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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영산기맥 5차(사동고개~화산골재) : 산길의 어느 이름 모를 묘지는 모두 우리 선조들의 천년고택

by 재희다 2020. 2. 22.

산 행 지 : 영산기맥 5차(사동고개~화산골위재) 전북 장성군, 함평군. 전남 영광군.

산 행 일 : 2020. 2. 22.(토)

산행코스 : 사동고개/덤바위재~분성산~월암산갈림길~연정재~광산김씨세장산~뱃재~가재봉

              ~밀재/선치~헬기장~금산고개~358봉~노루목~불갑산(연실봉)~구수재~용천봉

              ~모악산~노은재~화산골재 (17.2km + 탈출 1.3km, 7시간 40분 소요)

산행참가 : 17백두.

 

<산행지도>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국내 첫 확진자가 지난 1월 하순 발생한 이후,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던 방역망이 지난주 신천지교회 대구지역 신도들의 집단감염으로 겉잡을 수 없는 확산세를 보여, 백두산우회 정기산행에도 적잖은 영상을 주었다. 그동안 비가오나 눈이오나 태풍이 몰아쳐도 어김없이 이어지던 백두산우회 정기산행을 중단하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결국 직장에서 단체활동금지 지침이 내려진 일부 회원들을 자택에 격리해 둔 채 자기 진단에서 별다른 이상증상이 없는 회원들만이 산행 버스에 몸을 싣고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에서 살아지기를 바라며 산행지인 전남 영광으로 향한다.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쉬엄쉬엄 달려 새벽 3시 반쯤에 산행 들머리인 사동고개에 있는 상무대 CC 입구에 도착하였고, 원래 계획은 5시에 산행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함평군 월야면이 고향이 영규형이 '마침 산행코스가 조상님들의 묘소가 있는 선산을 지나는 관계로 막걸리라도 한잔 올리고 싶다'며 출발시간을 30여분 늦췄으면 좋겠다고 하여, 5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키로 하고 5시에 일어나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버스 문을 나서니 주변은 간밤에 내린 비로 촉촉이 젖어 있고, 사동고개 고갯마루는 2주 전의 모습 그대로다. 새벽까지 비 예보가 있어서 내심 걱정을 하였으나 예상보다 일찍 비가 그쳤다.

 

<사동고개(沙洞峙, 205m)>
영광군 묘량면 월암리 사동마을에서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덤바위재라고도 한다. 사동고개란 지명은 고개 아래에 있는 사동마을에서 따온 지명으로, 사동은 대밭과 모래가 많아 사동(沙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갯마루에는 장암선 도로 준공기념비와 장암산 등산안내도가 서 있는데, 기맥길은 도로 건너편 시멘트 옹벽으로 올라 숲으로 이어진다.

 

 

이곳 사동고개에서 밀재까지의 영산기맥 능선는 거칠고 조망이 트인 곳도 없어서 깜깜한 밤중에 진행을 하더라고 별도 아쉬울게 없는 구간이라, 아직은 짙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작은 렌턴불을 밝히고 시멘트 옹벽을 올라 숲길로 들어서며 영산기맥 다섯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편백나무가 듬성듬성 보이더니 이내 빼곡한 대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근데 이곳의 대나무는 자주 보던 산죽이 아니라 신우대라는 키가 크고 가늘어 매끈한 모습의 대나무다. 신우대(시누대)는 대나무의 시누이 격이라고 하여 시누대라 불리기도 하며, 신우대 또는 신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나무보다 굵기가 가늘고 곧아 화살대로 쓰인다고 한다.

 

 

제법 가파르고 거친 등로를 따라 오르면,

좌측으로 육군보병학교 가로등 불빛이 여느 도시의 야경인 듯 밝게 빛나고,

 

 

작은 대리석 정상석이 있는 분성산(318.2m)을 지난다.

네이버 지도에는 이곳을 장암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분성산(318m)>
전남 장성군 삼서면 대도리와 영광군 묘량면 월암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바로 아래에는 상무대 골프장이 있고, 정상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와 넓은 공터 위에 앙증맞은 표시석이 서 있으며, 산봉우리 아래는 군 벙커가 있는지 굴뚝 하나가 보이는데, 이 봉우리의 지명 유래에 관한 자료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조금 오래된 지도에는 분성산이란 지명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고, 장암산이라 표기가 된 곳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장암산의 한 능선으로 보는 모양이다.

 

봉우리 너머 차양막 지붕이 있는 참호 옆 느티나무 좌측으로 내려서면 넓은 공터 능선이 나오고, 이곳에서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두고 가시나무와 미역순줄기가 잔뜩 도사리고 있는 우측의 희미한 등로가 영산기맥인데 자세히 보면 선답자의 표지기가 한두개 보인다.

 

 

커다란 바위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능선을 따라 이어진 거친 등로를 따르면,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묘지를 지나 소나무숲으로 들고,

 

 

잡목이 무성한 가파르고 희미한 오름길 등로를 오르면, 표지기가 많이 달려있는 월암산 갈림봉(352m)이 나온다. 이곳에서 기맥길은 좌측으로 급하게 꺾어 내려서야 하고, 직진의 능선은 361.8봉을 거쳐 월암산(354.6m)으로 이어진다.

 

 

월암산 갈림길에서 잠시 내려서니 돌무더기가 눈에 띄는데,

성황당의 흔적 같아 보이지만 자세한 연유는 알 길이 없다.

 

 

잡목이 무성한 거친 족적을 쫓아서 조심스레 내려서니,

 

 

육군공병학교장 명의의 경고판이 보인다.

 

이런 경고판이 있다는 것은 이곳으로 산꾼들이 많이 다닌다는 증거이기에 우리가 영산기맥 능선을 놓치지 않고 있음을 짐작케 해 준다. 고마워유~~!

 

 

등로가 능선을 좌측에 두고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데,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보이지를 않는다.

아마도 연정재로 내려서는 곳인 듯하여 무작정 희미한 족적을 쫓아서 아래로 내려서니,

 

연정재로 내려서는 백두들.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연정재에 도착하는데, 영산기맥 능선을 벗어나 약간 우측으로 내려선 샘이다.

이곳에서 영산기맥 능선 들머리는 좌측 고갯마루로 조금 이동하면 나온다.

 

<연정재(225m)>
함평군 묘량면 연암리 연정마을과 장성군 삼서면 월계리 관동마을을 잇는 고개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기맥길이 이어진다. 주변은 조리봉, 가재봉 등이 위치하여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낮은 산지와 평지로 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팔암, 신계, 연정 등이 있다. 팔암은 마을 주변 산봉우리에 매바위, 쟁기바위. 조리바위 등 8개의 기암이 있는 것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계는 마을 일대가 계곡으로 형성된 지대로, 신월평의 신자와 연계의 계자를 합하여 신계라 칭하였다. 연정은 마을 앞에 연못이 있는데 연꽃이 많아 연정이라 불린다고 한다.

 

우측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 연정마을 방향.

 

연정재에서 처음으로 목을 축이며 잠시 쉼을 하며 행장을 간추린다.

 

 

잠시 목을 축이는 사이에 주변이 훤히 밝아오자,

연정재에서의 쉼을 뒤로하고 다시금 영산기맥 잇기에 나선다.

 

 

거칠기는 하지만 그나마 뚜렷한 등로를 따라,

연정봉(271.4m)에 올라 우측으로 휘어지며 칠봉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잠시 내려섰다가는 이내 다시 '육/훈' 표지석이 있는 무명봉을 지나고,

 

 

칠봉산(七峰山, 267.9m) 갈림길을 지난다.

잡목만 무성하고 펑퍼짐한 이곳 능선봉에서 직진하면 칠봉산으로 이어지고, 영산기맥은 직좌틀하여 내려가야 한다. 양쪽 모두 희미한 족적이 있어서 주의해야 할 지점으로 보인다.

