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산행>
산행장소 :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 (서울둘레길 2구간 일부)
산행일시 : 2018. 12. 22.(토) 오전 09:00 ~ 12:00
집합장소 : 경의중앙선 양원역 2번 출구 09:00
산행코스 : 양원역 ~ 중랑캠핑숲 ~ 망우산 ~ 용마산 ~ 아차산 ~ 아차산생태공원
(약 9km, 3시간)
산행참가 : 19백두.
<송년회>
일 시 : 2018. 12. 22.(토) 14:00 ~ 16:00
장 소 : 강진수산 (선릉역 4번 출구 70m, 테헤란오피스빌딩 B1)
(02-562-1155)
송년회참가 : 29백두.
<송년산행 지도>
매년 12월 마지막 산행을 서울에서 송년회와 함께 진행했던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매년 송년회를 앞둔 10월쯤부터 회장님과 총무님은 무척 바빠진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다들 일거리가 줄어서 야단인데, 좋은 일이라 해얄지는 모르겠으나, 거의 30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기란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교통편도 고려해야 하고, 근처에 목감탕도 있어야 하고, 저렴하면서도 맛나야 하고, 우아하며 격조 높은 장소가 세상에 그리 흔하지를 않으니 말이다. 회장님과 총무님 그리고 영식 형님까지 동원되어 장소를 물색하다가, 이러저러한 조건들을 충족하는 장소가 마땅치가 않아서 부득이 몇 해 전에 갔던 강진수산에서 올해의 송년회 행사를 갖기로 했다. 여러 분들이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여 안타깝고 죄스런 마음으로, 송년산행 출발지점인 경의중앙선 양원역으로 향한다.
경의중앙선은 전철이 자주 다니지를 않아서 한대를 놓치면 20여분을 기다려야 한다. 양원역에 9시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기로 했는데, 이전 열차를 타면 20여분 일찍 도착하고, 이후 열차는 14분 늦게 된다. 환승역인 이촌역에서 경의중앙선 승강장으로 들어서니 낮익은 얼굴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 이전 열차가 10여분 연착을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양원역에 도착하였고, 열차의 이칸저칸에서 백두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각에 도착하는 열차에 승차하신 한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열차에 타고 양원역에 도착한 것이다. 누군가가 백두산우회 전용열차라고 한마디 한다. 이제는 백두산우회가 열차까지 전용으로..ㅋㅋ
경의중앙선 양원역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한다.
잠시 후 약속시간에 도착 예정이던 열차를 탄 분들이 예정보다 조금 지연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겨울임에도 기온이 낮지 않고, 찬바람도 불지 않아서 산행하기에는 무난한 날씨다.
양원역을 뒤로하고 망우산을 향하는 백두들.
망우청소년수련관 앞으로 들어섰는데, 길이 없다.
돌아서 갈까 하다가 길없는 언덕을 내려선다. 백두 아니랄까 봐..ㅉㅉ
중랑캠핑숲 공원을 가로질러 언덕으로 올라,
서울둘레길은 이곳에서 우측 아래로 이어졌는데,
망우산으로 이어지는 좌측 능선의 숲으로 진행한다.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올라,
능선 위에 올라서서 우측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른다.
육산 능선에 커다란 바위가 이채롭게 놓여 있고,
우전방으로 가야 할 망우산이 건너다 보인다.
아채로운 바위를 통과하는 백두들.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온달장군이?
도로에 내려서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망우고개를 지나는 6번 국도를 넘는 육교를 건너며 망우산으로 진입하게 된다.
