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소 : 청와대 및 북악산 (서울시 중구)
일 시 : 2022. 10. 16.(일) 08:50
출발지 :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
코 스 : 경복궁역 ~ 청와대 관람 ~ 북악산 탐방 ~ 무궁화동산 (약 9km, 5시간 소요)
참 가 : 6 + 1 백두.
<탐방지도>
언제쯤인지 산행 도중에 지난 5월 주인이 용산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빈집이 된 푸른기와집 청와대 탐방 예기가 화제에 올랐는데, 회장님의 "우리도 언젠가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이 늘 숙제로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맑고 쾌청한 가을날씨가 이어지고 정기산행이 없는 셋째 주 일요일에 마침 별다른 일정도 없는지라 산우회 카페에 동행자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지난 5월에 개방하여 수많은 인파가 몰려 탐방 예약제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신청자가 줄어들어 며칠 전에만 신청하면 무난히 예약이 가능하고, 이제는 좀 덜 미어터질 것 같아 찬찬히 집구경을 하고, 그동안 못 가게 막아놓았던 뒷산인 북악산 남측의 탐방로도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휴일에는 아직도 관람객이 많아 청와대 탐방은 평일에 관람하는 게 좋겠지만 일터에 매인 몸들이라 하는 수 없고, 북악산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탐방객도 많지 않아 도심에서 한적한 산행을 즐길 수 있어서 함께 다.
청와대 관람은 무료이이지만 65세 이상과 장애인,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관람이 가능한데, 화요일은 휴관이며 9시부터 1시간 반 단위로 16시 30분까지 하루 6회 관람이 이루어지고, 예약은 1인이 최대 6명까지 단체는 20~50명까지 예약이 가능하다. 그리고 예약신청자는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하고, 다른 동반자도 필요시 신분 확인을 할 수 있어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우리는 우선 6명을 예약하고 공지를 올렸다가 신청자가 초과할 듯하여 김 전무가 추가로 6명을 더 예약했으나 탐방일이 다가오며 취소하는 분들이 있어서 1인 예약 인원이 6명이 함께 탐방에 나서게 되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청와대의 역사>
청와대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1입니다. 북악산을 뒤에 두고 있으며 시청과 종로·을지로 등 사무실이 밀집한 도심지역의 북쪽에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 12월 20일, 청와대의 주소가 ‘광화문 1번지’로 처음 정해졌고,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1월 1일에 한국식 주소인 ‘세종로 1번지’가 되었습니다. 2014년에 도로명 주소 체계로 바뀌면서 지금의 주소가 되었습니다.
1. 고려시대 : 이궁(離宮)이 있던 자리.
청와대 주변 지역이 역사서에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무렵입니다. 고려는 도읍이었던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을 삼경으로 두었는데, 숙종 때 동경 대신 이곳에 이궁을 설치하고 남경으로 삼았습니다. 남경은 ‘남쪽의 서울’이란 뜻입니다.
2. 조선시대 : 경복궁의 후원터.
청와대 주변 지역에 대한 기록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도읍 이전을 논의하면서 다시 나타납니다.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는 1394년에 새로운 궁궐을 세우기 위한 특별 기구인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만들고 관리들에게 새 궁궐터를 찾게 했습니다. 이에 관리들은 고려 숙종 때의 이궁 자리는 너무 좁으니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궁궐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임금께 보고했습니다.
태조는 그해 12월 정도전에게 궁궐을 짓게 하여 이듬해 9월에 경복궁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의 후원(뒤뜰)을 조성하면서 서현정, 연무장, 과거 시험장을 만들었습니다. 이 경복궁의 후원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가 있는 곳입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과 후원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경복궁과 후원은 약 270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재건했습니다. 당시 함께 지어진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에 뒤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갔습니다.
경복궁은 고종 33년(1896)에 이른바 아관파천으로 고종 황제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떠나자 정궁으로서의 위상이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3. 일제 강점기 시대 : 청와대 자리.
1929년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이곳의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습니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박람회 이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있던 옛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습니다. 이후 조선 총독의 관사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습니다.
