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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대전 보만식계 2차(먹티재~세천공원) :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그라!

by 재희다 2021. 7. 15.

산 행 지 : 대전 보만식계 2차(먹티재~세천공원)

산 행 일 : 2021. 06. 24.(토)

산행코스 : 먹티고개~만인산~태실~정기봉~골냄이고개~곡남산~머들령~국사봉~닭재~망덕봉~곤룡재~동오리고개~식장산~활공장~세천공원 (거리 25km, 11시간 소요)

산행참석 : 5백두.

 

<산행코스>

 

 

지난번 보만식계 첫번째 산행에서 무더운 날씨로 인해 만인산 오름길을 두고 먹티고개에서 산행을 마쳤던 터라 금번 두번째 산행에서 식장산을 넘어서 세천고개까지 가야 하는 관계로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는데, 지난 주말에 일기 예보를 찾아보았더니 마침 비가 예보되어 있다. 무더위에 장거리 산행이 부담스러워 산행을 후일로 미루고 싶은 마음에 단톡방에 비 예보 상황을 올렸더니 모두가 하나같이 더 좋다며 강행할 것을 고수했다. 혹여 비가 살짝 내려준다면 한결 쉬워지기는 하겠지만 여름철 업다운이 심한 긴 능선 산행을 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아서 식장산 오름길 직전의 곤룡터널이 있는 지점에서의 탈출도 염두에 두고는 산행을 강행하기로 한다.

 

지난번보다 이른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는데, 과천에서 산행 날머리인 식장산 아래 세천공원까지 가는 동안에 비가 쉼 없이 내리고 있어서 속도를 줄여서 가느라 예상보다 20여분 더 소요되었다. 우리를 산행 들머리까지 데려다주려고 신새벽에 어려운 걸음을 한 김 전무님의 지인분이 기다리는 세천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를 갈아타고 지난번 탈출 지점인 먹티고개로 향한다. 헌데 지난번에 만인산을 올라서 예정된 산행을 완료했던 총무님과 서여사님은 반칙이라며 만인산휴게소에서 진행할 것을 주장하고, 거기다가 산행이 짧아지는 게 마냥 좋은 송사장님도 동조를 하고 나선다. 차가 만인산휴게소를 지나니 내려실 분들은 알아서 하시라고 하고는 막무가내로 먹티고개로 향하는데, 만인산휴게소에서 내리겠다는 분은 아무도 없다.

 

 

세천공원에서 40여분이나 걸려서 비 내리는 먹티고개 고갯마루에 도착하여,

두번씩이나 애써주신 지인분께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우장을 챙겨 보만식계 두번째 산행 출발 인증을 남긴다.

 

<먹티고개>
먹티고개는 대전시 동구 하소동과 금산군 복수면 목소리를 잇는 고개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난다. 먹티고개는 석탄이 많이 묻혀있어서 주위가 온통 시커멓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실제로 먹티고개에 가까워지면 주변에 석탄처럼 시커먼 흙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만인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니,

 

이내 가파른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그나마 등로 상태가 좋아서 어렵잖게 가뿐한 걸음으로 만인산을 향하면,

 

이내 능선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잠시 완만한 능선을 따르다가 또다시 올라서면 휴양림2주차장 방향 갈림길이 있는 505봉을 지나게 된다.

 

만인산까지 400m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는 505봉 이정표.

 

 

삐쭉 바위들이 솟아난 완만한 능선을 잠시 따르면,

 

삼각점과 만인산 봉화대터 안내판이 있는 만인산 정상에 도착한다.

 

<만인산(萬仞山, 538m)>
충남 금산군 추부면과 대전광역시의 남쪽 동구 하소동 일대에 걸쳐있는 산으로, 고조선 때부터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태실(胎室)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태실산(胎室山) 또는 태봉산으로도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진산)에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성봉(星峯)이 있는데 땅이 두텁고 물이 깊으며 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나게 우뚝 솟아 모양이 마치 연꽃같이 생겼다. 우리 태조의 태를 묻었다."라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그만큼 산이 깊고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산으로, 일설에는 수많은 골짜기가 모여 산을 이루어서 만인산이라 불렸다고도 전해진다. 『여지도서』(진산)에는 "태실산(胎室山)은 군 동쪽 30리에 있다."라고 하여 태조 이성계의 태실이 안치되어 있던 만인산을 '태실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1872년지방지도』(진산)에는 만인산 아래 태조대왕 태실로 표기된 석실이 그려져 있다. 하소동에서 금산군 추부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태봉재라 한 것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

원래 태조의 태실은 함경도에 있었으나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만인산의 터가 명당이라 이곳으로 옮겨왔다. 태조 이성계의 태실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어 만인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만발한 연꽃 모양을 닮았다. 숲과 계곡이 아름다운 곳으로 등산로와 숲속 자연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만인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동쪽 능선에 만인루(萬仞樓)가 있으며 주변 일대가 조망된다. 남쪽 기슭에는 중부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동쪽에는 금산군 추부면이 위치하며, 대전천이 만인산 계곡에서 발원한다.

 

<만인산 봉화대터>
만인산 정상에는 지금도 절구통 양식의 봉화대 자리인 봉수대터가 남아 있는데, 한성에서 보내오는 봉화 신호를 받아 전라도 방향으로 봉화를 올려 소식을 전하였고, 동쪽 식장산 방향 2km 지점의 정기봉(580m) 정상의 봉수대에서는 경상도 쪽으로 봉화를 올려 소식을 전하였다고 한다.