<망우고개(忘憂)>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고개로 6번 국도가 지난다. 태조 이성계가 검암산 밑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유택으로 정한 후, 망우산 고개 위에서 쉬면서 신하들에게 “아아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어사(於斯) 오우망의(吾憂忘矣)).”라고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일설은 태조가 남재(南在)를 대동하고 명당을 찾던 중, 동구릉 부근에서 삼혈(三穴)을 얻었는데 이곳은 이미 남재가 묘 터를 잡아놓은 곳이었다. 태조가 남재에게 다른 곳과 바꿀 것을 제의하였으나 남재는 왕릉 예정지에 제가 묻히는 것은 불경이며 후손에게도 중죄가 돌아가게 될 것이므로 불가하다고 대답하자, 태조는 불망기를 써 줄 터이니 증빙을 삼으라 하고 불망기를 써 준 뒤 근심을 덜게 되었다는 뜻으로 망우리라고 했다고도 한다.
태조의 능터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로는 무학대사가 양주 회암사로 가기 전에 검암산 아래에 절터를 정하려고 했으나 그날 밤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이곳은 아홉 왕릉을 모실 자리라는 계시를 받고 그 자리에 태조를 모시기로 하고 절터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 망우리고개는 옛 고개보다 남쪽에 새로 낸 고갯길이며, 옛 고개의 위치는 중앙선의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 터널 윗길이다.
망우고개 좌측 구리시 방향.
우측 망우동 방향.
망우산(망우리공동묘지) 입구 도착.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나름 유명한 분들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다.
그때는 그다지 훌륭한 분인 줄을 몰랐는데, 지금은 존경받는 분들이고,
그때는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은 돌볼 여유가 생겼다.
그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뭣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일까!
망우리묘지에 묻힌 분들을 한분한분 되새겨보고,
망우산 둘레로 이어지는 '사색의 길'로 불려지는 서울둘레길 코스를 두고,
좌측 근심을 잊게 하는 망우산(忘憂山) 정상으로 향한다.
수많은 사연들을 애써 외면하며 망우산을 오르는 백두들.
능선 갈림길에 도착하여, 우측 능선을 따라 망우산 정상으로 향한다.
능선길을 잠시 오르니 망우산 3보루를 지나고,
이내 전망데크가 설치되어 있는 망우산(282m) 정상에 도착한다.
<망우산(忘憂山, 282m)>
서울시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는 산으로, 일대에는 서울시립 장묘사업소 망우묘지가 있다. 이 묘지는 1933년에 공동묘지로 지정되었으며,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과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독립운동가인 오세창, 한용운 그리고 천연두 보급의 건구자로 의학자이며 국어학자인 지석영 등이 안장되어있다. 이후 시인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옹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교육가 오긍선 등 여덟 분의 연보비가 추가로 설치되어 역사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화재로는 거북비로 불려 오던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경진의 신도비(서울 유형문화재 제95호)가 있다. 또한 망우리공원 내의 순환도로 5.2km를 아스콘 포장하여 산책로를 만들었으며 산책로의 이름을 공모하여 98년 5월 ‘사색의 길’로 정하여 불리고 있다. 도시환경과 자연관찰로, 나무정자, 약수터 등의 시설이 있으며, 수목 관리가 잘 되어있고, 공기가 맑아 휴식 및 자연공원으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단다.
북서쪽 봉화산 방향.
망우산 정상 전망대로 오르는 백두들.
날이 따뜻하고 바람이 없어서 미세먼지가 자욱하단다.
좌측으로 도봉산이, 우측으로는 수락산이 시원하게 보여야 하는데..ㅉㅉ
망우산 정상 증명.
망우산 정상에는 망우산 2보루가 있었나 보다.
남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망우산을 뒤로한다.
여느 시골의 들길 같은 능선길을 따르면,
성묘객들의 편의를 위한 순환도로인 '사색의 길'에 내려서게 되고,
이내 다시 능선 흙길로 들어서서,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직진의 능선길을 따른다.
혹시나 총각귀신이 따라오나 확인도 해 가며,
다소 호젓한 분위기도 느껴지는 숲길을 따르면,
망우산 1보루쯤을 지난다.
