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대전 보만식계 3차(세천공원~계족산)
산 행 일 : 2021. 07. 17.(토)
산행코스 : 세천공원~세천고개~동신고교~비룡마을~갈고개~갈현산(성)~능성~솔향산~길치고개~질현성/고봉산~절고개~성재산~임도삼거리~계족산~봉황정~죽림정사 (거리 14km, 6시간 소요)
산행참석 : 10백두.
<산행코스>
무더운 날씨에도 지난번 보만식계 식장산 구간을 무사히 마쳤던 터라, 금번 보만식계 마지막 산행인 계족산 구간 산행에서는 세천고개에서 완만한 능선을 따라 이어진 계족산까지의 다소 쉬운 산길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이번 산행이 쉬운 편이고 또 지난해 말부터 코로나19로 함께 하지 못한 백두들이 그리워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름아름 희망하는 분들이 모두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는데, 지난해 말부터 금북기맥과 금남기맥에 이어 보만식계까지 차량 1대에 탑승 가능한 소규모 인원만이 산행을 함께 해 왔는데, 금번 보만식계 계족산 구간은 산행거리도 짧고 등로도 다소 완만한 편이라 회장님을 비롯한 다수의 희망하는 회원들이 함께 산행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뭐 사실인즉 창병 씨가 봉숭아 학우들과 섬 산행을 갔다가 술김에 나온 말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연유야 어찌 되었던 코로나19가 수도권을 휩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차랑 2대로 10명이서 산행을 가게 된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다.
대전 동부지역에는 유난히 산성이 많은데, 대부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옛날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대립한 흔적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초기만 하더라도 신라는 감히 백제를 넘보지 못했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 패권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줄을 대기에 바빴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6세기 중엽은 백제의 역사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시점이고 신라의 입장에선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근초고왕 이후 가장 강력한 백제의 군주로 꼽히는 성왕 때의 일이다. 성왕은 사비(충남 부여) 천도를 통해 전열을 정비하고 신라와 연합(나제동맹)해 551년 백제의 근거지였던 한강유역을 되찾는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백제는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신라에 내주게 된다. 고토(한강유역) 회복을 위한 고구려와의 전투에 전력을 올인한 나머지 고구려와의 전쟁에선 이겼지만 전유물은 신라에게 속수무책으로 넘겨주게 된 것이다. 물론 백제는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다. 곧바로 서라벌을 향해 진격, 왜(일본)와 가야의 지원까지 등에 업고 도발을 감행한 신라를 응징해 나가면서 관산성(충북 옥천 추정)까지 접수했다. 그러나 백제의 선봉장이었던 태자 여창(위덕왕)이 고군분투하며 신라를 정벌하고 있다는 소식에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성왕이 수십 명의 친위부대만 이끌고 아들에게 달려가다, 적의 매복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이 황당한 역사의 기록으로 백제는 패망을 향해 치닫게 된다. 이 관산성 전투에서의 승리로 신라는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치열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대청호 부근이다. 대전지역에선 약 50여 개의 산성이 발견되는데 이 중 절반이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상, 대청호반에 위치해 있다.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만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 역사의 현장이 오늘 걷게 될 보만식계 계족산 구간이자 대전둘레숲길 5구간이다.
서울과 과천에서 각각 차량 2대에 분승하여 6시 반에 출발, 식장산 정상부에 있는 식장루에서 함께 만나기로 했다. 코로나19로 나들이 차량들이 많지않아서 별다른 정체없이 식장루에 도착하니, 서울팀은 아직이고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찾는이가 없이 한적하기까지 하다. 사실 금번 산행 코스는 식장산 아래 세천공원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지난 산행에서 본 식장루에서의 대전시가지 조망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고, 지난 산행에 참석하지 않은 분들이 다수 있어서 대전시가지 조망을 보여드리고자 차량으로 식장루까지를 왕복하기로 한 것이다.
쾌청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야가 좋은 날씨로,
식장산 정상부에 자리한 식장루 앞 전망대에서 본 대전시가지 조망이 멋지다.
보만식계의 첫번째 봉우리인 보문산 방향.
보만식계의 마지막 봉우리인 계족산 방향.
살짝 당겨본 대청호 조망.
좌측의 도로는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이고 우측 아래로 보이는 교량은 경부고속도로의 신상1교이다.
살짝 당겨본 계족산으로 이어진 오늘 걷게 될 능선.