 

 

칠봉산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내려서자 등로가 뚜렷해지며 오래된 묵묘를 지나고,

 

 

이내 둥그런 묘지가 나오는데, 옆에 있던 영규형이 증조부님 묘소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는 영산기맥 산꾼들의 대부분이 산행기에서 언급하는 묘소가 옆 동료의 가족묘지일 줄이야!

 

고향이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 석계마을인 영규형네 선산이 이곳 칠봉산 자락 영산기맥에 자리하고 있고, 그것도 산행기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석계공묘(石溪公墓)가 영규형 고조부님 묘소였다니 여간 놀랍지 않다.

 

영규형 증조부님(石溪公) 묘소에서!

 

 

묘소를 내려서자 '石溪公墓在頂上碑在下麓(석계공묘재정상비재하록)이라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해석하면 '석계공의 묘소는 정상에 있고 비석은 아래 산기슭에 있다'라는 뜻이다. 즉, 엄밀하게 따지면 이 비석은 묘지석이 아니고 묘소는 위에 있고 묘지석은 아래 산기슭에 있음을 알리는 안내석이다. 그동안 영산기맥 산꾼들이 묘지석이 묘지의 축대 아래에 있다고 다들 갸우뚱해했었는데, 그 연유를 두고 이제 더 이상 왈가불가할 일이 아닌 듯하다.

 

 

<함평군 개략도>

 

 

함평군(咸平郡) 동쪽은 광주광역시와 나주시, 남쪽은 무안군, 북쪽은 영광군·장성군, 서쪽은 황해 바다에 면해 있다. 면적은 392.26㎢이고, 인구는 32,735명(2020년 2월 말 기준)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8개 면, 272개 행정리(104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에 있다.

 

<월야면(月也面)>
북동쪽은 장성군 삼서면(森西面), 남동쪽은 광주광역시 광산구(光山區), 서쪽은 함평군 해보면(海保面)과 영광군 묘량면(畝良面), 남쪽은 나산면(羅山面)에 접한다. 북서쪽에 태청산맥(太淸山脈), 동쪽과 서쪽에 월악산(月岳山)·어수산(魚首山)이 있을 뿐, 면의 대부분이 중앙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월야천 유역의 비옥한 월야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고 복숭아·배 등의 과일이 산출된다. 또 용월리(龍月里)와 양정리(陽亭里)에서는 완초(莞草)를 이용한 돗자리공업이 활발하다. 월야리에는 양송이 가공공장이 있다. 국도가 면 중앙을 지나고 있어서 광주와 영광 방면의 교통이 편리하다.

백제시대에는 다지련, 신라시대에는 다기현, 고려와 조선초에는 모평현에 속했으며, 1409년(태종 9) 함풍현과 모평현이 합해져 함평현이 되면서 함평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지금의 월야면 지역에는 월악, 갈동, 대야면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악, 갈동, 대야면이 합쳐 비로소 월야면이 신설되었다. 월야면이라는 이름은 월악과 대야에서 한 글자씩 따서 월야면이 되었다.

 

<월계리(月溪里)>
월계리의 지명유래는 현재로서 알 수가 없다. 자연마을로는 석계, 용강, 덕산, 월계 마을이 있다. 석계(石溪)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지형이 배(舟) 형국으로 마을 뒷산에 큰 뱃재, 작은 뱃재라 불리는 고개가 있으며, 이 마을은 배의 밑 부분에 해당되므로 배밑이라고 불러왔는데, 대야면의 관할구역 때 석계리(石溪里)라 하였다고 한다. 용강(龍江)마을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 말 표현대사가 주변 일대를 살펴보고 이 지역은 후세에 강이 됨과 동시에 용이 승천할 것이라 하여 마을 명칭을 용강(龍江)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덕산(德山) 마을은 원래 이 마을은 서당(書堂)이 많이 있는 곳이라 해서 서당골이라 했으며, 후에 덕산(德山)이라 부르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전래되어 오는 이야기가 없어 알 수 없다.

 

<월계리 석계(石溪) 마을>
이 마을 구릉상에 선사시대의 유적인 지석묘가 분포된 것을 볼 때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존 성씨 중에서는 광산김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1700년대 초 김일삼(金鎰三)이 함평군 대동면 덕산리에서 살다가 창녕조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후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그 후 인동장씨가 250년 전에, 무안박씨와 여양진씨가 200년 전에, 함평이씨가 150년 전에, 전주이씨가 120년 전에, 죽산안씨가 105년 전에, 금성나씨가 24년 전에 들어와 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배(舟) 형국으로 마을 뒷산에 "큰뱃재", "작은 뱃재"라 부르는 고개가 있으며, 이 마을은 배의 밑 부분에 해당되므로 "배밑"이라고 불려 왔으며, 대야면의 관할 때에는 석계리(石溪里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 했다. 이 마을은 지석묘 등 돌이 많이 있으며, 지금 마을 상수도 물로 쓰이고 있는 밭시암(밖샘)이라는 샘이 돌로 되어 있고 돌 사이에서 시원하고 맑은 물이 나와 흘러 내려간다 해서 석계(石溪)라 불렀다 한다. 마을 안에 쇠점고랑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에 쇠점이 있었다고 하며 김씨가 살았다 해서 김정동(金定洞)이라고도 한다.

 

 

 

영규형 증조부인 석계공 묘지에서 잠시 내려서자,

시멘트 포장 임도가 나오며 '광산김씨세장비'가 있고, 그 우측에 영규형 선조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 임도 좌측 편은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 월계제(月溪堤)와 영규 형의 고향 마을인 석계마을로 이어지고, 우측은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 연암제(連岩堤)로 이어진다.

 

광산김씨세장비 뒷면에는 묘표를 새겨 놓았다.

 

우측의 묘비는 위쪽 석계공묘의 묘비석이고, 그 우측에는 유인 영광김씨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通政大夫祕書監丞 石溪光山金公箕粹(통정대부비서감승 석계광산김공기수)와 숙부인 영광김씨 묘비.

영규형네 증조부 내외분의 묘비로, 비서감(秘書監)은 대한제국 때 승선원(承宣院)을 고쳐 부른 관청으로 주로 궁내부(宮內府)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으로 요즘의 1급에 해당하는 품계다.

 

<광산김씨(光山金氏)>
광주광역시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인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아들 흥광공이다.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서 '광김'으로 일컫는다. 이 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본관별 서열로 제5위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특히 대제학 7명은 ‘광김’을 더욱 빛나게 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자손이다.
광산김씨는 고려 초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3세손 김길(金佶)로부터 8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여 명문 가문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15세손으로 대광(大匡)에 오른 김정(金鼎)의 아들인 약채(若采)·약항(若恒)·약시(若時) 3형제대에서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은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은 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집(集)에게 계승되어 부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집의 아우 반(槃)의 여섯 아들은 모두 출중하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 우의정 김희(金喜), 이조판서 김상휴(金相休)·기만(箕晩)·기은(箕殷), 대제학 김만기(金萬基)·만중(萬重) 형제 등이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이 가운데 총융사(摠戎使)를 지낸 만기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로 유명한 김만중의 후손 중에서 많은 인물이 나와 ‘사계 자손’의 주축을 이루었다.
예조판서·대제학을 지낸 김진규(金鎭圭)는 김만기의 아들이며, 대제학·영의정을 지낸 김양택(金陽澤)은 김진규의 아들로서 3대 대제학, 형제 대제학의 진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문집 10권을 남긴 문인 김춘택(金春澤), 고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김영수(金永壽)는 김진규의 형이며, 판서·참찬을 지낸 김진구(金鎭龜)의 후손이다.

 

 

광산김씨 영규형네 가족묘지에 도착하는 백두들.

 

영규형 고조할머니 산소에 일배를 올리며 인사를 드린다.

