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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영산기맥 4차(암치재~사동고개) : 고창과 영광의 벌판에 우뚝 솟은 봉우리를 넘고 또 넘어

by 재희다 2020. 2. 10.

산 행 지 : 영산기맥 4차(암치재~사동고개/덤바위재) 전북 고창군, 전남 장성군, 영광군.

산 행 일 : 2020. 2. 8.(토)

산행코스 : 암치재 ~ 고산 ~ 촛대봉 ~ 가미치 ~ 고성산/깃대봉 ~ 깃재 ~ 월랑산 ~ 몰치재 ~ 태청산 ~ 마치

               ~ 장암산갈림길 ~ 사동고개/덤바위재 (17.5km, 8시간 30분 소요)

산행참가 : 19백두.

 

<산행지도>

 

지난해 말인 2019년 12월에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우한 폐렴)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로 퍼질수 있다는 위기감이 확산되면서, 아무도 집 밖으로 나다니지않아 가뜩이나 얼어붙은 내수경기를 더욱 위축시키지 않을까 여간 우려스럽지 않다. 설명절 연휴로 지난 1월 네째주 산행을 건너 뛰어서 꼬박 한달여 만에 가게 되는 정기산행이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사태로 혹여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안고 양재에서 산행 버스에 오르니,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원이 버스에 탑승을 하여 산행에 대한 산우회원들의 열망을 다시금 확인한다.

 

영산기맥 네번째 구간인 이번 산행은 300~500 고지를 오르내려야 하는 5개 봉우리(고산, 고성산, 월랑산, 태청산, 장암산)들이 이어져 있어서 체력 소모가 많은 코스로, 태청산 직전 군감뫼 부근에서 좌측 대화레저관광농원으로 탈출도 고려하였으나, 전체 산행 거리가 17km 남짓으로 그다지 멀지가 않은 듯하여 모두 함께 완주를 하기로 한다.

 

 

오늘 오신 박기사님의 편안한 운전으로 크게 마음 졸이지 않고 암치재에 도착하여, 두어 시간의 새벽잠을 더 이어보려고 노력하다가, 버스문 여닫는 소리에 일어나 산행준비를 시작한다.

 

암치재 고산 방향 들머리 위에 올라서 바라본 고창군 성송면 방향.

거기까지 왜 올랐을까?

 

암치재(岩峙, 200m) 우측 북쪽은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고, 좌측 남쪽은 전남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로 893번 지방도가 지난다. 바위가 많은 재라 하여 암치(岩峙)라 불렀다고 한다.

 

 

암치재에서 영산기맥 4번째 산행 준비를 마치고 고산 등산 안내도와 이정표가 설치되어 이는 절개지 시멘트 옹벽으로 오르며 고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선다.

 

고산 등산로 안내판.

 

 

고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서 절개지 가장자리를 따라 능선으로 오르니 널찍한 임도에 접속하게 되고, 임도를 따르니 이내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좌측으로는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로 내려가는 넓은 임도가 나 있고, 우측으로는 암치리 목장으로 연결되는 임도가 있다. 영산기맥은 직진의 능선 임도를 따라 이어진다.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라 맑았으면 렌턴 없이도 산행이 가능했으련만, 날씨가 흐린 탓인지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켜켜이 둘러져 있는 임도를 따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는 넓은 임도를 두고 우측 수레길로 들어서면 고산 방향 오름길이 제법 가팔라진다.

 

 

수레길은 이내 좁고 가파른 등로로 바뀌고, 커다란 바위를 우회하여 능선에 접속하니 벤치가 설치되어 있고. 영산길은 우측 능선을 따라 고산 방향으로 오른다.

 

 

뚜렷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커다란 바위들도 지나고,

 

 

벤치가 있는 500봉쯤을 지나 오르면,

 

 

고산 정상 직전의 데크목 계단이 나타난다.

 

 

데크목 계단을 올라서면 영산기맥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고산 정상은 우측 소나무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고산 정상에는 '高山'이라 음각된 커다란 바위와 그 앞에 자리한 자그마한 오석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오색 정상석에는 주변의 산봉우리와 고산성(高山城) 그리고 주변 마을과 고인돌군 등이 표기되어 있다.

 

<고산(高山, 528m)>
전북 고창군 성송면 무송리·산수리와 전남 장성군 삼계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예로부터 평야지로 형성된 고창 지역 지역 주민들에게 신령스럽고 높은 산으로 추앙받고 있다. '높을 고(高)' 자를 쓰는 이 산은 고창 들판에 높이 솟아있어 주변의 조망대 역할을 한다. 물줄기는 서쪽의 대산천을 거쳐서 서해로 흘러들어 가고, 남쪽은 영산강을 통해 목포 앞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남서쪽에는 백제 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산성이 있으며, 선사 시대의 고인돌(지석묘)이 300여기나 있는 고산에는 용추골, 각시봉, 깃대봉, 매바위, 용두암, 거북바위, 촛대봉, 치마바위 등의 전설이 어린 기암들이 산재해 있고, 복분자 재배지와 늪지대 등이 있다.

 

 

서쪽 촛대봉과 대산면 방향.

고산 정상은 날씨만 좋다면, 환상적인 조망을 자랑한다고 하지만,

아직은 어둠이 걷히기 전이라 주변 마을의 불빛만 보인다.

 

 

북쪽 암치재와 구황산 방향.

 

날이 밝았다면 지나온 암치 건너 구왕산과 뒤편 멀리 문수산과 방장산 그 뒤로 입암산까지 조망되고, 우측으로 무등산과 광주시가지에, 고성산 뒤로 태청산까지 사방으로 막힘없이 조망되는 곳이라 하는데, 알지 못하는 불빛들만 바라보는 백두들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고산 정상이 협소하여 손점장이 대표로 정상 인증을 한다.

 

<고산성(高山城)>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 성송면 무송리,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에 걸쳐있는 삼국시대 후기에 축성된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한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이 혼재되어 있으며, 동문과 서문, 남문의 흔적은 있으나 북문의 흔적은 없고, 현재 4.8km 정도의 형태가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무장 고적조에 “고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100척(2,400m)이고, 가운데에 세 샘물이 있다 [高山城石築周八千一百尺中有三泉]”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산성의 축성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문헌비고」 성곽조에 “전해오기를 삼국 시대 무송현 성이 남쪽 20리에 있고, 토성기지가 있다.[世傳三國時城茂松古縣城在南二十里有土城基址].”라 하여, 삼국 시대의 무송현이 이 고산성으로, 치소성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변에 월랑산·군감뫼 등이 있는 지정학적 위치와 천혜의 바위 벽이 있어 외적을 방어하는 전략기지로 평가받고 있다.

