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삼성산 (서울시, 안양시)
산 행 일 : 2022. 03. 09.(수, 20대 대선 투표일)
산행코스 : 독산고교 ~ 영남 초교 ~ 금천정 ~ 산울림다리 ~ 목골산 ~ 서낭당고개 ~ 산복터널 ~ 헬기장 ~ 호압사 ~ 돌고래 바위 ~ 민주동산 ~ 제1야영장 ~ 장군봉 ~ 장군봉능선 ~ 깔딱고개 ~ 446봉 ~ 삼성산 중계소 ~삼성산 정상석 ~ 삼성산 국기봉 ~ 상불암 ~ 천인암능선 ~ 안양유원지 ~ 임곡동갈림길 ~ 안양항공무선표지소 ~ 망해암 ~ 삼각점 ~ 대림대사거리 (13.7km, 6시간 반 소요)
산행참석 : 15백두.
<산행지도>
20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 휴일이라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고 근교 산행이나 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카페에 삼성산 남북종주산행 계획을 올렸다. 삼성산이야 워낙 자주 가는 근교산이라 별다른 호기심을 끌만한 것이 없을 터이니 그냥 코로나로 갇혀 지내다가 찌뿌듯한 몸을 풀려 오는 몇몇 분이 함께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런데 창병씨가 카톡에 공지해서 그랫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기산행 때와 비슷한 숫자의 회원들이 참가 의사를 밝혀왔다.
말 많은 사전투표에 한표를 던지고는 9시에 1호선 전철역에 모여 5616번 버스를 타고 20여 분만에 산행 들머리인 독산고교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한다.
산행 들머리인 독산고교 버스정류장에서 산행 준비를 하며 잠시 기다리니,
2호선 신림역에 모여서 오는 분들이 합류하여 간단히 그간의 무사하심을 확인하고는,
'별초롱 어린이집' 정문으로 들어서며 이름도 거창한 '삼상산 남북종주' 산행에 나선다.
양쪽으로 철망울타리가 있는 능선 통로를 따르다가,
이내 '미성동 둘레길' 안내판에 세워진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길로 들어서고,
황토흙 능선길을 따라 팔각정자 쉼터를 지나면,
이내 '독산자연공원'의 삼각점이 있는 작은 봉우리에 도착하여 산행 복장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진다.
<독산(禿山)>
금천구 시흥동과 독산동을 품은 '독산'의 '대머리 독(禿)' 자는 흔히 쓰이는 글자는 아니다. 옛날에 수목이 듬성듬성 나 있는 민둥산이라 하여 '대머리산'이라는 의미로 '독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옛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예전 독산2동과 경계되는 시흥4동 구로부녀복지회관 부근의 뒷산이 바로 독산이다. 독산동에 살았던 세종 때의 문신 강희(姜曦)는 호를 독산(禿山)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현 산천조 (山川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어느 사람이 강희에게,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를 독산(禿山)이라고 붙였는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강희가 대답하기를, “내 집 뒤에 산이 있는데 벌거숭이 산이다. 그러므로 독산(禿山)이라고 한다. 원래 나무가 있었는데 한성 교외에 있는 까닭에 도끼로 찍히고 소·염소 등에게 먹히어 벌거숭이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조선 초기부터 독산(禿山)이라는 명칭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하는 백두들.
산행 시작 10여 분 만에 무려 10여분의 쉼을 즐기고는,
다시 등로로 들어서서 정심초교 울타리가 앞을 막아서는 갈림길에서 좌틀하면,
등로는 정심초교 울타리를 따라 이어지고,
안부 갈림길을 지나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금천정'이라는 팔각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팔각정인 금천정(衿川亭)에 올라 보니 바로 아래로 넓은 마당과 각종 체육시설, 운동기구가 설치된 금천체육공원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는 금천구와 광명의 아파트와 광명의 구름산이 가늠된다.
