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모악산(금산사 원점회귀) 전북 김제시.
산 행 일 : 2018. 01. 27.(토)
산행코스 : 금산사 주차장 ~ 화율봉 ~ 배재 ~ 장근재 ~ 모악산(795m) ~ 북봉 ~ 매봉 ~ 도통사능선 ~ 백운정
~ 모악산 마실길 ~ 금산사 ~ 금산사 주차장 (17km, 7시간 소요)
산행참가 : 19백두.
<산행지도>
전 지구적 온난화라는 말이 무색하게 올 겨울 들어 우리나라는 강추위가 연일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오죽하면 '삼한사냉(三寒四冷)'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이니 말이다. 본디 이번 주에는 한강기맥 운두령에서 불발현 구간을 가려고 계획했었으나, 산행지인 홍천군 내면의 기온이 영하 25도로 예보되고 있어서, 산 위의 기온은 영하 30도 아래가 예상되어 부득이 산행지를 그동안 가지 않았던 100대 명산 중의 한 곳인 모악산으로 급히 변경하게 되었다. 모악산이 있는 전북 전주와 김제의 기온도 영하 15도로 예보되어 있으니 추운 것은 매 한가지 이겠지만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수준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산행지를 모악산으로 정하고 코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20km 정도의 산행코스를 만들어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모악산 정상을 두 번 오르는 8자 코스는 모악산을 서로 다른 코스로 두번 오르는 것이 되어 회원들의 원성이 염려되었기에, 가급적 긴 지능선을 타고 올랐다가 내려오는 코스로 정하고, 내려오는 길에 김제의 고찰인 금산사도 둘러보기로 했다.
평소에 잘 입지 않던 오리털 내피까지 껴입고 양재에 도착하니, 이번에 회사 행사로 참석을 못한다던 창병씨가 와 있었다. 나도 회사 행사가 있어서 참석이 곤란했는지라 산행안내를 창병씨에게 맡기려로 했더니, 산행은 못 가고 배웅만 나왔다고 했다. 나도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밥줄 달고 있는 회사일을 제처두고 산행을 할 수는 없는 입장이니 여러모로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걱정은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고, 우선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편안하게 달리는 버스에서 잠이 든 사이에 버스는 모악산 금산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한참을 더 머문 듯하다. 버스에 불이 켜지고 곤한 잠에서 께어나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산행준비를 마치고 버스 밖으로 나서니, 넓은 주차장에서 들머리 방향이 어디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들머리가 있는 모악교 방향을 찾아내고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산행을 시작한다.
주차장에서 모악교를 건너 모악산 유스호스텔 입구에서 우측 소로를 따라 들어가서 희미한 족적을 쫓아 산모퉁이를 우측으로 돌아가면 화율봉 능선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나온다.
화율봉으로 오르는 능선길은 수레길 수준으로 널찍하며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진다.
차가운 밤공기를 폐부에 가득 불어넣으며 황톳길 화율봉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임도 방향 갈림길이 있는 능선 분기점에 올라서게 되고,
잠시 숨을 고르고는, 좌측 화율봉 방향의 오름길 방향으로 진행한다.
쌍분 묘지를 지나며 능선 오름길 경사가 조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화율봉 능선에 있는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 잠시 쉼을 하며 목을 축인다.
경사가 무척 가팔라지며 돌칼 모양의 선바위를 지나면,
이내 화율봉 정상에 서게 된다.
화율봉의 유래는 찾을 길이 없고, 화율봉(609m)이라 적은 자연석을 정상 이정목에 기대어 놓았다.
화율봉은 옛날에 걸었던 호남정맥에서 분기된 모악지맥에 있는 봉우리로, 이제부터 모악산을 지나 매봉까지는 모악지맥을 따르게 된다. 호남정맥은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분기하여 진안 곰티, 임실 슬치, 오봉산(五峰山)과 옥정호 옆 초당골을 지나 모악산 분기점에 닿았다가 남쪽 광양 백운산까지 뻗어 간다. 호남정맥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모악지맥은 동쪽 만경강(萬頃江)과 서쪽 동진강(東津江)의 분수령을 이룬 뒤, 국사봉·화율봉·배재·장근재 등 15.8㎞를 달려서 모악산을 지나 진봉면 봉화산(烽火山)에 이르러 끝을 맺는다.
화율봉 이정표에서 모악산 쪽으로 10여 미터 이동하면 오래된 묵묘가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동쪽 모악산 정상 방향으로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잠시 쉼을 하며 붉게 물들고 있는 동쪽 하늘을 조망한다.