살짝 당겨본 대전역 방향의 대전시가지 조망.
대전시가지 방향 파노라마.
계족산 방향 파노라마.
식장루 위쪽에 있는 헬기장으로 이동하여 가야 할 계족산 방향을 배경으로.
뒤이어 도착한 서울팀들이 합류하여 함께 대전시가지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식장산 해돋이전망대를 뒤로하고 타고 온 차량에 탑승하여 산행 출발지인 세천공원으로 향한다.
지난 산행의 종착지인 세천공원에서 출발하여, 대전~옥천 간 4번 국도 식장삼거리에서 좌틀하여 동신고 쪽으로 내려가다가, 비룡삼거리에서 우틀하여 비룡마을 방향으로 300m를 가면 좌측으로 갈고개 방향 이정표와 함께 대전둘레산길 5구간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좌틀하여 60m 진행하면 비룡마을회관이 나오고 맞은편 은진송씨 쌍계당 앞을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우측 축대 옆으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된다.
그런데 세천공원에서 비룡마을회관까지의 1km 남짓은 어차피 차도를 걸어야 하므로, 비룡마을회관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여 산행을 시작하고, 발빠른 총무님과 창병 씨는 차량을 날머리인 계족산 기슭의 죽림정사 부근에 있는 식당인 계림가든까지 차량을 가져다 놓고 돌아와서 산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비룡마을회관 주차장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 틈에 돌장승이 있는 들머리로 돌아나와 본 비룡마을회관 방향이다.
들머리에는 '은진송씨쌍계당공제실입구'라는 입간판과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비룡동 줄골장승'이라는 돌장승이 세워져 있는데,
들머리 좌측 편에는 할머니돌장승(지하여장군)이,
<비룡동(줄골) 장승>
비룡동 줄골마을 석장승은 할아버지 장승(천하대장군)과 할머니 장승(지하대장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두 장승은 길을 사이로 2.5m 간격을 두고 서 있었는데, 비룡동과 추동을 연결하는 길(도로)이 확장되면서 할머니 장승을 뒤로 조금 물려 지금은 약 10m 간격을 두게 되었다. 줄골마을에선 매년 정월대보름 하루 전날에 거리제를 지내고 제례를 마친 뒤 짚으로 만든 주머니에 음식을 넣어 장승의 목에 걸어두기도 한다. 이곳을 장승이 서있는 곳이라 하여 장승배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길 건너편 10여 미터 지점에는 할아버지돌장승(천하대장군)이 자리하고 있다.
들머리 이정표 옆 전봇대에는 이 구간이 대전둘레숲길 5구간임을 알리는 표지판도 걸려있다.
비룡마을회관으로 돌아와 산행 준비를 마친 일행들과 함께 본격적인 산행에 나서면,
비룡마을회관 맞은편에는 은진송씨 쌍계당제실이 자리하고 있고,
제실 앞을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은진 송씨(恩津 宋氏)>
은진 송씨(恩津 宋氏)의 시조 송대원(宋大源)이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송대원의 증손자인 송명의(宋明誼)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집단(司憲府執端)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낙향하여 처가인 회덕 황씨촌에 자리잡았다. 송명의(宋明誼)의 아들 송극기(宋克己)가 류준(柳濬)의 딸 고흥 류씨(高興柳氏)와 결혼하여 아들 송유(宋愉, 1388년~1446년)를 두었다. 송유는 12세에 부사정(副司正)이 되었는데, 13세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 회덕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은진 송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9명, 상신 2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하였는데, 특히 목사공파(牧使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목사공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송준길(宋俊吉)과 송규렴(宋奎濂)·송상기(宋相琦) 부자 등이 있으며, 정랑공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하여 송인수(麟壽)·송기수(騏壽)·송덕상(德相)·송환기(煥箕)·송치규(穉圭)·송근수(近洙) 등이 있다. 송준길은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고, 송시열은 좌의정을 지내고 문묘와 종묘에 종사되었다.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일대의 지명이다. 백제의 가지내현(加知柰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시진(市津)으로 고치고 덕근군(德近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공주(公州)의 임내(任內)가 되었다. 1397년(조선 태조 6년)에 덕은 감무(德恩監務)를 두었고, 1419년(세종 1)에 은진현(恩津縣)으로 개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충청도 공주목 은진현 시진(市津)의 성으로 송(宋)씨가 기록되어 있다.
