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금남기맥 3차(소룡고개~다듬재) 충남 논산시, 전북 익산시 완주군.
산 행 일 : 2021. 05. 08.(토)
산행코스 : 소룡고개~성태봉~고내곡재~증산봉~누항재~석회석폐광산~천호산~갈매봉~문드러미재~호남고속도로~양동재~쑥고개(국도1호선)~용화산~다듬재/아리랑재 (도상거리 약 18km, 7시간 40분 소요)
산행참가 : 3백두.
<산행지도>
산행일 날씨는 더없이 좋을 것으로 예보되었으나 목요일 예보에서 주말에 짙은 황사가 예보되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어차피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기에 황사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지만 시야가 흐려질 것을 생각하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승용차에 탑승이 가능한 4명 중에서 한분이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는 바람에 3명이 탑승하여 산행 날머리인 다듬재에 도착하니 이번에도 역시나 창병 대장의 지인분께서 먼저와 기다리고 계셨다. 이번이 마지막 민폐이니 염치 불고하고 지인에 차에 옮겨 타고 들머리인 소룡고개에 도착하니 7시 반쯤이다.
소룡고개에서 출발하는 금번 금남기맥은 충남 논산시와 전북 완주군의 경계를 따라 이어지다가 고내곡재를 지나 증산봉(368m) 쯤에서 온전히 전북 익산시의 영역으로 들었다가 천호산 능선에서 다시 완주군의 경계를 만나기도 하지만 갈매봉부터는 다시 익산시의 영역으로 들어서서 이어지게 된다.
소룡고개에서 우리를 데려다준 분과 이별하고는,
바로 들머리로 들어서며 금남기맥 세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소룡고개(巢龍峙, 300m)>
소룡(巢龍) 고개는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와 충남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를 있는 고개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난다. 소룡리의 남쪽 끝에 있는 고개라 하여 그리 이름 붙여졌는데, 소룡리(巢龍里)는 옛날 이무기가 집을 짓고 반 용이 되어서 천운을 기다렸다가 승천한다는 용굴이 있다 하여 소룡골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지리(陽地里) 일부를 병합하여 소룡리라 하고 논산군 구자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연무읍이 승격됨에 따라 논산군 연무읍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기촌, 대촌, 지내기, 차돌배기 등이 있다.
돌아본 소룡고개 들머리.
금만봉에서 급경사의 봉우리 오르내림이 연이어지는 빨래판 구간은 지난 구간의 말목재까지 이고, 말목재 이후 옥녀봉을 거쳐 소룡고개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졌고, 오늘 걷게 될 다듬재까지의 구간도 작은 봉우리들이 연속되기는 하지만 비교적 경사도가 완만한 구간이라 산행에 대한 부담은 한결 작아졌다.
기맥 능선으로 올라서니 철재 지주만 남은 벤치의 흔적이 눈에 띄고,
옛 백제의 성터 흔적이 둘러져 있는 봉우리를 오르면,
등로 좌측에 사각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바닥이 뒤틀려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이고,
이내 삼각점이 있는 성태봉 정상에 도착한다.
<성태봉(城太峰, 371.3m)>
전북 완주군 화산면과 논산시 연무읍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옛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성태봉이라 부른다고 하며, 성태봉 서쪽 황하리 사람들은 윗대의 어른들로부터 이 성이 삼국시대 백제의 고성이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백제 8대 고종왕의 셋째 딸인 매화공주에 관한 예기가 전해 온다. 매화공주는 문무가 출중하고 지혜도 남달랐다 하며, 신라와 전쟁을 할 때 신라를 방해하기 위해 용장을 인솔하고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대기한 곳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성태봉 인증.
성태봉을 내려서는 등로 옆에는 수풀이 무성한 의령남공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성태봉을 둘러싸고 있는 성터의 흔적을 내려서며 성태봉을 뒤로하면,
호젓하고 편안한 능선 등로가 이어지고,
따르던 수레길은 좌측 상호마을 방향으로 휘어져 내려가고 기맥길은 우측의 능선으로 이어진다.
좌측 화산면 운산리와 우측 연무읍 고내리를 잇는 옛 고내곡재를 지나면,
2차선 포장도로를 내느라 깊게 깎아놓은 고내곡재 절개지 위에 서게 되는데,
기맥 등로는 절개지 직전에서 우측 아래로 이어져,
가파른 절개지 사면을 내려서서 낙석방지용 철망과 석축 사이의 틈으로 빠져나가 건너편 들머리로 오르게 된다.
우측 고내리 고내곡제 방향.
고내곡재 들머리로 오르며 돌아본 고내곡재.
<고내곡재(高內谷)>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에서 충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를 잇는 2차선 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고개 북쪽 능선은 소룡고개와 함박재로 이어지고, 고개 남쪽은 성삼재와 화산재로 이어진다. 최근에 도로 공사가 마무리된 듯 보이며 고개 양측 절개지가 높게 깎여 있어서 기맥길을 걷는 산꾼에게는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다.
고내곡재는 성재 또는 고내골재라고도 부르며, 옛날에는 산적들이 웅거(雄據)하며 이 고개를 넘어가는 행인들을 괴롭히기도 했다고 한다. 6.25 때는 이곳의 골이 깊어서 연무 쪽 사람들의 피란지이기도 하였다. 논산시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논산시와 전라북도 완주군, 충남과 전북의 행정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다. 고개는 논산시와 완주군을 연결하지만 주요 도로는 지나지 않고, 기타 도로가 고개를 관통하여 완주군 화산면을 통과하는 지방도 740호선에 이어지고 있다. 고개 서쪽에는 고내곡이 있는데, 이곳에 고내곡 저수지가 있다.
