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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호미기맥 02차(당산재~순지마을) : 치술신모도 봤을 동해 일출 !

by 재희다 2024. 6. 4.


산행장소 : 호미기맥 02차(삼강봉~순지마을) 울산시 울주군, 경북 경주시. 

산행일시 : 2024. 01. 27.(토) 
산행코스 : 당산고개(170m) ~ 외동 갈림길 ~ 643.8봉 ~ 박제상(울산)망부석 ~ 치술령(766.7m) ~ 치술령(경주)망부석 ~ 721봉 ~ 묵장산(781.2m) ~ 700.7봉 ~ 서라벌CC ~ 421봉 ~ 사일고개/서낭재(226m, 904번지방도) ~ 327.5봉 ~ 제내고개(7번국도) ~ 270.8봉 ~ 365.7봉 ~ 마석산(531m) ~ 420.4봉 ~ 북토마을 ~ 북토교(원동천) ~ 득전농장 ~ 순지마을/태화식품 사거리 (21km, 9시간 소요) 

산행참석 : 16 백두.

 
▶ 즐산팀은 당산재에서 출발하여 사일고개까지 11km 산행.
 
<산행지도>

(오기:묵방산 => 묵장산)

 

 

매스컴에는 지구 온난화로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고, 우리나라의 유난히도 따뜻한 올 겨울 날씨도 온난화의 영향이라고 한다. 분명 예년보다 춥지 않은 겨울 날씨가 이어지고 있지만, 산행일을 앞두고서는 매서운 한파가 몰려와 겨울 산행을 해야 하는 산꾼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그리고 지난 호미기맥 1차 산행에서 19명이 참석하여 산행을 종주한 분이 고작 5명이었는데, 이번에는 날씨 때문인지 3명이나 줄었으니 혹여 종주자가 더욱 줄어들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염려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제벌 걱정과 연예인 걱정이라 했는데, 예정하는 산행을 종주하던 못하던 염려할 바가 아니고 또한 산행 참여자가 줄던 늘던 그 또한 염려할 바가 아님이 분명하다. 내게 산행이란 '비우는 의식'이니 그 모든 잡스러운 것들을 비우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일반인들이라면 고개를 내젓는 20km가 넘는 마루금 산행이 부담스러운 분들도 조금은 여유롭게 마루금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즐산팀 코스를 따로 진행하고 있다. 당일 코스 중에서 조금 짧은 핵심 부분만을 산행할 수 있도록 출발 시간과 지점 그리고 도착 지점을 별도로 정하여 산행을 하게 된다. 그래서 보통은 종주팀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출발하게 되는데, 오늘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박재상 부인 치술신모가 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렸다는 치술령에서 아침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산행 시작지점인 당산고개에서 함께 출발하기로 한다. 

 

 

이곳 당산재에서 치술령까지의 도상 거리가 4km 정도이고 일출이 7시 25분쯤이라, 4시에 일어나 산행 준비를 하여 4시 반쯤에 산행을 시작하면, 치술령 정상에서 동해 바다를 솟구쳐오르는 아침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며, 당산재 남쪽 기슭에 있는 폐공장 앞에 주차한 버스에서 산행준비를 마치고는 차가운 한기에 몸을 내맡겨, 

 

지난 구간 날머리에서 북쪽 고갯마루로 100여 미터 올라가 가로수 나무둥치에 걸린 '당산고개' 코팅지를 카메라에 담고서는, 

 

길 건너편 축대가 끝나는 지점의 들머리로 들어서며 호미기맥 두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희미한 길흔적을 따라 우측 폐공장 터 조성을 위해 쌓은 듯이 보이는 축대 위로 올라서서,  

 

능선 좌측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능선 위로 올라 넓은 터를 차지한 경주이씨 가족묘지를 지나면,  

 

송전탑으로 연결되는 길이라서 그런지 넓게 정비된 수레길이 이어지다가, 

 

송전탑(#4) 아래를 지나고, 

 

이내 또다른 송전탑(#5)이 있는 능선에 올라서며 능선등로는 우측으로 휘어져 이어지더니, 

 

한겨울임에도 파랗게 보이는 밀양박씨 묘지를 지난다.

 

 

작은 굴곡조차 여유롭게 느껴지는 호젓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표지기가 걸린 220봉쯤에서 좌향하여 내려가는데, 

 

나뭇가지에 걸린 '준·희'님의 격려문이 캄캄한 한밤에 초행의 산길을 가는 산꾼에게는 구원의 손길인양 반갑기만 하고, 

 

잠시 내려서다가 편평한 안부를 지나는데, 

이곳이 200고지로 766.7m인 치술령까지 2.8km 거리에 고도를 560여 미터나 높여야 하는 오름길이 이어지게 된다. 

 

 

따르던 널찍한 수레길을 우측으로 보내고 직진의 희미한 숲길로 들어서자, 

 

가파른 사면으로 희미한 오름길이 이어지며, 

돌아본 두동면 월평리 방향

 

차츰 고도를 높이자 바짝 마른 등로의 흙이 미끄러져내릴 듯이 더욱 가팔라지더니, 

 

가빠진 숨을 고르라는 배려인듯 가파르던 등로가 420봉쯤 직전에서 우측 사면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우측 당산마을(0.9km) 방향 오랜 세월을 견딘 이정표가 있는 편평한 안부에 도착하여, 

오늘 처음 만나는 이정표에서 처음으로 하는 쉼을 해야 한다며 배낭을 내리고 따뜻한 커피 타임을 갖는다.   

 

 

따뜻한 커피 한잔에 한결 여유로워진 기분으로 치술령을 향한 오름길로 들어서서,  

 

10여 분의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500봉쯤에 오르니 좌전방으로 가야 할 치술령 능선이 가늠되고, 

 

잠시 내려서서 우측 반석갤러리 방향 갈림길 이정표와 벤치가 있는 안부 쉼터를 지나 다시 오름길로 들어서자, 

 

가파르고 좁은 등로에 깊게 파놓은 산악오토바이 바퀴 자국이 걷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고, 

 

한참의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자 다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또다시 오름길을 잠시 더 오르자 둥그런 봉우리의 나뭇가지에 표지기들이 걸린 643.8봉을 지나게 되는데, 

 

사위가 어슴프레 밝아오자 치술령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픈 산꾼의 마음이 급해지고, 

 

일출을 놓치지 않으려는 산꾼은 사라지는 어둠을 붙잡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동쪽 하늘이 바라다 보이는 710봉쯤에 올라서자,

가파르던 능선 오름길은 완만하게 변하여 우측 북동 방향으로 휘어지며 이어진다. 

