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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네팔 랑탕 트레킹 1일(인천~카트만두) : '모두 함께 올라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네팔 카트만두로

by 재희다 2019. 4. 26.

산 행 지 : 네팔 랑탕히말 트레킹 (Langtang Himal Trekking)

산 행 일 : 2019. 04. 26.(금) ~ 05. 07.(화) (12일)

산행코스 : 인천공항 ~ 네팔 카트만두 ~ 샤브르베시 ~ 라마호텔 ~ 랑탕 ~ 강진곰파 ~ 체르코리 등정 ~ 강진곰파

              ~ 라마호텔 ~ 툴루샤브르 ~ 둔체(신곰파 경유) ~ 카트만두 ~ 인천공항.

산행참가 : 17백두.

 

<산행일정 및 지도>

 

 

 

 

<네팔(Nepal)>

언어 : 네팔어
면적 : 1,471만 8천㏊ 세계 93위.

수도 : 카트만두.

인구 : 2,994만 2,018명 세계 49위 (2019 통계청, UN, 대만통계청 기준)
GDP : 244억 7,201만 3,233.8달러 세계101위 (2017)

 

 

<네팔의 역사>

근대 이전

네팔의 중앙 산지에는 기원전 6~7세기 무렵부터 다수의 부족국가가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인도의 서사시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는 히말라야 동북쪽에서 진출해온 키라티(Kiratis) 왕조가 1,000년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키라티 왕조는 긴 칼을 차고 다니고 목축에 능했다는 정도만 알려지고 있을 뿐, 실제 그 존재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네팔은 불교의 주요 발상지이기도 하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기원전 6세기 네팔 중남부 룸비니(Lumbini)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교를 창시한 뒤에 제자 아난다(Ananda, 阿難陀)와 함께 카트만두 계곡[Kathmandu Valley]에 일정 기간 머무르며 불교를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에는 인도의 아소카(Ashoka) 왕이 석가모니의 탄생지를 방문하여 룸비니와 카트만두 계곡에 여러 개의 탑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2~3세기 무렵에 인도 북부에서 진출해온 인도-아리안족 계통의 리차비 왕조(Licchavis dynasty)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는데, 리차비 왕조는 그 존재가 실증되는 네팔의 가장 오랜 통일 왕조이다. 리차비 왕조는 인도, 중국과의 교역으로 크게 번성하였는데, 당(唐)의 현장(玄奘)이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7세기 초 수도의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융성하였으며, 네팔 고전 미술과 건축 양식의 특징이 형성되었다.

879년 리차비 왕조를 대신해 타쿠리 왕조(Thakuri dynasty)가 세워졌다. 이 시기에는 인도와 티베트 등의 침공이 잦았지만, 지형적 특성을 기반으로 독립 왕국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1200년 무렵 아브히르(Abhir Malla)에 의해 건국된 말라 왕조(Malla dynasty)는 18세기까지 존속되었다. 말라 왕조는 1245년 대규모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고, 티베트의 침략으로 파탄(Patan)이 파괴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문화와 예술을 발달시키며 네팔 문화의 전통 양식을 확립하였다. 말라 왕조는 15세기 야크샤(Yakshya Malla, 1429~1482)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그의 사후 아들들의 권력 다툼으로 왕국은 카트만두(Kathmandu, Kantipur), 박타푸르(Bhaktapur, Bhadgaon), 파탄(Patan, Lalitpur)의 세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각지의 부족이 독립하여 오늘날 네팔의 영역 안에는 46개의 토후국(土侯國)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분열은 1769년 구르카(Gurkha) 왕국의 프리트비 나라얀 샤(Prithvi Narayan Shah)가 각지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샤 왕조(Shah dynasty)를 세우면서 극복되었다. 샤 왕조는 카슈미르(Kashmir)와 티베트 접경지역, 그리고 인도의 시킴(Sikkim)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으나, 1792년 티베트 정벌을 꾀하다 청나라에 패배하면서 영토 확장이 위축되었다. 그리고 1814년에는 영토 문제로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전쟁을 벌여 패했다. 전쟁에 진 네팔은 1816년 수가울리 조약(Sugauli Treaty)으로 인도 북부의 시킴(Sikkim)과 타라이(Tarai) 지역을 빼앗겼으며, 영국인의 네팔 주둔을 인정하였다.