우측 고내리 방향이 황사로 시야가 흐려져 있다.
들머리 쪽 절개지를 올라 능선 숲 방향으로 진행하면,
금줄이 감긴 당산나무가 있고,
뒤쪽 숲길 입구 나뭇가지에 고내곡재 표지판이 걸려있다.
숲길을 지나 좌측으로 벌목된 능선으로 올라서면,
뒤쪽으로 방금 전에 지나온 성태봉이 가늠되고,
지난 구간에 지났던 옥녀봉도 가늠된다.
호젓한 육산 능선길에 둥그런 바위가 이채롭고,
좌측 화산면 운산리 누하마을 방향 갈림길을 두어 곳 지나고,
방화선처럼 뚫려있는 능선 수레길을 따라 완만한 봉우리를 넘으면,
좌.우로 길 흔적이 뚜렷한 옛고개를 지나게 되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작은 '증산봉(368m)' 표지기가 걸려있는 봉우리에서 첫번째 쉼을 가진다.
증산봉 표지기.
예상보다 진행이 빠르다는 느낌에 커피를 나누며 느긋한 쉼을 한다.
증산봉을 뒤로하고 완만하게 내려서면 숫돌 재질의 커다란 암반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 증산봉을 지나면서 좌 완주군 화산면, 우 논산시 연무읍에서 온전히 익산시 여산면의 품으로 들게 된다. 여산면(礪山面)은 농경시대에 유용한 숫돌이 많이 나는 곳이어서 '숫돌 여(礪)' 자를 이름 붙여 불리었다고 한다.
완만하고 호젓한 능선 숲길을 따라 고만고만한 봉우리들 두어 개 지나,
340봉쯤을 지나면,
앞쪽으로 가야 할 천호산 능선이 조망되는 벌목지대로 들어서게 되는데,
우전방으로 여산면 태성리를 지나는 호남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좌전방으로는 가야할 천호산이 가늠된다.
벌목된 금남기맥 능선 모습.
안부를 지나 320봉 오름길을 오로다가,
지나온 금남기맥 능선의 옥녀봉 방향을 돌아보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320봉쯤을 지나면,
앞쪽으로 가야 할 천호산 능선이 성큼 다가서고,
우측 용화산 방향으로는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도 가늠되고,
뒤쪽 운산리 방향으로는 지난 구간에 지났던 옥녀봉 직전의 460봉이 황사먼지 속에서 뾰족이 가늠된다.
좌측 여산면 태성리 누항마을 조망.
산의 소유권 경계를 표시하는 표지석일까?
완만한 벌목지대 능선을 내려서서 740번 비포장 지방도가 지나는 누항재를 지난다.
<누항재(漏項峙)/성치(城峙, 성잿골)>
전북 여산면 태성리 누황마을과 여산면 호산리를 잇는 740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고개 근처에 석회광산 등이 있어서 '작은 독고개'라고도 부른다. '누항(漏項)재'라는 이름은 고개 좌측 태성리 누황마을에 인접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인용하여 명명한 고개인데, 누항(漏項, 시어목-세목)은 시어목의 한문자 표기로, 시어목은 물이 새어(시어) 들어가는 목(좁은 부분)이라는 말이다.
천호산 북쪽 근처에 지형이 삿갓을 뒤집어 놓은 듯한(圓錐形) 곳이 있는데 비가 오면 물이 그 속으로 흘러 들어감으로(천호동굴 속으로) 시어목이라 했다. 성치(城峙)는 천호동굴 바로 동쪽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고 성치에는 나백전(羅百戰) 때 쌓았다는 천호성이 있어 성잿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누항재 표지판.
누항재 들머리로 들어서자 50번 송전탑이 나오고,
우측으로 가야 할 용화산이 황사 먼지에 희미하게 보인다.
보통의 바위와는 다른 느낌의 바위들이 보이며,
'보호구역 문화공보부'라 적힌 비석이 보이고,
이상하게 갈라진 바위들도 보이는데 이곳 능선 아래 어디쯤에 천호동굴이 자리하고 있는 곳인가 보다.
<천호동굴(天壺洞窟)>
천호동굴(天壺洞窟, 천연기념물 제177호)은 익산시 여산면 태성리와 호산리에 걸쳐 있는 호남 유일의 석회암 동굴로, 총연장은 약 800m이다. 『동국여지승람』 여산 산천조에 " 「漏項在郡東七里有川出高山縣西流漏入壺山麓伏流達西麓爲川穴圓徑丈餘諺傳龍湫天早禱雨」 누항은 군 동쪽의 7리에 있어 고산현에서 서쪽으로 흘러오는 내가 있는데, 호산 기슭으로 새어 들어가 땅속으로 흘러 호산 서쪽으로 나와 내를 이루었다. 물이 나오는 구멍은 한길 남짓으로 속칭 용추라 전하며 가물면 비 오기를 빈다."라고 하여 이미 조선 중기 이전에 동굴의 존재 사실을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동굴은 약 2억 5000∼4억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굴 안의 냉기가 대류(對流) 하여 춘분 후에는 바람이 구멍에서 나오고, 추분 후에는 바람이 구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사시로 은은한 뇌성이 울리는 듯하다 하여, 속칭 바람구멍(風穴)이라고도 한다. 특히, 수정궁으로 불리는 광장은 높이 약 30m, 너비 약 15m이고, 중앙 정면에는 높이 20m가 넘는 디스크형 대 석순이 솟아 있는데 그 지름이 5m에 이른다. 우기(雨期)에는 동굴 속에 유수량이 많아 동굴폭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한, 동굴 내에는 박쥐를 비롯하여 곱둥이•딱정벌레•톡토기 등 많은 동굴 생물이 서식하고 있다. 동굴 부근 일대는 마한 때부터의 도읍지로, 백제 때에는 미륵사(彌勒寺)가 건립되고, 후고구려가 생겼던 역사적 유래가 깊은 곳이다. 산정에는 산성과 용추사(龍湫寺)•문주사(文珠寺) 등이 있으며, 1966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진행하여 안부로 내려서는데,
우측으로 폐석회석광산이 내려다 보인다.