우측 축대 옆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시작된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 고압선 철탑 아래를 지나면,
대전 동구 용운동에서 비룡동과 세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갈고개에 도착하여,
갈현성 방향 능선 오름길로 진행한다.
갈고개로 들어서는 백두들.
갈고개를 지나 잠시 올라서면 갈현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2호) 표석이 있고 성터로 접어들게 된다.
<갈현성 (葛峴城)>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에 있는 이 산성은 해발 263m로 산 정상부에 만들었으며, 용운동에서 세천동으로 넘어가는 갈고개에 있다. 산 정상을 둘러쌓은 형태로 되어 있으며, 둘레는 약 350m이다. 높이 2m의 동쪽 성벽은 네모난 돌로 앞면을 맞추어 쌓았고, 서쪽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만 쌓았다. 성의 평면형태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폭 4.8m의 남문터가 남아 있다. 정상부의 가운데에 움푹 파이고 군데군데 돌로 쌓은 듯한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저장시설과 관련된 유적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을 성 안에서 찾아볼 수 있어, 성을 쌓은 시기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성 안에서 백제, 신라의 토기조각과 조선시대 자기조각이 출토되어 이 성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을 중심으로 북쪽 능선에는 6개의 작은 성이 있는데, 이것은 질현성을 보완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 성을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 중의 하나였던 지라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대전시 기념물 제12호인 갈현성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동쪽 성벽만 남아있고,
허물어진 성곽으로 올라 성 안쪽으로 들어서면,
갈현성 안내판이 있고, 그 옆 바람이 시원한 벤치에서 10여분의 쉼을 한다.
차를 산행 날머리로 가져다 놓기로 한 분들과 시간 차이가 1시간 정도이기에,
나중에 출발하는 분들이 따라잡을 수 있도록 30여분 마다 10분씩을 쉴 요량으로 딱 10분을 쉬고 다시 산행에 나서면,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좌측으로 대전시가지가 조망된다.
보문산과 대전역 방향.
서북쪽 대덕구 방향.
위치표시판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는데,
우전방으로 대청호가 조망되고,
뒤쪽으로는 식장산 독수리봉 능선쯤이 조망된다.
갈현성터 흔적을 뒤로하고 잠시 내려서면,
대전 동구 용운동과 비룡동을 잇는 비룡임도에 내려서서 직진의 북쪽 능선으로 길을 잡는다.
대전둘레산길 안내판.
임도 이정표에는 이곳이 '토막궁그리(?)쉼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평탄한 능선을 잠시 따르면 좌측은 군부대, 우측은 비룡동 방향 이정표가 있는 안부를 지나고,
나무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등로는 능선을 두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다가,
마치 고인돌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게 되고,
이내 군부대 훈련장의 흔적으로 보이는 철구조물이 있는 안부를 지나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언뜻 얼굴 모양으로도 보이는 바위가 있는 전망바위를 지나게 되는데,
얼굴바위 앞 전망바위에서는 보문산에서 식장산으로 이어진 보만식계 능선이 가늠되며,
아래로는 대전대학교 교정이 내려다 보인다.
다소 완만해는 능선 오름길을 따르면,
좌측으로 용수골약수터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성터의 흔적으로 보이는 너덜길을 올라서면,
'능성'이 있는 솔향산/솔랑산(317.5m) 정상에 오르게 되는데, 좌측으로 대전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능성(陵城)>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있는 해발 310m인 ‘비름들고개’ 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300m 정도이다. 테뫼식은 산의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이 되게 한바퀴 둘러쌓은 산성으로 옆에서 본 모습이 테를 맨 모양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렸지만 너비 5.1m의 동문터와 너비 3m의 남문터가 있다.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에 성벽이 바깥쪽으로 튀어나오도록 쌓은 치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동문터 남쪽에 있는 치성은 성벽 높이가 3.7m로 자연 경사면을 따라 처음 1m가량은 수직으로 쌓다가 급히 안쪽으로 경사를 주어 오므려 쌓은 후, 다시 수직으로 쌓았다. 성벽은 앞부분을 약간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는데, 이 부분의 치성은 밖으로 5m가량 튀어나오게 쌓았고 너비는 5.5m이다. 성안에는 별다른 시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동쪽 성벽 부분에 남아있는 치성을 통하여 동쪽 방면에 대한 방어를 하기 위해 이 성을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변에 체육시설이 즐비하고 정상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솔향산/솔랑산(317.5m)>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룡동에 위치한 산으로 네이버 지도에는 솔랑산이라 표시되어 있다. 정상에는 주민들의 운동시설이 많이 갖추어져 있고, 대전둘레산길 5구간에 속한 산으로 정상에 서면 대전시가지가 한눈에 조망된다.