4.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혜화동 이화장에서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경무대는 제4대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라는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푸른 기와의 청와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약속장소인 지하철 3호선 개찰구에서 나와 경복궁역 5번 출구로 가기 위해서는 짝퉁 불로문(不老門)을 통과하여 긴 지하통로를 지나야 하고,
광화문역 5번 출구로 나오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인적이 드문 경복궁이 보이는데, 최근에 맑은 날씨가 이어져 오늘도 청명한 가을 하늘을 기대했지만 흐리고 미세먼지도 있어서 아쉽기만 하고,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최근에 새로이 단장한 광화문 광장의 바뀐 모습을 살펴보고, 경복궁으로 입장하여 조선 왕들의 살림집이 어떠했는지를 살핀 후, 북문인 신무분으로 나가서 청와대 탐방에 나서면 옛날 왕의 집과 요즘 왕의 집을 비교하여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을 듯한데, 이는 후일을 기약하고 오늘은 청와대 관람과 북악산 탐방로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둘러보기로 한다.
참고로 경복궁 조망은 광화문 좌전방에 자리한 역사박물관 8층에서 보는 게 좋다고 하는데, 언제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을 함께 둘러보는 기회가 된다면 무료 조망포인트를 가 봐도 좋을 듯하다.
< 5대 궁궐 조망 포인트 >
- 경복궁 : 역사박물관 8층 (美 대사관옆 舊문화관광부 건물)
- 창덕궁 : '공간' 신사옥 4층 카페
- 창경궁 : 서울대 암병원 6층 옥상
- 덕수궁 : 서울시 서소문청사 1동 13층
- 경희궁 : 주변 아파트 사서 거실에서 보세요..ㅋㅋ
언제나처럼 회장님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계신다.
경복궁 돌담을 따라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지나,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은 궁중 안 서쪽 궐내각사 근무자들이 출입하던 문으로, 홍예천장에는 우백호(右白虎)가 그려져 있다. 경복궁에는 정문인 남문 광화문(光化門, 가운데는 임금이 출입하고 좌우는 신하가 출입하는 문으로 가운데문 홍예천장에는 남주작(南朱雀, 가운데문 오른쪽은 기린, 왼쪽은 현무)),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세자와 동궁영역 관청에서 일하던 신하·궁녀가 출입하고 홍예천장에는 좌청룡(左靑龍, 황룡도 있음)),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평상시 닫아 두었으며, 홍예천장에는 북현무(北玄武))이 있다.
참고로 기본적으로 조선은 유교사회였기에 그 기본이 되는 주역의 음양오행을 모든 것에 적용하였고, 그 대략적인 것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 東 : 左, 木, 春, 仁 (동쪽 좌청룡 낙산, 興仁之門, 建春門)
흥인지문은 원래 흥인문으로 해야 하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다른 산에 비해 125m로 낮아 지력을 보완하기 위해 地와 음이 같은 之를 넣었다고 하고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문임.
▶ 西 : 右, 金, 秋, 義 (서쪽 우백호 인왕산, 敦義門, 迎秋門)
서대문인 돈의문은 강북삼성병원 앞에 있었는데 헐려 없어졌고,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문임.
▶ 南 : 前, 火, 夏, 禮 (남쪽 남주작 목멱산, 崇禮門)
숭례문 현판이 세로인 것은 정면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억누르기 위함이라고 함.
▶ 北 : 後, 水, 冬, 智 (북쪽 북현무 북악산, 肅靖門)
북대문은 숙지문(肅智門)으로 해야 하나 '꾀할 정(靖)'자와 '지혜 지(智)'자가 비슷한 뜻으로 변형을 준거라 함.
▶ 中 : 土, 信 (普信閣)
보신각(普信閣)은 2층짜리 건물로, 2층 건물은 끝이 樓로 끝나야 해서 보신루가 맞으나, 이 건물이 불 타 한 때는 단층짜리 건물이어서 그게 굳어졌다 함.
영추문 모습.