 

 

구름에 가린 주변 조망을 대신하여 만인산 정상의 조망 안내판을 담아본다.

 

서쪽 금산군 복수면 방향 조망.

 

만인산 정상 인증.

 

 

만인산 정상을 뒤로하니 이내 작은 돌탑을 지나게 되고,

 

데크목 계단길을 따라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면,

 

다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만인산 자연산 자연휴양림과 휴게소 방향 갈림길을 지난다.

 

<만인산 자연휴양림>
'만 길이나 산이 높고 깊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만인산은 산세가 매우 수려하고, 대전천의 발원지인 봉수레미골 등 아름다운 골짜기를 가지고 있다. 만인산은 사계절 언제 찾아보아도 아름다운 산이지만, 특히 진달래가 곱고 산벚꽃이 흐드러진 봄에 찾으면 그 아름다움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만인산 휴게소 갈림길 이정표.

 

 

우측으로 만인산 휴게소와 푸른학습원 방향 수레길 갈림길을 지나,

 

지능선 분기점으로 보이는 곳에서 이정표의 좌측 정기봉과 태실 방향으로 들어서서,  

 

비에 젖은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잠시 호젓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대전둘레산길 2구간의 종료와 3구간의 시작 지점으로 태조대왕의 태실이 자리한 태봉재에 도착한다.

 

태봉재는 대전시 하소동에서 금산군 추부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푸른학습원에서 설치한 출렁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좌측 계단길로 내려서도 되지만 한사코 출렁다리로 들어서서, 

 

옛날 군 유격장의 추억을 떠올리며 출렁다리를 건너면,

 

우측 아래에 태조대왕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태조대왕 태실(太祖大王 胎室)>
조선을 건국 한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안치했던 곳으로, 본래 함경도 용연(龍淵)에 있었으나 태조 2년(1393) 당시 전라도 완주군 진동현이었던 현재의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로 옮겨 왔다. 태실은 몇 차례 중수 및 개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태실을 훼손하여 태항아리를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1993년 지역 주민들이 남은 석비와 석물을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비석 전면에는 '태조대왕 태실'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중건한 시기(1689년)가 새겨져 있다. 무학 대사가 함경도 용연지역에 있던 태조의 태를 옮겼으며, 태자의 태도 함께 이곳에 묻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이 산을 봉산이라 정하였으며, 조선 개국 이래 성역화한 곳이다.

 

 

잠시 가파르지 않은 능선길을 따르다가 가팔라지는 오름길 좌측의 우회길로 들어서니,

좌측 만인산 푸른학습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 접속하게 되고,

 

데크목 오름길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

 

학습원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능선에서 좌측 정기봉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비 온 뒤의 싱그러운 능선길을 따라 우측 추부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작은 봉우리를 좌회하여 지나면,

 

밀양박씨 묘를 지나게 되고,

 

본격적인 정기봉 오름길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데크목 등로를 따라 좌측 능선 방향으로 진행되고,

 

다시 능선길에 접속하여 우틀하여 정기봉 정상을 향하게 된다.

 

정기봉 정상이 200m 남았다는 이정표.

 

 

능선 오름길을 따라 벤치가 있는 쉼터를 지나 오르면,

 

봉화대 흔적으로 보이는 돌탑과 이정표가 있는 정기봉 정상에 도착한다.

 

<정기봉(正起峰, 580m)>
이정목과 벤치 그리고 봉화대터 안내판과 돌탑이 있다. 정기봉이 580m로 대전시계에선 식장산 다음으로 높은 산인데, 어옇한 산(山) 이름하나 못 얻고 봉(峰)으로 있는 것은 그렇고, 국립지리원지도에는 무명봉이다. 정상 좌측으로 1주차장 가는 길이 있고 보만식계 능선은 직진의 식장산 방면으로 이어진다.

 

정기봉 정상 이정표.

 

동쪽 방향으로 지난해에 올랐던 서대산이 조망된다.

 

살짝 당겨본 서대산 모습.

 

좌즉으로 보이는 산그림.

 

살짝 당겨본 남동쪽 금산군의 닭이봉 모습.

 

정기봉 정상에서 간식을 먹으며 쉼을 하다가 인증까지 남긴다.

 

이곳 정기봉에서 식장산까지의 능선은 이름 없는 삼국시대의 산성과 옛 고개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업다운이 심한 구간이다. 이름을 가진 여러 봉우리는 물론 이름 없는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지는 능선길을 걷는데는 많은 체력 소모가 예상되는 구간이다. 오늘 날씨가 더웠으면 곤룡재에서 탈출도 고려했었는데, 다행히 비가 온 뒤라 그런지 기온이 많이 오르지를 않아서 식장산을 지나 예정했던 세천고개까지의 구간을 완주해 보기로 하고 체력 안배에 신경을 쓰며 다시금 보만식계 능선길로 들어선다.

 

정기봉을 뒤로하면 이내 좌측 산흥초교 방향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갈림길에서 우측의 가드 로프가 매여진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면,

 

다시금 완만한 능선길이 한참동안 이어지다가,

 

 

우측 추부면 마전리 방향 능선 갈림길이 있는 지봉산/지붕산을 좌회하여 지나게 된다.