 

 

기맥길은 고산 정상에서 데크목 계단길 상단까지 되돌아나와, 데크 계단길이 아닌 우측 등로로 이어진다.

 

 

고산성 성곽쯤으로 짐작되는 능선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넓은 공터에 '해맞이기원제단'이 있다.

 

해맞이제단 앞에서 손점장의 알몸을 감상하며 잠시 여유를 갖는다.

 

 

우측 고창군 성송면 산수리와 좌측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 방향 길이 뚜렷한 안부 사거리갈림길을 지나고,

 

 

옛 성곽으로 추정되는 뚜렷한 등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촛대봉 4봉'이라 표시된 이정표와 '고산산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능선에 올라선다.

우측 봉우리가 촛대봉이고, 영산기맥길은 좌즉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이곳을 '가래재'로 표기하고 있다.

 

촛대봉 이정목과 고산산성 안내판.

 

<고산산성(高山山城)>
『"동국여지승람" 지리지에 의하면 삼국 후기에 총연장 八千百尺[8,800척, 당시 1尺: 60cm]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수년 전 전북대학교 고고학 윤덕향교수의 탐증에도 삼국시대 후기 축성으로 수년에 걸쳐 장기간 축성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깃대봉~촛대봉~정상 부근의 천연요새를 이용하여 토성과 석성을 혼합하였으며, 현재 4.1km 이상의 형태가 남아있고, 동문, 서문, 남문 자리가 확실한 형태가 남아있다.』

 

우측 촛대봉 너머 산수리 방향 능선에는 띠꾸리봉, 깃대봉, 각시봉이 자리하고 있고, 이 능선을 경계로 기맥길 우측이 지금까지는 고창군 성송면이다가 대산면으로 바뀌어 바로 아래 가랫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좌측은 계속해서 장성군 삼계면으로 이어진다.

 

촛대봉 너머 능선에 있는 고산 5봉 중의 하나인 띠구리봉은 고산 정상에서 보면 북서쪽 골짜기를 둘러싼 봉우리다. 특이한 이름의 '띠구리'는 삼이나 칡 따위로 세 가닥을 지어 굵다랗게 꼬아 나뭇짐 따위를 묶는 줄을 '참바'라 하는데, 참바의 전라도 사투리가 '띠구리'라고 한다.

 

 

좌측 능선을 따라 작은 언덕을 넘어서 가이드 로프가 설치된 내림길을 따라 내려서고,

 

 

비탈에 자리한 널찍한 묘지 앞을 가로질러 내려서면,

 

 

정규 등산로와 영산기맥 능선이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널찍한 정규 등산로는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고, 영산길은 족적조차 희미한 좌측 능선으로 이어진다. 혼자였다면 등산 좌측 영산기맥 능선길로 접어들었겠지만, 많은 일행과 함께 해야 하므로 우측 우회길로 들어선다.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우회길로 들어서면 제법 가파른 사면길이 길게 이어지고,

 

 

 

앞쪽 나뭇가지 위로 가야 할 고성산이 우뚝하게 드러나더니,

 

 

이정표가 있는 가릿재 삼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대산면 상금리 마을로 내려서게 되고,

우리는 다시 가랫재로 접속하기 위해 좌틀하여 진행한다.

 

이정표의 고인돌소공원 방향 표시가 약간 이상하다.

 

가랫재 삼거리를 지나는 백두들.

 

가랫재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가랫재로 향하는 백두들.

 

 

널찍한 계곡 개활지를 가로질러 계곡 물길을 건너면 다시 뚜렷한 등로에 접속하게 되고, 좌측 오름길을 따라 가랫재(가미치)로 향한다.

 

 

유씨들 가족묘지를 지나,

 

 

 

골짜기를 따라 오르는데,

 

우측으로 빼곡한 편백나무 조림지가 멋지다.

 

 

커다란 바위들이 산재해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는데,

각 바위에 번호표가 달려있어서 고인돌(지석묘)임을 직감케 한다.

 

<고창 상금리지석묘군(高敞 上金里支石墓群)>

『고창 상금리지석묘군(高敞 上金里支石墓群)은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 상금마을 일원에 있는 청동기 시대 돌무덤군으로, 1999∼2000년까지 원광대학교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상금리에서 장성 삼계면으로 넘어가는 표고 225m의 가랫재 정상까지 약 2.7km를 따라 약 205기의 고인돌/지석묘(支石墓)이 아홉 개의 군집으로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길은 법성포에서 장성 내륙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로 전통적인 교통로를 따라 고인돌이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덮개돌(上石)의 크기는 장축이 200∼400㎝ 범위에 속하는 중형의 것들이 대부분이며, 600㎝를 보이는 것도 있고, 두께는 100㎝ 이하가 대부분이나 300㎝가 넘는 대형 덮개돌도 확인된다. 덮개돌의 단면 형태는 장방형이 주류를 이루나 방형, 판석형, 제형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지표 조사였기 때문에 정확한 고인돌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탁자식(卓子式)으로 추정되는 것을 포함하여 개석식(蓋石式), 기반식(碁盤式), 여러 매의 지석으로 덮개돌 아래를 돌린 위석식, 여러 매의 판석을 덮개돌 아래에 둘러 무덤방을 지상에 마련한 지상 석곽식(地上石槨式) 및 지상 석곽식과 보조 지석이 결합된 형태 등 다양하다. 지석은 기본적으로 사방에 네 개를 고였으며, 한쪽에 하나를 더 추가하거나 중앙에 하나를 더 고여 5지석 식으로 받친 예도 있다.』

 

고창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고 하는데, 세계문화유산이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되는 걸 보며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싶어서 씁쓸하기 이를데 없다. 이곳은 고창고인돌군이나 행정구역상 엄격하게 따지면 영광군 대마면이다. 한반도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 밀집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동강 유역의 1만여기와 전남북지방의 2만여기를 합쳐 한반도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는 무려 3만여기로 전 세계 고인돌 5만여기의 60%에 해당된다. 최근 화순, 강화 지역의 고민돌군과 함께 전북 고창군의 고민돌들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基)'라고도 하며, 큰 돌을 괴어 놓은 돌무덤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썼던 무덤이다. 극소수 지배자만이 아닌 지배계증 모두가 썼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가랫재/가미치에서 고인돌을 배경으로.