 

근대 이후

샤 왕조는 2008년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는데, 1846년부터 1951년까지는 왕권이 무력화되고 영국의 지원을 받은 라나(Rana) 가문의 독재가 실시되었다. 1846년 바하두르(Jang Bahadur Rana, 1816~1877)는 이른바 ‘코트 학살(Kot Massacre)’이라고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국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스스로 왕(王)을 뜻하는 ‘라나(Rana)’의 지위에 올랐고, 그 지위를 세습하였다. 샤 왕조의 왕들은 라나의 통제를 받았으며, 라나 가문은 1951년까지 네팔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바하두르는 인도의 세포이 항쟁(1857∼1859) 때 다수의 구르카족 병사들을 진압군으로 파견하는 등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구르카 병사들은 영국군으로 편입되어 30만 명이 넘는 네팔 군이 1차,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다. 그 결과 세포이 항쟁 진압의 대가로 타라이(Tarai) 지역이 다시 네팔에 복속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3년에는 영국에게서 완전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라나 가문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하였는데, 1946년 인도에서 네팔의회당(Nepali National Congress Party)이 결성되었고, 이들의 주도로 1947년 비라트나가르(Biratnagar)의 대규모 파업을 시작으로 저항운동이 확산되었다. 1948년 라나 가문을 뒷받침하였던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민주화 요구가 더욱 높아졌고, 1950년 11월 6일에는 국왕인 트리부반(Tribhuvan)이 인도로 망명하였고, 네팔의회당은 국경으로 진입해 카트만두 남쪽의 비르간즈(Birganj)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결국 1951년 2월 18일 라나 일족과 네팔의회당은 협상으로 연합정부를 구성해 왕정(王政)을 부활시켰으나, 정국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1955년에 트리부반 왕이 사망하고 마헨드라(Mahendra) 왕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1959년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에 기초한 신헌법을 공포하고, 네팔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네팔의회당의 코이라라(Bishweshwar Prasad Koirala, 1914~1982)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마헨드라(Mahendra) 왕은 1960년 12월 정당과 의회를 해산하고 이에 반대하는 많은 민주 인사들을 투옥시키며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1962년에는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에 기반한 신헌법을 제정하여 무정당 체제인 ‘판차야트(panchayat)’ 제도를 실시하였다. 일종의 평의회인 판차야트(panchayat)는 기초 단위에서 전국 단위까지 4단계의 피라미드 구조로 구성되는데, 전국 판차야트는 국왕의 자문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으며 절반 가량의 의원을 왕이 직접 선출했다. 결국 마헨드라왕은 입법권을 독점하고, 수상 임명을 비롯해 내각을 직접 구성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네팔은 외국 원조의 왕실 착복, 부정과 부패 등으로 정치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1972년 마헨드라 왕이 사망한 뒤에 비렌드라(Birendra)가 왕위에 올랐으나, 전제왕정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더욱 확대되었다. 결국 1990년 2월 ‘국민운동(Jana Adolan)’이라 불리는 대규모 저항이 일어났다. 정부는 수십만의 시위대에 총탄, 최루가스로 대응하고 수천 명을 체포했으나, 결국 4월 9일 비렌드라 왕이 정당 정치와 의회민주주의를 수용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1990년 11월 국왕의 권력을 크게 줄인 새 헌법이 제정되었고, 1991년 총선거로 초대 내각의 수반이었던 B. P. 코이라라의 동생인 G. P. 코이라라(Girija Prasad Koirala, 1925~2010)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1994년 선거에서는 네팔공산당(Communist Party of Nepal)의 온건파인 ‘마르크스-레닌주의파(Unified Marxist-Leninist)’가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네팔공산당 내각은 네팔의회당과 국민민주당의 내각불신임으로 보수연합 정부에 정권을 내주었다. 1996년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주의 이론을 따르는 마오주의자(Maoist)들이 ‘인민전쟁’을 선포하고 원주민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시작하는 등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었다. 이들은 왕정 특권 폐지, 공화제 확립, 사회주의적 경제개혁 등을 내세우며 도시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국토의 40% 가까이를 장악하였고, 결국 네팔 정부는 2001년 11월 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한편 2001년 6월 1일 왕궁에서는 비렌드라 왕과 왕비가 죽고, 왕세자인 디펜드라(Dipendra)가 심각한 중상을 입는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디펜드라(Dipendra) 왕세자도 6월 4일 사망하자, 비렌드라 왕의 동생인 갸넨드라(Gyanendra Bir Bikram Shah Dev)가 왕위에 올랐다. 디펜드라(Dipendra) 왕세자가 왕위 찬탈을 노리고 저지른 일로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으나, 많은 국민들이 갸넨드라(Gyanendra) 왕을 의심하면서 왕권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졌다. 또한 이 사건으로 정부와 마오주의 반군 사이에 진행되던 대화도 무산되어 정치적 불안은 더욱 심화되었다.