독산자락길 안내판 옆 등로를 따라 우측 독산동과 좌측 신림동을 잇는 도로를 건너는 산울림다리를 지나,
옆으로 무장애데크길이 함께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목골산 정상 갈림길에서 호암산은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좌측 목골산 정상 방향으로 들어서면,
이내 작은 정상 표시목이 세워져 있는 목골산 정상에 도착한다.
<목골산(木骨山, 163m)>
서울시 관악구 미성동, 난곡동, 난항동과 금천구 독산동, 시흥동에 걸쳐 있는 있는 산이다. 남쪽의 호암산에서 뻗어나온 비교적 야트막한 산으로 호암산부터가 관악산 줄기에 있다. 지도에도 목골산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목골산의 지명유래는 알 수가 없으나 목골(木骨)이 '나무로 된 건축물의 뼈대 즉, 건축물의 중심 나무'를 뜻하므로 목골산은 좋은 나무(건축물의 뼈대)가 많이 있는 곳이라 해서 목골산(木骨山)이라 부르는 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정상의 둥근 공터에 가장자리 나무 아래 삼각점(표시 없음)이 자리잡고 있으며, 주위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한편, 구로부녀복지회관 뒷산이 독산이라고 하였는 바, 구로부녀복지회관은 현재 남부여성발전센터로 변경되었으므로 독산이란 지도상 목골산으로 표시된 곳을 말한다. 목골산 정상은 주위의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트여 있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호암산이 보인다. 목골산은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항공기들의 항로가 상공을 지난다.
목골산에는 정상을 지나는 능선길이 있는데 미성동둘레길이다. 목몰산에는 골로 내려가는 많은 길이 있다. 동쪽으로는 난향동, 난곡동 쪽의 서울정문학교, 난향공원, 난곡초등학교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서쪽으로는 시흥동의 산기슭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이, 남쪽으로는 호압사 방향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능선길에서 선우공원으로 내려가는 길도 여럿 있다. 선우공원과 금천체육공원 사이가 관악구의 금천구의 경계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산을 잇는 굽은 다리가 도로 위에 놓여 있다. '산울림다리'라 이름 붙은 이 다리를 통해 독산자연공원에서 목골산을 지나 호암산으로 길이 연결된다.
목골산 정상에서 본 호암산 방향.
코로나19로 자주 뵙지 못했던 회원님들 모습.
목골산 정상에서의 달콤한 쉼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좌측 난향동과 우측 시흥동을 경계하는 능선을 따르게 되는데,
<난향동>
조선 전기 정승을 지낸 강사상의 손자인 조선시대 명장 강홍립 장군이 은거하며 난초를 길러 난곡이라 불렸으며, 난초 향기가 그윽하다 하여 2008년 9월 1일 지금의 난향동이라 칭하였다. 또한, 강사상의 아들인 강서의 호도 난곡이다.
신작로 같은 널찍한 등로는 능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더니,
우측 시흥동 삼성시민공원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널찍한 능선 등로는 산복터널 상부쯤도 지나며 완만하게 호암산 방향으로 이어진다.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호암산이 꾀나 우람해 보이고,
좌측 신림동과 우측 시흥동을 잇는 안부 갈림길을 지나 오르면,
우측에 호압사가 자리한 널찍한 공터에 도착하여 또 잠시의 쉼을 한다.
우측 호압사 전경.
<호암산(虎巖山) 호압사(虎壓寺)>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 2동 호암산(虎巖山)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의 말사(末寺)이다.(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봉은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사찰 이름 '호압(虎壓)'은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하는데 아래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제10권 경기-금천현(衿川縣)조에 "삼성산(三聖山)은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호암산(虎巖山)은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범 모양과 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이름이 되었다. 윤자(尹慈)의 설(說)에,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다.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虎巖)이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보고 바위 북쪽 모퉁이에 절을 세워서 호갑(虎岬)이라 하였다. 거기에서 북쪽으로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 하고, 또 북쪽 10리 지점에 사자암(獅子菴)이 있다. 모두 범이 가는 듯한 산세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하략)" 하였다.