 

<가랫재/가미치(加味峙, 235m)>
전북 고창군 대산면과 전남 장성군 삼계면, 영광군 대마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가미치로 표기되어 있다. 고개 주변에는 고인돌들이 산재해 있다. 이 가릿재는 옛날 해상인 법성포와 육상의 장성을 잇는 보부상들의 물물교환 통로 역할을 했던 중요한 고개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영산기맥 출발점부터 우측을 함께했던 전라북도와 이별하고 온전히 전라남도로 접어들어 목포를 향해 이어가게 된다. 고산과 고성산 사이의 고개 안부인 가랫재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삼계면 생촌리 추동 마을 좌우 뒤편에 고성산(高城山, 546.3m)과 고산(高山, 526.7m)이 나란히 솟아있는데, 이 두 산 사이의 낮은 고개 안부(가랫재)를 넘으면 고창과 영광으로 통한다. 이 가랫재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기골이 장대하고 마음씨 착한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들은 힘을 겨루어 보기 위하여 이 두 산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기간을 정하여 형은 고성산에, 아우는 고산에 성을 쌓은 후 중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아우와 헤어진 형은 고성산에 올라가 지형에 알맞게 축성계획을 수립한 후 돌을 옮겨 열심히 성을 쌓았다. 예정된 날짜 안에 성 쌓기를 완성하고 약속한 장소에 나와보니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늦게야 도착한 동생을 보고 형은 게으름을 피우다가 약속을 어겼다며 크게 화를 내면서 동생의 목을 베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 형은 자기보다 힘이 세고 부지런했던 동생이 왜 그렇게 늦었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여 동생이 쌓은 성을 둘러보니, 자기가 쌓은 성벽보다 훨씬 견고하게 잘 쌓았고, 훗날을 위하여 '명천수(明天水)'라는 깊은 샘까지 파 놓았던 것이다. 형은 그제서야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동생의 무덤 곁으로 가서 가래(농기구)로 자신의 목을 잘라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 고개에다 두 형제의 무덤을 나란히 만들고 고개 이름을 가랫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던 것이다.』

 

가랫재 우측 '군사시설보호구역' 시멘트 표지석 너머 장성 방향 전경.

 

 

빼곡한 편백숲으로 들어서며 고성산 오름길을 시작하다가,

 

울창한 편백나무 숲에서 따뜻한 차를 나누며 잠시의 여유를 부려보기로 한다.

 

 

편백숲 사이로 난 등로를 따라 오르다가,

 

 

 

잡목이 무성하여 등로 흔적이 희미한 능선을 따라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잡목이 무성한 310봉에 올라서 급 좌틀하여 내려서는데,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고성산이 아직도 높아만 보인다.

 

 

고성산 정상까지는 시간이 걸릴듯하여 잡목이 무성한 묵묘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오늘이 정월대보름이라며 권법사님 내외분이 찰밥을 한가득 싸와서 나누는 바람에 누군가는 자기 도시락을 산행내내 지고 다녀야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우리네 풍습에 보름날에는 오곡밥을 지어먹으며 한 해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했는데, 오곡밥은 화합의 뜻에서 성씨가 다른 세 사람이 나눠 먹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권법사님 댁내는 올 한해 건강과 풍년이 그득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어린 시설 정월대보름 날에는 오곡밥을 나누는 풍속 외에도 여러가지 풍습이 있었는데,

'부럼깨기'는 정월대보름날 이른 아침에는 한해 동안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고 부스럼 예방과 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호두나 땅콩 등의 견과류를 어금니로 깨무는 풍습으로, 지방에 따라서는 '자기 나이 수 대로 깨물어야 한다'거나 '여러번 나눠 깨지 말고 한번에 깨물어야 한다'거나, '"부럼아 물러가가!"라고 소리를 지른 후 깨물어야 한다'는 등의 여러가지 방법이 달리 전해진다.
'달집태우기'는 정월 대보름날 밤 달이 떠오를 때, 생솔가지 등을 쌓아올린 무더기에 불을 질러 태우며 노는 세시 풍속인데, 달집 속에 넣은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터지는 소리에 마을의 악귀들이 달아난다고도 하고, 달집을 태워서 이것이 고루 잘 타오르면 그해는 풍년, 불이 도중에 꺼지면 흉년이고, 달집이 타면서 넘어지는 쪽의 마을이 풍년이라고도 한다.
정월 대보름 밤에는 뒷동산에 올라가 달맞이를 하며 보름달에게 소원을 빌며 한해 무사태평을 기원했는데, 아이들은 소원을 빈 후 논둑이나 밭둑에서 불을 붙이고 쥐불놀이를 하며 놀다가 집집마다 다니며 찰밥을 조금씩 얻어서는 함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따스한 차 한잔도 나누고는,

 

 

다시금 고성산을 향해 영산기맥길 잇기에 나서니,

 

 

고성산 오름길 등로가 무척이나 가파르고 거칠다.

 

잎사귀를 떨군 겨울에도 이정도인데, 무성한 여름에야 어떨지 상상조차 힘들다.

 

 

빼곡한 산죽밭을 헤치며 암릉을 우회하여 오르면,

 

 

우측 아래로 영광군 대마면 들판이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 보이고,

 

새벽에 지나온 고산은 구름에 싸여 있다.

 

 

거친 능선 오름길을 헤치고 올라 표지기만 한두 개 걸린 505봉쯤을 지나면,

 

 

지뢰·폭발물·불발탄 등이 산재해 있으니 주의하라는 군부대 경고판이 서 있다.

으와 무서버, 손대지 말고 발만 대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거친 등로를 헤치고 오르면,

 

 

밧줄이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이는 암릉을 힘겹게 오르고,

 

 

다시 나타나는 암릉을 우회하여 올라,

 

 

빼곡한 산죽숲을 헤치고 지나면,

 

 

전망이 좋을 것 같은 암봉이 나타난다.

 

 

잠시 기다리니 후미들도 도착하고,

 

 

모두 함께 흩날리는 눈과 구름에 가려있는 고성산 정상을 향한다.

 

 

작은 나뭇가지에 표지기만 몇개 걸려있는 545봉쯤을 지나니,

 

잡목과 미역순줄기와 같은 넝쿨이 뒤덮인 능선이 펼쳐진다.

가히 여름에 왔었더라면 입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을 법하다.

 

 

그래도 희미한 족적을 찾아 고성산 정상을 향하는데,

 

도대체가 능선 위로 어떻게 진행해얄지 막막하기만 하다.

 

 

대충의 방향과 능선만을 가늠하여 진행하면,

 

 

가끔씩 나부끼는 선답자의 흔적만이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을 굳건히 해 준다.

 

 

그렇게 길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일어나려는 즈음에서야,

 

 

고성산 정상이 불현듯 나타난다.