서쪽 대전시가지와 계룡산 방향 조망.
남서쪽 보문산 방향.
남쪽 식장산 방향.
보문산에서 만인산과 식장산을 거쳐 걸어온 보만식계 능선이 한눈에 가늠된다.
보문산 방향.
계룡산 방향.
갑하산과 우산봉 방향.
금병산 방향.
살짝 당겨본 대전역 조망.
살짝 당겨본 보문산 좌측 너머로 대둔산도 가늠된다.
살짝 당겨본 계룡산과 갑하산 방향.
솔향산 정상에서 10분 이상 쉬기를 몸소 실천하는 백두들.
대전시가지 방향 파노라마
만인산을 배경으로.
대전시가지를 배경으로.
솔향산 정상의 능성 안내판.
체육시설이 즐비한 솔향산 정상을 뒤로하고,
임도 수준의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면,
산 아래로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널이 지나는 밭탕골약수터 갈림길을 지난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싱그러운 능선길을 따라,
밭탕골약수터와 비룡동 방향 갈림길 안부를 지나고,
가파르지 않은 오름길을 잠시 올라서면,
헬기장과 게양대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게 되고,
나무그늘 아래에 바윗돌이 쉬어가기를 청하는 능선길을 따르면,
산 아래로 옛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덜이 지나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대전시 유성구 방향.
이내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서 동구 주산동·추동으로 넘어가는 길티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 길티고개(길치고개)는 지난주 계족산 임도 라이딩에서 지났던 곳이라 낯이 익다.
길티고개로 내려서는 백두들.
길티고개 고봉산.보현사 방향 들머리.
길티고개 이정표.
길티고개를 뒤로하고 보현산 방향 수레길로 들어서면 이내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의 널찍한 수레길은 보현사와 질현성을 지나 고봉산으로 오르는 정규 등로이고,
좌측의 능선길은 고봉산 우회길과 고봉산 정상으로 바로 이어지는 능선길로 이어진다.
우리는 고봉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길로 들어서서 잠시 오르니 가족묘지를 지나게 되고,
이내 고봉산 정상으로 이어진 정규 등산로에 접속하게 되는데,
앞쪽의 작은 봉우리가 고봉산이고 뒤쪽으로 보이는 더 높은 봉우리는 세개의 돌탑이 있는 무명봉이다.
<고봉산(古鳳山, 335m)>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소재한 산이다.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듯한 형상인 데서 유래했다 하며, 대청호가 조망되는 조망의 명소다.
<질현성(迭峴城)>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동구 가양동 더퍼리에서 동구 추동으로 넘어가는 질티재(길치재/길티재) 북쪽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성의 둘레는 800m 정도이고 면적은 11,107㎡이다. 이 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을 쌓은 수법은 내탁(內托)이나 동벽의 일부에서는 협축(夾築)한 곳도 있다. 협축한 부분의 성벽 안쪽 높이는 1.5m이고, 바깥쪽은 3∼4m에 이른다. 네모난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모서리의 가공한 면을 맞추어 아래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 쌓으면서 군데군데 돌로 쐐기를 박았다.
이 성은 오늘날의 대전과 회덕 방면에서 동쪽으로 충청북도 회인(懷仁)과 문의(文義) 방면으로 통하는 요로를 지키기 위하여 백제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성벽의 높이는 1.5m이고, 석루(石壘)의 상부 너비는 4.2m이며, 남문지의 너비는 약 6m, 동문지의 너비는 약 3.5m이다. 성안에는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샘물이 나오고 있으며, 성안에서는 백제시대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신라시대 토기조각과 조선시대 자기조각까지 출토되고 있어서,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엽까지 계속해서 사용하여 온 산성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에는 주위에 7곳의 보루(堡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성을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지라성(支羅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5년(문무왕 5)에 문무왕은 웅진도독 부여 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백마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맹약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웅진의 취리산은 현재의 공주(웅진)지방에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성의 부근에 주산리(注山里, 줄뫼)와 비룡리(飛龍里, 줄골)가 있고 질현은 곧 질티이므로 이곳이 취리산이라는 견해도 있다.
