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년

경의선숲길과 궁동산, 안산 이어 걷기

by 재희다 2022. 4. 26.

산 행 지 : 경의선숲길, 궁동산, 안산  (서울시)

산 행 일 : 2022. 01. 15.(토)

산행코스 : 삼각지역 ~ 숲길사랑방 ~ 효창공원앞역 ~ 공덕역 ~ 서강대역 ~ 홍대입구역 ~ 가좌역 직전 사천교삼거리 ~ 궁동산 ~ 작은안산 ~ 서대문자연사박물관 ~ 안산 봉수대 ~ 능안정 ~ 이화여대 정문 (14.8km, 5시간 소요)
산행참석 : 둘.


<산행지도>

 

 

'경의선숲길'은 용산구에서 마포구까지 이어진 총 6.3km의 선형공원으로, 경의선 철길 중 용산에서 가좌까지 연결되는 용산선 구간이 지하화 됨에 따라 지상에 만들어진 공원이다. 기존의 공원형태를 벗어나 길게 이어진 숲길은 2012년 3월 대흥동 구간을 시작으로 염리동, 새창고개, 연남동 구간, 원효로, 신수동, 와우교 구간이 차례로 완성되어 2016년에 경의선숲길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철길을 따라 도심을 가로지르는 '경의선숲길'은 서울의 대표적인 산책로로 도심과 숲, 과거와 현재,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로,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시민의 휴식공간이다. 보통은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드는 가을에 걷는 게 가장 좋고, 그 다음이 벚꽃이 피는 봄에 걸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좋은 때는 서울이 아닌 다른 곳을 헤매고 있을 것 같고, 겨울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고 추위로 아무도 찾지 않아 한가로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궁동산과 안산을 연계하여 걸어보기로 한다. 뭐! 좋으면 다른 분들과 함께 한번 더 걸으면 될 일이니!

 

 

<경의선 숲길>

경의선 숲길은 경의선이 용산에서 가좌까지 연결되는 6.3km구간을 지하화 함에 따라 지상에 만든 공원이다. 역사구간이나 옛날 건널목이 있던 자동차도로는 그대로 있어 실제 공원 길이는 5km 정도나 될까? 숲길 전체가 완공된 것은 2016년 5월 21일이다. 폭도 지상 철도부지의 넓이에 따라 구역마다 다르며 10여m로 좁은 곳이 있는가 하면, 60여m에 이르는 곳도 있다. 폐 철로를 이용한 공원이어서 건널목 표지를 살려두거나, 철로 레일에 귀를 대고 기차오는 소리를 듣는 어린아이 조각을 설치한 곳, 철로를 걸을 수 있도록 레일과 침목, 쇄석을 그대로 둔 곳도 있다. 버려진 폐 철길을 들꽃과 도심천(都心川) 작은공원(小公園), 실개천, 책거리 등을 조성하여 도시민의 정서함양(情緒涵義) 및 건강관리(健康管理)에 도움을 주는 휴식 및 운동공간으로, 총연장 6.3km, 폭 10~60m의 선형공간(線型空間)이다. 홍제천부터 용산체육문화센터까지는 공원구간(公園區間) 4.4km, 경의선 및 공항철도 역사구간(驛舍區間) 1.9km로 이루어져 있다. 

 

 

매서운 겨울 날씨에 한산한 전철을 전세 낸듯 타고 4호선 삼각지역에 내리니,

한산한 대합실 한켠의 조형물도 코로나19에 걸렸는지 격리되어 있고,  

 

삼각지역 6번 출구로 나와 삼각지역 사거리에서 삼각지고가도로 방향으로 좌틀하면, 

 

삼각지고가도로를 따라 경부선 철길을 넘게 되는데, 

 

우측 서울역 방향으로는 북한산 능선도 보이고, 

 

좌측 용산역 방향으로는 수많은 철로가 이어져 있다.  