청와대 영빈관문 앞에 도착하니 09:00부터 입장을 시키고 있는데도 아직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줄지어 있다. 아마도 개방 초기보다는 관람객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휴일에는 정원을 꽉꽉 채우는 듯하다.
휴일에 차량통행을 금지하는 청와대 앞길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사이에 입장줄이 줄어들며,
우리도 관람객 대기줄의 끝을 낚아채어 국민품으로 돌려줬다는 청와대의 영빈관 문으로 입장하는데, 동반자는 물론 예약자의 신분증도 확인 없이 예약 바코드만 확인하시키고 입장하여,
외빈을 위한 공식행사가 개최되는 영빈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남기고 영빈관 내부를 둘러본다.
<영빈관>
영빈관은 외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방문했을 때 만찬이나 연회 등을 베푸는 공식 행사나 대규모 회의나 연회를 하던 건물로, 1978년 1월에 착공해 그해 12월에 준공되었다. 원형 돌기둥 30개가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모습이며, 내부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 월계수, 태극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1층에 있는 홀은 외국 국빈을 접견하던 곳이고, 2층에 있는 홀은 대규모 오찬이나 만찬을 베풀던 곳이었다.
크기 말고는 석여사님 집 접견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예기를 나누며 영빈관을 나와 청와대 본관으로 향하면,
청와대 대정원 앞에서 지난해 말에 청와대의 새로운 쥔장이 되신 양반이 제대로 일을 해 보겠다며 용산으로 이사를 떠나며 남겨진 빈집을 이웃들의 쉼터로 제공한 분의 '청화대 국민 품으로'라는 구호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쥔장의 일터였고 우리는 TV 뉴스로만 보았던 청와대 본관 내부를 둘러보기로 한다.
<청와대 본관>
조선 시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정남향에 자리 잡은 청와대 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된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이 거주하던 곳을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로 계속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1991년 9월 4일에 새로 지었다. 전통 목구조와 궁궐 건축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건물을 짓고 총 15만여 개의 청기와를 이어 격조 높고 아름다운 팔작지붕을 올렸다. 본채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는 별채를 배치했다.
본관 내부는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그냥 사람들의 흐름에 떠밀려 흐르다가 관람을 마치게 된다.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세종실.
보고나면 별반 볼 것도 없다고 할 걸..ㅉㅉ
영부인 집무실인 무궁화실.
무궁화실은 영부인이 사용하던 공간을 통칭하는데, 영부인이 집무를 보던 집무실과 외빈을 만나던 접견실 등으로 나뉘어있다. 특히 접견실은 하얀 벽과 푸른 커튼 등 화사한 색감으로 꾸며졌고, 벽면에는 역대 영부인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역대 영부인 사진.
2층 대통령 집무실로 가기 위해 본관 계단으로 오르는데,
계단 정면으로 본관 건립 당시 그려진 김식의 '금수강산도'가 걸려 있다.
본관 2층으로 오르면 핵심공간인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게 되는데, 대통령 책상 뒤로 청와대의 상징인 금빛 봉황과 무궁화 문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입구에서 대통령 책상까지 15m에 달할 정도로 넓어 역대 대통령들이 “테니스를 쳐도 되겠다”(이명박 전 대통령), “너무 넓어 추위를 느낄 정도”(박근혜 전 대통령)라고 언급했다고 전해질 정도다.
접견실은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있으며 대통령이 외빈과 만나는 장소로 쓰였는데,
동쪽 벽면은 황금빛 ‘십장생문양도’로 장식돼 있고, 나무 창틀과 문살을 한지로 마감해 한국적 분위기를 풍긴다.
대통령 집무실.
김식의 '금수강산도'를 보며 다시 중앙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면,
외빈과의 공동기자회견장으로 쓰였던 인왕실로 들어서게 된다.
<인왕실>
청와대 서쪽 산의 이름을 딴 인왕실은 한국적 요소가 많은 본관의 주요 공간들과 달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유백색의 벽과 촛대형 샹들리에가 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간담회나 오찬·만찬이 열리는 소규모 연회장, 그리고 외국 정상 방한 때 공동 기자회견을 하는 장소로도 활용한 공간이다. 인왕실 동쪽 밖으로는 큰 창문을 통해 중정을 볼 수 있다.