 

 

 

 

광산김씨 영자 규자 내외분께서 가져오신 음식과 막걸리를 나누며 아침식사를 한다.

 

 

 

 

 

이후, 영규형네가 가져온 음식을 먹느라 정작 본인들의 도시락은 꺼내 보지도 못한 백두들은 무거운 배낭을 종일토록 메고 다닐 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묘소 앞 동백나무에 피어난 봄!

 

 

 

광산김씨 가족묘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는,

 

광산김씨 후손들의 세세손손 번창함을 기원하며,

 

다시금 영산기맥 잇기에 나선다.

 

 

들머리로 들어서니 빼곡한 시누대(신우대) 숲으로 등로가 이어지더니,

 

 

좌전방 능선 너머로 아침해가 떠오르고,

 

뒤쪽으로는 지나온 칠봉산 능선이 조망되는데,

능선의 봉우리들이 7개라서 칠봉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개념도상 200봉에 올라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좌전방으로 가야 할 가재봉이 우뚝하고,

 

 

이내 잡목들이 빼곡히 자리한 뱃재를 지난다.

 

<뱃재>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에서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 석계마을로 넘어가는 옛고개로, 빼곡한 잡목들이 널찍한 옛 고갯길을 점령해버려서 이제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 옛고개가 되어 버렸다. 좌측 함평균 월계리의 자연부락으로는 석계, 용강, 덕산, 월계 마을이 있다. 석계(石溪)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지형이 배(舟)의 형국으로 마을 뒷산에 큰 뱃재, 작은 뱃재라 불리는 고개가 있으며, 이 마을은 배의 밑 부분에 해당되므로 배밑이라고 불려 왔는데, 대야면의 관할구역 때에 석계리(石溪里)라 하였다고 한다. 용강(龍江)마을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 말 표현대사가 주변 일대를 살펴보고 이 지역은 후세에 강이 됨과 동시에 용이 승천할 것이라 하여 마을 명칭을 용강(龍江)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덕산(德山) 마을은 원래는 이 마을에 서당(書堂)이 많이 있는 곳이라 해서 서당골이라 했으며, 후에 덕산(德山)이라 부르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전래되어 오는 이야기가 없어 알 수 없다.

 

뱃재를 지나는 백두들.

 

 

우측으로 편백나무가 식재된 222봉을 지나면,

 

 

좌 우로 수레길이 선명한 작은 뱃재쯤을 지나게 되는데,

좌측은 보림정사와 석계마을로 이어지고 우측은 연암제로 이어진다.

 

 

작은 뱃재를 지나면 가재봉을 향한 가파른 오름길이 시작되고,

 

 

좌측 아래로 영규형네 고향마을인 석계 마을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데,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재봉을 이어지는 등로는 가파르지만 제법 뚜렷이 이어져, 모처럼 긴장을 풀고 느긋한 걸음으로 오르면,

 

 

'가재봉'이라 적힌 코팅지가 걸려있는 가재봉에 도착하는데,

 

주변은 잡목으로 빼곡하고, 연무조차 시야를 방해하여 인증만 남기고는 이내 밀재로 향한다.

 

 

가재봉을 지나자 등로가 다시 거칠어지며 산꾼들에게 혼선을 초래하는 가짜 가재봉을 지나게 되고,

 

 

미역순줄기와 가시덩굴이 뒤엉켜 있는 안부를 지나는데, 개념도상 흰바위재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곳에서 15분 정도 더 진행하여 나오는 커다란 흰바위가 있는 안부를 흰바위재라 하기도 하는데, 어느 곳이 맞는지는 확인키 어렵다.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작은 묵묘를 지나서,

 

 

254봉쯤에 올러서 두툼하게 입었던 옷을 벗어서 배낭에 갈무리하는데,

아직 2월인데도 기온은 10도를 넘어 오르고, 바람까지 불지 않아 거의 봄산행 느낌이 난다.

 

 

커다란 흰바위가 덩그러니 자리한 안부를 지나는데,

어떤 지도에는 이곳을 흰바위재로 표시하고 있지만, 개념도에는 그냥 '흰바위'라 표시하고 있다.

 

 

거친 등로를 헤치고 다소 편평한 260봉을 지나는데,

 

 

앞쪽으로 미역순줄기가 엉켜있는 등로가 이어지며 가야 할 영산기맥의 봉우리들이 보인다.

 

 

273봉쯤을 지나고,

 

 

거칠고 가파른 봉우를 오르는데, 봉우리 정상 직전에서 좌측 사면으로는 희미한 우회길이 있지만, 직진의 정상 방향으로는 잡목이 빼곡하여 등로가 보이지를 않는다. 이 봉우리는 삼면봉으로 좌측이 함평군 월야면에서 해보면으로 바뀌고, 우측은 계속 묘량면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다.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희미한 족적을 따르니 이내 다시 능선으로 접속하여 밀재로 향한다.

 

 

미역순줄기가 뒤엉킨 등로를 따르면,

 

 

최근에 새로이 단장한 진주강공의 묘소를 지나게 되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묘봉들이 올록볼록한 가족묘지 건너편으로,

밀재 저편의 헬기장봉(310.5m)이 높다랗게 건너다 보이고,

 

 

이내 옛 22번 국도가 지나던 밀재에 내려서는데, 이제는 아래로 밀재터널이 뚫려 차량 통행이 뜸해졌다.

밀재 버스승강장이 있는 밀재의 또다른 이름은 선치(蟬峙)인데, '매미 선(蟬)'자를 쓰는 것으로 보아 매미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짐작될 뿐이다.

 

<밀재(密峙, 180m)>
전남 영광군 묘량면과 함평군 해보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22번 국도가 지나가며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나,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터널이 뚫려서 부산하던 발길이 뜸해진 고갯길이 되었다. 지형도에는 '매미 선(蟬), 고개 치(峙)'를 써서 선치(蟬峙)라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함평)의 선치(蟬峙)가 모악산과 영광 군계에 표기되어 있다. 『지승』에는 동쪽 함평과의 경계에 뚜렷이 선치(蟬峙)가 기재되어 있다. 『광여도』에는 위치는 동일하게 나타나나 선치(禪峙)로 한자를 달리해 표기하고 있다. 좌측으로는 해보면 문장리로 연결되는 길인데 밀재 아래 문장리에는 국군통합병원이 있다.

 

밀재로 내려서는 회장님과 총무님.

 

밀재 좌측 함평군 방향.

 

 

밀재 건너편 수레길로 들어서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영산기맥은 우측의 등산로 방향 오름길로 들어서야 한다.

 

돌아본 밀재 모습.

 

 

영산길은 탐진최씨세장산(探津崔氏世葬山) 비석 좌측으로 이어지고,

 

 

잠시 오르면 커단 봉분의 탐진최씨 일가 묘지가 나오며 함평군에서 세운 이정표도 있다.

뒤쪽 위에는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 묘지가 있는데, 훈련원은 조선시대에 병사의 무재(武才) 시험, 무예의 연습, 병서(兵書)의 강습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봉사(奉事)는 종8품 품계다.

 

돌아본 밀재 건너편의 삼면봉 방향.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길을 오르면,

 

 

수양산 갈림길이 나오는데,

영산길을 우틀하여 금산고개로 내려가게 되지만, 좌측의 311봉 정상을 다녀오기로 한다.

 

 

밀재봉이라고도 부르는 311봉 정상에는 널찍하게 헬기장이 자리하고 있고, 수양산 정상이 300m 남았다는 이정표와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가야 할 불갑산 연실봉 조망.

 

돌아본 가재봉 방향.

 

연무로 월야면의 너른 발판이 희미하게 보인다.

 

 

다시 갈림길로 돌아나와 금산고개로 이어지는 내림길로 들어서면,

 

 

오래된 군 교통호를 지나게 되고,

 

 

금산고개를 향해 뚜렷한 내림길이 이어진다.