급경사 암릉을 내려서서 안부에 도착하자,
안내문이 세워져 있는데,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산 1-45번지 8필지는 '익산 석회' 석회석 채광지로,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된 '천호동굴(天壺洞窟)' 인근 500m 이내의 지역으로 문화재 보호법에 의거 석회 채광을 금지하고 산지관리법에 의거 복구공사를 완료한 지역이라는 내용이다. 아울러 위험지역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적혀있고,
기맥길은 안내판을 지나 폐석회석 광산 절개지를 따라 이어지며,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폐석회석광산 절개지가 아찔하다.
잡목과 넝쿨의 거친 능선 등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으로 보이는 구덩이들을 지나고,
다소 완만한 오름길을 따라 374봉쯤을 지나자,
잠시 평지 수준의 능선 등로가 이어지더니 능선 좌측으로 기독교인들 묘지를 지나게 된다.
잠시 숲으로 들었던 기맥길은 다시 벌목지대로 이어지며,
뒤쪽으로 지나온 기맥 능선이 황사에 여렴풋이 가늠되고,
서북쪽 여산읍 방향으로는 황사로 거의 뵈는 게 없을 정도다.
천호산을 향해 다시 숲길로 들어서니 우측으로 미사굴 방향 갈림길이 있는 미사굴입구 삼거리를 지나고,
<미사굴>
미사굴입구 삼거리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30여분 내려가면 예전에는 성치굴이라고 불렸던 미사굴이 나온다. 이 굴은 선조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숫돌을 캐던 곳이라고 한다. 미사굴 앞에는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후 페레올(고) 주교와 다블뤄(안) 신부(나중에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됨)가 성채골에 와서 두어 달 지내고 공주 수리치골로 떠났는데,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숨어서 미사를 드리던 굴로 여겨지고 있다」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서자 능선은 다시 완만해지고,
다시 잠시 능선 오름길을 오르자 성터의 흔적이 보이며 천호산성 표지판이 나타난다.
<천호산성(天壺山城)>
천호산성(天壺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99호)은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천호산 최고봉을 에워싼 퇴뫼식 산성으로, 서쪽으로 미륵산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 뗀돌을 이용하여 경사면을 따라 쌓았다. 성벽의 둘레는 669m이며, 현재 보존된 성벽의 폭은 6m 내외, 잔존 높이는 2.5m 내외이다. 이 산성은 성 주변에서 백제시대 수막새 기와와 토기 조각 등이 수습되어 백제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격전지라고도 전해지는 곳이다.
천호산성 안내판.
산성 안내판을 지나 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산성의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올라가면,
이곳이 '헬기장 끝'이라 표시해 놓은 이정표가 나오며,
널찍한 헬기장이 자리한 오늘의 최고봉인 천호산 정상에 도착한다.
<천호산(天壺山, 500.2m)>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과 완주군 비봉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충청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가는 첫 길목에 솟아 있다. '하늘 천(天), 병 호(壺) 자를 써서 속이 텅 빈 산이라는 뜻이다. 호산(壺山)•문수산(文殊山)이라고도 부르며, 정상에 옛 성터가 남아 있다 하여 산 밑 마을에서는 성태봉이라고 부른다.
서북쪽 기슭에는 석탄광산이 있고, 서쪽 산비탈에는 호남 유일의 석회동굴인 천호동굴이 있다. 성치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마을 위쪽 냇가에 구멍이 있는데, 비가 많이 오면 그 구멍 속으로 냇물이 빨려 들어간다고 한다. 결국 그 텅 빈 구멍으로 스며들어간 물은 석회를 녹여 큰 동굴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래서 동굴이 있는 마을의 이름도 호산리(壺山里)이다. 산기슭에는 천호 산성(대치 산성) 터가 남아 있고, 서남쪽 기슭에는 백운사•문수사 •천일사 등의 옛 사찰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여산 송 씨 문중의 영호제가 있다. 울창한 송림과 저수지, 시원한 계곡이 있는 천호산 주변은 경관이 뛰어난데, 특히 봄의 철쭉, 여름철에는 삼림욕과 피서지,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이 좋다. 천호산은 남쪽에 있는 수봉산과 함께 경관이 뛰어나고, 천호마을 위쪽 산기슭에는 성당, 순교자 묘, 사제관, 십자가의 길이 조성된 천호성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성지에는 세 명의 성인과 10명의 무명 순교자가 묻혀있어서 해마다 수많은 천주교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남쪽 완주군 비봉면 방향으로 천호성지도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보인다.