 

 

치술령 주능선이라 그런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능선길을 잠시 더 진행하면, 

 

좌측 참새미(0.1km) 방향 이정표가 있는 데크목 전망대에 도착하는데, 

 

남쪽 은을암이 있는 국수봉 방향의 전망데크에는 '박제상 유적(망부석)'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박제상 유적/망부석(朴堤上 遺蹟)>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417~458 재위) 때의 유명한 충신이다.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국(倭國)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인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을 몹시 보고 싶어 했다. 박제상은 왕의 명령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구출해 냈다. 다시 왜국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 나 자신은 붙잡혔다. 왜 왕이 자신의 신하가 되면 상을 많이 주겠다고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왜 왕은 심하게 고문해도 소용이 없자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 치술령에 올라 왜국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이 돌로 변해 이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고 한다.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1997. 10. 9. 지정) - [설명판 내용] 

울산광역시에서는 치산서원(鵄山書院) 터, 은을암(隱乙巖), 망부석(望夫石) 등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 관련 유적 3곳을 1997년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였다. 치산 서원은 박제상과 그 아내인 금교부인(金校夫人, 또는 김씨 부인)을 기리는 서원이며, 망부석은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기리다 죽은 뒤 몸이 굳어져 된 바위라고 전해진다. 은을암(隱乙庵)은 조계종 통도사의 말사로, 사찰 내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새가 되어 숨어들었다는 바위인 은을암(隱乙巖)이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은을암이 자리한 남쪽 국수봉 방향 조망.

살짝 당겨본 남쪽 국수봉 방향

 

남서쪽 연화산 방향

남쪽 울주군 범서읍 방향
살짝 당겨본 연화산 방향
당겨본 영남알프스 신불산 방향

 

전망대 울타리 우측에는 1979년 울산 향토사 연구회에서 바위면에 '望夫石'이란 대형 글자를 새긴 후부터 망부석으로 불리기 시작한 바위가 있다. 

종주팀의 울산 망부석 인증

 

 

전망대를 뒤로하고 치술령 방향으로 몇 발자국 오르면 빛바랜 이정표가 있는 우측 만화리의 법왕사 방향 갈림길을 지나, 

 

세차게 불어오는 겨울바람과 맞서며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바리케이드인양 길을 막아서는 바위를 올라서면, 

 

꾀나 넓게 조성된 공터에 오석의 '신모사지' 비석과 정상석이 있는 치술령 정상에 도착하는데, 

 

<치술령(鵄述嶺, 766.7m)>
경상북도 경주시의 외동읍 녹동리와 울산광역시 두동면의 경계선에 있는 산으로, 지술령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나물왕 김제상'에 눌지 마립간의 동생인 미사흔을 구하러 왜국에 갔다가 죽은 박제상[김제상으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다]의 아내가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치술신모에서의 치술이 바로 치술령을 의미한다. 치(鵄)는 솔개 등의 새를 나타내는 단어이고, 술(述)은 수리, 즉 높은 산을 뜻하므로 치술령은 '솔개가 사는 높은 산'을 의미한다. 남쪽의 울산 방향으로 향하는 곳의 가장 높은 산이기 때문에 동해와 일본을 향한 전망이 좋다. 『삼국유사』에는 '仍爲鵄述神母 今祠堂存焉(그리하여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있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과 신모사지(神母寺址), 기우단 등이 남아 있다. 『조선지형도』(울산)과 『조선지지자료』에는 모두 치술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때맞춰 붉은 불길이 번지고 있던 동해에서 아침해가 떠오른다. 와~아~ 해다!

 

 

신모사지 비석과 치술령 정상석을 지난 지점의 가야 할 묵장산 방향 들머리 옆에는 '지술령 망부석(至述嶺 望夫石)' 표지판(치술령(鵄述嶺)을 지술령(至述嶺)이라고도 함)이 세워져 있고, 바로 우측 데크목 계단길 아래는 동해바다가 시원스레 조망되는 치술령 망부석(鵄述嶺 望夫石)이 있다. 

 

<치술령 정상의 신모사지(神母祠址)>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朴提上)의 아내를 배향하던 사당 신모사(神母祠)가 있던 곳으로,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치술령(致述嶺) 정상에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왜국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신라로 탈출시키고 왜군에게 잡혀 순절한 뒤 그의 아내가 날마다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 땅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신라 사람들이 그녀가 죽은 자리에 신모사(神母祠)를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 치술령 정상에 '신모사지(神母祠址)'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치술신모와 망부석」의 전반부는 왜국에 가서 죽음으로 충을 다하는 박제상(朴堤上)의 충절담이고, 후반부는 박제상 아내가 일본에 간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죽었는데 몸은 망부석(望夫石)[울주군 두동면 월평리 산156]이 되었다는 암석 유래담이고, 혼은 수리새가 되어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는 치술령(鵄述嶺) 산신 유래담이다. 또한 새가 날아와서 앉은 자리를 비자현(飛自峴), 비조(飛鳥) 등으로 부르고, 새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隱乙巖)으로 각각 불렀다는 지명 유래담이기도 하다. 이를 「치술령 망부석」 또는 「치술령과 망부석」이라고도 한다.

 

치술령 정상 인증. 

떠오르는 동해 일출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울주군 두동면 관내를 지나 온 호미기맥은 이곳 치술령에서 경주시 외동읍과 만나 시도를 경계하며 북쪽 묵장산 방향의 남산방면 종주길을 따라 이어지게 되는데, 치술령 정상에서 좌측으로 가면 은을암이라는 치술령 정상 이정표가 있고, 

 

<은을암(隱乙庵)>
은을암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작은 풍채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조그만 사찰이다. '새(乙)가 숨은(隱) 바위(巖)'라는 뜻의 은을암은 망부석이 된 박제상 부인의 넋이 새가 되어 숨어든 바위(隱乙岩) 앞에 세운 암자다. 극락전과 범종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는 죽은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들었다는 바위동굴도 있다고 한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417~468) 때의 유명한 충신이었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장수왕을 설득해서  눌지왕의 아우 복호를 데려왔다. 복호를 데려온 자리에서 눌지왕이 또다시 왜국에 있는 아우 미사흔을 그리워하자 곧장 왜국으로 가서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왔다고 속이고 미사흔을 빼돌려 신라로 도망치게 했지만 자신은 붙잡히고 만다.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청하는 왜왕의 요구를 거절한 박제상은 결국 목도(木島)에서 불에 타 숨지게 된다.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화석이 되어  몸은 망부석(望夫石)이 되었고, 넋은 새가 되어 날아가 국수봉의 바위 동굴로 숨어들었는데, 박제상 부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암자를 짓고 ‘은을암(隱乙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치술령 정상석 앞쪽 데크목 계단을 내려가면 해뜨는 동해가 시원하게 조망되는 망부석이 있다.