 

<지봉산(止鳳山, 502.1m)>

대전시 동구 상소동과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지붕 같다고 하여 지붕산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지붕산이 어떻게 지봉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네이버 지도에는 상봉산으로 표시되어 있고, 또 어떤 지도에는 464.7봉 삼각점봉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산세나 높이로 보아 독립된 산 이름을 가질만한 봉이 못되는 봉우리인데도 지봉산이란 이름을 가졌다. 

 

<마전리(馬田里)>
추부면 마전(馬田)의 지명 유래는 예전에 말을 사고 파는 말 장터가 있었으므로 마전이라 불렀다는 설과 말채꾼이 매년 봄.가을 제주도 말을 몰고가던 중 머들령을 지날 때 사용하였던 마방이 있던 마을이라하여 마방의 '마'자와 마방에 딸린 관전의 '전'자을 따서 마전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추부분지가 펼쳐지는 그 서쪽에 위치해서 서북쪽으로는 만인산으로 이어지는 산이 가리고, 동쪽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지는 지역에 마전리가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자부리, 장대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복수면 목소리, 용진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용지리, 추정리와, 그리고 북쪽으로는 비 레리와 대전광역시 동구 하소동과 경계를 나누는 지점에 자리한다. 대전에서 진산을 거쳐 전주로 들어가는 국도와 금산으로 가는 지방도 또한 추부면 동북쪽을 횡단하고 충청북도 옥천으로 들어가는 지방도가 놓여있는 네거리에 위치해서 교통은 편리한 편이며 또한 추부면의 행정 중심지이다. 

 

 

지봉산을 좌회하여 지나면 바닥에 시멘트 표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한국동력자원연구소에 설치한 게 맞는지 또 이 표석의 용도가 뭣인지는 알 길이 없다.

 

 

좌측 동구청소년수련원 방향 갈림길을 지나 오르면,

 

 

우전방 추부면 방향으로 산봉우리들이 비구름을 걷어내고 있고,

 

작은 봉우리를 연이어 지나게 된다.

 

 

다소 완만한 소나무숲 능선길을 따라 480봉쯤을 지나면,

 

앞쪽으로 가야 할 곡남산이 우뚝하니 솟아있어서 산객을 시름에 젖게 하고,

 

우측 골냄이부락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

 

봉우리 오름길에 등로가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며 '돌까마귀 쉼터'라는 바위 벼랑 아래를 지나고,

 

지능선에 접속하여 묘지를 지나 오르면,

 

곡남산 직전의 벤치가 있는 봉우리에 도착하여 10여분 쉼을 하는데,

우산과 작은 물병만 든 산객 한분이 우리를 스쳐지나 나중에는 손총무님도 추월하여 갔다는 전설이 있다.

 

좌측 떡갈봉 방향 조망.

 

 

10여 분간의 쉼으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는 다시금 곡남산을 향하니,

 

좌전방 곡남산 좌측으로 대전통영고속도로가 보이며 그 뒤로 식장산이 구름에 싸여 있다.

 

 

곡남산 정상 직전에 좌측 상소동산림욕장 방향 갈림길이 나오는데,

 

갈림길 이정표.

 

빛바랜 대전 둘레산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삼각점이 있는 곡남산 정상에 도착하니,

 

'식장지맥 542봉'이라는 준.희 님의 낯익은 표지기가 나무에 걸려있다.

 

 

곡남산을 뒤로하니 우전방 추부면 요광리 방향으로 대전통영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잠시 더 진행하니 곡남산성/골나미성 쯤으로 짐작되는 석축을 두른 작은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라 벤치가 있는 쉼터도 지나고,

 

오래된 묵묘를 지나 잠시 진행하여,

 

좌측 상소동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식장산 방향의 완만한 내림길을 따르면,

 

아래로 대전통영고속도로 마달터널이 지나는 머들령을 지나게 된다.

 

<머들령/마달령(馬達嶺)>
대전광역시의 남동쪽 동구 삼괴동과 충남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를 잇는 고개로, 마달산에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말 한필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란 옛말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현재 머들령은 고개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지만 그 옛날 많은 사람들이 봇짐을 지고 넘나들던 유명한 고개였다. 지금은 추부터널과 마달령터널이 대전과 금산을 연결하지만 예전엔 태봉재나 머들령을 넘어야 금산으로 갈 수 있었다. 또한 머들령은 '요강원을 지나 머들령 옛날 이 길로 원님이 내리고 등짐장사 쉬어 넘고 도적이 목 지키던 곳'으로 시작하는 대전의 대표적 시인 정훈 시인의 시 '머들령'의 배경이기도 하다.

 

정훈의 '머들령' 시가 적힌 목판이 세워진 머들령 전경.

 

- 머들령(정훈) - ​

 

요강원을 지나
머들령
옛날 이 길로 원님이 나리고
등짐장수 쉬이 넘고
도적이 목 지키던 곳

 

​분홍 두루막에 남빛 돌띠 두르고
할아버지와 이 재를 넘었다.
뻐꾸기 애잣게 울던 날

 

​검정 개명화에
발이 부르트고
파랑 갑사댕기
손에 감고 울었더니

 

​흘러간 서른 해
유월 하늘에 슬픔이 어린다.

 

 

머들령 이정표.

 

지금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머들령.