<천호성지(天呼聖趾)>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산 남쪽에 소재하는 전주교구 소속의 천주교 성지다. 박해시대의 '천호(天呼)' 마을은 '천주(天主,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다'라는 뜻을 지닌 천주교인들의 거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마을을 둘러싼 천호산(天壺山)의 이름과도 연관이 있다. '천호산'은 '하늘 아래 호리병[壺]처럼 둘러싸인 외진 산골' 또는 '순교자들의 피를 가득 머금은 병 모양의 산골'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역시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곳에 묻히고 그 후손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아오면서 형성된 지명이다. 천호산 일대에는 가장 큰 마을이자 중심지인 천호(다리실, 용추내),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모두 7개의 공소가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천호, 성채골, 산수골 등 3개의 공소만 남아있다. 천호 마을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처한 것은 1839년 기해 박해를 전후한 시점으로, 주로 충청도 쪽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이주하여 현재 순교 성인들의 묘역 맞은편인 무능골에 정착함으로써 형성되었다. 1866년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한 6명의 성인(聖人) 중 손선지(베드로), 정문호(일명 基植, 바르톨로메오), 한재권(일명 원서, 요셉) 등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 출신의 3위와 이명서(일명 在德, 베드로) 성인을 포함한 모두 4위의 성인이 순교 직후 가족들이 이곳 천호동과 인근 시목동 등지로 피신하여 이곳에 순교자의 시신을 묻고 은거하였고, 1877년 입국한 블랑(Blanc, 白圭三)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호산 으럼골 등지에 거주하며 사목활동을 펼쳤다.
1906년 베르몽(Bermond, 睦世榮) 신부가 고산 본당에 부임하여 신자들과 협력하여 45만 평 정도의 천호 일대 산지를 매입함으로써 순교자의 묘역과 신자들의 터전을 보존하였다. 1939년 기해박해 순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손선지 등을 비롯한 6위의 순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1983년 호남교회사 연구소가 설립되어 김진소 소장 신부 등의 노력으로 정문호, 한재권 등을 비롯한 천호 일대의 순교자의 묘소를 새롭게 찾아서 유해를 발굴한 후, 현재의 순교자 묘역에 이장하였고, 1987년 피정의 집이 건립되었다.
천호산 정상에서 쉼을 하던 분들을 불러 인증을 남긴다.
지금까지 익산군 여산면 안을 남동향으로 진행해 오던 기맥 길은, 천호산에서 완주군 비봉면을 만나, 좌 비봉면, 우 여산면을 가르며 남서향 하게 된다.
기맥길이 유순하니 걸으며 쉬자는 말에 바로 천호산을 내려서서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 벤치가 있는 쉼터를 지나,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니 벤치가 있는 갈림길 사거리 쉼터가 나오는데,
좌측은 놋점재, 우측은 천일사와 문수사를 거쳐 유점마을로 내려서는 하산길이 있다.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안부를 지나 오르면,
다시 널찍한 헬기장이 있는 '천호산 남봉(467.9m)'을 지나게 되고,
잠시 후 봉화 봉(烽) 자가 새겨진 표석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는데,
표석의 각 면마다 다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무엇을 표시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많은 기맥꾼들이 알바를 하는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의 좌측 방향은 천호마을로 내려서는 하산로이고 기맥 마루금은 우측 내림길로 이어진다.
편안한 내림길을 따라 안부를 지나 오르면,
네이버 지도에 갈매봉으로 표시된 460봉쯤을 지나게 되는데, 실제 갈매봉은 7~8분 더 진행해야 나온다.
좌측 비봉면 내월리 문드러미재(실제)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고,
좌측 비봉면 내월리 명곡마을 방향이 트인 곳을 지나 오르면,
이내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있는 갈매봉(370.5m) 정상에 도착한다.
남서쪽 익산시 왕궁면 방향.
<익산시 왕궁면(王宮面)>
왕궁면(王宮面)의 유래를 보면 백제 때부터 금마저(金馬渚)에 속했다가 통일신라시대에는 우주현(紆州懸)이 됐으며, 고려 시대에는 금마의 일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석면과 우북면을 합하여, 옛적에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설에 의거해 왕궁면이라 했다. 양곡(벼티)은 양지바른 마을로서 볕바른 골이란 뜻에서 '볕이'로 한 것이 '벼티'가 됐다. 그러나 다른 설로는 양지바른 곳이라 벼농사가 잘 되고 벼가 잘 익는다고 하여 벼티라고 했다.
갈매봉을 뒤로하고 잠시 급하게 고도를 낮추자 작은 돌탑이 나오며,
좌측 완주군 비봉면 방향 조망이 트이고,
좌후방으로 완주군의 비봉면 내월리(內月里)에서 익산시 여산면(礪山面) 원수리(源水里)로 이어지는 741번 도로가 내려다 보이더니,
2차선의 741번 지방도가 지나는 문드러미재에 도착한다.
<문드러미재>
전라북도 완주군의 비봉면 내월리(內月里)와 익산시 여산면(礪山面) 원수리(源水里)를 잇는 741번 도로가 지나는 고개이다. 조선 시대 고산현에서 한양 혹은 익산으로 연결되는 재이자 관문이어서 문드러미재라고도 칭했다. 천주교 표지석에는 이곳을 '문드러미재'로 표기하고 있지만, 국가정보원 지도나 개념도에선 이곳에서 동쪽으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을 '문드러미재'로 표시하고 있는데, 여러 정황 증거로 미루어 보아 동쪽의 갈매봉에서 명곡마을 방향 지능선을 넘는 곳이 문드러미재일 것으로 추정된다.