 

<치술령 망부석(鵄述嶺 望夫石)>
이곳은 나라를 위하여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가 죽어서 돌로 변해버린 바위가 있다고 하여 유명한 곳이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의 신하였다. 눌지왕은 신라가 힘이 약해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그리워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눌지왕의 은밀한 명령을 받들어 우선 고구려에 가 있던 복호(卜好: 보해寶海)를 구해왔다. 다시 왜국으로 건너간 박제상은 미사흔(未斯欣: 미해美海)도 구출하여 신라로 보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그 자신은 탈출하지 않았다. 이에 왜국 왕은 박제상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라고 강요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여 순국하였다. 한편 그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에 올라 왜국 쪽을 바라보며 슬피 울다가 죽어서 마침내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치술령 정상 부근에는 이 바위 외에도 망부석이라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으나 정확히 고증되지는 않았다. 그중 이 앞의 거대한 바위에 올라서면 울산 앞바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므로 이곳이 망부석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짐작된다. [안내판 내용]

치술령 정상 도경계 아래 경주 땅에 망부석이라 이름 붙여진 암반이 이곳이고, 조금 전에 지나온 0.3km 전방의 울산 망부석 바위가 각각 따로 이름 붙여져 있는데, 두 지자체에서 서로 자기 지역의 망부석이 진짜 망부석이라고 은근히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치술령 망부석의 위치 논쟁>
호미기맥의 치술령 구간에는 망부석이 2개나 있다. 하나는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울산 망부석'이고, 또다른 하나는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경주 망부석'이다. 두 지자체 간에  무슨 이해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외지인들에겐 상당히 혼란스럽다. 분명 어느 한 곳은 아닐진대 정확한 역사적 고증으로 정리되었으면 한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부인이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로 변했다는 망부석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울산광역시는 울주군 두동면과 경주시 외동면의 경계인 치술령(765m) 중턱에 위치한 바위(두동면 소재)를 망부석이라고 지정한 반면, 경주시는 치술령 정상에 있는 큰바위(경주시 외동읍 소재)가 정확한 위치라고 두 도시 간에 위치논쟁이 치열하다.
울산시는 오래전부터 치술령 정상에서 서쪽으로 300m 아래인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의 큰 바위가 망부석이라고 확신, 관광 안내자료에도 이 바위를 망부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울산시는 시기를 알 수 없으나 바위 남면에「望夫石」이라고 뚜렷이 새겨져 있으므로 경주시가 주장하는 망부석의 위치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주시는 치술령의 중턱에 있는 울산시가 주장하는 바위는 능선에 가려서 동해바다를 볼 수 없는 곳이라며 “치술령 동쪽에서 20m 아래에 있는 큰 바위는 동해를 훤히 볼 수 있는 곳이라서 박제상의 부인 김씨가 일본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었다는 문헌상의 기록과 일치한다”며 이 바위를 망부석으로 단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공식적으로 2개의 망부석이 생긴 셈인데, 학계에서도 고증할 만한 자료가 미비하여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망부석에서 맞이하는 동해 일출!

 

치술령 망부석에서 맞이한 동해 일출! (32초)

 

 

 

 

찬바람을 피해 망부석 안내판 앞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동해에서 떠 오르는 해를 봤냐!"는 들뜬 목소리와 함께 즐산팀들이 도착하여, 

 

함께 동해를 박차고 오른 태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넓지 않은 망부석을 즐산팀의 식당으로 내어주고서, 

 

사면을 따라 기맥 능선으로 오르며 다시 호미기맥 이어걷기에 나선다. 

 

 

치술령 능선을 따라 나뭇가지 사이로 건너다 보이는 묵장산을 향하면, 

 

우측 '약수터'와 석계 상동못 방향 안부 갈림길을 지나 오름길로 접어들어, 

 

 암반 지대를 우회하여 오르면, 

 

'준.희'님의 '호미지맥 718.4봉' 산패가 걸린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돌아본 치술령 방향

 

 

낙엽이 도톰하게 덮인 능선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 능선숲길을 따라 묵장산을 향하면, 

 

편평한 능선 숲으로 이어진 다시한번 더 걸어보고 싶은 숲길이 이어지다가, 

 

주변 숲이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변화를 주어 걷는 즐거움을 배가해 주고,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완만한 오름길을 잠시 더 이어가노라면, 

 

'치술령(울산)-금오봉(경주)' 팻말과  '묵장산(781.2m)' 산패가 걸린 오늘의 최고봉을 지나게 된다.

 

<묵장산/묵정산(墨匠山/墨正山, 781m)>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와 경북 경주시 외동읍에 걸쳐있는 산으로 묵장산 또는 묵정산이라고도 한다. 지명은 산 아래에 있는 월평(月坪) 지방을 먹장(墨匠)이라 불렀는데서 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먹장(墨匠)의 ‘匠’이 갓재이, 노름재이, 점재이 등 천시되는 말로 전락하자 묵정(墨正)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묵장산을 뒤로하고 편안한 능선 내림길을 내려가노라면 잡목이 무성한 751봉 폐헬기장을 지나게 되고, 

751봉 헬기장을 지나는 백두들

 

잠시 더 편평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우측 '석계 자연농원' 방향 갈림길을 지나서, 

 

이곳 치술령 능선은 언제 걸어도 참으로 걷기좋은 능선이라는 생각에 쉬엄쉬엄 기맥 능선을 따르다가,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서라벌CC 방향 뒤로 우람하게 보이는 삼태지맥의 삼태봉쯤

 

경주 남산으로 이어지는 치술령 능선을 두고 우틀하여 내려서야 하는 700봉을 향해 완만한 오름길로 접어들면,  

 

어렵잖게 무너진 참호의 흔적과 폐헬기장의 흔적으로 보이는 깨어진 보도블록 조각이 보이는 700.7봉에 도착하는데, 

 

이곳 700.7봉에서 직진의 경주 남산 금오봉 방향 능선을 두고 우틀하여 서라벌CC 방향의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서야 해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따뜻한 차를 나누며 쉼을 한다. 