충무실.
<충무실>
동쪽 별채의 충무실은 대규모 인원의 임명장을 수여하거나 회의를 하는 공간이었다. 외빈이 왔을 때 만찬과 공연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태극기와 푸른 봉황기 정도만 남아있지만 행사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꾸며지던 곳이다.
복도에 놓인 나무의자를 보니 전생에서 쓰던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다고..ㅉㅈ
본관 관람을 마치고 본관을 배경으로.
본관에서 수궁터로 가다가 우측 소정원 입구에 있는 불로문(不老門)에서
"불로장생을 위해!"
아침에 경복궁역에서도 보았던 불로문과 이곳의 불로문 모두 짝퉁이고, 원본은 창덕궁 후원에 있으며 저 불로문을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고 하여 불로문(不老門)이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祉) 표석이 세워진 수궁터.(구 본관인 경무대 터)
본래의 '天下第一福祉' 글씨는 관저 위, 오운정 아래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수궁 터>
수궁 터는 조선 시대 때 경복궁을 지키는 수궁이 있던 자리이다. 일제는 이곳에 총독 관사를 지었고, 광복 이후에도 미군정 사령부 거처로 이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계속 사용하다가, 1991년에 청와대 본관을 새롭게 지으면서 1993년 11월에 건물을 철거했다.
지금 청와대가 위치한 곳은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고종 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 융무당, 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현재의 수궁터는 당시 왕궁을 지키는 수궁(守宮)의 자리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이 수궁터에 총독의 관사를 지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됐다. 1991년 청와대 본관을 새롭게 건축한 후 1993년 11월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그 건물을 철거하고 수궁터로 복원했다.
일제강점기 수궁터에 일제가 총독관저를 지을 때의 일화가 있다.
당시 총독관저를 자리 물색에 내몰렸던 조선의 풍수사들은 고의적으로 용맥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한다. 일제의 만행을 도저히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조선총독을 지낸 사람들뿐 아니라 그 후에 이곳에서 생활한 대통령까지 불행한 말년을 맞았다고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90년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 중 "天下第一福祉"라는 표석이 청와대 건물 뒤에서 발견됨으로써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수궁 터'를 뒤로하고 대통령 관저로 향하는데, 주변의 나무들이 하나같이 서여사님 집 정원의 나무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
대통령 관저 앞에 도착하니 노거수 소나무 세 그루가 눈길을 끈다.
<대통령 관저>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공간과 사적인 업무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건립됐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가 배치돼 있고 앞마당에는 우리나라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대문은 전통 한옥의 분위기에 맞는 삼문으로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목조 구조로서 궁궐 건축양식인 팔작(八作) 지붕의 겹처마에 한식 청기와를 얹은 'ㄱ'자형 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지금의 관저는 1990년에 건립되었으며, 아래 수궁터에 위치해 있던 구관저는 1993년에 철거했다.
'인의문(仁壽門)'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관저 대문.
대통령 관저 내부는 관람이 불가하고 관저를 한 바퀴 돌아서 나오게 되어 있다.
관저 앞마당에서 사랑채를 배경으로.
관저 관람을 마치고 쥔장이 떠난 빈집의 대문 인의문 앞에서.
지금까지 집주인의 일을 하는 평일날의 동선을 둘러보았기에 이제는 쉬는날인 주말 산책 동선을 둘러보려고 본관 정문 앞 좌측 숲길로 들어서서 테크목 숲길을 따르면,
한 사람을 위한 데크목 산책로가 사면을 따라 이어지며,
좌측으로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도 내려다 보이고,
산 비탈로 이어지던 산책로가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오색구름에 싸인 정자란 뜻의 오운정이 나온다.