 

 

삼각지고가도로를 내려서면 좌측에 자그만 문배어린이공원이 있고, 

 

좌측 용산구 문화세육센터 옆길로 들어서면, 

 

옛 경의선 철로가 나오며 화물차를 개조하여 만든 '경의선숲길 사랑방'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선형공원은 공식 명칭인 ‘경의선숲길’보다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린다. 가장 많은 유동인구가 오가는 연남동 구간은 ‘연트럴파크’로 불리는데 반려견과 산책하는 이들이 많아 ‘개트럴파크’라고도 불린다. 공원 주변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주점이 밀집해 도시에서 가장 ‘힙한’ 상점가로 꼽히기도 한다. 길이가 긴 공원이다 보니 구간별 특색도 있다. '연남동 구간'은 길게 뻗은 은행나무와 넓은 잔디밭이 아름답고, '신촌 와우교 구간'은 책거리가 있다. '대흥동과 염리동 일대'에는 작은 물길과 메타세콰이어길이 있으며, 새창고개에는 경의선 숲길의 유일한 언덕이 있으며, 시작점인 원효로(신계동)에는 옛 기차 한량이 '경의선 숲길 사랑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경의선 숲길은 서쪽부터 연남동 구간(1.2km), 와우교 구간(370m), 신수.대흥.염리동 구간(1.3km), 새창고개.원효로 구간(960m) 등 총 4개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남동 구간'은 가좌역에서 홍대입구역까지의 구간으로, 숲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있는 기찻길과 간이역을 닮은 쉼터를 보며 이 길이 과거 철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길게 뻗은 은행나무 행렬과 860m의 긴 물길을 따라 걷다보면 경의선 숲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와우교 구간'은 홍대입구역에서 와우교를 지나 서강대역까지로 '경의선 책거리'라는 책 테마 거리가 있어서 더욱 볼거리가 풍성하며, 곳곳에 남아있는 철길과 기차가 운행 기차가 운행되던 당시 땡댕거리라 불리던 철도 건널목을 그대로 복원해 놓고 있어 여러 구간 중에서도 경의선에 대한 향수를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구간이다. 

쉼터로 가득한 '신수.대흥.염리동 구간'은 서강대역에서 공덕역까지의 구간으로 '선통물천', '무쇠막', '철길 소년.소녀상' 등 마을의 옛 기억을 살릴 수 있는 장소가 있고, 대흥동 일대 구간으로는 봄철에 벚꽃을 만끽할 수 있다. 또한 만리동 일대 구간에는 메타세쿼이아길과 느티나무 터널이 있는 녹색쉼터가 있다. 

'새창고개.원효로 구간'은 공덕역에서 효창공원앞역을 지나 용산문화체육센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구불구불한 고갯길과 탁 트인 전망 테라스, 자연암석 등 옛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옛 경의선 철로를 공원으로 꾸민 '경의선숲길'로 들어서서 첫번째 '새창고개.원효로 구간'을 잠시 진행하면,  

 

옛 철로 좌측에 경의선 철로에 대한 내력이 적힌 벽판이 자리하고 있다. 

 