 

 

앞쪽으로 불갑산으로 이어진 영산기맥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참봉함평이공의 묘지를 지나면,

 

 

금산고개에 내려서게 되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10여 미터 이동하면 불갑산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있다.

 

<금산고개>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에서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갯마루 옆에는 함평이씨세화산비(咸平李氏世華山碑)가 있으며, 산꾼들에게는 용문사 갈림길로 많이 알려진 고개다. 고개의 지명은 고개 아래에 있는 금계리 금산마을의 지명을 따온 듯하다. 이곳에서 많은 영산기맥산꾼들이 등로를 포기하고 좌측 용문사 쪽 도로를 따라 노루목까지 올라가는 곳이다. 하지만 명색이 정통 산꾼을 자처하는 백두들이 그런 편법은 쓰고 싶지 않아 고생길이 훤한 기맥 등로로 가기 위해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선다.

 

고갯마루 모습.

 

고개 우측 편에 함평이공 묘에서 이어지는 수레길을 따르면 나오는 날머리와 건너편에 들머리가 있다.

 

 

금산고개에서 정통 영산기맥 능선으로 들어서면, 이내 임도를 두고 능선으로 들어선 것을 후회하게 되는데,

 

 

사면에 흩어진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용도가 뭣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어야 할 자리를 잘못 찾은 듯

 

 

오래전에 벌목이 된 듯이 보이는 능선 좌측은 우거진 수풀로 진행이 더욱 어렵고,

 

능선 좌측으로는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 금산마을의 금산제가 내려다 보인다.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 금산 마을>
금산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에 이천서씨와 밀양박씨가 들어와 신기지(新基趾)에 마을을 이루었고, 그 후 순조 때 전주이씨, 진주정씨, 파평윤씨가 이주하여 살고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 지명에는 신계리(新溪里)로 되어 있고, 1891년(광서 7년 고종 28년) 이 마을에 거주한 서복남 소유의 호적에 의하면 "신성리(新成里)"라 했는데, 1912년 행정구역 명에는 신성(申成)으로 표기했다. 대체적으로 1912년 표기는 "新"을 "申"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같은 마을이다. 기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금계(金鷄)"라고 해야 옳은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앞 시냇물이 맑은 것을 보고 "금계(金溪)"라 칭하였다.

 

돌아본 311봉 방향.

 

 

어디가 등로인지 분간이 어려운 능선과 사면을 더듬어 오르면,

 

 

아무런 표식이 없는 258봉에 올라서게 되고,

 

 

앞쪽으로 보이는 불갑산 주능선을 오르기 전에 지나게 될 358봉이 우뚝하니 버티고 있다.

 

 

잡목과 가시가 뒤엉켜 등로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가파른 내림길을 선탑자의 발자국을 쫓아 내려서니,

 

 

좌측 사면에서 이어져온 버려진 수레길에 내려서게 되고,

우측으로 수레길을 따라 258봉과 358봉 사이의 안부로 향한다.

 

앞쪽으로 보이는 358봉도 등로 상태가 엉망이면 어쩌지 하는 우려에 걱정이 앞선다.

 

 

잡목과 넝쿨이 가득한 버려진 수레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등로는커녕 족적조차 희미한 258봉과 358봉 사이의 안부를 지나는데,

같은 날 영산기맥을 출발한 무영객님의 표지기가 반갑다.

 

 

안부에서 잡목이 무성한 358봉 오름길로 들어서면, 이내 빼곡한 산죽지대와의 힘든 싸움이 시작되는데,

 

 

358봉 급경사 오름길을 빼곡한 산죽이 덮고 있어서 진행이 더욱 힘든다.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정상부에 올라서고,

 

 

이내 우측으로 편백나무가 식재된 358봉 정상에 도착한다.

 

 

이곳 358봉이 용문봉이라는 서래야 박건석님의 코팅지가 정상 옆 사면에 떨어져 있기에 정상으로 옮겨서 고정시켜 놓는다.

 

 

358봉을 뒤로하니 급경사 내림길이 뚜렷하고,

 

 

이내 성곽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는 안부를 지나서 오름길로 들어서는데,

 

 

등로 주변에 새싹들이 돋아나 온통 녹색으로 변하고 있다. 벌써 봄인가!

 

 

거칠기는 하지만 다소 완만해진 오름길이 길게 이어지고,

 

돌아본 358봉 방향.

 

 

불갑산 주능선이 가까워지니 경사는 오히려 완만해지며,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연자봉과 노루목쯤의 통신탑이 멀지 않게 보인다.

 

 

앞쪽으로 통신탑이 나타나며 좌측으로 금산고개에서 용문사를 거쳐 노루목으로 이어진 임도가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 임도를 따르면 바로 노루목으로 접속하게 되지만, 영산길은 통신탑 관리동 앞까지 직진하여 펜스 좌측으로 돌아 주능선에 접속해야 한다. 물론 주능선에서 우측 지근거리에 있는 장군봉을 다녀올 것인지는 알아서 판단할 문제이지만...

 

 

통신탑 울타리를 좌회하여 오르면,

 

이내 녹색의 꽃무릇 입사귀가 빼곡히 돋아난 불갑산 주능선에 접속하게 되고,

우측 지근거리의 장군봉을 다녀오기로 한다.

 

불갑산 주능선에 접속하여 장군봉으로 향하는 영규형.

 

 

불갑산 장군봉 정상에 도착하니, 앞서간 백두들이 목을 축이고 있다.

 

<장군봉(438.2m)>

불갑산 최고봉인 연실봉에서 북쪽 주능선의 투구봉 사이에 자리한 봉우리로, 정상은 넓은 공터(헬기장)지만 주변에는 나무가 둘러싸 조망은 없다. 장군봉은 영산기맥에서는 70m쯤 벗어나 있으며 영광군 묘량면,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이 갈리는 삼면봉이다. 북서쪽으로 묘량면과 불갑면을 나누며 이어지는 능선이 투구봉, 법성봉, 노적봉을 거쳐 덕고개로 이어진다. 하지만 장군봉이란 이름의 유래는 찾을 수가 없다.

 

장군봉 이정표.

 

불갑산 장군봉 인증.

 

 

 

장군봉을 뒤로하고 장군봉 갈림길로 돌아 나오니,

등로 주변에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꽃무릇이 지천이다.

 

주변에 무성한 꽃무릇.

 

<꽃무릇(석산화)>

꽃무릇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붉은 상사화로 알려져 있는데, 꽃무릇과 상사화는 같이 수선화과에 속하지만 전혀 다른 꽃이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피고 잎이 떨어진 뒤, 7~8월에 노란색 꽃이 핀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므로 상사화란 이름이 붙었다. 꽃무릇도 상사화처럼 잎과 꽃을 동시에 볼 수 없지만, 꽃무릇은 꽃이 먼저 9~10월에 피고 꽃이 진 뒤 잎이 돋아나 겨울을 지나고 5월경에 입이 떨어진다. 그리고 꽃 색깔도 붉은색이다. 꽃무릇은 꽃이 피는 무릇이란 뜻이며, 무릇은 백합과의 야생화다. 물론 꽃이 피지만 꽃이 작고 큰 특색이 없다. 무릇과 매한가지로 꽃무릇도 백합 뿌리와 비슷한 구근이 있어(학술적으로 비늘줄기라 부른다) 꽃이 화려한 꽃무릇을 그리 부르게 된 것이다. 꽃무릇 군락지는 이곳 불갑산의 좌우에 있는 불갑사와 용천사 그리고 고창 선운사가 유명하다.

 

용천사의 꽃무릇 사진(펌)

 

상사화 군락 사진(펌)

 

 

바위 암릉이 나타나는데,

 

바위 암릉에는 어느 두 분 산님의 추모비가 놓여 있다.