<오운정(五雲亭)>
1927년 일제가 총독관저를 지으면서 경복궁 북원의 건물들 대부분을 헐어버렸을 때 오운각만이 남았는데, 이 오운각이 오늘날의 오운정이다. 오운정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오운(五雲)이란 오색의 구름을 뜻하는 것으로 신선이 사는 별천지를 뜻한다. 오운정은 본래 오운각이라는 이름으로 1868년(고종 5)에서 1869년 사이 경복궁 재건 때 지어졌다. 오운정은 처음에는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었는데,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면서 그 옆으로 옮겨졌다.
오운정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가 작고 아담한 정자이다. 내부는 마룻바닥을 깔고 밖으로는 사방에 난간을 둘렀으며, 건물의 네 방향을 사분합문을 달아 바람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에는 절병통으로 장식하였다.
오운정 마당의 벤치에서 밤과 대추를 나누며 쉼을 하는 백두들.
오운정을 뒤로하고 사면으로 이어진 산책길로 잠시 진행하면, 일명 '미남불(美男佛)'로 알려진 석조여래좌상을 만나게 되고,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일명 미남불인 석조여래좌상은 통일 신라(9세기) 불상으로, 경주 이거사에 있던 것을 1912년에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다가 1989년에 청와대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현재 위치로 다시 옮겼다. 2018년 4월 20일에 보물로 지정됨.
미남불이 하루도 빼지 않고 바라보는 경복궁과 남산 방향.
잠시 더 사면 산책로를 따르다가,
지능선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북악산 방향 오름길은 통제되고 있어서 좌틀하여 아래로 향하면,
수궁터와 소정원 입구 사이로 내려서게 되고,
창덕궁 후원 애련정 옆 석문인 불로문(不老門)을 본떠 만든 청와대 불로문을 들어서면 소정원이 나오는데,
본관 앞 넓은 잔디밭인 대정원과 달리 소정원은 아늑한 숲이다.
소정원 숲의 나무들이 꽤 울창해 햇빛이 파고들 틈이 없을 만큼 그윽한 그늘을 만든다. 소정원은 청와대 부속 건물 곳곳으로 들고 나는 통로다. 자연과 막힘없이 소통하려는 우리 전통 건축 방식인 차경(借景, 자연을 빌려 정원으로 삼는다)을 떠올리게 한다.
청와대 쥔장의 시름을 달래주었을 쉼터.
소공원에서 좌측 녹지원 방향으로 내려서다가,
작은 개울을 건너기 전 좌틀하여 계곡 상류 방향으로 이어진 산책길로 들어서면,
개울 건너편으로 상춘재가 자리하고 있고,
커다란 물고기가 노니는 개울을 건너,
탐방객들의 흔적이 뜸한 계곡 상류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
계곡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자리한 벤치에서 배낭을 내리고 청와대 경내에서는 금지된 음식물 섭취를 시도하는데, 그래봤자 과일과 커피 정도일 뿐이지만 내부 사람들이 보게 되면 금방 제지당하게 된다.
관저에서 춘추관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올라 아래쪽 좌측의 침류각을 들렀다가,
<침류각>
고종 때 경복궁 후원을 만들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89년 청와대 대통령 관저 건립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지정.
다시 도로로 나와 우측의 숲길을 따라 내려서면 의전 행사가 열렸던 상춘재가 나오고.
<상춘재(常春齋)>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 귀빈들에게 우리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하거나 의전 행사, 비공식회의 장소 등으로 사용됐다. 현재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사 별관인 매화실(梅花室)이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 시절 상춘실(常春室)로 그 이름을 개칭해 사용해 왔으며, 1978년 3월 천연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로 개축했다. 이후 상춘재(常春齋)로 이름을 명명하고 1983년 4월 연면적 417.96㎡(126평)의 전통적인 한옥식 가옥으로 신축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상춘재 전경.
상춘재 앞으로는 청와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녹지원이 펼쳐진다.
<녹지원>
녹지원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 종의 나무와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으로 문·무의 과거를 보는 장소로 이용됐으며, 이후 정원이 되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의 부지로 사용됐다. 야외행사장으로도 이용됐으며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150여 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녹지원 중앙에 자리한 170여 년 된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품 있는 한국산 반송(盤松) 모습.