돌아본 우측 고봉산성 방향.
<고봉산성(古鳳山城)>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해발 340m의 고봉산에 있는 고봉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약 250m이다. 이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라 한다. 산성은 동쪽으로 길게 산의 형세를 따라 타원형의 평면 형태를 하고 있다. 서쪽 벽면에 3단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을 뿐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다. 약 300m 떨어진 곳에 질현성이 있어, 질현성의 자성(子城)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봉산성은 질티고개를 두고 질현성과 나란히 있어 이 고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된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봉산 정상은 잡목들로 빼곡하고 아무런 표식이 없고,
좌측 잡목 너머로 대전시가지가 조망된다.
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봉산을 내려서서,
좌측으로 밭탕골약수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면,
안부 이정표.
바위들이 듬성듬성 보이는 오름길이 이어지고,
성터의 흔적을 올라서면,
정상부에 세 개의 돌탑이 있는 387.5봉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식사를 하는데,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지난주에 걸었던 대청호의 '슬픈 연가' 촬영지가 내려다 보인다.
살짝 당겨본 대청호반 슬픈연가 촬영지 조망.
당겨본 지난주 계족산 임도 라이딩에서 묵었던 숙소(우중앙) 조망.
떡과 과일로 점심식사를 하는 백두들.
시원한 건들바람이 불어오는 쉼터에서의 여유로움.
돌탑을 배경으로.
돌탑봉을 뒤로하고 잠시 진행하니 대청호 전망 쉼터가 나온다.
전망 쉼터에서 본 대청호 조망.
하늘의 모습과 땅의 모습이 흡사한 대청호 조망.
살짝 당겨본 대청호 조망.
지난주에 걸었던 '대청호오백리길 4코스 낭만호반길' 조망.
동쪽 환산(고리산) 방향 조망.
멋진 대청호 조망 쉼터를 뒤로하니,
돌탑이 하나 있는 봉우리를 지나게 되고,
건들바람이 시원한 싱그러운 능선길을 따라 정자 쉼터를 지나고,
좌측으로 우회로가 있는 안부 갈림길에서 직진의 능선길을 따라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우측 대청호 방향 조망이 멋진 조망바위가 나온다.
조망바위에서 본 대청호 조망.
조망바위를 뒤로하고 잠시 올라서면 팔각정자가 자리한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좌측으로 계룡산이 뚜렷하게 가늠된다.
팔각정자 봉우리를 내려서니 우횟길 등로와 다시 만나게 되고,
갈림길 이정표.
그렇게 좌 대청호, 우 대전시가지와 벗하며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어느새 절고개에 도착하니,
차량을 날머리에 옮겨두고 온 두 분이 우회길로 날아와 절고개에 먼저 도착해 있다.
절고개는 유명한 계족산황톳길이 지나는 고개다. 계족산은 몇 해 전부터 황톳길로 유명해졌다. 대전·충남 향토 주류제조 회사인 맥키스컴퍼니(옛 선양)가 계족산 둘레길 약 14㎞ 구간에 황토를 깔아 맨발로 산행을 할 수 있게 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맥키스컴퍼니는 매년 봄 계족산 맨발축제를 열어 더 건강한 산행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고 숲속 야외 공연장도 조성해 등산객들에게 아름다운 오페라 공연도 선사한다. 계족산 황톳길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한국관광 100선’에 대전관광의 대표 아이콘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절고개 성재산 방향 들머리.
보만식계를 걷는 산꾼들의 대부분은 이곳 절고개에서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황톳길을 따라 계족산 정상 들머리가 있는 임도삼거리로 이동한다. 하지만 계족산성 방향 능선에 자리한 성재산은 대전둘레산길 5구간 정식 코스에서도 비켜나 있지만 그리 멀지 않고, 오르기도 쉬우며 조망이 좋아 한번 들러 보기로 한다.
절고개의 대전둘레산길 5구간 안내판.
절고개에서 간식을 먹으며 10여 분간의 쉼을 뒤로하고 성재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면,
이내 뒤쪽으로 식장산 능선이 조망되는 헬기장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뒷쪽 식장산 능선 너머로 서대산도 살짝 보인다.