망우산 1보루를 지나니 앞쪽으로 가야 할 용마산이 보이고,
통나무 계단길을 잠시 내려서니,
서울둘레길과 만나 좌측으로 진행하면,
망우산과 용마산 사이의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안부에서 용마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570개의 나무계단이 있는 깔딱고개 오름길이 시작된다.
깔딱고개 오름길.
돌아본 망우산 방향.
570개의 개단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고,
운동 나온 서 여사님은 좀체 땀이 나지 않는지,
헐레벌떡 달려가 전망바위에서 또 운동을 하고 있다.
용마산 5보루를 지난다.
<용마산 5보루>
용마산 5보루는 용마산과 아차산의 두 능선이 합쳐진 곳에서 북쪽으로 약 240m 떨어진 능선의 첫 번째 봉우리(해발 316.3m)에 위치한다. 북쪽 부분에 헬기장을 포함해 평탄면이 있고, 남쪽 부분은 이보다 약간 높은 소규모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정상부의 외곽을 따라 석축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평면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에 장축을 둔 장타원형에 가깝고, 전체 둘레는 약 132m, 내부 면적은 936㎡ 정도이다. 북쪽에서 파손되어 지표에 노출된 회흑색 연질토기 1점을 수습하였는데, 바닥이 편평하고 몸통이 길쭉한 장동호로, 표면은 전체적으로 회흑색을 띠며 마연되어 광택이 난다. 또한 물미로 추정되는 철제품 1점을 수습하였다.
아사산과 용마산 갈림길에서 우측 용마산 정상으로 향한다.
용마산 직전 헬기장을 지나는데, 반팔 런닝만 입고 있는 분도 보인다.
앞쪽으로 용마산 정상이 다가오고,
좌측으로는 가야 할 아차산 능선이 미세먼지에 가려져 흐리게 보인다.
용마산 정상 직전에는 체육시설이 있는 쉼터가 있다.
짧은 데크목 계단을 오르면,
돌아본 망우산 방향.
용마산 정상에 도착한다.
<용마산(龍馬山, 341m)>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과 중곡동, 중랑구 면목4동 사이에 있는 산으로, 별칭 '장군봉(將軍峰)' 또는 '용마봉(龍馬峰)' 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용마산과 아차산을 하나의 산으로 보아 아차산의 최고봉(最高峰)인 용마산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용마산의 유래는 면목동(面牧洞)이 말 목장의 소재지라는 '마목(馬牧)'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용마산도 면목동의 유래인 말(馬)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아차산공원, 용마폭포공원 등이 있으며 수도권 지하철 7호선 용마산역의 역명(驛名)과 용마터널의 이름도 이 산에서 본떠왔단다.
그래서 정상석에 용마봉이라 표시해 놓았나 보다.
용마봉 정상 전망쉼터에서 과일을 나누며 쉼을 한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짙어서 주변 조망을 볼 수가 없으니..ㅉㅉ
용마산 정상 인증.
용마산을 뒤로하고 우회길로 접어들어 아차산을 향한다.
아차산으로 오르는 회장님.
좌측 아차산 4보루를 들르기로 한다.
아차산 4보루 도착.
<아차산 보루(峨嵯山 堡壘)>
아차산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쪽과 구리시 서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흔히 서쪽의 용마봉, 북쪽의 망우산 및 봉화산 등 주변 산지를 포함하여 아차산이라 부른다. 아차산의 남쪽에는 서울의 젖줄이라 불리는 한강이 흐르고 있고, 맞은쪽 한강 남안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아차산 서쪽으로는 중랑천, 동쪽으로는 왕숙천이 흘러서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이들 강 유역은 저평한 충적 평야가 비교적 넓게 발달해 있다. 아차산은 해발 285.8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나, 용마봉(해발 348m)과 함께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아차산에서는 한강 이남의 전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으로는 멀리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아차산 일대는 고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아차산 일원 고구려 보루의 입지도 이러한 지리적, 지형적 이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아차산 보루는 누가 만들었을까?