갸넨드라(Gyanendra)왕은 수상을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등 전제왕권의 부활을 꾀하였다. 왕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많은 정치인을 투옥하였다. 그러나 2006년 4월 3주에 걸쳐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결국 왕은 4월 28일 의회민주주의의 부활을 승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는 마오주의(Maoism) 반군과의 정전 협정도 체결되어 내전도 종식되었다. 2007년 1월 왕정이 사실상 종식되고 과도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2007년 12월 23일에는 국민투표로 군주제의 폐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2008년 5월 28일 제헌의회에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실시를 중심으로 한 신헌법이 제정되어 ‘네팔 연방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네팔의 주민>


2007년 현재 네팔의 인구는 2천89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인구구조는 0-14세가 38.3%, 15-64세가 57.9%, 65세 이상이 3.8%로 고령 인구가 절대적으로 적고, 평균 나이가 20.5세로 젊은 국가 중의 하나이다. 남녀 성비도 1.05:1로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네팔의 종족 구성은 극히 복잡하다. 200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체뜨리족 15.5%, 브라만힐족12.5%, 마가르족 7%, 따루족 6.6%, 따망족 5.5%, 네와르족 5.4%, 무슬림 4.2%, 카미족 3.9% 이외에 기타 조사되지 않는 종족만 전체인구의 32.7%에 해당된다. 역시 2001년 조사에 따르면 종교는 힌두교가 전체 인구의 80.6%로 최대의 종교이며 그 뒤로 불교(10.7%), 무슬림(4.2%), 키란트(3.6%)순이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국가종교는 힌두교이다.

언어는 전체 사용자가 47.8%인 네팔어가 국어로 채택되어 있다. 이 외에 다양한 소수종족 언어가 있으며 공공업무나 사업 관계에는 영어가 통용된다.

 

 

<랑탕히말 트레킹(Langtang Himal Trekking) 개요>

 

(1) 히말라야
히말라야에 간다고 말하면 많은 분들이 히말라야를 산 자체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태백산맥처럼 히말라야도 산맥이다. 물론 태백산맥보다 규모는 월등하게 커서 네팔과 인도, 중국(티벳), 부탄, 파키스탄 등을 모두 걸치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K2 등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8,000미터 이상급의 산이 14개나 자리잡고 있다. 히말라야에서는 해발 7,000미터가 넘지 않으면 '마운틴'이라는 이름도 붙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3대 미봉이라 불리는 히말라야의 마차푸차레도 '산(mountain)' 대신 '피크(Peak)'라고 부른다. 아시아의 유명한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양쯔강은 모두 히말라야에서 발원한다. 참고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의 원래 이름은 '사가르마타'이지만, 영국 식민지 시절에 에베레스트로 바뀌어 네팔 현지인들조차 에베레스트로 부르고 있다.

 

(2) 트레킹과 등반, 등정
히말라야가 일반인에게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는 TV나 영화에서 비춰지는 이곳의 열악한 환경 때문일 것이다. 국내외 유명 산악인들이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도전해서 마침내 태극기를 꼽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수시로 발생하는 사고 때문에 일반인은 히말라야 도전에 엄두도 못 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목숨을 걸고 정상에 도전하는 '등반'이기 때문이며, 일반인은 대부분 정상을 목표로 본격적인 등반의 시작점인 베이스캠프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트레킹'을 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훨씬 쉽다. 직접 비교는 무리지만,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는 것은 등반이며, 지리산 둘레길을 천천히 걷는 것을 트레킹이라 할 수 있다. 히말라야 정상 도전은 값비싼 입산료와 부대비용이 들지만, 트레킹은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다녀올 수 있다.