 

바위 암릉 위에서 바라본 우측 모악산 방향.

 

북동쪽 태청산 방향.

 

 

바위 암릉을 내려서면 이내 노루목을 지나게 된다.

 

노루목 이정표.

 

 

군사시설 펜스를 우측으로 돌아 정면 암릉 능선길을 잠시 따르면 위험한 길과 안전한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나오는데, 좌측 위험한 길 표시 등로도 진행해 보면 위험한 곳에는 안전시설이 되어 있어서 크게 문제될 곳이 없다. 오히려 안전한길 표시 방향인 우측으로 우회해 간다면 빼어난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을 수도 있겠다.

 

 

좌측 위험한 길로 들어서서 돌계단을 오르니, 커다란 바위들이 있는 암릉길이 이어진다.

 

이곳의 바위들은 진안 마이산의 바위처럼 역암으로 금방이라도 부서질듯한 모양이다.

 

 

커다란 바위들을 우회하여 지나는데,

 

돌아본 태청산 방향으로 오늘 걸어온 영산기맥 능선이 한눈에 가늠된다.

 

 

다시 나타나는 돌계단을 올라 암릉 위로 올라서니,

 

 

지나온 장군봉 방향의 불갑산 능선이 조망되고,

 

새벽부터 걸어온 영산기맥 능선도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광주시와 무등산이 지척으로 보일 터인데, 연무로 아쉽기만 하다.

 

살짝 당겨본 금산마을과 금산제가 내려다 보이고,

 

가야 할 불갑산 정상 연실봉이 뾰족하다.

 

 

안전시설이 되어 있는 바위 날등을 지나면서,

 

지나온 가재봉 서쪽의 연암제가 꾀나 커 보이고,

 

능선 우측 아래 계곡으로는 불갑사와 해불암이 가늠된다.

 

<불갑사(佛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인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 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전과 만세루, 향로전, 팔상전, 명부전, 일광당, 칠성각, 일광당, 범종각, 세심정, 천왕문 등,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보물 제830호)은 서쪽으로 돌아앉아 있다. 서방정토를 그리는 것일까. 아니면 마라난타가 서해를 건너 백제 땅을 밟은 것을 기리기 위해서일까. 다른 사찰과 달리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약사여래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을 모신 불상배치도 특이하다.
불갑사의 창건 시기는 4세기 말 또는 5세기 말로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백제때 창건 이후 고려 후기에 크게 융성해 승려 수백명이 머물렀고 절 땅이 10리 밖까지 미쳤다고 한다. 지금도 옛 영화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절의 규모가 크다. 요즘은 9월 중순에서 말에 걸친 꽃무릇 개화기에 집중적으로 많은 인파가 찾지만, 동백골의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는 이른 봄이나 단풍이 화려한 늦가을에 찾아도 좋은 곳이다.

 

<해불암(海佛庵)>
해불암은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1번지에 위치하며, 불갑사에 소속된 산내암자로, 정확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그 경치가 뛰어나 옛부터 호남지역의 참선 수행 도량으로서 이름난 4곳의 성지 가운데 하나로 꼽혀왔다. 백제말엽~고려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말 각진국사가 불갑사에 주석하면서 불갑산 내에 31암자가 형성되었는데, 해불암도 이 가운데 하나이며 불갑사 5대 암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해불암은 역대로 고승들이 많이 주석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으나 그 후 법릉선사의 중창과 연화 인욱 대선사의 중창으로 가람의 면모를 되찾았다. 이 사실은 백암 성총 스님의 모악산 해불암기(한국불교전서 제8권 476쪽)에 자세히 실려있다. 그 후 1741년경의 채은선사의 중수를 거쳐, 1870년 설두대사의 중수와 자운천우선사의 중수를 거쳐 가람의 빛을 이어내려 왔으나, 6.25동란시 전소 되어 버리고 해불암에 모셔져 있던 아미타여래삼존불좌상과 지장 시황도, 칠성탱화, 신중탱화 등이 당시 불갑사 포교당인 영광읍 원각사로 옮겨 모셔져서 현재까지 봉안되어 있다.
해불암에는 설두대사의 중수시에 굉장히 오래된 차나무가 고사되어 있었는데, 설두대사의 중수로 불갑사가 다시 흥성하게 되자 차나무에 새 잎이 돋았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불갑사가 흥성하면 차나무에 새 잎이 돋고, 불갑사가 쇠퇴하면 차나무가 다시 고사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베어져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해불암에서는 연화 인욱 대선사와 그 제자인 구련 선하, 구화 처열, 구용 도인 등이 머물면서 수행하였고, 조선조 후기와 구한말 시대에는 설두대사의 주석 이후 금화 유성, 학명 계종 스님 등이 선풍을 드날렸으니 그 도향이 호남지역을 가득 채웠었다. 현재 대웅전 1동, 요사 2동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암릉을 내려서자 다시 위험한 길과 안전한 길이 합쳐지고,

 

 

커다란 바위를 우회하여 지나면,

 

 

해불암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이내 데크목 계단길이 나오는데,

 

첫번째 계단에 '108계단, 108번뇌를 소멸시켜 참된 진리를 향해 오르는 계단'이란 표지판이 놓여 있어서,

하릴없이 계단 숫자를 헤아리며 오른다.

 

 

108계단이 끝나는 즈음에 연실봉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우측으로 구수제 방향 갈림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아마도 연실봉에서 구수재로 가려면 이곳으로 돌아 나와야 되나 보다.

 

구수재 갈림길에서 연실봉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통천계단 도리천(33천)의 연화대(연실봉)로 오르는 계단'이라 새겨진 오석이 놓여 있다.

 

<통천(通天)계단>

도리천(忉利天)은 범어 Travastrimsa의 음역으로, 의역해 33천이라고도 한다. 33선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는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에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는 사방에 각 8천성(天城)이 있으며, 중앙에는 제석천(帝釋天)이 머무는 선견성(善見城)이 있기 때문에 합쳐서 모두 33성이 된다. 그러므로 33천이라고 한다. 이곳의 천인(天人)들은 신장이 1유순(由旬)이고, 수명은 1,000세이며, 남.녀의 구별이 있어서 신체가 서로 접근하면 음기와 양기가 만나서 아이가 태어난다. 처음 태어날 때 인간의 6세 된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며, 저절로 옷이 입혀진다고 한다. 이곳에는 뛰어난 누각, 동산, 연못, 난간 등으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고 한다. 33천은 6재일(齋日, 매달 8·14·15·23·29·30일) 마다 성밖에 있는 선법당(善法堂)에 모여서 법다운 일과 법답지 않은 일을 서로 논의한다. 이때에는 지상에 있는 중생들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함께 다룬다 하여 6재일에는 특히 계율을 잘 지키고 하루 한 끼만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 제석천이 머무는 곳으로써의 도리천은 원래 인도에 있던 것을 불교에서 취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摩耶) 부인이 죽은 뒤에 이곳에 다시 태어났으며, 석가모니는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해 3개월 동안 설법했다고 한다.

 

 

108계단을 오르면 108번뇌를 털어내고,

다시 33개의 통천계단을 올라서니 도리천의 연화대인 불갑산 연실봉에 닿는다.