좌측 임도삼거리 방향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봉 갈림길에서 우측의 능선을 따르면,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바위를 품은 부부나무'를 지나게 되고,
<성재산 가는 길에 있는 바위를 품은 부부나무>
이 나무는 백제의 한 마을에 사이좋은 부부 정유와 완이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중, 남편 정유가 원인모를 병에 걸려 불행이 찾아오고 남편의 병수발도중 꿈속에서 한 노인이 이 바위에 정화수를 올리고 정성을 들여 100일간 먹이면 나으리라 하여, 다음날부터 100일간 정성을 들이니 정유의 병이 낫게 되고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후 정유와 완이 부부를 닮은 팽나무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켜주듯이 바위를 보호하면서 자라났다고 한다.
바위를 품은 부부나무 안내판.
바위를 품은 부부나무. 바위는 품은 나무는 남편일까, 부인일까?
이내 삼각점과 전망데크가 있는 성재산 정상에 도착한다.
<성재산(398.7m)>
대전시 대덕구에 위치한 나즈막한 산으로,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대청호 조망이 멋진 조망데크가 설치되어있는데, 전망데크에서 좌측으로 개머리산, 함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추동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대청호 조망이 매우 좋다. 뒤쪽으로는 계족산이 마주하고 있다.
성재산 정상 삼각점.
돌아본 남쪽 식장산 방향.
동남쪽 옥천 방향.
동북쪽 대청호 방향.
성재산 정상 인증.
북동쪽 개머리산 방향.
동쪽 환산(고리산) 방향.
성재산을 뒤로하고 절고개 방향 갈림길이 있는 능선갈림길에서 우측 임도삼거리 방향으로 들어서면,
다시 절고개 방향 갈림길 삼거리를 지나게 되고,
나무계단 설치공사를 하고 있는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우측 아래로 계족산황톳길 임도가 내려다 보이고,
쉼터가 있는 계족산황톳길 임도삼거리에 도착하니,
절고개에서 황톳길을 따라 진행한 분들이 편안한 휴식을 하고 있다.
<계족산 황톳길>
계족산 명품 100리 숲길과 함께 펼쳐지는 장동산림욕장을 따라 물놀이장을 지나면 순환로가 시작되고, 산림욕장 입구의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보면 본격적인 황톳길이 나온다. 반쪽은 황톳길이고 다른 반쪽은 일반 산책길이다. 황톳길은 봄부터 가을까지 체험할 수 있다. 총 14.5km의 길이로 전국적으로 맨발걷기를 유행시킨 계족산 황톳길은 소주로 유명한 (주)맥키스컴퍼니(구 선양)에서 사비를 들여 조성한 길이다.
이 길이 만들어지게 된 재미있는 계기가 있다.
(주)맥키스컴퍼니의 조웅래 회장이 이곳을 함께 등산하던 하이힐을 신고 힘들게 걷고 있는 여성에게 신발을 선뜻 벗어주었고 자신은 맨발로 남은 산길을 내려오게 되었다. 발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오히려 그날 저녁에 숙면을 취하게 되었고 아침이 되자 피로감이 싹 없어졌다고 한다. 그로인해 맨발걷기의 효험을 깨닫게 되었고 이곳에 사비를 들여 맨발로 걷기 편하게 황톳길을 조성하였다는 사연이다. 사실 황토를 깔았어도 14.5km의 황톳길을 맨발로 다 걸으려면 대단히 용감해야 한다. 1~2km만 걸어도 발바닥에 감각이 없어지는 듯 아파온다. 그만큼 문명의 이기인 신발에 의존해온 인류의 나약함을 확인하게 된다. 아무튼 매년 사비를 들여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따뜻함이 이곳을 명품길로 만들었기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어김없이 10여분의 쉼을 하고는 계족산 정상을 향한 들머리로 들어서면,
그동안의 능선길에 비해 약간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며 작은 봉우리 쉼터를 지나고,
능선 좌측 사면으로도 더욱 뚜렷한 등로가 나란히 이어지며,
제법 가파르게 올라섰다가는 잠시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봉황마당 갈림길을 지나고,
갈림길 이정표.
다시 가파른 돌계단을 잠시 오르니,
묘와 헬기장 표식이 있는 계족산 정상에 도착한다.