 

<고성산(古城山, 546.7m)>
전남 장성군 삼계면과 영광군 대마면의 경계 능선에 위치한 산이다. 남도지역의 산으로는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지만, 주위에 산이 아닌 들판에 우뚝 솟은 산이라 그런지 상당히 높아 보이는 위엄을 갖춘 산으로, 산세도 남,북으로 주능선을 길게 늘어뜨리며 양옆으로는 자잘한 지능선을 흘러내리고 있는 형국이다. 정상에는 스테인리스 표지판에 고성산이란 판자 표지판과 그 옆에 깃대봉이라 표기된 말뚝과 조금 떨어진 곳에 삼각점이 있다, 산의 중턱에는 갖가지 동물형상을 한 아기자기한 암릉들이 있으며, 정상에는 억새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영산기맥을 가는 산꾼이 보기에는 억새보다는 잡풀과 미역줄기가 유명할 듯싶다.
이 산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풍스런 산성(古城)이 산의 4부 능선인 남쪽 부성리 비탈에 내성과 외성이 남아있다고 한다. 성은 산의 남쪽 사면에 빙 둘러 축조되어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져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산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 내려오지 않아 언제 축조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성산 정상 인증은 회장님과 두분 낭자가!

 

 

구름이 주변 조망을 가린 고성산을 뒤로하니 이내 삼각점이 있고,

 

 

잡목과 암릉이 산재한 능선을 따라 내려서는데,

 

 

맑은날이었으면 조망이 멋질 것 같은 암릉에서 구름에 가린 광주시 방향을 배경으로.

 

 

멋진 소나무가 있는 전망바위를 지나니,

 

흩날리던 눈발이 잦아들며 좌측 아래로 삼계농공단지가 희미하게 내려다 보인다.

 

 

고성산 오름길은 잡목이 빼곡하고 등로의 흔적이 희미하었는데,

내림길에는 가드 로프도 설치되어 있고 제법 등로를 관리한 흔적이 역력하다.

 

 

돌아본 고성산 방향.

 

좁은 암릉 등로에는 벤치도 설치되어 있다.

 

 

완만하게 내려서던 능선길이 깃재를 향해 급격하게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고,

 

 

 

등로 양 옆으로 소나무가 대문인 듯 자리한 곳을 지나면,

 

좌측 비좁은 터에 자리잡은 묘지가 있다.

 

 

급하게 고도를 낮추던 능선이 완만해지는가 싶더니,

 

 

등로 좌측 아래로 임도가 지나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후미들은 좌측 임도를 따라 깃재로 내려설 수 있도록 능선길에 막대기를 걸쳐 놓고는, 혹여 앞서간 분들이 직진의 영산기맥 능선으로 들어서서 길 찾는데 어려움을 격고 있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홀로 직진의 영산기맥 능선으로 들어선다.

 

 

제법 뚜렷한 등로를 따라 묘지봉(340m) 오름길에 돌아본 고성산 방향.

 

 

묘지가 있는 340봉에 올라서니 앞서간 분들이 희미해진 능로에 갈등을 하며 쉼을 하고 있다.

 

옆에 편한 임도가 있는데 굳이 영산기맥을 고집하는 정통 백두들과 함께 희미한 족적을 쫓아 깃재로 향한다.

 

 

잡목이 빼곡한 희미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직진의 능선길을 두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더욱 희미해진 등로로 들어서고,

 

 

아예 등로의 흔적조차 사라진 사면길을 대충의 방향만 잡고서 내려서면,

 

 

 

깃재 우측 영광 쪽에 있는 깃재산장으로 내려서게 되고,

 

깃재산장으로 내려서는 백두들.

 

 

깃재 산장에서 좌측으로 10여 미터 이동하면 깃재 고갯마루가 있고,

태청산 방향 들머리는 장성추모공원 입간판 도로 우측편에 있다.

 

<깃재/계재(200m)>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와 함평군 대마면 성산리를 잇는 816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이 고개의 형국이 갯벌의 게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갯재로 불리다가, 지금은 깃재로 불린다고 한다. 고개 정상부 우측 영광 쪽에는 '깃재산장'이라는 음식점이 있고, 고개 남쪽 장성 쪽 우측에는 장성추모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서해안을 따라 영광 쪽에서 장성 방향으로 진군할 때, 이 고개와 고산산성 등지에서 아군과 치열한 격전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단다.

남쪽 장성군 교통표지판 방향, 필암서원 표지판 우측 숲길이 들머리인데, 필암서원 표지판 뒤편 입구에는 '장성추모공원' 표지석과 '태청산 편백나무숲 트레킹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홍길동 생가터도 2.5km 거리에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영광군에서 새워놓은 이정표 '만나서 영광입니다'라는 문구가 재격이다.

 

 

깃재 태청산 방향 들머리가 있는 장성추모공원 입간판 옆에서 배낭털이를 하며 후미를 기다리기로 한다.

 

장성추모공원 입구 방향.

 

태청산 숲길 안내도.

 

과일을 나누며 후미를 기다리는 백두들.

 

 

묘지봉(340m) 직전에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좌측 녹색 화살표가 있는 곳으로 내려서게 되는데,

잠시 후 후미들도 임도가 아닌 정통 영산기맥 능선을 따라 깃재에 도착하여,

 

 

바로 태청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서 월랑산을 향한다.

 

 

송전탑이 있는 320봉에서 우틀하여 내려서면,

 

 

좌측으로 가야 할 월랑산이 보이는데,

영산기맥은 좌측으로 보이는 태양광단지를 우측으로 돌아서 이어지게 된다.

 

 

나뭇가지에는 '입장금지'라 적힌 뜻 모를 경고판이 걸려있고,

 

 

영산기맥길은 태양광단지 절개지 가장자리로 이어진다.

 

 

별다른 표식이 없는 294봉쯤을 지나며 영산길을 좌측으로 휘어지며 이어지고,

 

 

다시 송전탑(#67)에서 영산길은 우측으로 휘어져 뚜렷한 수레길로 접속되는데,

 

 

잠시 수레길을 따르면 네이버 지도에 '선산재'로 표시된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직진의 수레길은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의 태양관단지와 장성추모공원으로 이어지고, 영산기맥은 우측 능선으로 이어진 희미한 등로로 들어서야 한다.

 

 

비교적 뚜렷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능선이 약간 가팔라지면서 등로가 희미하게 변하며 거칠어지고,

 

 

바위가 있는 450봉쯤을 지난다.

 

돌아본 고성산 방향.