<경의선(京義線)>
경의선은 서울과 평안북도 신의주 사이에 부설된 철도로, 서울을 기점으로 개성~사리원~평양~신안주를 거쳐 신의주에 이르는 우리나라 관서 지방을 관통하는 종관철도(縱貫鐵道)로서 총연장 499㎞이다.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로 연결되고 있으나, 지금은 남북 분단으로 서울∼문산 간의 52.5㎞만을 운행하고 있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 침략의 목적으로 부설하였으며, 경부선과 함께 평시에는 원료 공급, 공업 제품의 수송을 맡았으나, 전시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 침략 노선으로 이용되었다.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Morse, J. R.)가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한 데 자극된 프랑스는 1896년 7월 친로파 대신 및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C.)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피브릴르회사(Fives Lile會社)의 대표 그릴르(Grille)에게 경의선 부설권을 획득하게 하였으나, 그릴르는 재력 부족으로 부설권을 상실하였다.(1899.6.23.) 이에 우리 정부는 당시 국내에서 일고 있던 애국 계몽운동에 힘입어 반환된 경의선 부설권을 1899년 7월 8일 박기종(朴琪淙)이 주도하는 대한철도회사(大韓鐵道會社)에 특허하였다. 그러나 재력이 없던 박기종이 실패하자 정부는 외세를 배격하기 위하여 경의선·경원선을 궁내부 직영으로 하였다. 
1900년 9월 조정은 내장원(內藏院)에 서북철도국을 두고 조병식(趙秉式)을 총재로 임명하고 서울∼개성 간의 선로 측량에 착수하게 하였다. 이때의 계획은 먼저 서울∼개성 간을 개통시키고 자금이 확보되는 대로 연장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정부가 스스로 착공하고 있는 데도 일본과 러시아는 경의선 부설에 계속 상관하였다. 그러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 뒤인 1904년 2월 21일, 일본은 서울∼신의주 간의 군용철도 부설을 위한 임시 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설치하고 3월 4일 이 감부 소속 철도대대를 상륙시켜 불법으로 경의선 부설에 착수하였다. 그러자 그 해 3월 12일 정부는 군사상 필요하다는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50년간의 임대 조약을 맺고 일본에게 경의선 부설권을 물려주고 말았다.
철도 부설권을 빼앗은 일본은 군인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공사를 급속도로 진행시켰다. 실제 답사를 통한 정밀한 조사를 하지못한 채 5만 분의 1 지형도로만 위치를 결정하고 측량을 하였다. 1904년 3월 12일 용산∼개성 사이, 4월 9일 개성∼평양 사이, 6월 25일 평양∼신의주 사이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0월 28일 용산∼임진강 사이에 철도건설을 위한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 1905년 1월 26일 평양∼신의주 간의 철도가 완성되었고, 3월 29일 대동강철교가 준공되었으며, 4월 28일 청천강·대령강의 두 철교를 제외한 전체 노선이 준공되어 이날부터 용산∼신의주 간에 연락 운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1906년 3월 25일 가장 난공사 지역인 청천강철교가 준공됨으로써 전 노선에 걸쳐 열차가 운행되었다.
경의선 건설에는 총 733일이 소요되어 하루 평균 730m의 선로를 부설한 셈이다. 큰 터널은 파지 않고 우회하였으며, 교량도 부실하여 공사비가 적게 든 반면 졸속 공사가 되었다. 특히, 철도용 부지를 무료로 강점하고 공병대를 투입하여 경비가 더욱 경감되었다. 이와 같이 군사상 목적으로 급조된 경의선은 그 뒤 대대적인 개량공사가 필요하였다. 철도감부는 1905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구배의 완화, 곡선의 개량, 터널 신설(19개소, 540m), 교량의 개증축(328개소) 등 개량 공사에 착수하여 1911년 11월 개량 공사의 대부분을 완공하였다. 그 결과 전선을 통하여 최급구배 100분의 1, 최소 곡선 400m의 선로로 되었으며, 1911년 11월 압록강철교의 개통으로 한국∼만주 간이 철도로 연결되었다. 또한, 각 열차의 운행을 만주 안동(安東)까지 연장하고, 서울 남대문과 만주의 장춘(長春) 간을 주 3회씩 직통 급행열차가 운행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일환이 형성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확대됨에 따라 일제는 1938년부터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물자 및 병력 수송을 위하여 경의선의 복선 공사를 시작하였다. 1943년 5월 평양∼신의주 간의 복선이 준공됨으로써 더욱 식민지 수탈과 대륙 침략에 최대로 활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북 분단과 함께 경의선은 끊어져 국토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한정상회담의 결과 경의선의 복원을 합의하고 2000년 9월 18일 경의선 복구작업을 착공하였으며, 2003년 6월 14일에 경의선 연결식이 군사분계선(MDL)에서 개최되었다. 현재 서울역~문산역까지 길이가 52.5㎞인데, 대부분의 구간이 복선전철화되어 있으며 2009년 서울역~문산역까지 광역전철이 개통되어 운행 중이다. 남북관계가 크게 진전된다면 경의선은 남북한 통일의 가교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남북한 경제교류의 통로로 작용하고, 나아가 중국, 러시아와 연결되는 새로운 물류유통로로 기능함으로써 국가경제의 발전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추운 날씨 탓에 경의선의 내력을 읽는둥 마는둥 서울러 발걸음을 옮기면, 

 

원효대교와 남영역을 잇는 원효로를 건너게 되고, 

 

도로를 건너 다시 경의선 숲길을 따르면, 

 

'세창고개 이야기'라는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새창고개>
용산구 효창동에서 마포구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 부근 효창동 213번지 일대에 조선시대 선혜청의 별창고인 만리창을 이곳에 새로 지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신창고개라고도 하였는데, 인근 마을을 새창마을이라고 하였다. 만리창의 창고 규모는 진휼청에 소속된 창고가 35문, 해서 소속 3문, 호남 소속 20문 등 모두 58문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의 혼성여단이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 수행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한다.