 

(3) 랑탕히말에 대하여
랑탕히말(Langtang Himal)은 네팔의 3대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 중 하나이다. 다른 두 곳은 잘 아시다시피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트레킹이다. 랑탕히말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등산 초보자가 가기에 가장 쉽고, 카트만두에서 바로 이동할 수 있으며, 짧은 일정 동안 드라마틱한 풍광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네팔 트레킹을 많이 갔던 분들이 주로 체력에 자신이 없는 분들께 랑탕히말부터 먼저 도전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 어렵지 않게 마지막 목표(대부분 '강진리'나 '체르고리')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지역에 가려면 카트만두에서 반드시 국내선 항공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하지만, 랑탕히말은 카트만두에서 버스를 타고 8시간 정도만 가면 바로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다. 휴가 일정이 짧아서 총 열흘 정도의 시간만 허용된다면 랑탕히말이 적격이다. 최소 사흘 정도는 걸어가야 제대로 된 설산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지역과 달리 랑탕히말은 트레킹 둘째날부터 온전히 히말라야의 품속에 빠져들 수 있으며, 시종일관 계곡을 따라 걷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참고로 랑탕히말은 과거 어떤 서양인이 이곳을 다녀와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 칭해서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4) 대지진 그 이후의 랑탕
2015년 4월에 규모 8 정도의 대지진이 네팔을 덮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특히, 랑탕히말의 피해가 엄청 컸다. 랑탕히말의 주요 코스 중 하나인 랑탕마을은 산사태가 나서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주민 5백여명 중 2백명 이상이 숨졌고 지금까지도 많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도 마을 복구는 엄두고 못 내는 실정이며 마을 바로 위쪽으로 조금씩 새로운 롯지가 생겨나고 있다. 트레킹 코스 중간중간에도 산사태로 길이 훼손된 곳이 많아 가끔씩 돌이 굴러 떨어져서 위험하기도 하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길은 매우 안전하며, 망가진 길 역시 현지인들이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복구 중이다. 가이드나 셀파의 안내를 받으면서 위험한 길에서는 조금만 더 신경 쓰며 걷는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다. 대지진 이후로 랑탕히말 지역의 경제가 매우 힘들어졌는데 트레커들이 많이 찾는 게 이들을 위한 가장 큰 도움의 손길이 된다고 한다.

 

(5) 네팔 트레킹 시기 정하기

10~11월 (★★★★) : 일년 중 날씨가 가장 화창하고 기온도 적절하여 트레킹 하기에 최고이지만, 그만큼 전세계에서 트레커들이 몰려서 물가가 비싼 편이다. 6개월 전에는 네팔행 항공권을 예매해야 하며, 네팔 국내 항공권도 서둘러야 한다. 추석 연휴라도 겹친다면 연초에 미리 티켓을 구하기 바란다. 히말라야 내 숙소(롯지)는 트레킹 당일에 일찍 도착해서 잡아도 된다.

12~2월 (★★★) : 이때도 날씨가 화창하지만 밤에는 상당히 쌀쌀하며 눈이 오기 때문에 그만큼 준비물(구스다운, 아이젠, 스패츠 등)이 많아진다. 하지만 초반부터 눈 쌓인 설산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의외로 많은 한국인이 겨울에 간다.(선생님들)

3~5월 (★★★) : 랄리구라스 등 야생화가 만발하는 시기라서 트레킹 자체가 즐겁다. 하지만 점차 우기가 가까워지면서 흐린 날이 많고 상당히 후덥지근해진다. 참고로 안나푸르나의 5월은 아침 일출 무렵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다가 오전 10시가 넘으면 구름이 몰려오길 반복한다.(몬순 영향)

6~9월 (★) : 이 시기는 히말라야의 비수기다. 비가 자주 내리고, 구름이 잔뜩 껴서 히말라야 설산을 보기 힘들다. 숲에는 거머리가 창궐한다. 산사태도 자주 일어나서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대신 물가는 저렴하고 트레커도 별로 없어서 한적한 산행이 가능하다.