산의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듯하므로 산의 북쪽에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고, 다리도 궁교(弓橋, 활 다리)라 하였으며, 암자도 사자암(獅子菴)이라 하여 산을 억누르려 했단 것이다. 궁교는 활로 호랑이를 쏘려는 것이고, 사자암은 사자의 기세로 호랑이가 설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흔한 비보풍수적인 전설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좀 더 극적인 다른 전설도 있다.
조선 태조 3년(1394) 무렵 경복궁을 짓고자 공사를 하는데 진척이 되지 않았다. 태조가 대목(大木)을 불러 꾸짖으니 대목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낮에 공사를 진행하면 밤에 호랑이와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 나타나 세워놓은 것들을 전부 부숴버립니다."
태조가 무장을 갖추고 병사들과 함께 밤을 기다리니, 정말로 두 눈에 불빛이 형형하고 모습이 호랑이 비슷한 괴물이 나타났다. 군사들이 활을 쏘고 창칼을 휘둘렀으나 괴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사현장을 망가트린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이성계가 숙소로 돌아와 이를 어떡하나 고민하는데 홀연히 노인이 나타나더니 말하였다.
"한양은 더없이 좋은 도읍지로다."
노인이 산자락을 가리켰다. 태조는 그제서야 그 산이 한양을 노려보는 범의 형상임을 깨달았다. 태조가 저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으니, 노인은 범이란 꼬리를 밟으면 꼼짝하지 못하니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알려주고 사라졌다. 태조가 들은 대로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호압사를 세우니 비로소 궁궐을 무사히 지을 수 있었다.
위 이야기들은 물론 그저 전설일 뿐이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승려 안진호(安震湖)가 쓴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따르면, 조선 태종 7년(1407)에 창건되었으며, 태종이 호압사(虎壓寺)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강력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과연 왕명으로 절을 창건하고 절에 이름까지 내려주었을지 의문이 남는다. 또한 ≪봉은본말사지≫도 20세기의 기록이므로 신빙성 있는 자료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16세기 중종 때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왕실이 호압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으므로, 태조나 태종이 창건 또는 창건에 관여했다는 전설은 그 후에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전설을 제외하면 창건 역사는 이처럼 불확실하며 그 이후의 역사도 불명확하다. 옛 기록에 단지 호압사라는 절이 있다는 정도로만 언급될 뿐이다. 헌종 7년(1841)에 건물이 너무나 퇴락하여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35년에 주지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지어 현대에 이른다. 그러나 이렇게 중창하고 일제강점기에 약사전을 지었는데도 규모가 작다. 전설만 듣고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절인 줄 알았다면 실제로 보고 그 아담함에 놀랄 것이다. 호암산-삼성산 일대로 등산하는 사람들이 호압사를 들머리/날머리로 삼아 드나들기 때문에 이쪽 등산객들에게도 친근하다.
꾀나 우람해 보이는 가야 할 호암산 모습.
호압사 옆 공터를 뒤로하고 호암산을 향하면 관악산둘레길이 지나는 사거리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호암산을 향해 제법 가파른 나무계단 오름길을 지나,
더욱 가파른 데크목계단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부에 벌써 도착하였나 싶었는데,
짧은 데크목계단길을 한번 더 올라야 하고,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리지만 조망이 트인 데크목계단을 올라서면,
호암산 정상부 암반지대로 들어서게 되고,
조망이 트인 암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쉼을 하기로 한다.
남서쪽 한우물이 있는 석수역 방향 능선 조망.
서쪽 광명시 방향.
지나온 북서쪽 목골산 방향 능선 조망.
내려다 보이는 호압사 전경.