 

<700.7봉>
잡목이 빼곡한 봉우리 가운데의 커다란 나무 중간쯤에 '준.희'님의 700.7봉 산패가 걸려있고, 옛 참호의 흔적이 희미하다. 호미기맥은 이곳에서 우틀하여 급경사 내림길로 이어지는데, 이곳부터는 지금까지 호미기맥길을 같이 해 온 울산과 완전히 헤어져 경북 경주시로 접어들게 된다. 

 

 

 

700.7봉에서 우틀하여 급경사의 사면으로 이어진 희미한 등로로 들어서면, 

 

700.7봉에서 서라벌CC 입구까지 1km 남짓을 내려가며 고도를 700에서 300까지 낮추어야 하는 급경사 구간이다. 게다가 능선 구분이 모호한 사면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3개의 지능선이 갈라지므로 지맥꾼들의 알바도 잦은 곳이며, 가끔씩 암릉도 있는 급경사 육산 등로에 낙엽까지 쌓여 있어서 무척이나 미끄러우므로 조심스레 내려서야 한다. 기맥길은 첫번째와 두번째 지능선 분기점에서는 그냥 우측 정규 등로를 따르면 되고, 450고지 정도의 세번째 지능선 분기점에서는 뚜렷한 우측의 정규 등로를 두고 좌측 숲으로 들어야 하는데, 기맥 능선길이 험한데 비해 별다른 특이점도 없고 서라벌CC 입구에서 다시 합쳐지므로 우측의 뚜렷한 정규 등로를 따라 진행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좌측 빼곡한 나뭇가지 사이로 경주시 외동읍 제내리 방향이 내려다 보이고, 

 

커다란 바위 사이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첫번째 지능선 분기점에서 등로는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지만, 좌측 전망바위에 서면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동북쪽 토함산 방향. 

기맥길을 두고 논란의 중심이 된 토성소류지 조망

 

동쪽 서라벌CC와 삼태봉 방향. 

 

동남쪽 울산 방향. 

 

 

멋진 조망을 선사받은 전망바위를 되돌아나와 진행방향 우측의 등로를 따라 내려서서, 

 

다시 급경사의 사면길을 내려서다가, 

 

별다른 흔적이 없는 좌측 방향 두번째 지능선 분기점쯤을 지나고, 

 

지도상 기맥길이 직진의 정규등로를 두고 좌측으로 이어지는 세번째 지능선 분기점인 450고지쯤에서,

희미한 좌측 기맥길을 두고 우측의 뚜렷한 정규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서라벌CC로 이어진 시멘트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좌측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앞쪽으로 서라벌CC 입구를 지나서 가야 할 기맥능선(좌측)이 가늠되고, 

 

우측으로 서라벌CC 9번 홀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도로를 막아선 철망문을 우회하여 다시 도로를 따르면, 

 

우측으로 서라벌CC 클럽하우스가 내려다 보이고, 

 

<서라벌 CC>
경북 경주시 외동읍 제내리 산 124에 위치한 골프장으로 36홀을 갖춘 골프장이다. 한겨울이라 휴장을 한 모양인지 클럽하우스 주차장이 헐빈하다. 

 

이내 서라벌CC 입구에 도착하여 도로를 건너 직원 주차장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앞서 내려간 여성회원 두 분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세번째 지능선 분기점에서 좌측 기맥능선으로 진행한 정통파 김전무가 도로로 내려서고 있다.
좌측 서라벌CC 정문 방향
우측 서라벌CC 클럽하우스 방향

 

 

서라벌 CC 진입 도로를 건너 직원 주차장 방향 도로를 따라도 되지만, 

 

지름길로 추정되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야 할 기맥능선 방향으로 진행하여,  

 

다시 도로로 내려서서 기맥 능선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앞서간 여성회원으로부터 '한참을 내려가는데도 표지기도 보이지 않는다"며 전화가 걸려온다. 

돌아본 치술령, 묵장산 능선과 700봉에서 서라벌CC로 이어진 기맥 능선 조망

 

 

앞서 내려갔던 두 분이 좌측 지능선으로 알바 중이라고 판단하여, 가던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 골프장 진입도로가 나오면 우측 골프장 방향으로 오라고 하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서라벌CC 진입 도로로 되돌아 내려가 잠시 기다리니 알바갔던 두 분이 나타나고, 

 

잠시 재회의 기쁨을 나눈 후,

두 분과 함께 기맥 능선을 향해 직원주차장 앞으로 이어지는 골프장 외곽 도로를 따라 오르면, 

 

잠시 전에 치술령 능선의 700봉에서 골프장으로 내려섰던 기맥 능선이 더욱 뚜렷하게 가늠되고, 

좌측 숲으로 선답자의 흔적이 있지만 너무 거칠어서 무시하고 진행

 

따르던 골프장 외곽도로를 계속 따라도 잠시 후 마루금으로 이어질듯 보이지만, 

좌측 토사 채취장이 있는 곳에서 급좌틀하여 수레길로 들어서서 기맥 능선으로 오르게 되는데, 

 

앞서 갔던 분들이 능선으로 오르는 들머리에서 배낭털이를 하며 기다리고 있다. 

 

 

한두 개 걸린 표지기에 이끌려 들머리로 들어서면 길흔적은 사라지고 없지만 평탄하고 완만한 숲을 오르게 되고, 

 

메워진 참호의 흔적이 있고 잡목으로 둘러싸인 봉우리를 지나서 내림길로 들어서면, 

 

골프장 외곽도로로 이어질 듯 보이는 널찍한 수렛길에 접속하여 좌측으로 진행하다가, 

 

우측 사면 방향으로 이어지는 수레길을 따라도 되지만, 

등로는 아니지만 마루금이고 지름길인 좌측 숲으로 들어서서 오르면, 

 

이내 우측 아래에서 이어오는 뚜렷한 능선길에 접속하게 되고,

좌측 등로를 따라 봉우리 방향으로 오르다가, 

 

봉분이 낮아진 묘지가 자리한 봉우리를 지나 잠시 내려서다가 다시 오르면, 

 

월성이공 묘지가 자리하고 있는 421.2봉을 넘게 되는데,

이후 사일고개까지 200고지 정도를 내려서게 된다.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북향으로 자리한 월성이공 묘지

 

 

월성이공 묘지 봉우리에서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희·준'님의 격려문'을 지나게 되고, 

 

희미하고 거칠지만 완만한 내림길이라 어렵잖게 내려서면, 

 

우측 경주시 외동읍 냉천리 방향 절개지 아래로 최근에 조성되고 있는 공장 건물이 내려다 보이더니, 

 

월성김씨 일가 묘지 3기를 지나서 경주김공과 밀양박씨 쌍분 묘지도 지나서 내려가면, 

 

비문에 부산시청 사무관으로 봉직하였고 원성왕릉 초헌관을 지냈다고 적힌 비석이 있는 '초헌관 경주김공 묘'를 지나, 

 

계단길을 내려가면 '904번 지방도'가 지나는 사일고개/서낭재에 내려서게 된다.