화율봉에서 바라본 모악산 방향.
일출이 임박했음인지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
화율봉을 뒤로하고 모악산 방향으로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면,
화율봉이라 표시된 이정표에 모악산 정상까지 5.4km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다.
매운 겨울바람에 한껏 동여 멘 백두들이 모악산을 향하고 있다.
화율봉에서 작은 봉우리 하나를 지나 내려서면, 작은 의자와 모악산 안내판이 있는 고수재를 지나게 된다.
고수재 이정표.
고수재에 있는 모악산 탐방로 안내판.
고수재를 지나자 능선은 마치 평지처럼 널찍하게 이어진다.
앞쪽으로 가야 할 모악산 정상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대창골이라는 이정목이 세워진 쉼터에 도착한다.
대창골 쉼터로 내려서는 백두들.
대창골 쉼터에 도착하니 그동안 붉은 기운이 짙어지던 동쪽 하늘에서 일출이 시작된다.
2018년 1월 27일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대창골 쉼터에서 일출 장면을 본 후 잠시 내려서면,
배재에 도착한다.
<배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와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를 연결하는 고개다. 김제 청룡사(靑龍寺)에서 완주군 구이면 배재 울과 탑선마을로 넘어가는 배재는, 옛적에 배가 넘어 다녔다는 전설 때문에 배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배재 이정목.
차가운 겨울바람을 피해, 배재 우측 탑선마을로 이어지는 등로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좁은 등로에서 일열로 앉아서 하는 식사라 각자 싸온 것 일부만 욱여넣고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친다.
배재를 뒤로하고 장근재로 향하며 본 모악산 방향.
배재에서 20여분 만에 장근재를 지나게 된다.
<장근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와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장근재는 소나 말이 짐을 싣는 길마 형국이라서 길마재라고도 하며, 미치(美峙)라고도 한다.
장근재를 지나자 모악산 남봉을 향한 오름길이 가팔라진다.
급할 게 없는 산행이지만, 추운 날씨로 쉬지 않고 모악산 정상을 향해 천천히 오른다.
드디어 모악산 정상을 향한 급경사의 끝이 보이는가 싶더니,
모악산 정상이 6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앞쪽으로 방송 중계소가 자리한 모악산 정상이 다가온다.
남쪽 임실 방향 산그림.
돌아본 화율봉 방향의 능선.
새벽에 출발했던 금산산 주차장 방향.
모악산 남봉 직전에 있는 전망대에서 금산사 방향 조망을 즐기는 백두들.
하얀 눈이 덮여 있는 모악산 남봉(제3헬기장)에 도착한 최 회장님.
모악산 남봉 정상 증명.
동쪽 완주군 구이면 방향.
동남쪽 방향 산그림.
남쪽 임실 방향 산그림.
남서쪽 화율봉 방향으로 지나온 능선이 한눈에 가늠된다.
모악산 정상 방향.
남봉을 뒤로하고 KBS 모악산중계소가 자리한 모악산 정상을 향하는데,
모악산 정상은 바로 갈 수 없고 좌측 아래로 돌아서 중계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우회길로 내려서는 백두들.
모악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KBS 모악산중계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개방시간이 09:00~16:00로 안내되어 있다.
모처럼 산행에 참석하여 힘들어하시던 석 여사님도 모악산 정상으로 오른다.
중계소 건물 옆에 자리한 모악산 정상석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중계소 내부로 들어서서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오는 백두들.
새벽부터 걸어온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 구이면 방향으로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동쪽 구이면 방향.
동북쪽 전주시 방향.
탐방객들을 위해 KBS 모악산중계소 옥상위로 올라서 조망을 볼수있게 해 놓았다.
KBS모악산중계소 옥상 위에 올라서 본 동쪽 완주군 구이면 방향.
남쪽 임실군 방향.
남서쪽 화율봉 방향.
서쪽 김제시 금산면 방향.
서북쪽 구성산 방향.
북쪽 매봉 방향.
북동쪽 전주시 방향.
전주시를 배경으로.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을 뒤로하고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내려선다.
모악산 정상석은 중계소 건물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모악산(母岳山, 796m)>
김제평야의 동쪽에 우뚝 솟아 호남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모악산은, 전주.김제 일원의 근교산으로, 유명한 금산사와 함께 이 고장 사람들의 당일 산행지로 각광받는 산이다.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어 ‘모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남평야의 젖줄 구실을 하는 구이저수지·금평저수지·안덕저수지와 불선제·중인제·갈마제 등의 물이 모두 이 곳 모악산으로부터 흘러든다.