 

만리동고개에서 이어온 능선마루쯤. 

 

 

매섭게 차가운 겨울임에도 경의선 숲길에는 산책 나온 분들이 더러더러 눈에 띄고, 

 

가늘게 이어지던 숲길은 첫번째 구간인 '새창고개.원효로 구간'과 두번째 구간인 '신수.대흥.염리동 구간'을 구분짓는 공덕역을 앞두고 대형 쇼핑몰 건물에 막혀 있는데, 

 

쇼핑몰과 공덕역을 요리조리 통과하여 마포대로 공덕오거리를 지나게 된다.  

 

공덕오거리 전경. 

 

마포대로 마포대교 방향.

 

 

공덕역에서 끊어졌던 숲길은 마포대로를 건너며 다시 이어져 두번째 구간인 '신수.대흥.염리동 구간'에 접어들게 되는데,  

 

경의선 숲길 옆으로는 예쁘게 단장한 작은 까페와 식당들이 각각의 모습을 뽐내고 있고, 

 

이내 다시 차도를 건너게 된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경의선 숲길 주변에는 전에는 보이지않던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경의선 철길의 '철길 소년.소녀상'이 옛 추억을 더듬게 하며,  

 

공항철도에서 나오는 지하수를 연결하여 일제강점기에 만든 '선통물천'을 재현한 수로 모형과 설명판을 만난다.

 

<선통물천(善通物川)>
선통물천(善通物川)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아현천에서 분기하여 터널로 쌍룡산을 뚫고 염리동과 대흥동을 차례로 통과한 뒤 신수동에서 봉원천으로 합류하던 하천이다. 1925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인공하천으로, 현재까지 하수 처리 및 범람원 조절 기능을 수행해 오고 있어 지속적 관리를 통하여 보존해야 할 시설물로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현동 쪽 터널 입구에는 ‘선통물(先通物)’이 음각된 표지석이 있었으나 보존 처리된 후 매립되었고, 이를 시에서 복제하여 2014년 원래 자리에 전시하였다. 그 글씨는 제6대 조선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가 쓴 것이다.
조선 시대, 선통물천은 아현천의 다른 이름이었다. 마포에 모인 여러 물자를 배에 나눠 실은 뒤 아현천을 거슬러 올라가 돈의문 부근까지 운반하였는데, 이렇듯 물건이 먼저 통과하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었다. 한자로는 '先通物川'으로 표기하였는데, 나중에 '善通物川'으로 바뀌었다.

 

<아현천(阿峴川)>
아현천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안산에서 발원하여 마포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합류하는 약 3 km 길이의 하천이다. 상류를 제외한 전 구간이 복개되어 있다. 마포에 모여든 물자를 작은 배에 나눠 실은 뒤 아현천을 통하여 돈의문 인근까지 운송하면 한양 도심으로 물자를 가장 빠르게 운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뜻에서 아현천은 물건이 먼저 통과하는 하천이라는 의미로 ‘선통물천’(先通物川→善通物川)이라고도 불렸다. 한편 아현동 주민은 ‘놋개천’으로, 공덕동 주민은 ‘공덕천’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선통물천 설명판.

 

 

'내가 알고있던 대흥동이 아닌 새롭게 변모한 대흥동이구나!'를 느끼며 숲길을 따르는데,  

 

우측으로 서강대학교 건물이 보이더니, 

 

두번째 구간과 세번째 구간인 '와우교 구간'을 구분짓는 경의중앙선 서강대역을 지나게 되고, 

 

서강대교에서 신촌역을 잇는 서강대로를 육교로 건너는데,

'언제 서강대로를 이렇게 넓게 새로이 포장을 해 놓았지'라며 변모된 모습에 사뭇 놀랍고, 

 

육교를 내려서면 다시 멋진 숲길이 이어지더니,  

 

땡땡거리 입구엔 차단기 앞을 관리하는 역무원과 철길을 건너려는 가족의 모습이 조각상으로 세워져 있는데, 옛 철로 건널목 모형이 아득한 어린시절의 기억을 끄집어 내게 하며,  

 

그 옆에는 '땡땡거리' 안내 벽판이 자리하고 있다. 