급할 게 없는 산행이라 여유로운 쉼을 하고는 호암산 정상이 어디인지 찾아 나서면,
널찍한 헬기장과 제1야영장으로 표시되는 공터를 연이어 지나게 되고,
평탄한 등로를 따라 민주동산 국기봉이라고도 표시되는 호암산 정상에 도착하여 인증을 남긴다.
<호암산(虎巖山, 393m)>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관악산 서쪽 끝 봉우리로, 삼성산에서 북쪽 방향으로 약 2km, 30분 거리에 있는 장군봉과 그 서쪽에 347m의 봉우리가 있다. 이 봉우리의 한 바위 형태가 호랑이 모양이라 하여 호암산이라 칭하였다. 조선 건국 당시 경복궁 건설 일화와 관련하여 호랑이 모습의 괴물이 궁궐 건설을 방해하여 밤에만 나타나 건물을 무너뜨리자, 그 남쪽의 산에 있는 호랑이를 제압하고자 시흥에 있던 호암사를 산 위로 옮겨 호압사(虎壓寺)라 이름을 고치고, 산 정상에 방화(防火)의 상징인 해태를 세우고 한우물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이 한우물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앞두고 선거이(宣居怡) 부대가 진을 치고 군용음료수로 사용하였으며, 그 외곽에는 신라시대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산은 조선시대 금주(금천)의 주산이 되어 금주산 또는 금지산(금천의 주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울시-
관악산 방향 조망.
호암산 국기봉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나와,
완만한 등로를 잠시 이어가면,
호암산 장군봉 정상을 지나게 되고,
장군봉 정상의 장군이 아닌 새를 닮은 바위.
수많은 샛길이 얽혀있는 사면을 내려서면,
좌측 삼성산에서 우측 호압사와 석수역 방향으로 이어지는 등로에 접속하여 좌측 삼성산으로 진행한다.
장군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깔딱고개 건너편으로 삼성산 국기봉이 조망되더니,
안부 갈림길인 깔딱고개를 지나 오름길로 들어서게 되고,
우측 경인교대 방향.
이내 또 좌측 서울대입구 방향 갈림길을 지나면,
삼성산 깃대봉 갈림길로 오르는 데크목 계단길이 이어지고,
돌아본 호암산 방향.
깃대봉 능선 갈림길에 올라서 좌측의 깃대봉 왕복은 생략하고 바로 직진의 삼성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측 삼막사를 지나 삼성산 정상을 차지한 KT중계소로 이어진 포장 임도에 접속한다.
정상으로 이어진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무너미고개 방향 갈림길을 지나 오르면,
삼성산 정상을 차지한 KT중계소 정문 직전에서 우측 철계단을 올라 컨테이너건물 지붕 위로 오르는데,
편평한 컨테이너건물 지붕에서 주변 조망을 즐기며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컨데이너건물 지붕 위에서 돌아본 관악산 방향.
<관악산(冠岳山, 632.2m)>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이 관악산이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는 ‘관악'으로 많이 나온다. 악(岳) 자체가 산(山)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 뒤에 다시 ‘산'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운악·북악·치악 등이 모두 그와 같은 예들이다. 이렇듯 관악의 산이름은 그 형상이 마치 관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처음의 산이름은 주위 산세에서 으뜸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관악산은 옛날부터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였다. 빼어난 수십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울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한다.
서울대 방향.
지나온 호암산 방향.
옛날 이 컨테이너 지붕은 개방되어 있었기에 가끔 자전거를 타고 이곳에 올라 저녁노을을 조망하며 시간을 보내곤 하던 곳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출입구에 문이 생기고 자물쇠가 달려서 출입이 불가하게 된 듯하다. 코로나19로 최근에 와보지 않아서 출입이 불가한 사실을 모르고 왔다가 문이 잠겨 있어서 당황스러운 상황이 초래되었는데 다행히 모든 이들이 바뀐 상황에 능숙하게 적응을 해 줘서 난처한 상황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오손도손 둘러앉은 백두들.