 

 

다소 완만해진 오솔길을 지나 가파르게 올라서면,

 

 

월랑산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 소나무 둥치에는 나무판으로 만든 정상 표지판이 걸려있다. 이런 표지판은 전국적으로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는데, 대구에 사는 김문암씨가 설치한 것으로 98년도에 경기 연천의 성산 정상을 찾았다가 죽을뻔한 경험을 한 이후 정상석이 없는 오지의 산봉우리를 찾아다니며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영산기맥은 좌틀하여 내려서게 되며, 직진하면 대마면 남산리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알바 길이다.

 

<월랑산(月郞山, 457.7m)>
전남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와 함평군 대마면 월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다랑산(多郞山)이라고도 부른다. 월암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특히 달빛이 밝게 비치는 산이라서 월랑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월랑산 삼각점을 지나서 능선을 따르면 알바길!

 

월랑산 인증.

 

 

월랑산을 뒤로하고 급경사를 내려서며 태청산(좌)을 향한다.

 

 

쓰러진 나무 가랑이 사이를 힘겹게 지나고,

 

 

387봉을 지나면 편백나무 조림지가 나오며,

영산기맥 능선 위로는 임도 수준의 수레길이 이어진다.

 

 

편백나무숲을 지나서,

 

 

우측으로 갈림길이 있는 삼거리를 지나면,

 

 

지도상 군감뫼로 표시된 안부 고개를 지나게 된다.

 

<군감뫼(350m)>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에서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 내동을 잇는 고개로, 고개 우측의 넓은 임도에는 태청산 등산로 안내판도와 이정표가 있다. 국지원 지도와 네이버 지도에는 월랑산 동북쪽 마을(장성군추모공원 인근)을 '군관매'로 표기하고 있고, 개념도에는 이곳 재를 '군감뫼'로 표시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이 군인이 현장을 지휘하는 형국이라 그리 부른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연유는 확인할 길이 없다.

 

군감뫼 이정표에는 태청산까지 3.3km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다.

 

군감뫼 고개 우측에는 임도가 있다.

 

임도 이정표.

 

태청산 등산로 안내판을 보니 이곳에서 상평길 임도를 따라 태청봉을 우회해도 될 듯하다.

 

 

레저용 RV가 다닌 흔적이 선명한 영산기맥 능선의 오름길 등로를 오르면,

 

널찍한 평지 사이로 수레길이 이어지는데,

흰둥이와 검둥이 두 마리의 바둑이가 지들끼리 뛰어 노느라 산꾼은 아예 관심에도 없다.

 

 

넓은 평지 사이로 이어지는 수레길을 따르는데, 주변이 평지로 보여서 능선 구분이 불명확하다.

 

 

좌측으로 묘지가 나오며 수레길은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간다.

 

 

멋진 편백나무 숲에 난 선명한 바퀴 자국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바퀴 자국이 좌측 태청산 관광힐링타운으로 내려가고, 영산길은 직진의 능선길로 이어지는데,

 

좌측 편백숲 아래로 임도가 이어져 있다.

 

이렇게 전봇대처럼 쭉쭉빵빵 자란 나무는 편백 아니면 삼나무라고 한다. 편백은 이파리가 넓은 반면에 삼나무는 바늘침 모양이다. 편백, 삼나무 둘 다 상록성이고, 겨울에 누렇게 낙엽이 들면 낙엽송(잎깔나무)이다. 측백은 잎이 편백과 닮았지만 이렇게 곧고 높게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좌측 아래로 산림도로 갈림길 표시가 있는 '작은몰치'를 지나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서 송전탑이 있는 언덕을 올라서면,

 

우측으로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의 남산제가 살짝 보이고,

 

 

편백숲 사이로 이어진 완만한 능선 등로를 따라 봉긋한 묘지를 지나면,

 

 

 

이정표와 대리석 벤치가 있는 몰치(350m)를 지나게 된다.

 

<몰치(351m)>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에서 대화레저관광농원이 있는 장성군 삼계면 화산리 몰치마을을 잇는 고개다. '몰치'란 이름은 고개 아래에 있는 삼계면 부성리에 있는 몰치마을에서 따온 지명이라는데, 논리적으로 맞지않는듯 하고 정확한 유래를 찾기도 어렵다.

 

몰치 이정표.

몰치입구는 군감뫼에서 이어오는 상평길임도와 만나는 지점을 이르는 듯하고,

좌측의 대화레저관광농원은 '태청산관광힐링타운'의 옛이름인 듯하다.

 

좌측 '태청산관광힐링타운' 방향.

 

우측 '몰치입구' 방향.

 

 

몰치를 뒤로하고 멋진 편백나무들과 교감하며 태청산으로 향한다.

 

 

편백과 소나무가 멋진 능선길에 조각품인양 서 있는 입석바위가 멋지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537봉을 우회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의 537봉 정상 쪽으로는 봉정사 방향이고,

영산기맥의 태청산은 우측 사면으로 우회하라고 표시하고 있다.

 

537봉의 동쪽 골짜기 장성군 삼계면 신기리에 자리한 태청산 봉정사(鳳停寺)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해 있는 사찰로 ‘1402년(태종 2)에 창건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갈림길 이정표.

 

 

우측 태청산 방향 데크목 계단 우회길로 들어서서 잠시 진행하면,

 

 

이내 537봉에서 이어오는 능선에 접속하고,

 

우측 능선을 따라 태청봉으로 향한다.

 

이제 날이 개이면서 돌아본 월랑산이 뚜렷이 조망된다.

 

돌아본 537봉 방향.

 

 

앞쪽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태청산의 윤곽이 가늠되고,

 

 

앞서간 백두들의 배낭털이에 끼여 지쳐가는 다리를 쉬게 하다가,

 

 

한결 평탄해진 능선을 따라 태청산으로 향한다.

 

 

등로 주변 수풀을 정리하여 방화선을 구축해 놓은 능선을 따라,

 

 

헬기장을 지나니,

 

 

어느새 태청산이 성큼 다가와 있고,

 

 

사각정자가 있는 쉼터가 나온다.

 

쉼터 갈림길 이정표.

 

 

때깍바위 갈림길 이정표에서 때깍바위가 우측 40m 지점에 있다는 유혹에 우측 때깍바위로 들어서니,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때깍바위.

 

때깍바위는 태청산 정상 북동 사면에 자리한 절벽 바위에 노끈이 통과할 정도로 뜬 가마 크기의 바위로, 이 때깍바위는 사람이 처음 앉으면 때깍하는 소리가 나지만 다시 앉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하며, 또 새끼줄로 묶어서 잡아당기면 움직이지만 사람이 손으로 밀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때깍바위는 커다란 바위 받침 위에 작은 가마 크기의 바위가 놓여있다.