모악산 정상에는 1978년부터 KBS 모악산중계소가 들어서며 정상 일대가 출입금지되었으나, 2008년 4월부터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복면인들의 모악산 인증.
전주시 방향으로도 찰칵!
모악산 정상을 뒤로하고 금산사를 향해 하산을 시작한다.
갈림길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매봉을 향한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무제봉을 거쳐 완주군 구이면 방향으로 가게 된다.
모악산 정상을 뒤로하고 하산길에 오른 백두들.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니 수레길 수준의 등로가 이어진다.
모악산 북봉 헬기장에서 돌아본 모악산 정상 방향.
매봉이 앞쪽으로 보이는 암릉에 도착하여, 암릉 내림길에 얼음과 눈이 덮여 있어서 아이젠을 착용한다.
암릉에서 본 전주시 방향.
동쪽 구이면 방향.
우측으로 연불암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고, 좌측으로는 봉우리를 우회하는 길이 있는 갈림길을 지난다.
매봉 정상에 도착하여 좌측 도통산 능선으로 들어선다.
널찍한 헬기장이 있는 565봉에 도착하여 여유로운 쉼을 한다.
565봉 헬기장에 도착하는 백두들.
이제 햇볕이 아닌 그늘을 찾아 쉼을 하고 있다.
오늘은 강추위 때문에 한강기맥 산행을 미루고 모악산으로 온 것인데..ㅉㅉ
모악산 정상에서 매봉으로 이어진 능선 조망.
565봉 헬기장에서의 느긋한 쉼을 뒤로하고 호젓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도통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잠시 후 자그마한 돌탑을 지나면,
이내 '모악산 마실길'과 만나는 백운정이 있는 갈림길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직진의 능선을 따르면 도통사와 닭지봉을 거쳐 금산사 주차장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좌틀하여 '모악산 마실길'을 따라 금산사로 향한다.
백운정에 올라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다들 금산사가 궁금한지 서둘러 금산사를 향한다.
'귀신사'가 있는 김제시 금구면 청도리 방향 조망.
좌측 봉우리가 구성산(489.6m)이다.
'후미는 내가~~'라는 분들끼리 구성산을 배경으로.
금산사로 이어지는 모악산 마실길 코스로 접어드니, 소나무 둥치에 '예향천리 모악산 마실길'이란 포지판이 걸려 있다.
오솔길은 소나무숲 속으로 이어지며, 짙은 나무향을 한껏 폐부에 불어넣게 한다.
사면을 따라 이어지던 오솔길은 금동계곡을 만나 계곡 아래로 방향을 틀고,
계곡을 건너 한적한 수레길로 이어진다.
어디로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이런 길은 마냥 하염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앞서갔던 백두들이 편백나무숲 쉼터에서 쉼을 하고 있다.
덕분에 늦게 도착한 나도 예쁜 딸기를 입안에 넣어 볼 수 있었다.
홀로 걸어도 외롭지 않을 오솔길을 따르다 보면,
언젠가는 모악산 마실길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연리지 나무 쉼터도 지난다.
나는 연리지 나무를 보면 고통이 느껴지는데, 다른 이들은 사랑을 느끼나 보다.
금산산에서 널연골을 따라 모악산 정상으로 오르는 도로와 만나, 우틀하여 금산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마마도 모악산 마실길을 따르면 백운동 뽕밭이 나오나 보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금산사로 향한다.
돌아본 모악산 정상 방향.
금산사 부도전(浮屠殿)을 지난다.
부도전은 금산사의 동쪽 0.2㎞ 지점에 있는데, 이곳에는 혜덕왕사의 탑비를 비롯하여 남악당선사(南嶽堂禪師)의 부도 등 모두 12기의 부도와 2기의 비석이 있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金堤金山寺慧德王師塔碑)>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고려 전기 혜덕왕사의 탑비로, 혜덕왕사(慧德王師, 1038~1096)는 고려 전기의 승려로, 속성은 이(李)고 이름은 소현(韶顯)이다. 11세 때 해안사(海安寺)의 지광국사(智光國師) 제자로 들어갔고, 1061년(문종 15) 경기도 개성의 송악산에 있는 왕륜사(王輪寺)에서 치러진 승과에서 합격하였다. 1079년(문종 33)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뒤 금산사를 재건하고 봉천원구(奉天院區)와 광교원구(廣敎院區)를 확장하였다.