(6) 자유여행과 여행사 패키지
자유여행은 말 그대로 자유롭게 일정을 짜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다닐 수 있다. 처음 가는 곳이라면 매우 막막할 수 있으나,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다. 비용도 여행사 패키지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참고로 대한한공 직항으로 10박 11일 일정으로 ABC를 다녀왔을 때 총 비용이 180만원 정도 들었는데, 중국동방항공을 타고 3주 일정으로 랑탕과 마르디히말을 다녀왔을 때에는 총 비용이 120만원 정도 들었다. 여행사 패키지는 모든 것을 여행사에서 맡아서 해주므로 편하지만 비용이 훨씬 많이 들고(보통 두 배 이상) 정해진 스케쥴 안에서 움직여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등에도 신경 쓸 부분이 많다. 당신이 20~50대의 신체 건강한 사람이라면 '히말라야 자유여행'을 적극 추천한다. 궁금한 것은 관련 도서 및 인터넷에 널린 정보(후기와 사진, 지도 등)를 검색해서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도저히 혼자 가는 게 두렵고 스스로 준비도 전혀 못할 것 같으면 여행사 패키지를 선택하면 된다. 대신, 현지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공정여행사를 먼저 검색해보기 바란다.


(7) 항공권
인천공항에서 네팔 카트만두 국제공항까지 대한항공 직항 노선이 있지만 주 2회만 운항하며 보통 120만원 이상으로 경유에 비해 매우 비싸다.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중국이나 태국, 인도 등을 경유하는 외국 항공사를 알아보길 권한다. 직항은 인천공항에서 카트만두공항까지 약 5시간 정도 소요된다. 경유는 보통 하루를 통째로 잡아먹지만 인터파크항공이나 스카이스캐터 등 전세계 항공권검색 사이트나 앱을 이용해서 잘 구하면 30만원대 초반에도 왕복으로 다녀올 수 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면, 안나푸르나로 갈 경우에는 포카라 공항으로 가는 국내선 항공편을 미리 예매해야 한다. 에베레스트 지역으로 갈 경우에는 루클라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을 예매하면 된다. 포카라는 버스나 택시 등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비포장도로라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고 위험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가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일정이 여유로운 분은 한 번쯤 버스를 타고 이동해보아도 좋을 듯하다.

(8) 비자, 팀스, 퍼밋

#1. 네팔 비자
비자는 카트만두 공항에서 심사 후 발급받을 수 있다. 비용은 15일 25달러, 30일 40달러, 90일 100달러이며 현금 및 신용카드로 결제 가능하다. 비자 신청서는 한국에서 미리 신청(네팔 대사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가능)해서 가는 게 편리하며, 기내에서 나눠주기도 한다.

​#2. 팀스와 퍼밋
팀스(TIMS, Trekking Information Management System, 트레킹 정보 관리 시스템)는 국립공원 보호기금, 퍼밋(PERMIT)은 히말라야 국립공원 입산 허가증이다. 히말라야에 입산하려면 팀스와 퍼밋 모두 필수다. 팀스는 트레킹을 하는 사람의 인적사항과 코스 등의 정보를 등록하는 장치다. 가이드나 포터 없이 트레킹을 하면 그린카드를 받고, 가이드나 포터와 동반하면 블루카드를 받으며, 전문 등반을 하면 엘로우카드를 발급받는다. 가격은 블루카드 1000루피, 그린카드와 엘로우카드는 2000루피다. 만약 팀스 없이 트레킹하다가 적발되면 발급 비용의 배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참고로 팀스 카드 제도는 민간단체인 '네팔 트레킹 에이전시 협회(TAAN)'에서 발급하는데 발급 수수료로 팀스 카드 인쇄 비용, 관리 비용 및 관광 마케팅, 홍보, 포터와 가이드의 사고시 보험과 복지, 트레킹 코스 인프라 개발 촉진 및 보존 관련 업무에 쓰인다. 팀스와 퍼밋은 카트만두나 포카라 등 현지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발급받을 수도 있지만 가이드나 포터를 고용했다면 네팔에 가기 전에 가이드나 포터가 속한 현지 여행사를 통해 대행하면 시간절약이 되어 좋다. 퍼밋은 국립공원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안나푸르나는 2000루피, 랑탕과 에베레스트는 3000루피다. 여행사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증명사진과 여권 정보를 보내면 된다. 증명사진 사이즈는 거의 상관이 없다.