점심식사를 마치고 관악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닫힌 출입문을 넘거나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컨테이너 지붕을 내려서고,
KT통신소를 우측으로 우회하면 몇 해 전까지도 없었던 삼성산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삼성산(481m)>
삼성산은 관악구 신림동과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의 경계를 이루며, 그 북쪽으로 뻗은 표고 412m의 호암산 장군봉과 더불어 관악산의 광역권에 포함된다. 삼성산은 신라의 고승인 원효·의상·윤필 등 세 대사가 산의 중턱 삼막사 부근에 초막을 짓고 수도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또 고려말에 지공·나옹·무학 등 세 고승이 이 산에서 수도하였다 하여 산 이름이 삼성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중수하여 서산·사명대사 등이 수도한 도량으로 유명하며, 삼막 중에서 일막과 이막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 삼막사만 남았다고 한다. 또 삼성산에서 북쪽 방향으로 약 2km, 30분 거리에 있는 장군봉과 그 서쪽에 347m의 봉우리가 있다. 이 봉우리의 한 바위 형태가 호랑이 모양이라 하여 호암산이라 칭하였다. 조선 건국 당시 경복궁 건설 일화와 관련하여 호랑이 모습의 괴물이 궁궐 건설을 방해하여 밤에만 나타나 건물을 무너뜨리자, 그 남쪽의 산에 있는 호랑이를 제압하고자 시흥에 있던 호암사를 산 위로 옮겨 호압사(虎壓寺)라 이름을 고치고, 산 정상에 방화(防火)의 상징인 해태를 세우고 한우물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이 한우물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앞두고 선거이(宣居怡) 부대가 진을 치고 군용음료수로 사용하였으며, 그 외곽에는 신라시대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산은 조선시대 금주(금천)의 주산이 되어 금주산 또는 금지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성산 정상 인증.
산객들이 몰려있는 삼성산 정상석을 뒤로하고 국기봉 방향의 암릉을 따르면,
좌측 관악산 주능선 조망.
가야 할 삼성산 천인암능선 방향.
기암들이 즐비한 암릉을 지나게 되고,
잠시 숲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좌측 망월암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옛날에는 삼성산 정상으로 간주되던 삼성산 국기봉 조망.
우측 광명시 방향.
우.후방 호암산 방향.
이내 삼성산 국기봉으로 오르는 암릉이 앞을 막아서지만 좌회하여 상불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상불암 옆 갈림길에 도착하여 국기봉을 오르지 않고 바로 천인암능선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좌측 관악산 방향.
국기봉을 올랐던 분들과 상불암을 둘러본 분들이 모두 모여 천인암능선으로 진행하면,
좌측 천인암 방향 갈림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게 되고,
널찍한 반석이 광장처럼 자리한 능선길을 지나게 된다.
우전방 수리산 방향.
돌아본 삼성산 국기봉 방향.
바위 암릉이 많은 천인암능선을 따르면,
좌측으로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의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고,
돌아본 삼성산 방향.
좌.후방 관악산 주능선 방향.
돌무더기가 있는 갈림길이 나오면 우측 안양예술공원 방향 능선으로 진행해야 하고,
잠시 능선길을 따르면 가야 할 비봉산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 능선길을 지나게 된다.
평촌 방향 조망.
안양예술공원이 자리한 계곡과 건너편의 비봉산 조망.
우측 안양예술공원 방향.
점차 가팔라지는 암릉 내림길을 따르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암릉을 우회하라는 경고판을 지나게 되고,
다시 다소간 완만해진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이내 전망데크가 있는 갈림길 쉼터에 도착하게 된다.
돌아본 천인암능선.
갈림길 쉼터를 뒤로하고 잠시 내려서면 서울대수목원 울타리가 나오는데 우측 울타리를 따라 내려서면,
작은 지계곡을 건너는 출렁다리를 건너게 되고,
잠시 황토숲길을 따르면,
안양예술공원으로 내려서게 된다.