 

때깍바위 옆에서 본 대마면 남산제 방향 조망.

 

 

때깍바위에서 돌아나와 잠시 오르면 태청산 직전의 헬기장이 나오고,

태청산 방향으로는 테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헬기장에서 태청지맥 572봉을 배경으로.

 

육군보병학교에서 세운 이정표와 빛바랜 태청산 등산안내도가 있는 넓은 헬기장이 태청지맥 분기점이다.

 

 

<태청지맥(太淸枝脈)>

태청지맥(太淸枝脈)은 영산기맥 태청산(太淸山, 593.3m) 동북쪽 약 100m에 위치한 헬기장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해 장성군 삼계면과 삼서면을 가르며 진행하여, 태산(207m), 제당산(158.8m), 월악산(166.9m), 만중산(107m), 가암산(151.3m), 병풍산(265.2m), 망산(270.8m), 구절봉(297.0m), 국사봉(281.6m), 백룡산(347.0m), 청림산(187.2m)을 지나서 고막원천과 영산강이 합수하는 석관정나루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9.1km에 달하는 산줄기다.

 

태청지맥 개념도

 

 

헬기장에서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육군보병학교 조망.

 

<육군보병학교(陸軍步兵學校)>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육군의 전투병과학교로, 1949년 경기도 시흥군(現 금천구 시흥동)에서 개교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광주광역시 서구의 구 상무대에 있었다. 그러다 1994년 상무대 이전으로 현재의 위치에 주둔해 있다. 기갑, 포병, 공병, 화학 등 4개 병과학교 및 지원부대와 함께 상무대를 구성하고 있다. 육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보병 병과를 맡는 학교인 만큼 학교장의 계급 또한 소장 계급이 보직된다.
1970~80년대에는 상무대 내 다른 학교들과 함께 전투교육사령부 예하 전투병과학교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재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병과 정보 병과의 초등군사반(소위) 및 보병 고등군사반(대위)와 보병 병과 중급반(중사)의 보수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소령 이상부터는 합동군사대학에서 보수교육을 받는다. 정보 병과로 임관하는 소위는 보병 초군반 교육을 받고 야전부대에서 소대장으로 1년간 근무한 뒤 중위 진급 후 정보학교에서 정보 초군반 교육을 받고 정보 병과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장기 및 복무연장자원에 한해서이며 단기자원은 병과만 정보이고 실제 하는 일은 그냥 보병으로 끝난다. 실제로 정보 병과는 애초에 단기 자원을 잘 선발하지 않는데 통역장교는 단기임에도 불구하고 정보 병과를 부여한다. 단, 보병 병과의 장교라도 기계화보병(자대가 기계화사단 또는 기갑여단)인 경우는 초군/고군 모두 육군기계화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며 상무대 내 교육기관들 중에 유일하게 병의 후반기 교육이 없는 곳이다. 보병 병과 부사관의 경우 육군부사관학교에서 중급반 교육을 제외한 초급과 고급반 교육을 받으며 특전부사관은 특전교육단, 기계화보병은 기계화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육사 사관생도도 재학중 군사훈련기간에 위탁 교육을 오기도 한다.
이름에 걸맞게, 당연히 초급장교의 보수교육을 위주로 하며 이는 육사, 학군사관, 3사, 학사장교, 간부사관 모두가 거쳐가는 곳이다. 물론 숙련도 순으로는 간부사관이 오래 남아있고 육사나 3사 출신 장교는 방학의 후반기교육 수준으로 사관학교 시절에 비하면 풀어주는 편이지만 학군 및 학사 출신은 임관하면서 빠진 군기를 다시 잡는 곳이다. 하지만 반이나 교관마다 군기를 잡기도 하고 장교라고 대우해주기도 한다. 사실상 교관이나 교육대대장 성향이 전체적인 반의 성향을 좌우하는 편이다. 운이 나쁘면 임관받고도 병사인 조교들에게 얼차려 받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살짝 당겨본 육군보병학교(상무대) 전경.

 

 

태청산 정상부로 오르니,

오늘 지나온 고산과 고성산, 월랑산으로 이어져온 영산기맥이 한눈에 가늠된다.

 

태청지맥 572봉 방향.

 

영광군 대마면과 고창군 대산면 방향으로 넓은 벌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남쪽 장성군 삼서면 방향.

 

 

태청산 정상에는 '태청봉'이라 새겨진 두개의 정상석이 형제인 양 나란히 세워져 있다.

 

<태청봉(太淸峰, 593.3m)>
전남 영광군 대마면과 장성군 삼계면과 삼서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영광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큰 바위가 있다고 해서 석태산(石太山) 이라고도 한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대마면과 묘량면의 평야와 영광읍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염산과 백수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으며, 북으로는 월랑산 줄기 너머로 대마면 소재지를 지나는 지방도 816호선과 그 뒤로 국도 23호선이 실낱처럼 이어진다. 동으로는 장성 방면의 부드러운 산릉 너머 멀리로 담양의 높고 낮은 산들이 가물거리고, 오른쪽으로는 광주 무등산도 시야에 와 닿으며, 남으로는 삼서면 학성리 분지에 상무대가 자리하고 있고, 남서 방면으로 장암산을 지나 함평 방면으로 이어지는 능선 너머로는 불갑산 줄기가 뚜렷하게 다가온다. 대마면 곡창지대의 젖줄이기도 한 태청산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 맛이 빼어나기 때문에 '대마막걸리'라는 명주가 생산되는 곳인데, 그래서 영광에서는 대마 막걸리 맛을 보지 않고 다른 술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산에 기우단(祈雨壇)이 있고, 산 아래 봉서동(鳳棲洞)이 있으며, 남서쪽 인근에 동과 서부를 잇는 마치(馬峙)고개가 있다.
태청산의 명물로는 정상 밑 절벽 큰 바위에 다른 바위가 얹혀 있는 형태로 영광팔괴(靈光八怪)의 하나인 때깍바위(딸깍바위)가 있다. 바위에 올라서면 때깍하는 소리가 났다고 하며, 바위 사이로 실을 넣어 당기면 빠져나왔다 하여 부석(浮石)이라고도 불린다. 동쪽으로 무등산이, 서쪽 방향으로는 영광읍 시가지와 물무산, 원불교 성지가 가까운 구수산(351m), 서남쪽으로 불갑산(516m)이, 북쪽으로 장성의 고성산과 담양의 여러 산들이 다 보이며, 바로 아래로 상무대가 훤히 내다보인다는데, 아직도 옅은 안개가 남아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갈 사람은 앞서 가버렸고, 올 사람은 언제 올지를 알 수 없으니,

이 고장장 출신인 영규형이 대표로 태청산 인증을 남긴다.