 

<불갑산 연실봉(佛甲山 蓮實峰, 516m)>
전남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연실봉은 불갑산의 주봉으로서 산 정상의 형상이 연꽃열매 모양을 하고 있는데서 이름하였으며, 주변 산들이 연꽃잎처럼 감싸고 있어서 산 전체가 연화행국을 하고 있는 영산(靈山)으로서 영광의 정기가 이곳에서부터 발원하고 있단다. 호남정맥 서남쪽 끄트머리에서 갈라진 영산기맥 능선에 자리잡고 있는 영광의 진산이라 불리는 이곳 불갑산은 멀리서 보이는 산형은 마치 노서하전(老鼠下田)이라 하여 늙은 쥐가 밭을 향해 내려오는 형세와도 같다고 한다. 원래는 아득한 산의 형상이 어머니와 같아서 '산들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모악산이라고 불렀는데, 백제시대에 불교의 '불(佛)'자와 육십갑자의 으뜸인 '갑(甲)'자를 딴 불갑사가 지어지면서 산 이름도 불갑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백제 때 창건한 고찰 불갑사를 품고 있고, 낮은 높이에도 빼어난 조망으로 이름난 산이다. 남북으로 줄을 선 주능선에서는 전망이 트이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서해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정상인 연실봉 아래에 있는 해불암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는 장관이다. '일출은 경주 토함산, 낙조는 영광 불갑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갑산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유명하다고 한다. 숲이 울창하고 산세가 아늑하며, 참식나무와 꽃무릇 같은 희귀식물들이 자생군락을 이루고 있다.
6·25 때 이 산은 빨치산의 본거지로 많은 양민이 토벌작전에 희생된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인민군 전남유격사령부는 한때 광주, 노령, 유치, 보성, 불갑 지구 등 5개의 지구대로 편성하여 활동했는데, 이곳 불갑산은 주로 노령지구와 연계하여 작전을 펼치곤 했다. 이때 이 주변 마을의 선량한 양민 5~6백명이 학살당하여 규명을 해야 할 역사적인 소명을 간직한 산이다. 육군 전사를 보면 1951년 2월 20일 실시된 대규모 작전으로 전남의 다른 지구사령부에 비해 가장 빨리 진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금산고개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와서 쉼을 하다가 연실봉을 내려서려는 분들을 붙잡아서 인증을 남긴다.

 

나무 펜스가 둘러진 불갑산 연실봉 정상석 뒷면에는, '연실봉은 불갑산(구 모악산)의 주봉으로서 그 형상이 연꽃 열매 모양을 하고 있는데서 이름하였으며, 주변 산들이 연꽃잎처럼 감싸고 있어서 산 전체가 연화형국을 하고 있는 영산(영산)으로서 영광의 정기가 이곳으로부터 발원되고 있다고 한다'라고 쓰여 있다.

 

 

 

 

백두들이 떠난 연실봉에서 바라본 서북쪽 불갑면 방향.

 

북동쪽 장군봉과 태청산 방향.

 

동쪽 광주 방향.

 

연실봉 정상 전경.

 

서쪽 모악산 방향.

 

함평군에서 세워놓은 불갑산 안내도.

 

 

연무로 동쪽 수양산 능선 너머의 월야면 벌판이 흐릿하게 보인다.

 

남동쪽 해보면 금계제 방향.

 

남서쪽 함평읍 방향.

 

<함평군 개략도>

 

<함평군(咸平郡)>
동쪽은 광주광역시와 나주시, 남쪽은 무안군, 북쪽은 영광군·장성군, 서쪽은 황해 바다에 면해 있다. 면적은 392.26㎢이고, 인구는 32,735명(2020년 2월말 기준)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8개 면, 272개 행정리(104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에 있다.
노령산맥의 여맥이 수지상(樹枝狀)으로 뻗어내려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그 사이를 영산강 지류들이 흘러 비교적 평탄한 지세를 이루고 있다. 북부에는 불갑산(佛甲山, 516m)·모악산(母嶽山, 348m)·군유산(君遊山, 403m) 등 노령산맥의 봉우리가 영광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중앙부에는 발봉산(鉢峰山, 179m)·천주봉(天柱峰, 376m)·고산봉(高山峰, 359m)·기산봉(箕山峰, 148m) 등 잔구들이 발달해 있다. 기산봉은 함평읍의 진산으로 산정에는 기산산성이 있으며, 산 아래로 함평천이 흐르고 고산봉이 보인다. 남서부에는 감악산(紺嶽山, 258m)이 무안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천은 나산천(羅山川)과 고막천(古幕川)이 동부를 남류하여 영산강에 합류하며, 함평천(咸平川)이 중앙을 남류하여 영산강에 합류한다. 영산강은 영암군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서류하며, 엄다면과 학교면을 흐르는 중류는 사호(沙湖)라고도 한다.


함평군에는 '함평천지'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는데, 함평은 예로부터 '천지(天地)'라 부른데서 연유한 말로, 함평이 “사람 살기에 좋고 모든 것이 넉넉하니 조화롭고 무궁하다."라는 뜻이란다. 함풍과 모평을 합해 현을 만들어 1409년에 비로소 지어진 고을 이름인 함평은 옛부터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었고, 특히 쌀맛이 좋고 질이 좋아 '함평 쌀밥만 먹은 사람은 상여도 더 무겁다'라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함평은 특히 높은 산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함평에는 기산영수(箕山潁水, 중국 하남성에 있는 산과 시내의 이름으로 堯(요)임금 때 巢父(소보)와 許由(허유)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으라는 왕명을 피하여 들어가 隱居(은거)했다는 산과 물.)로 불리는 명승지가 있으며, 함평읍내 동북방 함평공원의 둔덕과 그 아래 함평천을 일러 중국 하남성 동봉현의 전설적인 땅에 비유하고 기산영수(箕山潁水)라 했던 것이다.

 

서쪽 불갑면 방향.

 

 

연실봉을 바로 넘어서면 금계리 금계제로 내려서게 되고, 기맥길은 연실봉 정상에서 올라선 방향의 데크목계단길로 돌아나와 구수재 방향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쉼터가 나타나고,

 

 

구수재와 용천사 방향 능선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좌측 능선길로 진행하면,

 

 

좌전방 해보면 방향으로 조망이 멋진 암릉이 나오며,

 

 

데크목 계단길이 나오고,

 

앞쪽으로 우뚝한 바위가 멋지다.

 

 

이어지는 암릉을 우회하여 내려서고,

 

 

우측 데크목 우회길을 두고, 직진의 암릉으로 이어진 돌계단길로 들어서도 별반 어려움이 없고,

 

좌측 해보면 금계리 방향의 조망을 볼 수 있다.

 

 

위험하다고 하는 암릉길로 내려서서 뒤돌아 본 암릉 모습.

 

 

광주정공 묘지를 지나면서 등로는 전형적인 육산등로의 모습으로 바뀌고,

 

 

널찍하고 편안한 등로를 따르면,

 

 

다시 오래된 묘지를 지나게 되고,

 

 

사각정자 쉼터가 있는 구수재에 도착하는데,

후미팀은 이곳 구수재에서 용천사로 탈출키로 하였던지라 이곳 쉼터에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보이지를 않는다. 산행이 쉬워서 목적지로 향했는지, 아니면 용천사로 탈출했는지를 궁금해하면서 다른 산객들 틈에 끼여서 잠시 목을 축이며 쉼을 한다.

 

<구수재(223m)>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와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 좌측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 구수동마을에서 그 이름을 따 왔는데, 구수동 마을에는 아홉마리 구렁이가 재를 못 넘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멸치(滅峙)로 표시된 재로 나주 가는 길목인데, 여기를 넘었던 동학군은 두차례의 공성전에서 3,000명의 사상자를 낸 역사적인 장소로, 이 재가 멸군(滅軍)의 재였던 것이다. 또한 고개를 경계로 좌.우에 있는 용천사와 불갑사를 연결하는 고개이기도 한데, 예전에 두 사찰의 스님들이 교류하는 통로였고,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넘나들었던 길이였으며, 숯을 구워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숯쟁이들도 나무를 구하고, 또 영광에 숯을 내다 팔기 위해 그 길을 오갔던 고개다. 또한 구수재를 경계로 영광의 불갑사와 함평의 용천사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데, 두 사찰이 상사화로 잘못 알려져 있는 꽃무릇으로 유명하여 9월에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구수재를 깃점으로 불갑산과 모악산으로 나뉘는데, 두 산의 모양도 전혀 다르다. 불갑산은 주봉인 연실봉 주변으로 기암괴봉이 옹골차게 들어앉아 남성다운 반면, 모악산은 겉보기에도 부드럽고 아늑한 이름 그대로 어머니의 산같다.