<안양예술공원(安養藝術公園)>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공원으로 안양유원지의 새로운 이름이다. 안양역 북동쪽 2km 지점에 있으며, 관악산(冠岳山, 629m)과 삼성산(三聖山, 461m)의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천연수(안양천의 지류)를 이용하여 1950년대부터 이미 수영장이 개설되었던 곳이다. 1960년대 이미 수영장을 비롯하여 각종 오락시설을 갖추고, 주변에서 안양 명물의 하나인 포도나 딸기를 대량으로 공급받으면서 이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그러나 행랑객들의 증가와 무질서하게 형성된 음식점들로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열악한 시설과 낙후된 환경으로 인해 명맥만 유지해 왔다.
그러다가 기반시설들을 정비하면서 안양시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인공폭포, 야외무대, 전시관, 광장, 산책로, 조명시설 등을 설치하였다. 또한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전망대, 1평정보센터, 하늘다락방, 물고기눈물분수 등 유원지 곳곳에 국내외 유명 작가의 예술작품 52점을 설치하였다.
안양예술공원 회차로를 가로질러,
계곡을 건너는 돌다리를 건너면,
비봉산과 항공무선표시국 봉우리 사이의 안부인 임곡동갈림길로 오르는 들머리가 나온다.
야자메트까지 깔린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오르면,
작은 너덜지대도 지나게 되고,
안양유원지계곡에서 15분여 만에 비봉산과 항공무선표시국 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도착한다.
임곡동갈림길 이정표.
갈림길 안부에서 우틀하여 항공무선표시국 방향 오름길로 들어서서,
잠시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오르면,
삼성산과 비봉산 방향 조망이 트인 널찍한 전망바위에 도착하여 잠시 쉼을 한다.
돌아본 비봉산 방향.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대림대사거리에서 항공무선표시국으로 오르는 도로에 접속하여 우측 정상부를 차지한 항공무선표시국 방향의 도로를 두고 좌틀하여 망해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완만한 내림길 포장도로가 이어지더니,
산봉우리 남서쪽 아래에 자리한 망해암에 도착한다.
<망해암(望海庵)>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의 관악산 줄기에 자리한 망해암(望海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절에서 전하는 연혁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유물이나 문헌으로 고증된 사항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1407년(태종 7) 한양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누르기 위해 왕명으로 몇몇 사찰을 중창할 때 함께 중건하였다고 한다. 1803년(순조 3) 홍대비(洪大妃)의 시주로 중창하였고 1863년(철종 14) 대연화상이 중수하였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용화전 내에 조선 초기의 석불입상이 봉안된 점을 고려하면 망해암은 조선 전기에 건축된 사찰로 추정된다. 경내에는 근래에 건립한 법당과 범종루, 요사 등이 있다. 용화전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불입상과 약사불이 봉안되어 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조선 세종 때 조세를 운반하던 배가 월미도 부근을 지날 때 심한 풍랑으로 인하여 전복될 지경에 이르렀다. 선원들이 당황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뱃머리에서 어떤 승려가 나타나 그들을 진정시키고 인도해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풍랑이 잠잠해진 뒤, 한 선원이 고마운 마음에 승려가 사는 절이 어디인가를 묻자 관악산 망해암에 있다고 대답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이 한양에 도착하여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망해암을 찾았으나 승려는 없고 그와 용모가 아주 흡사한 불상만이 법당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은 매년 공양미 한 섬씩을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고 이러한 공양은 조선 후기에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용화전에 봉안된 안양 망해암 석불입상은 머리 위에 원형 보개를 착용하였으며 무릎 아랫부분은 마루 밑에 묻혀있다. 석불입상의 보개 하단에는 ‘성화십오년사월일조성(成化十五年四月日造成)’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 1479년(성종 10)에 건립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상호와 신체부는 흰색의 안료로 도색되어 있다. 머리는 마모되었지만 나발을 갖추고 있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육계 상면에는 원형의 두터운 보개가 있다. 머리의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상호는 방형에 가까운데 이마에는 금속재로 백호를 표현하였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양 눈은 반개하여 아래를 보고 있다. 코와 입은 두툼하게 조각하였다. 양 귀는 크게 만들었으며 귓불을 길게 내려뜨리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껍게 처리하여 신체의 곡선미를 볼 수 없다. 불상의 후면은 평면으로 다듬은 후 아무런 조식을 하지 않았다.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내장하였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려 외장하였다. 이 석불입상은 조선 전기 석조불상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곳 망해암에서 바라보는 일몰풍경이 안양 8경 중에서 으뜸이라는 안내판.
