. 운봉고원인 이곳은 옛날 바다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바다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가재 마을은 바닷가재에서 딴 이름이고, 주촌(舟村)은 '배 마을'이란 뜻이며, 고리봉은 배를 맨 고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가정집 앞에 핀 국화가 어여쁘다.

 

 

백두대간 능선상에 있는 유일한 아스팔트 도로인 60번 지방도.

 

 

 

 

고기삼거리에서 큰고리봉을 향한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고기삼거리>
남원시 주천면에 속하는 고기리는 고촌리와 내기리를 병합하여 고촌과 내기에서 한글자씩을 따서 '고기리'라 하였다. 고촌리는 마을이 산 높은 곳에 위치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며, 내기리는 깊은 산중의 안쪽에 있는 안터마을에서 유래되었다.

 

 

고리봉 중턱쯤을 지난다.

 

 

 

 

 

 

고리봉(큰고리봉) 도착.

 

<큰고리봉(1,305m)>
전북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북고리봉 또는 큰고리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복대와 성삼재 사이에 있는 작은고리봉과 구별을 위해 큰고리봉이라 부른다. 이곳의 해발 고도가 조금 높아 그리 부르는 모양이다. 또 달리 부르는 이름은 환봉(環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아래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왔다. 수일 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과(대추, 밤, 곶감)와 돼지 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정령치로 향한다.

 

 

 

정령치 건너편 만복대 방향.

 

 

마애불상군과 정령치 습지를 탐방하러 좌측 갈림길로 들어서면...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 보물 1123호)>
지리산 서북능선 큰고리봉 아래 개령암터 뒤 절벽에 새긴 이곳 마애불은 크고 작은 12구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불상군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3구를 제외하고는 훼손이 심한 상태이며, 가장 큰 불상은 4m로 조각 솜씨가 가장 뛰어나고 불상 아래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큰 체구와 형식화된 이목구비, 간결한 옷주름 등 각부의 조각 양식과 수법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1~2m의 작은 불상들 역시 조각 수법이 모두 같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봐서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시 정령치로 향하는 대간길로 돌아나와 내려서니,

 

 

정령치 도착.

 

<정령치(鄭嶺峙, 1,172m)>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덕동리 달궁마을로 넘어가는 지리산의 큰 고개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의하면, 기원전 84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鄭)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고 하여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령치는 황령치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 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다.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가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다가 천지를 울리는 천둥 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 나는 쪽을 바라 보니, 정령치 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 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 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게되어, 고갯 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사변 전까지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있어서, 옛날 전설(마한의 별궁 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정령치 휴게소 앞의 이정석.

 

금번 산행에 참여하지 못하여 다른 분들이 담아 온 사진으로 대신한다.

 

어느덧 대간남진길도 지리산 주능선만 남겨지게 되었다.

지리산 주능선 대간길은 태극종주 구간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대간남진 산행길은 정령치에서 마감하고자 하며,

아울러 지금까지의 대간남진길 무사 완주를 자축한다.

 

못다이은 지리산 천왕봉까지의 대간길은

지리산 태극종주 능선을 걸으며 잇게 될 것이고,

아울러 지리산 태극종주 능선을 따르며

주변의 지능선들과 골짜기를 두루두루 둘러보고자 한다.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지리산을 모르고서 어찌 한국의 산악인이라 자부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