문드러미재 들머리는 우측으로 10여 미터 진행하면 나오는 좌측 수레길이다.
돌아본 문드러미재 날머리 전경.
문드러미재 들머리 나뭇가지에는 표지기도 걸려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순례길' 이정석이 있다.
문드러미재 표지판.
문드러미재 들머리 수레길로 들어서면 이동통신탑이 있고,
산불감시초소도 지나서 편안한 능선길을 따르니,
우측 사면에 자리한 묘지가 나오며 가야 할 용화산 능선이 뿌연 황사에 희미하다.
잠시 더 수레길을 따르니 꾀나 넓은 공터가 나오며,
공터 옆 나뭇가지에는 육군부사관학교의 독도법 표지기가 걸려있는데,
쑥고개까지의 능선길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다. (아마도 갈림길 주의 표시인 듯)
우측으로 벌목된 능선길로 접어들자 여산면 원수리의 학동제가 내려다 보이고,
학동제 옆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시원스레 뻗어있다.
다시 숲길로 접어들어 잠시 내려서니 기맥 등로는 직진의 능선을 두고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데,
그 옆에는 기맥꾼들의 표지기와 함께 독도법 표지기도 걸려있다.
호남고속도로로 내려서는 철 계단 상단에서 철 계단으로 내려서지 않고 우측 선명한 등로를 따라,
철계단 상단부에서 내려다본 호남고속도로 모습.
고속도로 절개지 관리용 길로 내려서서 우측으로 진행하다가 끝 지점에서 수로를 따라 내려서다가,
이내 좌측 고속도로를 건너는 생태통로 방향으로 진행하여,
생태통로로 들어서서 호남고속도로를 건넌다.
우측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 방향.
생태통로로 호남고속도로를 건너면 희미한 등로가 숲으로 이어져 있고,
좌측으로 휘어져 오르는 희미한 등로를 따르면 '고압 송유관 매설지역' 표지판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오름길로 진행하게 되고,
커다란 구덩이가 있는 190봉쯤에서,
간식을 먹으며 쉼을 한다.
15분여의 긴 쉼을 뒤로하고 금남기맥 잇기에 나서면,
독도법 표지판이 걸려있는 Y자 갈림길에서 표지기가 많이 달린 좌측 길이 기맥길인데,
우측의 넓은 등로로 들어서서 여산면 원수리의 원수저수지 방향 능선으로 알바 길에 들어선다.
급하게 고도를 낮추는데 산행기에서는 보지 못한 가족묘가 나오기에 지도를 살펴보니 알바다.
갔던 길을 되돌아 Y자 갈림길로 돌아나와 좌측 표지기가 걸진 기맥길로 들어선다.
좌측에 저렇게 많은 표지기가 걸려있는데 왜 보지 못하고 알바를 하였는지..ㅉㅉ
잠시 거친 숲길을 따르자 가야 할 양동재와 용화산 방향 시야가 트이는 벌목지대로 나서게 되고,
잠시 능선을 따르자 2차선의 799번 지방도가 지나는 양동재 절개지에 서게 된다.
<양동재>
전북 익산시 왕궁면과 여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799번 지방도가 지나고 좌측에 있는 양동마을 주민들이 이용하는 버스정류장과 마을 표지석이 있다.
양동재 들머리는 좌측 양동마을 표석 방향으로 조금 이동하여 건너편 숲으로 이어진다.
양동재 들머리로 들어서서,
거친 숲길을 잠시 따르면,
천주교회 공원묘원이 나오는데,
우측 능선으로 오르면 길이 없고, 기맥길을 좌측으로 공원묘원을 가로질러 건너편 숲으로 이어진다.
공원묘지에서 다시 숲길을 따르는데 이번에는 좌측으로 가족묘지가 있는 곳이 나오고,
방화선을 내었다가 방치되어 가시나무와 산초나무 등의 잡목이 빼곡한 등로를 따르다가,
멧돼지의 놀이터쯤으로 보이는 곳을 지나 오르면,
돌탑이 있는 능선 봉우리에 올라 잠시 쉼을 하며 점점 더워지는 열기를 식힌다.
10여분간의 달콤한 쉼을 뒤로하고 기맥길을 따르면,
다시 벌목지대가 나오며 뒤쪽으로 천호산에서 이어온 기맥 능선이 가늠되고,
좌측으로는 왕궁저수지 저편으로 완주군의 명산인 서방산쯤이 희미하다.
돌아본 천호산 방향.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따르면,
소나무 둥치에 181.8봉 표지기가 걸려있고,
181.8봉 표지기.
이내 수많은 표지기들이 우측 숲길로 안내를 한다.
잠시 숲길을 따르자 좌측 아래에서 올라오는 수레길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들어서면,
No. 36 송전탑 아래로 지나게 되고,
능선 구분이 애매한 희미한 숲길을 따르면,
가야 할 용화산과 쑥고개(구1번 국도)가 내려다 보이는 1번국도 절개지 위에 서게 된다.