 

<땡땡거리>
땡땡거리는 원래 경의선이 지상으로 다닐 때 차단기가 내려가면서 나던 '땡땡' 소리를 따서 이름 붙여진 거리다. 지금은 경의선이 지하로 다니면서 경의선이 다니던 자리를 따라 공원이 형성되어 곳곳에는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벽에 그려진 것을 볼 수 있고, 땡땡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의 벽에는 땡땡거리에 있는 가게들을 그려놓은 벽화도 볼 수 있다. 

 

경의선 내력 안내 벽판.

 

 

땡땡거리를 지나자 철길을 건너는 와우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세번째 구간인 '와우교 구간'이 시작되며, 서강대역까지의 370m 숲길은 '경의선 책거리'로 불리며 와우교 아래에는 '경의선 책거리역'을 꾸며 놓았고,  

 

<경의선 책거리>
경의선 책거리는 18세기 후반, 책을 통해 문치(文治)를 하려는 정조시대의 책(冊)가도 문화를 현대적 의미로 되살려, 시민들에게 책을 통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제공하고자 경의선 폐선부지인 홍대 복합역사에 조성한 책 테마거리다. 경의선 책거리를 찾는 시민들이 세상에 나온 책 한 권의 위대한 가치를 통해 건강한 삶의 지혜를 함께 나누고 꿈을 실현하며, 마포의 출판 산업 부가가치를 높이는 출발 거점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의미로 2016년 10월 조성이 완료되었다. 

 

경의선에 기차가 다닐 때 세교리역과 서강역 사이에 자리한 '책거리역' 모형.  

 

와우교 아래를 통과하여 '경의선 책거리'로 들어서면 다양한 주제의 책방과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책거리에는 다양한 전시물과 책방들이 즐비하지만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문들 닫아놓아 아쉬움을 남긴다.

 

 

문닫힌 책방들을 힐끔거리며 책거리를 지나니 숲길 연남동 구간이 시작되는 홍대입구역이 나오며, 

 

매서운 날씨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긴 줄을 서 있다. 

나는 돈 받고 서 있으라 해도 싫은데, 저 친구들은 돈 받고 숲길 걸으라 해도 싫어하겠지..ㅉㅉ

 

AK백화점 입구에도 줄을 서 있네..ㅉㅉ

 

 

양화로는 횡단보도로 건너고, 

 

다시 숲길이라는 산책로로 들어서면, 

 

곳곳에 기찻길을 닮은 쉼터와 은행나무가 도열해 있는 경의선 숲길 연남동 구간이 이어진다.

 

 

경의선이 경의중앙선과 만나는 지점에서 '경의선숲길'은 철길 좌측을 따라 홍제천을 건너 가좌역으로 이어지지만, 우리는 궁동산을 거쳐 안산으로 진행해야 하므로 경의중앙선 철길 아래로 이어진 통로로 들어서는데,  

 

좌측에 '세교실개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세교실개천>
경의선숲길 연남동 구간이 위치한 지역의 옛 지명은 세교리, 잔다리 등이었다. 고지도를 통해 수계를 확인해 보면, 이 지역에 작은 물길이 여러 갈래로 지났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공원을 조성하면서 작은 실개천을 만들고 이름도 옛 지명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세교실개천'이라고 하였다. 실개천은 경의선 철도(용산~문산 간) 및 공항철도 지하 유출수를 이용하여 조성하였다.

세교천(細橋川)은 연희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동교동과 서교동을 지나 망원동에서 홍제천과 합류한 후 한강으로 흐르던 하천이었다. 1977년 난지도 제방 축조공사로 난지도가 한강의 섬에서 육지화되면서 홍제천의 유로가 완전히 변경되었다. 이후 세교천은 지상에서 사라져 땅속의 하수 박스 구조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경의중앙선 철길을 지하로 통과하여 나오면 성산로 도로가 나오고, 모래내고가교 아래 사천교삼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신촌역에서 가좌역으로 이어지는 경의중앙선 철길 모습.

 

궁동산 방향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진행하면, 

 

주택 신축공사장을 지나서 궁동산으로 오로는 들머리가 나온다. 