2003년에 시민공모와 각계 전문가들의 심의를 거쳐 안양시 최초로 "안양8경(安養八景)"을 선정하였다.
안양시의 유서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는 "안양 8경"은,
1경 - 관악산 망해암 일몰
2경 - 삼막사 남녀근석
3경 - 평촌 중앙공원
4경 - 삼막천 만안교
5경 - 수리산 최경환성지
6경 - 안양유원지
7경 - 병목안 산림욕장 석탑
8경 - 안양1번가
망해암 전경.
망해암의 일몰풍경이나 석불입상등에는 1의 관심도 없는 백두들은 서둘러 망해암을 뒤로하고,
도로를 따라 내려서다가 도로가 임곡동 방향으로 휘어져가는 안부에서 우측 봉우리를 향해 숲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뿌연 연무가 덥고 있는 안양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봉우리 정상부에 오르게 되는데,
뒤쪽으로는 잠시 전에 지나온 망해암과 삼성산이 가늠되고,
봉우리에는 지적삼각점 안내문 비석이 설치되어 있다.
희미한 산불의 흔적이 남아있는 봉우리를 뒤로하고 대림대사거리를 향해 내려서면,
평촌 시가지가 시원하게 조망되는 암릉지대를 지나게 되고,
빼곡한 소나무숲도 지나서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다시 안양천을 내려다보면서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게 되고,
이내 1번 국도로 내려서는 철사다리가 나오며,
철사다리를 내려서서 대림대사거리에 도착하여 삼성산 남북종주 산행을 마무리한다.
산행 날머리 주변의 감자옹심이 전문 식당에서 간단한 뒤풀이를 예정하고 있었는데, 참가자가 늘어나며 뒷풀이 장소를 안양1번가 부근의 닭볶음탕 식당으로 변경하여 안양천을 건너서 식당으로 향한다.
안양천 전경.
돌아본 대림대 방향.
안양 중심가 식당에 도착하여 바쁜 개인 일정에도 불구하고 뒤풀이에 참석한 손점장과도 즐거운 재회의 시간을 갖는다.
아슬아슬한 개표 상황이 연출되며 20대 대통령으로 2번 후보가 당선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있는 세계의 독재국가들 상황을 보면서 권력이 부패하거나 무능하면 언제든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의 중요성을 안다. 삼성산이 서울의 산이건, 안양의 산이건 게의치 않는다! 부디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은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하지 말고 늘 백성들과 함께 호흡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2022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의선숲길과 궁동산, 안산 이어 걷기 (0) | 2022.04.26 |
---|---|
화악지맥 1차(도마봉~도마치고개) : 한북정맥에서 화악지맥 분기점을 찾아! (0) | 2022.04.15 |
예천 회룡포 비룡산 : 강으로 둘러싸인 육지의 섬 (0) | 2022.03.26 |
구로올레길 산림형 : 이야기가 깃든 도심 산책길 (1) | 2022.03.22 |
명성지맥 4차(도내지고개~배모루) : 급경사와 빨래판에 녹초가 되었어도! (0) | 2022.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