 

 

 

 

 

 

태청봉 정상부 바위에는 흰색 페인트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데, 그 연유는 알 길이 없고,

 

태청산 정상 작은 나뭇가지에는 준.희님의 '태청지맥 분기점' 표지판이 표지기들과 함께 걸려있다.

 

태청지맥 572봉 방향.

 

 

태청산을 뒤로하고 오늘 영산길의 마지막 봉우리인 장암산을 향하니,

 

 

태청봉 봉우리 건너편 능선 분기점에서 앞서간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능선분기점 이정표.

 

 

방화선을 구축해 놓은 듯 능선 등로가 널찍하니 정리되어 있고,

 

 

태청산과 장암산 사이의 안부인 마치를 향하는데,

 

군데군데 육군보병학교의 법당으로 이어질 듯이 짐작되는 갈림길을 지난다.

 

 

둥글둥글한 바위가 있는 능선을 지나면,

 

작은 봉우리인 471봉이 나온다.

 

471봉 오름길 우측에는 물개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끌고,

 

돌아본 태청봉이 저만치에 자리하고 있고,

 

월랑산과 고성산은 나뭇가지 사이로 가늠된다.

 

471봉에서 본 서쪽 구수산 방향.

 

서북쪽 대마면 방향.

 

돌아본 월랑산과 고성산 방향.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엄청 우람해 보이는 산이 가야 할 장암산이다.

 

 

마치로 내려서는 급경사 내림길에는 가드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급경사이기는 한데, 이렇게 지그제그로 안전시설을 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정표와 육군보병학교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마치(330m)다.

 

<마치(馬峙, 330m)>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와 영광군 대마면 삼효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좌측 장성 쪽에는 육군보병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부터 우측으로는 영광군 대마면에서 묘량명으로 바뀌게 된다. 『대동여지도에 마차치(馬車峙)로 표기된 이 곳은,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와 영광군 대마면 송죽리 사이 말을 타고 넘던 고개로, 동학농민군들이 이 고개를 넘어 장성으로 가서 뒤따라 온 토벌군들을 맞아 황룡싸움을 벌인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군사교육을 따로 받지 않았어도 전봉준은 타고난 전략가였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에서 싸운다」란 원칙 하에, 황토현 전투 이후 농민군은 남으로 영광까지 내려온 다음에 전주의 관군 홍계훈군과 법성포 상륙 청군이 영광에서 합류할 것을 예상하고 농민군을 나누어 함평으로, 나주로, 장성으로 종적을 감추었던 것이다.』(펌)

 

마치 이정표.

 

 

돌아본 마치 전경.

 

 

마치에서 장암산 방향으로 오르다가 쓰러진 전신목이 있는 곳에서 돌아본 태청산 방향.

 

 

작은 봉우리를 지나니,

 

 

레져용 RV 바퀴자욱이 흉물스럽게 이어져 있고,

 

능선을 따라 바퀴자욱이 이어져 있다.

 

 

바퀴 자국으로 상처난 영산기맥 능선이 산꾼의 가슴에도 아픔을 전해오는데,

 

 

묘량면 석전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작은마치재가 나온다.

 

작은마치재 이정표.

 

 

완만하고 잘 관리된 장암산 오름길이 이어지고,

 

돌아본 태청산이 우람하다.

 

 

전방으로 안테나가 삐죽이 솟은 장암지맥 분기봉이 보이고,

 

좌전방으로는 다음 구간에 가게 될 불갑산 방향의 영산기맥 능선이 켜켜이 쌓여 있고,

 

돌아본 태청산은 멀리서도 그 위용이 우뚝하다.

 

 

돌아본 태청산 좌측으로 오늘 지나온 영산기맥의 연봉들이 도열해 있다.

 

연무 속에서도 우뚝한 태청산 모습.

 

동쪽 장성군 삼계면 방향.

 

 

산행 막바지라서 그리 가파르지않은 장암산 오름길조차 힘겨운데,

 

뒤쪽 멀리에서는 태청봉이 힘내라고 응원해 준다.

 

좌측 삼계면 방향.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조망이 트인 곳도 지나서 오르면,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항공표식 안테나가 있는 장암지맥 분기봉(486m)에 도착하는데, 한두해 전의 산행기에는 이곳 정상에 정자도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되어 빈터만 남아있다.

 

<장암지맥(場岩枝脈)>

장암지맥(場岩枝脈)은 영산기맥 장암산 486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장암산(483.1m), 오동산, 우이봉, 검은산, 수태봉, 비룡양노원, 벼락재, 서금산, 동초교, 백두개재, 수리봉, 갓봉, 봉화령을 거쳐 전남 영광군 배수읍 대신리에서 돔배섬과 구암천을 바라보며 부대초마을 북쪽 서해 바다로 이어지는 거리 36.8Km의 마루금이다.

 

장암지맥 개념도.

 

 

남서쪽 다음 구간에 가게 될 불갑산 방향 조망.

 

 

 

잘 정비된 넓은 등로를 잠시 따르면, 샘터삼거리(장암산 갈림길)인데, 영산기맥은 이정표의 월암리.사동 방향으로 좌틀하여 아래로 이어지고, 장암산은 직진 200m 거리에 벗어나 있으므로 정상을 갔다가 되돌아 나와야 한다.

 

이정표 옆 나뭇가지에는 이곳이 '장암지맥 분기점'임을 알리는 팻말이 걸려있다.

 

앞서 가셨던 교화형 내외분이 따스한 햇살을 쬐며 쉬다가

다른 분들은 장암산으로 갔으니 다녀오라고 한다.

 

 

장암산으로 가는 길 옆에는 테이블도 있는 쉼터도 있고,

 

 

샘터갈림길을 내려서니 이내 갈림길이 나오는데,

능선으로 이어지는 장암산 방향 등로도 수레길 수준으로 널찍하다.

 

돌아갈 때는 우측의 하늘색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하면 바로 샘터로 갈 수 있다.

 

 

장암산으로 이어지는 등로 옆에는 철쭉을 빼곡히 식재해 놓았고,

 

장암산 오름길에 돌아본 태청산과 고성산이 멋지다.

 

 

장암산 정상부에 다다라서,

 

돌아본 태청산 방향.

 

 

너럭바위 주변에 잔디밭이 조성된 장암산 정상에 도착한다.