 

 

야자메트가 깔린 등로를 따라 궁동산으로 오르면, 

 

궁동산 정상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보이더니, 

 

궁동근린공원을 한 바퀴 도는 궁동산둘레길을 따라 오르고, 

 

궁동산 정상을 차지한 연희배수지로 오르는 임도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진행하면, 

 

궁동산 정상을 차지한 연희배수지 앞을 지나서, 

 

연희배수지를 좌회하는 둘레길을 따라 잠시 더 진행하면, 

 

이내 연희배수지 뒤편의 '백사정(百思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각정자가 있는 궁동산 정상부에 도착하는데, 

 

궁동산 정상에는 녹슨 철구조물인 지적삼각점이 자리하고 있다. 

 

<궁동산(宮洞山, 104m)>
인왕산에서 안산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안산 서쪽으로 서대문구청을 감싸고 모래내의 남쪽으로 연하여 연희2동의 100m 봉우리와 연희1동의 104.3m 봉우리로 연이어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두 개의 봉우리 중에서 100m 봉우리를 '작은안산', 104.3m 봉우리를 '궁동산'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이궁(離宮) 가운데 하나였던 연희궁이 있었다는 데서 연희동이란 동명이 유래되었다. 이 궁의 이름을 딴 한성부 성저십리의 서부 지역을 관할했던 연희방(延禧坊)이 있었으며, 그중 현 연희동 지역은 궁동(宮洞), 음월동(陰月洞), 정자동(亭子洞), 염동(廉洞) 등으로 나뉘어 불리다가, 1914년 일제가 이를 합쳐 '연희리'라 하고 고양군 연희면에 편제하였다. 연희동 지역인 궁동에 있는 산이라 하여 궁동산(宮洞山)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이른바 104고지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6·25동란 중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수복을 위한 격전지로 유명한데, 궁동산 정상 동편 자락에는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海兵隊一O四高地戰蹟碑)’가 자리하고 있다. 연희고지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한국 해병 제1·2대대가 미 해병대와 더불어 1950년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악전고투 끝에 탈환하여 공산군의 서부방어선 돌파와 서울 탈환의 기폭제가 된 전쟁터였다. 연희고지는 이미 일제 때 용산에 있던 일본군의 진지훈련장으로 견고한 요새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적은 이러한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여 최후의 결전을 위한 서부방어선의 핵심 진지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국군 측은 연희고지의 탈환을 발판으로 와우산을 점령하고 노고산 북쪽을 제압하여 서부방어선을 돌파하였다. 104고지(궁동산) 정상에는 인근 주민의 식수원이 되는 상수도를 공급하는 연희배수지가 위치해 있다. 또 지적삼각점(地籍三角點)이 있어 국토 측량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서울시-

 

궁동산 정상부의 돌탑.

 

 

따뜻한 커피로 얼어붙는 몸을 녹이고서 궁동산을 내려서다가, 

 

갈림길 삼거리에서 좌측 궁동산체육관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우측 서연중학교 방향 능선으로 진행하다가, 

 

체육시설이 있는 쉼터 갈림길에서 직진의 '104고지 전적비' 방향 능선길을 두고 좌틀하여 사면길로 들어서면, 

 

우측 연희동 방향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안산이 가늠된다. 

 

<연희동(延禧洞)>
'복이 퍼지는 동네'라는 뜻의 연희(衍禧)는 세종이 내린 이름이었다. 연희동은 왕들이 머물던 연희궁이 있던 곳으로, 조선 초기 이궁(離宮)이던 연희궁(延禧宮)은 연세대학교 정문 부근 또는 연희동 194번지 일대(연희 브라운스톤 뒤편)에 자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 대동여지도 등지에 연희궁이 표기된 것을 보면 꽤 오랜 동안 궁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자 표기는 문종 때 연희궁(延禧宮)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 초 연희궁 인근은 조선의 수도 후보지로 거론된 명당이었다. 개국공신이었던 하륜은 무악 천도를 적극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대신 이곳에는 왕이 머무르는 별궁인 서이궁(西離宮)이 만들어졌다. 세종은 부왕인 태종이 머물 궁으로 서이궁을 선택했고 세종 7년 이를 중건해 연희궁(衍禧宮)으로 개칭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도 연희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세종은 궁궐터 근처에는 뽕나무를 심어 잠실도회도 만들었다. 당시 고부가가치 산업인 비단을 만드는 누에를 길렀던 것이다. 아직도 안산에 가면 뽕나무 잎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니 당시 뽕밭의 규모가 대단히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세종의 살뜰한 마음이 곁들어 있던 연희궁은 연산군 때 술이 넘쳐나는 연회장으로 바뀌고 만다. 연산군 11년(1505년) 궁을 개축해 궁녀들과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콘크리트 도로로 복개됐지만 당시에는 하천이 흐르며 뽕나무와 과일나무가 무성한 안산 자락이 뒤에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정궁과도 멀지 않아 연회장으로서는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연희궁은 연산군 때부터 이궁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대신 인근 마을이 ‘궁뜰’이라 불리면서 왕과 관련된 이들이 있던 곳으로 남는다. 이 곳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엄마인 영빈 이씨의 묘 수경원이 있었고 장희빈 생가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연세대학교 내에 수경원의 정자각과 비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연희 1동에는 장희빈이 머리를 감았다는 우물터가 재건돼 있다. 