녹지원 반송 배경의 포토 포인트에서.
녹지원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여민관 방향 산책로를 따르다가,
반송과 자리한 탁 트인 푸른 잔디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주마간산 격으로 진행된 청와대 관람을 마무리하고 춘추문을 나서면,
좌측으로 춘추관이 보이며 춘추관 앞 잔디 위로 남산타워도 보인다.
<춘추관>
춘추관은 대통령의 기자 회견 장소와 언론 취재 본부로 사용되던 곳이다. 춘추관은 고려와 조선 시대 때 역사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과 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역사를 엄정하게 기록하고 자유 언론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춘추관은 맞배지붕에 흙기와를 올려 우아하고 전통적인 멋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춘추관 전경.
춘추관 앞 잔디마당에서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여민관과 인왕산 방향.
<여민관/대통령비서실>
대통령비서실은 여민 1·2·3관으로 이뤄져 있다. 여민은 ‘여민고락(與民苦樂)’에서 따온 이름으로 ‘대통령과 비서진들이 국민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민 1관은 2004년에 완공됐으며 2관(구 신관) 및 3관(구 동별관)은 각각 1969년, 1972년에 건립됐다. 여민 1관에는 대통령 간이집무실 등의 주요 시설이 위치했으며, 에너지 절약을 위해 외단열 시스템을 적용해 건립됐다.
두 시간여만에 청와대 대충 모두 둘러보기를 마감하고, 춘추관 뒤로 이어진 등산로로 들어서며 최근에 개방된 북악산 남측의 청와대 주변 등산로 탐방에 나선다.
1968년 북한 공비들이 벌인 1.21사태 후 폐쇄되었던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고 북악산을 오르는 등산로 2개 코스도 공개됐다. 하나는 청와대 서편 칠궁에서 출발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청와대 동편의 춘추관 뒤쪽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두 코스는 중간 거점 장소인 백악정에서 만나 하나로 연결된다. 칠궁 방향 코스는 전체적인 길이는 좀 더 짧지만 가파른 계단 구간이라 다소 힘에 부치고, 춘추관 방향은 오르막길이지만 계단이 없이 경사가 급하지 않아 비교적 순탄한 편이다. 어느 길로 가든지 백악정까지는 약 20분 남짓이면 다다르고, 백악정에서 다시 청와대 전망대까지 약 10분이 소요된다.
우리는 춘추관 뒤로 올라 북악산 남사면의 등산로를 둘러보고 칠궁 방향으로 하산할 예정으로,
청왕대 돌담을 따라 이어진 제법 가파른 포장도로를 오르면,
우측 말바위 능선 방향.
도로 우측의 북악산이 멋지게 조망되어 배낭털이 장소로 예정했던 널마루 쉼터를 다른 산객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그냥 지나치고,
칠궁 방향 등산로와 합쳐지는 백악정 앞 삼거리에서 우틀하면,
작은 정원과 쉼터가 자리한 백악정이 나타난다.
<백악정>
북악산 남측에 있는 쉼터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기념식수가 있으며, 청와대 전망대로 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백악정 뒤편 철망문을 통과하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 길은 청와대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일방통행길이므로 무조건 우측으로 진행해야 하고,
가팔라 보이는 산 사면으로 이어진 데크길을 다르면,
좌측 능선으로 이어진 청와대 전망대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바로 우측 아래 삼청쉼터 방향 갈림길을 지나서 직진의 청운대 쉼터 방향 오름길로 진행하면,
제법 가파른 돌계단 오름길을 오르게 되고,
이내 나무둥치에 '만세동방' 표지판이 걸려있는 쉼터에 도착한다.