길을 내기 위해 옛 선조들이 바위를 깎아내느라 얼마나 고생스러웠을는지..ㅉㅉ

 

 

머들령에서 성터의 흔적이 있는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작은 봉우리에서 10여 분간 몸을 식히고,

 

호젓한 능선 산길을 따라,

 

작은 봉우리를 여러 개 넘고 또 넘으니,

 

준.희 님의 '식장지맥 명지봉' 표지기가 걸린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명지봉(404.2m)>
맨발님의 정상 표지판(식장지맥 명지봉 404m)이 나무에 걸려 있다. 충남북과 대전시 3도 경계봉인 명지봉은 정상부가 평평한 오래된 헬기장이나 공터였던 듯 싶은데 지금은 잡목이 들어차 있다.

 

 

명지봉을 지나 또 두어 개의 봉우리를 넘으며 진행하다가,

 

안부를 지나 가파른 오름길을 치고 오르면,

 

돌탑과 벤치가 있는 국사봉 정상에 도착하여 또 한참 동안이나 몸을 식히는 시간을 가진다.

 

<국사봉(國師峰, 506m)>
작은 돌탑에 벤치 2개가 있고 국가지정번호판에 매직으로 국사봉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돌탑에 자연석 정상석을 세워 국사봉이라 적어놓았는데 마모되어 보이지 않는다. 높이로나 산세로 봐서 당연히 이 봉이 국사봉이 맞겠다고 생각해 본다.

 

국사봉 인증.

 

 

국사봉을 뒤로하고 꾸준히 고도를 낮추며 진행하는데,

 

앞쪽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더니 산악 오토바이 3대가 등로를 헤집으며 지나가고,

 

잠시 더 평탄한 등로를 따르니 돌탑과 정자 쉼터가 있는 닭재를 지나게 된다.

 

<닭재>

대전시 동구 삼괴동 덕산마을 뒤쪽에 있는 산은 닭산이라 불렸는데 그래서 고개 이름도 닭재다. 옛날부터 마을에 경사가 있으면 이 고갯마루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흉사가 있으면 소나무가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대전에서는 꾀나 유명한 옛 고갯길이며 인근에 있는 계현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으로 닭재를 지키는 성이었음을 알 수 있고, 성안에는 지금도 토기편과 기와편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닭재 이정표.

 

이곳 닭재에서 대전둘레산길 3구간이 끝나고 식장산을 넘어 세천공원까지 이어지는 4구간이 시작된다. 

 

대전둘레산길 4구간 안내판.

 

 

좌측 삼괴동 덕산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지나고,

 

멋들어진 정자 쉼터를 지나 잠시 오르면,

 

돌담인듯 보이는 계현산성에 도착하여 미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거풍을 하며 몸을 식힌다.

 

<계현산성>
대전시 동구 삼괴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성곽으로,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4호다. 일명 닭재고개 위의 봉우리에 축조된 둘레 약 220m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북동쪽 성벽은 외벽 높이 4.2m, 내벽 높이 0.8m, 성벽의 하부 너비 4.5m이다.
계현산성은 충청남도 금산군 마전 방면의 추정리산성, 금성산성과 연결되어 있어 이곳에서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동으로는 성치산성, 서로는 소호동산성, 사정성, 보문산성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산행기에서 보았던 안내판을 보이지 않고 계현산성을 알리는 오석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계현산성을 뒤로하고 급하게 고도를 낮추어,

 

작은 봉우리를 지나 다시 내려서면,

 

좌측 삼괴동 방향 갈림길이 있는 꼬부랑재를 지나게 되는데,

꼬부랑재는 고개가 너무 꼬불꼬불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정표에 표시된 삼괴동은 말 그대로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정자처럼 서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꼬부랑재에서 완만한 오름길을 따라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좌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대전 시가지가 조망되고,

 

좌측으로는 남대전 IC 부근의 쭉 뻗은 대전통영고속도로도 조망되고,

 

앞쪽으로는 가야 할 망덕봉이 우뚝하며,

 

우측으로는 서대산이 듬직하게 조망되며 지나온 국사봉도 꾀나 높아 보인다.

 

돌아본 남서쪽 정기봉과 대전시 동구 삼괴동 방향.

 

지나온 국사봉과 곡남산 방향.

 

아침에 넘은 만인산 너머 멀리로 대둔산도 어슴프레 가늠된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를 지나 망덕봉을 향한 급경사 오름길을 오르면,

 

누적된 피로와 더위에 지쳐 쓰러질 즈음에야 겨우 망덕봉 정상에 도착한다.  

 

계현산성까지 함께한 송 사장님도 조망 몇 컷을 담는 사이에 앞서 가 버려서 홀로 망덕봉 인증을 남긴다. 

 

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망덕봉 정상 전경.

 

 

망덕봉 내림길에 쉬고 있는 송 사장님과 10여분 휴식을 하고는 다시 식장산을 향하니,

 

송전탑 아래를 지나는데,

 

우측 옥천의 마성산 방향 조망이 트여있고, 

 

좌측 산내초교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는데,

 

식장산이 아직도 6.1km나 남았다. 에고~~!

 

 

나무 계단을 따라 작은 봉우리를 오르면,

 

가야 할 식장산 주능선이 병풍인 듯 조망되고,

 

좌전방으로 보문산과 대전시가지가 조망되더니,

 

잠시 내림길을 내려서니 곤룡재에 도착한다.