보루나 성곽은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정기간 토목공사로 구축된 것이므로 현재 남겨진 보루는 초축 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아차산 일대에서 조사된 고구려 유적은 군사요새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봉우리 정상을 중심으로 입지하고 있다. 주변지역 특히 한강 남안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를 조망하기 위한 것으로 이들 보루군은 아차산과 용마산 줄기를 따라 2줄로 배치되어 있으며, 보루들 사이의 거리는 400~500m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인데, 구의동 보루 발굴 당시 유적 아래쪽 능선에 목책 구덩이로 보이는 시설이 확인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각 보루는 목책(木柵) 등의 시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일부 유적들 사이에는 소규모 석축이 남아있기도 하다. 이렇게 입지상 강남의 중심지를 향하고 있고, 고구려 토기편 외에 발견되는 유물이 거의 없으며, 같은 구조의 구의동 보루와 아차산 보루의 형태유적이 고구려의 중심지인 집안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고 사용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개로왕은 어디서 죽었을까?
개로왕은 비유왕의 맏아들로 근개로왕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455년 9월 비유왕이 정변으로 살해되자 백제 조정은 내분으로 인해 심한 혼란을 맞았다. 개로왕 즉위년 12월 고구려가 공격해오자 신라원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침략을 막았으며, 십년 이상의 내분 끝에 개로왕이 한성을 접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에 가담했던 장수들은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이들 중 후에 개로왕을 생포하는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그들 중 하나로 판단하고 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협공을 가하자는 제의를 하였으나, 고구려의 방해로 위왕과의 협상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은 바로 첩자를 파견하여 개로왕으로 하여금 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도록 부추겨서 백제의 군사력을 떨어뜨리고 급습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첩자 노릇을 한 자가 바로 승려 도림(道琳)이었다. 그는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것으로 속여 백제에 잠입하였다.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무척 좋아하였는데 바둑의 고수였던 도림은 그 점을 이용하여 개로왕에게로 접근하고, 마치 훈수를 두는 듯 개로왕을 부추겨 비유왕릉을 조성케 하고 궁실과 성을 새로 짓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국고는 텅텅 비고, 민심은 개로왕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도림이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고, 고구려군의 기습으로 순식간에 한강이북을 내어준 개로왕은 그때서야 도림이 첩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하였다. 이어 상좌평이던 아우 문주에게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난리를 피하여 왕통을 잇도록 하라 하고, 목숨걸고 싸워 한성을 지켜내려고 하였다.
서기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은 7일간의 공격 끝에 북궁인 풍납토성을 함락하고, 남궁에 머물던 개로왕은 과거 백제 장수였던 재증걸루에게 잡히게 되었다. 걸루는 개로왕을 사로잡자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일어나, 개로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 죄목을 따졌다. 죄목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개로왕이 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걸루의 혈족과 그 측근들을 대거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개로왕은 걸루에 의해 한성 북쪽 아차성으로 압송되고, 그곳에서 장수왕에게 수모를 당한 뒤 참형에 처해진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은 죽은 그의 시신을 백제에 돌려주지 않았다. 개로왕의 시신은 비석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아차성 근처 어느 산비탈에 묻혀졌을 것이다. 그 정확한 곳은 알 수 없으나 명색이 일국의 왕의 죽음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나 짐작할 수 있다.
아차산 4보루에 도착하는 백두들.
돌아본 용마산 방향.
용마산 5보루와 깔딱고개 방향.
아차산 4보루를 뒤로하는 백두들.
무선조종 자동차 동호인들.
모두가 자기에게 재밌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아차산 정상이 있는 아차산 3보루로 들어선다.
아차산 3보루 전경.
아차산 정상(285m)을 알리는 초라한 말뚝!