 

<장암산(場岩山, 482m)>
전남 영광군 묘량면과 장성군 삼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표시석과 정자 그리고 삼각점과 이정표가 서있다. 펑퍼짐하게 초원을 이룬 정상에 너럭바위가 있는데, 덩그러니 올려놓은 듯한 바위는 다듬은 듯이 매끄러워 기이한 느낌을 주고, 그 위에 올라서면 영광읍이 다 보이고 백수와 흥농 앞바다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늘은 희뿌연 연무로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시장 장(場)' 자와 '바위 암(岩)' 자를 쓰는 장암산 이름으로 보면, 여기서 지리산 장터목처럼 산상 장이 섰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랬을 경우 영광과 장성 삼계 사람들 각각 특산물인 굴비와 담배를 이고지고 올라와 흥정을 하고 바꿔갔으리라. 그러나 대동여지도에는 이름이 마점산(馬岾山)으로 ‘마치가 있는 산’으로 나온다.』

 

장암산 정상부의 너럭바위에는 고관집 도련님과 가난한 농부의 딸에 얽힌 애틋한 전설이 남아있고, 그 좌측 아래에는 팔각정자가 세워져 있다.

 

너럭바위 모습.

 

<장암산 너럭바위[마당바위] 유래>
옛날 장암산 기슭 아랫마을에 고관집 아들과 가난한 농부의 딸이 애틋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신분의 고하에 따라 집의 규모도 다른 시절이라 남녀는 양가 집안 몰래 장암산으로 도망하여 너럭바위에서 사랑을 속삭였다고 한다. 두 손을 마주잡고 어떤 상황에도 헤어지지 말 것을 다짐하며 서로 껴안는 순간, 희미한 안개 속으로 지팡이를 짚은 흰 수염의 산신령이 나타나 바위를 세 번 두드리며 삼일 동안 바위를 붙잡고 사랑을 속삭이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삼일을 견지지 못하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주문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남녀는 산신령이 알려 준대로 참꽃(진달래)을 따 먹으며 삼일을 견뎌내 결국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으며, 연인이 사랑을 속삭였다는 너럭바위는 당초 두명이 앉을 만큼 작았으나 산신령이 바위를 세 번 치자 십여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로 커져 마당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선남선녀들이 너럭바위에 앉게 되면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장암산 너럭바위 유래 안내판.

 

 

남쪽 불갑산 방향.

 

서쪽 구수산 방향.

 

 

서북쪽 법성포 방향.

 

북쪽 대마면 방향.

 

 

북동쪽 태청산 방향.

 

오늘 걸어온 고산과 고성산, 월랑산, 태청산이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

 

돌아본 장암지맥 분기봉 모습.

 

장암정과 너럭바위 전경.

 

 

장암산 정상 인증.

 

 

 

연인들의 밀애 장소로도 좋아 보이는 장암산 너럭바위를 뒤로하고 영산기맥으로 돌아나가는데,

 

 

장암산 정상에서 본 주변 조망(동영상 1:42")

 

 

철쭉이 만개하는 계절에 오면 더욱 좋을 듯하다.

 

 

갈림길로 돌아나와 우측 샘터로 바로 갈까 하다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후미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좌측 샘터삼거리로 진행한다.

 

 

샘터삼거리 이정표.

 

샘터삼거리에서 장암산 방향 입구를 나무로 표시를 해 놓고는, 사동고개 방향으로 들어선다.

 

 

좌측 아래로 상무대와 대도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숫가마터와 샘터 도착.

 

장암산 숯가마터.

 

『장암산 숯가마터는 1946년 봄부터 삼효리 미산마을의 오재학(1908년생) 씨와 영당마을의 이현복(1906년생)씨가 공동으로 숯만들기 사업을 시작하였다. 50명의 인부들이 나무를 베어 운반하여 숯을 생산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장암산 일대의 산림이 불태워져 폐쇄되었다.』

 

숯가마터 바로 아래에 숯가마샘이 있는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낙엽으로 지저분하지만, 샘물은 여전히 흘러나온다.

 

 

샘터에서 상무대 CC가 있는 사동고개까지는 길가로 철쭉이 심어져 있는 널찍한 수레길이 이어진다.

 

좌측으로 상무대와 상무대CC가 내려다 보인다.

 

 

길가에 용도가 궁금한 깃대가 세워진 곳에서,

 

시야가 선명했으면 광주시내가 보였을 방향을 조망해 보고,

 

 

우측 묘량면 월암리 방향도 가늠해 보고는,

 

나무계단을 내려서며 사동고개로 향한다.

 

 

편안한 소나무숲 등로가 이어지더니,

 

 

 

애마가 기다리고 있는 사동고개/덤바위재에 도착한다.

 

<사동고개(沙洞峙, 205m)>
영광군 묘량면 월암리 사동마을에서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덤바위재라고도 한다. 사동고개란 지명은 고개 아래에 있는 사동마을에서 따온 지명으로 사동은 대밭과 모래가 많아 사동(沙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좌측으로 상무대CC가 있고 장암선도로 준공기념비와 장암산 등산안내도가 서 있는데 기맥길은 건너편으로 이어진다.

고갯마루 좌측 아래에 상무대 골프장과 클럽하우스, 주차장이 있고, 사동고개 우측은 영광군 묘량면 월암리 사동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본래 영광군 황량면의 지역이었는데 1910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포리, 반월리, 칠곡리, 하월리, 죽림리, 동산리 청암리, 이문리, 성도리, 축동, 화촌, 문예리, 황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하월과 정암의 이름을 따서 월암이라 하고 묘량면에 편입되었다. 사동(沙洞) 마을은 200여년 전 밀양박씨에 이어 영월신씨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번창했다고 하며 대밭과 모래가 많아 사동(沙洞)이라 했다고 한다.

 

 

태청산 장암산 등산 안내도.

 

 

상무대 CC 입구

 

다음 구간 들머리 모습.

 

 

사동고개에 도착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후미분들도 도착하고,

 

 

영산기맥 네번째 산행을 마치고,

 

 

모두가 버스에 올라 뒤풀이가 예정된 법성포로 향한다.

 

 

기사분께 천원을 꾸어서 어묵을 맛나게 먹고,

 

해수랜드에서 땀을 닦고는,

 

 

뒤풀이 장소인 일번지 식당으로 이동하여,

 

 

법성포 전경.

 

 

정월대보름날 영산기맥 산행의 성대한 뒤풀이 시간을 가진다.

 

 

 

 

 

 

오늘 뒤풀이의 대미는 막걸리!!

 

 

설 명절로 인하여 지난 1월 넷째 주 정기산행을 건너뛰었더니 이번 산행이 무척이나 힘겹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근육이 빠지는 속도도 빨라진다고 하였는데,

오늘도 쉼 없이 움직이며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하루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