 

살짝 당겨본 북한산 방향.

 

 

잠시 평탄한 사면길을 따르면, 

 

궁동산 정상에서 이어오는 능선길에 접속하게 되고, 

 

우틀하여 궁동산체육관 방향의 안부로 내려서면, 

 

좌측 홍제천과 우측 연희동을 잇는 안부 도로를 지나게 된다. 

 

 

도로를 건너 완만한 구릉 수준의 궁동산 능선을 따르면, 

 

우측 궁동산체육관 방향 갈림길을 지나, 

 

가파르지 않은 데크계단길을 오르게 되고, 

 

돌아본 궁동산 정상 방향.

 

잠시 더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좌측 홍제동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 전망데크가 나온다.

 

 

매서운 날씨로 산책 나온 분들조차 뜸한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면, 

 

정자 쉼터가 있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의 '작은안산' 방향으로 진행하고, 

 

우측 연희동 방향 조망.

 

이내 궁동산과 작은안산을 가르는 '증가로'를 건너는 육교를 지나 작은안산으로 향하게 된다. 

 

좌측 명지대 인문캠퍼스 방향.

 

작은안산.궁동안 등산로 안내판.

 

 

안선의 서쪽에 있고 안산에서 뻗어나온 작은 산이어서 '작은안산'이라 부른다는 작은안산 들머리로 들어서면, 

 

연희동 사람들도 이웃과 인사를 하고 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고,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나무계단을 오르면, 

 

다시 평탄한 산책로가 이어지다가, 

 

봉우리를 우회하는 갈림길을 두고 작은안산 정상부를 찾아 우측 오름길로 오로면,  

 

작은안산 정상부에 오르게 되는데, 

 

안선의 서쪽에 있고 안산에서 뻗어나온 작은 산이어서 작은안산이라 부른다는 작은안산 정상부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마당이나 쓰는 빗자루만 작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작은안산 정상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다시 우횟길과 만나게 되고, 

 

완만한 내림길을 따라 안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측 연희동주민센터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안산자락길 방향의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앞 도로로 내려서게 된다. 

 

 

도로를 건너 안산자락길을 향해 서대문자연사박물관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르면,  

 

이내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앞을 지나게 되고, 

 

계속 직진하여 안산자락길에 접속해도 되지만 안산 정상 방향으로 우틀하여 오르면, 

 

숲속 어린이공원을 지나서 오르게 되고, 

 

이내 안산자락길에 접속하게 된다. 

 

매서운 날씨에도 안산자락길을 걷는 분들이 더러 보인다. 우리도 우측 안산자락길을 따라 능안정으로 진행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추운 날씨에 몸을 덮이기 위해 안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로 한다.  

 

 

안산 정상을 향해 오름길로 들어서서, 

 

제법 가파른 숲길을 오르면 등로는 이내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고, 

 

좌측 백련산 방향.

 

이내 안산 정상의 봉수대 방향 능선길에 접속하여서는 우틀하여 능선 오름길을 따른다.

 

 

봉수대 방향 능선길을 따르면, 

 

안천약수터를 지나게 되고, 

 

'음용금지' 표시판이 걸려있는 안천약수터를 지나 오르면, 

 

좌측으로 북한산과 인왕산이 시원하게 조망되고, 

 

수많은 산객들의 발길에 반질반질해진 능선 등로를 따라 오르면, 

 

안산 정상의 봉수대에 도착하게 된다. 