 

<곤룡재>
대전광역시의 동남쪽 동구 낭월동과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아래로 곤룡터널이 지난다. 곤룡재가 있는 산의 모양이 마치 용처럼 생겼다 하여 곤룡산이라 불렸고, 곤룡산에 있는 고개라서 곤룡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갯길 인근 마을 곤룡골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을 당했다. 우리 군경은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대전형무소에 있던 재소자 수 천 명을 이곳에서 모두 학살했고, 북한군도 양민들을 반동으로 몰아 이곳에서 학살했다. 그래서 이곳 곤룡골은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였다는 의미에서 ‘골령골(骨嶺谷)’로 불리기도 한다.

 

곤룡재 안내판.

 

곤룡재 이정표.

 

 

곤룡재를 지나자 다시 급경사 오름길이 이어지고,

 

더위에 숨쉬기 조차 힘겨운 즈음에 소나무숲 능선의 벤치에서 잠시 몸을 식히기도 하며,

 

연이어 나타나는 봉우리들을 하나둘 넘는 사이에,

 

사양리산성지임을 알리는 오석의 표석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사양리산성지(舍楊里山城址)>
사양리산성은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와 대전시 중구 낭월동 사이의 산봉우리에 쌓은 삼국시대(백제계성) 테뫼형 석축산성이다. 군서면 사양리 서성골 마을 서쪽 500m 정도인 식장산 남쪽 줄기에 있으며, 전체적인 지형은 남북으로 길며 동서로는 좁다. 옥천쪽인 동쪽 경사면은 매우 급경사로 거의 절벽에 가깝고, 대전쪽인 서쪽 방향은 상대적으로 조금 완만하나 그래도 경사가 급하다. 성의 내부는 동쪽이 약간 낮게 형성되었는데 그 이유는 성의 내부 공간을 확보하며 북서쪽의 찬바람을 막기위하여 서쪽 성벽을 원래의 능선에서 약간 아래쪽에서부터 높게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남쪽과 북쪽의 능선과 닿은 부분은 석축을 튼튼히 하여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였으며,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능선에서 3~5m 정도 아래로 축성하였고, 성벽의 높이는 북쪽은 3~5m 정도이며 남쪽 성벽은 2~3m 정도이다. 성벽은 많이 무너지기는 하였으나 다른 산성지보다는 나은 편으로 군데군데 원래의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석축 형태는 독수리봉산성지와 노고성지등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계현성과는 조금 다르다. 사양리산성지는 성의 남쪽에 있는 곤룡재와 성의 북쪽에 있는 동오리재를 경계하기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계현성과 동오리산성지와 함께 식장산 남쪽 방향에 축성된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 생각된다. 식장산의 남쪽줄기에 있는 주요 고개는 동오리재와 곤룡재 및 닭재(鷄峴)인데, 동오리재와 곤룡재는 고개의 동쪽이 매우 급경사라 많은 인원이 넘나들기에는 힘든 고개이나 닭재는 경사가 완만하다. 사양리산성지에서 토기조각등 유물은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이곳에서의 전망은 서쪽으로는 대전의 시가지가 잘 보이며 동북쪽으로는 조금 멀리 용봉산성지및 동평산성과 마성산성이 잘 보인다. 동쪽으로는 성티산성이 있는 말동산이 보이나 성티산성의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사양리산성 봉우리 내림길은 나무계단의 가파른 내림길이고,

 

이내 다가서는 작은 봉우리를 좌회하여 지나니,

 

좌측으로 지난 구간에 지나왔을 산봉우리들이 넘실거리고 있고,

 

살짝 당겨본 산내동을 지나는 대전통영고속도로와 산봉우리들.

 

이내 산내초교가 있는 낭월마을에서 올라오는 낭월임도종점을 지나게 된다.

 

이곳이 낭월마을에서 시작한 3km의 낭월임도가 끝나는 종점임을 알리는 이정표.

 

 

낭월임도 종점에서 능선으로 이어진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니,

좌측 오도산 방향으로 보만식계의 첫 봉우리인 보문산도 조망되고,

 

우측으로는 이태 전에 걸었던 천성장마 능선도 지척으로 가늠되며,

 

서대산도 지나온 봉우리들 너머에서 듬직하니 지켜보고 있다.

 

동쪽 옥천 방향.

 

북동쪽 식장산 주능선의 독수리봉(우) 방향.

 

곤룡재에서 급하게 올라서자 이어지는 봉우리에서는 쉴 새 없이 터지는 조망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다. 우측 옥천 방향으로는 서대산을 위시한 천성장마 능선과 첩첩산중의 웅장한 산세가, 좌전방 대전 방향으로는 발전하는 대전의 현주소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좌측과 후방으로는 지난 구간과 오늘 걸어온 산줄기도 가늠하면서 보만식계가 만만치 않은 종주길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북쪽 식장산 주능선 방향.

 

북동쪽 식장산 독수리봉 방향.

 

동쪽 옥천읍 방향.

 

남동쪽 서대산 방향

 

남서쪽 정기봉 방향.

 

 

봉우리를 넘고 또 어떤 봉우리는 우회하여 지나면,

 

식장산 주능선이 병풍처럼 앞을 막아서며,

 

 좌전방 능선에는 군부대가 차지한 식장산 정상쯤의 봉우리가 보이고,  

 

우전방으로는 식장산 주능선의 독수리봉이 가늠된다.