1096년(고려 숙종 1) 12월 봉천원구에서 59세로 입적하자, 나라에서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린 뒤, 1111년(예종 6) 탑호를 진응탑비(眞應塔碑)라 하고 금산사 동쪽 부도전 내에 세웠다. 비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이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없으며, 탑비와 귀부, 비신, 그리고 지대석만 남아 있다. 비신은 장방형으로 높이 2.78m, 너비 1.5m, 두께 0.18m에 이르는 대리석으로서, 높이 0.6m, 길이 2.55m의 화강암제 귀부 위에 세워져 있다. 귀부의 구상(龜像)은 몸체에 비해서 머리는 작은 편이며, 조각이 매우 뚜렷하여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글씨는 사방 약 2m 정도로 새겨져 있으며, 당나라 구양순체의 해서로 매우 정교하면서 대단히 뛰어난 솜씨이다. 전면은 43행 77자씩 새겼고, 둘레에는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육각의 갑문(甲文) 중앙부에는 비신 삽입부를 조각하였는데, 둘레를 22엽의 중판화문(重瓣花文)을 새긴 귀부를 방형 지대석 위에 석재로 새겼으며, 지대석 네 측면에는 파린문(波鱗文)을 새겼다.
비의 제액(題額)은 ‘증시혜덕왕사진응지탑비명(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이고 비제(碑題)는 ‘고려국전주대유가업금산사보리수정진요익융광구우호세능화중관증시혜덕왕사진응지탑비명병서(高麗國全州大楡伽業金山寺普利首精進饒益融廣口祐護世能化中觀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幷序)’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표적인 문벌 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唯識) 경전을 간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도 언급하고 있다.
음기에는 혜덕왕사의 문도(門徒)를 열거하였는데, 스승인 지광국사(智光國師)의 비석과 같이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사지전후몰세자(師之前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僧統), 수좌(首座), 삼중대사(三重大師), 중대사(重大師), 대사(大師)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인이고, 언급된 인명은 1800여 명에 이른다.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등의 기록에는 글을 지은 사람을 이모(李某)로, 쓴 사람을 정윤(鄭允)으로 보고 있으며, 음기를 쓴 사람을 채유탄(蔡惟誕)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문 끝에 ‘천경원년세재신묘맹하월(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이란 기년이 있어 1111년(예종 6)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혜덕왕사가 입적하고 나서 15년 후의 일이다.
청룡사 갈림길을 지난다.
언제가 시간을 주체 할길 없어지면 한번 와 보리라..ㅋㅋ
<청룡사(靑龍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17교구 금산사의 말사로, 청룡사(靑龍寺)의 창건은 고려시대인 1079년(문종 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 혜덕왕사(慧德王師)가 금산사를 크게 중창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혜덕왕사는 금산사 중창과 더불어 모악산 내에 40여 개의 암자를 세웠는데, 이때 청룡사의 전신인 용장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없는데, 근대에 와서 1954년 승려 용봉이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 뒤 용장사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청룡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이 때 관음전을 건립하고 완주군에 있는 옛 봉서사에서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을 모셔와 관음전에 봉안하였다. 그 뒤 붕괴 직전에 놓인 관음전을 1974년에 주지 월정이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
도로를 따라 잠시 내려서니 금산사에 도착한다.
금산사의 규모가 예상을 훌쩍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금산사 천왕문.
<금산사(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 호남 미륵신앙의 도량이다. 드넓은 경내에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노주, 석련대, 오층석탑, 혜덕왕사 진응탑비, 당간지주, 석종, 육각다층석탑, 석등 등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으며, 대적광전, 대장전, 명부전, 나한전,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 등의 건물과 심원암, 용천암, 청련암 등 부속 암자를 거느린 거찰이다.
모악산과 금산사라는 이름은 큰 산을 뜻하는 고어 엄뫼, 큼뫼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는 어머니의 뫼라는 뜻의 모악으로, 또 큼은 금(金)으로, 뫼는 산(山)으로 적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통 평야인 이 지역에서, 옛날부터 이 산의 존재가 외경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처음 지어졌다. 창건 당시에는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모셨고, 금당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그 이래로 금산사는 미륵신앙, 즉 신라 오교의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이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전에 있는 미륵불이 주불이며 석가불은 대장전에 따로 모셔져 있다.