 

<사일고개>
서낭재라고도 하며 2차선의 904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다. 고개 좌측(서편)은 외동읍 제내리 사일 마을 방향이고, 우측(동쪽)은 경주시 외동읍 냉천리 덕동마을 방향인데 냉천리에는 냉천지방산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냉천(冷川)은 찬물이 많이 나는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찬내’라고 부르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냉천(冷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경주시 외동읍지역으로 애기봉산 북서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경주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울산 방면으로 가다가 연안에서 내남으로 넘어가는 904호선 지방도를 따라 우회전하여 동해남부선 철길을 건너면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이 냉천이다. 동쪽은 연안과 입실리, 서쪽은 제내리, 북쪽은 북토리, 남쪽은 석계, 구어리에 인접해 있다. 냉천은 넓은 마석산과 애기봉산 사이의 올망졸망한 작은 산들을 의지해 대체로 넓은 들을 끼고 있는 농촌마을이었으나 최근 공단이 들어서면서 공단지역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사일고개 들머리는 도로를 건너 옹벽이 끝나는 지점으로 들어서서 우측으로 진행하게 된다. 

고개 우측 냉천리 방향
고개 좌측 사일마을 방향에 주유소와 식당이 보인다.
들머리 나뭇가지에 걸린 반바지님의 서낭재(사일고개) 코팅지

 

 

사일고개 들머리로 들어서서 선명하지만 거칠어지는 등로를 따라 오르다가,  

 

봉분이 사라지고 있는 묘지를 지나 잠시 더 오르면, 

 

송전탑 아래 넓게 조성된 경주최씨 묘원이 나오는데, 기맥길은 이곳 묘원에서 좌측으로 꺾어 내려서야 하지만, 직진의 송전탑 우측의 암봉인 327.5봉에 올라 주변을 조망해 보며 토성소류지로 인해 기맥이 어디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논란의 시발점을 직접 살펴보기로 한다. 

돌아본 좌측 앞 421봉과  치술령, 묵장산 능선

 

 <327.5봉 이후 호미기맥의 토성소류지 통과 방법 세 가지에 관한 논란>
첫번째는 327.5봉 ~ 241.9봉 ~ 지초마을 ~ 신원마을 ~ 193.4봉을 지나 136봉으로 연결되는 기맥길로, 제내리입구~신원마을 지나는 곳에 제법 큰 물줄기를 건너야 하는 한계가 발생하는데, 이 물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 울산 태화강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조은산님 지도상 녹색 1번 선]
두번째는 물길을 건너지 않는 맥길을 억지로 진행해 나가는 길로, 327.5봉에서 토성 소류지 방향으로 내려서서 북쪽으로 이어 가 토성 소류지 못 둑길을 지나 원동천 우안을 따라 나가는 길로, 현재는 토성 소류지 물이 제내마을 앞 제방(둑)을 따라 원동천이 되어 흘러 경주 형산강으로 흐르고, 원동천 우안 둑 바깥쪽 물(못둑 아래의 논 물)은 모두 태화강으로 흐른다고 한다. 이 길은 비록 물길을 건너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인공적으로 조성되었을 수 있는 못둑이 기맥 길이 된다는 한계가 있다. [조은산님 지도상 적색 2번 선]
세번째는, 현재 통상적인 기맥길로 인정되고 있으면서 우리가 지나기로 한 맥길로, 'ㄷ자' 형태로 길게 우회하여 거리가 많이 늘어나지만 327.5봉~270.6봉~마석산(531.0m)~북토마을~순지마을을 지나 136봉에서 호미기맥으로 일치된 길에 합류하는 길이다. [조은산님 지도상 분홍색 3번 선]

'조은산'님이 확인한 내용을 요약하면, 예전에 토성 소류지 못둑이 두 번이나 터졌는데, 그 물이 지초마을과 신원마을 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원래 태화강으로 흐르던 물길을 인공적으로 제방을 쌓아 형산강으로 돌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므로, 첫번째와 두번째 길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만 토성 소류지에서 흐르는 원동천이 오래전에 조성되어 비록 인공적이지만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물길을 건너지 않는 길로 의의가 있으므로 답사자의 선택에 따르면 될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더구나 선답자의 조사에 따르면, 토성 못은 17세기 문헌에도 이미 나와 있지만, 원동천이 지방하천으로 고시된 해가 1966년이었고, 1915년 지도에는 원동천의 물길 표시가 없다고 하므로, 원동천 물길은 일제 강점기 전후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물길로 추측되어, 비록 '북토교'로 물길을 건넌다고 하지만 기맥길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인공적인 물길로 맥길이 끊어졌지만 계속 맥길로 인정되고 있는 예로, 한남정맥의 굴포천 방수로 및 경인운하(경인아라뱃길)로 인한 단절과 사천 방수로 공사로 맥길이 끊긴 '낙남정맥'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경주최씨 묘원에서 이제는 기맥꾼의 발길도 끊어져서 그런지 희미해진 흔적을 더듬어 327.5봉을 향해, 

 

잡목의 방해를 뿌리치며 100여 미터를 진행하여 겨우 암릉으로 올라서면, 

 

넓지는 않지만 몇몇이 호젓이 쉴 수 있는 327.5봉 정상에 도착하는데, 잡목 사이로 주변 조망이 조금씩 트인다.

남서쪽 치술령과 묵장산 방향
묵장산 기슭에 자리한 제내2일반산업단지 방향
서쪽 명계리 쪽으로 이어진 7번 국도 방향
서북쪽 가야할 마석산 방향

 

북쪽 241.9봉~지초마을로 이어지는 잡목이 들어찬 논란의 기맥 능선 방향으로, 

사일고개에서 좌측 사일마을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했던 즐산팀이 저 논란의 기맥길을 따라 진행했다고 한다.