 

식장산(598m)은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었던 산으로 신라군과 백제군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식장산하 가활만인지지(食臧山下 可活萬人之地)"라 했던 옛말처럼 식장산은 넉넉한 품을 지니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 곳곳의 산 가운데 '시루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많지만, '밥 식(食)' 자가 들어 있는 산은 이곳밖에 없을 것 같다. 식장산이란 이름은 백제때 신라의 침공을 방어하던 요새이다 보니 성을 여러 개 쌓고 거기에 군량미를 많이 저장해 두었다는 데서 연유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 산에는 먹을 것이 쏟아지는 밥그릇이 묻혀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아주 먼 옛날 식장산에는 가난하고 착한 농부가 두 아들과 살고 있었는데,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근근이 살았더란다. 어느 날 먹을 것을 구하러 산속을 헤매던 농부는 옹기로 만든 솥 하나를 발견하고, 그 솥을 등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솥이 도깨비방망이였던지라 쌀 한 줌만 넣으면 솥에 밥이 가득 차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두 아들이 결혼할 때가 되자 두 아들이 옹기솥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지라, 농부는 두 아들에게 솥을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라고 말한 다음 솥을 처음 주웠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놓았다. 두 아들은 하루 종일 산속을 뒤졌지만 그 솥을 찾지 못했고, 할 수 없이 농부 자신이 솥을 감추었던 자리로 가 보았지만 그 역시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밥솥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식정산(食鼎山)이라고 부르다가 차차 식장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동화 같은 설화는 '창작과 비평사' 간 <남북어린이가 함께 보는 전래동화>에도 수록되어 있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과 넘실거리는 산 능선의 파도, 이런 멋진 풍경이 쉽사리 발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잠시의 쉼을 뒤로하고 다시금 날등을 따라 식장산을 향하며,

 

조망의 즐거움에 푹 빠진 사이에 동오리재(둥그너미재)를 지나게 되는데, 

 

동오리재는 대전 동구 낭월동과 옥천 안동오리마을을 잇는 고개다.

 

 

동오리재를 뒤로하고 본격적인 식장산 주능선 오름길에 들어서니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은 봉우리가 아닌지라 우측의 능선길로 들어서는데,

만인산에서 걸어온 길이의 1/10만 더 가면 식장산 정상에 도착한다는 이정표가 반갑다. 

 

 

가파른 지능선을 따라 벤치가 있는 쉼터를 지나 오르면,

 

천신만고 끝에 구절사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식장산 주능선에 올라선다.

 

구절사 갈림길 이정표.

 

벤치에서 쉬고 있던 산객들이 식장산 정상으로 향하며 내어준 벤치에서 더위를 식히며 쉼을 한다.

 

 

다시 식장산 주능선을 따라 식장산 정상 방향으로 진행하니 묘지도 지나게 되고,

 

한국통신 시설이 자리한 ​통신탑봉(574m) 능선도 지나서,

 

통신시설이 자리한 주능선을 피해 사면 우회길을 따라 진행하니,

 

우측으로 세천공원 방향 갈림길 안부를 지나게 된다.

 

갈림길 이정표.

 

 

580봉 오름길에 돌아본 통신탑봉이 저만치 멀어져 있고, 

옥천의 천성장마 능선과 서대산이 옅은 안개에 희미하게 느러나 보이고,

 

삼각점이 있는 580.6봉을 지나게 된다.

 

580.6봉 삼각점.

 

이 봉우리가 식장지맥의 580.6봉이라는 표지기.

 

 

식장산 주능선에 올랐으니 이제 완만한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 한두 개만 지나면 될 것으로 짐작했는데,

봉우리와 안부가 연이어 나타나며 다시 세천공원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난다.

 

대전둘레길은 이곳에서 우측 계곡을 따라 세천공원 방향으로 이어지고,

식장산 정상은 아직도 400m나 남았단다.

 

 

식장산 정상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오르는데 좌측으로 조망이 멋진 조망터가 나오며,

 

저 멀리 만인산에서부터 걸어온 능선이 시원스레 조망되는데,

 

더위에 힘겹게 걸었던 국사봉부터의 능선이 그저 그렇게 밋밋한 능선으로 보인다.

 

 

산허리로 돌아가는 우회길을 두고 식장산 정상으로 올라보지만, 길은 막아놓은 철문 앞까지 만이고,

 

다시금 오솔길을 따라 내려서니 군부대가 차지한 정상부를 우회하는 사면 길로 내려서게 되고,

 

올라설 수 없는 식장산 정상을 사면길로 좌회하여 식장산 정상석이 놓여있는 해돋이전망대로 향하니,

 

좌측 서대산 방향으로 걸어온 보만식계 능선의 봉우리들이 가늠되더니,

 

군부대가 차지한 식장산 정상을 우회한 지점의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우측 활공장 방향 갈림길이 있는 해돋이전망대 이정표가 나오는데,

송 사장님이 두고 갔다는 안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한참을 찾아보지만 헛수고만 하고,

 