1번국도 통과를 위해 절개지를 우측으로 내려서다가 좌측 생태통로 방향으로 들어서서,
1번 국도를 넘는 생태통로를 지나서,
대추나무밭을 통과하여 지나면,
쑥고개를 지나는 구 1번 국도가 나오고, 우측으로 50여 미터 이동하면 좌측으로 희미한 들머리가 있다,
<쑥고개>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와 왕궁면 용화리를 잇는 고개로, 국도 1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은 고려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견훤의 아들 신검과 문무관졸에게 항복을 받았다는 탄현(炭峴, 숫고개)이라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쑥고개라 부르게 된 연유는 옛날 산적이 많이 출몰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항상 수비병을 배치한 곳이라 하여 그리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쑥고개라는 명칭은 숯을 굽던 가마가 있던 숯고개에서 변했다는 설이 가장 많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깊은 골짜기에 쑥 들어가 있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숯을 굽던 곳이나 계곡 깊이 쑥 들어갔다는 이야기 모두 비슷한 내용 아닐까 싶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일 것이다.
은행나무 뒤로 이어지는 금남기맥 등로로 들어서서,
잡목의 태클이 심한 벌목지대를 힘들게 통과하여 능선으로 오르면 호적한 숲길이 이어지고,
편백나무가 식재된 153.4봉에 도착하니 둘레길 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정표에는 '소세양 신도비 길' 표시와 함께 '서동공원(시작점) 3.9km,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도착점) 3.1km'가 기재되어 있다.
<용화산 길>
금마 서동공원(금마면 금마저수지 부근)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로 연결되는 총 7km의 둘레길을 ‘용화산 길’이라 하는데, ‘용화산 길’ 중 첫 번째 둘레길인 ‘용화 세상 여는 길’을 지나면, 용화제를 시작점으로 편백나무 쉼터까지 1.9km(도보 40분)의 ‘소세양 신도비 길’과 편백나무 쉼터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까지 3.1km(도보 1시간)의 ‘장 보러 가는 길’이 이어지는데, 길이 대부분 포장되어 편편하고 경관이 아름다우며 역사 고도 익산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서 여유 있게 역사를 되뇌며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가람 이병기 선생>
가람 이병기 선생은 "바람이 소슬도하여 뜰 앞에 나섰 더니 ~"라는 "별"을 노래한 익산시 여산면 출신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조시인이자 국문학 자이다. 1891년 여산면 원수리 진동마을에서 태어난 가람 이병기 선생은 국문학자이며 시조시인으로 한국 현대시조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가람 선생은 1921년에는 권덕규, 임경재, 최두선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활약했고, 1922년부터 동광,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원, 1926년부터 시조에 대한 논문과 시조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가람 선생은 전북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56년 정년퇴임한 후 이듬해 뇌일혈로 쓰러져 앓다가 1968년 여산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병기 선생 생가(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는 지방기념물 제6호로 초가 네 채가 있다. 조선 말기 선비 집안의 배치를 따라, 안방과 사랑채 등을 만들었으며, 관리는 가람의 자부 윤씨 부인이 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술복, 시복, 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상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 별 -
바람이 서슬도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별은 뉘별이며 내별 또한 어느게오
잠자코 호올로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소세양과 황진이>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그는 전라도관찰사와 형조판서· 우찬성· 좌찬성· 홍문관 대제학까지 두루 지낸 뒤 익산으로 은퇴하였는데, 율시 등 각종 시문에 능한 문장가이자 송설체(松雪體)의 대가였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 양관대제학(梁冠大提學)에 올랐던 당대의 걸출한 유학자인 그에게도 강직하고 호기로운 면모도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 스스로 “여색에 빠지는 것은 사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자부하면서, 당시 송도의 명월(明月)이라고 소문났던 기녀 황진이(黃眞伊)와 한 달 간만 함께 동침하고, 단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라고 다짐했다. 즉, 자신의 친구 앞에서 명월이 뜨는 날 명월 황진이를 만나 한 달 뒤 그다음 명월이 뜨는 밤에 헤어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소세양이 황진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겉봉을 뜯어본 황진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榴'[석류나무 류] 한 글자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진이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장을 써서 주었는데, '漁'[고기 잡을 어] 자 한자만 적되 소세양이 보낸 글자 크기보다 더 크게 적어 보냈다고 한다. 그 뜻은 ‘류’를 독음하여 한자로 읽으면 ‘석유나무유(碩儒那無遊)’로, ‘큰 선비인 내가 왔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이고, ‘어’는 ‘고기자불어(高妓自不語)’로 '품위가 높은 기생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란 뜻으로, 네 유혹에 함부로 응대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아름다운 미모에, 가무에, 뛰어난 학문까지 겸비한 황진이에게 소세양은 온갖 정성을 다한 결과 한 달간의 계약 동거가 이뤄졌다고 한다. 한 달을 함께 보낸 뒤 이별 자리에서, 황진이가 소세양에게 시를 읊었다.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이 다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만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높은 누각 하늘과는 한 자 사이 맞닿았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사람들은 취하는데 술은 천 잔이로다
流水和琴冷(류수화금냉)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어우러져 서늘하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 소리에 향기를 풍겨오네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그리운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이어지리
소세양이 이 시를 받아 읽고는, “내 맹세한 대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하고는, 다시 황진이 집에 며칠을 더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황진이는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소세양에게 짧은 인연을 잊지 못해 그리는 마음을 글로 적어서 몸종 동선이를 시켜 한양에 있는 소세양에게 전했다는 시가 바로 '夜思何(야사하)'다. 그러나 이 시는 1996년경 조선일보 연재소설 ‘청사 홍사(이재운 작가)’의 황진이 편에 등장하는 시로써, 양인자 작사,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를 작사가 양인자 씨의 허락 하에 한시로 번역한 후 이를 황진이가 쓴 시인 양 픽션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참고로 양인자 작사의 ‘알고 싶어요’ 가사는 다음과 같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통나무 의자에 앉아 익숙한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란 노래나 들으며 쉬었으면 좋으련만..