 

 

327.5봉에서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경주최씨 묘원으로 되돌아나와 쉼을 하던 분들과 잠시 과일을 나누고는, 

 

경주최씨 묘원에서 진행 방향 직좌틀하여 널찍한 묘지길을 따라 내려서면, 

 

제내리가 시원스레 조망되는 계단식으로 공장부지를 조성하고 있는 절개지 상단에 서게 되는데, 

지나온 사일고개와 묵장산 방향
가야할 마석산 방향

 

절개지를 우측으로 돌아서 내려서며 조성 중인 부지 내 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좌측 삼영기업을 지나 우측 진흥기업 앞에서, 

돌아본 327.5봉 방향

 

2차선 포장도로인 제내길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진행하고, 

 

7번 국도가 지나는 제내2교 아래 제내고개를 지나서 바로 좌측 절개지로 들어서며 366봉과 마석산을 향한다. 

 

 

길흔적을 감춰버린 잡초지대를 오르느라 바지에 달라붙은 까치바늘을 털어내고, 

돌아본 327.5봉 방향

 

잘 가꾸어진 순안김공 부부 묘지로 올라 좌측으로 진행하면, 

 

월성김씨 가족들 묘지 옆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에 접속하여 366봉을 향해 오르게 된다. 

 

 

수레길 수준의 뚜렷한 등로를 따라 표지기가 한두 개 걸린 220봉쯤을 지나고, 

 

완만한 안부를 지나 다시 순안김공 가족 묘지 좌측으로 올라, 

 

꾸준한 오름길을 따라 암릉을 좌회하여 오르면, 

 

갈림길에서 좌측 270.6봉에 올랐다가 되돌아와 우측 '마석산 가는 길'이란 노란 팻말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외동읍 관내를 진행해 온 기맥 길은 270.6봉에서 좌 내남면을 만나 면 경계를 따라 북쪽 마석산까지 진행하게 된다.

가야할 365.7봉(좌)과 마석산(우) 방향

 

 

널찍한 수레길을 따라 편평한 안부를 지나고, 

 

파묘 자리를 지나며 빼곡한 소나무숲으로 이어진 오름길을 오르다가, 

 

점점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따라 바위들이 듬성듬성 위치한 사면을 올라, 

 

산불 흔적인 검게 그을린 소나무 둥치들이 남아있는 능선에 올라 거칠어진 능선을 잠시 더 헤치며 나아가면,

 

'준.희'님의 365.7봉 산패가 걸린 봉우리에 도착하여, 

 

무릎이 불편하다며 쉬엄쉬엄 올라오는 분들을 기다렸다가 우틀하여 마적산을 향해 진행한다. 

 

 

아직도 마적산을 올라야 하고 예정된 시각에 산행을 마치기 위해서는 산행을 서둘러야 하기에 365.7봉 인증만 남기고 바로 우측으로 내려서서 안부를 지나는데, 무릎 통증을 호소하던 분이 우측 제내리 마을로 탈출을 하겠다고 하여, 

 

혹시 탈출하는 등로가 있을까 하고 우측을 기웃거리는데 등로 우측의 묘지에서는 지나 온 묵장산 능선에서 이어져 오는 기맥 능선이 가늠되고, 

 

그렇게 탈출로를 찾기 위해 우측을 살피던 차에 우측 제내리 방향 뚜렷한 수레길을 발견하여 두 분을 탈출케 하고서, 

 

홀로서 앞서간 분들을 쫓아 마석산을 향한 본격적인 오름길로 들어선다. 

 

 

좌측 내남면 명계리 바탕골 방향 지능선 갈림길 삼거리를 지나며 다소간 완만해진 능선 등로를 따르는데,  

 

우측 아래로 호미기맥 종주자들에게 논란이 되고 있는 제내1리의 토성소류지가 내려다 보이고, 

 

 

잠시 전에 올랐던 327.5봉에서 토성소류지로인해 호미기맥이 어디로 이어질지에 대한 논란이 있음을 짚어보았는데,


제내리의 본래의 이름은 토상촌이라고 한다. (제내 : '돌매', '토상촌(吐上村)', '석동(石洞)' 등으로 부르다가, 마을 앞의 토성계(土城谿)에 못을 막고부터 '제내(堤內)', '못안'이라 불렀고, 해방 후부터 '제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외동읍 홈피 참조) 이 토상촌(吐上村)은 경주최씨들의 집성촌이며, 가까운 북토리와는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이고 위에 있는 사일마을과는 교류가 활발하면서 아주 가깝다고 마을 주민들이 증언한다. 또한 토성소류지의 물은 자연적으로 땅에서 솟아오른다고 한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토성소류지의 물 흐름을 정리하면, 

▶ 인공수로는 비 올때만 흐른다.
 이 연못은 아주 특이한 형식의 연못으로 지금까지 보아왔던 일반적인 소류지와는 그 성격이 다른 연못이다. 우선 일반적인 못은 상부에서 흘러오는 물을 모두 가두었다가 아래쪽으로 물을 공급한다. 그런데 이 연못은 상부에서 내려오는 물을 평상시에는 소류지 안으로 넣지만, 큰 비가 오면 인공수로를 통하여 물을 아래쪽 북토리로 보낸다.

토성소류지에는 상부의 물 유입구로 물이 들어오는 구멍이 두 개 있다. 이 두 개의 통로를 통해 물은 토성소류지로 유입된다. 물은 농사의 원천이다. 평상시에는 물을 지초마을로 보내고, 장마나 큰비가 오면 아랫쪽 북토리로 물이 흐르니 북토리의 주민들은 토성소류지의 물을 공급받을 수가 없다.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겠는가?

 토상촌(제내)은 경주최씨 집성촌이며, 물길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토상촌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경주최씨 집성촌으로서 자리잡은 것은 아마도 오랜 것 같다. 조선시대 최계종의 사당인 육의당이 있고 해마다 봄에 제사를 지낸다. 이런 마을은 옛날부터 근방 유지들이 살았고, 교육열도 높은 곳이다. 이곳에 사시는 분들은 현재 노인들(70세 이후)이 대부분이지만 도시에 나가 큰 벼슬도 한 것 같다. 최양식 前행자부차관(2006년도)도 이 제내마을 사람이라고 자랑을 하는 마을 노인은 아주 자랑스러운 듯 최씨 마을을 자랑한다. 이 분에게 물어보았더니 이 연못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연관성을 비추어 본다면 아주 옛날에 이 마을의 사람들은 힘있고, 권력이 있었던 사람들 같다. 대부분의 소작은 지초마을에서 거두어들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나면 지초마을의 농토는 물에 잠긴다. 왜냐하면 신원마을과 지초마을 사이가 좁아서 물이 빨리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수로를 만들어 홍수나 큰비가 오면 북토리 방향으로 물길을 돌렸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옛날 정월 대보름 놀이에서도 서로 상극이었던 마을이다.
지형상으로 또는 물길이 흘러가는 것을 보아도 토성소류지의 물을 공급받는 것은 지초마을 앞의 농토이다. 이와 반대로 북토리는 마석산(맷돌산)의 작은 개울물과 북토지의 물을 공급받아 농사를 짓는다. 북토리는 너무나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런 연유인지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정월 대보름에 쥐불놀이와 동네끼리 편싸움을 하면 항상 제내리가 이겼다고 자랑하는 노인장이다. 평상시에도 아랫마을 북토리보다는 윗쪽마을 사일 마을과 더 가깝게 지내고 교류도 활발하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로 보아 두 마을은 서로 상극인 것은 확실하다. 