<만세동방>
북악산 동쪽 만세동방 계곡의 중턱에는 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터의 바로 위 바위에는‘萬世東方聖壽南極(만세동방성수남극)’이라는 각자(刻字)가 있는데, 이로 인하여 일대의 계곡을 ‘만세동방 계곡’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만세동방은 ‘동방(東方:삼천갑자를 산다는 전설 속의 동방삭)이 만세(萬世:오랜 세월)가 되고, 성수남극은 성수(聖壽:임금의 수명)가 남극(南極:남극 하늘에는 사람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전설을 지닌 노인성이 있다)이 되길 바란다’는 뜻이다. 이 각자는 왕궁과 근접한 곳에 있다는 점, 그리고 단정한 글씨, ‘성수’등을 언급한 점으로 볼 때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시 이 계곡의 약수터에서 약수를 떠다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 약수터는 1968년 1·21사태 이후 출입이 금지되었다.
바위에 '만세동방 성수남극'이 새겨진 석간수가 흐르는 약수터 모습.
'음용불가'의 석간수가 흐르는 만세동방을 뒤로하고 데크목 산책로를 따르면,
좌측 청운대와 우측 숙정문 방향 갈림길 삼거리의 청운대 전망대가 나오는데, 우리는 좌측 청운대를 거쳐 북악산 정상을 다녀오기로 했지만 각종 먹거리를 넣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3시간여의 청와대 탐방을 하느라 지치기도 했고 점심시간에도 늦었다며 북악산 정상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측 숙정문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삼청쉼터를 경유하는 단축코스로 진행하기로 한다.
청운대 전망대의 조망 안내도.
미세먼지와 흐린 날씨로 시야가 맑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는 서울 조망.
숙정문 방향으로 이어진 데크목 등로를 따르다가 우틀하여 삼청쉼터 방향 내림길로 들어서면,
제법 가파른 계단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법흥사 터가 있는 꾀나 넓은 공터에 벤치가 있는 쉼터에서 오손도손 둘러앉아 간식을 나누며 느긋한 쉼을 한다.
<법흥사 터>
법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북악산 동편 기슭에 세운 절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축대, 주춧돌만 남아 있다.
법흥사 터 전경.
산객들의 자취가 뜸한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내려서는데,
가운데 돌탁자도 있어서 둘러앉아 운치 있는 쉼을 하기에 좋은 장소들도 보이고,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계곡을 건너며 내려서면,
옥호정(沃好停)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쉼터의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리는 우틀하여 만세봉방 방향으로 진행한다.
제법 가파른 데크목 계단 오름길을 오르면,
지능선 마루 작은 쉼터를 지나게 되고,
다시 지계곡을 향해 급하게 내려섰다가는,
길게 이어진 계단길을 올라 우측 만세동방 방향과 좌측 청와대 전망대 방향 갈림길 삼거리에 도착하여,
좌측 청와대 전망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청와대 외곽 울타리와 나란히 이어진 데크길을 따라 청와대 전망대 방향으로 진행하면,
뒤돌아본 삼청공원 방향으로 계동의 중앙중학교 교정이 내려다 보이며,
좌측 청와대 방향으로 남산이 연무와 미세먼지로 흐릿한데,
살짝 당겨본 남산 방향으로 청외대의 춘추관과 여민관 그리고 경복궁이 조망되고,
청와대 외곽 울타리를 따라 이어진 데크길에 작은 공터를 만든 청와대 전망대가 나온다.
청와대 방향 조망.
청와대 전망대를 뒤로하고 일방통행로를 따라 내려서면,
다시 백악정을 지나게 되고,
백악정 앞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칠궁 방향으로 내려가면,
돌아본 북악정과 북악산 정상 방향.
앞쪽으로 서촌과 인왕산이 조망되는데, 인왕산 좌측 정상부 아래는 치마바위, 오른쪽은 기차바위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얽힌 2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치마바위라고 불리게 된 것은 중종반정 후 중종은 사랑했지만, 신하들이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비가 된 단경왕후가 인왕산 인근 친정에 머무르며 중종을 그리워하여 치마바위에 다홍치마를 걸어 놓으면 중종이 경회루에서 그걸 보며 그리워했다고 해서 치마바위라 불려졌다고 한다. 참고로 중종반정 전에 반정 일당이 신수근 집으로 찾아와서 '누이가 중요합니까? 딸이 중요합니까?'라고 미리 신수근의 반정 참여의사를 우회적으로 타진했다고 한다. (신수근의 누이가 연산군의 비이고, 딸이 왕으로 추대될 진성대군(나중에 중종)의 아내였다고 한다.) 이에 신수근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반정 때 제일 먼저 죽였다고 한다.