 

<용천사(龍泉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600년(백제 무왕 1) 행은선사(幸恩禪師)가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대전 층계 아래에 있는 용천(龍泉)이라는 샘에서 유래한다. 이 샘은 황해로 통하며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1645년(의자왕 5) 각진(覺眞) 스님이 중수하고, 1275년(고려 충렬왕 1년) 국사 각적(覺積)이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세조와 명종 때 중수하여 큰 절로 성장하였다. 용천사 대웅전현판단청기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600년(선조 33) 중창하였고, 1632년(인조 10년)에는 법당을 새로 지었다. 1638년(인조 16년)과 1705년(숙종 31년)에 중건하고, 1938년에 중수했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1964년에 금당이 옛 보광전(普光殿) 자리에 대웅전을 새로 세우고, 요사도 지어 절의 면모를 바꾸었다. 1996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며, 9월에 열리는 함평 꽃무릇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 3대 꽃무릇 군락지로 선운사, 불갑사, 용천사 일대를 꼽는다. 그중 두 군데가 바로 전남 영광군 불갑사 일대와 함평군 해보면의 용천사 일대다. 공교롭게도 이 두 군데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지척에 있다. 상사화로 잘못 알려진 꽃무릇(석산화)은 9월~10월에 붉은 꽃이 피며 꽃이 시든 후에 잎이 피어나고, 잎이 시든 후에 꽃이 피기 때문에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하여 상사화(相思化)라고 하는 애틋한 별칭도 붙여졌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꽃이 떨어진 다음 짙은 녹색의 잎이 나오는데 다음 해 봄에 시든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데, 잎과 꽃이 함께 있지 못하고 잎이 다 떨어진 후에 꽃대가 올라와 꽃이 피기 때문이란다. 그 때문에 상사화에 대한 전설이 우리 주변 많은데, 어떤 사람을 혼자서 지독하게 짝사랑하다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무덤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상사화라는 얘기도 전한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상사화를 피안화(彼岸花)라고 해서 귀하게 여겼는데, 무성했던 잎들이 장마철 거센 비에 녹아 없어지고 꽃대만 올라와 꽃을 피우는 것이, 탐진치(貪瞋癡) 삼독이 얽혀있는 욕망의 속세를 벗어나 해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꽃무릇은 산기슭이나 사찰 근처에 많이 피어 있는데, 뿌리를 가루로 말려 불교 탱화의 방부제로 사용하였기에 사찰이면 어디를 가나 손쉽게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용천사 주위는 우리나라의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구수재 이정표.

우측 동백골 방향으로 내려서면 불갑사제(佛甲寺堤)를 지나 불갑사로 내려서게 되고, 좌측은 금계리 구수동 마을로 내려서게 된다.

 

돌아본 구수재 전경.

이렇게 평범한 재를 왜 아홉마리의 구렁이는 넘지를 못한 것일까?

 

 

구수재에서 잠시 올라서면 'Y자' 갈림길인데,

직진의 좌측 길은 용천사로 이어지고, 영산기맥은 우측 용봉 방향 오름길로 이어진다.

 

 

능선 같은 느낌인데 삼거리 갈림길 이정목에는 이곳을 용봉(龍峰)이라 표시하고 있으며,

등로 옆 나뭇가지에는 용봉이 칠성지맥 분기점이라는 표지목이 걸려있다.

이곳에서 좌측은 용천사 방향이고, 영산기맥은 우측 용천봉 방향 오름길로 이어진다.

 

용봉(龍峰) 이정목.

 

갈림길 나뭇가지에는 이곳이 칠성지맥 분기점임을 알리는 표지목이 걸려있다.

 

용봉은 철성지맥(鐵城枝脈) 갈림봉으로, 좌측 용천사 방향으로 분맥을 분기시킨다. 『철성지맥은 영산기맥 불갑산 서쪽 구수재와 용천봉 사이, 용천사 뒤 용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서쪽은 함평천을, 동쪽은 고막원천을 가르며, 당재· 송산고개를 거쳐 철성(鐵城)의 철성산(265.5m)을 지나 함평군 학교면 월호리 중천포에서 영산강에 빠지는 도상거리 31.2km의 산줄기다.』

 

<칠성지맥 개략도>

 

 

 

돌아본 용봉 전경.

 

 

임도 수준의 널찍한 등로를 따라 용천봉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뜬금없이 '독서하는 숲'이란 표지판과 쉼터가 있고,

 

 

잠시 더 오르면 사각정자가 있는 쉼터가 있는데,

모악산이 200m 남았다는 이정표의 거리는 용천봉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듯하다.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불갑산 연실봉의 모습을 보면서,

 

가이드 로프가 설치된 오름길을 오르면,

 

 

도솔봉 방향 갈림길이 있는 용천봉/용출봉 정상에 도착한다.

 

<용천봉(龍泉峰, 350m)>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2개의 이정표와 삼각점이 있고, 우측으로는 도솔봉으로 가는 등로가 뚜렷하다.

 

용천봉 이정표에서 영산기맥은 모악산 방향으로 이어진다.

 

 

용천봉을 뒤로하고 모악산 방향 능선으로 들어서면 사각정자 쉼터를 지나게 되고,

 

우측으로 가드 로프가 설치된 완만한 능선을 따르면,

 

 

넓은 헬기장 공터를 지나게 되고,

 

 

이내 태고산 방향 갈림봉인 모악산 정상에 도착한다.

직진의 우측 길은 태고봉과 나팔봉, 불갑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영산기맥은 좌틀하여 한우재 방향으로 이어진다.

 

<모악산(母岳山, 347.8m)>
함평군의 해보면과 영광군 불갑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산기슭에 용천사(龍泉寺)가 있다. 인근에서 불갑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며, 불갑산 남서부 줄기와 바로 이어진다. 함평천의 지류인 내동천과 불갑천의 발원지이며, 용천사 계곡에는 희귀식물인 꽃무릇이 수백만주 자생하고 있다.
『대동지지』(함평)에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영광과 경계를 이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광)에 모악산은 "함평군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함평현에서도 보인다. 산중에 있는 용굴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가뭄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함평군지』에 "모악산은 해보면에 있고, 불갑산에서 직락(直落)하여 구름 사이에 솟아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용천사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광여도』와 『지승』에는 지명이 표기되지 않으나, 1872년 『지방지도』(함평)에 모악산이 무악산(毋岳山)으로 표기되어 대야면의 북편에 자리잡고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와 『현대지형도』에도 지명 표기가 없지만 『군세일반』(함평)의 지도에 불갑산과 무악산이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평군)과 『1872년지방지도』(함평)에는 무악산(毋岳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어미 모(母)'와 '말 무(毋)'가 혼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는 봉우리라는데 현대 지형도에는 없다.

 

모악산 정상 이정표에 현 위치를 '모악산 정상'이라 표시해 놓고,

지나온 용천봉을 모악산이라 표시해 놓았다. 지들이 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들.

 

모두들 떠나버린 모악산 정상에서 홀로 인증을 하고,

 

 

한우재 방향 영산길로 들어서면,

 

그다지 필요치 않을듯한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고,

 

 

편안한 능선길을 따르는데, 누군가가 쌓아놓은 작은 돌탑이 눈길을 끌뿐이다.

 

 

용천사 방향 갈림길 이정목과 벤치가 설치된 한우재(283m)에 도착하여,

봉우리 같은 느낌의 한우재에서 영산길은 직진의 노은재 방향으로 이어진다.