 일반 저수지는 댐(둑)이  약 10~20% 정도를 차지하지만 토성소류지는 약 75%가 둑으로 되어있다. 

일반 저수지는 상부의 물을 모두 가두기 위해 둑을 쌓았다. 그리고 물넘이를 만들어 홍수에 대비한다. 하지만 토성소류지는 홍수 때 물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인공수로와 둑을 더 쌓았다. 그리하여 둑의 길이가 약 75%를 차지하는 특이한 형태의 연못이다. 입수구가 두 곳 있는데 사일 쪽에서 내려오는 하천의 물이 유입되고, 마석산에서 내려오는 지류의 물줄기가 유입된다. 아쉽게도 마석산의 물줄기 유입구는 근처를 살피면서 이런 현상을 생각하고 추론할 겨를이 없어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어디엔가 마석산의 지류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유입되는 수통이 분명히 있다. 또한 소류지의 물 높이가 낮고, 주변의 토질도 사질토와 암반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소류지로 솟아 올라오는 현상도 있는 것 같다. 


◈ 원래의 맥길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여러 사람들의 검토의견을 종합해 보면,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제내고개에서 마석산 ~ 제내마을 ~ 인공못둑 ~ 북토리 진입다리 ~ 순지마을 ~ 장구뱅이로 이어진다고 보는 최중교님의 의견이 타당해 보인다.

 

 

커다란 입석 바위들이 호위하듯 빙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묘지가 호기심을 자극하며,  

 

등로 주변에 기기묘묘한 입석 바위들이 전시되어 있는 능선을 지나고, 

 

무척 가파른 암릉길을 오르다가 되돌아보니, 

 

묵장산에서 사일고개를 지나 올라선 327.5봉에서 좌틀하여 제내고개를 거쳐서 이어온 호미기맥 길이 가늠된다. 

 

 

급경사 암릉 구간을 올라 다소 완만해진 능선으로 들어서자 등로 좌측으로  '송이 채취 금지'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출입을 금한다는 하늘색 노끈이 길게 이어지며, 

 

둥글둥글한 형태 기묘한 입석 바위들도 계속 나타나다가, 

 

다소 가팔라진 오름길을 잠시 더 오르면, 

 

헬기장의 흔적으로 보이는 보도블록이 깔린 널따란 공터에 오석의 정상석이 자리한 마석산(531.0m) 정상에 도착하는데, 

 

<마석산(磨石山, 531m)>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명계리와 외동읍 제내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 상봉에 있는 바위가 맷돌처럼 생겨 일명 맷돌산, 뺏돌산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마석산(磨石山)이라고 하였다. 산 곳곳에 기암괴석들이 많고 나무로 뒤덮인 정상에는 헬기 착륙장이 있다. 북서쪽으로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가 이어지며 남쪽 산 아래로 904번 지방 도로가 지나간다. 정상 부근의 거대한 암벽 위에 새긴 높이 4.6m의 백운대 마애불 입상(경북 유형문화재 제206호)과 마석산 삼층석탑 등의 유적이 있다. 

 

나무로 둘러싸여 조망이 없는 마석산 정상석 뒤로 이어지는 선명한 등로는 경주 남산으로 이어지는 등로이고,

호미기맥 길은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가 기맥 진행방향에서 우틀하여 이어진다. 

"산에서 만난인연 우리는 아름다운 美峰人 - 2008.11.16.-"

 

 

조망도 없고 앞서간 분들도 보이지 않는 마석산 정상을 뒤로하고 올라선 방향으로 약간 내려서서, 

 

우측 방향 올라온 기맥 갈림길에서 직진 즉 기맥길 기준 좌틀하여 진행하면,  

 

다시 삼거리 갈림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우측 거대한 바위 방향으로 들어서니, 

 

'마석산'이란 이름이 유래된 맷돌바위 앞에서 앞서간 백두들이 쉼을 하고 있다. 

 

다음 구간에 가야 할 토함산에서 남쪽 삼태지맥으로 이어진 능선 조망. 

맷돌바위에서 본 서쪽 방향 조망(펌)

 

 

거대한 맷돌바위 정상에 올라 주변 조망을 둘러보고 싶지만 즐산팀들은 벌써 순지마을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빨리 오기를 재촉하는 바람에, 후일 마석산 바위 찾기 산행을 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으며 맷돌바위를 돌아 앞쪽으로 내려서면 봉분이 낮아진 묘지 1기가 자리하고 있고, 

 

커다란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능선과 암릉을 내려서서, 

 

좌측 가시개(가위)바위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직진 방향으로 진행하면, 

 

등로 좌측으로 약간 비켜나 있는 420.3봉이 나오는데, 삼각점과 '호미기맥 420.3m(성원봉)' 산패와 함께 수많은 기맥꾼들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420.3봉을 뒤로하면 더욱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게 되는데, 암릉과 바위가 많아 등로가 여러 갈래로 흩어지며 혼선을 초래하는 애매한 곳이 여러 곳 나타나므로 주의하여 내려서야 하고, 

 

잠시 후 시야가 트이며 천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慶州)의 토대가 되었던 경주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며, 

북동쪽 토함산 방향
동쪽 토함산에서 이어지는 삼태지맥 능선 조망
남쪽 묵장산(우중앙) 방향

 

이내 아래로 북토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암릉지대를 지나게 되는데, 여유가 있었으면 각각의 바위들의 진면목을 사진에 담아두고 싶지만 마음 급한 산꾼의 처지에 후일을 기약해 볼 뿐이다. 

삼지창바위, 독수리바위, 횟불바위, 선바위 등등이 모두 모여...
살짝 당겨본 영지와 토함산 방향

 

<경주 영지(慶州 影池)>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연못으로, 751년(신라 경덕왕 10)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신라로 온 옛 백제지역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어린 곳이다.  