대전의 최고봉인 식장산의 정상석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식장산(食藏山, 598m)>
식장산은 대전광역시 동구와 옥천군 군북면, 군서면 등 세 지역에 걸쳐있는 산이다. 대전광역시의 최고봉으로 충남의 최고봉 서대산(904m), 옥천의 최고봉 대성산(705m) 등 인접지역의 명산들과 어깨를 견주며 대전시 동구의 남동부를 수놓고 있는 산이다. 그런가 하면 동구의 남동부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인 동구 삼정동, 판암동, 대성동 등이 산의 자락에 기대어 발전하는 동구 구민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기도 한 산이다. 백제 시대에는 군량을 많이 저장하고 신라의 침공을 방어하던 요충지였다는 기록에서 식장산이라 불렀다는 유래와, 먹을 것이 쏟아지는 밥그릇이 묻혀 있다 하여 식기산 또는 식장산이라 불렸다는 유래가 있다. 1934년 계곡을 막아 만든 댐이 식장산 세천유원지의 초입에 위치하며, 세천저수지를 따라 등산로가 만들어져 있다.
식장산(598m)은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보만식계로 불리는 보문산, 만인산, 식장산, 계족산 줄기를 모두 조망할 수 있고, 특히 활공장에서 내려다보는 대전시가지의 모습과 야경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식장산의 또 다른 매력은 생태환경이 잘 보전되어 있고 대전에서 보기 드물게 시원한 계곡이 있다는 것이다. 세천 수원지 주변에 봄이면 벚꽃으로 가을엔 단풍이 유명해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으며, 식장산 자연생태림은 대전팔경 중 하나이다. 대전광역시가 지정한 482만㎡ 규모의 자연생태보전림을 품고 있는 이 산은 78과 187속 224종 45변종의 식물과 노루, 다람쥐, 살쾡이, 너구리, 박쥐 등 포유류 45종, 조류 100여종, 파충류, 양서류 등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의 보고다. 밀림같이 숲이 우거져 도심의 허파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 산은 산 이름에 얽힌 효자효부에 관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청량제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산이기도 하다.
이 산마루는 백제 멸망과 관계 깊은 곳으로 탄현(炭峴) 또는 숯고개·숯재라 불리었다. 즉 백제때 성을 쌓고 군량(軍糧)을 많이 저장하여 신라를 방어하는 요새지였으며, 신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백제 의자왕 때의 충신 성충(成忠)은 백제의 국운이 위태로움을 간하다가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성충은 옥중에서 상서하기를 “앞으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니 만일 적병이 오거든 육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는 기벌포(伎伐浦)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황산벌과 백강에서 적병을 막았고 신라와 당나라 군사들은 탄현을 넘어 침공하여 결국 백제는 패망하였다. 식장산의 험난한 지형은 자연의 요새지로 백제 때뿐만 아니라 6·25 때에는 연합군과 괴뢰군의 격전지가 되었고 현재도 국방상의 요지이다. 이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양국의 길목으로 험난하지만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현재도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요지다. 이 구간은 경부선철도를 부설할 때 작업이 어려운 구간이었고 경부고속도로에서도 이 지역에 터널이 집중되어 있다.

 

식장산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었던 산이며 한밭의 상징처럼 우뚝 솟은 산이다. 또한 신라군이 백제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며 자연적으로는 한 고을의 병풍처럼 한 면을 가리고 안락한 멋을 풍기는 산으로도 유명하다. 냇물이 곳곳에서 흘러 들을 이루고, 들을 가리는 산맥의 줄기가 신기하므로 옛날에는「식장산하 가활만인지지(食臧山下 可活萬人之地)」라 하여 만인이 모여 살 수 있는 고을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100만을 넘어서는 가활지지(可活之地)를 조성하기도 한 산이다. 옛날부터 식장산엔 식량을 저장하고 있다는 설화도 있으나 이것은 백제의 군사들이 숲이 우거진 식장산에 식량을 쌓아놓고 싸움을 하였다는 기록에 연유한 것이며 식장산에 산성이 겹겹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능히 짐작할 만하다.