 

한우재 이정목에 '노은재'를 '노운재'로 잘못 표기해 놓았다.

 

돌아본 모악산 방향.

 

 

한우재를 뒤로하니 우측으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있고,

 

 

능선 등로는 깔끔하니 잘 정비되어 있다.

 

 

우측으로 불갑면 자비리의 산들이 만만찮아 보이고,

 

 

노은재 건너편으로 가야 할 영산기맥의 봉우리도 만만찮아 보인다.

 

 

모악산에서 이곳 노은재까지 이어져온 등로는 좌측 주차장 방향으로 이어지고,

가야 할 직진의 영산기맥 능선으로는 등로가 보이지 않는다.

 

<노은재(老隱峙, 253m)>
함평군 해보면 용암리와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용암리에 있는 용천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정표도 있고 뚜렷하지만, 정작 고개의 이름을 따온 우측 불갑면 노은마을 쪽은 아예 길도 없다. 노은(老隱)마을은 고흥유씨가 처음 조선조 세조 때부터 살기 시작하였으며, '젊어서는 속세에서 생활하고 늙어서는 은둔생활로 자기 수양(修養)을 하기 위하여 찾아들어 마을을 형성했다'하여 노은(老隱)이라 하였다고 한다. 불갑산 장군봉부터 이곳까지 편하게 걸었던 등산로는 이곳에서 끝나고, 이곳부터는 다시 고행의 길로 접어든다.

 

노은재 이정목.

 

 

노은재를 지나 봉우리로 오르니 등로는 보이지도 않는다.

 

 

거칠지만 완만한 능선을 따라 무명봉을 지나고,

 

 

276봉쯤을 지난다.

 

 

잡목이 우거진 거친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삼면봉인 노은봉(279m)쯤을 지난다.

 

이 봉우리는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 신광면의 경계인 삼면봉이다. 지금부터 좌측 남쪽편은 밀재에서부터 이곳까지 같이 걸어온 해보면과 작별하고 신광면으로 면계(面界)가 바뀌지만, 우측 북쪽은 여전히 불갑면과 같이한다. 이곳에서 좌측의 희미한 등로를 두고 우측으로 꺾어진다. 지도를 보니 좌측은 먹우재 가는 길인데 길이 없긴 마찬가지이나 우측 영산기맥은 아예 길이 없고 가시와 잡목, 그리고 간벌하여 버려진 나무들이 자꾸만 갈 길 먼 산꾼에게 태클을 건다.

 

 

사람들이 오르기는 하는가 의심이 들 정도의 덕동봉(287m) 쯤을 지난다.

 

돌아본 불갑산 방향.

 

 

덕동봉 내림길은 가파르지만 비교적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고,

 

 

우측으로 불갑면 자비리의 장등제 방향으로 능선이 갈라지는 봉우리에서 좌틀하여 진행하면,

 

 

키 높이의 산죽밭 사이로 영산길이 이어진다.

 

 

산죽지대를 통과하여 돌아본 모습.

 

 

다시 거친 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좌측으로 덕동리와 원산리를 가르는 능선이 분기되는 봉우리에 오르니,

앞서가던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고, 영산길은 우측 아래와 휘어지며 이어진다.

 

 

펑퍼짐한 안부를 지나,

 

 

잠시 오르면 건무산 방향 능선 갈림봉인 231봉에서 영산길을 우틀하여 이어지는데,

 

231봉 정상에는 정상석 대신에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231봉에서 우틀하여 능선길로 들어서면, 깃대와 사격장 경고판이 있는 능선분기점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뚜렷한 등로가 있는 능선을 따라 직진하면 화산골재 우측의 원남제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영산기맥은 직우틀하여 아래로 진행해야 한다.

 

 

능선분기점에서 직우틀하여 내려서면 앞쪽으로 오늘의 목적지인 화산골재가 내려다 보이고,

 

우곡제 우측으로 국사봉과 건무산이 조망된다.

 

살짝 당겨본 화산골재 방향.

 

 

사격장 경고판이 세워진 곳에서 원형 철조망이 트인 통로로 들어서고,

 

 

좌.우로 길 흔적이 뚜렷한 안부를 지나면,

 

 

다시 경고판이 세워진 철조망을 넘어야 한다.

 

 

깃대와 경고판이 세워진 화산골재 직전의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는데,

 

우측 골짜기에 훈령장과 사격장이 내려다 보이고,

 

 

앞쪽으로는 다음 구간에 가게 될 화산골재 건너편의 170봉쯤이 보이고,

 

 

화산골재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빼곡한 대나무숲이 자리하고 있어서 우측 사면으로 우회하여 내려서면,

 

 

화산골재에서 훈련장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내려서게 되고, 우측 도로를 따라 화산골재로 진행한다.

 

 

화산골재에 도착하여 영산기맥 5번째 마루금 잇기를 마감하고,

고개 좌측 버스가 기다리는 원산리1구 마을로 향한다.

 

<화산골재>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에서 영광군 불갑면 우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금은 군 훈련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며 민간인들의 출입은 통제된 곳이다. 육군보병학교 사격장이 있는 고개 위에는 군 교육장이 있다. 기맥길은 타이어로 만든 교육장을 지나 능선 위로 이어진다.

 

돌아본 사격장 방향과 대나무숲을 우회하여 내려선 날머리 전경.

 

고개 우측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방향.

 

 

버스가 기다리는 원산1구로 내려서며 돌아본 화산골재 전경.

 

원산제 전경.

 

 

이곳이 군 훈련장이라서 그런지 도로에 철문이 설치되어 있고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좌측 원형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잠시 우회하니,

 

산꾼과 주민들을 배려한 쪽문?이 나타난다.

 

돌아본 훈령장 철문 모습.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전경.

 

 

도로를 따라 버스가 기다리는 원산리1구 마을로 진행하면,

 

 

버스가 기다리는 원산리1구 마을 앞 널찍한 공터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무리한다.

 

 

뒤풀이 장소인 월야면 소재지에 있는 한새들식육식당에 도착하여,

 

 

길 건너편 월야면 공중목욕탕인 '달맞이 목욕탕'에서 땀을 씻는다.

 

입장료가 2,000원(주민은 1,000원) 이란다. 서울에서 목욕하러 와야겠다!

 

 

깔끔하니 몸단장을 하고 뒤풀이를 위해 영규 형이 주선한 '한새들식육식당'에서,

 

 

모처럼만에 원단 전라도 음식의 진수를 만끽한다.

 

 

 

오늘의 주 메뉴는 청국장샤브샤브인데, 식당에 있는 육회는 우리가 모두 거덜을 냈다.

 

 

오늘 부족한 육회는 다음 기회에!

 

음식 맛 어떠셨는지요!

 

 

 

오랜만에 맛본 남도 음식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서울로 향한다.

 

 

현지에서 마신 술의 양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당연히 서울에서 한번 더!

 

마루금 산행을 하면서 산행기에 자주 언급되던 묘지가 우리 동료의 할아버지 묘서였다.

한적한 산길을 걸으며 어느 오래된 묘지를 스처지날 때면 뉘실까 했었는데,

그런 무덤들이 모두 우리 선조들의 천년고택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맛있는 먹거리와 여러 가지로 꼼꼼히 챙겨주신 영규형님 내외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울러 이 산행기를 쓰는 와중에 다음번 산행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취소되었다.

어떠한 난관을 뚫고서라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모토(母土)에 따라,

백두산우회가 출범한 이후로 정기산행을 중단한 경우는 없었기에 여간 충격이 큰 게 아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에서 소멸되어야 우리 산행이 가능할 터인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그러면 우리의 산행은 여기서 끝인가!

 

3달, 3년, 아니 30년이 될지도 모를 기~인 기다림 동안

미뤄두었던 산행기나 정리하면서

옛 추억에 젖어 볼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