<계족산(鷄足山, 423m)>
대전시 대덕구에 있는 산이다. 계족산은 산의 모양이 봉황처럼 생겨서 봉황산이라고도 불렸는데, 세 갈래로 나뉜 능선의 형상이 닭발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계족은 닭의 다리라는 뜻으로 산의 모양이 닭의 다리를 닮았다고 해서 닭발산 혹은 닭다리산이라고 불려 왔다. 지금의 송촌 일대에 지네가 많아서 지네와 천적인 닭을 빌어 지네를 없애기 위해 계족산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또한 계족산은 '고려사'에도 등장하는 오래된 지명이며, 전해오는 이야기는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내린다 하여 비수리라 불렀다고도 한다.
계족산 정상석.
계족산성과 봉황정 안내판.
이곳이 대전둘레산길 6구간이 시작되는 곳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고,
그 옆에 있는 이정표에서 우리는 용화사 방향으로 하산하게 된다.
날씨는 뜨겁지만 건들바람이 불어오는 션한 나무그늘에서 마지막 배낭털이에 나서는 백두들.
대청호 방향 건너편 능선에 자리한 계족산성 조망.
<계족산성 (鷄足山城)>
대전시 장동 계족산(해발420m)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이 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99년 발굴을 통해 신라에서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높이는 약 7∼10m가량 되며, 동·서·남쪽에 문 터를 만들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에 만든 큰 우물터가 발견되었고, 성내 건물터에서는 고려시대 기와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쌓기 방법은 보은에 있는 신라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고,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의 신라토기임이 밝혀졌다. 이후에 나온 토기 형태도 백제계는 소수이며 다수의 신라계 토기가 보여, 한때 백제가 점령하긴 했지만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조사되었다. 계족산성은 새로운 발굴 성과에 의해 신라가 쌓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아직도 논란이 있으며, 6세기 중·후반 신라나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당시 대전지방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계족산성은 회덕이 백제 우술군에 소속된 이래로 줄곧 대신라(對新羅)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백제부흥군의 주요한 거점의 한 곳으로 최후까지 백제를 위해 충절로 산화한 민초들의 넋이 깃든 중요한 유적이기도 하다.
살짝 당겨본 계족산성.
간식과 과일을 먹으며 한여름 산행에서의 꿈결같은 20여 분 간의 달콤한 쉼을 즐기고는,
보만식계 완주를 인증하는 계족산 정상 인증을 남긴다.
계족산 정상을 뒤로하고 용화사 방향 능선으로 내려서면 이내 대전시가지 조망이 멋진 봉황정이 나온다.
<봉황정>
계족산 정상부에 자리한 봉황정이란 이름은 그 옛날 계족산을 봉황산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봉황정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대전팔경중 하나이다.
돌아본 봉황정 직전 광장 전경.
계족산 명품 100리 숲길 안내판.
봉황정에서 본 남쪽 만인산 방향.
남서쪽 보문산 방향.
서쪽 계룡산 방향.
봉황정을 뒤로하고 다시 용화사 방향 능선길로 접어들면 가파른 능선 내림길이 길게 이어지며,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신탄진 방향으로 이어진 경부고속도로가 조망되고,
대전시내를 관통하여 금강으로 합류하는 갑천이 조망된다.
대전시 유성구와 신탄진 방향 조망.
서쪽 유성구 문지동 방향.
서북쪽 유성구와 회덕 JC 방향.
북쪽 신탄진 방향.
가파르던 능선 내림길이 완만해지며,
통나무의자가 있는 갈림길 쉼터를 지나고,
지능선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 내려서면 계족산 둘레 임도길에 내려서고,
임도를 가로질러 다시 능선으로 접어들면,
송전탑 축대 정비공사장을 지나게 되고,
이내 죽림정사로 이어지는 도로에 내려서서 좌측 아래로 잠시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뒤풀이를 예약해 놓은 계림가든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무리 한다.
세면장에서 간단히 몸단장을 하고,
오리진흙구이와 소맥으로 짧은 산행 기 뒷풀이를 실천하는데,
두 분이서 소주와 맥주 20병을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한국 12대 종주코스의 한 곳으로 알려진 보만식계 종주는 예상보다 난이도가 높은 편으로, 특히나 보문산을 지나서 오도산부터 만인산을 지나 식장산까지의 구간은 높지는 않으나 가파른 봉우리들이 연이어지며 종주꾼들을 지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식장산에서의 장쾌한 조망과 계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의 대청호와 대전시가지 조망은 힘들게 걷는 산꾼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준다.
코로나19로 모든 백두들이 함께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런 시련도 이제 곧 끝이 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리운 얼굴들과 함께 걷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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