설화에 동살미(지금의 홍도동)에 살고 있던 전우치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일간 또는 삼년간은 먹고도 남을 만한 보물을 식장산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식장산 아래의 들이 기름지고 윤택해서 만인이 살 만한 터전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으며, 지금 대전이 근 백년 간에 비약적인 발전이 된 것도 식장산 같은 명산이 있고 옛사람이 이 한밭을 짐작해서 발전할 곳으로 지적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이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식장산의 산나물하면 고사리나물을 꼽는다. 제사상에도 오르는 고사리나물, 그 고사리 산나물이 많기로 전해 내려오는 식장산 아래 산마을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 슬하에는 자식이 하나 있었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항시 웃고 지내는 집안이었다. 아들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맛있는 산과일을 만나면 자기 입에 넣을 줄을 모르고 꼭꼭 홀어머니에게 드렸고, 산나물 캐는 며느리도 맛있는 산나물을 먼저 어머님에게 드린 다음 장터에 팔곤 했다. 이렇게 효심이 지극한 그들에게도 차츰 근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식이 자라면서 그들이 정성껏 해드리는 음식을 아들이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그들의 어머니가 음식을 먹을 때는 아이를 업고 나와 밖에서 서성거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음식이 할머니 앞에 놓이면 밖에서 서성거리는 그들의 자식은 더욱 소리내어 울어 그들의 어머니는 먹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궁리한 끝에 자식을 산중에 버리기로 했다. 아무리 효도를 하려 해도 자식 때문에 효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그들은 결심한 것이었다.
「여보,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지만 어머님은 한번 돌아가시면 그만 아니오. 사람이 짐승이 아닌 이상 부모에의 효도는 잊어서는 안 돼요.」
아내의 이와 같은 말을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서 삽자루를 들었다. 어머니 등에 업힌 아이는 잠이 들었다. 그들은 아이를 업고 산중으로 들어갔다. 산의 숲을 헤칠 때에도 아이는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산마루에 올라섰다가 양지바른 한 곳을 발견한 그는 우선 뗏장을 뜨고 흙을 파기 시작했다. 자기의 수난을 아는지 눈을 끔벅거리는 아들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땅이 파져서 아이가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기기 시작하자 아이의 눈에서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아이의 어머니가 돌아서서 치마로 눈시울을 닦는다.
땅을 파고 겨우 흙을 정리하고 땅 밑의 흙을 한 삽 파내려는데 「덜거덕」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큰 돌이구나」하고 두 손으로 흙을 파는데 어찌 된 일인가? 땅 속에 그릇이 파묻혀 있었다. 그는 그릇을 파낸 다음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두꺼비처럼 눈만 끔벅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들을 그냥 업고 돌아왔다. 하지만 아들은 여전했다. 할머니가 음식을 먹으려 하니까 더 날쌔게 먹어치운다. 그날 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연달아 담뱃대에 담배를 넣고 불을 붙였다. 담뱃재는 산속에서 캐내 온 그릇에 털었다. 담배를 열 대를 피워도 효도할 궁리가 나서지 않았다. 밤이 이슥했다. 그는 그만 한구석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가 아침에 눈을 떠보니 담뱃재가 그릇에 소복이 쌓여 있는 것이었다. 자기가 담배를 많이 피웠지만 저렇게 많은 재가 생길 리는 만무하였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아내와 상의한 끝에 그 그릇에 곡식을 넣고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았다. 이번엔 곡식이 그 그릇에서 철철 넘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이번엔 돈을 한 잎 넣어 보았다. 이번엔 그릇에 돈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가 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그 후 더욱 홀어머니를 잘 모셨다.
아들도 자라면서 철이 드는지 전보다는 습성이 나아졌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에도 한계가 있는 것, 그들의 어머니는 어느 날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그들은 이 식기를 그날 산속에 가져다 묻어버렸다. 그래서 이 산을 밥그릇이 묻혀있는 산이라 해서 식기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먹을 것이 많이 묻혀있는 산이라 해서 식장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동남쪽 서대산 방향으로 그렇게나 힘겹거 걸었던 국사봉과 망덕봉이 야트막하게 내려다 보이고,

 

아침에 비를 맞으며 올랐던 만인산과 정기봉 우측 멀리로 대둔산쯤도 희미하게 가늠된다.

 

살짝 당겨본 서대산 방향.

 

살짝 당겨본 정기봉 방향.

 

남서쪽 만인산 방향 멀리로 대둔산이 희미하다.

 

식장산 정상을 대신하고 있는 식장산(596.7m) 정상석에서.

 

 

정상석이 있는 해돋이전망대에 배낭을 두고 직진의 고산사 방향으로 조금 내려서니 멋진 전망 쉼터가 있다.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에서 대전통영간고속도로가 분기하는 산내 JC가 내려다 보이고,

 

보만식계의 첫번째 봉우리인 보문산과 대전 시가지로 쏟아지는 빛내림이 장관이다.

 

보문산 방향.

 

 

해돋이전망대로 돌아와 배낭을 메고 갈림길 삼거리에서 활공장 방향 나무계단길을 따라 내려섰다가는,

 

다시 로프를 잡고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철망울타리 옆길로 들어서면,

 

이내 활공장으로도 불리는 헬기장에 도착하는데,

 

헬기장에 서면 대전시가지는 물론 대청호도 멋지게 조망된다.

 

남서쪽 산내 JC 방향.

 

살짝 당겨본 산내 JC 모습.

 

서쪽 보문산 방향.

 

서북쪽 대전시가지와 계룡산 방향.

 

북쪽 계족산과 대청호 방향.

 

다음 구간에 가게 될 계족산 모습.

 

대전시가지 중앙의 검은색 쌍둥이 빌딩이 대전역이다.

 

보문산과 대전시가지를 배경으로.

 

 

군부대가 차지한 식장산 정상을 뒤돌아보며 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식장루가 있는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대전시가지와 대청호 조망이 끝내주는 식장루 모습.

 

식장루는 최근인 2018년에 건립되었다고...

 

식장산에서 본 조망 안내도.

 

서북쪽 대전시가지 방향 파노라마.

 

보문산 방향.

 

대전시가지 방향.

 

계족산과 대청호 방향.

 

살짝 당겨본 대청호 모습.

 

대청호를 배경으로.

 

 

식장루에서 세천공원까지의 보문식계 능선길은 식장루 옆 능선을 따라 세천공원으로 이어지지만 대부분의 산객들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내려서게 된다. 그리고 대전둘레산길은 식장산에서 우측 계곡을 따라 내려가서 세천저수지를 지나 세천고개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귀경 시간이 촉급하여 능선 하산길을 두고,

 앞서 내려가 세천유원지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가지고 올라온 손 총무님 덕분에 승용차로 하산길에 나서,

 

능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따라 내려와 세천공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앞서 내려간 분들이 기다리고 있다.

 

 

근처에 오리요리가 맛나다는 창병씨의 제안으로 한참을 헤매다가 들어간 두부집에서,

흑염소 수육과 두부요리를 맛나게 먹고 느지막이 버스전용차로 시간이 종료될 즈음에 귀경길에 올랐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여럿이 함께 가라'라는 교훈을 절감한 산행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에 장거리 산행의 부담으로 탈출로도 준비해 놓았으나,

쉬엄쉬엄 달아오르는 열기를 식히며 산행을 한 탓에

무사히 부담스러운 보만식계 식장산 구간 산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