한편, 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했던 후백제 왕 견훤이 이 절을 자신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중수했다는 설도 있다. 견훤은 말년에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신검을 비롯해 양검, 용검 등 아들들에게 붙잡혀 금산사에 유폐되기도 했다.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다. 석 달 동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금성(지금의 나주)으로 도망쳐 왕건에게 투항하고, 자기 아들을 쳐줄 것을 청했다. 왕건이 마침내 그의 아들들을 쳐 후삼국을 통일한 지 며칠 만에, 견훤은 착잡한 번민과 울화에 싸여 등창이 나서 논산시 여산에 있던 황산사에서 죽었다.
유난히 커 보이는 금산사 당간지주를 지난다.
경내로 들어서자 우람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우측으로 보이는 누각이 보제루다.
보제루 아래를 통해 계단을 오르면, 곧 눈이 확 트이면서 널찍한 절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당 오른쪽에 맨 먼저 눈길을 끄는 서향 건물이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이다.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불이 주불이라 한다.
<미륵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3층 법당으로, 이전에 있던 건물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후 인조 13년(1635) 수문대사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1988년부터 5년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치렀다.
겉보기에는 3층이지만 안에 들어가서 보면 모두 트인 통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에 측면 4칸이며,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건물 전체의 높이는 18.91m, 측면 길이는 15.45m에 달하며, 하부의 규모에 비해 위로 올라가면서 급격히 체감되기 때문에 매우 장중하고 든든한 느낌을 준다. 앞쪽과 양끝에 낮은 돌계단을 가진 석조 기단을 갖추었고, 자연석으로 된 초석 위에 굵은 원주로 사방의 우주(隅柱)를 세웠다.
1층에 고주(高柱) 4개와 그 밖에 20개의 변주(邊柱)를 세우고 안쪽의 고주와 변주를 커다란 퇴보로 연결하였다. 2층은 이 퇴보 위에 2층 변주를 세우고 그 안쪽의 고주와는 역시 퇴보로 연결하였다. 3층은 고주를 그대로 우주로 삼으면서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고주는 하나의 원목으로 할 수가 없어서 몇 토막의 나무를 이어 만들었다. 이와 같은 다층의 복잡한 건물 짜임은 전부터 내려오던 목조탑 건축 방식을 끌어온 것이다. 다시 말해 목탑의 사리공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 심주에 각층의 기둥이 연결되는 방식이 다층전각에 응용된 것이다. 즉, 한 개의 심주 대신에 네 개의 고주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이라 쓰인 편액이 붙어 있다. 미륵은 다른 말로 자씨라고도 불리고 화림원의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니, 세 편액에 적힌 말은 모두 미륵불을 모신 곳임을 뜻한다.
안에는 옥내 입불로는 동양에서 가장 큰 높이 11.82m의 미륵입상과 그 좌우에 높이 8.79m 되는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인조 5년(1627) 수문대사에 의해 조성된 소조불들로, 그중 주불은 1934년에 실화로 소실되었는데 1938년에 다시 석고로 복원하였다. 애초에 진표율사에 의해 모셔졌던 불상은 보처불이 없는 독존으로 철불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미륵전은 태우고 철불은 뜯어갔다고 한다.
이 미륵전과 같은 다층 불전 형식은 유독 전라·충청 지방의 옛 백제 땅에서만 볼 수 있어서 백제계 건축의 또 다른 특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이 있다.
육각다층석탑.
미륵전 앞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 현재 높이 2.18m의 점판암제 육각다층탑이 서 있다. 금산사에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본래 고려 혜덕왕사가 금산사를 중창할 당시 원로대덕들의 주석처로 만들었던 봉천원의 정중탑(庭中塔)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인조 때 금산사를 복구하면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탑인 데 비해 이 탑은 점판암으로 조성한 육각탑인 점이 특이하다. 고려 시대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점판암 탑이나 육각, 팔각 등 다각탑들이 만들어졌다.
화강석으로 된 3중 기단 위에 육각형의 지붕돌 11매가 올려져 있고, 몸돌은 맨 위 두 층에만 남아 있다. 3중의 기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폭과 두께가 조금씩 줄어들며 각 면마다 사자상 등을 양각했고 맨 위에는 단엽의 복련을 조각했다. 그 위에 앙련대가 중첩되면서 기단부를 형성한다.