 

<안산(鞍山)>
안산(鞍山)은 말이나 소 등의 안장을 닮았다 하여 안산(鞍山)이라 부르고 있으나 예전에는 무악산(毋岳山), 금화산(金華山), 복주산(福州山) 등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금화터널 위쪽으로는 금화산(金華山), 무악재에 가까운 봉수대(蜂燧臺)가 있었던 서봉과 동봉이 있는 쪽은 무악산(毋岳山), 이화여자대학교 자리는 복주산(福州山)이라 불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무악산, 금화산, 복주산을 통틀어 안산(鞍山)이라 부르고 있다. 

안산 정상에 자리한 '무악산 동봉수대'. 

 

<무악봉수대지(毋岳烽燧臺址)>
서울시 기념물 제13호로 서대문구 봉원동 산1번지인 안산(鞍山)의 정상(頂上)에 위치한 이곳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출발하여 경기도 내륙을 따라 고양 해포나루를 거쳐 남산의 제3봉수대(第三烽燧臺)에 최종 보고(最終 報告)되기 바로 전 단계의 봉수대(烽燧臺)인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束烽燧臺)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시대 봉수체계가 확립되었던 제종 24년(1442년)에 무악산(毋岳山)의 서봉수대(西烽燧臺)와 함께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악산 동봉수대 전경.

 

북한산과 안산 방향.

 

북쪽 홍은동 방향.

 

북한산 방향.

 

인왕산 방향.

 

서울 도심 방향.

 

남동쪽 남산 방향.

 

남쪽 관악산 방향.

 

 

안산 정상의 봉수대를 뒤로하고 남쪽 능선의 능안정 방향 능선길로 들어서면, 

 

제법 가파른 암릉 내림길이 이어지더니, 

 

돼지머리 모양의 기암이 자리한 전망바위를 지나게 되고, 

 

전망바위 아래에는 데크목 전망대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데크목전망대를 뒤로하고 암릉길을 따라 내려서서, 

 

돌아본 안산 정상 방향. 

 

다시 안산자락길에 접속하여 능선 남쪽에 자리한 능안정 방향으로 진향한다.

 

 

개나리가 피는 봄철에 걸으면 더없이 좋은 안산자락길을 따르면, 

 

안산 남쪽 능선에 자리한 능안정을 지나게 되고, 

 

능안정을 지나자 안산자락길은 지그제그의 데크길로 이어지고, 

 

데크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안산자락길을 두고 우측 봉원사 방향 숲길로 들어선다. 

 

 

이화여대 방향으로 하산하기 위해 봉원사 방향 숲길을 따르는데, 

 

이화여대 산학협력관 방향 등로가 폐쇄되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봉원사 방향 등로를 잠시 더 따르다가, 

 

등로가 작은 지계곡을 지나는 지점에서, 

 

좌측 뚜렷한 샛길 등로로 접어들어, 

 

철망울타리 옆길을 따라 내려서면, 

 

이내 봉원사로 이어지는 도로에 내려서게 되고, 

 

이화여대 산학협력관 방향 좌측 도로를 따르면, 

 

이내 이화여대 산학협력관이 나오는데,  우리는 우틀하여 이화여대 교정으로 진행한다. 

 

 

이화여대 교정으로 들어서서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좌측 남산타워 방향으로 이화여대 기숙사 건물이 내려다 보이고, 

 

따르던 아스팔트 도로를 두고 우측 숲길로 들어서면, 

 

학생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예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나오는데,

이곳이 이름이 지인의 별명을 딴 '팔복동산'이다.  

 

 

옆지기의 옛 추억을 건성으로 들으며 기숙사 입구를 지나고,  

 

중앙도서관 앞을 지나 교정을 통과하면, 

 

이화여대 정문쯤에 도착하고,  

 

이화여대 정문을 나서며 추운 겨울날의 추억여행을 마친다. 

 

지난해 가을 시청역에서 인왕산, 북한산자락길, 백련산, 안산을 거쳐 연세대학교 교정으로 하산한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이화여대로 하산하는 걷기길을 더듬다가 경의선숲길, 궁동산, 안산을 거쳐 이화여대 교정을 통과하여 걸어 보았다. 매섭게 추운 날씨에 걷은 것 밖에는 기억에 남은 게 없지만, 가을날 걷게 된다면 좋은 걷기길 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30여 년 전에 자주 가던 식당이 아직도 간판을 달고 있다며...

 

언젠가는 코로나19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고 

평온한 일상이 회복되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