지금은 흐려서 보이지 않지만 맑은 날 자세히 보면 인왕산 정상 아래의 바위에 무슨 글자인지는 모르나 바위가 더럽혀진 것 같이 보인다. 일제가 중일전쟁 승리 후 조선 민중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서울 한복판인 경복궁에서 눈만 들면 보이는 인왕산 치마바위에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皇紀 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 十六日(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朝鮮總督南次郞(조선총독남차랑)'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한 글자 크기가 자그마치 사방 3.6m에 깊이 15cm였다고 한다. 해방 후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자 정으로 쪼아내어 글자는 판독이 불가하나 바위가 더럽혀졌다는 아픈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바위라고 한다.
인왕산 조망.
청와대 담벼락을 끼고 이어진 등로를 따라 내려가면,
청와대 뒤편 북악산 등산로의 날머리로 예정한 칠궁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여 북악산 등산로 탐방을 마감하고 잠시 도로를 따르다가,
청와대 서편에 자리한 조선 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을 둘러보기로 한다.
<칠궁(七宮)>
칠궁은 조선 시대 때 왕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청와대 서남쪽에 있다.
육상궁(毓祥宮·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
저경궁(儲慶宮·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대빈궁(大嬪宮·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연호궁(延祜宮·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
선희궁(宣禧宮·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경우궁(景祐宮·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
덕안궁(德安宮·고종의 후궁 엄씨)을 모신 사당 일곱 개가 있어 칠궁이라고 한다.
청와대와 가까워 1968년 이후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으나, 2001년 11월 24일부터 일반에게 다시 공개된 문화유산이다.
칠궁 안내판.
칠궁을 둘러보고 나와 도로를 건너면,
옛날 궁정동 안가 터인 무궁화동산이 나오고,
<무궁화동산>
무궁화동산은 옛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전가옥(안가) 터에 마련된 시민휴식공원으로, 여기서 1979년 10월 26일, 일명 10.26 사태 때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고, 김영삼 대통령 때 허물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본래 이곳은 청와대 구내로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었으나 1993년 청와대 앞길이 개방된 뒤 시민공원으로 조성됐다. 공원 내에는 나라꽃 무궁화와 함께 각종 수목과 야생화가 식재되어 있으며, 맞은편에는 분수대가 있어 청와대를 찾는 관광객과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영빈관 앞 도로를 건너 옛날 청와대 쥔장이 이사 가기 전에는 늘 1인 시위가 벌어지던 청와대 분수대로 가서,
오늘 탐방한 청와대와 북악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본디 청와대와 북악산 탐방을 마치고 부근 서촌에서 점심식사를 하려고 예정했지만,
물고기를 편애하시는 분들이 많아 노량진수산시장으로 가기 위해 경복궁역으로 향하는데,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 행차를 꾸민 행렬이 축제장으로 향하는 모습도 보이고,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히려 눈길을 끌더니,
경복궁 역에 도착하여 청와대와 북악산 탐방을 모두 마감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노량진수산시장으로 향한다.
노량진역에서 수산시장으로 가다가 본 여의도 63빌딩 모습.
노량진 수신시장의 한 식당에서,
푸짐한 뒤풀이 시간을 가지며 보람찬 하루를 마감한다.
긴 뒤풀이를 마치고 식당 앞에서 본 여의도 조망.
어린시절 누군가가 "나중에 뭐가 될래?"라고 물으면,
서슴없이 "대통령요!"라고 답했던 이유가
혹시나 말로만 듣던 청와대를 한번 구경해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 소망을 가진 국민들의 소원도 풀어주고
한 국가의 리더로서 멋지게 일을 해 보려고 용산으로 이사 가신 분의 희망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며
해소키 어렵던 난감한 호기심을 해소케 해 준 집주읹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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