 

(9) 숙소
10~11월 성수기가 아니라면 굳이 카트만두나 포카라, 루클라의 숙소를 예약할 필요는 없다. 물론 다른 시기에도 카트만두나 포카라 내의 인기 있는 숙소는 미리 잡아두면 안심이 되겠다. 히말라야 내 롯지는 사실상 미리 예약이 불가하다. 포터가 당일 오전에 전화로 미리 예약을 잡아주는 경우도 있다. 숙박비는 아주 저렴하다. 카트만두나 포카라 내 고급 호텔이 아니라면 대부분 5~20달러 정도로 1박이 가능하다. 히말라야 산 속에 위치한 숙박시설인 롯지는 더욱 저렴하다. 보통 200루피에서 비싸도 500루피 정도이며 말만 잘하면 무료에도 가능하다. 하지만 롯지의 시설은 전기가 잘 안 들어오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는 경우가 많으며, 단열재가 없어서 일몰 후에는 실내도 추운 편이니 어느 정도 감안하는게 좋겠다.

 

 

 

<네팔 랑탕 히말 트레킹 1일차>

 

산 행 지 : 네팔 랑탕 트레킹 1일차(인천~카트만두)

산 행 일 : 2019. 04. 26.(금)

산행코스 : 인천공항 ~ 네팔 카트만두 트리브반 국제공항 ~ 카트만두 Yak & Yeti Hotel.

 

산행참가 : 17백두.

 

언제인지 정확치는 않지만 10여년 전에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 트레킹을 다녀온 후, 최회장님께서 남은 랑탕 트레킹은 본인의 70세 고희 기념산행으로 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처음에는 그냥 막연한 희망 쯤으로 여겼는데, 언제쯤엔가 산행 경비를 미리 예치해 놓았고, 모든 회원들이 함께 트레킹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약속되어진 랑탕트레킹을 가기로 한 해(年)가 언제 오려나 했는데 드디어 올해에 회장님께서 70회 생신을 맞게 되었다. 한때는 전원이 모두 랑탕으로 떠나는데 동참키로 했었던것 같은데, 다소 길다고 느껴지는 여정도 문제였지만 건강상의 이유와 기타 여러 사유로 예상보다 훨씬 적은 인원인 17명이 최회장님 칠순 기념 '랑탕 트레킹'을 함께 떠나게 되었다.

 

랑탕 트레킹을 떠나기로 한 날이 다가오자 정작 주인공인 최회장님의 트레킹에 대한 걱정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네팔의 3대 트레킹 코스인 쿰부히말 트레킹,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 트레킹, 랑탕히말 트레킹 중에서 가장 쉽다는 랑탕히말 코스를 칠순 기념 트레킹 코스로 남겨 두었었다. 하지만 정작 트레킹 오름길 마지막 날에 강진곰파(3,730m)에서 체르코리(4,985m) 정상까지 고소에서 급경사 등반을 하게 됨에 따라 고소증과 체력이 받쳐줄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또한 여성회원들이 많이 참가함에 따라 모두가 함께 올랐으면 하는 기대가 커지며 그에 대한 부담감이 우려를 한층 증폭시키는 듯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비스따리, 비스따리(천천히 천천히)' 오르면 가능할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워 보지만, 거의 대부분의 회원들이 우려를 가득 안은 채 네팔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직원들의 눈총을 받으며 긴 휴가를 내고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인천공항행 버스에 올라,

김포공항과 인천공항 1청사를 거쳐 네팔 카트만두행 대한항공에 탑승키 위해 인천공항 2청사에 도착한다.