아사달은 불국사 다보탑을 완성하고 석가탑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사녀는 서라벌로 찾아갔으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주지의 뜻을 받아들여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못가에서 기다렸다. 남편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던 아사녀는 문득 못 속에서 탑의 환상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석가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로 찾아온 아사달 역시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사녀를 부르며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릴 때 탑의 그림자가 이 연못에 비치었다 하여 그림자 못, 영지라 하였고 그림자를 비춘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렀다. 연못가의 소나무숲에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영사(影寺)의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座象)이 남아 있다.

 

당겨본 영지 모습
돌아본 마석산 정상 방향
불끈 솟구친 선바위!
경주평야와 토함산 방향

 

 

 

바위 전시장이 있는 지점이 지능선 분기점으로, 기맥길은 우측 지능선으로 이어지고, 정규 등로는 직진의 능선으로는 급경사의 암릉 등로가 이어지는데, 어느 쪽으로 진행해도 북토마을 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좌측의 불명확한 기맥길을 두고 우측의 정규 등로를 따라 급경사의 암릉을 내려서다가 다소 완만해진 능선으로 접어들면 잔디가 없어져 봉분 흙이 드러난 묘지를 지나게 되는데, 

 

묘지부터는 야자 매트까지 깔린 잘 정비된 등로가 이어지고, 

 

직진의 능선을 두고 우틀하여 진행하라는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면, 

 

등로는 북토마을 뒤편 밭지대로 접어들어 외딴 농가 앞을 지나게 되고, 

 

비포장의 도로를 따라 잠시 더 내려가면, 

 

우측 대나무에 표지기들이 걸린 4거리를 지나는데, 우측으로 등산로 표시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위 전시장에서 헤어졌던 우측 기맥능선과 다시 만나는 지점쯤으로 짐작되고, 

 

북토 마을 뒤편으로 들어서서 우틀에 이어 좌틀하여 마을길을 따라 진행하여, 

 

북토마을 앞에서 들판으로 이어진 마을 진입도로를 따르면,

 

 

토성 소류지에서 흘러내리는 '원동천' 좌안 둑방길에 접속하여 좌측 둑방길을 따라 아래로 진행하다가, 

원동천 둑방길 합류지점에서 돌아본 좌측 제내마을과 우측 북토마을 방향

 

<외동읍 제내리>
제내리는 맷돌산(마석산:磨石山) 동쪽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본래에 돌이 많아서 ‘돌매’, ‘토상촌(吐上村)’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 ‘토성계(土城谿)’에 ‘돌매못’을 막은 후부터는 마을이 ‘돌매못’의 안쪽이 되므로 ‘못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못안’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제내(堤內)’로 불렸다. 

그런데 ‘토상촌’과 ‘토성계’라는 이름의 의미를 살펴보면, ‘마석산’ 기슭인 이 일대가 돌과 마사토로 이루어져 물이 계곡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거의 땅속으로 스며들어 샘물로 솟아난다. 이 샘물이 솟아난 곳에 못을 막았는데 이곳을 ‘토성계(土城谿)‘라고 했다. 그리고 이 마을이 마석산에서 토해내는 샘물 위쪽에 위치하므로 ‘토상촌(吐上村)’이라고 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샘못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을 ‘북토리(北吐里)’라고 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샘물을 마석산이 물을 머금었다가 토해내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 토성계 즉 샘못인 돌매못은 형상강과 태화강의 분수령이기도 한데, 마석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에서 북쪽에 있는 ‘뱀거랑’으로 흐르면 형상강이 되고, 못 아래의 남쪽으로 흐르면 태화강이 된다고 한다.

 

문제의 '원동천' 물길 위에 놓인 '북토교'를 건너게 되는데,

북토교를 건너자마자 좌측 둑길로 진행해야 하나 편한 직진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순지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돌아본 묵장산 방향
돌아본 마석산 방향

 

 

선답자들이 북토교를 건너서 좌측 둑방을 따라 진행해야 한다고는 했지만, 평야 한가운데서 어디가 기맥 능선인지를 따지는 게 그리 녹록한 일도 아니어서 그냥 순지마을로 가는 도로인 직진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덕천기연 앞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계속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요즘은 보기 드문 탱자나무 울타리

 

북토리 순지마을로 들어서게 되고, 

 

<순지(筍池) 마을>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마을로 영지(影池)에서 남으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미개척 시대에는 이곳에 죽림(竹林)이 넓게 퍼져 죽순이 많이 났다고 하여, '죽순 筍’ 자를 써서 순지 마을로 불렀는데, 그 뒤 순(筍)이란 거사가 이곳에 들어와 죽림(竹林) 가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 밤숲(栗林) 이 우거졌다고 한다. 또 율림(栗林) 근처에 못을 파 이 못 이름을 밤숲못이라고 했다.

 

 

이내 2차선의 포장도로와 만나는 지점인 태화식품 사거리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오르며 호미기맥 두번째 산행을 마무리한다. 

보~~리~~~밭 !
다음구간 원고개를 향한 들머리 전경

 

 

순지휴게소 앞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올라, 

 

마석산에서 내려다 보이던 경주 영지를 휘돌아 지나, 

 

불국사온천지구의 온천에서 몸을 녹이고는, 

 

경주시내를 횡단하여 전소장님 후배가 운영하는 육부장갈비에 도착하여,  

 

브레이크타임에도 불구하고 출근당한 직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맛난 육부장 갈비와 삼겹살로 기~인 산행으로 소모된 열량의 갑절로 보충하는 뒤풀이 시간을 가진다. 

 

 

주말 브레이크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주신 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형산강변을 달려 서울로 향한다. 

 

 

 

오늘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신라 충신 박제상과 망부석" 이야기의 현장인 치술령에 올라, 동해 바다를 박차고 오르는 일출 장면을 목도하는 행운을 누렸다.  

 

어릴 때는 이 이야기를 접하며 박제상의 처인 김씨부인이 치술령이라는 고갯마루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린 것으로 상상했었는데, 치술령은 일반적인 고갯마루가 아니고 봉우리였음을 50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달았다. 우리 교육의 한계를 다시한번 절감하며 "스스로 공부하기"의 중요성을 학창시절에 알았더라면 세상이 바뀌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 볼 뿐이다. 

 

그리고 후에 삼국을 통일한 눌지왕 때의 신라는 고구려와 왜국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야 할 정도로 국력이 약한 나라였지만, 삼국통일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힘쓴 결과 마침내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뤄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었지 않았나 짐작한다. 가녀린 물줄기가 바위를 가르듯 부단히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바가 어디 있겠는가!