쉼터에서 좌틀하여 대나무숲길 방향 능선으로 들어서니,
우측으로 여산면 원수리의 원수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오고,
싱그러운 숲길을 따라 172봉쯤을 지나면,
벌목지대로 들어서며 좌측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의 도순저수지 방향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살짝 당겨본 도순저수지와 국도 1호선 모습.
앞쪽으로 가야 할 용화산쯤이 보이고,
잠시만이라도 편히 걸어온 '소세양 신도비 길'과 헤어지는 갈림길 안부가 나오며,
좌틀하여 이어지는 둘레길과 헤어져 직진의 오름길을 따라 용화산으로 향한다.
갈림길 이정표.
용화산을 향한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되고,
좌측으로 다시 벌목된 능선길이 나오며,
좌측 용화리 도순저수지 방향이 다시 한번 시원스레 조망된다.
다시 숲길로 들어 시원하게 불어주는 황사바람을 맞으며 싱그러운 용화산 오름길을 따르는데,
좌측 금마서동공원에서 올라오는 정규 등산로에 접속하여 우측 용화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이내 용화산(龍華山, 342.4m) 정상에 도착한다.
개념도에는 이곳을 용화산 남봉으로 표시하고 있고, 약간 더 진행하면 나오는 321.2m 봉을 용화산으로 표시하고 있으나, 서로 구분하기 위해 고도가 약간 더 높은 이곳을 용화산(龍華山, 342.4m)이라 하고, 321.3m 봉을 용화산 북봉으로 표기하는 게 좋아 보인다.
<용화산(龍華山, 342.4m)>
전북 익산시 여산면, 왕궁면, 금마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익산시지'의 용화산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까지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합하여 용화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옥녀봉, 선인봉(仙人), 노승봉(老僧), 성태봉(城胎)의 산줄기만 용화산이라 한다. 옥녀봉은 320m인데 성인 30여명 정도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자연석굴이 있다. 북쪽 후미에 있는 성태봉에는 둘레가 약 500보 정도의 석성이 남아 있다. 또 선인봉 동쪽 기슭에는 도신사지(道新寺阯)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산에는 동산사 터, 상원사 터 등 몇개의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서쪽 기슭에는 일산의 명승 중의 하나인 황각동계곡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산군 산천조에는 '군의 남쪽 12리에 군입산(軍入山)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징벌할 때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산관아에서 남쪽으로 12리쯤에 있는 산은 천호산에서 용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탄현(炭峴, 숫고개)에 해당한다. 이 탄현은 '고려사'의 추 백제군 정벌기에 '우리 군대는 황산군에 이르러 탄령을 넘어 마성(馬城)에 주둔하였는데, 신검과 그 동생 그리고 문무관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는 기사에서 보이는 '황산군의 탄현'을 가리키는 것이며, 태조 왕건의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는 마성은 용화산의 석성으로 보인다. 지금도 용화산의 석성 아래에는 견훤의 말터라고 하는 마산(馬山) 진터가 있다.
용화산의 동굴은 원수리 샘골, 동쪽 기슭의 중턱에 20미터쯤 되는 암벽 중간지점에 있는 30평 정도의 자연석굴이다. 굴 내부의 높이는 2m, 깊이는 10m이다. 작은 샘이 있는데 약수로 이용된다. 혹자는 현재의 위치와는 반대편이 용화산 쪽 기슭에 잇는 상원사 마을 앞의 작은 동굴과 위로 통하는 굴이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로 이 굴에서 불을 때면 그 연기가 저쪽에서 나온다는 것을 들고 있다. 굴의 높이는 10m쯤 되는 암벽에 있다. 이곳에 기생하는 소나무 뿌리를 이용하여 굴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통로를 만들었다.
<용화(龍華)>
대승불교는 석가모니불만이 아닌 다른 많은 부처님이 필요에 의해 발생한다. 석가모니불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가 있듯이 부처도 그러한 과거라든지 미래를 관장하는 부처의 발현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부처 중에 미래에 나타날 부처로 미륵불이 탄생되었다. 석존 사후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다. 근데 미륵은 석가 생존시 동 시기의 수행자였는데 석가보다 먼저 열반하여 천상계 중의 하나인 도솔천에 올라 천인들에게 설법 중에 있다. 미륵이 내려오면 천하가 태평해지는데 이 세계를 용화장세계라 한다.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것에 비해 미륵은 용화수 아래서 설법한다 하여 그렇게 불려진다. 이 세 번의 설법을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익산 미륵사지가 삼탑삼금당의 의미도 이러한 용화삼회의 법당을 의미한다. 절 뒷산이 용화산이고 그 뒷산이 미륵산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심한 황사에도 홀로 산행을 하는 아가씨에게 부탁하여 용화산 정상 인증을 남긴다.
용화산 정상 이정표의 아리랑고개가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다듬재로 1시간도 안 되는 거리라,
정상 벤치에서 배낭털이를 하며 편안한 쉼을 한다.