지도상의 아차산 높이와 말뚝에 표시된 높이가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아차산(峨嵯山, 296m)>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예전에는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였고, 마을에서는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등으로 부리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 또는 ‘아단(阿旦)’으로 언급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쓰인 『고려사』에 ‘아차(峨嵯)’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한편 태조 이성계의 휘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 ‘단’이 들어간 이름을 다른 글자로 바꾸면서 ‘단’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자만 고쳤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등을 모두 ‘아차산’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에 관련된 설화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산을 지고 가던 장사가 쉬었다가 다시 지고 가려고 할 때, 어깨 끈이 끊어져 '아차' 하면서 산이 놓여 아차산이 되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산 이동 설화를 차용하여 산이 서울[한양]이 되기 위하여 오다가 실수로 서울[한양]을 구성하지 못하고, 아차산이 되어 동구릉을 이루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마지막 하나는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명종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했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해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하고 사형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홍계관이 죽어 버렸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외 우국지사가 의병을 일으켜 서울[한양]에 입성하려고 고개를 올라섰는데, 이미 서울[한양]이 함락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좌측 한강과 고덕동 방향이 희뿌연 미세먼지에 가려있다.
아차산 3보루를 지나는 백두들.
우측으로 서울시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데크가 있지만,
시야가 없으니 아쉬움만 남기고 그냥 지나칠 밖에는.
돌아본 용마산 모습.
아차산 2보루 앞에서 우측의 우회길을 두고, 2보루 위로 오른다.
아차산 2보루로 오르는 백두들.
우측 구리암사대교 방향.
2보루 정상부에는 단체 산객들이 모여서 점심을 먹고 있다.
날씨가 따뜻하여 그런지 점심을 먹는 산객들의 표정에 여유가 넘친다.
돌아본 용마산 방향.
서울시내 방향.
잠실 방향.
커플룩을 자랑하는 두 분!
아차산 2보루에서 잠시 햇살을 쬐며 여유로움을 즐기는데 몇몇 분이 보이지를 않는다.
수술 후 처음으로 산행에 나선 창병씨가 염려되어 전화를 했더니,
세 분이서 함께 영화사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고 한다.
먼저 하산길에 들어선 세분들 없이 아차산 인증을 남긴다.
아차산 1보루는 좌회하여 지나면,
서울시내와 잠실 방향으로 조망이 멋진 전망대가 나온다.
멋진 조망이 펼쳐지는 곳이지만, 희뿌연 미세먼지가 전망대를 텅 비워 놓았다.
능선 동사면의 둘레길과 만나는 지점에 등산용품 노점상이 여러 가지 용품을 진열하고 있다.
전철에서 팔던 가성비 최고의 2천 냥짜리 터치장갑도 같은 가격에 팔고 있다.
우측 영화사 방향 갈림길에서 직진의 아차산성 방향으로 진행한다.
아차산성은 가림막을 치고 공사를 하고 있다.
아차산성을 지나는 백두들.
우측 아차산 생태공원 방향 능선길을 두고, 좌측 장로회신학대 방향으로 들어선다.
장로회신학대학교 후문 도착.
장로회신학대학교로 진입하는 백두들.
후문에 '이교도인과 잡상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걸려있었지만,
다행히 나는 이교도가 아닌 무교도이고, 뭔가 잡스러운 것을 팔 생각도 없으니..ㅉㅉ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정문을 나선다.
광장도 신동아아파트 앞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친다.
마을버스를 타고 강변역 인근 프라임 노다지 사우나로 이동하여 미세먼지를 털어내고,
송년회 장소인 강진수산에 도착하니 천보형이 기다리고 있다.
말끔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회장님의 개회사로 2018년 송년 행사를 시작한다.
30분 경과!
1시간 경과!
1시간 반 경과!
2시간 반 경과!
2018년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낸 알코올의 흔적들!
역시나 2차는 호프가 최고!
화려한 태헤란로 거리에서!
우아한 커피도 마시고!
이것으로 공식일정을 마무리하고,
지난해의 모든 시름 털어내고,
밝은 새해가 되시길!
백두산우회 최고!!
자랑스러운 백두들!
계속 함께 놀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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