지붕돌 모서리는 반전이 강하여 팔랑팔랑 들린 느낌을 주며 풍령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고 아래쪽 층급받침을 중심으로 초화교룡(草花蛟龍) 등의 문양이 선각되어 있다. 몸돌 각 면에는 불좌상이 선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없어졌고 나중에 올려놓은 화강석 상륜이 올라앉아 있다.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차분하면서도 상당히 장식적인 탑이다. 보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련대.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의 준말로 불상을 모셨던 대석을 말한다. 지금은 대적광전에서 미륵전 쪽으로 10m쯤 떨어진 곳에 있으나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 있는 곳이 원래 위치라면 금산사 가람배치에 일대 수정을 해야 할 것이다.
높이 1.67m, 둘레 10m가 넘는 거대한 규모로 전체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지만, 마치 각 부분을 다른 돌로 만들어 얹은 듯이 상대, 중대, 하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현재 지대석은 매몰되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대 측면은 십각인데 각 면마다 가늘고 긴 안상을 음각하고 그 안에는 서화(瑞花)를 하나씩 새겼으며, 그 가운데 두 면에는 서화형 대신 사자상을 조각했다. 하대 윗면에는 측면 십각의 각면마다 큼직한 복판의 연꽃잎을 꽉 차게 엎어 새겼다. 중대는 육각이고 각 면에는 역시 안상을 새겼으며, 상대는 원형인데 빙 둘러서 여러 겹의 앙련을 푸짐하게 조각했다.
상대 윗부분에는 깊이 52㎝ 되는 네모진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다. 불상의 발아래 튀어나온 부분을 여기에 꽂아 세웠던 자취이다. 연화대의 규모로 보아 위에 세웠던 불상도 상당히 거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 연화대가 진표율사가 조성했던 미륵장륙상이 섰던 대석이고 이 자리가 원래 미륵전의 위치가 아닐까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대석 안상이나 연판 등의 조각 수법과 각부의 양식에서 고려 초기의 작풍이 완연하기 때문에 이 석련대의 제작 연대를 10세기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보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 내부에는 많은 불상이 모셔져 있다.
돌아본 미륵전 전경.
마당 좌측에는 경부전과 대장전이 자리하고 있다.
우측이 대장전이고 중앙이 경부전이다.
대적광전 뒤쪽에는 조사전과 나한전이 있다.
경부전.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는 대장전.
앞에는 석등 한 기가 있고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제자인 아난, 가섭을 모셨다. 『금산사 사적기』에 따르면 이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중창할 당시 건립한 정중목탑(庭中木塔)이었다고 한다. 목탑 전각 속에도 보통 불상이나 경전을 봉안하므로, 인조 13년(1635) 수문대사가 옛 자리에 중건하면서 목탑이 일반 불전의 모습으로 변형되었고 1922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신라 시대 목탑의 모습을 지금의 대장전에서 더듬어보기란 어렵지만,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 예전 목탑의 흔적인 복발과 보주가 남아 있다. 보물 제827호이다.
범종각.
가람이 넓고 볼거리가 많아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다시 와야겠다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금산사를 뒤로한다.
돌아본 금산사 일주문.
잠시 후 속칭 견원석성이라 불리는 성문을 지난다.
금산사 매표소를 나온다.
모악산 금산사 집단시설지구의 모악산 도립공원 안내도.
집단시설지구에는 많은 상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직은 비수기라 그런지 탐방객들이 많지 않아 썰렁한 분위기다.
새벽에 시작한 산행 들머리도 이제는 훤히 보인다.
기다리던 애마에 오르며 오늘 산행을 마무리한다.
돌아본 모악산 정상 방향.
금산면 원평장터 옆에 있는 작은 목욕탕에서 땀을 닦고,
금구면으로 이동하여,
금구초등학교에 버스를 주차하고,
금구면 사무소 앞에 있는 '예촌'이라는 국수전문점에서 뒤풀이를 시작한다.
이곳은 지난해 자전거로 삼남길을 가면서 들렸던 곳인데,
시골의 식당임에도 맛집으로 추천하기에 손색이 없었던 곳이다.
국수전문점인데 안주거리도 꾀나 푸짐하고 맛깔나다.
시골 사랑방 분위기를 풍기는 곳에서 맛깔난 안주로 뒷풀이를 시작한다.
삼합과 낙지전골로 시작하여 여러 가지 안주를 맛보고 국수로 남은 빈틈을 채운다.
뒤풀이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한다.
추위를 피해서 선택한 모악산 산행이었지만,
100대 명산의 한 곳이란 명성이 바래지 않는 멋진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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