용화산 정상을 뒤로하고 다듬재를 향해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좌측이 사격장으로 도비탄과 불발탄 위험지역이므로 우회하라는 경고문이 세워져 있고,
등로는 능선 우측 사면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더니,
333m 봉우리를 우회한 암릉이 나오며 서쪽 미륵산 방향 조망이 트이다.
다듬재 건너편의 다음 구간에 가게 될 미륵산 방향.
지도상 용화산으로 표시된 용화산 북봉(좌, 321.3m)과 용리산 방향.
조망이 멋진 암릉을 내려서서 잠시 진행하니 용화산 북봉(321m) 방향은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고,
산객들은 우회길을 이용하라는 경고문이 세워져 있다.
용화산 북봉쯤에서 바라본 다듬재와 미륵산 방향.
북쪽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소재 채석장의 흉물스런 모습이 황사에도 불구하고 드러나 보인다.
용화산 북봉을 우회하여 내려서니 용리산 방향 갈림길이 나오는데, 다듬재 방향의 기맥길은 좌틀하여 내려서야 하고, 우리는 직진의 능선 내림길을 따라 용리산을 다녀오기로 한다.
좌측 다듬재 방향 갈림길 삼거리를 지나고,
갈림길 삼거리 이정표.
용리산을 갔다가 이곳으로 되돌아와 아리랑고개(다듬재)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편평한 능선길을 따라 돌탑을 지나고,
선인봉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의 용리산 방향으로 들어서면,
등로 옆 소나무에 '금강기맥 매봉재(275m)' 표지판이 걸려있고,
숲 속에 삼각점만 있는 용리산 정상에 도착한다.
금남기맥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냥 호기심에 들른 용리산 정상 인증.
용리산을 뒤로하고 다시 선인봉 갈림길을 지나,
세 개의 돌탑도 지나고,
아리랑고개 방향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아리랑 고개 방향으로 진행하면,
용리산 북봉 아래 갈림길에서 이어오는 금남기맥에 접속하여 다듬재(아리랑고개)로 향한다.
좌측 철조망에 접근금지 경고판이 걸려있는 봉우리를 지나면,
앞쪽 미륵산 방향 조망이 트이는 암릉길을 지나게 되는데,
좌측 익산(이리) 방향으로 금마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황사로 흐려진 익산시 방향>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노령산맥의 지맥인 천호산과 미륵산이 동부에 아름다운 산세를 이루고 있다. 서북부에 함라산 줄기가 이어져 남서로 향하는 구릉과 대.소하천이 비옥한 평원을 이룬다.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 논산시와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다. 호남선이 남북으로 중앙을 관통하고 익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전라선과 군산선(장항선)이 동서로 통과하며. 호남고속도로는 동부를 지나 금마 진입로에 있고, 1번 국도와 23번 국도 및 10여개의 국도, 지방도 등 전국 각지를 이을 수 있는 편리한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다. 익산은 서해와 옥구, 김제평야를 어머님 품 안으로 껴안고 있는 형상이다. 배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류가 유통되어야 하는것과 같이 일맥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전라북도 익산은 전국에서 수도를 가장 많이 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문명이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축으로 우리나라에서 네 번이나 수도였다.
첫 번째 수도는 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8년경에 남하하여 금마에 수도를 세웠고, 두 번째는 마한의 수도로써 금마지역은 마한 54개국을 총괄하던 도읍지였다. 세 번째는 보덕국의 수도로써 고구려 왕손 안승이 세운 나라이다. 네 번째는 백제의 무왕이 익산 왕궁으로 천도한 것으로 백제의 유일한 왕궁터가 남아 있다.
좌측이 사격장이라는 경고문과 철조망이 있는 호젓한 숲길을 따르다가,
좌측으로 서동공원 방향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서고,
서동공원은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금마저수지 옆에 있는 공원.
"정찰 감시" 표지판이 있는 갈림길에서 우틀하여 편안한 숲길을 따라 내려선다.
그렇게 산행 막바지 지친 발걸음이 즐거울 수 있는 등로를 따르면,
2차선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다듬재(아리랑고개)에 도착한다.
<다듬재/아리랑고개>
전북 익산시 금마면과 낭산면을 잇는 2차선 포장도로인 15번 군도가 지나는 고개다. 일명 아리랑고개라고도 하며 다듬잇돌이 많이 나오는 고개라 하여 다듬재라 한다.
다듬재 미륵산 방향 들머리 전경.
다듬재 미륵산 방향 들머리.
'돼지 출몰지역' 표지판이 있는 다듬재 날머리.
황사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차로 귀갓길에 오른다.
원래는 인근의 닭볶음탕 집에서 뒷풀이를 예정하였으나, 식사를 하면서 쉬게 되면 운전 중 졸릴 수 있다는 총무님의 강력한 주장으로 뒤풀이는 과천의 삼겹살 집에서 가졌다. 운전을 하면서 자세히 생각해 보니 정말 피곤한 상태임에도 조름은 훨씬 감소한 느낌이다. 과격한 운동으로 전신이 긴장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졸리지가 않지만, 긴장이 완화되면 오히려 졸음이 쏟아진다는 총무님의 주장이 확실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는 하다. 그래도 세상이 어디 합리적으로만 설명이 되겠는가. 산행에서 현지 맛집 탐방도 중요한 일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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