 

 

인천공항 2청사는 대한항공을 비롯한 스카이팀 항공사들이 입주하고 있는 청사로,

평일임에도 청사 내에는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한국이 잘 사는 나라임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근데 나는 왜!

 

 

긴 줄이 늘어선 출국수속대를 통과하여 탑승장으로 들어서니,

외국인은 거의 뜸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내국인들로 붐빈다.

아직은 한국사람들에게 한국경제의 경쟁력 상실은 남의 일인 듯 보인다.

내년쯤에는 실감하게 될려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가니 널찍한 무대에서 누군가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어느새 비는 그쳤지만 아직도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탑승장 한켠에 VR체험장이 있길래 들어가서 VR Racing 체험을 해 보았다.

레이싱카가 생각보다 예민하여 절벽에 부딪치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고..ㅋㅋ

 

 

탑승구로 향하는 기~인 통로를 지나,

 

 

네팔행 대한항공 탑승구에 도착한다.

 

탑승구 앞에서 잠시 기다리니 다른 분들도 모두 도착한다.

한결같이 세상 고민을 잔뜩 짊어지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보통 해외여행은 설레임이 동반되는데,

어째 별다른 설렘도 없이 네팔행 비행기에 오른다.

 

 

부산하게 나눠주는 기내식을 먹고 잠시 눈을 붙이니,

네팔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우리나라 여느 지방의 공항 같은 느낌을 준다.

 

 

트리부반 공항의 입국 수속은 예상외로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우선 줄을 서서 비자 발급비용을 납부하고, 영수증을 들고 입국수속대에 제출하면 된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혼자서 단체로 먹을 술을 담은 가방을 들고 있었더니 혼자냐고 묻는다.

아마도 혼자라고 대답했으면 뭔 사단이 날 분위기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모든 짐을 찾아 놓았는데도 아무도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다가,

20여분이나 지난 다음에 다른 분들도 검색대를 통과하여 쉽지 않은 입국절차를 완료한다.

 

까다로운 입국 검색대 모습.

일반적으로 입국 검색대는 그리 까다롭지를 않는데, 이곳은 예외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네팔 트리부반 공항을 나오니,

 

 

네팔 랑탕 트레킹을 이끌어줄 현지의 Seven Summit 여행사 임직원들이 붉은색 천을 목에 감아주며 환영을 해 준다.

 

붉은색 천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절차 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우리팀 가이드인 한왕용 대장이 옛날 14좌 등반을 할 때 도움을 받았던 셀파 밍마씨를 소개해 준다.

지금은 네팔에서 두번째로 큰 Seven Summit 여행사의 사장이라고 한다.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다.

붉은 천을 두른 사람은 한국인, 두르지 않은 사람은 네팔 셀파!

 

 

 

인천공항에서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트리부반 공항에서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하! 붉은 천은 머리가 젖지 않게 두르라는 것이었는가 보다!

 

 

소형 버스에 올라 숙소를 향하는 분들의 표정에 흐뭇함이 배어난다.

 

 

네팔에서 제일 번화하다는 대통령궁 앞 도로를 지나,

 

 

네팔에서의 첫날 밤을 보내게 될 Yak & Yeti Hotel에 도착.

Yak는 야크, Yeti는 전설에 나오는 히말라야 산맥의 설인(雪人)이라고 한다.

 

네팔에서 최고급 호텔에 속하는 Yak & Yeti Hotel에 도착한 백두들.

 

 

 

 

방에 짐을 올려 놓고 저녁식사를 하러 호텔을 나선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식당에서,

 

 

 

션한 네팔 맥주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Seven Summit 여행사의 부사장(우)과 부인 이겸이(한국에서 7년 거주)씨와 우리와 트레킹을 함께할 텐디 셀파(중앙)

 

 

그래도 한국보다는 맛있다는 평을 들은 네팔 맥주.

 

 

트레킹에 대한 부담으로 소맥은 자제하며 최대한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무리하고,

 

 

숙소인 Yak & Yity 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사실 지금 시간이 한국 시간으로는 밤 1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다.

 

무두가 체르코리 정상 등반에 대한 우려를 가슴에 가득 안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게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첫날밤을 맞이한다.

'나로 인해 다른 분들께 폐가 되면 안되는데..!'라며..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